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의 談論空間 개념과 主體의 문제
서울大學校 哲 學 科
李 正 雨
이 논문은 미셸 푸코의 철학에 있어 담론공간의 개념이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고, 그러한 작업의 바탕 위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서 취급되어 왔던 주체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푸코 철학의 특징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언어의 질서(담론의 질서)를 매개시키고, 이 담론의 질서를 통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맺음(여기에서는 인식론적 관계맺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푸코의 고고학을 인식론적 場理論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즉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어떤 개인이나 어떤 작품 또는 어떤 이론 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그에 속해 있는 일종의 기저공간을 통해서 즉 인식론적 장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인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장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서 우선 언표의 개념을 규정하고자 한다. 언표란 언어가 명제, 상징, 담화 등으로서 규정되기 전의, 질료 상태의 기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질료 상태의 언표도 그것이 존재의 차원이 아닌 언어의 차원으로 전환된 것인 한 그의 기초적인 규정성들을 지닌다. 이 규정성들이란 다음과 같다. 1) 언표는 어떤 가능한 세계의 법칙들의 집합과 상관적인 관계를 맺는다. 2) 언표는 어떤 주체가 차지할 수 있는 가능한 위치들의 집합을 포함한다. 3) 언표는 복수적인 공간으로 구성된다. 4) 언표는 반복가능한 물질성(制度)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푸코가 이러한 언표이론을 구성하는 이유는 서구 인식론이 잘 다루지 않은 어떤 담론들의 層을 발굴해 내기 위한 것이다. 즉 성공을 거둔 물리학적 이론들이나 칸트, 헤겔 류의 거대 담론들이 아닌 이들의 아래 층에 분산되어 있는 知識의 층을 발굴해 냄으로써 인식론적 논의의 범위를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며, 이러한 확대를 위해 언표이론이라고 하는 언어철학적 기초를 필요로 한 것이다. 이 논문의 1장은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푸코의 이러한 작업은 대표적인 서구적 담론이 다루어 왔던,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전제해 왔던 주체의 개념을 다시금 검토하고자 하는 목표를 깔고 있다. 푸코는 で선험적 주체と의 개념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던 19세기 이후의 철학 전통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고전시대의 담론들을 재검토한다. 즉 갈릴레오의 물리학이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같은 거대 담론들이 아닌 고전시대의 자연사, 일반문법, 부의 분석같은 지식들 - 생명을 유지하고, 말하고,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대상에 관련된 지식들 - 을 분석함으로써, 고전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친숙한 것으로 생각하는 주체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푸코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체의 개념은 19세기 철학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 구조주의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논문의 2장은 푸코가 제시하는 이러한 서구 담론사의 심층 구조를다루고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고고학적 사유를 대표적인 근대적 사유인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비교해 보고자 했다. 이 세 철학은 인식의 가능근거로서의 주체, 역사의 가능근거로서의 주체, 의미의 가능근거로서의 주체를 상정하는 대표적인 선험적 주체의 철학들인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우리는 2장의 역사적 논의를 보충하고, 칸트, 헤겔에서 연원하여 훗설, 하이데거, 싸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으로 이어져 내려 온 근대의 주체철학과 오늘날의 구조주의적-고고학적 철학을 비교해 보고자 했다. 이러한 비교는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문제를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논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주요어: 담론공간, 주체, 인식론적 장, 언표, 담론, 가능한 세계, 위치, 복수적인 공간, 반복가능한 물질성, 지식, 선험적 주체, 자유
목 차
머리말...............................................................................................................................................1
1장 언표적 장: 잠재적 공존의 복수성...................................................................8
I. 명제, 어구와 언표.............................................................................................................12
1° 명제와 언표................................................................................................................12
2° 명제와 언표................................................................................................................21
II. 언표적 장과 담론의 공간................................................................................................25
1° 分化의 장과 對象出現의 공간................................................................................26
2° 주체적 位置들의 장과 주체적 定位의 공간.......................................................31
3° 언표적 공존의 장과 담론적 방계공간.................................................................36
4° 반복가능한 물질성의 장과 권력의 공간.............................................................40
III.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언표적 장...................................................................................46
1° 가능성의 개념............................................................................................................46
2° 분화의 개념................................................................................................................55
2장 근대 유럽의 주체철학과 고고학적 반론........................................................58
I.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와 표상의 구조.........................................................................60
1° 《시녀들》을 통해 본 표상의 구조.....................................................................60
2°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표상의 구조.......................................................................64
3°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68
II. 근대성과 유한성의 분석론..............................................................................................75
1°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85
2° 코지토와 비사유........................................................................................................90
3° 시원의 후퇴와 회귀..................................................................................................93
III. 구조주의와 고고학...........................................................................................................99
1° 구조주의와 근대 주체철학 논박............................................................................99
2° 구조주의와 고고학..................................................................................................103
3장 主體哲學의 양태들과 考古學.......................................................................110
I. 선험적 주체와 고고학적 場 안의 주체: 현상학과 고고학.....................................113
1° 선험적 현상학과 고고학........................................................................................113
2° 생활세계적 현상학과 고고학................................................................................120
II. 내면화된 시간과 외재화되는 시간: 변증법과 고고학............................................128
1° 多와 총체성의 문제................................................................................................128
2° 약속의 시간과 분산의 시간..................................................................................135
III. 은폐된 의미와 관계망 속의 의미: 해석학과 고고학.............................................140
1° 수직적 의미와 수평적 의미..................................................................................140
2° 주체화되는 언어와 언어화되는 주체.................................................................146
결 론...........................................................................................................................................155
참고문헌.......................................................................................................................................162
Resume.........................................................................................................................................166
머 리 말
본 논문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고고학을 밑받침해 주고 있는 논리적 토대와 철학사적토대를, 특히 主體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철학의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어 왔던 주체의 문제는, 특히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 이후, 현대철학의 핵심적인 문제틀로서 제시되었다. 주체의 문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주체의 문제는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칸트의 < 선험적 주체 > 이후 주체는 인식론적 논의에 있어 늘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받곤 했다. 구조주의의 등장 이후 이제 주체의 이러한 인식론적 위상을 재고해야 할 상황이 도래했다. 2) 주체는 인간존재론적 차원의 문제 - 특히 자유의 문제 - 를 제기한다. 19세기 이후 특히 프랑스 철학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틀이었던 그리고 자연과학과의 관련 하에서 논의되어 왔던 자유의 문제가 오늘날 인간과학과의 관련 하에서 다시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체는 또한 실천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주체의 문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실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미셸 푸코의 고고학은 이와 같은 주체의 문제틀에 관련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푸코의 고고학적 인식론이 주체의 문제틀에 대해 가지는 의미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체 개념은 인식론적 맥락에 있어서의 주체 개념이다. 주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논하는 주체는 서구 철학사에 있어 칸트 이후 그 말에 부여된 특권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이다. 푸코의 고고학이 지향하고 있는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선험적 주체에 기반하는 철학들을 분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바 그 첫 부분은 {지식의 고고학}에서 전개된 논리적, 방법론적 논의이고 두번째 부분은 칸트 이후 전개된 선험적 주체의 철학을 비판하고 있는, {말과 사물}에서 전개된 역사적 논의이다. 우리는 이 논문의 1장에서 우선 고고학의 논리적 구조를 다루고자 하며 2장에서는 고고학의 철학사적 위상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3장에서는 고고학을 다른 선험철학들(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의의와 한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 장의 첫번째 부분에서는 고고학의 언어철학적 기초를 다룬다. 고고학의 일차적인 대상은 과학사적 문헌들 - 예컨대 포르-로와얄의 저작들이나 큐비에(Georges Cuvier)의 {비교해부학 강의} - 이다. 그런데 언어란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을 허용하며 그래서 이 과학사적 문헌들을 언어의 어떤 측면에서 독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사적 문헌들의 眞僞나 논리적 논증의 유효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우선 命題로서의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논의를 할 필요를 느낀다. 또 어떤 저작의 드러난 의미가 아닌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해석학자)은 언어의 이중적 의미구조에 대한 이론을 미리 구성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푸코는 자신의 고고학적 작업에 기초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언어철학적 입장을 수립하고자 하고 있다.
고고학적 작업이 수행하고자 하는 것은 한 텍스트의 진위에 대한 파악도 그 숨겨진 의미의 드러냄도 아니며 나아가, 구조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텍스트 속에서 차이들의 놀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고고학은 텍스트와 텍스트가 맺는 관계, 텍스트와 텍스트外的인 요소들이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즉 텍스트들이 서로 관계맺음으로써 형성하는 관계들의 망과 또 텍스트들과 非텍스트들이 맺는 관계들의 망의 전체적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고고학은 한 담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담론들, 비담론들과 그 담론이 맺는 관계들의 망을 탐구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고고학이란 한 담론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바의 認識論的 場(le champ epistemologique)의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큐비에의 {비교해부학 강의}가 오늘날의 생물학에 비추어 얼마나 참된 것인지, 이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명제들이 검증가능한 것인지, 이 텍스트의 논리적 구조가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인지를 문제삼지 않는다. 나아가 고고학은 큐비에가 이 텍스트를 통해 < 진정 >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 텍스트에 있어 구조주의적인 차이들의 놀이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고고학은 큐비에의 이 저작이 어떤 근거에서 < 비교해부학 >이라는 담론에 포함되는 것인지, 비교해부학이라는 담론은 당시의 형질변환설이나 실험생리학 또는 생식이론 등의 다른 담론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것이 고대로부터 행해져 온 해부학이라는 계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나아가 그것이 당시의 비담론적 실천들 즉 당시의 정치, 경제, 技術, 종교, 철학 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다룬다. 요컨대 고고학은 비교해부학이라는 담론이 그 안에서 형성되고 변환되었던 바의 인식론적 장의 구조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푸코는 우선 언어를 위와 같은 작업을 근거지울 수 있는 그러한 방향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바 이것이 그의 언표이론인 것이다. 즉 그는 언표(l'enonce)라는 개념을 명제, 어구, 담화행위(speech act) 등과 구분함으로써 언어에 있어서의 고고학적 작업에 일치하는 측면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 논문의 1장 1절은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2절은 이제 위의 논의를 통해 구획된 영역 즉 言表的 場 -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의 언표들의 모임 - 의 개념적 定義를 다루고 있다. 언표적 장은 1) 어떤 대상이 그 안에서 출현할 수 있는 좌표계 2) 어떤 주체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위치들의 체계 3) 각각의 개념들의 방계공간으로서의 장 4) 반복가능한 물질성으로서의 장으로 정의된다. 이 네 규정성들이 기호들의 계열이 가질 수 있는 최초의 규정성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논의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푸코의 철학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는 바 우리는 고고학을 개별적인 담론이 아닌 한 담론과 다른 담론들 내지 非담론들 간의 관계망을 다루는 認識論的 場理論이자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 주체가 아닌 그 담론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장에서 찾는 客觀的인 先驗哲學(philosophie transcendantale objective)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1장의 3절에서는 고고학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보다 명료히 하고자 한다. 고고학을 객관적인 선험철학이라고 봄은 인식은 가능성의 조건을 한 담론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조건으로 봄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제 이 可能性이라고 하는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푸코가 말하는 가능성이라는 표현이 그 자체로서는 애매하며 이 말을 가능태, 잠재성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고고학이 말하는 가능성이란 잠재성으로 이해되어야만 그 명료한 의미를 획득함을 밝힐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푸코에 대한 허무주의적,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이해들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두번째의 장은 서구 근세 철학사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과 그러한 해석의 연장선 상에서의 고고학의 철학사적 위상을 다룬다. 이 논의는 푸코의 시대 구분을 따라 고전시대(17, 8세기), 근대(19세기 이후), 현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우리는 푸코의 논의를 주체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고 그의 철학사적 위상이 어디에 있는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 장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19세기 이후 서구 철학사에 등장했했던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생명, 언어, 경제적 욕구라는 실증성들 을 통해 드러나는 有限性을 지닌 존재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실증성들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인간이라는 二重體(double)에 대한 분석을 푸코는 < 유한성의 분석론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이 2장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푸코의 철학을 다른 철학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철학적 공헌과 동시에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고고학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철학 사조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을 그 비교의 대상으로서 선택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19세기 이래 전개되어 온 선험적 주체철학의 대표적인 예들이며 푸코가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기를 원했던 철학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현상학적 사유와 고고학적 사유는 主體의 문제에 있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다. 주체를 인식의, 의미생성의 근원으로 보는 현상학과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는 푸코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점도 찾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변증법과 고고학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歷史와 時間이다. 이 두 철학은 역사의 목적론과 사건의 철학, 시간의 총체화와 시간의 분산이라는 측면에서 대립하며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 두 사유양식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해석학과 고고학의 경우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意味의 문제이다. 해석학이 의미의 수직적 풍요로움 속에서 탐구의 영역을 찾는다면 고고학은 언설들이 형성하는 수평적 구조 속에서 탐구의 영역을 찾는다. 우리는 해석학과 고고학의 경우 이들의 탐구를 양립불가능하지 않도록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인식의 가능근거로서의) 현상학적 주체 개념, (역사의 가능근거로서의) 변증법적 주체 개념, (의미의 가능근거로서의) 해석학적 주체 개념을 고고학적인 주체 개념에 대비시켜 봄으로써 고고학적 주체 개념의 의의와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지금까지 푸코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어 왔다. 아마 푸코만큼 복잡다단하게 왜곡되어 온 철학자도 드물 것같다. 1) 우선 푸코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해석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英文學의 전문용어이며 푸코의 철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는 영문학자들의 해석일 뿐이며 한국에서는 이러한 영문학자들의 해석이 그대로 유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또 푸코를 허무주의자, 회의주의자, 상대주의자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푸코는 한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객관적 선험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주의, 회의주의와 거리가 멀며 나아가 (현대에 절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그의 상대주의가 정확히 어떤 형태의 상대주의인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3) 나아가 하버마스처럼 푸코를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통적인 이성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하버마스가 그러한 이성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푸코를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인 용어법에서 보아도 잘못된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 오해들이 유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해서 푸코를 프랑스철학의 전통에 위치시켜 파악하고자 한다. 푸코는 1) 꽁트(Auguste Comte), 쿠르노(Antoine Cournot) 등에서 연원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깡길렘(Georges Canguilhem)을 통해 그에게 내려 온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에 서있는 철학자이며 그러면서도 2) 지금까지 인식론의 전통에서 배제되어 왔던 타자들(광인, 병자, 과학성의 문턱을 넘지 못한 담론들, 죄수 등)에 대한 지식들 - 정신병리학, 임상의학, 부의 분석, 일반문법, 자연사, 형법학, 법의학, 정신분석학 등 - 을 인식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 철학자이다. 즉 푸코의 매력은 한편으로 지금까지 철학의 영역에서 제외되어 왔던 他者들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급진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들을 정통적인 프랑스 인식론의 엄밀한 개념적 틀을 통해 다룸으로써 철학적 성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푸코 철학의 이중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그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생겨났다고 본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를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에서, 특히 주체의 문제틀에 있어 해석하고자 하며 또한 그의 고고학적 주체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어떠한 난점에 도달하는가를 보임으로써 그의 입장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1장 언표적 장 : 잠재적 공존의 복수성
- 고고학의 논리적 구조
하나의 철학적 이론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명료화해야 할 것은 그 철학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상의 불명확성과 그로 인한 언어의 空轉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어떠한 성격의 영역인가? 우리가 고고학적 영역에 대해 논할 때, 즉 정신병리학이나 임상의학 또는 자연사, 일반문법, 부의 분석에 대해 논할 때 또는 범죄학이나 정신분석학에 대해 논할 때,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예컨대 광인이나 병원 또는 감옥)인가, 그들에 대한 담론들(예컨대 정신병리학 등)인가, 의식(예컨대 한 시대의 인간들이 가졌던 관념)인가, 관계(예컨대 텍스트와 텍스트 또는 텍스트와 그 저자와의 관계)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요컨대 고고학적 영역의 存在論的 地位는 무엇인가?
고고학이 다루는 대상은 사물적인 차원이 아니다. 고고학은 자연철학이 아니며 인식론적 탐구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영역은 의식 또는 관념의 영역 또한 아니다. 고고학은 안에서, 의식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이 아니라 고고학은 바깥에서, 객관적 선험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이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영역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어떤 단초로부터 출발해야 할까? 고고학이 역사적 실증성의 문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 실증성의 문턱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준은 言語일 수 밖에 없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 일반이 그렇듯이 고고학적 사유도 언어에서 그 단초를 이끌어 낸다. 발견의 맥락에서 볼 때 고고학이 다루는 기본적인 자료는 역사적 자료들이다. 역사적 자료는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고고학은 이러한 자료들 중 특히 지식의 차윈에 속하는 것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기술을 통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非담론적 실천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기술을 통해 이들이 형성하는 고고학적 場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고고학의 대상은 사물도 의식도 아닌 담론적 형성규칙들 및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비담론적 실천들(정치, 경제 등)이 형성하는 관계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고고학은 인식론적인 場理論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은 물리학이나 구조주의적 사유에 있어서처럼 비가시적 실재를 형성하지 않는다. 고고학은 실증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본래 하나의 장은 그 장 안에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론적 지위를 달리 해야 한다. 그러나 푸코의 고고학에서는 장과 장 안의 존재들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지위를 지니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水準을 달리 한다. 이 장은 직접적으로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가시성을 초월한 존재도 아닌 실증성의 장이다. 고고학은 이 실증성의 장을 기술하고자 하며 고고학자는 실증주의자로 머루르고자 한다. 이러한 장의 발견을 위해 푸코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담론적 단위들, 예컨대 책이나 작품, 저자 등의 단위들을 비판한다. 이들이 야기시키는 문제점,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存在論的 分節의 허약함은 담론적 형성규칙이라는 고고학 고유의 단위를 발견하도록 해준다. 고고학이 역사적 텍스트들을 다룬다면 그것은 그들을 담론적 형성규칙의 장 속에 위치시키는 한에서이다.
고고학이 역사적 텍스트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가는 그 텍스트의 언어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는가의 문제로 귀착한다. 그러나 고고학이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의 언어 자체가 아니다. 고고학이 탐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타난 언어들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들의 가능성의 조건들 즉 그들의 形成規則들이다. 열역학자들은 한 열적 系가 드러내는 결과적인 지수들을 측정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통계역학자들은 그러한 지수들을 가능케 한 물질의 성격 자체를 탐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이 탐구하는 것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형성된 언어적 형성체들이라기보다는 그 형성의 가능성 자체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장, 언어의 이러한 水準, 그것을 푸코는 언표라 부른다. 담론적 장이 지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한다면, 언표는 담론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한다.
논리학적 규칙들이 명제들의 형성규칙을 가능케 하고 언어학적 규칙들이 어구(phrase)의 형성규칙을 가능케 하듯이 언표의 규칙성은 담론을 형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담론적 형성규칙의 장을 기술하는 것이 고고학의 주된 작업이라면, 언표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그러한 담론적 형성규칙 자체를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언표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고고학의 주춧돌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전에 우선 언표의 개념을 그와 대립되는 다른 개념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언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전제하는 것이다. 또 고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언표의 정의는 일반적인 맥락에 있어서의 이 말의 사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표에 대한 푸코의 정의는 이미 행해진 고고학적 작업들과 그 작업들이 함축했던 언어철학적 전제들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푸코의 언표이론은 그가 이미 행했던 고고학적 작업들에 맞추어 언표라고 하는 개념을 나름대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언표를 그와 유사한 다른 개념들과 비교함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은 명제, 어구와의 비교이다. 이러한 비교가 함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푸코가 명제와 언표를 비교함으로써 고고학은 일반적인 인식론에 있어서처럼 한 담론의 진위 여부나 그 추론의 정당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어구와 언표를 비교함으로써 고고학과 구조주의를 구분하고자 했다고 본다. 즉 언표의 정의는 고고학을 논리학 및 언어학과 분명히 구분함으로서 고고학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논의는 과학사를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그의 기획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 그의 논의 전개는 불충분한 것으로 보이며, 나는 여기에서 그의 언어철학이 과학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위해 기획된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고자 한다.
I. 명제, 어구와 언표
1° 명제와 언표
우선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은 명제와 언표이다. 명제와 언표를 구분한다는 것은 명제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기준과 언표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다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푸코는 세가지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1) 동일한 진리값, 동일한 구성규칙, 동일한 사용가능성을 가지는 하나의 명제가 상이한 담론적 군들을 발생시키는 두 언표를 가질 수 있다(예컨대 〈아무도 듣지 않았다〉와 〈아무도 듣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2) 하나의 언표가 존재하는 곳에 중복된 명제들이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3) 하나의 언표가 존재하는 곳에 불완전한 명제들이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거짓말한다〉).
첫번째 예의 경우, 이 예를 제시함에 있어 푸코는 명제라는 개념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명제는 우선 진리값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명제는 한 어구가 지니는 의미론적 내용, 즉 진, 위, 유효성 등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제는 진리담지자로서 파악된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와 〈아무도 듣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라는 두 명제는 진리값 부여의 동일한 기준을 지니며 따라서 동일한 종류의 명제로 간주된다. 그리고 명제는 그 구성규칙 및 사용가능성에 의해 이해된다. 명제는 판단의 형태로 구성되며 어떤 어구가 명제인가 그리고 그 어구를 명제로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결정하는 일정한 규준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명제의 동일성은 그 진리값, 구성규칙, 사용가능성에 의해 정의된다. 두번째 경우 역시 명제는 진리값을 규준으로 해서 이해된다. 때문에 이 문장은, 럿셀의 입장을 따라서, 〈현재 프랑스에는 왕이 있다〉, 〈그런데 그 왕은 대머리이다〉의 두 명제로 분해될 수 있다. 즉 지시의 맥락과 서술의 맥락이 뚜렷이 드러나는 두 명제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이다. 명제의 경우 우리는 유형들의 구분에 따라 어떤 명제들을 다른 명제들 위에 중첩시킬 수 있다. 명제는 유형학(typologie)에 기초해 있다. 세번째의 예 또한 그 명제가 언표되는 水準을 명시함으로써 그 불완전성에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명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명제의 진리값 및 그 진리값의 판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형학의 정립이다. 우리는 명제에 대한 푸코의 이러한 이해는 명제에 대한 프레게적 이해를 어느 정도 전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문장을 참이라고 말할 때 그 〈참이다〉라는 형용사가 서술될 수 있는 것은 그 물질적 구현체로서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글로도 소리로도 표현될 수 있는, 한글로도 불어로도 표현될 수 있는) 그 감각적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바의 존재, 즉 그가 〈사유되는 것 Gedanke〉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사유되는 것〉은 하나의 독특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참으로서 또는 거짓으로서 파악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신의 논리적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에 의해 〈사유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で사유되는 것と을 파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유되는 것〉의 차원은 외부세계도(그리고 외부세계로부터의 추상도), 인간의 주관적인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으로 자율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도 같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사유되는 것〉의 차원은 一般性의 차원이다. 그것은 변수와 논리적 연결사들로 구성되는 함수로 형성되어 있는 일종의 論理的 存在들의 차원이다. 따라서 그것은 논리적 경우들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에 僞인 〈Gedanke〉 역시 〈Gedanke〉인 것이다. 〈사유되는 것〉의 특성은 그 논리적 일반성에 있는 것이다. 〈사유되는 것〉 자체는 감각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감각적 대상들은 오직 〈사유되는 것〉의 함수값으로서만 기능한다. 즉 〈사유되는 것〉의 일반성에 어떠한 값이 치환되어 특수성으로 화하면 진리값의 부여가 가능해지며 논리적 일반성이 현실세계에 대한 지각과 관계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유되는 것〉은 오직 진위의 차원에서만 성립한다. 〈사유되는 것〉 각각은 진이거나 위이며 그 밖의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위 판별이 문제가 되지 않는 문장들은 〈사유되는 것〉의 차원과 관계없는 문장들인 것이다. 그래서 명제에 있어서는 언표적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언표행위의 상황이나 맥락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명제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그 인식적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다. 즉 명제는 그 사용의 맥락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자신의 고유한 논리공간 속에 그 존재론적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표는 그 동일성에 있어 명제와는 다른 규준을 지닌다. 명제는 진․위의 판별이 가능한 인식적 내용들이 존재하는, 그리고 공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다른 명제들이 파생되는 연역적 공간 속에 위치한다. 이에 반해 언표는 명제와는 다른 종류의 공간 속에 위치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언표가 이 공간 자체를 형성한다. 언표는 形式化가 행해지는 공간이 아닌, 그러한 형식화의 공간이 경우에 따라 그 안에서 형성될 수 있는 바의 複數的인 공간을 이룬다. 동일한 랑그 안에서 작동되는 담론적 형성규칙의 언표군에 있어서 조차도 記述의 공간, 관찰의 공간, 계산의 공간, 제도화의 공간, 처방의 공간에 따라 언표의 의미는 달라진다({임상의학의 탄생}
은 이러한 공간들의 형성과 변환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언표는 이미 존재하는 이 복수적 공간 속에서 운동할 뿐만이 아니라 언표 자체의 운동이 이 공간들을 형성시키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결국 명제적 공간은 언표의 복수적 공간의 한 경우로 파악된다. 명제적 공간은, 프레게의 입장에 있어서 처럼 사물의 공간으로부터 추상된 것은 아닐지라도, 어디까지나 언표의 공간으로부터 마름질된 것으로 파악된다. 언표의 공간은 언어의 존재방식의 가장 넓은 가능성의 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명제적 공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푸코의 논의는 명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 왔던 것이 아닌가? 즉 그것은 한 명제가 주장, 명령, 위협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使用될 수 있도록 해주는 〈실용적 맥락〉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우리는 부정으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은 진화한다〉라는 명제의 진위는 이 명제의 실용적 사용의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명제의 진위는 지시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며, 그의 실용적 사용은 이 결정에 대해 외재적이다. 반면 언표의 맥락은 그 언표에 내재적인 것이다. 언표적 수준에 있어 각 언표는 그 진․위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각 언표는 그것이 속하게 되는 또는 그것 자체가 형성하게 되는 복수적인 공간에 의해 평가된다. 〈종은 진화한다〉하는 언표는 그것이 형상하는 복수적인 방계공간을 떠나서, 그것으로 하여금 대상, 주체, 개념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하는 상관공간을 떠나서, 그를 비담론적 실천들과 관계맺어 주는 보조공간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다. 이 공간들은 언표 자체에 내재적이며 언표가 이 공간의 성격 자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언표의 성격이 명제의 실용적 맥락 자체를 可能하게 해주는 것이다.
언표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에 있어서의 事件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표는 명제처럼 순수한 논리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표는 하나의 순수한 나타남, 우발적인 出現이다. 따라서 언표란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푸코는 베르크손-들뢰즈적 입장을 따라 사건의 존재론을 받아들인다. 사건이란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 추상이란 이 사건의 계기들로부터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사건을 순수한 출현으로 본다는 것은 곧 모든 時間을 평등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표의 차원에 있어 의미란 인식적 核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핵과 비핵을,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지 않는 意味-事件으로서 이해된다. 의미-사건은 그 말의 가장 극단적인 의미에 있어 單一한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단일성 중의 하나가 죽음이라면, 푸코가 말했듯이, 〈하나의 의미-사건은 죽음만큼이나 중립적이다.〉 때문에 사건의 철학은 差異를 그것이 〈작다〉라는 이유에서 또는 〈비본질적〉이라는 이유에서 무시하지 않는다. 즉 차이를 동일성에 재흡수시키지 않는다. 사건의 철학은 차이의 필연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다. 이것이 (우리가 뒤에서 자세히 논할) 불연속, 우연성, 물질성과 같은 언표의 중요한 성질을 가져온다.
들뢰즈에 있어 뚜렷이 나타나는 이 개념은, 푸코가 지적해 주고 있듯이,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 사태 state of affairs 〉가 아니다. 사건이란 물리학에 의해 진술되기 위해 의식에 드러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사건이란 물리학적 공간이라는 등질적 공간 속에서 해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사건이 물리학적 공간을 그 가능한 하나의 경우로서 탄생시키는 것이다. 또 사건이란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 사실성 facticite 〉을 뜻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주체의 의식구조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주체의 의식구조가 사건의 가능한 하나의 경우일 뿐이다. 나아가 사건이란 변증법의 주장자들이 말하는 〈 계기 Moment 〉도 아니다. 사건이란 어떤 목적론적 체계의 한 연결고리가 아니다. 사건의 시간은 유일한 생성의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오히려 사건의 시간이 형성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경우가 변증법적 목적론의 체계일 뿐이다. 요컨대 사건이란 물리학이나 현상학 또는 변증법 등과 같은 등질적 공간 속에서 해소될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베르크손적 생성을 형성하며, 위와 같은 등질적 공간들이 그의 가능한 경우가 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러한 사건의 철학을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베르크손적인 직관으로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 운동에 대한 존재론적 직관과 형상에 대한 인식론적 요구가 공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있어서처럼, 푸코는 사건의 존재론을 언표의 인식론으로 되접는다. 푸코는 일단은 언어에 대한 파악의 수준을 논리적 추상성의 공간으로부터 세계에로 끌고 내려 간다. 하이데거가 잘 보여주었듯이, 기호(언표의 존재의 문턱인)는 세계 속의 손-안의-존재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다른 도구들과 구분되는 고유함을 지닌다. 기호는 세계 속에서 파열하는 세계적 사건이다. 그러나 푸코에 있어 기호는 이에 못지 않게 그것이 속해 있는 고유한 영역의 내재적 질서에 따르고 있다. 언표는 세계-내적이기 보다는 세계와 接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표는 세계의 관점에서 보아 우발적인 것이지만 언어의 관점에서 보아 일정한 질서를 지니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산의 체계〉, 〈분산의 규칙성〉과 같은 푸코 특유의 용어법이 나온다. 언표는 명제와는 달리 세계의 질서와 언어의 질서가 접하는 경계선상에서 파열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언어적 질서에 속해 있는 것이며, 푸코에 있어 언어란 세계-내적인 차원으로 구체화되는 것 못지 않게 그 자율성 속에서 즉 인식론적 단절 위에서 성립하는 談論의 秩序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푸코의 언어철학은 논리학적 추상성과 현상학적 구체성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결국 언표란 명제처럼 진위판별의 일정한 규준과 공리적 공간 속에 제한되지 않는다. 차라리 언표(언표적 장)란 경우에 따라 명제가 또는 공리적 공간이 그 위에서 마름질될 수 있는 複數的인 空間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과학이 그 위에서 성립될 수 있는 객관적 선험을 형성한다. 이 공간은 과학만이 아니라 예술, 정치적 담론, 성적 담론 등이 그 위에서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긴 하지만 결코 등질적이지는 않은 그러한 복수적 공간이다. 따라서 언표가 형성하는 이 공간은 미리부터 정해진 일정한 규정성을 지니지 않으며 언표라는 事件이 파열하는 순수한 우발적 공간이다. 이 공간은 결코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생활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談論的 空間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적인 논리공간이 아닌 담론적 실천이 비담론적 실천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성립하는 공간이다. 언표란 이 공간의 두께를 형성시키고 변환시키는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이해할 경우 푸코의 언표개념은 써얼(John Searle) 등이 말하는 〈담화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언표의 개념을 다시 명료화하기 위해 이를 담화행위의 개념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푸코에 있어서의 언표의 개념은 일견 담화행위 이론에 있어서의 < illocutionary act〉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써얼에 있어 이 < illocutionary act >는 담화행위에 있어서의 물리적, 가시적 부분 즉 기호나 소리 또는 이들이 불러일으킨 반응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가시적인 부분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가리키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한 담화행위에 있어서의 어구들이 바로 그에 따라 전개되는 바의 規則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표행위의 전이나 후가 아닌 그의 〈생산〉 자체를,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생산을 지배하는 규칙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써얼에 따르면 이 < illocutionary act >야말로,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가 무엇이건, 언어적 소통의 最小의 單位인 것이다. 따라서 < illocutionary act >란 언표행위를 가능케 하는 條件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使用 그 자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바의 논리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써얼의 < illocutionary act >와 푸코의 언표 개념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담화행위는 여러 개의 언표로 구성될 수 있다. 즉 ei의 언표들이 모여 어떤 담화
행위 IA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 IA를 몇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iai + iaj로 또는 극단적인 경우(언표와 < illocutionary act >가 일대 일 대응할 경우) iak로 만듦으로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외연적 차이를 극소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소화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푸코는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언표는 비표현적 행위보다 더 하위의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푸코는 비표현적 행위가 언어적 소통의 최소 단위라는 써얼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입장은 만족스러운 것인가? 우리가 보기에 이 입장은 이중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하나의 비표현적 행위가 여러 구분적인 언표로 이루어진다는 푸코의 (아무 예도 들지 않은 채 제기된) 주장은 비표현적 행위가 어떤 한 종류에 속하는 일련의 행위의 집합체로서 구성되는데 반해 언표는 개별적인 언표행위 각각으로서 구성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써얼의 주장이 정확히 그러한 것인가의 문제와는 별도로, 앞에서도 간단히 지적되었듯이 언표도 대부분의 경우 집합을 구성해야만이 그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나 계약, 약속을 할 때 여러 언표를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는 그들이 하나의 등질적인 < illocutionary act >를 구성하는 한 그들을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모두 이어붙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 illocutionary act >를 반드시 집합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언표를 반드시 개별적인 사건으로 파악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이 설사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이 앞에서의 명제/언표의 구분과 불균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명제/언표의 경우 푸코는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의 이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담화행위/언표의 경우에는 이들의 외연적인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 이들은 큰 유사함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입장은 이중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푸코의 언표 개념과 써얼의 < illocutionary act >의 개념이 매우 근접한 것이라고 결론내려야 할까? 만일 우리가 그들의 언어이론을 그 자체로서 추상해서 다루고자 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이론을 그들의 철학 전체에서 그 이론이 차지하는 의미를 고려해 본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이론이 제시되는 맥락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써얼이 말하고 있듯이, < illocutionary act >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담화행위 이론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行爲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다. 그가 게임과의 유비를 자주 드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 illocutionary act >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를 지배하는 관습적 규칙을 의미한다. 그래서 써얼의 담화이론이 담론들(과학적 담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푸코의 담론이론이 일상적인 담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써얼 이론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담화이며 푸코의 언표이론은 어디까지나 담론적 장을 분석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즉 < illocutionary act >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적 행위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한다면 언표는 담론들의 가능성의 조건 즉 담론의 질서를 구성하는 것이다. < illocutionary act >가 겨냥하는 대상영역이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언표가 겨냥하는 대상영역은 푸코가 < 담론들 > 내지 〈지식들〉이라고 부른 언어적 텍스트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이론이 속해 있는 바의 전체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어구와 언표
이제 위와 같은 비교를 행해 본 뒤라면 우리는 언표와 어구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언표는 어구보다 더 큰 외연을 지닌다. 우리는 같은 개념을 〈한 점에서 R의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으로도 그리고 < x2 + y2 = R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가 어구(의 부분)인데 반해 후자는 어구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구란 언표라는 보다 큰 외연 가운데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만족시키는 일련의 경우들로서 파악된다. 그래서 어구와 언표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있어서도 역시 이러한 차이가 본성상의 차이가 아닌 단순한 외연상의 차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더 근본적인 차이를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언표행위의 일종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물리적 실재로서의 어구 및 그의 구성규칙으로서의 문법과 하나의 사건 - 앞에서 말했듯이 물리적인 존재도, 의식적인 존재도, 목적론의 한 계기도 아닌 - 으로서의 언표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언표란 그 언표가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보여 주는 그 可能性 자체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언표가 가시적으로 물질화된 어구와는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곧 현대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랑그가 아닌가? 잘 알려져 있듯이 현대 언어학에 있어 랑그는 관계들의 체계 혹은 그 각 요소들이 그들을 연결해 주는 등가성과 대립의 관계들로부터 독립해서는 어떤 값도 가질 수 없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체계들의 집합으로서 정의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푸코는 언표란 랑그보다 더 하위 수준의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언표란 랑그이기 위한 조건을 훨씬 넘쳐흐르는 무엇이다. 이를 예시하기 위해 푸코는 타자기의 인쇄활자와 아무렇게나 인쇄된 < A, Z, E, R, T >라는 기호계열을 비교한다. < A, Z, E, R, T >는 분명 랑그라는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일종의 질료의 더미와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표를 구성한다. 그것이 기호로서 이 세계에 出現한 이상. 그것이 언어적 질서의 공간 내에 어떤 형태로든 편입되어 있는 한. 그것이 언어로서 최초의 형상을 부여받고 있는 한. 그래서 < A, Z, E, R, T >는 그것이 어떤 구조화된 공간도 - 논리학적 공간도, 문법적 공간도, 담화행위적 공간도 - 형성하고 있지 않다는 그 사실 자체에 의해, 그것이 이들처럼 보다 엄밀히 규정된 맥락에 있어 무의미하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언표에 관한 하나의 훌륭한 예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푸코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검토해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것은 명료하다. 그는 언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第一質料처럼, 그 바탕 위에서 어떤 규정성이 부여됨으로써 명제, 어구, 담화행위가 형성되는 바의 원초적인 재료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질료-형상 개념 역시 위계적인 구조를 지닌다. 제일질료와는 달리 언표는 순수한 물질성이 아니며 최초의 형상 즉 기호로서의 존재를 부여받은 것으로 파악되며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이러한 논의에 있어 우리는 이미 지적했듯이 사건으로서의 언표와 어떤 조건을 갖춤으로서만 작동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언표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그의 논의가 사건의 존재론과 언표적 장에 대한 규정을 동시에 중첩해서 가지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다. 즉 그는 언표를 베르크손-들뢰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事件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를 질료적인 것으로 다루면서도 동시에, 뒤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인 바, 언표란 엄밀한 條件을 갖춘 것으로서만 제대로 작동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비합리적인 것의 존재론과 동일화의 인식론을 포개어 가지고 있는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언표를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작동하는 機能으로서 파악하는 한 언표가 명제, 어구, < illocutionary act >보다 하위의 어떤 것이라는 푸코의 입지는 그만큼 약화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역으로 언표를 순수한 사건으로서 파악하는 한 언표적 장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에 대한 그의 규정은 그만큼 약화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푸코철학의 二重性은 {지식의 고고학}에 자주 등장하는〈 분산의 체계 systeme de dispersion 〉라는 그의 표현에서 잘 드러나듯이 분산이라는 존재론적 사실과 규칙성이라는 인식론적 요청을 조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철학에 있어 논의의 상이한 水準들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철학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중성을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푸코의 언표이론이 위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 이론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명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푸코가 드러내고자 하는 영역은 논리학이나 언어학(또는 언어학을 응용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시도들)이 다루고 있는 영역이 아닌, 그들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언표적 장(그리고 언표들이 모여 형성하는 담론들)의 영역이다. 이 언표의 영역은 그 위에서 명제나 어구가 마름질되는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이 언표의 영역은 인간의 여러 담론적 활동들이 그 위에서 펼쳐지는 객관적 선험(le transcendantal objective)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 선험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생활세계가 아니며(고고학은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영역을 다룬다), 나아가 써얼의 < illocutionary act >와도 구분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의 언표이론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식의 영역에 대한 고고학의 전체적인 기획과의 연관하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다 명료화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다소 직관적으로 사용해 왔던 개념들 즉 가능성의 장, 객관적 선험이라는 개념들을 보다 자세히 규정해야 할 것이다.
II. 언표적 장과 담론의 공간
우리는 1절에서 다소 소극적으로 언표를 정의했다. 즉 언표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절에서는 이제 언표를 적극적으로 정의할 단계에 이르렀다. 즉 이제 어떤 언어를 언표이게 해주는 조건들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이 언표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고고학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논리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명제로서의 언어에 대해 이해해야 하듯이, 해석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이중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해야 하듯이, 고고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언표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표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 우리는 이 말을 하나의 명제로도 또는 어떤 숨겨진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문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말을 언표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언표의 규정은 어떤 새로운 언어의 발견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가 지니고 있는 어떤 새로운 次元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언표이론이 제시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언어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어떤 存在樣式일 뿐이다.
푸코는 언표를 대상, 주체, 개념, 전략의 네 가지 요소들에 관련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언표는 명제의 규정이나 어구의 규정보다 더 넓은, 매우 유연하고 포괄적인 규정을 보여준다. 이는 언표의 개념이 명제나 어구 등과 대등한 水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하위의 水準에 존재한다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해 언표들에 어떤 규정성이 더 부과되면 그로부터 명제나 어구 등이 개별화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푸코에 의해 제시된 언표의 이론은 언어에 대한 매우 포괄적인 이론임을 알 수 있다. 고고학은 전통적인 인식론에 있어서처럼 이미 과학성의 문턱을 넘어선 담론들을 다루지 않는다. 고고학은 경험의 수준에서 벗어나 이미 言語의 문턱을 넘어선 존재들을 다루지만 과학성의 문턱 아래에 존재하는 담론들을 그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언표이론이 왜 언어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언표에 대한 네 가지 규정을 차례로 알아 보자. 그리고 이 언표이론을 (언표의 집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담론의 이론과 연결시켜 봄으로써 우리는 고고학적 작업의 논리적 뼈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분화의 장과 對象出現의 공간
언표가 언표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그것이 記號들의 연쇄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언표의 조건은 이 기호들의 연쇄라는 조건에 네 가지의 조건이 추가될 때 성립된다. 그 첫번째 것은 우선 한 기호들의 계열이 어떤 可能的인 世界(le monde possible) 또는 空間(사물들의 존재양식들의 체계)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호들의 연쇄는 그 자체는 기호들이 아닌 어떤 존재와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존재를 일단 대상이라 부른다면 한 기호계열은 그의 대상과 관련맺음으로써 언표로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는 이름과 그의 지시대상, 명제와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 어구와 그의 의미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와는 다르다. < 소크라테스 >라는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살아있었을 때나 오늘이나 또 그리이스에서나 한국에서나 바로 그 소크라테스를 가리킨다. 그러나 언표는 이 관계보다 더 一般的인 관계를 지닌다. < 소크라테스 >라는 언표는 그것이 어떤 공간 속에서 언표되었는가에 따라 - 예컨대 그것이 철학사를 기술하고 있는 책에서 언표된 것인가 아니면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영화에서 언표된 것인가에 따라 - 다른 언표로 간주된다. 언표란 한 이름이 그 안에서 언표되고 있는 바의 그 空間의 構造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 소크라테스 >와 그 소크라테스의 관계는 언표로서의 < 소크라테스 >가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境遇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유클리드적 관계들이 수학적 존재들이 가질 수 있는 관계들 중 어느 한 경우일 뿐인 것과 같다. 명제나 어구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의를 적용시킬 수 있다. <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와 같은 명제나 < 무색의 푸른 관념들이 광폭하게 잠잔다 >와 같은 어구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들이 명제로서 또는 어구로서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과 관계맺을 수 있는 공간들 중 어느 한 공간에 있어서일 뿐인 것이다. 이는 논의의 차원을 다소 일반화시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경우에로 확장할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명제나 어구 등에 비해 언표는 보다 일반적인 水準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즉 명제나 어구 등은 언표라는 기본 조건 위에서 개별화되는 것이다. 명제나 어구 등의 진리치에 대해 또는 의미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언제나 명제적 공간(앞에서 논한 프레게적 공간이 그 한 예가 된다)이나 어구적 공간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언표는 이러한 공간들과 대등한 어느 한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표는 어떤 기호계열들이, 그것이 명제이든 또는 어구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관계맺을 수 있는 相關關係의 空間들의 集合과 관계맺는다. 간단히 말해 언표는 언제나 어떤 相關者(correlat)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언표로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표의 상관자는 단순한 사물이나 사람(이름과 그의 지시대상에 있어서처럼), 어떤 현실적인 사태(명제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또는 상상적인 사태(문학적 언표들의 공간에 있어서처럼) 등이 아니다. 언표의 상관자는 < 사물 >이나 < 사실 >이 아니며 나아가 일반적인 < 현실 >도 아니다. 언표의 상관자는 < 어떤 對象들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그리고 어떤 關係들이 부과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領域들의 集合 >으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표적 공간은 그 바탕 위에서 어떤 가능성들이 마름질되는 그러한 可能性들의 法則들을 의미한다. 모든 언어는 그 안에서 그것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바의 어떤 공간 또는 세계 즉 存在의 規則들과 관계맺고 있다는 것이 푸코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즉 모든 언어는 그의 < 좌표계 referentiel > - 가능세계들의 복수적 공간 - 와의 상관관계 하에서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공간을 우리는 장소, 조건, 출현의 장, 분화의 심급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공간이 바로 < 어구에 그 의미를 주는, 명제에 그 진리가를 주는 存在의 出現과 制限의 可能性들을 정의한다. > 이 공간은 그 안에서 일정한 조건에 따라 명제, 어구 등이 분화되는 分化의 空間(여러 가능한 공간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분화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다음 절에서 보다 상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표이론의 이러한 요소가 고고학적 작업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고고학은 엄밀한 규정에 의해 개별화된 담론들 예컨대 과학을 다루지 않는다. 고고학은 어떤 과학이 과학으로서 개별화되기 이전의 수준을 다루는 것이다. 예컨대 고고학은 {종의 기원}보다는 {철학적 윤회}를 문제삼는 것이다. 고고학은 과학이나 문학 등이 개별화되기 이전의 수준 즉 경험의 차원을 넘어 언어화되었으나 아직 과학 등으로 개별화되지 않은 일반적인 수준을 다룬다. 즉 고고학은 개별 학문들이 다루는 제영역들이 마름질되지 않은 보다 일반적인 공간, 객관적 선험을 다루는 것이다. 언표이론은 바로 이러한 고고학적 작업을 논리적으로 정초하기 위한 언어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담론들의 형성과 변환을 연구하는 고고학에 있어 언표이론적인 맥락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고학이 어떤 對象을 다룬다면 그 대상은 어떤 사물도 사태도 아니다. 고고학이 다루는 대상은 바로 언표이론에서 논한 바의 언표의 相關者인 것이다.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광기의 역사}에서 다룬 대상은 광기라는 어떤 실체도 광기라는 말에 연관되는 어떤 사태들도 아니다. 고고학이 다루고자 하는 광기라는 대상은 광기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생성된 갖가지 종류의 언표들이 관계맺고 있는 복합적인 공간 그리고 그 공간과 관계맺고 있는 비담론적 실천들의 공간인 것이다. {광기의 역사}가 매우 복잡한 여러 대상들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광기는 그 자체로서 정의된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예컨대 이성적인 것< 이 아닌 것 >과 같이 否定的 방식을 통해 정의되곤 했다. 부정은 단독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어떤 검은 책상이 있을 때, < 이 책상은 노랗지 않다 >라는 말은 < 이 책상은 파랗지 않다 >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부정은 긍정의 경우만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것들에 의해 언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광기는 어떤 存在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無로서 다루어져 왔다. 그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타자들에 의해 정의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병리학은 매우 이상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無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아 그를 자신의 개념체계를 통해 하나의 존재로, 광기 자체에 대해서는 타자로 만들어 분석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기의 역사}가 왜 특히 對象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담론의 분석에 있어 對象을 다루는 방식의 예로는 우선 고고학적 분석에 있어서의 한 대상의 분석은 그 대상이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태보다는 그 대상이 그 안에서 출현한 바의 공간의 구조를 다루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푸코는 이를 < 出現의 表面 >이라고 부른다. 즉 고고학은 광기라는 대상이 바로 그 안에서 출현한 바의 공간, 구체적으로 말해 광기라는 대상이 그 안에서 출현할 수 있었던 바의 담론들/비담론들의 복합적인 관계망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19세기의 정신병리학적 언설에 있어 고고학이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병리학이 그 위에 존재하는 바의 표면인 것이다. 19세기 초에 있어서의 가족, 광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접하는 사회집단들, 노동활동, 종교적 공동체만이 아니라 당시 새로이 출현했던 예술, 성, 벌 등이 형성하는 복합적인 표면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병리학과 그 대상인 광기는 바로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들의 場 속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부분으로는 광기라는 대상을 다룰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인정된 제도들을 들 수 있다. 한 대상에 대한 논의는 그 논의를 행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떠나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다룰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위임받은 이 권위있는 제도들을 푸코는 < 制限의 審級들 >이라고 부르고 있다. 광기라는 고고학적 대상은 그를 언표하는 각종의 제도적 장치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 초 광기를 대상으로서 분절하고, 지시하고, 이름짓고, 수립했던 의학이나 한 개인에 대한 유죄판결에 있어서의 감형요인으로서 광기를 다루었던 형법적 정의, 병리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분리시키기 위해 애썼던 종교적 권위, 광기의 특권적인 장소로서의 문학적 담론들을 다루었던 문학비평 등이 이러한 심급들의 예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광기라는 대상 속에 포괄되는 여러 현상들을 분절해 주는 < 특이화의 그물들 >을 들 수 있다. 정신의학적 대상들로서의 광기들을 분리하고, 대립시키고, 인척관계를 맺어주고, 재분류하고, 서로 서로 이끌어내도록 해주는 것은 광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분절들이나 정신의학으로부터만 유래하는 개념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 의존과 소통의 도식에 의해 연결된 기관들의 삼차원적 집합으로 이해되었던 신체, 여러 종류의 인과이론에 입각해 해석되었던 개인적인 삶과 역사 그리고 신경-생리학적인 상호관계의 놀이들이라는 복합적인 그물 내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 어떤 존재가 그 존재로서 즉 어떤 하나의 존재로서 분절되는 것은 그 존재의 내재적 성질에 입각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즉 그것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바의 場의 구조에 의해 분절되는 것이다.
고고학이 광기라는 대상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광기라고 하는 말이 지시하는 어떤 실체도 광기라는 말에 관련되는 어떤 현상들로 아니다. 그것은 광기라는 언표가 언표될 수 있기 위해서 그 언표가 관계맺고 있어야 하는 어떤 공간, 정신병리학이 규정하는 공간이 아닌 바로 정신병리학이 그 안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공간이다. 광기의 출현의 표면들, 제한의 심급들, 특이화의 그물들은 이 공간이 지니는 세 측면들일 뿐이다. 고고학은 광기라는 대상이 그 안에서 성립할 수 있는 場을 기술하고자 하는 場理論이자 정신병리학 등의 담론을 탄생하게 해준 선험적 장을 기술하고자 하는 객관적 선험의 철학인 것이다.
2° 주체적 위치들의 장과 주체적 정위의 공간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두번째의 규정은 그것이 主體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그의 대상 즉 상관자만이 아니라 그 기호계열의 주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고학적 주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바의 주체가 아니다. 고고학적 대상이 단순히 한 언표의 지시대상이 아니듯이 고고학적 주체도 한 언표를 이 세계에 현존시킨 바의 어떤 인물을 뜻하지 않는다. 철수가 < 땅거미가 지고 있다 > 또는 < 모든 결과는 어떤 원인을 지닌다 >와 같은 말을 했을 때 또는 <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와 같은 말을 했을 때 우리는 손쉽게 철수가 이 언표들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대상이 한 언표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 관계맺어야 하는 어떤 공간을 의미하듯이 고고학적 주체란 한 언표가 언표되기 위해 어떤 주체들이(그 주체가 철수인가 앙드레인가는 아무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 언표와 관계맺을 수 있는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즉 그 언표가 관계맺어야 하는 主體的 位置들의 空間을 의미하는 것이다. 철수가 < 땅거미가 지고 있다 >라고 언표할 때 그리고 <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진다 >라고 언표할 때 주체는 철수가 아니라 철수라는 현실적 주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바의 그 가능적 주체(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상을 언표하는 주체, 어떤 철학적 원리를 언표하는 주체)의 위치인 것이다. 이 위치들이 배분되어 있는 공간이 고고학적 주체의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 땅거미가 지고 있다 >라는 언표는 시공간적인 어느 점에 있어 땅거미라는 현상 앞에 현존하고 있는 어떤 주체들의 공간과 상관관계를 맺음으로써 언표될 수 있는 것이며 <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진다 >라는 언표는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언표하는 어떤 가능적 주체들의 공간과 상관관계를 맺음으로써 언표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이란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대상의 측면에서 논했던 바로 그 공간과 동일한 공간 즉 언표적 장이다. 고고학에서의 주체의 개념은 이 공간 내에서의 그의 位置의 개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한 현실적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을 대화 중에 들었을 때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머리에서 들었을 때 그 언표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可能的 主體들의 空間인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이 주체를 분석한다면 그것은 큐비에도 맑스도 다윈도 아닌 이들이 바로 그 공간의 어떤 위치에 자리잡음으로써 언표할 수 있었던 그 장의 분석인 것이다.
그래서 언표의 주체는 하나의 규정된 기능, 어떤 개인들 - 그들이 언표를 언표했을 때, 어느 정도까지는 無差異的인 - 에 의해 채워질 수 있는 하나의 비어 있는 함수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유일하고 동일한 개인이 언표들의 계열 속에서 상이한 위치들을 차지할 수 있고 상이한 주체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수학자가 그의 저작의 서문에 그 저작의 의도를 서술할 때, < 제삼의 양과 동일한 두 양은 같다 >와 같은 명제를 전제할 때 또 < ․․․은 이미 증명되었다 >라고 말할 때 나아가 < 나는 ․․․한 점들의 모든 집합을 직선이라고 부른다 > 또는 < 어떤 요소들의 유한한 집합이 있다고 하자 >라고 말할 때 그 동일하고 유일한 개인은 상이한 言表的 主體의 位置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언표적 주체는 언표의 作用因이 아니다. 그것은 < 상이한 개인들에 의해 유효하게 점유될 수 있는 規定된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 >인 것이다. 요컨대 고고학은 < 주체와 같은 어떤 것이 어떻게, 어떤 조건들에 따라 그리고 어떤 형태 하에서 담론의 질서 속에 나타나는가? > 하는 물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에서 말한 공간이나 위치란 푸코가 실제 해놓은 작업에 있어 어떤 구체적인 공간/위치를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겨난다. 이 공간이란 다름아닌 우리가 대상의 측면에서 언급했던 그 場일 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근세 유럽이라는 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근세 유럽의 체험의 장도 인식의 장도 아닌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담론적 형성의 장을. 또한 언표적 주체의 위치란 곧 사회적 심급들에 있어서의 언표하는 주체들의 地位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언표이론을 담론의 분석에 대한 작업에 연관시킬 수 있다.
고고학적 작업에 있어 문제되는 것은 위에서 논한 주체적 위치들의 장 즉 언표행위의 양태들이 분포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있어 제기되는 물음은 우선 한 언표를 취할 수 있는 地位에 관한 물음이다. 고고학적 작업에 있어 < 누가? >라는 물음은 < 어디에서? >라는 물음으로 대치된다. 예컨대 < 의사라는 지위는 일정한 능력과 지식의 규준들을, 제도와 체계 그리고 교육학적 규범들을, 지식의 실험과 실천에 권리와 동시에 제한을 주는 法的인 條件들을 포함한다. > 나아가 의사의 지위는 지위들이 분포되어 있는 공간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음으로써 즉 다른 지위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이 지위는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유럽 사회에 있어 크게 변환되었으며 이 변환을 기술하는 것이 {임상의학의 탄생}이 수행하고 있는 주요 작업인 것이다.
나아가 이 지위는 법적, 제도적 지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추상적 지위에는 또한 구체적인 물질적 지위(자리, 위치)가 상응하는 것이다. 이 지위란 곧 물질적 場所를 의미한다. 예컨대 의사는 의학적 제반 지식이 코드화되어 있는 병원, 이 코드화를 벗어나는 영역에 있어 종종 보다 나은 지식을 가져다 주는 외적인 실천, 병원과 별도로 치료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험실 그리고 각종의 정보들이 집적되어 있고 의학과 연관되는 다른 지식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서의 도서관 등이 형성하는 공간적 장 안에서 그의 언표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의학적인 담론의 주체는 이러한 장소들이 형성하는 장의 구조 속에서 어떤 개인들이 점유하는 일정한 자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체의 위치는 또한 그가 다양한 영역들이나 대상들의 집단들과 관련하여 처할 수 있는 狀況에 의해 정의된다. 의사가 한 언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해 있는 고고학적 장의 갖가지 요소들과 관련맺음으로써 그가 처하게 되는 상황, 즉 그 장 속에서의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의학적 담론의 주체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그 담론을 언표한 개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그에 속해 있는 바의 고고학적 장을 기술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 근대 인식론에 있어서의 선험적인 주체는 이 객관적 선험의 장 속에 흡수되어 버린다.
푸코 자신은 명확히 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서 푸코가 논하고 있는 지위, 장소, 상황 등은 실제 世界에 있어 그들만이 아니라 세계와 나란히 놓여 있는 담론적 장 속에서의 그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가 말하는 지위, 장소, 상황 등은 담론적 실천들과 비담론적 실천들의 관계맺음의 양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주체가 어떤 위치를 잡는다 함은 실제 세계의 공간 속에서 어떤 지위, 장소, 상황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세계가 그의 상관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공간 즉 담론적 공간 속에 위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이해해야만 담론의 첫번째 규정과 두번째 규정은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이제 언표/담론에 대한 두 측면에서의 규정만을 논했을 뿐이지만 이 두 측면만으로도 우리는 고고학적 사유의 특이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인식론의 중심 문제는 인식의 가능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인식론적 출발점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인식의 근거를 어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형이상학적 원리들이나 선험적 주체라는 원리 나아가 객관과 주관을 이어주는 (그 자체 증명되지는 않는) 어떤 연결선에 입각한 이론들이 제시되곤 했다. 대부분의 프랑스 인식론자들은 이러한 입장들을 거부하고 인식의 근거를 실제 과학들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메타적 분석에서 구하곤 했다. 푸코도 물론 이러한 전통에 속한다. 푸코의 공헌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 이들이 그 구조 안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비로소 대상으로서 그리고 주체로서 성립되는 바의 그러한 제삼의 요소 - 언표적 공간, 담론적 공간, 객관적 선험의 장, 고고학적 장 등으로 부를 수 있는 - 를 발견하고 그를 기술할 수 있는 체계적 방법을 고안해 낸 점에 있다. 이 장은 일반적인 역사적 장도 아니고(이는 비담론적 실천의 영역이다)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생활세계도 아니다(고고학은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담론들을 다룬다). 그것은 (내가 뒤에서 논할) 상징적 공간 내지는 잠재적 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의 사유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구조주의는 아닐지라도 넓은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3° 언표적 공존의 장과 담론적 방계공간
한 기호적 계열을 언표로 만들어 주는 세번째의 기능은 그 계열에 연합해 있는 어떤 언표적 領域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 한 언표의 대상과 주체가 그 언표가 속해 있는 고고학적 장에 의해 규정되듯이 다시 언표는 그것이 다른 언표들과 함께 형성하는 장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한 기호계열이 언표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傍系空間을 그 필수적인 요건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명제나 어구 등도 그의 방계공간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명제는 그것이 속해 있는 연역적인 연쇄 없이는 고려될 수 없다. 즉 하나의 명제는 연역적인 연쇄의 한 고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구 또한 일정한 문법적 틀을 요구한다. < I am a boy >라는 어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英文法이라는 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표의 방계공간은 이러한 경우들과는 그 맥락을 달리 한다. 명제나 어구의 경우 연역체계나 문법은 이들이 명제나 어구로서 성립되기 위해 전제되는 것들이다. 즉 이들은 명제나 언표와 같은 水準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언표의 경우 한 언표와 그에 연합되어 있는 방계공간은 서로 다른 水準에 놓여 있지 않다. 그들은 동일한 수준에 놓여 있으며 서로 연합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言表的 場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언표이론에서 논하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언표가 아니라 언표적 場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언표는 그와 함께 하나의 언표적 장을 형성하는 이웃하는 언표들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나아가 명제나 어구도 그들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들의 방계공간과 즉 그들과 연합되어 있는 명제들이나 어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즉 명제는 그의 지시대상과의 관련하에서 진리치를 가질 수 있으며 어구는 그 어구가 사용되는 맥락을 요구한다고. 그러나 이는 명제의 진리치와 어구의 의미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지 한 기호적 계열이 명제 또는 어구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즉 단독적인 명제도 명제이며 맥락이 분명하지 않은 어구도 어구인 것이다. 반면에 언표는 오직 언표적 장의 한 요소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언표적 장을 떠난 언표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 하나의 언표는 언제나 다른 언표들이 기식하는 여백들을 가진다. > 이 여백이란 흔히 말하는 문맥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문맥들은 이 여백들로부터 마름질되는 것이다. 즉 이 여백들이란 바로 문맥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場인 것이다. 현실적인 이러저러한 문맥들이란 이 언표적 장 안에서 성립될 수 있는 어떠한 境遇들인 것이다.
위의 논의를 바꾸어 말한다면 언표적 공간은 不連續을 그 필수적인 요건으로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표적 공간은 등질적 공간이 아닌 다질적 공간인 것이다. 언표적 공간은 복수적인 공간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언표가 그의 방계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명제나 어구에 있어서의 논리적 연쇄 또는 맥락과 언표의 방계공간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언표이론의 이 부분이 담론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갈 때 그것은 槪念의 형성에 대한 문제로 변환된다. 고고학은 한 담론에서 나타난 개념들을 그들이 형성하는 場에 입각해 분석한다. 물론 이 장은 논리적으로 연역적인 장은 아니다. 그것은 언표들이 나타나고 순환하는 그곳에서 형성되는 조직화로서의 장일 뿐이다. 고고학은 이 장 안에서의 개념들의 出現의 體系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는 우선 繼起의 형태들이 있다. 즉 한 담론 내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 그 담론의 장 내에서 계기하는 형태들을 기술해야 한다. 즉 고고학은 언표적 계열들의 다양한 座標化를 기술한다. 언표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열을 형성하며 또 이 계열들은 좌표화된다. 이 좌표화의 유형에는 영향들의 질서, 계기적인 함축, 논증적인 추론 등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고고학은 언표들의 다양한 依存의 유형들을 기술한다. 예컨대 가설과 검증의 의존관계, 주장과 비판의 의존관계, 일반법칙과 특수한 적용의 의존관계를 기술할 수 있다. 언표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간에 의존의 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고고학은 여러 언표군들이 그에 따라 조합되는 다양한 수사학적 圖式들을 기술한다. 각각 계열을 형성함으로써 한 텍스트나 담론의 건축물을 특성화하는 서술들, 연역들, 정의들은 서로서로 연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고전시대의 자연사는 단순히 인식의 새로운 형태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 언표들을 系列化하는 規則들의 集合이며, 그 안에서 개념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반복적인 요소들이 분배되는 의존의, 질서의, 계기의 규칙적인 도식들의 집합 >인 것이다.
공존의 장으로서의 언표적 장의 형태는 또한 共存의 형태들에 의해 규정된다. 언표는 단독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언표들과의 공존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선 現存의 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언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가시적 표면을 형성하고 있는 언표들과 더불어 기능한다. 알드로반디(Ulisse Aldrovandi)가 그의 연구를 수행했을 때 그리고 린네가 그의 연구를 수행했을 때 그들의 작업을 둘러싸고 있었던 현존의 장은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倂存의 장을 기술할 수 있다. 이는 한 언표들의 집합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언표들의 집합들을 의미한다. 예컨대 린네(Carl von Linne)와 뷰퐁은 당시의 우주론, 철학, 地史, 신학, 수학 등과의 관련하에서 그들의 자연사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記憶의 영역을 기술할 수 있다. 즉 언표는 그 언표에 앞서 존재함으로써 현재의 언표가 필연적으로 관계맺어야 하는 축적된 언표들과의 연관하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시대 초기의 자연사가들은 매우 얇은 기억의 장만을 소유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축적된 기억보다도 표상의 새로운 방식이 더 본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干涉의 과정들이 있다. 언표적 계열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서로서로 관계맺는다. 언표적 간섭의 예로는 우선 다시 쓰기의 기법들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고전시대의 자연사가들은 선형적인 記述들을 다시 씀으로써 그들은 고전시대의 분류적 표와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옮겨 쓰기의 방법(린네는 그가 창안해 낸 명명법과 분류표 속에서 자연언어로 표현되던 분류를 옮겨 썼다), 번역의 양식(예컨대 생명체들에 대한 지각을 통해 형성된 질적 언어와 수학적 표현들은 서로 번역을 통해 간섭한다), 槪算(뚜른느포르 Joseph Tournefort 이래의 구조적 분석과 지각적 언표의 간섭은 보다 안정된 개산을 가능하게 했다), 언표들의 유효성 영역에 대한 제한방식(언표들의 유효성 영역의 확대 및 축소는 다른 언표들과의 관계를 변형시킨다), 언표의 유형을 이전시키는 방식(하나의 담론이 다른 담론으로 이전되는 경우. 예컨대 식물들의 특징학으로부터 동물들의 계통학으로의 이전), 체계화와 재분배의 방식(분산되어 있던 언표들의 체계화와 체계화되어 있던 언표들의 분산) 등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4° 반복가능한 물질성의 장과 권력의 공간
하나의 기호적 계열이 언표가 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은 그것이 어떤 物質的 實存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언표는 그것이 반드시 어떤 물질적 기반을 가질 때 비로소 언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물질성은 언표의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명제나 어구 등도 모두 물질성을 필요로 하며 물질성이란 사실 기호 일반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언표의 물질성은 푸코에 있어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쉽게 알 수 있듯이 물질성이란 事件으로서의 언표를 말한다. 상이한 소리를 통해 발생한 동일한 내용의 언표들 또는 상이한 표면에 새겨진 언표들은 사건들로서 분산된다. 그러나 언표의 특징은 그것이 단지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반복적인 常項들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표적 물질성의 특징은 분산되면서도 反復되는 무한한 언표행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의 形式인 것이다. 즉 언표를 특징지우는 것은 反復可能한 物質性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는 언표의 이 반복가능한 물질성, 그것은 곧 언표가 그 안에서 일종의 戰略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바의 그 制度的 場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이 말하는 물질성이란 본래적 의미에서의 자연철학적 물질성만이 아니라 언표의 이러한 시공간적인 사건으로서의 측면이 아닌 그 시공간적 사건들의 地位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의 생존시에 출간된 책들과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들은 그 물질성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닌 그 물질성을 조직화하는 物質的 制度들의 복잡한 規則의 차이인 것이다. 고고학이 문제삼는 물질성이란 바로 이러한 규칙들에 의해 조작되는 물질성인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반복가능한 물질성을 지배하는 규칙을 세가지로 나누어 예시하고 있다. 우선 再記入과 移書의 가능성이 있다. 언표는 어떤 물질적 조건에서 다른 물질적 조건으로의 다시 쓰기와 옮겨 쓰기의 가능성을 조작하는 제도의 질서에 따른다. 또 安定化의 場으로서의 규칙성이 존재한다. 즉 한 언표가 그 안에서 비로소 정확히 규정될 수 있는, 안정화될 수 있는 장. < 종은 진화한다 >라는 판단은 다윈 이전과 그 이후에 있어 동일한 언표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윈이라는 개인에 있는 것도 그 언표의 의미 변화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언표이론의 관점에서는 변화된 것은 그 언표의 使用條件들과 再投資條件들인 것이다. 즉 변화된 것은 사용의 도식들, 고용의 규칙들, 그 언표의 방계공간으로서의 안정화의 장인 것이다. 언표를 반복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장인 것이다. 나아가 使用의 場이 있다. 언표는 그것이 사용되는 담론적․비담론적 장의 종류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고고학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물질성으로서의 언표들이 바로 그 안에서 사용되고, 재투자되고, 이동되고 나아가 판매되기까지 하는 담론적․비담론적 제도들의
장인 것이다.
이제 이 언표이론을 담론의 분석과 연결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고학은 개념의 형성만이 아니라 이론들 및 테마들의 형성, 즉 푸코가 戰略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형성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는 우선 담론들의 가능한 回折點들을 결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상이한 전략들의 교차, 선택 및 배분, 상호배제 등의 역할을 기술한다. 고고학은 또한 담론적 별자리의 經濟學을 기술한다. 즉 한 담론 내에서 일련의 언표들을 허락하는 또는 배제하는 규정 원리를 구성한다. 이 두 작업은 담론의 장 속에서 일정한 전략들이 나타나고 또 배제되는 그리고 상호 관계맺는 각종의 역학들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고고학은 또 하나의 작업을 요구하는 바 이 부분에 있어 특히 담론의 분석은 언표적 규정의 네번째 조건과 연계된다. 푸코는 이 부분에 이름을 붙여 주고 있지 않다. 나는 이에 < 欲求와 權力의 놀이들 >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우선 담론이 非談論的 實踐들의 장 속에서 수행해야 할 기능을 기술한다. 일반문법의 교육학적 역할, 부의 분석이 행한 정치적 역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담론에 관한 專有의 체제와 과정을 포함한다. 이는 담론이 지니는 소유권으로서의 측면에 관계한다. 경제학적 담론은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사회 집단의 소유권과 관련해 일정한 기능을 행사했다. 마지막으로 담론에 관련해서의 欲求의 가능한 위치를 들 수 있다. 예컨대 부에 대한, 언어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담론들은 욕구에 관련하여 잘 규정된 위치들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담론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언표의 물질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앞서 주체적 위치들의 장에 대한 논의에서 등장한 지위의 문제가 권력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특히 이 반복가능한 물질성에 대한 논의와 그에 상관적인 담론이론은 푸코의 철학에 있어 權力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그 성격에 있어 다른 또 하나의 작업을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은 그 위에서 각종의 담론들이 마름질되는 고고학적 장 즉 언표적 장을 다루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즉 고고학은 언표적 장의 記述에 그 기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문제는 이제 그 언표적 장이 왜 그러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원인에 의해 그 구조가 변환되었는가를 說明하는 차원으로 넘어간다. 이제 그 언표적 장을 운동시키는 힘, 그의 原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고고학이 정력학적인 작업이라면 이제 이 작업은 동력학적 작업을 의미하게 된다. 이 동력학적 작업에 푸코는 系譜學(geneologi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고고학과 계보학 사이에 급진적인 단절은 없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 형태들을 분석해 왔던 푸코는 이어 그 형태들의 근저에 흐르는 힘의 관계들을 분석해 나간 것이다. >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푸코의 고고학이 객관적 선험의 장을 기술하고자 하는 철학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객관적 선험의 장이란 곧 고고학적 의미의 대상이 그 안에서 출현하는 장이요, 주체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는 장이요, 언표들이 그 안에서 공존의 장을 형성하는 장이요, 욕구와 권력의 놀이들이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장이다. 이 장으로부터 각종의 담론들이나 과학들이 개별화되는 것이다. 이 장이야말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이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주어지는 可能性의 場이기도 하다. 이 가능성의 장을 기술하는 것이 고고학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언표이론과 담론의 분석 사이에 어떤 불연속이 존재하지는 않는가? 언표이론에 있어 푸코는 언표적 장을 매우 포괄적인 가능성의 장으로서 정의했지만 담론의 분석에 있어 푸코가 실제 다루고 있는 영역은 근세 유럽이라는 늘 다루어지곤 했던 영역이 아닌가? 이러한 물음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표이론이 담론의 분석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적 바탕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푸코가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근세 유럽이라 해도 그는 근세 유럽이 포함하고 있는 측면들 중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영역을 다루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고학적 작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고고학이 다루고자 하는 영역을 포함하지 않고 있던 지금까지의 언어이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는 것이다. 언표이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성된 것이며 따라서 언어라는 존재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지평에서 푸코는 지금까지의 인식론에서 배제했던 영역을 다룰 수가 있었으며 , 푸코의 언표이론은 그가 실제 해놓은 작업들에 대한 논리적 바탕을 제공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열어 놓은 가능성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탐구를 근거지워주는 일종의 연구프로그램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고고학적 작업이 지니는 포괄적인 성격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즉 고고학은 인식의 대상, 인식의 주체, 인식체계(즉 개념들의 체계), 인식에 있어서의 비담론적 측면들을 모두 다룸으로써 매우 포괄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네 요소들이 모두 고고학적 장 속에 흡수되어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대상은 언표의 상관자로서 다루어지며, 주체는 인식의 가능근거가 아닌 언표적 장 속에서의 어떤 위치로 다루어지며, 개념들은 과학적 차원이 아닌 언표적 차원에서 언표적 장에 위치지워지며, 물질성은 언표적 장에 상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푸코에 대한 모든 일면적인 이해들을 물리쳐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인식을 비담론적 차원을 통해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들과 구분된다. 즉 고고학은 생활세계를 통해 인식을 설명하려는 현상학적 시도와도, 인식을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들로부터 설명하려는 지식사회학, 맑스주의, 뒤르케임학파 등과도 구분된다. 그러나 동시에 고고학은 인식을 오로지 인식의 차원에서만 다루는 전통적인 인식론으로부터도 구분되는 것이다. 요컨대 푸코에 있어 거부되는 것은 바로 과학적 차원/사회적 차원이라는 二分法 자체인 것이다. 푸코는 경험의 차원이 아닌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차원이면서도 순수 과학으로 정련되지 않은, 바로 과학이 그 위에서 마름질되는 바의 담론의 차원에 자리잡음으로써 기존의 내재적/외재적 이분법 자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과학과 비담론적 차원 사이의 영역을 발견함으로써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서서 담론/비담론이 접촉하는 극한을 보다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과학의 가능성의 조건이 비담론적 차원도 주체적 차원도 아닌 담론적 장 속에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III.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언표적 장
1° 가능성의 개념
우리는 앞의 절에서 고고학적 장을 일종의 가능성의 장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논의가 보다 정확한 것이 되려면 < 가능성 >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가능성의 개념을 위해 < possibilite >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이 말이 고고학적 사유의 특성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개념에 있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이미 나타나듯이 현실적(물리적) 가능성과 논리적 가능성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적 탐구가 관련맺고 있는 가능성은 일견 현실적 가능성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언표란 활자이든 소리이든 어떤 형태의 물질적 존재로서 세계에 출현했을 때 언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언표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물질적 가능성이 언표를 언표이게 하는 고유한 조건은 아니다. 물리적 조건은 세계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공통되는 조건이지 언표에 고유한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표를 언표이게 해주는 고유한 논리적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가능성을 세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1) 필연적으로 僞이지는 않은 것 2) 그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 되는 바의 것 3) 그에 대해 그것이 아마 존재하리라고 말하는 것이 참이 되는 바의 것. 첫번째의 경우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 모두에 대해 사용되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僞가 되지는 않는 것의 반대는 필연적으로 僞가 되는 것이다 즉 불가능성이다. 이 경우 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가능한 것 역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논리적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므로 불가능성 역시 논리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가능성이란 가장 넓은 의미로서 사유가능한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의 가능성은 歷史的 實證性으로서 파악되는 언표의 특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표에 있어 문제되는 것은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이 아닌 실질적 가능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두번째와 세번째의 경우 개연성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지만 일단 어떤 條件이 갖추어질 경우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 경우는 첫번째의 경우보다 더 작은 집합을 형성하며 언표는 실재하는 어떤 존재라는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언표의 특성을 드러내 주지는 못하는 바 왜냐하면 언표적 장에 있어서의 가능성이란 단지 어떤 경우들의 존재가능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가 적당한 조건 하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規定性이 이미 先在하고 있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즉 언표적 장에 있어서의 가능성이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決定되어 있는 어떤 존재가 일정한 조건 하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논리적 가능성이라는 말을 넓게 이해하든 좁게 이해하든 푸코가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은 언표의 특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두번째로 가능태(puissance)의 개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가능태는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희랍어 < dynamis >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 우리는 다른 존재에 있어서든 다른 존재인 한에서의 동일한 존재에 있어서든 운동이나 변화의 원리를 가능태라 부른다. > 여기에서 < e en hetero(i) e he(i) heteron >이라는 부분에 주목해 볼 경우 운동의 원인은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한 존재 甲이 다른 존재 乙에 의해 운동하게 될 때 乙은 甲을 운동하게 할 수 있는 가능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경우 甲이 변해 甲'가 되었을 때 甲 안에는 甲을 甲'로 만들 수 있는 가능태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甲은 甲'가 될 수 있는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두번째의 경우 안에는 다른 것에 의해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 그 어떤 경우든 이 개념은 < ․․․수 있다 >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能力이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도, 그 구조를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형상도 그렇다고 어떤 관계 또는 관계들의 집합도 아니다. 이 개념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 없으면서도 형이상학적 존재로 이해되지는 않는 몇몇 개념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가능태라는 말은 오늘날의 < 에너지 >와 가장 근접하는 개념 즉 어떤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는 힘에 가장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의 나아가 구조주의적 사유 일반에 있어서의 가능성의 개념이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능성의 개념과 크게 다르다. 유리가 수정이 될 수 있는 가능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스팔란짜니의 발생학에 있어서처럼, 유리가 매우 작은 수정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유리가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일정한 시간이 경과했을 때 수정이 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땅 속에 파묻혀 있는, 그 존재여부는 분명하지만 아직 아무도 발견해 내지 못한 황금불상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굴해 내기 이전에도 계속 황금불상이다. 즉 황금불상은 現實的이지는(actuel) 않지만 적어도 實在的이다(reel). 구조주의에 있어서의 가능성이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가능태라는 말도 언표적 장을 규정해 주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검토해 볼 개념은 < 잠재성 virtualite >의 개념이다. 앞의 두 개념에 비해서 이 개념은, 필요한 수정을 가할 경우, 고고학적 의미에 있어서의 가능성에 가장 근접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선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에 있어 이 개념의 사용법을 살펴 보고 그러한 사용법에 있어서의 어떤 부분들을 우리의 맥락으로 이끌어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 구조주의적 사유 일반에 있어서의 이 개념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구조주의적 사유양식과 비교했을 때의 고고학의 특수성은 무엇인가를 다시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잠재성이란 아직 현실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형이상학에 관한 담론}에 있어 이 개념은 실체와 속성간의 관계에 관련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담지하는 < hypokeimenon >이 아니다. 즉 라이프니츠에 있어 실체는 스토아적인 물질 즉 < substantia >로서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체가, 神에 있어 그렇듯이, 모든 속성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실체는 속성들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은 필연적으로 점차 현실화되는 것이다. 실체 - 그것이 사물로서 또는 형상으로서 파악되든, 법칙으로서 또는 구조로서 파악되든 - 가 현상들의 존재양태들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고 그 존재양태들이 어떤 조건 하에서 현실화된다는 생각은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로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뒤에 보게 되겠지만 푸코에 있어서는 이 現實化의 의미는 크게 변화한다.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잠재성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르그송은 논리적 맥락에서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無의 개념에 있어 그러했듯이, 사이비개념으로서 비판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실재하는 것은 가능성이 아닌 잠재성이다. 이는 생명 속에 내재해 있는, 진화의 도상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적 형상이다. 즉 그에게 있어 생명으로서의 잠재성은 差異들의 共存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잠재적인 것은 複數性의 공존으로서 이해된다. 베르그송의 잠재성 개념에서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잠재성의 현실화에 있어 創造가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그의 잠재성 개념은 결정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구조주의적 잠재성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며 구조주의에 있어 배제되는 時間의 차원을 어떻게 복구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큰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그의 잠재성 개념으로부터 우리의 맥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잠재적 복수성의 공존이라는 개념과 그의 分化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이 개념들을 재해석함으로써 잠재성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잠재성 개념을 되살리고 있는 현대의 대표적인 사유양식인 구조주의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 역시 전통적인 도식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선 구조주의가 설정하는 실재(현실의 비가시적인 본래의 모습)는 지금까지 제시되어 왔던 어떤 것들과도 다르다. 구조주의가 설정하는 기본적인 존재들이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들과 전통적인 존재들과의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구조는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사물의 형태도 상상을 통해 생각하는 사물의 내부적 형태도 아니다. 구조주의적인 구조는 우리가 예컨대 건축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상식적 의미를 완전히 벗어난다. 다음으로 그것은, 피아제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자체조절적 형태(Gestalt) 또한 아니다. 구조주의는 이러한 형태의 유기체주의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바, 구조주의에 있어 전체가 부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系列에 있어서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계열들은 열린 형태로 즉 불연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를 형태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에 대한 매우 소박한 이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구조는 우리의 이성이 파악해 내는 바의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도 아니다. 구조란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의 조합체계에 의해 형성되며 실증과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사물들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도 아닌 것이다.
구조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들이 어떤 기하학적 형태도, 하나의 자체조절적인 전체도, 실증과학적 탐구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본질도 아니라면 그를 무엇으로 파악해야 하는가? 나는 이를 들뢰즈를 따라 < 상징적 요소들 >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 요소들은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 요소들인가. 이들은 현실적 공간 속에 위치하는 요소들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조주의적 구조 개념은 건축 등에서 말하는 현실적 구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요소들은 우리의 사유공간 속에 위치하는 요소들도 아니다. 이 요소들은 이성의 힘에 의해 사물들 속에서 發見해 낼 수 있는 객관적 존재들이지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성립하는 사유공간 속에 요소들이 아닌 것이다. 객관 세계 내에 내재하면서도 결코 현실적 공간은 아닌 이 공간은 바로 현실적 공간이 또는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현상들이 그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바의 어떤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공간 또는 우리의 사유공간이 그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바의 法則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우리는 구조적 공간 또는 상징적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플라톤적 존재론에 근접한다.
상징적 요소들은 이 구조적 공간 속에서 배치되며 이 배치의 형태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현실적 현상들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구제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 이 공간은 고대의 사유양식에 있어서처럼 유클리드적이 아니며 나아가 근대의 사유양식에 있어서처럼 무한소미분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현상들을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구조적 공간 속에서 상징적 요소들이 차지하는 位置들이다. 이 위치들이 일상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사물들의 의미를 결정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 의미는 그들 자체는 의미가 없는 요소들의 조합으로부터 결과한다 >. 이 위치들의 배치, 계열화, 치환, 이웃관계, 조합 등에 의해 현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란 상징적 요소들의 관계맺음의 양태로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인가? 이 요소들이 맺는 관계를 < 변별적 관계 >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 변별적 differentiel >이라는 이 수식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변별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변별적 관계란 구조적 공간 내의 각 요소들이 형성하는 계열에 있어 이웃관계의 體系에 의해 형성되는 상호규정적 관계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소들은 서로간에 변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징적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변별적 관계들로 이루어진 < 표 >가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 일람표 >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현상들은 바로 이 표의 법칙에 따라, 즉 변별적 관계들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이 표가 고전시대적인 표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있어서의 잠재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있어서의 잠재성이란 현실적 공간을 구성해 주는 구조적 공간 내에서의 상징적 요소들이 형성하는 변별적 관계들이다. 이 관계들은 구조적 공간 속에 공존하며 그래서 이들은 潛在的 共存들의 複數性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수성들이 어떤 시공간적 조건 하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푸코의 고고학이 말하는 가능성의 장이란 바로 위와 같이 이해된 바의 잠재적 공존의 복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넓은 의미의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의 테두리 내에서 특히 고고학이 보여주는 맥락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은 푸코에 있어 잠재성의 現實化라는 구조주의적 발상이 여전히 유지되면서도 그에게 있어서는 비가시적 구조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푸코에 있어서는 구조적, 무의식적 공간과 가시적, 현실적 공간의 양분법이 사라진다. 푸코에 있어서는 오로지 가시성으로 드러난 현실적 공간만이 다루어진다. 단지 이 현실적 공간 자체가 몇 개의 層으로 또는 水準으로 나누어질 뿐이다. 푸코가 스스로를 < 행복한 실증주의자 >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푸코는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전개념적 생활세계의 공간도 좁은 의미의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상징적 공간도 아닌 공간을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증과학적 탐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형이상학적 공간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다루는 영역은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그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현실화되어 있는 영역, 언어화되어 있는 영역이다. 그가 다루는 것은 어디따지나 實證性의 영역이며 그런 의미에서 푸코는 스스로의 말대로 실증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한 과학-비과학의 이분법이라는 바슐라르적 도식을 거부한다. 그는 실증성의 영역을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눈다. 푸코는 여러 종류의 실천들 중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 형성된 것들을 談論的 實踐들이라 부르며 이 담론적 실천들에 의해 형성된 언어적 형성체들의 형성규칙을 담론적 형성규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담론적 실천들 중 인식론적 분석의 대상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춘 형성들 즉 일정한 검증의 규범성과 정합성을 갖춘 것들을 < 지식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지식들 중 보다 엄밀한 과학성의 기준들을 충족시킴으로써 과학성의 문턱을 넘어선 지식들이 과학이 되는 것이다. 이 층들에 있어 하위의 층은 경우에 따라 상위의 층으로 개별화될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하위의 층이 상위의 층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푸코는 실증주의의 한계 내에서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을 실행하고 있다. 푸코의 도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비담론적 실천과 과학 사이에 담론적 형성규칙(특히 지식)이라는 별도의 영역을 수립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 영역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통해 인식이라는 차원과 삶이라는 차원을 관계지워 분석할 수 있는 독특한 논리를 개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잠재성이란 비가시적인 구조적 공간이 아닌 바로 지식의 공간(더 넓게는 담론적 형성규칙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조주의적 의미에 있어서의 잠재성의 개념은 푸코에 있어서는 실증성의 문턱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지식의 영역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잠재성과 고고학적 잠재성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닌다. 구조주의적 잠재성이란 일종의 추상적 존재이다. 그것은 질료를 통해 구체화되어야 할 일종의 圖案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項들로 채워져야 할 자리들의 집합과도 같다. 그러나 고고학적 잠재성이란 현실성과 마찬가지의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 그들을 둘 다 이미 구체화된 어떤 존재들이다. 고고학적 잠재성으로부터의 현실성으로의 변환은 존재론적인 변환이 아닌 단지 일정한 條件들의 부과를 의미할 뿐이다. 예컨대 자연사와 생물학은 그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담론들은 아니다. 단지 자연사적인 담론의 어떤 부분이 일정한 과학성의 조건을 만족시킬 때 생물학의 어떤 부분으로 개별화될 뿐이다. 구조주의적 잠재성의 개념과 고고학적 잠재성의 개념은 위와 같은 존재론적인 차이점을 지니는 것이다.
2° 분화의 개념
지금까지 우리는 고고학에 있어서의 가능성의 장이라는 개념을 몇 단계를 거쳐 분석해 보았다.이제 우리의 논의의 두번째 단계는 이 잠재성이 어떻게 현실화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베르그송에 있어 생명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드러내며 변화할 어떤 < 경향들 >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은 진화를 통해 分化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분화란 단순히 기존의 경향성들의 현실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주에 있어서의 전혀 다른 質의 창조를 동반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도 분화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푸코에 있어 < 분화의 공간 >이라는 표현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생명이 경향들의 복합체인 반면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있어서의 (구조적 공간 내에서의) 복수성이란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변별적 요소들의 關係體系를 나타낸다. 이러한 복수성들의 어느 것이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 현실화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세계는 구조의 어떤 한 모습이며 시간에 따라 다른 얼굴이 현실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한 시점에서의 현실성은 구조적 공간에 있어서의 복수성의 한 계열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화란 이러한 현실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푸코에 있어 분화의 문제는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있어서와 유사하게 다루어진다. 명제/언표의 구분에 있어 논한 바 있듯이 푸코는 이러한 입장을 극단으로 밀고 가지 않으며 사건으로서의 언어의 수준으로부터 명제로서의 언어의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앞에서 보았듯이 몇 단계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에게 있어 분화란 잠재적 복수성의 현실화가 아닌 이미 현실화된 영역으로서 존재하는 담론적 형성규칙들 중에서 어느 것이 일정한 조건을 갖춤으로써 지식의 영역으로 마름질되는 과정 즉 個別化되는 과정을, 그리고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의 한 부분이 일정한 조건을 갖춤으로써 과학의 영역으로 개별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구조주의적 분화가 현실성의 문턱에서 발생한다면 고고학적 분화는 실증성의 문턱, 과학성의 문턱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있어서와 고고학에 있어서의 분화란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 구조주의에 있어 구조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법칙들이다. 구조는 현실과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칙은 현실 속에 구현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법칙은 현실로서 드러난다. 구조와 현실은 플라톤에 있어서의 < parousia >와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구조적으로 同形的인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있어 과학으로 분화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이다. 지식과 과학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규칙들이 다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지식이 成長해서 과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지식과 과학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식은 과학이 그 위에서 마름질되는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해 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자율적인 영역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푸코에 있어서의 對象의 出現이라는 개념 및 그 출현의 가능성의 장이라는 개념을 이제 분명히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가 인간의 대상으로서 대상화되어 그것이 언어화되었을 때 담론적 형성규칙이 발생한다. 이 상태에서의 대상이 일정한 실증성의 조건을 갖출 경우 이 대상은 이제 지식의 대상으로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 지식의 대상들 중 어떤 것들은 다시 일정한 조건을 갖춤으로써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약의 과정을 통해 인식의 대상들이 형성된다. 고고학은 인식의 대상들이 바로 그 안에서 형성되는 이 場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이 문제삼고 있는 대상은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이 그 안에서 마름질되도록 해주는 장 즉 그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하는 장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주체, 개념, 전략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고고학에 있어서의 가능성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결국 고고학은 기본적으로 선험철학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들을 그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통해 명료화하는 것을 그 기본적인 임무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선험철학은 칸트에 있어서와는 달리 객관세계를 그 탐구대상으로 하는 客觀的 선험이며 구조주의에 있어서와는 달리 현실성의 테두리 내에서 행해지는 實證的 선험철학이다. 또한 그의 철학은 쎄르에 있어서처럼 多元化된 선험철학이기도 하다. 고고학은 언설적 형성과 변환을 다루는 현대의 선험철학 즉 객관적, 실증적, 다원적 선험철학인 것이다.
2장 근대 유럽의 주체철학과
고고학적 반론
- 고고학의 철학사적 위상
우리는 이 장에서 우선 고고학의 철학사적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는 고고학의 철학사적 맥락에 대해 언급한 바 없다. 그러나 {말과 사물}은 고전시대, 근대 그리고 현대(구조주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에 대한 지식들 즉 생명, 노동, 언어에 관련되는 지식들에 있어서의 에피스테메 변환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는 푸코 자신의 철학을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 놓고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서구 근세에 대한 푸코의 이해는 또한 그 근세의 극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푸코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말과 사물}을 주체라는 문제틀에 입각해 이해하고자 한다. 1절에서는 고전시대의 표상의 구조에 있어 근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의 개념은 부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말과 사물}의 상당 부분이 고전시대의 담론들에 대한 분석에 할애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를 주체의 문제에 관련된 한에서만 살펴 볼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근대의 主體哲學的 傳統 을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근대철학에 있어 주체 중심의 철학 전통을 살펴보고자 하며 이는 고고학이 이 전통에 대항하여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사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절에서는 구조주의가 다루어지게 되며 구조주의가 근대의 주체철학을 어떤 맥락에서 파기시키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구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또 그와의 변별화를 통해, 지금까지 소묘해 온 주체 개념의 역사에 있어 고고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장은 근세 이후 인간을 둘러싼 철학적, 과학적 담론들의 역사에 있어 주체 개념의 형성과 변환을 살펴 보고 그러한 배경 하에서의 고고학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I. 古典時代의 에피스테메와 表象의 構造
{말과 사물} 1장에서 분석되고 있는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은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인식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 대한 분석을 주체의 문제틀을 통해 해석해 봄으로써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인식의 구조와 주체의 개념에 대해 큰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시녀들》을 통해서 본 표상의 구조
《시녀들》에 있어 그림 속의 畵架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으며 그림 속의 畵家는 그림을 그릴 때의 그의 비가시성과 모델을 관찰하고 있을 때의 그의 가시성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 마치 화가는 그가 그려져 있는 그림 위에서 보여지는 동시에 그가 그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그곳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화가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가 그림그리기를 그만두었을 때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한 그는 그림으로부터 독립된 화가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그 그림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 화가는 스스로를 소멸시킴으로써만 그림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벨라스케즈는 이와 같이 그림그릴 때의 비가시성과 그리그리기를 그만두었을 때의 가시성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화가의 등가물로서 그림 속에 묘사되어 있다. 고전시대에 있어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체는 대상들이 표상되어 있는 表 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편입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림 속의 화가가 관찰하고 있는 모델의 위치가 바로 그 그림을 그린 벨라스케즈의 위치이자 그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우리의 위치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와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그 화가의 등가물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즉 < 畵架를 수직으로 관통하고 있는 시선의 중립적인 線 속에서 주체와 대상은, 관찰자와 모델은 서로의 역할을 무한히 역전시키고 있다. > 그림 밖의 화가와 모델들(왕과 왕비) 그리고 그림그리는 모든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우리)의 자리 - < 王의 자리 > - 는 일치한다. 그리고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그림 속에 세 종류의 위치들 - 근접해 있지만 서로 분열되어 있는 위치들 - 로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림 밖의 그들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장소이다. 표상하는 또는 그 표상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는 또한 그 표상의 모델 - 그 표상이 표상하고 있는 바의 것 - 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에 있어 표상의 주체로서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서의 人間의 이중적인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구도는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담론은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 위에서 즉 어떤 표상의 구조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고전시대 인식의 야망, 그것은 모든 것을 표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표상하는 주체(화가), 표상의 대상(그림의 모델), 그 표상의 관찰자(모델을 관찰하고 있는 그림 속의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다시 관찰하는 그림 후면의 인물 - 이는 관찰하는 사람이 다시 그림 속에 들어가게 되는 無限的 構造의 표상일 것이며 그래서 그는 그림 안으로 이제 막 발을 들여 놓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 표상되어 있다 - 까지) 모두가 그림 속에 표상되어 있다. 그리고 표상의 특권적인 대상(모델)인 왕과 왕비는 그림 속의 특권적인 위치(거울 속)에 자리매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시대에 있어 일종의 선험적인 특권을 누렸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도 모델도 관찰자도 아닌 그들을 일정한 공간 속에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를 미리 선취하고 있던 그림의 구조(재현의 기능이 배분되어 있는 表)였다. 표상은 바로 이 표의 구조에 따라 행해짐으로써 표상의 모든 요소들은 그 표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 표는 몇 개의 系列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푸코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림이 보여주는 X자형(공주의 눈이 그 교차점을 형성하고 있는)의 두 계열이 그림의 구조를 견고하게 잡아주고 있다. 그러나 이 표상의 구조를 견고하게 잡아주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 X자형의 구조가 아니라 그 X자형이 이동하거나 회전하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는, 시선들이 그리로 집중되고 있는 그림 밖의 點 즉 왕의 자리이다. 이 王의 자리가 표상 전체의 구조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표상의 모든 요소들이 그를 중심점 - 그 자체는 그 표상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 비밀스러운 그림자(거울 속의 모습)를 등가물로서 보여주고 있는 뿐인 - 으로 정렬되는 바의 그러한 특권적인 점이다. 이것이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에 있어서의 神의 자리일 것이다. 그래서 그림 속에서의 이 점의 등가물(거울)은 그림 전체의 명암 구조에 영향받지 않고 그 신비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그림의 옆면에서 들어와 그림의 대상들과 화가 그리고 그 대상들을 표상하는 (그림 속의) 그림을 同時에 비춰주고 있는 빛이다. 즉 이 빛은 표상하는 주체와 표상되는 대상 그리고 표상 자체를 동시에 비춰줌으로써 이 삼자의 관계맺음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이 빛으로 말미암아 주체와 대상은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담론의 질서 속으로 즉 표상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며, 그 표상체계의 정립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빛은 주체와 대상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이 그를 준거로 해서 관계맺도록 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빛이야말로 주체와 대상을 견고하게 묶어주고 있는 < 자연의 빛 >일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화가와 모델이 그 안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表象의 秩序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표, 이 표 속에 스며들어와 주체와 대상을 묶어주고 있는 빛, 이 표의 요소들이 보유하고 있는 시선의 벡터들이 그곳으로 집중되고 있는 그래서 표 자체의 구조를 견고하게 지탱해 주고 있는 바의 點(< 왕의 자리 >), 이들이야말로 고전시대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 요소들인 것이다. 고전시대의 < 표상 >과 그 표상의 구조를 보여주는 < 질서 >는 이와 같은 조건들 위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
2°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표상의 구조
그래서 고전시대에 있어 < 표상 >의 구조는 고전시대의 全인식체계를 떠받쳐 주고 있는 기반으로서 기능했다. 르네쌍스 시대의 인식은 삼중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진되지 않는 존재의 또는 의미의 重層(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은 그 안에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다)과 숨겨져 있는 의미가 간접적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내비치고 있는 捺印(의미는 스스로를 완전하게 은폐하지는 않으며 그의 어떤 측면을 가시성에 드러낸다) 그리고 가장 복합적인 의미론적 장이자 객관적 중층의 압축판으로서의 人間이다. 이들이 유사성에 의해 의미가 증식되는 場의 요소들을 형성했다. 르네쌍스의 언어는 기호가 아닌 상징이었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진입하면서 이제 상징은 기호로 변환된다. 언어의 기능은 중층적 의미의 담지가 아닌 그와 일대 일로 대응하는 사물의 指示에 국한되었다. 존재의 두꺼운 층은 하나의 평면으로 환원되었고 이 평면의 거울로서 기호의 평면이 마주섰다. 나아가 이 평면의 구조는 또한 인간 사유의 구조이기도 했다. 존재의 평면과 기호의 평면 그리고 사유의 평면은 서로 일대 일로 대응하는 즉 寫像의 관계를 형성하는 거울들을 형성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인 어떤 표를 형성했다. 르네쌍스적인 두께는 상실되고 고전시대적인 평면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고전시대의 인식을 가능하게 했던 표상체계의 구조이며 모든 것은 이 구조에 입각해 배치되었다. 이 평면의 바깥에 존재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神이었으며 神이 이 평면의 존립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表象性이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 질서 >의 개념을 낳았다. 고전시대의 질서란 더 이상 유사성에 의한 의미의 끊임없는 증식이라는 르네쌍스적 질서가 아니었으며 이제 유사성은 지식의 형식이 아닌 오류의 기회로 전락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유사성(타자들의 혼합으로부터 기인하는)을 대치해서 동일성과 차이성(타자들의 혼합을 배제하는)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 단순한 것 le simple >을 추구했고 이는 그 뒤 철학의 전개에 있어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데카르트적 길을 따라 유비적인 위계는 分析으로 대치되고, 유사성의 놀이가 枚擧로 바뀌었으며 그 결과 비교가 완전한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 사유는 이제 < 사물들을 서로 근접시키는 것 >이 아니라 그들을 < 서로 구별하는 것 >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내면 속에서의 비밀스러운 의미의 증식들도 표백되었으며 진리는 주체의 두께와 대상의 두께가 그들이 서로 접축하고 있는 하나의 평면 속으로 압축되어 형성된 知覺 속에서만, 可視性의 얇은 표면 위에서만 즉 대상, 기호 및 (지각으로 환원된) 관념들이 배치되는 표 위에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고전시대의 인식이 일반적으로 르네쌍스와는 대립되는 위와 같은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전시대의 인식이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코는 고전시대의 인식을 세 영역으로 나누어 본다. 전통적인 인식론에 있어 고전시대의 인식은 이분법적으로 이해되었다. 그 하나는 천문학, 역학, 광학 등 새로 등장한 수학적 물리학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러한 과학성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던 미성숙 과학들의 영역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두 영역 사이에 그 두 영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또 하나의 영역이 존재했다고 본다. 이 영역은 1) 말하는,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노동하는 人間에 대한 지식들 2) 넓은 의미의 수학적(형식적) 구조를 통해 기술되지만 천문학, 역학, 광학 등과 같은 직접적인 수학적 학문들은 아닌 지식들 3) 그래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질서를 구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경험과학을 구성하지는 않았던, 나름대로의 다른 질서를 구축했던 지식들로 형성되어 있었던 영역이다. {말과 사물}은 바로 이 지식들 즉 말하는 인간을 다루었던 일반문법,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다루었던 자연사 그리고 노동하는 인간을 다루었던 부의 분석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푸코의 이러한 분석이 게루, 블라발, 쎄르 등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의 라이프니츠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본다. 즉 푸코의 분석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대립시켜 보고자 하는 현대 철학사가들의 입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대립은 양과 질의 대립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하학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범기하학주의를 꿈꾸었지만 라이프니츠는 질적인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일반대수학을 통해 表 속에 정돈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두 철학자에게 있어 측정치와 순서는 모두 중요했지만 그 중요도는 각자에게 있어 달랐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녔던 것은 기하학적 측정치였고 이 측정치들을 관계지우기 위해 순서의 개념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질적인 과학을 세우고자 했던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순서의 개념이 일차적인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의 수학은 데카르트와 같은 距離의 수학(측정치의 수학)이 아닌 位相學的인 수학이었다. 그래서 表에 있어 중요했던 것은 그 이웃관계였지 각 항들의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과 같은 담론들에 있어 일반대수학과 그 위상학적인 구조는 물리과학에 있어 무한소 미분이 했던 역할에 못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나아가 데카르트의 체계가 불가역적인 연역적 체계라면 라이프니츠의 체계는 가역적인 계열들의 체계이다. 때문에 데카르트에 있어 始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데 반해 라이프니츠에 있어 이 시원은 복수화되고 탈중심화되는 것이다. 더우기 데카르트적 중심은 주체에 있지만 라이프니츠의 탈중심화는 주체에 귀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쎄르가 말한 것처럼, < 데카르트는 인식하는 주체의 불가역적 순서에 따르는 철학자이지만 라이프니츠는 사물들의 무한히 재구성 가능한 순서에 대한 철학자이다. 데카르트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연쇄의 불가역성은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각 존재의 질적인 그리고 가역적인 위치로 바뀐다. >
요컨대 푸코는 고전시대적인 인식에 있어 수학적 과학들과 경험적 지식들 사이에 존재했던, 말하고, 생명을 이어 가고, 노동하는 인간에 관련되었던, 데카르트적인 범기하학주의가 아닌 라이프니츠적인 통일과학에 의해 고무되었던 하나의 層을 발굴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라이프니츠에 의해 개발되었던, 수학적 체계이기는 하지만 고유한 의미에서의 수학은 아닌 일반대수학적 틀을 그 공통 언어로 가지게 된다. 이것이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언어학적, 생물학적, 경제학적 탐구가 하나의 공통의 체계를 구축하게 되는 이유이며 고전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위의 세 분야를 동시에 연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앞에서 제시된 《시녀들》에 대한 논의 그리고 고전시대의 인식 일반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명제로 집약된다. 즉 고전시대에 있어서는 근대에 있어 나타났던 것과 같은 그러한 선험적 주체 즉 칸트, 헤겔이 말하는 인식, 의미 및 역사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전시대에 선험적 특권을 누렸던 것이 있었다면 즉 사물의 표면, 기호, 관념 사이에 존재했던 表象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표였다. 인간에 관한 고전시대의 담론들은 주체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 표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이다.
푸코가 논한 이 담론들의 장 위에서 19세기 이후의 인간에 대한 과학과 인간에 대한 철학이 형성된다. 즉 인간은 한편으로 실증성들의 담지자로서 파악됨으로써 실증과학들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한편 그 인식들의 가능근거로서 파악됨으로써 주체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주체철학들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간단히나마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이 형성했던 인식론적 장에 대해 알아 보자.
3°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
고전시대의 一般文法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표상의 구조를 뚜렷하게 예시해 보여주고 있다. 고전시대에 있어 일반문법이 세계가 그 안에서 그 본 모습대로 드러나게 되는 그리고 사유가 그 안에서 그의 얽힌 상태로부터 벗어나 정연한 질서 속에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場으로서 기능했다면, 그것은 기호 속에 은폐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 르네쌍스적 힘은 이제 소멸되고 指示의 기능으로 화한 기호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언어적 공간 상에서의 그들의 배치 즉 그들의 순차적 繼起의 秩序가 된다. 기호에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호가 세계와 인간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사유의 두께, 그들의 얽힘을 풀어서 언어의 순차적 배열을 통한 平面的 配置의 구조 속에서 전개시킬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서 일반문법의 대상은 사유도 개별 언어도 아닌 기호들의 배열로서의 고전시대적 < 담론 >일 뿐이다. 그래서 일반문법은 < 그것이 표상해야 할 同時性에 관련해서 언어적 질서를 연구하는 것 >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일반문법의 형성은 고전시대 인식의 한 예이자 또한 동시에 그의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 예라 함은 그것이 고전시대의 표상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가능했음을 의미하며 조건이라 함은 그것이 다른 인식들을 성립시키는 형식적 기반으로서 기능했음(왜냐하면 인식은 언어를 통해 성립하므로)을 의미한다. 이 일반문법의 구성은 네 가지 기능적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 < 서술 >은 관념과 관념을 이어 주는 근본적인 연결고리로서 작동한다. 그것은 계기적인 공간적 배치라는 언어의 속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사의 이론을 통해 드러난다. 모든 동사는 < etre >를 사용해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je chante >는 < je suis chantant >으로 표현할 수 있다) < etre >라는 동사는 서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권적인 기능을 보유하게 된다. 서술이라고 하는 언어의 기능은 < etre >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2) < 분절 >은 무한한 명사들을 분류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분절에 의해 상이한 단어들은 상이한 표상적 내용들을 표현하게 된다. 동일성과 차이성의 구분에 입각한 수평적 분절과 실체와 성질의 구분에 입각한 수직적 분절이 두 종류의 분절을 형성한다. 이러한 분절들을 통해 언어가 표상적이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복합적인 관계들의 망(계기, 종속, 결과)이 성립한다. 언어의 구성은 이러한 분절의 평면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3) 이 기능들에 < 지시 >의 기능이 덧붙여진다. 지시의 기능은 앞에서 논한 사물의 평면과 기호의 평면 사이에 寫像關係를 수립해 준다. 동작언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지시작용은 어근에 대한 이론을 발달시킨다. 즉 어근은 원초적인 외침으로부터 유래하며, 세계로부터 최초로 떨어져 나온 동작언어로서 여러 말들의 공통 부분들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4) 그러나 서술, 분절, 지시만으로는 언어의 풍요로움과 다양함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때문에 다시 < 파생 >이라는 기능이 요구된다. 이 파생은 예컨대 왜 나무잎처럼 얇고 부드러운 것들이 < feuille >라고 불리우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언어의 動性은 제유, 환유, 남유(유비관계가 즉각적으로 파악되기 힘들 때는 은유) 등에 의해 전개되며, 우리는 쓰여진 글의 근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발화된 말의 근저에 있어서도 말들의 수사학적 공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능들은 하나의 표 위에 배분될 수 있다(그림 1). 즉 이들은 서술로부터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마름모꼴의 네 꼭지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기능들은 서로에 대해 긍정적인 보완과 부정적인 대립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분절은 명제적 구조에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지만 명제적 연결을 분절의 불연속적 공간으로 와해시킨다. 지시는 분절된 명사를 세계와 관련맺게 해주지만 분절의 일반성을 지시의 특수성으로 바꾸어 버린다. 또 파생은 동작언어로부터 출발하는 어근을 다양하게 발달시키지만 동작언어가 지니고 있는 세계와 언어 간의 원초적 결합을 부수어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술은 파생의 잡다성에 일반적 형식을 부여해 주지만 파생의 공간적 성격을 명제의 시간적 성격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 마름모에 있어 한 단계씩 떨어져 있는 서술/지시, 분절/파생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성립한다. 서술/지시를 잇는 대각선은 단어들은 어제나 표상된 어떤 것을 명명한다는 사실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분절/비유를 잇는 대각선은 분절적인 능력들은 그들이 파생의 선을 따라 움직인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대각선들의 교차점 상에는 즉 마름모의 한 가운데에는 이름이 존재한다. 결국 명제란 이름들을 명명하는 것, 분절은 고유한 이름들을 일반화시키는 것, 지시란 이름을 대상에 연결시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생은 이름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그림 2).
분절
구체적 내용의 제공/ 세계와의 연결/
명제적 연결의 해체 명사적 일반성의 해체
서술 지시
잡다한 공간의 형식화/ 어근의 다양한 발전
공간 계열의 시간화 언어-세계의 사상관계의
와해
파생
그림 1
분 절
|
|
B
|
서술 ---- A ----------------- 이 름 ------------------ 지시
|
|
|
|
파 생
A : 단어들은 언제나 표상된 어떤 것을 명명한다.
B : 분절적 능력들은 그들이 파생의 線을 따라 움직인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림 2
이러한 일반문법적인 도식은 고전시대적인 表의 좋은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일반문법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사와 부의 분석에서도 발견된다.
고전시대의 자연사 역시 일반문법과 동형적인 구조 위에서 성립했다. 르네쌍스 시대에 범람했던 괴물들(기형들)이 사라지고 < 보는 것 >과 < 듣는 것 >의 차이가 선명해지면서 인식의 근거는 사물의 두께와 인간의 두께가 평면으로 압축되어 만나는 곳, 즉 知覺의 平面이 되었다. 그래서 고전시대의 자연사가들이 탐구했던 것은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可視的 表面들이었다. 이 표면들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형태, 수, 공간적 배치, 크기에 입각해 構造의 개념이 성립했으며 각 생명체들의 상관적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준거로서 형질(특징, caractere)의 개념이 성립했다. 고전시대의 자연사란 이 가시적 표면들에 대한 관찰결과를 일상언어의 번잡함을 탈피해 만들어진 中性化된 기호들의 공간에 배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전시대에 존재론적인 특권을 누렸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생명체도 생명체를 인식하는 주체도 아닌 생명체가 그에 따라 분리될 수 있도록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표였다.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에 기반했던, 동일성과 차이의 연속적인 계기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던 이 표는 고전시대에 도래했던 격변 등의 환경적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변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 경험이 생명의 계통적 분류표에서 불연속이나 비약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지 때문일 뿐이었다. 더 나아가 설사 고전시대에 뷰퐁이나 모페르뛰 등이 형질변환의 개념을 제기했다 해도 그것은 위의 표에 시간적 지수들을 덧붙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고전시대에는 種을 변환시키는 환경의 개념도, 시간의 개념도, 우발성의 개념도, 생존경쟁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자연사 >는 역설적으로 歷史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으며 < histoire >는 단지 < 탐구 >라는 그리이스적 의미를 나타낼 뿐이었다. 푸코의 단적인 입장을 따른다면 고전시대에는 生命의 개념도 生物學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고전시대에 있어서는 오늘날과 같은 생명개념도 생물학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主體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계통학적인 表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류가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 표가 자연사의 가능성의 조건을 형성했던 것이다.
富의 분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구조가 드러난다. 부의 분석 역시 르네쌍스기에 화폐에 부여되었던 실질적 가치를 하나의 記號的 價値로 변환시킴으로써 성립했다. 즉 그것은 다른 사물에 대한 교환의 매개체로서만, 지시의 기능으로서만 다루어졌다. 화폐는 다른 사물과의 실질적 유사성을 상실하고 순수한 표상의 도구로 화했던 것이다. 로오 등 화폐를 순수한 표상으로 본 사람들과 꽁디약 등 화폐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한 사람들의 대립은 위와 같은 기본 바탕 위에서 성립했던 피상적인 대립일 뿐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한 사람들에 있어서도 화폐가 부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의 원천을 토지의 잉여생산에 두는(그래서 교환을 이 가치를 분배하는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중농주의자들과 가치의 원천을 인간의 욕구에 둔 즉 토지로부터의 생산의 불충분성에 두는(그래서 교환을 이 최초의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공리주의자들간의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두 입장 모두 토지를 가치의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또 가치와 교환간의 본질적인 연관관계를 긍정하고 있다. 이 두 입장은 동일한 이론적 요소들에 대한 상반되는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부의 분석에 있어 특권을 누렸던 것 역시 교환의 준거로서 화폐가 지니는 기호적 가치 그리고 이 가치의 체계가 구성하는 표였다. 그래서 중농주의가 토지소유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리주의가 상인들이나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설명은 고고학에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고학이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론을 선택하는 주체들의 의견들이 바로 그 위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는 바의 심층적, 무의식적 바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고전시대의 인식들이 지니는 기본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고전시대의 인식은 르네쌍스기에 존재했던(그리고 근대에 다시 회복될) 세계와 인간의 두께를 얇은 표상의 평면 속에 압축해 이차원화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은 그림 속에 모든 대상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그 평면의 구조가 즉 표가 고전시대 인식들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시녀들》 속에는 이 그림을 창조한 벨라스케즈, 그 창조의 시간적 흐름, 이 배치 속에 포함될 수 없었던 존재들이 비치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인식의 공간 속에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로서의 主體, 존재와 인식의 가능성의 토대로서의 時間, 르네쌍스적 두께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이제 표 속에 배열되지 못하고 소외된 채 표 아래에서 나지막이 웅얼대고 있었던 他者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이제 이 주체, 시간, 타자들이 서구 인식의 지평 위로 어떻게 솟아올랐는지 보아야 할 차례이다.
II. 근대성과 有限性의 분석론
앞의 절에서 논했던 고전시대적인 표상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던 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였다. 이 시대는 서구 과학사에 있어서의 단절의 시기이자 동시에 인식론에 있어 주체의 개념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이르르면 고전시대에 있어 인식의 가능근거로서 기능했던 表象의 구조는 무너진다. 이제 < 지식의 일반적인 공간은 더 이상 동일성들과 차이성들의 공간, 질적인 질서들의 공간, 보편적인 특징체계의, 일반적인 계통학의, 측정불가능한 일반대수학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화들로 이루어진 공간 즉 전체에 의해 그 기능을 부여받는 요소들 사이의 내적인 관계들의 공간이다. > 즉 19세기는 유기적인 존재들이 또는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존재들이 시간 안에서, 역사 안에서 전개되던 시기였다. 고전시대에 존재했던 지식의 공간은 시간을 매개변수로 해서 총체적으로 재편성된다. < 19세기의 철학은 小역사로부터 大역사에 이르는, 사건들로부터 始源에 이르는, 진화로부터 근원의 첫번째 파열에 이르는, 망각으로부터 回歸에 이르는 거리 안에 존재한다. > 그래서 작은 질서들이 그 안에서 배분되는 큰 질서 즉 表와 그를 기술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준 일반대수학이 고전시대 인식의 바탕을 이루었다면 이제 작은 역사들이 그 안에 편입되는 큰 역사 즉 繼起의 秩序와 그를 기술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역사학이 19세기 인식의 바탕을 형성하게 된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있었던 큰 변화에 대해 우리는 인식의 역사가 < 발전했다 >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포르-로와얄의 일반문법이 언어학으로, 린네적인 생물분류학이 생물학으로 그리고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발전했다고 흔히 논하곤 했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 인식론적 단절 > 및 깡길렘의 < 선구자의 신화 >를 거친 푸코는 이러한 견해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단순한 실험적 정교화나 수학적 공식화의 차원이 아닌, 고전시대의 인식과 19세기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구분해 주는 에피스테메 상의 단절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시대의 표상구조의 붕괴는 지식의 영역을 전반적으로 재편성했다. 이제 인식의 본질, 과학과 철학의 관계, 문학의 위상 등이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실증성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푸코는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에 대한 논의에 이어 근대에 있어서의 문헌학, 생물학, 정치경제학의 형성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人間의 등장과 관련된다.
부의 분석의 경우,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그가 상품의 가치는 그것이 표상적인 교환체계와 가지는 연관관계에 있다고 본 점에서 고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시대의 富의 분석의 내부에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요한 요소들을 도입하게 된다. 스미스는 당시 가치의 척도로 기능했던, 즉 가치에 대한 기호적인 표상체계로서 기능했던 노동에 적어도 두 가지의 낯선 개념들을 도입했다. 즉 인간의 본질(그의 유한성, 시간에 대한 그의 관계, 죽음의 절박함)을 문제삼는 인간학적 문제틀이 그 하나이고 부의 교환이 아닌 그들의 실질적 生産(노동과 자본의 형태들)을 탐구하는 문제틀이 그 하나이다. 스미스를 통해 시간, 노력, 죽음 등이 부의 분석에 스며들게 되며, < 이 시간은 그의 고유한 필요에 의해 성장하는 그리고 그 토착적인 법칙들에 따라 전개되는 組織化의 內的인 時間 - 자본과 생산체제의 시간 - 인 것이다. > 가치는 기호가 아닌 생산물이 된 것이다.
리카르도(David Ricardo)에 있어 이러한 변화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리카르도에 있어 노동은 더 이상 가치의 척도가 아닌 그 원천이 된다. 무엇보다도 리카르도는 가치의 形成과 가치의 표상성을 분리시킴으로써 경제학적 사유 안에 역사 - 순환적이 아닌 선형적인 역사 - 를 도입했으며 그 결과 이제 富는 고전시대적인 표상체계 안에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쇄고리에 따라 조직화된다. 나아가 리카르도는 경제학적 유한성 즉 희소성의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경제학에 經濟人(Homo oeconomicus)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경제학에 인간학적 문제틀을 연접시켰다. 이제 경제학적 사유 속으로 경제적 행위자(무관심한 나아가 적대적인 이 세계와 투쟁하는 유한한 존재자)로서의 人間이 들어 온다. 그리고 또한 역사의 선형적 시간과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경제학적인 사유 안에 종말론적인 사유를 도입시키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리카르도의 비관주의와 맑스의 약속은 표면적인 대립에 불과하다. 이들은 경제학이 희소성과 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창출한 인간학적 문제틀과 역사의 종말을 연접시키는 두 방식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은 < 19세기 초에 있어 (생산의 형태들에 관련해서의) 경제학의 歷史性, (희소성과 노동에 관련해서의) 인간 실존의 有限性 그리고 역사의 終末의 도래([리카르도적인] 무한한 감속의 형태로든 [맑스적인] 급진적인 전복의 형태로든)를 모양지운 지식의 배치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
자연사의 경우, 이 담론은 조직화의 개념이 도입됨과 더불어 생물학으로 변환된다. 이 조직화의 개념 또는 유기체의 개념은 생명체에 있어서의 특징의 개념을 크게 변화시킨다. 이제 특징은 더 이상 가시적 구조에 근거하지 않게 되며 생명체에 본질적인 機能들의 존재 및 단순한 記述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關係들에 근거하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기관보다는 한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기능들이 문제시되었으며 이 기능들간의 관계(예컨대 날카로운 이빨로 사냥하는 동물은 또한 달리기 좋은 발을 가져야 한다)가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이 기능들과 관계들은 경험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며 이제 생명체들이 그 안에서 매끈하게 분류되곤 하던 아프리오리한 表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전시대적인 이차원적인 표는 이제 삼차원적인 球로 변한다. 보다 중요한 기관들은 동물들의 신체에 있어 내부에 존재했으며 보다 이차적인 기관들은 환경에 맞대어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그래서 신경계를 中心으로 하는 하나의 球와도 같은 조직화의 도안(plan d'organisation)이 성립한 것이다.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천재성은 그가 형질변환설을 주장함으로써 다윈의 선구를 이룬 사실에 있지 않다. 그의 형질변환설은 디드로나 뷰퐁(Denis Buffon)의 그것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생물학의 커다란 변환에 참여했다면 그것은 언어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 사이에 존재했던 고전시대적 연결선을 끊어 버리고 존재와 언어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고전시대와의 결정적인 단절은 큐비에와 더불어 나타난다. 큐비에는 기관을 기능에 완전히 합치시킴으로써 가시적 구조의 우선성을 붕괴시켰으며 해부학을 통해 생명체의 내부로 들어 갔다. 그래서 이제 고전시대적인 동일성/차이성의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그보다 훨씬 심오한 통일성이 나타날 수 있었던 바 조직화라고 하는 이 새로운 통일성을 통해 생물학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 조직화 도안의 다양함이 드러남에 따라 생명체들은 이 새로운 준거에 따라 새로이 분류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새로운 분류가 다양한 양태를 보여 줌에 따라 고전시대를 지탱해 주고 있던 連續的인 表는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생물학으로의 역사와 시간의 도입이라는 문제에 있어 큐비에가 지니는 위상은 보다 미묘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라마르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형질변환설은 고전시대적인 표에 시간이라는 지수를 붙여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생명체들에 불연속과 환경이라는 요인을 끌어들인 큐비에에게 있어 이제 시간이라는 요인은 생명계의 변화에 결정적인 인자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는 대단히 인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바, 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고정설을 주장한 큐비에야말로 진화론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의 토대를 제공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고정설은 그의 역사적 사유의 결론(물론 훗날 그릇된 것으로 밝혀진 결론)에 불과한 것이며 이 그릇된 결론이 그의 역사적 사유의 의미를 변질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일반문법의 문헌학으로의 변환은 보다 느리게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일반문법은 고전시대적 표상의 한 예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조 자체의 현실적인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르면 이미 랑그들 사이의 비교는 의미내용들의 분절과 어근들의 가치 사이에서 하나의 매개적인 존재 즉 屈折을 드러내게 된다. 이제 굴절이라는 개념은 조직화와 노동이라는 개념이 그랬듯이 고전시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기관의 표층적 구조로부터 기능의 심층적 구조에로 그리고 화폐적 가치의 기호로부터 생산으로의 변환에 상응해 이제 어근의 표층적 일반성으로부터 굴절의 심층적 일반성으로의 변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굴절의 개념은 한편으로 음성학을 다른 한편으로 비교문법을 탄생시킴으로써 이제 언어는 고전시대적인 담론(표)이라는 메카니즘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의 지평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변환은, 굴절에 대한 윌리엄 존스 등의 저작들에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지만, 보프에 있어 그 결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보프와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업에 의해 이제 언어는 그의 보편적인 표상적 구조를 상실하게 되며 한 언어를 다른 언어들과 구별시켜 주는 內的 特徵이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이제 각 언어는 각자의 자율적인 문법적 공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언어에 있어서의 이 내적인 변이들의 연구는 시간의 진행에 따른 언어의 진화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간적인 이웃관계는 시간적인 이웃관계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언어학에도 해부학적 사유가 도입되는 것이다. 나아가 어근의 항상성은 의심받기 시작하며 어원학의 성립은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외침으로부터 발생하는 어근에로의 회귀를 거부하게 된다. 그래서 < 동사들의 어근들은 で사물들と의 기원이 아닌 행위들, 과정들, 욕구들, 의지들의 기원을 가리키게 된다. > 이제 언어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위하고 겪은 것이 되었다. 이름들은 더 이상 표상의 복잡한 표를 마름질하지 않는다. < 언어는 더 이상 지각된 사물들의 측면이 아닌 그의 활동성에 있어서의 主體의 측면에 자리를 잡는다. > 그 결과 언어는 이제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아닌 인간의 자유와 관련맺게 되며 인간의 역사성이 보존되어 있는 寶庫가 되는 것이다.
고전시대적인 表의 붕괴와 지식에 있어서의 새로운 질서들(조직화의 질서, 노동의 질서, 굴절의 질서)로부터 유래하는 지식의 불연속적 공간의 성립, (인식공간 속으로의) 죽음을 비롯한 타자들의 도래, 역사성과 시간성을 통한 인식의 총체적 재편성, 주체로서의 인간의 도래 등 위에 기술한 많은 결정적인 요인들은 서구 인식의 공간을 총체적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환은, 르네쌍스로부터 고전시대로의 변환에 있어서도 그러했듯이, 언어의 변환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고전시대의 표상의 구조에 있어 언어는 인식 자체의 조건이었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서 사물들을 지각할 때 우리의 신체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듯이 그리고 우리의 지각이 신체의 구조 자체에 의해 조건지워지듯이, 고전시대의 언어는 우리 인식의 틀 자체였다. 그러나 고전시대적인 표상구조가 무너지고 언어가 다시 그 두께를 회복했을 때 이제 언어는 그 자체 풀어야 할 수수께끼 같은 대상이 된다. 언어적 두께의 회복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재정립된 것처럼 재정립되지 못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즉 일반문법이 해체되고 난 뒤 문헌학이 도래했지만 그것은 언어의 풍요로움에 대처하는 한 양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언어의 두께에 대응하는 많은 방식에 의해 근대 서구 인식의 다양한 지형도가 작성되는 것이다.
문헌학과 같은 개별과학적 연구가 아닌 언어의 存在 자체에 도전하는 지적 작업으로서, 언어의 불투명성에 대응하는 우선적인 방법은 언어의 形式化이다. 그래서 언어가 문헌학에 의해 다루어지기 시작했을 그 때 부울과 더불어 기호논리학이 탄생된다. 과학적 언어를 중성화시키고자 하는 이 꿈은 이상언어를 구축하고자 하는 꿈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이 길은 중성적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밑바탕에 은폐되어 있는 숨겨진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언어의 왜곡된 외관을 분쇄하려는 노력으로서 맑스, 니이체, 프로이트 등과 더불어 형성된 이 길은 해석학적인 담론들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호논리학과 해석학이 아무리 무관한 작업처럼 보인다 해도 이들은 근대 초 언어의 존재가 의문에 부쳐졌을 때 그에 대응했던 두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길은 文學의 誕生이다. 문헌학이 언어의 풍요로움을 새로운 질서에 입각해 밝히려고 노력했을 때 문학은 그와는 상반된 길을 걸어간다. 문학에 있어 언어는 이제 인식의 조건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하나의 자율적인 공간을 점유하게 된다. 니이체가 누가 말하는가라는 물음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갔을 때 말라르메는 대답한다. < 말하는 것, 그것은 그의 고독에 있어, 그의 연약한 떨림에 있어, 그의 無에 있어서의 말 그 자체 - 그의 의미가 아닌 그의 수수께끼같은 그리고 덧없는 存在 - 이다. > 문학은 이제 이 자율적인 공간 속에서 고전시대에 소외되어 있던 他者들을 담지하는 새로운 언어를 연다. 이제 문학은 <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 추한 것, 불가능한 것 >을 얼싸안게 되는 것이다.
실증성의 영역에 있어서의 이러한 재편성과 언어의 이러한 분산은 학문의 세계가 전반적으로 재구성되도록 만들었다. 우선 표상의 붕괴는 분석적 학문과 종합적 학문을 구분하도록 만들었다. 고전시대에 있어 표상의 구조를 형성했던 동일성/차이성의 체계는 표상체계에 대한 분석이자 곧 표상내용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중적 구조가 무너지자 이제 분석적 학문 즉 수학에 기초하는 연역적 학문과 종합적 학문 즉 경험에 기반하는 경험적 학문이 분리된다. 그래서 이제 학문의 세계는 삼각형적인 구조가 되는데 그 한 꼭지점에는 수학적 과학들이 다른 꼭지점에는 경험적 과학들이 그리고 또 하나의 꼭지점에는 철학적 반성이 자리잡게 된다. 이 철학적 반성은 다시 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하나는 先驗的 主體性의 철학으로서 이 철학은 고전시대로부터 근대로의 결정적인 이행을 선언하게 된다. 그 이행기에 우리는 두 철학적 태도의 대립을 본다. 그 하나는 여전히 표상의 체계를 다듬음으로써 모든 과학들의 공통의 문법을 이룩하고자 했던 관념학파로서 이는 고전시대의 최후 주자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이제 표상의 체계가 와해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소진불가능한 객관성 속에서 경험적 탐구들을 축적하는 실증성들과 다른 한편으로 이 실증성들과의 연결고리를 아직 찾지 못한 채 유한한 존재로서 남게 된 주체의 대립을 뚜렷이 자각했던 비판철학이다. 비판철학은 이제 지식과 사유를 감싸고 있던 표상의 공간이 와해되었다는 것에 대한 최초의 승인이자 동시에 그러한 와해의 마당에서 이제 유한한 실증성으로 화한 표상의 공간들의 土臺와 起源 그리고 限界에 대한 최초의 대답을 형성하게 된다. 이제 이 대답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하는 철학들 즉 定礎하는 主體의 철학들이 푸코가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대상이 된다.
다른 하나의 방향은 이제 분석적 학문과 종합적 학문 사이에 놓이게 된 틈 그리고 객체적 실증성들의 영역과 유한한 주체 사이에 놓이게 된 틈을 메우기 위해 실증성을 넘어서는 어떤 거창한 형이상학적 구도 하에서 이들을 종합하고자 하는 철학 즉 객체성 속에서 선험성을 찾는 先驗的 客觀性의 철학이다. 그래서 19세기에 있어서의 거창한 종합적 철학들과 그들의 한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나섰던 비판적 철학들은 근대 초에 형성되었던 고고학적 차원의 변환에 대한 반대의 응답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한 방향은 와해된 표상적 공간의 선험적 정초라는 야심을 포기하고 표상의 영역을 현실적 실증성의 영역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방향이다. 이는 지각 속에서 객관과 주관의 연결점을 구했던 고전시대적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만 이제 이들을 관통해 연결해 주던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표상은 유한성의 테두리 내에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 비판철학-실증주의-객체의 형이상학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은 19세기 초로부터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적 사유를 구성하게 된다. >
지금까지 논한 근대 초의 총체적 변환들, 즉 고전시대적 표상체계의 붕괴, 새로운 실증성들의 도래, 언어의 분산, 학문 세계의 재편성 등과 같은 배경 하에서 이제 푸코가 상세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先驗的 主體의 도래와 有限性의 分析論이 나타난다.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가장 큰 사건, 그것은 곧 선험적 주체의 출현이다. 인간은 이제 자연 속의 한 생명체로서, 일해야 하는 존재로서, 그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로서 하나의 유한성을 가진 채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이러한 실증성들이 오직 그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선험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을 유기체로서 조직해 주는 생명은 인간의 신체를 통해 드러나게 되고, 인간을 경제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생산력은 인간의 욕구를 통해 드러나게 되며 또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해주는 언어는 인간의 표현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객관 세계에 있어 나타나는 實證的인 것이자 동시에 인식을 기초지우는 根源的인 것(先驗的인 것)의 이중체로서의 인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바로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만들어 버린 칸트 이래, 이제 이 두 대립적인 그러나 서로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측면들을 조화시키려는 철학적 노력이 이어지게 되는 바 푸코는 이들을 < 유한성의 분석론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 하나는 선험적인 것에 의한 경험적인 것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코기토에 의한 사유되지 않은 것의 반복이며 마지막의 것은 근원에로의 회귀에 의한 후퇴의 반복이다. 이제 이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1°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푸코는 근대철학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은 칸트가 인간에 있어서 실증성으로 드러나는 유한성을 또한 인식의 가능근거로 전환시켰을 때 즉 경험적-선험적 이중체가 형성되었을 때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유한성은 경험적 차원에서 드러난다. 고전시대에도 인간에 대한 분석은 있었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있어 인간은 고전시대적인 表의 한 부분 - 표가 그 안에서 복제되는 부분 - 으로서 존재했다. 그래서 꽁디약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인간을 분석한다는 것은 곧 표상을 분석하는 것이었으며 人性을 분석한다는 것은 인식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표상의 성질들과 형태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관념의 분석은 동시에 인성론이자 문법이자 존재론이었으며 결국 表象의 構造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앞에서 논의되었듯이 언어를 지닌, 노동을 하는, 생명체인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실증성들이 서구 인식의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표상에 의해 보장되었던 인식의 가능근거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칸트에 있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난다. 칸트에 있어 표상의 지고함은 무너진다. 이제 그에게 있어 표상이란 설명하는 것이 아닌 설명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에게 있어 표상이란 인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인식의 가능근거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표상을 통해 인간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 표상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인간이 < 王의 자리 >에 들어앉게 되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 비판철학의 작업이란 인식 안에 주어져 있는 경험적 내용들로부터 출발해 인식의 조건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근대적 실증성들을 확대시켜 포괄적인 종합철학들을 만드는 대신 실증성들을 단순한 인식론적 質料로 해석하고 이 질료에 인식의 형태를 부여하는 先驗的 主體를 인식의 가능근거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유한한 실증성들의 담지자이자 동시에 그 실증성들의 선험적 근거라는 이중적 역할을 보유하게 된다. 푸코는 인간이라고 하는 이 경험적-선험적 二重體의 형성이야말로 우리의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近代性의 문턱을 형성한다고 보고 있다.
칸트 이후 이러한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라는 불안정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푸코는 이들이 칸트와는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이 이중체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에 못지 않은 이중체를 생산해 내었다고 본다. 이 시도들은 두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하나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벗어버리고 그에게 있어 단순한 질료로 취급되었던 실증성의 영역에 인식의 지평을 국한시킴으로써 身體의 空間을 인식 성립의 준거점으로 잡은 꽁트에서 드러나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객관세계와 맺는 사회적-역사적 노동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실증성에 인식의 지평을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社會的-歷史的 活動을 인식 성립의 준거점으로 잡았던 맑스에 있어 드러난다. 이들에 있어서는 실증성의 내용이 선험적 주체의 역할을 대치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증성들은 다시 어떤 위계적 질서에 따라 배분된다. 지식의 삼단계에 대한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과학에 대한 꽁트와 맑스의 이론에서, 역사의 목적론적 과정에 대한 이들의 이론에서 실증성으로 국한되었던 인식의 가능근거가 다시 종말론적 위계 안에 재배치되는 것이다. 이제 종말론적인 선험적 질서 내에서 실증성들이 재분배됨으로써 선험적인 것 안에서 경험적인 것이 반복되는 구조가 다시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 실증주의적-종말론적 구조에 있어 인간은 유한성의 장소이자 또한 그 유한성이 선험적 질서에 따라 배분되는 장소(진화의 정점)로서 나타난다. 인간은 환원된 진리이자 약속된 진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중체로서의 인간의 운명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경험적-선험적 이중체의 구조를 다시, 보다 정교한 형태로 재건하려는 철학적 시도가 제기되는 바 푸코는 이것이 현상학 그 중에서도 특히 메를로-퐁티의 실존적 현상학이라고 보고 있다.
메를로-퐁티적인 현상학은 환원된 존재이자 동시에 약속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파기하고자 한다. 실증적 유한성으로 환원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에 대한 경험주의적인 파악에 있어 분명히 드러난다. 경험주의적인 파악은 인간의 신체를 하나의 전적인 對象으로서 환원시키며 신체가 하나의 主體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것은 인간의 실증적인 유한성을 편견없이 드러내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경험이란 이미 이론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베르나르 이후의 인식론적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메를로-퐁티는 다른 방향의 비판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전적으로 대상으로서 파악된 신체는 그의 선험적 토양을 상실한 신체일 뿐이며 따라서 경험주의 철학은 경험적 주체의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선험적 주체로서의 신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증적 유한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나아가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근거로서 작동하는 선험적인 존재인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실증성으로 환원된 인간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선험적 층을 식별해 내고자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도 거부된다. 메를로-퐁티에 있어 주체는 하이데거에 있어서처럼 세계-안에-있는 존재이다. 메를로-퐁티에 있어 인간이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 인식의 궁극적인 준거점이 지각에 있음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 관념들의 확실성은 지각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의식은 지각적이다. 우리 자신들의 의식까지도. > 그래서 주체에 있어 언제나 선험적 차원이 작동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실증성의 場 안에서만 기능한다. 신체는 유한한 실증성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순수한 선험적 주체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선험적 二重體인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신체와 신체에 의해 지각된 장(그리고 이들의 시간적 운동으로서의 역사와 문화의 장)이야말로 모든 인식의 준거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에 있어 신체-주체는 또는 그것이 형성하는 지각적 장은 경험적 주체/선험적 주체가 미분화되어 진동하고 있는 二元的 一元性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실존적 현상학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나는 이 < 체험된 것 >을 기술하는 데 있다. 이 체험된 것은 경험적 내용들이 그에 주어지게 되는 실증적 장이자 이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장이기도 하다. 이 장 안에서 신체의 공간과 문화의 시간은 끊임없이 서로 교차한다. 즉 단순한 실증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신체의 활동과 축적된 의미작용으로서의 문화가 계속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적 현상학이 기술해야 할 체험된 장이다. 그러나 이 장은 고고학적 장 즉 객관적 선험의 장과는 다르다. 경험적 내용들을 선험적인 근거들에 의해 정초지우는 主體의 개념이 없이는 이 현상학적 장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적 현상학은 환원된 인간이라는 개념도 약속받은 인간이라는 개념도 거부한다. 즉 실증주의와 종말론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선험적 차원을 갖추지 않은 채 실증성들의 담지자로서만 존재하는 인간 그리고 예언적인 역사의 약속에 따라 존재하는 인간은 거부된다. 인간은 그 안에서 수많은 실증성들이 출현하는 장이자 이들을 선험적인 것 안에서 반복함으로써 그들을 정초지우는 이중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로부터 메를로-퐁티에 이르는 이 시도, 유한성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조건을 그러한 유한성을 정초지우는 선험적 주체로 전환시킴으로써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을 구성하고자 한 이 시도는, 푸코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진동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실존적 현상학이 발견해 낸 이 이중체는 한편으로 구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그것은 실증성의 담지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사물들의 실증성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그들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이 입장은 서로 통합되기 힘든 두 차원을 섞어버린다 : 자연에 대한 인식의 가능한 객관성과 신체를 통해 소묘되는 시원적인 경험을 또는 문화의 가능한 역사와 체험 속에서 동시에 드러나면서 숨는 의미론적 두께를.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이러한 이중성과 역동성이야말로 실존적 현상학이 끊임없이 드러내야 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지만 푸코에 있어 이는 풀기 힘든 논리적 난점(경험적인 것의 선험적인 것으로의 전환)으로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의 비판은 우선 실존적 현상학의 입장에서처럼 자연 및 문화에 대한 인식의 객관성이 주체의 체험에 그 준거점을 두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제시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우리의 체험된 차원과 인식된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不連續을 뚜렷하게 드러내어 준 바 있다. 푸코는 바슐라르적 입장에서 한편으로 체험의 영역에 국한되는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제시되는 현상학적 주체의 개념을 거부한다. 푸코에 있어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이란 한 담론이 그 안에서 개별화되는 담론적 장에 의해 주어진다. 그리고 주체가 이 담론적 장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담론적 장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잡음으로써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 파악되는 < 그러한 인간이 진정 존재하는가 > 라는 보다 급진적인 물음을 던진다. 현상학적인 주체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이 입장에 대해 우리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2° 코지토와 비사유
경험적인 것/선험적인 것의 이중체가 출현한 것과 나란히 코지토/비사유의 쌍이 근대철학의 문턱을 형성하고 있다. 고전시대에 있어 나의 思惟는 나의 存在와 연결된다.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표상의 구조는 자연의 빛 아래에서 코지토로 하여금 세계의 질서를 복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푸코가 지적하고 있듯이 데카르트에 있어 코지토가 자신의 완전한 실천을 이루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오류, 환상, 꿈, 광기 등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코지토의 완성을 위한 들러리들일 뿐이다. 데카르트의 코지토에서 근대적 주체 개념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 개념이 속해 있는 언표적 장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를, 그 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방계공간을 무시하는 것이다. 코지토의 의미는 고전시대 에피스테메의 구조 내에서만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 이러한 구도는 달라진다. 이제 코지토는 그것이 어느 한계까지밖에는 소화해 내지 못하는 불투명한 영역 즉 인식론적 질료에 맞서게 된다. 코지토는 非思惟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변화는 칸트 이후에 뚜렷이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이 결코 그에 대한 완전한 정복자가 될 수 없는 언어의 사용자가 되었을 때, 그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을 통해 완고한 자연과 싸우는 존재로 드러났을 때 그리고 자신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운동이 만들어 낸 한 조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더 이상 투명한 표상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코지토가 아닌, 언어의, 생명의, 노동의 두께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그래서 비사유와의 역동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존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비사유의 존재는 단지 코지토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어두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지토와 중첩되어 있는, 더 나아가 코지토와 섞여 있는 他者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철학 특유의 물음이 제시된다: < 코지토의 開現 안에서 빛나는, 말하자면 깜박거리는 그러나 그의 내부에 그리고 그에 의해 전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 < 인간의 존재는 ․․․ 어떻게 비사유와 지울 수 없는 그리고 근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
이 비사유는 19세기 이래 인간이 출현했을 때 그와 나란히 탄생해 말없이 그에 붙어 다녔던 타자였다. 그래서 비사유를 사유하고자 하는 철학적 시도들 - 대자의 형식 안에서 즉자의 내용을 반성하고자 하는 시도, 인간을 그의 고유한 본질과 화해시킴으로써 脫소외시키려는 시도, 무의식적인 것의 장막을 제거하려는 시도 또는 그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의 무한정한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 등 - 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코지토와 비사유를 화해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들의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현상학은 비사유의 무게에 걸려 있지 않은 데카르트적 코지토와 코지토의 선험적 정초에 기대고 있지 않은 비사유의 존재를 동시에 거부한다. 그것은 코지토에로의 비사유의 운명적 연결을 공식화하고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환원은 경험적 자아가 어떻게 선험적 자아에 의해 의미있는 것으로 구성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원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데카르트적 코지토가 아니다. 환원의 끝에서 결코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는 것이 드러남으로써 코지토는 불투명한 비사유에 묶여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훗설의 선험적 자아 역시 이중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훗설의 분석들에 있어서는 드러나지 않은 것, 비활동적인 것, 침전되어 있는 것, 수행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요컨대 그의 진리에 있어서의 인간의 뒤섞인 投射로서 반성된 의식에 제공되는 그러나 또한 그로부터 출발해 인간이 그 자신을 스스로 집결해야 하고 그의 진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소환해야 하는 기반의 역할을 수행하는 소진되지 않는 안감. >
그래서 메를로-퐁티가 강조했듯이, 시간적인 흐름 즉 우리의 경험의 흐름을 무시하고자 하는 또는 그를 지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사유조차도 이 흐름 속에 자리잡으며 그것이 구성되자마자 시간에게로 하강한다. 그래서 현상학자가 경험적 사실들을 정지시키고자 한다 해도 이는 그들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학은 오히려 우리를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세계와 이어주는 이 연결선에로 우리를 이끈다.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순수한 코지토가 아닌 결코 순수할 수 없는, 자연적, 문화적 객관세계와 뒤섞임으로써 前개념적 차원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신체적 주체인 것이다. 순수하게 의식적이지도 또 순수하게 非의식적이지도 않은 이 차원이 현상학이 기술하고자 하는 체험하는 주체이자 체험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코지토와 비사유는 운명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다.
푸코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학적 입장 역시 난점을 야기시킨다. 우선 훗설의 선험적 분석은 제과학을 선험적으로 정초시키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결국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사변적 성찰로 귀착되었다는 점이다. 꽁트 이후 현대 인식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무도 인식의 최종 근거가 인간의 의식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바슐라르 이후의 인식론은 과학의 근거설정에 있어 현상학적 입장의 부적절함을 충분히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상학은 우리에게 < 인식 >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해 준다기보다는 인간의 < 의식 >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인식론임을 자처했고 때문에 그것은 실제적 인식의 內容들에 철학적 폭력을 가함으로써만이 존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을 자처한 현상학은 실증성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현상학 속에는 비사유의 불안한 현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학이 처음부터 그 존재를 배척한 실증성들이 결국 코지토의 존립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어두운 타자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는 현상학이 서구적 합리성의 올바른 정초이기 보다는 19세기 초에 형성되었던 이중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공식화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결국 그것은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이자 비사유에 대한 그의 관계에 대한 물음일 뿐인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바로 의식이라는 그의 진영 자체 내에서 무의식이라는 거북한 실증성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비사유를 즉자의 영역으로 완전히 밀어내 버린 싸르트르의 현상학은 무의식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고 무의식을 받아들인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이중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최후의 정교한 공식화가 된다. 결국 비사유란 선험적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이라는 개념이 인정되는 한 언제나 그에 동반되어 나타나는 침묵의 그림자인 것이다.
3° 시원의 후퇴와 회귀
근대성의 문턱을 형성하는 마지막 이중체는 시원의 후퇴와 회귀이다. 근대에 있어서의 시간성과 역사성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始源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고전시대에 있어서도 물론 시원의 문제가 배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시간이란 공간적 表의 요소들에 붙는 指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표의 요소들 사이에는 시간 속에서의 生成(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의 생성)이나 사건의 偶發性과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시간이란 표 속에서 이미 논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요소들이 세계 속에 現存하게 될 順序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기존의 공간적 질서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시간이란 표상의 공간을 결코 훼손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예컨대 물물교환이 경제현상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었다면 그것은 물물교환이라는 사건이 지니는 역사적 우발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물물교환이 부의 분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표상체계를 論理的으로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고전시대에 있어 시간적 질서는 논리적 질서의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말하는, 생명체인, 노동하는 인간 즉 실증적 유한성으로서의 인간의 개념이 성립되면서 이제 인간은 그를 관통하던 자연의 빛을 상실하고 막막한 시간의 어느 한 조각의 범위 내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존재로 전환된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고자 했을 때 이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는 바 왜냐하면 < 그러한 지식은 그 모든 부분들에 있어 노동, 생명, 언어가 말하는, 실존하는 그리고 노동해야 하는 바로 그 존재들에게 그들의 진리를 숨기는 거대한 어두운 영역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 이제 인간은 사물들과 同時的인 존재, 그들의 寫像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인간이 결코 그 전모를 이해할 수 없는 생명, 노동, 언어의 두께가 인간을 감싸게 되며, 고전시대의 왕의 자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차이, 불연속, 분산을 정초해 줄, 이들이 그로부터 분화되어 나왔을 동일자인 始源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시원에 대한 이러한 탐구는 실증주의적 방향을 취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시간에 대한 두 개념, 불안정하게 결합되어 있는 두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실증주의는 사물적 시간의 연속체(시간의 과정) 내에 인간적 시간의 연속체(인간의 역사)를 삽입시키고자 한다. 다른 한편 이 철학은 인간이 사물들에 대해 얻어 낸 지식의 역사를 위계적으로 배열했다. 전자의 경우 사물적 시간은 우리가 그를 추적해 감에 따라 끊임없이 과거로 후퇴해 간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인간의 지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달해 왔으며 과거는 미래에 비추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실증주의는 시원의 문제를 과학적 해결의 바깥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에 의해 반복되었듯이 그리고 비사유가 코지토에 의해 반복되었듯이, 이제 시원의 후퇴는 그 回歸에 의해 반복된다. 물론 이 반복 역시 인간이라는 이중체를 통해서였다. 한편으로 인간은 시간의 무한 후퇴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는 그의 불투명한 과거와 역시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촛불처럼 깜박이는 존재로서 드러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간이 또는 역사가 그 진리에 있어 드러나는 것 또한 인간을 통해서이다. < 사물들이 그들의 시작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인간)에게 있어서이다: 그는 지속의 한 순간 속에 새겨진 금이 아니다. 그는 그로부터 출발해 시간 일반이 재구성될 수 있고, 지속이 흐를 수 있으며, 사물들이 그들에게 고유한 순간에 있어 출현할 수 있는 그러한 開現인 것이다. > 인간이 그가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언어의 사용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자기화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이며 진화 자체를 정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고무된 이 생각에 따르면 객관 세계란 단지 인류 역사의 어떤 특수한 순간의 지적인 산물일 뿐이다.
이제 인간은 한편으로 유한적 실증성을 통해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버려져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다른 한편 시간과 역사가 바로 그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로서 드러나게 되는 二重體로서 드러난다. 이로부터 근대철학이 늘 추구해 오곤 했던 回歸의, 再始作의, 反復의 테마가 형성되었다. 시간이 인간의 가능성을 통해 매개됨으로써 시간계열에 있어서의 과거의 우위는 미래의 우위로 전환된다. 이중체로서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시원의 후퇴조차도 인간에 의해 구성된 역사적 실재의 부분일 뿐이다. 사유라고 하는 同一者 속에서 시간의 분산과 불연속 그리고 차이가 정초됨으로써 역사는 인간학화되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에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헤겔 등에 의해 대표되는 첫번째의 유형은 시원의 회귀를 우리가 시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방황하는 동안 결여되어 있던 것의 完成으로서, 충만성의 再建으로서 간주한다. 역사란 최초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 동일자가 주어져 있지만 결코 現存하지는 않는, 그러나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원환적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역사는 긴 旅程이며 시원의 퇴락과 그로부터의 되찾음을 위한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그래서 이 역사철학에 있어 시원이란 또한 主體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증적인 사물적 역사에 삽입된 인간의 역사가 아닌 인간적 역사에 의해 구성된 사물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이 철학에 있어서의 동일자란 곧 주체로서의 인간일 뿐인 것이다.
하이데거 등에 의해 대표되는 두번째 유형은 시원의 회귀를 空虛의 개시, 역사의 모든 의미들의 無로의 붕괴로 간주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역사는 현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현존재는 存在라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려되었을 때 그 적절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있어 인간을 넘어서는 객관성의 차원은 실증적 시간이 아닌 存在에 두어진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역사는 存在의 후퇴의 역사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存在에의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를 거쳐 근세에 이르면서 점차 은폐되어 버린다. 근세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정복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재창조되며 역사 또한 대상화된다. 인간은 神의 자리에 들어 앉게 되고 이제 자신을 근거지워 줄 어떠한 정초도 없는 허무의 상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始源(存在)이 완전히 망각의 어두움에 묻혀 버린 이 극단적 은폐 속에서야 비로서 그 回歸가 가능해진다. 이 허무주의로부터 존재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이 도래하게 되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 단초는 미래에 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학화하는 역사철학의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유한성의 분석론들은 고전시대의 표상체계가 붕괴되면서 인간이라는 정초 위에서 실증성을 정초하고자 했던 모험적인 시도들이었다. 푸코는 우리가 이제 고전시대의 철학과 근대의 철학을 충분히 비교해 볼 수 있는 위치에 다다랐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시대의 대립은 결국 言語와 人間의 대립이다. 고전시대의 표상체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언어가 붕괴되면서 그 자리를 인간이 대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코는 앞으로의 철학은 다시 언어의 이론을 구축함으로써 인간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사유에 있어 문제가 된 것은 < 어떻게 他者가, 먼 것이 또한 가장 가까운 것, 同一者인가 >라는 문제였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 과 > 선험적인 것, 코지토< 와 > 비사유, 시원의 후퇴< 와 > 회귀에 있어서의 이 < 와(과)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이중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동일자였다. 그러나 이제 사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 동일자를 타자화하는 것, 이 중심을 분산시키는 것, 우리는 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푸코는 근대철학이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공간 속에서 깊은 < 인간학적 잠 >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근대적 사유는 자신이 그 안에서 깨어 있다고, 고뇌하고 있노라고 착각하고 있다. 구조주의에 의해 이 인간학적 잠으로부터 깨어난 푸코는 이제 이 빗나간 고뇌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오늘날 인간의 죽음에 의해 생겨난 빈 공간 속에서 푸코의 철학은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 아직까지도 인간에 대해, 그의 지배에 대해 또는 그의 해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인간이란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으로 모든 인식들을 인간의 진리들에로 다시 인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학화하지 않고서는 공식화하고자 하지 않는, 탈신비화하지 않고서는 신화학화하고자 하지 않는, 思惟하는 것은 곧 人間이라고 즉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사유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뒤틀리고 왜곡된 反省의 이 모든 형태들에게, 우리는 철학적 웃음 - 즉 어느 정도 침묵하는 웃음 - 으로 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다. >
III. 구조주의와 고고학
19세기 초 고전시대적인 표상의 구조가 무너지고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출현했던 것처럼, 오늘날(20세기 후반) 이제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중체로서의 인간이 출현했던 것이 유한성의 분석론을 실행했던 철학 내에서였다면 이제 인간의 소멸을 주도하는 것은 인간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구조주의라는 이름 하에 실행되고 있는 인간과학의 내부에서이다. 푸코는 19세기 이후의 인간과학의 흐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우리의 맥락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구조주의적 인간과학이다. 우리는 구조주의가 19세기 이래 다채롭게 그리고 장엄하게 진행되어 온 유한성의 분석론을 어떻게 소멸시켜 버렸는가를 보여주고 이러한 흐름 위에서 고고학의 철학사적 맥락을 정립하고자 한다.
1° 구조주의와 근대 주체철학 논박
우리는 구조주의가 19세기 이래 유럽 학문의 세계를 구성했던 삼각형 가운데에서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은 수학 및 수학적 학문들과 특이한 관계를 형성한다. 고전시대에 있어 표상의 구조를 견고하게 해주었던 그리고 동시에 자연사, 부의 분석, 일반문법을 비롯한 제언설에 공통의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통일과학의 이상을 고무했던 것은 일반대수학(mathesis)이었다. 19세기 이후 실증적 유한성들을 선험적으로 기초지우고자 했던 사람들이나 그들을 거창한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 융해하고자 했던 사람들 모두 이러한 수학적 일반화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적인 인간과학들에 있어 수학적 일반성은 다시금 그 힘을 획득한다. 나아가 이 일반성이 현대에 있어서의 구조주의적 통일과학의 이상을 고무시켜 주고 있다. 물론 이 수학적 일반성은 이제 일반대수학이 아니다. 不連續의 개념은 현대 인간과학의 심장부에 놓여 있으며 이제 수학적 일반성은 이 불연속을 보듬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위상학은 바로 이러한 언어를 제공해 주었으며 구조주의는 일반대수학과 유비적으로 一般位相學이라고 불러 봄직 한 수학적 언어에 의해 정초된다. 이 일반위상학은 단순한 표현방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일반위상학은 고고학적 장 즉 인간의 실증성들이 그 안에서 실행되는 공간 자체의 구조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일반위상학의 공간을 통해 인간을 정초지우는 구조주의는 先驗的 位上學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또한 삼각형의 또 다른 꼭지점에 위치해 있는 실증과학들과도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구조주의는 형식과학이 아닌 실증과학이므로 반드시 경험성을 그 요소로서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조주의가 19세기 이래 형성된 실증적 인간과학들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한편으로 실증과학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실증과학을 넘어선다. 구조주의는 無意識이라는 水準으로 파내려 감으로써 前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에 대한 선험적인 차원의 조망을 제시한다. 푸코가 말하고 있듯이, 구조주의는 생물학적 실증성을 통해 드러나는 기능을 규범의 수준으로, 정치경제학적 실증성을 통해 드러나는 갈등을 규칙의 차원으로, 문헌학적 실증성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작용을 체계의 차원으로 정초지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인간에게서 표상들로 형성되는 실증성들을 기술하는 차원이 아닌 그 표상들의 형성을 可能하게 하는 條件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구조주의는 실증과학임을 넘어서 그들에 대한 선험철학으로서의 역할을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조주의는 철학적 반성과 특이한 관계를 맺는다. 사변적 철학에 대해 구조주의는 이중적으로 대립한다. 변증법 등 수학을 넘어서는 것으로 자처하는 사변적 체계에 대해 구조주의는 한편으로 철저한 수학적 바탕 위에 섬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실증과학적 구체성을 지님으로써 사변철학의 위험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실증주의에 대해 구조주의는 무의식적 수준에서 실증적 표상들을 조건지움으로써 선험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특히 구조주의가 중요한 관계를 맺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주체철학의 전통이다. 구조주의는 이중체로서의 인간을 거부하고 무의식적 수준에 대한 탐구 결과를 통해 표상하는 인간을 정초함으로써 근대의 주체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구조주의는 언어에 두께에 대해 체계의 얇은 막으로부터 형성되는 의미를 내세우며, 코기토에 대해 이제 코기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파악된 비사유를 즉 무의식의 구조를 내세우며, 역사의 회귀에 대해 공시적인 사회적 구조를 내세움으로써 근대적 주체철학의 기본 논제들을 공격한다. 구조주의는 주체에 부여되어 왔던 선험적 특권을 박탈한다. 구조주의는 선험적 차원을 客觀世界에로 되돌려 준다. 구조주의는 객관적 선험의 철학이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이 사유양태가 근대적인 주체철학에 대해 가한 타격은 우선 언어의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발해 낸 언어학자들이 주체에 관련된 철학적 문제에 직접적인 공헌을 한 바는 거의 없다. 언어에 관련해 현대의 反주체주의적 철학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은 문학비평가들이었다. 현대의 문학비평가들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서 한 시대의 영혼이나 감수성이 아닌, 그룹이나 학파 또는 세대나 운동이 아닌, 저자의 삶과 그의 창조를 묶어주는 교환들의 작동 속에서의 저자의 인격조차도 아닌, 하나의 작품에, 하나의 책에, 하나의 텍스트에 고유한 構造를 제시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말하는 존재는 곧 말 자체라는 말라르메의 통찰에서 그 기본 입장을 발견한다: < 육신의 소멸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고자 원하여, 시간성 위로 불쑥 나온 작품 속에서 부동의 안정된 존재로 지속하고자 하는 바램은 헛된 것이다. > 현대 문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존재란 주체의 사라짐 속에서만 그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가 철학적 반성의 내면성과 지식의 실증성에 대조시키는 < 바깥의 사유 >이다. 현대 비평에 의해 고무된 이 언어관을 철학적으로 다듬어 현대의 인간과학 전반에 그 철학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논리적 구조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 곧 {지식의 고고학}의 목적인 것이다.
민족학적 사유 또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민족학은 처음부터 한 문화의 실증성들에 그 실증성들의 창조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표상을 냉정하게 거부한다. 민족학은 우리의 삶을 멀리에서, 바깥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은 문화적 무의식의 차원을 탐구하며, 실증성의 차원에서 생성하는 인간의 표상을 선험적인 수준에서 정초해 주고자 한다. 민족학은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표상 아래에서 규범들과 규칙들 그리고 체계들을 읽어낸다. 즉 민족학은 주어진 문화 내에서의 생물학적 기능의 규범화 또는 교환, 생산, 소비를 가능하게 해주는 규칙들 나아가 언어학적 모형에 따라 형성되는 사회적 실천들의 체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시간과 역사를 自己化하는 주체철학에 대해 다른 길을 제시한다: < 역사가 지속 속에서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 또는 우리가 사유에 의해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역사가 더 이상 內面化可能하지 않도록 그리고 잠정적인 內面化에 집착하는 환상에 불과한 그의 가지성을 버리도록. >
유한성의 분석론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대면한 구조주의적 인간과학은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은 규범과 규칙 그리고 체계의 보다 구체적인 무의식적 내용물들을 드러냄으로써 생명, 노동, 언어에 관련해 실증적으로 드러나는 표상들에 대한 가능조건들을 제시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중체를 통한 이들의 주체철학적 전환을 그 밑바탕에서 와해시킨다. 이제 죽음은 지식 일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인간의 존재양식의 유한성을 특성화하는 경험적-선험적 이중화를 근거지워 주는 것이 되고, 욕구는 사유의 심장부에서 언제나 사유되지 않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이 되며, 법칙은 시원의 후퇴와 회귀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무감동한 공간이 된다. 이 죽음, 욕구, 법칙은 지식의 내부에서 즉 실증성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제 主體를 위해 이중화되어 있던 인간은 자신에 대해 他者化된다. 근대철학을 특징지웠던 內面性에의 욕구는 바깥의 사유로 전환되는 것이다.
2° 구조주의와 고고학
고고학이 지금까지 기술된 철학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전시대로부터 근대에로의 전환은 특히 유한성의 분석론을 낳았고 오늘날 구조주의의 도래는 이러한 근대철학의 전통에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고고학은 이러한 인식론적 場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구조주의적인 민속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전통적인 인류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메타적 차원에서 성립했듯이 고고학 또한 그에 대응되는 실증성의 영역과의 관계 하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본다. 이 실증성의 영역이란 물론 역사학이다. 고고학은 19세기의 사변적 역사철학과 20세기의 실증적 역사과학 사이에서 메타적, 인식론적 태도를 취한다.
19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고전시대적인 표상의 구조가 무너지고 실증성의 새로운 양태들이 도래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다른 변화들이 야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앞 절에서 지적했다. 이 변화에 있어서의 중요한 측면이 곧 각 실증성들에 있어서의 역사성의 도래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기나긴 시간의 지속 안에서 형태변이되어 온, 환경과의 싸움을 통해 자연의 변화에 적응해 온 다양한 종들의 역사를 기술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노동을 통한 생산의 발전양식이나 자본이 축적되고 재투자되어 온 양태 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이하는 가격의 역사를 그리게 되었다. 나아가 언어는 그 고유한 문법적, 음성학적 역학에 따라 그리고 그에 영향을 주는 각종의 외부적 요소들과의 관계 하에서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변화되어 온 것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實證性들의 이러한 파열은 인간의 有限性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제 놀라운 전환이 일어나는 바 이는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수동적 관계를 역사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인간의 능동적 관계로 전환시킨 歷史哲學의 도래이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이제 인간은 이러한 실증성들을 二重化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즉 이제 인간은 진화의 정점으로서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진화 자체의 목적으로서 간주되기 시작했으며, 생산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경제학적 법칙들의 유효성을 안정화시키고 확장시키고 단축시키는 존재로서 간주되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언어를 자기화하여 변형할 수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 실증성들의 역사 뒤에서 보다 급진적인 인간 자체의 역사가 나타난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원의 후퇴와 회귀라는 유한성의 분석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적인 역사철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각은 역사학 자체 내에서 발생했다. 아날학파는 사건으로 시끄러운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평형들을 밝혀 냈다. 즉 시원으로부터의 그리고 시원으로의 역사의 목적론적 과정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의 평형 뒤에 찾아오는 급격한 변환의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변증법적 역사철학의 패러다임을 파기시킨 것이다. 아날학파의 작업에 따라 역사의 선형적 계기들은 그 심층에서 작동하는 분절로, 역사의 총체성은 계열들의 복수화로 대치
되었다. 브로델이 < 장기지속 >이라고 이름붙인 역사 연구의 이 새로운 단위는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기술해 오곤 했던 < 숨가쁜 역사 >를 대치할 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들의 일방향적인 묶음 또한 거부한다. 장기지속을 통한 역사 서술은 사건기술적인 역사을 지양함과 동시에 변증법적인 역사철학 또한 거부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고고학은 잘 드러나지 않고 역사의 심층부에 묻혀 있는,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전체적으로 변환되는, 상층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이 새로운 層의 발견이라는 맥락에서 아날학파와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은 현대 역사학에 대한 메타적 차원에서 성립된 것이다.
고고학이 아날학파의 역사학에 대한 메타적 입장에서 성립된 것이라 할 때 고고학의 철학적 입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물론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깡길렘의 메타과학사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다.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인식의 무한한 축적이라는 생각을 과학사에 있어서의 불연속적 비약이라는 생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무엇보다도 인식을 그 경험적인 기원이나 최초의 동기로부터 절단시킴으로써 푸코로 하여금 현상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깡길렘은 과학사에 대한 그의 메타적 분석을 통해 한 개념이 그 안에서 형성되고 변환되는 다양한 場들 및 복수적인 이론적 환경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에피스테메 개념의 형성을 가능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과학사를 서술하는 다양한 水準(인식론적 층위)을 드러냄으로써 푸코로 하여금 과학의 밑바탕에서 작동하는 담론적 형성규칙들의 수준 및 지식의 수준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길을 열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인간과학의 영역에 있어 레비-스트로스는 한 문화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법칙들을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역사의 내면화에 대항해 바깥의 사유를 제시함으로써 고고학에로의 결정적인 길을 준비했다. 요컨대 고고학은 역사적 실증성의 영역에 있어서의 아날학파의 혁신에 대한 메타적 작업(바슐라르, 깡길렘, 레비-스트로스를 선구로 하는)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적 사유는 결코 역사적 차원을 비켜가지 않는다. 고고학이란 역사라는 실증성과의 관계하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조주의조차도 역사를 거부한 바가 없다. 다만 구조주의적 사유는 어떤 형태의 역사를 거부할 뿐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 구조주의적 분석은 역사를 기피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역사에 일등석을 양보한다: 권리상 그것 없이는 필연을 고려할 수 조차 없게 될 환원불가능한 우발성에로 귀착되는 자리. ․․․구조들에로 전적으로 정향된 탐구가 유효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사건의 힘과 덧없음 앞에서 고개를 숙임으로써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사유가 거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그릇된 설명이지 역사 자체가 아니다. 고고학은 한 담론의 형성과 변환을 가능하게 해준 조건들을 기술함으로써 단순한 사건기술적 역사를 극복하고자 할 뿐이며, 역사에 대한 선형적인(또는 흔히 말하듯이 나선형적인) 이해를 복수화시킴으로써 역사적 시간을 복수화시키고자 할 뿐이다. 요컨대 고고학은 차이들을 환원시키지 않는다. 특히 고고학은 주체의 旅程으로 차이를 환원시키는 입장을 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 고고학은 차이들을 분석하고 그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정당하게, 말하고 또 그들을 分化시키고자 한다. > 고고학은 차이들의 內面化를 거부할 뿐인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성숙을 주체에 대한 外在性들의 變換으로 치환하고자 할 뿐이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反역사주의라는 논박은 19세기적 역사철학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알레르기적인 반응일 뿐인 것이다.
고고학은 한편으로 이와 같이 구조주의를 위시한 현대 프랑스의 인식론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개발해 낸 것도 사실이다. 고고학은 심층적 구조와 가시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주의적인 이분법을 버린다. 고고학은 역사적 실증성으로서 드러나는 가시성의 영역에 그 자신을 한정시킨다. 푸코 자신의 표현대로 고고학자는 < 행복한 실증주의자 >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가시적 현실과 그 현실의 可能性의 條件으로서의 선험적 장에 대한 구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고학에 있어 이러한 層化는 더욱 두드러진다. 고고학은 구조주의적 의미에서의 잠재성의 개념을 선험성의 형태로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層化는 가시성의 영역 내에서 형성된다. 즉 푸코에 있어서는 비가시성/가시성의 양분법이 아닌 가시성 내에서의 層化가 성립하는 것이다. 비담론적 실천의 영역(원한다면 이를 체험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영역 즉 담론적 형성규칙들의 영역(이 영역 내에서 지식들이 개별화된다) 그리고 과학성의 문턱을 넘어선 영역이 層化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바슐라르에 의해 그 불연속성이 강조된) 체험의 영역과 과학성의 영역 사이에 또 하나의 中間領域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중간영역은 언표의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담론적 형성규칙들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서 그 안에서 다양한 담론들 나아가 지식들이 형성되고 변환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의 發見과 그 영역을 기술할 수 있는 방법론적 장치들의 개발, 이것이 고고학의 인식론적 공헌인 것이다. 이 영역은 체험의 영역이 아닌 이미 言語化된 영역이지만 다른 한편 아직 과학으로 순수화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에 순수 과학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他者들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고고학은 이 영역을 엄밀한 인식론적 장치를 통해 기술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던 타자들을, 프랑스 인식론의 엄밀한 방법론적 장치를 통해 기술하고자 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고고학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
* *
지금까지 우리는 고전시대, 근대, 현대라는 푸코의 시대 구분을 따라 각 시대에 있어 생명, 노동, 언어라는 측면에 있어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논의들에 대한 결론을 토대로 푸코의 철학사적 위상을 가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푸코의 철학사적 위상은 그를 칸트의 그것과 비교해 봄으로써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칸트의 철학사적 위상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당시의 물리학이 사실적인 차원에서 논박했던 전통적인 自然의 형이상학을 선험적인 차원에서 논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러한 물리학을 인식론적으로 정초지워주는 것이었다. 그 뒤 칸트의 이러한 작업 위에서 人間의 형이상학들 즉 우리가 지금까지 논했던 유한성의 분석론들이 새롭게 세워졌던 것이다.
푸코의 작업은 칸트가 세웠던 이 인간의 형이상학을 칸트가 그 이전의 자연에 관한 형이상학에 대해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논박하는 것이다. 즉 푸코는 우선 현대의 인간과학(구조주의)이 사실적인 차원에서 행했던 근대 주체철학에 대한 논박을 선험적인 차원에서 다시 행하고자 하며 다음으로 그러한 작업을 통해 현대의 인간과학을 인식론적으로 정초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칸트가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을 종식시켰다면 푸코는 (칸트가 바로 그 정초자인)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을 종식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푸코 이후의 철학은 바로 이 < 인간의 죽음 > 즉 근대적 의미의 선험적 주체의 죽음이 남겨 놓은 빈 공간 속에서 성립한다. 이 빈 공간을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언어, 새로운 실천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푸코의 이어지는 작업이며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할 작업이다.
3장 主體哲學의 양태들과 考古學
- 선험적 주체의 철학들과
고고학의 대비
우리는 1장에서 고고학의 논리적 구조를 논했다. 그를 통해 우리는 고고학이 다루는 영역이 전통적인 인식론자들이 다루어 온 엄밀과학의 영역도 인식을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서 설명하는 생활세계적 현상학의 영역도 뒤르케임 학파 등이 다루는 사회학적 영역도 아니며 객관적 선험의 영역임을 보았다. 그리고 2장에서는 고고학의 철학사적 위상을 논의했다. 즉 서구 철학사의 흐름에 있어 선험적 주체의 등장과 소멸을 논의했으며 그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고고학의 철학사적 위상을 가늠해 보았다. 이 두 장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고고학이란 어떤 철학사적 맥락에서 출현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것은 어떤 논리적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논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짓기 위해 고고학과 뚜렷이 대비되는 철학들과 고고학을 비교해 봄으로써 고고학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철학들은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으로서 바로 근대적 주체철학의 대표적인 양태들이다. 현상학과의 비교는 가장 기본적이다. 현상학이야말로 인식의 근거를 선험적 주체에 둠으로써 고고학과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선험적 현상학과 생활세계적 현상학으로 나누어 논의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변증법과의 대비가 있다. 이는 시간의 문제, 사건의 문제, 역사의 문제와 연관되며 또한 실천의 문제와 연관된다. 마지막은 해석학과 고고학의 대비이다.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해석학과 고고학이 의미의 문제에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는가를 보이고 이러한 접근들의 밑바탕에는 다시 주체의 문제가 깔려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의 비교를 통해 고고학이 근대적 주체철학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고고학 자체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고고학이 지니는 反현상학적, 反변증법적, 反해석학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비교 자체가 어떤 근거에서 가능한 것인가를 논해야 할 것 같다.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통의 공간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비교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과 고고학의 대비는 외견상으로도 뚜렷하다. 그래서 우선 변증법과 해석학을 선험적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를 논해야 한다.
변증법적 사유의 경우(우리는 특히 헤겔적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선험철학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론(2장에서 논한 선험적 객관성의 철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세계의 운동양태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이 우리의 인식과 삶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우리는 선험철학의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잡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변증법을 역사를 파악하는 하나의 논리학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즉 그 대상이 무엇이건, 대립적 多를 지양해 가는 하나의 사유양식으로서 다루고자 한다. 즉 우리는 선험적 주체를 통해 역사의 목적론적 정초를 시도하는 철학을 선험철학으로서의 변증법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변증법적 사유양식과 고고학적 사유양식에 대한 비교는 각각의 사유양태에 대한 개념적 비교, 선험적 주체를 둘러 싼 인식론적 차원에 있어서의 비교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 이상의 내용들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해석학적 사유는, 특히 그 리꾀르적인 형태에 있어, 反省哲學의 필수요건으로서 제시된다. 반성철학은 실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존재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 대한, 즉 < 인간의 조건 >에 대한 自己化(주체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반성철학은 데카르트에 있어서처럼 자아의 명증성을 자명한 것으로 정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 cogito >라는 인식론적 원리를 < volo >라는 실존적 원리로 대치하는 것(멘느 드 비랑)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아는 우리가 해독해 내야만 할 복잡하고 불투명한 덩어리로서 파악된다. 그러나 현대의 반성철학은 이 덩어리를 분석하기 위해 의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역으로 이 자아의 참모습은 그의 客觀化된 양태들, 즉 文化의 제양태에 대한 解釋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객관적인 인간의 조건 - 객관적 선험 - 의 경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자아로 돌아오는 것이다. < 자아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뒤 그를 다시 찾는다. > 그래서 해석학은 객관적 선험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탐색하는 선험적 논리학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I. 선험적 주체와 고고학적 場 안의 주체:
현상학과 고고학
우선 비교해 볼 것은 현상학과 고고학이다. 현상학과 고고학은 주관주의적 사유와 객관주의적 사유의 전형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현상학은 인식의 근거를 객관세계에 대한 실증적 탐구들에로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현상학은 인간이 自然의 일부이자 文化의 일부이기 이전에 이들 객관성을 초월하는 하나의 意識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19세기에 대두되었던 자연주의나 역사주의 같은 (2장에서 사용되었던 푸코의 용어를 쓴다면) 초험적 객관성의 철학을 거부한다. 그것은 모든 의미있는 존재를 그것을 형성하고 < 구성하는 > 선험적 주체에로 소급시켜 그에 관계맺어 주고자 하는 태도를 지닌다. 현상학에 있어 대상은 그에 상관적인 의식작용에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대상을 대상으로서 구성하는 선험적 주체에 의해 그 근거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입장은 객관적 선험을 지향하는 고고학적 사유에 극단적으로 대립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상학/고고학의 대립을 선험적 현상학의 맥락과 생활세계적 현상학의 맥락으로 나누어서 고찰하고자 한다.
1° 선험적 현상학과 고고학
선험적 현상학은 대상과 주체를 이어 주는 피할 수 없는 연결선을 그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포함한다. 현상학에 있어서는 주체없는 대상도 대상없는 주체도 생각할 수 없다. 현상학에 있어서의 대상이란 곧 지향적 대상이다. 즉 그것은 의식에 대해 상관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지향작용이 향하고 있는 상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학에 있어서 주체란 반드시 구성하는 주체이다. 의식의 기본 성격은 그 지향성에 있으며 의식이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존재 나아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을 대상으로서 구성하는 존재로서 파악된다. 그래서 대상은 언제나 사유된 대상인 노에마이며 주체는 언제나 사유하는 주체인 노에시스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사유의 기초는 코지토에 있다. 그것은 사유하는 자아(에고)와 자아에 의해 사유된 사유대상(코지타툼)을 굳건하게 이어주고 있는 코지토에 의해 밑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경험적 자아와 구별되는 선험적 자아, 상식이나 과학에 의해 해석된 대상이 아닌, 판단중지와 환원의 과정을 통해 선험적 자아의 상관자로서 드러나는 지향적 대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둘을 운명적으로 묶어주고 있는 코지토, 이들이 현상학적 사유를 밑받침하고 있는 기본 요소들이다.
고고학은 이러한 현상학적 구도와 그 기본 정향을 달리 한다. 고고학에 있어 대상이라는 존재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적 대상이 아니다. 현상학에 있어 어떤 존재가 하나의 인식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의식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의식에 의해 어떤 의미를 부여받은 그러한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고고학에 있어 어떤 존재가 인식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언어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것, 즉 단순한 존재함의 차원에서 언어의 차원과 관계맺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이 言表의 相關者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타자기의 문자판이 < A, Z, E, R, T >라는 글을 쳤을 때 이는 그것이 명제나 어구 등 보다 엄밀한 규정을 지니고 있는 차원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러한 공간의 상관자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언표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그 공간이 < A, Z, E, R, T >의 상관공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상학적 대상이 의식에 의해 의미부여된 대상이라면 고고학적 대상이란 언어의 문턱을 넘어 언표와 상관관계를 맺게 된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입장에 있어 언표의 상관자가 아닌, 의식의 상관자인 어떤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이다. 고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우선 어떤 존재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存在의 차원에서 言語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 주체와(더구나 전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意識이라는 차원으로 추상된 인식 주체와) 직접적으로 맞대어 존재하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는 것은 넌센스인 것이다. 다음으로 인식의 대상은 항상 어떤 場으로서 존재한다. 이 사과 또는 저 사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은 이들의 어떠함 즉 이들이 언표적 장의 상관자로서의 어떤 공간의 구조 속에 편입됨으로써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즉 인식의 진정한 대상은 이 사과나 저 사람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한 境遇들의 장인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인식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을 인식이라는 현상이 포괄하는 수많은 요소들(계산, 실험, 추론 등) 중의 하나에 대한 이론(즉 사물의 지각에 대한 이론)으로서 간주하는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그것은 예컨대 피아제 식의 탐구에 비해 볼 때 지극히 사변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다. < 선험적 >이라는 방벽을 걷고서 보면 현상학은 그 기본 구도에 있어 흄이나 꽁디약 등의 18세기 인식론을 넘어서지 않으며 오늘날 현상학적인 구도를 가지고서 인식을 설명한다는 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도를 가지고서 자연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현상학적 구도를 통해 인식을 정초하고 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고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중 삼중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주체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시될 수 있다.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는 의식이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어떤 언어적 틀을 거치지 않은 채 대상을 더우기 대상의 보다 본질적인 면을 파악한다는 것은 고고학적 사유의 입장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이 언어를 거치지 않고 어떤 대상을 무엇인가로서 인식한다는 것은 신체를 쓰지 않고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예컨대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서 걷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과를 봄으로써 그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사과의 어떠어떠함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의 망 속에 그 사과의 봄을 삽입시킴으로써 그 사과를 어떠어떠한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주체가 대상을 보는 것은 인식이라는 행위의 일부분을 형성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서 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 언어를 삽입시키는 것에 불과하겠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입장은 보다 급진적이다. 고고학적 입장에 있어, 언표적 장은 주체에 선행한다. 즉 주체가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 그 사용의 양태와 조건은 이미 先在하는 것이다. 주체가 주체로서 성립한다는 것은 그것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다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이 언표적 장, 지금의 맥락에서는 주체가 그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位置들의 體系로 정의할 수 있는 장 안에 자리를 잡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반드시 어디에서 말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 주체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 언어의 존재양태와 사용의 조건들의 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인식의 지고한 가능근거라는 자리에서 축출당한다. 주체 이전에 주체가 그에 따라야만 할 談論의 秩序가 존재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언어는 주체에 그 시원을 두고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푸코가 말하고 있듯이, < 언어의 존재는 주체의 사라짐 속에서만 그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 설사 고도로 창조적인 언어가 주체에 의해 창출된다 해도 이는 반드시 기존의 언표적 장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담론들과의 관련하에서, 어떤 필수적인 조건들의 제약 하에서 개별화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주체적 활동은 객관적 선험의 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고고학적 사유의 가장 기본적인 정향을 알 수 있다. 고고학이 분쇄시킨 것은 곧 코지토이다. 대상과 주체를 연관시켜 줌으로써 현상학적 인식을 정초시켜 주는 주체의 사유작용은 고고학에 의해 분쇄된다. 대상과 주체 사이에는 談論의 秩序가 가로놓이게 되는 것이다. 대상이 대상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어떤 존재방식이 언표의 상관자로서 언표와 관계맺어야 하며 주체가 주체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언표적 장에 분포되어 있는 위치들 중의 하나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주체는 결코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주체의 직접적 인식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봄뿐이다. 그 봄이 어떤 것으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담론의 질서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체의 봄과 그 봄의 앎으로의 전환은 담론의 공간 속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에 있어 주체에 부과되는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역할은 이 담론의 공간으로 이전된다.
결국 고고학에 있어 주체에 의한 대상의 대상화란 반드시 담론의 질서에 의해 매개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대상화란 의식적 차원의 행위가 아니다. 대상화란 대상과 주체가 공히 담론의 질서에 참여하여 맺게 되는 관계에 다름아니다. 담론의 질서를 거치지 않은 대상화는 고고학적 사유 내에서는 혀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유의 기본 정향은 1장에서 논의한 고전시대적인 사유양식을 상기시킨다. 고전시대에 있어 대상은 기호를 매개로 해서 관념과 사상관계를 이루게 되며 인식이란 이렇게 일대 일 대응을 이루는 지각된 것들과 관념들이 기호의 체계 즉 고전시대적인 계통학적인 표 속에서 분류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고전시대에 있어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 준거점은 주체가 아닌 계통학적 표였던 것이다(우리는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이 도래하면서 고전시대에 대한 관심이 특히 라이프니츠에 대한 관심이 왜 다시 발흥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있어서의 계통학적 표와 고고학에 있어서의 담론의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큰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전시대적인 표는 어떤 평면적인 구조를 가질 뿐 그 자체의 불투명한 두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고전시대적인 표는 사물들의 표면이 드러내 주는 지각가능한 요소들의 체계 및 인식 주체의 관념들과 상응한다. 때문에 대상과 주체는 이 표를 통과해 서로 상응하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 지각가능한 요소들의 평면과 관념들의 평면 그리고 계통학적인 평면은 하나의 평면으로 압축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전시대는 이와 같은 사물-기호-관념을 관통하는 (바로 현상학이 주체철학적인 형태로 복구시키기를 원했던) 투명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면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의 담론의 질서는 이러한 투명성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 자신의 두께를 지니며 주체도 이 두께 속에 흡수됨으로써만 대상으로서 또는 주체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과 주체를 이어주기는 커녕 그들의 단순한 연결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담론의 < 두께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불연속을 예시할 수 있다. 우선 담론의 질서는 불연속을 포함한다. 대상들의 상관자로서의 언표의 공간, 그리고 주체적 위치들의 장으로서의 언표적 공간은 複數的인 空間이다. 그것은 대상 및 주체의 측면에 있어서의 상관자들의 불연속성을 그 기본적인 성질로서 포함한다. 나아가 이 불연속적인 장 자체는 다시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총체적으로 변환된다. 즉 공간적 배치가 전면적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과 주체의 연관은 이 복수적인, 변환적인 담론적 장과의 연관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고전시대적인 표가 차이들의 간단없는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언급했다. 고전시대의 표에 있어 예컨대 격변 등에 의해 어떤 불연속이 생성되었다 해도 그것은 이 표에 대해 外在的인 것이다. 그러나 언표적 장은 그것의 본질적인 성질로서 불연속을 포함하며 이러한 점에서 고전시대적인 표와는(나아가 고전적인 형태의 구조주의적인 구조 개념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아가 이러한 불연속성은 또한 담론적 공간의 物質性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시대적인 표는 사회적-역사적 요인들에 의해 변화될 수 없는 선험적인 공간이었는데 반해 담론적 장은 사회적-역사적 요인들과 즉 푸코가 말하는 반복가능한 물질성과 상관적으로 변환되며 이들의 불연속성이 담론의 불연속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현상학적 사유가 전형적인 內在性의 사유라면 고고학적 사유는 전형적인 外在性을 사유를 이루고 있다. 현상학은 외재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의 核으로 즉 의식으로 소급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 의식이란 다른 것을 설명해 주는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설명되어야 할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재화하는 주체가 그곳에서 일종의 익명적 분산 속에 처하게 될 그 < 바깥 >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래서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 언표란 의식 속에서 일어난 작용들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의 작용은 언표적 장의 規則性에 삽입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언표적 장은 현상학적 주체성을 거부하는 匿名的 場인 것이다. < 누군가가 말한다 on dit >라는 이 수준에 위치하는 언표적 분석은 그 누군가가, 그것이 누구이든, 그 안에서 말해야만 하는 이 익명적 장을 기술하는 외재성의 철학이자 이 장을 통해 과학 등 보다 개별화된 언설들을 설명하는 객관적 선험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험적 주체의 현상학과 고고학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점도 존재할 수 없다.
2° 생활세계적 현상학과 고고학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선험적 현상학과는 달리 인식의 가능근거를 선험적 주체가 아닌 생활세계에 둔다. 생활세계란 과학적으로 즉 이론적으로 구성된 세계가 아닌 그러한 이론적 틀을 벗고서 바라본 前개념적 차원의 세계이다. 그것은 인류의 전통과 우리의 일상적 생활이 얽혀 있는 영역이자 모든 이론적 활동이 그에 기반하고 있는 원초적인 영역이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실천, 가능한 실천의 보편적 場이다. 그것은 어떤 이론적 개념이나 기술적 장치에 의해 해석된 세계이기 이전에 우리의 知覺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세계로서, 생활세계적 현상학에 따르면 이 생활세계야 말로 우리의 모든 이론적인 활동의 가능성의 근거인 것이다. < 지각된 세계는 모든 합리성, 모든 가치 그리고 모든 실존이 언제나 전제하는 기본 바탕이다. >
그래서 생활세계적 시공간은 과학적으로 구성된 시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 개념화된 시공간이 아닌 우리의 신체에 의해 즉 前反省的 코지토에 의해 지각된 시공간인 것이다. 기러기가 그 자신의 시공간을 가지고서 비행하듯이 인간 역시 그의 신체를 통해 지각하는 시공간을 지니게 되며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 학문도 이 원초적 생활세계에 그 시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활세계는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생성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체라는 간주관적인 존재를 통해 연결됨으로써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지각의 보편적 구조에 바탕하고 있는 보편적 구조가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한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활세계가 모든 문화적 활동의 기본 바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의 작업을 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러한 생활세계적 기반을 忘却한다. 특히 수학적 과학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이론적인 장치들이 하나의 실재적인 존재인 것으로 믿어 버리고 생활세계를 이 개념적 틀로 대치해 버리는 것이다. 즉 과학자들이 만들어 내는 < 관념의 옷 >이 하나의 方法일 뿐인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어떤 實在的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세계는 그에 과학이 그 타당성을 최종적으로 근거해야 할 기반이자 또한 모든 과학적 실천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금자리이며 나아가 과학적 방법의 예측적인 측면이 그를 통해 검증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활세계는 과학의 토대이자 그 주제 그리고 그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의 可能根據인 이 생활세계를 망각하고서
그의 이론적 틀 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적 입장과 고고학은 다시 대립된다.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선험적 현상학과는 달리 客觀世界에서 인식의 가능근거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입장과 조금은 접근한다. 그러나 이 둘의 엄밀한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우선 우리는 存在의 차원과 言語의 차원 사이에 놓여 있는 불연속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슐라르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푸코에게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 가고 있는 생활세계가 과학의 가능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언어의 문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물리학적인 맥락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세계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어떤 불연속을 이룸으로써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세계란 우리가 진정한 인식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 정신분석되어야 할 > 즉 정화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식이란 우리가 생활세계 내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전통적인 편견이나 사물에 대한 실제적 관심 등으로부터 인식론적으로 단절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세계가 인식의 可能根據가 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인식이 그로부터 벗어나야 할 어떤 相關者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한 것이다.
생활세계가 과학의 상관자라 함은 과학이 관계맺고 있는, 과학이 다루는 대상인 현실 세계가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이기 보다는 오히려 과학에 의해 構成되는 존재임을 뜻한다. 칸트의 철학이나 현상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이 인식하는 것이 현상인 것은 아니다. 과학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식으로 말해 本體界인 것이다. 과학이 현상에 관여한다면 그것은 과학이 그를 통과해서 본체계를 파악해야 할 또 그 파악에 대한 자연의 응답이 그를 통해 이성에 전달되는 일종의 原質料로서일 뿐이다. 그래서 과학에 관여하는 현상은 언제나 이미 어떤 理論的, 技術的 장치에 의해 해석된 현상이다. 온도계를 읽고서 온도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행위 조차도 상당한 이론적 바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현상을 다룬다면 그것은 < 현상조작 >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 物化된 이론 >인 도구들을 통해 이론에 흡수되어 이해되는 바의 그러한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과학적 이론에 따라 그때 그때 해석되는 세계이지 과학을 근거지워주는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러한 현실 세계 즉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생활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학의 가능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논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논의는 생활세계가 문화적, 시간적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주장의 소박함을 일깨워 준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계몽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어떤 사과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그 인식주체가 지니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문화적, 이론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차이를 넘어서는 극히 보편적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인식의 차원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感覺의 차원이리라. 현상학은 감각의 차원 즉 단순히 존재의 차원에 속하는 것과 언어의 문턱을 넘어선 인식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不連續을 근본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학자들이 생활세계라고 말하는 이 현실과 과학적 이론과의 위와 같은 관계는 곧 과학적 존재들의 實在性을 둘러싼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자들 및 무반성적 철학자들이 생활세계에 관념의 옷을 입히고 그를 생활세계보다 더 참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훗설의 비판은 사실 과학의 본성에 대한 매우 소박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과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재론/유명론 논쟁으로서 이미 20세기 벽두 과학적 유명론을 주장하는 베르그송주의자들과 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포앙카레 등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된 문제이다. 훗설의 입장은 과학적 유명론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적 유명론을 취할 때 조차도 훗설이 말한 것처럼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생활세계를 忘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과학적 개념들이나 이론들이 현실에서 抽象해 낸 것들, 현실의 복잡함을 일단 단순함으로 환원시킨 뒤 다시 그에 복잡함의 요인들을 부가시켜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모델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현상학적 입장은 더 더욱 소박한 것으로 드러난다. 현상학이 말하는 과학의 빈곤성, 추상성은 사실 매우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과로부터 그의 색깔, 향기, 맛 등을 제거하고 그를 하나의 화학식으로 표현했을 때 현상학자들은 과학이 그 사과의 질적 풍요로움을 사상해 버리고 하나의 공간적 기호로 환원시켰기 때문에 과학은 그 사과의 질적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그 관념의 옷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상 사과의 화학적 파악(물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변천할) 속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되는 질들보다 덜 풍요로운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풍요로운 것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 화학적 표현 속에는 모양, 색깔, 향기 등을 훨씬 넘어서는 그 사과의 갖가지 존재양태들이, 나아가 그들의 변화의 양태들까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미시세계의 운동을 추상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시세계의 운동양태들의 많은 부분들을 가능성의 차원에서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추상성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은 추상이라는 이 말에 대한 대단히 소박한 이마쥬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소박한 이마쥬야말로 바로 과학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정신분석해 버려야 할 부분인 것이다. 훗설은 과학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바로 그 부분을 과학의 본질로 생각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세계야말로 과학이라는 < 이론적 실천 >이 근거하고 있는 장이라는 주장을 살펴 보자. 이 주장은 어떤 면에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과학자의 작업이란 항상 어떤 非談論的 차원과 관계맺는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의 이론적인 내용과 과학자의 생활세계-내적-삶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과학자는 정부나 일정한 재단의 연구비를 받아서, 어떤 공공적으로 설치된 장소에서, 일정한 직업적 상황 내에서 그의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론적 작업의 내용이 이 外的인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 내용은 오히려 이 비담론적 실천들 내에 존재하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과학의 내용과 과학자의 삶은 어떤 면에서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정향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세계가 과학적 실천의 가능근거라는 현상학의 입장은 만일 그것이 과학자에 대한 주장이라면 매우 평범한 주장이 되어 버리고 그것이 과학에 대한 주장이라면 과학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주로 바슐라르적인 맥락에서 제시된 현상학 비판을 푸코는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현상학에 대한 바슐라르적 비판과 고고학적 비판의 몇몇 차이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선 고고학은 層化된 사유이다. 그것은 언어의 존재양태를 몇개의 水準들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나아가 존재의 차원과 인식의 차원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언어의 문턱이라는 不連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은 바슐라르적인 인식론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있어서는 바슐라르에 있어 나타나는 합리성에의 단적인 주장, 과학/비과학의 이분법, 인식론적 단절의 이원구조 등이 보다 多層的이고 多元的인 형태로 유연화된다. 푸코는 생활세계의 수준 즉 비담론적 실천들의 수준과 과학적 인식 내지 철학적 반성의 수준 사이에 지금까지의 인식론자들에 의해 종종 무시되어 왔던 언표적 장, 담론의 질서를 설정한다. 생활세계와 과학 사이에 놓이게 되는 이 완충지대를 통해 푸코는 (물리학적 맥락에서 성립된) 바슐라르적인 인식론을 보다 유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인식의 가능근거란 생활세계도 아니고(왜냐하면 이는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므로) 과학의 이론적 구조도 아니다(왜냐하면 이는 인식의 결과이지 그 가능근거는 아니므로). 고고학에 있어서의 인식의 가능근거는 바로 대상들의 어떤 가능한 존재양태들의 체계가 그에 상관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주체가 그 질서 속에 자리잡음으로써 어떤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표들의 공존의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비담론적 실천들과 관계맺고 있는 이 언표적 장 내지 담론의 질서인 것이다. 고고학이 객관적 선험의 철학이라면 그 객관성은 생활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담론의 공간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에 있어서처럼 푸코에 있어서도 생활세계는 인식의 상관자이지 그 가능근거는 아니다. 이는 대상이 언표의 상관자로서 규정되는 맥락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러나 푸코는 이 상관관계의 공간들이 복수적인 공간이며 많은 가능적 공간들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보여줌으로써 순수하게 < 정신분석된 > 바슐라르적 의미의 과학의 영역은 이 보다 넓은 그리고 과학보다 한 水準 아래에(즉 더 보편적인 수준에) 있는 언표적 장으로부터 마름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푸코에 있어 인식론적 장애물은 단순히 정신분석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 체계적으로 기술되고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또한 푸코는 인식론적 논의가 局地的인(regional)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바슐라르적 입장을 이어 받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국지성이 어떻게 언표적 장이 지니는 기본적인 성격(즉 불연속)으로부터 유래하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그를 한 단계 깊은 차원에서 다시 조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적 실천이 생활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관련하여, 푸코는 언표적 장이 지니는 물질성이라는 규정을 통해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의 상관관계를 보다 적절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고고학은 언표적 장이라는 객관적 선험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존재의 차원과 언어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의 문제, 언표적 장의 국지성에서 유래하는 국지성과 그 상관자로서의 생활세계가 가질 수밖에 국지성,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보다 역동적이고 적절한 해명 등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이미 바슐라르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현상학 비판을 고고학적 맥락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II. 내면화된 시간과 외재화되는 시간:
변증법과 고고학
현상학과 더불어 고고학적 사유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사유양태는 변증법이다. 푸코의 철학은 反현상학적인 것 못지 않게 反변증법적이기도 하다. < 우리 시대의 모든 철학자들은, 논리학을 통해서든 인식론을 통해서든 나아가 맑스를 통해서든 니체를 통해서든, 헤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 고고학의 반변증법적 성격은 多를 다루는 문제 즉 총체화의 문제와 역사의 目的論에 관련된 문제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 多와 총체성의 문제
언표적 장의 중요한 특성은 不連續性이다. 이 불연속성이라는 특징은 고고학을 다른 무엇보다도 변증법적 사유양식과 구분해 준다. 고고학과 변증법의 차이는 특히 矛盾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들에 있어서의 차이에 있어 두드러진다. 변증법적 사유에 있어 전체는 부분들에 우선한다. 부분들은 전체에 준거해 그 존재이유와 존재양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부분들은 전체에 의해 매개되며 전체는 그 부분들 사이에 정합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정합성이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닌다 : < 직접적으로 가시적인 모순들은 표면의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 분산된 파열들의 놀이를 하나의 유일한 核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 변증법적 사유는 모순들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들을 보다 고차적인 종합 속에서 용해시키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종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모순들을 극대화시키는 것, 이것이 변증법의 기본 전략이다. 모순이 극대화될수록 궁극적인 종합의 의미는 극대화되는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사유는 총체성의 사유이다. 그것은 多가 一로 통합되는 사유이다. 변증법에 있어 多는 그 각각 하나의 순수한, 타자와 섞이지 않는 단순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 통합적인 內在性 > 속에서 서로에 대해 필수적인 매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헤겔의 설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 이 매개성은 더 이상 단순하게 또는 で역시と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관심한 다수의 통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一者 또는 배타적 통일 ausschließende Einheit 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에 있어서의 < 섞임 koinonia >과는 다르다. 플라톤에 있어 현실적인, 우발적인 사물을 설명하기 위해 섞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면 헤겔에 있어 多가 一로 통합되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必然的인 하나의 과정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부분적 존재자들은 전체에 통합된다. 부분적 사유들은 절대지에 통합된다. 그래서 변증법적 사유에 있어 否定이란 하나의 적극적인 규정을 부여받게 된다. < 사변적 부정은 創造的이다. > 부정은 변증법적 운동의 필연적인 媒介고리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부정을 통해 他者性으로 화한 부분들이 다시 전체 속에서 화합되는 이 回歸的 運動이 부정을 창조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 모든 정립은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內的인 부정, 自己에 의한 自己의 부정이다. ․․․긍정은 추상적인 바, 그것은 부정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은 구체적 긍정이다. 이는 그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음으로써, 자기에 대한 자기의 대립으로서의 그의 대립 속에서 긍정됨으로써, 그 자신이 된다. >
변증법은 同一者의 철학이다. 변증법에 있어 차이란 內的인 차이, 자기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차이는 변증법적 운동에 의해 동일자 속에서 용해된다. 그래서 변증법적 동일성은 즉자적으로 정립된 < A = A >라는 동일률적 동일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차이들을 그 안에 용해시키는 동일성이다. < 절대자는 스스로에 동화되기 위해서 스스로에 모순된다. 그것은 구체적 동일성이다. > 그래서 변증법적 동일성이란 또한 體系이기도 하다. 체계란 언제나 스스로로부터 소외되는 것 또는 그의 바깥에서 방황하는 것의 살아 있는 응집력, 의미이다. 이 살아 있는 응집력이란 곧 自己에로의 회귀, 체계의 궁극적인 자기동일성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헤겔 변증법의 가장 놀라운 테마가 제기된다: < 절대자는 주체이다. > 모든 변증법적인 운동은 절대자로서의 주체라는 이 零度에 기준해서 이해될 수 있다. 차이를 동일자에로 운동시키는 이 주체는 < 그의 차이 속에서 스스로에 동일화되는, 그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와 구분되는 그러한 구체적 동일성, 참된 동일성이다. > 그래서 사유의 내재적 범주들의 전개는 곧 역사 자체의 전개이며 결국 주체의 自己展開가 된다. 부분들은 전체의 표현이며 차이는 동일성의 표현이다.
고고학은 변증법과는 달리 담론들을 그 탐구 대상으로 국한한다. 그러나 이 장의 머리 부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들을 그들이 그들의 대상들을 다루는 논리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볼 수 있다. 고고학은 우선 모순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서 변증법과 대립한다. 고고학은 모순을 비모순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고고학은 그들을 그들 자체로서 기술한다. 고고학은 두 모순된 담론들간의 和解의 點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이 모순이 자리잡는 바의 장소를 정의하고자 한다. 나아가 고고학은 代案들의 갈라섬을 나타나게 하고 그 두 담론을 병치시키는 장소와 발산을 위치지운다. 모순을 기술해야 할 대상으로서 취함에 있어, 고고학적 분석은 그들의 자리에서 어떤 공통의 테마를 발견하고자 하지 않는다. 고고학은 그들이 보여 주는 간극의 형태와 측도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모순의 상이한 유형들을 정의하고, 그의 상이한 수준들을 지표화하며, 그의 상이한 기능들은 분석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화해의 점이 아닌 不和의 空間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깡길렘이 과학사의 거시적 층위와 미시적 층위를 구분함으로써 잘 보여준 바 있듯이, 상이한 수준들의 지표화는 특히 중요하다. 이 테마는 부분들은 전체의 표현이라는 헤겔적 논리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은 언표의 여러 수준들이 그에 수렴하는 준거점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언표들에 있어서의 대상들의 不調和, 언표행위적 양태들의 發散, 개념들의 兩立不可能性, 이론적 선택들의 排除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전시대 자연사에 있어서의 체계와 방법을 예로 들어 보자.
대상들의 부조화 : 체계는 연구의 대상들중 특권적인, 예외적인 구조 - < 특징 >이라고 불리운 - 를 가지는 요소들을 선별한다. 다른 요소들은 이 구조와의 차이에 입각해 기술되는 것이다. 그래서 체계는 대상들에 대한 자의적인 선택과 결과의 상대성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반면 방법은 어떤 출발점을 잡아 그를 어떤 미리 규정된 도식도 없이 낱낱이 기술한다. 그 뒤 다른 요소들도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 기술한다. 이는 출발점을 제외하고는 어떤 자의적인 요소도 없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덜 자의적이지만 기준점이 없는 끝없는 작업으로 이끌려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방식은 대상들에 있어서의 등위적 평면의 수립(여러 방식으로 다시 세워질 수 있는)과 무한한 대상들의 밭을 경험적으로 기술하는(결코 끝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확해지는) 두 대립된 방식을 통해 대상들간의 부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담론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간직하는 모순을 지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고학은 그러한 대상들 사이의 부조화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언표행위적 양태들의 발산 : 체계의 방법을 따라 작업하는 사람들은 보기 이전에 우선 사유하며 하나의 도식을 개발해 낸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수립한 (깡길렘적 의미에 있어서의) 층위의 기준이 중요하며 그들이 보는 것은 이 엄밀하게 언어학적인 도식을 따라 배열된다. 방법의 경우 사람들은 지표화 이전에 보기 시작하며 지표화의 층위들은 작업이 수행되는 과정을 따라 진동한다. 이들에게 있어 요소들을 그에 담을 수 있는 완전한 하나의 도식은 오직 작업의 끝(현실적으로 오지 않는)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체계와 방법은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두 초점을 양분하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담론의 주체들 속에서 담론에 내재해 있는 모순들을 내재화하고 지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고학은 담론의 주체들이 담론 속에서 어떻게 외재화되고 발산되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개념들의 양립불가능성 : 체계의 경우 그것은 구조의 개념과 특징의 개념을 그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포함한다. 즉 볼 수 있는 것들을 < 수, 형태, 비율, 위치의 산물로서 간주하는 것 >(린네)은 그리고 비교의 기준을 위한 구조(특징)의 선택은 체계에 있어 불가결하다. 따라서 체계에 있어서의 < 유적 특징 >의 개념은 봄에 의해 귀납적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봄을 기능하게 해주는 임의적인 도식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반면 방법에 있어서는 봄 이전의 유적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적 특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봄에 의해 귀납적으로 점차 형성된 것이며 또 그 과정을 통해 진동하는 것이다. 체계와 방법에 있어서의 유적 특징의 개념은 서로 양립불가능한 것이다.
고고학은 상이한 요소들을 총체 속에서 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고학은 하나의 총체 속에 얼마나 많은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드러내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허구적 총체성을 해체시키고자 한다.
이론적 선택들의 배제 : 계통학적 방법에 입각해 있는 체계의 경우 그것은 고정설을 함축한다. 체계는 일정한 기준점에 대해서의 차이의 체계를 작성함으로써 자연적인 이웃관계들의 선형적인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 그래서 체계가 전제하는 계통학적 표는 카타스트로피 등의 개입에 의해서도 붕괴되지 않는다. 그것은 A라는 대학의 수학과 건물이 화재로 불탔다고 해서 그 대학의 수학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도 같다. 그러나 방법의 경우 체계가 배제시키는 이 변환의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배제시킬 이유는 없다. 그것이 귀납의 과정에서 드러날 경우 방법은 이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잠정적이며 경험을 벗어나는 것 이외에는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체계와 방법은 배제의 역학에 의해 대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수많은 이론들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마침내 통합되어 大진리에 도달하리라는 목적론적, 종말론적 믿음을 분쇄시킨다. 고고학은 이론들이 서로를 어떻게 배제시키고 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고학은 多를 一로 환원시키는 총체화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것은 극한, 비약, 간극, 빈틈을 그들 자체로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불연속을 무한정하게 증폭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이 지역적 분석을 통해 복수성의 증폭을 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경우에 따라 여러 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間談論的 構造를 찾아내고자 한다. {말과 사물}은 그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담론적 구조는 여러 담론들이 그 속에 용해되는 하나의 거대담론이 아니다. 언설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疏通의 法則인 것이다. 고고학은 a1, a2, a3 ․․․를 A로 지양하지 않는다. 다만 a1 그리고 a2 그리고 a3 ․․․의 < 그리고 >를 확립하고자 할 뿐인 것이다. 고고학이 총체화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일 뿐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변증법적 지양과는 전혀 다른 소통의 논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과 사물}에 있어서의 고고학적 동형성들(유비적인 법칙들로부터의 상이한 담론들의 형성), 고고학적 모델들(법칙들의 상이한 형태들), 고고학적 동위성(이질적인 평면들 내에서의 개념들의 유비적인 위치들), 고고학적 어긋남들(동일한 개념 속에서 교차하는 여러 평면들의 공존), 고고학적 상호관계들(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예속과 상보의 관계들)에 대한 탐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脫中心化의 사유를 지향한다. 고고학에 있어 多를 종합하는, 차이를 용해시키는 주체라는 존재는 거부된다. 고고학은 주체를 외재성의 공간 속에서 분산시킨다. 고고학은 총체성, 부정의 부정을 통한 회귀, 자기 안에서의 차이성, 동일자의 표현 등과 같은 변증법적 주제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고고학은 탈중심화된 불연속적 공간 속에서 총체성을 분산시킨다. 고고학에 있어 부정이 있다면 그것은 부정일 뿐이다. 부정은 내면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 속에서 분산된다. 회귀라는 변증법적 사유도 거부된다. 나아가 고고학은 차이의 철학이다. 그것은 차이를, 타자를 용해시키는 어떠한 동일자도, 어떠한 주체도 거부하는 것이다.
2° 약속의 시간과 분산의 시간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공간적 측면에 국한시켜 왔다. 이제 이 문제를 시간적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담론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며 역사가가 이들을 다루고자 할 때 시간은 필수적인 요소로서 개입한다. 변증법적 사유에 있어 담론으로서의 사건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始源의 전개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매듭들로서 이해된다. 즉 그들은 일정한, 미리 정해져 있는 어떤 도달점(목적)을 향해 흐르는 시간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契機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결정된 이웃관계들에 따라 역사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부정을 통한 매개에 의해 필연적인 징검다리를 형성하는 (시원의) 다른 얼굴들일 뿐이다. 이 사유에 있어 시간은 필수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치없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이 시간의 매개 위에서 조직화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지만 그 조직화 자체에 시간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치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 사유에 있어 사건은 언제나 시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다. 사건들은 결코 그 자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또 이 사유에 있어 모순이란 가장 중요한 것이자 가장 가치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원의 전개 자체가 계기들의 모순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모순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스스로를 소거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양도함으로써만 그의 임무를 이룩한다는 점에서 가치없는 것이기도 하다. 필연적 계기들로 엮어지는 유일한 巨大系列의 수립, 이것이 변증법의 목표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사건들로서의 담론들을 다룰 뿐이다. 고고학은 이들을 꿰어 연결시킬 선험적인 밧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브로델의 < 장기지속 >과 바슐라르의 < 인식론적 단절 >에 힘입어 푸코는 사건들의 필연적인 시간적 연쇄라는 변증법적 모델을 담론들의 형성과 변환이라는 고고학적 모델로 대치시킨다. 그래서 이제 불연속은 메꾸어져야 할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발견되어야 할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사유모델을 한 시대의 총체적인 담론적 관계들의 구조와 이 구조의 총체적 변환이라는 모델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고고학은 한 시대의 복수적 담론들에 있어서의 국지적 에피스테메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이 간담론적 구조들의 (상이한 시간적 粘度에 따른) 다양한 시간적 벡터들에 대한 탐구이기도 한 것이다. 고고학은 변증법이 사건들의 출현 이전에 미리 설치해 놓은 시간의 단단한 실타래를 풀어 사건들 각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앞에서 논한 事件의 존재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사건의 존재론을 극단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사건들의 分散을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사건들의 분산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해 주는 어떤 아프리오리, 일정한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강조가 존재한다. 그는 이를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 historique)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적 아프리오리란 사건들의 단순한 분산도 또 단순히 선험적으로 제시된 법칙성도 아니다. 그것은 언표들의 출현의 조건들, 그들의 공존의 법칙, 그들의 존재양식의 특이한 형태, 그들을 존속시키고 변환시키고 특성화하는 규칙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래서 사건들은 절대적인 하나의 시간간격 내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場 속에서 출현하여 그 장의 규칙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푸코에 있어 事件의 존재론과 場의 존재론은 공존한다. 사건들의 출현,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우발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출현양태는 그를 조건지워 주는 장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논한 계열적 시간개념이 현재의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사건 a1, a2, a3 ․․․는 각자의 절대적 시간간격 내에서 출현한다. 이들의 필연적인 이웃관계들을 미리 보장해 주는 거대시간의 계열 A는 없다. 고고학은 어떠한 목적론적 총체화도 거부한다. 고고학은 사유의 역사를 그의 선험적인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 어떤 목적론도 미리 환원시킬 수 없는 불연속성 속에서 분석하는 것, 어떤 필연적인 지평도 가둘 수 없을 분산 속에서 지표화하는 것, 어떤 선험적 구성도 주체의 형식을 부과할 수 없을 익명성 속에서 전개되도록 하는 것, 어떤 새벽으로의 회귀도 허락하지 않을 시간성으로 개현시키는 것 >이다. 그러나 이들이 절대적 분산의 점들로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系列들을 형성하며 이 계열들이 다양한 시간적 벡터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서는 사건들이 시간에 앞선다. 시간은 사건들의 계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이 사건들의 계열이 특이성들을 형성하며 이 특이성들을 기술하는 것이 고고학의 목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고학적 입장이 주체의 문제를 둘러싸고 변증법적 입장과 어떠한 대립을 형성하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시간의 부분들이 서로 관련맺는다는 것 나아가 이 관련이 하나의 目的論的 과정을 형성한다는 것 즉 미래를 향한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다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人間學的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 준다. 변증법적 운동에 있어 언제나 부재하지만 또 언제나 현존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모든 과정들이 그의 表現에 불과한 바의 그 주체이다. 주체는 또한 理性이며 이 이성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의 계기들의 시간적 전개는 또한 이성의 범주들의 논리적 전개이기도 하다. 변증법적 주체는 스스로로부터 소외됨으로써 단순한 즉자적 동일성을 탈피하는 존재이지만 그 소외를 자기화함으로써 스스로의 自由를 전개시키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시간은 약속의 시간이며 변증법적 주체는 약속받은 주체이다. 진리는 미래에 있다는 것, 미래에 대한 약속이 현재를 지배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주체에 의해 담지된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시간 개념/주체 개념의 핵이다. 시간은 주체에 의해 역사가 되며 사건은 이성의 목적론에 의해 의미가 된다.
고고학에 있어서의 시간은 변증법적 시간과 대조적이다. 고고학적 시간은 주체 안에서 內面化되지 않는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 시간은 주체의 자기소외와 자기에로의 회귀 과정을 통해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바깥에서 複數化된다. 이 복수화된 시간은 주체를 불연속적 시간들 속에 분산시키는 것이다. 변증법에 있어 사건들의 계열들은 변증법적 매개고리들에 의한 이웃관계들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고고학은 이 통일화된 거대 시간계열의 層들을 복수화시키고, 그들에 脫續들(decrochages)의 분기점들을 제시하며 시간의 특이성들을 지표화한다. 고고학은 이성의 목적론에 의해 형성된 시간의 긴 계열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복수화된 시간 속에서 이제 주체는 더 이상 타자를 자기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복수성 속에서 분산되는 존재인 것이다. 고고학은 주체를 그의 바깥으로 내몬다. 지금까지 변증법적 사유에 의해 보호받았던 모든 것이, < 과학의 합리성과 목적론의 운명,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사유의 연속적인 긴 勞動, 의식의 깨어남과 진보, 스스로에의 영속적인 재포착, 전체화의 미완성된 그러나 간단없는 운동, 언제나 열려 있는 시원에로의 회귀, 요컨대 이 모든 역사적-선험적 테마들이, 하얀, 무사심한, 내면성도 약속도 없는 공간을 되찾음으로써,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닐까? >
III. 은폐된 의미와 관계망 속의 의미:
해석학과 고고학
고고학과 마지막으로 비교해 볼 주체철학적 형태의 사유양식은 해석학이다. 현상학이 특히 인식의 가능근거로서의 주체를 놓고서 또 변증법이 특히 시간과 역사를 내면화하고 정초하는 주체를 놓고서 고고학과 대립한다면, 해석학은 언어의 문제 특히 의미의 성립근거를 놓고서 고고학과 대립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절에서 우선 언어적 관점에서 이 두 사유양식을 대립시켜 보고 다시 이를 주체의 문제에 연관시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상학이나 변증법과는 달리 해석학의 경우 고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할 여지가 있으며 그럴 경우 그 상보성의 단초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수직적 의미와 수평적 의미
언표적 장의 특성에는 우선 그 稀薄性이 있다. 이 특성은 충만성이라는 특성 위에 기반해 있는 해석학적 사유로부터 고고학적 사유를 구분해 준다.
해석학적 사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의 담지자들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가 아닌 숨겨져 있는 의미, 즉 그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非言(non-dit)의 드러냄을 그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해석학이 문제삼는 것은 象徵이지 記號가 아닌 것이다. 리꾀르는 {상징적 형태들의 철학}에서 카씨러가 논한 상징은 지나치게 郭은 규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단순히 어떤 대상을 지시할 뿐인 기호와 숨겨진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상징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학적 사유에 있어 상징은 항상 寓意的이다. 상징은 자신이 진정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긴다. < 언어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자주 왜곡되어 있다 : 그것은 그것이 말하는 바와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二重의 意味를 지닌다. 그것은 다의적이다. > 해석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이중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과 해석은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각각을 필요로 한다. 상징은 하나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한 언어적 표현이고, 해석은 상징들을 해독하고자 하는 이해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사유란 이와 같이 상징의 이중적 의미, 수직적 깊이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의 重層決定(surdetermination)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고고학적 사유가 다루고자 하는 언표는 실증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고고학은 언표가 숨기고 있는 것, 깊이 속에서 끌어올려짐으로서 명시적 표면으로 드러나야 할 非言을 다루지 않는다. 고고학이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언표가 그것이 속해 있는 언표적 장 내에서 <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났다 >는 사실이다. 고고학은 언표를 그 언표적 장의 平面性(이차원적인 面이지만 결코 평평하지는 않은, 나아가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에 입각해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다의성이 관계하는 의미론적 장에 관계하지 않는다. 고고학은 언어의 出現樣態를 문제삼으며 그 출현의 場을 다루는 것이다. < 언표적 표면의 기술가능성이 말해주는 것, 그것은 ․․․ 언표적 기능을 실현시키는 條件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분명 언표는 단순한 의미에 있어서의 직접적인 가시성은 아닐지라도 언표가 출현하는 평면의 수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고학은 해석학적 사유의 기본전제인 의미의 풍요로움에 대한 탐구와 길을 달리한다. 이는 앞의 절에서 논했던 잠재성의 거부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학이 전제하는 잠재성(< 의미론적 잠재성 >)은 구조주의적 맥락보다는 베르그송적인 맥락에 보다 가깝다. 즉 기호는 세계(또는 의미)의 풍요로움을 결코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상징의 존재가 설명되는 것이다. < 의미의 풍부함, 중층결정을 드러내는 것이 해석학의 영원한 과제이다. > 그것은 < 복수적 의미의 두께 >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해석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다의성은 결코 애매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풍요로움을 뜻할 뿐이다.
이에 반해 고고학적 사유의 특징은 그 희박성의 탐구에 있다. 고고학은 언표의 언표가능성을 다루는 바 이 가능성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형성된다. 그래서 < 문법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고 한 주어진 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창고에서 출발해서, 결국 말해진 것은 극소수이다. > 고고학은 언어의 重疊의 차원을 문제삼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언표들간의 배제의 역학을 탐구한다. 중첩의 개념이 아닌 고유한 자리의 개념에 입각해 있는 언표이론은 필연적으로 배제의 역학을 다룰 수밖에 없다. 언표적 장은 복수적 의미를 두께를 지니는 장이 아니라 언표들 사이의 現存과 不在의 配分이 일어나는 배제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적 사유에 있어서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 異位性 >의 의미는 다르다. 해석학에 있어서의 이위성이란 한 언표를 관통하고 있는 여러 평면들의 이질성을 의미한다. 해석학적 입장에서 보면 한 담론의 등위성이란 의미의 등질적 수준을 수립함으로써 성립한다. 즉 서로 교차하는 복수적 평면들중 어느 하나만을 인정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해석학에 있어서는 한 언표란 언제나 복수적 평면들 - 그 안에서 의미가 일정한 방식으로 부여되는 각자의 의미론적 구조를 지니는 - 의 교차선상에 존재하며 이것이 그의 의미의 多價性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동시에 복수적인 準據平面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의 이위성이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언표적 장의 희박성의 구조로 말미암은(그리고 뒤에 논의할 불연속성의 구조로 말미암은) 포함과 배제의 역학으로부터 기인한다. 그 이위성이란 어디까지나 다질적인 이차원의 평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입장에서 보면 해석학적 다의성 자체도 이 희박성의 한 효과로서 파악된다. < 해석한다는 것, 그것은 언표적 결핍에 대응하는 방식이며 그 결핍을 의미의 복수화를 통해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 바로 언표의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해석학은 그 의미들을 복수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언표는 專有의 대상이 되며 필연적으로 權力의 물음을 야기시키는 일종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푸코는 리꾀르가 상징과 해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두 태도 즉 신성의 드러냄과 욕구의 은폐에 있어 후자의 입장에 서면서도 그를 담론의 수준에서 다룸으로써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를 공간적(동시적) 다의성에 국한시켰다. 이제 이 문제를 시간적 관점에서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해석학에 있어 언어의 다의성은 공시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통시적 관점에서도 규정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이해된 복수적인 의미는 의미의 변화, 의미의 移轉을 뜻한다. 언어의 풍요로움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의해 보장된다. 그래서 언어는 마치 생명체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 나아가며 동시에 과거의 의미를 현재에로 이전시킨다.
그러나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역사적으로 전해내려 오는 개념들이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연속성을 지닌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오래된 개념들을 여전히 사용한다 해도 이 개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이론적 장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설사 우리가 원자적 차원의 물질에 대해 < 물방울 >(닐스 보어)이나 (쿼크의) < 색 >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이 경우 우리는 이 말을 따옴표(ぢ っ) 안에 넣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과학적 언어는 新言語인 것이다. 언어는 역사 속에서 성장한다기 보다는 變換되는(이 말의 수학적 의미에 있어) 것이다.
유사한 논의를 깡길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깡길렘의 인식론은 설명적 이론들의 역사의 차원이 아닌 개념들의 형성과 변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에게 있어서 개념이란 그것이 속해 있는 각각의 이론적 테두리 내에서 상이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의 역사와 개념의 역사는 일치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율적인 역사를 지닌다. 경험이 이론화되기 전의 개념적 포착의 수준이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개념이 이론적으로 多價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가성이 해석학적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개념의 다가성은 그의 형성과 변환의 각 맥락에서 새로이 형성되는 의미들의 다가성이지 그 개념의 內在的 풍요로움이나 그 개념이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의 소진불가능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구자의 신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선구자란 과학사가가 그를 그의 문화적 틀에서 뽑아내 다른 문화적 틀에 삽입시킬 수 있다고 믿는 바의 존재이다. 즉 개념들, 담론들 그리고 사변적 또는 실험적 행동들이, 역사성이 배제된 채, 관계들의 가역성이 획득되는 어떤 지적 공간 속에서 變位되고 재투자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들은 그것이 형성되고 변환되는 각각의 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념들은 成長하는 것이 아니라 變換되는 것이다.
푸코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바슐라르-깡길렘적인 맥락을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보다 복잡하다. 일견 고고학에 있어 개념들은 오랜 동안의 지속을 유지하다 어느 순간 급격히 변환되어 버리는 에피스테메들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시간을 따라 형성되는 언어의 성숙이란 고고학에 있어 시간에 따른 총체적 변환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푸코에 있어 한 유일한 時間(그 시간)의 거대한 분절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파롤의 선형적인 모델을 거부하고 있으며, 비록 그 스스로가 자세히 전개시키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가 多元的 時間論이라고 부를 어떤 시간론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간과 사건의 관계는 일종의 포함관계를 형성해 왔다. 사건들이란 시간(하나의 시간)이라는 바탕 위에서 계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시간이란 사건보다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사건들의 系列이 시간을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들의 계열은 여러가지로 지표화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간 개념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그 시간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게 되며, 사건들의 계열이 존재하는 그만큼의 시간계열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시간은 이러한 계열들 모두가 그에 준거하여 지표화될 수 있는 하나의 巨大系列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푸코에 있어 담론 속에서 중첩되는 계기의 다양한 형태들은 단순히 리듬이나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열들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고학은 이와 같은 시간론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단지 한 시대의 얼어붙은 공시적 제관계들 속에서 언표들은 다루는 것이 아닌 것이다. 고고학은 담론들을 事件들의 指標에 따라 운동하게 만드는 動性을 피해가지 않는다. 그것은 각 담론들이 그 안에서 형성되고 변환되는 시간적 벡터들 - 각각의 시간적 粘度를 지니는(그래서 상이한 고고학적 비약들 사이에는 어긋남이 존재하게 된다) - 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고고학은 한 담론의 파생의 벡터들 또한 정의하고자 하는 바 그래서 고고학적 분지화는 균일하고 동시적인 망이 아닌 파생의 시간적인 벡터들을 지표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역사 속에서 성숙하는 파롤에 대한 해석학적 모델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화를 구성하는 변환들의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에 있어 언어는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分枝化되고 變換되는 것이다.
2° 주체화되는 언어와 언어화되는 주체
우리는 이제 언어의 문제와 주체의 문제가 교차하는 현대철학의 한 심장부에 도달했다. 우리는 위에서 논의한 언어철학적인 배경을 놓고서 주체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해석학과 고고학이 주체의 개념을 놓고서 어떻게 대립하는가를 보여주고 그 상보성의 단초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개진해 보고자 한다.
해석학은, 특히 그 리꾀르적인 형태에 있어, 意識에 집착하는 전통적인 반성철학, 주체철학의 난점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리꾀르는 주체철학의 대표적인 현대적 형태인 훗설의 선험적 현상학을 몇가지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1) 현상학은 일종의 < 自己定礎 >를 지향한다. 그것은 인식의 가능근거를 찾는다고 하면서도 제과학의 연장선상이 아닌 그들과의 불연속상에서 정립된다. 그러나 해석학은 이와 같은 자기정초가 그의 테두리 바깥의 객관성에 끊임없이 연루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 속함 >의 경험 즉 해석학적 경험이 인간 즉 < 그곳에-있는-존재 >가 < 그곳 >과 관련하여 가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 거리둠 distanciation >을 드러낸다. 2) 현상학은 인식의 가장 근본적인 정초는 直觀의 형태를 띤다고 본다. 궁극적인 인식은 봄이다. 그러나 봄이란 항상 어떤 場 속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주체의 봄은 그 봄이 그 안에서 행해지는 바의 場의 구조에 상관적이다. 이 상관성을 주체화하기 위해서는 즉 그 봄이 일종의 환상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 장이 끊임없이 媒介되어야 한다. 3) 현상학에 있어 올바른 봄은 오직 주체성 내에서만 실현된다. 내재성이 직관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학은 언어에 의해 외재화된 객관성을 매개로 해서 주체성에 접근한다. 해석학이 다루어야 할 텍스트는 주체에의 거리둠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내재성의 환상, 이데올로기적 의식에 대한 비판의 토대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해석학은 텍스트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주체의 의도를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내-존재에 대한 해명이다. 요컨대 해석학에 있어 주체성이란 출발점이 아니라 긴 우회를 거쳐 도달해야 할 종착점인 것이다. < 자아에 대한 자아의 거리둠 >, 이것이 리꾀르 해석학이 훗설 현상학을 비판하는 기본 요지이다.
나아가 리꾀르는 총체화에 대한 헤겔적 기도도 거부한다. 객관성은 해석해야 할 대상들을 끊임없이 주체 앞에 출현시킨다. 이러한 과정이 역사를 형성하며 그 역사 안에서 그를 해석해야 할 인간에게 역사를 총체화할 어떠한 선험적 도구도 주어져 있지 않다. 리꾀르는 역사의 목적론적인 과정, 그 과정을 지배하는 자유의 이념, 나아가 그 과정의 계단적인 구조 등에 대한 헤겔적 사변을 거부한다. 요컨대 리꾀르는 현상학적 주체의 내재성과 변증법적 주체의 사변성을 동시에 거부하고 있으며, 주체의 탐구를 열린 객관성 - 해석해야 할 언어적 존재들 - 위에 정초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해석학과 고고학은 공통의 대화 기반을 지니고 있으며 인식, 주체, 언어를 철학적으로 정초하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보다 깊이 들어가면 해석학적 언어관과 고고학적 언어관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세계-언어-주체의 삼자관계에 있어 해석학은 세계-주체 사이에 언어를 매개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삼자관계에 대한 총체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입장에 접근하지만 그러나 이 두 사유양식에 있어 세계-언어-주체 간에 수립되는 구체적인 구조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어철학적인 차이는 위에서 지적되었으며 우리는 이 차이가 주체의 문제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世界의 개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리꾀르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은, 텍스트를 오직 그 텍스트의 공간 내에 또는 텍스트들의 공간 내에 국한시키는 구조주의적 접근과는 달리, 언제나 세계라고 하는 指示的 相關者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언어는 언제나 < ․․․에 대한 > 언어이다. < 텍스트는 지시작용을 지닌다. 그 지시작용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해석인 한에서의 독해의 과제이다. > 리꾀르는 이 지시적 상관자가 다름 아닌 현상학적인 生活世界라는 것을 지적한다. 해석학의 대상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삶을, 세계를, 상황을 담지하고 있는 상징이다. 생활세계야말로 언어의 지시적 상관자의 차원인 것이다. 해석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언어에 상관적인 생활세계 - 정확히 말해 어떤 생활세계 - 이다. 해석이란 이 객관적 상황, 어떤 언어의 상관자인 바의 그 세계를 다시 現存시키는 데에 있다.
고고학에서 논하는 세계는 이와는 매우 다른 구조를 지닌다. 고고학에 있어서도 언표가 언표이기 위한 중요한 규준 중의 하나는 언표가 어떤 가능한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언표적 장 또한 그의 상관자로서 세계를 요구한다. 그러나 고고학의 상관자가 되는 세계는 생활세계가 아니다. 고고학은 세계가 어떠하다고 할 때의 그 어떠함의 종류 즉 세계의 어떤 가능한 존재양태와 관계맺는다. 언표적 장이 관계맺는 것은 어떤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어떤 존재양태이다. 언표적 장의 상관자는 사물이나 인간 또는 어떤 사태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체계, 규칙성들의 체계인 것이다. 해석학이 세계를 현존시키고자 한다면 고고학은 세계를 脫현존시키고자 한다. 고고학이 현존시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규칙성들일 뿐이다. 해석학에 있어 세계는 언어에 독립적이다. 상징은 이 세계의 어떤 면을 담지하고 있으며 해석학이 상징을 다루는 것은 상징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상징이 담지하고 있는 세계 및 삶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있어 우리가 어떤 세계에 대해 논한다면 그 세계는 이미 그것이 그 안에서 논해지고 있는 바의 담론의 구조에 상관적이며 그 구조를 떠나서 논의될 수는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여러 세계로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第一質料라고 하는 의미가 아닌 한, 언표의 상관자로서의 세계는 바로 그 언표적 구조의 등가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석학에 있어 상징은 세계를 담지한다. 고고학에 있어서는 언표란 바로 어떤 세계의 어떠함 그 자체이다.
위와 같은 구도 하에서 우리는 앞에서 논한 해석학과 고고학의 언어철학적인 차이를 다시금 조명해 볼 수 있다. 해석학이 언어를 수직적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그 언어 속에서 의미작용의 다양한 層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즉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반면 고고학이 언어에 수평적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수평적 구조가 그 언어의 상관자인 세계의 가능한 한 존재양태를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해석학이 어떤 텍스트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이중적인 의미에 주목한다면 고고학은 그 텍스트가 그것이 속해 있는 담론의 질서 속에서 어떤 位置를 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적 상징과 고고학적 언표가 공히 세계와 상관적이라 해도 그 상관적임의 양태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이다.
이제 현상학과 고고학이 세계와 언어의 관계에 있어 위와 같은 차이를 보인다면 주체와 언어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를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리꾀르는 해석학적 작업이 어떤 주체의 의식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적 작업이 주체 개념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해석학이 주목하는 주체는 객관성에 의해 매개된 주체이다. 그것은 의식의 차원으로 환원된 주체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보다 참된 모습으로서 파악된 주체이다. 이와 같이 객관성에 대한 해석학적 드러냄을 통해 주체의 보다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리꾀르는 自己化(appropriation)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자기화란 스스로에 낯선 존재를 매개로 해서 스스로에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다. 그래서 해석학은 주체의 < 고유한 propre > 차원을 그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 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이제 보다 잘 이해되는, 전과는 달리 이해되는, 나아가 이제 겨우 이해되기 시작하는 한 주체의 자아에 대한 해석 속에서 완성된다. > 객관성에 대한 해석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이 그 작업의 대상으로서 상징을 다룬다 해도 해석학이 다루는 것은 상징 자체의 구조가 아니다. 해석학은 그 상징이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그것이 드러내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를, 그 상징을 말하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즉 그 상징의 해석을 통해 보다 참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상징은 왜 그렇게 사용되었는가 즉 그 상징이 사용된 실천적 맥락이나 삶에 있어서의 상황 내지는 그 상징이 목적하는 바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고학에서 위와 같은 물음들이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고고학에 있어, 언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서의 무엇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어떤 규칙성이며 이 규칙성은 언표 자체에 상관적이다. 나아가 누가 말하는가라는 물음은 어디에서 말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주체는 담론의 질서 속에 흡수됨으로써 스스로의 역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석학이 탐구하는 < 무엇을 >과 < 누가 >는 고고학이 탐구하는 < 무엇을 >과 < 누가 >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다.
< 왜 >의 문제로 말하자면, 고고학은 언표가 왜 그렇게 사용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목적의 측면에서는 물론 원인의 측면에서조차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고고학의 중요한 한계라고 할 수 있으며 고고학이 계보학으로 넘어가게 되는 이유이다.
고고학은 담론의 공간에 초점을 맞추며 대상과 주체도 그 담론의 공간에 상관적으로 다루어진다. 나아가 고고학은 그 담론적 공간의 실천적인 맥락을 말해 주지 않는다. 고고학은 그 담론적 공간이 어떤 形態를 띠고 있는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며 대상과 주체는 이 形態에 상관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해석학이 고고학보다 더 포괄적인 인식론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해석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그 세계 및 주체가 고고학적 입장에서는 사실상 담론의 공간에 상관적으로 파악되지 못함으로써 그릇되게 파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고고학은 해석학을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유의 불충분함을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담론적 공간의 生成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물음에의 탐구는 두 측면에서 동시에 중요하다. 고고학의 경우 담론적 공간의 생성에 관련되는 이 실천적 맥락의 탐구는 고고학에서 배제되어 왔던 주체의 문제를(나아가 세계의 문제를) 다시금 재고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해석학의 경우 담론적 공간에 대한 실천적 맥락의 분석은 그러한 분석을 거치지 않은 수준에서의 세계, 주체, 목적에 대한 해답을 보다 객관적인 수준에서 보충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학이 < 상징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 > - < 상징으로서의 언어 > - <상징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주체 >라는 수직선을 따라 작업한다면 고고학은 < 언표의 상관자로서의 규칙성 > - < 언표적 장의 구조 > - < 언표적 장에 자리를 잡는 주체 >라는 수평적인 평면 위에서 작업한다. 그래서 이 두 관점을 조화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하나의 탐구방향을 잡아 볼 수는 있었다. 즉 언표적 장에 대한 정력학적 탐구가 아닌 그 형성과 변환에 대한 동력학적인 탐구를 통해 해석학과 고고학의 한계를 동시에 재고해 볼 수 있을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인식론적-언어철학적 논의가 아닌 (언표이론에서 이미 그 단초가 제시된 바 있는) 언표적 장의 물질성의 문제 특히 그 중에서도 權力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 지점이 고고학으로부터 系譜學으로 이전되는 지점이다.
*
* *
지금까지 우리는 고고학의 철학사적 배경과 논리적 구조를 살펴 보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특히 고고학을 그와 대조적인 입장에 있는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비교해 보았다. 우리는 고고학이란 칸트 이래 서구 철학사의 한 흐름을 이루어 온 주체철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반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았고, 고고학이 삶의 영역과 인식의 영역 사이에서 언어의 보다 넓은 場을 발굴해 내고 그를 통해 객관적인 형태의 선험철학적 장이론을 수립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태의 고고학이 인식의 가능근거를 선험적 의식에서 찾는 현상학, 시간의 내재화를 통한 인간학적 역사철학을 구축하고 있는 변증법, 이중적 의미의 해명을 통한 자아의 보다 객관적인 파악을 추구하는 해석학과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살펴 보았다.
결국 고고학은 철저히 反주체주의적 철학으로 드러난다. 고고학의 기본적인 공헌은 言表的 場의 發見이다. 우리의 경험이 언어화될 때, 대상이 주체에 의해 대상화될 때 세계 또는 삶과 인식 또는 주체 사이에는 그들이 그 구조에 복속되어 작동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담론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고학은 보여주고 있다. 이 담론의 공간은 어떤 超실증적인 존재도 아니며 단지 지금까지의 인식론이 소홀히 다루어 온 영역, 경험과 과학의 중간영역일 뿐이다. 존재가 최초로 언어화되어 있는 영역, 과학의 영역으로 순수화되지 못하고 과학의 下層部를 형성하고 있는 이 익명적 장의 발견이야말로 고고학의 첫번째 공헌일 것이다. 또한 푸코는 이 장이 결코 무규정적인 장이 아니라는 것, 그 장을 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규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대상, 주체, 개념, 전략의 네 관점에서 이 규정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푸코는 이 층을 구성하고 있는 담론들 즉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담론들을 과학사의 새로운 서술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푸코는 의식에, 과학의 논리적 구조에 또는 인식의 사회적 배경에 그 준거점을 두고 있는 기존의 어떤 인식론들과도 다른 독특한 논리를 개발해 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꽁트로부터 바슐라르, 깡길렘에까지 이르는 프랑스 인식론의 과학사 이해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소외되어 왔던 영역으로 이 인식론의 테두리를 넓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언표적 장에 대한 정력학적인 서술에 머뭄으로써 그 장의 형성과 변환에 대한 어떠한 說明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反주체주의적 논의가 지니는 약점도 바로 고고학의 이 한계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을 넘어서서 주체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철학적 기획은 필연적으로 어떤 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이 논문에서 결국 담론공간과 주체의 관계를 문제삼아 왔다. 푸코의 고고학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주체가 담론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담론의 공간이 주체의 활동을 일정한 형태로 제한하는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철학의 역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 꽁트/멘느 드 비랑의 대립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문제가 결국 自由의 문제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푸코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지니고 있는 철학사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푸코의 고고학은 결국 프랑스철학의 핵심 문제인 자유의 문제, 지금까지 주로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제기되어 오던 이 문제를 인식론적, 언어철학적인 수준에서 다시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결국 언어와 인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주체가 결국 담론공간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전형적인 결정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이 가장 농밀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그의 언표이론이다.
푸코는 그의 언표이론을 통해서 세계-언어-인간(대상-담론-주체)이 관계맺고 있는 기본 양태를 규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도, 인간이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도 모두 담론의 공간이 지니고 있는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즉 세계와 인간이, 대상과 주체가 관계맺는 것은 언제나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어떤 담론적 공간이 지니고 있는 질서 즉 談論의 秩序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담론의 질서는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비담론적 실천의 장과 문학, 철학, 과학 등 담론적 실천의 장이 맞닿아 있는 부분에서 형성되어 있는 하나의 場, 대상이 언어화되고 언어가 주체의 의도를 담는 과정을 지배하는 場인 것이다. 예컨대 {광기의 역사}에서는 광기라는 (정의불가능한) 대상을 정의하고자 했던 당시의 갖가지 담론적, 비담론적 실천들이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과정을 < 주체는 담론적 場 속에서 어떤 자리를 잡음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다 >는 말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푸코의 언표이론 그 중에서도 특히 언표의 네 가지 규정은 푸코 철학의 논리적 핵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입장은 세계와 언어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이론들, 그 중에서도 특히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그 근본 생각을 달리 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세계와 인간의 직접적인 만남을, 대상과 의식을 묶어 주고 있는 어떤 신비로운 끈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이론적 난점을 지닌다. 대상의 어떤 본질 - 그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매우 어려운 문제이거니와 - 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의식의 신비로운 힘을 전제하는 이 현상학적 사유에 대해 푸코는 대상과 주체가 관계맺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담론의 질서를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생각의 소박함을 비판하고 있다. 변증법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의 힘과 역사의 목적론적 과정을 그 논리적 뼈대로 하고 있다. 푸코는 이러한 변증법적 사유에 대해 주체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그 담론적 공간이 어떠한 목적론적 성격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그 담론적 공간이 필연과 우발성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임을 보여줌으로써 변증법적 사유의 독단적 성격을 비판하고 있다. 해석학적 사유는 언어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 있는 어떤 은폐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은 언어의 의미란 그 언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담론의 공간 속에서 행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해석학적 사유를 비판하고 있다. 현상학, 변증법의 경우와는 달리 해석학과 고고학은 서로를 결정적으로 패퇴시킨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두 사유는 각각 언어의 상이한 두 차원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유의 통합 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상보적인 관계맺음을 논구해보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위에서 언급한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은 모두 인식의 가능근거,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 의미의 담지자로서 선험적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 푸코는 위와 같이 선험적 주체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주체철학들을 논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적 차원에서도 비판하고 있다. 즉 오늘날 거의 철학의 일반문법처럼 되어버린 위의 주체철학들이 서구 사회의 특정한 시대, 특정한 구조 안에서 생겨난 것들임을 보여주고 또 오늘날 그러한 철학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한 분석들 중 우선 고전시대에 대한 푸코의 관심에 주목해 볼 수 있다. 흔히 서구 근세의 철학은 데카르트에서 발원하여 칸트, 헤겔에서 정점을 이루는 일종의 목적론적인 과정으로서 제시되곤 했다(그리고 사실 이 神話의 저자는 다름 아닌 헤겔 자신이다). 푸코는 (마르샬 게루 등의 업적에 힘입어) 고전시대와 근대를 날카롭게 대립시킴으로써 이러한 신화를 일축한다. 그는 < 일반대수학 >이라는 아프리오리한 표에 의해 지배되었던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와 선험적 주체에 의해 지배되었던 근대철학을 대비시킴으로써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있어 서구 에피스테메의 결정적인 단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는 선험적 주체의 철학 즉 (칸트와 헤겔에 의해 수립된) 선험적 주체에 근거하는 인식론과 역사철학은 19세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 주체철학의 반대급부로서 나타난 구조주의는 오히려 고전시대와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전시대의 < 표 >와 현대 철학의 < 구조 >는 일맥 상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론에서 말했듯이 푸코의 담론공간은 세계와 주체를 이어주는 고전시대적인 투명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전시대의 사유양식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전시대에 대한 이러한 푸코의 이해는 데카르트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보충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철학은 두 상이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정신지도를 위한 제규칙}을 정점으로 하는 합리주의적 인식론/존재론 및 기계론적 우주관이며 다른 하나는 {성찰}을 정점으로 하는 관념론적 인식론/존재론의 부분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프랑스에 있어서는 이 후자의 측면은 17세기 말 이미 강력한 비판들을 받고 파기된다는 점이다. 그 후 프랑스는 데카르트의 전자의 측면을 발전시켰으며 이 철학 전통은 오귀스트 꽁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꽁트, 베르나르, 쿠르노로부터 오늘날의 바슐라르, 깡길렘, 구조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이 철학 전통의 연장선 상에서 푸코의 철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반면 칸트, 헤겔에 의해 수립된 관념론적 철학은 데카르트의 코지토 개념에 근거하는 관념론적 부분을 이어받게 되며 칸트 이후의 주체철학은 이 데카르트철학의 사변적 부분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그 후의 철학사에 끼친 이 상이한 영향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전시대의 철학과 칸트, 헤겔의 철학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유럽철학을 거시적으로 볼 때 17, 8세기의 철학은 데카르트철학의 코지토 부분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라 그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이며, 단지 칸트, 헤겔은 후에 데카르트에서 자신들의 관념론적 철학의 선구를 찾아낼 수 있는 어떤 단초를 발견했을 뿐인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서구 근세철학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데카르트 철학의 합리주의적, 과학적 부분을 이어받은 전통으로서 고전시대의 철학으로부터 꽁트, 베르나르, 쿠르노의 철학으로 그리고 그 후 바슐라르 이후의 과학적 철학으로 이어지는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 철학의 관념론적, 사변적 부분을 이어받은 전통으로서 칸트 이후의 주체철학들의 전통이 그것이다. 그래서 근세 이후 유럽철학이 하나의 전통이 아닌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전통으로 나뉘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유럽철학을 이해하는 기본이다.
한국의 철학계에 퍼져 있는 < 대륙철학 >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영․미의 철학자들이, 종교인들이 그들의 종교와 다른 종교들의 총합(즉 이교도들)의 양분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철학 전통에 대비해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은 그들이 말하는 < 대륙철학 >은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두 전통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럽철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 대륙철학 >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파기되어야 하며 고전시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 꽁트, 베르나르, 쿠르노 등 칸트, 헤겔과 대조적으로 과학적 철학전통을 세웠던 사람들의 중요성, 그리고 바슐라르, 깡길렘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 전통과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구조주의 등의 철학 계열이 올바로 복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푸코는 근대 주체철학을 말하자면 고전시대와 구조주의의 시대로 양쪽에서 포위 공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푸코는 칸트 이전의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들이 깊은 독단의 잠에 빠져 있었듯이, 칸트의 이후 선험적 주체에 입각한 인식론과 역사철학을 구축했던 인간의 형이상학들은 깊은 인간학적(인간중심주의적) 잠에 빠져 있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그러한 잠으로부터 철학을 깨운 것이 바로 구조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과 사물}의 부제를 본래 < 구조주의의 고고학 >이라고 붙이고자 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푸코의 철학은 칸트가 근세물리학에 선험적 기초를 부여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들을 비판하고자 했듯이 현대 인간과학 즉 구조주의에 선험적(의식 내적, 형식적 선험이 아닌 객관적, 역사적 선험) 기초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형이상학, 주체철학을 논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실증주의를 늘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적 입각지에 있어 푸코는 주체철학과 전혀 다른 전통을 수립했던 오귀스트 꽁트의 선상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푸코는 구조주의가 인간 존재의 선험적 기초를 언어에서 찾는다고 본다. 즉 인간이, 특히 인간의 의식이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언어적 질서의 구조 내에서 인간의 언어와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기본적인 통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기초를 보다 선험적이고 역사적인 수준에서 뒷받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언표이론과 주체철학 논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고고학}에서 전개된 그의 언표이론(주체를 담론공간 속에 흡수시키는 이론)과 {말과 사물}에서 전개된 그의 주체철학 논박(주체철학이 서구 철학사에서 어떻게 태어났고 오늘날 어떻게 사라져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분석)이야말로 그의 철학의 핵을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 두 부분을 보다 자세히 분석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주체철학의 대표자격들인 현상학, 변증법, 해석학과 고고학적 사유를 비교해 보고자 했다.
푸코의 주체개념 논박이 어떤 면에서 극단적인 면이 있고 푸코 자신이 그의 후기에서 이러한 입장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는 그의 철학의 이 부분이야말로 아직까지도 인간학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각성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푸코 철학의 이 부분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역사를 발견하기 위해 우선 벗어나야 할 사유들을 씻어내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현대철학의 표백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1. 미셸 푸코의 저작들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 Gallimard, 1972
Naissance de la clinique, puf, 1963
Les mots et les choses, Gallimard, 1966
{지식의 고고학}, 이 정우 옮김, 민음사
La pensee du dehors, Fata Morgana, 1986
{담론의 질서}, 이 정우 옮김, 새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김 현外 편역, 문학과 지성사
{권력과 지식}, 홍 성민 옮김, 나남
Michel Foucault: Politics, Philosophy, culture, ed. by L. D. Kritzman, Routledge, 1988
?Theatrum philosophicum?, Critique, avril 1970
2. 푸코에 관한 저작들
M. Gane(ed.), Towards a critique of Foucault, Routledge, 1986
H. L. Dreyfus/P.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U. of Chicago P., 1983
M. Frank, Was ist Neostrukturalismus, Suhrkamp, 1988
G. Gutting, Michel Foucault's archaeology of scientific reason, Cambridge U. P., 1989
C. Kammler, Michel Foucault: eine kritische Analyse seines Werke, Bouvier, 1986
A. Kremer-Marietti, Foucault et l'archeologie du savoir, Seghers, 1974 ?De la materialite du discours saisi dans l'institution?, 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173, 1990, p. 241-261.
M. Poster, {푸코, 맑시즘, 역사}, 이 정우 옮김, 인간사랑
J. Rajchman, Michel Foucault: the freedom of philosophy, Columbia U. P., 1983
이 정우, [바슐라르의 불연속의 철학], 《철학연구》 제 30집, 1992년 봄
Dictionnaire du linguistique, Larousse, 1973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173, 2/1990, Foucault special
3. 그 밖의 저작들
Aristoteles, La Metaphysique, trad. par J. Tricot, J. Vrin, 1990
G. Bachelard, Le materialisme rationnel, puf, 1953
Y. Belaval, Leibniz: critique de Descartes, N. R. F., 1960
H. Bergson, Oeuvres, puf, 1970
M. Blanchot, {문학의 공간}, 박 혜영 역, 책세상, 1990
F. Braudel, {역사학논고}, 이 정옥 역, 민음사
G. Canguilhem, E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des sciences, J. Vrin, 1989
G. Deleuze, Foucault, Minuit, 1986 {대담: 1972-1990}, 김 종호 역, 솔 ?A quoi reconnait-on le structuralisme??, Histoire de la philosophie, Hachette, 1973
G. Frege, Nachgelassene Schriften, Felix Meiner, 1983
M. Gueroult, Dynamique et metaphysique leibniziennes, Les Belles-Lettres, 1934
G. W. F. Hegel, {정신현상학}, 임 석진 역, 지식산업사
M. Heidegger, Sein und Zeit, Max Niemeyer, 1977
J. Hyppolite, Logique et existence, puf, 1953 Figures de la pens[e philosophique, puf, 1971
I. Kant, {순수이성비판}, 최 재희 역, 박영사
G. W. Leibniz, Discours de metaphysique, Louis-Michaud
C. Levi-Strauss, La pensee sauvage, Plon, 1962 Du miel aux cendres, Plon, 1966
M. Merleau-Ponty,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Gallimard, 1945 The primacy of perception, Northwestern U. P., 1964
J. Piaget, Le structuralisme, puf, 1968
P. Ricoeur, De l'interpretation, Seuil, 1988
Le conflit des interpretations, Seuil,
1969 Du texte a l'action, Seuil, 1986
Temps et recit, t. III, Seuil, 1986
B. Russell, "On denoting", Readings in the Analytical Philosophy, 한국철학회 분석철학분과연구회 편
J. Searle, "What is a speech act?", The philosophy of language, Oxford U. P., 1971
M. Serres, Le systeme de Leibniz et ses modeles mathematiques, puf, 1968
Hermes ou la communication, Minuit, 1968
Resume
Le concept de ?espace du discours?
et le probleme de sujet
dans la philosophie de Foucault
Lee, Jong-Woo
Departement de philosophie
Seoul Universite nationale
Cet essai essaye de examiner le signification de concept d'espace du discours chez la philosophie de Michel Foucault. Et sur cette base, il traite le probleme du sujet qu'etait discute comme un probleme important philosophique depuis Auguste Comte et Maine de Biran.
Le caracteristique de la philosophie de Foucault consiste dans le fait qu'elle mediatise l'ordre linguistique entre l'homme et le monde. A travers de ce "l'ordre du discours", l'archeologie de Foucault traite la mise en relation(en ce cas relation epistemologique) entre l'homme et le monde. En ce sens, nous interpretons sa philosophie comme theorie de "champ epistemologique". Alors sa philosophie ne traite pas un individu ou un texte ou une theorie, mais l'explicite a travers de leur espace substrat, c'est-a-dire champ epistemologique.
Foucault veut determiner le concept de l'enonce pour developper sa theorie du discours. L'enonce signifie l'ensemble des signes en l'etat de matiere avant d'etre determinee comme proposition, symbole, "speech act" etc. Mais ce l'enonce-comme-matiere a son determination elementaire en tant qu'il est transforme en dimension de langage de dimension de l'etre. Ce determination est cela. 1) L'enonce a la relation avec l'ensemble des lois des mondes possibles. 2) L'enonce comprend l'ensemble des positions possibles qu'un sujet peut prendre. 3) L'enonce se compose de multiplicite des espaces. 4) L'enonce a la relation necessaire avec materialite repetable, c'est-a-dire l'institution.
La raison de ce constitution de theorie pour l'enonce est de decouvrir un strate des discours qui se mettait hors de l'epistemologie traditionnelle. En decouvrant la strate du savoir disperse au-dessous des grandes theories philosophiques et scientifiques, par exemple, la physique newtonnienne ou la metaphysique hegelienne, Foucault essaye de elargir l'extension de l'epistemologie. La theorie d'enonce donne le fondement pour ce elargissement. Le premier chapitre de cet essai traite ce contenu.
Cette recherche de Foucault a la fin de rediscuter le concept du sujet que la philosophie moderne avait presupposee comme le fondement de connaissance, histoire, sens. Le sujet de ce fondement est "le sujet transcendantal".
Foucault reexamine les discours de l'age classique pour ce travail. En analysant non pas les grands discours comme la physique de Galilee ou la metaphysique de Descartes mais le "savoir" comme l'histoire naturelle, la grammaire generale, l'analyse de richesse. Ces discours traitaient comme son objet les homme qui vivent, parlent et travaillent, mais il n'y a pas l'homme a qui nous sommes si familier aujourd'hui, l'Homme comme le sujet transcendantal. Avec ce travail, Foucault veut faire nous voir que le concept du sujet a qui nous sommes si familier est le resultat de la philosophie dix-neuvieme, specialement de Kant. Et que ce concept s'evanouissant aujourd'hui, specialement du structuralisme. Le deuxieme chapitre de cet essai traite ce structure profond de la philosophie moderne.
Sur cette base, nous essaye de comparer la pensee archeologique avec phenomenologie, dialectique et hermeneutique, ces pensees representatives modernes. Ces philosophies sont celles du sujet transcendantale comme la condition de possibilite de connaissance, histoire et sens. A travers de ces comparaisons, nous voulons completer le arguments de chapitre deux et comparer la philosophie de Foucault avec celle de Kant, Hegel, Husserl, Heidegger, Sartre, Merleau-Ponty. Cette comparaison donnera la base pour discuter en forme contemporaine le probleme du sujet.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트 미학과 존재론의 문제 (0) | 2022.03.31 |
---|---|
개슈탈트Gestalt 개념의 형성사 (0) | 2022.03.23 |
'배제의 배제'와 '환대',현대와 탈현대의 사회 철학 (0) | 2022.03.23 |
헤겔 미학에서의 “가상” 개념에 관한 연구 (0) | 2022.03.23 |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적 독해: 노동과 정치 (0) | 202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