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문제에 대한 철학적 일고찰
A Philosophical Study on the Problems of Responsibility
문 성 원 (부산대학교 철학과)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Tout autre est tout autre).
--자크 데리다
타자(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요약문>
책임은 권한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제도적인 통념을 넘어, 근원적인 면에서 책임이 권한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우리 책임의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인지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책임을 '응답'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이럴 때, 우리는 책임에서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보다 타자의 요구나 호소에 대한 고려를 앞세울 수 있다. 그 경우, 책임은 계산 가능성이나 대체 가능성, 호혜성 등을 넘어선다. 그러나 책임의 이 같은 면에 주목하면 책임짐을 일종의 희생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크다. 여기에 대해 본 논문은, 자크 데리다의 논의를 빌어, 책임짐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오히려 타자를 희생시키는 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한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결국 본 논문은,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 놓는 한, 우리의 책임은 지속적으로 무한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주제 분류>
사회 철학, 윤리학
<검색어>
책임, 권한, 희생, 니버, 데리다, 레비나스
1. 책임과 권한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의사들의 파업 사태는 책임의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라고 하는 특수한 지위와 역할 탓이었을 것이다. 의사들의 파업은 오늘날의 삶에서 의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적인가를 절감케 함과 아울러, 그토록 중요한 업무를 독점하고 있는 의사들이 과연 파업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해도 좋은가 하는 물음을 되씹어 보게 만들었다.
물론 파업을 결심한 의사들로서도 그런 방책이 불가피하다 할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 불가피성이나 정당성 여부를 직접 따져 볼 생각은 없다. 이 글의 의도는 다만, 그러한 사태를 계기로 철학적인 한 방향에서 '책임'의 문제를 천착해 보자는 데 있다. 혹 이 글이 책임의 견지에서 볼 때 의사들의 파업이 마땅치 않은 것임을 시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책임의 문제만을 들어 그 파업 사태 전반을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어지는 의사들의 파업 문제는 '책임'을 주제로 하는 철학적 논의에 실마리를 주는 데 그칠 뿐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권한과 책임의 관계 문제이다. 의사들이 파업을 벌인 중요한 원인은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약분업과 관련한 제도 변화에 의사들이 그토록 반발한 것은 자신들의 전문적이고 사회적인 권한, 또 여기에 수반되는 경제적인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권리와 의무, 권한과 책임을 함수 관계로 생각한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고,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권리와 권한이 커지면 그에 수반하여 의무와 책임도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고수하거나 확장하려 하면서, 그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한에 따르는 책임을 방기했다는 일견 배리적(背理的)인 사태가 성립한다. 의료 행위를 통해 환자의 치유를 돕는 것은 의사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 사항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문제 설정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임과 권한을 이렇게 연계하여 놓을 경우, 다른 한편에서는 권한에 대한 포기가 책임에 대한 포기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겨난다. 비록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권한을 내놓음으로써 책임으로부터도 놓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수단으로 삼아 새롭게 권한과 책임을 규정하려는 시도도 가능해진다. 사실, 의사들의 폐업이나 퇴직 위협은 바로 이와 같은 면을 현실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당분간 의사의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즉 적어도 그 기간 동안은 일정한 권한을 지닌 의사가 아니므로, 그 권한에 따르는 환자 진료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논란의 중심은 특정한 권한을 지닌 의사라는 직위가 되어 버린다. 그 직위에 이러저러한 권한을 부여해야 되는지 마는지가 갈등과 협상의 대상이 되고, 직접적인 책임의 문제는 그 뒷전으로 밀려난 채 권한에 수반되는 것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물론 책임과 권한을 연관짓는 것은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근거 있는 일이다. 책임이란 자신이 관장할 수 있는 사안의 범위 내에서만 문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나 정신이상자와 같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에 대해 직접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 가까운 주변의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일 때문에 책임을 추궁 당하는 것은 부당하거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임이 어떤 주체의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그 주체가 통제할 수 있는 힘과 권리가 미치는 한도 내에서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책임 문제가 주요한 철학적 주제로 등장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인 한스 요나스(Hans Jonas)에 따르더라도 책임은 권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사람은 행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책임질 바도 그만큼 적은 법"이라고 말한다. 책임 의식은 행위의 이 같은 인과적인 면 위에, 예상되는 행위 결과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태로 자리잡는다. 이처럼 '책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이다. 이른바 '책임 윤리'가 '의무'를 강조하는 윤리와 크게 다른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권리-의무'의 쌍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원칙이나 동기에 대한 강조로 흐르기 쉬운 데 비해, '권한-책임'의 쌍은 구체적인 행위 결과에 대한 예상과 그 결과에 대한 대응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나스가 의무 중심의 전통적인 윤리, 특히 칸트 식 윤리 대신에 책임 중심의 '새로운' 윤리를 내세우는 바탕에는, 환경 문제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행위 결과를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고는 윤리적 가치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요나스는 책임에서 힘과 지식을 강조한다. 책임은 "힘과 지식의 함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힘의 범위와 일치하는 광범위한 책임성을 갖추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지식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은 '권리-의무'의 틀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권한-책임'의 관계마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그 힘이 낳는 결과들을 예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권한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예상된 행위 결과에 책임을 지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적절한 한도 내에서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권한에 따라 책임이 주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책임에 입각하여 권한이 설정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경우 권한보다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어떤 행위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힘, 즉 현실적·잠재적 능력이다. 그러니까 '능력-책임'의 연관이 권한 설정의 밑바탕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책임이 권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오히려 책임은 권한에 비해 우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한을 조정하기 위해 책임을 방기한다든가, 이를 협상 수단으로 삼는 따위는 사태의 본말을 뒤엎는 꼴이다. 물론 요나스에게서 초점이 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즉 인류 전체의 생태학적 책임이지만, 특정한 인간 집단의 경우라고 해서 권한과 책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학자나 의사 집단의 경우, 그 권한에 따라서 책임이 주어진다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과학적 내지 의학적 지식의 잠재적 힘과 그 활용 결과에 대한 고려가 우선하고, 그에 따른 책임 문제에 비추어 권한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책임과 권한의 관계는 '권한-책임'이 아니라 '책임-권한'으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고 해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권한 규정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폭과 강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거나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책임이 징벌이나 보상 따위와 같이 법과 제도에 따르는 형태를 취할 경우, 그 준거가 되는 것은 법이나 제도에 의한 권한 규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이런 식의 제도적인 책임 규정은 보다 근원적인 책임성에 입각한 것이어야 함을, 곧 제도적 책임을 규정하는 제도적 권한은 능력과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나온 책임성에 의해 먼저 규정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하는 책임 회피에 대해 우리가 사회적 비난을 퍼부을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책임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 응답으로서의 책임
의사들의 책임 문제를 빌미로 또 한 가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책임과 호혜성(互惠性)의 문제이다. 알다시피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는 호혜적인 면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만일 호혜적인 면만을 고집한다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즉 의사가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와 환자가 제공하는 화폐의 교환 관계가 의사-환자 관계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그럴 경우, 의사의 책임은 상거래 관계에서 갖게 되는 일반적인 상호 책임 관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혹자는 의료 서비스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시장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야 하며, 그러한 한, 의사-환자 관계라고 해서 자유로운 인격체들간의 상호 거래 관계 이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대등한 거래 관계로 보지 않는 것처럼, 환자와 의사의 관계도 대등한 거래 관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학생이 선생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환자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더 절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관계는 한쪽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이다.
이 필요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매우 기본적인 것이고 그 반면 누구나에 의해 쉽게 충족될 수 없는 것인 한, 이를 시장 원리에만 맡기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그 예상되는 결과를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래서 왈쩌(Michael Walzer) 같은 이는 의료 행위처럼 "필요한 가치들을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태도 변화에 맡겨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그런 종류의 "필요한 가치들이 그 가치들을 소유하고 있거나 실행에 옮기는 일군의 강력한 집단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분배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그런 종류의 가치들을 상품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며, 따라서 의사 집단의 일방적인 이해관계는 물론, 의사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자유도 존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가혹하게 들릴 법한 이러한 생각은, 의료란 환자들의 필요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하며, 의사들의 책임 역시 이 대응과 관련하여 문제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이처럼 책임을 필요 또는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발상은, 앞서 우리가 간단히 살펴보았던 관점, 즉 책임을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와 결부시켜 보는 관점을 중요한 면에서 보완해 준다. 사실 책임을 결과에 대한 고려만을 통해 바라본다면, 일반적으로 결과론이 지니는 난점들을 피하기 어렵다. 먼저, 행위 결과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결과의 예측이 용이하지 않거나 불가능할 때에는 책임을 논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게다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떤 기준에 따라 그 결과를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불투명함을 넘어서서 책임이 문제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가령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감과 책임의식은 자식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예측에 따른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결과에 대한 판단에 앞서서 대개의 부모는 아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기 마련이고, 이것이 부모의 책임감이나 책임의식의 밑바탕을 이룬다. 의사들의 경우도 유사하다. 환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는 자세, 이것이 의사가 환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책임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에 해당하는 서양어들은 이러한 면을 그 언어적인 차원에서부터 잘 드러내 준다. 영어의 responsibility나 불어의 r sponsibilit , 또 독어의 Verantwortung은 모두 응답을 뜻하는 response나 r ponse, 또는 Antwort에서 파생한 것이다. 곧 이런 형태의 '책임'이라는 말은 어떤 부름이나 호소에 대한 응답이라는 뜻을 지니는 셈이다. 리차드 니버(Richard H. Niebuhr)는 이 같은 응답성(responsiveness)에 주목하여 책임의 첫 번째 요소를 응답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응답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책임의 윤리를 제창한다. 니버에 의하면, 이 책임의 윤리는 '좋음'을 앞세우는 목적론적 윤리나 '옳음'을 기준으로 삼는 의무론적 윤리와는 달리, '적합한'(fitting) 응답 행위를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이 적합한 응답 행위들이 좋음과 옳음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나아가 니버는 이렇듯 응답을 중심으로 한 이 책임 개념 안에, 관련된 여러 요소들을 포함시킨다. 즉, 삶 속에서 주어지는 여러 요구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해석의 다양성 문제나, 응답에 따른 반응을 계산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책무(accountability)의 문제, 또 우리의 응답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유대성에 관한 문제 등이 책임 개념의 내용 속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니버는 응답으로서의 책임 개념을 통해, 우리의 자아를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로 규정해 낸다. 우리는 "'당신'(Thou)들에 대한 응답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때 '당신'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책임적 자아의 응답 양상, 곧 책임 양상이 달라진다. 이 당신은 우선 한 사회 속에서 서로 요구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다른 자아들, 곧 우리 주위의 사람들일 테지만, 이들의 요구나 호소가 지니는 성격에 따라 그 '당신'은 직접적인 타인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즉 그것은 나와 타인들의 자아가 몸담고 반응하는 자연일 수 있으며, 자아들의 단순한 집합체를 넘어서는 '자아초월적' 사회일 수 있고, 시간적 연속성이나 시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일 수도 있다. 나아가 그 당신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우리 존재 자체를 주재하는 절대자나 신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양상들은 대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의사에 대한 환자의 호소는 직접적으로는 그 환자 자신의 호소이겠지만, 이 환자에 응답하는 의사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당신'들을 상대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병든 환자의 몸은 의사의 적절한 응답을 기다리는 자연의 호소일 수 있고, 의료 행위를 둘러싼 제도와 체제는 의사의 대응에 사회성을 집어넣는 사회적 당신일 수 있으며, 암이나 환경병에 대한 지속적인 치료 노력의 경우처럼 시대성의 요구가 의사들의 대응 뒤에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죽음과 대면해 있는 환자들의 호소 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주재자와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각도에서 보건 이러한 책임 양상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소 내지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고려에 앞서서 책임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특성이 되는 것은 호소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이 점을 받아들일 때, 책임은 호혜성에 우선하게 된다. 즉 이때의 책임은 행위 결과에 대한 계산 이전에 이미 시작되는 것이며, 또 그러한 계산을 뛰어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내가 물에 빠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계산에서 비롯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대응이 치료의 결과로 얻어질 금전적 대가를 계산하는 데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진 이의 호소를 듣고도 그 사람을 건져 줘 봐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냉정한 판단 하에 외면하고 돌아선다면, 또는 어떤 의사가 합당한 금전적 대가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사태의 결과를 고려하기에 앞서 이미 자신의 무책임성(ir-responsibility)을, 즉 응답 능력의 결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응답으로서의 책임'이 책임 문제의 모든 범위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제도에 따른 책임 규정이 가지는 현실적인 효력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행위 능력과 결과에 대한 고려가 책임 문제에 대해 지니는 중요성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응답으로서의 책임'을 통해 드러난 책임의 비호혜성과 비대칭성의 문제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볼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대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응답의 형태, 곧 '증여'와 '희생'으로서의 책임을 만나게 된다.
3. 희생과 책임
무한 경쟁이 운위되는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대가 없는 책임, 희생과 결부된 책임을 논한다는 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인 일로 비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자본주의 교환 경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 강퍅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대안 모색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임을 권한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권한을 규정하는 것이자 권한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권한이란 대개, 상품 교환 경제를 뒷받침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전제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책임과 희생을 같이 논하는 일도 그저 공허한 사변에 그치지는 않는다. 호혜성을 넘어서는 비대칭성에 주목함으로써, 교환과 거래를 절대화하는 자본주의 현실의 바깥을 지향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노력은 얼핏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각질을 뚫고 보다 근본적인 가능성의 터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인 셈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지배적 현실과 대극에 서 있는 극단적인 논의가 오히려,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삶의 조건과 의미를 드러내 주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생과 책임의 문제를 연관하여 다루는 자크 데리다의 논의는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하다. 데리다는 니버와 마찬가지로 책임을 응답으로 해석한다. 또 니버가 기독교 윤리를 신에 대한 응답의 형태로 보고 결국 이를 책임의 궁극적인 귀착점으로 삼듯이, 데리다는 응답의 문제를 우리가 한정지을 수 없는 타자(他者)와 관련시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응답'과 책임이 동일한 개체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합리적인 이기심을 가진 개체들이라든지 일정한 소유권을 지닌 개체들 사이의 관계 따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여기에 '신비'(secrets)가 개입한다고 말한다. 즉 응답과 책임은 계산이나 객관적인 지식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면모를 지닌다는 것이다. 책임이 관계하는 타자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고 있는 자'이다. 우리는 이 타자를 통해 우리의 한계를 넘어 무한과 접촉한다.
이렇게 되면 논의의 성격은 불가불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데리다는 종교란 "바로 책임이며 책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종교는 책임의 경험을 통해, 달리 말하면 응답성의 경험을 통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책임은 우리의 인위적인 규정들을 넘어서는 책임, 무한과 닿아 있는 책임이다. 무한에 대한 응답 방식 또는 신비에 대한 체험이 어떤 질서 잡힌 형태를 갖출 때, 그것을 종교라고 부른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또한 죽음과 책임을 관련짓는다. 그에 따르면, 권한 따위에 한정되지 않는 책임, '신비'에까지 관여하는 책임은 '죽음을 준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데리다는 이러한 사례의 잘 알려진 예로서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든다. 이들은 타인을 위해 죽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줌'으로써 타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짊어지는 예를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책임은 그 비대칭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죽음은 상호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준다는 점이 '죽음의 증여'가 '신비'의 영역과 관여하게 되는 이유이다. 혹자는 이 '죽음을 준다'는 것이 실상은 자기가 가진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생명을 산 채로 가지고 있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죽음을 주었다고 할 경우에, 그 줌의 대상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죽음은 현존하는(present) 것이 아니고 따라서 선물(present)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다는 것은 결코 교환 행위가 아니며, 접근할 수 없는 신비를 동반한 바침이고 희생이 된다. 이렇게까지 해석된 책임은 전가(轉嫁)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데리다는 그가 논의의 실마리로 삼는 체코 철학자 파토카(Jan Pato ka)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책임의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이 무시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 같은 세태는 객관적인 역할만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의 탓이며, 또 이 개인주의는 존재를 힘으로만 나타내는 잘못된 '힘의 형이상학'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이 응답이라면, 이 책임은 응답하는 자의 자리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자리를 어떤 지위나 권한 따위와 연결해서만 생각할 경우, 책임 또한 어떤 역할에 대한 것, 따라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 책임을 희생과 결부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각 역할에 해당하는 책임의 공정한 분배를 논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같은 공정성도 현실 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 따를 때, 우리는 그 이상의 책임, 즉 희생을 동반하는 책임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단 예수나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대칭적인 책임의 형태, 이를테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 같은 경우마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반면에, 데리다는 대체 불가능성이야말로 책임의 궁극적인 모습이며, 우리는 이 점을 '죽음의 증여'에 이르는 극한적인 사태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에서 출발해서야 우리는 책임을 지는 주체라든가, 자기의식인 영혼이라든가, 자아 따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 또는 죽음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을 경험함으로써 책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듯, 죽음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며, 나 또한 그 누구의 죽음도 대신할 수 없다. 각자의 죽음에 대한 응답의 자리는 대체 불가능하다. 이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역시 대체 불가능한 것임을, 또 우리의 응답성과 책임성은 궁극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러한 고유성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진다. 우리 자신의 삶에, 또 죽음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이다. 이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타자와 만난다. 우리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타자에게 책임을 진다. 이 타자가 처음부터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대체 불가능한 책임은 우리 삶에 대한 책임임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책임이 된다. 더욱이 이 타자가 한정된 존재에 그치지 않고 무한으로 이어진다고 할 때, 이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무한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처럼 "타자(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무한한 책임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꼭 '죽음을 주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증여'는 다만 책임이 지니는 비대칭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또 그러한 한에서 책임이 수반하는 희생성을 그 극한에서 보여주는 방식일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책임에는 특정한 권한의 상관물 이상의 것이 담겨 있음을, 또 사회구성원 사이의 상호적인 제약 이상의 것이 담겨 있음을 시사 받는다. 그러한 면모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책임들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계산과 대가를 넘어서는 책임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이어지는 책임이다. 부모 자식 간의 책임뿐만 아니라 친구와 친구 사이의 책임, 나아가 의사가 환자에 대해 갖는 책임이라고 해서 이런 책임의 면모를 갖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우리는 데리다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를 꼭 특정한 종교의 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자신이 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출발할 때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데리다도 신이란 우리가 간직하는 신비에 대한 이름이자, 비가시적인 내면성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정한 종교적 견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이들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은, 우리가 삶 속에서 맺게 되는 관계를 인위적인 규정들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한 우리의 책임 역시 그 한정된 규정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범위 면에서나 심도 면에서 무한한 타자와 만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무한한 책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보면, 책임은 이제 더 이상 책임을 지는 우리 각자의 희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책임, 교환할 수 없는 책임, 대가를 계산하고 기대할 수 없는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보기엔 책임을 지는 우리 각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듯하다. 하지만 책임에 대해 조금만 더 숙고해 보면,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다하지 못 하는 우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은 바로 그 타자임을 깨닫게 된다.
4. 타자에 대한 책임
데리다에 의하면, 책임이 무한에 대한 책임, 한정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책임인 한, 그것은 패러독스를 피할 수 없다. 이 패러독스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이다.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름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른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신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고, 신에 대한 책임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에게 바칠 제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이삭의 질문에 바로 응답하지 못한다. 신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아브라함은 아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못하는(ir-responsible) 것이다. 신에 대한 책임이 일단 아들에 대한 무책임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데리다는 키에르케고르(S ren Kierkegaard)의 표현을 빌어 이것을 내면성이 '외면성과 통약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는 신앙의 패러독스라고 말한다.
이때 신에 대한 책임을 내면의 절대성에 대한 책임으로 해석한다면, 이 패러독스는 자신의 내면적 믿음에 대한 책임을 위해 외적인 책임을 희생할 때 겪게 되는 아포리아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의 사상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해야 하는 사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이 내면성에 대한 책임을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책임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독립 운동을 위해 가족과 친지들을 희생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책임의 이와 같은 아포리아에 부딪힌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책임을 명확히 규정된 권한들의 함수로 한정하고 이 권한들을 통약 가능한 것으로 설정한다면, 혹 이러한 패러독스와 아포리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때 내적인 신념에 대한 책임이라든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처럼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책임은 그 본 모습을 훼손당할 것이고, 결국 그와 같은 해결 방식은 우리 삶에 나타나는 책임 문제의 중요한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는 아브라함의 패러독스와 유사한 패러독스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일까? 데리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매일매일 아브라함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삭의 희생'은 책임에 대한 가장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는 또 다른 타자를, 또 다른 타자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한 타자의 부름에, 요구에 응답할 수 없다. 그러한 희생이 없이는 한 타자에 대한 의무에 응답할 수도 없고, 심지어 그 타자에 대한 사랑에 응답할 수조차 없다.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Tout autre est tout autre).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한 타자에 응답하면서 다른 타자를 희생시킨다. 유한한 우리로서는 모든 타자에게 모두 응답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짐은 매 순간 우리의 배반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를 배반하기 위해, 그들의 목에 칼을 겨누기 위해, 직접 모리아 산까지 오를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어떤 타자들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다른 타자들을 희생시킨다. 내가 내 눈앞의 가족과 친지를 돌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무수한 타자들에 대한 책임을, 혹은 병들고 혹은 굶주리는 그 타자들에 대한 책무를 희생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이 성립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또 한정될 수 없다고 보는 한에서이다. 자신의 관계를 매우 좁고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리다의 이런 지적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조차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설정한 협소한 한계 속의 타자를 위해 다른 타자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렇게 열어 놓는 한,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짐은 언제나 다른 타자에 대한 희생을 동반한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 무한한 데 비해 우리의 책임짐이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왜 하필 다른 타자가 아니라 이 타자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저 타자는 아니며, 왜 저 타자는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 타자는 나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 왜 이 타자는 가깝고 저 타자는 멀어야 하는가? 사소하게는, 내가 매일 아침 먹이를 주는 이 고양이에 대해 세상의 다른 많은 고양이들이 희생당한다는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데리다가 말하듯, 이런 점에 관해 우리는 침묵하는 수밖에, 그래서 이를 '신비'로 돌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같은 물음이 우리를 하릴없는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제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물음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잊고 있는 책임의 폭과 깊이를 보여 주며, 우리의 책임이 안이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 준다. 즉 이 물음들은 책임을 단순히 권한의 함수로 생각할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계산을 넘어서는 책임짐의 자세조차 스스로를 희생이라고 여길 수 없게 만든다. 책임짐의 희생은 그 책임짐에서 제외된 타자들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주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 물음들은 우리의 삶이 책임짐의 끝없음과 책임의 무한함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아마 이러한 무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즉 누적되는 타자의 희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는 것,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무한과 하나가 되는 길뿐일는지 모른다.
한편, 이 같은 무한한 책임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역시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회는 자신의 책임을 일정한 구성원들에게만 한정함으로써 무수한 타자를 희생시킨다. 그 사회의 편파적 행위는 끝없는 희생의 누적을 낳는다. 이 세상의 숫한 아이들을 굶어 죽게 방치하는 사회, 간단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그로 인한 무수한 고통에 눈을 감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 요구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한한 책임에 대한 새롭고도 계속적인 각성이다. 한 사회가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이라고 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가 자신이 한정한 테두리 내에 갇혀 있지 않는 한, 이 책임은 계속 누적되며 그 누적된 무게로 끊임없이 다가온다. 애당초 책임의 한계를 닫아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아예 타자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책임을 끝까지 회피할 방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논의를 시작할 때 문제삼았던 의사들의 책임도 예외가 아니다. 법적인, 혹은 제도적인 면에서의 책임이야 분명히 어떤 한정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의사들의 책임은 그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환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지 못하는 숱한 환자들에게까지 미친다.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며, 모든 환자는 모두 다른 환자들이다. 혹 작금의 의료 분쟁과 의사들의 파업이 단순히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관련된 권한을 확장하려는 시도로가 아니라, 이 모든 환자들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을까? 또는 적어도 환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책임 회피가 궁극적으로 불가능함을, 그리고 결국 책임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 삶의 관계임을 환기시키는 한 계기로 이해될 수 있을까?
* 인용된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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