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 철학
문 성 원
사회 속의 개인
1. 학교와 사회
여러분도 대개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 군대에서는 '사회'라는 말을 독특하게 씁니다. "사회에 나가면", "사회에 복귀하면"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 경우에 군대는 '사회'가 아닌 셈입니다. 교도소에서도 '사회'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갖지요. 이럴 때 '사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활 공간을 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대나 교도소는 거기에서부터 격리된, 부자유의 장소구요.
그렇다면 학교는 어떻습니까? 학교는 이런 의미의 '사회'에 속하는 것일까요? '사회 생활'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곧잘 그 범위에서 '학교 생활'을 빼놓는 것 같습니다. 또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간다"는 식의 표현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쓰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교 역시 '사회'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위치에 있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학교, 군대, 교도소를 같이 '사회'에 대비시키는 것이 석연찮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세 가지는 역할과 특성이 너무 달라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들 모두가 좁은 의미의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 '사회'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함께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군대는 사회를 방위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외벽(外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교도소는 '사회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일정 기간 동안 격리하고 재교육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사회의 내벽(內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교는 사회 생활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생산해냅니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벽 같은 것은 없을지 몰라도 일종의 생산 틀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 기능을 할 사회 구성원들을 만들어내는 틀 말이지요.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틀을 거쳐 나와 내벽과 외벽의 보호와 규제를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그러니까 학교, 군대, 교도소는 '사회'라는 알맹이를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의 외곽 기관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 가운데 군대나 교도소를 갔다 온 사람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대개는 지금까지 십수년씩 학교 교육을 받아 왔을 겁니다. 그러므로 '사회'와 관련된 이 논의를 학교를 중심으로 잠시 진행해 보도록 합시다. 학교의 중요성이야 새삼 얘기할 나위도 없겠지요.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학교 체제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상 사회 구성원을 생산해 내는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기관으로 학교가 부각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종교 기관이나 가족 따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서양의 경우는 교회가, 그리고 우리의 경우는 유교 공동체가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고 보아 좋을 겁니다. 학교를 통한 보통 교육이 이루어진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얼마 안 된 일입니다.
현대의 학교 체제는 매우 효율적인 재생산 기관이지요. 잘 정비된 조직과 규율을 통해 일정한 특성을 지닌 사회인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회화'라고 일컫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가정도 사회화의 일익을 담당하긴 하지만 그 '보편적' 기능 면에서는 오늘날의 학교와 비할 게 못 되지요. 학교를 통한 사회화는 눈에 보이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규격을 갖춘 사회인들을 만들어 내는 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여러분도 이 규격화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쳐 온 셈입니다. 여러분이 얻은 졸업장은 그 표지라고 할 수 있지요. '사회'에 나갈 때 붙이고 나가는 그 표지가 여러분의 규격을 증명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닙니다. 우리들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관념들과 관점들 또한 생산됩니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 심지어 옷을 입고 몸뚱이를 움직이는 방식까지 만들어집니다.
우선 학교에서는 시간 관념과 질서 의식을 심어 줍니다. 이 과정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지요. 그래서 일정 기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시간 계획에 의해 구획된 생활 방식이 몸에 배고, 주어진 질서와 조직 속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집니다. 이와 같은 특성은 산업화 이후의 현대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꼭 필요한 인적 자원의 속성이지요. 사실 그러한 자질을 지닌 균질적인 사람들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오늘날처럼 크고 복잡해진 사회가 제대로 굴러나가기 어려울 겁니다.
이를 위한 훈련의 예로 출석을 부르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선생님이 '아무개'하고 이름을 부르고 여기에 답하는 간단한 행위에도 많은 전제가 필요하며, 그로부터 중요한 결과들이 생겨납니다. 우선 학생은 출석을 부르는 그 시간에, 또 그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격 요건과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요. 학생들은 자기 이름이 불릴 때 "예"하고 대답을 합니다. 이 간단한 행위는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요건들을 스스로가 충족시키고 있음을 확인받는 행위입니다. 이 대답은 선생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대답하는 학생 자신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학생은 선생님의 부름에 답하는 이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일정한 행위 질서를 따라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서 인정하는 것, 선생님과 선생님의 뒤에 서 있는 질서와 권위를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속한 질서와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일정한 관념들을 심어 줍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학생들은 정말 학생이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학생은 '학생'으로서 불림을 받고 거기에 대답을 함으로써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 과정이 선생님 개개인에 의해 마련되고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생님들도 이 '출석 부르기'를 비롯한 일련의 교육 과정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지요. 누가 하더라도 그 위치에서 해야 할 일들의 테두리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다시피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학습 목표는 대개 일정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균질적인 인적 자원의 생산이 가능한 것이구요.
아무튼 학교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학생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어 냅니다. 물론 이 과정은 완벽하지 않으며 그 결과도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습니다. 공산품의 생산 공정에서 불량품이 나오듯이 학교에도 불량 학생과 문제아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교육 과정을 중도에 이탈하는 학생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문제가 학교의 기능 수행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완전한 생산 체계란 없을뿐더러, 불량품을 처리하는 시설 또한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소년원이나 교도소가 그런 역할 중의 일부를 담당합니다. 사회 외곽의 여러 기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사회의 '정상성'을 지켜 내는 것이지요.
혹자는 저의 이러한 지적이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과장된 것이라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학교 교육을 마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학교를 '인격 도야의 장'이니 '자아 완성의 터전'이니 하고 듣기 좋게만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과장되고 낯간지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의 목표는 학교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학교가 사회화의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러분과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우리가 자유롭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부분 착각일 수 있습니다. 자유(自由)란 그 한자 말의 새김대로 '스스로 말미암음'을 뜻하는 것인데, 우리의 됨됨이를 비롯해서 머리 속에 든 생각까지 실로 많은 부분이 정작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일 테니까요. 실제로 한 번 따져 보세요. 정말 나에게서 비롯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를.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생각--이런 것들은 정말 나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혹시 내가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들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생각들과 표현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그것을 마치 나의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학교는 때로 자유롭다는 의식까지 심어 줍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배우지요.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자유로와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자유롭다'고 배우는 것과 실제로 자유로운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현대의 서구 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근대 이후의 서구 문화가 자유롭다는 허위 의식을 사람들에게 주입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근대인들에게 '자유'는 실상 물건을 사고파는 데 필요한 '자유 의식'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아다시피 근대 사회는 상품 교환이 보편화된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포함해서 온작 상품을 사고 팔지요. 이런 보편적인 교환 행위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환 당사자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다는 의식, 그런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이익 추구라는 끈에 의해 조종되어 왔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학교는 이러한 사회에 필요한 자유 의식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는 겁니다.
물론 학교만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넓게 보면 사회 전반이 교육에, 즉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의 재생산에 관여하지요. 다만 그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 근대 이후에는 학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학교와 '사회'는 대칭적인 반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학교는 '사회'의 요구에 따르고, '사회'는 학교에서 배출된 사람들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교와 '사회'의 구분은 다분히 편의적입니다. 학교는 '사회'의 반영이고 보다 큰 범위의 사회에 속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교육 현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일류대를 향한 치열한 입시 경쟁은 치열한 사회 경쟁, 치열한 출세 경쟁의 반영입니다. 입시 제도만 이리저리 뜯어 고쳐서는 이 치열성을 완화시킬 수 없지요. 특권적인 집단들로 계층화되어 있으며 또 그런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사회 질서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망국적인 과외병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학교 교육의 산물이고 또 그 과정을 포함하는 사회화의 산물입니다. 여러분이 대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와 보이는 공간 속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여러분은 이미 많은 교육 과정을 거쳐 왔고 그 속에서 주조(鑄造)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일정한 규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지요. 대학의 자유는 그 규격 검사에서 합격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교육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러분이 누리는 자유는 일정한 사회적 가치와 효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의(創意)와 자기 반성의 효용이요, 따라서 사회 변화와 발전을 위한 효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창의와 자기 반성은 주어진 조건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2. 사회와 개인
이제는 범위를 넓혀서 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규정력과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 때 사회와 대비되는 것은 개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개인과 사회를 대비시키고 그 관계 속에서 사회를 강조하는 것은, 이미 개인이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령 우리의 옛 전통 사회에서처럼 공동체적 사회 관계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경우에는, 이런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개인과 사회 관계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거기에 비해 오늘날에는 개인이, 즉 공동체적 사회 관계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이 중요한 요소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사회 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앞서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 비쳤듯이, 개개인은 여전히 오늘날의 특수한 사회 관계에 의해 규정받고 있지요. 사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특수한 사회 관계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은 흔히 간과하기 쉽습니다.
먼저 개인이 중시되는 맥락부터 짚어 봅시다. 근대 이후 사회 질서를 설명하는 가장 지배적인 사회 이론은 사회 계약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홉스(T. Hobbes ; 1588-1679)나 로크(J. Locke ; 1632-1704), 루소(J. J. Rousseau ; 1712-1778) 등에 의해 발전되었고 미국 독립 선언과 프랑스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이론이지요. 사회 계약론에서는 개인을 사회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습니다. 말 그대로 사회는 개인들의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 계약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 이전의 상태를 상정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자연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 상태에서 사회 계약을 통해 사회가 성립된다는 주장은 실제 역사 면에서 볼 때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자연 상태'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론적 가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런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대개 그 점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자연 상태가 정말 어떠한 것이었나를 역사적 증거를 통해 확인하는 것보다는 특정한 사회 형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더 주안점을 둡니다. 그런 까닭에, 사상가들마다 어떤 사회 형태를 내세우려 하느냐에 따라 자연 상태에 대한 가정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국가 권력을 옹호하려고 한 홉스는 자연 상태를 그와 대비되는 무질서의 상태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묘사합니다. 반면에 로크처럼 소유권의 보호를 사회 및 국가의 성립 이유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연 상태에서부터 소유권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사회 계약론의 실질적인 구도를 살펴 보면,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가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상태에서 그와 연관된 자연 상태가 도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허구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사회 계약론이 근대 이후의 지배적인 사회 이론으로 자리잡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근대적 사회 질서가 사회 계약론과 걸맞는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계약론적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지요. 먼저 오늘날의 정치 질서와 법 질서를 생각해 봅시다. 원칙적으로 볼 때, 현대 민주 국가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적이고 법적인 권력과 권위는 계약에 의해 생겨납니다. 우리가 헌법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 헌법이 국민들이 한 약속, 즉 우리가 맺은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그가 국민들이 약속한 절차에 의해 뽑힌 대표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권위가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공식적인 권력과 권위의 원천은 계약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이라는 TV 프로롤 보신 분이 있습니까? 약 10여년 전에 방영된 프로였다고 기억합니다만, 당시에는 꽤 인기 있는 외화였지요. 그 내용은 하버드 대학 법대 대학원 학생들의 생활을 에피소드 별로 엮은 것인데요, 말하자면 미국 사회 예비 엘리트들의 학창 생활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예나 지금이나 법은 사회 질서의 기본 형식이고, 그래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권력과 가깝기 마련이지요. 그런 법대생의 이야기를 인간적인 면들을 부각시켜 정감 있게 다루어 낸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인공인 젊은 법학도(이름이 '존'이었던가요?)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지요. 킹스필드 교수라고, 실력은 있지만 괴팍하고, 지나치리만치 엄격하면서도 속이 깊은 할아버지 교수님인데요, 혹시 그 사람 전공 분야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 분 있으세요? 그렇습니다. 계약법이었지요. 그 드라마에 주로 잡힌 교실 장면은 킹스필드 교수가 강의하는 계약법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TV를 보면서 저는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르는 이런 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더군요. 오늘날 '계약'이 지니는 의미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물론 킹스필드 교수가 강의한 계약법은 상법 중의 한 분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약이라는 틀이 원래 상거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이 틀이 정치적인 면으로 확산, 적용된 것이 '사회 계약'이라고 해석해 볼 때, 계약론이 법 강의의 중심으로 취급된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각도에서 보면 사회 계약의 배경에 있는 것은 상거래의 보편화를 이룩한 자본주의 경제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자본주의 질서하에서는 상품을 소유하고 그 상품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개인들이 중심 요소가 되지요. 여기에 어울리는 정치 질서의 모습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 경우에도 개인들이, 이번에는 권리를 가진 개인들이 중심이 됩니다. 이들이 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들지요. 정부의 권력은 이 개인들로부터 나옵니다. 즉 이들이 일정한 보호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특정한 기관이나 집단, 또는 개인에게 양도하거나 위임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계약 내용이 바뀌면 사회 형태나 정부 형태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형태는 가변적이지만 개인의 권리는 영원합니다. 나아가 개인의 권리 보호와 이익의 신장에 적합하지 않은 사회 형태는 마땅히 바뀌어야 합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사회 계약론이 봉건적 정치 질서를 공격하는 혁명적인 무기로 작용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계약론과 그것이 전제하는 개인주의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크게 보면 특수한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 사고방식일 따름이지요. 이 점은 그간 이 사회 계약론의 적용 범위가 변화해 온 과정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홉스와 로크가 내세우고자 한 사회 형태가 각기 달랐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지만, 홉스보다는 오늘날의 민주 사회에 더 가까운 모습을 제시한 로크의 경우도 노동자나 하인 등을 사회 계약의 주체에서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일정 정도 이상의 소유물을 가진 사람들만이 계약의 주체로 인정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당시의 실정과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실제로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얻은 것은 19세기초의 차아티스트 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여성들도 사회 계약의 주체에서 빠져 있었지요.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제약이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당연시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 이론까지를 제약한다는 얘깁니다.
이런 점 때문에 헤겔(G.W.F. Hegel ; 1770-1831)은 "모든 사람은 시대의 자식"이요, "철학은 그 시대를 사상 안에서 파악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누구도 그 시대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항상 자신의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시대를 앞서 나간다고 하는 사상가들도 다만 일반 사람보다 한 발짝 앞서서 그 시대적 요구에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시대적 제약에 더하여 각자의 사회적 처지도 그 사람의 의식과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테면 노예와 노예주, 귀족과 평민, 사장과 직공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특히 이런 차이는 이해관계가 다르거나 상충할 때 크게 부각되곤 합니다. 누구나 자기 위주로,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서 세상을 바라보기가 쉬운 까닭이지요. 로크가 빈털털이나 노동자를 사회의 주체로 취급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난한 자들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세금은 부담하지 않고 요구만 많이 하는 사람들로 보였을 테니까요. 반면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자들이 착취자요 사회에 기생하는 사람들로 보일 수 있었겠지요.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K. Marx ; 1818-1883)는 이런 면을 요약해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주로 계급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만, 그 범위를 넓혀서 성별이나 인종, 세대간의 차이 등등을 이데올로기와 연관지울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처지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그 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여러 체계적인 의식 형태들을 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집단에게 전파되거나 주입되기도 하지요. 요즘은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가령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들이 손녀보다 손자를 더 귀여워하고 딸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은 사태를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도 여자이니만큼, 또 살아오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설움과 불이익을 겪었을 것이니만큼,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딸과 손녀를 더 위해 주고 도와 주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할머니들에게는 오히려 남성 위주의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더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은연중에 강요했던 사고방식 탓이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을 경우, 더 피곤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점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이구요. 이것은 스스로의 처지가 나아질 전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노예가 어쩔 수 없이 노예주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겁니다. 그런 때에는 노예로서도 그 자신이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그나마 살아가는 데 유리할 테니까요. 하지만 노예가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사태는 달라집니다. 노예의 머리 속에서 노예주의 사고방식이 깨져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성차별이 줄어드는 것과 발맞추어, 신세대(?) 할머니들에게서는 이전과 같은 남아 선호 성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겠지요. 요컨대, 한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큰 영향을 받습니다만, 그런 이데올로기들의 관계는 사회 상황과 세력 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 문제로 다시 돌아와 논의를 정리해 봅시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개인을 사회보다 우선시하는 사고방식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상품 자본주의 사회에 기초한 특정한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큰 힘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집단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시도, 즉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던 역사적 실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을뿐더러, 그러한 시도가 낳았던 전체주의의 폐해가 개인주의에 대한 섣부른 비판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지요. 게다가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권리를 지닌 '개인'의 범위를 성별이나 재산 정도, 인종 등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넓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개인주의는 그 자신이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가려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개인이 사회보다 우선하며 사회는 개인들이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게 함으로써, 실제의 사태와는 거리가 있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지요. 사회로부터 독립된 개인, 그래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은 언제나 이미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회는 처음부터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사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사회의 규정력을 무시하고 모든 책임을 개개인에게 돌려 버릴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빈부의 문제처럼 사회?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제도 개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문제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과 개인주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누구나 능력만 있고 운이 좋으면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도 '록키'의 주인공도 '프리티 우먼'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조장하는 선전의 이면에는, 수십만분의 일, 아니 수백만분의 일의 확률을 뚫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과 운이 없어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야 하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주의는 타인의 문제와 공동의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합니다. 인간들은 각자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와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개인주의의 기본 입장이며, 따라서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가치는 개인의 권리와 인격이 됩니다. 이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개인의 권리가 어떤 내용으로 실현이 되며 개인의 인격이 어떤 방식으로 존중받는가에 있습니다. 권리니 인격이니 하는 것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형식적인 규정에 불과합니다. 내용이 채워져 있지 않은 것이지요. 예컨대 권리로만 따지자면, 재벌이건 막노동꾼이건 한 사회의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거 및 이주의 자유, 여행의 자유 등과 관련된 권리가 있지요. 다른 사람의 유사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재벌과 막노동꾼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다릅니다. 권리로만 따지자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수백평짜리 저택에 살거나 달동네의 단칸 셋방에 살거나 마찬가지일 수 있지요. 개인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이처럼 권리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더라도 그게 과연 개인적인 문제에 머물 수 있을까요? 또 그런 상황에서도 달동네의 주민들은 자신이 재벌과 동일한 인격을 갖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더구나 오늘날에는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동의 문제들이 중요하게 대두하고 있습니다. 환경 문제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합의와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개개인의 권리와 인격은 이런 노력과 함께 함으로써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비단 환경 문제나 핵 문제와 관련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형식적인 권리만이 아니라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이라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특히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서로 얽혀 있으며, 크게 보면 그들의 환경이 바로 나의 환경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사회적 삶의 드라마
지금까지 저는 주로 사회가 우리에게 미치는 규정력과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또 사회경제적 상황과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하는 따위를 말이지요. 학교도 넓은 의미의 사회에 속하니까, 저는 결국 사회에 의해 우리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해 온 셈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적 환경에 대해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는 말일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한 사회학자의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인용해 보고 싶군요.
우리는 꼭두각시들이 조그마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줄이 당겨짐에 따라 이러저리 움직이면서 그들의 다양하고 하찮은 배역의 지정된 경로를 따르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이 극장의 논리를 이해하게 되며 그 논리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회 속에 옮겨 놓으면서 우리 자신의 위치가 사회의 교묘한 끈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잠시 동안 우리는 자신을 정말로 꼭두각시로 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는 꼭두각시 극장과 우리 자신의 드라마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파악한다. 꼭두각시와는 달리 우리는 행동 중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어 우리를 움직인 장치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 행위에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놓여 있다.
우리는 분명 사회에 의해 구속받는 면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는 없지요. 주어진 무대의 조건에 따라야 하며, 그 속의 배역에 맞추어 행동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배역도 맡지 못하고 무대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고장난 꼭두각시 취급을 당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그렇게 쫓겨나는 것은, 그래서 수리 공장으로 실려가거나 폐기되어 버리는 것은 자유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결과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꼭두각시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 수는 없지요. 그렇게 하지 않을 가능성, 다시 말해서 무대에서 쫓겨나지 않으면서도 꼭두각시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바로 진정한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는 우리를 구속하는 무대 장치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조건들을 파악한 위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스스로 조정하고 무대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가닥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는 자신의 조건을 알지도 못한 채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꼭두각시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그런 자유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각본 속에 정해진 '자유'일 따름이지요.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회적 삶을 하나의 드라마라고 파악한다면, 그 드라마는 줄거리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드라마가 될 것입니다. 주어진 무대가 있고 배역이 있으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서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가닥을 짐작해 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예측할 수는 없는 드라마--무엇보다도 이 드라마의 특징은 우리 스스로가 배우이면서 관객이기도 하며 연출가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각본이 없는 채로 연기하고 연출을 해야 하지요. 마치 '중경삼림'의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적 삶은 '열려 있는' 드라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열려 있음' 속에 우리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려 있음의 폭은 그다지 크지 않지요. 무대의 조건과 배역, 이전의 줄거리가 그 폭을 제한합니다. 또 그렇게 제한된 폭 가운데서도 우리가 모든 가능성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그 가능성들을 가늠하고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를 말할 수 있게 되지요. 어떤 방향을 찾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느냐가 바로 우리의 윤리적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윤리는 단순히 구래의 관습이나 규범을 따르는 것과는 다르지요. 때로는 그런 규범들을 비판하고 수정하며 새로운 규범을 찾아나가는 것이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윤리는 열린 드라마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문제삼습니다. 윤리적 자세는 비판적이지만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열려 있는 우리의 미래가 현재의 조건에 의해 제약받고 있음을 알기에, 그 조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윤리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지요. 물론 선택을 하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개인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개인은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개인'이며, 그러한 개인들의 행위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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