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숙명여대)
Ⅰ. 들어가는 말
지난 몇 년간 20세기가 서서히 그 끝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곳곳에서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다양한 말들이 오고 갔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역사의 흐름에 객관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인류의 마지막 시도였다면, 그와 함께 역사의 행보를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하던 마지막 형이상학도 사라진 셈이었다. 1989년 동독이 무너졌을 때, 그것이 단순히 시장경제논리와 생산 합리성의 승리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충격은 더 뿌리깊었다. 파시즘적 템포로 진행되고 있는 기술의 진보와 그에 따라 삶의 영역 전반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생산 합리화는 계몽주의 이래 서구 근대가 지상에서의 유토피아 건설을 기획하면서 그 실현의 중심점으로 삼았던 이성적 주체를 거대하고도 복잡한 기계조직의 한 보잘것없는 부품으로 전락시켜 왔다. 그리하여 ‘정신적 불투명성의 지배하에 있는 이 전환기에 불가해한 사회관계 속에서 자율성에 근거한 행위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소멸되고 있는 가운데 인간은 단지 무력감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거의 신적 절대성을 획득하기에 이른 자본 및 생산 이데올로기, 그리고 행위 하는 주체의 전면적 무기력감 - 이것은 예술의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현상이다. 예술 또한 특정 형태의 절대적 합리성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그로써 부정의 힘을 바탕으로 자율적이지 못한 일체의 억압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자기이해로 삼던 예술은 그 근본에서부터 위협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가 근대의 기획이래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자유실현의 정신은 그러나 자기부정과 해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방법론을 통해 나름대로 새로운 역사철학의 패러다임을 준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연대기적 흐름의 순서로서가 아니라 담론의 어떤 전환 내지는 다른 담론의 이행으로 이해될 때 탈근대가 갖게 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를 다시 이야기하고 근대와 탈근대의 연계성을 곰곰이 따져보는 작업이 지난 십 수년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어느 정도 근대의 자기붕괴 과정의 끝자락에서 근대의 한계를 성찰하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근대의 구원을 꿈꾸었던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1892-1940)의 사유도 이러한 맥락에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유를 특징짓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 - 벤야민은 다분히 형이상학에 경도 되어 있던 20년대를 지나 30년대 이후로는 형이상학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접맥을 시도함으로써 소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한 독특한 양상을 이룩해 내었다 - 때문에 벤야민은 스스로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았던 간에 탈근대적 사유를 선취하고 있는 사상가로 읽힌다. 물론 ‘과거의 상은 현재와의 찰나적 교우 속에서 인식되고, 그로써 인용 가능한 것이 되고자 우리의 주변을 섬광처럼 스쳐지나간다’고 역설하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내포하고 있는 윤리적 요청이 함부로 삭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Ⅱ. 벤야민 사유의 기본특성
벤야민 사유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언어신학적으로 매개된 형이상학과 역사적 유물론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현상은 그러나 이 양대 축이 서로 관계 맺는 변증법적 방식에 의해 어느 정도 해명된다.
신학적-형이상학적으로 각인 되어 있던 초기의 사유방식은 경제위기와 기술화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는 파시즘 정권 내에서의 유대인 좌익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경험, 맑스주의자인 아동 연극가 라시스 Asja-Lacis와의 만남 (1924), 모스크바 체류 (1926/27),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독서, 그리고 브레히트와의 친교 (1929) 등을 통해 역사적-변증법적인 유물론에로 방향전환을 꾀하게 된다. 벤야민 자신에 의해 “완전한 변혁의 과정”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이러한 방향전환은 그러나 결코 그의 초기 사유를 지배했던 언어신학적 형이상학의 포기를 대가로 하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브레히트식 유물론에의 경도에서 친구의 형이상학적 정신을 구출해내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숄렘 그리고 아도르노의 판단과는 달리 벤야민에게 있어 형이상학과 유물론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이 꿈꾸어왔던 유토피아적 구원의 실현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야만 하는 두 노선을 의미했다. 이 두 노선을 변증법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시도’의 문학 비평적 실천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20년대 후반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하던 1940년까지 지속되었던 브레히트 연구와 카프카 연구이다. 그는 브레히트와 카프카로 대변되는 두 세계에서 자신의 사유를 관통하는 길들의 교차점을 보았던 것이다. 숄렘에게 보냈던 다음과 같은 그의 편지는 이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자네 걱정의 저변에 깔려있는 양자택일이 내게는 일말의 생명력의 그림자도 지니지 못한다네. ...... 오히려 브레히트의 작품이 내게 의미하는 바를 특징짓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내가 개의치 않는 그 양자택일 중 하나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일세.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이 내게 브레히트의 작품과 똑같은 비중의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공산주의가 정당하게도 투쟁하고자 하는 입장들 중 하나를 그의 작품이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결코 아닌 것일세.”
벤야민이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된 역사철학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로써 스탈린-히틀러 협약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테러에 답변하고자 했을 때 - 그는 이 테러에서 근대 기획의 결정적 좌초를 보았다 -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음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실패는 개인사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시대사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카프카 작품세계의 아름다움을 좌절한 자의 아름다움으로 규정하면서 벤야민은 그 좌절의 이유들을 카프카 자신의 사적인 능력여부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해낸 바 있다.
“문학을 교리로 전이시키고, 파라벨로서의 문학에 견고성과 소박함을 되돌려주고자 했던 그의 위대한 시도는 실패했다.”
벤야민이 자신과 카프카를 여러 면에서 동일시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40번째 생일에 자살을 계획하며 자신의 글쓰기 작업을 ‘작게 보아 성공이지만, 크게 보아 실패’한 것으로 평가내렸던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카프카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벤야민 자신의 지적-창조적 활동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카프카나 벤야민의 시도를 실패로 이끈 역사적 맥락은 넓게 보아 근대의 아포리아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더니티의 두 얼굴이 궁극적으로 근대의 기획을 좌절로 이끈 것이며, 그것을 막고자 하는 여타의 시도들 또한, 바로 그 시도들의 역사성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좌절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서처럼 쓰여진 이 마지막 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한번 더 그 “웅대한 시도”의 절박한 당위성을 논하고 있다. 벤야민의 텍스트 중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제 1 테제의 ‘역사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인형과 신학을 상징하는 곱사등이 난쟁이에 관한 파라벨은 그 당위성을 뛰어나게,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수수께끼같은 이미지의 형태로 형상화하고 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어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이 기계는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면 그때마다 그 반대 수를 둠으로써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었다. 터어키 의상을 하고 입에는 물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로 장치를 함으로써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인 등이 굽은 난쟁이가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 우리는 철학에서도 이러한 장치에 대응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어지는 인형이다. 이 역사적 유물론은, 만약 그것이 오늘날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파라벨을 해석하면서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 둘 중 궁극적으로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둘의 공동작업 그 자체, 혹은 그것의 당위성일 뿐이다. 벤야민은 이미 비유적 장치를 통해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 사이의 서열에 대한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둘은 그에게 있어 서로 상보관계를 맺는 필수 불가결한 두 사유방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역사적 유물론은 인류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의 기획이 결정적으로 좌초되는 위기의 순간에 벤야민은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는’ 역사의 모습을 꿈꾸었던 것이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이라는 두 정신적 태도의 만남을 실현시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기획을 좌초하게 만든 모더니티의 두 얼굴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이는가.
Ⅲ. 벤야민의 근대를 바라보는 시각
하버마스나 푸코, 혹은 코젤렉 R. Koselleck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근대 (또는 현대, die Moderne)는 1750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서양의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이다.그리고 근대성 (또는 현대성 die Modernität)은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태동된 정신적 태도, 즉 ‘관습적인 것을 부정하는 질적 범주’, 또는 ‘자기자신을 자발적으로 갱신하여 활성화시키는 시대정신’이다.
현대가 지니고 있는 자기수정 및 자기분화의 능력, 그리고 이 능력을 바탕으로 이룩해 낸 전통과의 단절, 그리고 과학, 도덕, 예술의 합리화는 근대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가치가 손상될 수 없는 중요한 성취이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비판이론 또한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사유방식 및 표현방식으로 비판이론과는 거리를 취했던 벤야민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적 사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창조적 정신과 그 정신에 의한 창조의 완성에 대한 시민사회 예술관의 전형적인 모범을 보여주는, 「완성 다음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텍스트를 읽어보자.
“사람들은 종종 위대한 작품의 탄생을 출생의 이미지로 생각하였다. 이 이미지는 변증법적이다. 즉 이중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 한 측면은 창조적 수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창조적 정신에 있어서의 여성적인 것에 해당된다. 이 여성적인 것은 (작품의) 완성과 더불어 끝난다. 그것은 작품을 생명으로 이끈 다음 소진해서 죽는다. 대가 안에서 완성된 창조와 더불어 죽어버리는 것은 대가의 한 부분, 즉 창조를 받아들인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러나 이제 작품의 이 완성은 죽어버린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이로써 (작품 탄생) 과정의 두 번째 측면이 시작된다. 이 두 번째 측면은 외부로부터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조탁과 수정도 이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 두 번째 측면은 작품 자체의 내부에서 수행된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는 출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창조는 완성 속에서 창조자를 새로이 잉태하는 것이다. 창조가 받아들여진 여성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남성적 요소에서 말이다. 행복에 겨워 창조자는 자연을 추월한다. 왜냐하면 그가 최초로 모태의 어두운 심연에서 받아들인 이 현존재에 대해 이제 보다 더 밝은 제국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게 된 곳이 그의 고향인 게 아니다. 그의 고향인 곳, 거기서 그는 태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언젠가 받아들였던 작품의 장자이다”(GS IV.1, S. 438).
벤야민에 의해 사유적 이미지Denkbild라고 명명된 짧은 텍스트들 중의 하나인 이 텍스트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주체는 의혹의 여지없이 시민사회의 이상주의적 예술관을 대변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 받아들임과 창조 사이의 대립을 남성적 주체에 의해 극복한다는 이념을 담고 있는 이 예술관은 자연을 정신에 의해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의 힘에 의해 촉진되는 역사의 동력학이 탄생과 소멸의 영원한 순환을 보여줄 뿐인 자연의 정력학(靜力學)에 대비되고 있다. 자연은 이러한 순환구조 속에서 무상함, 즉 죽음을 대변하며, 이 무상함은 정신의 우월성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주체의 절대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에도 불구하고 근대를 바라보는 벤야민의 시선은 그렇게 안정되어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역사의 선형적(線形的)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에 기반을 둔 여타의 근대적 사유에 대해 내려지는 그의 판결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근대에 대한 벤야민의 가장 날카롭고 철저한 비판은 역사철학적으로 준거 지워져 있는 진보의 믿음에 향해져 있다.
벤야민은 인류의 역사가 실제로는 출발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진보하지 않았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근대의 역사적 상황을, 고대역사학자 바흐오펜이 『모계법』에서 실제 존재했었던 인류역사 발전의 초기단계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던 전사(前史), 즉 난혼(亂婚)적 성문화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창녀적 늪의 세계’로 상징화하기까지 한다. 그가 보기에 카프카의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 또한 이러한 ‘창녀적 늪의 세계’였다. 바흐오펜의 『모계법』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신화와 현재의 교착적 관계에 대한 그의 성찰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그는 계몽의 양면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신화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철학적 숙고를 하고 있는데, 현재를 여전히 신화적 폭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전사(前史)적 시대로 평가 내리는 반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이성의 수정을 위해 신화를 유용하게 전환시키는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예컨대 고대 희랍비극과 도이치 바로크 비극을 비교하고 괴테의 『친화력』을 성찰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 희랍비극에서는 전사적 신화, 즉 전설이 주제가 되고 있으며, 도이치 바로크 비극에서는 역사가 일종의 신화적 도착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함으로써 그 저항의 침묵을 통해 인간 실존을 지배하고 있는 신들의 억압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의 침묵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화의 지배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행동의 영역에서는 ‘운명’으로, 인식의 영역에서는 ‘애매모호성’으로 계속 나타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을 철학사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신학적 실존주의 철학자 로젠츠바이크 Franz Rosenzweig의 연구를 상당부분 따르고 있는 벤야민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어와 진리간의 상관관계이다. 진리는 언어의 본질 속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내면의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진리에 대한 파괴적 중립성 die vernichtende Indifferenz gegen die Wahrheit’에 머물러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죄 연관망 der Schuldzusammenhang 또는 현혹 연관망 der Verblendungszusammenhang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죄 연관망 혹은 현혹 연관망은 자연의 폭력이라는 신화적 힘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아직 정복되지 않은 자연의 억압이라는 경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초자연적 삶의 부정이라는 정신적 의미에서이다.
언어의 부재라는 동일한 이유에서 괴테의 소설『친화력』또한 신화적 힘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벤야민이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의 본질과 관련된 심미적 신화이다. 불가능한 사랑에 복속하기 위해 ‘침묵하며’ 죽어가는 오틸리에를 통해 마(魔)적 미 die magische Schönheit의 신화적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벤야민은 ‘베일에 감추어진 상태 속에서만 본래의 아름다움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가상das schöne Schein’의 밀폐성이 신화적 은폐가 아닌 예술의 필연적 속성임을 밝혀내고자 한다. 형식을 통해 이것을 증명하는 것, 여기에서 그는 예술비평의 과제를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크 시대의 역사철학적 상황은 어떠한가? 벤야민에 따르면 바로크 시대의 역사적 삶은 독특한 신학적 상황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즉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그 형태는 철저하게 세속화되었고 이로써 중세를 지배하던 구원사적 종말론 대신 현세적 내재성이 들어서게 된다. 다시말해 신학적 내용의 틀 안에 머물면서 세속화의 길을 간 결과가 바로 바로크 문학이 보여주는 기독교적 내용과 중세 신비극에 대한 종속성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신의 구원사적 계획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역사는 피조물의 유한성과 함께 붕괴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은, 심지어 군주까지도, 단순한 피조물로 전락하고, 역사적 사건은 그 어떤 구원의 은총도 알지 못하는 자연으로 공간화되어 무대 위에서 세속의 의상 속에 펼쳐진다. 이제 역사적 사건은 신에 의해 형상화된, 즉 변용된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몰락 속에서 조각난 죽은 유물들의 파노라마로 오그라들어 버린다. 신화적 도착상태에 빠져있는 역사, 즉 <자연사(自然史)>로서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바로크 비극에 대한 연구서인『도이치 비극의 원천』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20여년간 추진된, 그러나 미완으로 남겨진 『아케이드』작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벤야민은 이렇듯 모더니즘 안에서 고대적이고 현대적인 것, 파국과 진보, 그리고 야만과 문화의 특이한 얽힘을 보았다. 모더니즘 역사에 대한 벤야민의 이러한 변증법적 진단을 더욱 명료하게 담고 있는 개념이 바로 <자연사(自然史)> 개념이다.
Ⅲ.1. 자연사(die Naturgeschichte) - 알레고리 - 폐허
벤야민은 <자연사>라는 개념으로 헤겔 이후 시민사회를 이끌었던 진보 낙관주의 및 역사철학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역사를 수난사로서 파악하는 시각은 이미 헤겔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역사의 단선적 진보를 부인하고 근대 기획의 해방적 관심을 실천이성의 카테고리 내에서 구체적으로 완수해내고자 하는 태도는 사실상 비판이론에 와서 분명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비판적 태도를 핵심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개념이 바로 자연사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역사의 관계를 더 이상 정력학과 동력학의 의미에서 규정할 수 없다는 인식을 담고 있는 자연사 개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바탕을 둔 역사관의 공통된 요소였다.즉 자연을 영원히 동일한 것의 정적인 반복으로, 그리고 역사를 ‘자유에 대한 의식의 진보’로서(헤겔) 파악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이제 역사의 동력학 자체 내에 숨어있는 야생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가리키고, 그럼으로써 제 2의 자연으로 굳어져버린 이것을 역사적 유동체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태도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이로써 헤겔에게서 정착된 근대 역사철학의 비판적, 해방적 자기확인은 파국의 자의식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른다.
기술과 자연 사이에 어떤 절대적인 범주적 구별도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이러한 역사철학적 시각은 마르크스와 루카치, 그리고 벤야민과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제 2의 자연> 개념 논의에서 그 뚜렷한 위상을 형성해나가게 된다. 루카치는 기술을 제 2의 자연으로 명명함으로써 세상을 그 주어진 형태에서 존재론적으로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가정을 비판한다. 「물화현상과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서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특성으로 언급하고 있는 의식의 물신적 성격과 소외 및 분열현상을 헤겔식으로 심화시키면서 소외되고 물화된 주체의 기계적이고 이원적인 사고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루카치의 이론을 수용하면서 아도르노는「자연사의 이념」에서 역사성을 존재의 자연으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식 존재론적 명제에 대항하여 자연과 역사를 변증법적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개념들로 파악하고 있다. 자연과 역사, 이 두 계기는 서로 충돌해 와해됨과 동시에 그러나 서로 교착돼 있음으로 자신의 범주를 상대방의 존재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즉 자연은, 가장 자연적인 바로 그곳에서, 역사를 위한 기호가 되고, 역사는, 가장 역사적인 바로 그곳에서, 자연을 위한 기호가 된다. 왜냐하면 외견상 자연스러워 보이는 대상들도 그것이 역사 속에서 인간주체를 통해 야기된 이상 사실은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역사 또한 이제까지의 역사 흐름이 인간의 육체를 비롯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파괴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상 ‘역사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실을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자연, 또는 역사로 파악하던 방식의 극복이 모색된다. 자연, 즉 신화적 힘과 역사를 이렇듯 변증법적 관계에서 살피는 것은 19세기 후반 팽창하고 있던 사회다윈주의, 즉 사회진화론의 맹신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진화론적 행보를 사회사의 자연스런 진행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제 2의 자연을 보다 더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 즉 그에게서 생산력이라는 개념은 산업기술 뿐만 아니라 기술을 통해 달라진 형태에 놓이게 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물질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이 새로운 자연은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시주의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으나, 벤야민에게 있어 선사적인 것 das Prähistorische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서 역사적 변화에 맞설 수 있는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원시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융 C.G.Jung이 설명하는 식의, 태고사의 원형적 형태 die archaische Form der Urgeschichte를 벤야민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생산성과 무상성 또는 몰락 등 유기적인 자연에 대해 사용되는 언술들이 산업주의에 의해 창출된 비유기적인 ‘새로운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될 때 어떤 극단적인 새로운 측면이 명명된다는 것이야말로 사태의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으로서의 인간은 이미 수만년 전부터 그 발전의 끝에 다달았지만, 종으로서의 인류는 시작에 서있다”(GS. IV, 147)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시민사회의 전사를 선사적 국면으로 읽어냄으로써 기술의 ‘새로운’ 자연을 유토피아적으로 살려내고자 한다. 즉 그는 역사적 자연을 그 모순된 극단 속에서, 즉 한편으로는 몰락과 죽음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 잠재력과 변화의 가능성으로서 파악한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에서 기술의 사회적 약속에 대한 벤야민의 이중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벤야민은『도이치 비극의 원천』(1923-25)과, 이후 19세기 및 모더니티의 방대한 사회철학적 연구로 기획되었던 『아케이드 작업』- 20여년간 지속되었던 이 작업은 결국 미완으로 남겨지게 된다 - 에서 역사와 자연사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몰두하게 된다. 벤야민은 바로크 시대와 19세기가 모두 ‘몰락의 시대’로서 역사철학적으로 볼 때 일련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녔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크 비극을 고찰하면서 벤야민은 알레고리라는 다분히 잊혀져 왔던 수사학을 재발굴해 17세기 전반에 대한 역사철학적 고찰의 일반적 방법론으로까지 승격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미적 표현과 대상간의 유토피아적 통일을 전제로 하는 상징과 달리 알레고리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파편성 내지는 다층성 때문이었다. 알레고리적 몽타쥬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틈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의미의 파편성, 그리고 다층성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몽타쥬에서 각 부분들은 전체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충돌함으로써 조화와 통합의 환상을 깬다.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총체적 역사관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바로크 시대 및 19세기를 설명해 주는 적합한 인식론적 도구로서 알레고리가 기능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인 것이다.
바로크라는 공간적으로 세속화된 역사는 의미없는 몰락으로서가 아니라, 무상함의 기호로서 나타나는데, 무상함의 이러한 기호들은 신화적-자연사적 의미에서 해독되어야 한다.
“상징에서는 몰락의 변용과 함께 자연의 변용된 얼굴이 구원의 빛 가운데 순간적으로 현현되는 반면, 알레고리에서는 역사의 죽은 얼굴이 경직된 태고적 풍경으로서 관찰자의 눈 앞에 놓여있다. 역사는, 역사가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미성숙한 것, 고통에 찬 것, 실패한 것, 이 모든 것으로서 한 얼굴에서, 아니 한 죽은 자의 얼굴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표현이 지니는 모든 ‘상징적’ 자유가, 형태의 모든 고전적 조화가,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이 이 얼굴에 결여되어 있다 할지라도, 자연의 몰락이 최상에 이른 이 모습에서 인간현존 일반의 본질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전기적 역사성이 의미심장하게 수수께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알레고리적 고찰의, 즉 역사를 세상의 수난사로 보는 바로크의 세속적 구상의 핵심이다. 역사는 그 몰락의 지점들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치명적으로 몰락한만큼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죽음이 자연과 의미 사이에 가장 깊숙한 경계선을 긋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이 옛날부터 치명적인 몰락성을 지닌다면 자연은 또한 옛날부터 알레고리적인 것이다. 의미와 죽음은 구원의 은총을 아직 받지 못한 피조물의 죄악의 상태에서 씨앗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 있듯이,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함께 성숙한다.”
역사는 역사의 가장 극단적인 대척점인 죽음에서 몰락으로 나타난다. 위 인용문이 보여주듯역사철학적 카테고리로서 알레고리는 이렇듯 “자연과 역사의 어떤 특수한 교착” 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전체적으로 상승한다는 역사철학적 이념을 부조리한 것으로 폭로한다.
바로크 알레고리에서 몰락의 순간에 자연과 역사가 일치하듯이, 그리하여 역사가 “경직된 태고의 풍경”으로서 읽히듯이,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던 19세기는 자연적 몰락의 순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19세기의 대도시, 파리의 인상에서 이러한 몰락의 징후를 읽고자 했던 것이 바로 미완으로 남겨진 『아케이드』 작업이다. ‘19세기의 태고사’로서 기획된 『아케이드』 작업에서 그는 산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상들을 화석들로서, 즉 살아남은 사물들의 표면에서 읽히는 생생한 역사의 흔적으로서 파악한다. 다시말해 대도시의 얼굴을 진보와 융화된 몰락의 알레고리로 읽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알레고리적 역사 고찰방식이나 ‘자연사’ 개념을 통해 비판하는 것은 단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이념 뿐이 아니다. 그는 ‘몰락의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그에게 있어 “‘진보’라는 개념과 ‘몰락의 시대’라는 개념의 극복은 단지 동일한 사실의 양면을 가리킬 뿐” (GS. V, S. 575)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일비극의 원천』에서 ‘원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괴테는 자연의 형태학을 다루면서 원형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과연과학에서 주체는 대상을 구성적 원칙에 따라 추상화시킴으로써 인식한다. 그러나 생물학에서 인식대상은 “환원불가능한 감각적 인지”에 따라 직접적으로 관조된다. 즉 주체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객관적 법칙과 규칙성을 그 구조의 형태에 있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구조들의 원형적인 형태는 말하자면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식물, 또는 동물로서 플라톤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현현시키는 것이다. 괴테를 철학적으로 심도있게 연구한 짐멜에 의하면 원형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 발전이나 조합, 또는 관계양상에 있어 가장 순수한, 그야말로 전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원형은 정신적 관조, 또는 주의깊은 관찰자의 눈앞에 나타나는 가상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원형은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인식론적 합명제의 구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물의 일반법칙을 사물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러한 법칙의 타당성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서 우연히,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것과 무관하게, 물질적으로 실현된다고 볼 때 그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객관적인 일로써 파악되는가 하면, 언제나 개별적인 것만을 인지할 뿐 결코 일반적인 것을 인지할 수 없는 우리들의 감각적 에너지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은 주관적인 일로 파악되기도 한다. 원형개념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본질과 현상 간의 이러한 분리이다. 원형은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직관 안에 깃들여있는 무시간적 법칙자체로서 말하자면 개별형태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괴테는 ‘현상 뒤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하지마라. 현상자체가 교리이다’라고 말한다.
괴테의 이 원형개념을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온 것이 벤야민의 원천개념이다. 벤야민은 19세기의 무상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종의 원형들로서, 다시말해 자본주의 산업경제의 형태들을 보다 투명한, 즉 맹아적 상태로 가시화시키는 역사 이미지들로 묘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사실과의 관련성하에 있는 묘사들이다. 문제는 “문학적 몽타쥬”이다. “나는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보여줄 게 있을 따름이다”(GS. V. S. 574)라고 말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원형들의 몽타쥬 구성이다. 벤야민이 요청한 원천의 구성 - 이것은 이념론Ideenlehre에 속하며 이 이념론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정신사적 내용을 객관적 배치로 구성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아도르노가 생각했듯이 아무런 이론적 사유도 없는 단순한 ‘자료들의 충격적 몽타쥬’가 아니라, ‘주해’의 형식에 기반을 둔 구성적 몽타쥬로서, 여기서 사실들을 지속적으로 매개하는 이론대신 작동되는 주해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각 원형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알레고리적 형태로 묘사해낸다. ‘미세한 개별적 계기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체사건의 결정(結晶)을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 알레고리적 몽타쥬는, ‘상투적인 자연주의’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상투적이고 천박한 자연주의를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차원에서 극복하는 태도인 것이다. 아도르노가 ‘초현실주의적 철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던 벤야민의 이미지적 몽타쥬 글쓰기는 총체성에 기반을 둔 보편사가 아닌 파국과 불연속의 연속 속에서 역사의 유일한 보편성을 보았던 그의 역사철학이 요청한 형식이었으며 이것은 언어실천적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빈번한 당착어법 Oxymoron의 사용을 가져왔다.
몰락에서 자연과 역사가 일치하는 것을 현상의 세계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폐허이다. 한 때 견고했던, 정신이 성공적으로 창조작업을 수행한 결과였던 그 실체의 파편은 자연과 역사의 변증법적 교착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다. 즉 자연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 자체가 무상한 것으로 폭로되며 그럼으로써 그 가상성을 지적받게 되는 것이다. 가장 새로운 것 또한 ‘경직된 태고의 풍경’을 품고 있다는, 즉 자연의 순환의 법칙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비판적 시각은 파리를 통해 19세기의 태고사를 읽어내고자 하는 『아케이드』 작업에서도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바로크 비극의 연구가 17세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자 하는 시도라면 『아케이드』작업은 19세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두 세기 간의 유사성은 몰락 - 자연사 - 알레고리 등의 방법론적 기제를 통해 확인된다. (GS. V, S. 133 참조) 기술이 가져다 준 놀라운 승리의 전시품들은 폐허의 잔해로, 다시 말해 몰락과 쇠퇴의 징후로 읽힌다. “역사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이해가 반드시 구체성의 값을 치루고 얻어져야 하는 것인가?”(GS. V, S. 575)라는 질문을 하면서 체계적 기술 대신 몽타쥬 기법을 취했던 벤야민은 스스로 아케이드를 산보하는 산보자가 되어 폐허의 잔해를 수집한다.
Ⅲ. 2. 상품 -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적 이미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소비경제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상품들은 일종의 마술환등으로서 시각적 착각에 기꺼이 빠져드는 소비대중과 날마다 환영적 유희를 벌인다. 기술에 의해 모든 예술작품이 복제되는 시대에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성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 위상을 지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시된 물신의 형태로서 상품으로 변화된다. 값이 곧 상품의 상징적 가치가 되어버리는, 새것이라는 특성 자체가 곧 물신이 되어버리는 이 소비자본주의 공간에서는 역사자체가 일종의 상품형태를 묘사하는 표현이 되어버린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자본의 경제적 분석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철학적 천착에 몰두했던 벤야민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시장의 상품이 아닌 쇼윈도우에 전시된 상품이었다. 사용가치 뿐 아니라 일체의 의미를 상실한 채 단순한 재현적 가치로서만 존재하게 된 이 전시상품들을 벤야민은 진보라는 판타스마고리의 원형들로서 읽어내고자 했다. 벤야민이 파리의 건축물 <아케이드>와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상품들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벤야민은 <아케이드>라는 구체적인 근대의 건축물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전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고대 건축물의 인용 및 철제와 유리의 재료를 통해 이미 포스트 모던적 건축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아케이드는 19세기에 당시 유행하던 세계 박람회 전시장과 더불어 산업과 기술의 신화적 힘을 마음껏 과시하며 상품자본의 원형적 성전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20세기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고대 신전의 폐허처럼 먼지 쌓인 물건들을 쇼윈도우에 진열하고 있는 파리 아케이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진보와 상품미학의 속도가 어떻게 인간의 문화적 관리능력을 앞지르고 있는가를 통렬히 보여주며 소위 진보이념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이렇듯 문제는 새로운 생산수단과 집단적 욕망의 판타지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는 여전히 자본주의 관계의 족쇄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욕망의 판타지는 신화적이고 무의식적이지만 그러나 인류의 태고적 집단 소망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해석학적 의미를 지닌다.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신화가 구원의 요소로 등장하는 까닭은 의미충만한 유토피아적 사회가 역사상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신화적 이미지로만 상상, 서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적 소망 이미지가 융C.G.Jung 식의 비변증법적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고 역사의 변혁을 위한 변증법적 이미지로 되기 위해서는 독해자의 변증법적 해석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것을 벤야민은 꿈의 모티브로 설명한다. 즉 사람의 꿈 속에서 욕망과 공포가 수수께끼같은 형태로 나타나듯이 한 시대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행과 건축물, 키취와 광고 등의 암호를 통해 드러내는바 이 암호들을 어떤 하나의 의미로 독해하는 것, 그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자의 과제라는 것이다.
“19세기는 개인의식이 성찰적으로 점점 더 증가하는 반면, 집단의식은 점점 더 깊은 잠속에 빠져드는 시간의 지대이다. 그러나 이제 잠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케이드에서 자신의 내부로 빠져들어가는, 꿈꾸고 있는 중인 집단에게도 일어난다. 즉 잠자는 사람이 - 이점에서는 정신병자와 비슷한데 - 자신의 몸을 대우주적으로 여행한다면, 그리하여 ... 그의 몸 내부에서 나는 소리나 느낌, 혈압, 내장들의 움직임, 맥박 그리고 근육의 느낌이 대단히 첨예한 내적 감각들을 통해 ... 환상이나 꿈의 장면들을 만들어낸다면, 꿈꾸는 집단도 그러한 것이다. 유행과 광고, 건축물과 정치에 나타난 19세기를 19세기가 꾼 꿈의 결과로 해석해내기 위해 우리는 수면중인 집단의 환상과 꿈의 이미지를 추적해야만 한다” (GS. V. S. 491).
가장 새로운 것이 이미 낡은 것일 수 밖에 없는 교환논리 속에서의 상품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유행이다. 유행의 반복성은 지금 현존재의 의미없는 반복으로서 근대의 신화적 시간성 판타스마고리이다. 예술 또한 이 메카니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세기에 이미 뚜렷한 자취를 남기기 시작한 경제력의 미학화에 봉사하기 시작한 유행과 예술이 벌이는 제의(祭儀)는 벤야민에게 있어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교환가치의 절대화에 복종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옥같은 모습 그 자체의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그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무상함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유행은 방금 탄생한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파괴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유행은 새로운 것의 영원한 회귀이다”라고 말하며 “그럼에도 바로 그 유행에 구원의 동기가 있을까?”(GS. I, S. 677)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물론 부정성 속에서만 답변될 수 있을 뿐이다. 물신화된 상품들의 찰나적 자기전시의 반복적 성격을 ‘영원한 회귀’라는 신화가 표현해 주고 있다면 이것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뿐인 진보라는 신화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보의 개념은 파국의 이념 속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계속해서 그렇게’ 지속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국이다. 파국은 목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은 “지속되는 파국 가운데에서의 가장 작은 도약에 매달리게” 된다.(GS. I, S. 683) 이 작은 순간이 바로 역사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산뜻한 경악”(GS. IV, S. 434 f.)이라고 벤야민이 표현한 바 있는 이 깨어남은 그러나 순간적으로만 가능하다. ‘구원의 찰나적 선취’라는 유대교의 사상적 전통에 빚지고 있는 벤야민의 이러한 구원의 구상은 범상한 일상의 문맥에서 볼 때 역설적으로 대담한 정치적 결단력과 지속적인 정신의 깨어있음을 요청한다. ‘언제나 극단적으로, 결코 일관되지 않게’, ‘모든 결정적인 안타는 왼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등의 명제가 후기 벤야민의 정치적 무정부주의 및 그 철저한 결단력을 증명하고 있다면, 유대교의 전통에서 계시의 교리 대신 경건함의 태도를 선택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또한 윤리적이기도 한 것이다. 유대교의 메시아주의는 역사의 매 순간을 메시아가 나타나 그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문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탈무드는 현세의 삶의 타락이 그 마지막 밑바닥에 다다랐을 때 메시아가 나타난다고도 지적한다. 역사를 중단없이 죽음에 내맡겨진 자연사로 간주하는 벤야민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파괴적 동력이 강한 것처럼, 참된 역사 서술에서 구원의 동력은 강하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순간이 역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역사의 깨어남에 역점을 둠으로써 벤야민은 꿈의 영역을 고집했던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길을 간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꿈 속에서의 자동기술이 아니라 꿈에서의 깨어남을 위한 구성적 몽타쥬였던 것이다.
몰락의 시대일수록 파편을 알레고리적으로 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이 증대한다. 그리고 벤야민에 의하면 그가 살고 있는 20세기 초는 바로크 시대와 마찬가지로 몰락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관건이 되는 것은 의미를 많이 내장하고 있는 극단적인 파편들을 제대로 수집하여 새로운 구성물로 형상화시키는 일이다. 물신적 성격 속에는 기만과 거짓, 그리고 조작 뿐만 아니라 꿈 속에서인양 유토피아적인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상품의 전시를 위해 배열된 대도시는 꿈에서 깨어나고자 노력하는 시대의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는 인식, 이것이 바로 ‘19세기의 태고사’로 기획되었던 미완의『아케이드』집필을 관류하는 흐름이었다.
“발자크는 부르주와지의 폐허에 대해 말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에 와서 비로소 이 폐허에 대한 시야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꿀 뿐만 아니라 꿈꾸면서 깨어나고자 노력한다. 모든 시대는 자신의 종말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으며 - 이미 헤겔이 인식했듯이 - 꾀로써 그 종말을 전개시킨다. 상품경제의 충격과 함께 우리는 부르주와지의 기념비들을 아직 그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폐허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GS. V, S. 59).
Ⅳ. 현대사회와 예술 : 매체적 관점에서 본 벤야민의 예술론
벤야민의 미학연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그의 기본태도, 그리고 미적 대상의 관찰은 궁극적으로 진리발견에 이른다는 미적 수용과 철학적 이론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예술이론가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벤야민은 문학분석의 본질은 비평에 있으며 이때 비평의 기관은 철학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예술작품은 역사철학적 성찰의 중요한 교차점으로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경향들이 자기표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된다. 이로써 예술작품은 한 시대의 비판적 인식이 가능한 매개체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의 기관이 되는 것이다. 사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리는 그러나 진리로서 또한 시간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그의 이러한 생각은 아도르노 및 마르쿠제 그리고 이후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미학이론이 공유하는 기본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벤야민은 미학Ästhetik을 본래 그리스어 어원인 aisthesis의 의미대로 ‘감각인지에 대한 이론’으로 파악함으로써 시민계급의 전통적인 미학이념의 경계를 뛰어넘어 매체이론적 미학의 새로운 면모를 준비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학적 생산조건인 기술의 발전과정에 따라 변모하는 감각인지와 그에 따른 표현가능성을 추적함으로써 기존의 사회관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유도해내기보다는 ‘현재의 생산조건하에’ 예술의 일반적인 발전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론적 개념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하버마스에 의해 ‘구제비평 die rettende Kritik’이라는 말로 개념화된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데올로기 비판적 비평 die ideologiekritische Kritik’과는 달리 궁극적으로 역사전통의 비판과 수정이 아닌 그것의 보존, 즉 구제에 기여하게 된다.
이미 30년대 이래로 예술을 매체기술적 측면에서 고찰하기 시작한 벤야민은 인간이 이룩해낸 문화적 업적을 역사적 변화 속에 있는, 다시말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지양되는 기술(技術)로서 이해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야기 전통의 소멸과 소설 및 저널리즘의 출현을 분석하고 있는 『이야기꾼』에세이, 그리고 예술작품의 존재위상을 그것의 발생맥락과 기능, 그리고 생산수단 하에서 질문하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다.
19세기를 특징짓는 예술적 재현의 위기를 감각인지 자체의 위기로 파악했던 벤야민에게서 예술 및 문화는 경험이론전반에 해당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경험의 빈곤현상과 예술에서의 영적(靈的) 분위기의 쇠퇴현상은 동일한 문맥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포착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것은 또한 예술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중의 등장과 함께 필수불가결해진 전격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생철학이 주장하는 감정이입 체험의 반대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험은 벤야민의 후기 작품에서 역사 및 사회의 노동구조에서 도출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집단적 과거와 개인적 과거의 일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기억이다. ‘이야기’가 가능하던 전(前)산업사회에서는 ‘영혼과 눈 그리고 손의 수공업적 합작’에 의해 살아내진 삶의 실천적 내용으로 가득한 경험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왔으며 이것이 곧 공동체적 집단기억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파시즘의 파괴 메카니즘은 이러한 경험과 기억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 또한 기술을 통한 예술작품의 복제가능성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인 예술작품의 영적 분위기를 현저하게 감소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가상’을 본격적으로 동요시키기 시작했다. 미학의 정치화와 유물론적 인류학의 적극적 전개를 주창했던 벤야민의 미학이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기술의 진보와 대중의 등장을 어떻게 올바른 의미에서의 미학의 정치화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미학의 정치화를 가로막고 있는 기존의 정치, 경제적 질서체계를 어떻게 하면 혁명적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벤야민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학이론이 다루어야 할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술은 신화를 파괴할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자본주의의 파시즘적 오용은 이러한 해방적 가능성의 진로를 차단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신화를 창출할 위험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신화와 보수적인 정신태도의 연계가 가져온 심각한 결과가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가시화된 것이 전쟁이다. 융어 Ernst Jünger의 『전쟁과 전사들』은 이것의 대표적인 문학적 예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술을 통한 자연정복이 지배계급의 이윤추구 욕망을 은폐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기술이 현실적 의미를 지닐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사회적 문제가 정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여기서 벤야민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기술을 통한 신화의 유물론적 파괴라기보다는 몰아적이고 집단적인 ‘진정한 우주적 경험’이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계몽된 주체의 합리성보다는 역사적 주체가 혁명적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정서적 에너지였다. 기존의 고립된 예술이념에서 해방된 환타지의 형상원칙들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초현실주의와 영화에 대해 그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감각인지의 기능이 점점 더 기술의 발전에 의해 규정되기 시작한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매체문화로 등장한 영화는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의 보편적 매체라는 적극성과 문화적 유산이 지니는 전통적 가치를 청산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성의 원칙에 기반을 둔 서구 근대화 과정을 이끈 주요매체가 활자였다면 이제 새로운 현실인식의 매체로 등장한 카메라의 조절가능한 눈이 시각의 무의식 영역을 확장시킨다. 필름이 수행하는 것은 이전의 활자와는 달리 더 이상 의미독해 내지는 추구가 아니라 감각의 심화이다. 오버랩, 클로즈업, 저고속 촬영, 멈춤, 몽타쥬 등의 기술을 통해 생산된 단속적인 리듬의 장면들은 한편으로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와 뉴스의 물결에 상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도시거리를 지배하는 교통과 인파의 물결에 상응한다. 영화는 벤야민에 의하면 이미 현대적 기계들 속에 각인되어 있던 인지형태의 후사(後史)적 전개이다. 단속적으로 밀려드는 영화장면들의 충격적 효과는 단속성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더니즘의 긴급한 욕구에 상응하는 것이니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단속적으로 밀려드는 충격에 익숙한 대도시 현대인들은 극장에서 정신집중이 아닌 정신분산이라는 수용적 태도를 바탕으로 충격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더 이상 시민사회의 예술작품이 그러했듯 이론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 연습의 도구이다. 카메라에 의해 조각조각 분해된 가상들은 이제 다른 목적으로 위해 재활용될 수 있게 된다. 특수기술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킴으로써 익숙한 사물의 숨겨진 세부사항을 들춰내 물질의 전혀 새로운 구조를 가시화시키는, 다시말해 ‘사물세계의 심리분석’을 과학적으로 수행하는 영화를 통해 이제 일상의 지옥도는 해방적으로 폭파되어 알레고리적 인식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술집과 대도시의 거리, 사무실과 가구가 있는 방, 정거장과 공장 - 지금까지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것들 속에 구제할 길 없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것이 영화가 등장함에 따라 이러한 감옥의 세계가 10분의 1초의 다이나마이트로 폭파됨으로써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감옥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찬 여행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GS. I.2, S. 499 f).
이처럼 영화는 벤야민에게 범속한 트임, 즉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매체로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매체의 이러한 기술적 특성은 사회가 기술을 사회의 유기적 일부로 병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 때 야만적인 정치의 미학화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으로, 또는 자본주의의 파시즘적 전략으로 오용될 수 있다. 새로운 시간경험의 훈련장으로서 극장이 갖는 의미는 그러므로 올바른 역사인식에 입각한 사회변혁적 유토피아 전망에 의해 수반될 때 비로소 온전히 실현될 수 있으니 이것은 이제 막 1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가 꾸준히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Zusammenfassung
Geschichtsphilosophie und ästhetische Theorie bei W. Benjamin
Kim, Young-Ok
Walter Benjamin(1892-1940) kommt das Verdienst zu, die Perspektive der Postmoderne in die starren Denkmuster des Modernismus eingeführt zu haben. In der Spätphase der Moderne übt er scharfe Kritik an einem “Moderne-Projekt”, das sich dem naiven Glauben verschrieben hatte, von der Idee eines linearen Fortschreitens der Geschichte ausgehen zu können.
Der Begriff, der die Diagnose Benjamins zur modernen Geschichtsauffassung am einprägsamsten zum Ausdruck bringt, ist der der “Naturgeschichte”. Schon in seinem frühen Werk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entworfen 1916, verfaßt 1925) entwickelte er eine Konzeption von Naturgeschichte, die die geläufige, am Fortschrittsglauben orientierte Geschichtsauffassung radikal in Frage stellt, die seit Kant bzw. Hegel die europäische bürgerliche Gesellschaft ideologisch begleitet hatte.
Die Erkenntnis, daß das Verhältnis von Natur und Geschichte nicht weiterhin im Sinne eines Gegensatzes von Statik und Dynamik zu verstehen sei, begegnet verschiedentlich auch bei Vertreter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wie bei Marx selbst oder bei Lukάcs, auch bei Adorno. Die dualistische Denkweise, die die Natur als eine statische Wiederholung des ewig Immer-Gleichen ansieht, die Geschichte dagegen als Fortschritt im Bewußtsein der Freiheit begreift, mußte nun einer geschichtlichen Haltung Platz machen, die versucht, das zur zweiten Natur Erstarrte in eine geschichtliche Flexibilität zu verwandeln, indem sie das naturhaft Wilde und Statische als etwas begreift, das seinerseits in die Dynamik der Geschichte involviert ist.
Für Benjamin, der die zweite Natur in verstärktem Maß marxistisch versteht, bedeutet Produktionskraft nicht nur Technologie, sondern generell die materielle Welt, einschließlich der Menschenwelt, die sich nun in einer durch Technologie völlig veränderten Lage wiederfindet. Er betont, daß das Prähistorische nur im historisch Neuen erkannt werden kann, und hier liegt der Grund dafür, weshalb er die archaische Form der Urgeschichte C.G.Jungscher Provenienz so entschieden ablehnte. Wenn Benjamin Begriffe, die im Kontext einer organischen Naturauffassung begegnen, wie Produktivität, Vergänglichkeit und Verfall, auf die ‘neue anorganische, mit Hilfe des Industrialismus entstandene Natur’ anwendet, so tritt damit eine radikal neue Sichtweise zutage, und eben in dieser Aspektverschiebung zeigt sich dann das ganze Paradoxon des analysierten Sachverhaltes. Benjamin versucht, die ‘neue’ Natur der Technologie in eine revolutionäre, utopische Kraft umzuwandeln und sie dadurch zu aktualisieren, daß er die Vorgeschichte des Bürgertums als eine prähistorische liest. Und dies bedeutet, daß er die geschichtliche Natur in ihrer radikalen Widersprüchlichkeit begreift, d.h. einerseits als Verfall und Tod, andererseits als potenzielle Kreativität und Möglichkeit zur Veränderung. In dieser dialektischen Sichtweise kommt die Ambivalenz der Benjaminschen Haltung angesichts des Versprechens, das die Technologie zu geben scheint, zum Vorschein.
Die kapitalistische Moderne, die die rapide Entwicklung der Industrialisierung wie auch der Verstädterung vorangetrieben hat, beschleunigt zudem noch einen anderen Prozeß, nämlich den, daß Arbeit und Sexualität zur bloßen Ware verkommen. In der Sichtweise der Wahrnehmungsästetik lassen sich all diese Vorgänge als Verarmung von Erfahrung zusammenfassen. Der Prozeß des Verlustes an authentischer Erfahrung, an Aura, ist nur denk- und vorstellbar im Zusammenhang des Warenfetischismus. Das Zeitalter des totalen Warenfetischismus, der keine Dauerhaftigkeit - notwendige Vorbedingung für jegliche Erfahrung, insbesondere für die ästhetische - zuläßt, entziffert Benjamin als einen Alptraum, in dem die europäische bürgerliche Gesellschaft ge- und befangen ist. Die Aufgabe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sieht er gerade darin, Hilfestellung zu leisten, um das kollektive Bewußtsein der Menschen aus diesem Alptraum aufzuwecken und beim Erwachen blitzartig die utopischen, schon in sich Erlösungskraft enthaltenden kollektiven Traumbilder der Urgeschichte erkennbar zu machen. Hier schlägt er einen völlig anderen Weg ein als die Surrealisten, die im traumhaften, automatisch sich vollziehenden Schreiben utopisches politisches Potential einfangen wollten. Von seiner geschichtsphilosophischen Sicht aus erscheint die montageartige und allegorische Konstruktioen der Abfälle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 und Konsumgesellschaft gerade im Zeitalter des Verfalls um so wichtiger. Eben dieser Aufgabe als historischer Materialist gerecht zu werden, war der Leitgedanke für sein “Passagen-Projekt”, ein großangelegter Plan, der letzten Endes unvollendet blieb.
출전: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5호 (2000년 10월)
학회URL: http://buechner.germ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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