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유형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
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
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 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
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
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
었다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그 방에서 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
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 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
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제목, 신이현의 소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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