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미학과 존재론의 문제
칸트 미학은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이나 경험주의 미학을 넘어서 미적 자율성을 정초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 미적 자율성은 근대적 합리성에 반대해 미학의 영역으로부터 삶의 총체성을 복원하려는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비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아름다움에서 참다운 인식이나 도덕적 가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예술 자체의 가능성을 사멸시키는 요인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아름다움을 존재 진리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칸트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예술은 삶의 한 영역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존의 존재론적인 근본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한다는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 속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칸트 미학과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칸트 미학의 존재론적 재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독일 관념론과 신칸트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칸트 철학을 해석한다. 독일 관념론이 선험적 자아의 문제를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해석을 전개하는 반면, 신칸트주의는 칸트 철학을 자연과학의 토대를 정초 하는 인식론으로 이해한다. 특히 신칸트주의는 칸트가 전통 형이상학과 부정적 단절 관계에 있으며,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 변증론을 통해 형이상학적 사고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 이론철학을 "경험이론"(Theorie der Erfahrung)으로만 보는 것은 칸트의 의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인식론(Erkenntnistheorie)의 수립이 아니라 존재론, 즉 형이상학1)의 새로운 "정초"(Grundlegung)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러한 문제설정은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Kopernikanische Wendung)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칸트는 모든 인식이 대상에 준거해야 한다는 종래 원칙을 폐기하고 오히려 대상이 우리 인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혁명적 관점을 주장한다. 이것은 사물이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경험 가능성을 형성하는 조건'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조건에 대한 앎은 대상의 존재적 인식(ontische Erkenntnis)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에 관한 어떤 확정을 하는 것"2), 즉 경험독립적(a priori)3)인 존재론적 인식(onto- logische Erkenntnis)이다. 보통은 주제적으로 의식되지 않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이 모든 경험 속에서 이미 항상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대상과의 일치를 목표로하는 존재적 인식은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앞서 개방되어야만, 즉 그 존재구성틀(Seinsverfassung) 속에서 인식되어야만 자신의 대상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KPM 13)4).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innere Moglichkeit)에 대한 물음을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칸트 철학을 평가하면서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과 도식론(Schematismus)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요한다5).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판과 재판(再版)에서 선험적 상상력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전개한다. 초판에서 선험적 상상력은 감성이나 오성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뿌리로 간주되는데 반해, 재판에서는 선험적 상상력의 자율성을 부정하며 오성 기능의 일부로 재규정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재판의 입장을 일종의 "물러섬"(Zuruckweichen)으로 평가하며 칸트의 주관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전제하고 있는 주관주의적인 전통적 인간관(觀)에 대한 비판에 근거해 자신의 '기초존재론'(Funda- mentalontologie)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새로운 인간 해석을 제시한다.
칸트 미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가에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이 그대로 관철된다. 칸트 미학의 평가와 관련해 다음의 두 곳에서 하이데거의 중요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이데거는 "선험적 방법에 의해 미학 해석의 보다 크고 확실한 가능성을 얻었던 칸트조차도 근대적 주관 개념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6)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을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7)(Das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진리'는 존재적 진리(ontische Wahrheit)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리(ontologische Wahrheit)를 의미한다8). 따라서 선험적 방법으로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을 묻는 칸트는 아름다움의 본질 해명에 가까이 다가갔던 셈이다. 둘째, 하이데거는 "판단력 비판에서 순수 상상력(reine Einbildungskraft)이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지, 특히 형이상학의 정초라는 앞서 언급된 특정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지는 여기서〔『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 필자 추가〕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다"(KPM 155f.)고 말한다. 간접적인 언급이기는 하지만 『순수이성비판』 초판·재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판단력비판』의 평가에서도 선험적 상상력이 그 근원성에서 해석되고 있는가 아니면 오성의 기능으로 환원되는가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서 오는 쾌감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러한 놀이는 오성의 합법칙성 일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 (Gesetze der Assoziation)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9).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a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닌다.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unnennenbar) 많은 것을 "미전개된"(unentwickelt)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KU 197). 칸트 미학의 다른 주요 개념들은 바로 이러한 '사태'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KU 16)은 상상력의 자유를 위해 전제되는 것이며, "반성의 쾌감"(Lust der Reflexion)(KU 153)은 그러한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쉴러가 무규정성(Unbestimmtheit)이 지배하는 태초 상태의 반복으로 규정하는 "미적 상태"10)(asthetischer Zustand) 역시 동일한 사태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상상력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들을 존재론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아름다움에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도덕적 관심으로의 이행을 지나치게 무리한 비약 없이 가능하게 하는 역할"(KU 260)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성(Menschheit)이란 외적 강제에 영향받지 않는 자주적인 자기결정, 오성(이성)의 자발성의 완전한 구현에 있다는 칸트의 주관주의적 편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오성(이성) 역시 선험적 상상력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칸트의 선험적 상상력은 궁극적으로는 하이데거에 의해 현존재의 근원적 시간성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1936년 여름학기에 칸트의 미적 판단력 비판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지만 그 내용은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다11). 따라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칸트 미학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하이데거 자신의 저술을 토대로 논의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칸트 미학을 단순히 '미학적' 관심에 따라 해석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칸트 철학의 전체적인 상황과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토대로 그의 예술철학의 전반적인 구도와 계기들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전개하면서 다루는 지각과 감정의 문제에 주목한다. 지각과 감정은 전통적인 미학적 탐구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주제로 간주되어 왔으며 따라서 지각과 감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해석은 미학과 미학적 태도를 그 토대에서부터 해체하는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관심 속에서 첫째, 칸트의 선험 철학적 방법이 어떤 점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 해명을 위한 '보다 크고 확실한 가능성'을 부여하는가? 둘째, 칸트가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셋째, 칸트 미학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하이데거 자신의 예술철학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들을 제기하고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칸트 미학과 하이데거 예술철학 사이의 관계를 구명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미학의 극복변형12)(Verwindung)을 통한 존재망각의 극복 가능성 모색'이라는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핵심동인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부에서는 칸트 미학을 해석하는 하이데거의 근본 입장을 미학비판과 이를 통한 존재물음의 제기라는 관점에서 정리한다. 먼저 미학의 성격을 규정한 후(1장), '질료-형식'이라는 미학의 주요도식을 통해 미학의 본질을 분석하고(2장), 칸트가 과연 존재론적 물음을 설정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이 극복-변형의 관점에 서있음을 밝힌다(3장). 2부에서는 지각과 감정으로 나누어 칸트의 논의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그리고 미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본다. 지각에서는 먼저 지각의 복잡한 구조가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됨을 제시하고(1절), 존재론적 지평의 문제(2절)와 이와 관련해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의미(3절)가 분석된다. 감정에서는 칸트 미학에서 감정의 의미를 살펴보고(1절), 이와는 구별되는 존경에 대한 칸트의 논의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2절), 그리고 칸트의 감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해석(3절)이 논의된다. 3부에서는 칸트가 지닌 주관주의적인 한계와 이와 관련해 예술작품에서 대지(Erde) 개념이 지닌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칸트가 '고대 존재론'에 기반하는 전통적인 존재 이해와 이성중심주의적인 인간 이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1장), 주관성을 포기하는 새로운 사유의 어려움과 예술작품은 '대지'가 고유하게 보존될 때에만 세계를 '열어놓는' 본질적인 힘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2장).
『순수 이성 비판』이 교조주의적인 합리론도 회의주의적인 경험론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철학적 기획이었듯 『판단력 비판』역시 합리주의적 미학과 경험주의적 미학의 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다. 합리주의적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beauty은 대상의 기하학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대상 자체의 성질이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도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장미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모종의 원칙들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다. 한편 경험주의적 미학은 아름다움이 주관적 만족gratification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어떤 표상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주체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순히 판단 주체가 느낀 쾌락sensation에 대해 보고하기 위한 게 아니다. 칸트가 보기에 미적 판단은 주관적subjective이면서도 보편적universal이어야 한다. 먼저 이 주관성이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는 판단이 인지적cognitive하지 않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대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개념concept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미적 판단은 보편적 동의를 요구한다. 미적 판단은 경험주의 미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보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senses은 쾌적한agreeable 것에 관심을 갖고, 이성reason은 도덕적으로 옳은morally right 것 - 선good - 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보니 쾌적함을 좇는 경향심inclination이나 도덕적 옳음을 좇는 존경심respect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까지나 감각과 이성의 관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미taste는 감각이나 이성과 달리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서 그것을 좇도록 부추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취미 판단은 자유롭다. 이론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관심에서 벗어난 취미 판단은 그래서 관조적contemplative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종류의 쾌pleasure가 호의favor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어떻게 주관적이라는 취미 판단이 동시에 보편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 근거가 없다면 주관적 취미 판단은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근거란 것이 개념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순간 취미 판단은 주관성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것을 "인식 일반cognition in general의 가능성을 위한 주관적 조건들의 유희interplay"에서 찾는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일단 지식은 보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성립 가능하기 위해 만족되어야 할 인지적 조건들 - 직관intuition에 주어진 것들을 조합하는 능력인 상상력imagination과 그것을 다시 개념을 통해 조합하는 능력인 지성understanding - 역시 보편적으로 소통가능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미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상은 다름 아닌 이들 인식 일반의 조건 - 상상력과 지성 - 사이의 유희를 일으킨다. (물론 여기에 개념을 동원하는 특정한 인지적 판단은 없다.) 보편적으로 소통가능한 느낌 - 공통감각sensus communis - 을 전제presuppose하기 위한 선험적a priori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근거에 도달한 것은 물론 경험적 관찰empirical observation을 통한 것이 아니다. 선험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에 의한 연역deduction이다. 여기서 미적 판단이 어떻게 필연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공통감각을 전제할 때 우리는 우연적 사실들의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다. 공통감각을 전제할 합당한 이유는 인식 일반의 보편적 소통 가능성이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 보편적 소통 가능성의 조건이 필연적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물론 이 필연성은 개념으로부터 도출해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적 판단이 "논리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apodictic" 것이 아니며 "보편적 규칙의 일례example"로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실례적exemplary이라 불릴 수 있다." 더욱이 공통감각은 우리가 전제한 비규정적 규범으로써 다만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릴 때 의존하는 어떤 가정presumption이 이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공통감각이 내포하는 것은 당위이다. "(…) 우리의 판단이 모든 사람들과 일치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합치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 따라서 공통감은 (…) 단지 하나의 순전한 이상적 규범이다." Fine art must be free art in a double sense: it must be free in the sense of not being a mercenary occupation and hence a kind of labor, whose magnitude can be judged, exacted or paid for according to a certain standard; but fine art must also be free in the sense that, though the mind is occupying itself, yet it feels satisfied and aroused (independently of any pay) without looking to some other purpose.칸트의 미학은 대상에 대한 미적 판단뿐만 아니라 예술 창작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만약에 예술 창작을 규정하는 규칙이 없다면 어떻게 창작 행위를 쾌적함을 좇는 행위나 도덕적 옳음을 좇는 행위와 구별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칸트 자신도 "아름다움에 관한 학science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창작품에 선행하는 규칙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재성genius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다. 천재성이란 간단히 말해 창작을 하기 위한 재능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느 재능과는 달라서 천재는 그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규제받지 않으며 스스로 창작을 위한 규칙을 세운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창작을 위한 규칙은 천재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학이 천재를 밀어내고서 그 규칙을 세우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규칙을 스스로 세우는 천재들이라면 예술의 기능은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 (이 규칙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걸까? 칸트는 이른바 순수 예술과 참여 예술 사이의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우리가 대상의 목적purpose을 표상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지각할 때 바로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form of purposiveness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망치를 지각할 때 곧장 그것의 목적을 표상하게 된다. 무엇을 위하여 망치가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때문에 망치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들판에 떼로 피어 있는 장미를 볼 때 우리는 도무지 그 장미의 목적을 표상할 수가 없다. 왜 하필이면 장미들이 이곳에 이렇게 많이 피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왜 하필 빨간색인지, 왜 이런 달콤한 향을 풍기는지를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as if 이 장미들의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목적의 내용은 여전히 표상할 수 없다. 우리가 장미에게서 합목적성의 형식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이 초월적 주체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한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주체말이다. 이 주체가 갖는다는 공통감각이란 것도 결국 미적 판단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무시간적인 불변자들timeless invariants에 근거해 전제된 것이었다. 우연적 욕망으로부터 미적 판단을 분리시켜 놓은 것은 어찌보면 칸트 미학의 기여라면 기여이지만, 미적 판단과 창작의 가능성의 조건들이 항상 이런 것들이었고 또 이런 것들일 것이라는 식의 생각에 문제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판단을 내리는 현실의 개인들과 판단의 대상이 되는 지금의 표상들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본다. 시간과 역사 속의 이 개인들이 없는 한 미적 판단은 고사하고 그 어떤 종류의 판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판단 주체와 표상들의 역사성은 판단의 가능성의 조건들이 결코 불변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헤겔이 앞서 제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칸트는 주체로 미학의 객관성을 대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객관성이란 것도 기실 주체를 통해 근거지어진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칸트 미학의 탈역사성만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기실 그가 칸트 미학에서 발견한 문제는 '초월적' 주체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초월적 '주체'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예술 작품을 "오로지 작품을 관조하거나 창작하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보았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칸트는 예술 작품이 그 자체 내에 진리 내용truth-content을 품고 있을 가능성을 간과했다. 어쩌면 칸트는 그 자신이 비판했던 경험주의적 미학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에 내재하는 인지적 요소가 결코 창작자의 의도나 관객의 감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바로 이 인지적 요소를 철학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합리주의 미학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을 순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아도르노에게 예술 작품이란 그저 주체에 의해 평가되고 인식되는 무기력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 작품은 그 자체 내에 주관적 계기를 품고 있다. 바로 작품이 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p. 89-127 (Analytic of the Beautiful) Simon Jarvis, "Art, Truth and Ideology," in Adorno: A Critical Introduction (New York: Routledge, 1998): 90-123 (Chapter 4) 킨트의 미와 숭고 아름다움beauty과 숭고sublimity는 물론 적잖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 자체로 쾌pleasure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한 가지다. 쾌락sensation이나 도덕적 옳음moral rightness을 통해 쾌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쾌적한 것들을 지향하는 감각sense의 판단이나 선good을 향하는 이성의 논리적이며 규정적인determinate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지만 양자에 대한 판단이 개념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때 미와 숭고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비규정적indeterminate으로 남기에 명제적 지식을 불리는 데 기여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인식 일반cognition in general의 가능성을 위한 주관적 조건들 - 상상력imagination과 지성understanding - 이 (표상이 주체에게 주어졌을 때) 자유롭게 유희한다는 점에서 미의 판단이 단칭적이고 주관적인 것임에도 보편적 동의를 규범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의 선험적a priori 근거를 찾았다. 단칭성과 주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보편성까지 갖추는 것은 숭고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그 근거를 찾는 방식도 구조적으로는 유사하다. 하지만 분명한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한계 속에서 존립하는 대상의 형식form에 관련된다. 반면에 숭고는 대상 혹은 대상의 자극 내에 무제한성limitlessness이 표상되는 동시에 그 대상이 하나의 총체성totality으로서 사유되는 한에서 몰형식적formless인 대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미는 지성의 비규정적 개념의 현시presentation로 간주되지만 숭고는 이성reason의 비규정적 개념의 현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에서의 만족은 질quality의 표상과 연관되는 반면 숭고에서의 만족은 양quantity과 연관된다"(『판단력 비판』 §23 5:244). 미와 숭고가 전달해주는 쾌 역시 성질이 좀 다르다. 아름다움은 활력을 직접적으로 가져다주며 자극charms이나 유희하는 상상력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숭고의 쾌는 순간적으로 활력이 감소되고 난 뒤에 나타나며 자극과도 양립불가능하다. 숭고의 감정은 어쩐지 엄숙한serious 것이 된다. 상상력은 유희한다기보다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름다운 대상에 우리는 매혹attract된다. 그런데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는 매혹될 뿐만 아니라 반감repel을 느끼기도 한다. 어째서 그럴까? 그 답으로 가는 단초는 이미 제시되었다. 하지만 "미와 숭고 사이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내재적인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물들은 그 형식 내에 합목적성purposiveness을 갖는 것으로 표상된다. 덕분에 우리의 판단력power of judgment의 관점에서 대상들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예정되어predetermined 있는 듯 보인다. 자연적 아름다움은 그래서 만족을 준다. 반면 숭고를 자아내는 대상은 그 형식 면에서 판단력에 대해 반목적적contrapurposive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시 능력 - 상상력 - 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그러나 숭고의 판단이 합목적성의 표상을 전혀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다. 숭고의 판단에서 주체는 대상의 형식에서 반목적성을 발견하지만 이제 더 고차원적인 합목적성higher purposiveness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차원적 합목적성은 미적 판단에서의 합목적성과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대비된다. (1)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미적 판단 자체다. (2) 상상력이나 판단력이 아니라 이성의 관점에서 합목적적이다. 이들 차이점은 계속해서 살펴볼 양자의 다른 차이점들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파악된다.) 칸트는 이것을 더러 우리의 상상력이 "폭력violence" 아래에 놓인다고까지 표현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숭고의 판단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숭고는 몰형식적인 대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던가? 숭고의 감정을 자아내는 것은 감각적 형식sensible form에 담길 수 없다. 그러니 상상력이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나서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개념을 통해 직관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지성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와 더불어 미의 판단이 있었다면 숭고의 판단은 상상력과 이성의 유희와 함께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상상력 그리고 다름 아닌 이성의 유희, 이것은 미와 숭고 사이의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설명해준다. 주체가 미의 판단을 내릴 때에 보편적 동의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감각sensus communis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공통감각을 전제하기 위한 선험적 근거는 인식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들인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에서 발견되었다. 숭고의 판단이 보편적일 수 있는 근거도 유사한 방식으로 마련된다고 했던가? 그렇다. 그 근거는 바로 도덕적 감정moral feeling의 보편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숭고 판단에서 상상력이 관계를 맺는 이성은 주지하듯 도덕적 감정의 보편성을 정초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의 판단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취미taste를 결여하고 있다고 나무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숭고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감정feeling을 결여하고 있다고 나무랄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무엇일까? 칸트의 말이다. "(…) 숭고한 것은 (…) 오로지 이성의 관념들ideas에만 관련된다. (…) 그러므로 폭풍우에 요동치는 광활한 대양은 숭고하다고 불릴 수 없다"(『판단력 비판』 §23 5:245-246). 숭고한 것은 대상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움 역시 대상이 객관적으로 갖는 속성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은 무시무시한 대양의 얼굴을 마주한 자가 직관을 통해 얻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을 갖기게 적절한 기분mood에 빠진다는 것은 곧 마음을 온갖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채운다는 것을 말한다. 숭고는 "자연 내의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다. 오직 마음 안에만 있을 뿐이다"(『판단력 비판』 §28 5:264). 스탠포드 철학 사전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칸트의 미학과 목적론Kant's Aesthetics and Teleology" 항목은 미와 숭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약간의 변형을 가해 싣는다.
II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 칸트의 숭고를 이해하는 데 미와의 비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숭고만을 두고 논의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숭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mathematical 숭고와 역학적dynamical 숭고로 나눈다. 수학적 숭고의 감정은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리는 대상이 주어졌을 때 일어난다. 반면 역학적 숭고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물리적인physical) 무력함powerlessness을 자각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두려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발생할 수 있다. 엄청난 크기와 힘, 그것이 숭고의 감정의 발단이 된다. 상상력이 압도당하거나 스스로의 무력함을 느끼는 일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숭고가 불쾌를 동반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하지만 이 불쾌는 쾌로 반전된다. 칸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의 움직임은 (…) 진동 - 그러니까 하나의 같은 대상에 대한 반감에서 매혹으로의 재빠른 전환 - 에 빗댈 수도 있을 것이다"(『판단력 비판』 §27 5:258). 그러나 이 불쾌는 단순히 쾌로 반전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는 "오로지 불쾌를 통해서만 가능한 쾌"이다(『판단력 비판』 §27 5:260). 그러므로 그것은 "부정적 호감negative liking"이다. 그런데 이 반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먼저 아주 커다란 규모의 것이 경험적으로 주어진다. 절대적 총체성을 요구하는 이성은 이때 상상력에게 그 대상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상상력이 무한the infinite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 엄청난 크기에 상상력이 압도당하고 말았을 때 초감각적 능력supersensible faculty인 이성이 나선다. 우리는 이성은 마침내 전체로서의 무한을 사유할 수 있다. 수학적 숭고에서 불쾌의 쾌로의 반전은 이렇게 일어난다. 상상력을 마비시킬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대상은 대개가 인공물이라기보다는 자연물들일 것이다. (칸트的 숭고의 감정이 자연물을 대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 작품도 숭고의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칸트는 수학적 숭고를 논하면서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나 로마에 있는 聖 베드로의 바실리카를 함께 언급하지만 이것들이 곧 수학적 숭고를 일어키는 대상들의 예로 제시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주 높은 산과 창대한 바다는 수학적 숭고의 예로 적합하다. (미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숭고의 판단 역시 대상의 목적을 표상할 수 없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동물들은 숭고의 감정을 일으킬 수 없다. 칸트는 동물들의 존재 목적을 표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역학적 숭고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천둥을 몰고오는 구름, 화산과 태풍과 같이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이 몰고 오는 위험에 처해있다면 숭고의 감정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 그래서 사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 가능하다. "[자연의] 불가항력은 자연적 존재로서 간주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물리적인 무력함을 자각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판단을 내릴 능력과 자연에 대한 우월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 인간이 [자연의] 지배에 굴복함에도 우리 인격 내의 존엄성은 떨어지지 않는다"(『판단력 비판』 §87 5:261-262). 인간의 다른 능력이 감당할 수 없었던 크기와 힘이 불쾌를 일으킬 때도 이성은 여전히 그 크기와 힘이란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불쾌는 쾌로 반전된다. 이것이 숭고다. 결국 숭고란 감정은 이성의 (자연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물이 아무리 커다랗고 강력하더라도 이성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성은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을뿐만 아니라 기실 자연을 넘어선 무엇이니까 말이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p. 128-159 (Analytic of the Sublime) Hannah Ginsbord, "Kant's Aesthetics and Teleolog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4 Eidition), ed., Edward N. Zalta,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4/entries/kant-aesthetics/> 박지용 「칸트의 숭고에 관하여: 미판단과 숭고판단의 연속성을 중심으로」『시대와 철학』 제22집 제2권 (2009): 155-183 |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리,철학 논고에 나타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0) | 2022.04.14 |
---|---|
모나드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0) | 2022.03.31 |
개슈탈트Gestalt 개념의 형성사 (0) | 2022.03.23 |
미셸 푸코의 담론공간 개념과 주체의 문제 (0) | 2022.03.23 |
'배제의 배제'와 '환대',현대와 탈현대의 사회 철학 (0) | 202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