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데이빗슨, 화이트헤드 인과론에 관한 小考
안 형 관*·박 정 희**
<한글요약>
모든 사건이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성은 사건의 모든 영역에 인과율이 적용되며 원인 없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과 관계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는 단지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필연성이나 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인과 관계가 있는 경우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인과 법칙이 존재한다면, 인과 관계를 말할 때 인과 관계에서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흄과 데이빗슨,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각각의 인과론을 논하면서 그 차이점에 대하여 비교하려고 한다. 먼저 흄은 인과 관계에서 필연성이 필수 요소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결과의 관념을 원인의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 필연성은 관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그의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는데 그의 인과 관계는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어느 것으로도 기술될 수 있는 개별 사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개별적 사건들 간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서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과 관계를 설명하며, 흄이 해명하지 못한 인과 관계의 필연성과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은 심리무법칙성을 주장하는 데이빗슨의 인과론을 수용한다.
1. 머리말
우리 일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 무엇인가의 결과이면서 또한 그 무엇인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성은 사건의 모든 영역에 인과율이 예외없이 적용되며 모든 사건이 원인없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과 관계에 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들은 단지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가 인과관계를 통하여 일상사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예측가능하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반드시 어떤 필연성이나 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인과 관계의 법칙적 특성에 관한 수 많은 입장들이 제시되었고, 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있어 왔지만, 이 논문에서는 인과관계의 본성이나 인과의 법칙성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을 나열하거나, 그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을 검토하는데 목적을 두지는 않고 인과 관계에 있어서의 법칙의 특성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흄의 인과이론과 정신에 관한 법칙, 즉 심리 무법칙성을 주장하는 데이빗슨의 인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인과에 대해 그 차이점을 비교 검토하고 아울러 흄과 데이빗슨의 인과론을 화이트헤드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2. 인과 법칙의 특성
일상생활에서 원인에 대한 생각은 아주 일반적이다. 원인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의도에서 나온 동작(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동작(행위)은 그러한 의도가 야기한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대로 원인에 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전혀 뜻밖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밖의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할 때 우리는 인과 관계에서의 인과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인과 관계가 있는 경우 인과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즉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인과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인과관계를 말할 때 어떤 의미에서든 인과 관계에서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흄의 해명에 따르면 인과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유사(resem- blance)의 법칙,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접근(contigvity)의 법칙, 그리고 원인 혹은 결과(cause or effect)의 법칙은 바로 이러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것은 인과 법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인과 관계의 법칙을 어떻게 설명(해명)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던 흄의 관점이다. 인과 법칙에 관한 견해들 가운데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에 따르면 인과 법칙에 의해 연결된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A가 B의 원인이다'를 뜻하는 일상적인 진술도 무척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A가 B를 일으키다', 'A가 B를 산출하다', 'A가 B를 빚어내다', 'A가 B를 초래하다', 'A가 B를 야기하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A와 B의 인과 관계를 똑같이 진술할 수 있다. 'A가 B의 원인이다'라는 진술은 A와 B가 둘다 발생했고, A가 일어날 때마다 B는 일어나야 한다는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법칙의 개념은 그런 법칙에 관련된 사건들이 필연적 법칙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인과 법칙에 의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동반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인과 법칙은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도 일어나야만 하며,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양면성을 갖는 필연적 법칙이다.
인과적 세계를 이루는 모든 성원, 모든 개별체는 특정한 공간에 솟아나온 유한한 시간적 존재이다. 이 세계의 성원인 우리는 한결같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신체적 존재이다. 그 변화 소멸의 과정이 인과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이루는 우리와 같은 실체들은 변화하면서도 그 하나됨을 견지하는 개별자들이다. 인과적 세계관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설명은 생성에서 소멸까지 시시각각의 장면들이 아주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하나의 인과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과성은 우리의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경험적 지각이 그 무엇의 존재를 인식하는 기초적 근거라고 할 때 그 무엇과 그 지각이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 지각이 그 무엇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을까. 붉은 사과를 보면서 붉은 사과의 존재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는 지각의 생성에 대한 인식적 책임이 대체적으로 그것을 초래한 원인에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우리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바라는 결과를 가져올 속셈에서 행동하며, 바로 그 속셈이 그 행동을 초래하였기에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떠안게 된다. 어떤 결과에 대해서 인식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책임을 그 무엇에 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그 무엇이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되는 원인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일으킴의 원인 개념에는 크게 두 모형이 보이는 양면성이 있다. 한 모형은 일으킨 것을 행위자로 보며 일으킴을 행위함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는 행위자 모형과 '저 당구공의 그 충돌이 이 당구공의 이 운동을 초래했다'는 운동모형(사건모형)이다. 첫 번째의 행위자 모형에서는 아버지가 우리를 낳았듯이 원인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아버지의 어떤 동작이 나의 태어남을 초래했다는 식으로 다시 진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 모형은 동작의 원인 주체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행위자를 놓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왜 그러한 동작을 취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의미로울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외면적이 아닌 내면적 속성으로서의 아버지의 동기를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의 '일으킴'의 기본은 행위자가 어떤 동작을 '산출함'이다.
두 번째의 운동모형(사건모형)에서는 저 당구공이 왜 그렇게 충돌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당구공의 외면적인 운동모습과 역학관계를 말해야 할 것이다. 한 당구공이 부딪히는 사건 A가 부딪힌 당구공의 운동사건 B를 초래했다고 흔히 말하듯이 그것은 A와 B의 시간적 선후와 공간적 인접의 관계뿐이다. 또다른 한 모형을 일으킨 것을 사건이라고 보면, 일으킴을 잇따름으로 보는 것이다. 빠르게 굴러간 한 당구공이 정지해 있는 또다른 당구공에 충돌하고 그 정지해 있던 당구공이 잇달아 움직인다.
'초래함' 또는 '일으킴'의 관계가 사실적(자연적) 관계라고 한다면 흄이 해명한 그것의 사실적 요소는 인접한 잇따름이다. 따라서 A가 B를 초래하다에 대한 정의는 'A에 B가 잇따르다'이다.
앞에서의 두 원인 개념이 함축하는 것은 운동(사건) 모형에서의 인과 관계들은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태들의 총체에 논리적으로 수반하며, 그것들은 개별적 사태들의 시간, 공간적 자리와 연접에 의존한다. 반면에 행위자 모형에서는 인과 관계들이 직접적이다. 우리가 행동들의 일으킴을 직접 감지할 수 있듯이 얼음물에 손을 넣으면 손이 시리다는 것을 금방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오늘날의 인과 개념은 상식적이고 고전적인 행위자 모형과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사건모형의 양면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흄의 인과이론
인과론에 대한 관심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인과 개념에 대한 현대적 적합성을 갖춘 논의는 흄에 이르러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과 관계를 두 대상 혹은 사건들간의 단순한 물리적 관계로 보는 시각이 흄에게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과 이론에 대한 구성들은 대부분 흄으로부터 온 것이거나, 그것의 비판과 수용을 거치면서 발전 내지 전개된 것이라고 볼만큼 흄의 위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인과성에 대한 흄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다음의 정의들을 살펴보면
1) 원인이란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것은 다른 대상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또한 그것과 공간적으로 인접하여 있고, 전자와 유사한 모든 대상들은 후자와 유사한 대상들과 선행성과 인접성의 관계를 갖는 그러한 것으로 정의된다.
2) 원인이란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것은 다른 대상에 선행하고 인접하여 있으며, 그렇게 결합됨으로써 전자의 관념은 우리의 심성으로 하여금 후자의 관념을 구성하도록 하는 그러한 것이다.
3) 우리는 원인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 다음에 다른 대상이 뒤따르고 전자가 없었더라면 후자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정의한다.
인과에 대한 언급은 흄에게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등장하지만 이 세 정의는 대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의 1)은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의 2)는 연상, 그리고 정의 3)은 필연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필연적 관념에 대한 흄의 인과적 설명에 따른다면, 필연성이라는 것이 마치 외부 세계에 내재해 있는 듯이 보는 우리의 일상적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다. 우리가 그러한 것이 믿음을 가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흄의 주장에 따르면, 필연성이 외적 대상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자신도 모르게 투사하고 객체화시키는 인간 마음의 성향이 바로 그러한 거짓 믿음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인과의 문제에 대해 흄이 가졌던 부담과 관심은 인과 법칙 혹은 인과적 필연성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경험주의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인과의 필연적 연접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흄의 이론 안에서 법칙이 있는가, 아니면 법칙이 없는가 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인과의 법칙적 특성을 분명히 언급하는 한편, 어떤 의미의 법칙이나 필연성은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법칙의 실재성 자체에 대한 논쟁은 무익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흄의 문제의 초점은 법칙의 실재성 논쟁에 있기보다는 인과 법칙의 특성을 규명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흄이 인과 관계를 항상적 연접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과 관계가 단순히 개별적 사건이나 대상간의 관계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대상들 집합간의 관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 사건을 포함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을 인과의 법칙성이라고 한다면 흄의 정의에서 볼 때 인과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항상적 연접, 항상적 연상, 필연적 연접은 인과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테이블 위에 당구공이 하나 있고, 다른 공 하나가 그것을 향해 빠르게 굴러오고 있고 그것들이 부딪힌다. 그래서 정지해 있던 공이 움직인다. 이것이 우리가 감각이나 반성에 의해 알고 있는 여느 예와 똑같은 원인과 결과의 완벽한 예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검토해 보면 다음 사실은 분명하다. 운동이 교환되기 전에 두 공이 서로 접촉했다는 것과 충돌과 운동사이에 조그만 간격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근접성이 모든 원인 작용의 필수적 환경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원인이었던 운동이 결과였던 운동보다 앞선다. 따라서 시간이 앞섬이 모든 원인의 또 다른 필수 환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사한 환경에서 같은 종류의 어떤 공이라도 실험해 보도록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한 공의 충돌이 다른 공의 운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언제나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셋째 환경이 있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변함없는 연접이다. 원인과 유사한 대상은 모두 결과의 유사한 어떤 대상을 언제나 야기한다. 나는 근접성, 앞섬, 그리고 변함없는 연접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이 원인에서 발견할 수 없다. 첫째 공이 움직이고 둘째 것과 충돌한다. 그리고 즉시 둘째 것이 움직인다. 내가 동일한 공 혹은 유사한 공으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실험을 하면, 나는 첫째 공의 운동과 충돌에 의해 다른 공이 언제나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떤 형태로 생각하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검토하든 간에 나는 그 이상의 것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인과 법칙의 성질은 무엇인가? 인과 관계의 법칙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들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무엇보다도 인과 법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 법칙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던 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과 관계에서 요구되는 법칙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그것은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과 규칙성 이론이다.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에 따르면 인과 법칙에 의해 연결된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것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법칙의 개념은 그런 법칙에 관련된 사건들이 필연적인 힘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과 법칙에 포섭되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의미의 인과 법칙은,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 사건도 일어나야만 하며 원인 사건이 일어날 때 결과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양상적 힘을 갖는 필연적 법칙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규칙성 이론은 원인과 결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어떤 힘이나 필연성과 같은 존재론적 요소는 아무런 경험적 근거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인과 개념을 분석하는 핵심적 개념을 필연성에서 찾지 않고 보편성이나 규칙성에서 찾고자 한다.
4. 데이빗슨의 인과론
데이빗슨은 그의 인과론을 위하여 특정한 사건론에 근거하게 되는데 그것은 기술론적 사건론이다. 기술론적 사건은 외연적이다.
사건의 언어 차원인 기술(description)은 그 기술 주체의 보는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술만으로 사건의 전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기술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사건 동일성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개별적 사건, 즉 구체적이고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개별적 사건은 그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과는 구별되어야 하고, 어떤 사건들이라도 그것들이 동연적이라면 그 사건에 대한 기술이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모두 동일한 사건이다. 예를 들면, 스코트의 죽음과 웨이벌리를 쓴 작가의 죽음에서 데이빗슨은 이 두 개의 각각의 사건들을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 왜냐하면, 각각의 이 두 가지의 표현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의 상이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사건들이 정확하게 동일한 원인들과 결과들을 갖는다면, 단지 그때에만 사건들은 동일하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데이빗슨에게 있어서는 사건들에 대한 기술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과 인과 관계는 어떻게 기술되느냐에 상관없이 개별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이고 이러한 관계에서는 사건을 외연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흄의 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사를 받는다. 분석 철학의 전통이 밀의 명제적 원인 개념인데 반하여 흄의 대상 개념이 사건적 원인 개념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는 논리적인 관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되는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두 사건간의 논리적 독립성이 확보되어야만 할 것이다.
데이빗슨에게 있어서 사건은 개별자이다. 그것은 다른 개별자와 논리적 관계는 갖지 않으므로, 외연론을 수용하는 구조에서 동일한 개별자에 대한 동치의 상이한 기술을 허용한다. 하나의 사건이 여러 가지 기술들에 의하여 상이하게 표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빗슨의 심신 인과 법칙은 물리적 기술들 사이의 관계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물리적이지만 모든 사건이 정신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의 심신인과 법칙은 물리적 기술들 사이의 관계이다. 데이빗슨은 "인과 관계의 법칙성의 원칙은 주의깊게 읽혀져야 한다. 그 인과 관계의 법칙성의 원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로 관계되면, 그것은 한 법칙의 예가 되는 어떤 기술들을 가진다는 것이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참인 단수 진술 모두가 법칙의 예화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데이빗슨은 무법칙적 일원론의 세 번째 원리에서는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는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별적 사건에 관한 어떤 정신적 기술과 또 다른 개별적 사건에 관한 물리적 기술을 연관시키는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사건은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에 속하지는 않는다. 같은 사건들이라도 물리적 용어로 기술되었을 때에만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의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을 이어주는 법칙만이 정신적 사건들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하는데 그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의 관계는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의 관계에 의해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는 엄격한 결정성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원리는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 사이의 관계에 의해 나타나는 심신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모든 심적 상태는 어떤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지만 어떤 물리적 상태도 그것이 물리적 사건에 관한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 하더라도 예측될 수 없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의 두 가지 주된 주장은 모든 심적 사건은 어떤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는 유물론적 견해와 심리-물리적 법칙들이 없다는 견해이다. 모든 사건은 어떤 기술 아래서 심적이라는 것이 데이빗슨 이론에 열려진 가능성으로 남는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만약 어떤 사건이 심적이라면 또한 그 사건은 물리적이라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주장한다.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혹은 물리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에 작용하면서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엄밀한 법칙이 없을 수 있을까? 그것은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이 사건들에 대한 어떤 기술들에 의해 오직 상대적으로만 어떤 엄밀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선박과 빙산이 충돌하여 선박이 침몰했다고 해서 선박과 빙산이 충돌하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선박이 침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박의 충돌과 그에 따르는 재난들에 관해서는 어떤 참인(선박, 빙산 등) 일반적인 기술이 존재하며 그것과 관련된 사건들이 그렇게 기술될 때 엄밀한 법칙을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어떤 욕구와 믿음 그리고 지각들이 생긴 후 손발이 움직였을 때 이 연쇄작용은 당연히 인과적이며, 따라서 하나의 엄밀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이 법칙은 다른 심리적 기술들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엄밀한 법칙은 아니다. 인과 관계는 법칙을 요구하므로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인과 관계는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을 연결시키는 심리 물리법칙을 요구한다. 그런데 심리 물리법칙성은 그러한 법칙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여기서는 심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들 간의 인과 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심리적 인과를 믿으면서, 심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심리적인 사건인 m이 심적인 종류에 속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인 사건이 물리적 종류에도 속하게 되는 것을 차단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심리적 사건들에 적용되는데 그러한 사건들은 모두 물리적 사건들이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성은, 심신 관계에 있어서 정신적 사건이 정신적 용어들로 기술되는 한 엄격하게 법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법칙성은,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어떤 정신적 사건과 어떤 물리적 사건을 이어주는 엄격한 법칙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심신 환원주의를 부정한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심리적 특성과 물리적 특성 사이에 법칙적 연결이 있음을 부정하지만, 개별적인 심리 사건과 물리 사건간에 어떤 상관 관계나 법칙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데이빗슨이 심리 물리적 무법칙성 논증으로부터 심리 물리적 환원은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또는, 심리적 특성과 물리적 특성간의) 어떤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5. 화이트헤드의 인과적 유효성
화이트헤드는 근대철학이 해결하지 못했던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자신의 형이상학 속에서 인과관계의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 위해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여러 개념들 중에서 인과 관계와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 양태는 원초적 지각(Primitive Perception)에 해당한다. 이 원초적 지각이란 '순응의 지각'(perception of con- formation)이다. '순응'이란 시간개념을 야기시키는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의 특수한 요인이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구체적 의미의 시간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 즉 먼저 것에 대한 나중 것의 순응이다. 각각의 사건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는 어느 정도 과거에 순응한다. 과거는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각된 사건으로 대상화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과적 유효성은 인과성의 지각으로서, 인과성의 근원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순응에 있으며, 인간이나 인간 이외의 하등동물에까지 개념적 분석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서 인과성이나 관련성이 여건으로서 있다고 주장한다. 인과성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해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다른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유일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선행하는 세계 전체는 다같이 협력해서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산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어느 하나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을 형성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과성에 관한 가장 타당한 주장은 내재성(immanence)의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각 사건들은 적극적으로 그 자신의 본질 가운데 이미 내포되어 있는 선행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건들은 그들 상호간에 상대적으로 규정된 지위를 가지고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이유로 인해 과거의 질적 에너지가 현재의 질적 에너지의 한 패턴으로서 결과되는 것이다. 이상 언급한 것이 인과성에 대한 이론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지면 우리의 눈은 깜박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사소한 사태는 생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리학적 설명은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전적으로 인과적 유효성에 의해 표현된다. 그것은 흥분할 때 발생하는 경련이 신경을 따라 결절중추로 향해 나아가는 경로와 수축할 때 일어나는 경련이 눈꺼풀로 되돌아가는 경로에 관한 추정적 기록이다. 눈을 깜박거리게 되는 사적 경험을 검토해 보면, 눈을 깜박거리는 사람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섬광에 부딪혀 눈이 경험한 것들이 눈을 감게 한 원인이라고 느끼며, 그 자신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로 하여금 섬광의 우선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과성에 대한 느낌인 것이다. 이 사람은 '섬광이 나로 하여금 눈을 감게 했다.'는 말로서 그의 경험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지면 우리의 눈이 깜박거리게 되는 것은 비슷한 경우의 반복으로 야기되는 습관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제시적으로 직접적인 빛의 번쩍임에 습관적으로 눈의 깜박임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고, 이런 경우 전체 경험은 제시적 직접성에 의해 분석된다.
반면에 데이빗슨의 관점에서는 그의 인과론이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짐' '우리의 눈이 깜박거림'의 표현들은 동일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만일 '무엇이 우리의 눈을 깜박거리게 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갑자기 전깃불이 켜짐'이라는 사건을 그 원인으로 제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이라는 표현은 데이빗슨에게 있어서 동일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의 원인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심성적 성질에서는 인과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생리학의 차원에서나 상식의 차원에서든 빛의 번쩍임은 눈의 깜박임을 야기시킨다고 본다. 즉 빛이 들어올 때 우리의 눈이 깜박거리는 경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흄이나 데이빗슨의 분석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을 부정하는 경험이론에 따른다면 빛의 번쩍임과 눈의 깜박임 간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인과적 유효성에 따른다면 빛의 번쩍임과 눈의 깜박임, 이 둘은 결코 따로 분리되어서는 발생할 수 없으며, 이 둘 사이에 인간의 의식적 판단이나 결단,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결합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여러 신체 부분들에 대한 경험은 근본적으로 투사된 감각여건의 근거(reason)로서의 그 부분들에 대한 지각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손은 투사된 촉각 여건의 근거이고, 눈은 투사된 시각 여건의 근거이다. 신체적 경험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 그 공간적 한정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체로부터 온 인과적 영향은 외부 세계로부터 유입된 영향이 지니고 있는 극단적인 모호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에서 조차도 인과적 유효성은, 제시적 직접성에 비해서 얼마간의 모호성을 항상 수반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의 원초적 양상을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를 가진 지각임을 예시하면서, 인과적 유효성에 관하여 진술한 것은 다음과 같다.
환경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실재에 대한 순응(conformation)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경험 속의 원초적 요소이다. 우리는 육체적 기관들에 순응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 저쪽에 가로놓여 있는 막연한 세계에 순응한다. 우리의 원초적 지각이란 막연한 '순응'의 지각이고, 또 잘 판별되지 않는 배경 속에서 더 막연한 '자기자신'과 '타인'이라고 하는 관계항(relata)의 지각이다.
지금까지는 일상적 경험에서 예시되는 인과적 유효성에 관하여 논의했지만 이제부터는 화이트헤드의 '파악이론'(Theory of Prehensions)을 근거로 하여 인과적 유효성을 계속 논의해 보고자 하는데, '파악이론'은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 양태에 대해서도 그 전제가 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파악이나 느낌에 관한 이론은 물리적 자연에 있어서의 인과적 요소들을 연구하는데서 비롯되는데, 느낌이란 말은 물리적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상호 영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며, 한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의 에너지 형식의 전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다. 사실 파악된 현실적 존재자는 파악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에 대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를 '물리적 극'(physical pole)과 '정신적 극' (mental pole)을 가지는 양극적인 존재자로 보는데, 물리적 극은 한 현실적 존재자의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느낌이며, 이것을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물리적 느낌을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이라고 하는 한편, 정신적 극은 개념적 느낌(conceptional feeling)이라 불리어지며 이것은 영원한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한 현실적 존재자에서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로의 추이를 느낌의 이론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추이는 인과적 느낌에 의해 발생한다. 즉 추이는 인과성의 한 작용이며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은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인과적 느낌은 과거세계가 느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의 최초의 국면, 즉 '수용적 국면'(receptive phase)을 구성한다. 어떤 특정한 현실적 존재자의 과거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은, 어느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긍정적으로(positively) 파악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파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긍정적 파악과 느낌의 제외라고 할 수 있는 부정적 파악이다. 긍정적 파악은 느낌에 해당되고, 부정적 파악은 개념적 느낌이다. 또한 부정적 파악은 영원한 대상에만 적용되며,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두 종류의 개념적인 느낌이 한 현실적 존재자의 정신적 극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적 극의 반대극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극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인과적 느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물리적 느낌은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느낌이나 개념적 느낌이 결코 의식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어느 형태의 파악의 주체적 형식에도 반드시 의식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물리적 느낌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단순 물리적 느낌(simple physical feeling)과 현실적 존재자들의 연쇄체에 대한 변질된 느낌으로 다시 나뉘어지는데, 단순 물리적 느낌은 다시 순수(pure)한 물리적 느낌과 불순(hybrid)한 물리적 느낌으로 구별된다. 순수한 물리적 느낌에 있어서는 여건인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물리적 느낌들 중의 하나에 의해 대상화되고, 불순한 물리적 느낌에 있어서는 여건을 형성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개념적 느낌들 중의 하나에 의해 대상화된다.
화이트헤드는 단순 물리적 느낌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인과의 작용(act of causation)이다. 최초의 여건(initial datum)인 현실적 존재는 '원인'이며,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결과'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물리적 느낌을 품고 있는 주체는 결과에 의해 제약된 현실적 존재이다. 이 제약된 현실적 존재도 '결과'라 불릴 것이다. 일체의 복합적인 인과 작용은 이러한 원초적인 구성 요소를 어떤 복합체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물리적 느낌도 또한 '인과적'느낌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의식이 없는 가장 근원적인 유형의 지각 작용이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최초의 여건인 현실적 존재는 지각되는 현실적 존재이고, 객체적 여건은 그 현실적 존재가 지각되는 '전망' (perspective)이며, 단순한 물리적 느낌의 주체는 지각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물리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느껴진 느낌의 주체적 형식의 재연(re-enaction)이다. 따라서 원인은 자신의 느낌을 새로운 주체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서, 그리고 그 원인과 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재생되도록 넘겨준다. 원인은 주체적 형식의 부분적인 동일성을 수반하는 결과 속에서 재생되는 느낌을 느끼는 자(feeler)였기 때문에, 결과의 구조 속에 객체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원인이 갖는 느낌도 그 자신의 객체적 여건과 그 자신의 최초의 여건을 가지고 있다. 원인이 객체적으로 결과 속에 있게 되는 까닭은 원인이 갖는 느낌이 하나의 느낌으로서, 원인인 그 주체로부터 추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결과에 있어서 주체로서 재연된 원인의 느낌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느낌에는 현실 세계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개별성, 즉 개별적인 원인과 개별적인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6. 맺는말
앞에서 흄, 데이빗슨, 화이트헤드의 인과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흄은 인과 관계에서 필연성이 필수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결과의 관념을 원인의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 필연성은 관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결속이 존재한다면 이 필연적 결속은 대상에 존재하는 힘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흄은 대상간의 필연적 결속은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 간의 필연적 결속을 인정한다면 대상에 존재하는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흄이 논의하는 필연성이란 어떤 필연성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필연성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필연성도 흄에 따르면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예를 들면 "1+1=2"라든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이다"와 같은 명제가 갖는다고 생각되는 필연성도 흄에 의하면 물리적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그 명제를 이해하는 인간의 오성 작용에로 환원이다.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그의 독특한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 데이빗슨은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을 이어주는 엄밀한 법칙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심신 환원주의를 부정하므로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어느 것으로도 기술될 수 있는 개별 사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인과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인과 관계는 서로 구별되는 개별적 사건들 간의 관계이다. 그러나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심리 무법칙성의 주장에 대한 존재론적인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의 인과론은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서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데, 인과 관계의 개념이 생기는 것은 인류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경험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유효성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시적 집적성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만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인과 관계는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순응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흄은 인과 관계에 있어서 필연성을 거부하는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이 분명하지 못하여 설득력을 잃는데 반해,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흄의 사건모형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그 나름대로 독특한 인과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결국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양분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초래하게 되는 인과 관계들을 속시원하게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면서, 심리 무법칙성을 주장하며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데이빗슨의 심신 비환원주의를 그의 인과적 유효성에 대한 설명에서 주지할 수 있듯이 자신의 유기체 철학 속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며 해결 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은 풀리지 않을 만큼 뒤얽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대립적인 입장들을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유기체 철학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 형 관*·박 정 희**
<한글요약>
모든 사건이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성은 사건의 모든 영역에 인과율이 적용되며 원인 없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과 관계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는 단지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필연성이나 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인과 관계가 있는 경우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인과 법칙이 존재한다면, 인과 관계를 말할 때 인과 관계에서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흄과 데이빗슨,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각각의 인과론을 논하면서 그 차이점에 대하여 비교하려고 한다. 먼저 흄은 인과 관계에서 필연성이 필수 요소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결과의 관념을 원인의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 필연성은 관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그의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는데 그의 인과 관계는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어느 것으로도 기술될 수 있는 개별 사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개별적 사건들 간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서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과 관계를 설명하며, 흄이 해명하지 못한 인과 관계의 필연성과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은 심리무법칙성을 주장하는 데이빗슨의 인과론을 수용한다.
1. 머리말
우리 일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 무엇인가의 결과이면서 또한 그 무엇인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는 인과성은 사건의 모든 영역에 인과율이 예외없이 적용되며 모든 사건이 원인없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과 관계에 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들은 단지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가 인과관계를 통하여 일상사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예측가능하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반드시 어떤 필연성이나 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인과 관계의 법칙적 특성에 관한 수 많은 입장들이 제시되었고, 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있어 왔지만, 이 논문에서는 인과관계의 본성이나 인과의 법칙성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을 나열하거나, 그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을 검토하는데 목적을 두지는 않고 인과 관계에 있어서의 법칙의 특성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흄의 인과이론과 정신에 관한 법칙, 즉 심리 무법칙성을 주장하는 데이빗슨의 인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인과에 대해 그 차이점을 비교 검토하고 아울러 흄과 데이빗슨의 인과론을 화이트헤드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2. 인과 법칙의 특성
일상생활에서 원인에 대한 생각은 아주 일반적이다. 원인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의도에서 나온 동작(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동작(행위)은 그러한 의도가 야기한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대로 원인에 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전혀 뜻밖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밖의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할 때 우리는 인과 관계에서의 인과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인과 관계가 있는 경우 인과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즉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인과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인과관계를 말할 때 어떤 의미에서든 인과 관계에서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흄의 해명에 따르면 인과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유사(resem- blance)의 법칙,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접근(contigvity)의 법칙, 그리고 원인 혹은 결과(cause or effect)의 법칙은 바로 이러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것은 인과 법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인과 관계의 법칙을 어떻게 설명(해명)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던 흄의 관점이다. 인과 법칙에 관한 견해들 가운데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에 따르면 인과 법칙에 의해 연결된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A가 B의 원인이다'를 뜻하는 일상적인 진술도 무척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A가 B를 일으키다', 'A가 B를 산출하다', 'A가 B를 빚어내다', 'A가 B를 초래하다', 'A가 B를 야기하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A와 B의 인과 관계를 똑같이 진술할 수 있다. 'A가 B의 원인이다'라는 진술은 A와 B가 둘다 발생했고, A가 일어날 때마다 B는 일어나야 한다는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법칙의 개념은 그런 법칙에 관련된 사건들이 필연적 법칙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인과 법칙에 의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동반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인과 법칙은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도 일어나야만 하며,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양면성을 갖는 필연적 법칙이다.
인과적 세계를 이루는 모든 성원, 모든 개별체는 특정한 공간에 솟아나온 유한한 시간적 존재이다. 이 세계의 성원인 우리는 한결같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신체적 존재이다. 그 변화 소멸의 과정이 인과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이루는 우리와 같은 실체들은 변화하면서도 그 하나됨을 견지하는 개별자들이다. 인과적 세계관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설명은 생성에서 소멸까지 시시각각의 장면들이 아주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하나의 인과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과성은 우리의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경험적 지각이 그 무엇의 존재를 인식하는 기초적 근거라고 할 때 그 무엇과 그 지각이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 지각이 그 무엇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을까. 붉은 사과를 보면서 붉은 사과의 존재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는 지각의 생성에 대한 인식적 책임이 대체적으로 그것을 초래한 원인에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우리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바라는 결과를 가져올 속셈에서 행동하며, 바로 그 속셈이 그 행동을 초래하였기에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떠안게 된다. 어떤 결과에 대해서 인식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책임을 그 무엇에 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그 무엇이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되는 원인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일으킴의 원인 개념에는 크게 두 모형이 보이는 양면성이 있다. 한 모형은 일으킨 것을 행위자로 보며 일으킴을 행위함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다'는 행위자 모형과 '저 당구공의 그 충돌이 이 당구공의 이 운동을 초래했다'는 운동모형(사건모형)이다. 첫 번째의 행위자 모형에서는 아버지가 우리를 낳았듯이 원인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아버지의 어떤 동작이 나의 태어남을 초래했다는 식으로 다시 진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 모형은 동작의 원인 주체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행위자를 놓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왜 그러한 동작을 취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의미로울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외면적이 아닌 내면적 속성으로서의 아버지의 동기를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의 '일으킴'의 기본은 행위자가 어떤 동작을 '산출함'이다.
두 번째의 운동모형(사건모형)에서는 저 당구공이 왜 그렇게 충돌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당구공의 외면적인 운동모습과 역학관계를 말해야 할 것이다. 한 당구공이 부딪히는 사건 A가 부딪힌 당구공의 운동사건 B를 초래했다고 흔히 말하듯이 그것은 A와 B의 시간적 선후와 공간적 인접의 관계뿐이다. 또다른 한 모형을 일으킨 것을 사건이라고 보면, 일으킴을 잇따름으로 보는 것이다. 빠르게 굴러간 한 당구공이 정지해 있는 또다른 당구공에 충돌하고 그 정지해 있던 당구공이 잇달아 움직인다.
'초래함' 또는 '일으킴'의 관계가 사실적(자연적) 관계라고 한다면 흄이 해명한 그것의 사실적 요소는 인접한 잇따름이다. 따라서 A가 B를 초래하다에 대한 정의는 'A에 B가 잇따르다'이다.
앞에서의 두 원인 개념이 함축하는 것은 운동(사건) 모형에서의 인과 관계들은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태들의 총체에 논리적으로 수반하며, 그것들은 개별적 사태들의 시간, 공간적 자리와 연접에 의존한다. 반면에 행위자 모형에서는 인과 관계들이 직접적이다. 우리가 행동들의 일으킴을 직접 감지할 수 있듯이 얼음물에 손을 넣으면 손이 시리다는 것을 금방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오늘날의 인과 개념은 상식적이고 고전적인 행위자 모형과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사건모형의 양면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흄의 인과이론
인과론에 대한 관심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인과 개념에 대한 현대적 적합성을 갖춘 논의는 흄에 이르러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과 관계를 두 대상 혹은 사건들간의 단순한 물리적 관계로 보는 시각이 흄에게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과 이론에 대한 구성들은 대부분 흄으로부터 온 것이거나, 그것의 비판과 수용을 거치면서 발전 내지 전개된 것이라고 볼만큼 흄의 위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인과성에 대한 흄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다음의 정의들을 살펴보면
1) 원인이란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것은 다른 대상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또한 그것과 공간적으로 인접하여 있고, 전자와 유사한 모든 대상들은 후자와 유사한 대상들과 선행성과 인접성의 관계를 갖는 그러한 것으로 정의된다.
2) 원인이란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것은 다른 대상에 선행하고 인접하여 있으며, 그렇게 결합됨으로써 전자의 관념은 우리의 심성으로 하여금 후자의 관념을 구성하도록 하는 그러한 것이다.
3) 우리는 원인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 다음에 다른 대상이 뒤따르고 전자가 없었더라면 후자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정의한다.
인과에 대한 언급은 흄에게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등장하지만 이 세 정의는 대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의 1)은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의 2)는 연상, 그리고 정의 3)은 필연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필연적 관념에 대한 흄의 인과적 설명에 따른다면, 필연성이라는 것이 마치 외부 세계에 내재해 있는 듯이 보는 우리의 일상적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다. 우리가 그러한 것이 믿음을 가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흄의 주장에 따르면, 필연성이 외적 대상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자신도 모르게 투사하고 객체화시키는 인간 마음의 성향이 바로 그러한 거짓 믿음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인과의 문제에 대해 흄이 가졌던 부담과 관심은 인과 법칙 혹은 인과적 필연성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경험주의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인과의 필연적 연접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흄의 이론 안에서 법칙이 있는가, 아니면 법칙이 없는가 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는 인과의 법칙적 특성을 분명히 언급하는 한편, 어떤 의미의 법칙이나 필연성은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법칙의 실재성 자체에 대한 논쟁은 무익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흄의 문제의 초점은 법칙의 실재성 논쟁에 있기보다는 인과 법칙의 특성을 규명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흄이 인과 관계를 항상적 연접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과 관계가 단순히 개별적 사건이나 대상간의 관계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대상들 집합간의 관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 사건을 포함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을 인과의 법칙성이라고 한다면 흄의 정의에서 볼 때 인과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항상적 연접, 항상적 연상, 필연적 연접은 인과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테이블 위에 당구공이 하나 있고, 다른 공 하나가 그것을 향해 빠르게 굴러오고 있고 그것들이 부딪힌다. 그래서 정지해 있던 공이 움직인다. 이것이 우리가 감각이나 반성에 의해 알고 있는 여느 예와 똑같은 원인과 결과의 완벽한 예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검토해 보면 다음 사실은 분명하다. 운동이 교환되기 전에 두 공이 서로 접촉했다는 것과 충돌과 운동사이에 조그만 간격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근접성이 모든 원인 작용의 필수적 환경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원인이었던 운동이 결과였던 운동보다 앞선다. 따라서 시간이 앞섬이 모든 원인의 또 다른 필수 환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사한 환경에서 같은 종류의 어떤 공이라도 실험해 보도록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한 공의 충돌이 다른 공의 운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언제나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셋째 환경이 있다.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변함없는 연접이다. 원인과 유사한 대상은 모두 결과의 유사한 어떤 대상을 언제나 야기한다. 나는 근접성, 앞섬, 그리고 변함없는 연접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이 원인에서 발견할 수 없다. 첫째 공이 움직이고 둘째 것과 충돌한다. 그리고 즉시 둘째 것이 움직인다. 내가 동일한 공 혹은 유사한 공으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실험을 하면, 나는 첫째 공의 운동과 충돌에 의해 다른 공이 언제나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떤 형태로 생각하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검토하든 간에 나는 그 이상의 것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인과 법칙의 성질은 무엇인가? 인과 관계의 법칙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들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무엇보다도 인과 법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 법칙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던 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과 관계에서 요구되는 법칙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그것은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과 규칙성 이론이다.
필연성으로서의 법칙론에 따르면 인과 법칙에 의해 연결된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것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법칙의 개념은 그런 법칙에 관련된 사건들이 필연적인 힘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과 법칙에 포섭되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의미의 인과 법칙은, 원인이 일어날 때마다 결과 사건도 일어나야만 하며 원인 사건이 일어날 때 결과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양상적 힘을 갖는 필연적 법칙의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규칙성 이론은 원인과 결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어떤 힘이나 필연성과 같은 존재론적 요소는 아무런 경험적 근거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인과 개념을 분석하는 핵심적 개념을 필연성에서 찾지 않고 보편성이나 규칙성에서 찾고자 한다.
4. 데이빗슨의 인과론
데이빗슨은 그의 인과론을 위하여 특정한 사건론에 근거하게 되는데 그것은 기술론적 사건론이다. 기술론적 사건은 외연적이다.
사건의 언어 차원인 기술(description)은 그 기술 주체의 보는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술만으로 사건의 전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기술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사건 동일성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개별적 사건, 즉 구체적이고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개별적 사건은 그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과는 구별되어야 하고, 어떤 사건들이라도 그것들이 동연적이라면 그 사건에 대한 기술이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모두 동일한 사건이다. 예를 들면, 스코트의 죽음과 웨이벌리를 쓴 작가의 죽음에서 데이빗슨은 이 두 개의 각각의 사건들을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 왜냐하면, 각각의 이 두 가지의 표현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의 상이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사건들이 정확하게 동일한 원인들과 결과들을 갖는다면, 단지 그때에만 사건들은 동일하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데이빗슨에게 있어서는 사건들에 대한 기술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과 인과 관계는 어떻게 기술되느냐에 상관없이 개별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이고 이러한 관계에서는 사건을 외연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흄의 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사를 받는다. 분석 철학의 전통이 밀의 명제적 원인 개념인데 반하여 흄의 대상 개념이 사건적 원인 개념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는 논리적인 관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되는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두 사건간의 논리적 독립성이 확보되어야만 할 것이다.
데이빗슨에게 있어서 사건은 개별자이다. 그것은 다른 개별자와 논리적 관계는 갖지 않으므로, 외연론을 수용하는 구조에서 동일한 개별자에 대한 동치의 상이한 기술을 허용한다. 하나의 사건이 여러 가지 기술들에 의하여 상이하게 표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빗슨의 심신 인과 법칙은 물리적 기술들 사이의 관계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물리적이지만 모든 사건이 정신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의 심신인과 법칙은 물리적 기술들 사이의 관계이다. 데이빗슨은 "인과 관계의 법칙성의 원칙은 주의깊게 읽혀져야 한다. 그 인과 관계의 법칙성의 원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로 관계되면, 그것은 한 법칙의 예가 되는 어떤 기술들을 가진다는 것이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참인 단수 진술 모두가 법칙의 예화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데이빗슨은 무법칙적 일원론의 세 번째 원리에서는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는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별적 사건에 관한 어떤 정신적 기술과 또 다른 개별적 사건에 관한 물리적 기술을 연관시키는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사건은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에 속하지는 않는다. 같은 사건들이라도 물리적 용어로 기술되었을 때에만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의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을 이어주는 법칙만이 정신적 사건들을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하는데 그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의 관계는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의 관계에 의해 정신적 사건들이 예측되고 설명될 수 있는 엄격한 결정성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원리는 정신적 기술과 물리적 기술 사이의 관계에 의해 나타나는 심신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모든 심적 상태는 어떤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지만 어떤 물리적 상태도 그것이 물리적 사건에 관한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 하더라도 예측될 수 없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의 두 가지 주된 주장은 모든 심적 사건은 어떤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는 유물론적 견해와 심리-물리적 법칙들이 없다는 견해이다. 모든 사건은 어떤 기술 아래서 심적이라는 것이 데이빗슨 이론에 열려진 가능성으로 남는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만약 어떤 사건이 심적이라면 또한 그 사건은 물리적이라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주장한다.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혹은 물리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에 작용하면서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엄밀한 법칙이 없을 수 있을까? 그것은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이 사건들에 대한 어떤 기술들에 의해 오직 상대적으로만 어떤 엄밀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선박과 빙산이 충돌하여 선박이 침몰했다고 해서 선박과 빙산이 충돌하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선박이 침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박의 충돌과 그에 따르는 재난들에 관해서는 어떤 참인(선박, 빙산 등) 일반적인 기술이 존재하며 그것과 관련된 사건들이 그렇게 기술될 때 엄밀한 법칙을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어떤 욕구와 믿음 그리고 지각들이 생긴 후 손발이 움직였을 때 이 연쇄작용은 당연히 인과적이며, 따라서 하나의 엄밀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이 법칙은 다른 심리적 기술들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엄밀한 법칙은 아니다. 인과 관계는 법칙을 요구하므로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인과 관계는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을 연결시키는 심리 물리법칙을 요구한다. 그런데 심리 물리법칙성은 그러한 법칙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여기서는 심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들 간의 인과 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심리적 인과를 믿으면서, 심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심리적인 사건인 m이 심적인 종류에 속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인 사건이 물리적 종류에도 속하게 되는 것을 차단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심리적 사건들에 적용되는데 그러한 사건들은 모두 물리적 사건들이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성은, 심신 관계에 있어서 정신적 사건이 정신적 용어들로 기술되는 한 엄격하게 법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법칙성은,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어떤 정신적 사건과 어떤 물리적 사건을 이어주는 엄격한 법칙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심신 환원주의를 부정한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심리적 특성과 물리적 특성 사이에 법칙적 연결이 있음을 부정하지만, 개별적인 심리 사건과 물리 사건간에 어떤 상관 관계나 법칙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데이빗슨이 심리 물리적 무법칙성 논증으로부터 심리 물리적 환원은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또는, 심리적 특성과 물리적 특성간의) 어떤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5. 화이트헤드의 인과적 유효성
화이트헤드는 근대철학이 해결하지 못했던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자신의 형이상학 속에서 인과관계의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 위해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여러 개념들 중에서 인과 관계와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 양태는 원초적 지각(Primitive Perception)에 해당한다. 이 원초적 지각이란 '순응의 지각'(perception of con- formation)이다. '순응'이란 시간개념을 야기시키는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의 특수한 요인이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구체적 의미의 시간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 즉 먼저 것에 대한 나중 것의 순응이다. 각각의 사건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는 어느 정도 과거에 순응한다. 과거는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각된 사건으로 대상화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과적 유효성은 인과성의 지각으로서, 인과성의 근원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순응에 있으며, 인간이나 인간 이외의 하등동물에까지 개념적 분석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서 인과성이나 관련성이 여건으로서 있다고 주장한다. 인과성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해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다른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유일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선행하는 세계 전체는 다같이 협력해서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산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어느 하나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을 형성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인과성에 관한 가장 타당한 주장은 내재성(immanence)의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각 사건들은 적극적으로 그 자신의 본질 가운데 이미 내포되어 있는 선행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건들은 그들 상호간에 상대적으로 규정된 지위를 가지고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이유로 인해 과거의 질적 에너지가 현재의 질적 에너지의 한 패턴으로서 결과되는 것이다. 이상 언급한 것이 인과성에 대한 이론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지면 우리의 눈은 깜박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사소한 사태는 생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리학적 설명은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전적으로 인과적 유효성에 의해 표현된다. 그것은 흥분할 때 발생하는 경련이 신경을 따라 결절중추로 향해 나아가는 경로와 수축할 때 일어나는 경련이 눈꺼풀로 되돌아가는 경로에 관한 추정적 기록이다. 눈을 깜박거리게 되는 사적 경험을 검토해 보면, 눈을 깜박거리는 사람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섬광에 부딪혀 눈이 경험한 것들이 눈을 감게 한 원인이라고 느끼며, 그 자신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로 하여금 섬광의 우선성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과성에 대한 느낌인 것이다. 이 사람은 '섬광이 나로 하여금 눈을 감게 했다.'는 말로서 그의 경험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지면 우리의 눈이 깜박거리게 되는 것은 비슷한 경우의 반복으로 야기되는 습관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제시적으로 직접적인 빛의 번쩍임에 습관적으로 눈의 깜박임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고, 이런 경우 전체 경험은 제시적 직접성에 의해 분석된다.
반면에 데이빗슨의 관점에서는 그의 인과론이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 '갑자기 전깃불이 켜짐' '우리의 눈이 깜박거림'의 표현들은 동일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만일 '무엇이 우리의 눈을 깜박거리게 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갑자기 전깃불이 켜짐'이라는 사건을 그 원인으로 제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이라는 표현은 데이빗슨에게 있어서 동일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의 원인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심성적 성질에서는 인과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생리학의 차원에서나 상식의 차원에서든 빛의 번쩍임은 눈의 깜박임을 야기시킨다고 본다. 즉 빛이 들어올 때 우리의 눈이 깜박거리는 경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흄이나 데이빗슨의 분석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을 부정하는 경험이론에 따른다면 빛의 번쩍임과 눈의 깜박임 간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인과적 유효성에 따른다면 빛의 번쩍임과 눈의 깜박임, 이 둘은 결코 따로 분리되어서는 발생할 수 없으며, 이 둘 사이에 인간의 의식적 판단이나 결단,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결합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여러 신체 부분들에 대한 경험은 근본적으로 투사된 감각여건의 근거(reason)로서의 그 부분들에 대한 지각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손은 투사된 촉각 여건의 근거이고, 눈은 투사된 시각 여건의 근거이다. 신체적 경험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 그 공간적 한정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체로부터 온 인과적 영향은 외부 세계로부터 유입된 영향이 지니고 있는 극단적인 모호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에서 조차도 인과적 유효성은, 제시적 직접성에 비해서 얼마간의 모호성을 항상 수반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의 원초적 양상을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를 가진 지각임을 예시하면서, 인과적 유효성에 관하여 진술한 것은 다음과 같다.
환경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실재에 대한 순응(conformation)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경험 속의 원초적 요소이다. 우리는 육체적 기관들에 순응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 저쪽에 가로놓여 있는 막연한 세계에 순응한다. 우리의 원초적 지각이란 막연한 '순응'의 지각이고, 또 잘 판별되지 않는 배경 속에서 더 막연한 '자기자신'과 '타인'이라고 하는 관계항(relata)의 지각이다.
지금까지는 일상적 경험에서 예시되는 인과적 유효성에 관하여 논의했지만 이제부터는 화이트헤드의 '파악이론'(Theory of Prehensions)을 근거로 하여 인과적 유효성을 계속 논의해 보고자 하는데, '파악이론'은 인과적 유효성의 지각 양태에 대해서도 그 전제가 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파악이나 느낌에 관한 이론은 물리적 자연에 있어서의 인과적 요소들을 연구하는데서 비롯되는데, 느낌이란 말은 물리적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상호 영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며, 한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의 에너지 형식의 전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다. 사실 파악된 현실적 존재자는 파악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자에 대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자를 '물리적 극'(physical pole)과 '정신적 극' (mental pole)을 가지는 양극적인 존재자로 보는데, 물리적 극은 한 현실적 존재자의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느낌이며, 이것을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물리적 느낌을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이라고 하는 한편, 정신적 극은 개념적 느낌(conceptional feeling)이라 불리어지며 이것은 영원한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한 현실적 존재자에서 다른 현실적 존재자에로의 추이를 느낌의 이론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추이는 인과적 느낌에 의해 발생한다. 즉 추이는 인과성의 한 작용이며 따라서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은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인과적 느낌은 과거세계가 느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의 최초의 국면, 즉 '수용적 국면'(receptive phase)을 구성한다. 어떤 특정한 현실적 존재자의 과거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은, 어느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긍정적으로(positively) 파악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파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긍정적 파악과 느낌의 제외라고 할 수 있는 부정적 파악이다. 긍정적 파악은 느낌에 해당되고, 부정적 파악은 개념적 느낌이다. 또한 부정적 파악은 영원한 대상에만 적용되며,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두 종류의 개념적인 느낌이 한 현실적 존재자의 정신적 극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적 극의 반대극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극은 과거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인과적 느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물리적 느낌은 인과적 느낌, 혹은 파악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느낌이나 개념적 느낌이 결코 의식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어느 형태의 파악의 주체적 형식에도 반드시 의식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물리적 느낌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에 대한 단순 물리적 느낌(simple physical feeling)과 현실적 존재자들의 연쇄체에 대한 변질된 느낌으로 다시 나뉘어지는데, 단순 물리적 느낌은 다시 순수(pure)한 물리적 느낌과 불순(hybrid)한 물리적 느낌으로 구별된다. 순수한 물리적 느낌에 있어서는 여건인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물리적 느낌들 중의 하나에 의해 대상화되고, 불순한 물리적 느낌에 있어서는 여건을 형성하는 현실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개념적 느낌들 중의 하나에 의해 대상화된다.
화이트헤드는 단순 물리적 느낌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인과의 작용(act of causation)이다. 최초의 여건(initial datum)인 현실적 존재는 '원인'이며,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결과'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물리적 느낌을 품고 있는 주체는 결과에 의해 제약된 현실적 존재이다. 이 제약된 현실적 존재도 '결과'라 불릴 것이다. 일체의 복합적인 인과 작용은 이러한 원초적인 구성 요소를 어떤 복합체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물리적 느낌도 또한 '인과적'느낌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의식이 없는 가장 근원적인 유형의 지각 작용이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최초의 여건인 현실적 존재는 지각되는 현실적 존재이고, 객체적 여건은 그 현실적 존재가 지각되는 '전망' (perspective)이며, 단순한 물리적 느낌의 주체는 지각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물리적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느껴진 느낌의 주체적 형식의 재연(re-enaction)이다. 따라서 원인은 자신의 느낌을 새로운 주체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서, 그리고 그 원인과 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재생되도록 넘겨준다. 원인은 주체적 형식의 부분적인 동일성을 수반하는 결과 속에서 재생되는 느낌을 느끼는 자(feeler)였기 때문에, 결과의 구조 속에 객체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원인이 갖는 느낌도 그 자신의 객체적 여건과 그 자신의 최초의 여건을 가지고 있다. 원인이 객체적으로 결과 속에 있게 되는 까닭은 원인이 갖는 느낌이 하나의 느낌으로서, 원인인 그 주체로부터 추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결과에 있어서 주체로서 재연된 원인의 느낌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느낌에는 현실 세계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개별성, 즉 개별적인 원인과 개별적인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6. 맺는말
앞에서 흄, 데이빗슨, 화이트헤드의 인과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흄은 인과 관계에서 필연성이 필수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결과의 관념을 원인의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 필연성은 관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결속이 존재한다면 이 필연적 결속은 대상에 존재하는 힘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흄은 대상간의 필연적 결속은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 간의 필연적 결속을 인정한다면 대상에 존재하는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흄이 논의하는 필연성이란 어떤 필연성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필연성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필연성도 흄에 따르면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예를 들면 "1+1=2"라든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이다"와 같은 명제가 갖는다고 생각되는 필연성도 흄에 의하면 물리적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그 명제를 이해하는 인간의 오성 작용에로 환원이다.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그의 독특한 사건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 데이빗슨은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을 이어주는 엄밀한 법칙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심신 환원주의를 부정하므로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어느 것으로도 기술될 수 있는 개별 사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인과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인과 관계는 서로 구별되는 개별적 사건들 간의 관계이다. 그러나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심리 무법칙성의 주장에 대한 존재론적인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화이트헤드의 인과론은 자신의 유기체 철학에서 인과적 유효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데, 인과 관계의 개념이 생기는 것은 인류가 인과적 유효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경험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인과적 유효성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시적 집적성 양태에 있어서의 지각만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인과 관계는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순응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흄은 인과 관계에 있어서 필연성을 거부하는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이 분명하지 못하여 설득력을 잃는데 반해, 데이빗슨의 인과론은 흄의 사건모형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그 나름대로 독특한 인과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결국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양분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초래하게 되는 인과 관계들을 속시원하게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면서, 심리 무법칙성을 주장하며 정신 속성의 인과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데이빗슨의 심신 비환원주의를 그의 인과적 유효성에 대한 설명에서 주지할 수 있듯이 자신의 유기체 철학 속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며 해결 하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물리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은 풀리지 않을 만큼 뒤얽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대립적인 입장들을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유기체 철학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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