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철학적 인간학에 있어서 레비나스와 타자성의 윤리에 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2. 3. 14. 15:25

철학적 인간학에 있어서 레비나스와 타자성의 윤리에 관한 연구

 

- 고영아(서울대)

 

국문초록

 

     본 논문은 레비나스의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타자성의 윤리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레비나스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성찰은 인간 존재에 관한 경험적인 사실과 그것에 바탕을 둔 추론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과 방법론적 유사성을 지닌다. 더욱이, 그의 인간이해는 인간에 관한 개별적이고 경험적 사실을 넘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과 학문적 목표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본질에 관한 철학적 인간학적인 앎이 레비나스의 인간이해 이전에 선행되어야 한다.

    참으로, 근대 철학은 기존의 중세 문화에 대한 계몽과 미신과 마술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둘러싼 근원으로부터의 이탈,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의 강화 등과 같은 부정적인 효과를 수반하였다. 자아 중심의 사고가 자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대상화하는 순간 주체의 의미 또한 퇴색해 버렸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성론적인 깨달음은 근대 문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을 이끌어내었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물화된 우주관과 대상화된 인간관을 비판한다. 전통적으로, 타자에 대한 개념은 주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타자는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주체에 의해 수용되고, 이해되었고, 또한 주체는 이성으로써 세계를 파악하고 소유한다.  후설의 상호주관성 역시 주체의 의식적인 지향성의 개념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주체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단순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부버의 「나-너」의 관계에 의해 고양된 타자의 개념에 적극적으로 답한다. 여기서 나에게 타자는 그저 객관화되는 하나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타자의 구성적 역할은 다음과 같은 타당한 근거를 같는다.

   우선, 타자는 주체의 존재론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데, 이러한 존재론적 욕구는 인간 존재를 설명해주는 두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이다. 레비나스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체의 존재론적 의지로 보며, ‘살아가다’(live on, vivre de)라는 동사를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내가 먹고 마시고 취하는 타자는 나에 의해 소유되는 타자이며, 그 타자성이 취소될 수 있는 타자이다. 두 번째 근거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망이 타자에 의해 부추겨지고 채워진다는 사실에 있다. 이 경우의 타자는, 앞서와는 달리,  절대적인 타자성을 지니고, 이러한 타자성은 나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무한성에 이르게 하고 초월과 영원을 꿈꾸게 하며,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가진 주체로 변모시킨다.

    결국 주체성은 존재론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에 의해 구성된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는 「나-타자」의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책임감에 대해 논의를 할 때, 주체의 자유 개념이 함께 다루어져왔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주체의 자유란 타자에 대한 폭력성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타자에 대한 책임감은 나의 이기성과 자유의 방종함에 대한 부끄러움을 갖게 한다. 주체가 책임감을 느끼는 조건이란 인간이 형이상학적 욕망을 갖는다는 사실에 잇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론적 사실로서 갖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형이상학적 욕망은 타자의 얼굴에 의해 부추겨진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있어 타자의 얼굴은 신체 철학의 연장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의 얼굴은 하나의 사건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특히 헐벗은 고아와 과부의 얼굴은 나의 책임감을 불러 일으키며, 그들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드러낸다. 사물들과는 달리, 이들은 나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고, 대신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변모시킨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인간의 도덕성의 근거를 적극적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성립시킨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가 외재적인 이유가 아닌 나의 존재론적 사실에서 연유한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이 존재한다’라는 사실 자체와 동어반복인 셈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인간의 도덕성을 확고히 하고 나아가 도덕교육과 사회윤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사회에 대한 개인의 책임 혹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책임과 연결시켜야 하는 사회윤리학적 과제가 우리에게 남게 된다.

 

 

   주요어 ; 철학적 인간학, 타자, 타자성, 존재론적 욕구, 형이상학적 욕망, 얼굴, 죽음,

           비대칭성, 책임, 희생, 도덕성.  

目     次

 

I.  序  論                                                              1

  1. 硏究 目的                                                            1

  2. 硏究 方法 및 範圍                                                    3

 

II. 哲學的 人間學에서의 人間 理解                                8

  1. 近代的 人間理解의 問題點                                             9

  2. 現象學的 人間 理解                                                  12

    1) 쉘러(M. Scheler)의 人間理解                                       13

    2) 하이데거(M. Heidegger)의 人間理解                                16

  3. 레비나스(E. Levinas)의 人間理解                                     21

    1) 레비나스의 人間理解의 背景                                       21

    2) 레비나스의 人間理解의 基礎                                       24

 

III. 레비나스의 他者로 열린 存在論                              27

  1. 레비나스의 存在 槪念                                                27

    1) 利己的인 自我(ego)                                                27

    2) 存在論的 欲求(besoin)와 形而上學的 慾望 (desir)의 主體 (sujet)     33

  2. 利己的인 主體의 일깨움                                              36

    1) 他者의 얼굴(visage)                                               36

    2) 죽음(la mort)                                                     42

 

 

IV. 레비나스의 他者性                                              47

  1. 나와 他者(L'Autrui)의 關係                                          47

    1) 非對稱的 關係                                                     47

    2) ‘나’에 대한 構成的 關係                                          52

  2. 主體에게 있어서 他者의 意味                                        60

    1) 他者에 대한 責任과 倫理의 要求                                   60

    2) 犧牲과 苦痛의 昇華된 삶 要求                                     67

 

V. 레비나스에 있어서 存在 倫理性 一致                  74

  1. 道德的 行爲의 動                                                  74

    1) 利己的 欲求의 充足으로서의 道德行爲                              76

    2) 超越的 欲求로서의 道德行爲                                       83

  2. 存在論的 要請으로서의 倫理性                                       87

    1) 存在構成을 위한 他者性의 要請                                    88

    2) 道德性의 積極的 根據로서의 他者性의 倫理                         91

 

VI. 結論                                                               95

 

*參考文獻                                                                98

*부록 1                                                                 106

*ABSTRACT                                                           108

 

 

 

 

 

 

I. 序 論

 

1. 硏究 目的

 

   얼마 전 영화 ‘희생(sacrifice)’을 시작으로 구소련의 망명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 Tarkowskij)의 영상들이 국내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심리적 거리가 먼 국가의 영화감독이기도 했지만, ‘犧牲’, ‘鄕愁’ 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인간관계가 고립되고 破片化된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주제를 일관되게 영상에 담아온 감독이기도 하다.1)

   희생, 책임, 이타성이라는 말이 낯설어지고 현대인들의 의식에서 그 자리를 비워주게 된 것은 데까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이성적 사유의 주체로 이해되는 근대적 인간관과 새로운 우주관의 개막과 관련이 된다.2) 근세 이후 미신과 신성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인간에게 있어 이성은 인간의 존재론적 빛으로 간주되었고3) 중세까지 인간 정신의 많은 정신을 지배하던 神聖을 대신하면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원동력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흔히 이성, ‘raison(reason)’의 어원이 ‘계산하다, 헤아리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4) 인간은 분석하고 사유하는 주체로서,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생각하는 자아(ego cogito)는 이성을 수단으로하여 진보와 발전이라는 목표들을 향해 나아갔다.

   근대성의 문화가 인간 계몽과 해방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를 에워싼 근원으로부터의 이탈과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나아가서 통제수단의 강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근대의 자아가 세상을 유용화해서 인간의 생활공간과 거주 가능 공간을 확대시킨 성과는 있으나 그 한계와 부작용 또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5)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이라 할 관료제도와 기술의 가속화 신속화, 기계화, 분업화 등은 작업의 능률향상과 함께 인간의 자기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앗아갔고 더 나아가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리라 믿었던 기술 문명이 오히려 인간의 실존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합리주의의 부정적 측면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6) 또한 자아 이외의 모든 것을 사물화, 대상화해 버린 순간 나, 즉 자아의 존재론적 의미 또한 퇴색해 버렸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의 제 1장 서문에서 오늘날 존재에 대한 물음이 망각 속에 빠져들었음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7) 이러한 인식은 이후 근대성의 문화를 벗어나려는 탈근대적 혹은 탈현대적 사고가 출현한 배경이 되었다.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사색8)은 근대 이후 철학이 가져온 사물화된 공간, 대상적인 인간관을 비판하고, 나, 자아를 이해함의 조건으로 타자의 개입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타자와 나의 비대칭적 관계는 타르코프스키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으로 규정한 희생, 고통을 적극적 의미로 수용하여 나(moi)를 길고 어두운 이기적 심연에서 벗어나게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단순히 응용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학이며, 레비나스 또한  자신의 윤리학을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타자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포용할 때, 그리고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가정한 창없는 단자( monad)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려진 탯줄을 통해 존재를 완성해 갈 때 이 세상에 참된 자아의 이해와 존재론이 가능하다. 다른 모나드와의 사회적-윤리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단자론이 지닌 내재주의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적인 사상인 초월성의 이면과도 강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스트라서(Strasser)는 밝히고 있다.9)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성적이고 고립된 자아(ego)를 주체로 하는 윤리학 대신 타자의 존재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자아 정체성으로 삼는 나(moi)를 윤리적 주체로 하는10)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에 관해 연구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도덕성의 보다 적극적인 근거를 찾고자 한다.

 

    2. 硏究方法 및 範圍

 

   본 연구에서의 레비나스는 그의 윤리학을 형이상학으로 지칭하고 형이상학이 존재론보다 앞선다11)는 진술로써 기존의 존재론 중심의 서양 철학의 전통을 비판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이러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대립적인 지칭은 통상적인 구분과는 다른 것으로12) 레비나스가 자기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정확한 과학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에 대한 윤리적 태도라고 함이 옳다.13) ‘외재성(l'exteriorite)’, 혹은 ‘넘어서 있음(au-dela)’을 철학적 반성의 중심부로 옮긴 철학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 혹은 윤리적 태도란 타자성의 윤리이며 이것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존재론에서 시작하고 있다. 타자를 자아의 존재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으로 보는 레비나스의 인간관과 윤리적 태도는 근세 이후 도구적인 합리성, 이성으로 무장한 주체 중심의 사유와 사물화, 대상화된 타자론과는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14)

   레비나스의 학문적 태도는 근대의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인간관 대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앎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20세기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던지는 철학적 인간학과 방향을 같이 한다. 철학적 인간학은 개별과학이 탐구한 광범위한 자료를 가지고 철학적 인간관의 종합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철학적 인간학은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자기 경험을 분석하고, 이로써 인간의 본질을 정초시키려고 하면서, 상대적으로 경험 과학과는 독립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인 실마리를 풀어나가거나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15) 본 논문에서는 철학적 인간학이 던지는 새로운 인간이해를 바탕으로하여, 특히 현상학적 방법 아래 전개되는 쉘러(M. Scheler, 1874-1928)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인간이해를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존재론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자아-주체 중심적 근대적 인간관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란 점에서 레비나스와 같은 맥락이지만 레비나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존재자 중심의 존재론인 타자성의 윤리를 설정하고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라이프니츠가 가정하는 것과 같은 단자(monad)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려진 탯줄을 통해 존재를 완성해 갈 때 이 세상에 참된 자아의 이해와 존재론이 가능하다. 다른 모나드와의 사회적-윤리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단자론이 지닌 내재주의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적인 사상인 초월성의 이면과도 강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스트라서(Strasser)는 밝히고 있다.16)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레비나스의 저작과 관련 논문 등을 중심으로 문헌연구법을 사용할 것이다. 연구의 텍스트로는 레비나스의 원문과 국역본 저서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관심 영역이 방대하고, 저술활동도 활발하여, 본 연구에서는 연구 주제에 합당한 그의 작품을 고르는 일에도 세심한 주의와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그의 저작 중에서도 그의 윤리적 사상의 특징이 잘 드러난 주저 『전체와 무한 (Totalite et Infini)』,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 『타자에 관한 논고 (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등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그 외의 레비나스 사상을 연구한 여러 국내외 문헌과 논문을 참고로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를 연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의의 순서를 따르고자 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가 그의 인간이해 와 존재론에서 출발하는 만큼, 철학적 인간학의 학문적 포부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특히 레비나스가 그의 사상의 주요 형성기 때, 훗설의 현상학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만큼 현상학적 방법에서 인간이해를 도모한 쉘러와 하이데거의 인간이해를 먼저 고찰한다. 레비나스가 기존의 존재론 혹은 인간이해에 대해 강한 거부심을 나타내고 거기에서 현대 유럽 문명의 몰락의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인간이해 이전에 꼭 필요한 선행작업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와 존재론, 특히 타자에게 개방된 존재론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레비나스의 타자-개방적인 존재론은 다음 장에서 논의하게 되는 타자성의 주제에서 보다 상세하게 드러나게 된다. 끝으로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요청으로서의 윤리성을 오늘날 도덕교육의 적극적 근거로 삼고자 한다.

   본 논문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인간학적, 윤리학적 영역에 초점을 둔 부분적 고찰이었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한계를 가진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에서 그 정체성을 의심할 만큼 문학, 예술, 철학, 신학 등 다양한 범위에 걸쳐 이루어진 만큼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틀의 결여는 레비나스의 사상 이해에 불완전함을 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드문 실정에서 그의 타자성의 윤리가 도덕성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지지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이 논문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I. 철학적 인간학의 인간 이해

 

   인간학, 즉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의 轉回는 이미 고대의 희랍 사상에서 있었다. 프러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자신만만한 명제는 그 당시의 지배적이던 우주의 질서 관념이 붕괴되면서 인간에게로 모아지는 철학함의 방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인간의 행동이 내면적 결단과 인간의 자기 해석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주목할 때 본질적이고 보다 심오한 인간학의 개념은 근대 이후이다.

   세계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전체적인 섭리가 있다고 믿어 온 고전적 형이상학이나 중세의 종교 및 신학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의 지동설이나 데까르트의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의 등장은 새로운 우주관과 인간관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이 시대정신을 코레트는 ‘주관에로의 전환’이라고 표현한다.17) 중세까지이 인간의 인식과 행동 원리인 신성이 인간 정신인 이성에 대체되면서 인간학적 轉回가 일어난다. 계몽주의의 인식은 자연의 목적을 인간 속에 옮겨두고, 이러한 자연 인식의 그 때마다의 목적 소외, 즉 해명 가능한 현실의 이러한 경직화와 냉각화 사이에서 인간학적 전회가 일어난다.18) 이러한 인간학적 전회는 초세속적 권위의 붕괴, 과학의 세속화, 그리고 세속의 과학화와 더불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이러한 시대정신으로서의 인간관과 우주관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의 과제였다. 17세기 중세에서 근대로의 과도기에 추락하는 인간의 지위에 대해 비극적이고 심오한 사색을 펼쳐보인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는 유명한 문구로써 신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근대의 새로운 우주관과 인간관에 따른 불안과 두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19) 또한, 신의 섭리 아래 질서있고 체계있게 짜여졌던 우주관의 갑작스런 균열과 세계의 중심점에서 조망하는 위치에 있던 인간이 균형을 잃어버리고 끝없이 무한한 우주에 던져져 있다는 물리적 사실에 균형을 잃어버린 인간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인간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나 지식은 사실 당대의 물리적, 과학적 업적과 큰 관련이 있다. 부버는 인간이 이제까지 확실시했던 그의 거주지와 안식처를 잃게 될 때와 자신의 세계와 자기의 위치가 의심스러운 때, 인간학적 물음이 역사적으로 항상 발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위기나 인간성 상실의 문제는 바로 근대 이후 발전해 온 인간에 관한 이해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근대 이후 인간 이해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러한 문제점 인식에 대한 한 대응인 현상학적인 인간 이해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이론적 변천의 고찰과 현상학적 인간 이해는 현상학의 직접적 세례를 받은 레비나스의 인간 이해를 돕고 더 나아가 레비나스의 인간 존재론에 바탕을 두는 타자성의 윤리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할 것이다.

 

    1. 근대적 인간 이해의 문제점

 

  중세까지 신의 섭리에 귀기울이던 사람들은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말해주는 새로운 인간관으로 인하여 바깥을 향하던 귀와 눈을 자신에게로 돌리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인간의 신체적 나약함과 감각의 불완전함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인하여 인식상의 불가지론과 회의론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몽테뉴이다. 몽테뉴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이전에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타하기도 하였다.

 

   누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의 궁륭(穹隆)의 놀라운 운행이, 그 머리 위에 높이 높이 돌고 있는 저 발광체들의 영원한 빛이 그리고 저 끝없는 대양의 놀랍고 두려운 움직임이 인간을 위하여, 그의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지고 또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존재해 간다고 믿게 하였는가? 이 가련하고 야속한 피조물, 자기 자신의 주인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도리어 온갖 사물이 주는 상처를 입기 쉬운 이 인간이 세계, 즉 그 전체를 지배하기는 커녕, 그 가장 작은 부분도 알 수 없는 자가 세계의 주인이요 왕이라 자칭하는 이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이 다시 또 있을 수 있겠는가?20)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둘레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며, 자기만의 사사로운 생활을 우주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몽테뉴가 질타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이러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고 방식 및 판단을 포기하지 앟고서는 진정한 자기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21)

   중세까지만 해도 인간과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는 신의 섭리에 의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는 인간에 대한 설명이었다기 보다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이다. 이제 새로이 답하기를 요구하는 ‘인간’에 관한 적나라한 질문에 대해 다른 여느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답은 ‘전능한 이성’에 의해서 주어진다. 근대 인간관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서문에서 천명되고 있듯이22) 인간은 이성을 하나의 본래적 특성으로 갖는 사유하는 주체이며 이러한 주체주의적 이성은 인식하고 목적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주체가 가능한 객체 또는 사태들의 체계와 맺는 관계를 규제하는 진리와 성공의 기준에서 자신의 척도를 발견한다.23) 또한 이러한 주체주의적 이성에 근거하는 존재이해는 대상화된 자연과 사회의 과정에 대한 이성 통제권을 무한히 확장시키고자 끊임없이 인간을 몰아세운다.

   여기에서 철학적 인간학이 등장하게 되는 토양이 형성되는데, 전면적이고 새로운 인간 이해로 넘어가기 전에 근대적 인간 이해의 모습과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근대적 인간 이해는 인간의 계몽과 해방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를 에워싼 근원으로부터의 이탈과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나아가 통제 수단의 강화로까지 되었다는 점이다.24) 인간의 자기 소외는 일상을 그 풍요로움으로부터 떼어내고 물질적 빈곤 대신 정신적 빈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25) 이 외에도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도덕적 무감각증, 무사려증, 도덕적 진공 상태는 인간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채 사물화, 대상화한 결과이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성의 문화를 벗어나려는 탈근대적, 탈현대적 사고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26)

   둘째, 데카르트 이후 몸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진행되면서, 타락한 인간 정신의 감옥으로 여겨지던 인간의 몸은 이전과 달리 인간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부분으로 등장하였는데, 더 나아가 이제는 어느 곳이나 육체가 난무하고 또한 육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27) 육체적인 것을 숭배하기까지하는 극단적으로 흐른 인간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애초부터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과 분리해서 순전히 야성적인 동물의 영역에 가두어 두려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 특히 정신분석학은 중세 신학에서 중세까지 중시하던 인간의 영혼에 몸과 관계하는 비합리적 요인이 어느정도 강하게 직접 작용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켰다. Bollnow는 데타르트적 이원론이야말로 계몽주의의 기계론적 인간상을 만들어내고, 인간학이 하나의 가치있는 과학으로 발전하려는 것을 지연시킨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28) 신체와 정신의 분리야말로 인간에 대한 관심을 상호간에 아무 관계도 없이 병렬되는 다수의 개별과학으로 분열시키고 이들 과학의 방법론적 독자성과 객관성은 인간에 대한 여러 관심이 종합, 해석되는 것을 지연시켰다.

   세번째는 근대적 인간 이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맹점으로, 인간에 관한 파편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개별과학들은 이미 ‘인간이란 자명한 것’으로 전제를 하기 때문으로 따라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마치 부메랑이 부메랑을 던진 주인을 찾아오듯 여전히 물음을 던진 자에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29) 생물학, 의학, 심리학, 사회학 등 개별과학들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미리 갖고 있거나, 인간의 自明性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전모습을 파악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경험적이고 개별과학적인 인식의 대상이란, 인간이 무엇이라고 말해줌으로써 말미암아 인간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체험하고 이해하면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를 앎으로써, 인간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며, 경험적인 개별 인식도 비로소 인간학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30)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바램이 철학적 인간학의 등장이었다.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 현존재의 총체 현상의 철학적, 현상학적 분석이 문제되며, 또 인간 현존재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투입과 정초가 문제된다.31) 현상학적 방법을 인간 이해에 직접 적용시켜 존재론적인 탐구에 몰두한 예로 막스 쉘러와 마르틴 하이데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현상학적인 인간이해

 

    우리가 ‘나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질 때, 많은 개별과학들이 인간 존재의 다양한 부분적 영역에 관해 부분적인 답변을 해 옴으로써 인간이해에 있어 만족스런 답변을 주지 못했음을 앞에서 언급했다. 철학적 인간학이 인간에 대해 보다 전면적인 이해를 시도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역시 질문을 하는 주체, 즉 구체적인 현전(現前)으로서의 ‘나’가 그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전이해(前理解)가 요구되는데, 인간의 전이해란 인간 존재의 모든 해석의 조건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 실존의 모든 현상(phenomena)을 연구함에 잇어, 현상을 의미하기 위한 배경적인 전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에머리히 코레트는 철학적 인간학의 연구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32) 개별과학이 탐구한 광범위한 자료를 가지고 철학적 인간관의 종합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자기 경험을 분석하고, 이로써 인간의 본질을 정초시키려고 하면서, 상대적으로 경험과학과는 독립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인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방법이다.

   본 논문에서는 철학적 인간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 구축하고 현상학적 탐구로 인간이해에 도달하는 막스 쉘러33)와 인간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며 현상학은 존재론 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에 접근하는 양식34)이라고 밝힌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이해를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1) 쉘러의 인간이해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단연코 막스 쉘러(Max Scheler, 1874-1928)에게까지 소급되어야 하는데, 쉘러는 정신적, 인격적 존재의 특징과 인간의 특수 위치를 세계와 삶의 전체 속에서 밝히려고 했다. 20세기 초반기에 주목받는 현상학자였던 쉘러는 자신이 철학 속에서 착수했던 대부분의 문제들이 철학적인 인간학의 문제 속에 초점을 두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철학적인 의식을 제일 먼저 깨우쳐준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 우주의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이 다른 어떤 철학적인 물음보다도 더 깊숙히 나의 마음 속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35)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것은 쉘러의 중심적인 주제였고 따라서 쉘러에게 있어서 인간학의 목적은 우주 전체와 관련하여 인간의 본질과 위치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역저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Die Stellung und des Menschen im Kosmos)』(1928)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그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나타나는 인간관 혹은 인간이해 위에서 그의 인격주의 윤리학과 가치 실재론이 배태되는 것이다.36)

   쉘러의 인간이해는 인간에 있어서 정신의 지위에 대한 해명에서 출발한다. ‘정신’으로써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매김하는 쉘러는37) 그의 사상의 각 시기마다 새로운 내용을 받아들인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은 정신의 작용이다. 우리말에서 정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으로 지(知), 정(情), 의(意)를 통틀어 말하는데,38) 17세기 데까르트의 이성주의적 주체관이 등장하면서 정신에 있어 이성의 역할을 과대평가해 왔다. 즉, 정신작용이 곧 이성작용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의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작용에는 사고하는 것, 추리하는 것, 표상하는 것, 감지하는 것, 직관하는 것, 사랑. 증오하는 것, 의욕하는 것 등 다 포함된다. 이 여러 기능 중에는 이지적(理智的)인 것도 있고 정의적(情意的)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도 있으나, 정의적인 영역을 간과해버린 경향이 있다.

   쉘러는 주지주의적 경향의 이성 개념에 대립해서 의도적이리만치 정신의 개념을 사용한다. 쉘러는 인간과 동물 간에는 정도상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오직 이 차이는 정신층에서 찾을 수 있고 인간은 그의 정신층으로 말미암아 동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달리 그의 고유한 정신 활동을 할 수 있다.39)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게 하는 유일한 것은 일체의 생명에 또한 인간의 생명에도 대립하고 있는 정신이다. 쉘러에게 있어 정신이란 것은 생명적인 것 전반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생명적 존재인 동물은 철두철미하게 충동에 그치고 환경에 구속되어 있는 반면, 정신층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자유롭고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40)

   따라서, 코레트는 쉘러가 본래적인 인간의 본질을 ‘정신’(Geist) 속에만 고립시켜 놓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41) 인간의 행동과 동물의 행동을 비교하고, 인간의 ‘세계 개방성‘을 동물의 ‘환경의 구속’과 구별하며, 인간의 특수위치의 근거를 ‘정신’에서만, 본래적으로 정신의 성취에만 두었다는 것이다. 물질이원론이 아닌 정신과 생명이 이원론이 그의 사상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성은 “인간에게서, 인간의 자아에서 비로소 정신과 생명(충동)은 서로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바로 그 둘이 만나는 전이기 때문이다”42) 라고 밝힘으로써 만남에 의해 대립되는 원리의 이원성이 하나의 동일한 존재의 속성임이 드러난다.

   쉘러의 인간이해의 두 번째 특징은 ‘가치실현과 의미부여의 주체로서 인간’을 상정하는 데서 출발한다.43) 동물이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여 사는데 그치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탈가 주위 환경에 대한 개방을 하는데,  인간은 정신적 삶을 통해, 정신적 작용을 통해 그의 환경 세계로부터 일탈하고 해방될 수 있다. 세계는 확장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의 정신 작용을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는 데는 아무런 방향없이 무목적성의 임의적인 방향으로가 아니라 가치계를 구성하는 가치들을 지향하여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 여기서 쉘러의 가치 실재론이 바탕이 된다.

   쉘러는 가치가 칸트의 생각처럼 당위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실증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의욕이나 의지방향에서 산출되는 것도 아니고, 가치 평가자들처럼 어떤 척도, 규범, 이념에 근거한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자체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고, 그 소여에 있어서 현상적인 존재보다 우선한다고 말한다.44)

   그러나 쉘러의 인간이해는 그의 인격주의 윤리학의 실질적인 토대를 형성하였고, 특히,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파악하는 정신의 철학인 인간이해는 근대 이후 추락한 인간 지위를 고양시키고, 협소해진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도덕적 실천 및 윤리학적 이론과 종교를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정신과 생명의 이원론에서 벗어나면서 그의 실질적 가치 윤리학을 받아들인다면 도덕적 공리주의와 상대주의가 가져다 주는 협소한 인간관, 즉 이기주의적 쾌락 추구와 결과 중시의 短見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 하이데거의 인간이해

 

   철학적 인간학의 시조인 쉘러와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자신의 인간 이해, 즉 인간 존재에 대한 解明이 그의 존재론 탐구로 건너가기 위한 단계적인 디딤돌로 간주되고 싶어했다는 점을 주목하는 데에서 하이데거의 인간관의 조명은 시작해야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하이데거가 존재의 방식을 이야기할 때, 인간 존재방식인 현존재(現存在, Dasein)를 자신의 분석의 목적지로서가 아니라 존재분석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45)

   하이데거는 ‘모든 현존하는 사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 모든 驚異 중의 驚異 즉 존재자가 존재함을 경험한다’46)고 했는데, 이 말은 하이데게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라는 사실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 지구상의 인간의 역사가 몰락이고, 위기라고 규정하는 하이데거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존재망각 (Seins vergessenheit) 속에서 살아왔음을 비판하면서 그의 존재론적 탐구를 시작하고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47)

   그는 존재방식에 따라 단순히 발생하면서 인지적, 이론적 관찰과 ‘대상’으로서 만나지는 사물적 존재자(眼前존재자, Vorhandensein)와 실천적 배려와 도구로써 만나고,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지닌, 그리고 언제라도 이용 가능한 도구적 존재자(Zuhandensein), 그리고 다양한 존재방식을 지닌 현존재 (Dasein) 등과 같은 존재의 유형으로 나눈다. 특히 사상 전개에 있어 그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존재와 시간』에서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대한 연구가 하이데거의 기획의 기초가 되고 있다.48)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現存在(Dasein, Being there)로 규정하고 존재는 오로지 그것이 현존재에 대해 의미를 갖는 한에서 혹은 현존재의 이해 속으로 들어오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49) 그러나 종래의 현존재를 겨냥해서 행해진 문제 제기들과 탐구들은 그것들이 거둔 실질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가 있었음은 앞에서 언급했는데, 하이데거 또한 이러한 인간학이 본래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는 일실(逸失)하고 있음을 지적한다.50)

   하이데거의 인간이해는 現存在라는 개념에서 시작한다.51) 따라서 현존재에 대한 개념 이해가 그의 인간이해 혹은 인간관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현존재(Dasein)는 ‘자기 자신에 관게하고 있는’ 그러한 현존재자(Seinde)이다. 인간의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문제되며 그의 참된 존재를 알기 위하여 고투하고 이 투쟁에서 그외 존재의 이해는 갖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모든 다른 현존재보다 뛰어났다.52) 하이데거의 인간론은 인간이 소외되었다고 하는 부정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데, 일상인의 존재 방식은 본질적 사태로부터의 도피, 진지함의 상실 등으로 나타나는데, 하이데거가 소외의 극단적 형태로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 존재 가능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해서, 세계 속에 몰입해있는 것을 하이데거는 퇴락(gefallen)이라고 말한다. 퇴락하는 세계-내-존재는 유혹적이고 위안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소외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하이데거에게 있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실존적 틀을 가지고, 퇴락은 이 세계-내-존재의 존재 양식이기 때문에 현존재의 실존성을 인정해주는 가장 기본적 증명이지, 세계로의 퇴락이 현존재의 실존성에 반대되는 증명은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퇴락이란현존재 자신의 본질적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고찰에서 하이데거의 인간이해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나”라는 실체적 고유함에서가 아니라 “존재함”의 고유성에서 찾는다.53) 이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이 다른 모든 여타 존재론을 위한 “기초적 존재론”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당연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쉘러의 방식을 뒤쫓는 철학적 인간학자이기를 늘 거부했다고 하는데,54) 여기서 더 나아가 후설과 쉘러가 인격성의 해석에 있어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즉 그들이 ‘인격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셀러의 경우, 인격을 결코 사물이나 실체로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함께 체험된 체험의 통일로서 보았고 직접 체험된 것의 배후나 외부에 있는 사고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은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원칙적 물음을 잘못 세운 것으로, 이 물음이 고대적-그리스도교적 인간학에 정향해있고55), 그 인간학의 불충분한 존재론적 기초에 대해서 인격주의가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의 실존적 토대로서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를 제시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는 이 현존재가 속해 있는 혹은 이 현존재가 속해 있음을 발견하는 주위 환경 세계의 구조 속에서가 아니라면 발생할 수도 없고 발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56)

   늘 존재이해를 갖는 현존재를 適在性이라는 존재양식에서 만나게 하는 기반, 즉 자기 지시적 이해가 행해지는 거기가 다름아닌 세계라는 현상이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가 행해지는 기반의 구조가 세계의 세계성을 형성하는 그것이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및 존재 가능을 자기의 세계 내 존재를 고려해서 근원적으로 이해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유의미화(有意味化)하게 된다.57)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없는 단순한 주관이란 존재하지도 주어져 있지도 않은 것처럼, 타자없이 고립된 자아도 없다. 즉 타자들과의 공동 현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이론적으로 단순히 존재하는 眼前 존재자는 아니고 도구적 존재자도 아니다.58) 현존재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존재한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자는 ‘그들로부터’ 자아가 부각되는, 나 이외의 나머지 사람 전부라는 뜻이 아니다. 타자들은 사람들이 대개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 속에 섞여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현존재는 대개 자기를 자기의 세계에 입각해서 이해하며, 타자와 공동 현존재는 종종 세게 내부적 도구적 존재자를 통해 만난다.59)

   여기서 하이데거의 인간이해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즉 공동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 양식에 입각해서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나와 그 때 생기는 하나의 성질에 불과하다. 공동 존재는 타자가 현실적으로 前在하지 않고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실존론적으로 규정된다. 현존재의 단독 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공동 존재이고 타자가 없다는 것도 공동 존재 안에서만 또 공동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단독 존재는 공동 존재의 한 결여적 양상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공동 존재를 증명하는 셈이다. 자기의 현존재는 타자들의 공동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우선 대개 환경 세계적으로 배려되는 공동 세계에 입각해서 만난다. 배려되는 세계에 몰두할 때, 즉 동시에 타자들과의 공동 존재에 몰두할 때,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전제”나 타자성으로부터, 혹은 인간의 특징, 혹은 타존재와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인간 자체의 “존재함”으로부터 질문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60) 타인과의 공동존재를 인간 현존재의 실존론적 양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인간이해는 전통적인 주체위주의 인간이해의 고립성을 깨뜨리고 타자와의 유대성을 받아들일 여지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현존재의 타자들과의 공동 존재가 인간이해에 결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하기 보다는 인간 이해의 시초적 사실로서 보는데, 이러한 점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번째, 타인과 공동 존재하는 현존재는 또한 타자들과 일상적 상호 존재로서,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존재는 자기로서 있지 못하고, 타자들로부터 존재를 탈취당하고 있다. 타자들의 의향이 현존재의 일상적 존재 가능성을 좌우하고61) 이 때의 타자는 특정한 타자들이기 보다 모든 타자들이며 특히 눈에 띄지 않는 타자들의 지배를 공동 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화된 타자를 하이데거는 중성적인 평균인, 세인(世人, das Man)62)이라 부르며, 이러한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인 세인(das Man)은 뒤에서 살펴 볼 레비나스의 타자와는 달리, 그때그때의 현존재로 하여금 그 일상성에서 책임을 면하게 할 뿐이다. 世人은 도처에 현전하지만, 현존재가 결단으로 치달을 때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꽁무니를 빼고 대신 세인은 모든 판단과 결단을 미리 주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현존재에게 책임을 면하게 해준다. 현존재 속에 안이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숨어있는 한, 세인은 前述된 존재 면책을 가지고 현존재에 영합한다. 퇴락이 보다 고귀한 상태에서 저열한 상태로의 하강을 의미함이 아니라고 하이데거는 말하지만,63) 하이데거에게 타인과의 공동 존재는 인간 현존재에게 있어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케하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해명에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타자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인간이해는 본 논문 다음 장에서 살펴 볼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와 사뭇 대조를 이룬다. 하이데거에게는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인간 현존재의 존재, 다시 말해서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 해명된 연후에야 가능한 것이었고, 다시 말해서 존재의 물음이 존재자에게 기본적인 것이었다.64) 그가 오랫동안 존재망각 상태에 있었던 유럽의 철학에 새로운 존재의 물음을 제기하여 전통적인 서양의 존재론적 물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존재 그 자체에서부터 해명을 시도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이고 철저한 사유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레비나스의 사유의 근원성65)과 일맥상통하나 하이데거의 인간관에서 타자란 나에게 말을 걸고 의미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나에게 ‘관계맺어지는’ 대상이다. 내가 의미부여를 않으면 익명의 어둠 속에 떠 있는 섬과 같은 다수의 현존재들이 타인이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오히려 나를 익명성에서 건져올려 주는 그물이고 나를 향한 빛으로66) 주체의 구성에 있어 적극적이고 긍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나의 존재를 심연에서 이끌어내 주는 등대고 불빛인 것이다.

 

    3. 레비나스의 인간이해

 

     1)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의 배경

 

   살아온 삶의 과정을 참작하지 않고서도 사상의 흐름을 기술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그의 철학 사상의 발달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결정적인 轉回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들 수 있다. 슈테판 슈트라서(S. Strasser)는 레비나스의 삶은 ‘이야기로 엮어졌을’ 뿐만 아니라,역사 자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삶67)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실지로 레비나스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고단했던 생이 낳은 값비싼 결실이었다. 따라서 그의 인간이해를 비롯한 그의 독특한 철학적 관점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삶 자체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쏟을 필요가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5-1995년)는 유태계 출신 철학자로,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는데, 거기서 러시아 혁명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1923년 열 일곱 살 때, 프랑스 유학이라는 큰 모험을 감행하게 되고, 프랑스에 유학을 와 스트라스부르에서 수학했다. 이후 프랑스 국적을 획득한 그는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이 당시 프랑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징집되어, 전쟁 중 포로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많은 저술을 남기고 아흔이라는 나이로 1995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문화권인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태인 레비나스가 현상학의 중심지에서 받은 교육은67) 그로 하여금 서구 사상에 정통하게 만드는 한편, 서구의 시각 바깥에서 서구 사상을 비판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탈무드 교육이 준수되는 엄격하고 정통족인 유태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이 구약성서, 푸시킨 그리고 톨스토이가 그의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어 주었던 리투아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68) 레비나스 자신 또한 그의 사상의 유태적 영향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또한 그 자신의 철학의 주요 개념인 형이상학, 초월, 무한과 외재성 등의 개념이 그의 철학적 사유 전개에서 나타나는 편협된 개념이 아니라 서양 철학의 전통 속에 늘 존재해 온 것임을 그는 밝히려 애썼다. 그는 1930년 24세가 되던 해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후설과 하이데거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싸르트르가 보봐르와 길을 걷다 우연히 서점에서 레비나스의 후설 번역서를 읽고 후설 철학에 입문하게 되는 사실은 유명하다.

   레비나스는 후설, 하이데거와 더불어 출발한다. 그의 최초의 글은 후설에 대한 연구서들이었다.69) 하지만 1940년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적인 전개하게 되는 전환점을 체험한다.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말처럼 국가 사회주의의 비인간성과 참혹한 2차 대전의 경험은 그의 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작금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나서 그것을 빚어내는 원인을 묻고, 그 원인을 서양의 존재론 우위의 唯我論的 철학에서 찾으면서 전통적인 서양의 존재론적 철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다. 주체주의적 철학이 도구주의적 합리주의의 모습을 강하게 띄면서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인  주체(ego)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이기성의 철학이 세상과 타인을 무한한 폭력 아래 두고자 하는 것을 그 자신이 독일군 포로 체험과 함께 무수한 유태인의 죽음을 통해 경험하였던 것이다.70) 따라서 레비나스이 성찰들은 오늘날 모든 도덕성들이 사회성을 잃었다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도 결국 도덕성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의 참된 인간적인 면모는 여기서 드러난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박해의 희생물이 되었고, 그 중에는 리투아니아에 있던 레비나스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인간적인 고통 속에서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De l'existence a l'existant)』를 저술한다. 이 책은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와 더불어 훗날 그가 발전시키는 형이상학의 단초를 이루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 『존재로부터 존재자에서』가 보여주는 제목은 하이데거에 의해 요구되던 시선과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후 레비나스의 독창적인 사상에서의 단초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71)

   전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를 하며 1961년 마침내 그의 역저 『전체와 무한-외재성에 관한 고찰 (Totalite et Infini-Essai sur l'exteriorite)』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존재론이 서유럽의 문화나 문명의 위기와 전체주의의 근원이며, 이러한 서유럽의 존재론적인 철학은 언제나 다시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적인 권력의 발달을 조장하였다고 주장한다.

 

      2) 레비나스의 人間理解의 基礎

 

   현대 철학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데까르트 이후 서양 철학을 지배한 주체성의 이념을 비판하고 이웃과 더불어 세계 안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모색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여 근대 이후 철학의 질문은 주로 주체의 지위를 둘러싼 것이었고, 계몽주의의 최고의 유산 중의 하나인 주체-자아(subject-ego)의 개념은 절대적이고 일원화된 전체, 그리고 타자를 포함한 세계와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개념이 형성된다.72)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레비나스 또한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새로운 방향에서 던진 철학자였다. “서양철학은 대체로 존재론이었다”는 『전체성과 무한』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표현은 서양 철학에 대해 레비나스가 취하고 있는 비판적 입장을 잘 드러낸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통적 존재론은 중립적인 매개 개념을 통해 타자를 동일자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이론이다.73)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은 모든 것을 예외없이 전체 속에 체계화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존재론이었고 이를 전체성의 철학, 전쟁의 철학, 이기주의적 철학으로 규정하고, 인간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철학, 인간의 인격 위에 자연, 신, 혹은 ‘존재’를 우위에 두는 철학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의 이름으로 항변한다.74) 레비나스가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비판할 때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존재론이 주체 중심의 철학이라는 것이다.74) 비록 존재론이 객관적인 존재에 관한 사색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유의 산물이요, 존재 자체란 개념조차도 사유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존재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외재적 실존에 그 구심점이 있다기 보다 차라리 그것을 이해하는 주체의 사유, 주체의 의식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하이데거의 철학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전체성과 무한』2부 인간 존재 분석은 특히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자의 존재의미란 존재를 통해 밝혀지는 것으로 존재자와 존재자의 관계도 존재를 통해 규정된다. 즉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도 존재에 종속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익명체, 무인격적 존재가 존재자를 사로잡고 지배한다는 뜻이다.75)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다른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소유와 지배의 철학’이고 심지어는 인격적 자아와 타자, 타자와의 인격적 관게와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 ‘不義한 철학’일고 ‘中立性의 철학’이라고 보고 있다.76)

   레비나스는 자기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란 말로 표현하고,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의 우위를 말하며, 존재론보다 형이상학이 앞선다고 말한다.77)  레비나스의 이러한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대립은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일반적인 의미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개념이 아니다.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이 하나의 이론적 학문이 아니고 학문의 영역을 초월한 대상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8)

   서양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모든 것을 주체의 사유에 포`함시키는 제국주의적 철학이라면, 레비나스에게는 ‘다른이(autrui)’가 ‘나’의 지향적 의식에 내재하는 존재적 개념이 될 수 없고, 나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절대적 존재라는 점이다. 이제까지의 철학에서는 다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주체적 사유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이’도 주체, 즉 ‘나’에 의해 그 존재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었지만, 이러한 사유에 반대하는한 레비나스는 ‘다른이’가 ‘나’보다 상위에 있고, 절대자로 하여금 자기를 나에게 계시하고 명령하고 호소하는 존재로서, 나로 하여금 그 앞에서 순종하게 하고 나의 무제한적인 자유의 방종에 제약을 가하여 나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한다고 주장한다.79)

   인간이해의 구심점을 ‘나’로부터 ‘다른이’로 옮기려는 레비나스의 철학에는 왜 존재론자들이 진정한 초월성, 즉 인간의 초월성 혹은 신성한 타자의 초월성을 고려하는데 이르지 못했는가 하는 이유가 잘 나타난다. 즉 레비나스의 철학에는 인간의 內在性 대신 外在性 혹은 ‘넘어서 있음 uber-hinaus-sein’을 철학적 반성의 중심부로 옮긴 철학이며, 이것이 곧 레비나스가 말하는 형이상학이다.80) 이제까지의 중심이 되었던 존재론적 철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즉 존재론의 기반 위에 형이상학적 기틀을 세우고자 한다. 또한 레비나스는 ‘다른이’와의 윤리적 관계 위에서 인간 이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타자와의 공동 존재, 즉 세계-내-존재를 인간 실존의 기본적 틀로 삼은 하이데거의 인식이 인간이해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시킨 점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인간이해에서 등장하는 타자의 개념은 현존재에게 의미부여를 받아야 하는 ‘익명의 섬’이고 더구나 타자와의 공동존재는 현존재의 실존적 성질로 규정되고 있다.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의 특징은 주체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적극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주체구성의 한 요소로 삼는다는 데 있다.

 

 

 

    III. 레비나스의 他者로 열린 存在論81)

 

     1. 레비나스의 存在 槪念

 

      1) 이기적인 자아(ego)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는 자아의 성질과 특성을 말하기 전에, 일반적인 존재 개념에서 주체가 등장하는 과정을  미리 언급하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존재한다’(Threr is, il y a)라는 개념을 하나의 동사적 의미의 존재 사건으로 보았다. 하이데거가 존재 물음에 대한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하며, 전통적인 존재론이 존재자론에 머물러 존재 물음 그 자체가 망각 속에 빠져있었음을 비판하고, 그의 主著『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자체의 물음에 천착한 반면, 레비나스는 존재 그 자체는 하나의 익명적인 어둠으로 보고, 익명의 존재가 아닌 존재자 그 자체에 사유의 우위를 둔다. 존재 그 자체는 어떠한 목적도 어떠한 가치의 음영도 보이지 않는 ‘있음’의 순간들의 끊임없는 연속으로서 나타나, 일련의 무의미한 ‘있음’은 공포의 방식으로 경험되어, 사물에게 아직 이름도 없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정체를 말할 수 없는, 다만 그 안에 종속되어 숨막히는 공간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존재’라고 부른다.82) 이러한 ‘존재’는 이름을 가진 사물과 자기 자신을 일컬어 ‘나’라고 부르는 주체의 출현 이전의 어둠의 세력이다.

   ‘존재하는 무엇(quelque chose qui est, the thing that there is)’이란 익명의 존재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轉回이다. 그것은 ‘익명의 존재’의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존재자의 출현은 지배력의 출현, 존재 속에서 자유의 출현이다.83) 존재에서 주체의 출현은 익명적인 존재 사건을 벗어나 자기에게 돌아옴으로써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함을 뜻한다. 이렇게 출현하는 ‘자아’는 익명의 어둠 속으로 추락하지 않고,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는 긴장과 노력, 즉 존재유지를 위한 ‘존재노력’(conatus essendi)84)이 필요하다.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서양의 철학이 존재론이라는 비판을 제기하면서, “인간자신이 곧 존재론이다”85)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자아의 이기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 자신이 레비나스가- ‘동일자의 철학’, ‘자아론’, ‘힘의 철학’으로 규정한 존재론 그 자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존재 익명성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암시한다. 그것은 세계를 관리하고 노동하고 그 가운데서 집을 짓고 타자와 함께 거주하며 사회를 형성하면서 나 이외의 타자86)를 동일자의 것으로 소유, 파악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의 이기적인 본성이 갖는 당연한 측면이다. 인간임을 인식하고, 파악하며, 소유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곧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출현은 익명적인 존재 사건을 벗어나 자기에게 돌아옴으로써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함을 뜻하는데, 주체의 존재 소유는 스스로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존재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무게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가 보는 타자성이다. 그리고 타자를 통한 이러한 초월의 과정을 그리는 것이 레비나스에게서는 그 자신의 형이상학의 과제였던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초기 작품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있다’(il y a)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상세히, 그러나 매우 암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의 외형이 어두운 밤 속에 감추어져 버릴 때, 그 때는 아무 대상도 아니며, 대상이 성질도 아닌 밤의 암흑이 우리를 점령한다. 우리는 점령한 그 밤의 무(無)를 우리는 도무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나 無는 無 자체가 아니다. ‘이것’ 혹은 ‘저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재는 곧 현존이고, 그것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현존이다. 이 현존은 부재에 대한 변증법적 대립항이 아니며 관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는 아무런 매개없이 현존한다. 그것에 대해 어떤 언술도 없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답해 주지 않는다. 다만 침묵만이, 침묵의 음성만이 들릴 뿐이다.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다만 ‘있을 뿐이다’ (il y a, there is).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명사도 덧붙일 수 없이 다만 ‘있을 뿐이다’. 마치 비가 오고 날씨가 덥듯이 그렇게 있을 뿐이다. 본질적 익명성, 정신도 외재성도 서로 맞서 있지 않다. 외재적인 것은-만일 이 용어를 허용한다면-내재성과 아무런 상관없이 머물러 있다. 주어진 것도 없다. 세계도 없다. ‘나’라는 것도 밤에 의해 침몰되고, 개별성을 상실한 채 숨막혀 있다----존재는 하나의 힘의 장(場)으로, 억누르는 분위기로 존속한다.87)

 

   레비나스는 그의 대표작인 『전체성과 무한(Totalite et Infini)』(1961)과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Autrement qu'etre ou au-dela de l'essence)』(1973)라는 책에서 자아의 본질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 혹은 앞에서 말한 ‘존재 노력’으로 정의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 출현하는 주체는 <지금, <여기에> 신체적으로 자신을 구성함으로써, 익명적 존재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 존재는 이제 ‘나의 존재’가 되는데, 이러한 주체는 ‘물질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88)

   레비나스가 보는 자아의 또다른 성질인 ‘물질성(materiality, materialite)’은 예컨대, 음식과 의복, 주거에 대한 일상적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자는 일상적 욕구를 통해 자신에게 몰두하는데, 자아에게 몰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체의 물질성이다.89) 의식주에 대한 일상적 욕구는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협하는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의 자연스런 표현이고 존재가 지워주는 무게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또하나의 ‘존재노력’이다.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는 외부세계에 대해 무지하다. 사고의 부재로 인한 절대적인 무지이다. 그것이 갖는 의식 또한 외부에 대한 것이 아닌 자아가 접하고 있는 순수 내적 세게에 제한되어 있다.90) 익명적인 존재에서 출현하는 자아는 자신의 존재에 매달리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온갖 힘을 다 쏟는다. 자아는 오직 자신에 관심을 둔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이기주의 또는 나찌즘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주의 또는 이기주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자아가 자아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애쓰는 모습이다. 이기주의, 이기적 자아(ego)란 자아 존재를 위한 존재론적 조건이다.

   자아의 자기 중심적인 존재유지 경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홉스와 스피노자91)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공통되는 것이다. 어떤 존재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경향, 즉 관성을 지니고 있다. 미세한 입자조차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그것의 구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레비나스 또한 자연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 대해, 인간은 사물들 중의 하나인 사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옴으로써 자신을 즐기는 존재이며, 다른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경향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이와 같은 경향을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하고 파악하는 ‘자기성’(ipseitas)92)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성을 인간의 ‘존재론적 독특성’93)이라고 보는 자기복귀, 내면성의 형성 또는 자아의 자기성의 확립을 ‘향유jouissance’와 ‘거주’(居住)라는 구체적인 행위에서 살펴보고 있다.

   첫째, ‘자기성’은 우선, 삶의 ‘향유’(jouissance)라는 활동을 특징으로 갖는다. 삶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근심과 걱정이라기 보다는 향유와 누림, 향유하는 데 있다. 삶의 내용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도구 전체성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 자체가 곧 삶의 내용을 이루고,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 자체가 곧 삶의 내용을 이루고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 자체가 곧 삶의 부분인 것이다.

   이처럼 자아성의 발현을 향유로 보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염려’(Sorge) 의 개념과 대조를 이룬다. 하이데거는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거기에 ‘내던져짐’(Geworfenheit)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거기에 있다’는 현사실과 더불어 존재이해, 즉 존재자 전체에로의 침투가 일어난다는 것을, 현존재는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자기 존재에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현존재는 존재관계로서 존재하며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94) 이러한 ‘세계 안에 던져져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염려Sorge’가 비롯되고, 염려 때문에 인간은 세계를 거주 가능한 ‘도구적’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삶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 안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염려와 불안보다 향유와 누림, 곧 향유가 세계와의 일차적인 관계라고 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삶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자아를 둘러싼 그밖에 모든 것들을 도구화하거나 주체의 동일성의 영역 안으로 끌어 넣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반면에, 향유는 내용을 즐기는 삶으로, 이것을 레비나스는 ‘삶에 대한 사랑’ 또는 ‘자기애(egoisme de la vie)’라고 표현한다.95)

   둘째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중심점을 레비나스는 ‘집’이라는 거주 공간으로 설정한다.96) 내부공간의 내밀함의 가치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위해서는 집 만큼의 특권적인 존재가 없다고 바슐라르도 말했지만,97)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외부의 세력과 불안으로부터 일체의 실증적인 보호를 약속해주는 집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할 때 여러 학문적 영역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집이야말로 향유 주체의 내면으로의 복귀가 밖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본다. 향유 속에서 요소 세계의 불확실성을 경험한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로의 복귀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거주함을 통해서만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집이란 존재는, 내면성으로의 전환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순수 의식의 관념론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언제나 肉化된 주체이고, 주체는 실체로서 거주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의 존재를 가진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내밀한 공간을 형성하는 집을 주체를 떠받쳐주는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집뿐만 아니라 다음 장에서 살펴 볼 타인가의 관계가 또한 주체를 구성,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자기성’, 자아의 독립성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체성과 무한』에서 더욱 더 치밀하게 추적한다. 이러한 자기실현 과정을 ‘분리’(separation)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존재의 전체성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집 안에서 머물게 된다. 자아성(l'egoisme)의 발현이며, 분리가 진행되는 본래적 존재 방식이다. 자기 자신이 설 자리를 ‘세계 속에서’ 전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에게 있어 세계는 생존을 위한 도구라기 보다 존재의 원천이나 만족으로 체험된다.98) 그러나, 삶의 요소는 우리 존재의 충족임과 동시에 위협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삶의 요소에 자기 자신을 무조건 내맡기기보다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 자기를 환경과 분리하면서 자기성을 확립하는 일은 집을 짓는 가운데 구체화되는데,『전체성과 무한』의 후반부에서 居住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 存在論的 欲求(besoin)와 形而上學的 慾望(desir)의 主體(sujet)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독특성’으로 인하여, 주체인 ‘나’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긴장이 요구되고, 이러한 자아의 존재유지를 위한 노력은 자아의 이기성을 낳는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는 처음부터 나로서 완전히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나와 나 사이의 거리, 혹은 나 자신의 결핍으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을 향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결핍감과 자기 유지와 자기 실현을 꾀하는 가운데서 자아는 메꿀 수 없는 간격과 결핍, 불완전성을 체험하고 일상적인 현실은 부족과 결핍의 체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참된 삶은 부재(不在)한다”99)라는 다소 자극적인 진단으로 『전체와 무한』의 서두를 시작하는 레비나스는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이 이러한 부재성(alibi) 속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존재유지에 필요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나, 선택의 자유는 무한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유한하다. 자아는 마침내 유한성의 끝인 죽음에 직면하고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존재유지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100) 앞 장에서도 말했다시피, 자기 보존을 하려는 자아가 세계의 주인으로서 자아의 욕구에 따라 세계를 즐기고, 관리하는 이러한 존재양식 또는 나 자신에게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유를 일컬어 레비나스는 <존재론>이라고 부르고, 따라서 나 자신의 존재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갈망을 존재론적 욕구하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기술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우리의 인식 능력이 표상되는 것으로서 (즉, 우리의 인식능력이 거머쥐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욕구(besoin)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 또는 나에게 소유된 것을 만든다. 자아의 이기성의 활동인 삶의 요소에 대한 享有와 居住는 나로 하여금 ‘나’로서의 동일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도록 해주고 동일자인 주체가 사물을 소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람은 육체에 의한 여러 가지 욕구(besoin, need)를 가지고 그들의 충족을 위하여 주위의 물건들을 소유하려는 소위 ‘경제적’ 관계를 맺게 된다. 주체가 익명의 전체성 속에서 벗어나 소유와 노동을 통하여 세계 내 여러 요소와 사물을 향유하고 땅 위에서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 ‘경제적’ 활동이다.101) 이렇게 하여 경제적 존재는 동일성 속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 활동은 경제적 대상에 대한 어떤 이론적인 접근이나 조직적 정복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건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삶의 요소에서 인생을 향유하는 것을 말한다.102)

   주체에게는 이같은 존재론적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욕구라는 말의 기저에서 통상적으로 의미되는 것은 필요(besoin, need)의 뜻으로, 이러한 욕구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며 자아의 동일성 내로 귀환하고자 하는 욕구이다.103) 이와는 다르게, 나의 존재유지를 위해 먹고 마시고 도구를 만드는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이를 ‘형이상학적 욕망' (desir metaphsique)이라고 부른다.104)

   인간에게는 나의 존재유지를 위해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besoin, need)와는 다 르게 ‘욕망’(desir, desire)이 있다. 레비나스는 『전체와 무한(Totalite et Infini)』에서 욕구(besoin, need)와 욕망(desir, desire)의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욕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욕망이란 말을 쓸 때는 나와 전혀 다른 자, 내가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105)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이전의 어떠한 유사성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결코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다.---선(goodness)과도 같은 것이다. 욕망되어지는 그것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채 욕망은 더해만 간다. ---욕망은 갈망하는 주체가 죽음을 운명으로 하고, 갈망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이다. 불가시성(Invisibility, Invisiblite)은 관계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주어져 있지 않는 것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그것에 관한 관념이 주어져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가시성(vision, visibilite)이란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 사이의 합치이고 그 사물을 둘러싸는 이해력이다. 불합치가 단순히 否定 혹은 관념의 모호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낮과 밤의 구분을 넘어, 존재의 명료함을 넘어, 일상적인 틀을 벗어난 욕망(desir, desire)인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정확히 말해서, 타인의 타자성과 외재성을 의미한다. 욕망은 절대적으로 타자를 향하는 욕망이다.”106)

 

   형이상학적 욕망(desir, desire)은 객체(대상)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고 욕구(besoin, need)는 주체로부터 기인한다107)는 점을 상기할 때 레비나스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 가는 이 ‘초월’의 가능성을 숙고하는 철학이다. 타자성은 모든 사고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동일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핍이고 결여를 암시한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즉 무한자인 타자는 소유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다. 욕망은 욕구(need)처럼 영혼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쓰지도 않는다. 욕망이 관계하는 그것은 채워질 수 있는 비어있음이나 결핍이 아니라, 무한자를 향한 움직임이고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108) 즉 레비나스에게서 욕망은 타자를 자기 동일성의 의식의 영역 안으로 이끌어들이려 애쓰지 않는, 그러면서 타자를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레비나스의 초월이란 바로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적인 타자와 관계함으로써, 규정을 거부하는 무한자와 관계하게 됨을 말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욕망이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기를 그만두고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 가서 그의 윤리적 요구에 따라 그를 위해 나를 내놓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09)

   이렇게 레비나스는 존재론, 형이상학, 초월, 무한자 등의 고전적인 개념의 의미를 윤리학적인 도식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 또한 ‘나’라는 주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대상을 나에게 종속시키고 소유, 향유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욕구(besoin)와 함께, 무한자에게로 초월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층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타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경시, 혹은 타자에 대한 이해나 인식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혹은 윤리적이라 부르는데, 형이상학적 초월이 욕망(desir)이다. 레비나스에게 이러한 욕망은 타자에 대한 존중, 타자를 타자로의 인식이다. 존재론적 욕구는 동일자의 전체성과 정체속 속에서 채워지고 충족되고 만족되는데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면, 오히려 형이상학적 욕망은 영원히 합치될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는 타자의 환원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외재성으로 불리워진다.110)

   이상에서, 레비나스에게 있어 인간 존재의 자기보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주체성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무한자, 초월과의 욕구, 타자와의 관계 역시 나의 주체성의 구성 혹은 주체성의 변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론적 욕구보다 형이상학적 욕망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우선한다’는 그의 명제로 귀결된다.111)

 

    2. 이기적인 주체의 일깨움

 

     1)타자의 얼굴(visage, face)

 

   인간에게 있어 신체란 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혹은 세계에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의미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의미의 이해가 이루어지는 場의 중심이 된다.112) 즉 신체란 인간의 고립되어 보이는 주관성의 교류를 가능케하고 나아가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매개이다. 생활세계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인 까닭은 바로 신체적 주관이 그 속에서 사는 세계, 신체적 주관에 의해서 체험된 세계(lived world)이기 때문이요, 세계의 친숙함을 신체가 몸소 느낀 세계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113) 레비나스는 인간의 신체성 속에서 특히 타자의 얼굴(visage face)을 통해 타자를 만나고 무한(Infinity)과 초월성을 경험한다.   

    얼굴(visage, face)의 개념은 레비나스의 철학 전반에 걸쳐 제일 중요한 개념으로, 얼굴 대 얼굴(face to face)의 관계라는 주제는 레비나스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굴 대 얼굴의 관계에 대한 레비나스의 입장은 초월의 문제, 동일성과 차이성의 문제, 책임의 윤리 특히 앞서 언급한 형이상학적 욕망의 문제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114) 훗설이나 하이데거가 타자와의 접촉 문제를 alter ego(제 2의 나)의 문제로 간주해버리는 반면,115) 레비나스에게는 모든 문제가 alter ego(제 2의 나)의 타자성에 집중되고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무한성의 이념은 자아의 전체성, 동일성의 사고와는 다른 근원에서 유래하며 전체성, 동일성과는 다르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무한성의 이념은 자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변증법적 순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을 통한 전체성의 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116) 타자가 절대적인 타자로서 타자의 타자성의 인정되고 수용되는 가운데 타자의 얼굴이 현현하는 사건을 하나의 절대경험으로 보는 레비나스는 ‘얼굴의 현현’(l'epiphanni du Visage)은 자아의 이기성을 일깨워주는 윤리의 근원적 현상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적 사건으로 본다.117)

   타자는 ‘얼굴’의 형태로 나의 지각에 출현하며, 얼굴과의 접촉의 본질은 추상적인(contemplative) 지각의 형태가 아니라 실질적인 접촉이다. 얼굴은 표현을 한다. 얼굴은 세계의 사물을 기호화하는 신호의 저장소이다. 그것은 다른 정신의 타자성에 대해 말을 하며, 결코 현존하지 않으며, 사물의 질서를 흐뜨려놓는 힘, 어떤 이해와 파악의 질서도 벗어나 버리는 그 무엇을 말해주는 감각적인 자료이다.118)

   인간의 몸을 생리학자가 해부대에서 분석, 연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레비나스 또한 여기에 속한다.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가 미완성의 존재이며 세계를 향해서 열려 있고, 이 몸을 매개로 타인과 주변 세계와의 상호관계의 장을 열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19)

   레비나스에 의하면, 얼굴은 신과 무한의 현현으로서 나에게 드러나며, 그것은 어떤 지평이나 맥락을 떠나, 그리고 지각(인식) 주체의 입장을 완전히 그러나 그 자체로 스스로 드러나는 의미이다. 폴 리쾨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타자의 현상은 사물 구성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윤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존경’이라는 개념으로만 제대로 표시될 수 있다고 보았다.120) 그리고 나에게 인간의 얼굴, 특히 타인의 얼굴은 이기적인 자아가 주체의 존재 유지를 위해 삶의 요소를 享有하고 집을 짓고 거주하며, 주위의 대상을 자아의 동일성의 영역으로 소유해 가는 가운데, 일상적인 사물 질서와 이해의 흐름을 깨뜨리는, 즉 자아의 전체성을 깨뜨리는 (la rupture de la totalite, the rupture of the totality) 놀라운 경험으로 일어난다.

    레비나스에게서 주체란 처음부터 내재적인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존재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의 초기 저술에는 주체가 존재(being)를 깨뜨리는, 원형적이고 잉여적인 존재자로 간주하고 있으나 후기로 가면 주체를 “존재를 넘어선 어떤 것(Autrement au-dela qu'etre, Otherwise than being)이란 말을 한다.121) 나를 넘어선 무엇인 존재가 타자이며 이러한 타자의 나로의 접근은 다른 현상들 사이에서 결코 현존한 적이 없는 것들의 통과 흔적을 남기고 존재의 질서를 차단하고 혼란시킨다.

   타자의 타자성과의 접촉은 타자의 호소와 거부에 실질적으로 응답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인지함과 동시에 그에게 응답한다는 것이다. 타자는 나의 동료인 동 시에 타자성이다. 타자이자 제2의 나(alter ego)이다. 타자성은 그의 객관성을 단순히 부정하는 주관성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에는 세계의 사물을 의미하는 객관적인 기호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적 규범성은 타자성, 타인과의 조우에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존재의 동일성에는 그것의 전 역사를 훑어보아도 신비한 데는 전혀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똑같고 모든 타자를 결정하고 그 자신에 영향을 미치는 타자는 없다. 만약 타자가 그걸 결정한다면, 즉 외재성이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면, 본능적인 존재를 죽이게 된다.122) 형이상학적 욕망은 동일자인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타자에게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타자의 얼굴은 자아에게 응답하기를 요구하고 이기적인 자아가 갖는 삶의 요소에 대한 주체의 자유, 거주, 자기 공간에서의 지배력 등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은 나(주체)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부추긴다. 벌거벗고 무방비적인 얼굴은 정의에 대한 호소이고 타자를 위한 책임감에 호소한다.123)

   데카르뜨에 있어서 ‘영원한 자의 관념’은 방법론적으로는 ‘사유함으로써 존재하는 자아’ 다음에 오는 것이지만, 원칙적으로는 자아인식(ordo essendi)이나, 세계 존재의 확실성이 신의 존재를 전제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레비나스에게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주체 중심의 모든 이론적 지식 즉 존재론은 ‘타자(다른이)’와의 관계 때문에 가능해지고,124) 타자와의 관게란 다름아닌 타자의 얼굴로 시작된다. 세상을 향유하는 주체는 곧 아무 제약이 없는 자유의 주체와 全존재론적 이기주의의 주체로서, 이렇게 무한정 방조하고 이기적인 주체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evenement)이 나타나서 그 자유와 향락에 한계를 규정한다. 

   자아성(Egoity)은 타인과의 접촉에서만 그 존재를 벗어날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갖는 윤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소유되기를 거부하고 나의 힘을 거부한다. 얼굴의 현현, 그 표현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전적인 저항으로 변모한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차원의 개막으로만 가능하다.----얼굴이 보여주는 표현은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걸고 소유를 하는 힘은 갖지 않은 어떤 관계로 나를 이끈다.125)

 

   얼굴 대 얼굴(face to face)이란 인격적 관계 맺음이다.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상호대등의 관게보다 구체화된 관계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얼굴 대 얼굴에는 그외 다른 무엇이 깃들어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얼굴 속에 나타나는 혹은 얼굴 그 자체로서 나타나기도 하는 무한자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특히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visage, face)에 대해 구하는 의미가 유대적 전통 안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구하는 답과 유사하다. 창세기 16장 13절에서 신의 이름을 Atta-El-Roi라고 하는데, 이 의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me voyant, look at me full in the face)’라는 뜻이다.126) 하갈이 사막에서 헤매다 신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라고 신을 부른 것처럼, 타인이 얼굴은 그저 육신의 하나로서 나와 관게맺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신의 현현을 읽는다. 즉, 타인의 얼굴은 그저 감각기관으로 인지되고 감지되는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이기성을 깨닫게 하고 일상적인 사물의 질서를 흐뜨려 놓는 그 무엇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봄으로써 나의 이기성을 일깨워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고 명령하고 책망하는 신의 현현(l'epiphany de Dieu)까지 보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서 무한과 초월을 읽는 레비나스는 타인이 나에게 갖는 힘을 윤리적 저항(resistance etique)127)이라고 표현한다. 엄밀히 말해서 타자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을 바로 그 때 타자가 행사하는 고유한 맞대응을 윤리적 저항이라 불렀다. 윤리적 저항은 타자로부터 힘을 빼앗아오려는, 혹은 타자를 제거하려는 나의 은밀한 이기적 경향에 대항한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얼굴의 술어적 혹은 지시적 기능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기 보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힘에 대해 말한다. 호소하고 명령하는 것이 얼굴이라는 신체의 한 부분이 하는 행위인 것이다.128)

   육체란 사물들 중에서 공격받기 쉽고 외부의 위협과 폭력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폭력은 주로 타자를 향해 그리고 타자의 얼굴에 행해진다. 타자의 얼굴은 주체의 표현 이전의 우선적인 것이며 따라서 얼굴의 의미는 윤리적이다. 즉 세상의 위험에 노출된 존재로서의 타자성을 갖고 보는 이로 하여금 조심스러움과 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의 헐벗음, 벌거벗음은 의미가 크다. 노출되고, 공격받기 쉬우며, 호소하는 듯한 눈과 스스로 무방어적이고 나아가 상대방까지 무장해제시키고 지시하는 목소리,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불러오며 아무것도 쥐지 않은 벌어져 있는 손. 이 모든 것들처럼 어떤 것을 명료하게 하거나 밝히지 않으면서도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존재의 벌거벗음이다.129) 그 벌거벗음과 무방비성에서 얼굴은 정의를 호소하고 타자를 위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과 인간의 모든 윤리적 상호작용의 근원지인 얼굴 대 얼굴의 관계의 의미를 캐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평화(peace) 역시 타인의 얼굴의 의미를 인정하는데 있다. 얼굴은 주체의 이기성을 일깨운다. 무한에 대한 생각은 타자에서 출발하는데, 타인의 얼굴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하여 타인은 신과 관계함에 있어 형이상학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근원지가 된다. 타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은 얼굴의 지각에서 혹은 무한에 대한 생각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2) 죽음(la mort)

 

   전통적인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서 죽음이란 허무로의 이행 혹은 다른 존재로의 진행으로 간주되었다. 또다른 존재와 무의 형태로, 적어도 경험적인 이승에서 나의 친지들의 죽음이란 적어도 이 곳에서의 사라짐 내지 새로운 출발이었다.130)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서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고, 만일 인간의 죽음이 무의미와 허무로 귀착되어야 한다면, 인간의 삶 또한 결국은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현존에 있어서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며 죽음이 없는 실존은 없으며,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는 실존이해는 없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l'impossibilite de la possibilite, impossibility of the possibility)’으로 말해지고131) 주체가 죽음과 직면해서,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님을, 존재의 주인이 아님을 경험한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에 ‘나’로서의 동일성을 형성하고 그의 생애 동안에 어떤 가능성들을 실현하면서 나름대로의 주관은 굳혀진다. 삶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죽음은 이러한 ‘할 수 있다’의 특성을 앗아가 보리는 것으로, 바로 이 때문에 노년이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러 면에서 제한받는 중간적 입장에 처하게 된다.132)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해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죽음은 주체의 힘, 익명적 존재 사건 속에서 홀로서기를 통해 가능했던 힘, 현재의 현상과 빛 가운데 표현된 힘의 한계가 된다. 우리의 힘을 벗어나는 현실의 경험적인 세계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다가섬에서 중요한 것은 그 때가 우리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 순간에 주체는 자시에 대한 지배권 자체를 잃어버린다. 경험적인 세상에 갑자기 돌출하는 죽음은----사건의 준비도 전혀없이 어떤 계획을 짤 새도 없이, 하나의 사건이 우리에게 엄습하는 형상이다. 죽음이란 아무런 계획도 준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러한 죽음의 접근은 ‘절대적으로 다른 것’, ‘타자성을 지닌 것’ 그리고 享有를 통해 우리가 동화시킬 수 있는 일시적인 존재가 아닌,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곧 타자성인 어떤 것과 우리가 관계맺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나의 단절성, 고독감은 죽음에 의해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균열을 일으킨다”133)

 

 

   레비나스에게서 죽음의 의미는 타인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이기적인 자기성(ipseite,selfness)을 깨뜨리는 데 있다. 즉 죽음은 ‘절대타자’,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내 바깥에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존재자’를 통해 익명적인 존재의 어둠에서 홀로 선 주체이 고통, 존재의 전체성은 고통 속에 다가 올 죽음을 통해 틈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죽음의 의미는 하이데거의 죽음의 의미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자세히 드러난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존재를 나의 것으로 수용하고, 미래를 향해 존재를 기획할 수 있는 근거였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죽음은---동시에 ‘현존재’의 상실이다. ‘더이상 현존재가 아닌’ 것으로 이행하게 되면, 현존재는 이 이행을 경험하고 또 경험된 것으로서 이해할 가능성으로부터 당장 배제되고 만다. 그런 가능성은 물론 자기 자신에 관한한 어떤 현존재에게도 거절되어 있다. 그러나 타자의 죽음은 더 현저하게 눈에 띈다. 따라서 현존재가 종말을 고하는 것은 ‘타자의 죽음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 가능하다. 더욱이 현존재는 본질상 타자와의 공동존재이므로 그는 죽음의 경험을 획득할 수 있다.  <중 략>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끝남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적합하게 성격지어지지 않는다. 사망한다는 것이 끝남의 의미 즉 ‘끝막음’으로서 이해된다면, 이로 인해 현존재는 도구적 존재로서 정립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부단히 이미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있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끝남은, 결코 현존재의 ‘끝막음’이 아니라 이 존재자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그 현존재가 인수하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134)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 볼 때, 모든 것의 ‘불가능성’으로 대두하는 레비나스적 죽음과는 달리 하이데거가 염두에 둔 것은 주체의 자유이다.135) 현존재는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소유하고 미래까지 기획할 수 있다. 죽음은 현존재에게 있어서 모든 다른 가능성을 가능케하는 최고의 가능성, 즉 죽음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possibility of the impossibility)‘을 뜻하게 된다.136)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세계 안의 존재‘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위해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보고 현존재는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같은 생각을 레비나스는 거부한다. 자아가 만나는 대상은 자아에 의해서 이해되며 더 나아가 소유와 향유가 가능한데 비해, 죽음이란 주관이 자신의 힘 속에 갖지 못한 사건, 주관이 주관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고, 가능성의 수용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건이며, 따라서 주체의 주도권을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137) 죽음은 현재 사건이 아니다. “네가 있을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왔을 때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Si tu es, elle n'est pas ; si elle est tu n'es pas)라는 옛 격언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버리려 했던 고대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사실로서 인식되지 않을 뿐더러 인식할 수도 없으며 그 본질을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이것이 자아의 이기성이 주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만일 죽음이 현재라면 나는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현재가 아니다. 죽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내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insaissable), 주체의 힘과 영웅적 용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한다.138) 나 자신의 죽음은 타자들의 죽음으로써 추론되지 않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죽음의 순간은 경험적인 무지, 우리의 앎의 한계에 따른 것이 아니다. 죽음이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은 어떤 앎의 지평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지 파악될 수 없다. 죽음에 한해서는 나는 절대적인 폭력 하에 있으며, 보다 정직하게는 보이지 않는 것과 나는 싸우고 있는 셈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나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미래와 관계하도록 나에게 길을 마련해 준다.

    레비나스가 죽음에 대해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타자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자아의 이기성의 심연을 흔들어 준다는 것이다. 죽음은 주체의 고독, 존재자로서 갖는 전체성을 깨뜨리고 자신의 존재에 같혀있던 주체는 죽음의 접근을 통해 전적으로 낯선 다른 타자를 만나게 된다. 전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139)라고 말하는 레비나스는 죽음 또한 신비로운 것이라고 본다. 죽음에는 나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존재 기반이 없다. 따라서 죽음이 갖는 타자성의 존재는 나의 내면성과 구별되는 외재성이다. 죽음을 통한 절대 타자와의 관계는 인간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그가 말하는 참된 미래는 현재 순간과는 완전히 다르고 전혀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오는 참된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은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그것이 다가온다는 사실로 인해 공간적 외재성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상, 미래의 기획은 베르그송에서부터 싸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은 이것을 시간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고 있다. 고작해야 미래의 현재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미래가 아니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덮쳐오고, 예기치 못한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다. 미래, 그것은 타자 (l'autre)이다. 미래와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140)

 

   죽음의 위협은 항상 연기되어 있고 지금 당장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데에 죽음에의 비극성이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죽음을 밖에서 오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의 존재에 부여하는 의미는 이러한 비극성을 깨뜨리는 또다른 의미에 있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자는 살기 위하여 나의 관심과 보살핌의 필요한 존재이다. 타자의 무력성과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의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는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141)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 중심적인 의미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과 환대를 통하여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미래는 동일자 (le meme, the same)로 흡수될 수 없는 타자(l'autre)가 존재 속의 전혀 다른 한 차원으로 틈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레비나스에게서 죽음이란, 타인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이기성을 깨닫게 하여 견고한 내재성을 열게 하고 외재성, 무한, 초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아는 존재론적 욕구만이 아닌 형이상학적 욕망에 매달릴 수 있게 된다.

 

 

 

 

 

 

 

   IV. 레비나스의 他者性

   

     1. 나와 他者의 關係

 

        1)非對稱的 關係

   

   레비나스의 철학, 특히 그의 윤리학에서 타자의 개념과 역할은 의미의 淵源을 이루는 샘과도 같다. 그의 윤리학에 있어서 타인의 얼굴은 무한의 이념과 초월성의 이념, 그리고 외재성의 顯現으로 나타나고 신의 顯現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주체의 이기성을 일깨워주는 얼굴로써 나와 관계맺는 타자는 타자와 나의 관계맺음에 있어 레비나스는 非對稱性(asymmetrie, asymmetry)에 주목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 우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에 있어서 타자성의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타자성의 개념 이해에서 타자와 나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인간들간의 윤리적 관계가 참으로 윤리적일 수 있으려면 나와 타자간의 비대칭성이 수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를 윤리적 사건이라고 하는 얼굴의 顯現 속에서 인간의 서로간의 관계맺음에서 찾고 있다.142) 레비나스 사상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많은 논의를 야기시키는 것도 자아와 타자간의 근본적인 비대칭성과 나아가 윤리적 관계의 비대칭성이다. 지금까지 자아 우위론적 타자성으로 혹은 상호 동등한 자아로 이해되던 타자성의 개념143)이 무한성의 이념과 함께 얼굴의 현현이라는 사건 속에서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타자일 뿐만 아니라 주체인 나에게 호소하고 기도하고 언명을 내리는 존재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 점은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타인은 무방비적이고 벌거벗은 얼굴로 나와 접하게 되는데, 이 때 나의 존재론적 권리는 의문시된다.

   비대칭적 관계는 타자가 나에게 내리는 윤리적 언명 속에서 구체화된다. 타인의 권리는 나 자신의 권리에 대해 우위를 점하면서 이는 ‘나를 살인하지 말라, 타인의 삶을 해하지 말라’ 등과 같은 윤리적 언명을 지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와 타자의 관계가 상호대등의 관계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타인에게 종속시켜야 하는 비대칭적 관계임을 알 수 있다.144) 자아와 타자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윤리적 의무가 선이고 정의라는 것은 타자와 상호 응수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윤리학은, 지금까지 전통적인 서양철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존재론, 실용주의, 공리주의의 한 부분집합에 속할 따름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우위’와 함께, 레비나스의 동일자(self)와 타자간의 관계의 비대칭성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 있다. “타자는 또 하나의 나(alter ego)가 아니다. 타자는 나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다”(The other is what I myself am not).145) 타자는 후설이 보는 것처럼 지향적 대상으로 주제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나에게 인사하고 호소하고 말을 걸어오는 존재이다.

    ‘나’가 아닌 타자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고조된 것은 1960년 이후 탈근대적이라고 할만한 철학적 경향들이 등장하면서이다. 특히 인간과 사회의 관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개념이 인간의 사회적 본성 또는 사회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들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 등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론적 개체주의나 집단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146) 대화의 철학으로 말해지는 부버의 사상은 인간과 인간 사이라는 개념을 주목한 데 있다. ‘나’가 아닌 타자의 호칭을 ‘너(Du, Thou)’와 ‘그것(es, it)’으로 구분한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사상은 레비나스의 타자성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부버의 『나와 너(Ich und Du)』는 현대 기술산업사회가 빚어내는 인간관계의 고립성과 소외성을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파헤친 저술로서, 현대 사회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상실하고 더 나아가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과 의의를 잃어버린다는 깊은 통찰을 바라고 있다.

 

     “근원어는 외톨이말이 아닌 조합어들이다. 하나는 ‘나-너’의 조합이고 또다른 근원어는 ‘나-그것’이다. 그것 대신에 ‘그’나 ‘그녀’를 넣어도 상관없다. 따라서 사람인 나도 이중적이다. ‘나-너’라는 근원어 속의 ‘나’는 ‘나-그것’에서의 ‘나’와는 이질적이다. 근원어는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맺는다. 그들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말함으로써 존재하게(existing) 되는 존재(being)에 대해 말한다. 근원어는 전존재적으로(mit dem Wesen, from the being) 말해진다. ‘너’라고 말할 때는 조합어 ‘나-너’의 ‘나’로 함께 말해지는 것이다.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 조합어 ‘나-그것’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둘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말한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147)

 

    여기서 부버는 ‘나-너’의 관계가 인격으로 나타난, 인격과 인격의 관계로 보는 반면, ‘나-그것’의 관계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사물과 같이 다루어 자기의 수단으로 삼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조건과 조건, 사물과 사물 사이의 문제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낮은 차원에서부터 과학적 관찰, 지식의 획득, 종교적 교리의 설정이나 철학적 인식 따위에 이르는 극히 다양한 태도를 내포한다. 부버는 어떤 종류의 ‘나-그것’이 가지는 생활상의, 혹은 문명, 문화적인 의의와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버는 인식의 경우에 있어, 어떠한 존재에도 ‘그것’으로서가 아니면 사람들의 지식 저장고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고 말한다.148) 인식하는 자는 그가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볼 존재를 대상으로 파악하고, 다른 여러 대상과 비교하여, ‘너’에 대한 모든 응답은 ‘너’를 ‘그것’의 세계 속에 얽매어 넣는 작용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을 주목하거나 관찰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구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그 사람을 “그것”으로서 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 모든 행위가 나에게서만 일어나고 있으며 그 사람은 오직 대상으로만 있을 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부버의 ‘거리(distance)’와 ‘관계(relation)’의 개념은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욕구(besoin, need)와 형이상학적 욕망(desir, desire)과도 상응한다. 부버에게서 인간은 ‘나-그것’의 세계와 ‘나-너’의 세계에 대응하는 두 가지의 태도, 즉 거리와 관계라는 태도를 지닌다.149) 거리는 ‘나-그것’의 세계에 대응하는 태도로 인간의 상황을 제공하는 반면에,  관계는 ‘나-너’의 세계에 대응하는 태도로 그러한 상황 속에의 사람됨에 기여한다. 부버의 이 두 개념은 레비나스의 욕구, 욕망의 개념에 대응할 수 있는 것으로, 레비나스가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망의 출발에서 윤리학이 등장한다고 본 점과 부버가 ‘나-너’의 인격적 관계 회복을 통해 참된 만남과 윤리성의 회복을 도모한 것은 공통된 점이다.

    레비나스는 부버의 나-너의 관계도 결국에 타자를 사랑의 관계 속에 용해하여 버림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너의 관계는 서로를 용해하는 사랑의 관계를 넘어서 정의와 선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요 내가 책임을 지는 타자에 대한 관계라는 것이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것은 내가 타인을 위해 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나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150) 또한 부버의 ‘나-너’의 관계는 윤리적 측면을 잃어버리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정신주의(spiritualism)라고 표현하는데,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자를 배불리는 것이 타자에 대한 진실되고 구체적인 접근이라는 것이다. ‘우정’(friendship)이라는 이름의 관념적인 영역이어서는 안된다.151)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와의 관계에서 상호성이 아닌 비대칭성이 있다. 타자는 높은 데서 내게 말을 걸고 나의 책임감을 일깨운다. 부버의 ‘나-너’ 관계에 대해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버는 동반자나 친구로서 너라고 말해지는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와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대상(l'objet)과의 관계를 구분했다---그러나 우리는 ‘너’라는 불림(tutoiement)이 타자를 상호대등의 관계 속으로 넣어 버리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상호성이 독창저인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부버식의 나-너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형식적인 특징을 포함한다 : 사람을 사람에게 단일화시키는 것처럼 사람을 사물과 단일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너라는 형식성은 아무런 구체적인 구조를 말하고 있지 않다. 나-너 관계는 사건이고, 놀라운 호소이고 이해이다. 그러나 우정 외에 다른 삶에 대한 이해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교만하고 아직 설명되어지지 않은 일종의 정신주의에 빠진 셈이다. 나의 작업은 이런 점에 대해 부버의 생각을 수정하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무한의 관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와 시각을 달리한다.152)

 

    주체성의 본질은 자아와 타자간의 놓여있는 분리(separation, separation), 거리의 유지 내지 촉발에 놓여있다. 역사가 나와 타자간의 거리두기가 아닌 동일화(identification), identification)의 과정이었다고 비판하는 레비나스는 타자를 안다는 것이 그를 대상으로 틀지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歡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타자는 인식과 사고의 대상 이상의 同類(ally)인 것이다.

    앞에서 타인의 얼굴의 출현은 하나의 윤리적 사건이라고 말했는데, 윤리적 사건인 얼굴의 현현 속에서 사람이 서로 맺는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것은 얼굴의 현현 가운데서 타자는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자아(alter non-ego)로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 역시 부버의 대화론적 철학과는 구별되는 점으로, 레비나스 자신 스스로 부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비대칭성을 내세우고 있다.153) 그러나, 레비나스와는 달리, 부버는 ‘나-너’의 관계의 힘의 회복을 통하여 점점 더 ‘그것’으로 굳어져가는 세계를 깨뜨리고 녹임으로써 되풀이하여 근원적, 실재적 생명을 되찾고, ‘너’라고 말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전체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버가 이처럼 인간관계를 ‘나-너’ 관계의 인격적 ‘만남’과 ‘대화’를 중요시하고 오직 독백만이 메아리치는 ‘나-그것’의 관계만이 횡횡하는 위험성을 일깨운 의의는 있지만, 레비나스의 보다 근본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태도와는 차이가 있다. 즉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란 그의 얼굴이 나에게 현현하면서 부버식의 표현을 빌면 ‘나-너’의 관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나, 부버에게서처럼 ‘그것’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지닌 대상적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체의 본질을 변형시키는 적극적 역할의 담지자라는 점에서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간의 비대칭성을 그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삼고 있다.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윤리적 형이상학의 전반적 입장은 윤리적 관계의 비대칭성은 역시 초월적이라는 데 있다. ‘나’와 ‘타자’의 관계가 ‘내’가 ‘타자’를 지배하고 정복하는 정치적 전쟁의 자아 중심적 관계였다고 판단하는 레비나스는 타자가 나보다 상위에 있고 주종의 관계, 즉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받는 관계가 아니라 1대 1의 동등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가 상위에 있는 비대칭적인 관계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154)

 

     2)‘나’에 대한 構成적 關係

 

    1960년 이후 현대 철학이 매우 강하게 反데카르트적 경향을 띠게 된 것은 현대 철학이 겨냥하는 철학적 목표가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문화를 극복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방법은 다르지만, 자아중심적인 철학 비판이었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철학이 진리 발견이란 명목하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힘에 대한 의지를 폭로한 것이다. 공통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155)

    첫째, 자아 혹은 주체는 세계의 근원이나 최종적인 근거는 아니다. 자아는 근원적이기 보다 파생적이다. 자아는 세계 이전에,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언어를 통해 형성된 구성물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의 사회 경제적 관계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 마르크스나, 힘에의 의지를 자아의 본체화의 근원으로 본 니체, 그리고 무의식을 의식저인 자아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본 프로이드의 관점을 이어받은 것이다. 둘째, 자아가 근원적 존재가 아니라 파생적 존재라는 것은 자아가 의미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의 의미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그가 부여한 의미에 대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가 지닌 의도나 그가 부여한 의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가 지닌 힘의 관계에 의해 생성한다. 셋째, 말은 말하는 자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현실을 표시하고 지칭하는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은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과 지배를 떠나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보다 권력 관계를 잘 표현하고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권력 관계의 그물 속에 갇혀있는 囚人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아 중심론적 철학의 비판은 곧 타자에 관한 사유의 발달로 이어지고 철학의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타자에 관한 중요한 논의 중 하나는 후설의 구성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후설의 구성 이론은 ‘構成’이라는 명칭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결코 사고 내용에 대한 단순한 ‘노에마(noema)’론이 아니라 언제나 구성하는 주체의 수행인 ‘노에시스(noesis)’의 구성적 계기를 상관관계적으로 고찰하는 이론이다.

    후설이 『데카르트적 성찰』 제5성찰에서 타자 경험의 구성을 사물 구성과 비슷하게 접근하면서, 후설은 타자 경험의 구성을 3단계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식의 주체인 ‘나’는 타인을 먼저 그의 육체를 통해 마치 다른 사물을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한다. 그 다음 살아 움직이는 나의 신체에 타인의 육체를 연상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타인의 육체도 나와 마찬가지의 신체로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몸이 의식의 주체이며 타자는 나와 마찬가지의 다른 자아임을 지각한다.156) 여기서 후설의 타자 경험 역시 모든 의식의 지반이 문제되고 있다. 사실 후설은 모든 의식의 근거를 먼저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현재화‘라는 현재성도 역시 의식의 내지성으로만 강조되었을 뿐이다. 다시 후설의 지향성을 의식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지향 대상은 바로 의식에 내재해 있는 것이 되고 만다.157) 이러한 구성이론이 인식론인 한, 후설의 선험 현상학에서는 존재론이 어디까지나 인식론 내에서 문제된다고 말할 수 있다.158) 또한 후설 사상에서 타자의 문제가 추구하는 바 핵심은 상호주관성의 보장 또는 유아론의 극복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와 동일한 또다른 주체인 타자, 즉 소통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으로서 복수적인 동일자의 가능성의 문제인 것이다.159)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보는 타인과의 관계는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된다.

 

       “우선 타자는 세상으로의 통로, 내가 知覺하고 居住하는 동일한 세상으로의 통로이다. 이 세상은 많은 자아 즉 존재하는 주체들 사이의 연결점이다 ; 세상은 공통된 앎과 행위의 場으로서 존재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타자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자아, 하나의 共主體(cosubject)이다. 두 번째는, 그는 또한 세계내의 대상, 나의 지각장과 행위장 안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면, 우리는 타자를 세계-내-존재(being-within-the-world, innerweltlich Seiendes)로서 만난다.----이런 면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이 후설에 의해 형성되는 초월론적 접근의 쇄신의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수정(modification)일 뿐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공통점은 타자는 전적으로 이 세상의 공주체(cosubject), 共居住者(coinhabitant)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타자는 참으로 또 하나의 자아(alter ego)이고 또 하나의 ‘나’이나 결코 파트너는 아니다.”160)

 

     이러한 주장은 타자의 존재가 나 자신의 존재에는 구성적 요소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가져온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주체는 타자에 의해 여전히 單子, 혼자만의 자아이다. 이처럼 현상학적 이론에서는 여전히 타자는 아무런 색깔도 본질적인 가치도 갖지 못하고 자아가 자기 동일성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앎과 인식의 행위에 감각을 제공해주는 존재로 그치게 된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사유를 부동의 기초로 보는데서 출발하였듯이 후설은 현상으로부터,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로부터 나온 근대의 사유는 주관성으로 완성되고 이는 묻는 자의 존재 물음에 대해 큰 걸림돌이 된다.

     이상과 같은 ‘나’라는 주체성의 물음에 대한 탈근대적 철학자들의 답변에서, 주체성이란 완전히 내팽겨쳐야 할 시대착오적인 개념인지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프랑스인 유태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준비하고 있는 답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주체로서 구성되는 ‘나’이다. 여기서 ‘構成’은 타자에 의해 전적으로 의존되는 구성은 아니다. Boer는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공존재의 주체로서, 그러나 인식과 사고의 대상에 그치고 하나의 대상으로 틀지워지던 ‘나-너’(I-Thou)의 타자관이 레비나스에 의해 심화되고 보다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책임이며 이것은 ‘너’라고 말해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레비나스의 주체 구성과 유사한 들뢰즈의 타자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들뢰즈 역시 주체의 구성에 있어 타자의 역할을 논의했다. 들뢰즈는 타자의 효과란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사물과 내가 사유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내 지각의] 변두리의 세계, 즉---배경을 조직하는 것이다---대상의 어떤 부분을 내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나는 이 부분을 나에게는 안 보이지만, 동시에 타자에게는 보이는 부분으로 여긴다. 그 결과 내가 대상의 이 숨은 부분에 도달하려고 할 때, 나는 대상 위에 있는 타자와 결합하고, 그리하여 이미 예측했던 전체화를 할 수 있게 된다.”라고 말을 한다.161) 사물 세계에 대한 우리 지각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는 늘 사물의 일부분만을 지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지각되지 않는 부분까지 종합하여 대상을 체험한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각하고 있을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만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바와 같이 하나의 전체화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말해 타자를 통해서 이 전체화한 세계의 상관자로서 우리 의식이 구성된다. 따라서 들뢰즈는 타자를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162) 즉 타자를 통해, 전체화한 이 세계의 상관자로서 우리 주체성의 근본 구조가 정립되는 것이다. 대상은 또 다른 주체가 아닌, 나의 주체성의 근본구조를 구성하는 타자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들뢰즈의 타자이론은 레비나스의 이론이 보여주는 새로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타자이론에는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동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란 데카르뜨가 “사유하는 주체”로서 상정한 全權的인 ‘자아’는 분명히 아니다. 레비나스는 주관의 그 자신에게로의 되비침 혹은 ‘그 자신에로의 덮침’으로써 특성화, 묘사될 수 있는 수동적인 되비침으로부터 출발한다. 주관의 그 자신, 즉 자아에게로의 되비침이 문제되는데, 레비나스는 색깔없는 실처럼 운명의 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존재의 흐름에서 중단, 즉 자아의 발생을 가능케하는 실의 끊어짐과 다시 이어짐이 발생한다고 가정해야 했다.163)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면 어떠한 자아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본질은 운명을 표현할 수 없는 단순한 무차별적인 계기들만을 산출할 것이다. 어떠한 것도 스스로 발생할 수 없다. 레비나스가 보는 존재란 익명의 어둠 속에서 무의미한 일련의 연속적 상태이고 이러한 흐름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고 자신이 맞이하게 될 죽음이다.164)

   여기서 레비나스가 능동적인 자기 정리의 관념론적인 개념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165) 자아 그 자체는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진행할 수 없다. 자아 그 자체는 함께 모여 ‘개념의 통일성’을 이루는, 그리고 개념 밖에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 의식의 형태로부터는 자라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 그 자체는 타자로 인해 형이상학적 욕망의 충족과 갈망을 경험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통해 독립성을 갖는 존재자가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주체의 동일성이 타자에 의해 책임감을 지니게 되는 점을 통해서만 생겨난다는 것이다.166)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존재, 본질의 구성은 주체를 존재(Dasein)의 기능으로 보기를 요구한다. 실제로 하이데거에게서 주체의 본질은 그것을 다른 실체들의 주변에 놓인 하나의 실제로 봄으로써 그리고 그들과의 유사성과 상호작용을 밝히는 데 있지 않고 코기토의 총체 즉 존재가 자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주체를 존재의 바깥에 있는 그 무엇으로〔be outside of being〕 본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167) 들뢰즈가 타자 이론을 통해 기술한 세계는, 레비나스적 의미로, 나의 욕구(besoin, need)의 실현을 위한 나에게 종속된 세계이다. 이 점은 들뢰즈나 하이데거 뿐만 아니라, 타자를 강조하는 다른 많은 탈근대적 사유들과는 구별되는 레비나스 철학의 가장 중요한 면모이다.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혹은 나의 의식(noesis)의 사고내용(noema)으로서는 아닌 ‘외재적인 무한자’로서 타자는 등장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타자의 구성적 관계는 나와 타자간의 앞서 말한 비대칭성 속에서 출발한다. 자아의 어떠한 이해도, 자아가 스스로 만들어 낸 어떠한 사상도 전원천적인 사건을 전제한다. 여기서 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적 접근이 레비나스의 인간 존재 이해에서도 유용함을 알 수 있다. 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을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때, 그 하나는 인간에 관한 개별과학들의 연구 결과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개별과학들을 거치지 아니하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삶의 체험 속에 나타나는 근원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168)레비나스는 모든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역할을 떠맡고 있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지향성을 지적하고, 인간이 타자와의 접촉, 관계함에서 체험하는 내용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상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의 나에 대한 구성적 관계는 두 가지 점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첫째는 존재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타자성이 있다. 자아의 존재 방식인 소유와 享有는 모든 존재에게 있는 존재유지의 경향이고 존재노력으로, 원초적인 나는 본질적으로 외재성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음(live on, vivre de)이 또한 타자를 향한 나의 지향작용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고 있음에서, ‘on’은 처음부터 타자성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만 소유를 취함으로써, 그리하여 통합함로써 취소되는 타자의 타자성이다. 이것은 ‘존재한다’(to be)라고 하는 동사를 자동사가 아닌 ‘생각한다’ (to think)와 같은 타동사로 간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169) 두 번째, ‘나’라는 주체는 존재론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구를 지님을 앞에서 보았는데, 형이상학적 욕구가 타자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서 존재론적 욕구가 자아의 존재유지, 혹은 존재보존의 노력의 하나로, 주위 환경을 나의 인식 내로 취하고 소유함으로써 동일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려는 욕구라면,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존재론적 욕구와는 다르게 만족과 멈춤을 모르는 움직임임을 논의했다.170) 그러나 인간에게는 존재론적 욕구만이 아닌 형이상학적 욕망도 공존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더구나 이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채워지고 다시 갈망된다. 외재성과 무한자의 이념의 현시로서 타인의 얼굴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채워주고 또한 부추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비나스 철학이 타자에 의해 주체가 좌우되는 결정론적인 철학은 아니다. 실지로 자신의 철학이 자아중심 철학임을 밝히고 있다.171)

 

      “이 책은 주체성의 옹호를 위해 씌어진 책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성이란 전체성에 反하는 순전한 이기주의적 수준에서의 혹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주체성이 아닌 무한성의 관념에서 기초지워지는 주체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한성의 관념에 기초한 주체성이란 결국 타자에 의해 나의 동일성, 정체성이 구성되는 주체 혹은 자아이다. 이기성의 자아를 벗어나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주체’는 타자와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不二而不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레비나스로 하여금 이웃에게로 향함과 함께 시작하는 윤리성의 전환의 문제와 함께 인간정신의 ‘수동성’을 강조하게 한다. 그의 수동적인 존재의 개념은 ‘고통 속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독특한 의미규정을 한다. 후설의 수동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주관의 인식없이 그리고 의지없이 흘러가는 흐름이었다. 이와 달리, 레비나스는 두 형태의 고통을 기술한다. 고통, 나이먹어 감, 죽음과 같은 신체적 고통과 기소되고, 강박관념과 같은 도덕적인 고통이 그것이다.172) 인간이 타자에게서 갖는 비대칭성, 형이상학적 욕망 등이 인간의 수동성의 개념을 밝혀주고 더 나아가 타자는 ‘나’의 존재 구성에, 정체성 형성에도 적극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레비나스의 존재 구성 개념이 전통적인 자아 우위의 초월철학의 경향과 대립되는 부버의 “‘나’는 ‘너’를 통해 나 자신이 되어간다(I am becoming myself through you)”는 주장과는 차이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부버의 이 주장에 따르면, ‘너’와의 관계가 있기 전에 ‘나’라는 자아가 이미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타자와의 대면 이후에 주체는 가능하고, 그러나 또한 그 만남을 통해 ‘나’는 ‘나’가 되어간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실제의 만남이란 상대방의 현실적인 존재를 미리 전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를 통해 내가 되어 간다는 것은 일종의 성격과 자격의 부여(investiture)이다.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자아의 이기성(egoisme)’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가는 轉換을 경험한다. 여기서 레비나스에게서 자아는 타자와 나의 ‘구성적 관계라는 타자와의 만남 이전에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를 갖는다. 구성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타자를 통해 심판받고,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가 되는 轉換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나의 자유의 제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성의 일깨움이다.173)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포함하여, 후설이나 하이데거 부버의 대화이론조차 타자의 경험을 대상 존재의 존재 구성과 인식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론으로 끌어들이고, 타자의 타자성을 결코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즉 나의 이해와 인식의 폭 안에 이끌어 들이려는 타자는 레비나스적 의미의 타자가 아니다. 동일자와 또 하나의 자아 (alter ego)에 불과한 것이다. ‘나’란 권력과 욕망과 언어의 삼각관계가 빚어낸 산물도, 권력과 언어, 사회 경제적 체계의 囚人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나’는 ‘존재’라고 하는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는 익명으로의 ‘있음’의 연속에서 벗어나 ‘존재자’가 되고 존재자가 타자와 스스로 관계함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로움과 선이 출현하며 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란 존재자는 늘 새롭게 존재의 짐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174)

   결국 ‘나’에게서 타자란 하이데거적 의미로 인간 현존재의 실존적 성질을 드러내는 ‘현존재도’, 후설적인 의미로 나의 지향성으로 경험되는 대상도 아니다. 레비나스의 독특한 ‘너’, 타자는 ‘나’의 존재노력의 측면에서 보여주는 독립성과 자유를 인정하면서 나보다 우위에 서서, 비대칭적 우위를 지니며 ‘나’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욕망을 일깨워 참된 ‘나’로서 나의 본질을 이루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타자를 나의 존재구성을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써만 개별성(individuation, individualization)을 인정한다’175)라고 하는 그의 말에도 나의 존재 구성을 위한 타자의 역할을 알 수 있다.

 

 

    2. 主體에게 있어서 他者의 意味

 

     1)他者에 대한 責任과 倫理의 要求

 

   한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들 중에서 타인들과의 관계라는 요건은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중시되어 온 항목이다.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의존에 의해 비로소 한 인간으로 설 수 있다는 사회성의 과제는 정치학, 사회학 등에서 ‘사회화’ 연구를 통해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 왔다.176) 최근의 윤리학적 논의, 특히 사회윤리학적인 논의의 주제로 책임성의 문제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데,177) 기존의 논의들이 책임을 말할 때 윤리학적인 책임이론이나 인간의 사회성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논의가 전제되었다.

   윤리적 책임에 관한 문제를 논할 때, 항상 따라 다니면서 그 논의의 핵심을 차지하는 개념이 자유(自由, freedom)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이 근본적으로 의도적인 선택임을 강조했는데, 물론 이러한 언급이 곳바로 의지자유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도덕적 범위에는 그 행위자의 의도성이 개입되어 있을 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명제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178) 자유란 서구 사상에서 이성과 의지와 동일시되어 오면서 절대적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전통적 의미에서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한 개인이 자신이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해 변명, 혹은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타인에 대한 책임’과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 결국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책임’(self-responsibility)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자아-책임의 토대 위에서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의 모든 유형을 흡수해버리는 의사소통적 윤리가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가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서의 책임이 다분히 독백적이라는 것이다.179) 이것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전체론적인 존재론을 비판하게끔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에서도 責任(responsibility)과 自由(freedom)는 그의 사상에서 주요개념으로, 여기서 그의 윤리학의 특이성을 잘 드러난다. 존재(Being), 전체(totality), 정신(Spirit) 등 보편적 개념 하에 존재자를 중성화시키는 존재론 대신, 개인의 실존의 의미는 존재의 전체성, 역사성 속에서 도출된다. 의미(signification, Meaning)란 타인의 얼굴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동일자, 자아로 하여금 타인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에 참여하게하고 거의 폭력에 가까운 자아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등장하는 타자는 나의 ‘자유’를 문제삼아 타자를 이해하고 나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주체의 이성의 의지에도 역시 이의를 제기한다.

   주체는 이같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전에는 자신의 個別性(individuation, individualization)을 깨닫지 못한다.180) 타자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와 관계를 맺고 타자의 헐벗음과 배고픔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나의 방종하고 무한정한 자유를 부끄럽게 만들고 제한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등과 같은 윤리적 언명을 담은 눈빛 속의 무방어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타자가 우리의 자유를 한계짓고 책임감을 요구한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산술적인 의미로서가 아님을 강조한다. 자유는 한낱 不正義(injustice)였음이 드러나고 폭력의 행사에서 善意와 歡待로 변모할 것을 요구받는다.181)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동일자, 자아가 갖는 책임감은 심지어 타인을 위한 代贖(substitution)으로 나아가고 이 개념은 윤리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근원이 된다. 代贖(substitution)은 책임과 함께 레비나스의 윤리학의 기초 개념이다.182) 레비나스의 저서 『존재 외의 다른 것 혹은 본질의 저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그의 시각에 있어서는 세상에 친밀함, 따스함, 자비, 용서 그리고 동정심과 같은 것이 있음 자체가 타자를 위한 대속에 힘입어서이다. 심지어 예의와 인정과 같은 단순한 태도조차도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에서 솟아나온다. “모두를 위해 대속하는 나를 위해 그 누구도 그를 대속시킬 수는 없다”183) “‘나’라는 의미는 모든 것, 모든 이에게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184)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나’와 ‘타자’간의 관계는 모든 연대성과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한 先條件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들은 한편으로는 나의 주관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타자의 위치에 들 수 있는 능력, 즉 대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대속으로까지 발전시키는 책임의 의미는 共觀福音書(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그려지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끝없는 의무(obligation)의 의미와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고대 유태인들의 주해서에서, 예수이 약점을 잡으려 애쓰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율법 중에 가장 크고 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예수는 답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지자들이 모든 가르침과 언명에도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185) 이 답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타자에 대한 유일한 접근, 다가섬이 타자와 이웃, 심지어 이방인에게까지 윤리적 책임감을 가짐으로써라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형이상학 혹은 윤리학에서 그의 유태적 전통의 흔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이같은 책임은 동정이나 연민(pity)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책임감은 진정한 의무이다. 타자는 자아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타자를 향한 능동적, 적극적 행위를 통해 강해진다. 레비나스의 책임감의 호소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자비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원죄의 개념과 유사한 것도 아니다.186) 레비나스는 책임을 하이데거의 ‘던져져있음'(Geworfen, letting-be)187)과 ‘염려'(Sorge, care)188)의 개념과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던져져있음’은 실지로 타인에 대한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접근 또는 행위라고 비판한다.189) 존재의 잠재성 속에 긍정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던져져있음'(Geworfen, letting-be)은 비윤리적(non-ethical) 혹은 실존의 무도덕적(a-thical)인 양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의 호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책임에 대해 자아의 자유 우위를 가정하는 것이고 은밀하게 타자를 위혀하고 억압하는, 중성적인 상호작욫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얼굴 대 얼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무(nothingness)와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 타자를 타자로 존재하게 내버려두라는 호소는 현존재의 편에서 볼 때, 타자를 현존재 즉 자아(self)로서 존재하게끔 하는 호소로서 나타난다.190)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로 인한, 타자에 대한 외적 책임(responsibility from the outside)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내적 책임(innerresponsibility)과 다음과 대조되어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게 한다. 첫째, 타자가 요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for the others)에서 ‘타자에 대한 for’의 의미이다. 이것은 종래에 쓰이던 ‘-을 위하여’라는 의미에서 나아가 자신의 존재 혹은 자신의 소유가 타인의 비존재 혹은 타인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대신해서’ (instead of) 말을 하고 행위를 하는 것이며, 이는 대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책임은 대속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에 대한 ’대속은 단순히 교환적인 의미가 아니다. 둘째, 존재가 되어가는 중에 타자에 대한 책임에 눈뜨는 존재로 되어감이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대화론적 교환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모든 자유로운 주도권에도 선행한다. 책임에 답한다는 것은 어떤 이해도, 어떤 자유도 어떤 의식에도 선행해서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내 책임감을 떠맡기에 너무 늦게 온다. 그래서 내 책임감에의 응답은 나 자신에 의해 주어지는 모든 답에 선행한다. 세 번째, 타인에 대한 책임은 타인의 명령의 중요성 안에서 작용한다. 전적으로 타자에 의해 수행되고 강화된다는 점에서 책임은 나의 것이 아니고, 대속은 나의 대속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대속적인 책임은 타인의 실수에 의한 고통을 타인의 실수에 대한 고통으로 내가 떠맡는다는 사실에 있다. “기소당하는 존재”, “고소하는 존재”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데, 책임을 진다는 것은 타자의 기소 아래 자신의 죄를 진다는 의미이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대속의 책임이란 타인의 실수로 인한 타인의 고통을 고통스러워함으로써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서 타인에 대한 책임이 타자의 행위나 고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하는 모든 것에 지는 책임이란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타자로부터 고통당하는 그 무엇이나 내가 타인을 위한 그 무엇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타자에 대한 책임은 결국, 단순히 부과된 짐덩이,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191)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그의 윤리학을 출발시킨다. 나로 결코 환원될 수 없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소유에 속하지 않는 타자의 낯설음은 나의 자발성(spontaneite)을 문제삼고, 이것이 바로 윤리이다.192) 형이상학, 초월성,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수용은 타자가 나에 대해 이의제기하고 이는 나의 인식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던지는 윤리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구분을 하고 있다.

   도덕(morality)과 윤리(ethics)의 구분에서 레비나스가 윤리를 제일철학으로 두고자 하는 입장이 잘 나타난다. 도덕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회 규범과 질서 체계라면 윤리학은 그것들이 근거하는 토대로서, 레비나스는 윤리학이 그 어느 학문보다 선행되어야 하며 제1철학이 되어야 함을 밝혔다. 따라서 체계화되고 규범화된 규칙(rule)의 도덕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헐벗음에 감응하여 책임을 갖는 것이 윤리이다.

    코헨(R. A. Cohen)은 레비나스 윤리철학의 독특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 중 네 번째 특징이 레비나스의 책임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다.다.193)

    첫째, 타인의 절대적인 타자성(the absolute alterity of the other person)이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인을 타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속성이나 속성의 종합이 아니라 타자성 그 자체이다. 물론 타자는 항상 구체적인 타인, 동료, 시민, 과부, 고아, 市長 등 구체적 존재로써 현존한다. 그러나 타인은 절대 하나의 현상이 될 수는 없다. 타인의 얼굴의 극도의 헐벗음은 모든 의미, 그것을 가리거나 이해하려는 시도를 파헤쳐지는 것이다. 둘째,  타인의 근원적인 타자성은 주체의 의식적 행위를 포함해서, 자아의 능력과 힘 이전에 주체와 접촉한다. 자발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과 맺으려는 상호관계에 앞서,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이려는 감성에 앞서, 자아는 타인의 극도의 타자성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타인과 관계해서, 자아는 재조건화되고, 탈실체화되고 자아의 동일성은 의문시된다. 세번째, 타인의 절대적인 타자성과 함께 자아의 극도의 수동성을 들 수 있다. 타인의 타자성은 자아의 삶을 지속적으로 자기만족적으로 만들어주는 능력들로부터 주체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 나타나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러면서 레비나스가 신의 말씀(la parole de Dieu)이라고까지 표현하는 메시지는 ‘나를 죽이지 말라’(Do not kill me)이다.194) 이는 존재론적인 힘이 아닌 도덕적 힘을 담고 있는 명령이다. 네번째, 타인의 극도의 타자성과 그것이 나에게 부과하는 명령에 주체성을 복종시키는 나는 ‘책임을 갖게 된다’(become responsible). 타자에게, 타자를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책임감은 자아의 속성이 아니고 자아 그 자체이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the self-despite-itself)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된다. 타인의 얼굴 앞에서, 단지 타인의 얼굴 앞에서 대신할 수도 교환될 수도 없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자신으로 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책임감은 이행되면 될 수록 커져가는 무한한 책임감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만족될 수 있는 어떤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는 타자의 모든 연약함, 타자의 배고픔, 상처, 욕망에 책임이 있다.

   현대 철학을 이끄는 주도적인 문제가 주체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면, 유럽과 대륙의 현대 철학의 가장 주된 관심은 “타자 the other”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철학은 정체감, 자아 동일성 혹은 자아의 합리적 의식의 이해라는 제목 아래 객체, 나와 다른 것, 차별성 등은 제거하고 지배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지금 철학의 위기는 주체(sujet)의 자리이다. 근본적인 타자성(alterite, altetity)과 타인(l'Autrui, the Other)의 윤리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동일성에 대해 차별성의 우위를 강조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언어나 개념 이전에, 형이상학은 결국 타자, 타인과의 관계이다.195)

   레비나스의 목표는 윤리학을 존재론의 영역에 타협시키지 않고, 일원성에 대한 다원성의, 동일성에 대한 차이성이 형이상학적 우위를 두는 것이다. 타자의 흔적, 무한의 관념은 타인의 얼굴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윤리적 책임감을 갖도록 한다. 자아가 타자에 의해 갖게 되는 책임감의 관계에 의해 익명적 존재의 밤과 같은 어두운 공포는 중지된다. 예를 들어 엄마가 한밤중에 아이를 달랠 때 이전의 외로운 두려움은 사라진다. 존재(il y a, there is)라는 것은 밤과 유사하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는 홉스, 헤겔, 사르트르가 말한 것과 달리 소외가 아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관계임을 알 수 있는데, 레비나스는 형제간 관계는 자아와 타자간 관계의 典刑이 된다고 말한다.196)

   타인과의 관계는 자아동일적인 의식의 전체성보다 앞선다. 타인의 얼굴(le visage d'Autrui)은 나의 자유에 이의제기를 함으로써, 타인의 얼굴이 지닌 비폭력적, 윤리적 저항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자유를 문제삼는다. 강자의 힘은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완전히 박탈할 수 있지만 나의 자유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힘없는 타인의 호소를 인정할 때 나의 자유, 나의 자기 실현을 그대로 무한정하게 추구할 수 없다. 얼굴의 현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제동이 가해진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 부여와 함께,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거리, 분리성을 지탱하는 데 있다. 윤리적 관계가 사상, 언어 심지어 존재 그 자체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윤리학 혹은 형이상학이 제1철학으로 유의미하다. 반대로, 지금껏 제1철학으로 존재라는 사건에 몰두하는 존재론은 타자와의 거리를 없애고 타자를 나의 인식과 이해, 동일성의 영역 안으로 흡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힘의 철학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재평가는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의 형성에 대한 재평가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만족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 이상이며 그 자체의 갈망에 의해 채워지는 것처럼 타자에 의해 촉발되는 책임감은 지면 질수록 증가한다. 책임이 수행되면 될수록 의무는 점점 커져간다. 불의가 발견되면 될수록 정의를 향한 갈망과 욕구는 커지게 된다. 나와 타자 사이에 있는 거리는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형이상학적 관계이다.197)

    레비나스 사상에서 등장하는 신(Dieu)의 개념은, 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신학적인 개념 이전에 무한의 관념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인간의 얼굴에서 타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신의 말씀을 찾는다. 더구나 나와 타자의 비대칭성으로 나는 어떤 타자에게도 나를 양보하여야 하고 또한 어떤 사람도 나에게 대체될 수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에 따른 개별화를 받아들인다. 또한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는 책임은 기존의 윤리학에서 행위주체인 개인이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발생하는 책임이론과는 다르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에 대한 책임이란 독립된 주체인 ‘나’의 이기적 자유와 향유를 문제삼고 나의 자발성에 타자가 이의제기하면서 발생하는 개념이다. 단지 내 ‘밖’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닌 ‘내 위’에서, ‘저 높은 데’에서 나에게 내려오는 것이고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윤리적 저항)을 대할 때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는 의무인 것이다

 

    2)苦痛과 犧牲의 昇華된 삶의 要求

 

   고통과 희생이란 단어가 가져다 주는 다소 엄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는 보통의 범상적인 인간들이 그것을 얼마나 꺼리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느끼는 정도가 크든 작든 혹은 횟수가 많든 적든 육체와 영혼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 못이겨 신음하고 절규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고통이 문제를 쉽게 외면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물학적 구조나 그의 심리상태, 사회생활, 사고, 감정, 심지어 영혼의 문제에까지 진지하고 성실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간과하면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뺴놓는다고 할 수도 있다.198)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현상을 대상화하기가 어렵고 근대의 학문적 성격이 요구하는 체계적인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답이 어려운 만큼 질문 또한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한 점 중의 하나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문제를 과감하게 주제화했다는 것이고, 그것도 철저한 방법론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이다.199)

   대부분의 서양어에서는 통상적 의미의 고통을 “괴로움”(苦, suffering, Leid, souffrance)과 “아픔”(痛, pain, Schmerz, douleur)으로 구별한다. 괴로움을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픔은 육체적인 加害이다. 후자는 몸에 상처를 입거나, 매를 맏거나 혹은 몸에 병이 났을 때 받는 느낌으로,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의식의 바깥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며, 주체의 의식작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육체적인 것이기에 아픔은 짐승과 사람에게 거의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서 “괴로움”은 피곤하거나, 모욕을 당했거나, 미래를 걱정하고 심한 죄책감을 가질 때 경험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 反省的인 의식작용에 의존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식적이며 자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짐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의식작용과 정신능력을 가진 인격체에게 국한된다.200) 그러나 신체와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데카르트적 사고가 표피적이었듯이, “괴로움”과 “아픔”으로의 단순한 구분도 단선적이다. “괴로움”과 “아픔”으로의 구분적 사고로서가 아니라 상관작용을 인정하는 포괄적 개념인 고통으로써 인간이해에 접근해야 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고통은 이 둘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특히 그는 고통의 수동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타자에게로 향하는 ‘나’는 그 신체적인 실존에 이르기까지 타자에게 바쳐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발적으로 희생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하지 않았을 뿐 희생적인 供物이다.201) 특히 인간의 신체는 감각적으로 영향받으며, 상처받기 쉬우며, 스스로 고통과 노동의 괴로움, 나이 먹어감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생의 인내’라고 부르는데, 忍耐는 견딤에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忍耐와 苦痛은 존재자들의 자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투쟁에서 평형추로서 작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고통은 상처입는다는 면에서 수동적이다. 여기서 고통을 의식한다는 것도, 엄격하게 말해서, ‘(의식을) 취한다’(prendre, take)의 뜻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의식작용의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堪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견디어냄을 堪耐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고통스러워하는 의식이 의식하는 ‘내용’ 그것이 바로 고통이란 것, 즉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여전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수동성은 능동성이 개념적인 대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순수한 현상에서 고통의 수동성은 결코 능동성의 반대가 아니다. 말하자면, 결과가 그것의 원인과 상관관계에 있다거나 감각하는 것이 그 인상을 생산하는 대상의 존재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수동성은 우리 감각 기관의 수동성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감각의 수동성에는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능동성이 있고 또한 단번에 지각된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감수성은 상처에 노출된 약점이 있고 따라서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이다. 경험(experience, experience)보다 더 수동적인 시련이다. 정확히 말해서 惡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악이라고 말할 때의 수동성으로서가 아니고 고통으로 이해되는 악으로 비유될 수 있다.202)

 

   

    이상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고통의 지향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관점은 독특한데, 그는 우선 고통도 의식에 ‘주어진 것’으로, 어떤 심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의식에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양적으로 잡을 수 없는 만큼 크기 때문이 아니라 질적으로 잡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고통은 칸트류의 의미의 종합을 거부한다. 단순히 거부할 뿐 아니라 의미의 혼란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고통은 배척의 의식이요, 배척의 증상일 뿐 아니라 배척 그 자체이며, 거부의 방식일 뿐 아니라 거부 그 자체다. 비록 내용이긴 하지만 고통의 내용은 배척이란 역설적인 성역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203) 의미를 형성하는 초월적 주체가 어떤 능동적인 작용을 하지 않고 순전히 당하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지향적 요소가 있을 수 없다.204) 고통은 주체를 지향적이 되도록 만드는 계기는 제공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지향적이지는 않다. 또한 레비나스는 ‘고통 속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독창적 의미를 부여, 수동적인 존재 개념을 강조했다.

   레비나스는 두 가지 형태의 고통을 기술한다. 고통, 나이먹어감, 죽음과 같은 신체적 고통과 비난받고 기소되고, 강박관념과 같은 도덕적인 고통이 그것인데,205) 전자는 ‘아픔(通, pain, Schmerz, douleur)’을, 후자는 ‘괴로움(苦, Leid, souffrance)’의 구분과 대응한다. 타자는 ‘나’에게 책임감과 함께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길 요구한다. 고통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죽음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시키는 경험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비웃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음흉한 세력이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낙관적인 전망에 찬물을 끼얹는 가장 원초적인 사실이다. 모든 고통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마음대로 만들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창조자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주체를 느끼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자는 영원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었다는데,206) 그것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것에 대한 기본적인 경험이다.

   레비나스에게서 고통의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생각할 때 정확하게 드러난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서 있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거리두기를 할 수 없고 이 때 오히려 윤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나에게 요구하면서 나의 의무를 일깨우고 나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고아와 과부의 얼굴 앞에서 우리의 윤리적 의무는 발생한다. 레비나스에게 고통의 의미는 타자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에 있다. 레비나스는 고통의 고통, 타인의 부당한 고통으로 인해 내 속에서 정당한 고통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한다. 이러한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관점이 고통에 닿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나에게 용서될 수 없고, 나에게 간청하고 호소하는 타인의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을 구분하다.207)

   형이상학으로 고통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쉘러에게 고통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죽음과 고통이 없다면 사랑도 없고 공동체도 없다. 희생과 희생의 고통이 없이는 사랑의 부드러움도 없다. 지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고통의 의미는 고통에 대한 순수 효용적인 가치의 인식보다 깊은 방식으로 우리를 고통과 죽음의 현실과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통과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되기 위하여 더 높은 실존의 발전과 사랑을 ㅍ초기하려고 결심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간단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일 죽음과 고통이 삶의 증대나 성장이 자기 뒤에 남겨놓는 흔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그 삶의 길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208)

 

   여기서 쉘러는 고통을 ‘犧牲’(Opfer, sacrific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픔의 느낌으로부터 종교적 형이상학적 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통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가장 형식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상위개념은 희생의 개념으로 보인다”고 하여, ‘고통의 존재론’(Ontologie des Leides)이라 불렀다.209) 모든 종류의 아픔과 괴로움은 이런 객관적인 희생과정의 주관적인 반영이며, 그 과정과 관계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가까이 있는 타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마주한 너가 아니라 제3자, 즉 ‘그’이다. 이 때 ‘그’는 ‘낯선이’로서, 고아와 과부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주는 길이 된다. 이웃을 향한 독특한 책임감을 짊어진다는 데서 단독자는 자신의 ‘희생’이 어던 목적의 달성에 이용되는지 알지도 못한채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게 된다.

   고통과 희생은 ‘형이상학적 욕망’, ‘책임감’, ‘윤리적 저항’ 등과 마찬가지고 레비나스 철학을 기초하는 근원적인 경험 중의 하나이다. 고통 속에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 우리 밖에서 침입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힘을 경험한다. 이러한 고통은, 책임이 代贖으로 전회하듯, 희생으로 이어진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선대(hospitalite, hospitality)하고 보살필 때, 나의 존재는 나에게서 타인의 미래로 무게 중심을 옮겨놓고 고통으로 향한 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귀고 죽음과 같은 고통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210)

   고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며, 철저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고통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다른 어느 느낌이나 경험보다 더 그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사실이다.211)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통의 의미는 수많은 사람에게 수수께끼요, 문제거리로 남아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하고는 인간,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제가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그의 생존은 어떠한 목적도 품지 못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라는 물음은 대답이 없는 물음이었다.---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설명하고,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인간은 자기 생존의 의미문제로 괴로워 했다. 인간은 주로 병든 동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나?’하는 절실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없다는 사실이진정한 문제였다. 인간, 이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은 고통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니, 괴로움의 의미, 고통의 목적이 제시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심지어 추구하기까지 할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없음, 그것이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린 저주였다.”212)

     참혹한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고통받는 자의 절규가 이해될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는 없다.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것은 레비나스의 지적대로 다른 사람을 나의 의식 속에 의미로 환원시켜 나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고통은 나의 의식의 내용, 즉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나 바깥에 엄연히 서서 나에게 도전한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객관적 혹은 이론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윤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나에게 요구하면서 나의 책임을 일깨우고 나의 행동을 촉구한다.

      V. 存在와 倫理性의 一致

 

   본 연구는 철학적 인간학적 관점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를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그의 인간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그의 인간이해는 또한 철학적 인간학과 방법론적 궤적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존재론에서 형이상학으로의 轉回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단순화는 아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존재론 비판에서 시작하여, 그의 윤리적 인간관 내지 인간이해에 기반한 형이상학을 구축하였다. 인간의 본질해명을 통하여 인간이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학과 형이상학을 접목히키려 한다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사상은 제2기의 철학적 인간학에 속한다.213)

   이상에서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와 인간 존재론, 그리고 여기에 근거해서 나-타자 간의 관계가 절대적인 윤리적 관계라는 사실과 이러한 윤리적 의미는 존재론적 의미에 우선해서 선행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본 장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고찰하고 기존의 입장에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성의 윤리가 인간의 도덕성의 긍정적인 지지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 도덕적 행위의 동기

   윤리(ethics)와 도덕(morality), 윤리적(ethical)과 도덕적(moral)이란 말들은 흔히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어휘의 어원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정확한 어의를 구분해야 한다. 윤리(ethics)는 희랍어인 에토스(ethos)에서 유래되고, 도덕(morality)은 라틴어인 모레스(mores)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214) 희랍어 에토스는 원래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 혹은 욕구를 지칭한다. 이와 반대로 라틴어 모레스는 행동에 대한 규율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덕으로서의 규율은 한 사람, 한 사회의 세계,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나 성격은 한 사람, 한 사회의 도덕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윤리라는 개념이 도덕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지만 도덕이라는 개념은 윤리라는 개념의 한 측면만을 뜻함을 알 수 있다.

   레비나스가 앞에서 언급한 구분과도 유사한 이러한 구분은 본 연구에서도 적용된다. “선이란 무엇인가”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포괄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를 벗어나 한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전제되는 공통된 신념에 근거하는 그 사회의 규율과 규칙 등을 도덕으로 볼 때, 이러한 도덕적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칸트의 경우『도덕철학원론』에서 순수철학이 오성의 특정한 대상에 제한되면 그것을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이를 다시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으로 구분한다. 특히 경험론이 아닌 합리적 부분이야말로 도덕이라고 불릴 수 있다. 물리학이 경험적 부분과 동시에 합리적 부분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윤리학 또한 경험적 부분과 합리적 부분이 있는데, 경험적 부분이 특히 실천적 인간학이라 불리우고 합리적 부분이야말로 바로 도덕이라 불릴 수 있다.215)

   현대 철학의 회의주의와 가치 상대주의 등의 범람으로 전통적인 윤리학이 학으로서의 정립 가능성조차 의심받게 되면서 윤리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메타윤리학적 논의는 윤리학의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당연한 물음이고 추세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삶이 가치로운가” 하는 물음 이전에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도덕적 행위가 어떤 행위임을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앎에 따른 행동에 당위성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최근 윤리학에서 흔히 ‘왜 나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why should I be moral?)라는 문제로 제시되어 논의되고 있다.216)

   ‘무엇 때문에 나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전통적인 윤리학적 논의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할 때 주로 두 가지 관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 필요 혹은 욕구의 충족으로서 정당화 내지 有意味化가 가능하고 도덕성의 영역 안으로 불러 들이는 것으로, 利己論이나 영국에서부터 발달한 공리주의나 미국의 실용주의 등이 있다. 또 하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초월하여 보다 외재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초월론적 욕구로서 정당화되는 도덕행위가 있다. 주로 종교적 영역이나, 12세기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 良知良能이라 부른  ‘양심(conscience)’의 보편성을 주장한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나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의 절대적 법칙에 도덕의 원리를 구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등의 윤리이론이 해당한다.217)

   본 장에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가 이 두 입장의 접합점으로서 기능하여 전통적인 도덕교육이 행해지던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기반을 보다 강화시킬 수 있는 적극적 근거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이기적 필요와 욕구의 충족으로서의 도덕행위

 

     니체는 『도덕의 계보』의 서문에서 기존의 도덕적 가치 특히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연민,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데,218) 이 본능들이야말로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고 피안화함으로써, 마침내 그것들이 그에게는 <가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러한 점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과 회의에서 시작하여, 흔히 ‘선’ 내지 ‘도덕’으로 말해지는 덕목들이 약자가 강자에게 호소하고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그래서 약자가 강자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행위 덕목을 ‘도덕’으로 보며, 이를 소위 ‘약자의 도덕’이라고 말한다.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판결한다는 것은 옹졸한 정신의 사람이 옹졸하지 않은 정신의 사람에 대해 즐겨하는 복수이며, 악의 또한 그것을 가진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정신적인 재산이나 특권이 혜택을 입은 사람에게 대해서도 자기들과 마찬가지의 척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내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219)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매우 이기적이고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떄때로 이기적이지 않은 모습이나 관대한 행동을 보여주기는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다만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홉스같은 사상가에게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절대적이고 인위적인 통치권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본성의 비관론적 견해가 윤리적 이기주의의 기초가 되기는 어렵다.220)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개인이나 집단간의 이기적 필요 내지 욕구의 충족으로 보는 시각은 크게 사회학적 이유와 심리학적 이유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첫째, 사회학적 이유로서는, 만약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유지되기 어렵다. 만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한결같이 도덕 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지 않고 위반한다면, 그 사회의 정상적인 질서유지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존재는 어떤 질서를 필요로 하며 그 질서 가운데에도 인간 상호간의 이해 관계를 가장 기본적 차원에서 조절하는 질서가 윤리적 도덕 규범이기 떄문이다. 도덕 규범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정글과 같이, 인간들의 관계가 완전히 동물들 간의 관계는 바뀌어질 것이다. 한 순간도 약탈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안심하고 살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런 곳에서는 문화 생활도, 문명 생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가능한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마련하기 위해서 도덕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은 사실 ‘왜 나는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서는소극적이고 불완전하다. 즉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왜 모든 사람들이 한 사회의 도덕을 지켜야 하는가의 이유를, 위와 같은 근거로써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왜 내가 사회적 관점에서 윤리 도덕을 이해해야 하는가, 왜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이유에서는 남들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내 자신까지 도덕을 지킬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내가 특별한 재주를 가져 남몰래 나쁜 짓을 하고도 들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의 행위의 결과에도 사회의 질서가 손상되지 않고 잘 유지된다면 이같은 상황에서는, 도덕을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의 이익, 내 자신의 최대의 만족에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이유로서 도덕적 행위의 동기는 남들의 관점, 사회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는 남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들을 위해서, 남들의 이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각자는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라도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이유에서 도덕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만족과 진짜 나의 만족,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의식과 진짜 나의 의식에 아무리 구별이 있으며, 아무리 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그것에 대한 만족을 찾았다고 믿고 있어도 사실인즉 뒤늦게 다르게 밝혀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역시 문제를 가졌다. 특히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의 의식에 대해 가지는 잠재적인 지배력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개인의 이기적 욕구가 윤리 도덕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는 이론은 이와 같이 불확실한 내용을 가정하고 있다.221)

   개인적 이기주의의 결함을 피해가면서 사회조직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규범이 사회 속에서 주로 가능한 다수의 이익과 다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 공리주의가 있다. 도덕 행위에 대한 근본원리로서 욕구충족, 그리고 이러한 욕구충족을 쾌락으로 보고 도덕적 행위의 한 원리로서 쾌락을 내세운 입장으로서, 벤담(J. Bentham, 1748-1832) 과 밀(J. S. Mill, 1806-1873)로 대표되는 경험적 공리주의222)를 들 수 있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지적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 달려있다.”223) 라는 그의 언명이 잘 말해주듯이 벤담은 인간의 행동은 ‘쾌락의 충족’이라는 욕구 충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양적”(quantitative) 쾌락주의로, 쾌락이란 양적인 면에서 다를 뿐이지 질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개념은 자신에게 유해한 것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자이며, 의무, 복종 혹은 도덕적 명령은 개인 자신의 행복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내가 a라고 하는 행동을 할 경우 각 행동에 따른 예상되는 가능서을 A1, A2....와 P1, P2...로 나타내어 보자. 그러면 a의 기대 효용은 ∑pi V(Ai)이다.224) 여기서 윤리는 궁극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자신이 쾌락을 충족시키고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이고, 그런 의미에서 범법자를 벌하는 법제도와 비도덕적 행위를 비판하는 윤리적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공동적 이기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대의 공리주의가 희랍의 쾌락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대체로 현세주의적인 기질과 전통 속에서 옛날 희랍의 사상가들이 ‘쾌락’을 윤리학의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다루면서, 희랍의 쾌락주의자들이 모두 자기 개인의 쾌락을 목적으로 삼은 데 비하여, 벤담과 밀 등 영국의 쾌락주의자들은 사회 전체의 公衆的 쾌락까지 역설했다는 사실이다.

   개인 혹은 사회의 이기적 욕구의 충족으로서의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공리주의를 김태길은 『윤리학』에서 다음 두 개의 기본 명제를 근간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모든 행동이 궁극의 목적으로 쾌락의 획득 또는 고통의 회피이다. 두 번째, 쾌락이 그리고 쾌락만이 선이며,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의 결과로서 생기는 쾌락 또는 고통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 두 명제 사이의 전제와 결론의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공리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225)

   공리주의는 몇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첫째, 가장 공통적인 지적 중의 하나가 벤담의 공리주의가 그릇된 심리주의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다.226) 벤담은 모든 사람의 행동이 의도적, 목적지향적이라고 가정하는데, 그러나 이런 가정은 개인과 상황에 따라 충동에 따른 행위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 잘못된 것이고, 행위가 예상한 행복을 가져오지 못할 때, 역시 참이 아니다. 좋은 결과를 예상한 선택이 재앙, 불운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는 행복은 직접적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행복이라고 말해질 수 없는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라고 하는 쾌락주의의 역설(hedonistic paradox)때문이다.227) 두 번째, ‘사람이 누구나 항상 쾌락은 원한다’는 것이 심리학적 사실이라고 해도, 그로부터 따라서 선이란 곧 쾌락이다‘라는 윤리학적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쾌락을 원한다’, ‘행동이 지향하는 궁국의 것은 쾌락이다’ 따위의 판단은 어떤 사실(fact) 또는 존재(Sein)에 관한 주장이며, ‘선은 쾌락이다’, ‘우리는 쾌락은 많이 얻도록 행동해야 한다’ 따위의 판단은 가치(value) 또는 당위(sollen)에 관한 주장으로서 그 영역이 서로 다르다. 사실에 관한 판단인 전제가 가치론적 결론이 도출될 수 얻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전제의 구실이다. 가치 판단의 정당한 대전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또 하나의 가치 판단 뿐인 것이다. 예컨대, ‘누구나 쾌락을 원한다, 그러므로 쾌락은 선이다’라는 추리가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앞에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선이다’라는 판단이 대전제로서 받아들어져야 한다. 사실이 어떠하다는 지식만으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추리되어 나오지 않는다.228) 세 번째, 많이 논의되는 것중의 하나로, 쾌락 혹은 행복의 量化에 대한 것인데, 이들의 有意味化가 모호하다. 순수하게, 전적인 쾌락의 비교는 미래의 무한한 우주의 진행 과정에서 무한한 가능수를 생각할 때 완벽하게 수행되어 질 수 없다는 점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이것은 기대 효용의 개념이 양적인 비교를 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미래의 가치는 가능성의 가치에 의해 증대될 필요가 있다. 가능성 또한 측정될 필요가 있고 주관적인 평가도 가능하다.229)

   공리주의는 쾌락을 위한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윤리이론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 욕구 충족을 통한 쾌락보다 고통의 최소화를 통해 만족을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손봉호의 ‘最少苦痛論’을 들 수 있다.230) 선과 악의 기준을 고통에서 찾는 이 주장은 目的論的 倫理理論으로서, 快樂보다는 그 역으로서의 고통에 더 강조점을 둔다는 점에서 쾌락주의와 차이가 있다. 공리주리의 ‘최대다수의 최대쾌락’ 보다는 ‘최소수의 최소고통’이 더 정당하고 윤리적 행동으로 이끄는 데도 더 효과적임을 말하는 ‘최소고통론’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전제와 설명을 요구한다.

     첫째, 여기서 고통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직접 혹은 간접으로 실제의 고통 혹은 아픔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중간 원인들도 모두 고통의 범주 안에 포함시킨다. 즉 실제로 아픔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정적인 것은 모두 고통이란 개념으로 대변된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악이 모든 윤리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격체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악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윤리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유발하는 것만이 윤리적인 악이다. 셋째, 여기서 말하는 고통과 쾌락은 단순히 현재 혹은 가까운 시일 내의 고통에 국한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장기적으로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쾌락 혹은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가능성까지 고려된다. 어떤 고통은 지금 당함으로 후에 당할 더 큰 고통을 막을 수 있고 어떤 쾌락은 지금 맛봄으로 후에 더 큰 쾌락을 포기하여야 할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젊을 떄의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속담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합리적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교훈이다. 넷째,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쾌락인가는 최종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쾌락을 맛볼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하는 자와 행위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다같이 무엇이 쾌락을 가져오며 어떻게 하는 것이 고통을 가져오는 가에 대해서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기준을 따라 의견일치가 이루어지겠지만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최후의 결정은 역시 직접 고통의 피해자에 의하여 내려지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소고통론’이라 부를 수 있는 이론도 공리주의의 약점, 즉 정의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인정하고, 롤즈가 제시한 ‘차등의 원칙’으로 보완해야 한다. 즉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의 어떤 행위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의 고통밖에 줄이거나 해소하지 못할 경우, 나는 그 둘 중 고통을 더 많이 당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려고 해야 하며, 사회 전체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정책도 고통을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고통의 수혜가 이루어지도록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의의 원칙도 직관적으로 정당화되며, 고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는 없다. 즉 ‘최소수의 최소고통’이란 원칙 외 차등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고 공리주의나 손봉호의 ‘최소고통론’은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통의 제거는 쾌락의 추구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 ‘최소고통론’이 가진 장점이다. 쾌락은 항상 느껴지지 않아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나, 고통은 제거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떄문이다. ‘나는 왜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의 심리적 만족감을 위해서 혹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혹은 나의 쾌락을 극대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용주의는 제임스(W. James)와 듀이(J. Dewy) 의 사상에서 발견되듯이 고전적인 미국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물음을 고찰하는 방법의 일환이었다. 유럽 사상가들의 오래된 경멸과 빈약한 이해가 따르긴 했지만, 철학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영국 공리주의의 저속한 반복이라든지 목적을 위한 조잡한 수단의 조작은 아니다.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의 조작이라든지 , 인간 조건의 과장됨 등을 거부하는 실용주의는 윤리학에서 고전적인 철학의 전통은 윤리적 결정을 위한 선험적인 근거나, 모든 사건들과 평가들을 지배하는 고정된 인성(人性) 혹은 자연법과 같은 영원성의 요새에 묶여 있다고 본다. 실용주의는 기본적으로 판단력, 명제, 진리추구, 결정 등의 도덕적 가치에 있어 기초적인 윤곽으로서 결과와 관계가 있다.231) 실용주의가 하나의 완전한 체계라기 보다는 인간의 행위의 선택에 있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실용주의는 개방적이고 새로운 것을 토대로 한 경험의 특징을 강조하는데, 특히 현재의 명령, 우리 눈 앞에 놓인 현재적 명령에 민감하길 요구한다. 실용주의적 접근은 명맥하게 일시적이며 유한하므로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도덕적인 무게에 많은 강조점을 둔다. 실용주의적 도덕은 우리에게 개선적인 삶, 즉 우리가 궁극적인 해결책을 가져오지 못하지만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기를 요구한다.

   이상과 같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밝히는 이론들은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유를 비윤리적인 사실인 외부에서 찾은 것으로 외재적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외재적인 도덕적인 행위의 근거는 외부적인 사실에서 찾아야 하는 이러한 주장은 열 중의 여덟은 해당되는 일반론적인 근거는 될 수 있으나 나머지 두 경우까지 포함하기는 어렵다. 즉 자기의 이기적 욕구나 편의를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보살핌이나 배려의 경험은 비단 성인, 성자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기적이지 않은 자아의 모습을 보고 더 감동받고 감화받는 것은 왜 일까?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할 때 이기적 욕구의 충족과 필요만으로는 부족하다.

      

     2)초월론적 욕구로서의 도덕 행위

   

   개인의 혹은 집단의 이기적 욕구의 충족이나 필요만으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물론 하나의 윤리이론이나 도덕이론으로서 복잡하고 변화 다양한 인간의 행위를 일괄적으로 단순화시켜 버릴 수는 없지만 보다 정확하고 타당한 동기를 찾기 위해서 여러 답변을 찾아 궁구해야 한다. ‘나는 왜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또 다른 방식의 답으로 초월적 욕구로서의 도덕 행위를 들 수 있다. 우선, 이 입장은 ‘왜 내가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는가(도덕적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나’라고 하는 존재를 넘어선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답을 구한다. 공자는 그 이유가 ‘天命’에 있다고 하였고,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그 이유를 ‘신의 계명’에서 찾는다.232) 천명이나 신이 계명은 우주적인 형이상학적 질서를 의미하고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 도덕적으로 좋고 나쁜 삶, 혹은 올바르고 틀린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 궁극적 이유는 인간이 형이상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즉 인간의 본질적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초월적 욕구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물이 각기 실현해야 할 목적을 가지듯이 인간에게도 인간으로서 실천해야 할 목적, 즉 ‘선’이 있는데, 우리의 행위 하나 하나는 그것이 고의적인 경우에는 어떤 목적을 가지게 된다. 개별적 행위의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이 수단과 목적을 연달아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는 그 이상 더 올라갈 수 없는 단계, 즉 그 자체를 위해서 그것이 소망되는 무엇에 도달할 것이다. 이 마지막 무엇이 바로 인내의 ‘궁극목적’이며 이 ‘그 자체를 위하여 소망되는 것’이 곧 인생의 최고선이 아닐 수 없다고 그는 단정하는 것이다.233)

   이러한 입장은 다시 임마누엘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최소의 궁극적 선으로 존재 목적을 상정하듯이, 칸트는 선의지를 제시한다. “이 세상에 있어서 또는 이 세상밖에 있어서까지라도, 선의지 이외에는 무조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도덕형이상학의 원리(Grundlegung zur Metaphysique der Sitten)』제1장의 첫 구절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윤리설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 기본 전제라고 생각된다.234) 도덕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노력이 궁극의 목표로 삼을 바는 선의지의 실현 내지 함양이요, 인생의 실천적 기본 원리의 발견을 사명으로 삼는 윤리학의 과제는 선의지의 탐구에 그 초점을 두게 된다. 그 자체로서 선한 것, 즉 본래적 선(intrinsic goodness)의 가치를 가진 것은 오직 선의지 뿐이다.235)

   오직 의무를 존중하는 동기에서 의무에 맞도록 하는 행위만이 칸트로서는 도덕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행위이고 따라서 개인의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동기도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의무에 따르려는 것이 동기이고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 그 밖의 어떠한 실질적 원리도 도덕적 가치의 성립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의지의 형식적 원리에 의하여 규정되었을 경우에만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의무에서 나온 행위는 경향을 제거해야 하며, 또 경향과 아울러 의지의 각 대상도 완전히 그러므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의지에 남아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법칙만 있고 제거되어야 한다. 주관적으로는 이 실천적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 따라서 모든 나의 경향은 중단하고서라도 그와 같은 법칙에 복종하라는 준칙만이 남아있다.236) 칸트의 다음 견해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모든 경향에서 오는 영향 및 의지의 대상으로터 분리되어야 한다. 따라서 의지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남는 것은 오직 객관적로는 법칙, 주관적으로는 그 실천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든 경향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 법칙을 따르리라는 준칙이 있을 뿐이다”237)

 

   인간의 도덕 행위의 동기 중의 하나인 초월론적 욕구로서, 종교적 가치, 내세적 열망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토미즘(Thomism)이 있다. 현재 토마스주의 윤리학은 13세기 도미니크 수도사로서 파리대학과 나폴리 대학에서 가르쳤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저작들을 그 기원으로 하는데, 20세기 가장 잘 알려진 토마스주의자들은 마리땡(Jacque Maritain, 1882-1973)과 질송(Etienne Gilson, 1884-1978)이다.238) 특히 마리탱은 순전히 철학주의 윤리학이 아닌, 계시된 도덕적 진리로부터 유용함을 얻기 위해서는, 도덕적 행위도 신앙에 의존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V. J .Bourke는 토마스주의를 분석적 토미즘(analytic Thomism), 초월론적 토미즘(transcendental Thomism), 아가페적 토마스주의(agapistic Thomism)로 구분을 하는데, 특히 아가페적 토마스주의는 신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라는 토마스 윤리학의 책임원리에 초점을 두어, 고결한 정신적 사랑(agape, caritas)은 모든 유형의 토마스주의자들의 도덕 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유관한 경향으로 또다른 신학적 덕인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인간의 초자연적인 덕으로, 희망은 신앙을 강화시켜 주며, 보다 완벽한 기독교적 사랑의 획득보다 선행한다. 이러한 경향은 도덕적 행위의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유사성에 대한 인식이 도덕적 인격의 완성을 위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통해 대부분의 경우에 윤리는 종교와 관련을 맺어왔고 종교는 윤리적 선의 내용을 제공하고 통제한다. 종교와 윤리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어왔지만, 역사적으로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며, 특히 기독교의 경우에는 많은 신자들이 성서의 규범에 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뷔송(Ferdinad Buisson, 1841-1932)이 말하길, 기독교는 도덕과 종교를 거의 동일시하도록 우리에게 주지시켜, 우리는 그 둘을 분리시킬 생각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받아들여왔다.239) 종교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그에 맞추어 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의 의무는 신의 명령들이다. 종교적 삶은 종교적 형태의 신앙으로써 도덕적 삶을 지탱해주고 익명적이고 추상적인 상태의 선(un Bien)을 개인적인 내용으로 변모시킨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윤리보다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면 칸트는 윤리의 우위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윤리의 기초가 영원법에 기초한다고 보았고, 이 기초적인 규범은 인간의 이성을 매개로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반영하는 자연법을 알 수 있으며 창조된 자연 속에서 선을 안다. 이성은 선의 토대이며 선한 행위는 이성에 의한 것이고 악한 행위는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다.240) 칸트는 종교를 윤리적인 토대를 통해서 접근을 시도했다. 칸트의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며 양심의 절대 무조건적인 도덕율은 모든 사람이 의무를 지켜야 할 보편적인 도덕법이다. 이 보편적인 도덕법을 토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

   어떤 종교도 없다면, 인류에게 있어 도덕이 불안정하고 별 효력이 없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다. 때때로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하는 데에는, 특히 과실을 해도 아무돈 본 사람이 없을 때.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는 때때로 초인간적인 힘이 필요하다. 사회가 스며들기 어려운, 의식의 내밀한 부분에서 제기되는 몇 사항에 있어서, 인간에게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전인생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신에 의해 허락되는 어떤 규율이 필요하지 않은가? Taine는 종교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낸다. “우리보다 5백년 앞서 인도에는 불교(Buddism)가 있었고 아랍에서는 우리보다 6백년 앞서 마호매티즘이 있었다. 우리 서양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있다.”241)

     윤리와 종교의 일치성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윤리가 비록 독립적인 분야이지만 윤리는 한계점에 도달할 때 종교적인 차원의 문을 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몇 가지 면에서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종교와 도덕을 일치시키려는 의견에 대해 M. Pradines는 우리의 전 존재를 포괄하는 이 두 실재적 원리가 사물의 행위, 의도에 대한 관점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도덕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삶과 이질적이고, 우리는 논리적으로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종교적 삶이 도덕에 부여하는 지지는 외재적이다. 경찰이 정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그 보다 더 신앙은 도덕을 유지할 수 없다.242) 도덕은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자율적인 원리이고 그것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다. 이와 다르게 종교는 타율적인데, 종교는 최고의 전능자에게 인간의 호소를, 인간의 무능을 고백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질성은 다음 각 행위의 의미의 대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을 초월의 세계, 피안의 세계로 향하게 하지만, 도덕은 종교가 그 무관심으로 곧잘 비난받는 세속적 의무 속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종교와 도덕은 분명 다르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근원하지 않는 다른 어떤 의도로 우리를 지향시킨다. 종교적 삶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도록 만든다.

 

    2. 存在論的 要請으로서의 倫理性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두 가지 측면, 즉 이기적 욕구의 충족 내지 이기적 필요에 의한 행위와 인간의 초월론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도덕적 행위로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동기는 설명은 표면적으로는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나의 이기적 욕구나 나의 종교적 신앙, 혹은 양심에 의한 도덕적 행위에는 타자나 사회가 들어 설 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주관주의 철학과 인간이해를 같이 한다. 인간의 본질을 문제삼아 온 대표적인 학문으로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질이란 인간의 다른 생물들과의 공통점과 차별성의 문제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러한 특징을 보유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플레쓰너(H. Plessner)는 유기체 일반이라는 차원에서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43) 유기체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가정하기 위해 사회적인 행위를 하는 행위자로 개인 뿐만이 아니라 그 개인을 포함해서 행위자의 개념을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것으로 확장하는 사회적 현상들의 존재를 주장하기도 하고,244) 사회 속에 실재하는 인간을 자연인과 공동인 (Corporate Person)으로 나누어 개인을 뛰어넘는 행위자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기도 한다.245)

   레비나스 윤리학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인간이해의 과정이 곧 윤리학으로 이어진다는 점으로, 그의 인간이해 속에는 개인성과 사회성이 공존한다. 그가 말하는 서양의 존재론은 전통적인 인간이해, 즉 나 이외의 타자적인 것은 모두 동일자의 이해가능한 인식의 영역 안으로 흡수해버리려는 끊임없는 갈망이었고, 여기서는 타자의 존재가 살아 숨쉴 공간이 없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존재론은 ‘나’라는 주체의 존재 사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며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임을 밝히고 있다.

 

      1) 존재 형성을 위한 타자성의 요청

 

   레비나스가 설정하는 윤리적 상황은 다소 감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레비나스 윤리 철학의 독특성은 그 주장의 직접적인 훈계성과도 관련되는데, 윤리적 주장의 훈계성은 앎(지식)에 대한 이의제기와 함께 非認知的인 논의로 윤리적 상황 그 자체의 진지함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관계는 특별한 관계이며, 거리도 일치성도 없는 관계이다. 부버의 ‘나-너’ 관계와의 대조를 통해서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타자성의 특징은 잘 드러난다. 부버의 다음과 같은 말은 레비나스의 말하고자 하는 ‘나’와 타자의 관계와 대조적이다.

 

     “내가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는 인간의 삶에 관한 원리의 문제였다. 우리가 발견한 인간의 삶의 기본적 원리는 두 가지 운동 속에서 구축되는데, 그 하나는 “거리를 두고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관게 속으로 들어감”이다. 그 하나는 다른 하나의 전제가 되며 양자는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다.”246)

 

   ‘나-그’의 양태와 ‘나-너’의 양태를 거리두기와 관게라는 특징으로 설명하고 ‘나-너’의 인격적 관계맺음이야말로 진정한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간의 관계에서 거리두기나 관계맺음의 일방성을 택하지 않는다. 나와 타자간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맺는 윤리적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 나의 관계는 ‘둘이 아니면서 또한 하나가 아닌 관계’(不二而不一)임을 알 수 있다.

   코엔(R. A. Cohen)은 다음과 같이 레비나스 윤리학의 특징을 네 가지 요소로써 밝힌다. 첫째, 타인의 타자성 둘째, 자아의 수동성과 그들의 관계 셋째, 타인의 명령과 네째, 거기에 응답해야 하는 나의 책임성 등이다.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이 네 가지에는 데카르트가 『성찰(Meditation)』에서 밝히고 있는 무한의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어떤 식으로든지 내 속에는 유한의 개념보다 훨씬 이전에 무한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대할 때마다 나는 어느 정도 어지러움을 느낀다”247)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에게서 무한의 개념을 빌려 와 타인의 타자성, 나 자신이 수동성, 타인의 명령, 그리고 나의 책임감 등의 성격을 구체화한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레비나스의 존재론과 타자의 ‘타자성’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아는 타인의 절대적인 타자성의 영향을 받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재조건화되고(reconditioned) 탈실체화되고(desubstantialized) 물음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248) ‘나’라는 주체는 스스로의 존재가 갖는 존재론적 욕구를 존재유지 경향(connatus essendi)을 통해 채워가고 소유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욕구인 형이상학적 욕망, 곧 초월과 벗어남의 욕망은 타자를 통해 갈망되어진다.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감과 희생의 윤리로써 일시적으로 채워진다. ‘나’는 타자의 ‘절대적인 타자성’에 비견될 절대적인 수동성 속에서 나는 극도의 수동적 존재이다. 물론 ‘나’는 존재론적 욕구만으로 享有와 所有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유한한 삶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하고 이 또한 타자의 얼굴을 통해 깨어진다. 타자의 얼굴이란 ‘나’의 이기적 욕구를 일깨워 책임감을 부추기고 나의 존재의 존재유지를 위하 노력과 자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둘째, 살아간다(vivre de, live on)란 동사를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로 본다는 점이다.249) 인간이 이기적 욕구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할 때,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외부의 타자적 존재에 나의 삶을 얹을 수 밖에 없다. 사물은 타인과 다르게 그 사물의 소유와 향유를 통해서 타자성이 취소되고 나와의 거리를 없앨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인간 존재에서 타자성의 적극적인 수용이 있음을 암시한다.

   셋째, ‘나’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無限’, ‘神’으로 현현하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일깨워지고 갈망된다는 점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의 경험을 알고 있는 ’나‘에게 그 불안은 타자의 죽음과 그에 대한 책임을 통해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바뀐다. 여기서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상호대등적 관계를 훨씬 뛰어 넘어 레비나스는 타자를 ’나‘를 변모-확대시켜 무한에로 나가게 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통해 무한을 보고 무한자로 커지는 것이다.

   인간에 관한 일련의 경험적 진리와 이 진리에 토대로 하여 추론해 볼 때, 인간 존재에 관한 첫째의 명백한 진리는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의 결핍이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결핍을 말하는 겔렌(Anold Gehlen, 1904-1976)의 “결핍존재”(Mangelwelwesen)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문화적인 존재(Kulturwesen)이다. 인간의 존재 양식이기도 한 문화는 인간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모든 문화 속에서 인간은 어떤 형태, 어떤 면으로든지 자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질이 잘 드러난다. 불완전하고 비보편적이며 구체적인 인간은 그 자체로는 無定型性, 可易性을 띤다. 이는 쉘러가 말한 ‘세계에로의 개방성’(Weltoffenheit)이며, 이 과정에서 자아, ‘나’라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적 존재를 수용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수용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인 힘만으로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고, 따라서 자기충족성이 결여된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완성되고 변모해간다. 인간에게는 존재 유지를 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욕구를 넘어 ‘나’가 아닌 다른 것, 의식, 예술에서 신에 대한 종교적 열망 등 레비나스가 외재성(l'exteriorite), 내지 무한(l'Infini)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욕망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 형성을 위해 타자의 개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道德性의 積極的 根據로서의 他者性의 倫理

 

   ‘교육’에 대한 정의가 여러 학자와 여러 시각에 의해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음은 ‘교육’이 무척 복잡하고 특수한 과정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특히 ‘도덕교육’은 ‘도덕교육’자체를 반대하는 ‘반도덕교육적 전통’(anti-moraleducation tradition)에 맞서 그 역할과 정체성이 의심되기도 했다. 카잔(B. Chazan)은 도덕교육을 반대하는 5개의 주장을 제시하는데, 이 중의 인식론적 견해는 전통적으로 있어왔던 가장 유력한 견해로서, 이에 대한 극복으로 합리주의 도덕교육이 발달되기도 했다.250)

   학교가 입증될 수 있고 객관적인 지식들만 가르쳐야 하며, 검증 불가능하고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가르쳐셔는 안된다는 인식론적 견해는 학교에서의 도덕교육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발달시켜 원리와 준칙에 의거한 합리적인 교육이야말로 개인과 사회를 진정 도그마적인 권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열쇠라고 간주하게끔 되었던 것이다.251) 그러나 60-70년대 미국에서 도덕교육의 지배적인 경향이던 인지발달적 도덕교육 이론과 가치 명료화 이론이 80년대 그 중요성을 잃어가면서 도덕적 추론과 가치 명료화 접근은 학생들은 도덕적으로 표류시키는 ‘도덕적 문맹’(moral illiteracy)을 양산할 뿐이라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더구나 원리 위주의 도덕 교육에서, 도덕 원리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도덕 원리들이 모든 예외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252)

   합리적 도덕 교육의 극복으로 ‘도덕적 인격교육’이 부활하는데, 인격교육의 부활을 촉진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두 사람은 배닛(William Benett)과 위인(Edward Wynn)이었다.253) 인격 교육은 교사와 학생간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요구한다. 부버는 교육은 하나의 순수한 대화의 관계이며, 참된 교육의 효과는 “만남”임을 강조하였고,254) 리코나는 인격교육은 도덕적 지식(moral knowing), 도덕적 감정(moral feeling), 도덕적 행동(moral action)이라는 상호관련된 제요소들에 통합돈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255)

   인격교육으로서의 도덕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에 대한, 그리고 인간이 갖는 도덕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리코나가 말하는 도덕적 감정도 도덕성에 대한 신뢰에서 발로한다. 듀이는 학교교육에서 교육의 궁극적 목적인 도덕적 인간 형성이 저해되는 것은 도덕성의 본질에 대한 오해라고 밝혔는데, 그 중 의무적 행위와 이기적 행위를 극단적으로 대립하여, 학생들이 도덕성 함양 교육과 현실의 괴리감의 간극을 확대하는 일면이 있다는 것이다.256)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개인과 사회, 나와 타자간의 거리를 좁힌다. 도덕교육의 근거, 즉 도덕적 행위를 장려하는 근거로서 주체인 ‘나’가 타인인 ‘너’를 향해 도덕적 헹위를 베푸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행위를 받는 것이지만, ‘나’에게서는 나의 존재양식의 당연한 발로이다. 타자를 위한 책임과 윤리의 도덕적 행위는 주체인 ‘나’에게는 존재론적 사실이 된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는 현대사회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윤리관이 급격히 붕괴되는 실정에서 돈키호테식의 풍부하고 무모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회복하기 어려운 만큼 세계는 도덕적 무감각과 냉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사회의 도덕 위기의 원인을 추병완은 몇 가지로 진단하는데, 첫번째로 일제 식민통치의 경험을 꼽는다. 두 번째, 그로 인한 이 땅의 분단구조이며, 세 번째로 성장 제일주의의 산업화 정책, 네 번째, 얄팍한 합리주의로 위장된 실용주의 등의 표피적인 유용성이 중시되는 왜곡된 서구문화 유입이며 , 마지막으로 건전한 학교교육의 不在 등을 지적한다.257) 특히 학교의 도덕교육이 충실히 수행되기 위해서는, 역으로, 도덕성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Bollonow는 의미깊은 삶의 전제를 신뢰(Vertrauen)로 규정하는데,258) 나와 타자에 대한 도덕성의 신뢰가 중요하다. 도덕교육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전적인 신뢰하에 교사와 학생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교사와 학생간의 인격적인 관계는 최근에 활발히 논의되고 진행되고 있는 인격교육, 덕교육에서 주요하게 논의된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나’의 존재구성을 통한 타자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와 수용으로써 도덕교육과 사회윤리의 형성에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기존의 전통적 존재론의 주관성에서 벗어나 부버가 나와 대등한 또 하나의 나로서 너를 상정한 데서 더 나아가 ‘나이자 동시에 나가 아닌’(不二而不一) 타자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타자의 존재에 반응하는 존재론적 사실로서 책임과 고통을 수용한다. 인간의 도덕성이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 인간의 본질로서 구성된다면 이는 사회윤리나 도덕교육을 위한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VI. 結論

 

   본 연구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타자성의 윤리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다. 레비나스의 인간이해는 인간 존재의 경험적인 사실과 거기에서의 추론과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과 방법론적 유사성을 띨 뿐만 아니라 인간에 관한 개별적인 경험적인 지식에서 나아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과 학문적 궤도를 같이 한다. 따라서 철학적 인간학의 인간이해의 바탕 위에서 레비나스의 인간이해의 특징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삼아 그의 타자성의 윤리학의 특징과 의의를 전반적으로 개관을 하였다.

   레비나스 사상은 전통적인 서양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 즉 존재론이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 시작을 멀리는 그리스, 희랍의 사유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까이는 데까르트의 합리적 사유의 주체(ego cogito)의 상정으로 삼을 수 있는데, 근대 주관주의 철학의 개막은 중세까지 우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우주의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지배적인 원리로 대표되던 신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인간의 이성을 대신 내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근대 주관주의 철학은 유아론적 경향과 도구적인 이성성으로 인하여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나의 이해, 인식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나와 타자간의 거리를 최소화하여 타자의 타자성을 무화시킨다.

   레비나스는 동일성의 철학의 존재론과 대조하여 자신의 철학은 형이상학, 곧 제1철학인 윤리학이라 명칭한다. 레비나스는 주체인 ‘나’에게서 존재론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의 공존을 말하는데 존재론적 욕구가 이기적인 존재 유지의 노력이라면 형이상학적 욕망은 나에 의해 소유되고 향유될 수 없는 것, 저 너머(au-dela)의 것을 향한 향수이고 갈망이다. 타자의 얼굴, 특히 과부나 고아 등의 헐벗은 이웃의 얼굴에서 현현되는 무한과 신의 자취는 나로 하여금 이기적인 자아를 벗고 타자를 향해 열린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익명의 어두운 존재의 심연을 끊고 타자와 공존하는 나로서 다시 존재하게끔 하는 타자는 나를 한 차원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이고 따라서 부버의 ‘나-너’의 관계의 상호동등성과 대립하는 비대칭성(asymmetrie, asymmetry)이 레비나스의 ‘나-너’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주요 특징이 된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전통적인 나를 통한 타자의 이해, 혹은 타자와의 공존으로까지 생각되는 전통적인 타자론의 단순히 주관성의 영역을 넘어 상호주관성의 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통해 나의 존재가 변모하고 더불어 나의 유한성이 극복되는 새로운 타자론이다. 인간이 세계 중심에서 홀로 고립되고 타자와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유아론적인 단자(monad)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를 향해 개방되고, 더 나아가 타자는 주체를 변형시키고 그에 반응하기를 명령하는 것이다. ‘나’라는 주체를 유지하기 위한 존재론적 욕구가 사물의 소유 내지 향유로 그 만족감을 느낀다면, 형이상학적 욕망, 초월과 무한을 향한 욕망은 만족되지 않고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 또한 만족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채워지기를 요구한다.

   흔히 윤리학적 논의에서 책임론은 개인의 자유와 관련지어 논의되는데, 레비나스에게서 자유는 자아가 타자에게 행하는 폭력성의 다름 아니다. 따라서 타자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책임성은 주체인 ‘나’가 가지는 자유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방종한 것이었던가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나의 자유를 제한한다. 이 때 자유의 제한이란 물리적이고 산술적인 제한이 아니라 나의 자유가 가진 폭력성에 부끄러움을 가지고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성을 느끼는 조건은 인간이 가진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이는 이기심이나 도덕성이 풍부하다거나 종교적인 신념이 충실한 사람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론적 사실로 갖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발로이고 이를 일깨우고 채워주는 것이 다름아닌 타자의 얼굴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visage, face)은 신체성의 철학의 연장이다. 신체는 나와 세계간의 의미형성과 전달의 場이다. 이런 맥락에서 타자의 얼굴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며, 특히 헐벗은 고아나 과부 등 이웃의 얼굴은 나에게 무한한 책임감을 불러 일으키는 무한성과 초월을 드러낸다. 사물과는 달리 절대 나의 인식과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는 오히려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여 변모시킨다. 타자가 나의 주체성을 구성한다는 근거는 살아간다는(vivre de, live on) 동사가 타동사적이라는 것, 형이상학적 욕망이 타자로 인해 취해진다는 점 등에 있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의 답변이 가능하다. 첫째는 인간의 이기적 욕구와 필요의 충족에 의한 것으로 이기론, 공리주의, 실용주의, 손봉호의 최소고통론 등을 살펴보았다. 이기론과 공리주의가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 욕망의 충족과 쾌락을 우선시했다면 손봉호의 최소고통론은 쾌락의 최대화 대신 고통의 최소화를 내세워 보다 설득성을 갖추었다. 둘쨰는 인간의 초월적 욕구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주로 종교적 성향을 띤 것으로, 토미즘, 기독교적 원리 등이 있다. 그러나 종교와 도덕은 분명 이질적인 행동 원리로서, 종교가 도덕을 고무시키고 지지해줄 수는 있지만 종교만으로는 도덕성이 유지되지 않는다. 경찰이 정의를 지켜줄 수는 없는 것처럼 종교가 도덕을 위한 본질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둘 다 인간 본성의 한 면만 해당될 뿐 전 전체적인 인간 이해가 기초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도덕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연일 신문 뉴스에 오르내리는 각종 범죄와 폭력의 난무는 인간의 도덕성,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심한 회의와 자괴감까지 낳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회 질서의 부분적인 침해는 있어 왔으나 오늘날 현대인들이 몸소 느끼는 도덕성과 인간 존엄성의 퇴조는 심각한 수위를 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도덕교육 또한 기존의 원리 위주의 합리적 도덕 교육이 아닌 인격 교육 덕교육이 부활하여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철학이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어떤 외재적인 이유, 곧 이기적 욕구의 표출도 의무의 이행도 아닌 ‘나’의 존재론적 사실과 조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의 도덕성은 존재 그 자체와 함께 구성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 실존에 딸린 부수적인 성질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인간이 도덕적이라는 사실이 함께 구성되는 현상인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는 인간 도덕성을 적극적으로 정초시키고 나아가 도덕교육과 사회윤리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나의 존재 사실로서 보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를 개인의 사회에 대한, 사회의 개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연결시키는 사회윤리학적 과제가 우리에게 남는다.

 

                             참 고 문 헌

 

  1. 국내문헌

 

  1)국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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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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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 이을상 옮김, (서울 : 문원, 1994) 

Braudel, F.,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 일상생활의 구조 上』, 주경철 옮김,                        (서울 : 까치, 1995)

Buber, M., 『나와 너』, 표재명 옮김, (서울 : 문예출판사, 1993).

Cassirer, E., 『인간이란 무엇인가-문화철학서설-』, 최명관 옮김, (서울 : 서광                       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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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hakian, W.S., 『윤리학의 이론과 역사』, 송휘칠‧황경식 공역, (서울 : 박영                            사, 1990).

Spiegelberg, H., 『현상학적 운동 I』, 최경호‧박인철 공역, (서울 : 이론과실                              천, 1991).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현상학적 운동 II』, 최경호 옮김, (서울 : 이론과 실천,                                1992).

Tarkowskij, A., 『봉인된 시간-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김창우 옮김, (왜                          관 : 분도출판사, 1995).

Toman, T.,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허혁 옮김, (왜관 : 분                      도출판사, 1975).

Tournier, M., 『방드르디-태평양의 끝』, 김화영 옮김, (서울 : 민음사, 1995).

Van Peursen, C. A., 『몸‧영혼‧정신 : 철학적 인간학 입문』, 손봉호‧강영안                          옮김, (서울 : 서광사, 1985).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 강영안 옮김, (서울 : 서광                          사, 1994).

Whitehead,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서울 : 한길사, 1996).

  

  3) 국내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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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ꠏꠏꠏꠏꠏꠏ,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현대성”, 철학연구회, 『철학연구』, 제29집,                       1991. 

  ꠏꠏꠏꠏꠏꠏ, “레비나스의 인간 존재론 소묘”, 『예술과 비평』, 23호, (1991년 봄                      호).

  ꠏꠏꠏꠏꠏꠏ,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현대성”, 철학연구회, 『철학연구』, 제29집,                      1991.

  ꠏꠏꠏꠏꠏꠏ, “존재 경험과 주체의 출현-레비나스의 존재론”, 『철학연구』 47집.

  ꠏꠏꠏꠏꠏꠏ, “존재‧주체‧타자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모험’에 관하여”, 『세계의                    문학』66호 .

  -----, “레비나스의 ‘평화의 형이상학’”, 『평화의 철학』, (서강대 철학연구                  소 편)(서울 : 철학과 현실사, 1995)

  -----,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성의 철학”, 『철학과 현실』, (1995년 여름                    호).

  -----, “향유와 거주: 레비나스의 존재 경제론”, 『문학과 사회』, (1995년 겨                 울호)

김계현, “고통에 관한 교육인간학적 연구”, 한국교육철학회, 『교육철학』, 제13                  집, 1995.

김안중, “덕목교육의 재음미”, 도덕교육연구회, 『도덕교육연구』, 제4집, 1990.

박봉소, “윤리성의 현상학적 분석”, 영남철학회,『철학논총』,제5집, 1989.

소광희, “현상학적 자아론”, 한국현상학회 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 심설당,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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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상, “하이데거의 현상학 이해”, 한국현상학회 편, 『현상학연구』, 제3집,                     (서울 : 양서원, 1988)

이삼열, “마틴 부버에서 본 대화의 철학”, 크리스챤 아카데미 편, 『대화의 철                  학』, (서울 : 서광사, 1992).

이승환, “눈빛․낯빛․몸짓: 유가 전통에서 덕의 감성적 표현에 관하여”, 철학          연구회, 『감성의 철학』, 1994.

이을상, “막스 쉘러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과 형이상학적 지위의 문제”, 영남철          학회, 『철학논총』, 제9집, 1993.

이인재, “쉘러(M. Scheler) 인격주의 가치윤리학의 도덕교육적 함의에 관한 연                   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진교훈, “윤리란 무엇인가”, 『한국인의 윤리사상』, (서울 : 율곡사상연구원,                     1992).

차인석, “현상학에 있어서의 지향성과 구성”, 한국현상학회 편,『현상학이란 무                 엇인가』, (서울 : 심설당, 1990)

추병완, “인격교육은 도덕교육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서울대학교 대                 학원 국민윤리교육과, 『사회와 사상』, 1995.

ꠏꠏꠏꠏꠏꠏ, “한국사회 도덕성 위기의 극복 방안에 관한 일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                  원 국민윤리교육과, 『사회와 사상』, 1993.

한전숙, “생활 세계적 현상학”, 한국현상학회 편,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해석                   학』, (서울 : 서광사, 1992)

홍성하,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에 대한 윤리적 문제”, 『철학논고』 4, 성                  대철학과(1993)

 

 

 

 

 

 

 

  2. 국외문헌

  

   1)국외서

 

   Adriaan T. Peperzak, Ethics as First Philosoohy, (New York : Routledge,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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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ck, C. M., Moral Ecucation : Interdisciplinary Approaches, (New York                           : Newman Press, 1971)

   Broad, C. D., Five Types of Ethical Theory, (London :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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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d, S., ed., Facing the Other-The Ethics of Emmanuel Levinas,                                     (Richmond : Curzon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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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 temps et l'autre. (Paris :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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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lewelyn, J., Emmanuel Levinas-The genealogy of ethics, (New York :                            Routledge, 1995)

   Mill, J. S., Utilitarianism, Rth ed., (London :1895)

   Mondin, Battista, Philosophical Anthropology, translated by Myroslaw A.                                Cizdyn, (Bangnlore : Theoretical Publications in India, 1985)

   Peperzak, A., Ethics as First Philosophy, (New York : Routlege, 1996)

   Radest, H. B., Can We Teach Ethics?, (New York : Praeger, 1989).

   Schroeder, B. S., Altared Ground : Levinas, history and violence, (New                                 York : Routledge, 1996)

   Sean Hand ed., Facing the Other-The Ethics of Emmanuel Levinas, (                                 Richmond : Curzon Press, 1996)

   Wyschogod, Emmanuel Levinas-The problem of ethical Metaphsics, (The                         Hague, M. N., 19740

 

    2)국외논문

  Caputo, John D., "A Phenomenology of Moral Sensibility", in George F.                                  McLean & Frederic E. Ellrod(eds), Philosophical Fondations                         for Moral Education and Character Development,                                  (Washington : Th Council for Research in Values and                              Philosophy, 1992).

  Derrida, J., "Violence et metaphysique", l'ecriture et difference, (Paris :                            Seuil, 1979)

  Kai Niesen, "Why should I be moral Revisited?",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 21, No. 1, 1984.

  Rich, J. M., "Moral Education and Emotions", Journal of Moral Education,                          Vol.9, 1980.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도덕교육에서의 갈등 : 원리를 가르칠 것인가, 또는 덕을 가르                         칠 것인가?”, 정세구 외 옮김, 『인격교육과 덕교육』, (서울 :                         배영사, 1995) 

  Thomson, Anne, "Emotional Origins of Morality", Journal of Moral                                       Education, Vol.18, No.3, 1989.

  Wyschgrod, M., "Martin Buber",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1.,                              (New York : The Macmillan Company, 1978)

 

 

 

   <부록 1>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연보

 

   1905년    구소련 연방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코브노 코브나스에서 12월 30일               출생, 정통적인 유태인 집안에서 자람. 구약성서, 푸시킨, 톨스토이를               정신적인 자양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냄.

             청년 시절은 우크라이나에서 보내고 거기서 러시아 혁명 목격하게 된               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 스트라스부르에서 수학. 당시 스트라스부르 교수들은                드레퓌스 사건 때 정열적인 투쟁을 벌였던 세대로, 이들의 풍부한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음

 

   1928-‘29년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위해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수학함. 후설                 밑에서 직접 현상학을 배우고 하이데거의 영향도 받게 된다.

 

   1930년   박사학위 논문인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을 출판하여, 프랑스에                현상학을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함. 이 논문은 후에 프랑스 학술원               의 상을 받게 된다.

 

   1931년   프랑스 시민권 획득

 

   1939년   이차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징집당하여 프랑스인으로 군에 입대

 

   1940-‘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음. 수용소               에서의 경험은 그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존재에서 존재               자로』(De l'existence a l'existant ) 저술.

 

   1949년   전후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그는 『후설, 하이데거의 실존              을 발견하며』(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출간

 

 

   1961년 『전체와 영원-외재성에 관한 논고』(Totalite et Infini-Essai sur                   l'exteriorite) 발표, 이 책으로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음

 

   1963년   파리 대학 낭떼르 분교에 교수로 임명

 

   1974년  『존재의 저편 혹은 본질의 저 너머』(Autrement qu'etre ou au-dela               de l'essence) 출간

 

   1991년 『타자에 대한 사유에 관한 논고』(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출간

 

   1995년   아흔을 며칠 앞두고 1995년 12월 25일 사망

 

                                Abstract

 

        A study on the ethics of otherness(他者性) with               Levinas in philosophical anthropology

                                                            Ko, Young-Ah

 

    This study has a purpose for discussing the ethics of the otherness(他者) which is based on Levinas' comprehension of human nature. Levinas' reflections on human nature have a methodic resemblance to philosophical anthropology in that they are proceded with empirical facts about human being and with reasoning grounded on such empirical facts. Futhermore, his understanding of human being has the same academic end as philosophical anthropology in that it tries to reveal essence of human being beyond seperate and empirical knowledge of human being. Accordingly, to know philosophical anthropology's comprehension of human nature must be proceeded before investigation the characture of Levinas'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Truely, modern philosophy has brought about enlightenment on medieval culture precedent and emancipation from superstitions and  sorcery, but at the same time it caused the negative effects, as to say, breaking away from the source surrounding human being, alienating from nature, reinforcing the means of controling over men. The ego-centered thinking that objectifies all things except ego resulted in effacing the meaning of subject and this reflective knowledge brougt about the rising of post-modern thought with a view to deviating from modern culture.

    Levinas criticizes the reified space and the objectified prospect of human being which has been brought by the concept of  'I', subject. By trodition, the concept of the other is made through that of subject. The other is accepted, comprehended by sensible subject with reason who perceives and apprehends the world. Husserl's intersubjectivity is a nothing but object which will be accepted, apprehended by subject in that it is too based on the initiative intentionality of subject. Levinas answers positively to interest accelated in the other by virtue of the relation 「I-Thou」of M. Buber. The other of 'I' isn't a mere target objectified but a important role-maker in the constitution of my subjectivity. The constitutive role of the other to my subjectivity has the valid grounds as follows.

   In the first place, the other satisfies the ontological need of subject which is one of two factors explanatory of human being. Levinas sees will to live as the ontological need of subject and regards the verb 'live on' (vivre de) not as intransitive but as transitive. So, the others that I am eating, am drinking and is taking are what can be possessed by me, and otherness of which can be reboked. The second gound lies in the fact that the metaphysical desire of the subject is seduced and satisfied by the other. In this case, contrary to the above-mentioned, the other has the absolute 'otherness'(他者性) which makes subject fly over one's fiteness to infiteness, dreams of transcendence, eternalty, and changes subject with responsibility and ethics for the other.

   Finally, my subjectyvity is constitutited by virtue of the ontological need and thr metaphysical desire. Such a concept of responsibility for the other like this is very significant in the relation 'I-other'. In discussion of responsibility, the concept of liberty of subject was most frequently traited. To Levinas, freedom of subject is a only violence to the other and thus the responsibility for the other makes me feel ashamed of the selfishness, licence of my freedom. The condition that subject feels the responsibility lies in the fact that human being has the metaphysical desire. Responsibility and ethics for the other is a menifestation of metaphysical desire which anyone who is human has as ontological fact. The seduction of metaphysical desire is done by the very face of the other. The face of the other in Levinas' ethics is the extention of corporal philosophy.

   It arrives me as an accident the face of the other in relation with other, and particulary the faces of orphan in need or of a widow make appeal for my respnsibility and reveal their infiteness and transcendence. Contrary to the things, these don't come in my range of comprehension and of perception, and instead constitute and transform my subjectivity. The ethics of otherness  of Levinas establishes positively the ground of human moral. If the responsibility and ethics toward the other don't derive from the external cause but from my ontological facts, morality of human being and 'human existence' itself is tautology.

   Thus, the ethics of otherness of Levinas confirms the morality of human being and furthermore will play a important role in development of moral education and social ethics. It remains our task in social ethics that shall link Levinas' ethics to the individual responsibility for society or social responsibility for individual.

 

 

 

  Key Word : philosophical anthropology, other, otherness, ontological need,                   metaphysical desire, face, death, asymmetry, responsibility, sacrifice, morality.                

1)이정하, “구원을 향한 기도”, 『녹색평론』 , 1995년 통권 제22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 Tarkowskij) ,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서울: 분도출판사, 1991).


 

2)김상환은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사회사적 관점, 문예사적 관점, 철학    적 관점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답을 구하고 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모더니즘은 인간의 사    유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의식하고 세계 해석의 중심원리로 점유할 때 시작된 존재    론적 역사의 변형과정 전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모더니즘의 탄생 지점    은 사유하는 자아의 주체성을 철학의 첫 번째 원리로 등장시키고 있는 데카르트에게서 찾    고 있다.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96), p. 360. 참조.


 

3)데까르트는『방법서설(Discourse de la methode)』에서, 이성, 양식(bon sens, good         sense)을 모든 인간에게 있어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본래적 특성으로 간주함에 따라, 인간    은 사유와 행위를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개개인이 공통적으로 가진 이성에 의    해 사유하고 행위하는 주체임을 밝히고 있다. Adam & Tannery, Œuvres de Descartes     VI, (Paris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1988).


 

4)reason은 라틴어 ratus에서 기원하는데, ratus는 ‘계산하다’, ‘셈하다’, ‘헤아리다’의 뜻으    로. 명사형은 ratus이며 역시 계산, 고려, 능력, 기능, 판단, 양식, 방법 등의 뜻을 가졌다     Eric Partridge, Origins-a short etymological dictionary of modern englisch,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1959).


 

5)현대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함으로써 객체에 대한 지식에 보편타당성을 부여하였다    면, 세계 인식은 결국 주체의 자기 인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 인    식은 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동일화하고 전체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장 프랑수아 료    타르 저, 이진우 역, “탈현대의 철학”, 김욱동 엮음,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구조주의    』, (서울: 현암사, 1991) 참조).


 

6)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M. 호르크하이머, Th․W․아도르노 공저,   김유동․주경식․이상훈 공역, 서울 : 문예출판사, 1995)에서 도구적 이성으로 추락한 인간   의 합리성에 대해 매우 잘 분석하고 있다.


 

7)하이데거는 존재를 둘러싼 논쟁을 ‘거인들의 싸움’으로 비유하면서, 오늘날 아무도 이들     의 싸움을 다시 불붙이려는 노력을 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자신의 현존에 대한     물음 이전에 다른 일상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의 존재 물음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저, 소광희 역, 『존재와 시간』, (서울: 경문사, 1995), p.5. 참조.


 

8)본 논문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레비나스(1905-1995)는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학자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국내에서도 그 연구가 많이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    내 번역된 책으로는 강영안의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서울 : 문예출판사, 1   996)가 유일하다.


 

9)S. Strasser, “엠마누엘 레비나스: 현상학적 철학”, H. Spiegelberg, 『현상학적 운동 (II)』,   최경호 옮김, (서울 : 이론과 실천, 1992).


 

10)레비나스가 말하는 자아(ego)와 나(moi)는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다. 나란 이 자아와는 대    립적인 위치에 놓인 것으로, ‘나’가 신체적인 실존에 의해 타자에게 바쳐지고 있는 것이라    면, ‘자아’는 자신의 존재에만 매달리는 자기 중심적인 존재유지 경향을 가진다.


 

11)E. Levinas, 『Totalite et Infini-essai sur l'exteriorite』, (Paris: Martinus Nijhoff, 1971),     p.32.


 

12)데까르뜨나 하이데거 등과 같은 철학자들은 대개가 형이상학을 모든 학문의 수위 자리에    두고 인식론과 존재론 등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하위개념으로 보고 있다. 데까르트, "철학    의 원리(Principles de la philosophique)", Acam & Tannery, 『Œuvres de Descartes IX    』, (Paris: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   상 옮김, (서울 : 서광사, 1994).


 

13)손봉호, “레비나스의 철학-다른 이의 얼굴”, 문학과 지성, 1974년 봄호.


 

14)레비나스는 기존의 존재론을 전체성의 철학, 전쟁의 철학, 이기주의적 철학으로 규정하는     데,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 논문 II장 3절, “레비나스의 인간이해”를 참고 바람.


 

15)에머리히 코레트 저, 진교훈 역, 『철학적 인간학』, (서울: 종로서적, 1986), pp.6-11.


 

16)S. Strasser, 앞의 논문, 최경호․박인철 공역, (1991), p.224.


 

17)코레트 저, 앞의 책, 진교훈 옮김, (1986), p.31.


 

18)O. F. Bollonow, 이을상 옮김,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 (서울 : 문원, 1994), p.15. 


 

19)B. Pascal, Pensee, 방곤 옮김, (서울 : 금성출판사, 1989), pp.11-19.


 

20)M. Montaigne, Essais II, 12장, trans. by W. Hazlitt, The Works of Michael de           Montaigne, (London, 1845), p.205.


 

21)Ernst Cassirer 著, 최명관 譯,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광사, 1988). p. 35.


 

22)본 논문 제I장, 1절, p.3을 참조바람.


 

23)J. Habermas 저, 이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4), p. 367.


 

24)강영안, “레비나스 철학에서의 주체성과 타자”, 『후설과 현대철학』, 한국현상학회편, (서    울: 서광사, 1990). pp. 244-246.


 

25)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사회에서의 일상생활의 중요    성을 절감하고 일상성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일상이 지배하는 현    대사회란 소비를 현대적 이데올로기로 삼고 그 속에서 인간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즉,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빈곤이다. Henri Lefevre 著, 박정자 譯, 『현대세    계의 일상성』, (서울: (주)세계일보, 1990) 참조.


 

26)멀리 니체의 반이성주의에서부터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    파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론, 그리고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성    과 주체에 대한 협소한 이해,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비판하는 이러한 학적    인 경향이 그 예다. 이광래, “미셀 푸코 언어, 지식 그리고 권력”, 김욱동 엮음, 『포스트모    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서울: 현암사, 1991) 참조.


 

27)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C. A. 반 퍼슨 著,    손봉호. 강영안 共譯, 『몸, 영혼, 정신』, (서울: 서광사, 1985), pp. 20-22.


 

28)O. F. Bollonow,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 (서울 : 문원, 1994), p.19.


 

29)진교훈, 앞의 책, (1982), p.25.


 

30) 코레트, 앞의 책, p. 9.


 

31)E. Coreth, 앞의 책, 진교훈 옮김, (1986), p. 49.


 

32)에머리히 코레트, 『철학적 인간학』, 진교훈 옮김, (서울 : 종로서적, 1986).


 

33)후설이 포부했던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추구와는 다르게, 쉘러에게는 현상학이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물음에 대한 그리고 심각한 위기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해 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현상학적 운동에 있어    쉘러의 위치에 관한 물음은 아직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렵다. 다음의 내용은 쉘러가 이해하    고 실천하였던 현상학적인 접근 방식의 세 가지 주요 특성들이다. ①체험, 즉 ‘삶을 통      한’ 직접적인 경험, 주어진 것 자체에 대한 통찰을 노리는 직접적인 경험. 이리하여 체험    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삶의 심화된 형태를 표현한다. ②실존(existentia)의 문    제를 괄호치고서 본질 (essentia)에로의 주의집중하기. ③이러한 본질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연관 즉 아프리오이에로의 주의집중하기. 스피겔베르그 저, 『현상학적 운동 (I)』, 최    경호․박인철 공역, (서울 : 이론과 실천, 1991), pp.304-310.

33)후설이 포부했던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추구와는 다르게, 쉘러에게는 현상학이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물음에 대한 그리고 심각한 위기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해 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현상학적 운동에 있어    쉘러의 위치에 관한 물음은 아직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렵다. 다음의 내용은 쉘러가 이해하    고 실천하였던 현상학적인 접근 방식의 세 가지 주요 특성들이다. ①체험, 즉 ‘삶을 통      한’ 직접적인 경험, 주어진 것 자체에 대한 통찰을 노리는 직접적인 경험. 이리하여 체험    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삶의 심화된 형태를 표현한다. ②실존(existentia)의 문    제를 괄호치고서 본질 (essentia)에로의 주의집중하기. ③이러한 본질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연관 즉 아프리오이에로의 주의집중하기. 스피겔베르그 저, 『현상학적 운동 (I)』, 최    경호․박인철 공역, (서울 : 이론과 실천, 1991), pp.304-310.

 


 

34)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41-43..


 

35)M. Scheler, 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G. W. 9, p.9, H. Spiegelberg, 앞    의 책, 최경호, 박인철 공역, (1991), p.303에서 재인용.


 

36)쉘러의 인격주의 가치 윤리학은 그의 인격론과 가치론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격을 칸트    식의 이성적 인격이 아닌 정신적 작용과 작용 과정의 ‘속’에서 그 자신을 나타내고 또 체    험하는 작용의 ‘수행자’로 파악하여 그 자체로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Trager)로 본다. 자    세한 내용은, 이인재, “쉘러(M.Scheller) 인격주의 가치 윤리학의 도덕교육적 함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1995) 참조.


 

37)코레트, 앞의 책, 1986, p.50.


 

38)진교훈 저, 앞의 책, (1982), p.75.


 

39) 막스 쉘러 저, 허재윤 역,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지위』, (대구: 형설출판사, 1982).


 

40)허재윤, 『인간이란 무엇인가?-철학적 인간학 연구』, (대구: 이문출판사, 1986), 금교영,     앞의 책, p. 137.


 

41)코레트, 앞의 책, p. 81.


 

42)M. Scheler, 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S.58.,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연    구(II)』, p.64에서 재인용


 

43)금교영, 『막스 쉘러의 가치철학』, (대구:이문출판사, 1995), p. 125.


 

44)이인재, “쉘러(M. Schller) 인격주의 가치 윤리학의 도덕교육적 含意에 관한 연구”, pp.      60-61에서 재인용


 

45)H. Spiegelberg, 앞의 책, 최경호․박인철 공역, (1991), pp.381-419.


 

46)스피겔베르그, 최경호․박인철 공역, 앞의 책, p. 378에서 재인용.


 

47)자세한 내용은 본 논문 I장. 1절 주7 참조


 

48)하이데거는 묻는다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 묻는 자인 우리를 자신의 존재    자를 가리켜 현존재라고 술어화(述語化)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라는 표현이 아닌    현존재라는 표현을 써 아무런 인격과 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통적 인간론에서 전제되는 인간 본질을 수용하여 자신이 또 “하나의” 인간론을 쓰    고 있다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둘째, 인간 본질과 존재와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현존재가 바로 인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존재와의 연    관성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을 갖는 존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세번째, 현존재    를 통해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적인 방법인 이원론을 극복하려 할 뿐 아니라, 현존재를    통해 “인간”이란 의미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넷째, 언어의 의미를 어원론적으로 시원적    으로 해석하고, 인간이란 단어가 표현해야 할 시원적 의미를 다시 끄집어내기를 시도한다.    새로운 용어인 현존재를 통해 그는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사태를 가능케 할 것이란 기대    를 갖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최상욱의 “하이데거 인간론”, 안상진 외 지음,    『하이데거 철학의 이해 I -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 문제』, (서울 : 철학과 현실사, 1996)을    참조하기 바란다.


 

49)H. Spiegelberg, 앞의 책, 최경호․박인철 공역, (1991), p. 379.


 

50)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69.


 

51)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며, 그러한 다양한 유형의 존재자가 있는 만큼 다양한 방식의 존    재가 있는데, 하이데거가 존재 문제에 대한 해명을 위한 단초로 삼은 존재자가 인간 현존    재이다. 그 이유는, 현존재는 다른 여타의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적 우위론” (ontischer V    orrang)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현존재는 존재 물음에 있어 여타의 존재자에 대해 “존재    론적 우위”(ontologischer Vorrang)를 지닌다. 세계라는 계기는 현존재로부터 분리될 수 없    다. 현존재가 지닌 이러한 세 가지 우위를 통해 현존재에 대한 분석이 모든 여타의 존재론    이 출범하는 “기초적 존재론”이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 - 이남인의    강의용 교재집 중에 실린 한 논문에서 발췌 ; 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역, p.21 참    조)


 

52)진교훈 저, 앞의 책, (1982), p. 129.


 

53)최상욱, “하이데거의 인간론”, 안상진 외 지음, 『하이데거 철학의 이해 I - 하이데거 철    학의 근본 문제』, (서울 : 철학과 현실사, 1996).


 

54)H. Spiegelberg, 앞의 책, 최경호․박인철 공역, (1991), p.383.


 

55)하이데거는 전통적 존재 해석의 그리스적 존재 해석이 그 해석에서 기능하는 실마리에     대해 분명한 지식도, 시간의 기초적 존재론적 역할에 대한 앎이나 이해도 갖지 못한 채 또    한 이 역할의 가능성의 근거에 대한 통찰도 없이 수행되었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추구    하고 있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로서,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의 구    분에서 시작한다. 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 H. Spiegelberg, 앞의 책,    최경호․박인철 공역, pp.378-384 참조


 

56)H. Spiegelberg, 앞의 책, 최경호․박인철 공역, (1991), p418.


 

57)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128.


 

58)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 174.


 

59)타자와 현존재의 만남의 도구적 이해에서 비롯되기 쉽다는 해석 또한 레비나스의 비판     대목이다.


 

60)최상욱, 앞의 논문, 안상진 외 지음, (1996), pp. 165-167.


 

61)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 185.


 

62)독일어의 부정대명사 das Man은 비인칭적인 대명사 ‘그’, ‘사람’의 의미로, 비본래성을    인간에게 속삭여주는데,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가능성이 스스로 음페되고 있음을 암시한     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상실한 대중적인 존재를 현존재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라    고 표현한다. 소광희 옮김의 『존재와 시간』에서는 세인으로, 스피겔베르그의 최경호․박    인철 공역 『현상학적 운동 I』에서는 비인칭의 존재인 ‘그 누구’로, 이기상의 『하이데거    의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에서는 ‘그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진교훈, 『철학적인간    학 연구(I), (서울 : 경문사, 1982), p. 131 참조.


 

63)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255.


 

64)진교훈 저, 앞의 책, (1982), p.137.


 

65)레비나스 또한 기존의 전통적 철학적 물음을 형이상학이라 지칭, 이야말로 현대 서양 문    명의 위기의 근원이라 단죄하고 형이상학 우위의 철학을 주장하였으므로 여기서 “근원적    radical"이란 표현을 썼다.


 

66)자세한 내용은 본 논문 III장 3절. “이기적인 주체의 일깨움” 참조


 

67)S. Strasser, 앞의 논문, 최경호 옮김, (1992), p. 195.


 

67)프랑스에서 박사 학위 논문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을 준비하던 레비나스는 논문 준    비를 위해 후설에게서 수학했다. 이후 현상학은 그의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보다 자세한 레비나스의 일대기는 본 논문 부록1.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연보”를 참조하기    바란다.


 

68)S. Strasser, 앞의 논문, 최경호 옮김, (1992), pp. 195-196.


 

69)그가 발표한 최초의 글은 "후설의 [이념들]에 대한 연구 (Sur les <Ideen> de M. E.        Husserl)" (Revue Philsophique de la France et de l'Etranger VII, 1929, 54e annee         n.3-4)로 후설의 『이념들 I』에 대한 논문이다. 그 다음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 (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menologie de Husserl) (J. Vrin, 1930)이다. 서동욱, “주체의 근본 구조와 타자-레비    나스와 들뢰즈의 타자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1996, p.91에서 재인용. 몇 가지 예비적인     작업에 해당하는 논문들을 써 낸 후에 서양 철학의 존재론 전체를 비판적으로 문제삼는     독창적인 철학을 내놓는다.


 

70)강영안, “레비나스: 타자성의 철학”, 『철학과 현실』, 1995a, 겨울호.


 

71)하이데거의 사상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선별적 관심을 잘 보여준다. 존재에 대한 물음을 명시적으로 반복해야할 필요성을 제    기하고 조재 물음에 대한 존재론적 우위를 강조하는데,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존재라는 익    명적인 사실에서 존재자로의 선회를 중시하고 구체적인 존재자에 대한 물음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자세한 논의는 본 논문 II장. 3절. 2). “전통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참조하기    바란다.


 

72)B. Schroeder, Altared Ground : Levinas, History and Violence, (New York :            Routledge, 1996), p. 7.


 

73)강영안, “향유와 거주 : 레비나스의 존재 경제론”, (서울 : 문학과 사회, 1995b), p. 1522.


 

75)E. Levinas, 앞의 책, (1991), pp. 32-39


 

74)주체 중심의 형이상학, 즉 존재론을 비판하는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적 우위를 전제하는    형이상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Schroeder, 앞의 책, (1996), p. 6.


 

75)E. Levinas, 앞의 책, (1971), pp.15-16.


 

76)앞의 책, (1971), pp. 274-275.


 

77)Levinas, 앞의 글, pp. 32-33.


 

78)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    해하고 ‘근대적 사유’ 혹은 ‘지각적 사유’를 ‘존재론, 존재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    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    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    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존재사유’의 필요성을 역설    한 반면, 레비나스는 ‘존재론’을 극복하고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 강영안, 앞의 논문, (1995b), p. 1526, 재인용.


 

79)타자가 주체인 ‘나’에게 요구하는 책임과 윤리성은 타자와 나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유래    한다. 타자의 나의 관계에 대한 본 논문 IV장 1절 “나와 타자의 관계” 참조.


 

80)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199.


 

81)레비나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동일자)의 범주와 도식으로 환원하는 이론과 활동(과    학, 과학기술, 노동, 문화), 즉 인간의 자기 실현과 관련된 일을 ‘존재론’이라고 부르고 있    다. 이러한 존재론은 전체성의 이념과 자기실현의 이념을 축으로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리고 레비나스는 자신의 사상을 존재론이 아닌 형이상학으로 지칭한다는 점을 상기    해 볼 때, 엄격하게 말해서, “타자로 열린 형이상학”이 레비나스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형이상학’이 통상적으로 내포하는 범위가 존재론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용어가 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고자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어휘를 택해 제목을 달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82)E. Levinas, 앞의 글, (1987), p. 27-31.


 

83)E. Levinas, Le Temps et l'autre, (Paris : Presses Univairesaires de France, 1983), pp.    31-34.


 

84)라틴어 conatus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An effort to accomplish a desired end,      endeavor, exertion, attempt)으로 풀이되고, essendi는 실체(Essence, substance)           essentia를 어원으로 한다.  스피노자가 자아의 보존본능, 살고자 하는 권리(right to         existence)를 ‘존재노력’이라는 말로 불렀다. Oxford Latin Dictionary,

84)라틴어 conatus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An effort to accomplish a desired end,      endeavor, exertion, attempt)으로 풀이되고, essendi는 실체(Essence, substance)           essentia를 어원으로 한다.  스피노자가 자아의 보존본능, 살고자 하는 권리(right to         existence)를 ‘존재노력’이라는 말로 불렀다. Oxford Latin Dictionar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참조.


 

85)E. Levinas, "L'ontologie est-elle fondamentale?"(1951), Entre nous-Essaie sur    le penser-a-l'autre, (Paris : Grasset, 1991), p. 14.


 

86)레비나스가 쓰는 불어 L'autrui/L'Autrui (the personal other/s)가 영어로는 대문자 O로     시작하는 Other, 그리고 autre/Autre (otherness in general ; alterity)는 소문자 o로 시작    하는 other로 구분되어 번역된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타자(打者)는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는    뜻이 없다. L'autrui/L'Autrui를 굳이 사람임을 강조하여 타인(他人)으로 하기에는 그 뜻이    지나치게 협소하다고 생각하뎌, 본 논문에서는 불어 용어 둘 다 타자라고 옮기도록 하고,    특별히 문맥을 자연스럽게 해야할 몇 경우에 한해서만 ‘타인’이라고 옮기도록 하겠다. B. S    chroeder, 앞의 책, (1996), p. 149 참조.


 

87)E.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Paris : Vrin, 1947), pp.94-95, 강영안, 앞의 논    문, (1995a), pp. 149-150에서 재인용.


 

88)E. Levinas, Le Temps et l'autre, (Paris :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3), pp.    36-38.


 

89)위의 책, (1971), pp. 36-38.


 

90)E. Levinas, "le Moi et la Totalite", 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Societe    Nouvelle Firmin-Didot, (Paris : Grasset, 1995), pp. 26-27.


 

91)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하려는 경향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연 법칙은 곧 자기 보존의 법칙이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영원하며 필연적이고 완전하여 자신 외에 다른 모습 존재자를 자신의 양태    로 갖는 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제3부 정리 6),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    는 노력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일 뿐이다”(제3부 정리 7), B. Spinoza, Ethica , 강영계     옮김, (서울 : 서광사, 1990).


 

92)라틴어 “ipse”에서 어원을 확인해 보면, “Himself, for his own part, acting or considered    alone or without the intervention of others of his own accord, by himself 등의 뜻으로,    ”자아의 독립성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어의를 담고 있다. Oxford Latin Dictionarym,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참조.


 

93)E. Levinas, 앞의 책, (1971), pp. 152-161.


 

94)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서울 : 문예출판사, 1992), p.206


 

95)E. Levinas, 앞의 책, (1971), p. 85.


 

96)위의 책, (1971), pp. 167-169.


 

97)G. Bachlard,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서울 : 민음사, 1990), p. 113


 

98)E. Levinas, 앞의 책, (1971), pp. 103-107.


 

99)E. Levinas, 앞의 책, (1971), p.21 참조.


 

100)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혹은 죽음이 인간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본 논문 III장 2절       “2)죽음”에서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다. 참조하기 바람.


 

101)E. Levinas, 앞의 책, (1971), pp.190-191.


 

102)손봉호, “레비나스의 철학-‘다른이’의 얼굴”, 문학과 사회 15호, 1974년 봄호, p. 162.


 

103)E. Levinas, 앞의 책, (1971), pp.21-22 참조.


 

104)E. Levinas, Totalite et Infini, pp. 21-24.


 

105)“형이상학적 욕망은 회귀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땅     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Totalite et Infini, p. 22에서 인용.


 

106)E. Levinas, 앞의 책, (1971), p. 22.


 

107)E. Levinas, 앞의 책, (1971), p. 56.


 

108)S. Schroeder, 앞의 책, (1996), pp. 73-75.


 

109)‘나를 내놓는다’는 레비나스적 의미는 데리다의 ‘아듀(adieu)’의 개념과 비교해서 이해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인간의 본질은 자기 보존욕이 아니라 아듀(adieu)이다’ 라는 표현     을 하는데, 여기서 ‘아듀’라는 의미는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적 욕망과 같은 맥략에 쓰인      다. 데리다에게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표현하는 말인 아듀는 세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첫     째, 타자와 만났을 때 하는 인사나 축복, 둘째, (죽음을 포함해서) 떠날 때 하는 인사나      축복, 셋째, <신에게로 a Dieu>로 해석된다. J. Derrida, "Donner la mort", L'Ethique du     don, (Transition, 1992), pp. 50-51 ; Hent de Vries, "Adiu, a Dieu, a-Dieu", Ethics as      First Philosophy, (New York : Routledge, 1995) 참조. 첫째가 낯선 자, 타자와의 관계를     의미하고 둘째, 셋째가 초월과 무한자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세 경우 모     두가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타자(낯선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110)J. Derrida, "Violence et metaphysique", l'ecriture et difference, (Paris : Seuil, 1979),      pp. 137-138.


 

111)E. Levinas, 앞의 책, (1971), p. 32.


 

112)R. M. Janer, 『신체의 현상학 : 실존에 바탕을 둔 현상학』, 최경호 옮김, (서울 : 인간     사랑, 1994), pp. 3-4.


 

113)한전숙, “생활세계적 현상학”, 한국현상학회편,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 :     서광사, 1992), pp.33-34.


 

114)B. Schroeder, 앞의 책, (1996), p. 91.


 

115)후설은 『데카르뜨적 성찰』5부 “모나드론적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선험적 존재 영역의 배     경”에서 ‘타자의 문제’를 다룬다. 나에게 타자의 신체는 다른 대상들처럼 주어진다. 그런     데 타자의 신체의 표현은 나의 신체의 표현과 유사하며, 나의 신체의 표현은 나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 점을 전제로, 나는 나와 유사한 표현을 하는 타자의 신체로부터 나와     동일한 의식 활동을 하는 주체로서 타자를 구성해낸다. 나는 다른 주체들을 나의 환경 세     계의 일부로서 나를 구성한다. 그러나 나는 타자를 (그리고 타자는 나를) 단순한 객체로     서가 아니라 그 자신 대상들을 가지며, 인식하며, 그리고 그것들에게 대응하는 주체로서     구성한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타자는 대상으로서 지각된 후, 나와 동일한 주체로 구성된     다는 점이다. 하이데거 역시 타자와의 공동존재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적 성질이기는 하지     만, 타자가 현존재의 존재론적 의미를 일차적으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후설의 『데카르     뜨적 성찰』(이종훈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3) ; 이길우, “구성이론과 존재론”, 『후설과     현대철학』, (서울 : 서광사, 1990), 본 논문 II장 2절, “2)하이데거의 인간이해” 참조.


 

116)E. Levinas, Totalite et Infini-essai sur l'exteriorite, (Paris : Librairie Francaise,          1988), p. 24.


 

117)강영안, “레비나스 철학에서 주체성과 타자”, 『후설과 현대철학』, (서울 : 서광사,         1990).


 

118)E. Levinas, 앞의 책, (1987), pp. 29-31.


 

119)C. A. Van Pearson, 『몸 ․영혼․정신-철학적 인간학입문, 손봉호․강영안 옮김, (서울     : 서광사, 1985), p. 129.


 

120)J. Derrida, "Violence et Metaphysique", l'ecriture et difference, pp. 137-139.


 

121)E. Levinas,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trans. by Alphonso Lingis, (Dordrecht :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987), p.17.


 

122)E. Levinas, "le Moi et la Totalite", 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ed. by     Societe Nouvelle Finmin-Didot, (Paris : Bernard Grasset, 1995), p. 26.


 

123)B. Schroeder, 앞의 책, (1996), p. 96l.


 

124)손봉호, “레비나스의 철학-‘다른이’의 얼굴, 『문학과 지성』 15호, 1974년 봄호


 

125)E. Levinas, 앞의 책, (1971), pp. 215-216.


 

126)사라(Sara)의 여종인 하갈(Agar)이 아브라함(Abraham)의 자손을 잉태하게 되자 하갈은     사라의 눈을 피해 사막으로 도망을 다니게 된다. 헤매다 신(l'Eternel)의 음성을 들은 사     라는 “Atta-El-Roi”라고 신을 부른다. La Sainte Bible, Alliance Biblique Universelle,       1992, 창세기 16장 13절, p. 14.


 

127)E. Levinas, 앞의 책, (1971), p. 217.


 

128)Alphonso, L., Libido : The French existential theories,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p. 5.


 

129)Alphonso, 앞의 책, (1985), pp. 60-62.


 

130)E. Levinas, 앞의 책, (1971), p. 258.


 

131)E. Levians, 앞의 책, (1983), p. 57.


 

132)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10.


 

133)E. Levinas, 앞의 책, (1983), pp. 62-63


 

134)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p. 342-351.


 

135)강영안, “존재․주체․타자-레비나스의 ‘존재론적 모험’에 관하여”, 세계의 문학 66호,       1992, p.212.


 

136)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 359.


 

137)E. Levinas, 앞의 책, (1983), p. 58.


 

138)위의 책, p. 59


 

139)위의 책, p. 63


 

140)E. Levinas, 앞의 책, (1983), p. 64.


 

141)E. Levinas, 앞의 책, (1971), p.258-263.


 

142)E. Levinas, 앞의 책, (1971), pp. 236-242.


 

143)데카르뜨와 함께 출발하는 자아 중심적인 철학에서 타자의 개념은 자아(ego)의 개념에      부수적인 성질 혹은 현상으로서 등장하였다. 사고 내용에 대한 ‘노에마’와 함께 대상 구성     의 주체인 ‘노에시스’의 구성계기를 상관적으로 고찰하는 후설은 타자 경험과 타자구성을     통해 결국 타인 자체와 나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타인’은 또 다른 자아에 불과하     고 여기서 엄격한 ‘나와 타자’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버의 타자성의 개념은 독립된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너’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데, 두 경우 모두 ‘나’와 함     께 상호동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E. Husserl, 『데카르트적 성찰』, 이종훈 옮김, (서울     : 철학과 현실사, 1993), pp. 179-186 ; 이삼열, “마틴 부버에서 본 대화의 철학”, (서울 :      서광사, 1992), p.233 참조.


 

144)Levinas and kearney, "Dialogue with Emmauel Levinas", Face To Face with Levinas,     ed. by R. A. Cohen, (Albany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 24.


 

145)E. Levinas, 앞의 책, (1983), p. 75.


 

146)Mary Douglas, How Institutions Think, (New York : Syraeuse Univ. Press, 1986), 서     문 참조.


 

147)M. Buber, I and Thou, trans. by R. G. Smith, (Edinburugh : T&T Clark LTD.,          1958), p. 15.


 

148)위의 책, p. 59.


 

149)M. Buber, The knowledge of Man, trans. by M. Friedman & R.G.Smith, (New York     : Harper & Row Publishers, 1965), pp. 59-71.


 

150)E. Levinas, 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pp. 30-32.


 

151)Theodore de Boer, "An Ethical Transcendental Philosophy", Face to Face with           Levinas, de. by R. A. Cohen, (Albany :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p.109.


 

152)E. Levinas, 앞의 책, (1971), pp. 64-65.


 

153)E. Levinas, 앞의 책, (1995), p. 125.


 

154)E. Levinas, 앞의 책, (1971), pp.236-238.


 

155)강영안, 앞의 논문, (1990), pp. 244-245.


 

156)E. Husserl, 앞의 책, 이종훈 옮김, (1993), pp. 179-186.


 

157)이정복, “현상과 존재해석”, 『후설과 현대철학』, 한국현상학회편, (서울 : 서광사, 1990),     pp. 199-200.


 

158)이길우, 앞의 논문, (1990), pp. 151-152.


 

159)서동욱, 앞의 논문, (1996), pp. 101-102.


 

160)Theodore de Boer, 앞의 논문, (1986), p.91-92.


 

161)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354-355.


 

162)Deleuze, 위의 책, pp. 357-369.


 

163)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17.


 

164)자아를 존재론적 이기성에서 깨어나게 하고 윤리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 타인의 얼굴     과 죽음과의 관계맺음이다. 본 논문 III장 2절 참고 바람.


 

165)위의 논문, p. 216.


 

166)위의 논문, p. 216.


 

167)E. Levinas, 앞의 책, (1987), p. 17.


 

168)진교훈, 앞의 책, (1982), p. 52-55.


 

169)Theodore de Boer, 앞의 논문, (1986), p.86.


 

170)본 논문, III장 1절 “2)存在論적 欲求(besoin)와 形而上學的 慾望(desir)의 主體(sujet)” 참     조 바람.


 

171)E. Levinas, 앞의 책, (1971), p. 11.


 

172)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25.


 

173)여기서 레비나스의 형이상학이 존재론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번 더 상기할     수 있다. 이기적인 존재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욕구를 갖는 존재론은 타자     와의 관계를 통한 형이상학으로 변모한다. Theodere de Boer, 같은 책, pp.109-110 참조


 

174)E.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Paris : J. Vrin, 1947), p. 9.


 

175)E. Levinas, "Philosophie, Justice et Amour", Entre nous-essais sur le                   penser-a-l'autre, (Paris : Bernard Grasset, 1995), p. 127.


 

176)박병기, “인간의 사회성에 관한 사회윤리학적 고찰”, 사회와 사상, 서울대학교대학원 국     민윤리교육과, 1993 제 12호,


 

177)한국철학회, 『철학』, 제32집의 특집, “사회윤리의 철학적 조명,” 손봉호와 황경식의 논     문이  대표적인 글이다 이후 손봉호의 논문(『철학연구』, 제27집, 1990, 가을)와 박병기     (『국민윤리연구』, 제30호, 1991, 12 ;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윤리학』, 인간사랑,        1993) 등 다수가 발표되었다.


 

178)박병기,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윤리학』, (서울 : 인간사랑, 1993), p. 227.


 

179)Bernard Waldenfels, "Response andd Responsibility", Ethics as First Philosophy, ed.      by A. T. Peperzak, (New York and London : Routledge, 1995), p.41.


 

180)B. Schroeder, 앞의 책, (1996), pp. 102-103.


 

181)Boer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가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타자관에서 한층 심     화된 타자관임을 강조한다.(T. de Boer, "An Ethical Transcendental Philosophy", Face      to Face with Levinas, ed. by R. A. Cohen, (Albany : Routledge, 1986), pp.91-93


 

182)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17.


 

183)E. Levinas, Otr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he Hague : Martinus          Nijhoff, 1981), p.126


 

184)"The word I means here I am, answering for everything and for every one", (E.         Levians, 앞의 책, p.114)


 

185)B. Schroeder, 앞의 책, (1996), p. 175.


 

186)위의 책, p. 101.


 

187)현존재의 존재유형으로, 구체적으로 현존재는 자기 자신 앞으로 이끌려와 그의 ‘내던져져     있음’ 안에서 자신에게 열어 밝혀져 있다고 한다. 이 내던져짐 속에서 존재 가능은 각기     나의 존재가능으로서 본래성 또는 비본래성 또는 이 둘의 양태적 무차별성에 자유롭게      열려져 있다.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서울 : 문에출판사, 1992), pp. 21        4-215.


 

188)하이데거가 현존재에게 붙이는 ‘염려(sorge)’라는 칭호는 물론 순수하게 존재론적-실존론     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찾고 있는, 구조 전체의 존재 전체성으로, 즉 현존재의 존재로서     의 염려는 현존재의 존재 규정을, 말하자면 실존성, 현사실성, 던져져있음 등의 단일성을     포괄하여 특징짓는다. 이기상, 같은책, (1992), p. 225.


 

189)B. Schroeder, 앞의 책, (1996) pp. 98-99.


 

190)M. Heidegger, 앞의 책, 소광희 옮김, (1995), pp. 277-279.


 

191)Bernard Waldenfels, "Response and Responsibility", Ethics as First Philosophy, ed.       by A. T. Peperzak, (New York and London : Routledge, 1995). p. 41.


 

192)E. Levinas, 앞의 책, (1971), p. 33.


 

193)R. A. Cohen, 앞의 책, (1986), pp. 6-8.


 

194)신의 말씀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타인의 얼굴은     약자의 얼굴인 동시에 명령의 나타남이기도 하다. E. Levinas, “Philosophie, Justice et      Amour", Entre nous-essai sur le penser-a-l'autre, (Paris : Bernard Grasset, 1991), p.     126.


 

195)B. Schroeder, 앞의 책, (1996), p. 6.


 

196)E. Levinas, 앞의 책, (1971), pp. 299-309.


 

197)Theodore de Boer, 앞의 논문, (1986), p.90.


 

198)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p.3.


 

199)레비나스가 후설이나 하이데거에게서 받은 현상학적 세례는 크다. 그러나 그가 훗날 전     개하는 철학적 사유의 내용은 현상학적 본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예를 들어, 후     설에 있어 지향 작용이란 극으로서의 주관에서 발생하여 대상에게로 향하고 대상을 주관     의 존재로서 구성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서, ‘나’라는 주관은 본질적으로 외재성에 의     존하는데, 그러한 외재성은 ‘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인간의 정신적인 생의 모나드(monad)적인 생각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모나드란     ‘창이 없는 것으로서’ 다른 모나드와의 사회적-윤리적 관계로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단자론이 지닌 내재주의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적인 사상인 초월성의 이념과 강하     게 대립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레비나스는 선험적 자아 중심주의가 아닌 윤리적 자아     론에 대응하는 ‘나’를 상정한다. ‘나’를 ‘타자’와 전적으로 무관하고 자신에 대해 지배력을     가진 주체로 보지도 않고, 역으로 ‘타자’에 의해 결정되는 ‘나’도 아닌 ‘나’를 설정하고 있     다. (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25 참조 바람)


 

200)손봉호, “고통의 현상학”, 한국현상학회편,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 : 서     광사, 1992)


 

201)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215.


 

202)E. Levinas, "La souffle inutile", Entre nous-essae sur le penser-a-l'autre, (Paris :        Bernard Grasset, 1991), pp.107-108.


 

203)E. Levinas, The provocation of Levinas-Rethinking Others, ed. by R. Beransconi and     D. Wood, (London and New York : Routledge, 1988), p.157.


 

204)손봉호, 앞의 책, (1995), p. 66.


 

205)S. Strasser, 앞의 논문, (1992), p. 225.


 

206)손봉호, 앞의 책, (1995), pp.45-46.


 

207)E. Levinas, 앞의 논문, (1991), p.111.


 

208)M. Scheller, Vom Sinn des Leides, in : 전집 6권, Bern, 1963, S.46.,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 연구(II)』, (서울 : 경문사, 1994), p.84에서 재인용.


 

209)M. Scheler, Vom Sinn des Leides, M. Scheler, Gesammelte Werke, Bd.6, Bonn,          Bouvier, 1986, p.52, 손봉호, 앞의 책, (1995), p.115에서 재인용.


 

210)강영안, 앞의 논문, (1995a), pp. 160-161.


 

211)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p. 78


 

212)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김태현 옮김, (서울 : 청하, 1992), pp. 169-170.


 

213)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궁구하는 철학적 인간학은 그 입장과 연구 방식에 따     라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초기의 철학적 인간학을 제1기 또는 초창기라 부르는데, 철학     의 전통 내지 인 간에 관한 개별과학들의 지식을 전제하고 이러한 역사적 지식들에 대한     전통은 해석을 통하여 인간 본질을 구성하려 했다. 셀러의 ‘정신’ (Geist), 플레쓰너의 ‘理     性性’을 통한 인간이해가 여기에 속한다. 이후 인간학은 개념적 영역에서 비판적으로 재     구성하려는 철학자들이 나타나면서 철학적 인간학을 ‘반성적’(reflektive) 학과로 파악하려     는 움직임이다. 부버, 플람(Leopold Flam, 1912-?), 로타커(E. Rothacker,1888-1965), 란트     만(M. Landmann, 1913- ) 등을 비롯하여 까뮈(A. Camus, 1913-1960)와 마르셀(G.          Marcel, 1889-1973)의 실존철학에서도 이러한 사고를 찾아볼 수 있다. 철학적 인간학과      형이상학 등 존재론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학과 코레트의 형이상     학적 인간학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앞의 두 가지 연구경향, 즉 철학적 인간학의 반응적     경향과 반성적 경향을 논리적으로 종합화하여, 수학적, 논리학적 훈련과 언어분석을 철학     적 인간학에 도잆하여 인간의 자기 성찰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제3기 혹은 종합기라 부를     수 있다. 캄라(W. Kammlah, 1905-1976), 로렌츠 등이 있다.  진교훈, 앞의 책, (1994),       pp.69-73.


 

214)이러한 구분은 어원론적인 구분으로 앞 장(본 논문 IV장. 2절 “1)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     리의 요구”)에서 레비나스가 하고 있는 도덕과 윤리의 구분 역시 이와 유사하다. 박이문,    『자비의 윤리』, (서울 : 철학과 현실사, 1990), pp.10-11 참조


 

215)I. Kant, 『도덕철학원론』, 정진 옮김, (서울 : 을유문화사, 1970), pp.8-9.


 

216)Kai Nielsen, "Why should I be moral Revisited?" in American Philosophical Quaterly,     Vol. 21, No. 1, 1984


 

217)김태길, 윤리학, (서울 : 박영사, 1991), p. 26.


 

218)F. Nietzsche, 『도덕의 계보』, 김태현 옮김, (서울 : 청하, 1992),


 

219)F. Nietzche, 『선악의 피안』, 송영택 옮김, (서울 : 정음사, 1975), p.185.


 

220)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더라도 사실에 관한 지식만을      근거로 삼아 가치 내지 당위에 관한 결론을 얻으려 하는 시도에는 논리적인 결함이 있      음은 뒤에 나올 공리주의가 갖는 약점이기도 하다.


 

221)박이문, 앞의 책, (1990), pp.86-100.


 

222)공리주의 이론은, 옳은 행동이란 가장 많은 양의 쾌락 혹은 행복과 최소의 고통을 산출     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유용성 이론에 근거한다. 밀(J. S. Mill)은 그의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의 제2장 첫머리에서, 그의 공리주의가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는 ‘유용     성’(utility)이 다름아닌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후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는 사실 판단과 가치판단 사이의 논리적 간극 그리고 정의에 관한 문제 등 그들의 현실     적인 정책 수립 적용 다방면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이후 카알라일(Carlye, 1795-1881)의      이타적 공리주의, 라쉬달(Rashdall)의 이상적 공리주의 등으로 보완되나 지금 여기서는      벤담과 빌의 영국의 공리주의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William S. Sahakian, Ethics : An     introduction to theories and problems, (New York : Barnes & Noble Books, 1974),       pp.28-41.


 

223)J. Bentham,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Ch. I. par.      ii.)


 

224)J. J. C. Smart, "Utilitarianism and its application", New directions in Ethics, ed. by      Joseph P. DeMarco and Richard M. Fox, (New York and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1986), p.25


 

225)김태길, 앞의 책, (1991), p.104.


 

226)Willam S. Sahakian, Ethics, An Introduction to theories and problems, New York :       Barnes & Noble Books, 1974, p. 32.


 

227)J. Butler(1692-1752)는 굶주림이라는 욕망의 직접 목적을 미각의 쾌락이 아니라 음식물     이라고 지적한다. ‘음식을 먹음’이 굶주림의 직접 목적이지 욕망의 직접 목적이 반드시 쾌     락은 아니다. 즉 쾌락은 행동의 동기라기 보다는 결과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김태길, 앞     의 책, 1991), p.105


 

228)김태길, 앞의 책, (1991), p. 105-106.


 

229)J. J, C. Smart, “Utilitarianism and its applications", New Directions in Ethics, (New     York and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1986), pp.30-31.


 

230)손봉호,『고통받는 인간』,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p.124.


 

231)J. J. McDermott, "Pragmatic sensibility : The Morality of Experience", New             directions in Ethics, pp.126-127.


 

232)박이문, 앞의 책, (1990).


 

233)Aristotle, The Ethics of Aristotle-The Nicomachean Ethics, trans. by J. A. K.           Thomson, (London : Penguin, 1976), trans. by Thomson.


 

234)칸트, 『도덕형이상학의 원리』, 정진 옮김, (서울 : 을유문화사, 1970), p.25.


 

235)칸트의 선의지는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의지란      옮은 행동을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항상 택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적인 경향을 따라서 옳은 행동에로 쏠리는 의지가      아니라, 단순히 어떤 행우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로 말미암아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인      것이다. 선의지란 객관적 실천의 법칙을 순수한 동기에서 따르는 능력이다. 두 번째, 그러     나, 현실적인 인간의 의지로 주관적 동기의 세력 밑에 있는 까닭에 보통 객관적 실천의      법칙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와 실천적 법칙 사이에 일종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데, 선의지란 의무 그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김태길, 앞의 책, (1987), p.127 참조)


 

236)김태길, 앞의 책, (1990), p.39.


 

237)I. Kant, 앞의 책, (1970), p.39.


 

238)Vernon J. Bourke, "Recent Thomistic Ethics", New Directions in Ethics, ed. by          Joseph P. DeMarco & Richard M. Fox, (New York and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pp.58-59.


 

239)Gabriel Madinier, La Conscience Moale, (Paris : Universitaires de France, 1961), p.86     에서 재인용


 

240)박원기, 기독교 사회윤리-이론과 실제,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5), pp.16-25.


 

241)Taine, L, t. XI, p.147.


 

242)M. Pradines, Esprit de la religion, p. 357.


 

243)H. Plessner, 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s Mensch, (Berlin, 1965), pp.140-141     에서 재인용.


 

244)B. Hindess, Political and Social Structure, (Worcester : Billing & Sons, 1989),           pp.3-4.


 

245)J. S. Coleman, The Asymmetric Society, (Syracuse : Syracuse Univ. Press, 1982).


 

246)M. Buber, "Distance and Relation", in M. Buber The Knowledge of Man, p.60


 

247)R. Descartes, 『방법서설․성찰』, 최명관 옮김, (서울 : 서광사, 1983)


 

248)R. A. Cohen, 앞의 책, (1986), p.11


 

249)E. Levinas, 앞의 책, (1971), p.114.


 

250)학교에서의 도덕교육을 반대하는 의견에는 과학과 같이 검증가능한 것만 가르쳐야 하고     검증되지 않고 합의 불가능한 도덕은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인식론적 입장, 학교     에서의 도덕교육이 국가나 집단유지를 위한 가치를 강요하여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반대     된다는 개인주의적 입장, 도덕 교육이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 체제에 복속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자본주의 질서 유지 고안책의 하나라는 사회주의적 입장, 경험적 평가에 의거할     때 학교 도덕교육이 사람들의 도덕성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경험론적 입장, 학교는     전체 사회구조의 반영에 불과하며 독립된 전문제도로서의 학교교육은 인정하지 않는  구     조주의적 입장 등이 있다. Barry Chazan, Contemporary Approaches to Moral Education     : Analyzing Alternative Theories, (New York and London : Colombia Univ. Press,        1985)


 

251)Ferrer, The Origins and Ideals of the Modern Schlool, pp. 15-17 ; Bruec Calbert,        Rational Education, (Griffith, Ind. : Open Road Press, 1911), p.25.


 

252)John M. Rich, “도덕교육에서의 갈등 : 원리를 가르칠 것인가, 또는 덕을 가르칠 것인      가?”, 정세구 외 옮김, 『인격교육과 덕교육』, (서울 : 배영사, 1995), pp.169-170.


 

253)위인과 배닛은 도덕적 행동의 실천을 도덕적 추론기능의 획득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     각하였다. 위인은 인지적 도덕 발달이나 가치 명료화 접근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별적 접     근에 반대하여서 전반적인 하교 활동들을 통한 도덕적 가치들의 교화를 주장하였다. 반면     에 배닛은 도덕적 숙고가 좋은 도덕적 습관의 실천에 해로운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특히     딜레마 토론의 폐해에 주목하였다. (추병완, “인격교육은 도덕교육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사회와 사상』, 서울대학교대학원 국민윤리교육과, 1995, p.2에서 재인용.


 

254)이삼열, “마틴 부버에서 본 대화의 철학”, 크리스찬 아카데미편, 『대화의 철학』, (서울     : 서광사, 1992), p.234


 

255)Thomas Lickona, Educating for Character : How Our Schools Can Teach Respect       and Responsibility, (New York : Bantam Books, 1991), pp.49-62.


 

256)정건영, 『존 듀이 교육철학』, (서울 : 교육출판사, 1993), p.205. 이러한 입장은 본 논문     의 입장과 동일한 데, 인간의 본성을 이기성으로 간주해버리면, 여기서 도덕이란 의무 내     지 신앙에의 충실을 위한 행위로 전락해 버린다.


 

257)추병완, “한국사회 도덕성 위기의 극복 방안에 관한 일 연구”, 사회와 사상, 1993, 제12      호, pp.213-216


 

258)O. F. Bollonow, 『교육의 인간학』, 오인택․정혜영 공역, (서울 : 문음사, 1990),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