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사회 인식에서의 경험의 의의

나뭇잎숨결 2022. 3. 4. 10:50

사회 인식에서의 경험의 의의
--헤겔에서 알튀세르까지


문성헌


'진리'(하나의 진리)란 한 사건에 대한 한 충실성의 실제 과정을 말한다.
--알랭 바디우


1. 서론 : '새로움'과 '경험'의 문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갈망,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갈망을 오늘날에는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취급하는 일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이러한 갈망을 우리에게서 완전히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불변의 진리'는 그 효율 면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한 진리로 무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진리가 포섭하는 범위 내에서는 새로운 사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모든 사태가 그 진리의 적용 대상이며, 따라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드는 새로운 노력이나 부담이 필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변의' 진리가 적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사태란 없다고 해야 옳겠다.
그렇다면 새로움의 인식과 진리의 인식은 서로 배치되는 것일까? 정말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일단 그것을 인식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의 '새로운' 진리를 안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자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새로운 인식과 진리의 인식이 합치할 수 있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인식되는 순간뿐이다. 물론 우리가 진리를 불변적인 것이 아닌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곧 불완전한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때에는 새로운 인식이 보다 나은 진리 인식일 수 있는 여지가 남는다. 일반적으로 보아, 우리가 인식하는 진리를 이렇게 불완전한 진리로 생각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인식의 역사에 잘 들어맞는 보다 상식적인 견해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실제로 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나 또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만이 아니다. 불변의 진리를 내세움으로써 얻는 효과도 이 문제들을 둘러싼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예를 들어, 불변의 진리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인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 불변적 진리에 대한 갈망이 이러한 효과와 결합하여 그 효율성을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확보하려 드는 경우도 많다. 다른 인식적 주장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통해서 특정한 '불변의 진리'의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시도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인식적 주장에 대한 배제와 수용의 규칙이 상대적으로 잘 체계화되어 있는) 자연 과학 영역에서보다 인식적 주장의 가변성이 크고 그 영향이 한층 더 직접적인 사회와 역사 영역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일반화된 이른바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는 이 같은 면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 보아 좋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널리 퍼졌던 회의주의적 풍조는 인식론의 영역을 화용론적으로 재편하거나 유동적인 차이의 연쇄로 '해체'하려는 경향마저 보여 왔다. 절대적 진리 주장에 대한 불신이 진리라는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거부로까지 나아간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방식이 '불변적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상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반(反)인식론적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집착이 그 같은 진리가 실재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라는 틀 자체의 거부 역시 진리의 실제적인 소멸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퍼트남의 지적대로, 진리에 대한 특정한 견해들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이를 진리 개념 자체의 붕괴로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절대적이지 않은 진리, 가변적인 진리를 상정하는 상식적인 견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가변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또 어떠한 성질을 갖는 것일까? 만일 이 가변성이 말 그대로 그저 변화 가능함을 나타낼 뿐이라면, 그래서 기존의 진리와 변화된 진리 사이에 어떤 특별한 차이를 이야기하기 힘든 것이라면, 그것은 실상 진리의 '해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경우 우리는 무수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식'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인데, 왜냐 하면 인식에서의 '새로움'은 이전의 것과 바꿔 놓아도 상관없는 그런 종류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인식이란 교환 가능한 양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질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변의 진리에 대한 집착뿐만 아니라 진리나 인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이 같은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과 그 특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새로움'의 문제를 조망하는 데 핵심이 되는 인식론적 범주는 바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움이 원래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 있던 것에서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그 경우 그것은 진정한 새로움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주어지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이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식 방식, 즉 수용성(受容性)을 특징으로 하는 경험이 문제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주어진다는 측면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경험을 경험일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계기이다. 주어짐이 없이는, 또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임이 없이는 인식론적 의미에서의 경험은 성립하지 않는다. 경험을 얘기하는 모든 인식론적 입장은 어떠한 의미에서건 이 주어짐과 받아들임의 계기를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어짐-받아들임의 구조가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는 데 필요한 주요한 조건인 개방성(開放性)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때의 경험은 근대의 영국 경험론자들이 주목했던 감각적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 개념은 분명 수용성의 계기를 중심에 놓고 있지만, '새로운 인식'과 연결되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감각의 영역'만을 다루고 있다. 즉 경험론자들은 주어짐과 받아들임이 오로지 감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 곧 사고 작용의 대상을 이루는 궁극적 요소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것의 성립에 대해 우리의 지성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의 철저한 수동성을 설정하는 데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은 경험관은 경험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사고의 대상인 관념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따를 경우 적어도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새로운 인식'에 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내놓기 어렵다. 감각적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경험을 위해서는 감각적 수동성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경험의 이러한 측면, 즉 감각을 넘어서는 개념적인 면과 수동성을 넘어서는 능동적인 면은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에 의해 주로 궁구되었다. 특히 헤겔은 그의 철학 체계가 지니는 궁극적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운동을 통하여 '경험의 발전'을 논의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였다. 그 후,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사변적 의식에 밀려났던 수용성 곧 감성(感性)을 다시 강조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포이어바흐의 감성이 독일 관념론에서 드러난 능동성의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에 오면 경험은 무엇보다도 '감성적 실천'에 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견해는 수용성과 활동성,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경험의 두 측면을 나름대로 통일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이르러 이와 같은 문제가 종국적 해결을 본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견해 자체가 새로운 검증의 대상이자 경험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사회 및 역사의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새로움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나아가 그 같은 인식이 과연 진리로운 것인지 하는 따위의 문제가 계속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그 가운데 경험의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흥미로운 것이 반영론(反映論)과 반(反)경험주의의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영론은 소련을 위시한 옛 사회주의권의 공식적인 인식론이었고, 알튀세르(L. Althusser)가 내세운 반경험주의는 그 반영론에 대한 주요한 반발이자 비판이었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면 반영론은 의식의 수용성에, 알튀세르의 반경험주의는 이론적 활동의 능동성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따라 마르크스 사상의 새로움을 설명하는 방식도 달라지는데, 알튀세르의 경우, 그 새로움은 경험과 무관한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이룩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구조주의적 색채가 강한 이 같은 견해는 경험이라는 문제 설정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경험과 인식에 관한 탈근대적 입장과 이어지는 면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견지에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의 새로움보다는 마르크스를 넘어선 새로움,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뒷받침할 새로운 인식이 더 문제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새로움에는 그 정형(定形)이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새로움의 성립 방식 및 그 새로움을 가능하게 할 개방성 자체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 개방성은 '불변의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허무는 것임과 동시에, 무차별한 차이의 연쇄를 향해서만 열려 있는 '해체'의 회의주의적 경계를 또한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생각과는 달리 '경험'이라는 문제틀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실패가 드러난 뒤에는 알튀세르 자신도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경험에 기대는 모습을 보인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앞으로 이 글을 통해 경험 문제를 둘러싼 철학사적 논란들을 간단히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 줄기는 경험이 지니는 수동적 내지 감성적 측면과 능동적 내지 개념적 측면이 엮어내는 궤적을 헤겔, 마르크스, 알튀세르 등의 이론을 통해 정리해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가 평면적 실증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임을 밝히지만, 결국 '경험'의 궁극적인 의의는 개방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결국 개념적 변환까지를 수용하는 개방성을 확보하는 일이 사회 및 역사의 인식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불가불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얽히는데, 이 글에서는 특히 경험을 대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유물론이 지니는 현대적이고 긍정적인 함의를 밝혀 보고자 한다.


2. 헤겔에서의 경험 개념

1) 경험론 및 칸트의 경험관에 대한 헤겔의 비판

헤겔은 {엔치클로패디}에서 철학의 내용은 현실이며, 이 내용에 대한 우선적인 의식이 경험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현실은 헤겔 나름의 규정에 의한 현실, 즉 이성적인 현실이자 필연적이고 계기적인 질서를 갖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경험을 통해서 드러나며, 또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경험이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은 헤겔 철학에서, 특히 그의 인식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점은 그의 철학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쓰여진 {정신현상학}이 원래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경험 개념이 감각적 경험으로 이해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헤겔이 볼 때 감각적 경험은 단지 경험의 한 국면, 그것도 아주 초보적인 단계일 뿐이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감각의 차원에서는 '진리'가 성립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진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일반성도 감각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감각적 경험은 이미 일반성에 의해 매개된 것들이다. 헤겔에 따르면 로크를 비롯한 경험론자들은 이러한 일반성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했다.
경험론자들은 감각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사고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러한 한 그것들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개별적인 단일성 내지 통일성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 즉 그것들은 한갓 감각 소여(sense data)라기보다는 지각(perception)의 내용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경험론자들은 사고의 대상이 되는 단순한 관념이나 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에 주목했을 뿐,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그러한 형태로 주어질 수 있는가는 철저히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감각적 경험의 성립 과정에서 의식이나 지성은 단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경험을 구성하기 위하여 의식 작용을 개입시킨다. 즉 지각 내용은 언제나 다양한 구체성을 지닌 것인데, 경험론자들은 이를 쪼개고 나누어 단순한 관념, 단순한 인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헤겔에 따르면 이 쪼개고 나누는 작업, 다시 말해 분석은 분명히 우리 주관의 작용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상은 타자와 구별되고 그 자체 내의 동일성을 갖는 한, 이미 일반성의 형식을 지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단위로 성립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은 주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전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헤겔은 경험론이 자신의 입장을 개입시켜 감각적 지각을 추상적 개별자로 만들어 놓고서도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추상적 개별자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헤겔은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경험의 근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연성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고 주장한다. 경험론은 단순한 관념이나 인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확실한 토대로 놓고 모든 인식 내용을 분석하여 그것들로 환원하고자 하지만, 정작 이 관념이나 인상이 주어지는 근거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어짐은 우연적인 것이 되며, 주어지는 각 요소들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인 연관도 확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진리란 모름지기 필연성과 보편성을 갖추어야 하는 까닭에, 이렇게 우연성에 바탕을 두고서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헤겔이 보기에 인식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지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개별자 속에서 보편적인 것과 항상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진리관을 전제로 하여 감각적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경험의 성립 과정에 주관의 능동적 요소가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매개 고리로 등장하는 것이 칸트의 경험 개념이다.
칸트는 경험론자들과는 달리 경험을 감각적 지각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물론 그가 '경험'(Erfhhrung)이라는 용어를 감각적 인상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경험의 본래적 의미는 '경험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의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감각적 인상이나 지각과 구별한다.

경험이란 경험적 인식, 즉 지각을 통하여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지각들의 종합이다. 이 종합 자체는 지각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 종합이 지각들의 다양의 종합적 통일을 하나의 의식 속에 포함한다. 그리고 이 종합적 통일이 [.....] (단지 직관이나 감관에 의한 감각이 아니라) 경험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칸트는 경험에 종합적 통일이라는 주관의 능동적 작용을 포함시킨다. 이는 경험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측면이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성립하는 것은 지각이나 관념 또는 표상이 아니라 이들이 결합된 판단 내지 경험적 개념이 된다. 그러니까 '주어짐과 받아들임'이라는 구도 아래서 보자면, 칸트의 경우 주어지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내용을 지닌 판단이고, 이러한 주어짐이 이루어지는 차원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주관의 결합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가 이런 식의 생각을 도입한 까닭은 특정한 판단의 결합 작용이나 종합적 통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필연성을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나 지각 자체에 의해서 확보하는 것은--경험론의 전개 과정이 보여주듯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칸트는 이를 의식의 작용에 귀속시킨다. 그러니까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판단 속에서 필연성을 갖게 되는 근거는 우리의 인식 주관 자체 속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경험 속에서 필연성을 발견한다면 그 필연성은 우리 주관이 스스로 부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우리가 준 필연성을 다시 받아들이고 이를 의식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경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필연성의 근거가 자아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경험의 근거가 전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은 감성에 주어지는 다양에 관계할 때에만 성립하는데, 이렇게 주어지는 다양의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관이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식 밖에 있는 그 무엇에 근거를 가져야 한다. 물론 이 다양이 주어지는 방식, 즉 직관의 형식은 우리의 심성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즉 우리는 이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적 인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또 이 형식이 우리 밖에 있는 그 무엇과 일치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이 성립하기 전의 이 대상을 '선험적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 이를 인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경험에서 우리 주관에 내재해 있는 형식에 기반을 둔 필연적 결합 이외의 부분에 대한 근거는 불가지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귀결은 인간의 경험이 일정한 형식을 지닌 수동적 감성에 주어지는 다양과 관계할 때에만 성립한다고 본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는 경험에 주관의 자발성과 자기의식적 요소를 도입했지만,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 감성에 제약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경험의 범위도 이에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칸트 철학이 "유한한 인식을 고정된 궁극적인 입지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자체로(an und f r sich) 진리인 것에 대한 문제를 포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헤겔은 칸트가 경험 중에서 확보하고자 한 필연성, 즉 의식의 능동적 작용에 기반을 둔 필연성도 결국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필연성이 인식 주관에서 말미암은 것이어서 '물 자체'와 구별되며 따라서 참된 객관에 적용될 수 없는 이상, 주관의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유의 참다운 객관성은 인식 주관에서 비롯하는 일반성이나 보편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 일반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이처럼 헤겔은 칸트가 인간의 경험에 부과한 한계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인 참된 객관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그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학적 인식'과 '절대지'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헤겔은 이 도정이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헤겔 경험 개념의 특징

헤겔은 {엔치클로패디}에서 "경험의 원리는 무한히 중요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경험의 원리는 한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참다운 것으로 여기려면 인간 자신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이 자기 자신의 확신과 일치하고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그 출발점으로 보아 경험적 학문"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경험이 감각적 경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외적인 감관을 통한 것이건 심오한 정신이나 자기 의식을 통한 것이건 간에, 의식 일반 가운데 있는 것이면 모두 경험된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 통로가 어떠하든 모두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아는 한, 모든 지(知;Wissen)는 경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의식 중에 있는 것, 의식에 주어지는 것, 따라서 경험되는 것 이외에는 알 수가 없다. 이 점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그런 까닭에 철학은 그 출발점에서 보아 경험적 학문이다.
물론 이렇게 포괄적인 규정은 헤겔이 제시하고자 하는 경험 개념의 출발점일 뿐이다. 모든 의식 내용에 대해 무차별한 이런 식의 규정만으로는 헤겔이 목표로 하는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도, 그것이 지이고 앎인 이상,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경험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경험하기 전에, 즉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또 무엇이 참된 인식인가를 먼저 알아보려는 태도는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수영을 배우려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인식을 시험하는 일은 인식하면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류의 선험 철학도 결코 경험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의 한 형태이자 지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이 양자는 경험을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미리 규정하고 거기에 따라 참된 인식의 기준을 자의로 설정함으로써, 도리어 자신들이 내세운 경험의 근거마저 제시할 수 없는 불완전한 형태의 지에 머물고 만다.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 역시 경험의 한 형태이자 지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 아닐까? 만일 다 같이 지와 경험의 한 형태라면, 칸트나 경험론자들의 철학과는 달리, 헤겔 자신의 철학이 세계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이룬 절대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헤겔은 이 근거를 역시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수용하는 경험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험, 더군다나 절대적 진리를 향한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험은 단번에 주어지고 마는 경험이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바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는 운동이 된다. 헤겔은 이 같은 의식의 운동 과정을 {정신현상학}을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다양한 지의 형태들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것들이 역사상으로 나타난 지의 모든 중요한 양식들을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이 지의 형태들을 절대지를 향해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전개 과정으로 꾸려 놓는다. 그리고 이 전개 과정의 종국점에 서 있는 절대지는 이 형태들을 모두 자신의 계기로 포함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겔의 말대로 이러한 질서를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상위의 지가 하위의 지를 그 계기로서 포함한다고 할 때, 또 이러한 지의 계열이 절대지까지 나아가는 일련의 발전 과정을 이룬다고 할 때, 이 지들의 위계적 연속 과정을 만들어 내는 평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헤겔은 이에 대해서도 어떠한 외적인 평가 기준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헤겔이 제시하는 것은 각 단계의 지에 해당하는 의식이 그 스스로의 평가 기준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의식은 그의 기준을 그 자신에게 부여하며", 의식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함에 따라 그 평가 기준 자체도 변화하게 된다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평가 기준을 설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일은 대상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이냐를 성급하게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파악한 대상 즉 지와, 의식이 대상의 참 모습 또는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진리의 관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두 계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의식은 양자가 합치하도록 자신의 지를 변경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기준도 이 과정에서 변경된다. 의식이 대상에 대한 지를 추구하는 가운데, 대상의 본질 내지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면, 이 기준 또한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또 이렇게 진리의 기준이 바뀌면 의식은 그 기준에 맞는 지의 형태를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다시 자신의 지를 변경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의식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헤겔은 의식이 겪어 나가는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즉 "의식이 자신의 지와 대상에서, 곧 자기 자신에게서 수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를 통해 의식에게 새로운 참된 대상이 생겨나는 한, 바로 경험이라고 칭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경험의 핵심적인 의미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새롭고 참된 대상이 생겨나는 한'이라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우리가 애당초 경험과 관련하여 부각시키고자 했던 새로움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헤겔에서도 경험을 경험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새로운 인식인 셈이다. 사실 이런 규정이 빠져 있다면,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식 내용과 경험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새삼스레 '경험'을 문제삼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의식 내용 가운데 새로운 인식과 결부된 내용만이, 즉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대상과 관계하는 내용만이 경험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헤겔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대상이 등장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일단 대상에 대한 의식의 관심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대상이 변화하게 되는 것은 의식의 이러한 태도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능동적 작용 때문이다. 일정 단계의 의식은 진리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한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각이나 지각이 진리의 준거 기준이라고 생각을 한다. 의식은 이러한 기준에 따라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검증해 보게 되며, 이 과정에서 사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확신을 포기하고 드러난 사태에 걸맞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 기준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럴 경우 새로운 기준에 따라 검증해 보아야 할 대상의 차원은 이전과 같은 것일 수 없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감각적 개별자를 문제삼았지만 이제는 일반자를 다루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 과정은 더 이상 의식이 자신의 진리 기준과 대상이 모순을 빚지 않는다고 여길 때까지, 즉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 경험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대상, 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차원이다. 새로운 대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곧 탐구의 대상이 되는 차원이 변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헤겔이 한 단계의 대상이 가상(假象)임이 드러났다든지 지양되어 버렸다고 할 때에도, 그 말은 세계의 한 국면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에서는 진리가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등장한 차원이 그 이전 차원의 진리나 본질을 이룬다는 의미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또 이 과정은 연속적인 까닭에, 선행하는 차원은 다음 단계의 전제를 이루며, 후자는 전자를 지양된 형태로 함축한다. 따라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차원은 그 이전에 등장한 모든 차원을 전제하며 내용적으로 함축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진리란 곧 전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종국적인 단계는 이전의 운동의 결과이며 또 이 단계에 가서야 이전의 모든 차원들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이 말하는 의식의 운동 과정, 곧 경험 과정은 경험론에서의 감각적 지각의 차원이나 칸트에서의 자기의식적 차원을 자신의 계기로 포함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정신현상학}에서의 이 경험 과정은 자기의식에 이어 이성의 단계를 거쳐, 사회 역사적 차원을 포괄하는 정신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 정신의 종국에 위치하는 것이 절대지이며,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총체적이고 개념적인 파악인 학(Wissenschaft)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 과정은 헤겔의 이 학적 체계를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며, 또 거꾸로 이 학적 체계가 경험 과정의 필연성을 다시 근거 지워 주기도 한다. 왜냐 하면 의식의 경험 과정이란 학적 체계에 의해 개념적으로 포착되는 바로 그 현실에 대한 계기적이고 발전적인 경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험 과정을 이끌어 가는 추동력은 이미 언급했듯이 의식 내부의 모순, 즉 진리 또는 대상의 계기와 지 또는 인식의 계기 사이에 성립하는 모순이다. 이 모순의 해결과 양 계기의 변화에 따라 의식은 새로운 단계의 경험으로 이행한다. 칸트의 경우 경험에 개입하는 의식의 능동적 활동은 언제나 감성에 의해 제약받는 것이었지만, 헤겔에서는 감성적 차원이 의식이 경험하는 제일 첫 단계로 다루어질 뿐, 그 경험 과정 속에서 곧바로 지양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헤겔이 말하는 경험에서는 의식의 능동적 운동을 넘어서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셈이다. 의식은 자신의 대상에 작용하여 그것을 변화, 발전시키고 또 여기에 따라 그 자신도 변화, 발전해 나간다. 이처럼 헤겔에서는 의식의 능동적 활동이 새로운 경험의 동인이자 지반이 된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서 수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규정은 경험에서 의식이 차지하는 이와 같은 위상과 역할을 잘 드러내 준다.

3) 헤겔 경험 개념의 폐쇄성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헤겔은 그 경험의 근거를 불가지한 것으로 놓았던 경험론 및 칸트의 경험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자신의 경험 개념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헤겔의 경험 개념은 절대지를 지향하는 그의 체계 속에서 자신의 학적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헤겔이 말하는 경험은 폐쇄적 관념론의 틀 속에 갇히고 말았다. 즉 헤겔에서는 경험의 두 축인 대상의 측면과 지의 측면이 모두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설정되고 그 내용 또한 궁극적으로 정신의 산물로 귀착된다. 이렇듯 그의 경험 개념은 완결된 절대적 인식이라는 목적 의식에 의해 침윤되어 있었고, 그러한 한 독단성과 폐쇄성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헤겔은 그의 경험 개념을 통하여 다양한 지적 형태들을 논리적이고 발전적인 연관하에서 파악하고자 함으로써 인간 사유의 역사를 논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경험의 각 차원, 특히 감각적 차원의 한계를 지적하고 각 차원 사이의 내용적 연관을 드러내려고 시도하였다. 또 그는 경험의 추진력으로서 주관의 능동적 활동을 부각시켰는데, 이것 역시 칸트에서와 같이 고정된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순에 의한 계속되는 발전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헤겔의 경험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이와 같은 운동성과 실천성, 곧 주체와 객체의 상호 작용과 상호 변화를 파악하는 방식은 노동과 생산을 모델로 하는 근대적 인식 틀의 한 고전적 원형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헤겔의 경험 개념은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절대지의 확보를 목표로 삼는 폐쇄적 특성을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헤겔의 경험 개념이 자신의 역동성을 제한하는 닫힌 구조를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헤겔이 인식 주관의 수용성 또는 수동성을 실질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방식으로만 새로움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헤겔은 경험에서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하고 경험이 이루어지는 각 차원의 불완전성을 다음 단계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미뤄 버린다. 여기에 따라 각 단계의 의식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함과 아울러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을 '경험'하지만, 이때의 새로움은 이미 방향 지워진 새로움이자 사실상 결정되어 있는 차원 이동의 새로움일 따름이다. 그밖에, 한 차원 자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병렬적인 새로움이나 차원들 사이의 관계 또는 차원의 이동 방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새로움은 의식의 경험에 대해 봉쇄되어 있다. 말하자면 헤겔에서의 새로움은 헤겔의 논리에 따르는 필연적인 새로움이고, 그러한 한 이 필연성을 파악한 견지에서 보면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이다. 물론 각 단계의 의식은 이런 견지에 아직 이르지 못했으므로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초월성은 결국 절대지의 견지 곧 헤겔의 견지에서 봉합되고 만다.
이러한 방식의 매력은 이미 봉합되어 있거나 쉽게 봉합할 수 있는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할 때 잘 드러난다. 즉 이미 새로운 대상이 아닌 것들을 다룰 때, 또는 적어도 그 대상들을 새로운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서 다룰 때 효과적이다. 그럴 경우 가장 일관되어 보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규칙이나 논리로 그 대상들을 적절히 배열하고 전지적이거나 또는 그와 유사한 관점에서 그 대상들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헤겔의 설명 방식은 더 이상의 새로움을 수용하지 않는 입장에서 채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새로움이란 주어진 내용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나 성립할 따름이지 헤겔의 견지에서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헤겔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대상의 발생과 그 대상의 수용을 경험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본다면, 정작 헤겔 자신은 스스로의 체계에 대해 반(反)경험적 설명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은 헤겔의 체계 속에서 수단으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그 체계 자체의 성격을 경험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감성적(sinnlich) 차원에 대해 취한 태도에 대해서도 한 마디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경험론자들이 경험을 감각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았고, 칸트가 경험을 감성(Sinnlichkeit)에 의해 제약받는 것으로 보았다면, 헤겔은 경험을 이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감성 또는 감각은 사물의 인식에 필요한 일반성조차 자체적으로는 성립시킬 수 없는 차원으로 취급되면서 지각(Wahrnehmung)의 영역으로 지양되어 버린다. 물론 이 지각의 차원으로 넘어와서도 감성적 요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다음 단계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감성적 요소는 각 단계에 맞는 발전된 형태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감성의 특성인 수용성이 과연 발전된 차원들에서 보존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칸트에서는 감성과 지성(Verstand) 또 이성 사이의 관계가 지양이나 발전 따위의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었던 만큼, 수용성은 감성의 몫이고 경험의 수용성은 이 감성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감성과 지각, 지성, 이성, 그리고 정신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각 단계는 지양과 발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수용성은 그러한 특성을 가진 한 차원에 의해 전담되거나 그 차원과 다른 차원이 결합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각 차원마다 그 차원에 맞는 형태로 갖추어져 있어야 마땅해 보인다. 사실 의미 구성체의 수용과 인식, 즉 의미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발상이 칸트의 경험 개념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발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헤겔은 자의적인 '필연'의 길을 통해 각 차원의 수용성을 봉합해 놓음으로써 감성의 특성을 지양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말살해 버리고 만 셈이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경험 개념이 남겨 놓은 숙제는 단순히 감성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은 수용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짓느냐 하는 문제, 그럼으로써 '새로운 인식'에 대한 개방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3. 마르크스에서의 '경험'과 유물론

1)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마르크스가 경험적 과학이나 실증적 과학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 시기(1845-6)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경제학 철학 수고}를 쓸 때(1844)만 하더라도 오히려 포이어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용어상으로 '유적 존재'(Gattungswesen)와 같은 어휘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포이어바흐와 유사한 방식의 서술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마르크스의 관심은 이른바 인간학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헤겔 법철학 비판}(1843)에서 나타난 정치적 영역에 대한 비판은 이미 포이어바흐 식의 종교 비판을 넘어선 것이었고, 이것은 {경제학 철학 수고}에 와서 경제 영역에 대한 비판과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 영역의 이동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1859)에서 회고하고 있듯이 그 이후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학 철학 수고}에 나타난 정치경제학 비판과 경제 영역에 대한 비판적 서술은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탈피하지 못한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의 논의는 아직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슈트라우스나 브루노 바우어 같은 여타의 헤겔 학파 성원들과 대비하여 포이어바흐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 진지하고 비판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이 분야에서 진정한 발견을 이룩한 유일한 인물이자 낡은 철학의 극복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비판이 시작되는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 하면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과 경험적 측면 또는 실증적 측면의 강조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포이어바흐 비판의 한 부분을 직접 살펴보자.

감성적 세계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파악"은 한편으로는 감성적 세계에 대한 단순한 직관에,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감각에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역사적 인간" 대신에 "인간이라는 것"(der Mensch)을 말한다[...]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성적 세계가 영원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항상 같은 사물이 아니라, 산업의 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 더욱이 감성적 세계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즉 이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자기들의 산업과 교류를 더욱 발전시키고 변화된 욕구에 따라 자신들의 사회 조직을 바꾸어 나가는, 일련의 각 세대들의 활동 결과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그는 인간을 단지 "감성적 대상"으로 파악할 뿐, "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는 여전히 이론에 머물러 있어서, 인간을 그 주어진 사회적 연관 속에서, 즉 인간을 현재의 모습대로 형성한 현 생활 조건하에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인간에 이르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추상물에 머물렀다[...]포이어바흐가 유물론자인 한에서는 그에게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에서는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에게서 유물론과 역사는 완전히 분리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초점은 그의 이론이 안고 있는 추상성과 사변성이다. 나아가 이것은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한 청년 헤겔 학파 전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포이어바흐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를 위시하여 청년 헤겔 학파의 어느 누구도 "독일 철학과 독일 현실의 관련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며, 중요한 것은 현실이 어떠한 것인가이다. 청년 헤겔 학파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종교나 개념, 일반자 따위로 보고 이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지배적 관념을 낳는 물질적 현실을 문제삼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포이어바흐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그는 종교를 그 세속의 기초로 끌어내림으로써 이를 비판하고자 하나, 종교의 본질을 추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귀착시킬 따름이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사변적 사유와 자기의식적 인간에 반대하여 수동성과 감성적 인간을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수동의 원리를 갖지 못한 철학은 필연적으로 경험과 대립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때의 경험은 헤겔이 말하는 의미의 경험--즉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의식 일반 속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경험된다고 보는 전제하의 경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감성적 경험에 기초함으로써 헤겔 식의 자의적인 사유의 진행을 거부하고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가 수동적 원리나 감성적 경험에 의해 제시하는 것은 '직관'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만 의존하는 한, 경험론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포이어바흐의 경우에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언급은 불가능해져 버린다. 이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사물의 본질을 간취해 내는 고차적이고 철학적인 직관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가 말하는 감성적 세계에 대한 파악은 철학적 직관과 감성적 직관으로 양분되고 이 양자에 제한된다. 포이어바흐에서는 이처럼 무매개적인 직관이 사유를 직접 규정하는 까닭에,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추상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추상성이 낳는 것은 또 하나의 사변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여전히 "철학자의 '안경'을 통해서" 감성적 현실을 바라본다고 말한다. 그의 잘못은 '감성적' 현실을 강조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직관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감성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직관적 유물론은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이런 종류의 유물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치는 시민 사회의 개별적 인간에 대한 직관이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관념화된 형태의 사랑이나 우정 따위 이외에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했고, 현실의 삶의 관계를 제대로 다루거나 비판하지 못했다. 이렇듯 현실적 삶의 관계에 관한 한, 마르크스가 보는 포이어바흐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위의 인용문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을 통해 내세우는 중요한 범주는 '감성적 활동'이다. 포이어바흐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감성적 활동이며, 또 이 감성적 활동을 통해서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뜻 보면 '감성적 활동'이라는 말은 모순된 규정의 결합인 듯이 보인다. '감성적'이란 이미 언급했던 바대로 수동적 또는 수용적이라는 의미, 즉 무엇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어 상으로 보아도 독일어에서 '감성적'(sinnlich)이라는 말이나 '감성'(Sinnlichkeit)라는 말은 '감관'(感官;Sinn)이라는 낱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다 '활동'(T tigkeit)이라는 능동성이 강한 단어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 자칫 모순적인 조어(造語)로 보일 법도 하다. 사실 '감성적'이라는 말을 감관이나 감각과만 연결시킨다면 '감성적 활동'이라는 어구는 자못 어색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감성적'은 '감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적' 또는 '물질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따라서 감성적 활동이란 육체를 매개로 한 활동, 또 물질적 조건이나 대상 속에서 행해지는 활동을 뜻한다고 보면 좋다. 마르크스가 감성적 활동이라는 말을 이 같은 각도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런 활동의 예로 산업 활동이나 교류 따위를 들고 있는 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감성적 활동'을 통해 우리의 물질적인 조건과 결부된 활동이자 그러한 조건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내세우고자 했던 셈이다. 이것은 '활동'을 헤겔에서와 같은 의식이나 정신 위주의 활동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임과 동시에, '감성'을 수동적 감각이나 직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폭넓은 물질적 활동 속에 자리잡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감성적 활동을 다른 말로 '실천'(Praxis)이라 부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감성적 활동 또는 실천이야말로 역사를 만드는 활동이고, 우리의 감성적 현실은 그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이 영역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감성적 현실을 강조하지만 감성적 활동을 문제삼지 못하는 까닭에, 결국은 현실적 삶의 밖에, 역사의 밖에, 따라서 감성적 현실의 밖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가 내세우는 유물론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감성적 인간이 역사 밖의 감성적 인간이고, 그의 감성적 현실이 역사 밖의 감성적 현실인 한, 그가 말하는 유물론도 역사 밖의 추상적 유물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볼 때, 그와 포이어바흐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역사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의 관철 여부에 있다. 문제는 '유물론과 역사의 분리', 유물론적 입장의 미관철 내지 불철저이지, 유물론이라는 단순한 입장 자체가 아니다. 또 이런 점에서 보면 철저한 유물론과 실천이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유물론적 입장이 인간의 현실적 삶으로 파고 들어갈 때, 그것은 현실을 인간 실천의 산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감성적 세계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마르크스에게서 유물론이란 단순히 물질과 관념, 또는 존재와 사유에 대한 선언적인 선택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자세와 방법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존재나 물질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사유나 관념을 그 반영으로 보는 관점을 취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참된 인식을 얻으려면 존재의 객관적 질서를 제대로 반영하고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근본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서는 어떻게 반영하는 것이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반영과 받아들임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따위의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유물론을 이와 같은 인식론적 입장과 결부시켜 놓고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유물론을 채우는 내용이 처음부터 불변의 것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물질이나 존재의 질서가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식도 거기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듯 현실 세계가 감성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변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 할 때, 인식의 견지에서도 우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가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유물론의 문제는 경험의 개방성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변화를 수용하고 인식하는 일은 곧 주어지는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경험의 문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초점은 역사 영역에서의 경험의 폐쇄성에 있다고 하겠다. 역사를 고찰하는 한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자가 아니라든지, 포이어바흐에게서 역사와 유물론은 완전히 분리된다든지 하는 지적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좋다. 같은 이유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사회 구조를 변혁해야 할 조건과 필요성이 나타나는 곳에서 곧바로 관념론으로 전락한다고 비판한다. 비록 포이어바흐가 감성적 경험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역사 세계에 대해서는 닫혀 있으며, 그렇게 봉쇄된 현실 세계의 모습은 자의적인 추상으로 대체되어 버린다는 얘기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서 문제가 되는 경험은 역사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이 경험은 포이어바흐의 경우와 같이 수동적이고 직관적인 방식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역사 세계는 단순히 감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감성적 활동에 의한 세계, 곧 실천에 의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단순한 수용이 아닌 '연구'가 필요하다.

2) 마르크스에서의 '경험적 연구'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전제들은 '현실의 전제들'이며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전제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때 이러한 전제들과 대비되는 것은 자의적 사변에 의하여 도출되는 관념적 전제들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견주어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이라는 말을 "물질적"이라는 말과 등치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마르크스가 자기 주장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고립된 수동적 주관에 의해 획득되는 감각이나 직관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 경험이며,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최소한 언어에 의해 매개된 경험적 자료이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료는 "사상(思想)의 직접적인 현실태인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이 언어는 "현실적 삶의 표현"인 만큼 경험적 자료는 현실적 삶의 과정 자체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또 인간의 삶의 과정 자체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인 한, 경험적 자료도 그러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경험 개념에 관해서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견해를 지양, 종합하고 있는 셈이다. 먼저, 경험이 이루어지는 곳의 범위를 좁은 의미의 감성에 한정하지 않고 언어를 통한 인간 생활의 능동적인 여러 국면과 여러 차원으로 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사 사회를 포괄하는 헤겔의 활동적 견지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헤겔과는 달리 경험의 필연적인 행로를 설정하지 않고 이 경험을 실증 가능한 물리적인 조건과 언제나 연결짓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포이어바흐의 감성적 견지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에 관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앞서 다룬 '감성적 활동'에 대한 그의 생각과 대응한다고 보인다. 사실 마르크스에서의 경험은 감성적 활동에 대한 경험이며, 감성적 활동 속에서의 경험이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견해는 '경험'의 특성인 수용성과 개방성을 활동성과 결합해 놓은 경험 개념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그러나 경험의 이러한 위상 설정만으로 주요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성립하는 영역을 넓혀 놓고 그 행로를 개방해 놓은 이상, 한정된 방식의 경험 개념에 비해 더 많은 보완과 체계적 규정이 필요해진다. 포이어바흐와 견주자면, 추상적 개념 또는 이론과 감성적 경험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남으며, 헤겔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리로운 경험이란 어떤 것이며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이 남는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에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구의 방법론이 경험 개념 자체보다도 한층 중요해진다.
경험이 다차원의 감성적 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며 단순한 감각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차적인 경험 자료는 대개의 경우 여러 표상이 뒤섞여 있는 혼돈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것 자체만으로는 현실의 내적 연관이나 본질을 드러내기 어렵다. 만일 그렇지 않고 경험만으로 모든 사태가 분명히 드러난다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과학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경험적 연구는 경험적 자료에 대한 연구이며, 그런 의미에서 경험적 자료는 연구의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자료는 구체적 현실을 파악하는, 다시 말해 "구체적인 것을 사유를 통해 정신적 구체로 재생산하는" 과정의 기반이자 첫 번째 차원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적 자료는 구체적 현실 자체와 같이 놓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마르크스에서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인 이유는 그것이 많은 규정들의 총괄이자 다양의 통일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험적 표상이나 자료는 구체적 현실에서 비롯하는 것이긴 하나 현실의 연관으로부터 떼내어진 추상물이며 아직 그 연관을 다시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말하자면 경험적 표상이나 자료는 현실의 본질적 연관을 드러내지 못하는 현상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우리는 연구를 통해서 "소재를 자세히 탐구하여 그 상이한 발전 형태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의 내적인 연관을 찾아내야만 한다." 즉 경험적 연구에는 이른바 '분석'과 '종합'이라는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분석은 경험적 자료로부터 추상을 통해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정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며, 종합은 이러한 추상적 규정들로부터 이 규정들의 연관을 타고 이것들의 총체인 사유된 구체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분석은 경제학이 성립하던 시기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연구 방법이었다. 그들은 경제적 현상들을 분석함으로써 노동과 노동 분업, 가치, 화폐 등과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정을 찾아내었다. 그런데 이들이 그와 같은 분석을 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은 그러한 추상을 가능하게 했던 현실의 역사적 발전에 있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가장 일반적인 추상은 일반적으로 어떤 하나의 것이 많은 것과 공통으로, 모든 것과 공통으로 나타나는 가장 풍부한 구체적 발전 하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식을 현실 또는 현실적 관계의 반영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러한 추상은 현실의 두드러진 한 부분만을 반영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잘못은 분석을 통해 추상을 행하는 데 머물렀을 뿐 이 규정들의 내적 관련을 발생적인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추상적 규정을 발생적 연관과 분리시켜 고정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스미스나 리카도 같이 가장 뛰어난 고전 경제학의 대표자들조차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된 추상적 규정이나 관계를 통해 이 생산 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 형태로 보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 내에서도 추상적 규정들의 올바른 연관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경험적 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현상의 차원과 이를 분석하여 얻은 추상의 차원이 서로 분리되어 버린다. 이럴 때 생겨나는 것이 눈앞의 경험적 자료에만 집착하는 조잡한 경험주의와, 현상들을 단순한 형식적 추상을 통해 직접 일반적 법칙으로부터 끌어내거나 거기에 가져다 맞추려는 스콜라적인 사고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발생적 서술을 가능하게 해 줄 연구가 분석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적 자료에 대한 연구에서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자료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이다. "역사적 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부터 과학을 창출"해냄으로써, 추상의 차원을 현상의 차원에다 두들겨 맞추거나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속하는 경험적 자료에 매몰되는 잘못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가 경험적 연구와 관련하여 계속 강조하는 것은 그 연구가 역사 세계에 대한 연구라는 점이다. 이것은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전 경제학자들에 대한 비판에서도 두드러진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연관에 주목하는 경험적 연구야말로 현실과 경험적 자료, 경험적 자료와 이론적 추상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 고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연구는 단순히 연대기적 순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나 범주들의 동적인 연관을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서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인간의 활동 과정을 기본 축으로 해서 각 범주들이 고정된 것으로가 아니라 상호 관계 하에서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연구에서도 각 시기에 작용하는 주요 범주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분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와 결합된 분석을 통해 끌어낸 산물은 고정된 일반자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 연관이 반영되어 있는 관계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개념은 현상의 차원이나 추상적 법칙의 차원에 평면적으로 배열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관념상으로 반영하는 서술 구조 속에서 자신이 차지할 층위를 이미 지시하고 있는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서는 경험적 연구에서 '분석'과 동시에 '종합'이라는 방법이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연구의 결과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서술은 가장 단순한 추상적인 것에서 복잡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발생적 전개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역사적 연구에 의해 파악된 범주들의 연관을 사유를 통해 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범주는 발생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범주들과의 관련 속에서 풍부한 규정성을 획득해 나간다. 단순한 순서상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점에서 서술의 과정과 현실의 역사 과정은 합치한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과 방식에도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연구의 내용은 서술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더욱이 구체적인 현실은 이 서술의 결과로서 관념상으로 재생산되는 까닭에, 서술 과정만 보면 그것은 마치 "선험적 구성"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이 때문에 헤겔 같은 이는 실재를 스스로 운동하는 사유의 결과로 파악하려는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여기서 자신과 헤겔의 차이를 강조한다. 헤겔과는 달리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와 서술은 감성적 차원을 넘어선 정신의 자기 산출적 사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재를 경험적 표상에 대한 가공을 통해 의식 속에서 재생산하는 현실 인식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이론적 사유를 행하는 과정에서도 현실의 주체이자 인식의 대상인 '사회'는 언제나 그 전제로서 머리에 떠올라 있어야 한다. 즉 경험적 연구는 그 대상인 사회에 대해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마르크스의 운명도 헤겔 식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경험적 연구 과정과 그 개방성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현실에서 강력한 권위를 획득하기에 이른 몇몇 주장과 서술의 구조를 부각시키는 일에 열중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범주들 사이의 연관은 역사를 뛰어넘는 필연성을 지닌 것처럼 여겨지고, 그럼으로써 고정된 폐쇄성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결국 마르크스가 헤겔 비판을 통해 지적했던 것과 비슷한 사태가, 즉 마르크스의 서술이 오히려 현실을 규정하고 경험적 연구를 제약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일들은 대부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필요와 맥락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과연 이러한 잘못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3) 반영론과 유물론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1859)에서 자신이 수년간의 경제학 연구로부터 얻은 일반적인 결과들이 그 이후의 연구를 위한 실마리로 쓰였다고 말한다. 그 결과들이란 잘 알려진 '생산력-생산 관계-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지는 사회 구조의 동적인 연관이다. 이 연관의 기초적 형태는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에 등장하는데, 마르크스는 그 내용을 앞서 언급했던 대로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현실적인 전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한정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서술이 시작되면 자립적인 철학은 그 존재의 매개물을 상실한다. 자립적인 철학을 대신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인간의 역사 발전에 대한 고찰로부터 추상해낸 가장 일반적인 결과들의 총괄이다. 이 추상들은 그 자체로는, 즉 현실적인 역사와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 추상들은 역사 자료의 정리를 쉽게 해 주고 그 개별적 층들의 순서를 시사해 주는 데에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역사 유물론이라고 알려진 다소 도식적인 구조 연관은 경험적 탐구를 위한 얼개이고 잠정적인 지침일 뿐이지 그 자신이 현실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상과 연관을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립적인 철학'을 부정하는 마르크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자본론}에서 그 일단의 완성을 본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견해 전체는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 방법이며, 완성된 도그마가 아니라 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정류장이라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개방성을 지시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마르크스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한, 경험적 자료의 분석을 통해 얻은 추상들을 종합적으로 연관지으려고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헤겔의 변증법에 크게 의존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특히 헤겔이 추상적 규정들의 연관을 정적이고 평면적이 아니라 동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취급한 것에 주목했으며,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 속에 실재의 발전적 움직임을 반영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는 모순을 통한 범주의 발전이라는 헤겔 식의 논리 전개 방식을 {자본론}을 비롯한 그의 저술에 끌어들였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와 같은 헤겔의 방식이 가지는 매력은 한정되고 봉합된 내용들을 일관된 발전의 논리로 개진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도 역사 발전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운명을 이와 유사한 논리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발전의 논리가 반영론적 입장과 결합하여 현실을 규정하는 일종의 폐쇄적 틀로 바뀔 위험은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도 잠재해 있었던 셈이다. 크게 보면 반영론은 헤겔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주객 일치를 지향하는 인식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주객 일치의 구조 속에는 자칫 경험의 개방성을 차단해 버릴 수 있는 여지가 숨어 있다. 즉 특정한 논리와 발전 양상을 의식 밖에 있는 객관적 역사 현실의 반영으로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이 결과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객관적인' 현실을 규정해 버릴 위험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 논리에 합치하지 않는 새로운 경험은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이와 같은 사태는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보편성을 지향하는 대부분의 과학에서 생겨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존 관점과 이론의 독단을 피할 수 있는 개방적인 절차와 방법, 태도 따위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실험적 조작이 어려운 사회 역사 영역에서는 자연 과학 영역에 비해 경험적 자료를 해석하고 연관지을 수 있는 여지가 더 넓고 더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특정한 연관이나 논리만으로 현실을 다 덮어 버리려는 시도가 초래할 위험도 크다고 보인다.
사실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조차 하나의 경험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일의적으로 해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은 보통 여러 이론에 의해 해석되고 규정될 여지를 지니며, 또 이론 이전의 여러 맥락에 의해 동시에 포섭될 여지를 갖는다. 그 이유 일단은 경험을 통한 인식 과정이 자연의 진행 과정을 거꾸로 행하는 데 있을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원인들에서 어떤 결과나 작용이 생겨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순서는 결과나 작용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복잡한 원인들과 그 작용 경로를 그대로 인식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파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분석에 의한 추상을 종합하여 사유 속에서 현실을 재생산한다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이러한 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본질적이고 중요한 연관과 그렇지 않은 연관을 구별하고 분석과 종합을 통해 전자를 파악해 내려고 했지만, 이 연관이 현실의 모든 면을, 특히 변화의 모든 방향과 가능성을 설명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마르크스의 종합 작업은 전반적으로 볼 때 일국적(一國的)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또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인식 대상인 사회가 감성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것이며 이를 파악하는 인식 과정 역시 감성적 활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종합적 인식 과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 구조의 연관도 역사적 상황에 의해 제약되는 유동적이고 한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인식 과정을 일종의 반영이라고 이해하더라도 그 반영의 불완전성과 가변성을 염두에 둔다면, 반영이라는 방식이 오히려 경험의 개방성을 가로막는 위험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반영'이 일차적으로 수용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자 개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반영론이 오히려 경험과 인식의 폐쇄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못 아이니컬해 보인다. 특히 우리가 옛 소련과 동구권의 정형화한 인식 이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태는, 반영의 방향을 거꾸로 적용함으로써, 즉 특정한 규정이나 논리를 현실의 반영으로 간주하는 반사적 투사(投射)를 통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영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역작용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원칙적으로 보아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했던 '유물론'의 입장이 '반영'의 역작용을 막는 전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잠시 되풀이하자면, 이때의 유물론은 의식 외부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입장을 말하며, 그렇게 이해된 세계, 곧 의식 속에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 세계를 우리의 의식을 통해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론은 경험의 개방성이 유지되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이렇게 볼 때, 경험의 개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거꾸로 반영론이나 '경험'이 꼭 유물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경험' 개념은 철학상의 유물론적 노선뿐만 아니라 관념론적 노선까지 포괄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폐쇄적인 반영론은 오히려 관념론의 진영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의식 내부에서 정리된 특정한 규정이나 연관이 의식 외부의 현실을 규정하는 것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이 초래한 부정적인 효과 때문에 알튀세르처럼 아예 반영론적 입장은 버리고 유물론만을 취하려는 시도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러한 발상은 우리의 인식을 경험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유물론과의 조화마저 어렵게 만든다. 알튀세르의 극단적인 시도와 그가 겪은 난관은 우리가 인식의 개방성을 유지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정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4. 알튀세르의 반(反)경험주의 인식론

1)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과 경험주의 비판

알튀세르는 반영론의 문제점이 실재와 사유를, 실재의 과정과 사유의 과정을, 또 실재 대상과 사유를 통해 주어지는 지식 대상을 혼동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혼동이야말로 경험주의와 헤겔 식의 관념론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다. 경험주의는 실재에 대한 사유를 실재 자체로 환원함으로써 실재와 사유를 혼동하는 것이고, 헤겔 식의 사고는 실재를 사유로 환원하고 '실재를 사유의 결과로 파악함으로써' 실재와 사유를 혼동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이 두 가지는 모두 실재와 사유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즉 경험주의는 이 차이를 실재 자체 속의 차이로 생각하고 헤겔은 이 차이를 사유 자체 속의 차이로 생각한다. 알튀세르는 이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유물론의 요건 중 하나라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경험주의와 헤겔 모두 이 유물론에서 벗어나는 관념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알튀세르는 '경험주의'를 대단히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헤겔 또한 경험주의의 한 변종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경험주의란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전제하고 지식을 객관으로서의 실재 대상에 따라 정의하는 인식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렇게 객관적 실재에 따르는 방식, 곧 객관적 실재의 함수로 주어지는 방식이 '경험'의 방식이며, 그렇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 '경험'의 내용을 이룬다. 따라서 이런 식의 포괄적 규정에 의하면 '경험'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이성적 직관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직관과 사고의 결합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지식의 내용을 사유 영역 밖의 실재에 의존하여 확보하려는 모든 인식론을 경험주의라는 그물로 포획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 '순전히 사유 영역 내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 모든 지식 이론은 '경험주의'라는 딱지를 받게 된다. 그는 헤겔의 경우도 이러한 인식론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다만 헤겔에서는 실재 대상에 대한 성격 규정이 관념론적인 것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 실재의 본질이 정신이나 이념 따위로 등장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경험주의 인식론은 실재와 사유를 이어주는 연속성의 통로를 갖는다. 이 통로를 통해 사유와 실재는 마치 마주선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인식론의 특징이라고 보고 있는 '거울 구조' 내지 '이중적 반영 관계'이다. 물론 알튀세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박한 모사론 따위는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반영의 통로는 무엇보다도 사유에 의한 '추상'이다.
경험주의는 실재 대상으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실재적 사실'을 얻는다고 여긴다. 이 때 본질을 뽑아내는 추상 작업은 마치 땅 속의 광석에 함유되어 있는 금을 추출하는 작업과도 같다. 즉 원래 실재 속에 들어 있던, 그러나 '현상'에 가리워 드러나지 않던 '본질'을 거기에서 분리하여 빼내는 것이다. 금을 정제해내는 데에는 광석을 선별하고 제련하는 여러 절차와 조작이 필요하듯이, 본질을 지식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도 인식 주관에 의한 모종의 절차와 조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추상 작업은 실재의 한 부분(본질적인 부분)을 분리하기 위해 다른 부분(비본질적인 부분)을 제거하는 조작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이 경험주의적 추상은 불투명한 실재의 막을 걷어내고 실재의 알맹이가 우리의 의식에 비치게 하는 통로인 셈이다. 그래서 경험주의적 지식 이론은 "실재 대상에 대한 지식을, 알려지는 실재 대상의 실재적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실재 대상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외면과 내면, 표면과 심층 등의 구분조차가, 즉 경험주의적 인식론이 전제로 하는 구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지식 이론 자체의 구조가 실재 세계 속에 이미 들어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점이 알튀세르가 경험주의의 특징을 '거울 반영'으로 놓을 때 지적하고자 하는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자들은 지식 영역의 구조를 실재 세계의 거울상으로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그네들이 보는 실재와 사유 영역은 쌍둥이처럼 서로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여서 경험주의자들은 실재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실재 세계에 투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따라서 이들은 '상상적인 것'을 실재로 또 실재의 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생각이다. 즉 그가 볼 때 경험주의 인식론의 발상은 "실재 대상의 실재적 한 부분으로 인식된 지식을 실재 대상의 구조에 떠넘겨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발상에 의하면 지식 영역은 실재 영역으로 환원되어 버리며, 지식 영역의 자율성이나 독자성을 내세울 수 있는 여지는 사라져 버린다.
물론 '경험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와 같은 규정은 철학사에 등장하는 '경험론'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과 합치하지 않는다(그가 말하는 'empirisme'을 '경험론'이 아닌 '경험주의'라고 옮겨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규정과 평가가 너무 포괄적이고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알튀세르 자신의 말처럼 경험론이건 합리론이건 간에 근대 이후의 거의 모든 인식론이 이 경험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공산이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비판의 초점은 흐려지기 쉽고, 그래서 경험주의라는 규정 자체가 단순히 자신의 견해 이외의 입장들을 거부하기 위한 장치로서만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경험주의'라는 규정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알튀세르가 이 같은 규정들을 통해 공박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표적은 '반영론',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공식적인 인식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거울 반영'이나 '추상의 방법', '환원론적 구조' 등이 모두 이 반영론을 겨누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여기에 대한 노골적인 공박보다는 일종의 우회 전술을 택하고 있다. 즉 그는 반영론의 문제틀을 한껏 넓혀서 그와 유관한 이론들을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그물을 엮어 내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경험주의'인 셈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경험주의의 사고 방식이 로크(J. Locke)나 콩디야크(E. Condillac)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며, 헤겔 철학 속에도 깊게 파고 들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감각론적 반영론의 색채를 지니고 있고 후자는 관념론적 반영론의 색깔을 띤다. 알튀세르는 물론 이 양자가 연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로크에 의한 근대 인식론의 탄생, 즉 주관과 객관의 쌍을 전제로 하는 문제틀의 성립은 "18세기 전체와, 칸트, 피히테, 그리고 헤겔까지도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헤겔의 실재는 '의식'과 그 의식의 연장체인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이 실현하는 원리인 '이념'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헤겔에서 의식은 실재 속에서 자기 자신을 관통하는 원리를 발견하고 경험해 나갈 뿐이다. 즉 헤겔에서도 주관과 객관, 사유와 실재는 같은 구조로 연속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이러한 문제틀이 발견된다는 데 있다. 반영론의 책임은 스탈린이나 즈다노프 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르크스 스스로도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적절한 개념을 찾아내지 못한 탓에 경험주의의 문제틀 및 그와 연관된 용어들(예컨대 "현상과 본질, 외부와 내부, 사물의 내적 본질, 표면적 운동과 실재적 운동 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엥겔스나 레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까닭에 반영론을 기본 틀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특정한 규정이나 논리를 실재 세계에 부과하는 역반영, 즉 자의적 투사의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이와 같은 의식과 실재, 주관과 객관의 대칭 구조를 거부하고 우리의 인식 또는 지식은 실재와 구별되는 지식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실재 세계와 우리의 지식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존재하며, 인식에서의 새로움은 실재 세계에 대한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생산 수단 격인 인식의 문제틀이 바뀌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 역시 만만치 않은 난점들을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 그 문제점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반(反)경험주의 인식론의 난점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아무래도 실재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 사이의 관계 문제가 되겠다. 알튀세르의 주장대로 지식과 실재 사이에 '반영'이라는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면, 그리고 지식이 순전히 이론적 실천의 영역 내부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지식과 실재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특히 이 양자 사이의 어떠한 관계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참되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알튀세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선은 이 문제 자체가 참된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즉 그 질문은 이미 경험주의적 문제틀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문제 제기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실재 대상과 지식 사이의 관계를 문제삼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의 입론은 문제 자체를 해소해 버리려는 의도를 담은 도피성의 궤변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입장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식 생산 과정이 전적으로 이론적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관점을, 그는 지식의 타당성 기준이 이론적 실천 내부에 있다는 주장과 연결시킨다. 알튀세르가 볼 때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타당성의 기준을 외부에 두느냐 아니면 이론적 실천 내부에, 더 정확히 말해서 '이론' 내부에 두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냐 과학이냐가 갈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를 폐쇄성으로 놓고 있으며, 외부에서 미리 주어진 결론이 이 폐쇄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대답이 되풀이되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동일한 대답과 그에 맞춘 동일한 질문이 되풀이되는 폐쇄성의 구조와, 지식 영역 밖에 있는 지식의 타당성 기준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외부의 기준이 쉽게 도입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문제틀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이 소유한 지식이 객관적 실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따위가 그 질문들의 대표적인 유형이 된다.
반면에 알튀세르에 따르면 과학은 타당성의 기준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준이 제멋대로일 수 있다거나 또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 과학에서 작동하는 '이론'은 대개 복잡하고 모순된 통일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 '이론' 속에 존재하는 기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기준이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실제의 과학들이 이 점을 예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학자들은 수학의 정리가 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학 외적인 기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발전된 과학에서는 그 과학 자신이 타당성의 기준을 제공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자신의 진리성을 보장해 줄 외적 기준이나 통로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런 점은 사회와 역사를 다루는 과학에도 적용된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도, 만일 그것이 과학이라면 그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의 생각은 과학이나 지식 영역을 지배하고 이용하려드는 정치적 세력이나 이념 따위에 맞서 과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려 한 알튀세르의 기본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지식의 생산 영역 외부에 놓인 것은 (이 영역에 의해 관장될 수 없고 따라서 지식 생산의 자율성과 배치되므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전제 위에서 보면 '추상'에 의해서건 '실천'에 의해서건 또 다른 무엇에 의해서건 "지식(또는 주체)과 그 실재 대상(또는 객체) 사이의 일치를 보증해 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되며, 그 보증 수단으로 설정된 것도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식은 어떻게 하여 실재에 대한 지식이 될 수 있을까? 이론 영역과 실재 영역이 접합되어 있을 뿐이고 지식과 실재를 직접 연결해 주는 통로가 없다면, 어떤 이유로 우리의 지식을 실재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는 이 문제에 대해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탐구 방향을 다소 막연하게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어 우리는 지식에 의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적으로 '전유'(專有;appropriation;(독)Aneigung)한다고 말한다. 인식적 전유는 종교적 전유, 예술적 전유 등과 함께 정신적 전유의 한 가지 방식이며, '사유하는 두뇌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전유 방식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전유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단지 그 방식을 '지식 효과'라고 부르고, 이 '지식 효과'의 생산 메커니즘을 '사회 효과'의 생산 메커니즘과 견주고 있을 뿐이다. '사회 효과'란 사회 각 영역의 생산 결과가 사회로서 존재하게끔 해 주는 효과, 달리 표현하면 사회의 '구조적 인과성'이 작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즉 사회의 각 영역이 각각 자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복합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체계인 사회를 존속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지식 영역도 복합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면서 그 사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해 내고 그것을 통해 인식론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을 통해서도 지식에 의한 실재 대상의 전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 곧 지식 효과의 메커니즘 문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의 결합 구조 문제와 지식 메커니즘의 문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전자의 문제가 실재와 실재 사이의 문제라면, 후자의 문제는 실재와 사유 또는 실재와 관념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튀세르 자신이 처음부터 사유 영역과 실재 영역,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의 구별을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가 부딪힌 이러한 난관은 역설적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알튀세르는 사유와 실재를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경험, 반영, 실천 따위를 거부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연속성을 차단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할 사유와 실재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사실 연속성을 거부한 상태에서 양자의 관련을 주장하기란 예컨대 스피노자 식으로 미리 설정된 관계(일치나 조화 또는 유사성 등)를 상정하지 않는 한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겠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설정된 관계는 입증하기 힘들다는 커다란 난점을 안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식과 관련된 알튀세르의 주장들이 전혀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그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론 영역을 통해 생산되는 지식이 실재 대상을 '인식적으로 전유'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주장함으로써, 또 그 자신의 해석에 따른 마르크스주의 과학을 그렇게 하여 생산된 지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스스로의 주장을 아우르는 순환적 체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즉 어떤 메커니즘으로 생산되었건 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실재 대상을 전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사회를 구성하는 한 층위인 지식 생산 영역에 대한 지식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따르면 '사회 효과'는 '지식 효과' 속에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또 거꾸로 '지식 효과'는 '사회 효과'에 대한 지식 속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생산들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순환 관계가 이데올로기적 거울 반영 관계와는 달리 열려 있는 순환 관계라고 주장한다. 지식은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은 반복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순환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순환 관계 속에 들어가 있을 때뿐이다. 알튀세르가 내세우는 '과학적 지식'을 용인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면, 이 순환은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순환일 따름이다. 더구나 알튀세르는 이 순환이 실재 대상이나 실재 세계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봄으로써, 지식 영역이 실재로부터 겉돌 수 있는 여지를 막지 못했다. 또 알튀세르는 지식 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론'에 대해서도 그 타당성의 기준이 이론 자체 속에 있다고 봄으로써, 이론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발전이 아니라 '단절'이라는 방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덕택에 알튀세르의 순환성은 이러한 단절에 의해 고립된 순환성, 즉 그곳으로 진입하는 방도조차 확실하지 않은 순환성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말하는 지식 생산에서의 새로움이나 개방성도 이 고립된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나 그 영역이 단절에 의해 성립할 때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알튀세르에게서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순환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립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지식 영역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데 있다. 알튀세르가 스스로 토로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그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이 확고하지도 않으며 그 타당성의 기준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태는 알튀세르의 반(反)경험주의 인식론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그 때문에 좌초해야 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던 셈이다.

3) 우발성의 유물론과 경험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알튀세르가 반경험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노렸던 중요한 목표는 반영론의 폐쇄적인 틀, 즉 미리 그 답이 주어져 있는 대칭적인 구조를 깨는 것이었다. 알튀세르가 볼 때 반영론과 경험주의는 이른바 '거울 반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대상 세계에 투영하는 이데올로기였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관-객관이 마주서는 대칭의 반영 구조를 깨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가 먼저 취한 방책은 인식의 주요 과정을 이론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지식과 대상 세계 사이의 대칭적 연결을 끊는 것이었다. 이럴 때 인식에서의 차별성과 새로움은 모두 이론 영역에서 주어지고, 대상 세계는 전제로서 요청될 뿐, 인식 성립 과정에서 분명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만 보면 알튀세르와 헤겔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헤겔의 인식론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알튀세르에서 이론에 해당하는) 의식의 관점과 개념이며, 또 이것이 새로운 인식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헤겔과는 달리 이론의 변전에 어떤 필연적인 법칙이나 도달점을 상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의 경우 모든 것이 의식과 그 연장체인 정신 안에서 일어나듯이, 알튀세르의 경우도 대상 세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론이 대상 세계를 전유하는 지식을 만들어낸다. 알튀세르의 견해가 '이론주의'라든가 '관념론'이라는 비난을 받은 주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토록 첨예하게 헤겔적 사유와 맞섰던 알튀세르가 후에 헤겔 사유의 핵심을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한 것도 이와 같은 유사성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그런데 '거울 반영'의 대칭 구조를 깨는 길로는 이러한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방식은 과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의도 아래 이론 영역에 과도한 강조점을 둠으로써 또 다른 자의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알튀세르가 고수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 과학'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과학과 이론 영역에 의존하는 방책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나올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책은 이제까지와는 거꾸로 이론이 아닌 실재 세계에 비중을 둠으로써 대칭 구조를 깨는 길이다.
이 경우, 중요한 점은 이론이나 의식에 없는 것, 이론이나 의식이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재 세계에 있는 것, 실재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실재 세계에 없는 이론의 존재가 대칭 구조를 깨뜨렸다면, 이제는 실재 세계의 요소에 그러한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으려면, 이 실재 세계의 요소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자 또한 알려지는 것이라는 모순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 전모가 알려지는 것이라면 의식과 실재의 대칭 구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또 아예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면 앞서 알튀세르가 그랬듯 이를 실질적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지되 그 전모가 알려질 수 없는 것, 알튀세르가 제시하는 그것은 우연적인(al atoire) 것, 우연성을 지닌 실재이다. 이때의 우연성이란 그 발생과 관련하여 언제나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 면을 남기는 것, 곧 우발성(偶發性)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우연성은 알려질 수 있는 연관에 대한 단순한 무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우연성을 지시한다.
알튀세르는 이 우연성 내지 우발성을 지닌 실재를 상정하는 자신의 입장을 '우발성의 유물론'(mat rialisme al atoire)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mat rialisme de la rencontre)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발성은 우연적인 마주침에 의한 발생을 뜻하는 것이고 유물론은 의식 밖의 실재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입장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명칭들은 알튀세르의 무게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이제 자율적 과학 대신에 우연적 실재를 앞세움으로써 주-객 일치의 목적론을 깨뜨리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알튀세르는 우연성의 개입을 중시하거나 미결정 상태의 근원성을 내세우는 모든 사상적 요소들을 자신의 동맹으로 끌어들인다. 원자 운동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설명에서부터 마키아벨리와 루소의 사회 이론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하이데거와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는 그럴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이라면 모두 동원하여 우연적 사건과 우연적 질서의 실재성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알튀세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미리 실재의 움직임을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이 실재의 운동과 변화를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정치 철학적으로는 공산당과 같은 기성의 조직이 아니라 무정형의 대중 운동에 희망을 거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식론적으로는 과학적 이론에 따른 지식의 생산보다는 실재의 우연적 운동과 변화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측할 수 없는 운동', '실재적 요소나 운동의 우연적인 마주침', '빗나감'(d viation) 등에 대한 강조는 이처럼 변화된 알튀세르의 관점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성 또는 우발성이 중요한 경우, 그렇게 일어나는 실재의 사건을 파악하는 길은 수용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험'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미래의 사건은 미리 규정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며, 그 일이 일어남과 함께 또는 일어난 연후에야 경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는 받아들이는 쪽의 조건과 처지 등도 중요한 변수 노릇을 하게 된다. 같은 변화나 사건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집단의 처지에 따라 그 경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순수히 감각적이거나 완전히 수동적인 경험이 아니다. 즉 이 경험은 언어와 사회 역사적 의미의 차원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경험에서 더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세, 곧 우리가 마르크스를 다룰 때 언급했던 유물론적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를 통해서만 우리는 새로운 사건을 가능한 한 왜곡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실재의 변화가 우리의 경험에 대하여 지니는 규정력이 경험의 조건이 경험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보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나 평균적으로는 훨씬 더 크다는 전제하에서이며, 따라서 전자를 통해 후자를 제어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이다. 이러한 전제가 없다면 모든 경험은 상대화되고 말 것이며 실재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경험을 판가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전제들은 유물론의 전제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유물론은 우리의 의식보다 우리 의식 밖의 실재에, 따라서 실재적 변화에 우위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에서 보면 알튀세르가 말하는 '우발성의 유물론'은 그 자신이 이전에 주장했던 '반경험주의'와 달리 '경험'의 중요성을 드러내며 또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경험은 알튀세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거울 반영'의 경험은 아니다. 이때의 경험은 오히려 그러한 대칭 구조를 깨뜨리는 '새로움'에 대한 경험이며, 수용성을 바탕으로 하고 의미 지평을 전제로 하는 경험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귀결은 알튀세르가 이전에 취했던 입장이 그 자체로는 사태 변화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즉 '반(反)경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알튀세르가 자신의 입장 변화를 통해 그가 근본적으로는 유물론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5. 결론에 대신하여 : 경험과 개방성

경험은 주어짐과 받아들임의 구조를 전제로 하며, 그러한 한 미지의 새로움을 담고 있다. 왜냐 하면 주어짐은 받아들이는 쪽에서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주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보았듯이, 헤겔에서도 '경험'은 새로움이 등장하는 '의식'에게나 성립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는 '정신'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움을 기지의 것으로 만들고 더 이상의 새로움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해 버리면. 더 이상의 경험이 필요 없는 '절대지'가 생겨난다.
마르크스에서도 '경험적 연구'가 경험적일 수 있는 것은 추상과 종합의 방법을 통해 구성되는 연관이 필연적인 봉합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 곧 새로움을 허용하는 유물론적 관점이 이 연관의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통해 경험의 차원을 확장하고 역사와 의미의 세계를 포함할 수 있도록 이 경험의 세계에 '활동성'이라는 숨을 불어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헤겔이 설정한 필연적 연관의 유혹이 이 역사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 다차원적인 활동성의 세계는 더 이상의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 죽은 체계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반경험주의'라는 극단을 거쳐 개방성 쪽으로 밀려온 흥미롭고 모순적인 행로를 보여준다. 알튀세르가 처음에 선택한 '이론' 우위의 전략은 반영론에 대한 반발로서는 효과적이었는지 몰라도 지속적인 새로움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힘든 방식이었다. 왜냐 하면 여기서의 새로움은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의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었고, 일단 '과학'이 성립한 이후에 이루어지는 새로움은 진정한 새로움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튀세르의 '반경험주의' 인식론에서는 과학 이론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폐쇄적인 봉합의 가능성과 결합할 위험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그 후, 알튀세르가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이론 밖의 영역에서, 즉 실재의 우연적 운동에서 찾았을 때, 그것은 곧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와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경험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지향하는 인식의 자리에 공백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만일 이 공백이 끝까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면, 경험에 대한 기대도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의 공백은 새로운 경험을 위한 빈 자리, 완전히 채워질 수는 없는 빈 자리인 셈이다. 알튀세르의 경우 이 공백은 먼저 과학의 자리에 설정되었다가 정치적 사회적 실재 속에 끼여들고 나아가 철학 자체의 속성으로까지 여겨진다. 아직 성취되지 못한 과학이나 정치적 상황의 빈 자리에 대한 인식은 결국 이와 같은 공백이 실재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따라서 우리의 경험과 사유는 이를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인식이 지향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이럴 때 그 진리는 어떤 고정적인 상태나 목표로 여겨질 수 없다. 새로움에 대한 경험이 작동하며 그에 따라 인식의 자리를 구획하는 경계가 이동하는 한, 이와 같은 운동과 고정된 진리는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리란 이 경험 과정 가운데에서 찾아야 하는 고정되지 않은 어떤 것, 언제나 생성하는 그 무엇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진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새로움과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세, 곧 유물론적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의 진리란 우리가 이 글의 제사(題詞)로 인용한 바디우의 말에서처럼, 새로움을 안고 있는 실재의 사건들에 대응하는 다수의 것이자, 이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충실성의 과정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사회 역사 영역에 관한 한, 이와 같은 진리관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등장하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한편에는 미래를 여는 진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던 이론들의 붕괴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반성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성의 질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식 체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여전한 갈망이 있다. 비록 예정되거나 예측된 변화와 발전을 설정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우연적인 변화를 예상하고 기대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우연적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인식론적 틀로 우리는 먼저 '경험'을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존재의 우연성에 관한, 더 나아가 그러한 우연성을 낳는 일종의 초월적 존재에 관한 반복되는 사변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를 인식하고 연구하는 데 게으를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보았던 대로 '경험'의 의의는 우선 인식에서 개방성을 유지하는 데 있다. 물론 이 개방성은 감각적인 차원에 갇히거나 특정한 논리와 직관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 또 경험은 변화와 새로움을 수용하는 자세와 결부되어야 하지만, 이 개방성의 강조가 경험적 연구 결과의 체계화를 아예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봉합되지 않은 체계화는 경험이 이루어지는 의미의 지평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체계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체계화와 개방성 사이의 긴장을 후자의 바탕 위에서 유지하는 것이 새삼 우리가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살펴본 헤겔, 마르크스, 알튀세르의 경험 개념은 이 긴장의 스펙트럼을 보여줌과 함께 그 긴장이 이처럼 개방성의 우위 아래 재정향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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