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도덕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나뭇잎숨결 2023. 12. 31. 08:43

도덕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정 원 규 서울대 철학



Ⅰ. 현대윤리학과 도덕 실재론

과학철학 분야에서 시작된 실재론의 바람이 윤리학에도 불어오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세기말에 더 확실한 것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것같기도 하고 단순한 학문적 회귀현상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결론은 바람이 그친 후에야 내릴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바람이 윤리학 분야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윤리학에서 실재론의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세기 말부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입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이전에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실재론적 태도,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지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중심적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실재론적 문제제기는 비인지주의의 대두와 맞물려 있다. 가령 정의주의자(emotivist)인 에이어(A. J. Ayer)는 도덕적 언명들이 단지 감정(emotion)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비인지주의적 주장이지만 너무 극단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도덕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립이 감정대립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우리의 상식적인 관행은 이것이 매우 반직관적임을 보여준다.

ぢ이성적 탐구로서의 윤리학을 포기하려 하는 일부 철학자들의 단념은 시기상조っ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달려든 헤어(R. M. Hare)는 정의주의와 같은 극단적 비인지주의를 지양하고 도덕적 진술에도 인지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도덕판단은 궁극적으로 で결단(decision)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과거의 인지주의적 견해들에 더 합리적인 일격을 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헤어의 주장에는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쉬네윈드(Schneewind),브로디(Brody),밤브루(Bambrough),풋(Foot),썰(Searle),기취(Geach) 등의 비판은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비인지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바로 우리의 직관이다. 어떤 정당화를 한다 해도 노예제가 부정의 하다든지 히틀러(Hitler)는 비도덕적인 사람이었다든지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비인지주의는 노예제를 수용하는 입장이나 히틀러 같은 사람의 입장도 하나의 도덕적 입장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는 심히 반직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적,실천적 수월성을 지닌 인지주의 이론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입장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입장은 도덕 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강력하다는 것은 도덕 실재론이 참이라면 도덕판단이나 도덕적 주장들의 참임을 바로 도덕적 사실에 의해서 보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강력한 만큼 입증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도덕적 사실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가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Ⅱ장에서 살펴보겠다. Ⅲ장에서는 그렇다면 도덕 실재론의 대안을 검토해 보겠다. 필자는 그 대안에 で도덕 구성주의(moral constructivism)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한편으로 롤즈의 구성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둘째 관습이 도덕을 구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이 메타윤리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메타윤리학이 다루는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도덕용어들의 개념분석이고,둘째는 도덕판단의 타당성을 입증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 실재론의 문제는 주로 후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매우 다양한 입장들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일단 이를 애링턴(R. L. Arrington)의 기준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

정의주의 - 에이어,스티븐슨(C. L. Stevenson)

처방주의(prescriptivism) - 前期 헤어

투영주의(projectivism) - 블랙번(S. Blackburn)

상대주의(relativism) - 윌리엄스(B. Williams)

인지주의(cognitivism)

자연주의(naturalism) - 페리(R. B. Perry),듀이(J. Dewey)

직관주의(intuitionism) - 무어(G. E. Moore)

합리주의(rationalism) - 거워쓰(A. Gewirth),거트(B. Gert)

실재론 - 플랏쯔(M. Platts),맥도웰(J. McDowell),브링크(D. O. Brink),스터젼(N. Sturgeon),보이드(R. N. Boyd)

상대주의 - 웡(D. B. Wong),하만(G. H. Harman),애링턴

오류이론(error theory) - 매키(J. L. Mackie)


논문의 성격상 이상에 열거한 각각의 입장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총괄적 논의를 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의 차이,실재론과 반실재론의 차이,그리고 비인지주의적 상대주의와 인지주의적 상대주의의 차이 정도만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는 도덕적 주장들이 진리 값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가,그렇지 않다고 보는가에 달려있다. 인지주의는 진리 값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 비인지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차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가령 세이어-맥코드(G. Sayre-McCord)는 실재론이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도덕적 주장들은 문자그대로 해석되었을 때 참이거나 거짓이다.

2) 몇몇 도덕적 주장들은 문자그대로 참이다.


1)이 의미하는 것은 도덕적 문장들이 진리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2)가 의미하는 것은 그들 중에서 적어도 몇 개는 실제로 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1)이외에 2)까지를 실재론의 기준으로 도입하는 것은 매키의 오류이론 때문이다. 매키는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에 관한 상식이 모두 오류라고 주장한다. 매키와 같은 입장을 취할 경우 인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참인 도덕적 진술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상 도덕적 주장들의 진리 값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하고 따라서 실재론을 올바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2)의 조건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도덕 실재론이려면 で3) 도덕적 사실이 존재한다.と는 조건을 하나 더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합리주의나 인지주의적 상대주의처럼 1)과 2)를 만족시키지만 실재론이 아닌 입장들이 엄연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은 반실재론적 인지주의와 실재론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하며 아울러 실재론이란 이미 존재론적 함축을 지니는 것이므로 3)과 같은 존재론적 조건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세 조건이 도덕 실재론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웡의 경우 이 세 조건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실재론과 다른 입장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조건이 도덕 실재론을 규정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겠다.

이번에는 비인지주의적 상대주의와 인지주의적 상대주의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참,거짓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상대주의는 비인지주의의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웡이나 하만처럼 상대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인지주의를 표방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테면 어떤 한 상황에 대해 서로 견해가 엇갈릴 경우 그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상대주의와 인지주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Ⅱ. 도덕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도덕 실재론을 비판하려면 먼저 도덕 실재론이 어떤 입론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실재론자가 있고 그만큼 실재론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다. 그래서 필자는 도덕 실재론에 대한 개념정리를 하고 나서 비판을 가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도덕 실재론에 관련된 논의들을 전개해 나가면서 도덕 실재론이 어떤 입론인가를 동시에 해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2절에서는 도덕 실재론에 대한 경험적 비판을 다루었다. 필자는 이러한 비판은 도덕 실재론에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음을 보일 것이다. 3절에서는 도덕 실재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논변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그 논변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적으로 도덕 실재론만을 옹호하는 논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도덕 실재론을 도덕적 사실의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와 연관시켜서 검토하였다. 필자는 도덕 실재론의 で아킬레스 건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 실재론을 아무리 정교화해도 도덕적 사실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를 해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1. 도덕적 갈등과 도덕 실재론

반실재론자들은 도덕 실재론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도덕적 갈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매키는 그의 이른바 で상대성으로부터의 논증と에서 시대와 장소 및 소속집단에 따른 도덕의 다양성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다양성은 직접적으로는 인류학적 문제일 뿐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주관주의,즉 반실재론을 지지해준다. 물론 도덕의 영역에서 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견해 차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의 불일치는 부정확한 추론에 기반한 사변적 추론이나 설명적 가설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불일치는 사람들 간의 삶의 양식의 차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결국 도덕적 불일치는 다른 분야에서의 불일치와는 달리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 매키의 주장이다.

매키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 널리 알려진 반론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도덕률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에 암묵적으로 주지되어 있는 매우 일반적인 기본적 원리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 같은 기본적 원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되어 그 상황에 따라 다양한 구체적인 도덕률을 산출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키는 이러한 기본원리에 대한 합의가 매우 어려움을 지적한다. 가령 공리의 원리와 의무론자들의 원리 사이에는 거의 화해할 수 없는 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대성으로부터의 논증은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실재론자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많은 도덕적 갈등은 도덕적 불일치라기보다는 그와 연관된 경험적 사실의 불일치라는 것이다. 둘째,도덕적 갈등 자체가 실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도덕적 갈등을 통해 실재론을 반박하려는 시도에는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갈등 자체는 도덕의 영역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갈등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반실재론자가 실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서의 갈등과는 달리 도덕적 갈등은 반드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세련된 도덕 실재론자들의 경우 해소될 수 없는 도덕적 갈등마저도 설명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결국 도덕적 갈등의 존재를 지적함으로써 실재론을 반박하기는 힘든 것으로 보인다.


2. 도덕적 사실의 설명능력과 도덕 실재론

하만은 그의 で최선 설명에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と을 이용해 도덕 실재론을 반박하려고 한다. 그는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면서 도덕 실재론을 반박한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예를 든다. 첫째는 안개상자 속의 수증기 자취를 보고 양자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물리학자의 경우이고,둘째는 살아있는 고양이에 불을 지르는 어린애들이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양자가 실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잘 설명할 수 있는 반면에 후자를 설명하는데는 자연적 사실 - 어린애들이 고양이에 불을 지름 - 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도덕적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지 가외로 도덕적 사실 - 어린애들이 고양이에 불을 지른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됨 - 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만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도덕적 사실을 가외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설령 도덕적 사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설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실재론자 스터젼은 で반사실적 검증と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만약 하만의 이야기가 옳다면 가령 히틀러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는지의 여부는 히틀러의 행위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설명적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반사실적 물음,즉 히틀러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일한 행위를 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하만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것이다.

하만은 스터젼의 で반사실적 검증と이 특정한 맥락에서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진술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령 도덕 부산현상론(moral epiphenomenalism) 같은 것을 받아들일 경우 위의 반사실적 검증과 동일한 결과를 빚으면서도 도덕적 사실의 설명적 무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만은 도덕 부산현상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환원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스터젼은 수반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하만의 주장을 거부한다. 이 때 하만의 주장이나 스터젼의 주장 중에 어느 것이나 아직 올바른 이론일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이것은 '최선 설명에의 추론'을 둘러싼 공방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 되고 말았다. 즉,문제가 도덕적 사실의 존재여부에 관한 문제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최선 설명에의 추론'에 의한 하만의 실재론 비판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하만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で최선 설명에의 추론と인데 이것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1) で설명と에 대한 주도적인 견해가 존재하지 않고 2) で최선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불분명하므로 결국 하만의 도덕 실재론 비판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3. 도덕 실재론과 외재주의 및 내재주의

1,2절에서는 도덕 실재론에 대한 경험적 비판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였다. 3절에서는 방향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도덕 실재론을 옹호하는 적극적 논변은 타당한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외재주의와 내재주의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특정한 도덕판단을 내린 사람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 하리라고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고유한 행위 인도적 특성인 것이다. 그런데 도덕판단은 어떻게 이런 특성을 갖게 되는가? 이러한 도덕의 행위 인도적 특성은 도덕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내재주의자이다. 따라서 내재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도덕적 고려들은 필연적으로 행위 인도적 특성을 띠게 된다. 반면에 외재주의자는 그것이 도덕외적인 요인 - 가령 동정심 - 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외재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도덕적 고려들은 우연적으로만 행위 인도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도덕 실재론의 타당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만약 내재주의가 옳다면 도덕 실재론이 타당한 입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재주의와 양립가능해야 할 것이다. 도덕 실재론을 받아들일 경우 도덕적 고려가 행위 인도적 특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바로 도덕적 사실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사실이 필연적으로 행위 인도적 특성을 지니게 할 수는 없으므로 도덕 실재론은 내재주의와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내재주의를 받아들이는 한,도덕 실재론을 거부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비인지주의자와 일부 실재론자 - P. Foot,J. McDowell 등 - 는 내재주의를 긍정한다. 그렇다면 도덕 실재론이 설 자리는 없게 되는 것이다.

내재주의와 실재론의 이러한 양립불가능성이 실재론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재주의를 합당하게 반박할 수 있는 경우 실재론자는 내재주의 뿐 아니라 내재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입론 - 비인지주의,내재주의적 실재론 등 - 을 반박하는 엄청난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을 취하는 사람이 바로 브링크이다. 브링크는 내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무도덕주의자(amoralist)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도덕주의자란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위할 동기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논리적,혹은 개념적으로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재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은 개념상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내재주의자는 무도덕주의자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외재주의는 이러한 무도덕주의적 문제제기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외재주의자는 도덕판단의 행위 인도적 특성을 우연적인 심리적 사실로 여긴다. 따라서 외재주의자에게는 무도덕주의적 문제제기가 항상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재주의자가 무도덕주의적 문제를 반드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내재주의,외재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외재주의자는 무도덕주의자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외재주의가 내재주의보다 도덕의 행위 인도적 특성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브링크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외재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곧바로 도덕 실재론의 옹호와 연결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브링크가 입증한 것은 내재주의와 연결된 제입론들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인지주의적 반실재론,예를 들면 다음 장에서 살펴볼 도덕 구성주의 같은 경우 외재주의와 양립가능하지만 도덕 실재론은 아니다. 따라서 브링크가 입증한 것은 기껏해야 비인지주의를 반박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4. 도덕적 사실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


이상의 논의를 통해 도덕 실재론에 대한 비판이나 적극적 옹호 중에서 어느 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1,2,3절에서 검토한 것은 도덕 실재론의 타당성을 직접적으로 논한 것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도덕 실재론을 비판,혹은 옹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절에서는 도덕 실재론의 성패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제,바로 도덕적 사실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덕적 사실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부담은 물론 실재론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최초의 시도중의 하나는 환원적 자연주의였다. 환원적 자연주의를 수용할 경우 도덕적 사실은 자연적 사실에 다름 아니게 되고 그럴 경우 자연적 사실과 존재론적,인식론적 위상을 같이하기 때문에 환원적 자연주의는 여타의 배경이론들과 정합적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는 で자연주의적 오류と를 범하고 있다는 무어의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환원적 자연주의를 수용할 경우 도덕적 문제가 순전히 잉여적인 문제가 되고 만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여기에서 실재론자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자연주의를 고수하되 비환원적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자연적 사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비환원적 자연주의를 주장할 경우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의 관계 - 환원이 아니면서도 의존적인 관계 - 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새로 가중되고, 반대로 비자연적 사실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는 그러한 사실이 도대체 무엇인가와 더불어 그러한 특이한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 - 이는 종종 직관이라 불린다 - 의 존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비환원적 자연주의의 경우 최근 철학계의 논의를 살펴볼 때 도덕적 사실과 자연적 사실 간의 환원이 아니면서도 의존적인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제 1 후보는 で수반と 개념일 것이다. 수반개념을 취할 경우 첫째 자연주의를 계속 견지하게 되므로 존재론적, 인식론적 난점들이 환원적 자연주의에서처럼 극복되며, 둘째 비환원적이므로 도덕적 사실이 잉여적인 것이 될 우려도 없게 된다는 잇점이 있다. 그러나 수반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김재권이 제기하고 있는 비판을 극복해야 한다. 김재권은 수반개념을 약수반과 강수반으로 분리하고 약수반은 관계 자체를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약한 개념이고 강수반은 너무 강해서 환원의 위험이 있다는, 그래서 결국 수반개념을 사용하여 비환원주의적 유물론을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김재권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비환원주의적 자연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수반개념을 사용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할 수 없다 하겠다.

그러면 먼저 약수반에 대한 김재권의 논변을 살펴보자. 김재권은 약수반은 세계 내적 일관성만을 요구하므로 의존관계로서는 적합하지 않고, 따라서 너무 약하다고 주장한다.


데이빗슨은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ぢ수반 혹은 의존っ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ぢ수반っ과 ぢ의존っ을 교환가능한 말로, 혹은 전자를 후자의 의미에 대해 한정하는 말로 사용하는 듯하다. 그가 수반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약한 공변이라는 것을 우리는 방금 보았다. 그러므로 다음의 실질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 약한 공변은 의존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가? 혹은 같은 말로서 : 수반이 의존관계여야 한다면 약한 공변이 수반의 한 형태일 수 있는가?

약한 공변은 토대 속성들의 분배에 따라 수반 속성들의 분배에 제약을 가한다. 위의 물음은 이 제약이 의존 혹은 결정의 한 형태를 보장할 만큼 충분히 강한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논변했었듯,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논의의 구체성을 위해,정신적 속성들의 물리적 속성들에 대한 약한 공변을 살펴보자. 이 공변은 다음의 각 상황들과 일관적이다 :

① 물리적 속성들의 분배에 있어서 이 세계와 같은 세계에서,정신이 전혀 없다.

② 모든 물리적 세부에 있어서 이 세계와 같은 세계에서,단세포 유기체는 완전히 의식을 지니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는 정신을 갖지 않는다.

③ 모든 물리적 세부에 있어서 이 세계와 같은 세계에서,모든 것이 같은 정도로 같은 종류의 정신성을 드러낸다.

약한 공변의 제약은 한 시점에서의 오직 단일 세계 내에서만 작용하기 때문에,이것들이 모두 약한 공변하에서 가능하다 : 정신성(mentality)이 한 세계에서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분배될 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물리적 속성들에 상대해 정신적 속성들이 분배되는데 있어서의 세계 내적 일관성이 약한 공변에 의해 부과되는 유일한 제약이다.

이는 약한 공변을 양상적 혹은 가정법적 효력을 지닌 의존 입론으로서는 부적합한 것이게끔 한다. 그리고 양상적 효력은 어떠한 의미 있는 의존성 주장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의존한다고 말할 때,우리는 ① - ③의 가능성들을 배제하기를 원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물리적 속성들을 자연적 속성들로,정신적 속성들을 도덕적 속성들로 치환하면 곧바로 윤리학에서 약수반이 어떤 문제점을 갖는지가 바로 드러난다. 가령 모든 자연적 속성에서는 동일한 세계에서 도덕적 속성이 존재하지 않거나,단세포 유기체만이 도덕적 속성을 지니거나,아니면 모든 것이 같은 정도로 도덕적 속성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속성/사실이 자연적 속성/사실에 의존한다고 말하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강수반과 관련된 그의 논변을 살펴보기로 하자. 김재권은 무한한 연언과 선언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강수반의 정의로부터 다음의 보다 강화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고 한다.


(5a)만약 A가 B에 강하게 수반한다면 A의 각 속성 F에 대해 N(∀x){G(x)↔F(x)}인 B의 속성 G가 존재한다. 즉,모든 A속성이 B에서 필연적인 동연(coextension)을 갖는다.

다음이 (5a)의 증명이다 : F를 A에서의 속성이라 하자. 이때 F를 우연적이라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 즉,어떤 x가 어떤 가능 세계 w에서 F를 갖는다. ((5a)는 비우연적 F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참이다.) 강수반의 정의에 의해서 (w에서) x의 속성이고 N(∀y){G(y)→F(y)}인 B에서의 속성 G가 존재한다. Bx,w를 w에서 x의 B-최대 속성이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 N(∀y){Bx,w→G(y)}. 그러므로 N(∀y){Bx,w→F(y)}이다. 그리고 u세계에서 F라는 속성을 갖는 각각의 v에 대해 우리는 다음 식을 얻는다 : N(∀y){Bv,u→F(y)}. B*를 이러한 B-최대 속성들의 무한선언이라고 하자 ; 그러면 N(∀y){B*→F(y)}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역이 성립한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 N(∀y){F(y)→B*(y)}.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고 가정할 경우 어떤 w#세계에는 F(x)이지만 B*(x)는 아닌 대상 x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강수반에 의해 w#에서 K(x)이고 N(∀y){K(y)→F(y)}인 B에서의 어떤 속성 K가 있다. B#을 w#에서 x의 B-최대 속성이라고 하자. 그러면, 앞에서처럼,N(∀y){B#→F(y)}이고 따라서 B#은 B*의 선언지중의 하나가 일 것이다. 따라서 x는 B*라는 속성을 가져야만 하고 이것은 모순을 낳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의 식을 얻는다 : N(∀y){B*(y)↔F(y)}.


이러한 김재권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수반개념을 받아들이는 비환원적 자연주의는 바로 딜레머에 빠지게 된다. 강수반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이 탈피하고자 했던 환원적 자연주의와 다를 바가 없게 되고 약수반을 받아들이게 되면 도덕적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의존하게 되는 관계를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김재권의 이러한 논증들이 타당한가, 강수반과 약수반 외에 실재론을 옹호하기에 적합한 다른 수반개념을 있을 수 없느냐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수반을 받아들이는 실재론자는 모두 약수반을 수용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실재론자가 여기서 취할 수 있는 길은 보이드처럼 수반개념을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보이드가 수반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방식으로 비환원주의적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이른바 '항상적인(homeostatic) 속성다발적 정의'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자연적 정의의 애매함이다. 이를테면 로크식의 자연적 정의는 ぢ물=H2Oっ 같은 것인데 이는 그 구성요건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해주는 방식이다. 비자연주의적 의미론을 주장하는 최근의 일상언어학파 계열의 학자들은 이렇게 필요충분조건을 제공하지 않는 방식의 정의 가능성을 조사하는데 그것은 어떤 용어가 속성다발로 정의되었을 때 그 용어의 외연을, 모든 속성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몇 개 이상을 만족시키는 것이면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보이드는 그 자신 일상언어학파에 동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수용한다. 즉 자연적 정의에는 그 외연의 불확정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것은 열린 구조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드는 그의 그러한 주장이 자연종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종의 정의를 살펴볼 때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진화론자들은 성적으로 재생산하는 종에서 유전적 물질의 상호교환을 그 종의 특징적인 다른 속성들의 항상적 통일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윈(Darwin)이 지적하는 것처럼 종을 지칭하는 용어들의 외연의 필연적인 불확정성은 진화론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불확정성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진화론의 이론적 근거를 흐리는 것이 되고 따라서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는 이러한 항상적인 속성다발적 정의 방법에 의해 도덕적 속성을 자연적 속성으로 정의하려는 전략을 택한다. 이는 수반이나 구성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는 자연주의적 정의이면서도 비환원적이기 때문에 수반을 받아들임으로써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음은 물론 직관주의적 실재론이 갖게 되는 인식론적 부담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보이드가 이렇듯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닌 항상적인 속성다발적 정의를 그럴듯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논지에서 였다. 항상적인 속성다발적 정의는 일차적으로 증거들에 의해서, 즉 이론 의존적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들은 이론 의존적이므로 곧 근사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지만 이론의 발전에 따라 점점 참에 근접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이론의존적임이 근사적 참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 그것은 과학적 실재론과의 유비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는 과학적 판단에 대한 평가는 이론 의존적 믿음들에 의존하고, 과학의 성공을 볼 때 이 이론 의존적 믿음들은 근사적으로 참이어야 한다는 추론에 근거하여 과학적 실재론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즉 오늘날 과학의 성공을 이론 의존적 믿음들이 근사적으로 참이라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도덕 실재론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드의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라우든(Laudan)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성공적이라면 보이드의 도덕 실재론 또한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라우든은 보이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T) 어떤 이론이 성공적이면, 그 이론은 근사적으로 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문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지시는 근사적 참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② 한 때 성공적이었지만 지시적이 아닌 이론들이 많다.

(예:에테르 이론, 열소이론 등)

③ 성공적이지만 근사적으로 참이 아닌 이론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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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은 근사적 참을 보장하지 못한다.


라우든의 과학사에 의거한 이러한 반론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보이드의 도덕 실재론이 그의 과학적 실재론에 의거하고 있는 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면 플랏쯔나 맥도웰 등의 직관주의적 실재론자들은 도덕적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플랏쯔의 경우 그 자신이 솔직히 도덕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실재론에 대한 논의 중에는 도덕적 사실들에 관한 그의 견해들이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중심으로 플랏쯔의 개략적인 생각을, 나아가 아마도 직관주의적 실재론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는 먼저 도덕적 사실에 관한 논의를 전통적으로 で좋은と이나 で옳은と 등의 분석에서 시작했던 것과 달리 で용기と,で친절と 등의 이른바 で두꺼운 도덕적 개념と들, 즉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개념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념들이 사용되는 범위가 で좋은と이나 で옳은と 등에 비해 훨씬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이 용기 있게 행동하는 가의 문제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보다 훨씬 더 결정하기 용이하기 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이러한 도덕적 사실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특별한 인식능력을 가정해야 한다는 직관주의의 전통적인 단점을 자신의 직관주의적 실재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들을 충족시키는 도덕적 사실이란 어떠한 것인가 ? 그는 흰 종이 위의 검은 점과 그 검은 점들에 의해 그려지는 얼굴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점들이 얼굴의 형태를 고정(fix)시키지만 얼굴형태가 그것들로부터 추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점들의 배열이 수학적 좌표로 나타난 곳에서는 우리가 얼굴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정시키는 특징들을 보지 못하고서, 즉 점들을 보지 못하고서는 어떤 식으로든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정시키는 특징들을 반드시 봐야만 한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 사실이 도덕외적 사실들로부터 추론가능한 것이어서 비추론적인 도덕적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직관주의적 실재론자들의 주장이 반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플랏쯔가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논의를 전반적으로 고려해 볼 때 두 가지 반론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도덕적 사실과 도덕외적 사실 간의 구분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도덕적 사실들이 도덕외적 사실들로부터가 아니라 도덕적 사실들로부터 추론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도덕외적 사실/도덕적 사실의 문제를 도덕적 사실/도덕적 사실의 문제로 전이시켰을 뿐이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구성가능한 반론은 플랏쯔가 도덕적 사실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고(unique) 보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추론이 가능하려면 보편적 연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 상황이 고유한 것이라면 이러한 보편적 연결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성의 도입은 도덕외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 간의 추론불가능성을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양자 간의 관계는 단지 우연적인 것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후자를 고정시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다시 지게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번에는 또 다른 직관주의적 실재론자 맥도웰의 입장을 살펴보자. 맥도웰은 도덕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주로 ぢ가치와 이차성질っ이라는 논문에서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매키와의 토론회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주로 매키의 견해와 대비하는 방식으로 개진하고 있으므로 필자도 이러한 맥도웰의 방식을 따라 매키의 입장과 맥도웰의 입장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매키는 일상적인 평가적 사고는 세계의 측면들에 대한 감지의 문제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맥도웰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 감지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둘의 견해가 엇갈린다. 매키는 그러한 감지가 지각적 모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그 감지되는 것은 제일성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일성질 같은 것은 우리의 감성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인데 그것이 인간의 감성에 우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울러 제일성질 모형은 가치 인식론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므로 결국 도덕적 양태에 대한 언급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맥도웰은 그러나 왜 우리가 반드시 그 모형에 제이성질이 아니라 제일성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맥도웰은 매키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가 제이성질을 받아들이는 것이 투영적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투영적 오류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아픔을 느낄 경우 분명히 아픔을 느끼는 한,이를테면 자연적 원인 같은 것은 우리 외부에 있겠지만 아픔 자체는 우리 외부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많은 제이성질의 경우는 그것들이 우리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곧 투영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를 제이성질로 볼 경우 마찬가지로 가치가 우리 밖에 실재한다는 투영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맥도웰은 매키의 제이성질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맥도웰에 따르면 제이성질은 대상에 대한 그 속성의 귀속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지각적 양태를 나타내는 대상의 성향에 의해 참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절하게 이해되지 않는 속성이다. 예를 들어 한 대상이 붉다는 것은 그 대상이 어떤 특정한 여건에 붉게 보이는 그러한 것임에 의해서 붉게 보이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키가 투영적 오류라고 부르는 것도 잘 설명할 수 있다. 객관적임과 주관적임의 대조는 현실적임과 환상적임의 대조와는 다르다. 그런데 매키는 바로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대상이 경험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을, 주관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대상이 주관적 상태의 허구로서 경험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제일성질 모델을 주장하는 매키의 견해가 옳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제이성질이 주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것은 다만 그 대상의 특성이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제이성질 모델을 받아들일 경우 투영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매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맥도웰의 생각이다. 이렇게 보면 가치를 제이성질과 같은 것으로 보아도 객관성을 확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맥도웰의 이러한 논변은 가치의 존재양태와 색의 존재양태 간의 전통적인 유비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러나 가령 제이성질이라는 면에서 색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 아픔의 경우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비자연적인 것이든 아픔의 원인이 우리의 감각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픔이 우리 밖에 우리의 지각 여부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설령 아픔과 같은 제이성질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맥도웰의 정의에 따르면 대상의 특성이 규정해야 하므로) 동시에 그것이 그것의 원인이 되는 (자연적) 속성과는 다른 것인 한, 그것의 원인이 되는 어떤 속성과 이차성질 간의 인식론적인 관계를 해명해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지각적 모형에서는 그것이 아마도 지각에 의해 설명될 수 있겠지만 실제 가치의 영역에서는 플랏쯔가 버릴 수 있다고 했던 신비로운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상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도덕 실재론의 존재론적 측면을 옹호하는 실재론자들의 논변은 성공적이지 못하지만 브링크나 플랏쯔 등의 실재론자들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사실은 비추론적이거나, 증거독립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실재론을 경험적으로 완전히 반박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론의 약점이다. 왜냐하면 먼저 직관주의적 실재론자의 경우 비추론적 사실의 존재는 도덕적 사실의 고유함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규칙들의 보편성을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브링크처럼 증거독립적인 사실의 존재를 주장할 경우에 그 증명에의 부담은 결국 실재론자에게 돌아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증거독립적인 사실의 경우 우리가 그런 것의 존재를 왜 상정해야 하는 가라고 물을 수 있다. 칸트의 물자체처럼 아무런 특성도 확인 할 수 없이 다만 그 존재가 요청되는 것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굳이 그것을 괄호 치지 않고 논의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겠는가 ? 필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이드이 경우는 역으로 도덕적 사실이 이론 구성적이라는 것으로부터 도덕 실재론을 끌어낸다. 그러나 이론구성적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부를 이유가 무엇인지,그 경우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어떤 차이가 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진리개념이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기준이 된다면 보이드는 자신의 입장을 인지주의,혹은 인지주의적 구성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견해를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대안의 모색 - 도덕 구성주의

Ⅱ장에서 필자는 도덕 실재론은 여러 가지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사실의 인식론적,존재론적 지위로 인해 옹호하기 힘든 입장이라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Ⅰ장에서 서술한 것처럼 필자는 인지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서도 어떤 형태로 인지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지를 보여야 하는 것은 필자의 몫일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윤리학 분야에서 で구성주의と란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아마도 롤즈일 것이다. 롤즈는 자신의 입장을 で칸트적 구성주의と라고 명명하고 있다. 롤즈가 자신의 입장을 で구성주의と라고 이름 붙인 것은 도덕은 발견되거나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즈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실제로 롤즈는 도덕 형이상학과 독립적으로 도덕이론을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따라서 롤즈의 구성주의는 하나의 포괄적인 메타윤리적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도덕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최소한의 메타윤리적 주장에 그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구성주의에 대한 이러한 롤즈의 직관을 하나의 포괄적인 메타윤리 이론으로 발전시킨다면 많은 메타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도덕 구성주의가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で구성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일 것이다. 롤즈에게 있어서 구성은 배경적 조건의 구성을 의미한다. 즉 합당한 정의관을 도출할 수 있는 배경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다. 필자는 롤즈와는 달리 도덕이 관습에 의해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도덕 구성주의란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필자가 で도덕적 관습주의と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で도덕 구성주의と란 이름을 사용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전술한 것처럼 도덕은 전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전적으로 창조되는 것도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이고,둘째는 상대주의로서의 で관습주의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で관습주의と는 특히 で문화 상대주의と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 상대주의가 아니다. 필자는 관습에는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관습이 있고 아울러 더 유동적인 관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상대주의는 유동성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가운데에서도 더 고정적인 관습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덕을 고정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습의 몫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찍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해서도 주장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취할 경우 문제는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관습과 유동적인 관습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관습이 있다해도 그것이 어떤 것들인지 최소한도나마 확정할 수 없다면 고정적인 관습과 유동적인 관습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른바 で문법적 명제と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で문법적 명제と와 그렇지 않은 명제를 구분하는 기준은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과연 인식론에서 그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그러나 필자는 도덕 인식론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관습과 유동적인 관습을 구별하는 기준은 다소 막연하나마 그것이 공리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관습인가를 살펴보면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면 이러한 도덕 구성주의에 어떠한 비판이 가능하겠는지를 살펴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통해 이러한 도덕 구성주의가 어떤 입론인가를 더 분명히 해 보도록 하자. 도덕판단의 객관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는 인지주의적 입장과 비인지주의적 견해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 가령 우리는 끔찍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는 인간이면 지켜야할 도리,즉 도덕이 있다는 믿음을 지지해주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미개부족은 제쳐두고라도,서양인과 동양인은 다른 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도덕의 상대성을 지지해주는 믿음이라고 할 것이다. 이 두 믿음을 어떻게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특히 인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러한 두 믿음들 중에서 특히 두 번째 믿음을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 믿음을 사실에 관한 믿음,가령 자연과학적 믿음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우리는 아프리카의 미개부족이 자연현상에 대해 우리와 다른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믿음에서와는 달리 그들이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에 관한 믿음과 자연현상에 대한 믿음을 달리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도덕에 있어서는 관습적 요소를 강하게 인정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력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필자가 도덕의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부정해야,즉 상대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도덕의 관습적 요인을 인정하면서 도덕의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관습이 지역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기는 하지만 모든 관습에 인간으로서 공통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일단 우리에게 존재하는 도덕적 믿음의 성격을 분석하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도덕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도덕적 믿음에는 순수 도덕적 믿음이 있고 경험적 사실과 결합된 도덕적 믿음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강한 객관성을,후자의 경우에는 사실판단에 대한 차이에 따라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한 것과 같으므로 더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첫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느 민족에게서나 적어도 자녀가 어릴 때에는 부모가 자식을 돌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친애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집단에 공통적인 관습적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적 요인은 '효'라는 도덕원리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관습적 요인들 전부가 도덕원리,그것도 인류 전체에 공통적인 도덕원리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회의 도덕을 형성하는 관습적 요인들 중에서 많은 것은 인류 전체에 공통적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같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덕은 우리의 자연적 경향과는 무관하다는 칸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칸트의 주장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 사람이 상을 받을 욕심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칸트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행위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이 되건,도움이 되지 않건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구조하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함으로써 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의 주장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확실히 도덕은 경향성에서 비롯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 때의 경향성은 바로 나 개인이나 나와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의 경향성에 한정시켜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도덕적인가? 그것은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자기의 이익보다는 자기가 속한 가문이나 단체,사회 등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것이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가문이나 소속단체 등의 작은 이익을 위해 행위하기보다는 사회나 국가,나아가 인류를 위해 행위하는 것이야 말로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고전적 의미의 공리주의는 아니지만 분명 공리주의의 한 형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공리주의의 원리가 도덕의 객관성을 확보해 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필자는 도덕은 관습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공리주의적 원리도 관습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가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둘째,공리주의의 원리는 단일한 원리인데 공리주의를 받아들이고서도 도덕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셋째,종래에 공리주의에 행해졌던 비판들을 극복해야 한다. 넷째,도덕의 객관성에 대한 논의는 메타윤리학적 논의이다. 그런데 공리주의에 관한 논의는 규범윤리학적 논의이다. 그렇다면 과연 규범윤리학에 의한 메타윤리학의 정당화가 가능한가?

앞의 두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도덕의 성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도대체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런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면 그렇듯 모든 인간 사회를 꿰뚫고 있는 도덕의 본성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그것은 전술한 것처럼 利他行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무리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를 지으려면 서로 간에 양보와 존중이 필요하다. 양보와 존중이란 자기의 이익을 항상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도덕적'이라는 말은 '남을 더 존중하는',혹은 '남의 이익을 더 앞세우는'이라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공리의 원리는 사회를 이루면서 사는 인간의 관습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때 '남'이 누구를 의미하는지,그리고 '이익',혹은 '존중'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 발전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사회를 일통하는 도덕원리는 다양하게 발현되는 문화적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각 사회의 도덕은 각 사회의 문화형태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세 번째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고전적 공리주의에 가해진 주요한 비판들은 다음과 같다. 1) 효용을 측정할 수단이 없다. 2) 결과주의에 빠져서 행위동기를 무시한다. 3) 공리주의의 원리만 충족시킨다면 노예제 같은 것도 허용할 수 있다. 4) 모든 가치를 종종 한 가지(예를 들면 쾌락),혹은 몇 가지 속성으로 환원시킨다. 필자는 이러한 비판이 모두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공리주의자가 반드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알 수 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증가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는 많은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공리의 원리를 실현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결과주의에 대한 비판과 관련지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모든 행동을 할 때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행위의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 뿐 아니라 의도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공리주의는 의무론과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효용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특정한 행위의 효용을 모두 올바르게 측정할 수는 없다. 아마 엄밀한 의미에서라면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평가할 때 그 행동의 효용을 전적으로 고려하지 않고서,적어도 그 행위의 효용을 추정하지 않고서 행위할 수 있는가? 올바른 의도를 가진 행동이란 무엇인가? 결국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효용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면에서 본다면 모든 가치를 몇 개의 가치로 환원하려고 시도했던 고전적 공리주의의 잘못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의 논의에서 효용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효용의 측정에 대한 비판은 공리주의자는 전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임에 분명하다. 노예제에 대한 문제는 어떤가? 필자는 확실히 공리주의는 노예제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입론 - 의무론,덕의 윤리학 - 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령 의무론자도 논을 가는데 소를 이용하는 행위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 노예주들이 노예제를 옹호한 것은 그들이 노예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 공리주의적 원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공리주의는 다른 사람의 효용을 자신의 효용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평등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인지주의의 규범윤리학적 옹호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찍이 롤즈는 메타윤리학을 괄호치고도 규범윤리학을 추구할 수 있음을 밝혔다. 필자는 이것이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과 자연학 간의 관계와 유비해서 설명할 수 있겠다. 필자는 메타윤리학과 규범윤리학의 관계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연학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형이상학을 통해 그러한 자연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인다. 그렇다면 윤리학에서도 규범윤리학을 명확히 한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이는 것이 메타윤리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규범윤리학에 의한 메타윤리학의 정당화는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사실판단의 객관성과 가치판단의 객관성 사이의 상이성에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의 차이를 인간의 利害와의 관련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저 꽃은 아름답다.'고 할 경우 그것은 '저 꽃은 인간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저 꽃은 붉다.'고 말할 때는 '그것은 사람의 눈에는 이러이러한 색상으로 보인다.'는 정도의 의미이지 그것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의미는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해관계의 주체가 반드시 욕구를 가지는 개인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가족,국가 등의 더 큰 범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충신이다.'고 말할 경우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국익을 위해 공헌했다.'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차이를 전제하면 사실판단의 객관성과 가치판단의 객관성 간에도 차이가 나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실판단의 객관성은 의심하지 않는다. 또 애매한 부분이 있더라도 인간들의 노력으로 그 애매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판단에 대해 사람들이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사실판단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감각경험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 실재론자들은 도덕판단의 객관성을 주장하기 위해 도덕적 사실의 존재에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Ⅱ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사실판단에서와 같은 경험에 의존할 수 없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객관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가치판단의 객관성을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과학,특히 자연과학에서 관찰의 역할을 하는 것은 윤리학에서는 고정적인 관습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도덕 구성주의가 여타의 입장에 비해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II장에서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합당한 인지주의적 입론이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도덕의 다양성과 딜레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도덕의 객관성에 대한 사람들의 일상적 믿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 외재주의적 도덕 심리학과 정합적이어야 한다.

4) 도덕을 잉여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5) 특별한 인식능력이나 비자연적인 사실의 존재를 상정하지 말아야 한다.

도덕 구성주의는 도덕 실재론과 달리 4)나 5)에 대한 부담이 없다. 아울러 도덕 발생의 우연성을 통해 1)과 3)을 설명할 수 있다. 또 공리의 원칙에 의해 2)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 도덕 구성주의가 완전히 정당화,해명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주요한 목적은 도덕 실재론이 부적합한 이론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인지주의적 입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므로 이 정도에서 논의를 마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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