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A.N.Whitehead의 유기체철학 내에서의 미적 경험에 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3. 12. 31. 08:39

 

A.N.Whitehead의 유기체철학 내에서의 미적 경험에 대한 연구

 

- 尹 自 貞(서울大)

 

 

 

 

이 논문에서 자주 인용되는 화이트헤드 저작들의 약칭은 다음과 같다.

 

<AI>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The Macmillan Co., 1952)

<SMW>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New York: The Macmillan Co., 1925)

<RM> Religion in the Making (New York: The Macmillan Co., 1926)

<SME> Symbolism: Its Meaning and Effect (New York: The Macmillan Co., 1927)

<MT> Modes of Thought (New York: The Macmillan Co., 1938)

<PR>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New York: The Macmillan Co., 1960)

<CN>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Univ. Press, 1920)

<PNK>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Cambridge Univ. Press, 1919)

<ESP> Essays in Science and Philosophy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47)

 

 

국문초록

 

 

이 논문에서 필자는 신실재론의 대표적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얘기되는 A. N. 화이트헤드의 이른바 유기체철학을 통해 미적 경험의 존재론적 특성을 살핀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경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우주론’의 체계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경험을 적절히 설명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경험은 곧 실재(reality)이다. 그리고 실재론자로서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는 단순한 주관적인 관념(표상)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있는’ 본질로써, 이 계기들은 동시에 존재 전체의 총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을 ‘느끼고 있다.’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종의 역동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인다. ‘과정’(process)인 것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이 실재가 동시에 끊임없이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보며, 나아가 그 말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미’는 ‘가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실재’가 곧 ‘가치’이고 ‘가치’는 또 동시에 ‘미’이므로 ‘실재’는 곧 ‘미’가 된다. 그리고 ‘실재’의 자리에 ‘경험’이 대입되어도 같은 얘기가 성립한다. 굳이 도식화해 본다면 이는 <‘실재’(혹은 ‘경험’)=‘가치’=‘미’>의 관계가 된다.

 

결국 우리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의 현실적 사실들은 곧 미적인 사실들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미주의’라고 규정한다든지 그의 철학체계 자체가 곧 미학이라는 얘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말로 그의 미학사상에 대한 고찰은 그의 ‘형이상학’ 혹은 ‘우주론’ 자체에 대한 고찰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상에 대한 상기의 윤곽 속에서 필자는 특히 다음 두가지 점을 중시한다. 첫째, 모든 사물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확신하면서 그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이 거기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바의 관념들의 어떤 포괄적인 체계(즉, 궁극적인 일반성)를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의 기반은 ‘미적 경험’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적 경험은 경험 일반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경험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선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조건들(범주적 제약들 categoreal obligations)이 있는데, 이 조건들은 일반적으로 미학자들이 미적 경험을 특별히 설명코자 할 때 호소하게 되는 바로 그 조건들과 똑같은 유형이며, 그래서 그가 말하는 범주적 제약들의 목록이 경험을 해석하는 데 알맞고 또 경험과 일치하는 한에서 그는 미적경험의 보편적인 속성을 동시에 특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은 곧 경험일반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는 것이자 연속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미적 경험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하나는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이 어떻게 철학적 탐구의 정당한 토픽으로서 역할하는지 그리고 인간 경험의 이 측면이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체계와 조응하는지를 알아보는 측면이다. 여기서는 그의 우주론의 전체 틀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위상과 더불어 특히 그가 ‘미적 경험’이라고 할 때의 이 ‘미적’의 의미를 그가 말하는 ‘패턴’ 혹은 ‘구조’의 개념과 관련하여 살펴진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현대철학에서 강조되어온 의식적인 감각지각의 우선성에 반하여 모든 경험의 근본으로 화이트헤드가 생각한 가치경험을 대표하는 미적 경험이 과연 그의 경험론의 주도 개념이랄 수 있는 두가지 지각양식(인과적 효능성 및 표상적 지시성) 및 이의 상징적 지시성 개념과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검토한다. 내용적으로 이는 후자의 개념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고찰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덧붙여서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미적 경험론이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확인한다.

 

이 모든 고찰을 통해 필자는 미적 경험은 인간의 고유한 경험양식이면서 동시에 그 경험의 속성은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주요어: 화이트헤드, 미적 경험, 현실적 존재,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

표상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 상징적 지시성

목 차

 

 

국문초록

 

머 리 말 1

 

제1장 화이트헤드의 철학관: 화이트헤드와 현대 영미철학 간의 대비 12

1. 분석철학의 반(反)형이상학적 입장 13

2.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옹호’ 22

3. 사변철학의 방법과 조건 23

4. 현대 영미철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 29

 

제2장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 41

1.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42

(1) 현대 과학이 요청하는 개념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43

(2) 과정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45

2.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 47

(1) 현실적 존재의 한정 형식으로서의 영원적 객체 49

(2) 가능태로서의 영원적 객체 50

3. 파지(prehension) 53

(1) 합생(concrescence),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 54

(2) 긍정적 파지―느낌―와 부정적 파지 58

4. 신 63

(1) 具體化의 原理(the principle of concretion)로서의 신 63

(2)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 65

 

제3장 화이트헤드의 체계 내에서의 인간의 경험 70

1. 지각의 두 양식(인과적 효능성의 양식과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과

전통적 경험론 70

2. 정서성(혹은 ‘느낌’)으로서의 인간 경험의 가치성 85

 

제4장 미적 경험 96

1.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서의 미적 경험 97

2. 가치로서의 미 100

3. 미적 경험의 통일성 104

4. 두가지 지각양식의 상징적 지시성과 미적 경험 108

5. 미적 경험과 예술 122

 

맺 음 말 129

 

참고문헌 149

 

ABSTRACT 156

머 리 말

 

 

본 논문은 20세기 신실재론의 대표적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얘기되는 화이트헤드(1861-1947)의 이른바 유기체철학을 통해 미적 경험의 몇가지 본질적인 국면들을 살펴보고자는 목적을 지닌다. 예술 혹은 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일반적으로 ‘매혹’의 계기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러한 매혹적 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의 문제는 미학의 역사 전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과 미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핵심문제로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이 미적 경험의 문제를 필자가 특히 화이트헤드라는 사상가의 견해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견해가 인간 경험의 일반적 보편적 성격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미적 경험의 본질을 잘 설명해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는 분명 현대를 대표할 중요인물 중의 한명인데도 그 업적에 비하면 그렇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다. 국내철학계에서는 특히 화이트헤드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 기호논리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저서 ?수학원리?(러셀과 공저)의 저자 정도로 기억할 뿐이다. 수리논리학자로서, 자연(과학)철학자로서, 그리고 형이상학자로서 철학의 전영역에 걸친 그의 방대한 업적과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극히 난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난해성의 일차적 요인으로는, 그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이론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사고방식과 그 기초개념들을 상당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든지, 특히 그가 구사하고 있는 핵심 용어들이 철학사상(哲學史上) 거의 전례가 없는 용어들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그의 사상의 심오함과 서술상의 특수성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이트헤드 철학사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의 미학사상에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미학적 토픽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서 그 전모를 추스러내기가 더욱 곤란한 점이 있기도 하다. 사실 그는 따로 미학의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 일반은 어떤 미학이론을 분명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어떤 언급들에서는 강력하게 시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M. C. 비어즐리는 자신의 저서 ?미학사?에서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적 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1925)의 제 5장에서 나타나는, 시인은 세계의 근본적인 질적 특성들을 볼 줄 아는 눈과 경험의 통일성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논증, ?관념의 모험 Adventure of Ideas?(1933)의 제 17장, 제 18장에서의 그의 치밀한 미 분석,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형이상학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 ‘영원적 객체,’ ‘수용,’ ‘파지(把持),’ ‘창조성’ 등의 준(準)미적 범주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그가 미처 미학에 관해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철학체계 자체가 어떤 미학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충분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1)

 

여기서 비어즐리는 화이트헤드가 ‘시간이 없어서’ 미학책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화이트헤드 자신의 언급들, 예컨대 “현재로서 가장 유익하면서도 또 가장 무시되고 있는 출발점이 미학이라고 불리는 가치이론이라는 것이 나 자신의 신념이다”2)는 언급과 “참으로, 미학의 주제가 이미 충분히 탐구되었는데, 더 이상 논의할 무엇이 더 남아있는지 의심스럽다”3) 는 언급 등을 빌어 유추해보면 그는 자신이 쓴 기왕의 책에서 이미 미학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별도의 책이 필요없다고 믿었던 것 같다.4)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상의 기본은 그럼 무엇인가. 본 논문의 의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도한 단순화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오해나 오류를 무릅쓰고 그의 철학 및 미학사상(특히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의 대강을 먼저 언급코자 한다.

 

필자가 보기에 화이트헤드 미학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침 위에서 비어즐리가 하고 있는 얘기 중에서 특히 다음 구절, 즉 “그의 철학체계 ‘자체’가 어떤 미학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구절이 시사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미학사상은 전체 철학사상의 한 항목으로 첨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사상 전체가 동시에 어떤 미학사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철학을 ‘유미주의’(aestheticism)라고 부른다는 버트람 모리스의 지적은 바로 이 지점을 언급한 것이다.5) 여기서 우리는 왜 그의 철학 전체가 ‘유미주의’로 불리는가, 또 그럴 때 그 ‘유미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답은 그의 철학의 근본취지와 맞물린 곳에 있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경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우주론’의 체계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경험을 적절히 설명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에 대한 불신의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서, 그러나 지식의 중요한 산출방법으로서 또는 철학적 구성의 방법으로서 사변철학이 갖는 미덕을 강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변철학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가 거기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바의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 논리적 필연적 체계를 만들려는 노력이다.’6) 여기서 그는 자신의 철학이 사변철학이며, 그것이 경험의 어떤 해석체계를 만드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경험은 곧 실재(reality)이다. 예컨대 저 18세기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말하는 경험과는 달리,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경험의 모습은 그대로 실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라고 본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 (‘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어떤 사물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 (drops of experience)이다.(인용자 강조)7)

 

이 인용문이 말해주듯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경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험에 대한 이론과 실재에 대한 이론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한 이론가의 실재에 대한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경험되는 사물들에 대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8)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유미주의’는 바로 이 실재의 어떤 근원적인 모양새에서 비롯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실재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그것의 모든 구성인자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재론자로서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는 단순한 주관적인 관념(표상)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있는’ 본질로써, 즉 자기 자신이 라이프니츠의 단자(單子, Monade)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실재적으로 있는 계기’들로써 이룩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계기들은 동시에 존재 전체의 총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을 ‘느끼고 있다.’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종의 역동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인다. ‘과정’(process)인 것이다. “구체적 사실, 그것은 유기체인데,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성격의 완전한 표현이어야 한다”9)는 언급이나 “구체적인 사실은 과정이며, 과정은 곧 그 아래에 놓여있는 파지(prehension)의 활동을, 그리고 실재화되는 파지적 사건을 나타낸다”10) 는 언급은 이러한 점을 요약한 말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이 실재가 동시에 끊임없이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보며, 나아가 그 말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미’는 ‘가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실재’가 곧 ‘가치’이고 ‘가치’는 또 동시에 ‘미’이므로 ‘실재’는 곧 ‘미’가 된다. 그리고 ‘실재’의 자리에 ‘경험’이 대입되어도 같은 얘기가 성립한다. 굳이 도식화해 본다면 이는 <‘실재’(혹은 ‘경험’) = ‘가치’ = ‘미’>의 관계가 된다. ‘가치란 내가 사건의 내적 현실(intrinsic reality of event)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11) ‘존재는 그 본성에 있어 가치강도를 유지시키고 있다. 또한 어떠한 단위존재도 타자와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각각의 단위존재는 그 나름의 권리를 가지고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가치강도를 유지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은 가치강도를 우주와 공유하게 된다’12), ‘현실적 사실은 곧 미적 경험의 사실이다’13)는 등의 표현이 이 도식을 뒷받침한다.

 

D. M. 보스킬은 이를 두고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혹은 우주론의 체계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체계를 윤리적이라고 믿었던 바와 비슷한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미적인 것이다”14)고 말한다. 비슷한 인식 하에서 E. H. 피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가치형식은 미적인 것이며, 가치를 성취하는데 실패하는 계기란 없다. 사실상 하나의 계기는 가치의 성취 외의 다른 무엇을 ‘의도할’ 수조차 없다. 미적인 종합의 비성취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15)

 

결국 우리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의 현실적 사실들은 곧 미적인 사실들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16)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미주의’라고 규정한다든지 그의 철학체계 자체가 곧 미학이라는 얘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미학이 예술의 문제만을 주로 다루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철학’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미학은 현실성의 가장 단순한 단위로부터 가장 복잡한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고, 우주 전체에 걸쳐 상관물을 갖는 그러한 것이다. 다른 말로 그의 미학사상에 대한 고찰은 그의 ‘형이상학’ 혹은 ‘우주론’ 자체에 대한 고찰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상에 대한 상기의 윤곽 속에서 필자는 특히 다음 두가지 점을 중시한다. 그 하나는, 모든 사물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확신하면서 그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이 거기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바의 관념들의 어떤 포괄적인 체계(즉, 궁극적인 일반성)를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의 기반은, 위의 도식이 암시하는 바, ‘미적 경험’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미적 경험을 그 자신이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 생각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 본다는 얘기인데, 필자가 이 점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말하는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은 곧 그가 말하는 실재 자체에 대한 고찰과 상호연결되어 있음을 말할려는 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미적 경험은 경험 일반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험과 미적 경험 간의 도식적인 이분법은, 예컨대 존 듀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17)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에서도 있을 수 없다. 그는 ‘미적 경험의 속성’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경험의 미적 속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두 얘기는, 경험과 미적 경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경험과 미적 경험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경험을 미적 경험으로 만드는 어떤 특수한 조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는 결코 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경험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선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조건들(범주적 제약들 categoreal obligations)이 있는데, 이 조건들은 일반적으로 미학자들이 미적 경험을 특별히 설명코자 할 때 호소하게 되는 바로 그 조건들과 똑같은 유형이며, 그래서 그가 말하는 범주적 제약들의 목록이 경험을 해석하는 데 알맞고 또 경험과 일치하는 한에서 그는 미적경험의 보편적인 속성을 동시에 특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은 곧 경험일반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는 것이자 연속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논문의 주제로 상정하는 점은 그럼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필자는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형이상학의 우주론적 구상 속에서 특히 인간 경험의 근원적 구조를 두가지 지각양식(인과적 효능성의 양식과 표상적 직접성의 양식)에 대한 구분을 통해 포착해 내고,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양식이 인간 경험의 토대적 차원에 놓여 있음을 설명하면서, 이 차원에서 이미 ‘경험’과 ‘가치’와 ‘미’의 근원적인 상호연루성을 포착, 마침내 우리가 ‘미적’이라고 부르는 경험양식이 갖는 보편적 우주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두가지 지각양식의 개념을 중심으로, 미적 경험이 단순히 주관적이고 변덕스런 정신적 분비물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우주 내의 가치창출의 場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본 논문의 구성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코자 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미적 경험에의 주목은 기본적으로 경험 일반에의 주목을 선행요건으로 요구한다. 동시에 경험 일반에의 주목은 곧 실재 그 자체에의 주목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는 그가 말하는 미적 경험의 속성에 대해 검토할려면 실재 그 자체에 대한 그의 견해가 동시에 검토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한편으로 그에게 있어서 실재의 기본 성격은 실재가 내재적으로 언제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가치경험에 대한 부단한 강조야말로 화이트헤드 사상의 제 1의 요체인 것이다. 그에게서 존재의 본질은 언제나 가치경험에서 발견된다. 가치경험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의 중심축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제 1장에서는 가치정향성이라고 하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이 문제의식을 설득하고 관철시키기 위하여 그가 취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그가 왜 ‘형이상학’을 요청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자는 적극적으로 그의 입장을 현대 영미철학(분석철학)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필자가 화이트헤드를 특별히 현대 영미철학과 대비시킬려는 이유는 후자의 반(反)형이상학적 입장이 근본적으로 전자의 그것과 상반되고, 그것은 특히 경험에 대한 견해에서 두드러지게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양자의 비교 속에서 화이트헤드의 기본입장이 보다 잘 부각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현대 영미철학의 경험이론들에서는 의식적인 인간경험, 더 구체적으로는 소위 ‘의식적인 감각지각’(conscious sense-perception)에서 발견되는 경험양식만이 철학적 주목의 중심이라는 암암리의 혹은 공공연한 전제 하에(이 전제의 결정적인 근거는,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로크나 흄으로 대표되는 18세기 영국의 경험론 철학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전제의 편협함에 대한 지적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립한다) 미적 경험과 같은 가치경험은 대체로 무시하는데 반해, 화이트헤드는 철저하게 후자에 주목한다. 물론 현대의 영미철학이 가치경험(여기에는 미적 경험과 더불어 흔히 도덕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도 거론된다. 도덕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도 화이트헤드의 ‘유미주의적’ 경험관에 따르면 일종의 넓은 의미에서의 미적 경험이다)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영미철학이 ‘가치’를 다루는 경우 그것은 대부분 가치의 ‘경험’이 아니라 가치에 ‘관한 이야기’ 속에 포함된 언어나 논리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의 ‘경험’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연의 소치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양자 간의 철학적 문제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 장에서는 인간의 경험일반에 대해 철학의 주된 방법으로서 논리적 혹은 언어적 분석에 초점을 맟추는, 혹은 인간경험의 파라다임으로서 의식적인 감각지각에 초점을 맟추는 현대 영미철학의 주류를 거울로 삼아, 논리와 언어는 경험의 보다 넓은 배경으로부터의 추상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논리와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할 때는 사유의 넓은 해석적인 틀 위에서 보아야 하며 철학의 주된 방법으로서 분석적인 방법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의식적인 감각지각이 세계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올바른 원천을 제공한다는 ‘무비판적인’ 가정은 가치와 관련되는 저 경험유형들을 포함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화이트헤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강조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유기체철학으로 불리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구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미적 경험의 가치성은 결국 실재 자체의 가치성에서 오는 것이므로, 실재 자체가 구현하는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결국 그의 형이상학의 전모를 그 기본 구도상에서나마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의 기본 구도는 특히 그의 저서 ?과정과 실재?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8개의 현존(existence) 범주―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 파지(Prehensions), 결합체(Nexus),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s),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s), 명제(Propositions), 다수성(Multiplicities), 대비(Contrasts)―를 설정하고서,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개진한다.18) 그런데 이 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은 현실적 존재, 영원적 객체, 파지, 신이라는 4개의 범주이다. (신은 현실적 존재의 일종이지만 다른 현실적 존재들과 구별되는 특수성 때문에 따로 하나의 범주로서 취급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이 네 개의 기본 범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의 형이상학의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인 현실적 존재의 범주를 고찰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는 현실적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미관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결정되어가는 과정에 기능하는 궁극적인 존재 유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현실적 존재가 자신을 결정하는 과정에 기능함으로써 개별적인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특정형식 혹은 한정성이 요구된다. 즉 현실적 존재들은 자신이 지니는 한정형식을 통해서만 여타의 현실태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한정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태들의 개체성이 요구하는 한정형식이 바로 영원적 객체이다.

 

영원적 객체는 그 자체로서는 특정 현실태의 진입과 관련하여 중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순수 가능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상 현실태를 위한 가능태이다. 이와 같은 가능태로서의 영원적 객체와 현실태를 관계시키고, 현실태와 현실태를 연결시키는 작용이 바로 현실적 존재의 파지작용이다.

 

개개의 현실적 존재는 파지를 통해서 자신의 여건을 자신의 것으로 합생하며, 이와 같은 합생이 완성되는 동시에 자신은 다른 현실적 존재에 대한 파지의 여건이 된다. 이와 같이 현실적 존재가 하나의 다른 현실적 존재에로 이행함으로써 모든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 불멸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객체적 불멸성은 오로지 신이라는 특별한 현실적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신은 모든 순수한 가능태로서의 영원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 평가를 자신의 원초적 본성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개개의 파생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자신의 주체적 한정형식으로서의 영원적 객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은 구체화의 원리이다. 또한 이와 같이 신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다시 신에 의해 파지됨으로써 신 속에서 그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상호 연관적인 이들 범주들은 이렇듯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유기체철학의 전체상을 드러내고 있다. 본 장에서는 그 전체상의 골격을 그려내고자 한다.

 

제 3장에서는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 속에서 인간 경험의 가치성이, 특히 ‘지각론’에 입각하여 어떻게 해명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대철학에서 인간 경험의 가치적 측면이 무시되어온 것이 로크나 흄의 경험론에 기인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보고 이들의 경험론을 교정하는 일을 경험의 가치성 회복을 위한 중요한 단초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특히 지각의 두가지 양식(인과적 효능성causal efficacy과 제시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의 개념 및 이 두 양식 간의 상징적 지시성(symbolic reference)의 개념을 통해, 근원적 차원에서 인간의 경험은 언제나 가치경험으로 존립하고 있음을 확인해내는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적 차원’이란 인간의 경험이 의식(意識)의 차원으로 떠오르기 이전의 일종의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화이트헤드는 이 차원에서 성립하는 인간 경험의 가치성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특히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에 대한 해명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지각의 두가지 양식 개념을 살펴보고, 로크와 흄의 경험론이 경험의 파악 방식에 있어서 어떠한 한계를 노정하는 것인지를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확인한 다음,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설정한 것들에 대한 검토작업을 행하고자 한다. 제 2장에서 살펴본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와 관련하여, 그에게 있어서 인간경험의 가치속성의 구체적 내용은 ‘情緖性’에 있다는 점과 이 情緖性이란 현실적 존재의 근원적 속성으로서의 ‘파지적 속성’에 근원을 두는 것이라는 점이 여기서 살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 4장에서는 앞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미적 경험’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얽혀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일반적 문맥에서는 경험과 미적 경험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의 성격이 고찰되는 앞 장에서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미적 경험에 부여하는 특수한 위상과 존재론적 자격을 지각의 두가지 양식 개념을 통해 확인해 내고자 한다.

필자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데, 그 하나는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이 어떻게 철학적 탐구의 정당한 토픽으로서 역할하는지 그리고 인간 경험의 이 측면이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체계와 조응하는지를 알아보는 측면이다. 그의 우주론의 전체 틀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위상과 더불어 특히 그가 ‘미적 경험’이라고 할 때의 이 ‘미적’의 의미를 앞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살펴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철학에서 강조되어온 의식적인 감각지각의 우선성에 반하여 모든 경험의 근본으로 화이트헤드가 생각한 가치경험을 대표하는 미적 경험이 과연 그의 경험론의 주도 개념이랄 수 있는 두가지 지각 양식 및 이의 상징적 지시성 개념과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내용적으로 이는 후자의 개념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고찰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덧붙여서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미적 경험론이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이 모든 고찰을 통해 필자는 미적 경험은 인간의 고유한 경험양식이면서 동시에 그 경험의 속성은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코자 한다.

제1장 화이트헤드의 철학관: 화이트헤드와 현대 영미철학 간의 대비

 

 

일반적으로 화이트헤드철학은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러셀 등과 함께 영국 신실재론에 속하는가 하면 플라톤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흔적도 많이 보이고 있으며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후설, 월리엄 제임스, 크로체 등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의 철학의 이 ‘다양한 얼굴’은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오해의 소지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그가 자신의 사상의 탑을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참조하고 조회한 당대 및 기왕의 사상이 넓고 깊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한 증거로 일단 받아들인다.19)

 

그러나 한편으로, 적어도 ‘가치정향성’이라고 하는 성격에 있어서 그의 사유는 대단히 ‘일목요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조어광(造語狂)을 연상케 하는 신조어(新造語)들과 잠언(箴言)스타일의 난해한 표현들로 가득차 있는 그의 저서들이 그의 사유내용에 접근하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고 있고, 보헨스키(I. M. Bochenski)는 그래서 화이트헤드를 현대의 가장 뛰어난 앵글로색슨계 철학자로 평가하면서도 서구철학사에서 그의 정신사상의 위치를 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20) 이 ‘일목요연함’은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점은 흔히 ‘분석철학’이라고 통칭되는 20세기 영미철학의 주도적 흐름과 비교적 뚜렷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필자는 그 대비지점에 대한 확인작업을 통해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입장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1. 분석철학의 반(反)형이상학적 입장

 

주지하다시피 금세기로 접어들어 철학은 전통적인 방법과 당시까지의 지배적인 경향(흔히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일컬어지는)에 대한 반작용과 반항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유럽대륙에서 그러한 반항이 주로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형식을 취한데 반해 영미에서의 그것은 논리실증주의, 논리적 경험론, 언어분석 등의 형식을 취해 왔다. 이들 영미에서의 흐름은 편의상 흔히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으로 통칭되고 있다. ‘분석철학’이라는 어구는 그러나 대단히 넓은 범위의 철학자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이 운동의 정확한 특징을 전체로서 제시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A. 카플란(Abraham Kaplan)의 언급이 시사하는 바, 대략적으로라면 공통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1960년에 ‘분석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한 강연에서 그는 이 어구가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논리적 경험론(logical empiricism), 과학적 경험론(scientific empiricism), 옥스포드 분석학파(Oxford analysis), 캠브리지 분석학파(Cambridge analysis) 및 일상언어철학(ordinary language philosophy)과 같은 여러 다양한 입장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 표현을 그것이 그 운동의 특성이 되는 철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한 개념을 전체적으로 제안하기 때문에 선택한다. 그 철학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초과학적인 진리의 집합도 아니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라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며, 기본적으로 일종의 논리-언어적 분석이다.21)

 

그러면서 카플란은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가 분석철학이라는 표현으로 느슨하게 지시하고 있는 이 광범위한 철학적 운동이 영미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22)

 

필자는 ‘영미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이면서 동시에 ‘기본적으로 일종의 논리-언어적 분석’인 이 분석철학의 전모를 살필려고 애쓰지는 않겠다. (그 다양한 분파의 전체 내용을 살피는 일은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지면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철학사적 문맥에서 인정되는 이 철학의 두드러진 몇가지 특징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그것은 분석철학이 반형이상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석철학이 크게 보아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경험론 철학의 맥을 잇고 있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의 경험론 철학은 당시까지의 전통철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경험론 철학이 공격한 전통철학은

 

(서양 유럽의 전통철학은) 우리의 감관에 의해서 우리에게 인식되고 과학에 의해서 탐구되는 친숙한 사물세계를 초월해서 가치를 포함하는 또 다른 질서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 중 선, 미, 진이 현저한 것이며, 이들이 윤리학, 미학, 논리학을 각각 구성한다. 다른 말로 해서 그 까닭은, 우주는 어떤 것들은 올바르고 어떤 것들은 그른 도덕적 질서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어떤 것들은 아름답고 어떤 것들은 추한 미적 질서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어떤 판단들은 참되고 어떤 판단들은 거짓되다고 하는, 진리와 같은 그런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추가하여 우주는 또한 신성을 포함하며, 신성은 가치들―종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는 방식들이라고 설명하는데―, 즉 선, 진, 미의 원천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친숙한 세계를 초월하고 그 근거가 되는 실재에 대한 연구―은 부분적으로는 가치와 신에 대한 연구이다.23)

 

그러나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과 같은 사상가들로 대표되는 경험론 철학은 형이상학 및 한갖 사변적인 사고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적이었고 인식은 우리의 감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로크는 세상에 태어날 때의 인간의 마음은 백지상태이고 이 위에 바깥에서 오는 인상이 기록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인식은 감각으로부터 나오고, 기억의 도움을 받는 반성을 통하여 감각들은 여러가지 학문분야 또는 인식체계로 조직된다. 타고난, 즉 본유적인 관념들의 존재는 부정되며 보편자(혹은 플라톤식의 이데아)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차라리 ‘오성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오성의 발명품이고 창조물’인 것으로 용인된다.

흄은 로크의 입장을 더욱 철저히 밀고 나아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지각들의 묶음(다발)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관념들은 단순감각들의 모사이고 복합관념들은 단순관념들의 결합으로부터 혹은 복합인상으로부터 형성된다. 흄의 입장의 일반적 취지는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관념들이 있다는 생각(위의 인용문을 빌어 말하자면 ‘사물세계를 초월해서 가치를 포함하는 또 다른 질서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생각)의 타당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분히 ‘사실정향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론은 19, 20세기에 과학의 부흥과 그 영향력 하에서, 그리고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 속에서 커다란 지지세력을 얻게 된다.

 

적어도 그 기원을 달리하는 세 그룹이 경험적 전통을 견지했고 지지했다. 이들은 19세기의 프랑스의 실증주의, 비엔나 학단(Vienna Circle)의 논리적 실증주의, 영국의 철학적 분석학파였다. (여기서 말하는 분석철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뒤의 두 그룹이다.) 이들 그룹은 그때그때의 시류에 따라 부침을 겪는 과정에서 서로서로를 지지하거나 강화하면서 전체적으로 분석철학의 특유한 사고유형을 공고화했다. 필자는 그 사고유형의 내용을 가늠하기 위해 위 세 그룹의 입장을 가능한 한 그 철학적 근본전제에 주목하여 요약해 본다.

 

① 프랑스의 실증주의

 

인식을 감각지각과 객관적 과학의 탐구에 기초지우려는 경향과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폐기하려는 경향은 프랑스에서 실증주의로 알려진 입장을 낳았다. 실증주의는 인식을 관찰가능한 사실들과 이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진술에 한정하고자 한다. 대표적 인물인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인간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었는데, 각 시기는 어떤 사고방식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첫번째 시기는 신학적 시기로서, 거기에서는 상상력이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정령신앙적(animistic)이거나 초자연적인 용어로 정의되는 세계와 함께 사건들은 정령이나 신들의 통제나 개입에 의해서 설명된다. 두번째 시기는 형이상학적 시기로서, 이 시기에서는 사건들은 원인, 내적 원리, 실체 등과 같은 추상물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들 추상물이 초자연적인 작용들을 대신한 것이다. 세번째 혹은 ‘실증적’ 시기는 최종적이며 최고의 시기이다. 이것은 과학적 서술의 시기이며, 이러한 서술은 관찰가능하고 측량가능한 사실들을 넘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은 원인, 숙명,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발경하려는 자신의 보다 앞선 노력들을 포기한다. 이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이 세계에 한정시켜야만 한다. 실증주의는 인간 사고의 최종적인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의 과학의 과업은 인간을 위해 현 세계를 안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학파의 사고에 따르면 인식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 물질적 세계와 사회에서의 조건들을 변형시키는 데 이 인식이 도움을 주기 때문일 뿐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은 현상 및 법칙들(그 아래에서 사물들이 작용하는 법칙들)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초자연적인 종교와 형이상학적 통일성은 인간과 사회적 진보의 이름으로 배격된다. 경험된 질서를 넘어서는 실재에 대해 실증주의가 취하는 부정적 태도는 실용주의, 도구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행동주의, 언어적 분석학파 등 현대의 여러 학파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② 논리적 실증주의와 비엔나 학파

 

크게는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와 1922년에 마하를 승계하여 비엔나 대학의 귀납과학 철학의 교수가 되었던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때문에, 실증주의 그룹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다, 나중에는 서구 곳곳에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특히 활동적이었던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과학자, 수학자, 혹은 기호논리학과 과학적 방법론에서 자신들의 주요한 전문적인 작업을 수행했던 사람들이었다. 초기의 실증주의가 19세기의 과학에 근거해 있었던 반면에, 새로운 발전단계들은 보다 최근의 논리적 과학적 개념들에 의존해 있었다. 그 운동은 ‘비엔나 학단,’24) ‘논리적 실증주의,’ ‘신실증주의,’ ‘논리적 경험론,’ ‘과학적 경험론,’ ‘과학 통일 운동’ 등 여러가지로 지칭되어 왔다.

 

이 운동의 구성원들은 모든 과학을 위한 안전한 지적 기초를 세우는 데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느낀 바로는 여러 과학은 비록 지금은 고도로 통일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과학에―이들 중 하나 혹은 단지 소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하나의 포괄적인 술어적 개념적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특수한 과학들의 언어에 대한 연구와 보편적 과학언어를 발견하리라는 기대 속에서 언어 일반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운동의 구성원들은 언어, 특히 과학언어를 분석하는 일이 철학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모든 학문적인 명제의 의미는 감각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감각자료, sense data)25)을 기술하고 이것을 다시 손질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는 데에만 이 명제들을 검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공유한다. 이것은 ‘감각적인 지각이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흄의 근본명제의 직접적 번안이다. 이런 것을 넘어서서 존재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그런 선천적인 진리는 없다. 우리들의 개념, 명제, 그리고 소위 진리는 편의상으로 가정한 것이며, 이런 가정은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것인 감각에 따라, 증명되거나 증명되지 못하거나 한다. 비록 선천적인 것(Apriori)에 관한 말은 하더라도, 이것 역시 기껏해서 일종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 영혼, 제1원인, 목적성, 초월 등에 관한 모든 명제는 아무런 뜻도 없다. 이런 것에 관계되는 문제들은 ‘사이비’ 문제들이다. 철학의 과제는 오직 게임의 기술적인 규칙을 세우는 것이며, 우리는 이런 규칙을 가지고서 감각자료(sense data)를 엄밀한 논리적인 계산 하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개별과학들에 최대한 접근하게 되며, 동시에 구체적이고 증명해낼 수 있는 내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③ 철학적 분석학파

 

20세기 초에 G. E. 무어, 버트란트 러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일련의 철학자들은 언어 연구와 명사(term), 개념, 명제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일련의 관념론자들, 주로 F. H. 브래들리의 합리론적 일원론에 대한 반발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절대적 관념론자였던 19세기 후기의 합리론자 중 몇몇은 세계를 단일하고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로 보았는데, 이러한 전체에 있어 유일의 자기충족적 실체는 실재 그 자체―절대자 혹은 신―였다. 그러한 엄격한 일원론에 대한 한가지 반작용은 극단적 다원론―이 다원론은 세계를 무수하게 많은 각각 분리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기술한다―이었는데, 이런 다원론에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란 용어가 적용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원자론’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형이상학적 함의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부분적으로는 그 분석적 방법 때문에 ‘논리적 경험론,’ ‘분석철학’ 등등의 용어가 채택되기도 한다.

 

분석이 철학자들의 유일한 합법적 활동이라고 주장했지만, 분석철학자들은 결정론, 행동주의와 같은 많은 철학적 문제에 관하여 혹은 형이상학의 요청가능성 문제26)와 관련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몇가지 예외가 있지만 후기의 분석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진술을 하는 것을 피하거나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무의미한 것이라 하여 거부한다.27) 그러면서 그들은 묻는다. 철학자들 간의 불일치가 세계의 복잡한 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일상언어의 애매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관념들이 표현되는 언어와 그 언어의 구조의 분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관심사항의 타당성을 철학사 자체에서 찾았다. 언어분석이 피상적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었고 비언어적인 점들이 문제가 되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역사는 곧 언어분석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의’와 같은 개념들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 용기 선 경건과 같은 용어들의 의미를 명료화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 인과성에 관한 진술에 대한 흄의 엄밀한 검토 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분석은 새로운 고안이 아니라 특히 경험론자에 의해서 강조된, 충분히 확립된 철학적 방법이었다. 언어분석가들이 진술하는 바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외적인 엄격성과 꼼꼼함, 기호적 방법의 증가된 세밀함과 정확성, 철학에서 행해지는 것은 언어분석이라고 하는 명시적인 주장이었다.

 

이상 살펴본 바 분석철학은 전체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성격을 뚜렷이 가지며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는 영국 경험론, 특히 그 중에서도 흄의 사고를 대단히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흄에 따라 인간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지각들의 묶음(다발)에 지나지 않아 ‘사물세계를 초월해서 가치를 포함하는 또 다른 질서의 실재’가 존재할 가능성은 차단되고, 그런 의미에서 분석철학은 철저히 ‘사실정향적’인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치열한 지성의 조탁작업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은 우리 삶의 구체성에 관여할 길을 찾지 못해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어떤 가치로 물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사실정향’ 그 자체도 일종의 가치(혹은 가치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분석철학을 무조건 몰가치적이라고 몰아부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삷의 가치적 차원,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가치경험이 그들의 철학적 전제 속에서는 ‘형이상학’이라는 용수를 뒤집어 쓰고 잘려져 나가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제대로 주목될 가능성은 분명 크게 제약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지점에 대한 우려의 소리는 비교적 일찍부터 들리고도 있었다.

 

나는 20세기 중반에 철학에 있어 심각하게 잘못된 어떤 것, 즉 순수과학과 수학의 성취에서의 지성의 장엄한 승리를 제외하고는 전쟁, 혁명, 민족주의, 핵 에너지, 공간 탐험, 혹은 우리 시대의 삶의 특색을 이루는 그 외 어떤 것에도 주목을 하지 않는 그릇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28)

 

시각은 우리에게 정확한 비유를 제공한다. 안경을 사용하지 않고는 내가 볼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다른 안경에 의해서 그 안경을 연구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파노라마적 광경을 얻도록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러한 광경에 적합한 다른 대상을 나에게 줄 뿐이다. 안경에 관해 무언가를―그것의 크기, 무게, 굴절 등을―인식하는 것은 또한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는 시각 그 자체를 나에게 이해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시각이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나는 실제 대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인식에 대한 논리적 언어적 도구에 초점을 맟추기 위하여 객관적 통찰을 제쳐놓는 분석철학은 자신의 유리의 흠집이나 먼지 얼룩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실제로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같다.29)

 

……특히 과학, 수학, 형식논리학이 내보이는 ‘대단히 명백한 사실’에 대한 그것(현대철학)의 배타적인 존경은 이제는 일반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현대철학의 특징을 한가지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가 많은 용법 즉 윤리학, 미학, 문학의 용법을 가진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 용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일 것이다.30)

 

 

2.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옹호’

 

화이트헤드는 그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필자가 그와 대비시키고 있는 이 분석철학과 관련지워 언급한 적은 없었다. 사실 ‘분석철학’이라는 어구 자체가 이 철학이 과학에서 점차 언어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면서 현대철학의 주도적 사상으로 정착되는 금세기의 중반부터라고 보면 그 때 그는 이미 고인이었다. (그는 19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분석철학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는 신실증주의가 세를 불리던 시기가 그 자신 형이상학의 길로 접어드는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화이트헤드는 하바드 대학의 초청으로 동 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한 1924년부터 ‘형이상학’에 몰입, 자신의 유기체철학을 완성시킨다.)과 당시 신실증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던 그 자신이 같은 신실증주의자인 러셀과 ?수학원리?의 공동작업 이후 남은 작업에도 불구하고 결별할 때의 주요 이유가 그 자신이 강하게 느낀 ‘형이상학의 필요성’ 때문이었던 점 등을 고려해보면 그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반(反)분석철학적’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필자는 가치정향성이라고 하는 그의 철학상의 근본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철학에서 방법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형이상학적 체계화로부터 독립시켜 다루는 것이 오늘날 유행이 되어 있으나 화이트헤드는 경험에 대한 올바른 이론은 어떤 해석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체계로부터 분리되어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정과 실재?의 서문에서 화이트헤드는 개별적인 질문들에 대한 분석은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모든 경험이 거기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는 바의 관념들의 체계를 구성할려는 공고한 노력에 의해 보완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믿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여러 특수한 논제에 관여하는 모든 건설적 사고는, 승인되지는 않았지만 상상력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와 같은 어떤 도식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철학의 중요성은 그러한 도식을 명확히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31)

 

그리하여 화이트헤드의 견해로는,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포괄적인 우주론적 도식을 구성하는 일이 큰 중요성을 갖는다. 화이트헤드가 사변철학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그의 확신 즉 최종적인 분석에 있어서 모든 추리는 형이상학적인 참조를 떠나서는 틀리게 된다는 그의 확신에서 발견된다.32) 이 말이 곧 철학자들이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분석은 회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말의 의미는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특수한 문제들에 접근할 때 그가 알게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바의 어떤 사유의 틀(framework of thought)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는 특수문제들에 대한 취급 아래에 놓여있는 사유의 틀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곧 철학은 방법론적 인식론적 문제들에만 관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문제들에도 마찬가지로 관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3. 사변철학의 방법과 조건

 

이러한 이유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철학의 ‘정당한 목표’는 포괄적인 범주적 도식들을 다듬는 일이 되어야 하며 또 이들 도식들을 다른 체계들 및 매일매일의 일상의 경험과의 대면을 통해 점차적으로 교정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때 철학을 하는 올바른 방법이 ‘상상적이고 기술적인 일반화의 방법’(the method of imaginative, descriptive generalization)인데,33) 그는 이를 비행기의 비행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관찰이라는 대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력에 의한 일반화라는 희박한 대기권을 비행한다. 그리고 나서 합리적 해석으로 예민해진, 더욱 새로와진 관찰을 위해서 착륙한다. (It starts from the ground of particular observation; it makes a flight in the thin air of imaginative generalization; and it again lands for renewed observation rendered acute by rational interpretation.)34)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것은 철학뿐 아니라 사실은 특수과학에도 해당되는 ‘발견의 방법’이다. 하나의 과학적인 가설은 그 과학적 가설이 기초하고 있는 특수적인 관찰사실들에 비해 필연적으로 보다 넓고 보다 일반적이다. 나아가서 그 가설은 저 특수한 관찰사항들 너머로까지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거의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과학자는 어떤 한정된 관점 내에서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에다 어떤 질서를 부여하여 정렬시킨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업은 이륙을 위하여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과학자가 이들 자료들을 어떤 가설들을 형성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료를 단순히 모으고 정렬하는 것은 거의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활주만 하고 결코 이륙은 하지 않는 비행기에 비유될 수 있다. 과학자는 현상의 관찰과 자료의 수집을 넘어서서 어떤 가설―애초에 자료를 택할 때에도 고려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도 하고 또 연이은 관찰들에서 일어나는 다른 자료들 조차도 예견하는데 봉사하는 그러한 가설―을 발전시키는 구성적인 작업에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과학자는 즉각적인 관찰이라고 하는 지면을 떠나며 ‘상상적 일반화라고 하는 희미한 대기권에로의’ 비행을 한다. 그의 비행은 그 자신의 개별적인 관심에도 분명히 영향을 받고 또 동시에 자신이 그로부터 출발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전히 내팽겨치고 떠나지는 않는 바의 지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과학의 가설은 관찰된 사실들에 그 가설이 얼마나 적절하게 적용이 되느냐에 따라서도 판단되지만 저들 특수한 사실들을 넘어선 적용에서 그것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하는 점에 의해서도 판단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떠난 대지로 반드시 귀환해야만 하는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는 어떤 일반적인 가설로 무장한 후에 관찰의 장에로 귀환한다.

 

요컨대 화이트헤드는 모든 사물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확신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이 거기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바의 관념들의 어떤 포괄적인 체계, 즉 궁극적인 일반성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개별과학들의 일반화가 어떤 도움이 되는 단서들을 제공할 수도 있고 개별과학의 일반화가 자신의 고유한 탐구영역 너머에서 적용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개별과학들의 차이점들을 단순히 화해시키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는 아니다. 철학자의 탐구작업이 과학자의 기초작업에 반드시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철학에서나 개별과학들에서나 발견의 기본적인 방법은 같다는 점이다. 둘 다 경험의 관찰로부터 시작하며, 상상적이고 사변적인 일반화의 차원으로 나아가며, 둘 다는 자신들의 일반화가 적절하고 적용가능한지를 시험하기 위해 관찰의 지반으로 되돌아간다. 이 얘기는 철학도 결국 과학의 일종이라고 규정하는 얘기가 아니라 과학 그 자체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바 보다도 훨씬 철학적이고 사실은 보다 사변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얘기이다.

 

철학과 개별과학들 간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러므로 양자간의 서로 다른 방법론들에서 보다도 그들의 탐구영역들의 범위에서 찾아진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은 개별적 관심사항들의 어떤 영역을 한정하는데 반해 철학의 주제는 전체로서의 실재 그 자체만큼 넓은 것으로 주어진다. 이 영역이 말할 수 없이 넓은 것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모든 사물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견해가 만약에 옳다면 어떤 완전한 우주론의 체계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사물들의 철저한 상대성에 대한 가정은 화이트헤드의 전체 철학적 활동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는 철학자는 이 상호연관성을 포착할 수 있는 관념들의 어떤 체계를 표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은 사변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와 또 사변철학에 대한 옹호에서 분명해진다. 화이트헤드는 말하기를

 

사변철학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가 거기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바의 일반적인 관념들의 정합적 논리적 필연적 체계를 만들려는 노력이다.(Speculative philosophy is the endeavor to frame a coherent, logical, necessary system of general ideas in terms of which every element of our experience can be interpreted.)35)

 

이 정의 속에는 타당한 철학체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이 내포되어 있고 이것으로써 또한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방법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정의에 포함되어 있는 ‘정합성’과 ‘논리성,’ 그리고 ‘필연성’ 및 ‘해석’이라는 개념들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설명을 보면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정합성’(coherence)이란 철학적 체계, 또는 도식을 전개하고 있는 기본 개념들이 상호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것들은 분리되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36) 다른 말로 하면 정합성의 조건이란 어떤 존재자(entity)도 우주의 체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사유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유기체철학이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체계가 요구받는 정합성의 이념은 철학과 수학간의 유사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유사성이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에 대한 오해로 유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철학에서 어떤 범주적 도식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수학에서 공리적 체계를 전개시킴에 있어서도, 제1원리들 간에 어떤 임의적인 비연결성이 있어서는 물론 안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수학의 예는 많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방법이 명석하고 판명하고 확실한 전제들로부터 연역적으로 주장하는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끔 잘못 인도하였다.37)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견해에서는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연역보다는 기술적 일반화에 있으며, 어떤 궁극적인 일반성들이란 최초의 전제들에서 요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이 지향하는 바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한편으로 궁극적인 일반성들의 어떤 포괄적인 체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내적인 일관성이라고 하는 이념에 의해 향도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체계는 그 용어의 일상적인 의미에 있어서 ‘논리적’(logical)이어야 한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철학체계란 논리적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모순을 내포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고, 또한 추리의 규칙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화이트헤드는 그러나 “논리적 개념들은 철학적 개념들의 체계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38) 이는 형이상학이 논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가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을 가리킨다.

 

하나의 철학체계는 정합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덧붙여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체계는 우리의 경험에 적용가능하고(applicable) 또 경험의 모든 항목을 해석하는데 충분해야(adequate)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전자의 요구사항들 즉 사변적 체계가 정합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의 합리적 기준을 표현한 것이라면 후자 즉 그것이 적용가능하고 충분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의 경험적 기준을 표현한다. 여기서 사변철학을 위한 합리적 요건들과 경험적 요건들의 융합이 있게 되며 이는 사변철학이 경험의 사실들로부터 동떨어져서도 안되고 보다 큰 일반성들에서 눈을 돌려도 안된다는 점을 말한다.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추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철학자는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리하여 자신의 체계가 경험의 어떤 항목들에 적용가능함을 보증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이 기획하는 바의 목표는 경험의 전체에 충분한 하나의 관념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이것은 ‘상상적 일반화라는 회박한 대기권’에로의 상승을 필요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는 어떤 속박에서 벗어난 상상력의 지배에 보다도 일반화의 과정에 주어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는 자신이 관념들의 그물을 짜는데 있어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의 도식은 경험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또 경험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체계는 일반적으로 경험론자들이 경험에 근거하여서는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일종의 필연성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연성’(necessity)이란 사변철학의 경험적 측면이 가지는 위에서 말한 충분성에서 유래하는 특징이다. 필연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다음의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항에 대한 이 도식의 충분성이란 우연히 고찰의 대상이 되었던 사항에 대한 충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철학적 도식을 예증하는 것으로서의 관찰된 경험의 구조가 모든 관련된 경험이 반드시 동일한 구조를 나타내게 되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도식은 직접적인 사실과 소통하는 것에 국한시킨다면, 그 도식 자신 속에 모든 경험과 통하는 보편성의 근거를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이 된다고 하겠다.39)

 

이상적인 사변철학이 갖추어야 하는 조건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합성, 즉 모든 존재자는 일반관념들의 체계 안에서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 2) 논리적으로 같은 도식 안에 있는 다른 존재와 일관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험적 해석과 관련해서 그 도식은 3) 적어도 경험의 사례에 적용될 수 있으며, 4)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한가지 주목되어야 할 점은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변철학의 이상을 말하면서도 철학적 체계의 가설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의 체계 그 자체가 사실은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접근되고 있다. 그는 이 체계를 “…그로부터 특수한 상황들에 적용가능한 참인 명제들이 도출될 수 있는 하나의 주형”40)으로 볼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또 그것의 범주적인 진술들은 단지 ‘작업가설’41)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철학적 구성의 참된 방법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관념들의 도식을 축조하고, 그 도식에 의거하여 과감하게 경험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42)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반성은 사물의 본성의 깊이를 타진하려는 노력이 참으로 천박하고 미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에서는 어떤 진술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려는 독단적인 확실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리석음의 징표가 된다.43)

 

이러한 진술들은 경험에의 보편적인 적용가능성 덕분에 충분하게 되는 바의 어떤 일관되고 정합적인 관념들의 체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변철학의 이념이 사실은 획득불가능한 이념임을 뜻한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사실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의 이런 입장은 “철학자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제1원리들을 형성하는 것을 끝까지 바랄 수는 없다”44), “우리는 어떤 완전한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잘 정의된 일반성들의 최종적인 조정을 산출할 수 없다”45)는 구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화이트헤드는 사변철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면서도 그러나 이 사변철학은 결코 완전할 수는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의 보다 ‘근사한’(‘완전한’이 아니라) 설명을 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화이트헤드는 철학적 사유가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어떤 자명의 원리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잠정적으로 정식화된 원리에서 보다 정확하게 진술된 원리에로의 인간 지식의 점진적 정치화(精緻化)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예컨대 어떤 전제의 확실성이나 최초의 명석성에 의존하는 데카르트류의 방법과는 상이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46)

 

 

4. 현대 영미철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

 

영미의 현대철학의 주요한 특징 중 두가지가 철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접근과 두드러지게 대비된다. 첫째, 어떤 완전한 사변적인 우주론의 체계를 시도하는 화이트헤드와 달리 거기에는 철학의 주된 방법론으로서 논리적 언어적 분석에 호소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둘째로, 현대의 인식론의 주도적인 기질은 확실히 경험론이며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에게서 인정되는 바 보다도 훨씬 넓은 것이라는 화이트헤드의 주장과는 달리 감각주의적 경험론(sensationalist empiricism)이라는 보다 좁은 견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두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자신의 사변적인 도식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부적절성들을 치유하고자 한다. 전자와 관련하여 그는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개념들을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 내의 올바른 시각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였으며 논리와 언어가 형이상학에 의존함을 보이고자 했다.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과학적 인식과 가치경험의 둘다가 어떤 단일한 통합적인 이론 안에서 설명됨을 보이는 방식으로 감각지각을 어떤 보다 넓은 인간의 경험이론의 맥락 내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에 따르면 현대의 철학적 풍경을 지배하는 바의 철학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과 언어적인 접근은 둘다 철학적 탐구의 배타적인 방법들이 되기에는 필연적으로 부적당하다. 거기에는 이미 어떤 형이상학적인 관점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논리는 상식이라는 분석되지 않은 배경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상식은 가려져 있을지언정 형이상학적 개념들에의 참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불멸성’(Immortality)을 주제로 한 한 강연에서 화이트헤드는 논리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배경 때문에 사유에 대한 적절한 분석으로서 용인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47) 그는 같은 강연에서 그에 앞서 언급하기를, 그러나 우리의 상식상의 이해는 언제나 저 무한한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해석되지 않은 배경으로 놓여있기 때문에 상식에 대한 어떠한 완전한 분석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모든 사물은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신념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논리적 수학적 언어적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그 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비슷한 지적이 ?사유의 양태들?에서도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특히 ‘괴델의 정리’(Gӧdel’s theorem)와 관련하여 논리학의 형식체계에서도 그 체계를 넘어서는 개념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논리학 자체도 전제들의 모든 유한한 집합은 그 직접적인 시야에서 배제되고 있는 관념들을 지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형식적으로 증명된 명백한 사실을 놓고 씨름하고 있다.”48)

 

이러한 언급들은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그 체계가 그로부터 일어나고 또 그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 바의 하나의 배경이 요구된다는 화이트헤드의 확신을 가리킨다. 실제적인 목적들에 있어서는 이 배경은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조차도 보다 근본적인 어떤 배경을 깔고서 작동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믿음들조차도 무한한 우주를 밑바탕에 두고 해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논리는 그것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실재 전체의 이해를 요구한다. 다른 말로 논리는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있으며 형이상학적 배경이 분명해질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물론 우리가 형이상학적 사변에 관여하지 않고서도 논리의 사용에 얼마든지 관여할 수는 있다. 분명히 우리는 어떤 특정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저 체계 뒤에 있는 암묵적인 전제들을 묻지 않고서도 특정한 논리체계의 규칙들을 적용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새로운 논리체계들을 그 체계 뒤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전제들에 대한 분석에 관여하지 않고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러한 전제들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가정들을 드러나게 하고 비판적인 가치평가의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따르면, 그래서 논리적 분석이 단독으로 우리에게 적절한 철학적 도구를 제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상들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에 ‘사물들의 근원적인 연관성’을 못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언어의 분석을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궁극적인 도구로 삼는 일도 신뢰될 수 없다. 화이트헤드의 언급에 따르면 “그 자체의 의미를 올바르게 진술하는 문장은 없다. 거기에는 언제나 그 무한성 때문에 분석을 거부하는 전제가 배경으로 있는 것이다.”49)

 

한 경우로서 화이트헤드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는 문장을 들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장은 누구나 다 이해한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는 불가피하게 그 문장이 명시적으로 진술하는 바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 사물에다 그 자체를 더하면 두 사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 문장의 의미에 대한 가능한 분석으로서 이러한 해석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은 또 어떤 한 종류의 한 사물이 다른 종류의 다른 사물과 함께 하면 두 사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합동을 얘기하기에 적당한 종류와 사물들이 따로 있음에 틀림없다. 불꽃과 폭약의 합동은 폭발을 만들지만 이것을 ‘두 사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50) 뿐만 아니라 일종의 수학적인 추상인 이 문장은, 사물들은 그들의 상황이 변하면 따라서 변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상황 내의 변화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를 암암리 깔고 있다. 어떤 목적에서는 이것이 충분히 옳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장의 올바른 해석과 적용은 변화들이 중요하기도 하고 덜 중요하기도 한데 대한 이해를 허용할 정도로 충분히 넓은 어떤 배경이 근거가 되어 이해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바의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간단한 문장에 대한 분석조차도 사물들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논리와 언어 둘다가 사물들의 연관성으로부터의 추상의 결과로서 오는 제약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지만 그런 중에서도 논리보다 언어에서 상황은 좀더 복잡하다. 언어는 철학의 필수적인 도구인데다가, 언어에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다 가져오는 전제들이 이미 육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 분석은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고도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 혼자로는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언어의 분석은 철학자가 자신의 작업에 가져오고 있는 전제들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제들이 옳은지 혹은 적절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 즉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존재론적 관여물들에 대한 가치평가가 요구된다. 언어 역시 그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무한한 우주라는 배경을 요청하며, 언어에 대한 올바른 분석을 하고자는 시도는 언제나 스스로를 넘어 형이상학적 고찰들에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적 분석이 자신의 과업을 마치더라도 철학의 임무는(그 임무가 언어의 명료화에 의해 용이해질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수많은 철학적 논의들이 언어의 추상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혼란을 겪었다. 특히 이른바 실체(substance)와 속성(quality)에 대한 논의들 대부분이 그러한 예가 되고 있다.51) 실체 속에 원래부터 내재해 있는 바로서의 속성이라는 개념은 ‘푸른 잎,’ ‘둥근 공’ 등과 같은 표현을 즐겨 쓰는, 그리고 명제의 주어-술어 형식을 즐겨쓰는 언어들에 하나의 자연스런 전제가 되고 있다. 이런 표현 속에는 분명 일련의 추상이 들어 있다. 그 추상은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 바로 그것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상징(말)의 사용에 의존한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되는 사물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의 구조가 흔히 언어에 의해 애용되는 바의 주어-속성 혹은 실체-속성의 패턴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그러한 잘못은 화이트헤드 자신이 누누이 강조하는 ‘구체성을 엉뚱한 데서 찾는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의 일종이다. 이 오류는 한마디로 인간이 삶의 필요 때문에 구사하는 어떤 인위적인 추상을 그 자체 실재의 참모습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 자신의 말을 빌면,

 

구체적 사실은 단순한 추상인 것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추상물을 구체적인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 즉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대치하고 사유의 추상물을 구체적인 실재로 오인하는 오류를 뜻한다.52)53)

 

요컨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은 인간이 세계에 대해 얘기하는 특정한 방식에의 호소에 의해 해결될 수 없으며, 철학적 논의는 언어가 없다면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이것 자체가 언어를 철학의 제1주제로 삼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는 우리에게 인간이 실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언어를 통한 개인들 간의 의사소통의 대부분이 용어들의 의미와 표현의 형식들과 관련된 어떤 공통된 배경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인간은 품사론과 문법 안에 이미 고정되어 있는 의미들을 넘어서 통찰력의 섬광들을 즐긴다”고 말한다.54) 그는 실재와 언어의 관계 뿐 아니라 사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도 양자 간에는 밀접한 연관관계가 존재하며, 그리하여 언어는 흔히 사유의 표현도구로서 사용이 되지만 이 점이 곧 사유가 언어적 표현과 동일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역설한다. 만약에 동일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유를 표현하는 말들을 향한 분투를 더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사유들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말들을 찾고자 애쓰며 흔히 그러한 노력은 실패에 봉착하기도 한다. 화이트헤드는 사유와 언어적 표현간의 구분을 종교적 직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직관은 말의 형식에 관한 식별이 아니라 특성의 형태에 관한 식별을 의미한다. 말을 고양시키는 일은 교양있는 심성의 특성이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그들의 입술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심정 속에서 많은 것들을 숙고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알려진 이들 많은 것들은, 호소할 길이 전혀 없는 저너머의 궁극적인 종교적 증거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55)

 

화이트헤드의 견해에서는 그러한 직관들이 ‘궁극적인’ 철학적 증거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다른 증거에 대한 호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 모든 고유한 의미에 있어서의 철학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명은 추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명한 것이든가 아니면 철학이 아니든가이다……철학의 목적은 순수한 개시(開視)에 있다.56)

 

이어서 그는 말한다. “철학의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의 실패이다.”57) “언어는 직관의 뒤에서 머뭇거린다. 철학의 난점은 자명한 것에 대한 표현에 있다. 우리의 이해는 말의 일상적인 용법들을 추월한다.”58) 말하자면 언어는 철학의 필요한 도구는 도구이되 지속적인 손질과 보완을 필요로 하는 도구이다. 언어의 적절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철학자가 경험의 본질과 실재에 관한 가장 넓은 일반성들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서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한 잘못 놓여진 믿음은 흔히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바의 이른바 ‘완전한 사전의 오류’(MT, 235-6)의 형태를 취한다. 이 오류는 인간의 경험에 근본적인 모든 기본적인 관념들이 이미 인간의 언어 안에서 포착이 되었다고 보고, 철학자는 그 ‘사전’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는 데에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항하여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직접적인 통찰에 호소해야 하며 사전은 단어들과 표현의 형식들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용법 너머로 확장되는 바의 방식으로 더 넓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소피스트’에 대한 언급들(AI, 153, 293)에서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이 이미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일상언어가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깨달았으며 이에 투쟁하면서 ‘일상적인 담화의 한계들’을 지적했음을 말하기도 한다. “비존재 그 자체는 존재의 한 형식”임을 인식하면서 플라톤은 언어적으로는 자기모순적인 진술에 대한 생각을 표현했으며 이는 존재라는 개념이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언어의 우둔함에 대항한 새로운 사유의 지속적인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과업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의 이러한 전반적인 불완전함에 직면하여 철학자가 해야할 일은 그럼 무엇인가? 언어를 버려야 하는가? 화이트헤드에게서도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애매할 수도 있고 자신의 범주적 체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선명하게 정제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언어적 표현들과 ‘함께’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59)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은 점점 더 명석해져야 하며 경험의 사실들에 대한 적용들에 있어서도 더욱 더 선명하게 정제되어야 한다. 경험이 관념들의 해석적인 체계의 조명 속에서 시험됨에 따라 체계의 진술 속에 사용된 말들과 구절들에 대한 정의들은 경험과의 대면이 이루어짐에 따라 변모를 겪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한 의미는 그것들을 위해서 우주가 제공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배경에 대한 그에 걸맞는 확실한 이해를 떠나서는 정확하게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언어는 생략된 형태의 것일 수밖에 없으며, 직접 경험과 연관시켜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상상력의 비약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떤 언어진술도 명제의 충분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형이상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60)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이해는 형이상학, 즉 우주에 의해 공급되는 체계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 철학을 언어에 대한 명료한 분석에 근거지우려는 시도가 실패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철학적 이해의 올바른 과정을 역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며, 언어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형이상학을 ‘앞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뒤쫓는’ 것이다.

 

논리와 언어에 대한 협소하고 과도한 주목과 관련되면서 화이트헤드의 접근과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현대철학의 다른 중요한 점은 철학을 가능한 한 ‘과학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화이트헤드가 볼 때 이러한 노력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은 감각지각이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접근이라는 전제이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과학이 ‘관찰가능한 사실들’에만 한정된다는 흔히 하는 가정은 과학을 불모의 것으로 만든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이 흄(Hume)류의 극도로 단순화된 경험이론의 무비판적인 수용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 그는 이것을 ‘감각주의 원리’(sensationalist principle)로 규정하면서 그의 저서의 여러 곳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미적 경험을 포함하는 가치경험 일반의 위상을 찾을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감각주의 원리’는 동시에 그가 비판해마지 않는 ‘주관주의 원리’(subjectivist principle)와도 직접 연결되고 있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에 이르는 근대철학의 근본 전제에 대한 비판작업을 자신의 유기체철학의 입장에서 쉬임없이 수행한 화이트헤드는 근대 철학의 다양한 학파들이 지니고 있는 난점들은 주로 주관주의적 편견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 주관주의적 편견은 데카르트에 의해 근대철학에 도입된 것으로서, 곧 의식적 존재자의 주관적 경험을 철학적 분석을 위한 형이상학적 근본입장으로 삼는 것이다.61) 그의 판단에 따르면 주관주의 원리는 다음의 세 전제를 필연적으로 받아들인다. (1) 궁극적인 존재론적 원리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실체-속성’ 개념의 승인, (2) 항상 주어이며 그래서 결코 술어가 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제1실체(primary substance)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승인, (3) 경험하는 주체가 제1실체라는 전제 등의 세가지가 그것이다. 첫번째 전제는 최종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은 언제나 실체 속의 고유한 성질로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진술이다. 두번째 전제는 속성들과 제1실체를 상호 배타적인 두 부류로 분할한다. 이 두 전제는 공히 보편자(universals)와 특수자(particulars) 간의 전통적인 구별의 근거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은 이 구별이 근거하고 있는 그 전제들을 거부한다. 대신에 존재자들의 두가지 궁극적인 부류를 용인하는데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와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가 그것이다. (이 개념들에 대한 고찰은 다음 장에서 이루어진다.) 화이트헤드는 이것들이 각각 ‘특수자’와 ‘보편자’로 잘못 이해되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주관주의 원리에 입각하는 한 논리적으로는 주어-술어의 형식, 형이상학적으로는 실체-속성의 형식이 실재를 분석하고 묘사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가정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고 이는 실재의 참모습을 포착하는 데 실패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주의 원리는 감각주의 원리와 덧붙여지면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다.62)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따르면 문제는 인간의 경험을 단지 감각지각의 노선을 따라서만 인식할려는 태도에 있고, 그 속에서 인간 경험의 어떤 ‘본질적인’ 국면들이 누락되고 있다는 데 있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에 있어서 지각이 근본적이라는 관점에서는 전통적인 경험론과 일치하고 있으나, 지각과 감각지각을 동일시하는 관점은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8세기와 19세기에 마련되었던 인식론의 취약성은 그 인식론이 편협하게 정식화된 감각지각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그 결과 그 인식론은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실로 근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게 되었다.63)

 

화이트헤드는 ‘감각주의 원리’를 ?관념의 모험?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 모든 지각은 귀, 눈, 입, 코와 같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기관과 촉감, 아픔 및 다른 육체적 감각들을 제공하는 확산된 육체적 조직의 중개에 의한다는 것, (2) 모든 지각내용(percepta)은 직접적 현재에 주어진 패턴화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순전한 감각자료(sensa)라는 것, (3) 공동체적 세계(social world)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같은 지각에서 전적으로 이끌어내어진 해석적 반작용(interpretative reaction)이라는 것, (3) 우리의 정서와 의도적인 경험(purposive experience)은 그 본래의 지각에서 파생된 반성적 반작용(reflective reaction)이며 위의 해석적 반작용과는 뒤얽혀 있고 또 부분적으로 그 반작용을 형성한다. 이렇게 해서 그 두 반작용은 해석적, 정서적 그리고 의도적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의 상이한 양상이다.64)

 

말하자면 감각주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지각을 구성하는 것은 ‘명확하고 선명한’(clear-cut) ‘감각자료’의 의식적 수용이고, 경험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이 감각자료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감각자료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감각자료, 즉 색깔, 소리 등에 대해 그와 같은 감각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명확하기 때문에 근본적이라는 가정은 거부한다.65) 요컨대 감각주의 원리는 의식의 가장 생생하고 가장 명석한 여건을 감각, 혹은 감각자료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는 이러한 감각자료는 실체들을 규정한다고 얘기되는 속성이나 보편자를 단순히 예증할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인식하는 실체와 인식되는 실체 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게 되고, 이같은 감각주의 원리는 과거 혹은 미래의 정보를 우리에게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사물 그 자체는 알려질 수 없다고 하는 회의론에 이르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부분은 3장 1절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경험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은 ‘감각지각의 좁은 구성’에 기초하고 있는 저 현대 영미철학의 인식론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감각지각의 좁은 구성’에 들지 않는 인간경험의 저 중요한 부분들을 임의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 될 뿐이다. 바로 그 본성에 의거하여 철학은 아무 것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경험의 모든 다양성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주어야 한다.66) 다시 말해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이나 종교적 도덕적 경험은 임의대로 철학에서 누락될 수 없다. 경험의 이 유형들은 올바른 철학적 도식의 형성 속에서 감각적인 경험과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사유의 양태들?에서 화이트헤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종교와 도덕의 얼룩진 역사는 과학의 보다 안정된 일반성을 위하여 종교와 도덕을 제쳐놓고자 하는 욕구가 널리 퍼지게 된 주요원인이다. 우주를 범속(commonplace)의 구현으로 보려는 이와같은 독선적인 시도에는 안된 일이지만 미적 도덕적 종교적 관념들의 충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문명을 붕괴시키기도 하고 문명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는 힘이다. 이들은 인류를 끌어 올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한다. 이들의 힘이 약화될 때 소리없는 쇠퇴가 서서히 도래한다. 그런 다음 새로운 이상이 생겨나서는 잇따라 사회적 행태의 활기를 북돋워나간다……사태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것에다 지상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극단적 국면으로의 접근은 언제나 즉흥적이고도 은둔적인 성격을 학문에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개개인의 경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우주를 드러내 보여주는 본질적인 연관들을 외면한다.67)

 

화이트헤드와 분석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영미철학 간의 대비는 이렇듯 분명하다. 이 대비는 근본적으로는 철학의 본질에 대한 견해차에 있으며, 철학적 방법론 상에 있어서나 경험의 속성에 대한 견해 상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점을 낳고 있다. 살펴본대로 화이트헤드는 현대 영미철학에서는 간과되고 있는 인간 경험의 총체를 원상회복시키고 거기다 정당한 의미부여를 하고자 한다. 이 점을 우리는 그가 특히 ‘형이상학’을 지향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총론상의 확인이었지 각론상의 구체적인 확인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부터의 과제이다. 그 과제는 그의 형이상학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할 것을 선결조건으로 요구한다.

 

제2장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

 

 

본 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경험관의 일반적인 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이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된 ?과정과 실재?가 특히 고찰의 중심이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의 머릿말에서 이 책의 의도는 ‘우주론의 관념들을 압축시킨 구도를 제시하고, 그 관념들의 의미를 경험의 다양한 주제들과 대결시키면서 전개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특수한 존재를 서로 결합시킬 수 있는 충분한 우주론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서술상에 있어서 그는, 철학의 특수한 논제들을 순차적으로 취급해 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전체적인 우주론의 구도를, 그 책의 제1부(「사변적 구도」)에서 제5부(「최종적 해석」)까지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더욱 포괄적이고 명확하게 전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그의 우주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요소들은 그것들이 되풀이될 때마다 보다 더 풍요한 내용을 갖게 되어, 마지막에 가서는 그의 우주론에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되며, 그때 사물들의 모든 가능한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데 충분한 모든 유적(類的)generic 관념의 전개가 종결되는 그러한 방식이다.68)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기본구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그의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의 구도가 어떤 방식으로 풍부한 내용을 갖추며 발전하고 있고, 그 우주론을 이루는 여러 범주들 간의 상호관계는 궁극적으로 그의 전체 우주론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의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개념들은 자족적으로 독립해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는 전체적인 우주론의 구도에 대한 선행 이해를 필요로 한다. ?과정과 실재?가 난해하다고 얘기되는 건 화이트헤드 우주론의 전체적 연관성 및 이런 서술상의 특수성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의 기본 범주는 현실적 존재, 영원적 객체, 파지, 신 등의 네가지 범주이다. 화이트헤드가 현존의 범주로 설정한 것은 현실적 존재, 파지, 결합체, 주체적 형식, 영원적 객체, 명제, 다수성, 대비 등의 8개이지만 이 네 개념을 탐구해야 할 기본 범주로 설정한 것은, 이들에 대한 이해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현존 범주들에 대한 이해를 포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69)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는 신도 현실적 존재의 일종이지만 신을 따로 설명하는 것은 시간적인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현실적 존재들과 구별되는 신의 특수성 때문이다.

 

 

1.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현실적 존재(‘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고도 불린다)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범주이다. 화이트헤드 자신이 직접 얘기하는 현실적 존재의 일반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현실적 존재’―‘현실적 계기’라고도 불린다70)―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어떤 사물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 현실적 존재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텅빈 공간에서의 지극히 하찮은 한가닥의 현존도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데 비록 그 중요성에서 등급이 있고 그 기능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태가 예증하는 여러 원리에서 볼 때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 궁극적 사실은 이들이 하나같이 모두 현실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이다.71)

 

이 기본 규정을 중심으로 현실적 존재의 내용을 지금부터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현대 과학이 요청하는 개념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먼저 그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 왜 ‘현실적 존재’라는 낯선 개념을 도입하는지 그 이유부터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해서는 우선,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현대과학(특히 양자론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이 광범하게 확인하고 있는 바의 실재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최대한의 일반성을 가지고 설명해낼려고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점을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한다. “내가 논의하려는 바의 기본요지는 과학적 도식이 새로이 구축되어 유기체라는 궁극적 개념에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진일보한 단계의 잠정적 실재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72) 이러한 현대과학적 세계관은 곧 내용적으로는 특히 뉴우턴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는 자연 일반에 관한 뉴우턴의 이론에서 근본적이었던 개념들을 비판했고, 이 뉴우턴의 자연이론을 수정하여 현대의 과학적 관념들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기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뉴우턴의 개념에 의하면, 물질의 입자들은 각기 시간의 어떤 특정한 순간에 공간의 어떤 특정한 점에 존재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개념을 두고 상상력이 없는 경험론의 소산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뉴우턴이 말하는 타입의 입자들이 구체적으로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자연 속에서 변화하는 어떤 生滅 혹은 사건이요, 이런 생멸이나 사건은 시간 속에서 전진하며, 또 그 성질은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건들의 조직망에 대해서 그것이 갖는 여러가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사건도 분리된 존재임으로써 성립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 둘레에 있는 다른 사건들을 고려에 넣는다(이 ‘고려에 넣는 일’을 반드시 인식의 수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인식의 수준에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구체적인 세계는 사건들의 광대한 연쇄망이요, 이 사건들 하나하나는 다른 사건과 서로 관련은 가지고 있고, 또 이 관련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뉴우턴의 입자들은 ‘단순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들은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한다는 것은 생기한다는 것이다. 물질의 즉각적인 형성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우기 구체적인 사건들은 고립된 존재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것들의 환경으로부터 그것들에게 들이닥치는, 그리고 또 그것들이 그것들대로 휘어잡는 여러가지 영향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여러가지 변화를 입고 있다. 휘어잡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물을 고려에 넣는다는 것이요, 또 그리함으로써 어떤 특수한 변모를 갖게 되는 것이다. 휘어잡는다는 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그것이 다른 사건들의 여러 측면을 그 자신의 부분으로서 혹은 그 자신의 생멸의 양식으로서 포함하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가 단순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뉴우턴의 입자들은 완전히 그것들 자체를 통해서 그것들 본유의 성질을 가지며, 또 그저 외부적인 관계 속에서만 서로 결합한다. 화이트헤드의 사건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른 모든 사건에 침투하고, 또 다른 모든 사건에 의하여 침투되는 것이요, 그것들의 존재가 서로 상관적으로 생기하는 내적 관계들에 의하여 꾸며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형이상학, 우주론을 구상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은 대략 상기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전통적인 ‘실체’개념이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으로 전제하고 있는 바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개념을 모색하게 되고 이에 채택된 개념이 ‘현실적 존재’인 것이다.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은 말하자면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적 연구성과의 강한 영향을 받아서 탄생된 개념이다. 그것들에 따른다면 외계와 무관계적인, 자기완결적 완고한 궁극적 실체와 같은 원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원자는 다시 양성자, 중성자, 전자, 광자 등의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시 그것들은 각각 하위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원자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게 된다. 그는 다시 이 유기체의 개념을 상상적으로 일반화시켜 이를 ‘현실적 존재’라고 명명하면서, 모든 사상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존재범주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하나의 가설적 개념이긴 하지만 인간의 직접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고 동시에 물리학, 생물학 등의 연구성과를 통해서 그 유효성과 타당성이 확인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 과정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설명의 범주 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는 그 자신에 대하여 기능함으로써 그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고도 자기 형성에 있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자기 창조적(self creative)이다. 그리고 그 창조 과정에서 그 다양한 역할들을 하나의 정합적인 역할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생성’(becoming)은 ‘부정합’으로부터 ‘정합’으로의 전환이며, 각각의 특정한 사례에서 그 전환이 달성될 때 종결된다.73)

 

현실적 존재에 대한 이 설명범주의 의미를 밝히자면 먼저 창조 과정, 즉 창조성의 개념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창조성’은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지우는 보편자들의 보편자(the universal of universals)이다.74) 창조성은 이접적인(disjunctive) 방식의 다자를 연접적인(conjunctive) 방식의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순수 활동의 개념이다. 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적 존재는 이와 같은 창조성의 개별적 사례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현실적 존재는 다시 창조성의 제약조건이 된다.

 

이와 같이 창조성의 개별적 사례로 간주되는 현실적 존재는 자기 창조적인 생성활동으로 규정된다. 현실적 존재가 자기 창조적 생성활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성을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개별화시키는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을 현실적 존재 스스로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현실적 존재가 자신의 주체적 형식을 스스로 포함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영원적 객체와 파지 및 신의 범주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자기 창조적인 생성활동의 개별적 사례인 현실적 존재에 그것의 한정형식을 부여하여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바로 그 현실적 존재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영원적 객체라는 점만을 우선 지적한다.

 

현재로서 현실적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의미관계를 형성하며, 그 자신이 결정되어가는 과정에 스스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는 자기 형성의 주체로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며 그와 같은 자신의 다양한 활동들을 하나의 정합적 활동체로 전환시킴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하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적 존재의 본질은 오로지 그것이 파지하는 사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현실적 존재는 우주 안에 있는 각 사항과 완전히 한정된 유대 관계를 갖고 있다. 이 결정적 유대 관계가 그 사항에 대한 현실적 존재의 파지이다.75)

 

윗 글에서 나타난 바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는 ‘파지’라는 활동을 통해서 자신과 우주 안에 있는 각 사항과의 한정된 ‘의미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이 결정되는 과정에 ‘기능’한다. 다시 말해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현실적 존재들을 파지하는 생성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현실적 존재는 현실세계를 파지함으로써 다른 현실적 존재와 자신의 의미관계를 형성시키며, 그러한 의미관계를 가진 사물로서 자신을 결정해 가는 경험의 과정으로 설정된다. 다시 말해 현실적 존재들은 모두 파지라는 경험을 통해서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이와 같이 서로를 파지하는 작용을 통해서, 서로를 대상적 객체로서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상호의존적이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인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존재하기 위해 그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자’에 관한 데카르트의 학설을 부정한다.76) 오히려 모든 현실적 존재는 파지의 객체적 대상으로서 현실세계를 필요로 하며, 또한 스스로를 다른 현실적 존재에 대한 여건으로 제공한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또한 ‘실체는 항상 주어가 될 뿐, 결코 술어가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실체에 대한 언명도 부정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현실적 존재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경험의 주체이고, 과정이란 바로 경험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현실적 계기들에 다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 존재 하나 하나는 그 여건에서 생겨나는 경험의 행위로 간주되며, 그것은 다수의 여건들을 하나의 개체적 만족의 통일 속에 흡수하기 위해 그 여건들을 파지하는 과정인 것이다.77)

 

 

2.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이 영원적 객체이다. 앞서 지적한 존재론적 원리에 의하자면, 현실세계는 현실적 존재들로 되어 있는 것이며, 또한 ‘현존’(existence)의 어떤 의미에서 이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실적 존재들로부터 추상되어 파생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도 현실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78)

 

‘영원적 객체’는 ‘사실의 특수한정을 위한 순수가능태(pure potentials), 혹은 한정성의 형식(form of definiteness)’이라고 정의되는 것인데, 현실적 존재와 함께 존재의 양극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실재성을 가지지 못하나 현실적 존재의 내적 구성의 한 요소로서 실재하는 존재자이다. 현실적 존재가 우주의 근원적 단위로서의 사건이라면 영원적 객체는 불변의 계기로서의 형상 혹은 보편자에 해당한다. 그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영원적 객체는 말하자면 플라톤의 ‘idea’나 아리스토텔레스의 ‘eidos’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현실적 존재’와 ‘영원적 객체’의 구분은 그의 중기 자연철학기의 ‘사건’과 ‘대상’ 간의 구분에 대응한다.

 

?자연의 개념?에서의 다음 구절을 들어보자.

 

우리는 사건(event)을 인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건은 지나가버리면 벌써 그 사건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을 관찰할지도 모르나 자연의 활동의 현실적 토막은 그 독특한 사상에서 분리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성질은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광장 근처의 제방에로 향해 간다면 우리가 클레오파트라의 방첨탑(方尖塔)으로서 인지하는 성질을 가진 하나의 사건을 관찰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인지하는 것을 나는 대상(object)이라고 부른다. 대상은 사건들이라든가 또는 그것이 성질을 나타내고 있는 사건의 흐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녹색은 위의 정의에 따른다면 하나의 대상이다.79)

 

이 인용문이 보여주듯 대상은 사건과 아주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대상은 추이성을 결여한 자연 내의 불변적 요소이고, 사건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임에 비하여 대상은 가능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바로 이 둘의 관계가 현실적 존재와 영원적 객체 간에도 적용된다.

 

 

(1) 현실적 존재의 한정 형식으로서의 영원적 객체

 

현실적 존재 각각은 창조성의 원자적 개별화이다. 각 현실적 존재의 개별화는 특정한 형식을 취하는 궁극적 창조성에 의하여 구성된다. 즉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인 창조성에 의하여, 현실적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고 있는 ‘타자’에 있어서의 어떠한 존재와도 다른, 새로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는 이와 같은 개별적 현실적 존재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의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는 각각의 특정 형식 혹은 특정 성격이 없다면 개별화될 수 없다. 하나의 개별적 현실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결정적인 형식이나 한정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은 자신의 형식을 통해서 하나의 한정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정형식은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현실태의 요소로서 요구된다. 즉 하나의 개별적 현실태가 되려면 그 현실태는 특정 형식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로서의 개별적 현실태는 특정 종류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는 그것의 한정성, 즉 형식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요구되는 현실적 존재의 한정성의 형식이 바로 ‘영원적 객체’80)이다.

 

현실적 존재는 앞서 보았듯이 생성의 과정에 의해 구성된다. 현실적 존재의 현존(existing) 및 본성은 그것들의 활동(acting)이다.81) 다시 말해 활동이 현실적 존재의 구조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생성(becoming)에 함축되어 있는 변천으로서의 변화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현실적 존재는 새로운 창조라는 의미에서 현존한다. 그러나 영원적 객체들, 즉 한정적 형식들은 새롭게 창조되지 않는다. 영원적 객체들은 그것들이 현존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과정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영원적 객체들은 현실적 존재의 활동 과정의 한정성을 결정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적 객체들 자체가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의 한정성은 생성된다고 볼 수 있지만, 형식의 한정성으로서의 영원적 객체는 생성되지 않는다. 영원적 객체에 있어서의 ‘영원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현실태의 한정성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영원적 객체들이 현실적 존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진입’(ingression)이라고 부른다. 영원적 객체들은 새로운 현실적 존재들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그들의 한정성을 결정한다. 현실적 존재에로의 진입을 떠나서는 영원적 객체는 단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과정을 구성하는 현실태들은, 모든 현실적 존재에 있어 그 한정의 가능태를 구성하는 다른 존재의 진입 내지 관여(participation)를 예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적인 사물들은 영원적인 사물들에 관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82)

 

여기서 영원적 객체의 진입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진입하게 되는 현실태들에 선행하는 듯한 어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영원적 객체들이 그들의 영원성 덕분에 선행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83) 만약 영원적 객체들이 그것의 영원성 때문에 현실적 존재들에 선행한다고 기술한다면 이것은 영원하게 존재하는 형식들을 일종의 현실태로 취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는, 영원적 객체들이 일종의 플라톤적인 형상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가 현실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영원적 객체들은 단지 현실적 존재의 구성 요소로서만 존재 할 수 있다.

 

 

(2) 가능태로서의 영원적 객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영원적 객체들은 그 본성상, 특정 현실태로의 진입과 관련하여 ‘중립적’이다. 여기서 ‘중립적’이란, 영원적 객체들 자체에는 그것들이 어떤 현실태 안으로 진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영원적 객체들은 그래서 그 자체로서는 현실태의 결정을 위한 순수 가능체(pure potentials)이다.

 

그리고 이때 가능체는 현실태를 위한 가능태이다. 가능태란 개념은 현실태 개념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되는 두 존재유형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태와 가능태는 서로를 요구한다. “현실태는 가능태의 예증(examplification)이며 가능태는 현실태를 규정(charaterization)한다.”84)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영원적 객체들이 현실적 존재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현실태라는 식의 플라톤적 실재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읽을 수 있다. 가능체로서의 본성상 영원적 객체들은 현실적 존재에 ‘주어진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가능태들(potentialities)로서의 그것들의 본성은 그것들의 소여성(givenness)안에 수반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과정의 개념은 가능태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음으로 해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우주가 정태적인 현실태에 의해 해석될 경우, 가능태는 사라진다. 모든 것은 단지 지금의 그것일 뿐이다. 계기(succession)는 지각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단순한 현상(appearance)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과정을 근본적인 것으로 보아 출발한다면, 현재의 현실태들은 과정으로부터 그들의 특성을 끌어내서, 이들을 미래에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직접태(immediacy)는 과거의 가능태들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가능태들의 보고이다.85)

 

그리고 ‘주어진 것’ 즉 ‘소여성’의 개념은 어떤 결단과 관계된다. 이 결단에 의해 ‘주어진 것’은 그 계기에 있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러한 소여성의 요소는 한계를 끌어들이는 어떤 활동성을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적 객체들은, 가능체로서의 본성 때문에 ‘소여성’의 특징을 갖게 되지만, 한계를 끌어 들이는 결단으로서의 활동성은 그것들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서 그것들은 가능체일 뿐이다. 그 자체로서는 그것들이 진입하는 특정현실태들과 무관하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영원적 객체들이 어느 현실태로 진입할 것인가의 결단은 영원적 객체들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결단’은 일종의 활동인데, 존재론적 원리에 의하면, 단지 현실적 존재들만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계를 끌어들이는 활동으로서의 ‘결단’은 그 영원적 객체들을 받아들이는 합생의 과정 중에 있는 현실적 존재들에 존재한다.

 

……영원적 객체들을……이끌어 들이느냐 아니면 배제하느냐 하는 것은 현실적 계기의 창발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86)

 

따라서 영원적 객체와 현실적 존재는 현존하기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영원적 객체는 현실적 존재에 진입 혹은 관여함으로써만 현존하게 되며, 현실적 존재는 영원적 객체 가운데서 어느 것을 주어진 것으로 선택하는 결단의 활동성을 통해서만 한계를 가진 특정한 현실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적 객체는 특정 현실적 존재에 진입하지 않은 채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선행 현실태의 한정성을 결정한 것으로서 현실적 존재에 주어진다. 따라서 합생하는 현실적 존재 B에 사실상 주어진 것은 순수한 가능태가 아니라, 특정한 영원적 객체에 의해 결정된 선행하는 현실태 A인 것이다.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 A는 영원적 객체의 매개를 통해서 현실적 존재 B에 주어지며, 영원적 객체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 A에 함축된 것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영원적 객체는 존재의 어떤 순간에도 항상 특정 현실태에 주어지도록 조건지워진 것으로 존재한다.87)

 

그렇지만 이 때문에 어떠한 현실태의 사적인 세부 사항과도 무관한 순수한 가능태로서의 영원적 객체의 본성이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현실태의 여건을 구성하는 것으로 조건지어진 양태에서조차 그것들이 다를 가능성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적 객체는 여전히 “될 수도 있음”(might have been)의 양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88) 본성상 그것의 진입은 어떤 특정양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영원적 객체는 순수한 가능태이기도 하고 조건지워진 가능태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조건지워진 것으로서 현존한다. 그러나 본성에 있어서 그것은 순수하다.

 

현재까지의 논의를 요약한다면, 영원적 객체들은 본성상 무시간적(timeless)이고 영원하며, 생성 중에 있는 현실태들에 주어진 것으로서, 주체로서의 현실태들에 대한 객체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그것들을 영원적 객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항상 생성 가운데 있는 현실태들에게 객체로서 주어지며, 본성상 영원하기 때문이다.89)

 

 

3. 파지(prehension)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에 있어 ‘파지’는 매우 중요한 범주이다. 파지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의 중심에 놓여 있는 개념이며, 이 개념을 통해서만 현실적 존재나 영원적 객체 그리고 신같은 개념들도 그 체계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전체성을 대상으로 하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그 체계화의 방법을 이미 전제된 부동의 원리에서가 아닌 전체의 연관 속에서 늘 새롭게 형성되어지는 원리에서 구하면서, 하나의 보편적인 체계로 나타난다. 형이상학적 대상을 최초의 불변의 원리로부터 연역하거나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간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그것의 전체 연관성 속에서 종국적으로 그 원리를 찾는다. 전체성이 하나의 체계 안에 포섭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를 이루는 개별적 요소존재와 전체가 하나의 관계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개별성이 단순히 전체적 보편성을 위한 구성요소로서만 머물러서도 안되며, 개별성에 대한 강조에서 전체성이 도외시되어서도 안된다. 여기서 개별자와 보편자가 동시에 주제가 되는 ‘유기체적인 현실적 존재’ 내지 ‘구체적 보편자’가 요구되며, 그런 의미에서 개별자와 보편자의 유기적 통합이 문제가 된다. 세계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부분에 대한 설명은 또 상대적인 지위를 지니는 데 그치는 근대 과학의 영향에 맞서 우주 내에 있는 모든 존재자들을 조화시키는 보편적 체계를 시도하는 그에게 있어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의 보편성은 부분과 전체, 혹은 개별자와 보편자의 유기체적 상호연관성 속에서 찾아진다. 이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파지이다.

 

이것은 다수의 여건들(data)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 속으로 사유화하는(appropriate) 과정으로서, 이것을 통해 현실적 존재는 개체적인 것으로서의 자신을 향유하게 된다.90) 다시 말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파지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가 다른 사물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활동이고, 현실적 존재는 이와 같이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붙잡는”(grasping 혹은 seizing)활동인 파지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적 존재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들이 그에게 객체화되고 그것이 또한 후속하는 현실적 존재에게 객체화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서로 포함하고 포함되는 관계를 현실적 존재의 ‘내적 관계’로 규정하고 이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concrete facts of relatedness)을 ‘파지’라고 부르는 것이다.91) 여기서 우리는 ‘파지’가 어떤 의식적인 정신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실재 자체의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사유화(appopriate) 과정에 대한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파지’의 개념과 직결되는 몇가지 개념을 더 살펴봄으로써 ‘파지’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1) 합생(concrescence),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

 

앞에서 우리는, 현실적 존재는 현실세계를 파지함으로써 다른 현실적 존재와 자신과의 의미관계를 형성시키고 또한 이처럼 현실적 존재가 여건으로서의 현실세계를 자기 자신의 구성요소로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언급하였거니와, 이를 좀더 자세히 고찰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념이 바로 ‘합생’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거시적인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현실적 존재’로 불리어지는 미시적인 요소실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현실적 존재는 자기중심적인 원자론적 존재인가 하면 ‘자기만족’이라는 완결성을 지향하는 주체적 목적을 가지는 존재이다.92) 세계가 원자론적 존재인 현실적 존재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이들이 무시간적인 실체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형성과정과 지속을 통해 구성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실체 속에서 사물의 근거를 추구하던 방식이 ‘현실적 존재의 합성적 본성’ 속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 다수의 사물들이 새로운 일자의 구조 속에 결정적으로 종속됨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가 ‘합생’이다.

 

현실적 존재는 이미 다수의 존재로부터 생겨나며 이 통일된 일자는 또 다시 다른 모습의 다수로 형성되어져 간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는 그에 앞선 선행존재(predecessor)의 합생결과이며, 그것은 또 후속존재(successor)로 이어져 합생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종류의 유동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한 종류는 개별적 존재자의 구조에 내재하는 유동성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유동성을 ‘합생’이라고 불러 왔다. 다른 한 종류는 개별적인 존재자의 완결에 따르는 과정의 소멸이 그 개별적 존재자를, 과정의 반복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다른 개별적인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시원적 요소로 만들어 가는 유동성이다. 이런 종류의 유동성을 나는 ‘이행’(transition)이라고 불러 왔다. 합생은 그것의 주체적 지향인 어떤 목적인(final cause)을 향해서 나아가고, 이행은 불멸하는 과거인 작용인(efficient cause)의 매개체이다.93)

 

여기서 보듯 합생은 현실적 존재의 구체적 통일성을 위한 일종의 입각점이다. 그리고 합생의 과정을 통해 완결된 상태의 현실적 존재들은, 단지 서로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분리된 것으로서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이 되어 서로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과정의 연대성 속에서 서로 서로 관계 맺어진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은 현실적 존재들의 연대로서의 우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과정에는 리듬이 있다. 이것은 창조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의 자연적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의 박동(pulsation)을 산출토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본질로 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 가운데 유한한 단위 사실들을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94)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이 이행의 과정 가운데 있는 현실적 존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은 단계설정을 통해 한층 분명히 한다.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네 단계는 각각 여건(datum), 과정(process), 만족(satisfaction), 결단(decis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처음과 끝의 두 단계는, 정착된 현실 세계로부터 그 정착이 상대적으로 한정되게 되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이행해 간다는 의미에서의 ‘생성’(becoming)과 관계가 있다…… 이 여건은 정착된 세계에 의해 ‘결단된다.’ 그것은 새롭게 대체되는 존재에 의해 ‘파지된다.’ 여건은 경험의 객체적 내용이다…… 그리고 새로운 합생은 이 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전망은 양립불가능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마련된다. 최종단계인 ‘결단’은, 현실적 존재가 그 개체적 ‘만족’95)을 달성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미래의 개척지에다 결정적인 조건을 부가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여건’은 ‘수용된 결단’이며, ‘결단’은 ‘전달된 결단’이다. 수용되고 전달되는 이 두 결단들 사이에는 ‘과정’과 ‘만족’이라는 두 단계가 있다. 여건은 최종적인 만족에서 보자면 미결정이다. ‘과정’은 ‘느낌’의 요소들을 부가해가며, 이로 말미암아 이러한 미결정은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현실적 통일성을 달성하는 결정적인 연쇄 속으로 해소된다.96)

 

따라서 현실적 존재들은 항상 창조적 과정 가운데 있는 자기창조적 창조물들이다. 새로운 현실적 존재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들을 여건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성된다는 점에서, 과거 즉 선행 현실태들에 대해 순응적이다. 생성중인 현실적 존재는 선행여건들이 새로운 단위로 결합(growing together)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새로운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생성과정에 대해 합생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합생은 여건으로서 흩어져 있는 구성요소들을 현실적인 공재성(actual togetherness)으로 완성시키는 결정적 ‘만족’을 구축해 간다. 그리고 이러한 합생의 과정은 결정적인 ‘만족’의 달성으로 종결된다. 이때 끊임없는 과정으로서의 창조성은 그 종결된 ‘만족’의 형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를 다른 현실적 존재의 합생을 위한 ‘여건’으로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합생을 시작한다. 현실적 존재의 완결 즉 ‘만족’은 직접적으로 소멸하지만, 현실적 존재는 후속하는 현실적 존재들의 구성요소로 남음으로써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직접성을 잃어버린 현실적 존재는 ‘객체적 불멸성’에 의하여 다른 생성의 살아 있는 직접성에 있어서의 실재적(real)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힉득한다. 그것은 그 불안정의 내적 원리인 목적인을 상실하지만 작용인을 획득한다. 이 작용인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창조성을 특징짓는 제약(obligation)의 근거가 된다.97)

 

말하자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 실현의 주체인 동시에 자기 실현된 자기 초월체로서, 어떤 한 현실태의 자기 실현에 있어서 그 현실태의 한정성에 관여할 수 있는 결정자로서 개입한다. 역으로 말하면, 현실적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손에 의해 객체적으로 한정됨으로 말미암아 정확히 지금의 그것이다.98) 그리고 목적인의 달성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정을 멈추게 하고, 그 결과 그 현실적 존재의 개별적 과정은 초월을 통해서, 한정성의 보고인 우주의 실재적인 가능태(real potentiality)에 부가되는 새로운 객체적 조건으로 이행함으로써,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2) 긍정적 파지―느낌―와 부정적 파지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를 “파지”로 분석하는 것이 현실적 존재의 본성상 가장 구체적인 요소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파지”는 현실태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적 존재는 우주 안에 있는 각 사항(item)과 완전히 한정된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결정적 유대관계가 그 사항에 대한 현실적 존재의 파지이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를 파지로 분석한다는 것은, 현실적 존재를 그것이 우주 안에 있는 각 사항과 맺고 있는 결정적 유대관계들로 분석해 내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현실적 존재가 우주의 각 사항과 맺는 유대 관계로서의 파지에는 두 종, 즉 긍정적 파지와 부정적 파지가 있다.

긍정적 파지란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 자신의 실재적 내적 구조에 여건으로서의 객체적 사항이 적극적으로 기여하도록 그 사항을 명확히 포섭하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은 긍정적 파지를 그 사항에 대한 그 주체의 ‘느낌’(feeling)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선 ‘느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느낌’이라는 말은……합생하는 현실태가 여건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작용을 시사하기 위해 채택되었다.99)

 

……현실적 존재 하나하나는 그 여건에서 생겨나는 경험의 행위로 간주된다. 그것은 다수의 여건들을 하나의 개체적 ‘만족’의 통일 속에 흡수하기 위해 그 여건들을 ‘느끼는’ 과정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용어는 여건의 객체성으로부터 문제되는 현실적 존재의 주체성으로 이행하는 기본적인 일반적 작용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는 용어이다.100)

 

인용문들이 시사하듯 느낌의 주체는 느낌의 여건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들로부터 그 느낌의 여건을 수용하는데, 그러한 여건들이 진입 내지 객체화 됨으로써 즉 느낌이 발생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합생이 초래된다. 즉 느낌의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그러한 느낌들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는 것이다. 느낌의 과정은 화이트헤드가 느낌의 복합적 구조를 이루는 요인들이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다.

 

느낌의 복합적 구조는 그 이행이 무엇으로 되어 있고, 무엇을 초래하게 되는가를 표현하는 다섯 가지 요인으로 분석될 수 있다. i) 느끼는 ‘주체,’ ii) 느껴질 수 있는 ‘최초의 여건,’ iii) 부정적 파지에 의한 ‘제거,’ iv) 느껴지는 ‘객체적 여건,’ v) 그 주체가 그 객체적 여건을 느끼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이 그러한 요인들이다.101)

 

느낌은 그것을 품고 있는 현실적 존재로부터 추상될 수 없다. 이 현실적 존재는 느낌의 ‘주체’라고 불린다. 곧 느낌의 ‘주체’는 느낌을 품고 있는 현실적 존재이다. 느낌은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인 주체의 한 양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주체’(subject)라는 용어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는 이유로 해서 ‘자기초월체’(superjec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102) 이 ‘자기 초월적 주체’(subject-superject)가 느낌들을 창발하는 과정의 목적이다.103)

 

느낌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와 유리될 수 없다. 이 목표는 느끼는 자(feeler)이다. 느낌은 그 목적인으로서의 느끼는 자를 지향한다. 느낌들이 지금의 그 느낌들인 것은 그것들의 주체가 지금의 그 주체일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주체는 자신의 느낌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그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주체는 오직 그 느낌들에 의해서만,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창조성을 객체적으로 제약한다.104)

 

다음으로, 느껴질 수 있는 ‘최초의 여건’과 느껴지는 ‘객체적 여건’의 요인을 살펴보자.

 

최초의 여건인 현실적 존재는 지각되는 현실적 존재이고, 객체적 여건은 그 현실적 존재가 지각되는 ‘전망’이며, 단순한 물리적 느낌의 주체는 지각자이다.105)

 

최초의 여건은 객체화되기 이전의 우주의 요소로서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이다. 이 최초의 여건은 어떤 ‘전망’(perspective)을 통해서 객체화되는데, 그 ‘전망’이 바로 ‘객체적 여건’이다. 최초의 여건은 특정 ‘전망’―다시 말해, 객체적 여건―의 매개를 통해서만 객체화된다.

 

느낌이란 우주의 일부 요소들을, 그 느낌의 주체의 실재적인 내적 구조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 만들기 위해 사유화(私有化)하는 것(appropriation)을 말한다. 이 때의 요소들은 최초의 여건이고, 그것들은 느낌이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추상 아래에서 느껴진다. 느낌의 과정은 제거(elimination)를 낳는 부정적 파지를 수반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여건은 느낌의 객체적 여건인 ‘전망’ 아래에서 느껴지게 된다.106)

 

인용문을 보면 특히 ‘최초의 여건’과 ‘객체적 여건’ 사이에 부정적 파지를 통한 제거작용이 설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이 제거작용을 거치고 남은 것들만이 객체적 여건이 되어 느낌의 주체의 구조에 개입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체가 객체적 여건을 느끼는 방식(how)인 ‘주체적 형식’을 주목해 보자.

 

느낌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그 주체적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최초의 여건, 그리고 객체적 여건인 결합체조차도, 다른 주체에 속한 다른 느낌에 제공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적 형식은 직접적인 새로움이다. 그것은 그 주체가 그 객체적 여건을 느끼는 방식이다.107)

 

그러므로, 주체적 형식을 그 합생의 새로움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체적 형식은 그 직접적 현재의 직접성 속에 내장(內臟)되어 있다. 말하자면 ‘개별 실체에 내재하는 성질’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예는 ‘느낌에 내재하는 주체적 형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형식을 느낌으로부터 추상한다면, 우리에게는 주체적 형식의 잔여물로서의 영원적 객체만이 남게 된다.108)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합생에 있어서의 구성요소인 느낌이 그 여건과의 관련에 있어서 항상 새로울 수 있는 것은, 그 느낌의 주체적 형식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그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비록 그 여건에 대하여 항상 재생적 관련을 갖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여건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09) 또한 모든 느낌은 본질적으로 그 주체를 지향하는 느낌이므로, 여건은 그 어떤 주체적 형식을 통해 느껴져야 한다. 합생의 과정은 그 주체적 형식들에 의해 제어되는 느낌들의 점진적 총합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체적 형식은 새로운 개별적 사실에 독특한 새로운 형식의 진입으로서, 그 객체적 여건과의 특이한 방식의 융합을 수반한다.110) 그리고 현실적 존재는 그 주체적 형식을 통해서 자기 초월적 주체가 된다.

 

느낌의 분석에 있어, 사물에 앞서는(ante rem)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여건이며, 독점적으로 그 사물 속에(in re)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주체적 형식이고, 그 사물 속에 그리고 사물의 뒤에(post rem) 나타나는 것은 모두 ‘자기 초월적 주체’(subject―superject)이다.111)

 

끝으로, 긍정적 파지와 대비되는 부정적 파지에 대해 살펴보자.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부정적 파지는 한마디로 ‘느낌으로부터의 배제’이다. 부정적 파지는 그 여건으로 하여금, 그 주체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파지의 전진적 합생에 있어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파지이다. 다시 말해, 부정적 파지의 주체적 형식은 여건들을 그 주체의 합생에 작용하지 못하도록 제거하는 성격을 지닌다. 부정적 파지는 단지 그러한 ‘주체적 형식’만을 새로운 통합적 파지의 형성에 이바지하도록 제공하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합생 과정에 대한 다음의 설명을 보자.

 

i) 현실적 존재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적 존재의 구조 속으로 개입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ii) 존재론적 원리에 의해 모든 존재(entity)는 어떤 현실적 존재에 의해 느껴진다는 것, iii) i), ii)의 한 결과로서, 합생 중에 있는 현실태의 현실세계 속의 모든 존재는 그 합생에 대하여 어떤 등급(gradation)의 실재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iv) iii)의 결과로, 어떤 존재의 부정적 파지는 그 정서적인 주체적 형식을 동반한 적극적 사실이라는 것, v) 파지의 주체적 형식에는 상호적인 감수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 vi) 합생은 만족이라는 하나의 구체적 느낌으로 귀착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112)

 

느낌들의 점진적 통합으로서의 합생이 과정에서, 보다 초기의 위상의 느낌들은 보다 후기의 위상의 더욱 복합적인 어떤 느낌의 구성요소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각 위상은 하나의 복합적인 만족이 달성되는 최종의 위상에 이르게 될 때까지, 그 새로움의 요소를 추가하지만, 일단 최종적인 만족의 위상이 성취되면, 그 만족이라는 느낌의 위상은 어떠한 추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실적 존재의 최종적인 ‘만족’이 어떠한 추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 학설은, 모든 현실적 존재―그것은 그것 자체(what it is)이기 때문에―그 자신이, 결국 그것이 무엇을 빠뜨리고 있느냐에 대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113)

 

즉 모든 현실적 존재의 내적 구조에는, 최초의 여건에는 존재했었으나 부정적 파지에 의한 제거를 통해서 빠뜨려진 요소들과 모순되는 어떤 요소들이 들어있다. 따라서 모든 현실적 존재의 미결정상태의 완전한 소멸로서의 만족의 위상은 부정적 파지의 주체적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반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그 우주에 관한 ‘느낌’ 혹은 ‘느낌에 대한 부정’의 완전한 결정이 있게 된다.114)

 

요컨대 부정적 파지는 현실적 존재의 과정에 기여하는 자기 자신의 주체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탄생시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느낌은,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사실상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의 인상 혹은 인(印; impress)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느낌을 위한 여건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 느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1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정적 파지는 느낌의 주체적 형식에 기여하고 있다.

 

 

4. 신

 

(1) 具體化의 原理(the principle of concretion)로서의 신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개념이 신의 개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의 개념은 이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를 정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요청하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개념은 그의 우주론을 완성시키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현실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태들의 경우에서 시작해보자. 현실적 존재들은 모두 상대성의 원리에 의해서 합생의 과정의 완성, 즉 만족을 성취하는 동시에 자기 초월적인 존재로서 후속하는 현실태들에 대한 여건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포함되는 방식, 다시 말해 선행하는 현실태들이 합생하는 현실태 속에 포함되는 방식은, 여건들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합생중인 현실태의 결단에 달려 있다. 또한 생성 중인 어떤 하나의 현실적 존재에 의해 통합되는 각 현실태들은 광대한 다수의 여건들 가운데 하나이며, 통합을 위한 여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통합을 일으키는 주체일 수 없다. 나아가 각각의 선행 현실태는 다수의 다른 개별적 통합에 있어서 여건이므로, 그들 자신의 개별적 본성에 있어, 이들 여건들은 그러한 통합에 대한 어떤 지배적 원리를 수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지배적 원리 즉 주체적 목적은 어떤 현실적 존재로부터 파생해야 한다. 이에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목적의 원초적 근원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즉 신의 범주를 제시한다. 따라서 신은 그로부터 모든 주체적 목적 다시 말해 지배적 원리로서의 한정성이 파생되는 궁극적인 현실태로 간주된다.

 

어떤 의미에서 각 시간적 존재는 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정신적 극에서 생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자신이 토대를 이루는 개념적 지향(conceptual aim)―그 현실세계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 존재의 결단을 기다리는 미결정성을 수반한 개념적 지향―을 이끌어 낸다.116)

 

이와 같이 신은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의 최초 위상에서 주체적 목적을 제공함으로써 그것이 현실적 존재들의 합생과정을 주도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신은 구체화의 원리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아니면 뒤엉클어져 버리고 말 상황으로부터 일정한 결과를 창출시키는 원리인 것이다.117) 현실적 존재들은 신으로부터 주체적 목적들을 수용함으로써 한정형식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함으로써 현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각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의 창조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우주의 궁극적인 창조성은 신의 의지에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는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최고의 초월적인 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서의 궁극자는 어디까지나 창조성 혹은 창조적 활동이다. 각 현실적 존재는 자기 창조과정의 자기원인이다. 따라서 신이 자신의 활동에 의해 현실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신도 하나의 현실적 존재라는 점에서 자기창조 과정의 자기원인이며, 창조성의 한 사례이다. 신은 모든 시간적 세계를 구성하는 현실태들에 의해, 그들의 주체적 목적을 제공하는 자로서 즉 그들의 구체화의 원리로서 요구된다는 점에서 모든 창조적 활동을 제약하는 원생적 조건으로서의 창조성의 원생적 사례인 것이다.

 

진정한 형이상학적 견해는 신이 이 창조성의 원생적 사례(aboriginal instance)이며, 따라서 신은 이 창조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원생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창조성을 특징지우는 것은 현실태의 기능이며, 신은 영원한 원초적 특성이다.118)

 

요약하면, 신은 우주의 섭리같은 것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다. 신은 실재의 양극인 현실성과 가능성을 포괄하고, 우주질서의 근거이며 ‘具體化의 原理’(the principle of concretion)인 그러한 존재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특수한 우주요, 공연히 상상될 수가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의 무더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구체화의 원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실적 존재의 광대한 가능성들을 현실의 세계에 국한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근거로서 신은 요청되는 것이다.

 

 

(2) 신의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과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화이트헤드는 신을 세계 안에 있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신은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나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신이 아니며, 전지전능한 자로서의 신도 아니고 理神論에서 말하는 신과도 다르다. 그의 신은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대부분의 다른 현실적 존재들보다도 훨신 더 광대하기는 해도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신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휘어감고 있고, 이 나머지 부분은 또 신을 휘어감고 있다.

 

그리고 신이 이와 같이 생각될 때, 화이트헤드는 신의 존재의 두 국면을 구별하게 되었다. 곧 ‘원초적’(primordial) 국면과 ‘결과적’(consequent) 국면이 그것이다.119)

신의 원초적 본성은

 

자신의 여건 속에 모든 영원적 객체를 포함하는 개념적 느낌의 통일적 합생이다. 이 합생은 다음과 같은 주체적 지향에 있어서 그 방향이 잡혀진다. 즉 느낌의 주체적 형식들은 영원적 객체들로부터 모든 실현 가능한 기초조건에 각기 적절한, 느낌의 관련된 여러 유혹을 구성해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120)

 

는 구절로 일차 그 성격이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원초적인 것으로서 고찰될 경우, 신은 절대적으로 풍부한 가능태의 무제한적인 개념적 실현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before)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창조와 ‘더불어’(with) 있다. 그러나 원초적인 것으로서의 신은 ‘탁월한 실재성’(eminent reality)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상에 있어 신은 ‘현실성을 결하고’ 있다.121)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로는 신의 느낌들은 단지 개념적일 뿐이고, 그래서 충만한 현실성을 결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개념적 느낌은 물리적 느낌과의 복합적인 통합을 떠나서는 그 주체적 형식에 의식을 수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으로 구별하고 신을 원초적 현실태의 추상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느낌의 충만성이나 의식을 신에게 귀속시켜서는 안된다.122)

 

말하자면 신은 사물의 바탕에 있는 개념적 느낌의 무제약적 현실태로서, 이 원초적인 현실태 때문에 창조의 과정에 대한 영원적 객체의 관련에는 질서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실세계의 온갖 특수성은 신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신의 통일성은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이라는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성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때, 결국 신의 원초적 본성은 창조성에 의해 획득되는 원초적 성격인 것이다.123)

 

그러나 신의 원초적 국면이 불변이요 무시간적이며 그 현세태는 완전하다 하다라도, 이러한 신은 영원하지만 그 영원성은 죽은 영원성일 뿐이다. 이것은 신의 창조성의 한 속성일 뿐이고, 신은 창조를 통해서만 비로소 살아난다. 그래서 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측면이 요구된다. 신의 원초적 본성에 대해 상대적인 이 측면은 신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바로 ‘결과적 본성’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이란, 현실태의 다양한 자유를 신 자신의 현실화의 조화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신의 순수한 개념적 현실태에 따르는 결여성을 보완하여 완전한 것이 되게 하는, 실재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신이다. 신의 이러한 결과적 본성은 파생적인 현실적 존재에 대한 신의 물리적 파지(physical prehension)에서 생겨난다. 다시 말해 신의 결과적 본성은 진화하고 있는 우주의 현실태에 대한 신의 물리적 파지를 말하는 것이다.124)

 

세계의 유기적 현실태들의 합성적 성질이 신의 본성(divine nature) 속에서 어떻게 완전히 표현되느냐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신의 “결과적 본성”을 구한다. 이 신의 본성은 진화하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신의 원초적인 개념적 본성(primordial conceptual nature)의 영원한 완성을 향해 퇴락함이 없이 진화해간다.125)

 

여기서 우리는, 신은 시간적인 현실태들에 대한 물리적 파지와 영원적 객체에 대한 개념적 파지를 통합함으로써 성취되는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물리적 파지의 여건인 다른 현실적 존재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적 본성에 있어서의 신의 현실성은, 모든 현실세계의 현실태들의 주체적 목적이 신의 개념적 욕구의 무한성에 기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무한성에 기반한다. 또한 그것은 현실세계의 현실태들의 생성과정과 마찬가지로, 그 욕구와 세계과정으로부터 받은 여건을 통합함으로써 현실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신의 본성은 양극적(dipolar) 이다. 신은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의식적이다. 그것은 신의 본성의 통일성에 있어서의, 그리고 신의 지혜의 변형을 통한, 현실세계의 실현이다. 원초적 본성은 개념적이며, 결과적 본성은 신의 물리적 느낌들이 신의 원초적 개념들 위에 짜여 들어간 것을 말한다.126)

 

신의 결과적 본성이 시간적 세계로부터 파생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신의 원초적 본성의 완결은 결국, 영속성을 수반한 현실태가 유동을 자신의 완결로서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유동적인 현실적 계기들은 신의 결과적 본성 속에서 신에 의해 파지됨으로써 객체적으로 불멸하게 되며,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간적 세계의 각 현실태가 신의 본성 속으로 수용될 때 신의 본성 가운데서 존재하는 현실태는, 살아서 항상 현재하는 사실로 변형된 시간적 현실태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신의 두 본성을 통해 신과 세계의 상호의존성을 구축하고자는 화이트헤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과 세계가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의 일관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과 세계가 그 현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오직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현존을 위해 타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과 세계를 이루는 현실적 존재들의 상호의존성은 화이트헤드 우주론의 기본적인 주장, 즉 우주는 활동의 과정이며, 현실태들은 생성의 과정이라는 주장의 명백한 귀결로 볼 수 있다.

 

본 <제2장>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하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사유는, 살펴본대로, 현실적 존재, 영원적 객체, 파지, 신 등의 범주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범주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엮어내는 전체적인 우주론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러한 우주론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경험을 파악하기 때문에 <제1장>을 통해 살펴본 그의 문제의식이나 철학적 방법론이 주장되는 것이다. 그의 우주론에 대한 이상의 고찰로, 이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우리들의 경험의 여러 요소들을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상호관계 속에 정초시키면서 그 속에서 ‘가치성’을 읽어내는지, 그리고 ‘미적 경험’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망루’ 위에 올라선 셈이다.

제3장 화이트헤드의 체계 내에서의 인간의 경험

 

 

앞에서 우리는 경험의 총체성을 회복하고자는 화이트헤드의 기본적인 철학적 문제의식과 이를 구현하고 있는 그의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총체성을 회복할려는 화이트헤드의 노력은 결국 인간 경험의 근원적 가치성을 주목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특히 ‘의식적 감각지각’의 우위성을 전제하는 현대 영미철학과의 대결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도 보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의 구체적인 내용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원칙상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노력을 그의 경험론의 주요내용을 이루는 지각론, 특히 그의 두가지 지각양식의 개념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지각의 두 양식(인과적 효능성의 양식과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과 전통적 경험론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그 자체 ‘경험에 대한 記述’이지만, 특히 그의 경험론은 그가 말하는 지각의 두가지 양식의 개념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앞에서 필자는 화이트헤드가 우주론적 차원에서 현실적 존재들이 관계맺는 방식 즉 다수의 여건들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 속으로 사유화(appropriate)하는 과정을 ‘파지’의 범주로 설명해내고 있음을 언급하였거니와, 이것이 인간 경험의 구체적인 양상과 관련하여서는 지각의 두가지 양식의 개념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지각의 이 두 양식을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과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으로 각각 부른다.

 

로크나 흄 등은(화이트헤드가 이들의 입장을 ‘감각주의 원리’로 규정했듯이) 경험의 원초적 양상을 감각지각(sense-perception)이라고 생각해 온 데 반해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정이 최초의 수용적 국면에서 최종적인 국면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는 것과 관련하여 화이트헤드는 기본적으로 지각을 의식 이전의 원초적인 국면에서부터 최후국면에서 나타나는 의식적 지각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인 과정으로 본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은 그런 점에서 감각자료로써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나 지각을 감각지각과 동일시하려는 견해를 명백히 거부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지각은 그 내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비감각적 지각(non-sensuous perception)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127) 그는 “의식에 있어서의 명석성은 발생적 과정(genetic process)의 제 1단계에 있어서는 명백하지 않다. 그 반대가 참에 가깝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128)고 주장하여 의식 이전의 지각의 원초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감각지각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에 해당하고 이 양태의 지각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지각양식이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이다. 즉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양식은 가장 천연 그대로의 지각이며 과거에 대한 순응적 느낌(feeling of conformation)129)으로서 합생의 최초 국면에서 일어나는데 반해,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양식은 특수한 기하학적인 연장적 관계를 예증하는 것으로서의 공간의 동시적 영역(contemporary region)의 대상화로서 이해된다. 이것은 경험의 보다 뒤의 부수적 국면에서 산출된다.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은 분명히 철학의 전통에서 주된 주목을 받아온 그런 류의 지각은 아니다. 철학자들은 흔히 내장(內臟)의 느낌visceral feelings을 통해 얻어지는 세계에 관한 정보를 멸시하고 시각적 느낌visual feelings에 주의를 집중시켜 왔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지각이라 부르는 것은 지각하는 계기의 합생에 있어서 후기 단계의 결과를 말한다. 우리가 회색의 돌에 대한 우리의 시지각을 의식에 새겨넣을 때, 거기에는 단순한 시각 이상의 무엇인가가 연루되어 있다. 그 ‘돌’을 작은 것일 때에는 날아가는 무기로 또는 큰 것일 때에는 걸터앉는 의자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그것의 과거와 관련을 맺고 있다. ‘돌’은 확실히 역사를 가지며 미래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가능태로서가 아니라 어디가지나 현실적 근거로서 연관시켜야 할 현실 세계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회색의 돌에 대한 지각 속에 있는 단순한 시각이, 그 지각자와 동시적인 회색의 형태, 그러면서도 그 지각자와 다소 모호하게 공간적 관계를 맺고 있는 회색의 형태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시각은 그 지각자와 동시적인 어떤 공간 영역이 그 지각자에 대해 갖는 기하학적인 전망적 관계를 예시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이러한 예시는 ‘회색’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회색’이라는 감각자료는 그 영역을 다른 영역과의 모호한 혼재상태로부터 구출해낸다.

 

단지 감각자료에 의해, 어떤 동시적 공간 영역을, 그것의 공간적 형태 및 지각자로부터의 그것의 공간적 전망과 관련하여 모호성으로부터 구출해내는 데 그치는 지각을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이라 부르기로 하겠다.130)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인 지각유형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을 위한 기반을 부여한다. 그러나 감각지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대부분이 제시적 직접성에만 배타적으로 근거하고 있으며, 위 인용문의 ‘내장의 느낌’과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 화이트헤드가 중시하는 ‘신체적 차원’은 무시되어 왔다. 그럼으로써 인간 경험에 있어서 의식의 우위성을 의심치 않아왔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의식은 다만 보다 근원적인 유형의 파지들이 통합을 낳게 될 여러 요소로 남아있는 한에 있어 이러한 파지들을 조명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 속에 명석 판명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우리 경험의 요소들은 경험의 기본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과정에서 생겨난 파생적인 양상들이다. 예컨대 의식은 단지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 있어서의 파지를 희미하게 조명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파지는 우리의 경험에 있어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 있어서의 파지는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의식하면서 향유하는 파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파지는 경험주체의 합생에 있어서의 후기의 파생물이다.131)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기억은 특히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의 좋은 예를 제공한다. 그것은 ‘경험의 현재의 계기 내에서의 직전 과거의 내재성’(the immanence of the immediate past in a present occation of experience)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인간경험론에서는 근원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는 말한다. “현재를 통해 다시 살게 되는 직전의 과거는 비감각적 지각의 가장 두드러지는 예이다.”132) 현재를 ‘활기차게 하고’ 미래를 향해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직전의 (즉각적인)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을 통해 직전의 과거는 현재의 경험 내의 한 생생한 요인이 된다.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은 “애매하고 조절되지 않고 정서로 꽉찬 퍼셉타(percepta, 지각내용)를 산출한다. 그것은 직전의 과거로부터의 파생의 감각을 산출하며 즉각적인 미래로의 행로에 대한 감각을 산출한다.”133) 이에 반해 제시적 직접성에서 일어나는 퍼셉타는 “판명하고 한정적이고 조절가능하고 즉각적인 향수에 알맞고 과거 혹은 미래에의 관련성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이다.”134)

 

한편으로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세계의 연장적 관계(extensive relation)들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의식이 존재하는 지각양식”으로 기술되는데, “이들 관계들은 공간의 연장성과 시간의 연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양식에 있어서 동시적 세계는 연장적 관계들의 연속체로서 의식적으로 파지된다.”135)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양식이 신체에 의해 느껴지는 경험의 특징으로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타나며 무의식적이고 불확정적이고 애매하고 복합적이며 강요된 경험인데 반해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양식은 전자의 지각양식에 의한 감각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나 추론되며, 고급한 유기체들만이 갖는 경험양식이다. 그리고 이때의 ‘여건’은 한정된 위치만을 고수하는 명확히 분절된 감각자료로서 과거나 미래와의 연관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정서적으로 보다 중간적인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견해와 감각자료를 말하는 지각이론들 간의 중요한 차이점은 화이트헤드에게는 감각자료가 경험의 궁극적인 원료로서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감각자료는 그 자체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며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그것들에 대한 설명은 현실적 존재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의 대답은 감각자료는 상대적으로 복잡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사회들의 구성원인 고단계의 계기들 내에서 합생의 보완적인 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명석하고 판명한 감각자료의 산출은 최소한 동물의 신체들의 ‘주요한 계기’에서 일어난다. (특히 인간에게서이긴 하지만 최소한 고등한 동물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감각자료는 언제나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에 의해 공급되는 데이타로부터 일어난다. 그리하여 화이트헤드는 신체적 지시성을 인간의 감각지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근본적인 요소로서 취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인간의 지각의 원초적인 양식은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이며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과성의 개념은 인류가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경험 가운데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136)

 

요약하자면,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양식은 ‘신체’에 의해 느껴지는 경험의 특징으로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타나며, 무의식적이고 불확정적이고 애매하고 복합적이며 강요된 경험이다.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양식은 첫번째 지각양식에 의한 감각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거나 추론되며, 고급한 유기체들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양식이다. 이 여건은 한정된 위치만을 고수하는 명확히 분절된 감각자료로서, 과거나 미래와의 연관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정서적으로 보다 중간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인과적 효능성의 차원에서의 경험이 인간 경험의 근원적인 가치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이 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특히 전통적인 경험론 철학의 경험관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내용을 다룸으로써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경험관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제1장에서 보았듯이 감각주의적 인식론에 집착하느라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 혹은 적어도 그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의 유보를 선호하는 철학은 화이트헤드의 판단에 따르면 정상적인 인간의 공통된 경험들을 포착하는데 실패하기 쉽다. 이는 보다 근원적인 경험양태로부터의 파생적인 추상일 뿐인 ‘의식적인 감각지각’에 대한 과도한 주목 때문이다.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의 우선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그래서 대체로 영미의 최근의 철학에 만연되어 있는 ‘감각주의적 경험론’(sensationalist empiricism)의 풍조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거기서는 인간지식 일반에 대한 흄의 분석을 좇아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왔다. 그러나 흄의 분석은 순전히 경험론적 기초에 근거해서 인간지식을 설명하고자는 시도는 어떤 것도 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감각주의적 경험론 학파로서 로크와 흄은 주된 인물들이고, 화이트헤드의 평가에 따르면 이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장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들의 장단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수정된 경험관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그들이 안고 있는 장단점을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구절을 들어보자.

 

한 사람은 그 학파의 주요 학설의 조명 하에서 일관성은 없지만 충분성을 가지고 경험을 바라보려는 철학자이고, 또 한 사람은 그 학파의 학설에 엄밀한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자인데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그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곤 한다.137)

 

여기서 전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로크이고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또 그의 비판과 대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화이트헤드가 ‘감각주의자의 이설’(sensationalist doctrine)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앞 장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다음의 두가지 원리, 즉 주관주의 원리(subjectivist principle)와 감각주의 원리(sensationalist principle)이다.

 

그런데 로크는 경험은 주관적 형식이 없는 상태에서 여건을 주관적으로 향수함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감각주의 원리를 수용했다. 이것은 로크가 ?인간오성론?의 처음 두 책을 쓸 때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그 책들에서 그는 때로는 주관주의 원리와는 모순되는 견해도 피력하고 있고, 세번째 네번째 책에서는 화이트헤드 자신의 입장과 비슷한 견해를 선호하여 저 주관주의 원리를 암암리 거부한다.138) 로크에게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화이트헤드가 생각하는 개념은 그의 ‘힘이론’(doctrine of power)이다. 그런데 이 힘이론은 나중에 흄이 감각주의적 경험론의 근본전제들과는 모순됨을 증명하기도 했지만, 로크는 애초부터 자신의 철학을 어떤 절대적인 수미일관성 위에 세우는 것보다 경험의 충분성 위에 세우는데 사실은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판단에 따르면 로크는 충분성을 추구하는 어떤 이론에서도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는 경험사실들을 제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로크에게서 발견되는 바 힘의 개념은 두가지 측면을 가진다. 인간경험의 상식적 차원에서 우리는 다른 개체나 대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과 영향을 받는 능력 둘 다를 동시에 안다. 로크식 용어로 말하자면 ‘외적 사물’(exterior things)의 차원에서 우리는 “불은 금을 녹이는 힘을 가지고;…금은 녹는 힘을 가진다”139)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힘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난점은 감각주의자의 이설에 근거해서는 힘의 관념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로크는 힘의 관념은 그 자체 하나의 단순관념에 불과하고 이 단순관념은 실체에 대한 우리의 복합관념의 주된 구성분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로크의 이러한 견해는 입장을 달리 하는 다른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자기 철학의 주된 원리들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힘의 관념은 만약에 경험이 그 자체 감각가능한 속성들에만 한정되는 한에서의 여건의 감각을 통한 단순한 수용으로만 구성될 경우 경험적 용어로는 설명될 수 없다. 힘은 단순한 감각적 속성이 아니다. 요컨대 힘을 단순관념으로 보는 로크의 견해는 그 자신이 말하는 경험이론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자체 힘의 관념인 감각적 속성은 없다. 만약 힘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되려면 그것은 로크가 말하는 감각의 단순관념이나 흄이 말하는 인상 등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로크의 힘이론이 로크가 속으로는 거부하면서도 겉으로는 지지하는 주관주의 원리와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보았다. 화이트헤드의 판단에 따르면 로크의 이러한 통찰과 ‘상식의 구출’(deliverance of common sense)―즉, 우리는 우리의 바깥에 있는 사물들에 의해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은 선천적 감각주의(a priori sensationalism)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보다도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140)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이러한 경험의 ‘명백한’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의 곤란스러움은 로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데카르트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는 바의 주관주의 원리가 실체-속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전통적인 강조와 일관되게 연결이 되면 이는 유아론의 입장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 흔히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암암리의 모순들을 끌어들임으로써’141) 이를 피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로크의 힘이론이 시사하는 바를 화이트헤드는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의 진정한 주제가 ‘경험의 계기’(occations of experience)의 구성에 대한 것이라고 여겼으며, 로크의 암묵적인 형이상학에의 관여는 유기체철학을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142) 그리고 로크 자신은 실체-속성의 범주에 대한 믿음과 주관주의 원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주관주의 원리에 대한 그의 공언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실체-속성 범주는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는 주관주의 이래로 더 이상 우선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위해서 그 자신 이외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실체의 개념은 주관주의 원리와는 양립하지 않는 객관주의적 형이상학을 이미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자신의 유기체철학에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그 현실적 존재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 사물들’임은 앞에서 이미 얘기되었다―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 이론은 그가 로크와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사항과 관련이 된다. “로크의 진정한 논제는 현실적 존재가 향수하는 갖가지 유형의 경험을 분석하는데 있다. 그런데 이 완결적인 경험이란 그 현실적 존재의 즉자적 대자적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143) 현실적 존재들은 그 자체가 ‘경험의 방울들’이며, 변화를 겪는 변치않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라는 전통적인 개념은 화이트헤드에 의해 거부되며, 이와 함께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범주로서의 실체-속성이라는 개념도 거부된다.

 

현실적 존재의 이론을 제안하면서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에 의해 현대철학에 도입된 주관주의 편향에 실질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관주의 원리는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reformed subjectivist principle)로서 데카르트적 주관주의 원리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의 이 ‘수정’은 실체-속성 범주의 거부와 맥을 같이 하며 동시에 경험하는 주체와 경험의 대상 간의 임의적인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에 의하면, “전체 우주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다.”144) 그래서 “주관적 경험의 요소로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도 철학적 도식 속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존재론적 원리이다”고 규정하는 것이다.145)

 

주관주의 원리를 수정하고, 또 감각주의 원리와 실체-속성 범주를 거절함으로써 화이트헤드는 마침내 현대철학에 만연해 있는 주된 난점들을 피하면서 동시에 로크의 힘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실상도 분명하게 그려낸다.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 현실적 존재의 다른 현실적 존재에 대한 힘은 전자가 후자를 구성하는 데 어떻게 객관화되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46) 그리고 그러한 객관화가 화이트헤드에 의해 인정되는 이른바 지각의 두 순수양식 즉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과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 따라 ‘인과적’일 수도 ‘제시적’일 수도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흄의 입장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을 만나게 된다.147)

 

화이트헤드는 흄이 도달한 결론들은 감각주의적 경험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확신했다. 인간 경험의 본성에 대한 흄의 최초의 가정들에서 회의적 결론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결론들이 일상적인 경험의 사실들과 어긋나기 때문에 최초의 전제들에 무언가 잘못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흄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저들 전제들에 대한 집요한 공격의 형태를 취한다. 의식적인 감각지각을 경험의 근본양식으로 주목하는 것은 경험의 참된 본성을 역전시키는 것이고 이러한 역전은 극복할 수 없는 난점들을 야기시킨다고 화이트헤드가 확신하고 있음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그러한 난점의 하나가 인과성의 자격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제기된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그 문제는 의식적인 감각지각이 발견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가정하는 철학자들이 인과적 연관성에 대한 어떠한 감각인상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기된다. 이에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을 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하고, 신체에의 의존성 때문에 일상적인 감각지각은 그 자체 인과적 효능성에 의존함을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신체적 경험은 근본적으로, 제시적 직접성이 인과적 효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경험이다. 흄의 이론은 그 역시 경험인 인과적 효능성을 제시적 직접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 있다.14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시적 직접성의 본성이나 역할이 유기체철학에서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그것의 중요성은 그릇 해석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감각지각은 인간의 의식적인 경험에서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에 주된 지각양식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흄도 그래서 그러한 경험양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견해에서 보면 흄은 결과적으로 의식적인 감각지각을 인간경험의 모델로 채택할 때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증명한 것이며, 그래서 감각주의적 경험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에 있어서 주된 표적이 되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논리적 우선성 혹은 단순성이 물리적 우선성이나 단순성을 보증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감각인상은 논리적으로 물리적 파지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다.”149) ‘붉은 반점’ 혹은 ‘푸른 공간’ 등과 같은 고도의 감각자료는 우리의 시지각 장에서 명료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래서 그것들은 우리의 경험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로서 별다른 의심없이 채택되어 왔다. 감각의 단순관념에 대한 이론을 얘기하는 로크나 감각인상에 대한 이론을 얘기하는 흄은 복합관념의 승인을 통해 인간경험에서 그러한 고도의 감각자료가 물리적으로도 우선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론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쉽게 도출된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우리는 공통의 세계 속에서 능동자와 수동자로서의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인지된 감각인상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아이는 처음에 개별적인 사물들의 복합적인 외재성을 뒤섞인 한정의 형식들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으로 희미하게 설명하고, 그 다음에 가서 그러한 형식들에 대한 그의 인상들을 하나하나 풀어 놓는다. 젊은이는 감각인상과 함께 춤추는 경험을 시작하고 나서 상대가 누구인지를 추측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경험은 그 반대의 경로를 취한다.150)

 

계속해서 화이트헤드는 흄과 대비되는 진정한 경험론은 “물리적 느낌들은 본래적으로 벡타이며, 합생의 발생적 과정은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요소들을 도입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본다.151) 흄에 따르면 감각인상은 결국 어떤 미지의 원인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는 완전히 설명불가능”하다.152) 그는 그러나 그러한 원인들이 자신의 경험론에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화이트헤드에게서는, 감각인상의 원인은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현실적 존재들(혹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 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경험의 여건으로서 객관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객관적으로 불멸인 존재자들에게서 발견한다.153)

 

흄의 분석이 지니는 오류를 증명하고 나아가 흄의 분석이 경험의 충분성 요건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대단히 단순한 한가지 경험을 든다. “어둠 속에서 전기불이 갑자기 들어오면 우리는 눈을 깜박거린다.”154) 흄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 쪽에서의 그 눈의 깜박임은 비슷한 경우의 반복으로 야기되는 습관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제시적으로 직접적인 빛의 번쩍임에 습관적으로 눈의 깜박임이 뒤따르는 것으로 되고, 이 경우 전체 경험은 제시적 직접성에 의해 분석된다. 그러나 흄의 분석에는 왜 빛의 번쩍임이라는 감각자료의 향수가 눈의 깜박임이라는 물리적 사건을 불러들이는지에 대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상식의 차원에서나 생리학의 차원에서나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빛의 번쩍임이 어떤 식으로든 눈의 깜박임을 야기시키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흄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생리학적 설명은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못한다. 흄의 이론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가 그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우주의 한 측면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155)

 

말하자면 화이트헤드는 만약 우리가 빛이 들어올 때의 우리 자신의 눈을 깜박거리는 경험에 주의깊게 주목을 한다면 우리의 그 상황에 대한 분석은 흄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을 부정하는 경험이론에 따르는 사람이라면 빛의 번쩍임과 눈의 깜박임 간에는 아무런 인과적 연관성도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번쩍임이 나를 깜박거리게 했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진술이 의심을 받는 경우라면 그는 “나는 그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156)

그런 점에서 인과성의 지각에 대한 흄의 부정은 (이 부정이 제시적 직접성에 지각을 한정할려는 그의 시도에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관련하여 증언하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상반된다.

 

물론 흄의 이론이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들의 경험과 조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도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에 직면하여 흄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의 이론에 대한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흄의 이론이 안고 있는 바로 그 ‘일관되지 못함’을 꼬집어내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흄은 그 자신의 인과성의 지각에 대한 명백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감각인상을 설명할 때는 신체적 지시성을 가정함으로써 인과성의 지각을 암암리 전제하고 있다. 또 그는 최소한도 지각의 재료로서의 감각자료의 산출에 있어서는 인과적으로 효능이 있는 상식적인 ‘대상’세계를 가정하고 있다. 또 그는 자신의 철학으로는 인과성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인과 결과의 중요성을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행,’ ‘반복,’ ‘습관’ 등의 개념들도 감각인상들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과성과 마찬가지 운명인데도 불구하고 이들 개념들에 종종 호소하고 있다. 말하자면 흄은 일상언어에는 내재되어 있으나 그 자신의 인식론적 관점과는 일치되지 않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암암리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흄에 대해 제기하는 주된 비판은 그러므로 흄은 자신이 암암리 신체적 차원에서의 지시성을 전제는 하면서도 지각에서 인간의 신체가 행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설명해내는 일은 완전히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에 대한 그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미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는 흄의 ?인간오성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눈에 의해 지각된다면 그것은 색임에 틀림없고, 귀에 의한다면 소리이며, 혀에 의한다면 맛이며, 다른 감각들도 이 관계는 마찬가지이다.157)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흄의 얘기는 제시적 직접성에서 기능하고 있는 감각데이타가 인과적 효능성에서 기능하는 ‘눈,’ ‘귀,’ ‘입’ 때문에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얘기는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158)

 

화이트헤드는 흄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때의 표현방식과 관련하여 거기서 그가 자기 철학과는 모순되는 이중적 지시성을 사용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 ‘색을 지각하는 것으로서의 눈’(the eye as perceiving a color)이라는 표현은 감각자료에 대한 지시성도 포함하고 그 지각에 관여하는 감각기관으로서의 눈에 대한 지시성도 포함한다. 만약에 흄의 입장에서 이 경우 지각의 대상이 어떤 색을 가진 물리적 대상이라는 점이 인정된다면(그리고 이것은 흄이 일괸되게 사용하는 말의 방식이라고 본다) 다음과 같이 결론, 즉 지시성의 두 측면에는 어떤 인과적 연관성이 들어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대상은 지각에 대해 원인적 관계에 있게 되고 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흄이 다른 한편으로 자기 철학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감각자료로부터 그 감각자료의 원인이 되는 어떤 지각대상으로의 추론은 있을 수 없다. 감각자료로부터 눈으로의 추론도 물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흄이 말하는 눈으로 색을 지각하기는 인과성을 전제한다고 보아야 하며 이는 그의 인식론적 입장과 모순된다. 화이트헤드의 판단에 따르면 지각에 대한 진술들에서 보이는 이중적 지시성은 흄의 이론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요컨대 흄이 자신의 인식론을 말하는 것과 자신이 일상언어를 사용할 때 암암리 전제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화이트헤드는 후자를 명백히 지지한다. “유기체철학이 [‘이러저러한 광경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눈’의 자명성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결론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지각의 근원적인 사실은 지각이 이러저러한 경험을 갖는 인간 신체의 선행하는 부분의 객체화를 데이타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하는데 이것이 그가 강조하고자 하지만 현대의 지각이론들에서는 흔히 간과된 ‘신체의 참여성’(withness of the body)이다.159)

 

흄의 모순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의식적인 감각지각을 경험의 근원적인 (혹은 유일한)양식으로 주목하는 그러한 경험이론이 과연 적절한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대답은 분명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접근은 위에서 말한 ‘신체의 참여성’을 전혀 고려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감각과 정서적 느낌들 간의 정당한 관계도 역전시키고 만다고 보았다. 그는 말한다.

 

다른 현실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파지를 사적인 감각의 중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은 순전히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반대의 학설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 즉 객체화의 보다 원초적인 양태는 정서적 색조를 통한 것이며, 단지 예외적인 유기체의 경우에만 감각을 통한 객체화가 효과적으로 부수된다.160)

 

이것이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이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서의 지각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의 이유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점은 어떤 의미에선 흄도 의식적인 감각지각이 경험의 유일한 의미있는 양식은 아니라는데 암묵적으로는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각지각에 기초하는 자신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인과성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그는 ‘경험’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인과의 관념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특정의 대상들이, 과거의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항상 서로 연결되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161)

 

흄에게 있어서도 ‘경험’은 의식적인 감각지각보다도 사실은 더 넓은 것이다. 전자에는 ‘습관’(habit)이나 ‘관습’(custom)도 포함되지만 후자는 인상과 관념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흄의 감각주의적 경험론은 흄 자신에게 있어서조차도 충분한(adequate) 경험론이 못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정서성(혹은 ‘느낌’)으로서의 인간 경험의 가치성

 

그래서 흄식의 감각주의적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화이트헤드가 내세우는 대안은 의식적인 감각지각이 더 근본적인 지각형식인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에서의 지각형식에 의존함을 보이고 이 두 경험유형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모색되고 있다.

 

이러한 ‘원상회복’을 통해서 화이트헤드 자신이 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럼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치’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바로 경험의 가치보유적 속성에서 결정적으로 발견된다.

 

존재는 그 본성에 있어 가치강도(value-intensity)를 유지시키고 있다. 또한 어떠한 단위존재도 타자와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각각의 단위존재는 그 나름의 권리를 가지고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가치강도를 유지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은 가치강도를 우주와 공유하게 된다.162)

 

현실태(actuality)는 “그 자신의 자기향수(self-enjoyment) 때문에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향수와 미래로 향한 이행을 포함하는 그 무엇”으로 기술된다.163) 다시 말해 “모든 궁극적인 이유는 가치로의 목표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것은 가치의 내적인 획득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삶의 본질이다.”164)

인용구들은 모두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들의 경험함에 의거한 실재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경험유형이 과연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 경험이 ‘정서적’이라는 점이다. ‘가치강도’라든지 ‘자기향수’와 같은 용어들은 경험의 이러한 정서적 속성을 암시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언급하기도 한다.

 

생명은 과거로부터 파생되어 미래를 지향하는 감정의 향유이다…… 감정은 두가지 방향에서 현재를 초월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생겨나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수용되고, 향유되고, 전달된다.165)

 

AI의 다음 구절도 경험의 정서적 기초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

 

계기는 관련되는 대상들로부터 생겨나며 다른 계기를 위하여 대상의 자격 속으로 소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서적 통일성으로서 절대적인 자기향유의 결정적인 순간을 향유한다…… 세계의 창조성이란 스스로를 새로운 초월적 사실 속으로 내던지는 과거의 약동하는 정서이다.166)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점은 우주 그 자체의 가치적 속성으로서의 정서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현실적 존재의 ‘합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에 의해 저 계기에 객관적으로 공급되는 여건의 다수성이 자신의 내적인 구성 속으로 수용되고 ‘주관적 느낌의 통일성’에로 결과되는 바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여건을 수용하는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가지는’ 주체, 그것들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변형시키는 바의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가 경험이다.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그것의 환경(즉, 객관적인 불멸성으로 보존되며 창조적 전진의 행로를 조건짓기는 하지만 결정짓지는 않는 과거의 계기들로써 저 계기에 공급되는 우주)에 의해 공급되는 가능태와, 그것(즉, 신의 원초적 본성에 의해 공급되는 영원적 객체들의 영역)을 향해 열려있는 가능성의 범위에 의해 공급되는 가능태로부터 생겨나는 일종의 유일하고 독특한 ‘정서의 약동’이다.

 

느낌의 이 통일성을 획득함으로써 존재의 주관적 목표의 만족은 달성되고 현실적 존재는 경험하는 주체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그리하여 주관적 즉각성으로부터 객관적 불멸성에로 이행하며 다른 현실적 계기들의 경험을 위한 여건이 된다. 이러한 방식에서 현실적 존재는 두가지 구별되는 국면―즉,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자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전통철학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주체이자 객체이다. 그러나 이 이중적인 측면이 ‘인식하는 자 knower’와 ‘인식되는 것 known’ 간의 관계로서 해석될 수는 없음은 앞서도 누누이 지적하였다. ‘인식 knowledge’은 현실적 존재의 경험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의 이 두 측면은 합생의 과정 동안의 주관성의 자기향수 내에 있는 바로서의 존재와 다른 창발(emergence)하는 계기들 내에서의 어떤 완성된 성분, 어떤 가능적인 성분으로서의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주체’(subject)이자 ‘자기초월체’(superject)이다.

 

현실적 존재의 자기초월체적 속성이 주체적 속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얘기는 어떤 주어진 존재의 합생의 과정은 자기초월체의 생성이며, 그것은 그 완성에 있어서 동일한 존재라는 얘기이다. 주관적 즉각성을 향수하는 존재와 그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객관적 불멸성에로 이행하는 존재는 동일하다. 현실적 존재의 이 이중적 측면은 로크의 힘이론의 이중적 측면에 대응한다. 어떤 주어진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다른 현실적 존재들(이것들은 객관적으로 불멸의 것이 되었다)에 의해 영향을 받고 다시 그 속에서 그것이 객관화되는 바의 잇따르는 존재들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에 따라 객관적 불멸성의 ‘존재’로 이행한 모든 현실적 존재는 각각의 새로운 합생의 ‘생성’을 위한 가능태가 되고, “우주 내의 모든 항목은 각각의 합생에 포함된다.”167) 그리고 어떤 현실적 존재의 합생이 ‘우주의 모든 항목’을 포함하는 방식은 바로 저 항목들의 ‘파지’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은 제25번째 설명범주이다.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합생과정의 마지막 위상은, 완전히 결정된 하나의 복합적 느낌이다. 이 마지막 위상은 ‘만족’(satisfaction)이라 불린다. 그것은 (1) 그 발생과 관련하여, (2) 그 초월적 창조성에 대한 객체적 성격과 관련하여, 그리고 (3) 그 우주의 모든 항목 하나하나에 대한 ―긍정적 내지 부정적인 ― 파지와 관련하여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 (PR, 38)

 

과거의 계기들은 닫혀진 것, 죽은 것이다.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결코 변화될 수 없다. 그것들은 미래의 계기들을 조건지우는 ‘완강한 사실’168)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 합생의 주관적 즉시성에 있어서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스스로의 자기결정을 제외한 어떠한 결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제9범주적 제약에 따르면, ‘각 개별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내적으로는 결정되고 외적으로는 자유이다.’169) 비록 그로부터 계기가 생겨나는 바의 여건은 저 계기의 전개를 조건지우지만, 그것은 계기가 자신의 여건(이 여건은 무엇이 생성될 것인가를 결정한다)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가 자신의 사실계(즉, 과거 계기들의 객관화)로부터 물려받는 바의 것은 자신의 유효한 원인을 구성하지만 자신의 최종적 원인은 (이것은 만족에서의 자신의 주관적 목적이다) 스스로의 결정에 복종한다.170) 한 현실적 존재의 생성은 그것이 과거(이 과거는 현실적 존재에다 우주의 창조적 전진 내에서의 어떤 한정적인 위치를 준다)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그 자신의 자기창조 과정의 ‘독자성’(aloneness) 내에서의 자기결정 간의 산물이다. 동시발생하는 현실적 존재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주관적 즉시성에서의 각각의 존재는 닫혀있고 사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가 객관적 불멸성이라는 공공성에로 이행하는 것은 주관적 즉시성으로부터의 소멸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합생의 과정에 있는 다른 존재의 합생하는 존재에 의한 파지란 없다. 이는 곧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동시발생하는 다른 현실적 존재의 어떠한 결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보증해준다.

 

현실적 존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을 연상시키는데 양자 간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관점에서 우주를 반영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과거 전체는 스스로의 자기전개 속에서 ‘고려되고,’ 그것은 다시 모든 후속하는 현실적 존재에 의해 고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우주의 ‘반영’에도 불구하고 각 현실적 존재 혹은 모나드는 외부로부터의 결정으로부터는 자유롭고, 그것의 전개과정은 내부로부터 인도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와 화이트헤드 간에는 두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변화를 겪는 개별적인 실체들로 생각한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들을 지속하는 실체들로 여기지 않았으며,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미리 확립되어 있는 조화’ 대신에 ‘새로움에로의 창조적인 전진’이 있다.171)

 

이 두사람의 공통성은 우주를 한정적인 통일성의 전개로서 그리고자 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자기결정하는 개별자를 허용하는 데 있다. ‘보편자에 의해 속성지워지는 실체’를 인정하는 전통적인 실재관에 조응하면서 우주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볼려는 시도들은 스피노자나 브래들리 식의 극단적인 일원론(‘실체’ 에 입각한 해석에 의존하는)으로 귀착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를 강조하는 철학들은 우주 내의 유의미한 통일성들을 기술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존재 thinking thing’로서의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자아를 넘어 우주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대한 난점을 겪었으며, 우주에 대한 인식이 감각가능한 경험들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고 본 흄에 있어서는 어떠한 진정한 연관성도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바의 세계가 남겨진다. 이 두 극단의 어느 것도 우리의 상식적인 견해 ―즉, 일상의 인간은 스스로를 세계 내의 개별자로서 발견한다― 와는 어긋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와 화이트헤드는 둘다 어떤 공통의 우주 속에 진정한 개별자들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를 철학적으로 설명해낼려고 한 것이라 하겠다. 이 경우 문제는 극단적인 일원론과 극단적인 다원론 사이를 안전하게 ‘항해’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상대성의 원리는 존재론의 원리가 극단적인 일원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공리이다.”172)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상대성의 원리는 존재론의 원리가 극단적인 다원론으로 빠지는 것도 지켜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의 원리에 따르면 유일한 이유들은 현실적 존재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해 채택되는 수정된 주관주의의 원리는 “전체 우주는 주관의 경험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173) 그러한 설명들이 현실적 존재들에 근거하고 있는 한 그러한 설명을 떠난 다른 설명은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우주의 통일성을 보존하는 연관성의 이론이 없다면 존재론의 원리는 극단적인 다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존재론의 원리는 상대성의 원리가 극단적인 일원론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실적 존재들의 진정한 개별성을 반영하는 이론이 없다면 상대성의 원리는 극단적인 일원론의 입장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렇다면 일원론과 다원론의 양 극단을 피하고 우주의 공고성과 자기결정하는 개별자들의 진정한 개별성을 공히 그려내고자 한다면 두 원리는 공히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들의 자기창조와 ‘새로움에로의 창조적인 전진’에 대한 그 자신의 강조와 함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화이트헤드의 설명이 과연 우주의 공고성을 올바로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세계 내의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들이 일순간의 것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느낌의 고동들’이라면, 전체 우주는 단지 ‘무의미함의 소동’에로 해체되어버릴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174) 이는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극단적 다원론에로 빠질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여기서 이 문제의 요점이 ‘세계 내에서의 한 개별자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인간’과 그 ‘인간의 경험’을 화이트헤드가 과연 제대로 설명해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사실 화이트헤드가 “철학적 사유를 우리 경험의 가장 구체적인 요소들에 근거하게”175) 만들고자 시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듯한 현실적 존재의 이론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끊임없이 소멸하는 현실적 존재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실재에 대한 견해는 바위나 나무, 사람, 동물―그런데 이것들은 덧없이 지나가는 느낌의 계기들은 ‘아니다’―등이 거주하고 있는 바로서의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의 모습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의 ‘경험의 방울들’이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러저러하다고 믿는 바인 인간이라는 유형에로 이행하느냐는 문제도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나’는 단지 ‘느낌의 고동’의 한 연속이 아니라 오히려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의 ‘지속하는 자아’인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경험의 지속적인 주체요 변화의 소재지로서의 실체적인 자아라는 개념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유에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실체라는 범주에서 현실적 존재라는 범주로의 이행이 어렵게 보여서 그런 것일 뿐 일단 자신의 유기체철학의 기본 전제들을 이해하고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물론 화이트헤드 자신도 우주의 응집성과 연속성을 설명하는 데에 실체 개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실체 개념을 통해 이루고자는 시도는 극복하기 어려운 수많은 난점과 부딪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인 해결책으로서, 실체-속성의 범주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피하면서 동시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 내의 개별자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설명을 적절하게 해낼 수 있는 그러한 실재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말하는 ‘결합체’나 ‘사회’와 더불어 결정적으로는 ‘패턴’ 혹은 ‘그룹’의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주어지고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현실적 계기들은 결코 지속하지 않는다. 그러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하는 인간, 건설되어서 파괴될 때까지 ‘지속’하는 집, 수천 수만년 동안 ‘지속’하는 바위 등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그것들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가? 이에 대해, 그것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계기들의 그룹이고 패턴이라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요컨대 바위나 집, 사람과 같은 대우주적 대상들의 지속은 소우주적 존재들의 그룹을 특징짓는 패턴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 계기들은 계기들의 한 시리즈를 통해 전달되는 패턴들 속에서 스스로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되고 시리즈를 통해 이행되는 것은 패턴이며, 이것이 지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이, 말하자면, 전통적인 철학의 중요문제인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방식이다. 인간의 자기동일성이 어떤 절대적인 동일성이 아니고 연속하는 계기들을 통해 자아를 특징짓는 어떤 질서의 유형으로 파지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물질과 정신을 두고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이 강좌의 이론에 의하면, 가장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는 지각의 한 특정한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건들의 통로를 통하여 지속되는 물질과 정신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의 통로로 부터 그들의 특수한 개체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 조각의 물질의 특성은 그것의 통로에서 일어나는 각 사건에 공통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유비적으로 한 정신의 특성은 그 정신의 통로의 각 벌생사건에 공통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각 소립자와 그리고 각 정신은 하나의 종속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현실세계에 유비된다.176)

 

사실 화이트헤드가 어떤 질서(혹은 패턴)의 개념을 도입하여 우주의 응집성을 설명하고 있음은 결합체와 사회에 대한 그의 설명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보편적 체계에는 단순한 자연이론 뿐만이 아니라 경험주체의 ‘사회’이론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데, 이 때 중요한 개념은 바로 ‘사회’(society)와 ‘결합체’(nexus)라는 개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사회와 결합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세계의 연대성’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현실적 존재는 미시세계적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람, 나무, 집 등과 같은 ‘거시세계적 존재들’이다. 이 거시세계적 존재들은 그럼 어디서 온 것이며, 우주 내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 것인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것들은 다름이 아니라 현실적 존재들의 집합체이다. 그리고 이 집합체를 결합체 내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의에 있어 ‘사회’라는 말과 ‘결합체’라는 말은 서로 대체가능하긴 하지만 결합체의 집합은 사회의 집합보다 외연이 넓다. 사회는 모두 결합체이지만 모든 결합체가 다 사회는 아니다. 요컨대 개체화에 의한 새로운 합동의 창출이 합생이며, 합생으로 생긴 고차적인 현실적 존재가 결합체이고, 결합체보다 한층 복합적인 차원이 사회라고 불리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지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와 파지가 실재적이고 개별적이고 개체적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실재적이고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共在, togetherness)라는 실재적인 개별적 사실들이 존재하게 된다. 현실적 존재들의 공재라는 이와 같은 개체적 사실은 모두 ‘결합체’라 불린다.177)

 

여기서 우리는 자연 자체의 변화와 이에 대한 주체의 다양한 관점 변화는 하나의 범주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곧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의 뜻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초월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의식적 주체를 애당초부터 배제하는 반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유기체적으로 변화하고 형성되는 주체를 강조한다. 실재론적으로 현실은 하나의 현실이 있을 뿐 내면의 현실이 외적 현실과 대립되어서 나타나지 않으며 이 둘은 상호관계를 통해 늘 하나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취지에서 ‘현실적 존재’를 어떤 ‘불변적 주체’가 아닌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험하는 주체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결합체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사회적 질서’를 향유하고 있다. (1) 그 결합체에 포함된 각 현실적 존재들의 한정성에 예시된 공통요소로서의 형상이 있을 것, (2) 그 결합체의 각 구성원이 그 결합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파지함으로 말미암아 그 결합체에 부과되는 조건들에 근거하여, 이 공통요소로서의 형상이 결합체의 각 구성원에서 생겨나고 있을 것, 그리고 (3) 이 때의 파지들이 그 공통형상에 대한 긍정적 느낌을 포함하고 있음으로 해서 재생의 조건을 부여하고 있을 것 등이다. 그러한 결합체를 ‘사회’라 부르며, 거기서의 공통형상은 그 사회에 대한 ‘한정특성’(defining characteristic)이다.178)

 

여기서 우리는 지속하는 결합체는 사회이며 사회의 지속은 사회를 통한 어떤 공통된 형식의 전이(transmission)에 있다고 보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읽을 수 있고,179) 전통적인 ‘실체로서의 인간’관을 ‘현실적 계기들의 사회로서의 인간’관으로 대체하는 입장도 확인할 수 있다.180)

 

필자는 현실적 계기들의 사회로서 인간을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설명이 인간의 경험을 주로 의식적인 감각지각을 통해 좁게 파악하는 견해들에 비해 인간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 훨씬 포괄적이고 융통성있는 기초를 제시한다고 할 때, 그 논증의 중요한 고리에 해당되는 내용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경험의 저 뒤바뀐 관계―즉 인과적 효능성의 경험양식이 제시적 직접성의 경험양식의 기초를 이룸에도 후자를 경험의 기초로 보는 것―를 역전시키는 화이트헤드의 노력은 신체를 구성하는 사회들의 사회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그리고 마음을 보다 넓은 사회에 의존하는 일종의 계기적으로 질서화된 사회로 보는 시각을 통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제4장 미적 경험

 

 

앞 장에서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두가지 지각양식 개념을 주축으로 화이트헤드가 생각하는 경험의 기본 양상을 살펴보았다. 두가지 지각양식 간의 구분을 통한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항은 결국 인간의 경험이란 어떤 ‘통일된’ 주체로서의 인간이 ‘통일된’ 대상을 ‘인식’(혹은 ‘의식’)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인식’이나 ‘의식’ 이전의, 이른바 ‘현실적 존재’의 어떤 우주론적 메카니즘 하에서 그 근원적 속성이 물어져야 하는 그러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식적인 감각지각’에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케 하는 흄 류의 경험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과적 효능성’의 차원에서의 경험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인간 경험의 근원적 가치성을 이 차원에서부터 길어올릴 때의 화이트헤드의 기본 주장이다.

 

이제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경험론을 바탕으로 해서 ‘미적 경험’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미적 경험의 존재론적 특성이 무엇인가는 문제로 논의의 무게중심을 옮기고자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얽혀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의 일반적 문맥에서는 경험과 미적 경험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의 성격이 고찰된 앞장에서 사실상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도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적 경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예비적 고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경험과 미적 경험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적 경험의 상대적 특수성은 주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적 경험의 존재론적 특성을 보기 위해 보다 선명해져야 할 부분으로 필자는 다음의 몇가지를 제기한다.

 

첫째, 그의 우주론의 전체 틀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기본적인 위상이 명백해져야 하리라고 본다. 둘째로, 그가 ‘미적 경험’이라고 할 때의 이 ‘미적’의 의미가 좀더 천착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세째로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얘기되는 두가지 지각양식과 이의 상징적 지시성이 ‘미적 경험’을 이해하는데 과연 어떤 기여를 하는지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상 세가지 점이 함께 고찰이 된다면 미적 경험의 상대적 특수성을 경험 일반의 보편성과 연결시키면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생각하는 미적 경험의 개념과 나아가 그의 미학적 사유 전체에 대해 어떤 정돈된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서의 미적 경험

 

“미적 경험은 현실적 존재의 모델”이라는 구절이 시사하는 바, 미적 경험은 현대 철학에서 강조되어온 의식적인 감각지각의 우선성에 반하여 모든 경험의 근본으로 화이트헤드가 생각한 가치경험을 대표하는 것이다. 가치경험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경험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확인되었듯이 ‘느낌의 우위성’을 철저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경험의 구조를 새롭게 해석하는 화이트헤드의 방식은 사실 이 ‘느낌의 우위성’으로 요약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미적 경험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분석의 기초도 마련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화이트헤드가 반대하는 경험론 즉 주관주의적 감각주의(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고 로크나 흄의 경험론에서 주로 나타나는)는 경험이 어떤 명료한 감각인상들과 함께 시작하고 그것들의 정신적 종합으로 끝난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러한 가정 하에서는 ‘미적인’ 것으로 기술되는 경험들은 흔히 사적인(private)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취미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de gustibus non disputandum est)는 저 낡은 격률 이상의 무엇이 주장될 여지가 없게 된다.

 

가치라는 것도 감각주의에 근거하면 결국 주관적인 상태의 파생물에 불과하며, 흔히 욕구나 욕망의 차원으로 설명이 될 뿐이다. 그 자체 일종의 가치론인 미학은 그러한 근거 하에서는 ‘모욕적인’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화이트헤드의 가치론은 이에 반해 “‘가치’는 내가 사건의 내적 현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181)는 진술이 말해주듯 전통적인 이원론 철학과는 다른 가치론을 나타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사실(fact)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며 느낌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인 사실에 대한 단순히 주관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어떤 현실적 존재들의 다른 현실적 존재들에 의한 느낌을 보다 고도하고 특수한 경험의 절대적 기초로서 여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느낌이나 정서적 토운은 우리가 실제사물들과 접촉할 때의 본질이다. 느껴진 요소들은 사적인 주관성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주어진 경험상황 내의 다른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한 성분들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화이트헤드는 다음의 두가지 근본적인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 모든 실재론의 근본적인 전제조건으로서, 즉 경험되는 무언가 실재하는 것이 있으며 경험 속에서 부딫치게 되는 어떤 실재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

 

(2) 우리가 사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또한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는 기본 조건으로서, 즉 경험되는 바의 모든 것은 최종적인 분석을 통해 보면 경험하는 주체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

 

바로 이러한 가정을 통해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주객 이분법의 함정을 피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주객 이분법에 입각한 철학에서는 경험에서의 느껴지고 향수되는 항목을 기껏해야 감각으로부터의 파생물로 보며 최악의 경우 순전히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으로 본다. ‘단순히’ 느껴진 것을 실재하는 보편적 세계의 구성요소로 여기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실재론은 느껴진 경험을 ‘실재로 존재하는 바 세계’에 대한 정보로 여기며, 이때의 세계는 느끼는 주체를 통합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그러한 세계이다.182)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경험론의 물질-정신 간의 이분법을 화이트헤드가 어떤 식으로 타파하는가를 암시하기도 한다. 화이트헤드는 심적인 사건에 대해서나 물질의 분자들, 혹은 그 분자들 간의 기계론적 관계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도의 추상의 단계에서의 언급이다. 구체적인 것은 오직 생성의 과정 안에 있는 기본적인 현실태이다. 전통적인 감각주의를 거부하고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두가지 지각양식을 구분해 얘기할 때의 화이트헤드가 감각지각을 총체적인 경험상황 내에서의 ‘고단계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이다. 감각지각은 이미 경험되는 내용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생겨난다. 그것은 선택과 차별화 그리고 배제를 포함한다. 감각지각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추상’으로서 ‘해석적이지 결코 원래적인 것이 아니다. 원래적인 것은 애매한 총체성(vague totality)이다.’183)

 

이 ‘애매한 총체성’은 경험하는 주체와 그의 바깥에 있는 무엇 간의 최초의 접촉을 나타낸다. 그러한 접촉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타자의 활동을 느끼는 어떤 활동존재의 본질이다. 감각적 판별의 전제가 되는 원초적 경험은 다른 현실태로 향하는 향수되는 느낌이며, 일반적으로 의식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이것이다.

 

경험의 기초는 정서적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기초적인 사실은 관련성이 이미 주어져 있는 사물들로부터 생겨나는 정서적 토운이다.184)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용어에 따르면 바로 이 ‘정서적 토운의 발생’이 ‘파지’로 기술되는 것이다. 즉 어떤 경험행위 내에서 여건 혹은 대상과 조응하는 실체의 느낌이 파지이다. ‘사물들로부터의 생겨남’은 그러한 파지가 언제나 어떤 다른 것 (실재 사물 혹은 상황)에 의해 야기됨을 말하는 것이고, ‘관련성이 이미 주어짐’은 개별적인 경험상황들 간의 복잡한 상호연관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느낌의 계기(그 안에서 문제의 존재는 타자의 파지를 통해 그 자체가 된다)는 화이트헤드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서적 통일성으로서의 절대적 자기획득의 순간’(moment of absolute self-attainment as emotional unity)이다.185)

 

정서적 통일성의 달성은 그러나 ‘지속’될 수는 없다. 일단 충분히 생성이 되면 ‘이’ 주체로서의 존재는 더 이상 없다. 그것의 창조성은 이후의 계기들의 생성 속으로 빨려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의 ‘소멸’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 느낌이 이제 객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에로 단지 변형되는 것일 뿐이다. “계기는 관련되는 대상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다른 계기들을 위한 대상의 상태로 소멸해 들어간다.”186) 그러나 그 중간에 완전한 즉시성의 순간이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가 ‘느낌’ 혹은 ‘파지’라고 일컫기도 하고 ‘자기향수’라고도 일컫는 것은 이 개별적 순간이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실재는 경험상의 용어들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미적 경험은 동시에 자연 혹은 실재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도 된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미적 경험이 사변철학의 올바른 출발장소를 제공한다고 제안하고 있는데, 이때 현실적 존재(‘경험의 방울’로 인식되는)는 미적직관의 계기에 준해 모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의 ‘가치를 위한 항변’은 가치경험을 경험의 근본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가치를 현실태의 본질로 묘사하고 있는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난다.

 

철학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가장 무시되었기 때문에 가장 생산적인 출발점은 현재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가치론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인간 아트의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향수, 혹은 자연미에 대한 향수, 어떤 명백한 야만과 파괴에 직면하여 느끼는 우리의 공포―이것들은 우리에게 밀려오는데, 경험의 이 모든 양식들은 분명 충분히 추상화된 것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분명 사물의 바로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187)

 

 

2. 가치로서의 미

 

위의 인용문은 미와 가치가 근원적으로 동류임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가치경험의 근원적 우위성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미’와 ‘가치’의 상관관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기본적으로 미를 자신의 일반가치론의 이론틀 내에서 분석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가치론은 여러모로 애매한 점이 있는 게 사실이고 그래서 여러 독자들로부터 제각기 상반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188) 자신의 전 철학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치론을 통해서도 화이트헤드는 주관주의와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라는 양 극단 간의 괴리를, 주체와 객체 간의 2원론을, 그리고 사실계(the world of fact)와 가치계(the world of value) 간의 2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가치는 사실계와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며, 가치가 구체적으로 실재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현실적인 실체’(actual essence)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사실계를 필히 요구하는 그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하나의 가치가 현상에 내재하는 실재의 자격으로 형성되어 나오는 것은 현실적인 실체를 통한 ‘실재화’(realization), ‘통일화’(unification), 즉 실체로 드러남의 한 귀결로서이다.189)

 

한편으로 그의 철학에서 가치는 일종의 가치이념상(value ideals)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이념상이란 가치의 실현가능성을 그 자체 언제나 내재하고 있는 불변적 영속적인 것으로서, ‘일시적’ 상황에 조건지워지는 법은 결코 없으며 그래서 종내에는 신적인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실재화’의 과정이나 사실계 속에서의 가치이념상의 구현은 필연적으로 실천활동(activity)과 연결되지만 이 활동이 인간의 활동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얘기되면서 ‘우주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가치론 속에 ‘패턴’ 혹은 ‘구조’의 개념을 도입힘을 말한다. 그에게서 패턴의 현상에로의 침투라든지 이 패턴들의 항상성(constancy)과 변형(modification)은 가치가 현실적인 실체들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고 있다.190) 그래서 가치를 분석하는 일은 곧 패턴을 분석하는 일이 되며,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패턴은 조화와 집중 및 생명성(liveliness)의 통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으로 용인된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미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는데,191) 미에 관한 한 그는 명백히 플라톤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대상은 그것이 미(beauty)의 이념을, 이념적 가능성(an ideal possibility)을, 영원적 객체를 구현할 때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192) 미는 일종의 ‘우주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미는 모든 것을 포섭하고, 미는 그것을 지각하는 유기체가 전혀 없을 때에도 존재한다. 시원의 한 숲속 외따로 떨어져 홀로 피는 한 송이 꽃은 비록 그것이 그 어떠한 생명체에 의해서도 지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혹은 그 존재 자체를 아무도 몰라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름의 미묘한 미를 간직할 수 있다.193)

 

동시에 미는 ‘최대한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한, 개개의 다양한 경험항들의 내적 조응’(the internal conformation of the various items of experience with each other, for the production of maximum effectiveness)으로 이해된다.194)

 

‘경험항들의 내적 조응’은 곧 ‘패턴’이나 ‘구조’의 개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며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결국 ‘미’라고 하는 용어를 가치 일반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를 현실적 존재가 자기실현되고 ‘통합되는’ 과정 속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얘기할 때 화이트헤드는 이미 자신의 준거틀을 미적 경험의 문제에까지 확산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역으로 미적 경험이 왜 현실적 존재의 모델인지도 재확인하게 된다.

 

미적 경험은 말하자면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우주론을 구성함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믿었던 바의 어떤 특별한 강조점들에 특히 알맞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통일성으로서의 우주, 그리고 그 속에는 각자 나름의 중요성과 자기결정권을 갖는 진정한 개체들이 있는 그러한 통일성으로서의 우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체계를 고안하는 문제는 그 해결책을 미적경험에의 참조를 통해 찾고 있다.

 

그렇다면 미적 경험을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 선택한 화이트헤드의 선택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미적 경험이 갖는 구체성은 ‘잘못 놓여진 구체성’에 반대하여 현실적 존재들을 궁극적인 실재적인 사물들로 선택함으로써 ‘우리 경험의 가장 구체적인 요소들’로 복귀하고자 시도하는 화이트헤드의 의도를 잘 반영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적 경험에 대한 강조는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와도 잘 조응되는데, 이 원리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화이트헤드가 사변철학을 위한 하나의 필요한 제약으로 받아들인 원리이다. 즉 경험에서 예시화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건 사변적 도식 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데 경험의 기초로서의 현상계와 인간의 경험과 필연적으로 밀접한 것으로 남아있는 본체계 간의 이분법은 그리하여 피하게 된다.

 

세번째로 그러나 미적경험은 객관주의적 형이상학의 기초도 제공한다. 미적경험을 구성하는 주관적인 느낌은 미적 대상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에 데카르트적인 주관주의에 지속적인 위협으로 남아있는 유아론의 함정이 피해진다. 합생의 즉각성 안에서의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경험하며 그 완성과 함께 그것은 다른 합생하는 현실적 존재들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의 객관적인 내용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모든 현실적 존재는 주관이자 동시에 객관이며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불멸성에 다다르는 현실적 존재들에 의해 구성된다.

 

현실적 존재의 이중적 성격(즉 주관으로서의 성격과 객관으로서의 성격)은 그리하여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서 미적 경험을 선택함에 있어서 네번째 장점을 부여한다. 현실적 존재의 가치는 이중적이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그 자신을 위한 가치를 가지면서 타자를 위한 가치도 가진다. 적용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힌다면 그것은 곧 각 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와 우주전체를 위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그것의 주관적인 느낌에 의해 자기중요성을 향수하며 세계 내의 객관적인 요소로서 그것은 전체에 대한 그것의 기여 때문에 중요하다.

 

 

3. 미적 경험의 통일성

 

한편으로 세계의 통일성, 그리고 경험의 통일성은 화이트헤드의 저작들에서 자주 사용되는 ‘직관’개념과 관련하여 주목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직관은 이들 통일성과 관련하여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미적 경험의 이해를 위해 검토가 되어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직관은 느낌과 상관적인 용어로서 ‘전체’에 대한 파지이며, 모든 복잡한 경험형식들이 그로부터 야기되는 바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원초적인 그러한 종류의 경험이다.

 

직관은 언제나 통일적이다. 여기서 강조는 경험이 되는 바로서의 전체의 통일성에 주어지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산타야나가 말하는 ‘본질의 직관’과는 다르고, 듀이나 베르그송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화이트헤드와 듀이, 베르그송 등 이들 3인 모두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은 ‘인식’의 범주에 결코 넣을 수 없는 광범하고 풍요로운 결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대단히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인간의 경험이 인식적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하면서 철학은 인식적 측면과 비인식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경험의 직접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존 듀이는 경험의 이 복잡한 특성을 경험 내의 상황과 대상 간의 구분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중요한 점은 사유에 있어서 대상들 간의 관계와 선택적인 결정은 상황(지배적이고 내적으로 통합적인 질quality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에의 참조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을 인정하는 데 실패하면 결국은 대상들의 논리적 힘과 대상들의 관계를 설명불가능한 것으로 내버려두게 된다.195)

 

복잡하고 지배적인 상황은 경험에서 흔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대상을 채색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을 구성한다. 그리고 듀이는 ‘직관’이 흔히 이 지배적인 질(pervasive quality)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그는 말한다.

 

세련된 철학적 용법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용법에 있어서 ‘직관’은 명료한 추리의 모든 세부의 아래에 놓여 있는 단일한 질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둔하고 불명료할 수 있으되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들과 정당성들을 형성하는 명확한 생각들로는 표현되지 않되 근원적으로 옳은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직관이 개념에 선행하고 더 깊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반성과 이성적 가공은 선행하는 직관에서부터 나오고 또 그것을 명료하게 만든다.196)

 

이런 의미에서 ‘직관’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에 대비하여 전체로서의 상황이 갖는 지배적인 질에 대한 파악을 의미하는데 이는 화이트헤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의 생각이 더욱 명료해질 때는 그가 현실적 존재가 실현되는 바의 과정은 이해(understanding)의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이다. 만약 그것이 이해의 과정이라면 합생은 ‘관련성의 여러 등급’(grades of relevance)에 따라 영원적 객체들을 포함하고 그 관련성의 여러 등급들 자체가 영원한 대상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적 객체들의 무한퇴행(無限退行, vicious regress)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197) 무한퇴행은 그러나 과정을 ‘느낌’의 하나로서 취함으로써 회피된다. 느낌의 경우에는 느껴지는 것이 무한히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화이트헤드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복합적 여건이 직관에 있어 하나로 직관된다는 학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움으로써 자신의 생각에 대한 원군으로서 칸트를 끌어들이기도 한다.198) 사실 화이트헤드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칸트의 직관이론과 어느 정도는 입장을 같이 하는데, 한가지 이견은 그가 판단하기에 칸트는 흄과 마찬가지로 여건으로서의 인상들의 근본적인 비결합성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칸트가 자신의 [선험적 감성론]을 느낌의 질서를 통해 여건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주관적 과정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199) 한마디로 칸트는 직관이론을 충분히 밀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보면 느낌은 ‘모든’ 경험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인간 경험의 인식적이고 개념적인 양태를 강조한 데 반해 화이트헤드는 느낌을 그것이 없이는 보다 복잡한 양태들이 일어날 수 없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경험으로 보고있다. 그래서 그는 유기체철학의 목표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취했던 철학적 입장에서 ‘순수느낌의 비판’을 열망하는 것”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200)

 

이렇게 보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적 우주론의 체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미적 직관에서 발견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현실적 존재는 한마디로 ‘느낌의 방울’(drop of feeling)로서 인식되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여건의 다수성이 하나로서 느껴지는 것은 미적경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느껴지는 대상과 함께 하는 느낌의 일자성이 있다. 대상의 다양성이 하나의 통일성으로 경험되는 것은 오직 그러한 직관에 의해서이다. ‘이해’는 그 다양한 요소들을 쪼개고 추상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문제는 예컨대 브래들리(Bradley)에 의해서도 느낌에 의해 해결되었지만 브래들리는 이 통일성이 ‘절대자’(the Absolute)에 대한 느낌 안에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각각의 현실적 존재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갖는 ‘절대적인’ 느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즉 여건의 다수성으로부터 그것은 야기되지만 그 속에서 여건이 강렬한 주관적 느낌으로 느껴지는 것은 하나의 단일하고 한정적인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계기로서의 현실세계는 저 현실적 존재의 선택적인 합생에 의한 느낌의 실제적 통일성에서 해결되는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는 일이 된다… the many become one...”201) 그리고 이 현실적 존재가 후속하는 합생들을 위한 데이타 속의 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하나가 더 증가된다… and are increased by one...”202)

 

그리고 “모든 미적 경험이 동일성 아래에서의 대비의 실현으로부터 생겨나는 느낌”(All aesthetic experience is feeling arising out of the realization of contrast under identity)이라는 구절이 말해주듯,203) 현실적 계기 내의 느낌-강도의 깊이는 대비의 폭에 의해 고양된다.204)

 

그것은 ‘동일성 하의 대비의 실재화로부터’ 일어나는 느낌이며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느낌이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충분히 한정적인 느낌으로서의 현실적 존재이다. 현실적 존재의 본질은 자기향수로서, 합생의 직접성 안에서 그것은 만족의 강도를 추구하고 그리하여 그 자체를 위한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모든 후속하는 합생을 위한 데이타 내로의 그것의 포섭에 의해 타자를 위한 가치도 가진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그것은 우주 전체를 위해 가치를 가진다고 말해질 수 있다. 객관적으로 불멸하는 바의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의 자기향수를 넘어서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우주 내의 그것의 위치와 관련해서이다. 그리하여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에 의해 향수되는 미적 경험의 통일성은 그 자체를 넘어서는 세계 내의 관련되는 패턴의 객관적인 통일성에 기여하게 된다.

 

 

4. 두가지 지각양식의 상징적 지시성과 미적 경험

 

지금까지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 내에서 미적 경험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본 장의 서두에서 살펴볼려고 예정했던 세가지 문제 중에서 앞의 두 문제에 주로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필자는 세번째 문제로 넘어가서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얘기되는 두가지 지각양식과 이의 상징적 지시성이 미적 경험을 이해하는데 과연 어떤 기여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가 미적 경험을 현실적 존재의 모델로 보면서 미적 경험의 우주론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를 앞에서 보았다면 여기서는 이제 일반적으로 미학자들 사이에서 미적 경험의 중요한 성격으로 용인되는 지점들이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보는 것이다. 앞의 논의가 그의 ‘체계 안에 있는 미적 경험’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면 이후의 논의는 그의 ‘체계 밖에 있는 미적 경험’을 그의 사유노선을 일반적인 참조의 틀로 삼아 살피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업 간의 구분이 내용상에 있어서 어떤 논리적인 선후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고, 미적 경험의 근원적인 성격을 확인코자는 주어진 목표 속으로 함께 용해되어 들어와야 할 것이다.

 

먼저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나 미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는 미적 경험의 속성부터 짚어보도록 하자.205) 그 속성의 내용을 필자는 다음의 세 종류로 나눈다.

 

(1) 우선 미적 경험은 강렬한 향수를 통해 주관적 개별성의 느낌을 고양시킨다. 그러면서 그것은 우리 바깥에 있으면서 그 경험에서 우리를 부여잡는 어떤 강제하는 실체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 이중성―심화된 주관성과 외부로부터의 강제―은 흔히 이 경험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말해져 왔다. 우리는 흔히 긴장이라든지 균형, 안정된 균형상태, 무언가에 사로잡힌 주목 등의 측면을 말하면서 이 특이성에 주목해 왔다.

 

일찌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 이래로 이 이중성은 동시적으로 주목이 되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만 특별히 주목되거나 했다. 플라톤은 미적인 황홀의 순간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엑스타시의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명석한 이성의 빛을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제의 경험을 일으키는 구조적 속성들과 형식적 특징들을 알고 있었으며,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분석은 후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유에 있어서 크게 부각되었다. 그 후 수 세대를 걸쳐 고전주의는 객관적 질서, 조화, 미, 그리고 통일성의 법식을 확정할려고 애썼으며, 낭만주의는 미적인 순간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느낌이나 정서, 쾌락과 희열 등 주관성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드문 편이긴 하지만 일부의 사상가들은 이 경험의 양 측면을 함께 고려하고자 했다. 칸트는 미적 경험의 특이한 ‘내부-사이적(in-between)’ 위상을 신중하게 주장했다. ‘무관심적 향수,’ ‘목적없는 합목적성’ 등의 용어들은 미적 경험의 이중성과 애매성에 대한 칸트의 인식을 보여준다.206) 실러는 ?인간의 미적교육에 대한 서한?에서 칸트적인 통찰을 그대로 이어 받아 이를 더 가공하고 세련화시킨다. 그의 ‘생명형식(living form)’은 미적인 경험에서의 주관적 경험, 살아있는 경험, 느껴진 경험을 형식적 통일성과 아울러서 지칭하는 개념이다. 실러에게 있어서 미적인 것은 결코 정태적인 순간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유희의 역동성으로 보았으며 여기에는 활성화된 상상력의 가장 깊은 원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그가 진정 인간일 때 유희한다. 그리고 그는 유희할 때 비로소 완전히 인간이다.’207) 현대로 와서는 수잔 랭거가 ‘느껴진 형식(felt form)’이라는 미학적 개념으로 느낌과 형식 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그녀는 느낌과 객관적인 패턴 혹은 구조 간의 ‘논리적 결합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컨대 수많은 사상가들이, 미적 경험에 대해 올바로 기술하자면 느낌의 사적인 성격과 느낌내용의 형식적 속성이 함께 살펴져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2) 한편으로, 미적 경험은 일종의 ‘소극성’을 띠는 것으로 얘기된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을 향수하는 일 말고는 그것을 달리 이용한다든지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 그러한 것을 대면한다. 칸트가 ‘무관심성’이라고 설명한 경험의 측면이 이것일 것이다. 즉 실제적인 목적이나 도덕적 가치평가들에로 향하지 않는 태도로서 그럼에도 그것이 객관적인 내용이 없는 태도는 아니다. ‘무관심성’은 경험되는 대상을 더 이상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태도가 취해지는 대상도 있음을 분명 의미한다.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는 미적으로 사로잡힌 주목의 경우에 있어서의 어떤 특이한 격리상태―대상을 고립시키고, 대상을 어떤 외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주목하는―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보다 현대적인 개념이다.208) 여기서 우리는 ‘몰입’과 ‘거리두기’ 간의 어떤 평형상태 혹은 긴장상태를 보게 된다. 그러한 균형적인 집중은 흔히 경험되는 대상이나 상황을 그 특수성이나 특이성(보편성이나 타자와의 유사성 등과는 다른)에 있어서 드러내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자체를 위해’ 경험되는 것은 요컨대 구체적인 개별성으로써 충분히 현전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측면에서 고려할 때, 무언가를 미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그 무언가를 그 자체로써 충분히 현전시키면서 동시에 그 현전에 사로잡히는 주목의 순간이다.

 

(3) 다른 한편으로, 미적 경험은 의례히 경험자의 감각지각을 내포하는 것으로 얘기된다. 지각적 인식은 이 경우 미적 사건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진다. 사로잡힌 주목의 ‘여기 및 지금’적 성격, 그것의 특이한 현재성은 미적 경험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특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감각적인 지각에의 조회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일상적 지각’과 ‘미적 지각’ 간의 구분문제가 그래서 제기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구분이 의미있는 구분이 되느냐는 데 있다. ‘일상적 지각’이 일반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반면 ‘미적 지각’은 자기충족성이라는 특이한 특성에 의해 흔히 규정된다. 미적 지각은 그 자체를 위한 지각이며 더 이상의 어떤 목적을 갖지 않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것의 자기충족성은 그러나 동시에 일종의 ‘상상’에 의한 감각지각의 확장에도 기초하고 있다.209) 이 상상적 활동은 흔히 지각적 내용에 기초하고 있거나 지각적 내용을 축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상적으로’ 지각되는 것은 이런저런 감각적 표면이다. 그러나 ‘미적으로’ 지각되는 것은 깊이, 의미, 환기력, 암시를 위한 배경 등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즉 미적 경험은 현재의 지각이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각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것으로서의 상상력은 지각을 이 지각의 순수한 현재성을 확장하고 부정하는 차원의 경험으로 변형시킨다. 우리는 종종 심오한 미적 경험의 순간의 어떤 ‘비실재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결국 미적인 경험양식은 (1) 주관적 느낌의 측면과, 그러한 경험에서 느껴지는 객관적 형식적 통일성 혹은 구조의 측면, (2) 대상은 오직 그 자체 만을 위해 경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무관심성의 측면과 정서적 거리를 강조하는 거리두기의 측면, (3) 감각에의 지각적 현재화의 측면과 환상이라는 차원을 통해 이 현재화를 상쇄시키는 상상적 확장이라는 측면 등의 몇가지 이중적 측면을 가지는 것이다. 미적 경험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을 때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두가지 지각양식을 얘기하는 화이트헤드의 체계가 미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일차적 경험양식, 즉 인과적 효능성의 양식은 확실히 앞에서 미적 경험의 특징으로 기술된 측면들―사물들과의 ‘느껴지는’ 접촉이라든지, 불명료한 경험의 배경이 가지는 초기의 풍부성과 암시성 등―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한정성이나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화이트헤드의 일차양식을 ‘미적인’ 양식으로 인정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전인식적인 경험이 미적 경험과 결코 동일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210)

 

미적 경험을 다른 모든 경험의 아래에 있는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들은 이 경험(미적 경험)양식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이 경험의 특징으로 지적한 지점을 설명해내지 못하는 폐단을 안고 있다. 그 특징이란 경험되는 사물이나 상황 혹은 형태(configurations)에 대한 주의깊은 주목이라든지 고도의 복잡성과 같은 특징을 말한다. 미적 경험은 확실히 선택, 집중, 강조 등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을 연상시킨다. 이 양식이 바로 선택이나 추상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적 경험의 의식적, 선택적, 표상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감각-인식(sense-awareness)과 동일시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미적 경험은 그러한 단계가 지니는 것으로 얘기되는 명료한 단순성이라든지 정서적 중립성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두가지 지각양식―‘인과적 효능성’과 ‘제시적 직접성’― 간의 구분이 우리에게 미적 경험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두고 샤퍼(Eva Schaper)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과 화이트헤드의 두 지각양식의 어느 하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심지어 ‘미학적 사유에 해악’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211) 그러나 이는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단순화시킨 데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화이트헤드는 두가지 양식 중의 어느 하나가 미적인 경험양식과 동일하다는 식으로는 결코 보지 않으며, 후자(미적인 경험양식)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상징적 지시성의 개념이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지시성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하여 먼저 화이트헤드 자신이 상징작용(symbolism)에 대해 규범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구절을 인용해보자.

 

경험의 어떠한 성분들이 그와 다른 경험의 성분들에 걸맞는 의식, 신념, 정서, 어법(usages) 등을 이끌어낼 때, 이때 인간의 마음은 상징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성분들은 ‘상징’이고, 후자의 성분들은 상징의 ‘의미’이다. 상징으로부터 의미에로의 전이가 이루어질 때의 유기적 기능(organic functioning)을 나는 ‘상징적 지시성’(symbolic reference)라고 부르겠다.212)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이러한 상징작용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대표적이고 기본적인 영역이라고 보는 몇 영역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언어영역이고213) 두번째가 감각제시(sense-presentation)로부터 물리적 물체(physical body)로의 상징작용의 영역이며214) 가장 중요한 세번째 영역이 지각의 영역이다.215) 그런데 위의 정의와 관련하여(특히 ‘유기적 기능’이라는 구절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특히 주목코자 하는 사항은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 상징과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상징과 하나의 의미 사이의 연결이 한 가지 모범답안만을 허락하는 고정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점이다. 요컨대 상징과 의미와의 관계는 역전이 가능한 관계이며,216) 심지어 ‘오류의 가능성’217)을 항상 안고 있기까지 한 관계이다.

 

상징적 지시성의 이러한 성격은 우리가 어떤 경험양식을 다루고자 할 때는 함께 고려되해야 하는 어떤 맥락적 측면이 있음을 말한다.

 

일차적인 구체적 만남으로부터의 추상양식인 제시적 직접성의 양식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추상들이 지향을 함으로써 영향을 받는 바의 어떤 목적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능적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하나의 경험‘양식’은 그 속에서 경험이 어떤 목적 혹은 목표의 달성을 지향하는 바의 어떤 방식 혹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식적 양식’은 인식적 목적을 위한 경험양식이며, ‘실천적 양식’은 실천적 목표에 의해 지배되는 양식이며, ‘미적으로 경험하기’는 그리하여 미적 목적을 위해 경험하기이다. 한마디로 경험양식들에 대한 분석은 경험의 서로 다른 기능들, 혹은 경험이 지향하는 바의 서로 다른 목표나 목적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감각-지각을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만나게 되고 스며들어 오는 존재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인식에 대한 추상양식으로서, 이때의 추상이 다양한 목적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 목적은 인식일 수도, 이해일 수도, 행동일 수도, 향수일 수도 있다. 요컨대 감각-지각양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목적의 성취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며 그것이 수행되는 어떤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것은 감각자료의 단순한 제시를 보통 넘어서게 된다.

 

극단적인 감각자료이론을 제외한 모든 지각이론은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할 때 단순히 감각자료(색점 따위와 같은)를 지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색깔이 있는 사물’이다. ‘감각자료’ 자체는 이미 사물과의 최초의 접촉에서 추상되고 의식에로 끄집어 올려진 그 무엇이고 어떤 목적이 들어감으로써 부각되는 그러한 것이다. 우리의 주목은 조우되는 사물 혹은 상황의 총체성으로부터의 선택을 이미 지향하고 있으며,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선택을 어떤 ‘사물’로 경험할 뿐이다. 총체적인 지각과정은 추상화된 감각자료를 넘어선 저 너머에 있다. 아주 드물고 예외적인 경우에 있어서 색점과 같은 류의 순수한 감각자료에 한정되는 지각은 어떤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화이트헤드 자신이 들고 있는 예를 빌어 말한다면, 우리가 걸상이 놓여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 먼저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떠어떠한 색채의 형상―이것은 인과적 효능이다―을 보게 되고, 이것은 곧 또 다른 양식의 지각―즉 표상적 직접성이다―을 상징적으로 가리키게 되어 결국 우리는 하나의 의자를 보게 된다. 이 경우, 그가 미술가라면 색채의 지각에만 자신을 국한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능력과 특별한 훈련이 이미 요구된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그때의 우리의 정서가 전적으로 표상적 직접성의 양식으로 지각되는 악음(musical sounds)에 의해서만 야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음파(sound waves)가 먼저 우리의 신체마다 인과적 효능의 양식으로 미적인 쾌의 감정상태를 산출시키고, 이것이 이후에 표상적 직접성의 양식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음의 감각-지각(sense-perception)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청범위 이상 혹은 이하의 음들은 가청범위 내의 음에다 정서적 기미(tinge)를 더한다.218) ‘정서의 상징적 이행이라는 이 문제의 전체는 예술미학의 어떤 이론에서도 그 기초로 놓여 있다’(This whole question of the symbolic transfer of emotion lies at the base of any theory of the aesthetics of art.)는 화이트헤드의 언급은 직접적으로는 이런 양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219)

 

이렇게 볼 때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상징작용은 그것을 수행하는 상징적 이행까지도 포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즉 경험의 통일성이 많은 구성요소의 합류에 의해 생긴다는 사실―의 한 예증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각각의 구성요소는 스스로의 성격 그 자체에 의해서 다른 구성요소들과 어떤 종류의 가능적인 도식적 관계에 서게 된다. 하나의 경험적 행위인 현실적인 구체적 사실을 구성하는 것은 이 가능태의 실재하는 통일체로의 전화(轉化)인 것이다. 그러나 가능태로부터 현실적 사실에로의 전화에 있어서 경험의 정서적 소산과 목적, 기타의 요소들의 억제나 강화가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러한 것에로 주의력을 집중하기도 하고,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작용도 발생할 수 있다.220)

 

그래서 우리는 감각지각의 상징적 작동은 그 목적에 따라 달라지며 따라서 고단계의 서로 다른 경험양식들의 구분을 닣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감각적 상징들은 자신들의 의미로서 원초적이고 ‘느껴진’ 통일성으로부터 여러 다양한 측면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미적인 목적은 그렇다면 여러 가능성 중의 한 가능성을 구성할 뿐이다. 왜냐하면 감각지각의 매개적 양식이 미적 경험에서만 상징적 기능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지각 일반의 상징적 작동을 가지는 여러 양식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징의 단계를 통해 그것들이 달성하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 정상적인 인간의 감각지각이 작동할 때 지향하는 가장 일반적인 목적은 (너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감각지각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잘못 여겨지기조차 한다) 인식(recognition)이나 이해(understanding)라는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인식적 양식과 미적 양식의 두 경우 모두 감각적 인식에서 지각되는 항목들은 최초의 느껴지는 접촉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이 추상들은 상징적으로 기능한다. 즉 감각적 세부사실들은, 그것이 상징으로 경험될 때,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을 지칭 혹은 유도한다. 경험의 인식적 목적과 미적 목적 간의 차이점은 그것들이 최초의 접촉으로부터 의미로서 이끌어 내는 특징들에 있어서의 차이점인 것이다.

 

먼저 인식적 목적을 위한 상징적 작동을 고려해 보자. 일반적으로 인식(knowledge, cognition, recognition)은 (어떤 더 나아간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것이건 순전히 사변적인 이해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건) 사물의 일반적인 특징, 즉 우리가 그것을 통해 비교하고 차별하는 특징들에 대한 판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식적 목적에로 방향지워진 경험들에서 감각적 상징들의 역할은 사물 혹은 상황의 ‘일반적’ 특징을 의식의 전면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감각지각의 중재를 통한 경험의 목적이 이해라든지 개념적 파지 등과 같은 쪽으로 지향되는 것이라면 감각적 상징들은 경험되는 사물 혹은 상황들이 그 일반성 혹은 일반적 형식에서 의미하는 바 쪽을 향해 주목을 이끌어간다.

 

이와 반대로 미적 목적을 향한 경험에서는 감각지각은 매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감각의 추상들 즉 추상화된 세부사실들은 인식적 양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지시성을 위해 경험된다. 그러나 미적인 양식에서는 감각적 상징들은 일반적인 형식적 특징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접촉의 국면에서 느껴진 것으로서의 형식적 특징들을 지칭한다. 그것들은 사물의 일반성이 아니라 최초로 무의식적으로 느껴진 것으로서의 사물의 형식을 의식에로 이끌어낸다. 기초적으로 느껴진 것은 총체적 복합물로서 의식에 현전하지는 않으며 현전할 수도 없다. 인식은 최소한도 어떤 추상을 전제하는 판별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구체적인 것은 인식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개념적 이해보다 결코 덜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둘 다 구체적인 조우행위로부터의 감각의 추상들을 포함한다. 차이점은 그것들이 의미로서 의식에 이끌어내는 특징들의 종류에 있다. 인식적 경험의 경우 그것은 일반성에서의 형식적 특징들이며 미적 경험의 경우에서는 느껴진 것으로서의 형식적 특징들이다. 느껴진 항목들이 미적으로 향수될 때 (혹은 미적 양식에서 향수될 때) 우리는 그러므로 그것들이 미적 상징물로 향수된다고 말할 수 있다. 미적 상징들은, 인식적 추상의 경우처럼 대상의 일반적 특징들 뿐만 아니라, 경험하는 주체와 경험되는 세계간의 관계를 구현하는 사물들과의 과거의 접촉에 있는 저들 형식적 특징들을 의식에 가져온다. 이 두 복합양식에 있어서 감각지각은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해 도구적 역할을 한다. 즉 일반적 특징의 인식을 향하거나 형식의 ‘느낌’을 이끌어내는 쪽으로 향하거나이다. 두 경우에서 공히 감각지각은 상징적으로 기능하며 주목을 의미에로 방향지운다. 기능적 차원에서의 차이점은 두 양식의 목적의 차이점일 뿐이다.

 

두가지 지각양식의 상징적 지시성의 개념에 대한 이상의 고찰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앞에서 언급되었던 미적 경험의 세가지 특성으로 되돌아가, 앞서의 경험에 대한 일반이론이 경험의 ‘미적 양식’과 관련되는 이 세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대응될 수 있을지를 역시 각각의 질문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러한 경험들의 첫번째 이중성은, 미적 경험들은 정서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어떤 사적인 몽상 따위와는 달리 무언가 필연적이고 한정적인 것에 대한 경험들이라는 것이었다. 미학적 사유의 역사 속에서 이 결합(‘정서로 가득차 있음’과 ‘필연성·한정성’의 결합)은 ‘다양성 속의 통일성’ 혹은 ‘느껴진 조화’(felt harmony) 등을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는 이론들 속에서 인정되어 왔다. 깊게 느끼고 그러면서도 객관에 초점을 두고 있는,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한 개인적 태도와 형식적 구조들에 같은 정도로 관여하는 이 점이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어떻게 고려되는가.

 

만약 우리가 느낌이 기본적 경험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견해를 취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느껴진 접촉의 일차적 국면이 무의식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우리는 미적인 것을 복합적이고 고단계인 양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게 된다. 감각 안에서 추상을 포함하면서도 감각적 상징들은 다시 그것들이 처음에 추상화된 느낌관계를 지시한다. 동시에 감각적 세부사실들은 조우된 사물의 형식적 특징들을 강조하고 부각시킨다. 의식적인 구별을 통해 느낌과 형식의 결합을 인식하는 것은 그래서 미적 양식의 기본적 특징이다. 미적 경험은, 미적으로 정향된 감각지각의 상징적 기능을 통해, 다른 어떤 양식보다도 사물과의 최초의 조우를 재포착하는 일에 가까이 다가간다. 우리가 흔히 미적 양식을 다른 양식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어떤 독특한 특수성에 훨씬 더 관련되는 것으로 얘기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경험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시에 고도의 주의집중적 성격, 조우되는 사물들의 형식에로의 집중이라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미적 태도는 느껴진 사물들의 주어진 한정성에 대한 ‘의식적인’ 주목으로 기술될 수 있다. 의식적인 주목은 그것이 언제나 추상적이고 선택적인 감각지각을 포함하기 때문이고, ‘주어진’ 사물의 한정성은 현재의 여건이 없이는 어떠한 상징적 기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껴진’ ‘사물’의 한정성은 상징적 지시성이, 비록 느껴진 것으로서이기는 하지만 구조적 특징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무관심성’(어떤 외재적인 목적의 부재)과 ‘거리두기’(느껴진 경험에로의 단순한 개인적인 침잠으로 빠져들지 않기)―이것들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미적 경험의 중요 속성들이다. 전통적으로는 ‘미적 경험의 자율성’이라든지 ‘자유,’ ‘비관여’ 혹은 ‘유희’의 요소를 주장하는 모든 이론들에서 무관심성의 측면이 나타난다. ‘거리두기’의 측면은 ‘심리적 거리’(psychic distance) 혹은 ‘균형과 안정,’ 그리고 ‘미적 태도에 있어서의 정관적 요소’를 얘기하는 모든 이론들에서 나타난다.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에서 미적 경험의 무관심성과 거리두기는 어떻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감각적 상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행위를 위한 지칭으로서 역할할 수도 있고 인식을 도우는 방편이 될 수도, 그리고 이미 확립된 접촉의 표식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항목이 동시에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이것은 상징의 지시성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같은 시간에 여러 기능을 수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어떤 하나의 항목이 ‘느껴진 배경’을 상징적으로 지시할 때, 그것이 실천적 혹은 개념적 목적을 향한 한걸음 더 나아간 추상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 동시적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지금 미적으로 경험되는 사물은 나중에는 예컨대 인식적으로 경험될 수 있고, 지금 인식적으로 경험되는 사물은 나중에는 미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상징적 지시성은 그러나 ‘동시에’ 다른 종류의 지시성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거리두기’는 정서적 요동으로부터의 격리와 관련되며, 그래서 이것은 미래에의 모든 관여로부터의 비연결성을 가리키는 ‘무관심성’의 대항물이다. ‘거리두기’는 ‘무관심성’이 다른 목적이나 관심사로부터 일종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것처럼, 최초의 접촉 사물과의 직접적인 관여 따위로부터의 거리를 강조한다.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에 의하면 접촉의 일차적 양식은 모든 고단계의 경험에 기초가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거리두기는 이 원초적인 정서적 국면에로의 단순한 역행이 미적 양식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에 감각적 인식이 없는 어떠한 인식도 있을 수 없다면 의식의 요소는 이미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의식은 선택을 의미한다는 것, 즉 단순한 무의식적 느낌으로부터의 선택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수 있다. 미적 태도에서의 주목이 상징적으로 기능하는 감각항들에 사로잡힐 때, 이 보다 명료해진 것들에의 주목은 경험하는 자를 직접적 접촉의 혼동 속에서 느껴지게 되는 바의 단순한 혼란과 어떤 강한 개인적인 관여로부터 분리시킨다. 최초의 접촉은 이제 완전한 모습으로 재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환기된다. 이것은 즉 행위자가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단지 느끼는 것이 아니다. 미적인 양식에서 형상들에 대한 의식적인 판별을 통한 상징화는 상징적으로 이끌려 나올 수 있는 느껴진 관계라는 측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충격으로부터는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미적 양식에서의 감각지각과 상상력 간의 상호교류의 문제는 그럼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어떻게든 미적 경험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감각에 현재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현재하는 것, 뚜렷하게 현전하는 것은 감각되는 성질들이며, 그것들은 이미 추상적이다. 상징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현재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지시성의 과정 동안에 그것들은 순수한 감각항들로서 중요하게 게속 남아있게 된다. 그것들이 끄집어내는 의미들은 그 자체 더 진전된 추상이 아니라 최초 접촉의 느껴진 관계들의 일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적 상징들은, 다른 상징들과 달리,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대체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시성을 위해 현재로 계속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시성의 축적을 위해 요구되는 상징들 모두가 ‘동시에’ 실재적으로 현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없으면서 단지 상상으로만 현재하는 상징들도 허용된다. 이때의 상징은 일정 기간 동안에 이전의 감각적 상징들이 축적되면서 현재로 모이는 일의 성취로서 이해된다. 실제로 현재하는 감각자료는 그리하여 상상적 현재들, 즉 비실재적 현재의 도입에 의해 보완된다.221)

 

결국 미적 양식에서 상징적 지시성은 이 감각적 상징들의 의미로서 즉시적인 과거로부터의 느껴진 관계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 과거 사건의 보유(retention) 혹은 상기(recalling)는 전통적으로 ‘상상’이라고 불려진 것에 속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어떤 면에서는 흄과 마찬가지로 상상을 보유적이고 반성적인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러나 감각자료의 우선성에 대한 경험론적 설명을 역전시켜서, 감각지각은 전체의 접촉으로부터의 추상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상상적 보유는 그리하여 과거의 느껴진 관계들에의 상징적 지시성인 것으로 설명한다. 지각이 미적인 목적을 위해 기능할 때 그것은 이전에 느껴진 접촉의 재포착으로 정향될 뿐 아니라 감각적 상징들에 의해 상징화될 수도 있다. 미적인 양식에서 지각은 그리하여 상상에 의해 확장된다. 바로 이 ‘확장된’ 지각이 바로 우리가 ‘미적 지각’이라고 불러온 것이다.222)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복잡한 경험양식들과 미적인 경험과의 차이점을 기술하는 다른 길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지각의 상징적 기능에 대한 지각적 목적과 비지각적 목적 간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적인 경험에서는 감각지각은 의식에다 최초의 원초적인 지각적 기초의 중요한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가져온다. 즉 감각지각은 ‘지각적’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 이 점에서 미적 양식은 여타의 고단계의 양식들(인식적 이해 따위)과 대비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감각지각은 마찬가지로 상징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의 느껴진 접촉의 지각적 기초를 도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추상에로의 나아감을 원활히 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즉 여기서의 감각지각은 ‘비지각적’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 이러한 이론에서는 미적 지각이 ‘그 자체를 위한 지각’ 혹은 ‘상위의 어떤 다른 목적이 없는’ 지각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게 되는 것이다.

 

 

5. 미적 경험과 예술

 

지금까지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구상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통해 우리는 미적 경험의 여러가지 근원적인 속성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 연속선상에서 필자는 이제 예술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예술의 문제’는 전적으로 본 장의 논의내용과 직결되는 문제로 범위를 좁혀 잡을 생각이다. 미적 경험에 대한 화이트헤드식의 성격규정 속에서 “예술은 어떤 측면에서 그 본질이 찾아질 수 있느냐”는 문제(이는 곧 일종의 ‘藝術定義의 문제’가 될 것이다)와 이 문제가 어떤 함의를 갖느냐는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필자가 마지막으로 이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함은 이 문제들이 화이트헤드의 경험론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머리말>에서 미학은 단순히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 즉 화이트헤드의 우주론 내에서의 미학의 맥락은 예술의 영역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의 우주론의 구상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경험 및 미적 경험에 대한 해명을 통해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지적되었다. 살펴본대로 화이트헤드에게서 미학의 맥락은 현실성의 가장 단순한 단위로부터 가장 복잡한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고 우주 전체에 걸쳐 상관물을 갖는 그러한 것이다. 저토록 넓은 적용가능성을 갖는 화이트헤드의 미학의 맥락에서 그럼 ‘예술’은 어떻게 이해되는 것인지를 본 절에서는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예술에 대한 언급은 사실 산만하고 의미도 불분명한 점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언급을 꼼꼼히 추적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대한 언급들의 대부분은 ?과학과 근대세계?와 ?관념의 모험?에서 볼 수 있지만 그 외의 저작들에서도 다양한 ‘예술’의 용례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종교는 예술이다”(RM, 16), “祭儀의 도래와 함께 인류는 예술가가 되었다”(RM, 21), “자유로운 사회는 예술이다”(SME, 88), “진보는 예술이다”(PR, 515), “삶은 예술이다”(FR, 8), “문학은 예술이다”(AE, 47), “과학적 관찰은 예술이다”(AE, 49), “연역적 추리(deductive reasoning)는 예술이다”(AE, 85), “대학을 조직하는 일은 예술이다”(AE, 97), “항해(navigation)는 예술이다”(AI, 79), “문명은 예술이다”(AI, 271)…… 등등.

 

여기서 즉각 떠오르는 의문은 이 모든 예술 개념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예술 개념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필자는 우선, 금세기의 직업훈련이 안고 있는 결함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 삶의 전체 환경에 내재해 있는 무한한 ‘가치’의 다양성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화이트헤드가 하고 있는 다음의 말을 우선 들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여러 구체적 사실에 의해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에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실들을 배열 조정하는 어떤 선택활동(selection)이다.223)

 

화이트헤드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의가 여기서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활동’이며, 이 선택활동에 의해 사실들은 스스로가 실현시키는 생생한 가치들에 주목이 되게끔 배열·조정된다.224) 앞서 제2장의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서 우리는 사실이 사실이기 위해선 가치변이(value-gradation)가 작동해야만 하며 그러지 않으면 현실태는 현실태일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런 점에서 현실태는 곧 가치이다. 만약 그러한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혼융은 한정성이 결여된 비실재로만 남아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225) 그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예술은 현실태인 이 가치를 ‘강조하는’ 선택활동이며, 현실태가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막는 쪽으로 움직이는 선택활동이다.226)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로는 아직 충족되지 않는 물음들이 있다. 가치를 주목케 만드는 구체적 사실의 선택활동이 예술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택활동을 일으키는 조건들은 무엇인지, 즉 무엇이 주어진 선택활동을 예술로 만드는지가 애매한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가치는 현실태가 존재할 때마다 존재한다. 현실태의 한정적 본질이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현실적 계기들에 대해, 이들이 가치이행을 통해 하나의 방향, 즉 하나의 한정성을 선택하기 때문에 예술의 역량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 화이트헤드는 “예술의 습관은 생생한 가치를 향수하는 습관이다”(the habit of art is the habit of enjoying vivid values)고 말하고 있다.227)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가치’(value)와 ‘생생한 가치’(vivid value)는 구분이 되는 것인가? 의문은 또 있다. 누가 선택하고 누가 향수하는가? 이 ‘누구’가 유기체로서의 인간(human organism)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 또 선택과 주목과 향수의 조건은 무엇인지가 위의 인용문들에서는 아직 불분명한 것이다.

 

요청되는 이 물음에 대응하기 위해 필자는 우선 ?관념의 모험?의 다음 구절에 의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험에 있어서 예술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의식(consciousness)이다. 물론 의식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선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이며, 그 자체로 경험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228)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 사실을 생생한 가치로 이끌어내는 선택작용은 오직 ‘의식적인’ 유기체에 의해 수행되는 선택작용임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생생한 가치는 ‘의식적인’ 유기체의 주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전자나 분자, 돌맹이들도 현실적 계기의 복합물로서 분명히 가치변이를 유지하지만, 의식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런 유기체에 대해 예술-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 된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의 체계에서 볼 때 의식이란, 정신극과 보완적 느낌들이 사실 ‘및’ 사실에 대한 가설이 결합되는 것을 허용할 때 나타나는 성질이며, 그러한 파지의 주관적 형식을 특성화하는 성질이다. 즉 의식은 물리극의 산물들과 정신극의 산물들 간의 대비, 현실태와 이념태 간의 대비를 특성화하는 성질이다.229) 이는 곧 의식에 의해 조명된 경험부분이란 오직 일종의 ‘선택활동’이며, 의식은 단지 주목의 한 양태라는 말이다. 이 주목의 양태를 궁극적으로 명료히 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은 그 자체이며 경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의식의 선택성이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선택활동이기 때문에, 예술도 그 자체이며 경험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특별히 다음 사항, 즉 인간이라는 계기의 자발성(spontaneity)―개별성을 향한 그 자신의 기여―은 의식 및 의식적 주목의 영역 내로 지나가는 관념들을 가장하여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시에 의식과 이 자발성, 그리고 ‘예술’은 밀접하게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230) 그런데 자발성은 인간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으며, 의식과 의식적 관념들은 분명 인간경험의 상층부에 속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이 상층부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또 연결되는 것은 분명한지, 그리고 예술은 곧 경험이 되는 바로 그것인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연결성은 다음과 같이 그가 말하는 순간에 분명히 인정되고 있다.

 

……명석한 의식 내에서 일어나는 예술은 희미한 의식 내에서 혹은 경험의 무의식적 활동들 내에서 보다 넓게 분포되어 있는 예술의 일종의 특수화일 뿐이다. 이들 희미한 요소들은 그 효과가 점차 소멸한다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예술적 정조(tone)의 궁극적인 배경을 제공한다.231)

 

앞에서 화이트헤드는 의식은 예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경험 내의 요소라고 말했다. 그런데 위의 구절은 예술이 의식에 선행함을 얘기하고 있다.232) 그렇다면 여기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의식이 현상의 인공성(artificiality of appearance)을 ‘강화’시킨다는 점,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그 현상은 의식이 뚜렷이 임재(臨在)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산출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모순이 아니다. 의식이 희미한 계기나 무의식적인 계기도 현상을 낳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예술은 어렴풋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예술이 제대로 온전하게 출현하는 때는 의식이라는 질(quality of consciousness)이 함께 출현할 때이다. 그것은 의식이 희미한 계기와 무의식적 계기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현상에 부여하는 판명성과 함께 할 때 그것은 ‘온전하게’ 나타나게 된다.

 

한편으로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예술을 산출함에 있어서 인간의 신체 자체가 도구로써 기능함을 특히 주목했다.233) 우주론적 기술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미학에 대한 고려를 통해 보았던 바 느낌의 고차원적 유형들에 중심되는 미적 종합의 중추가 신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는 또한 인간의 예술활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신체의 생리학적 기능들에 의해 생겨나는 갈망, 그 중에서도 특히 ‘다시 행하기’(re-enaction)의 갈망이 예술의 기원을 설명한다. 느낌의 미적 종합이 의식과 인간의 자발성, 그리고 ‘예술’을 상호연관된 창발물로서 발생시킨다. 여기서 ‘다시 행하기’의 갈망은 유기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기체가 하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과거 및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신의 과거 안에 각인되어 있는 복합적인 정서적 경험을 ‘재생 relive’하고자는 직관적인 반응을 가리킨다. 예술는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예술의 기원은 “…祭儀적 진화물들(이로부터 연극, 종교적 祭式, 종족적 祭儀, 춤, 동굴화, 시문학, 산문, 음악 등이 나타난다)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34) 여기에는 의식이라는 질과 ‘함께’ 창발하는 자발성이 있다. 의식과 함께, 가치를 선택하는 능력에 대한 ‘인식 awareness’이 오는 그 지점까지 현상의 강화가 있게 된다.

 

의식은 선택적이고, 주목의 한 양태이며, 일종의 승리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부정적인 직관적 판단을 위한 능력이 점차로 창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그럴 수는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식적인 느낌들이 거기서 오게 된다. 이 느낌은 바로 그 주체가 향유하는 일정한 부정적 파지와 관계된다. 그것은 부재에 대한 느낌이며, 이 느낌은 그 부재를, 실재로 현존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배제함으로써 산출된 것으로서 느낀다.235)

 

그러한 전조와 함께, 예술은 비록 언제나 저 기원의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다시 행하기’의 ‘너머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세계와 함께 한다는 순응적인 느낌’(conformal feeling-with the world)은 ‘세계에 대한 느낌’(feeling-about the world)으로 나타난다.

 

정리를 해보면, 화이트헤드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인간 경험들을 모두 ‘예술’이라고 일컫고 있었고,236) 그러한 언급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모든 의식적인 경험이 예술’(All human conscious experience is art)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 세계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사례와 관련한 ‘실제로’(in fact)와 ‘일 수도 있다’(might be) 간의 대비가 인간 유기체에 의해 ‘느껴지고,’ 이 대비에 대한 느낌의 주관적 형식이 의식이다.237) 그러한 느낌들이 부여하는 선택성은 인간 유기체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명료히 하게끔(articulate) 해준다. 그래서 “예술는 경험에다 패턴을 부여하는 것”238)이고 “모든 예술는 패턴에 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239)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언급하는 인간 경험의 저 수많은 부면들이 예술의 영역 ‘내에’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짐작할 수 있고,240)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예술이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예술’과 ‘경험’(혹은 ‘미적 경험’)과 ‘가치’ 사이의 일종의 ‘세계내적’ 상호연루성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맺 음 말

 

 

이제까지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에 근거하여 우리가 ‘미적’이라고 부르는 경험의 본질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화이트헤드의 견해가 저 경험을 설명하는 방식을 보이고자 했다. 이 경험유형은 감각주의자의 경험관에서는 흔히 간과되지만, 미학의 오랜 주제이면서 동시에 ‘완전성’을 추구하는 어떠한 경험론에서도 누락될 수 없는 인간의 중요한 경험양식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러한 완전한 이론을 구성해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러한 경험론을 위하여 화이트헤드의 우주론 체계의 ‘모든’ 영역들을 살피지도 않았다. 다만 필자는 경험의 본질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가 의식적인 감각지각에 주목하느라 미적 경험을 진지한 철학적 주제로부터 배제하는 경험론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점과, 그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적 경험이란 인간의 고유한 ‘가치경험’의 양식이면서 그 가치는 실재 자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먼저 제1장에서 필자는 ‘가치정향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그가 취하는 철학적 방법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필자는 그의 입장을 현대 영미철학(특히 분석철학)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후자의 문제의식과 그 철학적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전자의 그것과 상반되고, 그것은 특히 경험에 대한 견해에서 두드러지게 대비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현대 영미철학의 경험이론들은 의식적인 인간경험, 더 구체적으로는 소위 ‘의식적인 감각지각’(conscious sense-perception)에서 발견되는 경험양식만이 철학적 주목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적 경험과 같은 가치경험은 대체로 무시하는데 반해 화이트헤드는 가치경험의 근원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제2장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철학적 방법론이 구현되고 있는 그의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구도를 현실적 존재, 영원적 객체, 파악, 신 등의 네가지 현존의 범주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본 범주들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의 경험의 여러 요소들을 하나의 일관된 상호관계 속에 정초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었다.

 

제3장에서는 미적 경험의 문제를 다루는 전단계로서 화이트헤드가 우선 인간의 경험일반을 어떻게 파악하고 설명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이 현대 영미철학의 가장 큰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전통적인 경험론 철학에 대한 부정과 비판 위에서 성립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가 전통적인 경험론을 비판하는 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그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가늠코자 했다. 흄의 입장은 그 자체가 자신의 인식론이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관되지 못하다는 점, 또 인간의 여러가지 인상적인 경험의 사실들을 설명하는데 부적당하다는 점을 얘기하고, 그 근본원인이 감각주의자의 공식들은 보다 원초적인 차원의 경험(인과적 효능성의 양태에서의 파지)에 의존하고 있는 바의 감각자료들을 근본적인 것으로 여김으로써 경험의 참된 질서를 뒤바꿔놓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고전적 경험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경험의 참된 질서를 향한 노정(露呈) 위에서 화이트헤드가 인간의 경험이 원칙적으로 가치경험이며 그 가치는 ‘정서성’(혹은 ‘느낌’)의 성격을 근원적으로 갖는 것임을 자신의 우주론에 의거하여 포착해내고 있음을 문제로 삼고, 이를 살펴보았다. 특히 여기서 필자는 우주론적 차원에서 현실적 존재들이 관계맺는 방식, 즉 다수의 자료들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 속으로 사유화(appropriate)하는 과정을 ‘파지’의 범주로 설명하는 화이트헤드가 이 ‘파지’의 인간 경험적 차원에서의 대응양상을 지각의 두가지 양식의 개념(즉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양식과 표상적 직접성의 지각양식)을 통해 포착함에 유념하여, 인간 경험일반이 왜 가치속성을 가지며 그 가치속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는 문제를 이 두가지 지각양식의 개념을 통해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화이트헤드의 경험관에 입각하여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이 어떻게 철학적 탐구의 정당한 토픽으로서 역할하는지 그리고 인간경험의 이 측면이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체계와 조응하는지, 나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미적 경험의 여러 속성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우선 필자는 ‘미적 경험은 현실적 존재의 모델’이라고 여기는 그의 우주론의 전체 틀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기본적인 위상을 명백히 하였으며 둘째로, ‘미’와 ‘가치’의 근원적 상관성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세째로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 얘기되는 두가지 지각양식과 이의 상징적 지시성이 ‘미적 경험’을 이해하는데 과연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미적 경험론에 입각, 예술의 본질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규정방식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미적 경험이 인간의 고유한 경험양식이면서 동시에 그 경험의 속성은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과정에서, 그의 사유방식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비판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목의 필요성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본 논문의 테마와 관련되는 한에서나마 화이트헤드의 생각이 충분히 반추된 연후에 어떤 종합적 반성의 차원에서 그러한 비판들을 다루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필자의 판단으로 뒤로 미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결론에 즈음하여 본문에서 논의된 화이트헤드의 경험론에 겨누어진 중요한 몇가지 비판들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대응은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재확인한다는 차원에서 다소 일반론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반론 1> 화이트헤드의 경험이론에 대해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의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의 경험일 수 있는가?”는 물음이다. 이는 특히 실재와 경험의 상관성을 전제로 하여 미적 경험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경험의 양식이면서 그 가치는 실재 자체의 보편적 속성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이고자 한 본고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의당 제기될 수 있고 또 제기되어야 하는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된다.

 

<대답 1>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241)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이른바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reformed subjectivist principle)로 규정한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적 존재자의 주관적 경험을 철학적 분석을 위한 형이상학적 근본입장으로 삼는 데카르트의 ‘주관주의 원리’를 일종의 철학적 편견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수정하여,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의 이 원리의 수정은 실체-속성 범주의 거부와 맥을 같이 하며 동시에 경험하는 주체와 경험의 대상 간의 임의적인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수정된 주관주의 원리에 의하면, “전체 우주는 주체의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다.”242) 그래서 “주관적 경험의 요소로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도 철학적 도식 속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존재론적 원리이다”고 말한다.243)

 

철학의 보다 일반적인 어법으로 말한다면 이는 ‘존재와 경험의 일치성 혹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물음의 진의(眞意)는 왜 양자 사이에 일치성이 존재하느냐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물음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양쪽 모두에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 화이트헤드 자신은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상정은 하면서도 그것이 왜 원리로 상정될 수 있는지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화이트헤드 자신에게도 일종의 ‘우주적 신비’인 셈이다. 그것은 마치 빛이 1초에 3십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을 우리가 확인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재 물리학자 아인시타인의 다음과 같은 언급, 즉 “이 우주에 대해 정말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한가지 사실은 이 우주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는 언급은 퍽 시사적이다.) 이러한 우주적 신비의 영역을 화이트헤드는 그러나 미신적 차원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정신으로 문제를 삼으려 하고, 그럼에도 그러한 영역이 합리적 설명을 허락하지는 않는 상태에서, 이에 대한 잠정적인 규정방식으로 ‘궁극적 비합리성으로서의 신(神)’의 개념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런 정황의 고려 속에서, 결국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각자가 치열한 내성적(內省的) 관찰을 통해서만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튼 현실적 존재가 인간의 경험과 상관적임으로 해서 미적 경험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경험의 양식이면서 그 가치는 실재 자체의 보편적 속성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적 경험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경험’이라는 얘기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실재 자체의 ‘심미성’을 가장 강렬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며, 그 가치가 ‘실재 자체의 보편적 속성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가치로서의 미가 순전히 주관의 어떤 심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주관과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객관의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주객관이 이미 관계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그러한 것으로서의 실재가 끊임없이 미적 가치를 창발하고 있는 상태로서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본고에서 다루어진 화이트헤드식 용어로 다시 말한다면, 실재의 궁극적 단위존재인 현실적 존재가 가치로서의 미를 구현하고 있고, 이 현실적 존재는 동시에 ‘경험의 방울’이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가 구현하는 미는 곧 경험을 미적 경험으로 존재케 하며, 그 현실적 존재의 사회(society)로서의 인간이 특히 미적 경험의 전형적인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미적 경험이야말로 실재 그 자체의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며(그래서 “미적 경험이 현실적 존재의 모델”인 것이다), 미적 경험의 전형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미적 경험을 하면서 동시에 저 웅장한 우주적 드라마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필자는 미적 경험이 증언하는 이 무거운 의미야말로 화이트헤드가 우리에게 환기시킬려고 애쓴 바 바로 그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미적 경험에 대한 차후의 연구에 중요한 시사를 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반론 2> 화이트헤드의 경험이론에 대한 주요 비판 중의 또 하나는, 현실적 존재들을 ‘세계를 구성하는 최종적인 실재물’로 보면서 자신의 형이상학을 출발시킴으로써 화이트헤드는 ‘인간’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을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그의 체계는 ‘인간경험’에 대한 어떠한 논의의 기초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244) 요컨대 실재의 본질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현실세계의 온갖 사물들이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제기되는 비판이다.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을 갖는 인간 존재가 어떻게 과정(過程)이나 유동(流動)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현실적 존재로써 설명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 2> 인간이 어떻게 덧없이 지나가는 ‘경험의 방울’로 구성될 수 있느냐는 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비판은 일견 그럴듯하다. 즉 만약 우주가 생성소멸하는 수많은 경험의 방울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믿는 바인 엄청나게 복잡한 지속되는 유기체로 그러한 존재들이 조직화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특히 현실적 존재들을 어떤 불연속적인 실체들(존재하기 위해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로 보는 경우,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따르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들은 불연속적인 실체들이 아니며, 완전히 자기충족적인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궁극적 요소를, 혹은 직접경험(immediate experience)의 내용을 지금 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혹은 ‘사건적 계기’라고 보고 이를 ‘현실적 존재’ 또는 ‘현실적 계기’라고 명명하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것이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실체’ 개념을 대신하는 유기체적 존재 개념이라는 점은 본문에서 충분히 강조가 되었지만, 이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위해서는 특히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場’(field)의 개념을 상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물질, 분자, 원자, 전자 등은 모두 시공에 있어서의 場의 여러 양상이다. 그리고 그 場의 초점을 이루는 영역이 상식적으로는 ‘물질’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의 場은 시공의 전 영역에 걸쳐 있으며, 시공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무수한 場이 중첩되면서 서로간에 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결국 추상화의 소산이며, 모든 대상은 사건의 場 속에서 일정한 맥락을 가지며 다른 대상들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출현한다.

 

이처럼 현실적 존재가 서로 작용하며 관계하는 양상을 화이트헤드는 ‘파지’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파지를 통해서 한 쪽은 다른 쪽의 가능성을 실현시킨다. 실현시키는 쪽에서 보면 그것은 ‘주체화’(subjectification)가 되며 실현되는 쪽에서 보면 ‘객체화’(objectifi-cation)가 된다. 이러한 주체화와 객체화를 통해서 현실적 존재는 ‘생성’한다. 그러기에 현실적 존재는 항상 ‘과정’이다. 그것은 ‘흐름’이며, 언제나 새롭고 창조적이며, 따라서 그 하나하나는 ‘획기적 사건’(epochal occasion)인 것이다. 여기에 현실적 존재는 현재를 지각함과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따라서 자신의 ‘생애의 역사’를 보유하는 동시에 자기의 ‘동시대자’를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유기적’이고, 화이트헤드가 스스로 자기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부른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각 사건은 상호반영적인 連鎖(결합체, nexus)의 집합(togetherness)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저마다 ‘사회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세계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유기적인 현실적 존재의 완전한 상호의존적인 사건 내지 과정의 조직체인 것이다.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질서’라는 사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리하여 계기들의 그룹화는 어떤 맹목적인 우연한 기회를 기반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 내의 모든 질서의 형태들은 궁극적으론 신에게 의존하면서 현실적 존재들의 사회 내의 어떤 직접적인 유전의 노선으로 존재함으로써, 과거는 각각의 새로운 계기 속으로 종합되고 각 계기는 그 나름의 새로움의 정도를 더해 나가는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도 화이트헤드의 체계에서는 그 속에서 인간의 연속성이 직접적인 유전의 노선에 의해 부과되는 바의 일종의 현실적 존재들의 복잡한 사회로서 설명된다. 이 견해는 실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는 이해되기 힘들지만 현대과학―여기서는 특히 場(field)의 개념―이 후광을 드리우는 유기체철학의 조명 하에서는 수긍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입장에서 볼 때 위의 비판에 대한 답변은 제3장 제2절에서 전통적인 ‘실체로서의 인간’관을 ‘현실적 계기들의 사회로서의 인간’관으로 대체하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통해 이미 주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론 3> 화이트헤드의 경험이론에 대항하여 흔히 제기되고 있는 다른 유형의 반론은 그의 경험관의 극단적인 일반성과 관련된다. 화이트헤드의 포괄적인 경험관은 ‘경험’을 모든 것을 포섭하는 그러한 용어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경험의 참된 의의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245) 특히 ‘경험’하면 의례히 ‘의식적인 감각지각’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경험이라는 용어를 화이트헤드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적용시키고 있고 그처럼 확장된 의미에서는 경험의 개념은 불가해한 것이 된다.

 

<대답 3>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한번 찬찬히 숙고해보라고 권하는 이상의 어떤 특별한 대응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의 경험이 정말로 의식적인 감각지각에 한정되는지 아니면 다른 양식의 경험도 포함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을 권하는 일이 적절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인식(knowledge)’에 대한 철학적 집착, 특히 데카르트 이래 서구철학을 특징짓고 있는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욕구는 다른 경험양식을 배재하면서까지 과학적 인식(cognition)에 과도한 주목을 하게끔 이끌었다. 그러나 인식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 벗어나서 실제로 향유되는 바의 우리 자신의 경험내용을 되물어볼 때 우리는 거기서 인식 이상의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세계 내의 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전신체적(全身體的) 경험은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저 수많은 속성들에 대한 어떤 국소적인 지적 탐구로 한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철저하게 얽혀 있으며 우리의 이 얽힘은 여기서 미적이라고 지칭된 그러한 경험유형들을 포함한다. 즉 인간의 가치경험은 감각지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에 ‘현전’하며,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가 취하는 넓은 경험관이 정당화된다.

 

<반론 4> 또 하나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요컨대, 감각지각과 가치경험 간에는 어떠한 진정한 연관성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단일한 경험이론에로 함께 잡아넣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비판이다. 여기서는 가치경험이 인간경험의 한 중요한 모습이라는 점은 인정하는데는 주저하지 않으나, 그것은 감각지각에서 발견되는 경험유형과는 본질적인 아무런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246) 그러한 견해는 과학적 인식에 포함되는 경험양식과 미적인 경험양식 간의 엄격한 이분법을 주장한다. 본 논문 전체를 통해 필자는 감각지각과 가치경험을 하나의 통합된 경험이론으로 취급하는 화이트헤드의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는데, 만약 위 비판에서의 지적처럼 두 경험양식 간에 어떤 기초적인 통일성이 없다면 통합이론은 전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대답 4>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자연의 이분법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논박이 ‘가치를 위한 항변’이며 동시에 그의 경험이론이 ‘사실’과 ‘가치’ 간의 간극을 연결하는 수단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의 우주론의 체계에서 “궁극적인 사실은, 모두 마찬가지로, …「가치」경험의 방울들”247)인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모든 ‘한정적인 지각행위’(definite act of perceptivity)248)는 동시에 가치화의 행위(act of valuation)이며 그래서 경험의 분화가 있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지각과 가치경험 간의 본질적인 통일성은 두 경험양식의 토대적 차원에서 발견된다. 이 토대적 차원의 경험양식이 보다 복잡한 경험단계를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근원적인 경험양식이다. 달리 말하면 직관, 혹은 느낌, 혹은 총체적 상황에 대한 어떤 파악(apprehension)이 두 경험양식의 기초로서 역할한다. 이 두 경험양식 간의 어떤 ‘본질적인’ 연관성을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다. 물론 이 연관성이 통합적인 경험이론을 위한 기반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단순히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두 양식의 구분이 필요한 측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둘은 공히 인간경험의 진정한 양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편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경험이론은 ‘불충분한’(inadequate) 경험이론이 되고 말 것이다.

 

<반론 5>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견지되고 있는 협소한 경험관과 달리 화이트헤드는 그 속에서 과학적 인식과 가치경험 둘다 인간경험의 정당한 양식으로 인정되는 통합적인 인간경험이론을 제시한다. 또 현대 분석주의자들의 협소한 철학적 방법과 달리 화이트헤드는 포괄적이고 사변적인 우주론의 체계를 제시한다.

 

철학은, 그것이 최선의 상태일 때,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능산적’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변적 구성에 대한 현대철학의 만연해 있는 경멸 때문에 능산적 측면을 강조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능산의 철학’으로서의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갖는 의의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회의의 눈길을 보내는 이가 적지 않았다. 화이트헤드의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구성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1장에서의 지적처럼, 사유의 일반적인 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점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비판과 개선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은 그의 사유의 특수성·독자성과 맞물려 항상 그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반론으로는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관련되는 것을 들고자 한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철학을 제창하고 비슷한 미학관을 피력하고 있는 존 듀이가 「화이트헤드의 철학」이라는 한 논문에서 제기한 비판을 들고자 하는데,249) 굳이 이를 드는 이유는 이에 대한 답변 속에서 화이트헤드의 사유방식에 대한 어떤 종합적인 확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발생론적-기능적’ 접근방식(’genetic-functional’ approach)과 ‘수학적-형식적’ 접근방식(’mathematical-formal’ approach)이라고 그 자신이 부른 철학에의 두가지 다른 접근방식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이 두 접근방식이 모두 발견되고 있다고 제안한다. 발생론적-기능적 접근이란 실험적 관찰과 경험으로부터의 일반화를 강조하는 것인데, 철학의 정당한 방법은 기술적 일반화의 방법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이러한 접근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듀이는 먼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경험주의자는 주저없이 동의해야 한다. 경험에 대한 기술적 일반화는 어떤 경험론에서도 그 목표가 되는 것임을.250)

 

그러나 듀이는 그러한 일반화가 “그 속에서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가 해석될 수 있는 어떤 정합적 논리적 필연적 일반관념의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에 대해서 몇가지 점에서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듀이에게 이것은 철학자는 어떤 고정되고 아프리오리한 진리(수학적-형식적 체계와 비슷한 체계를 구성하는)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일종의 전통적인 합리론의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방법과 관련하여 듀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요컨대 문제는 그것이 (자연과학의 방법처럼) 실험적인 관찰에 근본적으로 강조점을 두는 것이냐 아니면 전통적인 합리론처럼 수학적 방법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냐는 것이다.251)

 

듀이는,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동일한 차원에 있을 수는 없으며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러면서 듀이는 자신의 선택은 발생론적-기능적 해석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그는 화이트헤드도 양자 중 어느 것이 우선적인지를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듀이의 발언에 따르면 이 선택은 어떤 아프리오리한 일반성을 구성하는 일에 스스로 관여하는 합리론과 그렇지 않은 실험주의적 경험론 간의 선택이다. 듀이는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전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에다 수학적 해석이라는 옷을 입히는 데에는 분명 아이러니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과정에 대한 정지의 우선성을 뜻하기 때문이다.252)

 

<대답 5> 이러한 듀이의 문제제기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아무래도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철학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는 두가지 해석 간의 융합의 문제이다. 세계의 史的 과정(이는 발생론적-기능적 해석을 요구한다)은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 유동(流動, flux) 내의 필연적 연관성을 표현하는 궁극적인 존재의 원리로 향하는 어떤 통찰력도 요구한다.253)

 

이 대답의 요점은 요컨대 영속하는 것에 유동하는 것이 의존하고 유동하는 것에 영속하는 것이 의존한다는 이미 익숙해진 명제이다. 이렇게 볼 때 듀이와 화이트헤드 간의 이 교류에는 두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들어있다. 첫째는, 철학적 방법에 관련되며 특히 듀이가 제기한 문제이다. 둘째는, 영속성과 유동성 중의 어느 것이 우선적이냐는 형이상학적 물음과 관련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방법은 본 논문의 제 1장에서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상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발생론적-기능적 접근과 수학적-형식적 접근 간의 선택을 거절하는 그의 이유를 살피자면 철학의 본질에 대한 그의 견해의 일부에 다시 주목하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즉각적인 경험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사변적 일반화의 차원으로 나아가며 다시 점검과 더 나아간 적용을 위해 경험의 근거에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철학의 이상은 경험에 적용가능하면서 동시에 경험에 적절한 그러한 어떤 필연적 진리의 논리적이고 정합적인 체계를 틀짓는 일이다. 여기서 경험은 사변철학의 원천이자 사변철학에 대한 점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과 인간지식의 이상인 완전한 이해라는 목표는, 일반적으로 즉각적인 경험이, 과정이 거기에 순응하는 바의 질서의 필연성에 대한 일련의 이해를 획득하기 위해 초월될 것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영속성과 유동성의 개념, 필연성과 우연성의 개념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주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그의 후기저작(특히 ?과정과 실재?)을 지배하는 주 테마이다.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통찰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이 두 요소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속성과 유동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파악에서 조우하며, 우주에 대한 해석을 위해 함께 필요하다.

 

피할 수 없는 유동 속에는 무언가 머무르는 것이 있고, 압도적인 영속성 속에는 유동성으로 빠져나가는 요소가 있다. 영속성은 오직 유동성으로부터만 추출될 수 있고, 일시적인 계기는 영속성에 복종함으로써만 충분한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 이 두 요소를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조차도 해석할 수 없게 될 것이다.254)

 

이 인용문이 말해주듯, 듀이가 제기한 질문 속에 함축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영속성과 유동성은 어느 쪽도 우선성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각각은 상대방을 요구하고 어느 한편이 없는 다른 한편이란 있을 수 없다. 우주의 과정을 순전히 흐름으로만 이해하고자는 시도는 과정에 내재하는 질서와는 어긋나며, 실재를 어떤 고정되고 불변적인 존재로서 이해하고자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실패의 운명에 놓인다. 각각은 다른 쪽을 위해 필요하며 어느 한편을 떠난 다른 한편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화이트헤드를 일반적으로 ‘과정의 철학자’(process philosophy)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 자신은 사실 어떤 내재적인 질서가 없는 과정이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 내의 일반적인 원리들의 자격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과 관련하여 듀이와 화이트헤드 간에는 어떤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는 셈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원리들이 인간의 경험 안에서 정의되고 표현되어야 하나 인간의 표현은 궁극적인 안정성의 단계에까지는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듀이와 일치하나 인간에 의해 발견되는 어떤 일반적인 패턴이 사물의 본질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수학적-형식적 접근보다 선호한다는 발생론적-기능적 접근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을 염두에 두건대, 듀이는 자연 내의 그러한 패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오히려 원리들은 인간의 반작용을 요구하는 상황들로부터 창발되어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발되는 질서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성에 의해 부과된다.

 

아마도 양자 간의 불일치를 화해시킬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증거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듀이에게서는 원리들이 과정으로부터 생겨나고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원리들이 과정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 간에 형이상학적인 불일치가 있지만, 그러한 원리에 대한 인간의 표현이 결코 궁극적인 안정성의 단계에는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그들은 일치한다.

 

듀이가 화이트헤드에게 선택을 권유한 것은 유동성의 세계를 우선적으로 보는 견해였으며, 여기서의 철학의 주된 방법은 발생론적-기능적인 것일 것이다. 다른 쪽은 자연의 패턴들을 일차적인 것으로 강조하며 철학의 주된 방법이 수학적-형식적인 것이 된다. 선택하기를 거절하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유동과 영속 어느 쪽도 우선적이지 않으며(‘존재의 질서’의 차원에서), 사실과 원리 어느 쪽도 우선적이지 않다(‘인식의 질서’의 차원에서)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해는 사실과 원리 간의 조화로운 직조술을 필요로 하며, 특수한 사실은 일반적 원리를 예증하고 일반적 원리는 특수한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의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이해는 극단적인 합리주의적 견해와 경험주의적 견해 간의 혼융에 달려있음을 화이트헤드는 보여주는 것이다.

제1장에서 사변철학의 이상은 합리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 둘다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간의 화해를 도모함을 지적했다. 합리주의적 측면에서는 사변철학은 논리적이고 정합적이어야 하며 수학적-형식적 접근에 대답해야 한다. 경험주의적 측면에서 그것은 경험에 적용가능하고 적절해야 하며 발생론적-기능적 접근에 답해야 한다. 그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을 희생하면서 강조될 수는 없으며, 그래서 듀이가 권하는 선택은 사양된다. 사변철학의 목표는 경험에서 예증되고 모든 경험에서 적절성의 테스트를 감당하는 일반적 관념들의 필연적 체계를 표현해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변철학의 목표는 경험에 근거를 두면서 경험에 적용가능하고 적절한, 그러나 경험과는 독립적인 보편성과 필연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서 모든 경험의 아래에 있는 질서의 필연성을 포착하는 그러한 명제들의 어떤 일반적인 체계를 틀잡는 일이다.

 

그러한 목표는 인간정신의 모험을 유혹하는 그러한 것으로 역할한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과 우주 내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자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바의 목표이다. 그러나 이 야심적인 목표는 인간의 이해력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이 목표가 획득불가능하다는 사실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이해를 향한 모든 인간의 노력은 우주의 광대함과 복잡성 앞에서 겸손의 미덕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반성은 사물의 본성의 깊이를 타진하려는 노력이 참으로 천박하고 미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에서는 어떤 진술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려는 독단적인 확실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리석음의 징표가 된다.255)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상이 현대미학의 場 속에서 갖는 위상을 중심으로 본 논문의 의의와 한계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중복되는 얘기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철학은 ‘경험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이루고자는 노력에 다름아니고, 그 경험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궁극적 사실’인 ‘현실적 존재’를 통해 파악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경험의 보편적 성격’은 결국 실재 그 자체의 보편적 우주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화이트헤드는 우주 전체의 총체적인 모습에다 조회하는 방식으로써 경험을 해명해내는 것이다.

 

특히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우주 전체의 총체적인 모습’이 기본적으로 현대과학이 확인해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적극 참조하고 있다는 점은 진지하게 음미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화이트헤드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미학의 가장 오래되고 또 중요한 문제인 ‘미적 경험’의 문제가 당연히 받아야 할 ‘과학의 조명’을 화이트헤드가 비로소 가져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는 느낌도 가지고 있다. 여기다 화이트헤드가 모든 문제를 형이상학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결국 화이트헤드는 ‘미적 경험’의 문제를 과학과 형이상학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어떤 큰 틀 속에서 반추하고 있는 셈이다.

 

형이상학과 과학은 서로가 상대방을 무시해서는 제 모습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미학의 많은 문제들은 사실 종종 어느 한 쪽에만 과도하게 의탁되어 해답이 추구되는 경향이 있어온 게 사실이다. 미학의 내용이 방법론 상에서 ‘예술철학’(philoslphy of art)―이는 연구방법이 ‘철학’이다―과 ‘예술학’(science of art)―이는 연구방법이 ‘과학’이다―으로 크게 나누어진다는 사실은 형이상학과 과학을 오가는 미학의 학문적 양면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미학의 장에서 이 양면성의 조화와 통일이 치열하게 모색되고 있음은 역으로 미학이 자칫하면 쉽게 어느 일방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256)

필자가 미학의 주된 테마인 ‘미적 경험’의 문제를 특히 화이트헤드의 경험관에 비추어서 살펴보고자 한 연유의 일단이 사실은 과학과 형이상학의 바람직한 조우 속에서 이 문제가 모색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필요성을 구체화시키는 한 유력한 사례를 화이트헤드에게서 볼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미적 경험, 나아가 미학의 어떠한 이론이나 논의도 이러한 두가지 점(형이상학과 과학)을 동시적으로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올바른 논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문제제기’로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나 후대의 미학자들에게 그의 사유가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을 가상적 형식(virtual symbol)으로 보는 상징주의 예술철학자 수잔 랭거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기조로서의 철학?을 화이트헤드에게 봉헌하고 있으며,257) 화이트헤드의 ‘직관’ 혹은 ‘느낌’의 개념을 빌어 인간 느낌의 진화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음의 이론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258)

 

화이트헤드는 또 ‘신미학’의 주창자 막스 벤제(Max Bense)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벤제는 특히 화이트헤드의 ‘실재화’(realization) 개념에 크게 시사를 받았는데, 자신이 믿는 바에 따르면 화이트헤드만큼 ‘실재화’의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을 깊이 이해하고 동시에 명확히 표현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실재화’가 선택(choice)의 문제와 관련이 되는 한에 있어서 벤제는 이 개념과 정보의 개념 사이에서(정보란 결국 정보주체에게로 입력되는 자료의 ‘구성화’,‘구조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또 동시에 실재화와 관련되는 바인 ‘개별화’(individualization)의 과정과 이른바 ‘미적 정보’ 사이에서 하나의 유사성을 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패턴 개념을 가치이론 속으로 도입한 화이트헤드의 시도에 힙입어 패턴 개념을 자신의 정보미학에서 사용되는 ‘구조’ 개념과 일치시킨다. 벤제는 화이트헤드적인 우주론이 어떻게 그 형이상학적 성격과 함께 미적인 성격도 지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패턴’ 개념과 ‘가치’ 개념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상기의 여러 맥락에서 벤제는 화이트헤드를 퍼어스, 모리스와 함께 자신의 우주론적 미학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용인하고 있다.259)

 

그런가 하면 현대 모더니즘의 미학이론과 실천작업들에 끼친 화이트헤드의 영향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모더니즘의 주요 이론가 중의 한 명인 허버트 리드는 화이트헤드의 저서 ?과학과 근대세계?의 서평(書評)에 즈음하여 이 책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이후 (과학과 철학의 십자로에서 핀) 가장 의미있는 책이라고 상찬하면서, 이 책 때문에 과학과 철학 뿐 아니라 종교와 예술까지도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260) 저명한 폴란드의 미학자 W. 타타르키에비츠는 자신의 논문 「추상예술과 철학」을 통해서, 현대 물리학이 추상주의 운동에 끼친 영향과 함께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이 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화이트헤드야말로 물리학과 추상성을 미적 경험의 원리들에 연결시키려고 시도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의 미술사가 I. L. 주프닉은 자신의 논문 「추상예술의 철학적 등가물」을 통해서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몽드리앙의 회화가 어떻게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가를 보여 준다.261)

대표적인 몇가지 사례만을 들었지만,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이렇듯 현대의 미학사상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현대미학의 전체적인 이론구조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여러 요인262)으로 그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더해지고 있음은 일단 반가운 일이다.

 

본고만 하더라도 필자는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주로 그의 형이상학의 기본 구도와 그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느라 그의 ‘심미주의’를 확인하는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필자는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을 확인하면서도 그 가치의 서열(序列) 문제는 다루지 않았으며,263)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미적 경험의 특징과 미학의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운위되는 미적 경험의 특징 간을 연관짓는 문제에도 충실하지 못했으며,264) 미적 경험과 관련시켜 예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도 ‘인간활동의 어떤 내적 특질로서의 예술’은 언급하면서도 이를 바탕으로 해서 ‘파인 아트(fine-art)로서의 예술’에로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필자로서는 그러한 문제들이 본고의 문제영역을 너무 넓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화이트헤드에 대한 연구의 현단계에서는 특수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본고의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미적 경험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근원적으로 반성케 하는 계기는 마련하였다고 생각한다. 본고의 한계들로 지적되는 상기의 여러 문제들이 차후의 연구를 통해 보완된다면 화이트헤드의 미학사상은 본고가 마련한 반성의 계기와 함께 보다 풍부한 미학적 사유의 자양분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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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Aesthetic Experience

in A. N.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The basic aim of 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ontological character of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As is generally known, Whitehead is one of the major philosophers of New-Realism. The reason of for investigating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Whitehead lies in my idea that his thought explains the nature of aesthetic experience successfully in the course of revealing the nature of human experience in general.

Whitehead thought that philosophy should be a description of experience. So he himself did his best in describing human experience against the background of his framework of “cosmology.” At that time, in spite of the air of distrust on speculative philosophy, Whitehead saw great importance in it. He says that “speculative philosophy is the endeavour to frame a coherent, logical, necessary system of general ideas in terms of which every element of our experience can be interpreted.” (Process and Reality, p. 4) Here he says that his own philosophy is “speculative philosophy” and its main purpose is to establish a system by which our all experience can be interpreted.

Meanwhile, according to Whitehead, experience itself is reality. He explains “actual entity” as follows: “‘Actual entities’―also termed ‘actual occasions’―are the final real things of which the world is made up. There is no going behind actual entities to find anything more real... and these actual entities are drops of experience, complex and interdependent.”(Process and Reality, pp. 27-8) So far as the above quotation tell us, actual entities as the final real things are nothing but experience.

Moreover, according to Whitehead, the fundamental figure of reality is the interconnection of all of its elements. For Whitehead as a realist, the world is not a subjective idea (presentation) but something which really exists, and is made up of the “really existing occasions.” Then this really existing occasions is simultaneously connected with the totality of reality. In this sense, all existing things “feel” one another, and the world is a dynamic unity in which all constituent elements continuously influence mutually. So all existing things are “living” organisms. As “living” organisms, they are not static ones but moving ones. In other words, they are “process.”

Whitehead regards this reality of concrete facts as continuously realizing “value” at the same time, and the word “beauty” in the fundamental sense as a synonym of “value.” Boiled down, “reality” is equal to “beauty” because “reality” is equal to “value” and “value” equal to “beauty.” To schematize, all this relation can be expressed this way: <“reality”(or “experience”)=“value”=“beauty”>. Following expressions support this scheme: “‘Value’ is the word I use for the intrinsic reality of an event.” (Science and Modern World, p. 93), “Existence, in its own nature, is the upholding of value intensity. Also no unit can separate itself from the others, and from the whole. And yet each unit exists in its own right. It upholds value intensity for itself, and this involves sharing value intensity with the university.” (Modes of Thought, p. 111), “An actual fact is a fact of aesthetic experience.”(Process and Reality, p. 427)

Here we see that for Whitehead the actual facts are nothing but aesthetic facts. So we can say that Whitehead’s philosophy is nothing but “aestheticism,” and his philosophical system itself is nothing but “aesthetics.” This means that aesthetics for Whitehead differs widely from the “philosophy of art” in the traditional sense. The unusually broad range of the former covers from the tiny unit of actuality to the complex organism, and has its counterparts extending over the whole universe. In other words, his aesthetic thought goes in gear with his “metaphysics” or “cosmology” itself.

With the above outline of the aesthetic thought of Whitehead, I focus on two points in this thesis:

The one is the fact that for Whitehead who believed it necessary to construct a comprehensive system by which all our ideas and particular events could be interpreted and understood the basis of the world is looked out for in aesthetic experience. What makes this possible comes from Whitehead’s view that aesthetic experience is the “model” of actual entity which is the final real thing. And the reason for my attention to this is my intention to show that for Whitehead the inquiry of aesthetic experience is nothing but the inquiry of reality itself.

The other is the fact that aesthetic experience is not different qualitatively from experience in general. The dualism between experience in general and aesthetic experience is rejected as a sort of dogma in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By “the nature of aesthetic experience,” he means “the aesthetic nature of experience”. Of course experience in general is not in itself identical with aesthetic experience, and there are certain conditions that make experience in general aesthetic experience. But the difference is not in quality. In other words, there are universal conditions (categorial obligations) that must be fulfilled in order for any experience to occur and that these conditions are of the very same type to which aestheticians have appealed in specifying the aesthetic experience. Insofar as Whitehead’s list of categorial obligations is adequate to interpret experience and is coherent, he will have characterized the universal nature of an aesthetic experience. This, in effect, means that the inquiry of aesthetic experience is based on the inquiry of experience in general.

Bearing these two points in mind, I’m dealing with the problem of aesthetic experience in two respects. The one is to see how aesthetic experience (as value experience) plays a role of a proper philosophical topic and how this aspect of human experience accords with the cosmological system of Whitehead. Here I examine the status of aesthetic experience in his whole cosmological framework and the relation of the meaning of “aesthetic” when he talks about “aesthetic experience” and the concept of “pattern” or “form.”

The other is to see how the two modes of perception (perception in the mode of causal efficacy and perception in the mode of presentational immediacy) and symbolic reference can accord with the aesthetic experience which, for Whitehead, is representative of “value experience” that Whitehead thinks of as the origin of all experience, contrary to conscious sense perception which is emphasized in modern philosophy. In content, the work is to show how these concepts (two modes of perception and symbolic reference) can contribute to the explanation of the properties of aesthetic experience. In addition to it, I examine how the nature of art can be characterized within Whitehead’s theory of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these investigations, I maintain not only that aesthetic experience is a proper mode of human experience, but also that its properties should be rooted in the ubiquitous properties of the whole universe. Here the statement, “aesthetic experience is a proper mode of human experience,” means that human organism takes the deepest breaths of the “aestheticism” of reality itself. And the statement, “the properties of it should be rooted in the ubiquitous properties of the whole universe,” means that beauty as value is neither a purely mental state nor a state of object considered to be isolated from the subject. Rather, beauty as value exists as the state where the aesthetic value emerges ceaselessly from the reality itself which is already a melting point of subject and object.

Because actual entities as final real things embody beauty as value, and these actual entities are “drops of experience,” the beauty that actual entities embody makes it possible for experience in general to be aesthetic experience, and for man as a society of actual entities to be a typical subject of aesthetic experience. Then aesthetic experience itself shows the most dramatic happening of the reality itself (so “aesthetic experience is the ‘model’ of actual entity”), and man as the typical subject of aesthetic experience plays the leading part in that cosmological drama in experiencing aesthetically. This heavy meaning of aesthetic experience is what Whitehead wants to show us, and will have abundant suggestions for further study of aesthetic experience.

 

 

 

KEYWORDS: Whitehead, aesthetic experience, actual entity, perception in the mode of causal efficacy, perception in the mode of presentational immediacy, symbolic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