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자기이익적인 행위자의 도덕적 삶

나뭇잎숨결 2023. 12. 31. 08:43

자기이익적인 행위자의 도덕적 삶

 

최제윤(연세대)

 

[한글요약]

상식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도덕관은 자기이익을 배제하고 타인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을 권유한다. 즉 도덕은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칭찬하며, 자기이익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는 '나'와 '타인'을 도덕적으로 대칭적인 개념으로 구분하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이분법을 기초로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철저한 이분법적인 사고 때문에 도덕의 영역에서 완전히 제외된 자기이익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순수하게 이타적인 동기를 지닌 도덕적 행위 속에서도 행위자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 확신과 자기긍정이라는 자기이익을 가질 수 있다. 순수한 이타적인 행동에서도 자기이익은 발견되는 것이다. 한편 자기이익적인 행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이익을 존중해 줄 수 있다. 이는 자기이익이 도덕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자기이익은 자신의 이익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현실적인 행위자들의 행위를 끌어내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가 아니라 이들의 적절한 조화를 통하여 타인을 배려함과 동시에 자신역시도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추구된 자기이익은 각자의 삶을 도덕적인 삶과 다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자기이익적인 행위자들의 도덕적인 삶은 자기이익과 도덕의 적절한 추구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주제분야 : 도덕철학, 현대 영미윤리학, 규범윤리학

주 제 어 : 이기주의, 이타주의, 자기이익, 타인, 나

1. 들어가는 말

 

상식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도덕관은 우리에게 자기이익을 배제하고 타인을 위하여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을 권유한다. 즉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하며, 그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이타적인 것은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기적인 것, 즉 자기이익적인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깔려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인 행위자들이 도덕의 요구처럼 실제적으로 비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또 그래야 할 필요가 과연 있는지에 관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현실적인 삶 속에서 행위자들은 자기이익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자기이익이 완전히 배제된 삶은 당사자에게 큰 의미를 지닐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교육이나 사회화를 통해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규범들은 많은 경우에 나의 이익을 앞세우기 보다는 나의 이익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규범의 이러한 특성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요구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원하고 욕구하는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욕구는 행동을 끌어내는 중요한 동인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타적인 것은 도덕적이고 이기적인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자기이익을 도덕의 영역에서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자기이익이 지닌 도덕적 요소를 논의해보려 한다. 자기이익이라는 동기를 가진 도덕적 행동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이익은 도덕적인 것과 대립적 위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일 수 있는 부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이익과 도덕은 인간의 행동을 함께 끌어내는 이유로써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이 논증될 것이다. 적절하게 추구된 자기이익은 도덕과 다른 길을 가는 것만이 아니다. 자기이익과 도덕이 배타적이고 대립되는 것만이 아니고 같은 방향을 가는 것임이 논증되면, 자기이익은 도덕성을 지닐 수 있으며 우리의 도덕적인 삶 속에서 자기이익이 차지하는 역할도 분명해질 것이다. 자기이익은 도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며, 자기이익적이면서 도덕적인 삶은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자기이익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

 

일반적인 도덕은 대체로 비이기적이고 공평하며 사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도움을 주라는 명령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도덕이 요구하는 만큼 비이기적인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그렇게 비이기적일 필요가 있는가하는 것도 의문스럽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모두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삶은 이기적으로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이기보다는 객관적인 가치들과도 조화를 이루는 삶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기이익과 도덕의 개념을 분리해서 논의하면 자기이익은 자신의 욕구와 소망 등과 관련된 것이므로 도덕적인 의미를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논자는 자기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 모두 도덕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라는 논의를 하려고 한다. 자기이익이 자신에 대한 합리적이고 진실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덕스러운 것이라면 이는 도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며, 각자의 자발적인 선택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의 이러한 도덕적 선택은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며 결국 자신의 전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이런 삶 속에서 자기이익적인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자기이익적인 이타적 행동은 자기이익의 도덕성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이타주의만을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이려면 자기이익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항상 이타적인 행동만을 기대하고 명할 수 없듯이 인간의 행동은 항상 자기이익적인 것만도 아니다.

논자의 주된 관심은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동기로 하는 자기이익적인 행동은 도덕적일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자기이익은 어떤 면에서는 도덕적일 수 있으며,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도덕적인 탁월함 역시 그 안에 내재할 수 있다. 이타주의나 자기이익의 심오한 한 형태일 수 있는 도덕적 탁월성은 인생 전체를 통한 한 개인의 삶에서 늘 찾아지기 보다는 짧은 기간 동안만 스치듯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는 도덕적인 영웅이나 도덕적 성인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의 즐거운 선행 등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탁월성은 자기이익을 동기로 가진 사람이 그가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만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자기 이익적인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가치도 그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현실과 별개인 먼 이상 세계의 도덕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논자는 최근 윤리학자들에 의해서 많이 논의되는 나찌의 탄압에서 유대인들을 구한 구조자들의 일화를 통해, 전형적인 이타적 삶 속에 내재한 자기이익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한다. 구조자들에 관한 연구는 이미 여러 곳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연구 중의 대부분은 그들의 동기가 이타적이었다면 이 동기는 또한 자기이익적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논자는 구조자들의 이타적인 행동들은 깊은 의미에서 자기이익적인 행동일 수 있으며, 또한 이는 그들의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기도 하였음을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유대인들을 구한 구조자들의 행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순수하게 이타적이며 도덕적인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자기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이들의 행동에서 자기이익적인 동기를 찾아볼 순 없을까? 합리적 행위자 이론은 '이타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효용과 선호의 만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구조자들에 관한 연구는 이타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혹은 대부분 인간 행동의 가장 지배적인 동기는 자기이익이라는 견해가 틀렸음을 보여준다.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구조하기로 한 구조자들의 개인적 결정은 그 결정에 따르는 비용과 이익에 대한 의식적인 계산의 결과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구조자들은 개인적인 위험이 뒤따르며 물질적 보상이나 명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을 완전하게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계산이나 생각의 개입 없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하였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 대부분에게 사람들은 그저 무관심하였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이타주의자라는 등의 칭찬이나 만족감 등의 심리적인 보상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보다는 유태인들의 고통에 더욱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자들의 행동의 동기는 정말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 대부분은 본래부터 이타적인 행동을 늘 하는 도덕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유명한 쉰들러도 그저 평범한 사업가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그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영웅적인 이타심을 발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감한 사람은 예측된 일보다 돌발적인 일에서 더욱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마음의 준비보다는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구조자들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구조자들의 동기는 자기이익적인 것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구조활동을 통해서 그들이 얻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한 자기긍정감은 자기이익이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은 계산이나 도구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자기확신과 자기위엄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이익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구조자들의 행동은 자기이익과 이타성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조자들은 자신들이 자기이익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이익의 본성에 대해서 확실히 알면 구조자들은 합리적인 자기이익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인 요구를 배반할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기배반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자기이익에 의한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이타적인 행동이려면 이기적인 동기가 전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도덕이 정의하는 '이타적'의 의미이다. 타인과의 일체감 속에서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행위는 구조자들이 자기긍정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목적 자체가 표현되고 실제화된 것이었다. 자기긍정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된 것이라면 이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닌 이타적인 동일성을 긍정하기 위하여 행한 이타적인 행동은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가진 감각이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므로 자기이익과 이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자들의 행동은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자기이익적인 동기를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 행위가 항상 개인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덕과 자기이익이 일치되지 않는 상황에서 도덕적인 삶을 선택해야 하는 최소한의 이유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는 도덕과 자기이익의 조화에 대하여 매우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 하지만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매 순간 행위를 선택 할 때 어느 것이 자기에게 최대의 이익을 결과할 것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자기이익은 구체적인 행위보다는 삶의 방식에 적용되어 간접적으로 행위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 자기이익의 원리에 의하여 채택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이익의 이유에 의해서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 채택되기도 하지만 도덕적인 의무도 자기이익의 이유와 관련되어서 이해되고 정당화되어야 한다. 각 개인에게 아무런 내재적인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고 오직 타인의 이익만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도덕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도덕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자기이익에 부합하는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자기이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진실하며 자신의 이타적인 경향성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이기도 하다. 자기이익이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타적 자아가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의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 얻어지는 자기 확신과 긍정심에서 비롯되는 자기이익 또한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행위의 도덕적인 가치 여부는 그 동기가 순수하게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동기가 그 사람 자신에게 진실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라면 자기이익이라는 동기가 우선시되었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이익은 자기존경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신이 지닌 가치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의 이익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세상과 대면함으로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들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도덕은 우리가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고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관련되는 것이다. 의미있는 삶이란 자신이 가치를 두는 삶의 계획들에 역동적으로 참여하고 그 참여 속에서 연대감을 느끼면서 사는 삶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흥분되는 일들에 참여하고 싶어 하며, 이러한 참여와 연대감 속에서 기쁨과 열정을 느낀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루하고 소외된 것일 뿐이다. 의미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발달시키며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긍정적인 방식으로 참여할 때 생겨난다. 의미라는 것은 큰 것보다는 작고 개인적인 것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가치를 주는 것을 찾으면서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 안에서 얻는 성취감은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해준다. 자기이익이 자신의 의미있는 삶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자기이익에 너무 집중해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자리를 내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의미있는 삶과 자기이익은 심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나와 타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이분법의 기초가 되는 개념은 '나'와 '타인'일 것이다. 사회계약론에서부터 현대의 이기주의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자기이익에 관한 논의의 주된 축은 간략히 표현하면 '나'와 '타인'이며, 나와 타인의 구분된 개념이 결국 '이기적이다', '이타적이다', 혹은 '비도덕적이다', '도덕적이다'라는 구분을 만들어 내었다.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만이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도덕적 견해이지만, 그 행동의 동기가 반드시 그리고 순수하게 이타주의적일 필요가 없음은 지적하였다. 자기이익적인 동기도 타인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때는 도덕적인 가치도 지닐 수 있다는 견해는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전환적인 사고이며, 일반적인 도덕관과는 모순 되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도덕에 대하여 조금만 다른 시각을 가지면 가능해지는 사고이기도 하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나누는 기준은 동기에 대한 문제와 항상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동기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기이익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1) 순수한 동기의 신화

 

이타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선, 좋음 등을 자신의 도덕적 대상으로 삼아 이것이 그들의 선한(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이익이 우리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전형적으로 이타적인 동기는 동정과 사랑 같은 특별한 감정과 관련된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의 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충분한 이유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태도와 같은 것들이다. 물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러한 종류의 동기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논자가 주목하는 것은 "왜 오직 그러한 동기만이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타적인 도덕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선을 보호하고 증진시켜야 하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 행동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우는 많이 있고 이는 구조자들의 논의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은 자기이익을 도덕적인 동기에서 완전히 배재해 버렸다. 이는 너무 과격한 결론이다. 자기이익에 대한 관심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인 관심에 해가 되는 것일까? 동기는 꼭 '순수해야 한다'는 강요가 도덕적인 논의에서는 왜 중요한지 살펴보자.

'순수함'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요구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배제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만약에 자기이익의 추구가 제멋대로이기만 하여서 비사회적인 삶의 형태를 낳는 것이라면 이는 물론 도덕적인 동기와 양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이익에 대한 이러한 편견이 잘못된 것임은 이미 지적하였다. 자기이익과 도덕이 양립할 수 없음을 의심하는, 그래서 순수함을 요구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기이익의 개념에 대한 좀 더 풍부한 적용에서 비롯된다. 자기이익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적인 의미로 취급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비판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러한 결과가 자기이익이라는 동기가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자기이익적인 동기에서 하는 행동들은 물론 자기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이 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하려하고 속이려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과는 다르게 타인을 자신의 행동의 도구로써 격하시키지 않으면서, 타인들의 목적과 자율성을 존중해주고, 그런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 역시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자기이익의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상인은 항상 신선하고 먹음직스러운 야채들로 자신의 가게를 가득 채우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상점은 그의 자기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는 자신의 상점을 더 이상의 다른 선을 위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항상 그의 고객들을 정당하고 정직하게 또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다.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는 사람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A와 같이 타인을 소중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이익이라는 동기만을 가지고는 이들의 차이점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는 관점의 차이는 다른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하는 견해의 차이에 달려있다.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는 행위자는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 이외로는 여기지 않으며, 타인의 자율성에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A와 같은 상인은 그의 고객들을 그들 자체로써의 목적으로 대했다. 그는 다른 사람(고객)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그 상인은 자신의 고객들을 정직하고 진심으로 대하였으며 고객들의 독립적인 가치와 목적을 존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점을 다양하고 신선한 상품들로 채우려는 노력을 아낌없이 하였으며, 고객들의 특별하고 어려운 주문에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의 고객들의 만족과 요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예의바르게 대하였으며 항상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상인의 자기이익은 폭력배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타인을 이용하려는 것처럼 굉장히 강렬하고 강한 것이었지만 폭력배들이 다른 사람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면, 상인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과 그들의 가치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인의 타인을 위한 행동에는 자기이익적인 동기가 내재한 것이고, 이는 타인을 그 자체 목적으로써 취급한 것이므로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인의 자기이익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결국 상인의 총체적인 목적은 오직 자신을 위한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고객들을 대한 것일 뿐, 사실상 그의 고객들을 그들 자체로써의 목적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첫째,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취급하는 것과 둘째, 타인들을 그들 자신의 목적으로 대하는 것과의 차이를 혼동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상인이 그의 고객들과는 독립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고객들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취급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그가 그의 고객들이 그들 자신의 독립성과 자신들의 사적인 목표에 참여함을 존중했다는 것을 요구할 뿐이지 고객들의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만 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상인의 경우는 자기이익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을 목적으로써 대우하는 것과 양립 가능함을 보여주는 경우이며, 이는 행위 당사자들이 서로를 그 자체로써 마주보아야 한다는 중요한 도덕적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고객들이 그 자체 목적으로 존경되어졌지만, 상인은 고객들의 선을 그의 도덕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데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도덕의 대상은 단순히 그 자신의 선인 것이며, 그래서 그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가치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인의 예는 다른 사람을 배려함이 자기이익과 양립가능함을 보여주지만 자기이익 자체가 도덕적임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상인의 덕은 그가 그의 고객들의 선을 동기로 가지고 있었다면 자명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선을 동기로 하였으므로 불확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의 이익을 자신의 선으로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를 다음의 예를 통해 살펴보면서 야채 장사의 자기이익적인 행동은 충분히 도덕적임이 더욱 명백해 질 것이다.

 

2) 자기이익적인 도덕적 행위

 

베트남 전에 참가하였던 한 참전용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는 자기이익의 경우를 살펴보자. 베트남 전에 참여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전쟁의 상처로 인하여 남은 평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만 한다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남은 인생을 그냥 무심하고 절망적으로 보내기보다는, 그가 항상 원했던 건축가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대학에 입학한다. 4년의 학교생활 동안 그는 내내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 정류장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비가 오는 날이나 맑은 날이나 언덕이 많은 캠퍼스의 길들을 강의실에서 실험실로 도서관으로 자신의 휠체어를 스스로 굴리면서 다닌다. 오후 7시나 되서야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스스로 저녁을 준비하고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결국 그는 수석 졸업을 하고 성공적인 건축가가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왜 그럴까?

그는 그에게 가장 좋은 이익을 추구했다는 자기 이익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용기와 결단력과 많은 노력을 칭찬한다. 그의 삶은 무심하게 남은 인생을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빚어낸 그의 전적인 투쟁과 노력, 그리고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결심과 결단력의 산물이므로 이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모든 노력은 그 자신을 위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결단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도덕적인 가치는 나 아닌 타인과 연결되어야만 가능하다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사고는 그의 행동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찾아 내지 못한다. 그의 노력은 타인의 선을 위한 동기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동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상하다.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였던 군인의 목적이 단지 '자기 자신의 이익'에 근거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덕적인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를 실현하고 자신의 삶을 의미있고 풍부하게 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단지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것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도덕과 모순된다는 것은 명백하게 틀린 사고이다.

그러므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나누는 구분이 되는 '동기의 순수성'이란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정직한 태도로 대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다른 사람들의 것과 양립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들도 그들 자신의 것을 양립가능하게 추구하도록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선과 결합해서 그들의 선을 함께 추구할 것이다(상인의 경우처럼). 혹은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할 때 그들의 선은 우리의 것과 조화롭게 연합된다. 우리가 우리의 자기이익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올바르게 대할 수 없다. 벤담이 말했듯이 "만약에 우리가 세계의 행복의 양을 증가시키는데 관심이 있다면 자기이익에 대한 배려가 먼저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자기이익적인 이타주의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도 가끔씩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정의롭고 자비롭게 취급할 때 우리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도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주고 신뢰를 받을 때 다른 사람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도덕은 궁극적으로 각자의 자기이익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목해야할 것이 하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도덕적임에 대한 자기이익적인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자기이익은 각자가 자기이익이라는 동기를 가지지 않았을 경우에만 도덕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혼동을 일으키며, 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이는 도덕은 우리의 이익을 더 확장시키기는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자는 행동을 할 때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가 우연히 예전에 즐거웠던 기억과, 혹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던 가치 있었던 행동들을 기억하면 도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는 그 기억을 다 잊어버려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가 동기를 택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는 것 같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사항들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고통 속에 있다고 하자.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며, 도움을 주는 행동에서 단지 개인적인 기쁨만을 느낀다면 도움을 받는 나는 고맙기보다는 오히려 경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할 것이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그의 동기가 전심전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에서 그가 만족감을 느낀다면 나는 그의 행동을 비난해만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도덕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비난받기보다는 칭찬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짐이나 의무가 아닌 삶의 중요한 기쁨들 중의 하나임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베푸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을 반대하는 유일한 논의는 그들이 단순히 그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위선적인 자비를 베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선적인 자비는 자비가 아니며 진실한 자비의 마음이 주는 기쁨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기주의의 역설이 주는 아이디어는 의미가 있다. 너는 외부적인 것에서 기쁨이나 감사를 찾는데 실패할 수 없으며 그리고 또한 그들을 즐겁게 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한편으로 버틀러가 제안하였듯이 완전하게 자기이익과 관련됨이 없다는 것이 한 개인이 이익을 얻는데 필요하다는 사실에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행동이 개인의 수단이 된다고 여기는 행동과 개인의 이익을 분리된 개념이라고 잘못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는 그들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이익일 뿐이다. 듀이(J. Dewy)는 자비적인 행동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추구되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분은 다른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도구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무관심하게 가치화하는 것 사이에 우리의 선택이 놓여있다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진실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독립성을 존경해주는 것과 관련된다. 옥스프드 사전은 '우리가 어떤 것과 관련해서 가지게 되는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정확하게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예술이나 환경 등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의 대상이 다른 사람일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왜 관심의 기본적인 본성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가는 명확하지는 않다. 버틀러는 모든 관심들은 "평등하게 이익이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하다. 왜냐하면 관심의 대상들이 평등하게 나 자신이냐 혹은 그 외의 것이냐 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사고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과 같은 동기는 가지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이기적인 관심만을 고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나와 타인 모두를 관련된 것으로써 보는 견해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의 개념을, 사람들이 자비와 자신의 다른 가치나 이익 사이의 연결을 무시하려 할 때보다 오히려 더 풍부하게 해준다. 각자의 자비심과 관련해서 보면, 타인의 선은 내가 도덕적으로 추상적인 것들 중에서 추구해야만 하는 의무를 주는 어떤 것이기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문제시되는 어떤 것이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선만이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그 외의 추구들은 모두 비도덕적이라고 도덕의 영역을 구분하는 사고는 오히려 우리가 타인을 위한 선을 추구하려는 것도 방해할 수가 있다. 나를 위한 선을 추구할 수 없다면 정말 왜 도덕적이어야만 하며, 왜 나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목적들에다 '도덕적'이어야만 하는 목적을 더해야만 하는 것은 계속되는 질문일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선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기쁜 일이다. 물론 우리가 타인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삶에서 이미 타인들을 배려하고 있는 사람에게 "왜 다른 이들을 배려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이미 필요 없다. 타인의 배려에 대한 본유적인 지식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애정은 정당한 감정이다. 하지만 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도덕을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면 도덕은 스스로를 정당화해야만 할 어떤 것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존엄성과 원칙적인 삶의 방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삶은 풍요로울 수도 있으며 가난할 수도 있다. 도덕은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가 아닌 "왜 그렇게 나쁘게 행동해야만 하는가?"일 것이다.

도덕은 우리의 다른 목적들보다 더 높은 것에 대한 추구는 아니다. 도덕은 궁극적인 어떤 것에 대한 추구를 안내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을 위한 안내자일 뿐이다. 우리가 도덕 원칙이란 안내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직업을 선택하거나, 글을 쓰거나, 거리를 걸을 때와 같은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곳에서 도덕을 고려 안하는 것은 임의적인 욕구에 우리를 맡기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주일에는 교회를 가는 시간을 꼭 내야만 한다는 일상적인 규칙을 나의 삶에 주는 정도로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의 유일한 근원이었던 도덕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에게 도덕은 삶의 한 단면이기보다는 순간적인 치장이나 장식에 불과하다. 그가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것에 관한 도덕인 것이지 그가 주말에만 교회에 나가는 자비로운 행동이 일주일 동안의 그의 모든 행동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도달하기에 어려운 목표물임은 틀림이 없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도덕에 있어서 '나 자신'은 기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타인'이 그에 대한 해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사람들이 추구해야만 하는 많은 가능한 관심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도덕적으로 더 좋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아니다. 타인을 돕고 배려하는 삶은 인간의 삶에서 도덕적인 덕과 관련될 수 있는 탁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과 똑같은 기준과 시각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5. 자기이익적인 도덕적 삶

 

도덕적인 행동에 자기이익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흔히 이타적인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라고 인식된다. 그러나 본고에서 논의하였듯이 많은 도덕적 행위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위와 양립 가능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과 자기이익적으로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유형의 삶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도덕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일상적인 삶에 적합하지 않는 도덕은 만족스럽다고 볼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너무나 고상해서 다른 모든 사람이 실행할 수 없는 도덕을 제안했다면, 누가 제안했든지 간에 그것은 고상한 도덕이 아니다. 오히려 단호히 거부되어야 할 도덕이다.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면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무용하다. 따라서 도덕적인 삶은 그저 짤막한 도덕 규칙을 써놓고 그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준수해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쓸모없는 도덕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도덕을 우리가 처한 특정 상황에 비추어 고려할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도덕을 확보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과 자기이익의 갈등이 아니라 어리석은 이익과 현명하고 합리적인 이익 사이의 갈등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행위를 선택할 때 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만 하는가?인 것이다. 당장에는 이익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손해가 되는 어리석은 선택과 당장에는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이고 진정한 자기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는 자기이익이 우리에게 주는 역설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도덕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이 도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프랑케나의 말처럼, "도덕은 인간의 좋은 삶에 기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우리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의 뿌리가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과 자기 이익의 만남은 부분적으로는 도덕의 권위를 손상시킬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는 세속적인 우리의 삶에서 도덕을 보다 친숙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의 인간화는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는 맹목적이고 소외된 전체주의적 도덕을 완화시켜갈 것으로 본다.

도덕은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들어와 있다. 도덕은 개인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이 둘 사이를 연결지우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가 행하는 많은 선택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어떤 때 도덕은 쉽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또 어떤 때는 지나친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침범하는 것은 가끔씩 있는 일이다. 그것은 종종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들어온다. 궁극적인 선택을 적절하게 수행하려면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도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을 잘 인식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일상생활에서도 도덕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되고 도덕을 삶 전체와 잘 어울리는 부분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6. 맺는말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갖는 문제점은 도덕의 정당성을 개개인의 욕구나 관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데서 파생된다고 보는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자기이익과 도덕의 조화를 찾는 작업을 요청한다고 보았다. 이제까지의 도덕은 나의 희생이나 고통을 감수하면서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것을 칭찬해 왔다. 도덕은 개개인의 욕구나 관심이 느끼는 만족의 차원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며, 따라서 개개인의 욕구에 근거한 이유들과 도덕이 요구해 온 이유들 간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도덕은 비이기적인 것이고, 공평한 것이며, 개인적인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은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소외시킬 위험을 가진다.

'도덕적 임'(being moral)은 나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호의나 배려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나의 필요와 타인의 필요가 갈등을 일으킬 때 나에게 호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허용 가능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요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진실한 삶과 관련된 자신에 대한 배려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이 항상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수 있는 것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공평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 '나'를 모든 도덕적인 고려에서 배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필요는 항상 무시되어도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그들 자신을 도덕적인 고려를 할 때 항상 염두에 두며,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에도 자신을 한편으로 밀어놓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회나, 종교, 또는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도덕적인 의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하인이 될 필요는 없다. 물론 타인에게는 너무 적은 관심을 주고 나에게는 과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은 도덕적인 의무들과 자기이익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도덕과 자기이익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지닌 삶의 양식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성의 결과에 따라 행위를 그것에 적절하게 부합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이익과 적절하게 결합된 도덕적인 삶은 자기의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실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한 개인의 도덕적인 행동이 물론 세계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람들의 사유의 구조 자체의 변화가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조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는 각자가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이익을 실현시키기에 더욱 좋은 것임을 사람들이 깨달으면 다른 사람들도 동참할 것이고 결국 이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도덕과 자기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기이익적이면서 도덕적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익이 우리 행동의 선택에 있어 최우선적인 의무가 되어야한다 것은 아니다. 모든 의무의 궁극적 근거가 자기 이익이라는 것과 자기이익이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자는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희생하고(일시적인 자기이익의 유보나 절제가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행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부정하거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이익에 충실한 사람은 그러한 행위자에 대해 존경을 표할 것이다. 다만 적절한 자기이익이 경계하는 것은, 그러한 이타적 행위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거나 비록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가치보다는 어떤 이념에 의해 강요된 것이거나 심각한 갈등과 부담을 동반하는 경우 그러한 희생이 결코 도덕적 의무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있어 비록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위자들에게도 도덕적인 삶은 견고한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대안이 된다. 도덕적인 삶은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삶이 자기이익의 포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덕적인 삶의 태도는 나의 이익과 도덕이 갈등일 일으킬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 나의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 될 때 나는 자기이익과 도덕의 갈등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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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elf-Interested Moral Life

 

Choi, Jae-Yoon (Yonsei Univ.)

 

The common sense of morality demands caring for others. So morality praises an altruistic behavior and scolds an egoistic behavior. These division basically depends on the dichotomy of self and others. Caring for self is immoral and caring for others is moral. But for an agent who is living in a real world, is it possible? Ignoring self-interest will be meaningless for an agent in a real life. So this thesis notices the existence of self interest in moral behavior. Even though a behavior has a purely moral motivation, it also can have a self interested consequence. These kind of self interest is self esteemed and self authentic. So it will be moral.

Self interest is a strong activator to produce an agent's behavior. The important thing in a moral behavior is not a pure altruistic motivation but a moderate self interest. The harmony of self interest and altruism can produce a good morality. So desirable moral life of agent has to contain morality and self interest.

 

Key Words : egoistic, altruistic. self-interest, others,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