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인식론 대 초월론적 인식론*
원 승 룡*전남대
1장. 서 론
1941-1942년 로렌츠(Konrad Lorenz)가 발표한 "현대 생물학의 시각에서 본 칸트의 아프리오리 이론"은 소위 '진화론적 인식론'(약자 EE)의 출범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 후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가 대략 1970년 대부터 폴머(G. Vollmer)와 캠벨(D. T. Campbell)에 의해 EE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되었고, 계속해서 리들(R. Riedl), 카스파르(R. Kaspar), 부케티츠(F. M. Wuketits), 외저(E. Oeser) 등에 의해 인식론과 과학론의 분야에서 새로운 강력한 파라다임으로서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인식, 정확히는 인식 능력과 구조(장치)는 종족사적으로 발생한 진화의 산물이며 따라서 매우 개연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인식론, 특히 칸트를 모델로 삼은 '초월론적(transzendental) 인식론'(약자 TE)과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EE는 비록 로렌츠가 선구자이긴 하지만 그 설립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획기적으로 발달한 생물학(진화론, 발생학, 유전자학)과 생리-심리학 등 여러 자연 과학의 발달, 그리고 자연과학 지향적인 인문-사회 과학과 철학들의 강한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 EE가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상들을 열거해 보면,
① 다윈과 헉슬리의 진화론적 생물학
② 20세기 전반 생물학적 철학
E. 헤켈: 인간 정신의 계통 발생적 상대성
H. 베르그송: 생기론적 진화론
폰 윅스퀼: 유기체와 환경(Umwelt)의 관계
H. 스펜서: 심리학적, 사회학적 진화론
G. 짐멜: 진화론과 인식론의 관계
③ 20세기 후반 생물학적 철학
L. 버탈란피: 유기체의 체계 이론, 범주의 상대성
J. 삐아제: 심리학-발생학적 인식론
H. R. 마투라나: 자기제작적 시스템
④ N. 촘스키: 보편 생성 문법
⑤ K. 포퍼의 과학론
이 중에서도 EE가 특히 과학철학이 발달한 비엔나를 주활동 무대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E는 {객관적 지식}(1972)의 포퍼로부터 과학의 방법과 발전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받았으며 포퍼와 알버트(H. Albert)의 '비판적 합리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에 따라 EE는 오늘날 철학이 인식의 문제에 아직도 관여하고자 한다면 과학적 지식을 초월한 입장에서의 소위 '순수' 인식론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으며 과학의 연구 결과를 용인하거나 적어도 양립할 수 있는 인식론만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EE는 인간의 인식 (장치)의 구조와 발전사에 관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지식의 문제를 둘러싼 과학과 철학의 협동적 연구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식의 문제를 둘러싼 EE의 기본적인 주장과 그것이 전통적인 인식론인 TE와 어떻게 대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EE는 TE의 결점과 한계를 들추어 내면서 EE가 TE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적어도 EE는 '인식'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으며 인식론의 많은 기존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 칸트의 전통 속에서 자라온 많은 독일 철학자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대략 1980년대부터 반격에 나서 EE는 전혀 (철학적) 인식론이 될 수 없다거나, 칸트와는 처음부터 길이 다른, 결점이 많은 인식론이라거나, EE가 자만하지 않는다면 TE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정도라거나, 결국 EE는 TE를 중심축으로 흡수될 수 있는 주변적 이론에 불과하다는 등의 비판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자의 타협과 상호 보완을 모색하는 통합적 입장도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의 과정을 추적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오늘날 (철학적) 인식론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며 이에 대한 조그마한 해답의 실마리라도 얻는다면 이 논문은 만족할 것이다.
2장. 진화론적 인식론의 기초
1 절. 단초 : Konrad Lorenz의 생물학적 칸트 해석
로렌츠가 1941-42년에 발표한 "현대 생물학의 시각에서 본 칸트의 아프리오리 이론"이 EE의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토대'라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거의 이의가 없다. 그 후 로렌츠가 1973년 {거울의 뒷면}(R ckseite des Spiegels)에서 약간 입장을 수정하였다고 하지만 그 근본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렌츠가 위 논문에서 중점으로 다루는 것은 칸트의 아프리오리 개념과 인과성 범주를 중심으로 한 칸트의 범주 개념이지만 전체적으로 그가 의도하는 것은 칸트적 이성 개념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지 비판, 그의 말로 "인간의 이성을 자연적 측면에서 보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명백히 현대 생물학, 특히 다윈 이래의 과학적 진화론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칸트의 당대에는 진화론은 커녕 생물학이란 학문 조차 과학의 형태로는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 칸트에게서도 진화론적 사고의 흔적 내지 싹이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나 칸트에게 이는 결국 '형이상학적 가설'에 불과하고, 소위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물자체의 세계에 대한 언급으로 취급된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정립된 이 시점에서 칸트가 생각지 못했던 인간 이성의 측면을 밝히고 새로운 인식론의 가능성을 타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것이 칸트의 '이성 비판' 작업에 대한 하나의 보충적인 작업인지 아니면 전면적인 전도가 될지는 나중의 문제가 될 것이다.
로렌츠는 현대 생물학적 관점에서 칸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고 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①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뇌와 똑같이 주위 자연 법칙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지
② 선험적, 사고 필연적 지성의 법칙은 인간이 다른 중추 신경 장치나 다른 역사적발생 방식을 가졌더라면 달라졌을 것이 아닌지
③ 우리의 사고 장치의 일반적 법칙성이 외부 실재 세계의 법칙성과 연관된다는 것은 단지 개연적인 것이 아닌지
④ 경험적 현상의 이론과 물자체의 이론은 과연 무관한 것인지
먼저 로렌츠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의 불합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칸트는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기준으로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구분하고 물자체 개념을 정의하고 있는데 이 가능한 경험의 한계란 생물 종에 따라 다른 것이며 유동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가령 인간과 박쥐의 청각적 경험의 한계는 서로 다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적인 우연적인 한계이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보편적인' 인식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일종의 의인주의(Anthropomorphismus)의 함정에서 벗어 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같은 종 내에서도 이 한계는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인식의 발전에 따라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칸트도 로크처럼 물체의 미립자의 구조가 여러 감각적인 성질을 일으키는, 그러나 결코 경험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오늘날 미립자나 보이지 않는 빛을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여러 간접적인 증거에 의해 실재로서 '인식할 수' 있다. 도덕적, 실천적 의미에서 쓰이는 물자체의 개념을 도외시한다면 적어도 자연적 물체의 본체라는 측면에서의 물자체는 그 한계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다. 칸트는 뉴톤의 역학과 우주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과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된 불변적 체계로서 진화는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체계로 본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로렌츠의 물자체 개념은 매우 실재론적이다. 로렌츠의 '물자체'는 원천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기 동일적 실재적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고 인식 장치를 갖춘 어떤 종도 나름대로 그 실재에 대해 접근 가능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주체가 부여(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며 각 인식 주체들은 그 실재와 경험적, 실천적으로 대결하는(auseinandersetzen) 가운데 그 실재에 적응하는 적합한 세계상(Weltbild)을 얻어 낸다. 가령 "말의 발굽이 그것이 대결해야 하는 초원 지역 땅에 맞는 것처럼 우리의 중추신경적 세게상 장치는 인간이 대결해야 하는 풍부한 실재 세계에 적응한다. 다른 기관처럼 그 장치도 영겁의 종족사적인 생성 속에서 실재와 실재의 대결을 통해 종유지적, 합목적적 형식을 얻어낸 것이다." 말의 발굽은 초원 지역 땅에 적합하지 모래땅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그렇게 형성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초원 지역 땅은 말이 대결해야 하는 실재였으며 말은 초원 지역 땅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잘 인지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물의 흐름의 법칙을 물고기처럼 잘 알고 있는 종이 있을까? 그 법칙은 물고기 주체가 부여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인간 주체가 부여한 것일까?
물론 칸트는 자연의 법칙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즉 세계상) 상호 간의 법칙이지 물자체의 법칙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자연 자체의 법칙이란 이념은 포기한 것이며 또는 적어도 우리 안의 실재인 현상과 우리 밖의 실재인 대상 자체의 관계(의 인식)를 포기한 것이다.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가 실재적 관계, 역사적-진화적으로 형성된 관계라는 관점을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칸트는 현상을 지배하는 아프리오리한, 절대적 법칙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실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왜 객관적일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있게 논증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관계는, 즉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는 유비적인 관계일 뿐이지 정확한 일대일 대응의 모사적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각 인식 주체들의 세계상은 실재와 적합하게(ad quat) 대응한다. 여기서 '적합성'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적합성'이 관념적, 이념적 관계가 아니라 실재 세계와의 실천적 대결을 통해 얻어 낸 실재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로렌츠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상은 종족사적으로 획득된 '본유적 노동가설(Arbeitshypothese)'이다.
체계에 노동이 요구될 때 비로서, 그리고 자신의 전 실존적, 종유지적 의미가 놓여 있는 외부세계에 대한 실행이 요구될 때 비로서, 다시말해 준설기의 삽이 땅 속으로 박히고 띠톱의 이빨이 나무 속으로 박힐 때, 혹은 이론의 가설들이 경험적 사실로 정립되어야 할 재료들 속으로 박힐 때 비로서 사태는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충돌하기 시작한다. --- 그러나 이것(원치 않는 잡음)은 체계와 실재 외부 세계의 대결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의 즉자가 우리의 현상계를 들여다 보는 문이며 인식의 길이 진보해 가는 문과 같은 것이다. 아무 저항없는 장치의 윙윙거림이 아닌 바로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세계상은 어떤 경우에는 실재를 정확하게 모사하지 못하지만(특히 미시 세계로 갈수록 그러하다) 적어도 실재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실재와 아무 관계없이 처음부터 그렇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말의 발굽이 초원 땅에 적응한 결과이듯이 우리의 인식과 인식 장치도 물자체의 세계에 적합하게 적응한 결과이다.
로렌츠는 인간의 직관과 사고는 모든 개별적 경험에 앞서서 일정한 기능적 구조를 소유하고 있다는 칸트의 발견은 옳을 뿐 아니라 위대하고 원칙적으로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한다. 로렌츠에게도 우리에게 아프리오리한 인식의 형식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그 아프리오리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인식 형식(혹은 인식 산물)의 아프리오리는 로렌츠에서는 철저하게 인식 장치의 아프리오리로 해석된된다. 그리고 이 아프리오리한 인식 장치는 또한 철저하게 인간 종의 진화의 산물로 간주된다. 칸트는 카메라의 아프리오리한 구조가 카메라가 만들어 내는 그림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할 뿐 그 카메라가 하나의 장치, 도구라는 사실을 소홀히 했다. 오늘날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를 갖지 않았으며 오래 전부터 사진찍는 원시적 장치로부터 발생해 온 것이다. 여기서 로렌츠는 칸트의 아프리오리적인 것이란 사실상 '종족사적인 아포스테리오리'라는 주장을 펴게 된다. 로렌트는 칸트가 더 이상 물을 수 없다고 믿었던 아프리오리한 인식의 출생의 비밀을 추적함으로써 적어도 필연성과 절대성의 요구는 근거없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물론 로렌츠도 나중에 인정했듯이 칸트의 아프리오리 개념은 철저하게 '경험과 독립한', '경험에 앞선'의 의미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인식의 '산물'에 대해서, 그리고 논리적인 의미에서(시간적인 의미가 아닌) 사용될 수 있으며 인식의 발생적 '과정'에 대해서는 적용되자 않는다. 그리고 시-공간의 직관 형식과 사고 범주가 아프리오리라고 말할 때에도 이는 경험과 독립적으로 내재해 있는 형식이라는 의미일 뿐 '발생의 기원'에 관계된 의미는 조금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노코멘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의 아프리오리는 철저하게 '선험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본유적'(angeboren), '생득적'이라는 의미의 '선천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칸트를 넘어 서는 것까지 칸트 해석이라고 볼 때 아프리오리 개념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선천적'에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새롭고도 중요한 칸트 해석일 수 있다. 로렌츠는 칸트가 논리적인 의미에서 사용한 아프리오리의 의미를 고의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오늘날의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롭게 변형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원자물리학, 양자 역학, 파동 이론 등에서 칸트가 생각했던 시-공간 직관 형식, 인과성, 실체와 양의 범주 등은 더 이상 절대적 타당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나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다시말해 '종유지 투쟁의 생물학적-실천적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유지되었고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천사라도 동일한 사고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절대성과 필연성, 보편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그 법칙은 여전히 아프리오리하다. 왜냐하면 종의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어떤 개체도 없으며 그 법칙은 일정한 형식 속에서 우리의 직관과 사고의 성향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직관 형식과 범주는 우리에 있어서 정신이 아니라 정신이 사용하는 기계이며, 선천적 구조를 갖지만 모든 고정적인 것과 같이 한편으로 유지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직되게 만든다.
로렌츠는 특히 인과성 범주 분석에 주안점을 두면서 인과성을 칸트처럼 순수하게 자연외적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에 반대한다. 인과성의 범주는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인식 형식인데 칸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자연 자체와는 무관하며, 절대성과 필연성에 심취하여 그 내재성의 기원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인과성의 범주란 --- 그 생물학적 기능에서 볼 때 조건 반사를 획득하려는 성향이 목표로 하는 자연 법칙을 파악하는 도구다." 즉 인과성 범주는 어떤 고차적인 정신의 작용 체계가 아니라 유기체의 생존 필요성에 의해 조건 반사, 연상, 습관 등 고착화된 지식을 가능케 하는 기본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자연의 생기 현상의 계열 가운데에서 원인과 결과의 짝을 나름대로 연결시킴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자연 현상을 예측한다. 그것은 순수하게 지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도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원인과 결과란 에너지가 불멸의 존재 흐름의 과정에서 취하는 현상 형식들의 무한한 계열들 중에서 나란히 나타나는 항"일 뿐이다. 가령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는 인과적 판단은 우리가 어떤 에너지 계열 흐름의 과정에서 불이 나는 현상과 연기가 나는 현상의 항을 취해 인과적 짝으로 연결시킨 결과이다. 자연의 에너지 흐름 자체의 과정은 사실과학의 탐구 영역이지만 삶과 연관된 모든 인과적 사고는 습관과 전통에 의해 고착된 것이다. 모든 생물 종은 이렇게 종족사적으로 형성된 선천적인 인과 형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자연 법칙을 파악한다. 물론 이 선천적 인과 형식은 자연 자체에서 일어나는 두 사건의 필연적 연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 자체로도 그 어떤 종에서도 절대적, 필연적이지 않다. 모든 인과적 지식은 흄에서와 똑같이 개연적이다. 그렇다고 그 지식이 자연 자체와 전연 무관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어떤 부분을 (개연적으로라도) 반영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자연을 전연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예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며 형성되었더라도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어 버렸을 것이다.
로렌츠에 따르면 어떠한 사고 체계도 완성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절대적 참'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인식, 모든 진리는 아주 일정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방향에서 한 단계 앞으로 진보한 것이다."
2절. 진화론적 인식론의 기본 공리들
앞으로의 논의 전개를 위해서는 여기서 미리 대략적이라도 EE의 기본적인 주장을 개괄해둘 필요가 있다. EE의 대변자들 간에도 주장들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근본적인 주장들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공통된, 그리고 주요한 주장들을 발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EE의 기본 공리들은 이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R. M. 부케티츠에 대체로 따른 것이나 필요에 따라서는 필자가 첨삭하기도 하였다.
1) 모든 유기체는 본유적 소질의 체계를 구비하고 있다. 어떤 유기체도 초기 상태에서 '깨끗한 상태'(tabula rasa)가 아니다.
여기서 본유적 소질의 체계란 실재 세계를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는 선천적 능력이나 장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에는 인식 능력만이 아니라 욕구, 의지, 행위적 능력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능력, 기능적 구조, 체계 등은 생득적으로 구비된 것이면서 종적-발생적으로 제한된 것이다. 가령 촘스키의 문법의 보편적 유형이나 보편 생성 문법은 언어를 습득하는 우리의 선천적 능력을 전제한다. 여기서 언어 자체가 선천적이라기 보다 언어를 구성하고 습득하는 우리 종의 능력이 선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역시 우리 종이 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우리의 장치, 도구일 뿐이다.모든 각 유기체는 종적으로 고유한 본유적 학습 장치를 이미 상속받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로 상속한다.
2) 본유적 소질은 종의 진화의 결과다. 그것은 선택 메카니즘의 산물로서 모든 초기 산물 가운데 삶과 생존의 조건을 가장 잘 수습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고착시킨다.
각 종들의 본유적 소질들은 일정한 '가설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로렌츠의 '노동 가설', 리들의 '이성적 가설의 체계' 등은 종의 본유적 학습 체계가 실재와 대결하는 오랜 종의 진화의 역사 속에서 자연 선택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존에 가장 유리한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자연을 보다 적확하게 재현한다는 목표외에 다른 진리 기준을 갖지 않는 가설들의 체계다. 가설의 체계가 형성되는 선택 메카니즘은 철저하게 다윈의 자연선택의 메카니즘을 따르고 있다. 종이 학습, 보존, 유전시키는 가설들의 체계는 외부세계에 대한 적응, 생존적합성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말하자면 종의 어떠한 내적 요인으로부터도, 그리고 어떤 필연적 원리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다.
3) 類人(subhuman) 세계에서의 모든 심리적 현상이나 인간적 체계에 적합한 인식 능력은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에 기초하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심리적, 정신적 현상의 전제 조건이다.
모든 생물종은 자기 유기체 안의 정보처리 메카니즘을 발달시켜 가면서 주위 황경을 보다 잘 재현함으로써 더 좋은 생존의 기회를 얻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의 삶 자체가 인식 획득의 과정이고 학습의 과정이다. 종의 진화는 일반적으로 끊임없이 기능을 분화시키거나 복잡성을 증가시켜 가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리들은 이 과정을 '학습의 알고리즘'이라 하여 선세포적, 구조적, 본능적, 연상적, 의사 이성적, 이성적, 문화적 단계등 상세하게 나누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생물학적 정보 처리 메카니즘의 진화에서 심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출현한다(emergent)는 것이다.
유기체적 수준→ 심리적 수준→ 정신적 수준
정신 현상이나 능력(그 핵심은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은 인간 종에게만 나타나고 류인적 종에서는 심리적 현상, 그리고 그 이하에서는 유기체적 현상만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심리적 수준의 현상은 유기체적 수준에서 볼 때는 전혀 새로운 질서이고, 정신적 수준의 현상은 마찬가지로 심리적 수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새로운 질서와 상태는 단순히 직선적,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갑자기 '섬광적 출현'(Fulguration)의 형태로 현현한다. 특히 이성(ratio)의 출현은 모든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일컬어 지는데 이는 이 사건이 우연적, 돌발적이라는 것, 그리고 진화는 학습 목표가 미리 주어져 있는 발견적 과정이 아니라 무한히 열려진 학습 과정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유기체의 정보처리 메카니즘이 분화 발전한다고 해서 모든 유기체가 심리적, 정신적 능력을 필연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출현한다'는 것은 미리 어떤 형태가 갖추어 져 있다가 때가 되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윈의 진화론이 언제나 강조하듯이 진화는 '어떤' 종에서 '우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중요한 것은 어떠한 종의 어떠한 인식 능력도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을 넘어설 수 없으며 거기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 종에만 나타나는 정신적 현상은 특정한 뇌의 활동에 의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정신 현상은 뇌의 활동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 정신 현상은 뇌의 진화로부터 출현한 것이며 그 구조와 기능을 초월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4) 자연주의자는 객관성의 공리, 즉 자연은 객관적이고 관찰 주관에 앞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공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EE가 철학적 인식론으로서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서 보통 '가설적 실재론'(hypothetischer Realismus)의 입장으로 불리고 있다. 이미 로렌츠의 칸트 비판에서 그 특성이 잘 드러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주관적 사고 질서는 자연 자체의 질서로부터 출현, 발생한 것이며 자연적 질서는 주관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지성은 자연에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대결 속에서 비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 실재의 어떤 부분이 지각 장치 안에 재현되는데 같은 종에는 같은 지각 장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종 간에는 서로 다른 세계상이 재현된다는 것 등이다. 재현, 대응, 일치 등을 말하는 점에서 EE는 명백히 '자연주의'이고 '실재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이것이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이기 때문에 EE는 '소박한' 실재론과는 다른 것이다.
5) EE는 인식 활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학제간 연구이다.
다음에 예로 드는 여러 개별 과학들은 생물 종, 특히 인간 종의 인식 장치에 선천적인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과학적 탐구의 분야들이다. EE는 이들 연구의 결과를 수용하여 전체적으로 인식 현상을 설명하는 철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생물학적-심리학적 연구가 가장 기초적이라고 할 수 있다.
3장. 진화론적 인식론 대 초월론적 인식론
1절. Vollmer의 신코페르니쿠스적 전회
1. 칸트와 전통적 인식론 비판
폴머는 1984년의 "칸트와 진화론적 인식론"이라는 논문에서 주로 칸트를 목표로 하여 전통적 인식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1) 인식론적 탐구의 영역이 너무 좁다.
전통적 인식론은 적어도 인간 종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인식 이론을 제공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내용적으로는 단지 정상적, 성인적, 교육받은 유럽인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다른 종의 인식 현상은 고사하고 인간 종 내에서도 완성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인식 만을 고려하는 편협함을 드러 내고 있다. 이것은 인간 인식 능력도 저차원적 인식 능력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성장해 온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인간 종족 내에서도 상이한 특질을 소유한 다양한 인지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개체에 있어서도 생물학적 선천적 기능과 성장 배경의 차이에 따라 인지 체계가 서로 다르게 발달할 수 있다는 사실들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는 저차원적 동물이나 비정상인의 인지 상태를 연구함으로써 '우리' 인식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종적-역사적으로 제한된 보편성임을 알게 된다.
2) 우리 범주의 기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폴머가 전적으로 칸트를 겨냥하여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칸트는 아프리오리한 개념(범주)의 기원(발생)의 문제를 문제로서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거론되는 곳은 별로 없는데 단지 몇 군데에서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순수 이성 비판} B 166-7에서 칸트는 개념이 경험을 가능케 한다는 제 2의 길의 입장에 서서 특히 제 3의 길(순수 이성의 전성설 체계)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는 본유관념론을 둘러싼 근세의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데까르뜨와 로크의 중간 길을 가고 있다. 즉 선험적 개념들은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획득된(erworben)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데까르뜨를 넘어서고, 그 획득은 경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urspr nglich) 획득', 즉 내적인 인식력의 활동 자체로부터 비로서 획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로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표상(관념) 자체는 본유적이지 않지만 그를 형성하는 주관의 능력은 본유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보인다. '본유적 정신의 법칙'이니 '인간 심성의 기능 형식들'이니 하는 것들은 위의 인용에서의 제 3의길, 즉 어떤 창조주에 의해 처음부터 심어진(eingepflanzt) 소질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거부하는 차원에서 얘기되고 있으나 사실 라이프니츠가 '선천적 능력이 경험이 발생할 때 일깨워 진다.'고 말할 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칸트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가설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러한 본유적(선천적) 능력의 기원의 문제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라는 것과, 그 '심어진 소질'로서는 자연 법칙과의 필연적 일치를 결코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도 인식을 구성하는 주관적 질서가 어떻게 객관적 실재와 필연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역시 보증할 수 없다. 기껏해야 경험과 내재적 정신의 법칙과의 일치인데 이것은 순환 논증 구조 속의 일치일 뿐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게에서 인식의 참된 객관적 구성요소인 자연 자체는 들어설 공간이 없다. 또한 '객관성'을 '상호주관성'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에도 칸트는 어떻게 적어도 인간 종에서 상호주관적 이해가 가능한지를 근거짓기가 어렵다. 주 31)에 인용된 몇몇 칸트의 저작에서 나타난 것처럼 칸트는 선험적 표상은 획득되는 것이면서도 그를 획득하는 능력은 본유적이라는 애매한 입장에 서 있다. 소위 '순수이성의 후성설'(Epigenesis)이란 결국 '본유적 획득'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 '본유성'도 그 '획득성'도 칸트는 더 이상 근거지울 수 없으며 근거지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EE는 칸트가 버린 그 제 3의 길을 다시 부활시킨다. 물론 더 이상 형이상학적 가설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을 증거로 하여 우리에게 본유적으로 '심어진' 소질이 있으며 그것이 모든 개체의 개별적 경험을 가능케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심어진 소질이란 진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한구조이며 그것이 유전 정보 안으로 구축되어 상속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EE가 비로서 본유성과 획득성의 결합인 '근원적 획득'의 비밀을 설명하게 된 것일 뿐 '근원적 획득'의 발견은 칸트에게서 이미 이루어 진 것이다. 다만 그 근원적으로 획득된 주관적 구조는 더 이상 절대적,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귀결이 중요할 뿐이다.
3) 범주는 완전한 것이 아니며 과학적 이론의 분석을 통해서도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폴머는 칸트의 범주표가 구조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서로 대등관계적이지도, 순수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칸트는 범주를 실제적인 경험 판단에서 추상해(heraussuchen) 내는 경험적 발견법을 사용하면서도 이를 논리적-필연적인 증명, 연역(Deduktion)인 것처럼 말한다. 소위 '순수 지성의 원리'는 원리라기 보다 정의이거나 설명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지성의 활동이 판단을 구성하는 활동으로 소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모두가 그 틀에 맞추어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 언제까지라도 그 틀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다. 현대 과학 이론들은 오히려 이 틀에 맞지 않는 판단 양식들을 보여 주고 있다.
4) 완전한 지식, 필연적 진리, 궁극적 정당화는 가상이다.
폴머는 극단적으로 완전한 지식도, '순수' 오성도, 종합적 선험성도, 초월론적 자아도, 규범의 최후 정초도, 추상적 인식론도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지식은 가설적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한, 필연적 지식은 거부된다. 특히 '필연성'(Notwendigkeit)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반드시 갖추어 져 있는', '필수적'이라는 의미와 필연적 '타당성'이라는 의미가 혼합되어 있는데 칸트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식의 성립을 위해서 어떤 필수적인 구성 요소가 요구된다고 하여 그 인식이 필연적으로 '타당한' 인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당성'도 인간의 종적 구조와 기능에 제한된 타당성이 있을 뿐 인식 자체의 절대적 타당성도, 그 타당성을 궁극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근거도 없다. 우리는 '참된 신념'과 그것을 상대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2. 진화론적 인식론의 귀결
다음에서는 주로 폴머에 의거해서 EE의 중요한 포인트를 요약, 정리해 보고자 한다.
1-1) 인식이란 '적합한 재구성'이다.
폴머는 '인식'의 개념을 순환없이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 일종의 '탐구 가설적 정의'를 제안한다.
인식이란 외부 구조를 주체 안에서 적합하게 재구성하고 정체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폴머는 인식을 현실(실재) 인식에 제한시킨다. 말하자면 수학적, 논리적 인식 같은 것은 제외하고 외부 실재하는 대상에 관계하는 인식만 볼 때, 인식 과정이란 주체가 외부 세계의 내적 모상을 만들어 이를 축적된 인상과 비교하고 재구성된 대상이 얼마나 기지의 것과 일치하는 지를 판단하여 정체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재구성의 '적합성'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외부 대상과의 구조적 동형성(Isomorphie) 때문이다. 물론 이 동형성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재구성은 가설적일 뿐이다.
1-2) 인식이란 더 넓은 의미에서 외부 세계에 적응한 결과이다.
여기서 '적응'(Passung)의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생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과정으로 좁게 본, 위에서 말한 '재구성'도 '적응' 안으로 포섭될 수 있다. 말하자면 정확치 않은 재구성도 있을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나 그것이 인식인 한 그것은 '생존 적합적'이다. 재구성된 가설이 삶의 과정에서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올 때 그것은 잘못된 가설이 되며 진화 과정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적 성공이 진리와 객관성의 보증 수표는 아니다. '진리'가 객관적 실재와의 완전한 일치라고 한다면 진화적으로 성공한 인지와 인지 체계도 결코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성공한 가설'일 뿐이다.
2) 우리의 본유적 인식 구조는 지각과 경험적 인식에 대해서 구성적이지 이론적(과학적) 인식에 대해서는 구성적이지 않다.
폴머는 우리의 인식을 지각적, 경험적, 이론적(과학적) 인식으로 등급을 나누는데 여기서 EE의 설명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세계로 부터의 인식인 지각적, 경험적 인식에 제한된다. 모든 종의 인식은 그 종을 둘러 싸고 있는, 삶에서 직접 부딪치는 환경(Umwelt)에 대한 것이다. 각 종은 그 종에 고유한 환경에 따른 고유한 인식 능력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어느 인식도 이상적이고 완전한 것은 없다. 우리 인간의 인식도 신도 동물도 아닌 중간우주적(mesokosmisch) 존재로서 중간적 차원의 세계에 적합한 것일 뿐이다. 이론적(과학적) 인식은 생물학적 삶과는 독립적으로 인공적 경험과 수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한 인식이므로 진화론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3)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폴머는 EE야말로 '참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룩한 인식론으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칸트는 인간을 '자연의 법칙 부여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사고 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수행했다고 보나 EE에 있어서는 차라리 칸트는 '반코페르니쿠스적 반혁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축출했던 인간을 다시 인식론적으로 세계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사고 방식의 전회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고 그 점에서 '혁명적'이지만 '인간 중심주의'를 고수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이제 EE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끌어 내려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한 작은 관찰자로 만든다. 이것은 근세 이후 인식론이 걸어온 길의 반대, 주관의 '탈중심화', 세계상의 '탈의인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2절. 반론들
어떻게 보면 EE를 주장하고 옹호한 학자들보다 EE를 비판한 학자들이 더 많아 보인다. 이들 반론의 관점도 매우 다양한데 어쨌든 이들에게 EE가 매우 낯설고 파격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에는 EE를 '악마의 속임수', '정신에 반대하는 죄악', '악의 권력의 지시'니, 또는 '교화할 수 없는 경험론자'니 하여 비판이라기 보다 비난에 가까운 혹평을 퍼부은 이들에서부터, EE가 근본적으로 철학적 인식론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보는 Baumgartner, Stegm ller, K chler, L w 등이 있고, TE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정도로 인정해 주는 Eve-Marie Engels와 김진, 그리고 TE와 모순적, 경쟁적 관계에 있다고 보는 Holzhey 등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이들 반론들을 모두 고려하기도 어렵고 그들의 완전한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지만 몇 가지 큰 범주에서 이들 반론의 요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칸트 해석의 문제
많은 반론가들은 EE가 칸트 철학을 상당 부분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EE의 진영 속의 한 사람인 카스파르도 로렌츠를 비롯한 EE가 칸트의 아프리오리 이론과 TE 철학의 본성을 오해했다고 본다. TE는 본래 경험적 요소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인식 행위의 본질과 본질 구조를 논리적 명증성과 정합성에 따라 해명하려 할 뿐이기 때문에 칸트의 이론을, 특히 '아프리오리적인 것'에 관한 이론을 경험과학적으로 검사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프리오리'는 일상 언어에서는 '개체에 대해 본유적인' 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칸트의 것은 처음부터 EE의 분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E는 인식 행위 능력의 발생을 자연과학을 근거로 해명하려 하려는 이론외에 아무 것도 아닌데 오해는 인식 행위 능력의 '산물'까지도 생물학적-진화론적으로 정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엥겔스도 유사하게 칸트의 아프리오리는 처음부터 자연적 발생(진화)도 형이상학적 발생(창조주)도 완전히 배제하고 있으며 칸트의 관심은 인식 가능성의 조건 자체와 학적 인식의 정당화의 문제에만 있기 때문에 EE가 설령 칸트가 남겨 놓은 문제를 해결하는 설명적 힘이 있더라도 이것은 칸트 철학의 의도된 문제가 아니므로 EE와 TE가 양자택일해야 하는 경쟁적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며 굳이 말한다면 '작업의 분업'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TE가 우리 판단의 '진리 차별성'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모든 경험 판단 각각에 대한 보증을 해주고 오류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은 아니다. 칸트의 인식론이 사실상 참된 경험적 인식에서 출발했든 아니든 칸트는 타당한 경험 판단의 '내적 구성의 원리'를 밝혀 보려는 것이지 타당하고 완전한 경험적 인식의 존재를 입증해 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인식과 실재 개념의 문제
엥겔스는 EE가 인식 개념을 너무 넓게 잡아 인식의 고유한 의미를 잃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즉 '적합성'의 의미를 곧바로 '생존 적합성'으로 해석하여 거짓 인식으로도 생존 기여적이기만 하면 인식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EE는 실재와의 일치라는 의미에서의 적합성은 보증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EE는 '실재'를 물리학적 실재, 과학적 실재에 국한시킴으로써 생물체가 대결하는 환경으로서의 실재와 구분하는 모순을 일으키며 실재와의 일치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식과 실재의 일치가 아니라 생존 기여라는 순수 기능적 측면을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엥겔스는 EE가 물리학적 이론이 객관적 타당성의 최후, 유일한 재판정이라는 관점을 포기하고 중간 우주적 인식의 객관성만을 유지하도록 '수리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중간우주적 인식의 객관성도 종의 생존 여부와는 독립적으로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의미의 생존은 객관성의 기준으로 되기에는 너무 '엉성하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빠아제, 윅스퀼, 짐멜처럼 '구성주의적 객관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존재와 사유의 '적합성'은 단순한 '일치'로 볼 것이 아니라 주관의 실천(노동, 행위)을 통해 매개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 환경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지, 단지 살아 남도록 환경 세계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구성하는 행위의 성공 여부는 생존이냐 사멸이냐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그저 살아 남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은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따라 측정된다. 엥겔스는 '인식'을 인식답게 만드는 인식 주관의 규범적 -구성적 행위의 결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설령 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전제가 없다해도 '인식'과 '진리'에 대한 객관적 정의가 충분히 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주관의 규범-구성적 행위로부터 가능하지 생물학적 삶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에 대해 엄밀한 '인식론적' 관점에서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뢰프에서 더 잘 나타난다. 뢰프는 모든 인식은 '주체에 대한' 것이며 주체를 통해서만 인식일 수 있다고 한다. 인식은 주체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부여된 것이지 단지 재현된 것은 아니다.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세계상 장치(가령, 사진기)는 스스로를 보지는 못한다. 즉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사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이란 단순한 '봄'이 아니라 본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이념의 파악 과정이며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자기 반성적 과정'이다. 또한 뢰프는 EE의 가설적 실재론이 자연주의적 인식론의 변종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설적'이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과학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깔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진정 회의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독단적인 소박 실재론과 별로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EE는 어느 것이 '더 참된', '더 객관적인' 인식인지를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이 오직 의사 이성적 장치라는 안경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면 '참된' 현실에 관한 모든 언표도 동시에 안경을 통한 것이며 다른 것보다 '더 참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E는 칸트 인식론을 인간 중심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실재와 실재 인식의 판별 기준이 애매한 한 EE도 '인간적' 인식을 넘어서 나아갈 수는 없다.
3. 발생과 타당성의 문제
위 '칸트 해석의 문제' 단락에서 약간 암시되었지만 좀 더 일반화시켜 볼 때 EE의 비판가들은 EE가 인식의 '사실의 문제'(quid-facti, 발견의 맥락)와 '권리의 문제'(quid-juris, 정당화의 맥락)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혼동한다'는 것은 두 개의 맥락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구분한다 하더라도 사실적인 '설명'으로써 타당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의미한다. 엥겔스는 이것이 사실에서 규범을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의 일종인 '발생적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사실적인 설명'도 인식론의 문제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중심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인식론의 중심 문제는 '타당성의 문제'다. EE는 타당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만 엥겔스가 볼 때 EE는 '타당성'을 '설명하는' 것일 뿐 진정 '인식의 정당화'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인식 장치의 종적-계통적 발생 과정에 대한 설명은 인식 구조의 발생을 이해하는 하나의 필요 조건일 수 잇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다. 말하자면 인식의 '발생'을 설명할 때에도 생물학적-진화론적 발생의 측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실현 조건'이 요구된다. 이 말에서 엥겔스는 인식을 (타당한) 인식으로서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일정한 규범적 조건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식론은 그저 인식의 발전사가 아니라 '타당한' 인식의 조건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 '타당성'은 어떤 과학적 인식을 증거로 설명될 수는 없으며 모든 형태의 인식, 인식 일반에 대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규범적 조건'으로 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4. 인식론의 본성의 문제
반론가들의 EE의 본질에 대한 평가도 다양한데 크게 보아 EE는 엄밀한 철학적 인식론으로 볼 수 없다는 부류와 일정 부분 EE의 역할을 인정하는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의 부류에는 다시 EE가 '인식의 생물학'으로서 자연과학적 학과이지 철학적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Dretschke)에서부터, 철학적 이론이라 해도 인식론의 본래의 문제, 즉 인식의 본질, 진리, 타당성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기껏해야 '철학적 기획'(L w)의 성격을 갖는다는 입장 등이 있다.
우선 바움가르트너는 '이성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일'의 필연적인 자기 한계를 지적한다. EE는 이성의 자연사적 발생과 기능이라는 이성의 한 측면을 설명할 뿐 이성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어떤 이론도 이성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으로서의 이성은 설명될 수 있지만 그렇게 설명하는 이성 자체는 이미 '자연'이 아니며 자연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성은 그 자체로서 변이와 선택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성 자체는 그 개념의 종류에 따라 그때그때 스스로로부터 그 진화의 해석 모델이 제시되는 그러한 것이다. --- 따라서 EE는 자신이 맞서려고 하는 이성의 내적 통찰, 이성의 철학, 철학적 반성에 의존한다. 그것 역시 이성 개념의 도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이성을 설명할 수 없다. --- 이성은 사실상 정대적이고 소급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의 진리 내용이 문제가 되며 이 문제는 자신의 토대 위에서만 ,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해결될 수 있다. --- EE가 이미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경험적 이론으로서의 --- 그 자명성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E가 논의되어야 할 곳은 이성의 철학이다. .EE가 함께 언급되는 것은 이성의 역사도, 가능한 역사도 아니며 이성 개념 자체의 적합성이다.
바움가르트너의 비판은 매우 근본적(radikal)이다. 그는 메타이론으로서의 철학적 논의의 차원을 분명히 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 독일적인 배경에 서 있다. 그가 볼 때 EE는 '이성의 철학'이 아닌 '이성의 과학'을 하고 있다. 이것도 이미 '어떤' 이성 개념의 (규범적) 해석을 전제로 가능한 것인데 EE가 이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가령 인식의 '고차성'의 문제에서 우리의 이론은 인식의 높고 낮음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동물과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질적으로 높은 것'을 인식한다고 할 수 없다. 보다 나은 일치니 적응이니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 기획한 이론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뢰프에 따르면 EE 자체는 자연과학적-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며, 그렇다고 철학적 '이론'도 아니고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고 말한다. EE가 인지 과정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인식의 근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한 그것은 '철학적'이지만 그 해결을 철학적-메타이론적-반성적 규범의 발견에서가 아니라 다시 자연과학적 성과들에 의존하는 한 철학적 '이론'은 아니다. EE는 자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식의 규범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사실상 그것을 거부한다). EE는 인식의 보편적 규범적 정초를 거부하면서도 스스로 다시 규범적인 진리성 요구를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요컨대 진리성, 객관성, 타당성의 문제는 규범적 해석의 '철학적' 문제이지 자연과학적-사실적으로 근거지워 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EE는 철학과 진화론의 정초 관계, 다시말해 철학적 인식 규범 이론과 과학적 진화론 사이에서 누가 누구를 정초하느냐의 문제에서 완전히 역전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EE는 자신이 거부하고 있는 규범화된 진리, 이성, 정당성 개념등에 대해 이미 일정한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권유하는 하나의 철학적 기획일 뿐이지 보다 우수한 인식론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엥겔스와 카스파르는 EE가 하나의 인식론으로서 성립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전통적 규범적 인식론과는 다른 문제 설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EE와 TE가 모순적 대립적 관게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EE가 마치 옛 TE의 많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자만만 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카스파르는 EE는 (철학적) 인식론이 아니라 사실적 인식(인간적 인식을 포함한)의 이론일 뿐이며, 엥겔스는 EE가 다루는 인식은 과학적 '인식'이라기 보다 중간우주적 차원의 경험적 '정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한다. 이 말은 결국 EE는 엄밀한 의미의 철학적 인식론은 아니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이들은 앞의 비판가들보다는 온건한 입장에 서 있는 듯하나 궁극적으로는 EE의 철학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3절. 폴머의 변론
폴머는 1987년 글에서 그때까지 나온 EE에 대한 비판을 정리하고 이를 재반론하는 형태로 EE의 주장을 변호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반론들을 4가지로 정리하였던 바 폴머의 반론도 대체로 이 범주에 따라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EE의 인식 개념이 너무 넓다는 비판에 대해 폴머는 EE의 인식 개념은 단순히 정보 개념으로 대치될 수는 없다고 본다. '정보'란 모든 살아있는 진화하는 유기체에 적용되지만 '인식'이란 일정한 인지체계(kognitive Systeme)를 갖춘 유기체, 적어도 중추 신경 체계를 갖춘 유기체에만 적용된다. 이러한 인지 체계는 적어도 외부 세계를 투사, 해석, 재구성, 정체 확인 등의 인식 과정을 처리할 수 있는 체계를 일컫는다. 또한 폴머는 '생존 적합성'이 실재와의 일치성, 객관성과 동치일 수 없다는 엥겔스의 비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EE가 인식 개념을 생존의 성공 여부와 일치시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E는 '재구성'이란 말 속에서 이미 주관적 인식 구조가 세계의 객관적 구조와 구조적으로 (부분적으로라도)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어떤 '적합성'도 궁극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으며 모든 현실 인식은 가설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로의 투사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참-거짓의 여부가 판단되는데 참인(적합하게 재구성된) 지식도 절대적, 필연적으로 '근거지워진' 지식은 아니다. EE의 비판가들은 EE의 인식 개념이 너무 넓고 상대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도대체 '인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저 암시적일 뿐 명확한 정의도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
위 인식 개념의 문제는 바로 EE가 발생과 타당성의 문제를 혼동한다는 비판의 문제에도 연결된다. 폴머는 EE가 타당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에 대해 그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타당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 '타당성'이란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다. '적확성'(Lotze)이든, '논증적 치환 가능성'(Puntel)이든, '동의 능력'(Gethmann)이든 뚜렷한 기준 하에서 '타당성'이 논의되어야 하며, '타당성의 문제'라는 것도 가령 "어떤 조건 하에서 하나의 언표(사실 주장이든, 규범이든, 논증이든)가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지?"라는 형식으로 분명히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폴머는 한 언표가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필요 조건은 많다고 말한다. 가령 구문론적 정확성, 논리적 정합성, 의미론적 일관성, 상호주관적으로 이해 가능하고 검증 가능함, 다른 언표와 모순없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타당성 조건이란 제한적으로만(가설적, 상대적으로) 가능할 뿐(즉 자신의 타당성을 위해 다른 타당한 언표를 전제하는), 무제한적(정언적, 절대적)으로 타당한 언표란 없다. 어떤 철학도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처럼 그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지식은 오직 참된 신념일 뿐 절대적으로, 궁극적으로 정초된 신념은 없다. 따라서 어떤 참된 신념도 다른 참된 신념보다 더 객관적으로 더 참일 수 없고 주관적으로 더 확실할 수 없다. 어떤 학문도 규범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결국 '타당성의 문제'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며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물음이다. EE가 다루는 물음은 사실적 물음과 상대적 정당화의 물음 뿐이다. EE가 타당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이 옳다면 다른 어떤 철학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폴머가 인식의 '규범'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규범이란 인식을 설명하는 모델이며 파라다임일 뿐이다. 우리는 더 설득력이 있는 규범을 선택할 뿐이며 그 선택의 근거가 있을 뿐이다. EE는 발생과 타당성의 문제를 혼동하지 않는다. 즉 종의 유지라는 사실에서 종의 세계상의 정당성을 도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경험적 지식과 관련해서 타당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경험적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사실적 언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릴 뿐 아니라 타당성을 설명하는 어떤 규범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가릴 수 있다. 폴머는 경험적 사실을 통해서 왜 소박한 실재론도, 극단적 경험주의도, 극단적 합리주의도 잘못된 인식론적 파라다임인지 밝혀 질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인식의 규범을 다루는 인식론이 경험적 지식을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면(왜냐하면 그렇게 돼면 순환 구조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철학적 인식론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없을 것이다. 폴머도 경험적 지식의 이론과 메타이론적 반성 작업이 다른 작업임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왜 깨끗하게 구분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사실적 인식을 설명하지 못하는 인식론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식론의 역할은 단지 자기 인식에 대해 반성하는 것 뿐인가? 그 자기반성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인식의 '확실한 가짐'?, 소크라테스적인 무지의 깨달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정신의 위대함의 깨달음일까?
많은 반론가들이나 몇몇 EE의 옹호자들 조차 EE는 칸트적인 의미의 순수 인식론과는 전혀 공유된 영역이 없으며 따라서 EE가 순수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그러나 폴머는 EE가 모든 인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거나 해결했다고 주장한 적은 없으며 지금까지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① 주관적 인식 구조는 어디서 나오는가
② 왜 모든 인간에서 이것이 같은가
③ 왜 주관적 구조는 객관적 구조에 적합하고 부분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가
④ 인간 인식은 왜 이상적이 아닌가
⑤ 인간 인식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⑥ 객관적 인식은 가능한가
⑦ 인간 인식에 한계가 있는가
⑧ 세계에 대한 선천적 인식이 있는가
4장. 결 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볼 때 EE와 TE의 공통분모는 거의 없다고 보인다. EE가 칸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로렌츠)에서 출발하였고 여전히 전통적인 인식론의 문제들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EE를 어떤 점에서든 '칸트적인 구상의 한 단면'으로 보는 것은 역시 '칸트 편들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평행선을 달리는 이 두 이론이 어떻게 '상호비판을 통해 보완될 수 있는지' 지금까지는 알 수 없다. 다음에서 우리는 위 논쟁 과정을 통해 드러난 인식론의 주요 문제점들을 되짚어 보고 반성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치하고자 한다. 이것은 EE든 TE든 공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아프리오리'가 인식의 산물로서 '선험적' 판단에 적용될 때와 인식의 형식적 장치로서 '선험적' 직관 형식과 범주에 적용될 때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인식의 '산물'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비경험적 과정으로부터 산출된다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인식의 산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을 산출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선험적'은 '경험에 앞서, 경험과 독립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어떤 것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든 있는 어떤 구조(장치)에 대한 것이다. 칸트는 '아프리오리'에서 발생의 의미를 삭제해 버렸지만 다시 이 둘을 혼동해서 '선험적' 인식 장치(구조) 때문에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추론을 했다고 보인다. 인식의 '선험성-후험성'은 인식 장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 장치는 선험적 인식을 낳든, 후험적 인식을 낳든 '선천적'이다.
2) '인식'을 정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마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문제 설정이 상기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정의한다는 것은 앎의 종류를 열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앎 그자체의 보편적 본질을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도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 세 가지의 단점을 비판하기만 하지 정작 자신의 이상적인 정의는 결코 주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칸트도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정작 어디서도 '인식'이 무엇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식의 가능 근거'에 대한 물음이란 것도 마치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적-경험적 지식을 언급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소위 '순수' 인식론이란 분명 인식의 이상적 모델을 간직하고 추구하는 '관념론적' 태도 위에 서 있다.
3) 우리가 흔히 인식론에서 '인식을 정초한다(begr nden)'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근본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단 지식에 대해 '근거를 준다', '정당화한다'는 뜻일 것이다. 근세 이후 철학적 인식론은 더 이상 '참된 인식'(episteme)의 추구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그 가능 근거의 해명에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분명 흄에 반대하여 (어떤) 지식의 보편타당성을 보여 주려고 했다. 엥겔스가 말하듯 칸트는 단지 지식의 '내적 구성 원리'만 보여 줄 뿐 지식의 현실적 진리 기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칸트의 '선험적 종합 판단'은 참된 인식, 보편타당한 지식의 표본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관의 선천적 '내적 구성 원리'란 '초월론적 자아'와 함께 바로 그 판단의 보편 타당성을 근거 지우는 궁극적 가능 근거였다. 그러한 '정신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직관적으로 자명한 필연적-내적 원리를 EE는 종의 진화에서 출현한 '노동 가설'로 대치한다. '노동 가설'의 타당성은 현실적인 실재 적응성에서 부분적으로 정초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적 구성 원리'란 것도 정신적(자발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진화한 뇌의 정보 처리 메카니즘일 뿐이다. 물론 인식의 '정초'가 인식의 '타당성'의 정초가 아니라 인식과 인식 주체의 '관계'의 정초로 볼 수 있다. 가령 현실 - 인식 - 주체의 관계 자체가 아프리오리하고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아프리오리하고 절대적인 지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지식의 (절대적) 타당성에 동의하지 않고도 그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칸트는 전체적으로 볼 때 '정초'의 이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후자의 의미만 받아들인다 해도 EE에서는 절대적-필연적 정초의 가능 근거인 '초월론적 주관성' 같은 것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초월론적 정초', '최후 정초'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4) 진화론을 아직도 '가설'이요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자가 보기에 어떤 종교가들과 그 종교를 뒤에 감추고 있는 몇몇 철학자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세계 생명의 인과적 사슬들'을 아무리 보여 주어도 아직은 부족한 것이며 진화론은 여전히 '경험적 가설'일 뿐이다. 물론 진화론은 반박될 수 있는 가설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모든 과학 이론(철학 이론도 포함하여)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폴머는 위와 같은 점을 누차 강조하면서 EE도 하나의 철학 이론으로서 검증될 수 있고 검증받아야 하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비판가들은 EE가 철학 이론이 아니라거나, 자연과학적 이론도 아닌 철학적 기획(이데올로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EE도 메타 이론적인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단지 EE는 사실적 지식의 변화에 따라 이제 메타 이론적 인식의 규범도 재고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 뿐이다. 그것은 종의 (인지적) 진화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식론적 주장들을 '상대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할 뿐이다. EE의 인식론적 요구들은 물론 일종의 '기획'이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스스로 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거룩하고 절대적인 철학적 '이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폴머는 EE가 최후 정초될 수 있다고 조금도 주장한 바가 없다. 그런데 '진화론이라는 경험적 가설에 대한 최후 정초성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니 '최후 정초'니 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자에게나 위협이 될 뿐이다.
6) EE는 진화론과 여러 행동 과학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본질적으로는 인간 종의 인지 구조를 설명하려는 하나의 인식 이론이다. 그것이 과학적 이론이든, 철학적 이론이든 중요한 것은 모든 개체의 모든 특성과 행동 양식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어떤 특정 문화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다는 것이다. EE가 일반적으로 선천적-종적-유전적 소질을 강조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후천적-환경적-문화적-우발적 요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EE의 이론이 경직된 '결정론'을 깔고 있다고 보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천성과 후천성, 자유주의와 결정론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실제로는 매우 애매한 문제이다. 뇌가 세계상을 체제화하고 적응하는 양식은 유전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자유롭다'.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것 자체가 '열려진' 주관적 구조를 전제한다. 언제나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진화'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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