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그리고 하버마스
- 서구 합리적 사유의 역사철학적 귀결에 대한 분석
이순예(서울대)
1. 왜 아도르노인가?
‘올해도 전진의 해’ 라는 표어아래 전 국토와 온 국민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면서 이른바 근대화를 추진해온 개발독재 시기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한반도 구성원들에게 스스로는 ‘과거’라고 치부하고 싶으나 그래도 여전히 발목을 잡는 온전한 ‘현재’이다. 2천년대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 그리고 부인하기 어려운 매력에 이끌려 디지털과 영상매체의 위력을 추인하는 작업에 열중하였던 한국의 인문학계는 이제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진 듯한 느낌이다. 사실은 매체의 물질적 위력에 맞서면서 인문적 가치를 천착하는 일이 인문학의 본령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문학자가 아니면 누가 사물이 주도관행을 거슬러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이겠는가? 나는 이 글에서 파시즘의 광기를 분석한 아도르노의 사회비판서 ?계몽의 변증법?1)이 지닌 ‘인문학적 가치’에 주목하고자 한다. 경제의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한국에서 새 세기의 새로움이 ‘덕’으로 될지 아니면 ‘화’로 될지 하는, 남들이 안 하는 애꿎은 고민을 인문학자들은 하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치의 파시즘을 독일특수적 현상으로 국한시켜 그 특수성을 분석하는 일로부터도 이제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실 외부침략이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인간관계면에서 보자면 한국처럼 파시즘화된 문화를 지닌 사회도 드물다. 파시즘은 한국인들의 일상이다. 일찍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파시즘의 내부를 파고들었지만, 최근 들어 독일사회가 내부의 희생자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을 꼭 역사적 부채에서 벗어나려는 게르만적 뻔뻔스러움으로 돌리는 것도 그다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이 문제를 설명하는 새로운 틀 중에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테제는 무척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불편한 과거를 지닌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의 테제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설득력을 지닌다면 그것은 한국적 현대의 원형으로 근대화의 불편함을 지목해야한다는 당위 때문이다. 개발독재의 근대화 모델은 한국인의 피와 살로 실현되어 현재를 이루고 있다.
아도르노의 이론구성은 독특하다. 그의 독특함은 서로 이질적인 문제의식을 나름의 ‘부정사유 Negatives Denken’로 묶어내는 미덕에 있다. 고전 독일 철학에서는 칸트와 헤겔을 헤쳐 모이게 하고, 사회 경제적 분석을 통해 인간행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는 데는 마르크시즘을, 개개인의 결단을 미시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심리분석을 활용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적 주체의 고통스러운 행적을 복원해낸다. 고통은 그의 저술들을 관통하는 주도 모티브이다. 이 고통을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 방법론으로서의 부정사유를 요청하는데, 꽤나 까다로운 이 모든 장치들을 설정하는 아도르노의 의도는 명백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오늘을 사느라 잊고 만 존재의 원형을 상기해보도록 하는 일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고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떠나온 곳으로, 문명사회에서 ‘자연’이라 상정하는 어떤 상태로 되돌아 갈 수 는 없음을 인정하도록 도모하기 위함이다.
서구 시민문화를 비판하는 아도르노의 사상은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 전통에 서있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으로 문화담론의 기초를 세운 이래로 독일의 문화계는 예술작품이 전달하는 반성능력에 의지하여, 제도가 필요로 하는 도구화된 이성의 폐해를 보완하면서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획을 추진해왔다. 그후 오랫동안 독일사회는 원자화된 개인 Individuum 과 그들이 모여 이룬 사회 Gesellschaft 사이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였다. 이 조화를 위하여 18세기 이래로 예술작품에 대중이 자신의 합리적 이성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인격을 세련하도록 하는 역할을 위탁해온 것이다. 이러한 문화담론에서 형성된 미술관, 박물관 등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중요하게 들어올려 하버마스는 ?근대성 - 그 미완의 기획?에서 계몽의 철학적 기획을 근대성의 문화적 기획으로 대중화시켰다. 그런데 이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되짚어본 서구 이성의 계몽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면서 비판이론 진영으로 분류되는 이 두 사상가는 그러나 시민문화와 예술이 추구하는 조화에 대해서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아도르노는 이 조화를 매개로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 System 로 절대화시킨 고전관념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사회비판을 그 사회 속에 사는 개개인들의 의식구조로부터 이끌어내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매우 독특한 미덕을 지닌다. 그는 문명화과정 속에서 개인들이 실존적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절망감, 고통 등을 이론의 중심에 둔다. 따라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인문학적 노력이 사회적 전망모색과 직접 연결될 수 있게된다. 그런데 이처럼 인문학적 입지에서 출발하는 소외극복 노력은 제도 속에 살면서 그 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성능력을 촉구하게 된다. 우선 제도의 힘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사고력을 지녀야 하는 데, 아도르노가 당위적 요청으로 제시하는, 부정하는 사유 Negatives Denken 는 추상 수준이 매우 높은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어떻게 꾸려갈 수 있을지가 문제로 남는다. 문학 예술을 통해 대중화할 수 있다는 기획을 아도르노 스스로는 지니고 있으나, 심미적 예술을 선호하는 그의 미학이론 역시 난제이긴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이론적 천착이 인문학의 위상을 둘러싼 오늘날 우리의 논의에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계몽과 신화 그리고 관념론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기초하고 미학저술들에서 이 ‘본원적 삶의 좌표’를 현실감 있게 제시하고자 시도하였던 미학자 아도르노 (1903-1969)는 막스 호르크하이머 (1895-1973)와 더불어 현대 문명이 직면한 위기의 ‘현재적’ 형태인 파시즘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한다. 공저 ?계몽의 변증법?은 자연과 계몽의 좌표 내에서 파시즘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실행되는 지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비판서’2)는 자연과 계몽의 악무한적 엇갈림을 현대문명이 계몽을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의지하고 있는 인간 ‘인식능력들의 구조적 결함’ 때문인 것으로 밝혀낸다. 저자들의 해명에 따르면, 이 ‘인식론적 결함’은 다름이 아니라 계몽의 기획 자체에서 비롯된다. 서구의 계몽이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삼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 자연정복이라는 합목적성에 맞추어 이성을 사용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연지배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방향지워진, 인간이성의 ‘계몽된’ 즉 ‘탈 신화 프로그램으로 포맷된’ 인식론적 구조가 성립되면서 이 지배관계 속에 들어온 자연과 정복주체인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자연, 그 자연을 한계 지우는 인간이성 사이의 ‘원죄에 따른 전투’가 일어난다. 인간이 현재와 같은 틀대로 인식능력들을 사용하는 한 이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이처럼 비판이론은 초기의 이론구성에서부터 독일 특유의 관념론적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일단 개인의 인식능력들이 실행되는 ‘계몽된’ 이성구조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임을 깨닫게되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하도록 하는 길은 없을까를 고민하게 됨은 당연하다. 이 순서는 관념론의 오랜 습관이기도하다. 그런데 즉자적으로 보고 느끼는 대로 사물을 인지하지 않고 이념 Idee의 이끔에 의지하여 보편성을 거머쥐도록 한다는 고전 관념론의 기획을 아도르노는 수용할 수가 없었다. 문명화의 현 단계인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이념이 도출해내는 보편성을 동일성 신화 속에 포섭하여 계몽의 결과물을 신화 상태로 뒤집어 놓는 ‘변증법적’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존재하는 사회관계는 바로 계몽과정이 동일화 전략에 순응한 계몽 자체의 결과이며, 아도르노의 표현을 따르자면 반복역학의 덧에 걸린 신화상태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신화를 다시 ‘계몽’하기 위해서는 고전 관념론의 보편이념에 상응할만한 구속력을 지닌 ‘전혀 다른 원리’가 필요했으며, 그 원리는 칸트와 헤겔이 구상한 변증법의 동일화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탐구한다. 그리고 부정사유를 당위적 요청으로 제시한다. 나는 그가 이 책에서 설정하고 있는 비동일자 Das Nichtidentische가 고전 관념론이 제출하였던 절대정신의 20 세기적 양태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사물의 질서를 그 신화적 양태를 깨고 본원적 상태에 비추어 볼 수 있게되기까지 이 비동일자는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거느리는 강력한 상비군인 대중매체는 소비를 제2의 자연으로 굳힌다. 물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적 감정의 사회적 실현과정에 매체가 가공해낸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가 묻혀 들어오는 장애를 소비주체는 장애로 인식하지 않는다. 소비주체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감정의 비인간적인 실현인데, 그것은 이 사회적 의사소통과정에 물질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부정사고는 이미지의 세기에 물질성을 이념형으로 내세운다. 이미지와 물질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인간다운’ 의식을 구성하는 비동일자가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 아래서 부정사유를 발판으로 삼을 때 비로소 비판적 현대인은 제2의 자연으로 굳어 버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러한 작은 희망으로 새로운 사회를 전망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나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자본주의라는 세계사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양태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관념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본원적 상태에 비추어 ‘참된’ 것으로 파악된 사물의 질서가 현상계에 경험자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전 관념론의 형이상학과 결정적으로 구별된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헤겔로부터 다시 칸트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미적 가상의 세계는 부정의 형이상학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부정성이 현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정성의 현상인 예술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참된 존재의 모습을 개인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자연이 약속해준 행복을 경험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참’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지시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런데 이 지시가 일종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기초로 하고 있는 ‘관념론적’ 부정의 형이상학 때문이다.
나는 관념론이 지닌 미덕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미덕이 지닌 사회적 효력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가 아도르노를 뒤이어 발전시킨 비판이론의 또 다른 양태가 논리적 완결성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일종의 퇴보라고 평가하면서도, 아도르노를 비판하는 그의 논점을 한 번 진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까닭도 이 사회적 효력을 둘러싼 물음 때문이다. 독일 고전관념론과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유사한 논리구조로 파악하는 나의 틀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은 헤겔의 절대정신을 현대화한 것으로 비추어진다.3) 칸트가 열었던 비판 Kritik의 의식활동 영역이 다시 형이상학의 규정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감으로써,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증적’ 전체가 복원된다. 이 합리적 전체가 개개인의 합리적 사고와 행동, 그 사회적 교환의 ‘합리성’을 구속한다. 계몽주의 시기 이래로 독일에서 서로 제각기 발전해나간 이질적인 두 지적전통을 아도르노가 비동일자를 통해 어렵게 나마 그 질적 차별성을 유지시킨 채 서로 연결하고 있다면, 하버마스는 니체철학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 전통마저도 성숙한 개인들이 참여하는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합리화 과정’ 속에 편입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개인적인 일탈이 있을 뿐 개별성은 궁극적으로 전체에 마찰 없이 조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론을 구성한 나머지 하버마스의 체계에서는, 개개인의 고통을 비롯한 개별적 감정이 ‘의사소통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거나 아니면 감정의 세계가 사회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남고 만다. 그 결과 미적 영역이 이론체계에서 배제되거나 -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4) 하버마스와 아도르노의 사상체계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바로 이 미의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계몽을 수행하는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어 그를 구성하는 일부이면서, 계몽의 대상이기도 한 자연에 대한 표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비판이론의 관념론적 틀을 구축하는 맨 밑바닥에 놓인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하버마스의 반론5)은 우리가 이점을 인식하기에 충분하게 해준다.
?계몽의 변증법?은 서구인들이 현대문명을 구축하는 도구로 삼아온 합리성이 인간의 두뇌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사고의 내부구조를 밝히는 데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거머쥔다. 그런 후 합리적 사고구조의 역사철학적 귀결이 바로 당대 문명의 야만상태인 파시즘이라고 지적하는 흐름을 유지한다.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구체적이고도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러한 지적이 그 역사성을 뛰어넘어 21 세기로 접어든 오늘날까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까닭을 나는 그들이 문제의 원인을 파고드는 ‘독창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또 다시 이러저러한 양태로 마찬가지의 야만성을 사회적 귀결로 가져올 수 있는 개개인의 사고구조가 문제의 발단이라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명제 ‘계몽의 변증법’을 나는 -저자들의 의도를 존중하여- ‘인식론적으로’ 풀어 서술하고자 한다.
3. 서구 ‘합리적’ 사유에서의 개념과 직관
3.1. ‘밝은’ 개념과 ‘어두운’ 변증법
계몽이 가져다주는 결실이 인류의 진보와 행복으로 이어지리라는 순진한 낙관은 이미 18세기말에 적어도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스스럼없이 통용되기 어려운 화두가 된다. 그후 계몽의 자기파괴과정은 사회적 담론들을 다양하게 분화해내는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을 이 자기파괴과정의 개념화라고 특징지으면서 시민적 사상가들이 쓴 책 중 가장 어두운 am schwarzesten 책이라 자리매김한다.6) 그는 비판이론의 첫 세대에 속하는 저자들을 마키아벨리, 홉스, 그리고 사드와 니체로 이어지는, 서구 시민사회의 어두운 사상가들에 연결시키면서 그 정점에 세워놓는데, 이 어두운 전통을 개념화함으로써 선배들이 ‘온갖 수사’를 동원해 부각시키려하였던 변증법적 역동성을 명쾌하게 정지시킨다.『계몽의 변증법』저자들에게 수사가 필요했던 것은 ‘밝은’ 전통이 가꾸어온 개념의 언어로는 범주화되지 않는 인간의식의 아킬레스건을 담론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문명화를 추진하면서 그 과정에 편입된 인간은 이 어두운 수렴점을 중심으로 개념들 사이사이로 흘러 미끄러져 나가는 사물의 본원적 실체를 의식의 망에 포섭한다. 수사에 의지하여 이 책은 개념적 사고와 정서, 의식 그리고 심리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순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문명인의 부조리한 존재방식을 바로 이 수렴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설명틀을 저자들은 ‘변증법’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면 우선 이 틀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버마스의 개념화는 뒤이어 비교될 것이다.
3.2. 개념과 객체의 변증법 - 실증적 이념의 보편지배가 야만을 부른다
명제: 서구의 계몽은 ‘변증법적’으로 뒤집혀져 신화로 귀결된다.
하버마스가 현대생활이 주는 피로에 ‘쓸데없이’ 민감해진 탓으로 저자들이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수사에만 매달렸다고 ‘정리한’ ?계몽의 변증법?이 내세우는 이 명제 These는 바로 그 수사가 이끄는 의식의 곡예를 함께 넘으면서 읽는 이의 존재도 이 반성과정에 끌어들여 비추어볼 때 비로소 주장하는 바가 전달된다. ‘뒤집히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그리고 이 뒤집힘에서 인간이 빠져 나올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사고하는 주체인 ‘내’가 계몽의 운동역학 즉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전진과정에 인식능력과 함께 끌고 들어간 저 ‘어두운’ 아킬레스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어두운 심연이 계몽의 과정 중에 어떻게 해서 합리성으로 무장한 인식주체 속에서 벌어져 나가게되는지가 우선 문제될 것이다. 저자들은 서구 인식론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가운데 설명한다. 그리고 인식주체이고 계몽의 담당자인 인간이 자신과 인식 대상인 객체를 개념의 정신에 따라 구분 짓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낸다. 계몽은 일단 인류에게 진보와 행복을 약속하였으므로 개념이 보편을 매개해 주리라고 믿으면서 나갈 수밖에 없지만, 허나 개념은 어떤 특정한 사고과정의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에도 저자들이 독특한 의미내용으로 가다듬은 ‘변증법’이라는 용어가 앞 뒤 맥락을 연결하기 위해 동원되어지는데, 변증법적 사고과정의 결과물이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구절을 직접 읽어보기로 하자.
개념이란, 사람들이 기꺼이 그 이름으로 파악된 것의 특징들에 대한 통일된 단위로 정의하고 있지만 사실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할 때부터 변증법적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늘 그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지는 가운데 그것으로 될 뿐이다.7)
그렇다면 이 ‘인식’과정에서 이른바 ‘대상을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은 영원히 뒤로 미루어지게 된다 verschoben. 그런 가운데 우리는 대상을 인식하였다고 ‘믿으면서’8) 개념을 동원한다. 따라서 개념이란 결국 차이를 구별해내는 사고가 이 미루기 작전을 종결한 끝에 등장한, 즉 특정한 유형의 사고방식 (이른바 서구 합리적 사유)의 산물일 뿐인 것으로 된다. “객관화하는 규정의 원 형태”9)인 개념은 이처럼 사물과 서로 어긋나는 가운데 자기규정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이 어긋남에서 빠져나 올 수 없는 까닭은 주체구성 역시 이 개념의 규정성에 결부되어있기 때문이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지우는’ 사고 또한 인간이 개념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한 이 변증법적 미루기 작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서구 계몽의 전진적 사고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계몽이 앞으로 나아가는 fortschreiten 진보의 외관을 지녀야만 하는 까닭은 인간이 개념적 사고를 시작한 이상 미루기 역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루기를 멈추면 주체구성 Subjektkonstitution도 소멸된다.
이런 틀을 기반으로 하여 저자들은 계몽의 전진적 사고가 신화의 속성인 ‘자기반복’ 구조에 그대로 상응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그것의 역사철학적 귀결을 진지하게 묻는데 주력한다. 바로 이 물음이 그들이 제출한 명제가 사회비판적 함의를 지니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된다.
계몽이 이룩해낸 서구 문화는 이성함의를 통해 그 진보성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이 이성함의는 단지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이 다시금 뒤로 되짚어 비껴가는 한에서 전진적으로 fortschreitend 귀결된다. 이성은 이른바 ‘효력을 발생시켜야 wirken’ 하는 데, 다른 말로 풀어쓰자면 이는 이성이 자신의 구상에 따라 조건들을 구성하여 그 경험적 대응물을 만들어 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이성활동 끝에 주체자체에게로 되짚어 ‘떨어지는’ 귀결이다. 이성은 자신을 경험적으로 ‘작용’시키기 위해 대상을 주체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성이 오성범주들에 의지하여 인식주체와 대상을 구성하면서 갈라놓는 일을 하는 가운데 이성주체의 내적 자연이 다른 자연대상물들과 마찬가지로 대상화되는 일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 자연은 주체에 대하여 전적으로 ‘타자’인 그 무엇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작용’을 하는 이성은 이성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 결과에 대적하는 반작용도 초래한다. 이처럼 서로 뒤엉켜 진자운동을 하는 가운데 이성주체는 자신의 이성적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이질적인 비이성으로 체험한다. 계몽의 프로그램에 장애가 발생하고, 이성과 비이성이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자기자신과의 투쟁이 이 문화의 자기역학이다. 문화지형전체가 이런 관점에서 폐쇄된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이 사슬고리, 즉 ‘도착적’인 합리성에 의해 막혀버린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두 저자는 구체적인 대답을 생략한다. 그 대신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물론 계몽은 다시금 신화로 전락한다는 저자들의 ‘어두운’ 진단이 나오기까지 그들의 이론적 작업을 떠받쳤던 것은 무엇보다 현실사회 비판이었다. 이 책의 생성자체가 제 2차 세계대전의 가공할만한 사건들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미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파시즘의 테러를 이성이 야기한 야만의 특정한 형태로 체험하였다. 문명사회를 꾸려 가는 인류의 불행한 역사과정에 나타난,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한 단계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저자들이 특별하게 거두어낸 성과는 파시즘이라는 이 특별 체험을 일반화해낸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이성이 도구화되어 자연지배의 그릇으로 된 결과라고 그 일반적 구조 속에서 설명한다. 그리고는 이런 식의 이성비판이 파시즘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비판의 출발점이 이러한 이상, 그 논리적 사슬고리가 거침없이 엮어질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집산적 대중에 대한 지배라는 형태로서의 이성지배는 사회주의 정부구조나 문화양식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지 않는가. 아메리카의 문화산업은 계몽의 전도된 형태 바로 그것이다. 즉 추방된 자연이 이성에 복수를 가하는 것이다. 저자들이 이처럼 ‘희망’이 끼어들 여지를 봉쇄하면서 논리적 철저성으로 자신들의 전제를 현실사회관계에서 확인하고 관계들이 어우러지는 역학을 설명하는 가운데 바로 서구 합리성의 기본구조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획득되고 있다.10) 그 결과 이른바 사회비판적 통찰이 인식론상의 내부 구조를 기술하는 언어로 고스란히 번역되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보편자 das Allgemeine의 특수자 das Besondere에 대한 지배로 정식화되었다. 저자들은 처음부터 문명화된 사회관계들 속에서 ‘개념 Begriff’이 ‘제각기 다양한 것들 Mannigfaltigkeiten’을 억누르는 역학으로부터 사회비판적 전망을 발전시켜나갔었다. 결국 그들의 파시즘 비판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닮아가기’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파시즘의 프로그램인 획일화는 옛적 야만으로 퇴행이 아니다. ‘눌러서 똑같이 만들기’ 전략의 ‘승리’이다.11) 파시즘은 이 전략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는 시민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전대미문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결국 ‘닮은 것들’만이 양산되었다. 권리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확대해나가는 일이 불의 Unrecht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운동역학에 따르는 총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시민사회는 개인을 억압한다. ‘이성지배’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합리성의 역사철학적 귀결을 ?계몽의 변증법?은 아래와 같이 고유한 언어로 담아낸다.
지배는 개체에 대하여 보편자로서, 현실 세계에 있는 이성으로서 맞선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구성원인 한에서는 다른 길이 열려있는 것도 아닌 그들 모두의 힘은 감당해야하는 노동분업에 의해 매번 새롭게 바로 그 전체 das Ganze의 실현을 위해 결집되는 바, 이렇게 해서 그 전체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다시금 증폭된다. 소수에 의해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진 것이 늘상 다수에 의해 개별자들이 제압된다는 식으로 추진된다: 사회의 억압은 언제나 집단에 의한 억압이라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집산성과 지배가 하나를 이룬 것이지 직접적인 사회적 보편성이 아니며, 사유 형식들의 바탕을 이루는 연대성이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였던 철학개념들은 보편타당성에 대한 요구를 통해 그 개념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관계들을 참된 현실로 끌어올렸다. 그 개념들은 비코가 말했듯이 아테네의 장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개념들은 물리학의 법칙들에 적용될 때와 마찬가지의 순수함으로 법적 권리를 완전하게 누리는 시민들의 평등과 여성, 아이들 그리고 노예의 열등성을 반영하고 있다. 언어자체는 말하여진 것, 즉 지배의 관계들에 예의 보편성을 부여하였다.12)
합리적 사유는 보편자의 이 독재를 벗어날 수가 없다.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이런저런 권력관계들에 함몰된 채 ‘이름하여 합리적인’ 서구의 전진적 사유는 단지 그저 “처리해서 나열하는 disponierendes”13) 그 무엇으로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사유는 확고부동하게 자기한계 속에 자리잡고 들어앉은 차이들 사이사이로 진리를 결박해버린다. 그럼으로써 자연을 분류의 대상일 뿐인 무질서한 소재 Stoff로 격하시켜버림으로써14) 단순한 분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가 (베이컨: 이순예)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의 본성과 인간의 오성이 이룬 행복한 결혼은 가부장적이다.15) 미신을 제압한 오성이 주술에서 벗어난 자연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하는 것이다.〔...〕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온전하게 지배하기 위하여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안중에 없다.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계몽은 그 고유한 자기의식을 뿌리까지 들어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즉 자신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를 만큼 강한 사유라야 신화를 깨부수게도 되는 것이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이다.16)
이러한 구도 즉 개념적 사고방식이 이끄는 대로 두뇌가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올린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전진하는 (목도한 사실을 확정했다고 확인하기 위해 다음 번 비교대상을 거머쥐는)’ 사유와 그 결과로 형성되는 인간의 의식이 서로 반목하는 대척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인간은 처해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인간이 맺어 가는 관계들은 거듭 반복되는 순환의 회로에 갇힌다. 한때 신화가 그러했듯이 자연강제에 따른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3. 시민적 주체형성 - 그 파탄의 해부학
- 오디세우스와 쥴리엣: 공적영역 das Öffentliche과 사적영역 das Private에서의 자연정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저자들은 계몽의 신화적 순환역학을 서구의 오랜 인식론 전통에서 취한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빌어 담론화시킨다. 주 논문에 해당하는 「계몽의 개념」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분석결과를 명제로서 선언한다. 그리고는 일상적이지 않은 분량과 개성을 지닌 두 보론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일단 단정하고 나서 예시와 증명을 덧붙이는 글쓰기는 주 논문과 보론의 위계질서를 허문다. 서로 넘나드는 읽기를 통해서만 비로소 전체가 와 닿기 때문이다. 분량으로 상징되는 외적 측면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이 책은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그리하여 읽는 이가 ‘다르게 생각해 보도록’ 도모한다.
주 논문과 보론을 아우르는 전체적 구상은 계몽이 신화적인 반복의 역학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개념의 언어들은 신화의 역학을 ‘단정적으로’ 즉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도록’ 나열할 뿐이다. 그리고 호머와 사드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은 이 ‘미루어 짐작함’에 단단한 대응물들을 제시한다. 개념의 짐작에 조응하여 허구적 물질이 개념들의 틈새를 잘 막아낸 결과 전체가, 개념의 한계 너머에서만 우리 의식의 망에 포섭되는 어두운 세계마저도 아우르는 그 전체가 개념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의 토론장에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 이라는 명제로 추상되는 것이며 구체로 상승한 귀결은 철저하게 비관적인 인간학이다: 신화가 운명과 보복의 과정을 오로지 보복을 통해서만 빠져나갈 수 있듯이 그리고 그리하여 또다시 운명적 타격들의 꼬이고 얽힘에 빠져들 듯이 계몽을 ‘조직화하는’ 주체는 자연을 수용하는 과정 Aneignung에서 그와 마찬가지의 신화적 질곡에 빠진다.
주체는 자연을 모방하는 데,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오디세우스가 바로 전형적인 경우이다. 이 ‘주변사물을 정리하여 일을 꾸려 가는 자 der Richtende’는 일이 생길 때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자연법칙 밖에 놓여있는 것과 자신의 ‘꾀’로 제압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자연법칙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한다. 이런 방식의 ‘객관화’를 통해 결국은 ‘내적’ 자유가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활동으로부터 추방되어지고, 그리하여 통일의 사안, 다시 말해 실체적인 것 das Substantielle은 개념적 사유의 자간 Leerstelle에 들어박히게 된다. 그런데 이 ‘글자들 사이’는 범주들의 차이들만을 생산해낼 뿐이다. 따라서 ‘사안’을 직관하는 것 Anschauung이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사고는 결코 ‘참된 wahr’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요점을 지적하는 구절들을 이 저서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중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미숙한 통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수준 높은 통찰에도 거기에는 이미 진리에 대한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선지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믿음의 역설은 마침내 어지럼증 나는 20세기의 신화로 전락하였고, 그 비합리성은 철저하게 계몽된 자들의 수중에서 합리적 기구로 된다. 이 자들은 사회를 그저 야만으로 몰아간다.17)
늘 출구 없이 반복되는 계몽은 자신이 이루어야할 본래의 프로젝트에 대해 무능력한 것으로 밝혀진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계몽의 결과로 남는 것이다. 계몽의 기획은 애당초 이 프로젝트를 구상, 제안, 추진한 인간에게 결국 ‘손상된’ 의식을 갖게 하고 만다. 이러한 점에서 계몽의 출구없음은 신화적 반복과 다르다. 계몽의 과정에서 주체는 스스로 ‘해방’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주체는 이 순환고리에서 ‘필연적이고 강제적인 것’으로 기능하는 자연관계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도 깨닫는 것이다. 결국 계몽은 주체가 이 부자유에 직면하여 ‘속수무책 Hilflosogkeit’의 의식상태를 지니도록 이끈다.
그러나 마력적인 환상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반복은 합법칙성이라는 이름 하에 인간을 저 순환고리에 더욱 가차없이 붙들어맨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환고리를 자연법칙에 따라 대상화하면서 이제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정립했다는 식의 허황된 망상을 갖는다.18)
그런데 신화로 되는 계몽의 이 ‘탈 신화적’ 계기는 이미 주 논문의 세 번째 단락에서부터 뚜렷하게 읽히기 시작하는 데, 저자들은 논문 초입에서 도입한 이 계기를 이어지는 보론에서 계속 추적하여나간다. 자유로운 주체의 자기보존은 자연강제를 -신화적 미신을- 파괴하는 가운데서만 ‘획득’된다. 파괴로부터만 거머쥘 수 있는 주체형성의 고단함은 그런데 그 파괴력의 강도에 대한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형성해나가는 주체는 그 강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되는 바, 이 파괴의 회로에 자기자신에게 속한 고유의 것 마저 던져버리는 당착에 빠진다. 계몽이 신화와 구별되는 계기는 이렇게 시작되어 신화적 반복이 이성적 주체에게 ‘의식’ 되고 만다. 주체는 자신의 이성이 자신의 또 다른 고유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인식’ 하는 것이다. 이 자연지배의 신화적 반대급부는 탈 감성화의 형태 속에서 이성의 지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의식이 구성되어진다.
「오디세우스 혹은 계몽과 도덕」이라는 제목을 지닌 첫 번째 보론은 호머의 서사적 서술19)을 무엇보다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낸다. ‘모험의 대가’인 오디세우스가 여기에서 ‘시민적 개체’의 원형으로 해석된다. 이 개인은 ‘정리하는 이성’의 성과를 구가하면서, 동시에 이 활동의 반작용을 기꺼이 자기 속에 끌어안는 자이다.
자신을 유지하려는 긴장된 노력들은 자아의 모든 단계들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자아상실의 유혹은 이를 쥐고 있겠다는 맹목적인 결의와 늘 짝을 이룬다.20)
?오디세이? 제 12장은 이러한 결의를 실현시키는 ‘조치들’에 관한 이야기로 사이렌의 매혹적이고 운명적인 노래를 ‘즐기기는 하나 운명은 피해 가는’ 오디세우스의 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한다. 그런데 이 조치들이란 전적으로 자신과 남의 힘들을 합리적으로 ‘지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그런 한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다. 유혹을 ‘즐기는 자’는 이처럼 자신과 남의 힘을 ‘지배함으로써’ 유혹에 저항할 수 있게되고, 저항하는 가운데 자신을 보존한다. 이 조치들이야말로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 함축성 있는 알레고리”21)이다.
기술적으로 계몽된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결박하도록 만듦으로써 그 노래가 갖는 태고의 위력을 인정한다.22)
감각적 유혹에 직면하여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을 또 다른 가능성을 궁리한다. 그는 경험계를 넘어서서 미적 차원으로 발을 내딛으려한다. 그러나 일탈하고자하는 충동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기 위하여, 그보다 먼저 우선 가혹한 조건들이 확정되어져야 한다. 그는 자기 수행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다. 이 결박 때문에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된다.23)
바로 이 부인 Verleugnung, 문명화과정을 주도하는 합리성의 핵인 이 부인이 검버섯처럼 번져나가는 신화적 비합리성의 세포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자연을 부정함으로써 외적인 자연을 지배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까지도 혼란스럽고 불투명해진다. 인간이 자기자신의 의식을 자연으로 재단해서 도려내는 순간, 왜 자신이 삶을 유지하는 지가, 또 사회적 진보와 모든 물질적, 정신적 힘들의 강화, 그리고 의식자체 마저도 쓸데없는 것으로 된다. 후기 자본주의에 접어들어서는 공공연하게 광기의 성격마저 띄는 수단과 목적의 전도현상은 그런데 주관성의 시원사 Urgeschichte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24)
주체성은 주체가 그로부터 몸을 빼낸 자연력들을 계몽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해방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체 측으로부터 배제 당함으로써 이질적으로 되어버린 자연력에 대한 합리적 정리 및 통제라고 할 것이다. ‘해방하는’ 정신은 지배와 자기제어의 도구가 된다.
사드의 소설 ?쥴리엣 혹은 악덕의 이점들 Juliette oder die Vorteile des Lasters?은 감각을 지배하는 개념의 정신이 ?오디세이?에서와는 다른 양태로 활동하게되는, 사적영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묘사를 화두삼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두 번째 보론 「쥴리엣 혹은 도덕과 계몽」에서 계산의 기관으로 활동하는 이성이 어떻게 하여 자기 자신의 육체를 살의 쾌락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가 하는 점에 몰두한다.
팀 내부의 협력은 정확히 규제되어 어떤 구성원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으며 매 구성원에 대해 대체할 후보가 준비되어 있는 현대의 스포츠 팀들의 전례를 우리는 쥴리엣의 섹스 팀에서 분명히 발견하게된다. 여기서는 어떤 순간도 놓쳐지지 않으며, 육체의 어떤 구멍도 등한시되지 않고, 어떤 기능도 활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25)
성적 계몽은 연애감정을 기독교의 도덕규범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나 이 해방이 애당초 기술적 완전성이라는 계몽의 기획에 따라 프로그램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성은 세련된 스타일로 다듬어지고, 또 절정에 도달하는 욕심의 해결을 추구한다. 이렇게 하여 수단이 목적으로 되고, 몸이 도구로 된다. 쥴리엣의 성 유희집단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인간 개개인은 사라진다. 최고 치의 성과를 거두려는 경제성 속에서 쾌락마저 주체로부터 소외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살의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는 그러나 바로 주체 자신의 이성이 활동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주체 내부에서 엉겨드는 이성과 비이성의 사슬고리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신들의 명제에 따라 계몽의 신화적 성격으로 지적해낸다. 이러한 지적과 더불어 계몽이 신화로 뒤집힌다는 그들의 명제는 그 마지막 귀결점에 이른다. 인간의 정신활동이 자신의 감각을 지배하는 구조를 확정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계몽은 현대 주체를 자기소외 속에서 설정한다.
바로 이 주체의 내적 계기가 계몽을 ‘신화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변증법적’으로도 만드는 것이다. 자유로운 주체의 계몽은 파괴와 건설의 저 신화적 질곡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여기에다 어떤 치유책을 써도 모두 허사라는 사실을 잘 아는 손상된 의식을 동반한다. 이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자기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념들을 무기로 삼아 주변사물들을 분석적으로 처리해내는 이성은 인간존재를 이중의 틀 속에서 근거지운다. 하나는 자연강제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이고 둘은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기 살을 이 자연강제 속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주체내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틈새는 오로지 사유의 전진적인 계기 속에서만 지양될 수 있다. 이 ‘변증법’의 역학 속에 서구의 계몽은 갇혀있다. 그런데 바로 이 변증법을 주체에게 열려있는 일종의 자기반성으로 논구하여 나감으로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서술은 ‘비판적’인 함의를 획득한다. 주체는 자연에 대한 분석적 파괴를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활동을 통해서는 다시 부정되어야만 하는 정체성을 획득할 뿐이다. 따라서 주체가 사유를 하는 한 그가 구성하여 내세운 ‘실증적’ 정체성은 동시에 부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계몽의 변증법?은 서구의 주체구성 기획이 실현 불가능한 이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차없이 분석해낸다. 무엇보다 그 조건들을 수미일관하게 밝혀내고 있어 이 저서가 확정한 분석자료들은 사구사회를 반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중 아도르노는 주체구성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부정과 실증의 반전들을 새로운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세운다. 계몽하는 주체는 그의 부정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가운데 실증성의 어떤 흔적을 철학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는 전제를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확립한 후 자신의 다음 번 저서인 ?부정 변증법?에서 본격적으로 발전시킨다.
4. 복지국가 이념의 자연지배
새로운 천년으로 넘어오면서 독일 학계에서는 ‘어두운’ 사상적 전통을 대변하는 니체 철학을 새롭게 사회이론화 하려는 움직임과 ‘밝은’ 개념의 보편적 매개를 당위적 요청으로 내세워 복지국가의 이념을 방어하려는 진영이 서로 잠시 공개적인 논쟁구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이른바 슬로터다익 논쟁 Sloterdeijk Debatte은 독일의 사상적 흐름을 지탱하는 두 개의 큰 줄기에 뿌리를 대고 있는 까닭에 형식적으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사회가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부채를 여전히 현재형으로만 감당할 자세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이 논쟁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과거청산 논의와 복지국가 이념에 50년 동안이나 몰두하였음에도 니체철학의 전통은 여전히 파시즘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문제를 제기한 슬로터다익이나 서둘러 진화시켜야한다는 ‘선의’를 지녔던 하버마스나 마찬가지였다. ‘어둡고’ ‘밝은’ 사상적 전통의 이분법이 편가름으로까지 나가면서 새로운 상황에 유의미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제기의 단초들이 사그라져 버렸다.
사회를 주도하는 이념적 지형이 변화를 요청 받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자신이 강력한 타자임을 주장하는 니체 철학은 관념론의 나라 독일의 아킬레스건이다. ‘본 공화국 Bonner Republik의 철학자’ 라는 칭호를 얻은 비판이론가 하버마스가 선배 이론가들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론구축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이 아킬레스건을 다시 말끔하게 배제시키는 과정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복지국가를 구축하여 상대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려온 구 서독사회의 심리학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배제의 역학’이 저항 없이 작동될 수 있는 세계사적 조건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이념마저도 자신과 다른 것은 자신으로부터 배제시키는 이 역학에 따라 작동해왔다는 혐의가 날로 짙어지는 세기로 접어든 것이다. 이 배제의 역학을 아도르노는 ‘동일성 신화’로 정리하였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음을 선언하면서 구성되고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주체가 자신의 안과 밖에 타자로 존재는 자연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선배들의 저술 ?계몽의 변증법?을 논평26)하면서 하버마스는 자연관계들에 대한 주체의 반성만을 문제삼는다. 그의 해설에는 자기 자신의 반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태도를 취하는 주체는 없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스스로 계몽하는 주체를 단지 자기부정 속에서만 인지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된 민감성”과 “협소화된 시각”에 걸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실존하는 형태들과 흔적들에 대해 불감”27) 해져버렸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 의 저자들과는 달리 그 후계자는 주체가 자신의 개념적 정체성을 부인하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 그 정적인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비변증법적으로’ 명쾌하게 둘로 나누어 정리한다: 이 책은 계몽의 자기파괴적 과정을 개념화하는 장점은 있지만, 그러나 ‘그 해결하는 힘’에 대하여는 어떤 희망도 남겨두지 않는 단점을 지닌다. 그렇지만 이 ‘희망없음’의 전제와 조건이야말로 바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공동의 연구를 통해 도달한, 그들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결론이자 ‘발상의 전환’에 대한 요청이 아니었던가. 하버마스는 이 독특한 결론을 교정 가능한 결점으로 폄하한다. 물론 그는 어디에 결점이 있는가를 아주 잘 안다고 여긴다: “독자들은 모든 것을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으로 부정하는 이 책의 서술이 문화적 근대의 근본적인 특성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되는 데 이 점은 옳다.”
그렇다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하여금 계몽의 기획자체가 위험에 빠질 지경까지 계몽에 대한 비판을 그토록 깊이 몰아간 동기들이 대체 무언가라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계몽의 변증법?은 즉물적인 폭력으로 귀착된 목적 합리성의 신화에서 벗어날 어떤 전망도 열어놓지 않는 것이다.28)
이런 물음에 뒤이어 하버마스는 “온갖 것을 자기 자신과 관련시키는 비판”29)에 이의를 제기한다. 선배들은 이른바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뿐인데, 한편으로는 비판을 계속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이성적인 척도들의 타락을 설명해야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이 설명을 위해서라도 결국은 ‘하나의 einen’ 척도는 남겨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역설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전복시키는 비판은 방향을 상실한다.”30) ‘계몽의 반복된 반성되어짐에 대한 회의’을 가지고 하버마스는 ‘가장 어두운 책’ 에 대한 비판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여전히 해명되지 않고 남는 것은 그들이 서구 합리주의의 성과들 -일단 이렇게 뭉뚱그려 말해두자-을 다룰 때 보이는 경솔함이다. 여전히 계몽주의자임에 틀림없는 이 두 계몽주의자들이 어떻게 문화적 근대의 이성적 내용을 그토록 평가절하 하는지, 그래서 모든 것에서 오직 이성과 지배, 권력과 효력의 결합만을 인지한단 말인가? 그들은 그래 여기에서도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아서는 독자적으로 된 verselbständigten 미적 근대의 근본체험에서 자신들의 문화비판적 척도들을 확보해낸단 말인가?31)
하버마스는 이리하여 합리적 사유 속에서 계몽의 과정에 아무런 대책 없이 마주서있는 주체의 ‘어두운’ 지점을 비켜간다. 스스로 ‘변증법적’으로 귀결되는 계몽에 직면하여 그는 하나의 실증적인 전망을 전개시켜나가는데, 계몽의 변증법이란 계몽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분석적 처리방식에 의거해서는 어떤 종합의 도출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대변하는 반면 하버마스는 합리성의 자기 교정적 잠재력을 대변한다. 이러한 태도가 그로 하여금 선배들의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회의로부터 스스로를 구분 지우게 하며, ‘계몽의 기획’을 기존의 틀 속에서 계속 추진하도록 한다. 문화적 근대를 평가하는데 이 차이점은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두 입장이 다루고 있는 연구의 주요대상의 차이로 환원되어질 수 없다. ?공적영역의 구조변화?의 저자와 ?미학이론?의 저자는 특정하게 서로 다른 이론적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각자의 처리방식은 간과할 수 없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차이점을 계속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아도르노 철학의 중심개념인 부정 Negation을 논구하여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개념에서는 완전히 벗어나는 ‘어두운’ 지점을 철학적으로 해명해야만 한다. 평면적인 비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처리방식은 두뇌 사용의 전혀 다른 역학에 의지하고 있고, 사회과학적 차원과 미적 차원으로 현 세계상태가 분화되어 설명되는 일종의 관성에 익숙해있는 요즈음, 오히려 역학의 다름을 설득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계몽의 변증법?의 문제의식은 값지다. 근대 주체가 자연지배를 통해 자신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 스며들어와 똬리를 트는, 시간이 갈수록 더 옹골지는 이른바 저 ‘어두운’ 아킬레스건을 사회구조 분석의 틀 속에 끌어들인 비판이론의 창시자들에게 오늘날의 비판이론가들이 좀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5. 마무리 - 사회비판서의 인문학적 매력 혹은 인문학적 사회 비판서
나는 사회비판서 ?계몽의 변증법?을 우리가 특별히 ‘인문학적’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이른바 ‘사회비판적’ 접근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분석하는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지 새롭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독창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하나의 양태를 제시하였다. 나는 이 책이 그 어떤 탈출구도 열어놓지 않는 ‘스산한’ 세계상을 담고있는 까닭이 무엇보다 바로 접근방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이라는, 인류문명사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파국의 한 단원을 분석하면서 파국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사유방식에 기초한 사회구조에 있다고 파헤쳤을 때, 그래서 이 사회구조를 중심으로 문제를 분석하였을 때, 개인이 구조 속에 갇힌 상태로 드러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저자들은 스스로 선택한 분석 방법론에 성실하였다. 전체주의인 파시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화산업과 반유태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문화까지도 동일한 방법론으로 설명한다. 이리하여 저자들은 사회구조를 문제삼는 접근방식이 할 수 있는 일을 정확하게 제시하였다. 전망을 모색하는 일은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인문학의 몫인 것이다. 아도르노가 철학서 ?부정변증법? 그리고 미학서 ?미학이론?으로 집필 대상과 방법론을 옮겨가는 과정자체에 대해서도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 지닌 미덕을 나는 이러한 방법론적 분화에서 찾는다. 하버마스가 사회철학자의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적 필요성에 따라 미적 현상을 재단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능력과 학문적 방법론에 대한 아도르노의 이해가 훨씬 더 다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우리에게서도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보다 폭넓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인문학의 사회과학화를 추구해왔는지도 모른다. 사회구조적 접근은 문제를 파악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서로 모여 살면서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문제들과 그 모든 인간적 자질마저도 사회과학적 사실자료들로 분해하여 정리해내는 경향으로부터는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학문은 방법이고 문제의 중심에는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들어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조가 강제하는 비인간적 행동방식에서 인간이 이탈할 가능성을 찾으려면 구조의 틈새를 집어 올려야 할 것이고 이것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였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의식의 저항을 전략으로 삼는 비판이론이 관념론 전통이 깊은 독일에 고유한 현상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이 사회구조에 모두 포섭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론의 출발점은 인문학의 위상정립을 위해 소중한 자산일 수 있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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