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

나뭇잎숨결 2023. 12. 31. 08:39


안형관*·이태호**

<한글요약>


이 논문은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가 어떻게 그의 범주도식에서 한 원리로 정착되었으며, 또한 이 원리가 그의 범주도식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성 원리의 핵심 용어인 상대성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인류의 인식 근저에 절대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 절대성이 인류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타파되어 왔는가를 먼저 고찰한다. 첫째, 고대 희랍인들이 갖고 있던 공간방향 절대성을 타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을 고찰한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 근저에 있었던 공간위치 절대성을 타파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의 공간위치 상대성을 고찰한다. 셋째, 뉴턴 등의 인식을 지배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성을 타파한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상대성을 고찰한다. 넷째, 아인슈타인이 버리지 못한 물질(광)과 중력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를 고찰한다.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는 사건의 내적관계 이론을 존재론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합생과정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내적관계인 과정의 원리와 비교되며, 모든 존재자가 현실태에 내재하기 위한 가능태로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라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은 지금처럼 성립되었다. 궁극자의 범주는 일자인 주체가 다자인 대상을 내재해서 새로움을 창출하기 때문에 상대성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존재범주들은 모두 대상이 될 수 있고,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는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이들은 내적관계를 가져 상대성 원리가 적용된다. 역으로 말해서 이렇게 상대성 원리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범주도식이 지금처럼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가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로 되었는지, 그리고 이 원리가 그의 범주도식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고찰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2장에서는 상대성 원리의 핵심이 되는 '상대성' 개념에 대한 예비적 고찰이 있다. 예비적 고찰의 방법으로, 상대성과 대비되는 절대성이 인류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타파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있다.

3장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물리적 상황(물질, 시간, 공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광과 중력의 절대성이 유지되고 있는데 비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존재론(존재 일반)에 까지 확대한 것으로 그러한 절대성이 부인된다는데 대한 고찰이 있다.

4장에서는 존재론으로 확대한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가 과정의 원리와 비교되면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의 한 원리로 정착되는데 대한 고찰이 있다.

5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범주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범주의 구도는 어떤지, 그의 상대성 원리가 이 범주도식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고찰이 있다.

화이트헤드 상대성 원리의 모체가 되는 것은 내적관계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연철학 시기에 나왔으나 형이상학 시기에는 파악이론으로 정교화 된다. 그렇지 만, 이 논문에서는 파악이론에 대한 세부사항과 존재범주들의 세부사항이 논의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파악이론이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이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존재범주들은 모두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이 대상들을 수용하는 주체가 존재범주 속에는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점들만 지적하는 것은 본 논문의 주제가 상대성 원리와 범주도식이기 때문에 이 점만 부각시켜도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이 지금처럼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등속운동과 관계되는 특수상대성 이론(1905)과 가속운동까지 포함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1916)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입증되었다.(1919) 그 관측대는 중력장이 광선을 휘게 하는 것을 관측했다. 이것은 시·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주장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 이후 상대성 이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상당히 많아졌다. 그러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반면에 이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상대성이론의 참뜻}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 조상 아마도 인류발생 이전부터 물려받아 왔던 것이며 우리가 어릴 적에 배운 심상의 변화가 필요한데, 우리는 이 변화 없이 (상대성 원리에 대한) 상상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절대성 중에서 많은 부분이 타파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가 아직까지 절대성을 바탕으로 한 원리에 지배되고 있는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사하로프라고 불리는 팡리지(方勵之)는 {뉴턴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까지}에서 "과학은 믿되 유아시절부터 품어 온 생각들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버려야 할 생각들이 절대성의 오류임을 암시하면서, 이 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전부터 인류가 생각해온 절대성의 오류들을 하나씩 타파해 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절대성의 타파에 대한 예로서 팡리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은 다음과 같다. 고대인들은 지구가 평평한 물체(거북이 등과 같이)이며 반대편(거북이의 배)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끝없는 공간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며,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위와 아래라는 공간방향이 절대적이라는 상식의 타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공간방향은 상대적이며,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서 있는 곳(기준이 되는 사람과 반대편에 있다고 하더라도)에서 머리 방향이 항상 위쪽이 된다. 즉 위와 아래라는 것이 어느 고정된 시각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사람에 따라서(그 사람이 기준이 되어) 상대적으로 정해진다. 이것은 공간방향의 절대성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공간방향의 상대성을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도 공간위치의 절대성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위치의 절대성이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고정시켜서 지구에게 절대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공간 위치의 절대성(지구 중심성)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등의 상대성 원리가 나타남으로써 타파되었다. 이들의 상대성 원리는 어떤 공간도 우주의 중심적 위치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면에서 모든 공간이 위치에 있어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위치의 상대성이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천동설과 대비된 지동설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 진다.

공간 위치의 상대성까지 인정한 뉴턴도 여전히 공간이 절대적으로 정지해 있다는 것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불변이라는 관념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시공간은 어떤 외적 상황(사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균일하기 때문에 절대 시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사물은 다만 이러한 절대 시공간에 단순히 위치만 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외적 상황(사물)에 영향을 받아서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그는 "내가 나타내고 싶었던 바는, 공간-시간은 물리적인 현실의 실제 대상물과는 무관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적인 대상물은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시공간의 절대성을 타파하고 시공간의 외적 상황(사물)에 대한 상대성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유아시절부터 품어온 시공간의 절대성을 쉽게 타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상대성을 주장한 아인슈타인도 물체(중력장)의 절대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의 부록 Ⅴ부에서 "장이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상대성 이론 180)는 것과 "물리적 현실에서 장 법칙은 순수한 중력장에 대한 법칙의 일반화로 생각하게 된다."(상대성 이론 180)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물체의 개념 형성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 형성에 앞서 있어야 한다."(상대성 이론 165)고 말한다. 그래서 팔터(Robert M. Pal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물질(또는 중력장)이 존재론적으로 시공간보다 우선이고, 사건은 단순히 입자들의 세계선(world line)의 교차점이라고 주장한다. 화이트헤드는 사건이 존재론적으로 시공간에 우선하고, 물질은 단순히 어떤 사건의 부수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사건은 입자(물질)들이 세계선에서 만나는 교차점에 불과하다. "세계선은 시공 4차원(공간 x,y,z와 시간 t)에서 나타나는 입자로서의 1점인 세계점들의 궤적을 말한다. 입자들은 이렇게 시공 4차원에서 세계점으로 나타나고, 이 점들은 궤적을 그리면서 세계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사건은 입자들의 만남이다. 따라서 사건은 세계선의 교차점이 된다. 그는 사건 개념의 한 예로서 '번개가 치고 있음'을 들고 있다.(상대성 이론 164)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사건이 어디까지나 사물들의 외적관계임을 나타낸다. 즉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번개가 친다는 사건은 음전기를 띤 물체인 구름과 양전기를 띤 물체인 구름과의 만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비해 화이트헤드는 사건 개념의 한 예로서 이집트의 대피라밋을 들고 있다. 이것의 차이는 존재론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대피라밋을 사건이라고 할 때, 그 개념에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째, 화이트헤드는 그 대피라밋이 외부의 대상들을 수용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유기체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즉 보통의 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무기물이나 유기물을 수용하는 것과 같이 대피라밋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건을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의 활동으로 보며, 이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자연철학 시기의 이러한 사건 개념은 형이상학 시기에 현실적 생기(生起)actual occasion 또는 현실적 존재자actual entity라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아인슈타인아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현실적 현실적 존재자는 외부의 대상들을 자신의 내부구조로 끌어들인다. 이때의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와 주체 앞에 놓여진 대상들은 내적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자신 앞에 놓여진 대상들을 자신의 내부구조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을 사건이라고 한다.

결국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 모두 사건을 시공간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현실적 존재자의 내적관계로서 존재 그 자체를 말하고, 아인슈타인의 사건은 존재자인 물질들의 외적관계로서 부수적이며, 우연적 관계이다. 즉 우연히 일어남happening이다.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에서 아인슈타인과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건들의 의미관련significance은 더욱더 복잡하다. 먼저 사건들은 서로 상호간에 의미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건들의 일정한 의미관련은 그렇게 사건들의 일정한 시공간적 구조가 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이 구조를 우연적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우발적인 이질성으로 가정하는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달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건들의 의미관련은, 대상이 식별하는 주체인 신체와의 내적관계를 가지는 사건 속에서 의미가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내적관계를 가짐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들은 상호간에 의미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대상과 주체와의 내적 관계는 필연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하지 않으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의미관계는 내적관계이며 필연적이다. 그는 의미의 분석(analysis of meaning)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열 개의 손가락들과 수십 억의 별들, 그리고 무수한 원자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관계들이 있다. 개별적 사물 집단들의 특정 다수성들의 상호 관계들은 역사의 우유(偶有)들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들로 귀결되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에 대한 가장 명료한 예를 구성한다.


화이트헤드의 의미관련을 인식론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의식을 가진 존재자에게 어떤 대상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식적 차원이 아니다. 의식 이전의 문제이며 존재론적 차원이다. 의미관련은 위에서 예를 든 손가락, 별, 원자 등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타자들과 내적관계를 가짐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진 다수성(대상)을 주체로서 받아들여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자신의 내적 구조 속으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사건이라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사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구조 속으로 대상을 수용하는 주체와 그 주체에게 수용되는 대상과의 내적관계이다. 따라서 사건들의 구조는 주체가 대상들을 관계항으로서 수용할 때 이루어진다. 이 때의 기본적인 관계항은 연장extention과 공액cogredience이다. 이 때의 연장은 공간성에 가까우며, 공액은 시간성에 가깝다. 그러나 연장의 개념 속에도 시간이 들어 있으며, 공액 속에도 공간이 들어 있다. 따라서 사건은 연장된 채로 연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관계의 일반적 도식으로서 연장적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기본적인 관계항으로서 공간성을 표현하는 연장과 시간성을 표현하는 연속체(위의 용어로는 공액)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공액은 그 지속 내에 있는 입각점의 해체되지 않은 특질의 보존이다."(CN 110/134) 즉 현재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특질이며, 미래까지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는 특질의 보존이다. "사건을 식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역시 사건들의 구조 속에 있는 관계항으로서 그 사건의 의미관련을 인식한다. 이 사건들의 구조는 연장과 공액이라는 두 관계에 의해 관련된 사건들의 복합체이다."(CN 52/72)

아인슈타인은 물질들 사이의 외적관계인 사건들에서 시공간을 찾기 때문에 사건들 사이의 측정 문제에 있어서 절대성을 가진 광 현상을 중심으로 상대성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는 이 상대성이 거시 물질들의 외적 상호관계를 다루는 중력의 공식과도 일치함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시간과 공간을 관련시키는 색다른 공식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상대성은 제일 먼저 광 현상을 포함하는 전자기학과의 관련에서 전개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때부터 그것이 중력의 공식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를 해왔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나와 아인슈타인과의) 주된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내가 아인슈타인의 일정하지 않는 공간 이론 혹은 광신호의 특수한 기본적 특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가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측정에서의 근거인 광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시 물질들의 외적 상호관계에서 비롯되는 중력 법칙의 절대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기술방식은 수학적으로 매우 단순하며, 오직 하나의 중력법칙 만을 인정하고, 그 밖의 것들은 배척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동시성이나 공간배치에 관한 사실들을 그의 주장과 조화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광과 중력법칙의 절대성을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것은 그의 사건 개념이 외적관계가 아닌 내적관계에 그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대해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여러 사건들 사이의 관계 이론에 도달하였는데, 이 이론은 하나의 사건이 갖는 관계란, 다른 관계항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사건에 관한 한 모두 내적인 관계들이라는 학설에 기본적으로 그 토대를 두고 있다. …… 앞서 말한 내적인 관계는, 어째서 하나의 사건이 바로 그것이 있는 장소에만, 그리고 그러한 존재 방식으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 즉 일정한 조(組)의 관계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관계가 그 사건의 본질에 들어가며, 그래서 그 관계를 떠날 때 그 사건은 더 이상 그 사건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관계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과거에는 시공관계가 외적인 것이라고 흔히, 실로 보편적으로 생각했었다. 여기서 부정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인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토대로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 각각 자신에 관한 한 내적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사건과 관련된 시공관계가 외적이라는 사고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가 토대로 하고 있는 내적관계는 사건이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내적관계라는 개념은 사건이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의 요소는 기저에 있으면서 개체화되는 실체적 활동력이며, 다른 하나는 이 개체화된 활동력에 의해 통일되는 여러 양상들의 복합체, 즉 한 사건의 본질 속에 들어가는 여러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적관계라는 개념은 여러 관계를 종합하여 사건의 발현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활동력으로서의 실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사건이 사건으로 성립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 속에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


두 가지 요소 중 하나인 실체적 활동력은 주체의 활동력이며, 다른 하나인 양상들의 복합체는 주체에 의해 통일되는 대상들이다. 이 대상들은 관계들의 복합체이다. 이 복합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활동력인 주체 때문에 사건이 성립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사건이 사건으로 성립되는 까닭은 사건이 자신 속에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고 있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 때의 사건은 현실적 존재자이고, 내적관계는 파악이 된다. 이 현실적 존재자와 파악은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에서 모두 존재자entity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타자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관계들을 떠나서 존재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의 원리로 도입하고 있는데, 이것을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 이 원리는 물리적 상황에 적용된 상대성 이론을 존재 자체에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더욱 보편화시킨 것이다.

더욱 보편화된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절대성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유기체 철학이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는 인도나 중국 사상의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쪽에서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는데 비해, 전자 쪽은 사실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

과정을 궁극자로 본다는 것은 존재자들이 내적관계를 갖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며, 사실을 궁극자로 본다는 것은 존재자들의 외적관계를 궁극자로 본다는 것이다. 존재자들의 내적관계라는 과정을 떠나서 존재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불교의 연기(緣起)사상 등은 동양인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움으로 느껴지며, 학문의 장으로 끌어올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서양인들에게는 사실을 궁극자로 보는 뿌리 깊은 인식구조가 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동양인들처럼 과정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이 동양과 서양 철학의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과정을 궁극자로 본다고 할 때의 과정은 관계하고 있는 과정이며, 이 때의 관계는 바로 내적관계이다. 화이트헤드 상대성 원리의 모체가 되는 것은 내적관계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연철학 시기에 나왔으나 형이상학 시기에는 파악이론으로 정교화되어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핵심이 된다. 파악이론은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이론이다.

화이트헤드의 이 느낌(파악 : 내적관계)이론을 위상적으로 해석한 헨리 키튼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중요성은 현 20세기나 21세기에는 아마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념들은 이미 한계에 직면한 오늘날의 개념적 조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며, 25세기쯤 되어서야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키튼도 느낌(파악 : 내적관계)이론을 분석하면서 이 이론이 이해되려면 몇 세기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인류의 인식구조 속에 고정되어 있는 절대성이 타파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기반인 상대성에 관한 학설에 따르면…"이라고 말하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상대성의 견해를 채택할 것이다."(PR 65-66/155)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자연과학에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확대한다. 그는 존재론적으로 확대한 상대성 원리를 보편적 상대성 원리라고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는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을 정면에서 파기한다. 그와는 반대로 이 원리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에 내재한다. 사실 우리가 다양한 정도의 관련성 및 무시할 수 있는 관련성을 참작한다면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기체 철학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사물의 궁극적 실재라는 면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아리화화이트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지 않는데 비해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자는 다른 주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가 관련성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이것을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라고 하며, 이 원리를 밝히는 일을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서 주력하는 일로 삼는다.

화이트헤드는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를 자신의 범주도식에서 가능태들이 현실태로 되어가는 과정의 원리와 연결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에는 합생과정과 이행과정이 있다. 합생과정은 현실적 존재자가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 자신 앞에 놓여진 많은 가능태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행과정은 통일체로서 생성된 현실태(현실적 존재자)가 그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고 가능태가 되는 과정이다. 이 때의 가능태는 연이어 일어나는(繼起하는) 현실적 존재자에게 작용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합생과 이행의 과정이 있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가 다른 존재자의 생성을 위한 가능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가 가능태로 될 수 있어야 다른 주체(현실태인 현실적 존재자)에 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모든 존재자가 다른 현실태에 내재하기 위한 가능태로 될 수 있다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설명범주 ⅳ)에서 상대성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많은 존재자들이 한 현실태로의 실재적인 합생에 있어서 한 요소가 되기 위한 가능태는 모든 존재자들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갖고 있는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이다. 그 우주 안에 들어있는 모든 항목들은 각각의 합생과 관련된다. 달리 말하면, 그 항목이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태라는 것은 있는 것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이 상대성의 원리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자들이 합생의 한 요소가 되기 위한 가능태가 된다고 했는데, 이 때 가능태로 있는 것을 지칭할 때 있는 것(being)이라고 한다. 즉 '있는 것'은 합생하는 주체에게 합생되기 위한 대상으로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화이트헤드 철학에 있어서 '있는 것'(being), 즉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 즉 새로운 존재자를 생성시키기 위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상태로 있든지 '있는 것'은 홀로 있지 않고 어떤 생성과 관계되기 위해서 있다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고 고립된 상태로 있는 것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추상에 불과하다.


설명의 범주 ⅳ)에서 〈완전한 추상〉complete abstraction이란 관념은 자기모순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것이든 비현실적인 것이든 간에 그 어떤 존재를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고찰하기 위해 그 존재로부터 우주를 사상(捨象)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자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어울리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는 저마다 세계 전체에 널리 스며들고 있다.


이렇게 진정한 실재는 모두 서로 관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성을 실재에서 빼버린 추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자는 서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추상은 불가능하다. 즉 관계하고 있는 것을 끊어내어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관념으로는 추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 분석에 불과하다. 추상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 분석이지만, 화이트헤드도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진정한 실재를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하고, 그것들이 관계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리고 화이트헤드화이트헤드화이트헤드는 이 설명범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네 번째 범주(설명범주 ⅳ)는 이 학설을 '존재자'entity라는 바로 그 개념에 적용한다. '존재자'라는 개념이 생성의 과정에 기여하는 요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 범주에서 주장된다. 우리는 이 범주 속에서 '상대성' 개념에 대한 극도의 일반화를 발견한다.


물론 네 번째 설명범주는 존재론적으로 확대한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존재론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를 존재자의 개념에 적용한다고 말한다. 존재자는 생성의 과정에 기여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네 번째 설명범주의 내용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가 생성의 과정에 기여할 수 있음을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상대성 개념을 극도로 일반화시킨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질, 시간, 공간에 상대성 이론을 적용시켰지만,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시켜서 그의 범주도식 속에 있는 하나의 원리로 정착시켰다. 범주도식 범주도식 속에 정착된 상대성의 원리는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원리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원리이다. 물론 이 때의 내재한다, 혹은 파악된다는 것은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대상들을 주체가 파악해서 자신의 내적으로 구조화하지 않으면 주체의 존립 자체가 안 된다는 존재론적 차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에서 상대성 원리가 그의 범주도식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자.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처럼 최상류의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최상류의 개념을 구체화하려는 목적으로 범주를 나타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의 범주도식을 시작하는 구절에서 "우리의 반성적인 경험 가운데 불가피하게 전제되어 있는 - 전제되고는 있지만 좀처럼 표현되어 드러나지 않는 - 유적 개념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PR 18/ )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목적과 더불어 "화이트헤드는 범주를 통해서 자신의체 유 유기체 철학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들에 대한 예비적 개요를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PR 18/ )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화이트헤드의 범주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궁극자의 범주(The Category of the Ultimate), 존재범주(Categories of Existence), 설명범주(Categories of Explanation), 범주적 제약(Categoreal Obligations)이다. 이러한 형태의 범주들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존재자(entity)는 존재(existence)의 어느 한 범주의 특수 사례이어야 하고, 모든 설명은 설명범주들 중의 한 특수 사례이어야 하고, 모든 제약은 범주적 제약들 중의 한 특수 사례이어야 한다. 궁극자의 범주는 이 세 가지 보다 더 특수한 범주들에 전제되어 있는 일반적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우선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범주와 다른 세 가지 범주를 구분하고 있다. 궁극자의 범주는 세 가지 특수한 범주들에 전제되어 있는 일반적 원리이다. 이 원리는 우주의 창조적 진전을 표현하고 있다. 유기체 철학 혹은 과정 철학이라고 불리는 화이트헤드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정적인 실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과정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존재범주), 어떻게(설명범주), 어떤 조건아래(범주적 제약)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세 가지 범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범주들에 비해 궁극자의 범주는 바로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근거(이유)인 일반적인 원리이다.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궁극자의 범주는 일자(one)와 다자(many)와 창조성(creativity)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대한 언급 없이 그 대상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려면 다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대한 언급 없이 주체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려면 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고 할 때, 파악해서 새로움을 창출하는 궁극성을 창조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극자의 범주는 이접적인 존재자들(다자)에서 연접적인 존재자(일자)로의 과정을 거쳐 창조(창조성)된 새로운 일자만큼 세계가 진전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낸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궁극적인 원리라고 말한다.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자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자를 창조하는,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진전이다. 이 새로운 존재자는 자신이 도달한 〈다자〉의 〈공재성〉인 동시에 또한 자신이 뒤에 남겨 놓은 이접적인 〈다자〉 속의 일자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종합하는 많은 존재자들 가운데 이접적으로 있는 새로운 존재자인 것이다. 다자는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 존재자들은 그 본성상 연접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궁극적인 원리는 이접적인 다자와 그것을 수용해서 연접적인 일자로 창조 활동하는 유기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해당하는 궁극자의 범주가 다자, 일자, 창조성인 것이다. 이 궁극자의 범주에 대해서는 논자가 이 논문에 앞서 발표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논문은 그 다음으로 존재범주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존재범주는 궁극적인 원리에 따라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존재자들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밝히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범주인 설명범주와 범주적 제약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범주(Categories of Existence)는 8개이며 다음과 같다.


(i) 현실적 존재자들(또한 현실적 생기들), 또는 궁극적 실재들, 또는 진정한 사물들(Actual Entities (also termed Actual Occasions), or Final Realities, or Rēs Verae).

(ii) 결합체들(결합체의 복수), 또는 공적 사태들(Nexūs (plural of Nexus), or Public Matters of Fact).

(ⅲ) 파악들, 또는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들(Prehensions, or Concrete Facts of Relatedness).

(iv) 주체적 형식들, 또는 사적 사태들(Subjective Forms, or Private Matters of Fact).

(v) 영원한 대상들, 또는 사실의 특수한 결정을 위한 순수 가능태들, 또는 한정성의 형식들(Eternal Objects, or Pure Potentials for the Specific Determi- nation of Fact, or Forms of Definiteness).

(vi) 명제들, 또는 가능한 결정 속에 있는 사태들, 또는 사태들의 특수한 결정을 위한 불순 가능태들, 또는 이론들(Propositions, or Matters of Fact in Potential Determination, or Impure Potentials for the Specific Determi- nation of Matters of Fact, or Theories).

(vii) 다수성들, 또는 다양한 존재자들의 순수 이접들(Multiplicities, or Pure Disjunctions of Diverse Entities).

(viii) 대비들, 또는 하나의 파악 속에 있는 존재자들의 종합 양식들, 또는 패턴화된 존재자들(Contrasts, or Modes of Synthesis of Entities in one Pre- hension, or Patterned Entities).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위의 존재범주들을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 여덟 가지 존재범주들 가운데, 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은 어떤 극단적 궁극성을 띠고 나타난다. 다른 존재 유형들은 어떤 매개적 성격을 가진다. 여덟 번째 범주는 범주들의 무한 수열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비에서 대비의 대비, 그리고 대비의 보다 높은 등급들로 무한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존재범주를 극단적 궁극성을 지닌 것(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과 매개적 성격을 지닌 것(파악, 결합체, 주체적 형식, 명제, 다수성, 대비)으로 구분하고 있다. 존재범주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존재범주 중 궁극성을 지녔다는 것은 관계의 양극단에 있으며 매개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관계의 중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관계의 양극단에 있는 현실적 존재자와 영원한 대상은 사물에 있어 양극을 형성한다. 즉 현실적 존재자는 물리적 극을 형성하고, 영원한 대상은 개념적 극을 형성한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 존재자는 물리적 극으로서 극단적 궁극성을 지니며, 영원한 대상은 개념적 극으로서 극단적 궁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를 느낄 때 물리적 느낌이라고 하고, 영원한 대상을 느낄 때 개념적 느낌이라고 한다. 이 물리적 느낌과 개념적 느낌은 한 사물의 양극을 이룬다.

관계의 중간에 있어서 매개적 성격을 지닌 존재자들은 두 가지 이상의 존재자들이 결합되어 있거나 양쪽을 매개하는 존재자이다. 그 중 파악은 주체인 현실적 존재자가 대상(다른 현실적 존재자나 영원한 대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결합체는 현실적 존재자들이 영원한 대상과 함께 하나의 패턴을 이룬 것(공재)이다. 주체적 형식은 파악하는 주체가 파악되는 대상을 파악하는 형식이다. 즉 파악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대상을 매개하는 것이다. 명제는 결합체가 주어, 영원한 대상이 술어로 된 결합이다. 다수성은 대상들이 이접 상태로 주체 앞에 모여 있는 것이다. 대비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대비라는 양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대상들(모든 존재자)이 주체(다른 존재자)에게 파악(내재)된다'는 보편적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존재범주도 위의 여덟 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존재범주가 상대성 원리와의 관련하에 있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에 따라 존재범주에 속하기 위해서 그 범주들은 반드시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주체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존재범주 중에서 주체의 기능을 하는 범주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상들만으로는 내적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상들 사이에 내적관계가 성립되었다면, 그 때는 이미 둘 중의 하나는 주체이지 모두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존재 범주들을 검토하여 위의 조건이 만족되는지 살펴보자.

첫째, 현실적 존재자는, 자기 앞에 있는 대상들인 존재자들을 파악해서 새로움을 창출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 현실적 존재자도 만족에 이르러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고 대상적 불멸성을 지닌 채 다음의 주체에게 파악될 대상들 중의 하나가 된다. 상대성 원리에 따라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을 파악하는 또는 내재시키는 존재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존재범주에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있다. 그러면서 또 이들도 상대성 원리에 따라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고 할 때의 '모든 존재자'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파악되는 또는 내재되는 대상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진정한 사물이라고 하고, 이것을 떠나서 더 궁극적인 것이 없다고 하여 궁극적 실재라 하며, 이것을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진정한 사건이라고 하여 현실적 생기라고 한다.

둘째, 결합체는 우리가 일상에 접하는 사물들로서 현실적 존재자들이 어떤 패턴을 함께 공유하면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도 주체로서의 역할과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결합체 자체는 현실적 존재자들의 외적관계이다. 그래서 공적 사태라고 한다.

셋째, 파악은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이다. 즉 주체가 대상을 수용하는 것이다. 파악에는 부정적 파악도 있지만, 이 때도 이미 무엇인가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미 주체와 대상이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국면의 파악에게 앞 국면의 파악이 대상이 된다.

넷째, 주체적 형식은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즉 대상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이다. 이것은 파악 대상을 파악 주체 속에 내재시키는 내적관계이며, 사적 사태이다. 이 주체적 형식도 다음 주체에게 대상이 되어 내재한다. 그렇게 됨으로서 주체의 동일성이 유지된다.

다섯째, 영원한 대상은 순수 가능태이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다른 존재범주와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태라는 것은 현실적 존재자나 결합체에 내재(진입)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영원한 대상이 내재(진입)함으로서 내재된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가 아닌 바로 그 존재자로 한정된다. 그래서 영원한 대상을 한정성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 영원한 대상이 대상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섯째, 명제는 불순 가능태이다. 여기서 불순이라는 것은 두 가지 종류 이상의 존재 범주가 섞여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제는 결합체와 영원한 대상이 섞여있는 존재 범주이다. 그런데 명제는 주어와 술어 형식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론이라고도 한다. 명제는 자신이 이끄는 대로(자신의 이론대로) 주체가 느끼도록 유혹하는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일곱 번째, 다수성은 여러 존재자들이 주체에 내재하기 위하여 이접 상태인 대상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주체에 내재하기 전에 집합되어 있는 대상들 각각을 지칭 할 때는 존재자라고 하고, 이것들을 한꺼번에 지칭할 때 다수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수성도 당연히 대상이다.

여덟 번째, 대비는 하나의 파악 속에 있는 존재자들의 종합 양식들, 또는 패턴화된 존재자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존재범주 중 다수성을 제외한 여섯 가지 존재 범주들을 종합해서 패턴화된 하나의 존재자로 만드는 양식이다. 이 대비 때문에 무수한 유형의 존재 범주가 가능하게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대비된 존재범주들을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8가지 존재 범주들 모두가 대상이 되어 주체 안에 내재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주체가 되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렇게 주체 안에 내재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수용해서 내재할 수 있는 주체가 있어서 그들 사이에 내적관계가 이루어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존재범주들이 그의 상대성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원리에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화이트헤드 철학의 근저에는 상대성 원리가 놓여 있으며, 이 상대성 원리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인식근저에 놓여 있는 절대성을 타파해야 한다. 그것도 여러 겹의 절대성을 타파해야 한다. 그래서 논자는 본 주제의 예비적 고찰로서 여러 겹의 절대성을 타파해 가는 과정을 고찰했다. 그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방향 상대성, 뉴턴 등의 공간 위치 상대성,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상대성을 들었다.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는 시공간 상대성을 이해한 아인슈타인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도 물체(중력장)와 광의 절대성을 타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절대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궁극적 실재인 존재자의 내적관계를 보아야 하며, 존재자들이 외적관계만 갖는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은 사실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다.

화이트헤드의 상대성 원리가 모체로 하고 있는 존재자의 내적관계는, 대상들을 주체가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대상들이 주체에게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모든 존재자에게 확대 적용시키면,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내재한다'는 원리가 된다. 이 원리를 화이트헤드는 보편적 상대성의 원리라고 한다.

이 원리는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에 적용되고 있다. 궁극자의 범주는 대상들을 다자로, 주체를 일자로, 파악하는 힘을 창조성에 대비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상대성 원리에 따라, 대상들(다자)이 주체(일자)에게 파악된다(창조성)는 것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존재범주는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성 원리를 따르고 있다. 즉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 내재하기 위해서 대상이 된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주체도 있어야 한다. 즉 그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게 내재해야 한다. 이 때의 다른 존재자는 그 대상을 내재시킬 주체여야 한다. 그런데 존재범주 중에는 현실적 존재자와 결합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존재범주도 상대성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을 통해 화이트헤드의 보편적 상대성 원리는 존재론으로 확대된 상대성 원리이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범주도식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었으며, 그리고 이 원리는 그의 범주도식 모든 곳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