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토마스 베른하르트 I
조 현 천 (부산대)
Ⅰ. 들어가는 말
21세기 예술작품 내지는 예술이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하나가 바로 쇼펜하우어(1788-1860)이다. 흔히들 세기말이라고 하는 19세기 말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계 (혹은 방향감각 상실 현상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세계)”1)였다. 방향상실은 한편으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절망감이 팽배하기 마련이다. 방향상실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으로서 데카당스와 몰락의 분위기가 지배하던 19세기말에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 청년시절을 보낸 토마스 만(1875-1955) 역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한 가문이 4대에 걸쳐 몰락해 가는 과정을 다룬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일가 Buddenbrooks?의 토마스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죽음의 형이상학을 재현하고 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탐독한 날 밤 깊은 잠에서 갑자기 깨어난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방안에서 갑자기 계시의 빛이 비치는 것을 느낀 그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세계관을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란 무엇이었던가?〔...〕죽음이란 축복이었다. 지금처럼 은총을 받은 순간에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축복이었다. 죽음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헤매다가 돌아오는 것이고 중대한 착오를 교정해주는 것이며 역겹기 짝이 없는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안타까운 불행한 사건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것이었다.2)
Was war der Tod?〔...〕Der Tod war ein Glück, so tief, daß er nur in begnadeten Augenblicken, wie dieser, ganz zu ermessen war. Er war die Rückkunft von einem unsäglich peinlichen Irrgang, die Korrektur eines schweren Fehlers, die Befreiung von den widrigsten Banden und Schranken - einen beklagenswerten Unglücksfall machte er wieder gut.
의지의 산물인 고통스러운 이 세계는 살 가치가 전혀 없으므로 죽음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토마스 만의 초기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부덴브로크 일가?를 비롯한 초기 작품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죽음의 형이상학을 형상화시켰던 토마스 만은 1차대전 직전의 유럽을 무대로 한 시대소설 ?마의 산 Der Zauberberg?에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 외에도 삶은 ?영원한 현재?(nunc stans)라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시간소설로 형상화시키는 등 그의 전 작품에서 쇼펜하우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간과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했던 토마스 만이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쇼펜하우어 추종자였다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쇼펜하우어 추종자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일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1978년 쇼킹한 제목의 산문 ?예, 그럴 겁니다 Ja?를 발표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페르시아 여인은 일인칭 화자로부터 언젠가 자살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웃으면서 “예, 그럴 겁니다” 라고 대답하는데, 그녀의 대답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것이다. 이 페르시아 여인은 나중에 자신이 말한 대로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 들어 자살하는데, 자살/죽음의 문제는 베른하르트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주제 중의 하나이다. 베른하르트의 주인공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절망에 빠진) 베른하르트의 화자들은 이런 주인공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원기를 회복하는 경우가 많다. ?예, 그럴겁니다?의 일인칭 화자 역시 페르시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그녀와 같이 산책을 다녀온 후 마음이 심란해진 그는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는다.3) 다음 인용문은 그가 한 말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 가장 중요한 철학책으로 나는 언제나 그 책의 영향력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나면 언제나 머리가 아주 맑아졌다.4)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war mir schon von frühester Jugend an das wichtigste aller philosophischen Bücher gewesen und ich habe mich auf seine Wirkung, nämlich die vollkommene Erfrischung meines Kopfes, immer verlassen können.
이 작품뿐만 아니라 베른하르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외할아버지는 실제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삼았다.5) 1931년 네덜란드 헤를렌의 한 수도원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줄곧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했던 베른하르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가 없는 베른하르트의 문학세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베른하르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6) 베른하르트는 ?호흡 Der Atem?에서 결핵 요양소에서 읽은 책들을 열거하면서 외할아버지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몽테뉴와 파스칼 그리고 페귀를 읽었는데, 이들 철학자들은 후에 항상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 정도로 나에겐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도 포함되었다. 외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당연히 그의 철학이 아니라 그의 세계와 사상이었다.7)
Ich hatte Montaigne gelesen und Pascal und Peguy, die Philosophen, die mich später immer begleitet haben und die mir immer wichtig gewesen sind. Und selbstverständlich Schopenhauer, in dessen Welt und Denken, naturgemäß nicht in dessen Philosophie ich noch von meinem Großvater eingeführt worden war.
베른하르트는 작품(허구에 바탕을 둔 창작이나 자서전8))에서 뿐만 아니라 기고문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그때부터 여태까지 읽었던 모든 책들은 모두 이 두 권과 같은 것들이다. 모두가 진리를 말할 수 없는 동시에(혹은) 인간의 삶을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9)
이것은 베른하르트가 자신의 독서체험을 밝힌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두 종류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10) 이 독서체험을 통해 베른하르트는 우리들이 안고 있는 영원한 화두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진리란 궁극적으로 전달이 불가능한 것이며, 극복할 수 없는 삶/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지프가 굴러 내리는 돌을 계속해서 밀어 올리듯이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주어진 이 난제를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독서체험을 밝힌 글에서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다룰 문학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밝힌 셈이다.
Ⅱ. 쇼펜하우어의 예술론
1.
칸트 철학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비판을 통하여 비합리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이라는 독특한 철학체계를 세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물자체를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이 의지의 형이상학에 의할 것 같으면 살려고 하는 의욕과 노력은 본질적으로 필요와 결핍, 즉 고통이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방황한다. 물자체인 의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는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따라 무수한 개체에 자신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분산된 개체는 생존하기 위해 서로 투쟁을 한다. 동물은 식물을 먹고, 그 동물은 또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된다. 인간 역시 서로를 탈취하는 이런 자연의 섭리라고 하는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지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한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살려고 하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의욕과 욕망은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의 욕망을 충족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충족의 기쁨은 금새 사라지고 또 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철저하게 구체화된 의욕과 욕망이며,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11)로 규정하고 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이 바로 우리들 삶의 내용인데, 인간이 이런 고통을 감내하는 이유는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 인간은 고통을 추방하려고 쉴새 없이 노력하지만 고통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쾌락, 성욕, 애정, 증오, 명예욕 등은 모두가 이 고통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고통이 다른 모습을 취할 여지가 없게 되면 권태와 혐오가 우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갔다”12) 하는 것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모든 인생은 철저하게 의욕과 성취 사이를 흘러가고 있다. 소망은 그 본성에 따르면 고통인 것이다. 성취는 얼마 안 가서 곧 포만을 낳는다. 목표는 피상적일 뿐이고, 소유는 흥미를 빼앗아가고 새로운 모습으로 소원과 욕구가 다시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황량, 공허, 권태가 생기고, 이에 대한 투쟁은 곤궁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13)
인간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욕구는 금새 사라지고 새로운 욕구가 그 자리를 대신하므로 충족된 욕구는 인식된 오류이고, 새로 생긴 욕구는 인식되지 않은 오류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며?마야의 베일?에 쌓여 있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마야의 베일을 어떻게 벗길 수 있단 말인가?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세계고(世界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자서전 5부작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베른하르트의 인생이 철저하게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듯이, 그의 문학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모두가 한결 같이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1969년에 출판된 ?바텐 Watten?의 일인칭화자인 의사가 하는 다음의 말은 베른하르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에 관해 말하자면 불행이 존재의 증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는 불행만이 존재하듯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행이다. 자연은 개개인을 불행에 빠지도록 내버려둔다.14)
Was mich betrifft, weiß ich, daß Unglück Existenzbeweis ist. Daß einer da ist, ist ein Unglück, wie das nur Unglück auf der Welt ist. Die Natur läßt den einzelnen in seinem Unglück allein.
‘불행이 존재의 증명’이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이 맹목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런데 인간이 안고 있는 고뇌는 모두가 실체가 없는 것이라서 삶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든 싫든 삶이 근본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으로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 베른하르트의 산문 ?걷기 Gehen?15)는 화자와 욀러가 산책을 하면서 욀러가 하는 이야기를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욀러의 인생관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는 오류라고 욀러는 말한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도록 일찌감치 이러한 사실에 안주해야 된다고 욀러는 말한다. 따라서 오류가 유일한 현실적인 근거이다.16)
Existenz ist ein Irrtum, sagt Oehler. Damit müssen wir uns früh abfinden, damit wir eine Grundlage haben, auf welcher wir existieren können, sagt Oehler. Der Irrtum ist folgerichtig die einzige reale Grundlage.
“우리의 존재가 견딜 수 없이 끔찍스러운 존재”17)이지만 존재 자체가 오류에 기인한 것이므로 진정한 삶이란 이 오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류는 맹목적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세계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의지를 긍정하는 모습은 종족보존 행위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때문에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는 종족 보존 행위인 아이 낳는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18) 한 예로 ?걷기?의 욀러와 일인칭화자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가를 걸어가다가 수많은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욀러로 하여금 아이 낳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19) 욀러가 하는 말을 일인칭화자는 이렇게 전달한다.
아이를 만드는 사람은 불행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욀러는 말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20)
Wer ein Kind macht, sagt Oeler, weiß, er macht ein Unglück, das unglücklich sein wird, weil es unglücklich sein muß〔...〕.
인간은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를 낳기 때문에 아이들은 만들어진 것이며,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아이는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욀러는 아이 낳는 행위를 파렴치한 행위로 보고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 없이 만들어진 아이들보다 더 파국적인 것은 없으므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최악의 범죄”21)를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 낳는 것에 반대하는 법을 제정하고, 더 나아가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를 만드는 행위에 대해 최고형을 선고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범죄행위를 지원해주고 있다. 이처럼 범죄에 동조하는 국가를 욀러는 “생각 없는 국가”22)로 부르고 있다.
2.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주의와 플라톤의 이념을 접목시켜 자신의 독창적인 의지의 형이상학 이론을 정초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선천적인 인식 조건인 근거율에 의해 현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은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물자체인 의지와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의 세계에 속하는 개별자들 사이에 의지가 객관화된 형태로서 플라톤적인 이념이라는 것을 설정한다. 이념이란 무기물에서 동식물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각 종마다 고유한 형식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중력, 전기, 자기 등 자연법칙 같은 것이 이 이념에 속하는데, 인간처럼 의지의 개관성의 높은 단계가 되면 개성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의지가 여러 단계로 객관화된 이념 역시 근거율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 공간,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의지의 유일한 ?적절한? 객관성인 이념을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의지의 개관화의 여러 단계는 무수한 개체로 나타나서 객관화의 유례 없는 모범으로서 혹은 사물의 영원한 형식으로서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개체의 매질인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가지 않고 고정되어 있고, 어떠한 변화도 받지 않으며, 항상 존재하지만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23)
물자체인 의지는 “아직 객관화되지 않고 표상 되지 않은 의지”24)이지만 플라톤적 이념은 “필연적으로 객관, 즉 인식된 것, 즉 표상이며, 또 그러하기 때문에 물자체와는 다른 것이다.”25) 시간, 공간,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물자체와는 달리 인식이 가능한 이 이념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쇼펜하우어의 설명에 의하면 개별적인 사물을 인식하다가 이념에 대한 인식으로 이행하는 경우는 별안간 일어나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인식 주체가 자신의 주관을 버리고 주어진 대상에 몰입하면 주체는 의지에 봉사하기를 멈추고 이념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별적인 사물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부터 이념의 인식으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예외로만 고찰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이행은 갑자기 일어난다. 즉 인식은, 의지에의 봉사로보터 해방되고, 바로 그렇게 되어 주관이 단지 개체적인 주관인 것을 그만두고 이제는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주관이 되고, 이유율에 따라 여러 관계를 추구하지 않고 주어진 객관을 그것과 다른 객관과의 연관을 떠나 굳게 관조하고, 여기에 몰입하는 경우에 일어난다.26)27)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념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자연과 인생을 관조함으로써 이념을 인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과 세계에는 이념을 인식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의 의의가 있다. 우선 예술을 천재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는 쇼펜하우어는 자연과 인생의 관조를 통해 인식한 이념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순수 관조에 의해 파악된 영원한 이념, 즉 세계의 모든 현상의 본질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을 재현한다. 그리고 재현할 때의 소재에 따라 예술은 조형예술이 되고, 시 또는 음악이 된다. 예술의 유일한 기원은 이념의 인식이며,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이 인식의 전달이다.28)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인식한 이념을 형상화시킬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은 천재에게만 주어진 것이기에 쇼펜하우어는 예술가를 천재와 동일시한다. 예술가는 온갖 우연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이념만 전달하므로 우리들은 자연과 세계에서 이념을 인식하는 것보다 예술작품을 통해 이념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미보다 자연미를 우위에 두고 있는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자연미보다 예술미를 더 우위에 두고 있다. 어쨌든 대상을 순수하게 관조함으로써 인식된 이념의 전달이 예술이라고 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을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가가 자신이 인식한 이념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베른하르트의 경우 관찰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베른하르트의 주인공들이 스스로를 버리고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관찰이라는 개념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순수관조로 이해할 수 있다. 1970년 이후 베른하르트의 화자들은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관찰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29) 그런데 베른하르트는 관찰예술30) 역시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음을 자서전 제 1편인 ?원인 Die Ursache?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은 외할아버지와 산책하던 일이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자연을 거닐었다. 그리고 거닐면서 관찰을 하곤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이 관찰을 나에게서 서서히 관찰예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31)
Meine schönsten Erinnerungen sind diese Spaziergänge mit meinem Großvater, stundenlange Wanderungen in der Natur und die auf diesen Wanderungen gemachten Beobachtungen, die er in mir nach und nach zur Beobachtungskunst hatte entwickeln können.
이 관찰예술의 백미는 병실에 누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왔다갔다하면서 주변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 세상의 실체를 인식한 후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죽음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자서전 제 3편 ?호흡?이다.
Ⅲ. ?호흡?- 관찰예술
1.
베른하르트의 자서전은 이중적인 관찰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자서전이란 과거와 현재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독특한 장르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를 되돌아(관찰)보면서 과거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회고한다는 점에서 자서전의 서술하는 자아는 본질적으로 관찰자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서술하는 자아가 자신의 과거를 관찰하면서 우연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필연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면 체험하는 자아는 주변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삶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경험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대상을 관조함으로써 이념을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면 베른하르트는 관찰을 통해 이 세상의 실체를 인식하게 된다. 해석하는 자아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른하르트에게 외할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런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베른하르트는 ?호흡?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를 길러준 사람은 그들(식구들)이 아니라 외할아버지였으며, 궁극적으로 나를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고 또 언제나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 드려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외할아버지다.(S. 26)
Nicht bei ihnen war ich ja aufgewachsen, sondern bei meinem Großvater, ihm verdanke ich alles, was mich schließlich lebensfähig und in hohem Maße auch immer wieder glücklich gemacht hatte, nicht ihnen.
베른하르트는 18세때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식료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중 늑막염에 걸려 잘츠부르크 주립 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베른하르트가 병원으로 실려오기 직전에 베른하르트의 외할아버지도 급성패혈증으로 입원하였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작가는 이 사건을 되씹어 보면서 이 때의 경험을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 계기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서술하는 자아는 외할아버지와 동시에 입원하게 된 이 우연한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외할아버지와 손자간의 사랑에 의한 필연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베른하르트는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자 자신도 외할아버지를 뒤따라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자신이 식료품 가게에서 무리하여 아플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미리 아파서 병원에 들어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외할아버지는 손자를 가르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서 병원(질병)의 실존적인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고 영원히 손자 곁을 떠나고 만다. 할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병원은 지옥이며 감옥이자 수도원이다. 병원은 “삶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고통의 공간”(S. 47)이다. 그러니까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사색공간”(S. 49)인 병원을 거치지 않으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색공간에서 우리는 이 사색공간의 바깥에 있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의식이며 모든 존재에 대한 의식”(S. 49)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아프지 않을 경우 상상으로나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한다. “병자는 혜안을 가진 자이며, 그 누구도 병자보다 이 세상을 더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법”(S. 48)이기 때문이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베른하르트에게 혜안을 가지도록 해주기 위해 베른하르트를 병원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질병이란 “정신과 영혼이 비약적인 발전”(S. 45)을 하기 위해 육체가 겪어야 하는 의식이므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반 치료기관인 동시에 인간 파괴기관”(S. 78)인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면 훌륭한 예술가(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손자를 격려해준다.
여기까지가 스승이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즉 어린 시절부터 손자를 예술가로 키우려고 했던 외할아버지의 역할은 예술가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고, 예술가가 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외할아버지는 베른하르트를 병원에 남겨두고 영원히 떠나고 만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없는 인생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베른하르트는 외할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병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외할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할아버지를 따라 병원에 온 것인데, 이제 혼자 병원에 남게 되자 병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제 할아버지께서 남긴 교훈을 스승으로 삼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혼자 힘으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체험하는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자 나는 오로지 건강을 되찾겠다는 목표에만 매진하게 되었다.(S. 83)
Die plötzlich durch den Tod des Großvaters klargewordene Tatsache, allein zu sein, hatte alle Lebenskräfte in mir sich auf dieses Ziel, gesund zu sein, konzentrieren lassen.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제 1의 인생을 끝내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제 2의 인생을 결심한 베른하르트는 마침내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살아서 병원을 떠나는 장면을 베른하르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 길은 내 인생의 한 시기를 마감하는 길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내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삶, 즉 나의 제 1의 인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정이 지금까지도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있다.(S. 95f)
...war diese Fahrt der Abschluß einer Periode gewesen, in welcher ich mein erstes und altes Leben, meine erste und alte Existenz abgeschlossen und, meiner wahrscheinlich wichtigsten Entscheidung gehorchend, mein neues Leben und meine neue Existenz angefangen hatte. Diese Entscheidung bestimmt bis heute alles, was mich betrifft.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삶이란 자기자신이 원하는 자신만의 삶을 지칭한다. 이렇게 본다면 “스승이자 구세주”(S. 86)였던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학교”(S. 84)를 졸업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긴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해방감을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난생 처음으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으며, 갑자기 느끼게 된 이 완전한 자유를 이용하여 내 인생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S. 83)
Der Tod des Großvaters, so entsetzlich er sich gezeigt und sich auf mich auswirken hatte müssen, war auch eine Befreiung gewesen. Zum erstenmal in meinem Leben war ich frei und hatte mir diese plötzlich empfundene totale Freiheit in einem, wie ich heute weiß, lebensrettenden Sinne nützlich gemacht.
2.
베른하르트의 세계는 쇼펜하우어보다 더 극단적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지옥이다. 그런데 자신이 겪고 있는 지옥 같은 병실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삶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획득하게 된다. 우선 병원으로 실려온 베른하르트는 죽음의 방32)으로 옮겨진다. 이 죽음의 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밤새 환기가 안 된 탓으로 환자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병실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또 약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호흡하기조차 곤란했다. 18세밖에 안된 소년에겐 고통과 악취로 진동하는 이 죽음의 방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몇 시간마다 한명꼴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죽음의 방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베른하르트는 모종의 “인지 메카니즘”(S. 36)을 가동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관찰이다. 관찰대상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지옥과도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관찰의 전제조건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내가 관찰해야 할 때는 언제나 반드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것,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 역겹기 짝이 없는 것 그리고 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지극히 당연한 현상임을 전제로 하고 시작하였다.(S. 36)
Ich mußte in meinen Betrachtungen und Beobachtungen davon ausgehen, daß auch das Fürchterlichste und das Entsetzlichste und das Abstoßendste und das Häßlichste das Selbstverständliche ist 〔...〕.
죽음의 방에서는 매일같이 환자들이 죽어나간다. 죽음의 방에 있는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처방해주는 약들은 치료제라기보다는 사망촉진제나 다를 바가 없으며, 환자들이 꽂고 있는 링거 역시 “최후의 순간을 그때그때 표시해주는 유리기구”(S. 52)에 불과하고 의사의 회진 역시 죽을 자를 “예비검열”(S. 51)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사는 무능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오진을 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오만불손하기 때문에 환자는 궁극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집단”(S. 55)인 셈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회진할 때도 환자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환자들을 내팽개칠 뿐이다. 병원이라는 사색공간에서 혜안을 가질 수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면서 매일 같이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베른하르트는 삶을 죽어 가는 과정이라고 인식하게 된다.33)
우리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죽는다고 말한다〔...〕. 일생 동안 진행되는 죽음의 과정 중에서 마지막 단계를 죽음이라고 부른다.(S. 64)
Wir sterben von dem Augenblick an, in welchem wir geboren werden, aber wir sagen erst, wir sterben, wenn wir am Ende dieses Prozesses angkommen sind〔...〕 Wir bezeichnen als Sterben die Endphase unseres lebenslänglichen Sterbeprozesses.
관찰은 계속된다. 죽음의 방에는 26개의 병상이 있다. 26명의 환자들은 모두가 포도당주사를 맞고 있다. 베른하르트는 링거 줄에 생명을 의존하고 누워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두각시 인형이 끈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 시체실 직원들이 시신을 들어내 가는 것을 소도구를 치우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결국 인간이란 “세상이라고는 부르는 꼭두각시 인형극장”(S. 41)에서 떠돌아다니다가 꼭두각시 인형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병이 다 나아갈 무렵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보고 겪었던 것을 분석함으로써 교훈을 얻으면서 즐거워하게 되었으며, 잘츠부르크 주립병원을 떠나기 직전에는 관찰의 달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끔찍함조차도 별것 아닌 일상적인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달인이 되어 있었다.(S. 90)
〔...〕jetzt auch schon in der Gewohnheit, selbst das Fürchterliche als eine leicht zu verarbeitende Alltäglichkeit hinter mich zu bringen, ein Meister〔...〕.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잘츠부르크 주립병원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의미를 깨닫고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찰을 하기 시작하였다. 베른하르트는 혜안을 가지고 지옥을 관찰하면서 건강을 회복해가지만 관찰 외에도 다른 방법도 동원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술은 이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베른하르트는 우선 예술 중에서도 음악을 치료수단으로 활용한다.
나는 구석자리 침대에 누워 다시 모짜르트와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곡을 떠올려 전 악장을 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는 구석침대에 누워 이렇게 상상으로 음악 듣는 것을 중요한 치료수단으로 삼았는데, 물론 음악이 가장 중요한 치료수단은 아니었다.(S. 38)
Ich hörte schon wieder Musik in meinem Eckbett, Mozart, Schubert, ich hatte schon wieder die Fähigkeit, aus mir heraus die Musik zu hören, ganze Sätze. Ich konnte die in meinem Eckbett aus mir heraus gehörte Musik zu einem, wenn nicht zu dem wichtigsten Mittel meines Heilungsprozesses machen.
음악 외에도 시 낭송과 외할아버지가 남긴 말씀도 중요한 치료수단이 된다. 그런데 베른하르트가 외할아버지 역시 작가34)요 철학자35)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가지는 모두 예술을 통한 지옥탈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술을 떠올리면서 죽음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침착하게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그 관찰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었다.
3.
잘츠부르크 주립병원은 지옥이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난 베른하르트는 경치가 아름다운 그로스그마인 호흡기 질환 요양소로 이송된다. 그러나 나중에 이 요양소가 사실은 결핵요양소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스그마인에는 두 부류의 환자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젊은 환자들이고, 또 한 부류는 살아나갈 가망이 없는 중환자들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서 처럼 죽음과 질병이 만연하는 고요한 산 속에서 환자들은 죽어나간다. 환자들 중 대부분이 결핵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전염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만다.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상태로 그로스그마인 요양소로 갔기 때문에 면역성이 없었던 그는 마침내 결핵 양성반응 판정을 받고 그라펜호프 결핵요양소로 향한다.36) 서술하는 화자는 그로스그마인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치료를 받아 건강을 되찾기 위해 그로스그마인에 간 것이 아니라 후에 내 평생의 병이 되고 말았던 심한 폐질환을 얻기 위해 갔었던 것 같았다.(S. 107)
...mein Gedanke ist heute tatsächlich, daß ich nach Großgmain gekommen bin, um mir meine spätere schwere Lungenkrankheit, meine Lebenskrankheit, zu holen, nicht um mich auszukurieren und gesund zu werden...
결과적으로 요양소에서 평생의 지병을 얻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건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요양소가 위치한 산속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지만 요양소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지옥의 구멍”(S. 118)이었다. 베른하르트는 이 지옥의 구멍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독서를 한다. 물론 요양소에서 처음으로 독서를 한 것은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후 어머니가 병실로 가져다주는 외할아버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서를 하여 노발리스, 몽테뉴, 파스칼,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함순과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괴테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독서가 궁극적으로는 지옥과도 같은 요양소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었다. 베르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곳에 언제나 버티고 서있는 절망의 구렁텅이를 건너, 모든 것을 파괴시키기만 하는 이 곳 분위기에서 나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다.(S. 120)
Mit dem Lesen habe ich die auch hier jederzeit offenen Abgründe überbrückt, mich aus den nur auf Zerstörung hin angelegten Stimmungen retten können.
물론 요양소에서의 일과는 독서 외에도 신문 읽기, 사색하기 그리고 병실동료인 건축공학도와 이곳에 만연에 있는 죽음과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요양소에서 독서를 한 것이 그 이후의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한다. 독서를 통해 문학이 인생에 미치는 의의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런 인식을 하게 된 것이 모두 외할아버지 덕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을 수학으로 여기고 현실에 적용시키면 문학이 인생을 수학적으로 풀어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을 고급 수학예술이라 칭하고, 완전히 통달하게 되면 최고의 수학예술로 그리고 또 독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로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인식하게 된 것을 외할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S. 119)
Diese Entdeckung, daß die Literatur die mathematische Lösung des Lebens und in jedem Augenblick auch der eigenen Existenz bewirken kann, wenn sie als Mathematik in Gang gesetzt und betrieben wird, also mit der Zeit als eine höhere, schließlich die höchste mathematische Kunst, die wir erst dann, wenn wir sie ganz beherrschen, als Lesen bezeichnen können, hatte ich erst nach dem Tod des Großvaters machen können, diesen Gedanken und diese Erkenntnis verdanke ich seinem Tod.
Ⅳ. 나오는 말
본고에서 베른하르트의 관찰예술을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으로 고찰하면서 자서전 제 3편 ?호흡?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베른하르트의 자서전은 전통적인 자서전과는 달리 고통의 자서전이다.37) 베른하르트가 고통스러운 삶을 관찰, 음악, 문학으로 극복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베른하르트를 쇼펜하우어의 충실한 제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통과 공포의 연속이며, 그 고통과 공포의 근원이 바로 의지에 있다. 그런데 이 세계의 고통이나 공포는 개체의 죽음에 의해서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의지가 객관화된 한 형태로서의 개체뿐이지, 세계고의 근원인 의지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의 고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두 가지로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성자처럼 열반의 경지에 들어선 종교적 초월의 길이 있고, 두 번째는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예술에 의한 구원가능성이다. 본고에서는 베른하르트가 한편으론 관찰을 통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예술(음악,문학)을 통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내고 있는 과정을 살펴보았지만 베른하르트 작품에 나타난 예술(음악)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와 토마스 베른하르트 II」에서 다루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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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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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Schopenhauer und Thomas Bernhard I
Cho, Hyun-Chon (Pusan Univ.)
In der vorliegenden Arbeit wird versucht, anhand der dritten autobiographischen Erzählung von Thomas Bernhard ?Der Atem? die Kunstauffassung von Schopenhauer aufzuzeigen. Schopenhauer erklärt das Ding an sich von Kant als Wille zum Leben, dem das Leiden und die Furcht des Lebens zugrundeliegt. Nach Schopenhauer schwingt unser Leben, gleich dem Pendel, zwischen dem Schmerz und der Langeweile. Nur durch die Verneinung des Willens kann man dem Weltschmerz entgehen. Für das Individuum gibt es nur ?die dem Satz vom Grunde unterworfene Erkenntnis?, durch die die Erscheinungen, nicht aber das dahinterliegende Wesentliche erfasst werden können. Dieses Wesentliche nennt Schopenhauer die Platonischen Ideen, die adäquate Objektivationen des Willens seien. Der einzige Ursrprung der Kunst ist die Erkenntnis der Ideen und das einzige Ziel der Kunst ist die Mitteilung dieser Erkenntnis. Die Kunst zielt auf die Mitteilung der durch reine Kontemplation des Lebens gewonnenen ewigen Ideen.
Thomas Bernhard kann insofern als ein Schüler Schopenhauers angesehen werden, als er in seinem Werk behauptet, dass Unglück Exitenzbeweis ist. In seinem Werk versucht Bernhard, durch die Beobachtung, die mit der reinen Kontemplation von Schopenhauer gleichgesetzt werden darf, die Leiden und Qualen des Lebens zu überwinden. So nennt er seine Kunst die Beobachtungskunst, die auf die Lehre des Grossvaters zurückgeht. Genauso wie Schopenhauer benutzt Bernhard neben der Beobachtung die Kunst als Überwindungsmittel. Dies werde ich in meiner Arbeit「Schopenhauer und Thomas Bernhard II」behandeln.
[출처] 쇼펜하우어와 토마스 베른하르트-조현천|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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