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과 상상력 -흄과 칸트를 중심으로
송 명 국(서울대 철학과)
I. 머리말
서양 철학사에서 상상력에 대해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상상(phantasia)'을 '지각에 근거해 발생하는, 지각과 유사한 일종의 운동' 또는 '판타스마타(phantasmata)가 나타나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나아가 그는 상상력을 지각도 아니고, 사고 또는 믿음도 아니며, 지각과 믿음의 결합도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상상력에 독립된 위치와 기능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력을 독립된 능력으로 취급한 후, 그의 뒤를 잇는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은 상상력과 지식의 관계였다. 그들은 상상력을 지식의 형성에 도움을 주는 요소로 간주하거나, 인간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근원으로, 또는 지식과 오류 모두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상상력의 기능을 지식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많은 철학자들이 오류의 근원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지식의 면에서, 특히 지식에 대한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성향이 오류의 원인으로 간주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상상력을 '심상(image)'을 산출하는 기능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의 기능을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간 경험의 특성과 관련하여 놓치기 쉬운 상상력의 기능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식은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경험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직접 주어진 것' 뿐이다. 그러나, '경험'을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직접 주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해서 우리는 그러한 요소들을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주변적인 요소들은 그렇게 처리해도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에는 근거없는 것으로 배제해 버릴 경우, 경험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들에 직면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흄이 전자의 길, 즉 직접 주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정당화할 수 없는 요소로 간주하고 회의주의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에 직면해서 그러한 요소들을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간주하여 초월 철학의 길을 간 사람이 칸트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에는 흥미로운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곧 그들은 모두 경험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없는, 그러나 경험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기능을 '상상력'에 돌렸다는 점이다.
Ⅱ. 흄과 칸트에서의 상상력
1. 흄에서의 상상력
1.1. 관념의 일반적 사용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던 흄은 마음의 내용, 곧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었다. 인상은 기억 또는 상상력에 의해 관념으로 재생된다. 기억과는 달리 관념들을 임으로 분리, 결합할 수 있는 상상력은 보통 일정한 원리에 따라 활동하는데, 상상력이 이러한 원리에 따라 단순 관념들을 결합한 결과로 형성된 복합 관념 중의 하나가 실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원칙에 따라 실체에 대응하는 인상이 무엇인가를 조사해 보면 그러한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체라는 관념은 상상력에 의해 결합된, 그리고 그에 일정한 이름이 부여된, 단순 관념들의 집합일 뿐이다. 실체라는 관념에 대한 흄의 분석은 '일반 관념'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함축을 가지는데, 곧 일반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념은 인상에서 유래하며, 인상이 개별적이라면, 일반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흄이 해명해야 할 문제는 '이름이 어떻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가'라는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답을 흄은 실체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제시한다. 우리는 특정한 이름을 부여했던 인상들의 집합과 유사한 집합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이름을 유사한 대상들에 확대 적용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이것은 습관이 된다. 이러한 습관이 형성된 후에는 거꾸로, 이름을 들었을 경우 상상력은 그 이름이 적용될 수 있는 여러 대상들 중, 특정한 대상에 대한 관념을 상기시킨다. 물론 상상력은 이름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을 모두 재생해 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나의 이름은 모든 관념을 재생해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적용되는 대상들을 통해 획득한 습관만을 되살아나게 한다(T20). 상상력은 이렇게 개별 관념들을 부분적으로만 재생해 냄으로써 그 작업을 단축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관념들을 제시하는 상상력의 작용은 '천재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어서(T24),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다. 비록, 습관과 관련된 상상력의 이러한 작용을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지만(T22), 흄은 이로써 본성상 개별적인 관념이 어떻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가에 대한 답은 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개별 관념들은 상상력 안에서 여러 개별 관념들을 상기시키는 습관을 통해 개별 관념들과 관계를 맺는 일반 명사에 부속됨으로써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1.2.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
실체가 개별 관념들의 단순한 집합일 뿐이라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곧 우리가 인상들의 원인으로 가정하는 '물체' 또는 '대상' 개념이 문제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상'이란 것이 우리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식이 지각에만 한정된다면 대상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각하는 동안 뿐이다. 우리는 지각과는 별도로 대상들이 존재하는지, 또는 어떻게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과 대상을 구별하고, 대상이 지각하지 않는 경우에도 독립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흄은 이러한 믿음을 형성하도록 한 인식 주체의 능력의 후보로 감관, 상상력, 이성을 든다. 먼저, 감관이 주는 지각은 일시적이고 단속적이기 때문에 감관이 그러한 믿음을 산출한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들이 지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감관에 나타난 것 이상의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어떠한가? 이에 대한 흄의 설명은 다소 복잡하다. 그가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을 '어리석은' 대중들의 믿음과 '현명한' 철학자들의 체계로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들이 지각과 대상을 혼동하여 지각 자체에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존재를 귀속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지각과 대상을 구별한다 해도, 하나의 존재만을 지각하는 대중들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T202). 대중들의 견해를 이렇게 파악한 것은 다소 의아스럽다. 대중들은 누구도 지각한 것이 곧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각과 대상을 구별할 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각이 단속적이라는 사실에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단속적인 것은 지각일 뿐, 대상들은 지각하지 않을 때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흄은, 대중들은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별, 현상과 실재의 구별과 같은 철학자들의 논변 같은 것은 알지 못하며, 보통 현상을 그대로 실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견해를 이렇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각이 지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며, 아무리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대중들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모순적인 사고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중들의 견해에 대한 흄의 평가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러므로 그에 근거한 서술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제기한 문제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각들의 단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대상들이 지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의미있는 물음이며, 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이성에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지각과 대상을 구별하고 지각에는 단속적인 존재를, 대상에는 지속적 존재를 귀속시킨다. 그러나 이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를 추론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통한 것이다(T212). 따라서, 지각과 대상의 관계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의 결합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지각뿐이다. 따라서, 지각으로부터 대상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렇다면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이 이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의 원인을 감관에도, 이성에도 돌릴 수 없다면, 그러한 신념의 원인을 상상력, 보다 정확하게는 항상성과 정합성이라는 인상들의 성질과, 불완전한 항상성과 정합성을 완전한 정도까지 끌어 올리려 하는 상상력의 경향성 사이의 일치에 돌려야 한다. 지각들이 유사할 경우, 상상력은 그들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면서 시간적으로 불연속적인, 따라서 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지각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산출한다. 이 경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감각이나 이성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각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고, 나아가 이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의 원인이 상상력에 있다는 말은 곧 이러한 신념은 정당화될 수 없는 신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는 하늘이 밤 사이에 소멸했다가 새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제 보았던 동일한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감관이 제시해 주는 바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이성의 추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사성과 동일성을 혼동하고 지속적 존재라는 허구를 믿도록 하는 상상력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회의는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지만(T218), 우리가 충분히 부주의하고 무관심하다면, 상상력의 이러한 작용에 힘입어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1.3. 상상력의 보편적 기능과 불규칙한 기능
상상력에 대한 칸트의 이론을 탐구하기에 앞서, 흄이 상상력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흄은 상상력의 기능을 보편적인 기능과 불규칙한 기능으로 나눈다(T225). 보편적인 기능은 모든 사고와 활동의 토대이며, 그러한 기능이 제거된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너지게 된다. 반면 상상력의 불규칙한 기능은 필수적인 것도, 유용한 것도 아니다. 상상력의 보편적인 기능은 칸트가 말한 초월적 기능을 연상시킨다. 흄도 칸트와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기능 중 일부는 경험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상상력에 대한 흄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경험적 지식은 마음의 내용만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탐구를 시작했으나, 경험적 지식의 여러 특징들은 마음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작용을 통해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물론, 흄은 이러한 생각을 밀고 나가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대신, 그러한 통찰들을 인과 추리의 본성과 물체 개념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을 보편적인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흄은 인과 추리에 근거한 상상력의 활동만을 보편적인 기능으로 본 것 같다(T109-10). 그렇다면 물체의 존재라는 신념은 가변적이고 취약한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관념들의 항상성 또는 유사성에만 근거한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또한 관념들의 정합성에 근거한 추론이기도 하며, 이에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인과 추론의 역할도 포함되어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칸트가 주장했듯이 물체, 즉 실체 개념은 인과 추리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경험의 근본 전제라는 점이다. 흄도 이 점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이것[물체의 존재에 대한 원리]을 그[회의론자]가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며, 그것을 우리의 불확실한 추론과 사변에 맡겨 두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물체의 존재를 믿도록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이다(T187)."
흄은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물체의 존재는 자명한 것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물체의 존재에 대한 신념 역시 상상력의 보편적인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상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지각 경험을 기술하기 위해 전제되는, '개념적 틀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실체라는 개념을 경험의 가능 조건 중의 하나로 파악한 이유이다. 흄이 가정했던 조각난 경험을 기술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경험에는 이미 감관이 제시하는 것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체의 존재를 믿도록 하는 상상력의 기능은 감관의 기능에 외적으로 덧붙여진 기능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한 상상력의 기능은 경험 자체에서 작용하고 있는 기능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칸트가 초월 철학을 통해 걸어 갔던 길이다.
2. 칸트에서의 상상력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초월 철학(transzendentale Philosophie)'이라 부른다. '초월적'이라는 말은 경험에 선행하는 동시에 경험 인식의 가능성과 관련되는 사태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칸트의 철학을 초월 철학이라 부를 때, 이는 경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식의 가능 조건을 탐구하고자 하는 칸트는 지식이 형성된 과정을 탐구했던 흄과는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 그는 지각 경험은 우연히 이러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이 아니라, 지각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력 역시 경험 인식의 조건을 탐구하는 철학에 걸맞게, 그의 이론에서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 조건으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2.1. 칸트의 개념론
2.1.1. 추론적 지성
잘 알려진, 칸트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개념과 직관의 구별은 우리 지성은 직관적이 아니라 추론적(diskutsiv)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대상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지성 이외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직관적 지성이란 무엇인가? 직관적 지성은 우선적으로 직관에 의해 촉발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을 말한다. 칸트는 이러한 지성을 '원형적 지성(intellectus archetypus)'이라 부른다. 이러한 지성의 직관 작용은 문자 그대로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은 인간 지성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의 지성은 직관하는 능력이 아니라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능력이다. 능동적으로 직관하는 지성이라는 모델이 인간 지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이 수동적으로 직관적일 수는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경험론은 감각 인상을 직관의 형식이나 지성의 원리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용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개념적인 인식 모델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모사적 지성이라는 모델이 적합하지 않다는 칸트의 생각은 선험적 종합 판단에 대한 그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지성이 전적으로 모사적이라면 우리는 경험적 지식만을 가질 수 있을 뿐, 종합적이면서 선험적인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선험적 종합적 지식은 지성이 대상을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는 대상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지만 직관을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지성의 모델을 찾았고, 그 결과 도달한 것이 바로 추론적 또는 논증적인 지성이다.
추론적 지성은 개념을 통해 사고하는 지성이다. 개념을 통한 사고는 대상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다. 개념이 간접적 표상이라는 사실은 우선 개념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개념은 비교, 반성, 추상을 통해 산출되며, 개념은 이 때문에 일반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개념이 대상에 간접적으로 관계하게 되는 이유이다. 개념은 여러 대상들의 술어가 될 수 있는 공통적 특징들을 통해 대상에 간접적으로 관계한다. 한편 개념이 간접적이라는 사실은 판단에서 하는 역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판단하는 능력인 지성은 개념을 사용하여 표상들을 통일하는데, 이 때 개념은 가능한 판단의 술어로 사용된다.
"개념은 가능한 판단의 술어로서 아직 규정되지 않은 대상의 어떤 표상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물체의 개념은 바로 그 개념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 예를 들면 금속을 의미한다. 개념은 이렇게 자신 아래 다른 여러 표상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표상들을 통해 대상들에 관계할 수 있기 때문에 개념이다. 그러므로 '모든 금속은 물체이다'의 예에서처럼, 개념은 가능한 판단의 술어이다(B94)."
그러므로 개념은 대상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표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계한다.
2.1.2. 규칙으로서의 개념
"개념은 …… 항상 보편적인 어떤 것이요, 규칙으로 쓰이는 것이다(A105)."
개념의 일반성, 그리고 개념이 판단에서 하는 역할을 통해 알 수 있는 개념의 간접성으로부터 개념에 의한 결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개념이 일반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개념이,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여러 대상들에 대한 통일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붉음이라는 개념은 붉은 사과, 붉은 꽃 등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대상들은 붉음이라는 개념 아래서 통일되어 있다. 다음으로, 개념이 가능한 판단의 술어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개념이 판단에 나타난 직관의 다양에 대한 통일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가시가 있는 붉은 잎을 가진 것은 장미이다.'라는 판단에 나타난, 붉음, 잎, 가시 등의 직관은 장미라는 개념 아래서 종합, 통일되어 있다.
칸트는 이러한 두 종류의 통일을 분석적 통일, 종합적 통일이라 부르고 분석적 통일은 종합적 통일을 전제한다고 말한다(B133). 무엇인가를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B130). 주어진 다양을 분석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전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지성이 그것들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은 종합을 전제한다. 분석이 종합을 전제한다는 사실, 즉 개념에는 이미 종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칸트로 하여금 개념의 일반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떠나 개념을 직관을 결합하는 규칙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수지성개념, 즉 범주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라이프니쯔에 이르기까지의 전통적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테고리아(categoria)'라는 말을 '술어'라는 뜻을 나타내는 철학 용어로 채택하고, 술어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10개를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10'이라는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범주 이론 자체도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중세의 학자들은 그가 제시한 10개의 범주를 완전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 이 점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 술어의 유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단지 언어 차원에서의 구별이 아니라, 실재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즉, 그들에게 범주는 존재자들의 유형을 나타내는 최고의 유개념을 의미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칸트는 범주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다. 그는 선험적 지식은 대상이 '현상'인 경우에만, 즉 범주가 마음에서 유래하여 대상에 부여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범주는 사물 일반의 보편적 술어가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대상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하는 특성, 즉 대상 일반의 개념을 의미했다.
칸트는, 대상의 직관은 범주를 통해 판단의 논리적 기능 중의 하나와 관련하여 규정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B128). 지성은 판단을 통해 판단의 형식을 산출한다. 지성은 이러한 판단의 형식을 개념에서 분석적 통일에 의해 산출하는데(B105), 지성이 산출한 서로 다른 판단의 형식들은 지성이 표상들을 결합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 다시 말하면 판단된 대상에 부여된 서로 다른 종합적 통일의 방식들이다. 이러한 판단의 형식들은 모든 판단에 나타나게 되는 필수적 계기들로서, 판단되는 데 사용된 구체적 개념이나 판단된 대상의 특별한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판단 형식에 이미 종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왜 칸트가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범주를 이끌어 내려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사고한다는 것은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표상들의 이러한 결합은 곧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성이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결합하는 방식으로서의 판단의 형식들이 개념, 즉 범주로 기능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의 의식 속에서의 표상들의 필연적 통일의 개념이 된다. 결국 범주란 판단을 위한 형식 또는 규칙이며, 그러므로 대상의 형식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고의 형식이다. 범주는 직관된 사물들을 포섭하는 개념이 아니라, 직관을 개념화하는 종합에 통일을 주는 개념이다. 개념을 이와 같이 규칙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물론 선험적 개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칸트는 순수지성개념 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을 규칙으로 파악하는데(A103, A105, B134 주 등), 이러한 생각은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2.2. 대상
"모든 현상은 다양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지각들은 마음 안에서 따로 떨어져 개별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감관 자신이 줄 수 없는 지각들의 결합이 필요하다.(120)."
칸트는 인식을 '비교되고 연결된 표상들의 전체'로 정의한다(A97). 인식은 표상들이 결합된, 하나의 전체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표상들의 종합(Synthesis)은 감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감관은 수동적인 개관만을 줄 수 있을 뿐(A94), 종합하거나 통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관 이외에 다양을 종합하는 능력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감성이 받아들인 직관을 개념에 따라 종합함으로써 의미 있는 경험의 대상으로 읽어 낸다. 그러므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합은 추론적 사고가 인식의 내용을 제공해 주는 감성적 직관과 결합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의 이러한 종합은 개념이 경험적일 경우 '경험적'이며, 선험적일 경우 '초월적'이다. 경험적 종합이란 연합(Association)의 경험적 법칙에 의존하는 '재생적' 종합을 말하는데(B152), 이는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우연적인 방식의 종합이다. 연합은 표상들의 종합을 위한 주관적, 경험적 근거일 뿐(A121-2) 표상들이 항상 그러한 방식으로 종합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나타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표상들의 종합이 단지 우연적일 뿐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왜 표상들은 규칙적으로, 흄의 표현을 빌자면 항상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나타나는가? 우리는 표상들 사이의 항상성과 정합성의 근거를 '대상'에 돌린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각' 뿐이라면, 표상들의 필연적 일치의 근거로 간주된 '대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직관의 다양에 종합적 통일을 주었을 때 우리는 대상을 인식한다고 말한다고 한다(A105). 이는 곧, 표상들의 필연적 일치의 근거로서의 대상이란 '표상들의 다양에 주어진 필연적, 종합적 통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인식이 지각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따라서 지각들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된 대상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대상이란 직관의 다양에 주어진 통일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직관의 다양에 주어진 통일이라는 말은 이러한 통일의 근거는 '의식'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에 따른 표상들의 연합의 객관적 근거를 현상의 규칙성 자체로부터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경험적 규칙성은 단지 사실만을 보여 줄 뿐, 필연성을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규칙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필연적 통일의 근거는 현상이 아니라 의식에 있으며, 이 인식 주체로서의 의식은 표상들을 종합, 통일하여 비로소 객관적 경험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경험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의식을 칸트는 '통각(Apperception)'이라 부른다.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이란 바로 통각의 원리에 따른 순수 종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합은 지성 자체의 원리에 따른 종합이며, 따라서 '생산적'이다.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를 통해 우리는 흄이 말했던, '감관에 나타난 것 이상의 것', 그리고 칸트가 말했던, '감관 그 자신이 줄 수 없는 지각들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상 개념은 사물이 아니라 주어진 직관을 결합하는 주체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므로 경험 인식에는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흄과 칸트는 경험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이란 주체의 이러한 결합이며, 이는 바로 상상력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3. 도식
칸트가 도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맥락은 동종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대상을 개념 아래 포섭할 때, 대상의 표상은 개념의 표상과 동종적이어야 한다(B176). 그러나, 순수지성개념은 경험적 직관과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순수지성개념이 직관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범주와 동종적이고, 한편으로는 직관과 동종적인 제 3자가 요구된다. 칸트는 이러한 제 3자를 '초월적 도식(transzendentales Schema)'이라 부른다(B177). 도식장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많은 주석가들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예를 들어, 워녹은 칸트가 개념의 소유와 적용을 분리함으로써 어리석은 문제를 만들어 냈다고 말하며, 베酛도 개념의 소유는 곧 적용능력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도식론이 불필요한 부분이거나 연역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은 도식론은 연역이 해결해야 할 문제 이외에 다른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 서 있다. 도식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연역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연역에서 다루고자 했던 문제는 지성에 근거를 둔 순수지성개념이 경험의 대상에 적용되는가의 여부였다. 그러나 칸트는 범주가 경험 대상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범주가 어떠한 방식으로 적용되는가의 문제를 계속 탐구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도식의 문제는 순수지성개념이 '어떻게' 직관에 적용되는가의 문제이며, 이것은 연역과는 구별되는 문제이다. 그는 단지 개념이 직관에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 조건을 명시함으로써 개념이 어떻게 직관에 적용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은 도식이 다루는 문제를 '판단의 문제'로 규정할 때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벨은「판단의 기술」을 통해 이와 같은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도식론에서 칸트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판단의 객관성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판단하는 주체의 역할을 강조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파악하고, 이를 '규칙의 지배를 받는 자발성(rule-governed spontaneity)'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모호하게 제기하고 있지만, {판단력 비판}에 가서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판단력의 초월적 이설'이라고 불렀던 바에 걸맞게, 도식장에서 칸트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판단'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식장은 연역의 성과를 바탕으로, 범주가 직관의 대상에 어떻게 적용되는가의 문제, 즉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식장이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왜 칸트가 순수지성개념의 도식과 경험적 개념의 도식의 필요성에 대해 모순되어 보이는 말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칸트는 순수지성개념의 도식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학문에서는 대상을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개념과 구체적으로 표상하는 개념이 이종적이지 않으므로, 개념을 대상에 적용하는 문제를 구명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고 말한다(B177). 그러나, 이와 달리 도식을 형상과 구별하면서 그는 감성적 개념, 즉 경험적 개념과 수학적 개념의 도식에 대해 이야기한다(B179-80). 칸트가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은 그가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과연 감성적 개념의 경우 도식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여럿 위의 하나(one over many)'로 표현되는 고전적 보편자 문제를 생각해 보자. 유명론적 입장에 따르면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유사함'과 관련하여 문제를 안고 있다. 유명론자들은 일반 관념을 얻게 되는 추상의 과정을 곧 보편자 문제에 대한 설명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대상들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가능한 답은, 예를 들면, 흰 눈과 백합이 유사하고, 백합과 흰 종이가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유사함이라는 관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유사함'을 보편자로 인정하도록 할 뿐이다. 다수의 대상에 적용된다는 특성이야말로 보편자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보편자 문제에 대한 버클리나 흄의 설명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보편자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개념의 보편성을 개별 관념들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념의 기원이 경험에 있다 하더라도 개념의 적용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경험적 개념의 경우에도 여전히 보편적인 개념과 개별적인 직관 사이에는 매개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칸트가 왜 경험적 개념의 도식을 논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경험의 대상이나 대상의 형상(Bild)이 개념에 도달할 수는 없으며, 개념은 상상력의 도식에 관계한다고 말한다(B180). 형상은 개별적인 반면, 개념은 일반적이다. 형상은 개념을 적용한 결과일 뿐, 개념의 의미나 대상에의 적용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이 경험적 기원을 갖는다 해도 개념은 여전히 도식 작용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순수한 감성적 개념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은 대상의 형상이 아니고 도식이다(B180)."
피핀은 경험적 개념의 도식에 대한 칸트의 이러한 설명은 흄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개념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한다. 흄은 개념이 감각 인상을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개념은 형상이 아니라 도식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개념은 비개념적인 것으로 환원됨으로써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오히려 비개념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다.
칸트는 초월 도식을 '제 3자'(B177), 또는 '매개적 표상'(B177)이라고 하기도 하고, '초월적 시간규정'(B178)이라고 하기도 하며, 범주적 규칙에 따른 '순수 종합'(B1812)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식장이 객관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 조건을 다루는 것이라면, 초월 도식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지성 개념의 사용이 제한되는 바 감성의 형식적이고 순수한 조건'(B179)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초월적 종합이란 이러한 감성의 순수 형식적 조건을 산출하는 상상력의 생산적 기능을 의미한다.
"상상력의 종합이 의도하는 것은 개별적 직관이 아니라 감성의 규정에서의 통일이다(B179)."
생산적 상상력의 이러한 통일을 바탕으로 개념은 직관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초월 도식은, '제 3자', '상상력의 산물' 등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개념적 사고와 감성적 직관의 공통적 특성에 대한 표현이며 현시라고 할 있다. 칸트가 초월 도식을 '초월적 시간 규정'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범주 및 현상과 동종적인 초월 도식은 범주가 대상 일반의 개념이라는 점에서 현상의 보편적 특징을 나타내야 하며, 이러한 특징을 우리는 시간에서, 즉 시간이라는 형식 아래서 주어진 경험적 대상이 반드시 지니게 되는 특성으로서의 초월적 시간 규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상 일반의 개념으로서의 범주가 적용되는 조건으로서의 초월 도식이 모든 감성적 직관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이라면, 경험적 개념의 도식도 특정한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의 공통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식과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순수 감성적 개념의 도식을 포함하여, 경험적 개념의 도식을 "한 개념에 그 형상을 부여해 주는 상상력의 일반적인 방법의 표상(B179-80)"이라고 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선험적 개념의 도식이든 감성적 개념의 도식이든, 도식은 개념과 직관 사이의 공통적 특성에 대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Ⅲ. 지각에서의 상상력
지금까지 상상력에 대한 흄과 칸트의 주장을 각각 두 가지 면에서 살펴 보았다. 흄은 상상력에 본성상 개별적인 관념이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그리고 단속적이고 일시적인 감각 인상들을 넘어 지속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라는 신념을 형성하도록 하는 기능을 부여했다. 칸트는 상상력의 기능을 초월적 기능과 경험적 기능으로 나누었다. 상상력은 초월적 종합을 통해 실체라는 관점에서, 경험적 종합을 통해 경험 개념 아래서 지각 대상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감관이 제공해 주는 지각은 생멸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각을 바탕으로 독립적이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가정하고, 그러한 대상을 분류하여 이름을 부여한다. 흄의 분석이 보여 주는 바는 경험이 지닌 그러한 특성이 대상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지각 경험을 이루고 있는 특성들은 지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라, 받아들인 지각을 인식 주체가 조직하고 질서지운 결과 형성된 것이다. 자연은 말하자면, '완성되지 않은 감각적 밑그림(unfinished sensory sketch)'만을 제공해 주며, 우리는 역시 자연이 제공한 자연적 '성향' 또는 주관의 '형식'에 의해 그 밑그림을 완성한다.
흄과 칸트는 다같이 자연이 제시한 밑그림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기능의 중요한 일부를 상상력에 돌렸다.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경험의 두 가지 특성을 '종류'와 '대상(또는 개체)'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지각들을 일정한 '종류'로 파악한다 함은 개념을 사용하여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각들을 지속적 '대상'으로 파악한다함은 자기 동일성을 지닌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상상력 : '비현실'을 보는 능력
흄이 지속으로 존재하는 물체에 대한 신념의 원인을 감관에 돌릴 수 없다고 한 이유는 그러한 신념에는 감관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흄이 이러한 신념의 원인을 상상력에 돌렸을 때, 이는 상상력이 실제의 지각이 없을 때에도 상상적 지각을 산출함으로써 단지 유사한 지각들을 동일한 지각으로 간주하게 하고, 나아가 지속적 존재라는 신념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가? 칸트의 이론에서도 지속적 존재라는 관점에서 경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상상력이 현실에 없는 지각을 산출한 결과인가?
'상상(想像)'이라는 말은 '모양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상상에 의한 상은 현실적인 상이 아니라 '심상(心象)'이다. 그리고 심상이라는 말을 시각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청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상상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심상과 관련되어 쓰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상상이라는 말은 단지 짐작하거나 가정을 하는 경우에도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의 역할을 하며 노는 아이의 경우, 그들이 그에 해당하는 심상을 그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상상(력)이라는 말은 예술 작품의 창조나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독창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뜻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상상(想像)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정신적 상과 관계되어 쓰인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여러 쓰임새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상상이라는 말의 다양한 쓰임새들과 상상력의 여러 기능들을 포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상이라는 말을 심상과 관련해서만 생각한다면, 그리고 상상력을 심상을 산출하는 능력으로만 간주한다면, 상상력에 대한 칸트의 서술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게 될 뿐더러, 그러한 해석은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칸트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지성과 감성을 매개하여 지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았던 칸트가 현재의 지각에 다른 심상을 덧붙침으로써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의 지각에 덧붙여진 심상 역시 감성적 요소이며, 지식을 감성적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입장에 반대했던 칸트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상상력에 대한 좀더 넓은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감관에 나타난 것 이상의 것을 본다'고 했던 흄의 말에서(T189), '직접적으로 나타난 사태의 주관적 측면 이상의 것을 본다'고 했던 스트로슨의 말에서, 그리고 '시야에 나타난 것 이상의 것 본다'고 했던 영의 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주어진 사태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비현실을 보는 능력'으로 정의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칸트의 이론에서 비현실을 보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은 심상을 산출하는 능력이라기보다는 감관에 주어진 것을 질서짓고 해석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지각 경험에도 상상력이 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지각에서의 상상력과 창조적 상상력
'비현실을 보는 능력'이라는 상상력에 대한 정의는 예술에서 나타나는 창조적 상상력의 기능도 포괄할 수 있을까?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나눈다. 인식에 관한 판단에서 기능하는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이다. 그러나, 미에 관한 판단에서 기능하는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력이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개념을 통해 대상을 규정하지 않는다. 미적 판단은 표상들을 대상이 아니라 주관에 연결시키는 판단이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대상을 지성의 비규정적 개념 아래서 파악하거나, 이성의 비규정적 이념 아래서 파악한다. 지각에 대한 개념 판단에서 상상력의 역할은 현전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본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제, 미적 판단에서의 상상력의 활동도 역시 동일한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지각에서도 상상력은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보지만, 지각에서 상상력은 감각 세계에, 그리고 개념에 다소 매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좀더 자유로운 능력이 된다. 규정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지성의 개념에 따라 활동함으로써 지성에 봉사한다. 그러나 반성적 판단에서는 상상력은 대상을 포섭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상력은 다만 주어진 표상들을 자유롭게 결합해 봄으로써 포섭할 보편을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이 발견되었을 경우 상상력의 활동은 지성과 일치하게 되며, 이 경우에는 지성이 상상력에 봉사하게 된다. 말하자면, 상상력은 감각 세계를, 그리고 감각 세계를 질서짓는 지성의 개념마저 넘어서는 것이다.
지각판단과 미적 판단에서의 상상력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 곧 둘이 별개의 것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 판단에서의 상상력의 활동을 현전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곧 인간의 시각으로 감각 지각을 구성하여 고유한 세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이 다시 지각 판단을 통해 형성된 감각 세계마저 넘어서려 할 때, 여기서 '비현실을 보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의 동일한 활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윤동주가 십자가에 햇빛이 비치는 모습에서 "걸려 있는" 햇빛을 볼 때, 파운드가 지하철 안의 사람들의 얼굴에서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Petals on a wet, black bough)"을 볼 때, 그리고, 고호가 자신의 침실을 약간은 기묘한 모습으로 화폭에 옮겨 놓았을 때, 우리는 감관이 제시하는 조각난 인상들을 넘어 지성의 개념에 따라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의 활동과의 충분한 유사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Ⅳ. 맺음말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지각들을 파악함에 있어서나, 상상력이 상상적 지각을 산출한다는 흄의 견해는 다소 소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흄의 설명에서 인식의 특성에 대한, 그리고 인간 능력의 하나로서의 상상력에 대한 중요한 생각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은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각에는 이미 주체의 능동적인 작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서 기능하는 주요 능력 중의 하나가 상상력이다. 한편, 지각에 포함되어 있는 해석 작용으로서의 상상력의 기능은 상상력의 고유 영역으로 말해지는 예술에서의 상상력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다. 예술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의 모습을 감각 지각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나타나는 상상력의 기능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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