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적 독해: 노동과 정치
- 송 호근 (서울대 사회학)
I. '하버마스' 독해: 전제
지난 십 여년 동안 세계학계는 이른바 "사회과학의 위기"현상에 봉착하여 왔다. 학문의 위기는 세계의 변화상이 이론 수용력의 범위를 넘어설 때와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 자체에 심각한 회의가 제기될 때에 발생한다. 양자의 계기는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구태어 구분한다면, 70년대의 위기는 경쟁적 패러다임 간의 우위성 다툼 속에서 진행된 비교적 풍요로운 형태의 것이었던 반면 이 시대의 위기는 우위를 점해온 패러다임들의 성찰적 반성과 자체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1980년대 말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 대량생산체계의 유용성 소진, 후기물질주의적 가치관의 성숙과 확산 등이 지배적 패러다임의 쇠퇴를 촉진한 요인들인데, 이들의 쇠퇴는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걸치고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저항.해체.비판사상과 사회이론가들에게 상대적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찌보면, 독자적 적실성을 주장하며 서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포스트이즘의 제경향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의 권위와 영향력을 새로운 유형의 상호교신과 교류의 장으로 흡수 분산시키는 정보기술의 마력적 성격에 의하여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의 위기'는 거대이론(grand theory)의 종언을 재촉하려는 이론적 의욕을 집약하는 명시적 개념이기도 하고, 현대성의 핵심 논지들의 보증이나 부정을 출발점으로 설정한 미시이론들의 생동적 반란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이론의 유용성이 거의 삭아든 듯한 이 시점에서 거대이론화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람이 바로 하버마스이다. 하버마스는 푸코와 함께 현대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논의가 많이 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명료하게 보인다. 계몽주의를 동일한 시원(始原)으로 출발하는 두 사람의 사상은 근대적 주체의 상실, 왜곡, 확립과정을 사회질서의 중추인 권력,권력형성, 권력행사의 네트웤 속에서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는 일상적 체험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지식의 동학으로 거시권력의 버팀대를 갉아 쓰러뜨렸음에 비하여,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에 내버려진 도덕적, 규범적 상호이해의 행위들을 복원하여 찌그러진 현대성의 권력기제들의 억압적 성격을 폭로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비판이론의 배타적 특권일 터이지만, 이른바 '정통사회과학'(orthodox social science)의 경계를 두고 보면, 푸코와 하버마스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동일한 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푸코는 정통사회과학의 관심 밖에 존재하였던 비정상적, 비규범적, 타부적 대상에서 배제와 격리와 감금을 체화하는 규율의 본질을 꿰뚫었다면, 하버마스는 규범적, 도덕적, 실천적 가치를 내팽개쳐온 정통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내벽을 헐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전통에 입각해 있으면서 새로운 정통(a new orthodoxy)을 정초하는 데에 성공한 학자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회체계론]과 [행위의 일반이론]에 기초한 파슨즈의 '사회행위론'이 맑스와 베버 이래 나타난 거대이론의 전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은 크고 작은 포스트이즘들의 난립 속에 솟아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거대이론으로 간주하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거대이론은 포괄성과 추상성을 살리는 대신 구체성을 희생시킨다는 점은 지난 시대 거대이론의 수용과정에서 이미 터득한 바이다. 그러므로, 추상성의 폐해와 보편성의 강제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거대이론의 지평을 개척한 하버마스 비판이론의 이론적 의의와 실천적 함의를 적실성있게 파악하려면, 의사소통행위론이 창출된 유럽황금기의 정치경제적 조건, 특히 60-70년대 독일의 사회적 상황과 결부시키는 발생구조론적 해석의 교훈을 간과해서도 안되지만 하버마스의 학문체계를 관통하는 해방적 관심을 상황맥락적으로 과도하게 제한하는 시각은 더욱 위험하다. 하버마스 자신도 인정한 바 있고 여러 연구자들이 간간히 지적하였던 바와 같이 하버마스의 이론은 서구중심적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후기자본주의적 질서를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현대성 담론이 반성철학과 실천철학의 아집에 의하여 철저히 로고스중심주의에 매몰되어온 이론적 발전궤적을 규명함으로써 "결박된 이성"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사회이론의 열린 체계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하버마스 독해의 첫 전제이다.
하버마스는 청년헤겔주의자의 오류를 극복하기를 원한다. 청년헤겔주의자들은 비판의 자유공간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성 비판이라는 사유의 형식을 헤겔적 이념이 안고 있는 절대성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자신의 내면적 본성을 객관화하는 희생을 치르고서만 주체성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귀의함으로써 '계몽의 권위주의화'라는 의식철학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방식과 전략은 다르지만 이성의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헤겔 우파와 좌파의 논리들에 의하여 이성 자체에 응축된 해방의 잠재력이 권력의 도구로 대상화되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여기로부터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철학과 결별하지 않고 현대성의 담론을 완수하려는 헤겔의 의도를 매듭지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 하여 더욱 철학적 비판적 능력을 갖춘 사회이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의 사회이론적 기획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근본주의자이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근현대적 경험을 사상의 질료로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보편적 영역으로 성큼 다가서는 추진력이 이로부터 기인한다.
이 글은 계몽주의적 전통의 노동 개념이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서 변용되고 있는 양상과 의사소통행위론의 전개과정에서 유럽의 노동구조가 반영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하버마스의 이론을 검토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체제와 정치적 양상을 하버마스의 이론적 구도에 비추어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하버마스 이론의 보편성을 진단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괴리가 이 글의 논리전개를 방해한다. '하버마스 이론과 유럽 상황간의 괴리', '유럽과 한국 노동구조 간의 괴리'가 그것이다. 이 괴리들은 역사적 사회적 공간에 실재하는 것들이어서 한국 상황에 대한 하버마스 이론의 직접적 적용을 불가능하고 또 무용하게 만든다. 이 난제들을 피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는, 하버마스 비판이론을 이해함에 있어 '이론적 보편성'보다는 '기획의 보편성'을 중시하겠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실천적, 도덕적, 미학적 합리성을 모두 끌어안는 '포괄적 합리성'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행위의 분석단위, 내부 갈등과 투쟁을 촉발하는 균열 구조, 체계의 개입수단과 방식 등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러저러한 비판들은 모두 의사소통 행위론의 기획적 포괄성을 강화하는 데에 공헌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비판들은 결코 사소한 것들은 아니지만, 비판에 완전히 면역된 거대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금은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비판들은 의사소통행위론의 논리적 기반을 침식하는 것이기도 한데, 결국은 하버마스의 기획을 무산시키기 보다 그것을 확대하고 세련화하는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한편, 유럽과 한국간에 존재하는 역사적.사회적 괴리, 또는 정치체제의 측면에서 민주적 조합주의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간에 존재하는 괴리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노동체제를 하버마스의 기획에 비추어 두 개의 변종(變種)으로 취급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과 유럽간의 편차보다는 두 개의 변종이 하버마스의 보편적 기획에 비추어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가의 '거리'를 보다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국의 특수성을 과장하여 하버마스의 기획을 현실적합성이 없는 사회이론 또는 구체적 전략을 결여한 이상주의론으로 폄하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전환으로부터 두 번째 전제가 정립된다. 그것은 하버마스의 이론이 기존의 비판이론과는 달리 실천적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기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대립과 모순이 관찰되는 곳이라면 해방을 향한 '전복적 사고'의 물꼬를 터준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객관적인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여정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식론을 전수한 하버마스에게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오직 미완의 변증법을 완결하기 위하여 이성과 합리성이 온전히 실현되는 '전체', 그것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전체'로 달려가고 있을 뿐으로 생각되었다. 변증법의 완결을 위한 '부정적 인간주의'(negativer humanismus)는 마치 카우츠키의 영속혁명 테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세계의 얼룩이 묻지 않은 표백된 이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버마스에게는 우리가 호흡하는 현실 공간 속에서 이성의 변혁적 잠재력을 발화시키는 것이 더욱 절실하였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인식은 루카치, 베버, 마르크스, 니체가 이성의 실현을 위하여 어떻게 이성 자체를 결박하였는지를 역추적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도구적 이성 개념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철저히 왜곡되는 이성의 일면적 실현과정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지만 이론적 낙관성을 둘러쓰고 비관적 세계관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관론을 거꾸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합리성의 패러독스에 의해 결박된 이성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전제조건임을 확신하고 이를 토대로 헤겔이 개창한 현대성 담론으로부터 전복적 사고의 찰학적.사회과학적 기반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전복적 사고의 관점에 서면, 유럽의 민주적 노동체제나 한국의 억압적 노동체제 모두 '왜곡된' 형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계몽에서 신화를 분리하고 미완의 계몽을 완성하려는 하버마스의 '기획'으로 보자면 가장 발전된 형태로 분류되는 유럽의 노동체제 역시 '덜 사악한 악마' (lesser evil)일 뿐 실천적 의지가 차단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노동계급의 저항 잠재력이 아직 체계영역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국에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극복될 가능성이 많다는 역설도 성립될 법하다. 그렇다고 비관론을 거꾸로 뒤집은 하버마스의 시도가 비판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버마스는 이성에 내재된 해방의 잠재력과 실천의지를 복원시키는 대신, 규범적, 이상적 논리에 과도 귀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두 가지의 전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이 한국의 노동체제 이해와 분석에 어떤 이론적 실천적 함의를 제공하고 있는가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주로 세 가지 논점에 논의를 집중할 것이다.
(1) 도덕적 규범과 윤리성을 복원하려는 하버마스의 이론적 기획에서 '노동'은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가? 그가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를 개진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며 희생시킨 것은 무엇인가를 규명한다. 得과 失의 관점으로 잰다면, 하버마스는 노동-사유재산-권리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적 이해관심과 비판의식의 축을 보편화용론(universal pragmatics)으로 수용함으로써, 노동으로 회귀하는 구심적 사고를 원심력적으로 돌려놓으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得),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 모순의 핵심 소재를 희석시키고 이해갈등의 방향성을 천지사방으로 흐트려 놓았다 (失).
(2)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에서 하버마스는 노동계급의 투쟁 잠재력과 노동운동의 위상을 과소평가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모순의 소재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론에서 이미 예견되는 것이지만, 브르주아공론장의 이상화 경향과 생활세계에 대한 체제의 침투로 야기되는 '합리성의 패러독스'를 과도하게 강조한 결과로 보여진다. 하버마스는 유럽 노동운동의 궤적을 '체제내화'의 과정으로만 파악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도 사민주의자들은 '권력에의 길'(road to power)을 둘러싼 타협/이탈전략 간 왕복을 계속하여 왔으며, 공산당과 인민당 등 급진적 좌파 정당들은 여전히 생활세계에서 분출되고 있는 잠재적 저항력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사회복지국가를 배태한 노동계급의 '탈급진화'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체계에 의한 정치화'에 근접하기는 하지만, 사회복지국가의 맥락에서도 노동계급은 나름대로 계급의식의 독자적 전수기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하버마스는 과소평가하고 있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에 새롭게 형성되는 전선들도 암암리에 자본-노동의 모순에 연루되어 있음을 간과한다. 이것은 원심력적 이론화에 수반되는 일종의 '의도적 오류'에 속하는데, 이는 하버마스 이론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폄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유럽 이외의 국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된다. 체계에 의한 노동계급 포섭이 강제된 대부분의 권위주의국가에서 노동운동은 이른바 공식노조에 대한 민주노조주의(democratic unionism)의 강력한 도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남미와 한국의 민주노조주의는, 그 기원과 성격이 다르지만, 전자는 체계로부터 이탈한 노조가 생활세계의 활성화를 통하여 체계의 조정매체(권력)의 원리변혁을 꾀하는 경우이며, 후자는 체제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돌파하여 임금노동자들이 독자적 공론장을 형성해간 사례에 해당된다. 성장업적을 체계통합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설정하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국가에서 정당성 위기는 여전히 자본/노동의 전선에서 발생하며 이는 정당성의 과다가 아니라 정당성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그가 의사소통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제시하는 실천전략으로서의 토론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법치국가론에서 상정하는 노동계급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권력개념으로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가 상정하는 정치질서와 급진적 민주주의의 기획을 동시에 비판하는데, 앞에서 지적한 '모순소재'의 분산과 이해갈등의 방향성 분산이라는 의사소통행위론의 '열려진' 성격 때문에 체계변혁의 어떤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하버마스의 실천전략이 원래 목표한 것이겠지만, 의사소통 공동체의 창출을 통하여 체계의 침투와 지배를 방어하는 데에 그치는 수세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결국 토론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해내는 몸에 배인 '습속'(folkrore)과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association)가 활성화되고 그로부터 창출되는 '도덕적 실천적 리더쉽'을 중시하는 토크빌적 민주주의론의 현대적 복원 정도에 그친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오페의 지적대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과 노동의 담론논리는 변화되지 않으며 양자의 논리적 격차에 의하여 권력의 불균형이 지속된다고 보면, 방향성과 모순의 소재를 분산시킨 채 발화되는 의사소통합리성은 이러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적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온건한 프로젝트는 언어패러다임을 완성하고자 하는 그의 과도한 의욕이 빚어낸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II. 도덕적 규범의 이론적 復元: 得과 失
'가설'의 이론화
계몽주의 이래 현대사회이론에 이르기까지 미해결의 쟁점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도덕(morality)과 윤리(ethics)의 문제이다. 도덕은 인간행위를 규제하는 내면적 가치의 복합체인데, 외적 강제력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자율성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말하자면, 인간을 여타의 생물체와 구별하여 존엄성을 확증해주는 가치인 것이다. 도덕적 규범은 인간이 사회적 공간과 영역에서 다른 성원들과 부단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권력, 신화, 거짓, 기만, 지식, 요설 등에 근거한 타자의 개입에 독립적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생성되지만 이성적 작용에 의하여 질서를 부여받아 다시 이성의 요소로 농축되는 가치의 내면적 복합체이다. 계몽주의는 도덕적 규범이 이성(reason)의 중요한 요소이며 상황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율적 판단과 행위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즉,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주체성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성은 개인적 욕망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봉사하려는 도덕적 의무와 규범을 내포한다는 이중적 성격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자들은 자연법적 질서를 주체적 삶을 향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다른 성원들의 이익과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도덕적 규범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규제되는 상태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바로 이 <도덕적 인간> 개념은 초기 시민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자유와 합리성을 주창하였던 모든 계몽주의적 사상가들의 공통적 관심사였는데, 이 개념이 근현대 사상을 일관하여 하나의 계율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덕적 인간>과 <도덕성>의 개념이 사회이론화의 과정에서 이론의 구성요소로 편입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도덕적 규범은 대부분의 사회이론에서 이론성립을 위한 불변의 신념 내지 가설(假說)의 형태로 편입되었을 뿐, <도덕적 인간>을 이론화하는 개념적 도구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 대신, '사회계약'을 통하여 창출된 인위적 제도 -국가나 정부- 에 의하여 도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전제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버마스가 주목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인간은 도덕적 심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의 전제인 도덕적 인간은 현실사회에서 흔히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오히려 사리와 탐욕에 의하여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비도덕적 인간으로 행위하게 되는 것이 경험세계의 현실적 모습이다. 계몽주의자들은 민주정부(룻소)와 국가(홉스)라는 초개인적 실체를 도입하여 이 논리적 난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인위적 제도가 다시 인간을 억압할 가능성이 돌출하자마자 억압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룻소가 도덕교육(moral education)을 강조하고 로크가 저항권(right to resist)을 설정하고, 홉스가 공공선(commonwealth)의 증진을 위한 국가의 절대성을 설정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의 개별적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것을 억압하는 인위적 제도를 도입하여야할 불가피성은 근대사상이 줄곧 고통받아 왔던 딜레마이다.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근대사회 이후의 인류역사는 합의기반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창출된 제도가 다시 그것의 억압기제로 귀결되는 모순의 연속적 과정으로 파악된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존시키기 위한 제도가 다시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새롭게 합의된 제도로 대치되어야하는 순환적 모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계몽의 약속"은 바로 이러한 논리적 비약의 산물인 인위적 제도의 도입에 의하여 物化되었으며, 이성의 중요한 한 측면 -일반의사를 존중하는 도덕적 규범-이 분리, 사장되었다는 것이다. 이성의 도덕적 성격은 합의와 동의를 창출하는 자율적 추동력이며 룻소가 도덕교육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실현해주는 잠재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 내재한다. 계몽주의자들도 이러한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도덕적 심성을 활성화해주는 인간행위를 내재적으로 (from inside) 구체화하지 않은 채 외재적으로 (from outside) 담보하려 했기에 이성으로부터 도덕적 규범을 분리하여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계몽의 기획이란 문화의 수준에서만 발현되어온 이성의 잠재력을 사회적인 행위영역에서 발현시키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의 잠재력을 실어내는 미시적 도구로서의 행위가 바로 의사소통행위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문화, 과학기술화되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이성의 한 측면, 즉 인지적-도구적 측면이 이성의 전체로서 발현된 결과 이성의 심미적, 실천적 측면이 매몰되는 경향을 날카롭게 설파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의 잠재력이 표출되는 유일한 영역을 심미적, 예술적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또는 이성의 자기 모순 속에서 계몽의 치유법을 찾아내고자 함으로써 오히려 계몽적 이성의 자기 모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계몽의 왜곡을 산출하였다. 하버마스는 근대의 기획을 [미완의 혁명]으로 잘못 인도한 이러한 오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자 한다. 이런 이미에서 하버마스이론은 '계몽의 계몽', 계몽의 기획을 다시 계몽하고 재구성하는 시도로 평가된다. 현대의 과학문명과 결합된 도구적 이성만을 이성의 전체로 보는 패배주의적 이성 개념을 수정하여 회의주의와 비관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는 이성 개념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의 도덕적 측면을 이론의 중심 요소로 재편하여 그것을 담보하려는 외재적 시각으로 초래된 이성의 결박상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버마스의 '해방의 기획'은 근대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분리되어온 도덕적 규범을 이성의 본래적 요소로 귀환시키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버마스가 초기에 계몽과 해방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자율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방'은 하나의 매우 특수한 자기 경험의 하나인데 왜냐하면 그 안에서 자기이해의 과정은 자율성의 획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윤리적' 통찰과 '도덕적' 통찰이 결합된다. ...우리가 '도덕적인' 문제들에서 도대체 무엇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지를 알고자 한다면 바로 해방적 의식화 안에서 도덕적 통찰과 하나의 새로운 윤리적 자기이해가 결합된다.
생산패러다임의 쇠퇴: 노동과 가치의 분리
하버마스가 노동/상호작용, 도구적 행위/의사소통행위를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이다.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독자적인 행로가 출발한다. 하버마스는 인간 이성의 심연에서 샘솟는 실천적, 혁명적 계기들을 모두 '노동'으로 환원하는 포괄적 해석을 부정하고 상호이해적 상태에 도달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의 측면을 분리해냄으로서 생산패러다임(production paradigm)의 환원론적.결정론적 시각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회적 노동의 안과 밖에 작동하는 사회통합의 계기들을 시야에서 놓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은 상호작용의 한 유형으로 격하되었다.
하버마스는 국가에 의한 과학과 기술의 지배가 맑스가 지향하는 노동의 비판성을 더 이상 발화시키지 않는 현대의 조직원리로 등장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노동(work)과 상호작용(Interaction)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은 '목적합리적 행위', 도구적 행위, 합리적 선택 행위, 또는 이들의 결합양태로 정의된다. 도구적 행위란 경험적 지식에 토대를 둔 기술적 규칙에 의해 관할된다. 이러한 행위는 목적에 비추어 옳다/옳지 않다, 혹은 적당하다/적당치 않다는 판단이 적용되는 만큼 전략적이다. 이에 반하여 상호작용은 적어도 두 사람이 참여하는 이해와 공인의 과정으로서 상호 기대를 규정하는 동의적 규범(consensual norms)으로 관할되는 의사소통적 행위 내지 상징적 상호작용이다. "기술적 규칙과 전략의 타당성은 경험적 사실성과 분석적 진리에 근거하는 반면, 사회적 규범의 타당성은 행위의도의 상호이해적 간주관성에만 근거하며 의무의 일반화된 상호인식에 의하여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맑스의 생산패러다임은 물질적 재생산을 담당한 노동과 상징적 재생산을 수행하는 상호작용을 혼효한 것이 된다. 맑스의 이러한 혼동은 생산력의 요소로서 기술과 지식의 진화와 이와는 다른 규칙을 따라 진화되어온 도덕적, 실천적 의식의 발전양상을 하나의 법칙으로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세계에 속하는 '행위'와 자본주의적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가치이론의 공간속으로 혼합시켜버린 맑스의 노동중심적 패러다임은 후기자본주의사회를 분석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맑스는 처음부터 상호작용과 노동의 연관을 분명히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라는 특정화되지 못한 항목 아래 하나를 다른 하나로, 즉,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였다". 무엇보다도, 맑스의 생산패러다임이 브르주아법치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발전하면서 자연법의 토대를 해체하고 자연법의 본래의 기획을 영원한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맑스에 의하여 "자연법에 잠재하여 있던 본질적 혁명의 고리는 풀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강조는 필자). '본질적 혁명'이란 노동계급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모순을 전복시키는 의도적 기획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포함한 시민사회에서 밑으로부터의 규범적 동의와 합의과정을 통하여 자본주의와 국가의 모순을 감싸안아 스스로 용해시키는 형태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생산패러다임'으로부터 '언어패러다임', 또는 '의사소통패러다임'으로의 전회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 게재한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라는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생산적 활동으로부터 의사소통적 행위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그리고 이를 통해 -철학적 노동개념에 관한 마르쿠제의 논고 이래로 항상 맑스의 실천개념과 합성되었던- 생활세계 개념을 의사소통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해질 때, 두 계열의 전통 [반성철학과 실천철학]들은 비로소 다시 결합한다. 다시 말해, 의사소통행위론은 실천과 합리성의 내면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적 실천에 전제되고 있는 합리성의 조건들을 연구하고,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규범적 내용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 속에 수용한다.
언어패러다임으로의 전회는 노동 개념에 포괄되어 객관성으로만 존재하는 '전체성'(루카치), 이성의 다양한 계기를 전횡적으로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프랑크푸르트 학파), 이성의 결박상태를 초래한 '합리성의 패러독스'(베버)로부터 도덕적, 실천적 의식이 성장할 출구를 마련하여 주었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적 행위란 화자와 청자 간에 이해가능성,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 등에 대한 타당성 요구(Geltungsanspruche)를 제기하고 서로 인정하게 되는 상호이해적 과정(Verstandigu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호이해는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당사자들간에 합의와 동의가 전제된다. 이를 위해서는 참되다/거짓이다, 옳바르다/그릇되다, 진실되다/허위이다라는 세 가지 타당성 요구를 비판적으로 점검하여 협업적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 "협업적으로 도달된 합의와 동의"는 사회의 공동이익, 즉 일반의사에 공헌하는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며, 자연법 사상이 지향하였던 계몽의 본래적 기획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사회계약론의 행위론적 근거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맑스의 생산패러다임은 비판적 잠재력을 도구적 전략적 행위인 노동으로 부당하게 환원한 것이 된다.
이성의 도덕적 잠재력을 복원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이 보이는 언어패러다임적 전회는, 그러나, 도덕성을 향한 계몽주의의 기획을 살리는 대신(得), 다른 중요한 측면, 즉 노동과 그것에 바탕을 둔 사유재산을 시민적 자유의 원천으로 상정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노동 개념과 가치창조의 행위로서의 맑스의 노동개념을 과도하게 축소하여 버렸다(失)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로크의 [정부론]과 룻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보여지듯이, 노동 개념은 시민적 자유의 전제이며 사유재산의 원천으로 설정되었다. 노동은 시민적 자유의 본질적 측면을 구성하는 핵심 가치이자 자기보존(self presevation)을 지향하는 행위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이 노동의 결과로서 사유재산(property)을 물질적 재산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개인의 권리 일체를 포괄하는 추상적 포괄적 개념으로 상정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로크의 주장대로, "재산이란 물질적 소유나 생활필수품 내지 편이성 등의 협의를 넘어서서 '생존(Lives), 자유(Liberties), 토지를 포함한 물적 소유(Estates)' 일체를 포함한다" (복수적 용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노동은 바로 이러한 추상적 권리의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화폐(money)는 노동의 결과물로서의 '추상적 권리' 일체의 유통과 분배를 담당한다.
그러므로,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의사소통행위가 계몽주의자들이 겨냥한 이러한 권리 일체를 담보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하버마스는 노동을 화폐와의 교환대상으로, 이외의 권리를 의사소통행위의 장으로 소속시킴으로써 권리실현을 위한 개념적 도구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분리의 과정에서 노동의 유기체적 가치복합체의 의미는 소실되었다. 룻소식으로 표현하면, 작은 경제(가족)와 큰 경제(정부)를 묶어주는 정치라는 유기체의 도덕적 미덕(moral virtue)의 생산소재가 단지 의사소통행위로 전가됨으로써 노동에 부여된 정치체(The body politic, 하버마스 용어로는 국가와 행정체계)와의 긴장의 고리가 소실되었다.
맑스의 입장에서도 동일한 비판이 제기된다. 맑스의 경우 노동은 자기실현의 유일한 삶의 양식이며 가치창조의 행위이다. 헤겔의 관념론적 노동개념을 사회과학적 평면에서 가치의 법칙으로 전화한 것이 맑스의 공헌이라 한다면, 하버마스는 노동으로부터 비판의식과 실천의식의 추동력으로서의 가치론적 요소와 자아실현의 본질적 의미를 떼내 노동을 도구적.수단적 합리성의 공간으로 국한시켜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계몽의 기획'의 출발점인 노동개념은 하버마스의 '계몽의 계몽'에서 모순의 소재 및 실천적 의식의 생산창구로서의 위상을 상실하였다. 다시 말해, 맑스의 노동 개념에서 잉여가치가 갖는 분석적, 비판적 의미는 의사소통행위의 영역에서 담론이라는 중립적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사실, 노동에 실려진 철학적, 실천적 부담을 경감하려는 것은 하버마스의 기획에 이미 예견된 것일 터이다.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국가개입의 조정 수단에 의하여 노동이 그러한 의미를 점차 잃고 있음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버마스가 만들어낸 독자적 개념인 의사소통행위라는 창구가 노동에 실려진 '계몽의 기획'을 온전히 실현시키기에 적합한 것인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여전히 의문이다.
첫째, 맑스의 노동개념은 국민경제학의 물화된 가치개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에 단지 목적합리적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맑스의 노동개념은 임금교환의 수단과 함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인간학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노동을 통하여 맺게 되는 사회적 생산관계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이미 포괄하고 있는 셈이며, 맑스는 임노동의 법칙을 기반으로 사회구성체의 구조분석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반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가 만들어낼 도덕적 합의와 동의로 연대한 의사소통공동체라는 이상적 상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언어패러다임의 전제는 외적 강제와 권위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적 담화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의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담화상황은 대단히 복잡한 요인들에 의하여 굴절, 왜곡되는 것이 보통이다. 교육, 언술능력, 경험, 교양, 이해관심의 차이에 따라 담화 참여자간에 도달한 합의는 심각한 오류와 왜곡의 형태로 귀결될 소지가 많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데마고그(demagogue)와 이데올로그(ideologue)는 자신이 뜻한 대로, 혹은 카리스마적 정치인으로부터 지시받은 대로 담론의 흐름을 주도해가는 담론연금술사였다. 하버마스는 반복되는 타당성 요구의 논증절차에 의하여 데마고그의 허위는 끝내 밝혀지리라는 것을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 행위론은 만하임의 상대주의를 이미 극복하면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만하임이 허위의식으로 지칭한 모든 형태의 계급의식이 계급상황과 경험에 결부되어 이해관심의 충돌로 나타난다면, 과연 하버마스의 기대대로, 타당성 요구를 통한 반복되는 상호이해과정은 이러한 충돌의 개연성을 어느 정도 경감시킬 것인가?
세째, 이상적 담론상황을 통하여 도달되는 합의의 '방향성' 문제이다. 의사소통적으로 도달된 합의는 일단 도덕적 규범을 갖추고 있다는 이론적 전제를 달고 있기에 그것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답변이 잘 내려지지 않는 두 개의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는, 담화참여자와 관찰자가 사회집단과 계급의 수준으로 확대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는 점이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담론에는 계급의식의 편린이 담겨 있거나 계급나름의 독특한 표현양식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이미 노동사 연구로 밝혀진 바이다. 그러한 담론에서 나타나는 타당성 주장은 결국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에, 자본가와의 논쟁에서 동의가 얻어질 것인가, 얻어진다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학에서 발전된 집합행위론과 합리적 선택이론은 행위참여자 모두가 공공이익을 향해 행위하는 것(이상적 담화상황)이 왜 불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불법파업과 같은 집합행위란 흔히 왜곡된 의사소통의 결과로 발현되는데, 근현대사를 통틀어 충분한 의견을 나눌 만큼 참여자간 채널과 기회가 주어진, 그리하여,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으로 추동되는 집합행위가 어느 정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가?
의사소통행위론은 노동개념에 짐지워진 중층적 모순을 단선적으로 만들어주는 대신 모순의 소재와 해결 방식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세계를 '노동의 집'으로 만들어버리는 역사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은 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노동의 인식론적 가치론적 해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대신 자본주의적 모순의 고리를 다분절화함으로써 실천개념의 영역이전과 실천전략의 불투명성을 산출한 셈이다. '열린' 인식 공간은 '선택의 다양성'을 선사하지만, 자본주의의 견고함 앞에서 오히려 어정쩡한 프로젝트로 남을 공산이 크다.
III. 생활세계에 작동하는 두 개의 정치
무엇보다도, 자본-노동의 모순이 타당성 요구의 담화상황으로 이전하면서 두 가지의 변질이 발생하였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은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주된 검토의 대상이다. 하나는 '모순' 자체의 변질이며, 다른 하나는 '모순 해결과 발현 방식'의 변화이다. 하버마스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모순의 핵심적 기제인 잉여가치의 착취기반은 과학과 기술의 조작을 통하여 생산력발전을 도모하는 개입국가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와해되었으며, 더욱이 개입국가는 잉여가치의 교환관계를 재정치화하여 모순의 발현을 제어하고 변형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본/노동의 모순은 더 이상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핵심적이 아닌 것으로 화하였다. 또한 복지국가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식을 제도적으로 순치하여 자본주의적 모순이 노사대립의 형태를 띠는 것을 변질시켰다. 전자는 모순의 소재의 변화이며, 후자는 모순의 발현방식에 해당한다. 이리하여 노동은 모순의 핵심적 소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노동계급은 복지국가의 혁신 앞에서 제도적으로 순치되었다.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위기를 생산하거나 변혁을 도모하는 주체가 아니다. 후기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 위기는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과 체계통합(system integration)의 불균형에서 오는 위기이다.
정당성의 위기(legitimation crisis)란 체계의 조직원리가 생활세계에서 분출되는 자발적 도덕적 요구들을 저해하여 사회 통합과 체계통합 간에 심각한 괴리를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괴리는 대기업군의 탄생과 국가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의 조직화된 자본주의에서 더욱 첨예화된다. 대자본의 생존을 위하여는 시장조작이 필요하고 이는 다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장교환이 교란된 상황에서 대자본은 노동의 가격을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조정양식을 필요로 한다. 시장임금을 대치한 임금의 정치적 가격(political price)은 곧 독점부문에서의 노자갈등을 외화하는 창구이다. 국가는 다른 한편으로 빈곤문제의 해결과 공공복지의 확대라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사회성원으로부터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는 시장조작과 가격설정을 통하여 대자본을 노자갈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적 서비스의 확대를 꾀하여야 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에 의하여 계급정체성과 계급의식의 분절이 초래되었으며, 급기야는 사회복지국가의 역할에 의하여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이 체계로 포섭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를 정점으로하는 정치체계는 중첩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계급구조는 정치적 논쟁에 의하여 변형되고, 경제체계는 자율규제적 시장기능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 속에서 생산관계의 전치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체계의 조정매체들은 생활세계로부터 분출되는 새로운 형태의 정당성 요구들을 수행할 능력이 제한된다. 정당성의 위기는 체계가 생활세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어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 중 오늘날 가장 첨예한 정당성 문제는 테크노크라시와 참여정치 간의 대립에 놓여 있다.
조직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이러한 관찰은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life world)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생활세계란 자발적인 의사소통행위의 그물망으로 짜여진, 자신의 경험과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일상의 참여자들과 타당성 요구의 검증과 포기를 공동적으로 반복해서 도덕적 합의에 이르게 되는 "확신의 보관소"이다. 따라서 생활세계는 하버마스에게는 계몽주의자들이 상정하였던 자연법적 질서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체계 요구의 선택적 압력 속에서 경제적 행정적 조절기제를 앞세운 개입국가의 확장이 생활세계에 깊숙히 침투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 개념은 베버의 '관료제화', 토크빌의 '행정적 중앙집중화에 의한 자유의 침해'라는 합리성의 패러독스를 체계-생활세계의 분화현상에 거꾸로 적용시키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즉, 베버와 토크빌은 합리성의 산물이 다시 행위의 자율적 토대를 침해하는 조직원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여 실천의지가 작용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음에 비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의 소재지이면서 도덕적 규범을 창출하는 수원지로서의 생활세계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복원하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위한 중요한 영역인 "문화적 공론영역과 정치적 공론영역은 국가라는 하위체계의 관점에서는 '정당성 산출'과 직결된 환경"이기 때문이다.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노동의 갈등은 이미 체계에 포섭되어 있다. 노동조합과 정당은 정치체계와 행정체계의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계급의 사회적 정체성은 붕괴되었고, 계급의식은 분절되었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을 더 이상 표출하지 않는다. 자본축적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복지국가의 크고 작은 모순들은 화폐와 권력이라는 조정매체를 통하여 해소된다. 하버마스가 체계분화의 수준을 향상시킬 전제로서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추동할 새로운 힘을 학생운동, 여성운동, 핵반대운동, 환경운동 등의 이른바 신사회운동에서 찾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하버마스는 이론화 초기과정인 1960년대에 '생활세계의 재정치화'를 추진하는 공론장의 주요 행위자로서 노동조합과 같은 공익결사체와 정당에 기대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68년의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버리고 '공론장의 탈정치화'의 주도세력인 테크노크라트적 지배와 대중매체의 선동에 저항하는 기획들을 보다 중시하게끔 되었다. 저항기획은 사회복지국가에 의하여 매몰된 노동부문에서가 아니라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가장 첨예하게 겪고 있는 부문에서 분출된다. 말하자면, 자본과 노동의 갈등은 점차 주변화되고, 체계의 침투에 저항하여 생활세계의 합리성을 확대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전선이 체계와 생활세계간에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일관성은 미완의 기획을 완성하려는 의도에 충실한 결과이지만, 이글의 중심 소재인 '노동'의 근현대사적 전개과정을 돌아보면, 역사적 경험적 사실들을 과도 단순화시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복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행위양상을 단편적으로 동원하더라도 하버마스의 의도적 오류는 금새 확인된다. 금세기 유럽의 노동운동사가 포섭과 체계내화의 장기적 과정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저항과 이탈의 흔적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즉, 포섭과 저항, 국가의 노동정치와 노동계급의 정치가 서로 맛물리고 갈라지는 오랜 여정이었다. 그것은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벌써 끝장난 것은 결코 아니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형태와 양식을 달리하며 발현되는 본질적 모순의 자원인 것이다.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주요 모순의 소재와 모순의 표출방식에 대한 하버마스의 진단은 유럽정치의 최근 변화를 집약하는 '후기물질주의' 명제와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정향에 본질적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연구 등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의사소통합리성에 과도하게 기대를 거는 오류가 발견된다. 유럽 정당들의 주요 쟁점이 노동으로부터 후기물질주의적 가치관으로 이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노동분화를 중심축으로 하는 것이어서 근본적 변화는 아니다. 정당의 기반은 여전히 계급이며, 계급의 기반은 노동분화이다. 더욱이, 금세기 유럽 노동운동사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찰은 사실상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의 전통에 편중되어 타협을 넘어서려는 노동계급의 시도와 그 속에서 배태되는 계급의식의 재생산을 향한 저항적 시도들을 간과한다.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계급적 정체성을 재생산하는 독특한 기제들이 존재하여 왔다. 영국의 문화론적 연구에 의하면, 계층이동의 개방성이 확보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노동계급의 자녀들은 계급적 정체성을 보강하는 상호작용의 행위양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미시적 수준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문화적 재생산 기제들은 하버마스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부정하는 근거로 설정한 '포섭된 거대구조'와 간극을 만들어 놓는다. 말하자면, 하버마스는 이론의 완결을 위하여 역사적, 경험적 사실들을 과도 단순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유럽의 노동운동사는 탈급진화(deradicalization), 달리 표현하면, 체제내화의 역사이다. 체제내화는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계급타협'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계급타협이란 위계질서적인 노사정 정상조직간의 협약이다. 이 협약이 도덕적 실천적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하버마스의 기대대로 조합원들과의 꾸준한 상호행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상조직의 협약이 현장 노동자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이른바 과두정치적 경향이 짙어지면서 목적-수단의 전치현상을 낳아 작업장 수준에서 이에 저항하는 조합원의 이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1968년 영국에서 발생한 shop steward 운동은 그 전형적 예일 것이다. 풍요로운 사회의 도래 속에서 노동계급의 브르주아화가 지배적인 견해로 확산되고 있었던 1960년대말과 70년대 초 전유럽은 또 한 차례 노동계급과의 전면전을 경험해야 했다. "노동계급의 재봉기"로 표현되는 70년대 초 유럽의 노동상황은 '풍요한 사회의 노동자'라는 명제를 부정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노동포섭의 정치는 항상 저항의지와 저항분파를 다른 쪽에 생산한다. '포섭정치'(노동정치)와 '저항의 정치'(노동계급의 정치)라는 두 개의 정치는 생활세계에 작용하는 대립적 힘이며 정도가 다를 뿐 유럽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날 공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의도적으로 간과된다.
탈급진화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포섭에 공헌하였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더라도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급진적 분파의 이탈을 재촉하기도 한다. 금세기 노동운동사에서 이것을 입증할 사례는 풍부하다. 프랑스의 노동계급은 국가와의 정치적 타협을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저버리는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강하여 전국연맹인 CGT는 아직 느슨한 우산조직의 형태로 남아 있다. 프랑스의 노동계급 중에는 아직 체계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생활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무정부주의적 혁명적 신디칼리즘에 경도된 노동조합이 건재한다. 체계에 대한 저항기획을 여전히 분출하고 있는 프랑스의 노동계급은 하버마스 진단의 적합성을 훼손한다. 사회복지국가가 가장 발전된 북구의 경우 노동계급은 계급적 정체성의 쇠퇴라는 하버마스의 진단과는 달리 세계에서 가장 높고 안정적인 계급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사민당의 정책실패와 함께 육체노동자의 체계이탈이 가속화되고 이탈자의 대부분이 사회복지국가의 전면적 재설계를 주장하는 공산당의 지지세력으로 화하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하자면, 신사회운동이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주요한 운동세력이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견해인데, 노동계급 역시 체계-생활세계의 전선에서 체계의 조정능력의 한계를 공격하는 중요한 계기들을 산출하여 왔을 뿐 아니라 생활세계 내부에서도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저항기획을 만들어내고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 전역에서 무정형적, 분산적, 무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신사회운동보다는 조직을 갖추고 집중도가 높은 급진적 노동분파들의 저항운동이 '공론장의 재정치화'에 훨씬 효과적인 충격을 가하고 있음도 주목을 요한다. 일상 노동자들과의 진실한 담화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때문에 사민당을 위시한 좌파정당들이 위계질서적 정당 구조로부터 지역적 자율성을 부여한 수평적 구조로 일대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지적하자면, 생활세계에는 체계에 의하여 포섭된 노동정치와, 소수이지만 이것으로부터 이탈한 저항적 급진분파의 정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생활세계에 존재하는 노동정치와 노동계급의 정치라는 두 개의 대립적 정치는 '공론장의 분열'과 동시에 '공론장의 재정치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근현대 노동사에서 '노동정치에 의한 포섭'이라는 일면적 특성이 과도 강조되었듯이,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사회복지국가의 위상 또한 과대평가되어 있다. 사회복지국가는 육체노동자의 기본욕구(basic needs)를 충족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체계포섭에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두 가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하나는, 풍요 속에서 자라나는 '상대적 박탈감'의 확산이며, 다른 하나는 독점부문과 경쟁부문 간에 존재하는 이중 구조의 확대이다. 전자와 후자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독점부문과 경쟁부문 노동자의 포섭정도와 계급의식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여러가지 연구에 의하여 이미 판명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복지국가의 기획에 반발하는 불만이 주로 혜택을 많이 받는 독점부문의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불만은 복지국가가 노동시장에서의 우월한 경쟁력과 성장공헌도에 비하여 쓸데없는 양보를 강요한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이 노동계급 내부의 균열이라고 할지라도 하버마스가 중요성을 부인한 분배문제라는 노자모순의 전통적 쟁점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경제민주주의'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형태의 경제민주주의이든 분배문제가 대립전선의 핵심적 쟁점으로 남아 있을 자본주의사회에서 여성해방, 환경, 핵, 성, 평화문제 등, 신사회운동의 새로운 이슈들은 여전히 이것과 연관되어 나타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실지로,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새로운 이슈를 수용하려고 정강과 전략을 변화시켜 왔는데, 여전히 분배문제가 차지하는 핵심적 위상은 변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이 하버마스가 지적하는 체계의 조정능력의 한계를 입증하는 증거일른지도 모르지만).
복지국가의 체계효율성이 물질적 확대재생산을 전제로 한다면, 노동계급의 변질에 대한 하버마스의 진단은 경기침체에 특히 취약하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의 물질적 기반이 심하게 침식되면 소외된 급진 분파의 계급갈등은 증폭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계급갈등이 체계-생활세계간 일차적 갈등으로 복귀할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하버마스 자신도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지만, 노동계급의 위상을 폄하하는 하버마스의 진단은 아무래도 복지국가에 대한 과대평가와 의사소통행위론의 기획을 완결하려는 이론적 의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론장의 재정치화 가능성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은 특히 권위주의적 억압정책으로 일관하여온 한국의 상황에서 적실성을 갖는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일부분파를 제외하고는 체계외부에서 사적 공중으로 성장하기를 철저히 강요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공론장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 것은 겨우 1970년대 말의 일이다. 1987년의 노사대분규는 '사적 공중'에서 '시민적 공중'으로 변한 노동계급이 공론장의 재정치화를 시도한 대표적 예일 것이다. 한국의 노동정치는 '분리와 차단'을 특징으로 한다. 분리란 '노동문제의 공론화'를 억제해온 측면을 지시하며, 차단이란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저지해온 측면을 의미한다. 반노동주의와 성장우선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국가는 노동계급의 탈정치화와 탈동원화를 노동정치의 기조로 추진하였다. 이를 하버마스의 용어로 표현하면, 억압적 행정력(권력)을 동원하여 노동계급의 정치화를 제어하였으며, 시장교환적 경제체계(화폐)의 강화를 통하여 노동력의 매매과정을 관리함으로써 노동자가 사적 영역에만 머물도록 억제하였다. 이것이 시장기제적 통제(control by market mechanism)의 핵심원리이다. 이러한 유형의 통제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하여 '사적 공중'으로 분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체계의 억압적 강권력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을 단지 임금을 소비하는 '수동적 공중'으로 만들고자 한다. 즉, 분리와 차단은 노동자들이 자율적 담론을 행하는 '문화생산공중'으로 변화해서 공론장의 정치화를 주도할 가능성을 막고, 궁국적으로는 사적 영역에서 임금소비에만 자족하는 소비공중으로 남도록 제어하는 정책기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조정매체의 능력이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또는 체계의 정당성 위기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사적 영역에 머물도록 억제되어온 노동자들은 공론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계기는 유럽에서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특히 성장지향적 권위주의국가일수록 자주 발생한다. 성장혜택의 분배문제를 둘러싼 불만고조, 정부와 어용노조(공식노조)간의 배타적 협약에 대한 저항, 독점부문과 경쟁부문간의 이중 구조, 노동소외와 노동의 비인간화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기들이 잠복해 있다. 이 문제들은 모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간의 모순이라는 거대 명제의 하위 쟁점들인데, 정도의 차이는 논외로 하고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적 노동정치가 행해져온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발전도상국가 및 후진국-전세계국가의 80%인 140여개국이 여기에 해당한다-에서 생활세계와 체계의 투쟁전선은 이러한 쟁점들로 가득차 있는 셈이다. 투쟁전선이 도처에 형성되어온 한국의 경우는 '정당성의 과다'로 인한 위기라기보다는 '정당성의 결핍'으로 인한 위기이며, 복지국가의 '과도한 성장'의 위기가 아니라 '과도한 낙후'의 위기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노사분규란 언제나 사적 영역에 억제되어 있는 노동문제를 공론장의 영역으로 활성화시키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갈등이며, 지배권력과의 의사소통의 기회를 쟁취하고자 하는 집단적 요구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회의 차단은, 역으로, 노동계급 내부의 의사소통행위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비공식집단과 재야저항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사소통행위는 정치권력의 균열구조가 노동계급 내부에 재생산되는 것을 저지하고 노동계급의 연대력을 강화해주는,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자면, 도덕적 규범과 담화윤리를 정착시키는 추동력이었다. 한국의 노동구조는 생활세계에 작동하는 두 개의 대립적 정치-국가의 억압적 노동정치와 노동계급의 저항기획-의 산물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시민사회의 질적 성장과 함께 '시민적 공중'으로 변신한 노동계급이 생활세계의 재정치화를 통하여 정당성 결핍에 직면한 체계의 조직원리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궤적으로 파악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 주목할 점은, 노동운동이 일시적으로 잠재된 듯이 보이는 민주주의 이행의 시기에 노동운동이 민주화의 공간을 뚫고 활성화되는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세력들과 연대기반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성장이 뒷받침된 민주화과정에서 노동운동은 대중적 설득력과 호소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노동세력은 시민사회운동과의 긴밀한 유대를 확산하면서 생활세계의 합리성을 증진하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 가는 중이다. 생활세계에 작용하는 두 개의 정치, 노동계급의 자발적 정치와 분리와 차단을 지속하려는 체계의 통제정치가 부딪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노동패러다임의 쇠퇴라는 하버마스의 진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의사소통합리성의 증진을 통한 '생활세계의 정치화'라는 실천적 기획에는 대단히 적합한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IV. '제일 방정식으로의 회귀?':정치적 프로젝트와 노동
모순의 소재변화와 의사소통합리성의 열린 성격은 하버마스가 이론의 도달점으로 제시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에 개방성을 부여한다. 맑스적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를 주장하고 현대사회의 지배적 모순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규정하였던 하버마스에게는 의사소통 행위를 바탕으로하는 도덕적 규범과 윤리성이 일상생활의 제도와 거시구조적 권력기구 및 국가를 관할하는 상태 이외에 일체의 목적론적, 결정론적 변혁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기모순으로 비쳐질 뿐이다. 이런 까닭에 하버마스는 노동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론이나 시민사회적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제시한 라클라우.무페류의 급진론적 민주주의 모두로부터 비켜서 있다. 대신 의사소통합리성 개념에서 도출되는 유토피아적 전망, 즉 외적 강제와 강압적 권력의 개입이 없는 상호주관성의 구조를 바탕으로 개인들간의 상호이해가 증진되는 조건들이 성숙된 사회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의사소통행위론의 가설적 전제로 설정되었던 '이상적 담화상황'(ideal speech ssituation)이 실현되는 사회이자, 의사소통적 해방론의 핵심이다. 맑시즘과 같은 목적론적 사고에서 보듯이,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는 신념이야말로 이십세기 사회사상의 특징이라 한다면, 사회주의권의 전면적 붕괴 이후 하버마스가 이렇게 열려진 프로젝트를 지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런지 모른다. 1989년 "인민의 가을"을 계기로 동구사회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이 적극 환영받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의사소통적 해방론은 도덕적 규범과 보편성이 확보되는 상황과 조건을 다루는 '담화윤리학'과 의사소통적 권력을 행정적 권력으로 전환시키는 여과기제로서의 '법이론'으로 보완된다. 담화윤리는 어떤 실질적인 기준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고 보편성과 공동선에 이르는 담화의 절차적 실천적 과정원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 담화상황을 현실세계에 실현시키려는 의지를 집약한다. 생활세계의 윤리성을 담보하는 원리가 담화윤리에 해당한다면, 법이론은 타당성과 사실성, 생활세계와 체계의 사회적 매개범주로서의 법을 문제시한다. 현대사회에서 자주 발견되는 실정법화 경향은 법의 형식합리성만이 강화되는 탈규범화를 의미하기에 체계와 생활세계를 접합해주기 보다는 양자간 분리를 가속화한다. 사회적 통합의 앙양을 도덕과 법의 관점에서 조명하였던 뒤르껭의 기획은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정치관으로 수용된다. 그리하여, 법은 담화윤리에 기초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기능적 측면과 의사소통행위로 새롭게 창출된 도덕적 합의(의사소통적 권력)를 체계에 정착시키는 규범적 측면의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된다. 하버마스는 담화윤리와 법적 기제로 보증된 이상적 담화상황의 공동체를 의사소통공동체로 명명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버마스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정치질서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정치체를 '담화론적 법치국가'로 정의하고, 그 내부에 작동하는 원리를 토론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로 개념화한다. 토론민주주의는 가역성, 보편성, 상호성이 보증된 담화상황을 전제로한 자율적 공론장과 정치적.행정적 정당성이 보증되는 체계간의 상호침투와 접합을 촉진하는 의사소통적, 합의론적 정치질서를 의미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정치적 프로젝트는 도덕성과 윤리성의 보장을 염원하는 "계몽의 약속"을 완결시킨 기획으로 보인다. 계몽주의자들이 미완의 형태로 남겨두었던 정치 기획의 이론적 체계를 완결시켰다는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제일 방정식으로의 회귀"(back to the square one)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의 보편성'의 측면에서 고려하면, 하버마스의 정치적 프로젝트는 계몽주의자들로부터 헤겔, 토크빌, 밀, 뒤르껭을 거쳐 심정윤리를 강조한 베버, 도덕적 실천적 헤게모니를 중시하는 그람씨의 소망을 포괄한다. 그런데, 룻소의 '도덕적 공동체,' 윤리성을 전제로한 헤겔의 '대의정치,' 우애(fratenity)의 복원을 강조한 뒤르껭의 '정치적 다원주의', 공공 책무와 권리를 강조하는 밀의 '급진적 자유주의' 등의 근대정치사상의 기획들과 공통점을 확보하면서도 하버마스의 관점은 자기규제적, 자기제한적, 수세적 프로젝트라는 차이를 보인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토론민주주의로 창출되는 의사소통 합리성으로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범하는 것을 차단하고 체계로 하여금 위기관리능력을 갖추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와 생활세계의 균형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세적 실천논리는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위시한 목적론적 혁명론과 코헨.아라토와 같이 공세적 전략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급진적 변혁론이 비극적 으로 마감될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론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인지 급진적 체계변혁론으로 빠져드는 성급함을 우회하여 생활세계의 합리성 증대의 결과로 체계가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이라는 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 변화의 양상은 의사소통 행위로 도달된 도덕적 규범의 내용이 열려 있듯이 변혁방향과 도달지점에 대한 어떤 명확한 초상을 거부한다. 생활세계를 의사소통 행위로 창출된 의사소통 권력의 저수지로 보면서 그것이 급기야는 체계로 흘러넘치기를 기다리는 사회진화론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의사소통적으로 창출된 권력은, 포위된 요새를 함락시키듯이 자신의 규범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림하고자 하는 아무런 의도없이도 공공 행정이 진행하는 평가과정이나 결정과정의 전제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의사소통적으로 창출된 권력은, 행정권력이 도구적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권력이 법치국가적으로 확립된 이상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그러한 근거들의 저수지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프로젝트의 개방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실천전략의 부재를 뜻하기도 한다. 이 양자는 실천에 따르는 모든 책임은 결국 자신에게 전가된다는 냉혹한 도덕율을 배경에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이다. 이러한 자기책임의 냉혹성은 이미 의사소통 행위론의 본질에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회성원들의 공동 책임이다. 계급갈등과 분배문제와 같은 본질적 모순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일찌감치 치룬 선진자본주의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실천론이 지배와 피지배, 노자갈등, 정치적 강압과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전통적 쟁점을 이론의 핵심줄거리로 끌어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장구한 역사발전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야의 넓음 때문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아직 그런 문제들에 매몰되어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게는 하버마스이론이 현실성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도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정치적 프로젝트에서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전략이 나타날 리 없다. 더군다나 노동계급은 생활세계와 체계간의 전선에서 이미 퇴진한 老兵으로 정리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버마스가 노동계급의 역동성을 과소평가하였다는 앞에서의 논지를 밀고 나가면, 퇴진한 노병에게도 나름대로의 고유한 실천적 책무가 등장한다. 민주적 조합주의에 내재한 억압(coercion)과 노동조합 및 노동정당의 과두지배적 정치질서의 극복이 그것이다. 양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버마스도 사민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데, 지면을 할애하여 충분한 논의를 할 만큼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의 성찰적 노력은 하버마스의 가벼운 텃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민주적 조합주의는 조직을 정치적 교환과 합의의 기본행위자로 설정한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노사정의 정상조직간 협약에 의하여 규율이 창출되고 각 조직의 성원은 이를 지킬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조직을 단위로 하는 상호행위가 성립될 전제조건은 바로 신뢰이다. 그러나, 쉬미터의 지적처럼, 국가간 경쟁이 심화되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거시구조적 명법을 우선시하게 되는 조합주의적 협약행위는 조직성원의 의사에 위배될 위험이 항상 수반되고 협약 내용을 조직성원들에게 강요할 때에는 그 자체 억압으로 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체인 민주적 조합주의는 관행의 반복과정에서 점차 억압기제로 변질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쉬미터가 이익집단을 중심으로한 '사적 이익정부'(private interest government)를 제 4의 모델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그러나, 사적 이익정부는 아무래도 특수이익을 공공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을 갖기에 하버마스의 프로젝트에 훨씬 못미치지만, 노동중심의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버마스의 노동폄하의 정치론을 반박할 수 있는 단서를 내포한다.
동일한 비판이 거대조직화된 노동조합과 노동정당에도 공히 적용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정점으로하는 노동조합과 노동정당은 대중정당적 면모를 갖추게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현장노동자의 의사에 위배되는 폐단을 보였음이 지난 시대의 경험이다. 과두지배의 법칙이 더욱 강하게 관철되는 것이다. 이것을 척결하려는 정당과 조합원들의 최근의 노력은 노동문제를 핵심축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로서 주목을 요한다. 그런데, 부단한 노동분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본질이 어떤 형식으로든 훼손되지 않은 채로 후기자본주의의 공간에 발현되는 것은 하버마스의 노동폄하를 직접적으로 반박해주는 근거인 반면, 그의 '토론민주주의'는 과두지배의 폐단을 해소하고 다시 조직성원과의 부단한 의사교환으로 복귀하여야 한다는 계몽주의시대 이래의 원형적 권고(archetypical recommendation)를 전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토론민주주의는 노병의 도덕적 재무장을 위한 구체적 전략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여진다.
유럽의 정치질서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민주화가 진행되는 한국의 경우에 더욱 절실한데, 두 가지 쟁점-민주화의 양식과 노동운동의 전략-이 특히 중요하다. 한국의 민주화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구체적 경로는 정치엘리트에 의하여 주도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성공적이었지만, 시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한 유력한 권력자에 의하여 대부분의 개혁조치가 진전되었다는 점에서 '위임민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는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민주화를 주도한 소수의 엘리트 내지 권력자 개인에 의하여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 결정되는 체제를 의미한다. 생활세계의 합리성 증대를 통한 재정치화라는 하버마스의 프로젝트로 보자면 대단히 거리가 먼 질서이다. 모든 참여자가 중대사안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누구라도 수긍하는 합의에 도달하게 하는 '토론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하버마스의 권고는 위임민주주의의 폐단을 보이는 한국의 민주화에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의 민주화가 이런 형태로 귀착하게된 이유는 바로 노동운동의 잠재적 쇠퇴 또는 공론장의 재정치화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점에서 기인한다. 앞에서 분석한 '분리와 차단'의 정책기조는 민주화 이행과정에서도 유효한 채로 지속되었기에 노동운동 세력의 저항기획이 체계변혁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한국 민주화 양식의 또 다른 특징인 배제적 민주화(exclusive democratization)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배제적 민주화는 민주화를 주도한 시민운동 세력을 민주적 정치공간으로 집단화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지도자만을 선별하여 정치엘리트로 선발하는 식의 정치행태를 뜻한다. 시민운동은 지도력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활성화 역사가 짧고 운동의 경험부족 때문에 배제적 민주화는 시민운동 단체의 도덕적 실천력을 현격하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노동운동 세력의 약화도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지도력의 상실과 정치질서로의 포섭에 부분적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세력이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운동의 주요 세력들을 결집시키는 중핵으로 역할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같이 시민운동이 초기단계에 있는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공론장의 정치화라는 하버마스의 실천전략에서도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대변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담화론적 법치국가 개념에 스며있는 하버마스의 정치적 프로젝트의 비중은 바로 시민사회의 도덕적 실천력에 놓여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여전히 생활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운동 세력과 지속적인 연대를 확산하여 궁국적으로는 체계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소망적 사고를, 하버마스의 진단에 반하여, 비판적 독해의 결론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하버마스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실천적 기획의 열려진 성격 때문일 것이다. 한국처럼 급진개혁주의적 자기비판의 에너지가 노동운동으로부터 분출되고 있는 국가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오히려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자본주의사회에 부여된 문명사적 책임을 모색하는 논문에서 하버마스가 제시한 답변은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운동에 부여된 책임과도 일맥상통한다.
21세기의 도전은 서구 사회가 도달하게될 유형과 거시적 질서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답은 이해관계를 일반화하는 급진-민주주의적 여론형성과 의지형성의 과정없이는 결코 찾아질 수도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 그렇게 함으로써 법치국가적, 복지국가적 대중민주주의라는 형식 속에서 약점 뿐만 아니라 장점까지도 전개시켜 왔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급진개혁주의적 자기비판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 국가사회주의가 붕괴된 이상, 이러한 급진개혁주의적 비판은 모든 것의 통과해야만 하는 유일한 바늘 구멍인 것이다.
<요약문>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적 독해:
노동과 정치
송 호근 (서울대 사회학)
거대이론의 유용성이 거의 삭아든 듯한 이 시점에서 거대이론화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람이 바로 하버마스이다. 하버마스는 푸코와 함께 현대 사회과학계에서 가장 논의가 많이 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명료하게 보인다. 계몽주의를 동일한 시원(始原)으로 출발하는 두 사람의 사상은 근대적 주체의 상실, 왜곡, 확립과정을 사회질서의 중추인 권력,권력형성, 권력행사의 네트웤 속에서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는 일상적 체험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지식의 동학으로 거시권력의 버팀대를 갉아 쓰러뜨렸음에 비하여,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에 내버려진 도덕적, 규범적 상호이해의 행위들을 복원하여 찌그러진 현대성의 권력기제들의 억압적 성격을 폭로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비판이론의 배타적 특권일 터이지만, 이른바 '정통사회과학'(orthodox social science)의 경계를 두고 보면, 푸코와 하버마스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동일한 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푸코는 정통사회과학의 관심 밖에 존재하였던 비정상적, 비규범적, 타부적 대상에서 배제와 격리와 감금을 체화하는 규율의 본질을 꿰뚫었다면, 하버마스는 규범적, 도덕적, 실천적 가치를 내팽개쳐온 정통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내벽을 헐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전통에 입각해 있으면서 새로운 정통(a new orthodoxy)을 정초하는 데에 성공한 학자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회체계론]과 [행위의 일반이론]에 기초한 파슨즈의 '사회행위론'이 맑스와 베버 이래 나타난 거대이론의 전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은 크고 작은 포스트이즘들의 난립 속에 솟아있는 이 시대의 유일한 거대이론으로 간주하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이 한국의 노동체제 이해와 분석에 어떤 이론적 실천적 함의를 제공하고 있는가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주로 세 가지 논점에 논의를 집중할 것이다.
(1) 도덕적 규범과 윤리성을 복원하려는 하버마스의 이론적 기획에서 '노동'은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가? 그가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를 개진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며 희생시킨 것은 무엇인가를 규명한다. 得과 失의 관점으로 잰다면, 하버마스는 노동-사유재산-권리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적 이해관심과 비판의식의 축을 보편화용론(universal pragmatics)으로 수용함으로써, 노동으로 회귀하는 구심적 사고를 원심력적으로 돌려놓으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得),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 모순의 핵심 소재를 희석시키고 이해갈등의 방향성을 천지사방으로 흐트려 놓았다 (失).
(2)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에서 하버마스는 노동계급의 투쟁 잠재력과 노동운동의 위상을 과소평가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모순의 소재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생산패러다임의 쇠퇴론에서 이미 예견되는 것이지만, 브르주아공론장의 이상화 경향과 생활세계에 대한 체제의 침투로 야기되는 '합리성의 패러독스'를 과도하게 강조한 결과로 보여진다. 하버마스는 유럽 노동운동의 궤적을 '체제내화'의 과정으로만 파악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도 사민주의자들은 '권력에의 길'(road to power)을 둘러싼 타협/이탈전략 간 반복을 계속하여 왔으며, 공산당과 인민당 등 급진적 좌파 정당들은 여전히 생활세계에서 분출되고 있는 잠재적 저항력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사회복지국가를 배태한 노동계급의 '탈급진화'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체계에 의한 정치화'에 근접하기는 하지만, 사회복지국가의 맥락에서도 노동계급은 나름대로 계급의식의 독자적 전수기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하버마스는 과소평가하고 있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에 새롭게 형성되는 전선들도 암암리에 자본-노동의 모순에 연루되어 있음을 간과한다. 이것은 원심력적 이론화에 수반되는 일종의 '의도적 오류'에 속하는데, 이는 하버마스 이론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폄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유럽 이외의 국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된다. 체계에 의한 노동계급 포섭이 강제된 대부분의 권위주의국가에서 노동운동은 이른바 공식노조에 대한 민주노조주의(democratic unionism)의 강력한 도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남미와 한국의 민주노조주의는, 그 기원과 성격이 다르지만, 전자는 체계로부터 이탈한 노조가 생활세계의 활성화를 통하여 체계의 조정매체(권력)의 원리변혁을 꾀하는 경우이며, 후자는 체제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돌파하여 임금노동자들이 독자적 공론장을 형성해간 사례에 해당된다. 성장업적을 체계통합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설정하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국가에서 정당성 위기는 여전히 자본/노동의 전선에서 발생하며 이는 정당성의 과다가 아니라 정당성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그가 의사소통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제시하는 실천전략으로서의 토론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법치국가론에서 상정하는 노동계급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권력개념으로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가 상정하는 정치질서와 급진적 민주주의의 기획을 동시에 비판하는데, 앞에서 지적한 '모순소재'의 분산과 이해갈등의 방향성 분산이라는 의사소통행위론의 '열려진' 성격 때문에 체계변혁의 어떤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하버마스의 실천전략이 원래 목표한 것이겠지만, 의사소통 공동체의 창출을 통하여 체계의 침투와 지배를 방어하는 데에 그치는 수세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결국 토론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해내는 몸에 배인 '습속'(folkrore)과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association)가 활성화되고 그로부터 창출되는 '도덕적 실천적 리더쉽'을 중시하는 토크빌적 민주주의론의 현대적 복원 정도에 그친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오페의 지적대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과 노동의 담론논리는 변화되지 않으며 양자의 논리적 격차에 의하여 권력의 불균형이 지속된다고 보면, 방향성과 모순의 소재를 분산시킨 채 발화되는 의사소통합리성은 이러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적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온건한 프로젝트는 언어패러다임을 완성하고자 하는 그의 과도한 의욕이 빚어낸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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