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쟝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명된 인식 의미와 철학 이념

나뭇잎숨결 2022. 3. 4. 10:49

쟝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명된 인식 의미와 철학 이념

문 장 수*경북대

I. 서 론

논제가 직접적으로 함축하듯이, 본고는 쟝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이 해명한 인식 의미와 그것이 제안하는 철학 이념이다. 논자가 보기에 삐아제는 현대 유럽 철학의 인식론에 관한 한 그 누구못지 않게 굵은 선을 긋고 있다. <발생학적 인식론> 혹은 <구성주의적 구조주의>로 자주 명명되는 삐아제의 체계는 이 시대의 합리적 사유의 주요한 종합적 표현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철학 이념 해명은 바로 비합리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합리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다양한 대안들 중의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이러한 소극적 입장을 지양하면서, 삐아제의 구성주의적 구조주의는 이 시대의 합리적 사유의 최고의 표현으로 평가함직하다고 역설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하에서 비합리주의 철학에 대한 합리주의 철학의 정당화를 제시할 것이다. 합리주의적 철학이 인식론적 경향을 지향한다면, 비합리론적 철학은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적 경향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 두 경향의 대비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대결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론에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즉 철학사에 있어서 합리론적 전통과 비합리론적 전통 사이의 논쟁은, 언뜻보면, 단순히 상호비방 혹은 상호무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 용어의 건설적 의미에 있어서, 끊임없는 상호비판과 따라서 상호진보를 이끌어 왔다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인식의 불가분리성에서부터 이미 분명한 것이다.
프랑스어권 안에서의 비합리론적 철학자들, 예를 들어, 파스깔, 싸르트르, 푸코, 데리다 등은 이성, 객관성, 체계, 과학 등에 대단히 냉소적이다. 그렇게 하여, 이들, 비합론적 철학자들은, 이성의 객관적인 논증적 질서를 효과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대단히 즉흥적이고, 상징적이며, 직관적인 문체를 활용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글은 대단히 난해하고 애매모호하다고 자주 평가되기도 한다. 이들은 과학적 사유 질서와 구분되는 보다 상위의 질서가 있음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무시하거나 사이비라고까지 극단화하지는 않았다. 사실, 파스깔은 물리학과 수학에 많은 기여를 했고, 과학주의에 대한 가장 냉소주의자인 싸르트르조차도 철학은 그 시대의 과학적 사유의 종합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실증주의적 철학 이념을 결국 인정했다. 그리고 푸코나 데리다의 역설은 사실 과학적 사유의 위조성보다는 인문학적 사유, 특히 철학적 사유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의해 믿어온, 절대성의 허구를 폭로하는 데 있었다. 보다 역설적인 것은 이들 모두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고 있지만, 사실 그들 자신은 철학 자체에 냉소적이었고, 자신들이 철학자로 명명되기를 적극적으로 원치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파스깔이 "진정한 철학자는 철학을 비웃는다"고 말할 때, 싸르트르가 "인생은 무용한 정념"이라고 할 때, 푸코가 "어떠한 필연적 학적 에피스템도 없다"고 주장하고, 데리다가 "일체의 것은 글자 게임"이라고 말할 때, 이들은, 과학적 체계이든 철학적 체계이든, 일체의 학적 체계에 대한 근원적인 한계 내지는 근본적으로 비관적 세계관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동시에 이러한 냉소적, 비판적, 비관적, 파괴적, 거부적 사유가 유일하게 진리와 자유를 드러낸다는 확신과 역설을 숨기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데까르트, 콩트, 베르그송, 바쉴라르 그리고 삐아제로 이어지는 합리론적 철학은 문제 또는 그 연구 대상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제한하려고 하면서, 분석적이며, 조작적이고, 체계적인 사유, 간단히 말해 과학 선호적이다. 이러한 합리론적 철학의 관심도 물론 때때로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적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신비주의적 경향에로 넘어가기도 했다. 데까르트는 광학과 분석수학에 심오한 토대를 마련했지만, 동시에 형이상학에 몰입했고, 콩트의 실증주의나 베르그송의 생물학적 또는 사회학적 반성들도 철학적, 종교적 차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바쉴라르의 물리학적 사유도 시적 신비의 세계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방향은 인식론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주의, 과학주의, 체계주의, 이성주의의 가장 최근의 계승자가 삐아제이지만, 삐아제 그 자신 유년 시절엔 신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더욱 역설적일 것이다.
과학주의자들의 비합리적 경향과 반과학주의자들의 합리적 경향이라는 이러한 역설은 이 논문의 주요한 한 동기이다. 즉 우리의 논제의 주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는 과학과 철학의 절대적인 구분의 철폐이다. 이 점은 이미 합리주의 철학의 한 입장이다. 즉 대부분의 비합리주의 철학은 그들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과학과 철학의 견고한 구분을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서론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사항은 여기서 논자가 사용하는 <구조>라는 용어의 이중적 의미이다. 우선 구조 개념의 첫 번째 의미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구조주의>를 지칭할 때, 구조의 의미이다. 방법론으로서의 삐아제의 구조주의는 직관주의 방법 또는 내성법적 방법을 평가절하하고, 반면에 조작주의 방법, 형식화적 방법, 변증법적 방법, 통시론적 연구와 공시론적 연구의 종합 등을 권유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구체적 연구 대상인 한에서 구조 개념이다. 곧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연구 대상인 한에서의 <구조 개념>은 곧 인식 개념, 체계 개념, 대상 개념 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실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한 결론은 <인식은 전체성의 구조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법의 본성과 구체적 연구 대상의 의미는 불가분리적 연관성을 지닌다. 구조주의는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구조 개념에로 환원하려는 일종의 환원주의이다. 말하자면, 구조 개념은 이 시대의 학적 사유의 최후의 보루, 즉 더 이상 환원불가능적인 인식 대상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그러한 대상들을 보게 하는 창이다.
이하에서 우리의 구체적 연구 방향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조명된 인식의 본성, 즉 구조 개념과 구조 개념으로서의 이러한 인식 개념이 함축하는 철학의 바람직한 방법, 태도, 의미, 목표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방법과 구체적 대상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 진행의 편리와 이해의 명료성을 위해 제 2장에서는 삐아제의 구성주의적 구조주의의 방법론적 이상을 논의하고, 제 3장에서는 통시론적 관점에서 인식의 조건들을 분석하면서, 발생, 구조 그리고 구성의 의미를 논구하고, 제 4장에서는 공시론적 관점에서 인식의 조건을 해명하면서, 인식의 순환성과 학제간 연구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제 5장에서는 철학의 바람직한 방법, 철학의 이념, 철학과 과학의 관계문제 등을 나름대로 개진하고자 한다.

Ⅱ. 방법론 문제

삐아제는 우선 전통적 철학, 즉 플라톤으로부터 오늘날 현상학이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사유에 고유한 방법 및 태도를 <직관주의적 방법>, <내성법적 방법>, <선험주의적 태도> 등으로 특성화하면서, 이러한 방법 및 태도의 불충분성을 지적한다.
우선 직관주의에 대해 말하면, 사실 <직관>이라는 이 용어는 시대에 따라, 학자에 따라, 관련된 주제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기에 일의적인 의미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용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포착함>을 의미한다. 이 용어의 의미의 다의성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 개념에 관계한 주요한 세 노선은 <영적 신비적 직관>, <감각적 직관>, <범주적 직관>으로 구분된다고 본다. 영적 신비적 직관은 중세의 신학에서 지지된 다양한 종류의 직관을 지시하는데, 오늘날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의 직관 역시 이러한 노선의 연장이다. 감각적 직관은 고전적 경험론의 인식론의 근본 토대이며, 현대 논리실증주의자 혹은 분석철학의 <감각 소여> 개념으로 연장된다. 범주적 직관이라는 개념은 훗설의 용어로, 이는 순수 논리적 보편자, 소위 본질 직관 개념과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첫 번째 직관은 영적 신비적 실체들의 실재를 전제하며, 두 번째 종류의 직관은 감각적 실재를 전제하며, 마지막으로 범주적 직관 개념은 본질들의 실재를 전제할 것이다.
그러나 신, 영혼 등의 초월적 실체의 실재성과 영적 직관의 주관성, 애매 모호성, 무의미성 등은 칸트의 이율배반론과 분석철학에 의해 이미 충분히 비판되고 있다. 그리고 감각 실재론 및 감성적 직관의 불충분성은, 데까르트에 의해 이미 논증된 바 있듯이, 철도의 원근법이나 유리컵 안의 막대기의 굴절 현상이 사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또한 색명검사의 예들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가 미리 셰마를 - 이러한 셰마 자체 불변적인 것은 없고, 역사발생 또는 정신발생 등과 더불어 변형된다 - 갖고 있는 것만 지각한다는 실례들에서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본질 직관 또는 범주적 직관 개념의 불충분성은 모든 시대를 통해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논리적 규범들은 없었다는 것, 즉 논리적 규범들 그 자체 역사적으로 변형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또한 본질이란 그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적 체계의 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등에서 이미 노정된다 하겠다.
두 번째로 내성법은 주관의 심리적 상태들을 내면적으로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 <관조>, <성찰> 등으로 자주 명명되는 이러한 내성법은 사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특히 이는 현상학이 심리주의를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즉 내성법은 주관주의를 필연적으로 야기시키며, 따라서 엄밀학의 이념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현상학자들 역시 아직 새로운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내성법적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현상학자들은 내성법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내성법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내성법의 본질적인 한계는 이미 완성된 것을 반성한다는 데 있다. 즉 내성법은 성숙한 철학자 자신의 완성된 의식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러나 구성하는 의식이 자기의 의식을 분석하면서 구성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려는 모든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주요한 한 주장이다. 한 체계의 무모순성의 논증은 그 체계 내에서는 불가능하고, 보다 상위의 체계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괴델의 무모순성 논증 불가능성 정리 또한 이러한 내성법의 한계에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구성자는 그 자신 구성자이기 때문에, 문제의 구성 그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절대로 형식화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상 만사가 자아의 구성의 결과이지만, 그러나 자아 그 자체는 우리의 직관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인정한 칸트나 싸르트르 등도 이미 잘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세 번째로 선험주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철학사에서 <선험적>이라는 이 용어의 부각은 칸트에게서 시작한다. 칸트는 자기 이전의 철학, 즉 플라톤, 데까르트 등의 철학을 초월론적 철학(Philosophie transcendante)으로 규정하고, 이에 비해 자기의 철학을 선험 철학(philosophie transcendantale)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현상의 가능성의 아프리오리한 조건에 대한 해명 내지는 탐구를 의미했다. 그런데 해명해야 할 현상이 한정된 대상이 아니라, <경험 일반>, 또는 <세계 자체> 등일 경우, 우리는 중대한 하나의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인식밖에 갖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계 일반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험적이라는 이 용어는 칸트에게서는 정당하게 사용되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 근본 문제는 물리 수학적 인식의 필연성과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즉 문제의 대상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는 인식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험적인 방법으로 <세계 자체의 가능성>을 해명하려 한 훗설의 경우, 선험성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나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라고 삐아제는 비판한다.
사실, 어떠한 학적 사유도 이러한, 직관적 방법, 내성법적 방법, 선험주의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방법들에만 의존할 경우 우리의 사유는 어떤 형식으로든 독단적 주관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비판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삐아제의 구조주의의 방법론적 이상은 이러한 세 종류의 방법들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으로써 보완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권장하는 첫 번째 방법은 직접적 분석 방법이다. 이는 자연과학에 고유한 방법으로서 대상을 제한하고 관찰하여 시간적 추이과정에 따라 변형되고 발생하는 사건들 상호간의 관계성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인과성의 원리를 지지하는 기술이고, 이러한 직접적 서술은 대부분 우리의 자연적 지각에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이는 사실 감성적 직관의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기술하더라도 자연적 감성 능력으로서의 단순한 시각적 기술과 현미경이나 망원경 등의 도구를 활용하는 기술 사이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구의 활용은 인식 주관의 단순한 도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관의 인식 구조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모델들을 제공한다. 사실, 현미경, 망원경, 컴퓨터, 인공 두뇌 체계 그리고 다양한 물리학적 측정 기기들은 한편에서는 인간의 인식 체계 그 자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가시적 차원과 비가시적 차원의 경계를 허물 것이다. 인식론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이러한 직접적 분석 방법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과학에서의 직접적인 분석은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직접적 분석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관찰자의 다양한 구조들을 다양하게 적용한다는 데 있다. 훗설은 무전제, 판단중지, 순수 기술 등을 말하지만, 그가 지향성 개념을 말할 때, 그 의식이 어떠한 의식이든, 의도 없는 의식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미리 모델을 갖고 대상을 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 자체 가치 중립적인 물자체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칸트의 저 긴 순수 이성비판을 여기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델의 적용을 받지 않은 직접적 대상 인식은 원칙상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렇다고 대상 자체가 모델에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 자체는 분명 주관적 모델을 넘어 서 있다. 바로 여기에 직접적 분석에 의한 기술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직접적 분석에 의한 기술이 새로운 모델의 구성을 적극적으로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자 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구성은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이젠베르그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연역하게 하는 것은 그것에 앞서 제시된 구체적 실험의 결과였다.
우리는 방금 직접적 분석 방법은 모델들의 적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모델들의 적용의 보다 엄밀화가 구조주의가 지지하는 두 번째 방법인 <형식화적 분석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연 과학에서는 직접적 분석 방법만큼이나 오래된 방법이지만, 인문 과학에서는 럿셀 및 논리실증주의자들, 특히 현대 구조주의의 다양한 운동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즉 인문 과학적 사유도 학적 엄밀성을 갖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적 표현으로는 불충분하며, 잘 정의된 인공 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건축물을 짓고자 할 때, 아무리 일상적 언어를 잘 구사해도, 일상 언어적 설명은 잘 그려진 도면보다는 부정확할 것이다. <빵이 많이 있다>와 <빵이 10개 있다>고 말하는 것, 또는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고 말하는 것과 <그것은 3×108m/sec>이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모델화 또는 수학적 형식화는 직접적 분석에 의해 주어진 소여를 단순히 기호적 차원으로 번역하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수리물리학의 저 많은 예들이 보여주듯이, 수학적 형식화는 물리적 실재들을 단순히 기술하고 서술하는 차원을 넘어, 물리적 실재 그 자체를 새로이 구성하고 예견한다. 즉 수학적 형식화는 실재의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실재 그 자체의 <형성자>이다. 예를 들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수학에 있어서 리만 기하학을 물리적 공간에 적용하는 데서 구성되었다.
삐아제의 구성주의가 권유하는 세 번째의 방법은 <역사 비판적 방법>이다. 이 방법은 P. Duhem, G. Milhaud, P. Boutroux, L. Brunschevicg, E. Meyerson, A. Reymond, A. Koyr , G. 그리고 S. Bachelard, Caguilhem 등이 활용하거나 강조한 방법이다.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들, 예를 들어 인과성, 실재성, 대상, 생명,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들이 학적 체계들의 역사적 발생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념의 역사적인 변형들의 단순한 나열은 인식론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칸트적 의미에 있어서 <비판적>이라는 용어의 중요한 역할을 여기서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비판적 방법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유용한 한 방법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의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문제의 학설을 구성하게 된 이론가 혹은 과학적 발견을 획득한 그 과학자는 그가 그러한 학설 또는 발견을 구성하기 위해 의존한 경험 또는 실험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A. Koyr 가 갈릴레이의 연구 성과를 역사-비판적으로 재구성할 때 잘 지적해 주듯이, 과학자들의 모든 학설이 실증적인 실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갈리레이가 물체의 자유낙하 속도는 물체의 무게에 상관없이 똑 같다는 것을 정당화할 때, 또는 아인쉬타인이 그의 동료 연구자들과 소위 E-P-R 역설을 제안할 때, 그들이 의존한 것은 구체적인 실증적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에 의한 실험, 소위 <사고 실험>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문제의 실험으로부터 어떠한 연역적 체계를 구성했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문제의 실험에 예비적으로 접근할 때, 활용한 셰마 또는 형식적 모델들과 그것들의 인식론적 본성들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 또는 셰마들을 착안하게 한 선행하는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는 이 문제가 그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비판적 방법의 활용의 성공적인 실례는 원자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이다. 한 때, 꽁트는 원자론은 서술적, 현상론적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설명적, 인과적 차원 따라서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라 평가하면서, 엄밀한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되어야 할 이론인 것처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 철학의 차후의 전개 자체가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분명히 했다. 즉 원자론은 실험 물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수리물리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강요된다는 관점에서, 과학 통합을 역설한 신실증주의는 원자론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제 여기 신실증주의에서는, 꽁트의 실증주의와는 반대로, 원자론은 설명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서술적 차원에서, 즉 경험 소여적 차원에서 강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실증주의의 난점은 서술적 차원과 경험적 확인의 차원을 극단화하면서, 정의의 차원과 이러한 정의적 영역의 의미론적 토대인 조작적 조합의 역할을 단순히 언어적 문제로 환원시키고 만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원자론적 가설은 20세기의 원자론적 실험들이 있기 훨씬 이전에 설명적 의도 속에서 분명히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설명적 의도를 지지하는 원자의 가설은 수적 단위들의 누적에서 착안된 조작적 조합 셰마 덕분에 가능했다. 즉 G. Milhaud가 지적하듯이, 그리스의 원자론은 피타고라스의 수 이론에 근거했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의 원자론은 조작적 차원, 연역적 차원 그리고 실험적 차원의 상호 긴밀한 협력에서 구성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 Meyerson과 Bachelard의 역사-비판적 연구이다. 따라서 역사-비판적 연구는 형식화적 분석의 결여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비판적 방법이 다른 한편으로 상대론적 인식론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상대론을 구분해야 한다. 소위 철학적, 형이상학적, 회의주의적 상대론과 과학적, 역사적 상대론이다. 철학자들이 절대적 인식을 가정하면서, 우리의 실질적인 모든 인식은 단순한 일시적, 도구적, 편리적 진리일 뿐, 그 자체로서의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회의론에 빠질 때의 진리 상대론을 역사-비판적 방법론은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후자가 지지하는 상대론 또는 일반 과학에서 지지하는 상대론은 우리의 과학적 인식들은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온건한 상대론이다. 즉 그는 역사적 진보에 따라, 우리의 인식적 장치들은 보다 정교화될 수 있고, 따라서 우리의 인식들은 점점 더 완전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지지한다.
정신발생론적 방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우선 <발생학적 인식론>과 이를 구분해야 한다. 정신발생론적 접근은 발생학적 인식론이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들 중의 하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예를 들어, 인과성, 수, 대상, 실재 등의 개념들이 아동, 초등생, 중등생, 대학생, 석사, 박사, 전문가 등의 인지적 수준의 변형에 따라 문제의 인식들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로 변형되는가를 고찰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는 형식화적 분석 방법과 역사-비판적 분석 방법의 보완일 수 있을 것이다. 형식화적 분석 방법은 전문적인 학자 자신의 의식의 구조, 말하자면, 이미 완성된 성인의 의식의 형식화에 의존하는데, 이처럼 이미 완전하게 형성된 성인의 의식의 구조 분석에서 모종의 인식론적 해석을 찾을 경우, 불충분성과 자의성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리 선택의 자유>에 의한 <형식화의 수다성>과 아울러 <형식화의 한계> 등의 인식론적 의미를 알고 있듯이, 어떤 하나의 형식화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비판적 방법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에 한정된다. 역사-비판적 방법을 때때로 <역사 발생적 방법> 혹은 <사회 발생적 방법>이라 명명하듯이, 인류가 걸어온 모든 인지적 과정을 역추적할 수 있게 하는 자료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역사시대는 선사시대에 비하면, 얼마나 짧은가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에, 마치, 생물학에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헥켈의 주장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정신발생론적 접근은, 역사발생론적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인류의 인지적 구조들의 전개과정, 즉 변형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 또는 구성주의적 구조주의는 앞에서 제시한 전통적인 철학적 세 가지 방법, 즉 직관적 방법, 내성법적 방법, 선험주의적 태도 등의 불충분성을 방금 소개한 네 가지 방법, 즉 직접적 분석 방법, 형식화적 분석 방법, 역사-비판적 분석 방법, 정신발생론적 분석 방법 등에 의해 보완하고 종합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세부적인 다양한 방법들의 종합을 함축하는 발생학적 인식론은 크게 논리주의적 경향과 심리주의적 경향이 갖는 불충분성의 비판적 종합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당위에서 사실에로 직접적으로 가는 것도 권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듯이, 마찬가지로 사실에서 당위에로 직접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당위, 규범, 공리 등이 그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규범을 갖게 한 심리적 직관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완전 무에서 공리나 규범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규범들을 강요한 심리적 직관 내용들을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주어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단순한 규범이나 형식화도 실질적인 물리적, 심리적 과정의 완전한 번역, 혹은 단순한 녹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물리적 실질적 과정과 논리적 형식적 체계 그 사이에 이러한 간격을 만들었는가? 삐아제는 그것은 주관의 조작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인식론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방법론적 이상은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인식 의미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Ⅲ. 통시론적 관점에서 해명된 인식의 조건 : 발생, 구조 그리고 구성

통시론적 관점에서의 인식의 조건 해명이란 역사적으로 인식의 의미가 어떻게 적용되고 이해되고 해석되어 왔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선사시대는 제쳐두고, 역사시대에 한정한다손 치더라도, 국가, 사회, 인종, 계층, 연령 등의 다양성에서 오는 다양한 인식 의미들을 모두 다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료는 한편으로 문집화되어 있는 학적 체계들, 즉 역사-사회 발생적 소여들과 다른 한편으로 삐아제의 독창적 방법에 의한 정신발생적 소여들이다. 역사적으로 제시된 학적 체계들 전체를 분석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탐구 영역을 보다 더 제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을 위해 불가피하게 인식의 의미를 미리 잠정적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하여 획득된 인식의 의미를 기준으로 삼아 이제 우리가 탐구할 대상 내지는 영역을 한정해야 하는 순환성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인식이란 올바르고 참다운 지식 개념,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면, 진리 개념과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자. 이처럼 인식을 지식 또는 진리 개념과 교환적인 것으로 정의하면, 모든 과학적 이론체계들은 참 인식을 기술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다양한 과학적 법칙 또는 진리들은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학적인 인식만이 참 인식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선과학적 인식 또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인식들도 참 인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 인식이라는 협의의 인식들을 포함하면서, 방금 언급한 이러한 광의의 참 인식의 조건 내지는 본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거나 기술한 이론 또는 체계를 우리는 <인식론>이라 한다. 그런데 관념사에서 제시된 인식론은 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학적 역사 안에서 제시된 모든 인식론들을 다 분석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략적으로 우리의 특별한 기준에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9 가지의 주요 변이들만을 분석하고자 한다.
비환원주의, 환원주의, 구성주의(변증법적 인식론)라는 세 구분과 대상 중심주의, 주관 중심주의, 주관과 대상의 상호작용주의라는 세 변이의 곱에 의해 9가지의 인식론적 변이를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이들에 대응하는 역사적 인식론들을 간략하게 분석하는 데만 우리의 통시론적 연구를 한정하려고 한다.
비환원주의의 대표적인 세 변이는 플라톤주의, 선천주의(Apriorisme), 현상학이다. 이들 중에서도 플라톤주의는 대상중심주의 패러다임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인식론은 모든 주관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들>이라는 선험적 실재들에 무엇보다도 더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선천주의는, 데까르트나 칸트에서 보듯이, 주관 중심적 패러다임이다. 여기서는 모든 주관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완성된 선천적 관념들 또는 그러한 관념들을 직관할 수 있게 하는 선천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현상학은 선험적 본질과 선험적 주관 양자를 동시에 요청하면서, 일종의 선험적 상호작용을 지지한다.
비환원주의의 이러한 세 패러다임들 각각에 대해서 실로 다양한 비판들이 관념사 안에서 주어졌지만, 여기서 그 하나하나를 세부적으로 나열할 여유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환원주의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비판점이라고 간주되는 한 문제점만 요약하고자 한다. 비환원주의 인식론에 있어서, 문제의 비환원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한 근본적 근거는 논리적 규범들의 존재이다. , 또는 <1 + 2 = 3> 등의 논리적, 양적 판단들의 필연성은 물리적, 구체적 대상들의 질적 조합적 차원과는 분명 구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논리적 보편자들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갖고 태어난다는 주장에 안주할 수는 없다. 사실 이러한 비환원주의적 선험주의적 태도는 논리, 수학적 판단들의 근원을 아주 손쉽게 해결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하나의 요청적 생각일 뿐, 결코 논증도 설명도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주관은 처음부터 완성된 논리적 보편자들을 지참하고 태어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어떠한 역사발생적 소여도, 정신발생적 소여도 없다. 반대로 학적 역사는 학적 사유의 진행과 함께 끊임없이 논리적 규범들을 수정해 왔으며, 마찬가지로 아동의 인식에서 성인의 인식에로 나아갈수록 논리적 셰마는 점진적으로 복잡하게 변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환원주의의 인식론이 가능했던 것은 성인의 완성된 의식만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일체의 발생적 소여들을 보지 못한 것에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삐아제는 비환원주의적 인식론의 한계를 <발생없는 구조>라고 비판한다.
환원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기에도 다시 세 가지의 세부적인 변이들, 즉 경험론, 유명론, 동일화의 인식론으로 구분된다. 잘 알다시피, 환원주의는 인식을 선험적인 요청들에서 설명하지 않고, 가능한 한 발생적 차원들 자체 내에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연적 설명> 또는 <후천적 설명>이라고 자주 평가된다. 이러한 세 변이들 중에서도, 고전적 경험론은 대상 중심적 패러다임이다. 사실 고전적 경험론은 더 이상 선험적 본질 내지는 실재들을 상정하지 않으며, 일체의 인식의 가능성을 비선험적 외적 물리적 대상들에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현대의 다양한 이미지 중심주의 인식론들도 사실은 이러한 고전적 경험론의 연장이며, 따라서 대상 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의 인식론이다. 예를 들면, Mach의 인식론은 자주 철저한 주관주의 또는 관념주의로 평가되곤 하지만, 사실은 대상 중심주의의 패러다임이다. 물론 Mach는 일체의 소여들을 감각들의 전체성에로 환원할 때, 이러한 감각 작용의 가능성의 토대인 외적 물리적 실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일체의 논리적 연역적 규범들까지도 이러한 감각적 소여들에로 환원시키면서, 감성적 직접적 현상들과 논리적, 양적 규범들 사이의 위계성과 이러한 위계성의 출현의 원리를 놓치고 있다. 질적 감각적 구조들과 논리적, 양적 구조들 사이의 위계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주관의 서로 다른 두 차원을 보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삐아제는 평가한다. 주관의 두 차원이란 직접적, 자기중심적 주관과 인식론적, 조정적, 탈중심적 주관이다. 전자는 오직 직접적 감각들 내지는 이미지들에 관계한다면, 후자는 이러한 감각들에 관계하는 주관의 행동의 구조에 관계하는 주관이다. Mach는 논리적 보편자들의 구성에 관계하는 주관의 행동들과 이러한 행동들의 내적 구조화 내지는 조정화의 인식론적 의미를 놓치면서, 즉 일체의 논리적 보편자들을 주관의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것으로 간주된 <감각 소여>에로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그의 인식론은 대상 중심적이라고 삐아제는 평가한다.
유명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습주의와 교환적으로 사용되듯이, 이 입장에 따르면, 일체의 인식 또는 진리는 단순한 명칭 또는 사회적 약정일 뿐이다. 이러한 명칭이나 약정의 실행자는 주관이기에 이 입장의 인식론은 물론 주관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이다. 반면에 통일과학의 인식론은 물리학적 질서와 논리 수학적 질서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실증적 차원과 논리적 차원 모두 단순한 동일성(identite)의 원리가 아니라 동일화(identification)의 원리에 근거한다고 주장할 때, 주관과 객관의 상호 침투를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이 학파의 주류인 논리실증주의의 인식론이 잘 보여주듯이, 결국 실증적 차원과 논리적, 언어적 차원을 구분하면서, 논리적 수학적 질서를 단순한 언어적 상징 기호화의 차원으로 환원하면서, 주관의 조작적 구성의 측면을 놓치고 만다.
삐아제에 따르면, 구성주의의 인식론은 변증법적 인식론과 교환적이다. 구성주의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하위 패러다임을 포함한다. 주관중심주의인 Hegel의 정신의 변증법, 대상중심주의인 막스-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 그리고 이 양자를 최대로 종합하는 삐아제 자신의 발생학적 인식론(구성주의적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의 패러다임이다.
변증법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한 문제는 변증법이란 단순히 <사유의 법칙>인가 아니면 동시에 <자연적 외적 실재적 과정들의 법칙>인가 하는 문제이다.
막스주의의 Hegel주의에 대한 비판의 본질은 Hegel이 사유 안에서 생각했다고 간주된 모든 것들을 자연적 실재 안에 적용하는 데 있었듯이, 변증법의 문제에 있어서도 양자 사이의 논쟁은 Hegel주의에서는 <모순의 원리>가 단지 사유의 원리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적 실재 전체의 생성 원리가 <모순의 원리>이며, 이러한 자연적 실재의 모순 원리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유적 단계에서 인식 원리로서의 <모순성>이 유의미하다고 역설했다. 그렇게 하여 L nine는 〔철학 수첩〕(1955) 안에서 사유적 단계에서의 <모순성>에 선행하는 자연적 과정 안에 고유한 <모순들>의 예들을 다음과 같이 주었다 : <수학에 있어서 '+'와 '-', 미분과 적분, 기계학에 있어서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 있어서 음전기와 양전기, 화학에 있어서 원자들의 결합과 분해>
모순 원리의 실재론적 태도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비판가는 Nicolai Hartmann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모순은 본질적으로 사유와 개념의 영역에 속한다. 모순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 모순은 논리학적 올바른 판단을 지지한다. 개념들 혹은 판단들은 모순될 수 있다 … 그러나 사물들, 사태들, 실질적 관계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모순될 수 없다 … 사람들이 생적 모순, 실질적 모순 등으로 대단히 부적절하게 명명하고 있지만, 실질적 모순은 전혀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갈등일 뿐이다> <실질적 모순>과 <논리적 모순>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Kant와 더 앞서는 Aristoteles에게서도 이미 일견된 바 있지만, 명시적으로 공론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Hartmann 이후 Ajdukiewicz, Copi, Kelsen 그리고 L. Colleti 등에 의해 심오화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 1) 실재가 모순적이라는 것 또는 모순이 존재한다거나 실질적이다고 하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모순은 논리, 사유, 개념의 영역에 속한다. 즉 그것은 실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들에 속한다. 2) 자연이나 사회 안에 갈등, 투쟁, 대립적인 경향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수학, 물리학, 화학 그리고 과학 일반이 관여하고 있는 이러한 상반적 관계들 혹은 실질적인 대립 관계들은 논리적 모순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3)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부흥하여, 모순 관계로 자연을 파악하려는 모든 과학적 이론은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며, 따라서 버려야 할 이론이다.
사유의 법칙을 자연의 실재의 법칙인 양 잘못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비판가들은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주장하는 Hegel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양자 모두 사유 상의 구분을 존재론적 구분인 양 실재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관념론적> 혹은 <유물론적> 이라는, 즉 <사유의 자연화>냐 <자연의 사유화>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인식과 존재의 일치 내지는 분리 불가분성을 주장한다는 공통된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Piaget에 있어서 변증법의 의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균형화>의 관념은 Hartmann, Popper, Kelsen 등의 실재와 인식의 극단적인 분리의 요구가 그렇게 주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시할 것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실재성> 개념 그 자체 이미 전체성의 체계 내에서만 유의미하기 때문에, 자연의 실재라고 생각하는 <작용과 반작용>,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 <음극과 양극 사이의 반발과 견인> 등의 관념은 사실 Bool의 대수적 구조에 고유한 zero 요소를 함축할 때에만 유의미하다. L o Apostel의 다음 문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표현해 준다 : <한편에서 두 사건들 사이의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명제 사이에 어떤 동형적인 것이 있을 때, 두 사건들 사이에 실질적인 모순이 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할 것이다. 우선 과학적 명제들은 당연히 실재에 관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 명제들은 논리적 체계들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단순 지각들에도 논리적 구조가 먼저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실험 심리학의 확실한 결론이다. 그런데 이 말이 논리적 선험주의 내지는 선형성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들 그 자체 필연적으로 실재와의 관계에서 구성된 위계적인 구조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논리의 근본 원리들이라 생각하는 <동일성의 원리>, <부정의 원리>, 그리고 <모순의 원리> 등은 논리적 구성의 도구들이지만, 그들 역시 구성의 결과들이다.
통시적 관점에서의 인식의 조건에 대한 논의들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인식론사에서 제시된 비환원주의적 패러다임들은 다양한 단계의 발생들을 보지 못하고, 성숙한 성인 학자인 자기 자신의 의식의 내면을 내성법적으로 직관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구조들의 보편성과 선행성을 강조했지만, 이러한 구조들의 구성과 변형들을 보지 못했다. 반면에 환원주의적 패러다임들은 발생에 주목했지만, 그들이 주목한 발생은 감각적 지각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지각은 이미 구조화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즉 여기서는 구조들의 역할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의 의미의 망각은 행동의 차원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보지 못한 데 기인한다. 변증법적 패러다임들은 주관의 활동과 구성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만,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패러다임에 선행하는 다양한 변증법적 구성주의는 아직 철저하게 과학적 체계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즉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도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도 구성의 메카니즘들을 엄밀하게 형식화하는 데까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은 인식의미를 보다 완전한 전체성 속에서 해명하려면, 발생과 구조를 동시에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임무는,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인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 경험들과 그러한 경험을 가능케 한 구조로서의 범주들을 분석하는 칸트의 과업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삐아제 그 자신 칸트가 분석한 범주들의 구체적인 발생들의 확인에 몰두한다. 그러나 결론은 칸트와 다른 것이다. 어떠한 구조도 범주도 자체 완결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없으며, 주관이 대상과의 관계에서 수행한 오랜 기간의 행동들의 조정화에서 후천적으로 내면화된 것이 구조요 범주라는 것이다. 대상과 주관 사이에 선험적인 경계를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발생과 구조 사이에도 결정적인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들 사이에 무한한 변증법적 진보, 즉 선행한 단계들에 있는 체계들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선행한 체계들을 하위 체계들로 포함하면서 동시에 이들에게 없었던 새로운 속성을 첨가시키는 종합, 이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구성>이라고 명명하는데, 바로 이러한 새로움의 구성을 강조하는 것이 발생학적 인식론의 패러다임이다.

IV. 공시론적 관점에서 해명된 인식의 조건 : 인식의 순환성과 학제간 연구의 요구

기초과학들의 분류화는 그 과학에 고유한 대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특히 문제의 이 대상이 다른 영역의 대상과는 분명히 구분되어 무분별적으로 환원하여 취급할 수 없다는 데서, 이렇게 특별히 구별되는 영역의 대상들을 특별히 취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개별적인 특수적 과학들이 분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Comte의 학문 분류화에 따라, 비생기적 물체들의 영역, 생명적 유기체의 영역, 정신적 의식의 영역 이들 상호간의 환원 불가능성과 독자성에서 각각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이 발생했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광의의 정신 현상들 중에서 <논리> 내지는 <논리적 사실들>은 내적 외적 단순한 지각들 내지는 직접적인 경험들 혹은 이러한 경험들의 추상에서 성립되는 복합 관념들에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리하여 <논리학>이 심리학으로부터 독립하는 근거를 마련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물리 현상이 있기 때문에 물리학이 성립할 수 있고,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생명 현상이 있기 때문에 생물학이 성립할 수 있고, 물리 현상으로도 생명 현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정신 내지는 의식 현상이 있기 때문에 심리학이 가능할 수 있고, 단순한 개인적, 직관적, 체험적 의식 내용들에로 환원될 수 없는 객관적인 어떤 <체계> 내지는 <구조>, 소위 <논리>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독자적인 영역이 있기 때문에 논리학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논리학은 질적 대상들의 차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수학적 조작은 일체의 질적 대상적 차원과 결별하면서 엄밀한 양적 조작에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논리학과 수학을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러나 기초 과학들 상호간에 이러한 구분은 꽁트가 생각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대의 학적 인식들의 실상은 다양한 분과 학들 사이에 상호 의존성을 드러낸다.
우선 논리 수학적 구조들과 물리학적 구조들 사이의 의존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물리학적 구조들, 운동, 시간, 공간, 에너지 등의 개념들에 이미 논리 수학적 구조가 개입함은 오늘날 수리물리학과 특히 양자역학에 의해 분명해졌다. 순수 연구 대상의 관점에서 보면, 운동, 에너지, 속도, 힘 등의 물리적 대상과 수, 방정식, 함수, 미분, 적분 등의 순수 양적 조작들 사이에 어떠한 유사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념적, 이론적 차원에서는 물리학적 인식들은 논리 수학적 조작들에 의존함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인식은 외적 대상들의 지각의 직접적인 번역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오늘날 발생학적 기술은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했다. 예를 들면, 외적 대상의 운동의 기술에서 속도 개념이 직접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속도 개념은 물리학적 전체성의 인식 안에서 구성된 조작적 개념이다. 이러한 속도를 미분하면, 다시 가속도가 된다. 여기에 이미 수학적 조작과의 결합이 있다. 말하자면, 물리학적 구조들은, 논리 실증주의가 생각한 것처럼, 외적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지각적 소여들의, 언어에 의한, 직접적인 번역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 조작들의 전체성의 맥락에서 해석과 관계하여 구성된 개념들이다. 즉 속도나 가속도 등의 언어는 지각적 소여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조작적 구성물이며, 따라서 언어, 특히 학적 언어들은 직접적인 지각적 소여 이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적 언어가 인식의 내적 셰마로 내재화될 경우, 반대로 지각은 이제 이러한 셰마에 따라 분석된다.
두 번째로 물리학적 인식들과 생물학적 인식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에 대해 말하자면, 생물학적 대상들과 관계된 생물학적 개념들, 즉 유전, 적응, 발생, 동화, 진화 등은 물리학적 대상의 한 특수한 영역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밀러와 폭스에 의한 무기물에서 유기물 합성의 성공, L. von Bertalanffy 또는 Ilya Prigogine 등이 <유기체의 균형화>, <개방 체계 내에서의 안정 상태> 이론을 물리학의 <열역학적 비평행적 안정 상태> 이론과 접목시키려고 할 때, 이들은 Descartes 이후 심오화된 생물학의 인과론적 설명, 즉 생물학의 물리 화학적 환원을 심오화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신경 생리학적 과정에 <목적론적 설명>을 첨가하려고 할 때, 이는 생물학과 심리학의 상호 연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 또는 <의도> 개념은 근본적으로 심리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Rashevsky, Volterra 등이 생물적 유전 법칙을 대수적 구조로 번역하려고 할 때, 또는 Piaget가 생물학적 분류화에서 이원 가치 논리의 역할을 분석해 낼 때, 이들은 모두 생물학과 논리 수학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논증하는 것이다.
심리-사회학과 생물학 사이의 의존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사실 생명적 유기체들 중의 한 특수한 종이며, 사회란 이러한 인간이 생을 영위하는 장이다. 우선, 심리학적 구조와 사회학적 구조의 순환성은 개인적 정신의 종합의 의미는 사회적 전체성의 의미(의사 소통, 인식의 근원)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학적 단계의 인식이 문제시 될 때, 그것이 아무리 학자 개인의 독창적인 종합이라고 할지라도, 언어적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언어는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사회적 전체성의 체계이다. 양자 사이의 매개자로서의 언어학적 구조의 이러한 지위는 심리학적 구조들과 사회학적 구조들 사이에서 근본적으로 잘못 정립된 문제, 즉 개인이 먼저인가 사회가 먼저인가 하는 그 문제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심리-사회학적 구조들과 생물학적 구조들 사이의 의존성은 다음과 같은 사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심리-사회학의 <정보 이론>, <놀이 이론>, <결정 이론>, <행동 모델>, <조작 모델> 등을 동물 심리학 또는 생물학 일반, 즉 신경-생리학적 차원에까지 적용하려고 할 때, 반대로 신경조직화, 생인지학, 유전학 등에서 인식적 메카니즘들을 설명하려고 할 때, 이들은 생물학과 심리-사회학 사이의 의존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을 형이상학적 반성적 인식론에 안주할 수 없게 한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다양한 학적 체계들 사이의 순환성을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학적 체계들 사이의 순환성은 인과적 체계와 연역적, 함축적 체계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순환성에 근거하며, 후자는 다시 의식적 차원에서의 대상과 주관의 순환성에 근거한다. 의식적 차원에서의 이러한 주객의 순환성은 이러한 의식적 지평보다 훨씬 더 넓은 지평인 행동적 차원과 그것의 조작적 조정화의 차원에 근거하며, 이 후자는 다시 보다 근원적인 유기체의 조직화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근거한다. 이것으로서 우리는 오늘날 학계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학제간 연구의 필연성과 중요성의 모든 토대를 마련한 것이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감각 운동적 행동 단계에서 개념화적 조작 단계에로, 다시 완전한 언어적 구조화의 단계에로 이행케 하는, 그리고 이러한 조작적 구조화의 단계들 내에서도 다시 무한한 진보를 보증하는 변증법적 운동은 따라서 <균형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균형 상태들이 변증법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 새로운 장애를 만나서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는 새로운 행동을 도입할 때, 예를 들면, 기하학사에서 자연 속에는 양의 정수만 있어야 한다는 원리에 모순되는 √2라는 무리수가 출현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하학과 대수학의 새로운 종합을 구성할 때, 또는 물리학사에서 Galilei 변환이 빛의 절대 속도가 개입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자, Lorentz 변환으로 대체되면서 여전히 그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 Lorentz 변환 체계의 한 하위 체계 내지는 특수한 경우로 고려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변증법적 추월을 말할 수 있었듯이, 변증법이란 보다 더 엄밀하게 특성화하면 <균형화의 추론적 양상>이라는 Piaget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균형화>는 <추론적 양상>과 불가분의 방법으로 또한 <인과적 양상>을 포함할 것이다. 즉 인지적 발달에 있어서 그것에 선행하는 단계들의 역할을 가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언설적 단계의 변증법에 선행하는 행동적 조작들에 고유한 기본적인 변증법적 사태들의 중요성을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변증법이 <인과적 양상>을 아무리 필연적으로 함축한다손 치더라도 이러저러한 물질적 조작들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Piaget의 조작주의 혹은 셰마주의가 경험론의 시행 착오 이론과 다른 점이다. 즉 변증법적 진보는 수행된 조작적 행동들에서 이끌어 낼 수 있은 <의미의 연결>(의미 체계 도식)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에서, Piaget는 <균형화의 추론적 양상>이라는 관념을 생각한다. 이처럼 <균형화의 추론적 양상>으로 변증법을 정의하면, 행동들 사이에서 가능한 의미들의 추론적 균형화는 그 용어의 엄밀한 논리학적 차원의 <모순> 개념을 피한다. 두 행동들 사이의 모순이란 그 두 행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음을 지시하지, < a ×non a = 0>라는 엄밀한 <형식적 모순>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변증법자들이 <모순>으로 명명하는 것은 <대조적인 것>(oppos ), <상반적인 것> (contraire), <갈등적인 것>(conflictuel) 등이지, (a× non a = 0)이라는 이러한 엄밀한 형식적 모순은 아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여기서, "부정이란 (한 개념)전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결정된 것(따라서 전체성의 여러 양상들 중에서 한 양상)의 부정이다" 라는 Hegel의 말을 상기하는 것은 대단히 교훈적일 것이다.
인식의 조건에 대한 1부에서의 통시적 연구와 2부에서의 공시적 연구의 종합적 결론은 이러하다. 인식 즉 대상의 의미란 전체성의 구조 혹은 체계이다. 즉 인식은, 소박한 실재론자들이 생각하듯이, 세계 안의 다양한 자연물들이 처음부터 지참하고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모종의 원리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대부분의 선험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주관이 선천적으로 지참하고 태어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절대적 구조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소박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의미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의 단순한 상호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것도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변증법적 운동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의 인식은 그 대상을 동일화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화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차원의 종합에서 구성된다. 우선 문제의 그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즉 그 대상이 관계하는 환경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 그 대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즉 그 대상에 관계된 목적, 의도,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세 번째로 그 대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즉 그 대상의 활동, 작용, 기능을 알아야 한다. 네 번째로 그러한 작용 또는 기능은 어떠한 구조(안정 형태)에 의존하는가, 즉 그 대상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때, 문제시된 구조는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그 대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변형되는가, 즉 그 대상의 진화를 이해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삐아제의 구성주의적 구조주의가 말하는 <인식의 전체성>은 환경, 구조, 목적, 기능, 진화라는 다섯 가지 요인 내지는 관점의 종합에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삐아제의 발생학적 인식론은 오늘날 일반 체계론적 인식론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V. 발생학적 인식론의 철학 이념 : 다양한 가치들의 합리적 종합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명된 인식의 본성 내지는 조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다양한 성과들을 참조할 때, 우리는 철학의 정의를 새롭게 수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사실 삐아제 그 자신 자신의 발생학적 인식론의 결과들을 토대로 하여, 철학은 다양한 가치들의 합리적 종합이라고 정의한다.
이미 우리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듯이, 19 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의 유럽의 철학적 사유의 변형 과정은 먼저 <현상학>에서 시작하여, <실존주의>에로 연장되는데, 따라서 이 두 분야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는 정신들은 자주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 방식을 <형이상학적> 또는 <신앙적 믿음> 등으로 특성화하면서, 이제부터 철학은 보다 현실성 있는 사유를 지지할 것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현상학은 과학적 성과들을 철학적 사유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고, 서론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실존주의자들 중에서 과학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Sartre도 나중에 철학은 동시대의 과학적 인식들의 종합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상학 또는 실존주의는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음도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긍정적인 의미를 결코 평가절하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구분이 가질 수 있는 위험도 동시에 상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대비시키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상호연관적인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한다.
우선, 어떤 철학자는 철학적 인식은 절대적이고 과학적 인식은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과학과 철학은 절대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 때 그 구분의 근거는 과학적 인식은 사실들 사이의 순수 인과적 인식이고 철학적 인식은 순수 가치적 당위의 인식이다는 것이다. 가치적 당위는 불변적이지만, 사실의 진리는 새로운 방법론의 적용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정반대로 생각한다. 과학적 인식은 절대적 불변적 진리이고 철학적 인식은 개인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인생관 내지는 세계관일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은 방법론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분석될 수 있지만, 적어도 문제의 방법적 틀 내에서는 자연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뉴턴의 고전 역학적 패러다임과 아인쉬타인의 상대론적 패러다임 그리고 오늘날 양자 역학적 패러다임에로의 진화는 물리학적 인식의 심화이지 후자가 전자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논자가 보기에 철학과 과학의 이러한 상호 무시는 다음과 같은 주요한 사태를 망각한 데서 유래한다고 본다. 즉 아무리 순수 가치라고 해도 거기에 인과적 인식이 이미 개입되지 않은 가치는 없고, 마찬가지로 아무리 순수 인과적 인식이라 해도 거기에 이미 가치 개념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 인과적 인식은 없다.
심리주의의 난점이 잘 보여주듯이, 사실들의 종합에서 순수 가치적 당위를 도출할 수 없고, 반대로 논리주의의 난점이 잘 보여 주듯이, 가치적 당위가 직접적으로 사실적 차원의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적 진리와 규범적 진리를 완전히 구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순수 인과적 인식이라 해도 그것 자체 이미 <실용적 가치>의 차원을 배제할 수 없고, 아무리 순수 규범적 당위라 해도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당위는 없다. 사실 대부분의 규범적 당위는 <반복>, <언어적 인습적 습관>에 의존한다는 것을 충분히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 개념의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사실 가치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가치이든 그 가치를 의욕하는 주관에 있어서는 항상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하느님>이 절대라면, 불교 신자에게는 <부처>가 절대일 것이다. 기독교인과 불교도에게 있어서 <절대>가 다른 것은 의지의 무한성의 문제와 관계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의지의 자유와 독립성을 정당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주관이 어떤 가치를 무한한 의지로써 의욕한다면, 그 사람의 그 가치관을 누구도 간섭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가치의 절대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것이 자기한테 절대적 가치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그것이 절대적 가치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들의 다양성과 갈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들이 갈등을 이루고 있을 때, 이들을 합리적으로 조정 내지는 종합하는 것이 <철학>이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철학과 과학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두 번째 견해에 의하면, 철학은 주관 객관 분열 이전의 진리를 포착하는 데서 성립하고, 과학적 지식은 주관 객관 분열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진리는 절대적이고 과학적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논자는 이런 철학관은 필연적으로 독단주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다양한 철학관이 있음을 알고 있다. 논자는 다양한 철학관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철학적 진리가 무전제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철학이 그 시대의 과학적 성과를 무시해도 된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몇몇 신비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철학의 대가들이 직간접으로 그 시대의 과학적 성과를 자기 철학 체계 속에 융합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리스토텔레스, 데까르트, 파스깔, 칸트, 로크 등이다. 그리고 현대 프랑스 사상가로서는 베르그송, 바쉴라르 등이 있으며, 삐아제 역시 서양 철학의 이러한 지적 전통 위에 서 있다. 우리가 현대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처럼 철학을 과학으로 해소시켜서도 안되지만, 철학이 과학을 무시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없는 하나의 독단적인 잘못일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는 세 번째 논거는 이러하다. 과학은 분석적이고 형식 논리학적 절차에 의해 진행된다면, 철학은 변증법적이고 종합적이다. 그런데 실재 자체는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실재를 번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실질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오직 변증법적 전개 형식을 갖는 사유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일단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 자체는 변증법적 과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실재에 대해서 연구하는 과학들의 전개는 변증법적 이행 규칙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형식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반대로 실재가 변증법적 과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재에 대해서 갖는 우리의 인식은 실재 자체의 변증법에 일치하여 발전되거나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 또한 동등한 가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식의 전개 형식이 실재 자체의 전개 형식과 동일한 형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권리적으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우리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엄밀한 형식 논리학적 동일성과 모순율의 원리가 변증법자들이 자주 생각하듯이 보다 저급한 논리가 아니라, 완성된 성인의 논리이며, 따라서 모든 과학에 고유한 원리라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의 수준에서 진보를 보장하는 것은 형식 논리들 상호간의 새로운 <변증법적 조합>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 논리의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풍부화이다. 즉 동일성의 원리와 부정성의 원리는 그들 자체 인간 정신 활동이라는 전체성의 불가분의 이중성을 구성하지, 일자가 다른 일자를 완전히 포섭하지는 않는다. 즉 모든 결정은 부정이라면, 모든 부정은 결정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학과 철학 사이에 견고한 장벽의 설치를 정당화하는 네 번째 논거는 과학적 법칙들이란 이미 결과로서 주어진 모종의 소여들 사이의 <관계성>, 혹은 그러한 관계성에 대한 <형식적 인습적 번역>일 뿐, 문제의 소여가 주어진 전체성의 계기 또는 그러한 관계 구조 내지는 형식화적 체계들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Comte의 실증주의에 있어서 과학적 인식의 의미에 한정될 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듯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오늘날 그 어떤 과학자들도 자기가 탐구하는 문제가 갖는 인식론적 철학적 전체성의 의미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지나친 자기 합리화이다. 그리고 실로 잘 알려진 철학자들 치고 과학에 문외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 뿐만 아니라 과학을 평가절하하면서 과학과 철학을 차별화하려는 의도는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과학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에 대해서, 언어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논변한다 : <의미>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한 편에서 통시적 관점에서 역사 발생적 차원과 정신 발생적 차원에서의 모든 변이들과, 다른 한 편으로, 공시적 관점에서 수백 개 분야의 과학적 소분과들에서 논의되는 의미의 다양한 변이들을 총망라하여 <의미의 의미의 복잡성>을 제시하는 언어학에서의 건전한 정신들의 협력적 탐구가 일개 철학자의 개인적 <소신적 차원>에서의 <의미의 의미>보다 빈약하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양한 가치들의 합리적 종합으로서의 이러한 삐아제의 철학 이념은 철학 교육의 이념과도 가장 잘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적 인식과 가치적 인식의 이러한 상호 침투의 문제는 달리 말하면, 이론과 실천의 불가분리성의 문제이다. 철학 교육의 이념은 단순히 이론적 가치들만의 습득이 아니라, 그러한 이론적 가치를 현실적 삶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말로는 진리를 보았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행동이 여전히 자기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부조리 자체일 것이다. 철학적 탐구가 진정으로 교육의 이상인 전인 교육과 탈자기중심화를 이룩하려면, 철학은 자기의 토대를 다양한 가치들의 합리적 조정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적 조정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물리학적, 생물학적, 심리-사회(역사)-언어학적, 논리-수학적 차원의 다양한 객관적 인식들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치들의 합리적 종합으로서의 이러한 철학 이념은 오늘날 학적 현실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는 전통적인 철학의 권위를 되찾게 해 줄 것이다. 철학자들 자신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현대의 다양한 과학적 인식들을 최대로 합리적으로 종합하면서, 현실적 삶의 주요 문제들에 구체적이면서 이념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면, 프랑스 철학계에서 철학 교수들의 지위, 즉 교수들의 교수의 지위를 우리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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