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근거로서 자유에 대한 존재론적 연구
김 병 환*동의대
이 글은 인간 실존과 윤리의 근원적인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가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천이고, 이성적 자유, 상태로서의 무차별의 자유, 그리고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가 아니라, 세계의 상황 속에서 위치된 자유, 애매한 자유, 그리고 참여의 자유임을 존재론적으로 밝히는 데에 있다. 전통적인 윤리학적 의미에서 삶의 궁극적 목적 실현은 이성적 존재가 도덕적 주체로서 윤리적 삶을 완전히 달성하는 곳에 있다. 이러한 삶에 관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참된 근거를 해명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 존재론적으로 초월론적인 것은 초월들의 원천이 되는 곳인 애매한 삶이다.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진리의 세계와 선의 세계로 지향한다. 진리-속에로의-존재로서의 신체-주체가 가능적 진리들의 상황 속에서 획득하는 통합적 진리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선의 개념과 통합적 진리의 개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선의 세계로 지향하는 세계-속에로의-존재로서의 신체-주체의 윤리적 삶과 도덕성은 신체-주체의 고유성인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모든 것들은 우리의 할 수 있음 혹은 누군가의 할 수 있음에 있다. 데까르뜨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자유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 의지는 자유이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은 그 의지가 자발적으로 오성에 의해서 가리켜진 명증의 방향을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적 자유는 이성적 자유이다. 데까르뜨는 무차별의 자유에 관해 '상태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를 부정하고,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전자의 무차별은 비결정의 상태이고, 후자의 무차별은 반대적인 둘 중의 어느 한 쪽에 대하여 자기를 결정하는 긍정적 능력이다. 그러나 메를로-뽕띠는 이성적 자유가 오성에 의해서 지시된 명증에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는 이러한 명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다..
자유가 구체적일 수 있기 위해서 자유는 세계의 이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만나는 가운데 있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세계에 참여되는 수동적 양상으로서의 참여는 사실의 참여이고, 세계에 참여하는 능동적 양상으로서의 참여는 능동적 의미에서 참여이다. 인간 실존에 있어서는 비결정성의 원리가 있다. 이 실존은 그 자신의 근본 구조 때문에 그 자신에 있어서 비결정적이다. 내가 나를 기술하기 위해 나-자신으로 향하는 이상, 나는 익명적 흐름과 아직 의식의 상태들이 없는 총괄적 투사를 일별한다. 나의 자유란 주어진 상황에 참여하는 자유이고, 그 상황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자유이다. 자유가 장을 가져야 한다면, 자유에 대해서는 특권화된 가능적인 것들 혹은 존재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실재성들, 다시 말하자면 삶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주요어 : 윤리,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 무차별의 자유, 애매한 자유, 참여의 자유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면서 참된 삶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자유의 정신 아래에서 실제적인 유용성을 획득하는 행위, 규범 의식에 의한 자발적 행위 등을 실천하고 지속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함이 이와 같은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윤리적 존재, 사회적 존재, 정치적 존재, 경제적 존재 등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자기 뜻을 펼치는 자유의 존재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자유의 존재에 있어서 우리는 자유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자유란 확인되고 기술될 수 있는 사실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란 자유의 지반 위에서 입장을 취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역설적 명제에서만 우리는 자유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행동들의 원동력으로서의 힘이고, 또한 인륜성의 영역 속에서 실천적 삶의 근원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자유가 윤리적인 실천적 삶의 근본 문제로서 모든 행위 규범들의 총체인 윤리의 근거로서의 자유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탐구는 인간 존재와 그의 지평인 근원 세계로 돌아가는 문제로서 인간의 실존적 존재 방식과 삶의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밝힘이다.
인간은 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투사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란, 세계에 대한 인간 자신의 수동적 존재 양상으로서 세계의 그물 속에 이미 침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투사함이란 인간이 '할 수 있음'의 존재로서 자신이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의지대로 그 의지의 펼침을 가리킨다. 가능적 의미의 세계 속에 침투되어 있는 인간은 의미가 솟아오를 세계 상황 속에서 세계의 열기라는 실존적 존재 방식을 취하고 있는 세계-속에로의-존재이고, 세계를 여는 상황에서 의지를 펼치는 존재인 자유의 존재이다.
이제 우리는 신체-주체에 있어서 윤리의 근원적 힘인 자유가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데까르뜨의 이성적 자유와 무차별의 자유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신체-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메를로-뽕띠의 참여의 자유와 애매성의 자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유의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2. 윤리의 근원성인 자유
우리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으로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무엇을 상상하거나 기억하고, 어떤 것들에 대해 감각, 지각, 운동, 판단 등을 수행한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 힘은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능동적인 자발적 '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함은 이러한 '할 수 있음'에 의해서 일어남, 즉 자신의 자유로운 힘에 의해서 일어남이다. 이 힘은 어떤 조건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무조건적 능력으로서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고립된 섬나라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주체가 세계와 더불어 신체적인 세계적 상황 속에 위치되는 가운데 존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가? 그 이유는 이 문제가 바로 우리 인간 자체에 관한 궁극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동의 근원성의 문제이고,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으로 지향하는 관계적 인간임과 동시에 의미 생성적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의 문제이고, 능산적이고 소산적인 인간 자신에 대한 규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능산적이고 소산적 인간인 이성적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 어떤 규칙을 가지고서 자유로이 살아간다. 이 존재가 이와 같이 살아감은 자신의 삶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전통적인 윤리학적 의미에서 삶의 궁극적 목적 실현은 이성적 존재가 도덕적 주체로서 윤리적 삶을 완전히 달성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일은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목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대체로 이 윤리학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실천적 덕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의 삶과 선에 관한 탐구이고, 게다가 이성적 존재의 훌륭한 삶과 최고선 자체에 관한 탐구이다. 여기서 이성적 존재의 훌륭한 삶이란 그 존재가 자신의 이성의 고유성을 가장 훌륭하게 완수하는 활동 그 자체의 삶을 말하고, "최고선이란 인간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그의 모든 행동과 노력을 다하여 인생에서 성취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즉, 최고선은 인간이 그것에 도달함으로써 인생에서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성적 존재의 가장 훌륭한 삶이란 고유한 이성을 완전히 발휘한 상태의 삶으로서 최고선을 획득하는 것이고 동시에 행복이다.
여기서 행복(eudaimonia)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에서는 선한(eu : good) 정신(daimon : spirit)을 뜻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선한 삶(The good life)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이성적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이성을 자유롭게 완전히 펼침으로써 참된 윤리적 존재가 된다. 즉, 이성적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이성적 자유를 펼친 윤리적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는 전반적으로 윤리의 근원인 자유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지 않다. 근대 윤리학에 들어서서야 자유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 윤리학에서 진정한 도덕적 성취는 자유를 위하여 자유롭게 목표를 정립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자유는 의지의 자유로서 도덕적 행위 자체의 원리이자 기준이 된다." 또한 "의지의 자유는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지기 위한, 또는 적어도 윤리적 판단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견해이다."
이성적 존재는 의지의 자유에 의해 자유롭게 행동한다. 이와 같이 행동함은 이성적으로 행동함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함은 윤리적으로 행동함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가 자유롭게 행동함은 윤리적으로 행동함이다. 윤리적 행동의 근거에는 항상 윤리 의식이 기초하고 있으며, 더욱이 윤리 의식은 자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자유의 현존이 부인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윤리 의식은 자유의 현존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를 능산적이고 소산적 인간에 있어서 스피노자 식의 능산적 자연의 절대적 자유나 소산적 자연의 절대적 필연성과 관계지어 윤리의 근원 문제를 밝히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능산적이고 소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근원성의 문제, 즉 인간 자신과 그의 삶의 근거적인 고유성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과학적 사실에 관해 고찰되고 증명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신체와 정신의 총체적인 통일적 존재로서의 의미 생성적 신체-주체의 근거 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는 세계의 그물 속에 던져져 있는 인간 존재의 익명성과 애매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실존을 중심화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역시 우리로 하여금 그 실존을 절대적으로 중심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우리 신체의 익명은 불가분적으로 자유와 구속이다. 그래서 개괄해 보자면, 세계 속에로의 존재의 애매성은 신체의 애매성에 의해서 나타나고, 신체의 애매성은 시간의 애매성에 의해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주체로서의 신체, 즉 신체-주체로서 익명적 존재이고, 이 존재는 세계의 절대적 중심자가 아니라, 자유와 구속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익명성과 애매성을 자신의 고유한 양식으로 취하면서 세계 속에로의 존재라는 실존 양식을 갖는 존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메를로-뽕띠가 유아론적 주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절대적 주체의 탈중심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체-주체는 세계와 불가분의 상관관계 속에서 세계에 자신을 자유로이 참여시키고 동시에 세계는 그 주체에 침투작용함으로써, 이 주체는 세계 속에서 그 자신을 위치시키고 세계를 의미화하며 신체화하는 존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 참으로 초월론적인 것은 어떠한 선입견 없이 공정하게 바라보는 자가 구성하는 작용들의 총체도 아니고, 그 앞에서 불투명함이 없이 구성적 작용들에 의해서 펼쳐지는 투명한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들의 원천이 되는 곳인 애매한 삶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 신체와 초월들을 연결시키는 곳이다. 여기서 초월들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신체성과 사회성, 세계의 선실존(la pr existence), 그리고 우리 자유의 기초가 발견되는 곳인 선객관적(pr objective) 현존재의 두께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자유가 신체의 세계와 초월의 세계가 상호 침투되고 있는 애매한 삶이 형성되는 상황의 세계와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진리의 세계와 선의 세계로 지향한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진리의 관념은 존재론적 우연성, 세계 그 자체의 우연성에 의해서 기초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진리는 필연성과 영원성의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진리로서 신체-주체에 의해서 가능적인 우연성의 세계 속에서 솟아올라 펼쳐지는 것이고 통합적인 것이다. "진리에서 통합적이라는 것은 본질적이다." 진리에 대한 명증은 신체-주체가 "진리-속에로의-존재(l' tre- -la-v rit )"로서 가능적 진리들의 상황 속에서 획득하는 체험적 명증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시간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진리들은 마치 시간에 있어서 각각의 현재가 과거에 맞물려 있으면서 미래지향하는 것과 같이, 서로 연결되고 항상 넘어섬의 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메를로-뽕띠가 진리에 대한 의미를 상세히 밝히는것과 달리, 선에 대해서는 충분한 의미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선의 대상이 인간의 행동인 한에 있어서 선의 관념이 그의 철학 속에서 통합적 진리의 관념과 유사한 역할을 행하는 증거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메를로-뽕띠가 "가치를 부여하다(valoriser)"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모든 평가 작용에 필요불가결한 최초의 가치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경험했던 실재성들이 아니다.
이 관념들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형태로 놓을 수 있도록 하는 관념들이다. 그래서 이 관념들은 세계의 살 속에서 교착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관념들이 인식적일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관념들을 우리의 모든 지향들의 관념적 극들로서 특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 관념들이 초월적임을 말하고자 하고, 덧붙여 말하자면, 메를로-뽕띠가 인간 속에서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현존적일지 모르는 것으로 향한 운동이다. 또한 무엇으로 향한 운동은 운동시작의 국면에 한정된다. 우리의 의지 작용에 의한 신체적 운동은 신체의 근육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국면에 한정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의 모든 운동은 운동의 계기 속에서 무엇으로 향한 운동이다. 예컨대 우리의 언어 활동에 있어서 말은 언어적 계기 속에서 "진리를 향한 운동"이고, 우리의 윤리적 행동은 윤리적 계기 속에서 선을 향한 운동이다. 이와 같은 인간적 운동의 계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형성한다. 만약 우리가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의미가 없는 것을 구별한다면, 우리는 이미 어떤 규범에 우리 자신의 근거를 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 규범은 어디서 오는가? 이 규범의 개념은 세계와 더불어 수동성의 개념이다. 메를로-뽕띠는 인간의 조건이 수용성과 수동성의 양상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대해 거역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나의 삶은 내가 구성하지 않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고, 엄격히 말하자면 상호주관성이 있을 것이며, 우리들 각자는 절대적 개별성의 의미에서 익명자일 수 있을 것임과 동시에 절대적 일반성의 의미에서 익명자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의미 부여는 오로지 원심성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사고에 대해 말하면서, "사고의 중심에 수동성의 신비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수동성이 신체의 중개로 말미암아 정신에 가해진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수동성의 신비는 우리의 인식적 삶이 진리에 있고, 우리의 도덕적 삶이 선함에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자기 자신과 타자성에 대한 자기의 열기는 의식이 발하는 어떠한 빛이나 자기를 이해하는 어떤 관점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불투명성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불투명성에는 항상 자기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손을 볼 때, 그 봄에는 내속적인 수동성이 있다. 왜냐하면 보여진 나의 손은 나에게 보여진 것으로서 보고 있는 나에 내속적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에게 보여진 것으로 주어진 손은 보고 있는 나라는 보는 자에 내속적 수동성이 된다. 이러한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보는 자는 그 자신이 보는 것에서 붙잡혀질 수 있다. 그 이유로서는 보는 자가 본 손은 보는 자의 것으로서 보여진 그 자체는 보는 자의 자기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메를로-뽕띠의 계획은 정신의 가장 높은 삶도 포함해서, 모든 작용과 모든 삶에 가역성의 구조를 일반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체-주체의 특성에서, 선의 세계로 지향하는 세계-속에로의-존재로서의 신체-주체의 윤리적 삶과 도덕성은 신체-주체의 고유성인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자유는 신체-주체의 윤리의 근거로서 주어지고 있다. 자유가 '할 수 있음'으로서의 신체-주체의 근원적 힘으로 있고, 윤리의 근원성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음으로써, 지금부터 우리는 메를로-뽕띠가 데까르뜨의 자유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신체-주체와 세계에 관한 이원론적 방식을 넘어서서 자신의 새로운 자유를 밝히고 있음을 논하고자 한다.
3. 이성적 자유와 두 종류의 무차별의 자유
메를로-뽕띠는 자연과 의식 사이나 즉자와 대자 사이의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고전적인 이원론을 넘어서 3차원을 찾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이 3차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주체와 순수한 대상의 단순한 이원론적 관계를 넘어서 우리의 능동성과 수동성 및 우리의 자율과 종속이 모순적이지 않을 장소이다. 3차원의 이와 같은 의미는 세계 속에 던저져 있는 신체-주체가 세계와 더불어 상호 침투작용 속에 있으면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위치시킨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메를로-뽕띠는 {지각 현상학}에서 절대적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위치된 자유를 정식화하고 있다.
메를로-뽕띠는 은총과 자유 사이에서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 자유의 데까르뜨적 개념 속에서 우리들에 있어서 신을 발견한다. 데까르뜨는 인간 능력들 속에서, 특히 오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원인을 완전한 신에서 찾는다. 완전한 신에 있어서는 어떠한 오류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에 있어서 오류는 왜 발생하는가? 우리는 오류의 문제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판단함에 있어서 오성이 그것에 대한 판단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 판단을 위해서는 오성과 동시에 의지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고자 할 때, 우리의 의지와 오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저기 있는 단풍나무는 붉다',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덕은 쾌락이나 유용성이다' 등의 판단들을 할 때에, 이 판단들의 과정에서 우리의 의지 작용과 오성 작용은 함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판단들은 단지 오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판단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오성과 의지는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자체 능력들로서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우리는 오성과 의지의 능력들 자체들이 미치는 범위와 그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성은 유한하다. 왜냐하면 불가해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단될 수 없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불가해하지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있음), 의지는 무한하다. 즉 불가해하지만 판단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의지는 무한하다.
이러한 능력들이 미치는 범위들의 차이가 오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오성에 의해서 명확하게 붙잡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의지를 사용할 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명백하게 이해하지 않은 것들을 판단할 때,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은 것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즉 오성에 의해서 명석·판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관해 긍정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말하자면 그것은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고 더 확장되기 때문에, 내가 의지를 오성과 동일한 범위 안에 포함하지 않고, 또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까지 확장한다는 오직 이러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의지는 본래 무차별적이므로, 의지는 아주 쉽게 자기를 벗어나게 하고, 선에 대하여 악 혹은 참에 대하여 거짓을 선택한다. 이 일은 바로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짓는다는 결과가 된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자유로운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은 자유가 아닌 삶의 바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는 모든 행동들의 편에 있다."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관해 데까르뜨에 있어서는 의지인 것과 자유인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고, 내가 나라는 존재에서 경험하는 자유 의지가 있다. 즉 의지는 자유이다. 그에 있어서 인간적 자유는 신적 자유와 다르다. 신적 자유는 신이 어떤 것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자유라는 의미에서 무차별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차별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것을 창조하거나 창조하지 않는 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은 그 의지가 명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가 의지적으로 혹은 구속 없이 오성에 의해서 가리켜진 명증의 방향을 뒤따른다는 것이다. 신성이 무차별적이고 인간적 특성이 그렇지 않는 한에서, 인간적 자유와 신적 자유는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자유들은 필연적으로 명증의 방향에 기울어지는 한에 있어서 유사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인간적 자유가 구속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그 자유는 해방의 자유이다. "모든 것들은 우리의 할 수 있음 혹은 누군가의 할 수 있음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지적 주체에 부여된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에서 벗어나는 정신(이성) 철학 중심의 철학적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다.
데까르뜨에 있어서 인간적 자유는 오성에 의해서 가리켜진 명증의 방향에서 나아가는 의미에서 이성적 자유이다. 데까르뜨는 신적인 자유와 관련해서는 무차별의 자유를 설명하고, 인간적 자유와 관련해서는 이성적 자유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데까르뜨는 무차별의 자유보다 이성적 자유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다. 이성적 자유는 상황을 지시하고 혹은 의지는 의지적으로 오성에 의해 지시된 명증의 방향을 뒤따른다. 반대로 무차별의 자유는 인간 존재들에 있어서 오성에 의해 지시된 명증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그러한 방향을 뒤따르지 않을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성찰}에서 주장하고 있는 데까르뜨의 본질적 대상은 의지보다 오성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결국 데까르뜨는 인간에 있어서는 무차별의 자유를 부정하고 이성적 자유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까르뜨가 {성찰} 이후 무차별의 자유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한 것이고, 메를로-뽕띠가 데까르뜨의 그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미 속에서 자유의 긍정적 양상을 찾는 것이다.
데까르뜨의 무차별에 대한 두 종류를 제시해 보면, 우선 한 종류의 "무차별이란 참이나 선에 대한 지각에 의해 다른 어떤 방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면으로 밀려지지 않은 경우에 의지인 상태"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무차별은 오성에 의해 가리켜진 명증이 없기 때문에, 의지가 결정을 취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다른 무차별이란 "반대적인 둘 중의 어느 한 쪽에 대하여, 다시 말하자면 추구하거나 회피하는 것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를 결정하는 긍정적인 능력"이다. 달리 말하자면 두 가지 구속들을 행할 수 있는 능동적 힘(puissance active)이다. 결국 이 경우의 무차별은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이다. 데까르뜨는 이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 속에서 방법론적으로 의심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토대와 명증에 따르기를 멈추는 '할 수 있음'을 발견했고, 반대로 상태로서의 무차별이 의지 결정의 단순한 결핍이기 때문에, 그는 상태로서의 무차별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부정된 무차별의 자유는 한편으로 '상태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로서는 부정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로서는 긍정적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데까르뜨는 여전히 이성적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는 오성이 의지를 앞서게 된다는 것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메를로-뽕띠가 이러한 데까르뜨의 입장에 대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두 자유들 사이에 명증적으로 모순이 있다. 이성적 자유가 오성에 의해서 지시된 명증에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는 이러한 명증에 따르지 않는 능력이다.
데까르뜨는 어떻게 이 두 자유들을 조정하고 있는가? 데까르뜨는 이 문제에 대해 자유의 두 계기들을 구별함으로써 해결을 시도하였다. 의지 작용의 수행 이전과 그 수행을 생각함, 다시 말하자면 의지의 실천을 앞서는 계기와 의지가 실천되고 있는 중에 있는 계기가 결정되기 전에 의지는 항상 두 대립적인 것들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할 수 있음)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조금도 무차별적인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의지가 결정할 때, 의지는 어떠한 무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그것은 오성에 의해 지시된 명증에 따른다. 행하여지는 것은 행하여지지 않음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를 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의지의 작용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의지의 "자유는 조금도 무차별적이지 않는다." 데까르뜨의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 우리는 의지적 결정이 완전히 성립되기 이전에 대립적 선택의 능력인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가 있고, 그 결정 중에 오성에 의한 명증에 따르는 '이성적 자유'가 있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메를로-뽕띠가 데까르뜨의 자유의 두 개념들, 즉 무차별의 자유와 이성적 자유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자유의 개념인 애매한 자유(la libert ambigu ) 또는 참여의 자유(la libert d'engagement)를 이끌어내고 있음을 깊이 고찰하고자 한다.
4. 애매성의 자유와 참여의 자유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한 바에 의해 한 마디로 말하자면, 메를로-뽕띠는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와 '이성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그 이유를 상세히 밝히는 가운데 자유의 특성인 참여와 애매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첫째, 그 이유로서는 이 두 가지 자유가 의지의 유일한 양상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는 의지가 결정 이전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지는 행하는 의지이고 세계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지가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그 의지는 무차별적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결정 이전과 같이, 의지는 세계에 있고, 세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말은 의지가 이미 결정 이전에 세계에 참여되고 있다는 뜻이다. 자유가 구체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유는 세계 속에 위치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의지가 오로지 세계에 달라붙고 오성에 의해 지시된 명증에 따르도록 할 수 있을 것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위치되고, 인격적 삶의 자율적 결정들은 '다시붙잡음' 혹은 '전인격적(pr personnelle) 실존의 손에서 붙잡음'의 특징을 가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메를로-뽕띠에 있어서는 명증에 오로지 따르게 할 수 있는 이성적 자유가 비판됨으로써, 자유는 힘(puissance)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힘은 신체-주체가 세계로 침투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자발적인 능동적 할 수 있음이고, 가능적 의미를 실재화하는 할 수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 신체-주체의 자유는 이러한 할 수 있음과 결부되어 있다. 신체-주체의 자유는 거기로 나아가는 할 수 있음, 즉 아직 실재화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실재화하도록 하는 힘(puissance)으로서 신체-주체의 애매성과 같이 애매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의 존재인 신체-주체는 상호주관성을 자신의 본질적 특성으로 하고 있으면서 '내가 아닌 다른 나', 즉 다른 신체-주체와 관계하는 상관적 존재이다. '나'의 자유와 '다른 나'의 자유는 할 수 있음의 자유로서 상호침투하여 상관적이면서 대립적이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자유는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침투하는 반대적 힘으로서의 타인의 현존"과 상관적이다. 결국 메를로-뽕띠는 데까르뜨의 자유의 두 개념인 이성적 자유와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자유는 의지가 애매할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메를로-뽕띠는 이 두 자유의 개념이 오성에 의해 지시된 명석·판명한 명증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비판한다. 이성적 자유가 의지적으로 명증에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 자유가 명증에 의존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데까르뜨는 명증을 부정하는 데에 있는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가 명증이 증가하는 정도에서 증가한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명증에 대한 경향이 더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경향에 반대되는 자유가 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명증이 긍정되든지 부정되든지 무엇일 수 있든지 간에, 가장 위대한 자유는 항상 가장 위대한 명증을 수행한다. 이러한 것은 바로 전적으로 오성에 근거를 두고자 한 데까르뜨의 입장이다. 그러나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명증은 오성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명증은 초월적 법칙에 의해서도 내적 반성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고, 상황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자유 의지인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 뿐만 아니라, 주어져 있고 우리의 운명과 본성을 표현하는 선과 참에 대해 함께 느끼는 데에 있는 자유인 이성적 자유도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데까르뜨의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와 '이성적 자유'에 대해 메를로-뽕띠가 부정하는 이러한 정황에서 보더라도, 메를로-뽕띠의 자유가 애매성과 참여의 특성을 시사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실존자가 그 자신의 고유한 신체를 가짐으로써, 실존자는 자기가 세계 앞에 던져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로 던져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실존자는 세계에 위치되지만, 동시에 그는 세계를 부정하면서 자유롭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언어체계와 말 사이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말하는 주체는 언어체계 속에서 개념적 의미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그 의미들을 자유롭게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의미화들을 창조하면서 주어진 개념적 의미들에 이 새로운 의미화들을 침전시키고, 또한 언어체계들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새로운 언어 체계들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체는 세계와 역사에 의해 조건지워짐으로써, 그 세계와 역사를 부정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나의 역사는 앞선역사로부터 획득된 결과들을 이용하는 바로 그 앞선역사(pr histoire)의 연속일 것이고, 나의 인격적 실존은 전인격적(pr personnelle) 전통의 다시붙잡음일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지각 현상학}의 마지막 장에서 자유에 관계한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자유의 개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결정을 대립시키면서 자유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어떠한 선택도 어떠한 행동도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행동은 단순한 반사로 환원된다. 그러나 {행동의 구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모든 정도에 대한 생물학적 존재들의 행동들은 그들의 선택에 의존한다."
모든 인간들에게 절대적 자유가 강요된다면, 또한 그러한 자유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노예는 자신을 자유롭게 함과 마찬가지로 구속 속에서 살면서 자유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메를로-뽕띠가 주장하고 있는 관점은 자유가 현상 세계와 역사에 의해서 조건지어진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러한 조건들로부터 시작하여 단지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가 구체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유는 세계의 이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만나는 가운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체-주체가 자기 앞에 위치된 세계적 상황과 만나는 가운데 위치된 자유가 솟아오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메를로-뽕띠는 자유의 능동적 양상, 다시 말하자면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의 명증을 부정하는 작용에 중요성을 둔다. 그러나 이후 그는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 속에서 '부정적 사고'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데까르뜨는 섬광 속에서 부정적 사고의 가능성을 일별했다. … 그는 바라봄에 의하여, 말하자면, 정도를 내포하지 않고, 신에 있어서와 같이 인간에 있어서 무한이고 부정의 무한인, 행하지 않음과 행함의 능력을 측정하였다. 왜냐하면 행함과 마찬가지로 행하지 않음인 자유 속에서 입장이 결코 부정된 부정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말은 명증을 부정하는 긍정적 힘을 뜻한다.
메를로-뽕띠는 데까르뜨적인 이러한 힘 속에서 그의 존재론적 철학의 투사를 특징화하는 부정적 철학의 원본적 형태를 발견한다. 또한 메를로-뽕띠는 {변증법의 모험}에서 사르트르에 있어서 자유의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참여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이 자유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사르트르적인 참여의 개념은 "인간은 참여하기 위해서 자유롭고,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참여한다."라는 말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은 대자 존재(자기에 대한 존재)의 자동주의를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세계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 사르트르에 있어서 참여는 세계로부터 자기를 해체하기 위한 방법이거나, 세계에 참여하기보다는 세계와 더불어 우리를 격식에 맞추는 방식이다.
반대로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참여는 무엇보다도 세계와 함께 하는 관계이다. 이 참여는 세계에 닻이 내려지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여는 두 가지 양상들을 가진다. 그것들은 세계에 참여되는 수동적 양상과 세계에 참여하는 능동적 양상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세계에 참여되는 수동적 양상으로서의 참여는 '사실의 참여'(engagement de fait)이고 세계에 참여하는 능동적 양상으로서의 참여는 '능동적 의미에서 참여'(engagement au sens actif)이다. 사실의 참여란 "내가 나의 삶을 각성할 때에, 내가 행하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나의 견지에서 다시 붙잡는 많은 것들에 대한 책임지움을 나에게 드러내는"상황으로서 정의된다. 능동적 의미에서 참여란 "나를 구성하고, 나를 선택하며, 나의 타고난 위태로운 언행들을 지우고, 위태로운 언행들을 선택하며, 내가 그것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창조하는 수행에 의해서 나를 되찾고, 나를 다시 시작하고, 그리고 또한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데에 있다."
게다가 메를로-뽕띠는 참여의 두 가지 개념들 뒤에 비판될 자유의 두 의미들이 있음을 말한다. 참여의 개념들 뒤에서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적 개념은 데까르뜨가 말하는 바, 행함이나 행하지 않음의 순수 능력으로서 정의된다. 비록 자유에 대한 개념이 '능력(할 수 있음)'으로 명명될 지라도 그 개념을 결코 '어떤 행함'이 아니고, 그것은 "결코 살(chair)이 되지 못하고, 획득된 것을 갖지 않으며, 결코 힘과 더불어 자기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판단하는 자유이고 쇠사슬에 묶인 노예가 보존하는 자유이다." 또 다른 자유는 행함이나 행하지 않음의 순수 능력으로서 정의되지만, 중단하는 능력이고 우리가 우리에게 확증하는 무한한 능력이다. 이 자유는 바로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이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세계와 분리된 대자존재의 속성인 사르트르적 자유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유가 세계에서 행동하기 위한 긍정적 힘을 갖지 않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은 메를로-뽕띠가 신체-주체에 있어서 단지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의 긍정적 양상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신체-주체인 인간의 삶과 역사는 바로 그 자체들의 고유한 양식 속에 있지만, 그 삶과 역사의 하부구조들은 하나의 운명이 아니다. 신체-주체인 나의 삶은 나의 삶의 하부구조들을 변형시킬 수 있지만, 이 삶은 "나의 삶에 이-의미 혹은 저-의미를 부여함을 결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 논리와 함께 술책을 쓰는 것 없이, 나에게 열려진 것을 사전에 미리 숙고된 의미화의 한계들 속에서 넣어두는 것 없이, 나에게 열려진 것을 소박하게 체험하려고 노력함에 있다."
메를로-뽕띠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수동적 양상, 즉 위치된 자유를 강조하였지만, 또한 그는 {변증법의 모험}에서 힘(puissance)으로서 자유의, 능동적 양상을 긍정한다. 그래서 그는 애매한 자유를 확정한다. {지각 현상학}에서 자유에 대한 중요한 점은 자유의 수동적 양상, 다시 말하자면 자유가 조건지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본질적인 관점은 자유의 능동적 양상, 즉 부여된 명증을 부정하는 능력에 근거를 둔다. 달리 말하자면 본질적 대상은 참여의 자유의 양상으로부터 다른 참여의 자유의 양상으로, 즉 던져짐으로부터 자기를 투사함으로 옮겨진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자유의 수동적 양상 뿐만 아니라 자유의 능동적 양상도 밝히면서 자유의 애매성을 확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구체적 자유에 대한 생각에 이르고 있다. {변증법의 모험}에서도 그는 자유 의지에서 출발하여 실천적 자유, 역사 속에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인간 실존에는 결정성의 원리가 있는가 아니면 비결정성의 원리가 있는가? "인간 실존에 있어서는 비결정성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이 비결정성은 우리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우리 인식의 어떤 불완전으로부터 유래되지 않는다. 신이 심장들과 콩팥들을 깊이 조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과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것을 명확히 경계를 획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실존이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를 취하고 성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더 일반적인 의미화를 취하는 활동 자체인 한에서, 실존은 자신의 근본적 구조 때문에 자기에 있어서 비결정적이다." 이러한 연관에서 우리는 인간 실존이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과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것의 경계를 획정함을 배제시킨다.
또한 예술적 영역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특성을 말하고자 한다. "예술적 힘의 의지는 무질서에서 도식들의 투사작용인 한에서, 살아 있는 자의 근본적인 활동성이지만,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구조화하고 입법하는 이러한 활동성일 수 있는 의미에서 더 인간적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뜻대로 예술 활동을 수행하지만, 그 일에는 어떠한 양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 양식이란 예술가 자신이 구성하는 등가의 체계이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적 의지 활동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이 체계, 즉 양식은 예술가의 의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인 자유 의지의 활동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의지 활동에서 그 양식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예술적 자유 의지는 어떠한 제재 없이 그 스스로 자발성을 가지는 자율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 실존의 예술적 의지는 자유로운 예술적 활동 능력으로서 자기 존재를 더욱 새롭게 구조화하고 입법하는 '할수 있음'과 '하고자 함'의 의지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주체와 그의 신체, 그의 세계 혹은 그의 사회 사이에 인과성의 어떠한 관계도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의 모든 확실성의 근거를 잃는다는 조건으로, 나에게 나-자신에 대한 나의 현존을 알려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기술하기 위해 나-자신으로 향하는 이상, 나는 익명적 흐름, 아직 의식의 상태들이 없는 총괄적 투사를 일별한다." 세계 속에로의 존재로서의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 "나는 나의 행동들 가운데 어떤 것들에서 자유롭고 다른 것들에서는 결정된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만약 나의 행동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나의 행동들을 결정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행동들에서는 시간적으로 항상 결정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행동들은 자유로운 행동들이 아닌가? 나의 행동들은 구속에 의한 행동들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 행동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개념은 심리적 자유 개념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그 자유 개념은 심리적 법칙에 따른 자유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행동은 나의 '할 수 있음'이라는 능력과 나의 '하고자 함'이라는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일어나는 것이지, 나의 심리적 법칙에 의거하나 정신적 규칙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나에게 놓여진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것인가' 혹은 '저렇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나는 심리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자유 의지(자유성)에 의해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나에 있어서 자유란 주어진 상황에 참여하는 자유이고, 주어진 상황에 침투되고 침투하고 있는 자유이다. 넓은 의미로서는 나라는 신체-주체는 세계 속에로의 존재로서 세계와 교착배어법적 방식을 띠면서, 세계에 참여하는 자유의 존재이다. 결국 이러한 자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모든 행동들은 시간 계열에서 결정론적인 시간적 순서와 필연적인 규칙성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또 한번 내가 자유롭다면, 이것은 내가 수많은 것들 가운데서 셈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는 멈춤 없이 자유로움일 것임에 틀림없다. 또 한번 나의 행동들이 나의 것들임을 멈춘다면, 그 행동들은 결코 다시 나의 것들임이 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세계에서 나의 붙잡음을 잃는다면, 나는 그 붙잡음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나의 자유가 경감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생각될 수 없다.
내가 타인을 의식적 존재로 보든지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보든지, 이 일은 나에게 자유이지만, 타인에 대해 어떻게 보는 나의 선택은 구속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의 소여인 이러한 선택은 순수 의식으로서의 나에 대한 하나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하는 '나'는 나에 대해 타인이도록 하는 '나'이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 인간들로서 있도록 하는 '나'이다. 결국 이러한 선택은 또한 자유로운 선택이다.
메를로-뽕띠는 이성적 자유에 대한 비판으로서 선택에 관한 지성적 특성의 선택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열려진 상황들의 순환이 없다면, 상황들을 확정하는 결정에서나 그 상황들을 변형시키는 결정에서 자유는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그러한 선택은 선결해야 할 참여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장을 가져야만 한다면, 자유에 대해서는 특권화된 가능적인 것들 혹은 존재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 실재성들, 다시 말하자면 삶의 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선택은 우리의 전체적 특성의 선택이고 세계 속에로의 존재인 우리의 존재 방식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 전체적 선택은 "세계 속에로의 우리 존재의 침묵적 솟아오름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이도록 하는 선택은 참으로 하나의 선택이고, 우리 실존의 전환이다. 나의 자유는 단순히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적 참여의 부정적 양상이 아니고, 또한 그것은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의해서만 의미와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5. 맺는 말
세계 속에로의 존재인 신체-주체는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의 세계를 구축하여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단순히 세계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 반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과 관계하면서 교착배어법적 양상을 가진다. 이와 같은 존재 방식을 가진 신체-주체는 세계적 상황 속에 이미 위치되어 있으면서 자기의 고유성인 자유를 펼친다. 이러한 신체-주체의 자유의 펼침은 근원적으로 모든 행동의 원동력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자면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익명성과 애매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취하고 있는 신체-주체는 세계 속에서 세계로 지향하는 세계-속에로의-존재로서 끊임없이 상관적 대상들의 의미를 생성하고 의미의 세계를 펼치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행동들의 근원적 힘인 자유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신체-주체의 자유는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 자유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더불어 위치된 자유이고, 진리와 같이(진리는 진리-속에로의-존재인 신체-주체에 의해서 가능적인 진리들의 세계적 상황 속에서 솟아올라 펼쳐지는 통합적인 진리이고, 이러한 진리의 계기들 속에서 이 주체의 자유는 진리로 지향하는 근원적인 할 수 있음이다.), 윤리적 계기 속에서 도덕성과 선으로 지향하는 운동성의 자유로서 윤리의 근거가 되는 '신체-주체의 할 수 있음인 자유'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신체-주체의 이러한 자유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의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 속에서 선으로 지향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런 특성에서 우리는 가능적인 선들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펼치는 선-속에로의-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데까르뜨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는 이성적 자유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고, 무차별의 자유는 부정되고 있다. 하지만 상태로서 무차별의 자유가 부정되고 있으며, 할 수 있음으로서 무차별의 자유는 긍정되고 있다. 이 '할 수 있음으로서의 무차별의 자유'는 대립적인 선택 능력이고, 이성적 자유는 의지가 오성에 의한 명증에 따르는 자유이다. 이러한 데까르뜨의 자유에 대한 비판으로서 메를로-뽕띠는 세계에 위치되어 참여하는 자유로서 참여의 자유와 애매한 삶과 함께 하는 애매성의 자유를 제시하고 있다. 참여와 애매성의 성격을 띠는 이 자유는 아직 실재화되지 않은 것을 실재화하도록 하는 힘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참여는 세계에 닻을 내리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수동적 양상과 능동적 양상을 지니는 참여이다. 이러한 참여의 뜻에 자유의 의미가 결부된다. 자유에 대한 참여의 이와 같은 뜻에서 우리는 신체-주체가 자유의 수동적 양상과 자유의 능동적 양상을 취하고 있음을 제시할 수 있다. 참여의 자유와 더불어, 신체-주체의 모든 행동들이 시간 계열 속에서 어떤 고정된 결정성으로 완전히 확정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들이 맞물려서 의미가 생성되는 비결정적인 것으로서 있는 가운데 애매성을 취하는 것과 같이, 세계적 상황에서 할 수 있음으로서의 자유를 펼치는 신체-주체의 의미 생성적 자유가 비결정성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가운데 애매성의 자유가 솟아오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우리의 삶의 지평을 이루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으로서의 신체-주체의 자유의 개념 자체가 '우리가 구체적으로 세계적 상황에 기초지어져 있다는 것', '우리의 결정이 미래에 빠지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이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라는 자유의 고유성을 자유의 존재론적 본질이라고 간주한다. 만약 자유가 이루는 것이라면, 자유가 이루는 것은 새로운 자유에 의해서 곧 해체되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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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tude ontologique de la libert comme le fondement d' thique
- Kim, Byeong-Hwan -
Cette th se consiste clairer ontologiquement que 'la libert comme pouvoir' originaire de l'existence humaine et de l' thique est la source de tous les comportements de l'homme, et qu'elle est non pas la libert rationnelle, la libert d'indiff rence comme tat, et la libert d'indiff rence comme pouvoir, mais la libert situ e dans une situation du monde, la libert ambigu , et la libert d'engagement. La r alisation du but final de la vie est dans le lieu o l' tre rationnel comme le sujet moral acheve la vie thique compl tement. Nous avons lucider le fondement vrai de notre vie sur cette vie. Ce qui est ontologiquement transcendantal dans le monde de notre vie, c'est la vie ambigu qui est le source de la transcendance. Nous tendons le monde de la v rit et du bien dans cette vie. La v rit int grale que le corps-sujet comme l' tre- -la-v rit acquiert dans les situations des v rit s possibles, c'est temporelle, historique. Il y a la ressemblance entre la conception du bien et la conception de la v rit int grale chez Merleau-Ponty. Nous voulons dire que la vie thique du corps-sujet comme l' tre-au-monde qui est intentionnel le monde du bien, et sa moralit fondent sur la libert qui est sa propri t .
Toutes choses sont en notre pouvoir ou aucune. Il n'y a pas aucune diff rence entre la volont de l'homme et sa libert chez Descartes. La volont est la libert . Que la volont de l'homme est libre, c'est le fait que sa volont volontairement suit l'orientation de l' vidence indiqu e par l'entendement. En ce sens, la libert humaine est la libert rationnelle. Descartes nie la libert d'indiff rence comme tat sur la libert d'indiff rence, il y donne la libert d'indiff rence comme pouvoir le sens positif. Ici, la premi re indiff rence est l' tat de l'ind termination, la seconde indiff rence est une facult positive de se d terminer pour l'un ou l'autre de deux contraires. Mais Merleau-Ponty critique que la libert d'indiff rence comme pouvoir ne suit pas l' vidence indiqu e par l'entendement.
Pour que la libert puisse tre concret, elle n'est pas en de a du monde, mais au contact avec lui. L'engagement comme la modalit passif engag dans le monde est l'engagement de fait, l'engagement comme la modalit actif qui s'engage dans le monde est l'engagement en sens actif chez Merleau-Ponty. Il y a le principe d'ind termination dans l'existence humaine. Cette existence est ind termin e en lui-m me, cause de sa propre struture fondementale. l'instant o je me tourne vers moi-m me pour me d crire, j'entrevois un flux anonyme, un projet global o il n'y a pas encore d' tats de conscience. Ma libert est la libert s'engageant dans une situation donn e, et elle est la libert qui est eu train de faire un sense dans cette situation. Si la libert doit avoir du champ, il faut qu'il y ait pour elle des possibles privil gi s ou des r alit s qui tendent pers v rer dans l' tre, c'est- -dire un champ de vie.
※ Mots-cl s : libert , thique, libert d'indiff rence, libert ambigu , libert d'eng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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