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노 장 과 해 체 론, 개방성의 기원에 대하여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27

노 장 과  해 체 론, 개방성의 기원에 대하여

 

김상환(서울대)

최진석(서강대)

 

 

 

 

노장은 동양의 해체론이고, 해체론은 서양의 노장이다. 서양 철학은 해체론을 발판으로  동양으로 다가오고 있다. 동양 철학은 노장이 있어 서양의 첨단에 손을 내밀 수 있다. 노장은 해체론을 통하여 미래화될 수 있으며, 해체론은 노장과 더불어 탈서양의 꿈을 이룰 수 있다.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분화되어 온 동양과 서양에 대하여 노장과 해체론은 그 만남을 대신하는 견우와 직녀이다. 그러나 이 설레이는 만남의 예식은 조심스럽게 준비되어야 한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도 무릅써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점 때문이다. 첫번째 난점은 노장과 해체론 사이에서 쉽게 관찰되는 유사성에 있다. 이는 그 표면적 유사성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손쉬운 것 앞에서 우리가 종종 범하는 성급함 때문이다. 특히 철학에서 손쉬운 대차대조표는 기만적일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정작 중요한 것이 빠지기 쉽고, 빠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드는 마술도 있다. 두번째 난점은 노장과 해체론 각각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데 있다. 노장은 아직도 그 핵심에 있어 자명하지 않은 사상이다. 해체론은 아직도 충분히 소화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비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이런 경우 비교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런데 이상의 두 가지 난점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하나의 해결은 다른 하나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난점은 ‘노장과 해체론을 어떤 수준에서 상호 비교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그리고 두번째 난점은 ‘노장과 해체론을 각각 어떤 수준에서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문제는 결국 수준, 해석과 비교의 수준, 또는 노장과 해체론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고의 높이다. 이 미지의 높이가 문제라면, 두 사상의 상호 비교는 어떤 필요불가결한 절차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비교란 상호 번역이자 이동이고, 각 사상은 그런 자리 옮김을 통해서만 자신이 도달했던 수준을 대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대상화란 명료화의 조건이다. 우리는 노장이 도달한 사유의 높이에서 해체론적 사유의 수준을, 해체론이 오른 경지에서 노장적 사유의 높이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양자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장에 대하여 이 비교는 道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해체론에 대하여 그것은 차연․글쓰기(기록)․텍스트 등과 같은 용어의 구체적 재연역을 의미할 것이다.

 

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오류의 계보학에서 無名者의 기록으로

 

노장과 해체론의 상호 유사성은 일차적으로 동서양의 사상사 안에서 그것들이 각기 차지하는 위치에서부터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표면이 유가 사상이라면, 서양에서 그것은 플라톤주의이다. 유가적 전통에 대한 대안적 사유가 노장이라면, 플라톤주의에 대한 총체적 대안이 해체론이다. 이런 위상학적 유사성은 내용적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비판과 극복의 대상인 유가 사상과 플라톤주의는 일견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이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分(구분․분석)의 절대화, 正名論, 동일성의 사유, 본질주의, 목적론, 반생성론적 정태주의, 위계의 중시 등에서 동서양의 사상사적 표면이 서로 일치한다. 때문에 노장과 해체론에서 다같이 齊一 사상, 무명자의 체험, 차이의 사유, 반본질주의와 반목적론, 생성론과 변화의 중시 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위상학적 및 내용적 유사성은 이미 여러 가지 비교철학적 작업에 의하여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여 노장과 해체론이 도달한 사고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양자가 모두 가상론이자 오류의 계보학이라는 점에 주목하도록 하자. 즉 그것들은 다같이 칸트적 의미의 선험적 가상론, 니체․푸코적 의미의 계보학과 근거리에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노장과 해체론이 모두 개방성의 기원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일치이다. 모든 개방성에 대한 사유는 가상론이나 계보학과 같은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칸트의 가상론은 논증적 차원의 오류가 있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지성 내재적 착각, 따라서 인간이 본성상 불가피하게 빠질 수 밖에 없는 선험적 가상에 대하여 말한다. 가령 인간의 지성은 시간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생겨먹었다. 그래서 그것이 가상임을 깨달은 이후에도 여전히 시간을 그런 식으로 표상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수평선상의 해가 정오의 해보다 크게 보이는 것이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태양을 지각하는 것과 같다. 칸트는 지성이 독자적으로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신념이 독단적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양육해 온 선험적 가상임을 말하고, 그런 가상적 신념은 논리학을 생성 기관(organon)으로 잘못 아는 착각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했다.1)

 

해체론은 서양 철학사의 기원에 있는 착각, 그러나 이론적 이성의 본성상 피할 수 없는 가상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칸트적 가상론을 계승하고 있다. 해체론의 관점에서 본질주의, 동일성의 사유, 목적론, 중심화된 구조의 추구 등은 그런 이성 내재적 착각,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환원불가능한 욕구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욕구는 진리의 현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으로 향하는 욕구이다. 이 욕구에 의한 착각은 이성이 실수나 부주의때문에 빠지는 오류가 아니다. 이성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그런 욕구와 착각 속에 깊이 침잠하게 된다.

 

니체의 계보학은 이성이 원인, 중심, 기원을 설정하는 타고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계보학이 계보학인 것은 이성의 진리가 어떤 신화화의 결과, 이데올로기적 효과, 그래서 어떤 원근법적 전도와 도착의 산물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성이 내세우는 원인과 기원은 숨겨진 내력의 결과에 불과하고, 중심은 어떤 전도된 주변이라는 것이다. 가령 양심과 영혼은 바깥으로 향하던 인간의 공격성이 내면화된 결과이며, 금욕적 진리 추구는 生(차이와 변화)에 대한 총체적 지배 의지에서, 혹은 감성에 대한 복수심과 평가절하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2) 해체론은 서양 형이상학의 공리적 개념이나 이념이 아직 자명하지 않은 가치 해석을 배후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시대에 속하는 문헌은 이 시대를 초과하는 해석학적 과제를 수반하고 있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니체적 계보학을 계승하고 있다.

 

이런 해체론에 대해서 노장은 가까이 있다. 노장은 진리를 말하되 그것을 상식의 교정과 표면적 진리의 비판 안에서 암시되도록 말한다. 노장적 현상학은 가상론이자 오류의 계보학이다. “大道가 없어지니 仁義가 있고, 지혜가 나타나니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六親이 화목하지 못하므로 효성과 자애가 있게 되고, 국가가 혼란하므로 충신이 있게 되었다”라는 ꡔ도덕경ꡕ(18장)의 문장은 오류의 생성 과정과 진리의 후퇴 과정을 동시에 기술하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할 뿐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한 것으로 알면, 이는 선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有와 無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나게 하며, 높고 낮음은 서로 포함하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3)라는 문장은 오류의 교정과 진리의 발견을 하나의 사건으로 조직하고 있다. ꡔ장자ꡕ의 「제물론」(13장)에 나오는 ‘朝三’의 이야기는 오류의 체험을 진리의 체험으로 반전시키고 있다.

 

노장과 해체론에서 다같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이 오류의 계보학은 물론 이 두 사상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진정한 철학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일 것이다. 과연 진리가 오류로 혹은 오류가 진리로 반전되는 경험 없이 진리의 경험, 진리의 현상학이 가능할까? 착각된 진리의 재등록과 재서술 없이 새로운 진리의 서술이 가능할까? 철학에 대하여 진리는 가상적 진리의 가상성을 교정하고 등재하는 과정 안에서 비로소 기술될 수 있다. 진리란 이러저러한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 준다기보다, 적어도 철학에서는, 오류와 가상에 대한 재인식을 가져다 준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 진리론은 언제나 가상론을 수반한다. 철학적 인식이란 언제나 재인식이다. 이때 가상론이 말하는 것은 ‘진리는 없다’라기보다 ‘그것은 아직 진리가 아니다’이다. 이 부정성은 새로운 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미치는 간접적 효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리와 오류가 동시에 현상할 수 있는 구도가 개방되는 사건의 효과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개방성의 사건 자체, 그 개방성의 기원을 생각할 수 없을까? 우리는 노장과 해체론이 사상사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것들이 도달한 사유의 수준을 이 물음과 결부시켜서 설명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구성적 사유는 회의의 형태를 띤 부정적인 사유에 의해서 시작된다. 단지 시작될 뿐만 아니라 인도되고 범위를 얻고 도약의 계기를 만든다. 가상론은 단지 파괴하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구성적 사유 못지 않게 분류하고 정리하고 논증한다. 파괴 속에서 길을 내고 개척하고 개간한다. 철학적 진리 발견, 구성의 작업은 사유의 범위를 새롭게 열어놓는 이 부정의 작업을 앞세우면서, 그 발꿈치를 뒤쫓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가상론은 단순히 박탈의 노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박탈인 동시에 증여 혹은 선사의 사건이다. 가상론이 선물하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개방성이다. 이 개방성의 증여는 아직 진리의 부여가 아니다. 선사되는 것은 다만 진리의 범위와 수준이다. 가상론이 부여하는 이 범위와 수준에서 진리는 전미래(미래완료)의 시제 속에 숨어 있다. 가상론의 부정성은 앞으로 있어야 할 진리의 자격, 그 위상을 정해준다.

 

노장이 동아시아 존재론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無를 통하여 有 일반을 상대화하면서, 그리고 유가적 정명론의 허구성을 가리키면서, 노장은 동아시아적 사유가 올라서야 할 마지막 높이를 결정해 주었다. 가상론으로서 노장이 선물한 사고의 최고 눈금은 道로서 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도는 아직도 미지의 진리로서, 전미래 시제의 진리로서 남아 있다. 이 도의 전미래성, 그 안에 담긴 풍요한 해석학적 잠재력은 동아시아 사상사의 보고로서, 노장이 실천한 가상론의 증여물이다.

 

해체론 또한 이러한 문맥 안에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해체론은 단순히 一價의 논리에 대하여 多價의 논리를, 동일성에 대하여 차이를, 배타적 이항 대립에 대하여 대리적 보충을, 단순성에 대하여 복잡성과 관계론적 그물망을 대체하는 어떤 주의나 입장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입장은 유사한 형태 안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해체론이 아닌 다른 사조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다. 해체론의 역사적 의미는 그런 유사한 입장의 대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기보다 이 시대의 모든 입장이 도달하거나 넘어서야 할 수준을 표시했다는 데 있다. 해체론은 이 시대의 모든 사유가 포괄해야 할 마지막 범위를 열어놓았다. 해체론, 가상론이자 오류의 계보학으로서의 해체론은 21세기적 사유의 눈금이다.

 

그 눈금은 정확히 언어의 안과 밖,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그어져 있다. 거기서 구성적 사유로서 해체론이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림, 개방성 자체이다. 해체론이 마침내 탐구하고자하는 것은 언어적 합리성의 질서가 시작되는 기원, 그 개방성의 기원과 논리이다. 데리다는 이 개방성의 논리를 ‘구조의 구조성’, ‘차연의 구조’라 불렀다. ‘글쓰기의 경제’도 그 개방성의 기원과 논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에 대응하는 노장의 이름은 무엇인가?

 

가상론으로서 혹은 오류의 계보학으로서 노장과 해체론은 폐쇄된 질서, 고착화되기 쉬운 사유에 대하여 존재론적 개방성의 기원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스스로 개방화하는 사유를 실천하였다. 이런 개방성의 탐구와 실천은 언어의 한계를 지나 그 너머에 이른다. 해체론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로 향하는 이동, 이동을 위한 길내기, 열기의 작업, 열기에 가득찬 노동이다. 언어에 대해서 그 경계는 단순히 끝이 아니다. 언어는 거기서 멈춘다기보다 충격 속에 놓인다. 새로운 에너지를 길어올리며 변형과 재편을 겪으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런 한에서 그 경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 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그 경계는 종속과 소멸의 시작이다. 그것이 언어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언어의 규칙, 그 고착화되려는 질서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역되고 증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체론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어에 행사하는 폭력, 그리고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행사하는 반폭력, 이 두 폭력의 관계, 그 갈등하는 두 힘의 상호 수용과 소비 혹은 지연과 보류에 주목한다. 해체론은 폭력의 경제학이며, 이 경제학을 통하여 존재론적 개방성의 비밀을 보고자 한다.

 

이러한 해체론적 주제로부터 노장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간단한 동작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ꡔ도덕경ꡕ을 열자마자 그 첫면 첫째줄에서 언어의 한계, 그 한계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서 말하는 노자를 읽는다. “道라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개념화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4). 노장의 사상을 개시하는 이 문장은 탈언어적 사태로서의 도와 언어화된 도 사이의 차이를 명시하고 있다. 그 차이는 언어의 본성에서부터 설명되고 있다. 즉 언어 혹은 이름은 규정된 형태의 사물을 기의로 하는 기표이다. 도는 이러저러한 사물도 아니며 더군다나 이러저러한 형상을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기의로서의 도는 임시적으로만 혹은 불완전하게만 기표로서의 도를 통하여 지시될 수 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이 도로 지칭되는 사태에 이르러 한계에 이른다. 그리고 노자의 명제는 이 한계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틈이 모든 언어적 기호, 모든 이름 속에 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名可名, 非常名”은 그렇게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기표와 기의의 정상적 결합이 와해되고 그 사이에 자꾸 벌어지는 틈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노자의 첫번째 명제는 규정성을 띤 이러저러한 사물과 (언표 불가능한 기의로서의) 도 사이의 차이 안에서, 그 차이를 근거로 도를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차이를 강조한 서양 철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여전히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차이에 해당한다. 언명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언명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존재’라 적으면서 말소 표시(×)를 그 위에 덧붙였다. 존재는 이름을 통해서 규정할 있는 어떤 것, 정해진 본성을 지닌 어떤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말소 표시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의 말소로 그치는 것도, 나아가서 단순히 부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5)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스스로가 자기 은폐적이며 자기 말소적이다. 존재는 스스로를 자기 은폐와 말소로서 드러낸다. 즉 존재자를 개방하는 사건 속에서 존재는 존재자의 배후로 다시 후퇴하고 숨는다. 언어적 차원의 말소 표시는 탈은폐와 은폐, 드러남과 숨기의 동시성을 말하고자 한다. 존재는 자기 말소 속에서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자 또한 道가 자기 은폐적임을 자주 강조한다. “새끼줄처럼 꼬여 있구나. 그래서 이름 붙일 수가 없고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소위 아무 형상도 없는 형상이자 아무 모습도 없는 모습이다. 이런 상태를 惚恍이라 한다. 앞에서 기다렸다 맞이해 보지만 그 앞모습을 볼 수 없고, 뒤에서 따라가 보지만 그 뒷모습을 볼 수 없다.”6)는 말이 나, “도는 이름 없는 데에 숨었으나 오직 도만이 잘 빌려주고 잘 이룬다”7)는 말이 또한 그것이다. 장자는 그러므로 “참주인(眞宰)이 있는 것 같은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그 작용을 통해 믿음이 가는데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 진짜 있는 것인데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구나”8)라고 했고,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9)고 했다. 도는 이런 자기 은폐성 때문에 이름을 통하여 명시하거나 노출시킬 수 없다. 따라서 노자의 첫 문장은 ‘도’라고 쓰면서 그렇게 쓰여진 말을 다시 지운다. 지우기 위해서, 쓴 것을 다시 지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글은 지우기의 과정일 때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에 그친다면 노장의 문헌, 나아가서 노장의 사상은 있을 수 없다. 노장의 사상이 어떤 사상인 것은 그들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언어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고, 쓸 수 없는 것을 쓰고자 했다. 말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쓸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사이, 그 사이가 노장의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는 장소, 장소라 할 수 없는 장소이다. 무명자의 기록이 노장 사상의 모태라면, 데리다 또한 끊임없이 무명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적는다. “아직 이름할 수 없는 것(l'encore innomable), 그것이 어떤 종류도 아닌 종류로, 무형의 형태로, 해괴한 畸形과도 같은 무성적이고 유아적이고 끔직한 형태로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있다.”10) 해체론은 이 기형적 무명자의 언어 내적 도착을 알리는 기록이다. 그러나 마치 헤겔의 변증법이 논리학적 사태인 동시에 존재론적 사태이듯이, 데리다적 의미의 기록은 언어적 행위인 동시에 존재론적 사건, 개방성의 발현이다. 기록은 무명자의 언어 내적 도착 자체로서, 탈언어적인 것(그러나 이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이 언어 안으로 기-입(in-scription)되고 유입되는 사건이다(ED, 18). 구성적 사유로서의 해체론은 이런 존재론적 의미의 기입(자기 은폐적 도착)에 대한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론적 의미의 기록, 무명자의 언어 내적 기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다보면, 우리는 노장의 道에 대한 기록학적(grammatologique) 해석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미 그런 사변적 차원 이전에서부터 물을 것이다. 글쓰기라니, 노장은 번잡하게 말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가? 多言을 멀리하고11) “不言之敎”(『道德經』2장)를 가르치는 것이 노장 아닌가? 노장의 언어는 “希言”(『道德經』23장)이 아닌가? 노장 철학은 한마디로 無爲論이 아닌가? 따라서 해체론과 다른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떻게 무위에 도달할 것인가? 어떻게 希言에 이를 것인가? 有爲를 통해서, 多言을 통해서가 아닐까? 가령 노자는 이렇게 적었다. “배운다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요, 道를 행한다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냄으로써 無爲(인위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無爲 즉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지만 되지 않는 것이 없다”12).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무위가 직접적으로 도달되거나 주어지는 사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덜어냄을 통해서, 덜어냄의 반복(損之又損)을 통해서, 따라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이르는 경지이다. 우리는 有爲없이 무위에 도달할 수 없다. 무위는 그에 적합한 어떤 유위의 절차 뒤에 주어진다.

 

노자에게서 무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유위가 덜어냄(損)이라면, 데리다에게 그것은 글쓰기, 지우기로서의 글쓰기이다. 글을 통해서 덜어낸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라 하고, 비유하고, 은유와 환유를 동원하고, 풍자하고, 언어 밖으로 향한 예감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글을 통해서 지운다는 것은 삭제와 해소가 아니라 덧칠, 덧붙임이다. 말하기 어렵고 언표불가능한 사태일수록 그만큼 많은 말, 정교하고 숙련된 언어가 필요한지 모른다. 잘못된 말, 통용되는 말, 고착화된 언어, 엉성한 진술을 지우기 위해서 다시 말이 필요한 것이다. 지움과 덧붙임, 덜기와 보탬, 적게 하기와 많게 하기는 하나일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나게 한다”13) 또는 “왜곡되면 온전해질 수 있고 구부려지면 펴질 수 있다”14)의 역설과 모순통합적 논리는 해체론적 글쓰기의 논리 자체인 것이다.

 

노자는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15)고 했다. 덜어냄, 지우기를 통해서 무명자로 복귀한 자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는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다. 무명자로 아직 복귀하지 못한 자, 모르는 사람은 말을 한다. 왜 하는가? 말을 했어도 아직 모자라기 때문이다. 노자는 “배우기를 그치면 걱정이 없다”16)하고,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우라”17)한다. 왜 絶學이고 無學인가? 배울 만큼 배웠기 때문이고,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어린아이 상태로, 질박함으로, 무극으로 복귀”18)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귀는 덜어냄, 덜어냄으로서의 쌓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말소하는 글쓰기, 그것이 복귀의 길, 언어적 행위로서의 철학이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철학의 저편으로, 어떤 순수한 경험, 무명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철학을 초과해가려는 모든 시도마저 역시 이 언어의 길, 글쓰기의 길을 피해갈 수 없다(ED, 190-191). 적어도 현대인에 대하여, 노자가 말하는 ‘복귀’란 언어적 절차, 자기 말소적 글쓰기의 과정이다. 그 과정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希言과 無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희언과 무언은 단순히 언어의 부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말과 말 사이의 (말 아닌) 말, 행간의 말, 여백의 언어일 것이다. 황홀한 말, 그 여백의 언어를 장자는 치언(卮言)이라 했다. 여백, 말의 바깥이 드러나는 말, 그것이 희언이고 치언일 것이다. 희언과 치언, 그 황홀한 말 안에서 드러나는 (말 아닌) 말, 말의 바깥이 무언일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그저 많은 말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말, 언어의 잠재력을 회집하고 소진하며 탕진하기까지 하는 말, 언어를 통하여 언어의 한계를 접촉하는 말, 말의 폭력성을 제압하는 장인적 숙련성 없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장은 침묵의 사상도, 언어의 포기도 아니다. 다만 희언과 치언에 이르는 극치의 언어, 무언의 여백을 기록하는 글쓰기의 황홀경이다. 칼쓰기의 황홀경, 장자는 소잡는 庖丁의 말을 빌려 이 황홀경을 기술을 넘어선 상태, 그러나 기술의 숙달을 통해서 기술보다 멀리 간 상태라 하지 않는가. 그것이 道라 하지 않는가(『莊子․養生主』).

 

                 II. 分․形․名의 삼위일체와 그 바깥:

                     天網 혹은 텍스트 존재론

 

데리다의 해체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글쓰기 사상, 기록학(grammatologie)이다. 첫째, 해체론은 작가적 글쓰기의 추구라는 점에서, 언어의 바깥과 여백을 언어의 안쪽에서 드러나게 하는 글쓰기, 다시 말해서 다언을 통하여 희언과 치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록학이다. 둘째, 글쓰기, 기-입은 이미 말한 것처럼 존재론적 사태이다. 언어화된 세계, 언어적 질서의 영역에 대하여 그 안과 밖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과 경제, 그 영역의 닫힘과 열림의 구조,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개방성의 기원을 서술하는 것이 기록학이다. 기록학으로서의 해체론은 따라서 존재론적 현상학과 비슷한 장소에 서 있다. 우리는 또한 이 기록학으로서의 해체론이 노장의 道論과 같은 장소에 서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이중적 의미의 해체론적 글쓰기에 대해서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즉 기입은 폭력적이다. 무명자는 언어적 질서의 사태 안으로 들어올 때 그냥 오지 않는다. 저항을 받고, 그러나 그 저항을 물리치면서, 충격을 가하고 전복하면서, 그러나 저항에 의하여 다시 좌절되고 난파되면서 들어온다. 무명자가 언어 안에 내는 길, “그 길은 깨어지고 부서지고 분쇄되고 [하면서] 트인다”(ED, 298). 이 기-입의 사건은 그러므로 이중적으로 폭력적이다. 먼저 무명자가 有名者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있다. 그리고 유명자가 무명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있다. 기입, 기록, 글쓰기는 이 상반된 폭력의 경제학이다. 이 폭력의 경제학 속에서 언어적 질서는 초과되고, 충격 속에서 변형되거나 재편된다. 그와 동시에 무명자는 그 기입의 과정에서 왜곡되고 오역되고 훼손된다. 급기야 행간의 울림, 여백의 흔적만 남기고 사리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이 두 폭력 사이의 관계, 이 폭력의 경제학을 다만 파괴론으로만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폭력의 경제학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경제학은 먼저 언어적 질서, 그 질서 안의 유명자로 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파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해부하기 위해서이다. 소잡는 포정처럼, 그가 소의 뼈마디와 근육들 사이에서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구니에 칼을 밀어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댔던”19) 것처럼, 해체론은 글쓰기의 폭력성을 언어적 질서의 마디에, 名(기표)과 유명자(기의) 사이의 틈에, 그 사이에서 자꾸 넓어지는 텅빈 허무에 기입한다. 도입하는 것이다. 이후 해체론은 폭력의 경제학을 통해서 언어적 질서의 열림과 닫힘, 그 개방성의 구조, 그 구조의 구조성을 성찰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건 혹은 존재의 발현(Er-eignis)이라는 이름 아래 하이데거가 몰두했던 존재의 탈은폐와 은폐, 개방성의 주제가 보다 정교한 수준에서 언어화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먼저 폭력의 경제학인 해체론적 기록학의 첫번째 측면, 그 해부학적 측면에 주목하자. 그리고 이로부터 노장의 해체론적 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해보자. 『도덕경』에서 언어의 폭력성을 표현하는 문장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구절이 좋은 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글자를 붙이자면 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을 지어 大라고 한다.”20) 도는 원래 탈언어적 사태이다(『道德經』1, 32, 34장). 도라는 말은 강제로 가져다 맞춘 이름에 해당한다. 노장의 사상은 이 도의 경우에 노출되는 언어의 폭력성, 언어 일반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또한 제압하기 위해서 있다. 그러나 그 제압은 여전히 언어에 의해서, 언어의 폭력성을 이용하면서 도모될 수밖에 없다. 담론하는 자는 담론의 폭력성을 고발할 때조차 그 담론 내재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폭력성은 철학적 행위이든 그 밖으로 향한 이행이든 모든 언어적 행위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ED, 172-173, 190-191). 문제는 얼마만큼 그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그 폭력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는가, 얼마만큼 최소화하되 최대의 효과를 내는가에 있다.

 

왕필은 위에서 인용된 노자의 말에 이런 주석을 붙였다. “저 名은 그로써 형체를 규정하는 것이고, 字는 그로써 대략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 [글자가] 정해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눔이 있으며, 나눔이 있으면 그 지극함을 잃는다.”21) 이 구절을 통해서 유가적 정명론의 언어철학적 배후가 표명되고 있고, 표명되는 동시에 비판되고 있다. 왕필은 『老子指略』에서 더 분명하게 적었다. “무릇 이름이란 형상에서 생겨나며, 형상이 이름에서 생겨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이 있으려면 반드시 이러한 형상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형상이 있으려면 또한 그러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22) 즉 사물은 특정한 규정성(定形)을 띠고 있고, 이 규정성은 특정한 구분법(分)에서 비롯되며, 이 구분법에 의해서 결정된 규정성이 이름(名)의 근거이다. 한마디로 이름할 수 있는 사물의 세계에서 分․形․名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유가에서 믿는 것만큼 이 삼위일체는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 노장의 생각이다. 그 한계가 드러나는 탁월한 경우는 도라는 명칭이다. 여기서 도라는 이름, 나아가서 이름 일반의 강제성과 폭력성, 그 인위성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노출되고 있는가? 정명론의 삼위일체 사이의 마디마디에서, 그 삼위일체의 각 부분을 뒤흔들면서 표출되고 있다. 노장의 해체론적 면모는 이 흔들리는 삼위일체의 분해로, 그 삼위일체의 가상성을 주제로 한 오류의 계보학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점을 分․形․名의 각각에서 확인해 보자.

 

1) 分과 形의 해체: 하향적 초월론으로

 

유가 철학은 신분의 위계적 질서를 중시하고, 이 위계적 질서를 우주론적 질서로 소급시켜서 선험화했다. 이런 선험적 구분론에서 正名論이 나왔으며, 유가적 親親의 논리와 禮 사상이 거기에서 근거를 찾고 있다. 반면 노장은 선험화된 유가적 위계 질서를 부정하고 변화와 생성의 존재론을 추구한다. 노장의 해체론적 성격은 이 관계와 생성의 존재론이 수반하는 비판적 효과로서 성립한다.

 

그 비판적 효과는 일차적으로 유가적 구분론의 무근거성으로 향한다. 이 구분론의 경험적 바탕은 언어적 질서이다. 이 언어적 질서는 상호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이항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위, 선/악, 안/밖, 실재/가상, 불변/변화, 보편/특수 등 무한히 이어지는 양항성이 언어적 질서를 구조화하고 있다. 정명론은 이 대립적 양항 각각의 의미가 그에 상응하는 실재와 본질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두 항이 서로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우열 관계에 있다고 간주한다.

 

반면 노장은 두 항이 상호 보충적인 待對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성의 사건에 참여하는 대등한 요소로 본다. 나아가서 그런 이항대립적 구분 자체가 작위적이고 임시적이며, 아직 자명하지 않은 요구와 의도에서 비롯되는 결과임을 지적한다. 즉 有/無, 善/惡, 美/醜, 是/非, 長/短, 高/低, 音/聲, 前/後, 喜/怒는 서로 교직․교차․전이된다(『道德經』2장). 또한 曲/全, 枉/直,  窐/盈, 幣/新, 少/多가 서로 맞물리고 반전되는 관계에 있다( 『道德經』22장). 이런 대대와 상생 그리고 역전의 논리,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은 데리다의 해체론이 수반하는 여러 가지 표현법, 가령 파르마콘․대리적 보충․결정불가능성․이중물림․파에르곤 등등과 같은 용어로 번역될 수 있다.23) 이런 번역을 통하여 일가적 사유가 아닌 다가적 사유, 동일성의 사유가 아닌 차이의 사유로서 노장 사상이 지닌 특성이 더욱 명료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배타적 이항 대립의 질서에서 대대적 상생의 논리로, 모순 통합적 이중물림의 사태로 향하는 노장 사상은 抱一(『道德經』22장)의 지점에 이른다. 得一(『道德經』39장)로서 표현되기도 하는 이 노자의 포일론은 장자에 이르러 齊物論 혹은 齊一論으로 발전한다. 형상적 본질로서 항구화되는 규정성, 배타적으로 고착화된 규정성의 배후에서, 혹은 그 뿌리에서 모든 사물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포일론이다. 그러나 노장적 의미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든 특수성과 개별적 차이를 추상한 보편자를 뜻하는가? 포일론 혹은 제물론에 대한 해석은 노장적 의미의 一에 대한 물음을 요구한다. 특히 ꡔ도덕경ꡕ(42장)의 “道生一”이란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道와 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단 포일론을 形에 대한 해체론적 비판의 배후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한에서 노장의 一은 어떤 무규정성의 사태, 모든 규정성이 상대화되거나 무력해지는 무차별성의 사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하여 읽을 수 있다. “보려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夷라고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希라고 하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므로 微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져서 캐물을 수 없으므로 섞여서 하나이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새끼줄처럼 꼬여 있구나. 그래서 이름 붙일 수가 없고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소위 아무 형상도 없는 형상이자 아무 모습도 없는 모습이다. 이런 상태를 惚恍이라 한다.”24)

 

이 문장의 내용은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구절이 무규정성의 사태로서의 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이 일은 초감성적 사태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초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초개념적 사태, 초언어적 사태이다. 개념적 구분법, 형상적 구별이 불가능한 혼합(故混而爲一)의 사태, 이름 붙일 수 없는(不可名) 관계적 사태이자 轉化의 사태인 것이다. 초감성적이자 초개념적이라는 의미에서 一은 초월적이다. 둘째, 이 초월적 무차별성은 無狀之狀, 無物之象이다. 一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물로 돌아간다는 것(復歸於無物)을 말한다. 그러나 이 때 무물이란 사물의 완전한 소멸과 부재, 현존성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형상, 규정성, 구분가능성의 부재를 뜻한다.

 

왕필은 노자의 無物에 대하여 이런 주석을 붙였다.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려 하니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하였다. 또 恍惚에 대하여, “(무어라고) 정할 수 없다”25)고 했다. 이런 감동적인 주석은 그러나 노자의 무물 혹은 무를 만물의 생성론적 원천으로, 어떤 지고한 본체로서 간주하도록 부추긴다. 만일 노자의 무가 사물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상위의 본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서양의 해체론보다는 부정신학적 전통의 神論에 접근시켜야 할 것이다.

 

부정 신학은 신의 무규정성과 언표 불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신이 개념적 언어로 표현 할 수 없을만큼 과도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다. 신은 너무도 무한하여 말로 규정하면 이미 그 무한성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부정 신학은 신을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없고 다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규정할 수 있다고 간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월성을 초과의 사태로 파악한다는 것은 플라톤 이래의 서양 사상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 부정 신학은 그런 상향적 초월론의 한 정점일 뿐이다. 서양 철학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감성적 경험의 내용을 초과하는 개념적 실재성을 이데아로 지칭했고, 이 이데아계의 정점에 善의 이데아를 두었다. 태양에 비유되는 이 최고 의 이데아는 최대의 실재성, 존재자 일반을 능가하는 그런 과도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좋음은 [단순한] 존재자(ousia)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 존재자를 초월하여 epekeinas tes ousia 있다”.26)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상위의 본질, 상위의 원인, 상위의 기원일수록 하위의 것보다 더 큰 지위와 더 많은 힘, 더 많은 실재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플라톤주의적 초월론은 기독교 안으로 유입되어 신을 최고의 존재자로, 개념적 언어를 넘어선 무한한 실재성을 지닌 존재자로 파악하는 부정 신학으로 이어졌다.

해체론 또한 무명자, 규정할 수 없는 것, 언표 불가능자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 언표 불가능자는 과도한 실재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소한 실재성을 지녀서 언표할 수 없다. 언어, 이름 안에 담기에 너무 미미하고 하찮은 실재성, 그 빈곤하기 짝이 없는 실재성 때문에 무명자인 것이다. 해체론적 무명자는 초라한 것, 겨우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해체론에서 초월적인 것은 위에, 높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낮고 낮은 곳에 숨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해체론적 초월론은 하향적 초월론이라 할 수 있다.

 

겨우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차라리 무(“無物”)라 해야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이 노장의 무명자가 아닌가 한다. 적어도 ꡔ도덕경ꡕ의 綿綿若存이란 표현은 그런 하향적 초월성의 경험을 담고 있음이 틀림없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玄牝이라고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고 하는데 겨우겨우 이어지는 모습이 마치 있는 무엇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작용은 무궁 무진하다.”27) 겨우겨우 존재하는 듯 한 것, 그러나 죽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일하나 힘들이지 않고 억지로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무궁무진한 작용력을 갖는 것이 노장의 무명자이다. “유약함이 道가 작용하는 모습이다”28)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으며, “無名의 소박함”29)이란 말 또한 하향적 초월성을 암시한다. 이 질박성(樸)은 때로 작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도는 항상 이름이 없으니, 그 질박하기가 비록 자잘한 듯 하지만, 천하가 그것을 신하로 부리지 못한다”30)는 말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참고 : 장자, 知北遊, 22장)

 

무명자는 작은 것이고 적은 것이며 있으나마나 한 듯이 보인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지배될 수 없고 종속되지 않으며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를 입으로 표현하면 담담하여 맛이 없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써도 다하지 못한다”31)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것, 어디에나 미치고 막힘 없는 것, 그것이 미약한 무명자의 본성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32)는 노자의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노장의 무명자가 유약하다면, 해체론적 무명자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약하다. 데리다는 자신이 발견한 무명자, 거의 무에 가까운 이 궁핍한 실재성의 소유자를 유령이라 불렀고, 동시에 “만능열쇠passe-partout”의 소유자라고 불렀다.33) 왜냐하면 모든 개념적 구분법에 의한 경계선과 장벽, 이론적 건축물을 조직하는 모든 방문들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때문이다. 노자는 上善과 道를 물에 비유할 때34) 유사한 것을 말하고 있다.

 

2) 名의 해체: 天網과 텍스트

 

유가적 전통은 도덕적 법칙, 그 법칙의 실재성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옹호해왔다.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추구되고 방어되어 온 것은 이론적 법칙의 실재성, 개념적 실재성이다. 이 두 전통 모두에 대하여 이름은 언제나 실재가 있어 의미를 지닌다. 이때 실재는 완결된 규정성과 형상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 말은 그 규정성과 본질에 대한 일치를 조건으로 합당하게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서양에서 이런 언어관에 도전한 것은 규약론자들이다. 이들은 말을 사용자들의 약속에 의해서 생긴 자의적 기호로, 혹은 관습의 산물로 본다. 노장과 해체론은 단순히 규약론인 것은 아니지만, 말을 (말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재현이나 반영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규약론과 유사하다.

 

우리는 실제로 장자에게서 유사 규약론적 언어관이 나타나는 대목을 읽을 수 있다. 가령 이런 구절이다.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는 본래 그럴 까닭이 있고,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하나도 없다.”35) 이 문장은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적 관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유사 규약론적이지만, 규약론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사물은 본래 배타적인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 이렇게 불러도 되고 저렇게 불러도 되는 대립적 성격이 사물에 공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자의적 관계는 이런 사물의 다의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필연적 일치와 통일성은 사물의 존재론적 본성, 그 다성적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성취할 수 없는 꿈이다. 명실일치(名實一致)란 이런 불가능한 꿈, 그 일치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 가상일 뿐이다.

 

장자에 의하면, 사물의 이런 다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분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이 성립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물 사이의 차이짓기와 대조 효과, 데리다적으로 말하자면 차연적 관계 때문이다. “사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의 입장에서 출발하면 ‘이것’을 볼 수 없고 ‘이것’의 입장에서라야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方生이다.”36) 즉 사물은 그 자체로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다만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사물이 이것이거나 저것이 되는 것은 다른 사물과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 자체 안에 근거를 둔다고 생각하기 쉬운 규정성은 사물 사이의 관계, 그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노장의 관점에서, 이 관계의 그물망 없는 사물의 개체성, 그 개체의 언어적 규정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가의 선험적 가상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장자는 사물의 언어적 규정성을 낳는 관계적 차이짓기, 그 차이짓기의 구조를 方生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각 사물의 개념적 규정성을 그것을 낳은 방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였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聖人은 한정된 근거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37)

이 대목에서 ‘하늘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개체의 규정성을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 함장적 존재로 보지 않고 전체의 구조, 그 그물망의 구조 안에 위치시켜 놓고 본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노자에서 天網, 즉 하늘의 그물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 천망을 개체적 사물이 놓여 있는 관계적 그물망으로 새긴다해도 커다란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무리가 따른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은 노자의 본뜻에 가장 근접한 해석일지 모른다. 노자는 “萬物竝作”이라 했고(『道德經』, 16장),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긴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38)고 했다. 성긴 듯 하나 놓치는 것이 없는 하늘의 그물, 그 천망은 노자가 개체적 사물의 규정성을 결정하는 존재론적 구조, 그 차이짓기의 구조로서 발견하는 관계적 사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일자(故混而爲一)와 무로의 복귀(復歸於無物)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일자로서의 무 혹은 무로서의 일자를 “새끼줄처럼 꼬여 있구나. 그래서 이름 붙일 수가 없다”(繩繩不可名)고 했다. 사물의 사물됨을 다른 사물로부터 고립된 그 사물 자체 안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물의 개체적 규정성을 사물 전체의 차이 관계 안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노장은 그 사물 전체의 차이 관계를 고정된 구조로 보지 않고, 다만 그것을 한정 불가능한 유동성의 사태로 보았다.

 

이런 노자의 天網의 존재론, 그리고 장자의 方生의 존재론 안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치, 기호의 통일성은 자의적이며 임시적이다. 정명론적 일치, 分․形․名 사이의 삼위일체는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분할과 재조합을 기다리고 있다. 노장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언어 존재론, 그것이 말하는 언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는 오늘날 서양에서 소쉬르 이후의 철학을 통해서, 특히 데리다를 통해서 전개된 언어 철학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혁명적인 기호 개념을 떠받치는 두 자기 테제를 차연이라는 용어 안에 담았다. 또 소쉬르적 구조 개념을 해체론적으로 비판하여 텍스트라는 새로운 구조 개념에 이르렀다. 소쉬르의 두 테제란 자의성의 테제와 차이의 테제이다. 자의성의 테제에 따르면,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그 관계는 관습을 비롯한 공동체의 역사 문화적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양자의 유사 관계나 어떤 내적 일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쉬르는 기호의 발생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우연하고 임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한번 성립된 양자의 관계는 변하기 어렵다고 본다. 소쉬르 이후의 저자들, 푸코, 보드리야르, 바르트, 데리다는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차이의 테제에 따르면, 기표 사이의 차이짓기와 대조 효과가 기의 발생의 바탕이다. 먼저 기호 이전의 기의가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위계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가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기표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호의 기능과 의미화는 기표 전체 사이의 관계, 그 차이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기의, 그것들 간의 구분과 상호 위상은 기표 차원의 차이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는 일단 생성된 기호에 대하여 기표와 기의는 동전의 양면 혹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나눌 수 없는 일체를 이룬다고 본다. 양자는 동등한 자격에서 기호를 구성하는 두 요소라는 것이다. 라캉 이래의 저자들, 특히 보드리야르, 바르트, 데리다는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쉬르는 이미 생성된 기호 체계에 어떤 선험적 구조의 자격을 부여한다. 발생 과정은 임의적이나 이미 구조화된 체계는 항구적 지속성을 띠면서 기호 교환의 질서를 선험적으로 조건짓는다는 것이다. 소쉬르가 랑그라 부르는 이 선험화된 구조, 안정되고 닫혀진 이 기호학적 구조는 데리다의 해체론을 거치면서 변형된다. 중심이 없고 불안정하면 열려 있는 형태로 탈바꿈된다. 다시 말해서 해체론적 의미의 구조는 끊임없는 생성 속에 존재한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 미끌어지고 기표 차원의 은유와 환유는 기의에 의해서 통제할 수 없는 기호의 교환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탈적 기호 교환은 구조적 질서를 불안정 상태에 빠뜨린다. 데리다는 이런 해체론적 의미의 구조를 텍스트라 불렀고, 이를 통하여 구조의 열림과 닫힘의 논리, 구조의 구조성을 탐구 주제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노장에게서 天網, 繩繩, 方生 등과 같은 말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존재론적 직관은 데리다의 열린 구조성, 차이의 관계망인 그 텍스트와 대칭적 번역 관계에 있다. 데리다에게서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면, 노장에게서 천망 혹은 방생의 바깥은 없다. 모든 것은 그 차이의 그물망 안에 위치하고, 그로써 각기 자신의 임시적 규정성과 정체성을 획득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이 텍스트 일원론으로 향한다면, 노장 또한 천망의 일원론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노장이 말하는 得一이나 齊一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노장적 의미의 일이란 모든 특수성과 개체성이 소멸해버린 보편자, 추상적 일반자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특수성과 개체성을 낳되 거두어 가고, 사물을 더불어 있게 하되 대대적 관계 안에서, 배타적 차이가 아니라 상생적 차이 속에서 있게 하는 어떤 거대한 문맥, 그러나 스스로 변화해가는 그물망을 말한다. 데리다적 의미의 텍스트를 말하는 것이다.

 

Ⅲ. 道의 의미:

개방성의 기원 혹은 어떤 접경적 경제

 

노장은 복귀의 사상이다. 無物, 無極, 齊一로 돌아가는 것이 노장적 사유의 궤적이다. 그러나 복귀한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노자는 “反이 道의 움직임이다”39)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의 운동(력)을 지칭하는 이 反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노장에게서 이 복귀와 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위에서 노장적 의미의 복귀를 단순한 추상화, 일반화, 보편자로 향하는 회귀로 새길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특수성과 개체성의 환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사물이 자신의 개체성과 특수성을 획득하고 향유하는 天網, 方生, 萬物竝作의 사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가는가? 노장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은 그 복귀가 글쓰기를 통한 복귀, 말소적 기록으로서의 복귀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질박함(樸)으로의 복귀, 그 귀착은 가상, 오류, 편견, 허술한 말, 서투른 多言, 불완전한 지식을 지우고 덜어내고 옮겨놓는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해체론적 의미의 복귀란 해석학적 행위이다. 해체론적 위상의 노장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해석학, 무명자로 돌아가는 해석학, 덜어내기 위해서 보충하는 해석학이다. 복귀란 그런 이중적 의미의 해석학적 복귀이다.

 

이 복귀란 그러므로 플라톤적 회상 혹은 회귀가 아니다. 플라톤적 회귀는 이미 완결된 모습, 충만한 내용, 현재였던 과거의 재현재화이다. 그것이 이데아의 인식이자 상기인 것이다. 노장의 복귀를 보편자로 향하는 회귀로 새길 때, 우리는 그것을 플라톤주의적 구도에서 이해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노장의 一, 無極, 나아가서 道를 어떤 변함 없는 실체, 영원한 본체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노장의 道에 대한 새김은 노장적 의미의 복귀에 대한 이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장 사상의 핵심인 道의 의미를 위하여 먼저 복귀의 의미를 정확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해체론, 특히 그의 텍스트론은 노장적 의미의 복귀를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는 어떤 완결된 구조와 의미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텍스트의 구조와 의미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구조주의적 구조처럼 해석학적 문맥을 벗어난 초월적 기의가 아니다. 그 구조와 의미는 탐구와 회상 이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와 회상 자체에 의하여 생산된다. 이 생산이 해체론적 의미의 해석이다. 데리다가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진리 혹은 실재의 시제이다. 즉 의미는 완료(현전적 과거)의 시제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해석학적 현재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산출되는 특이한 시제, 전미래(미래 완료)의 시제 속에 존재한다. 의미는 事前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事後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장의 복귀를 이런 문맥 안에서 새겨야 할 것이다. 복귀의 지점, 그것은 無極이자 齊一 혹은 無物이자 齊物이 경험되는 곳이다. 우리는 그것이 天網, 方生이라는 것, 萬物竝立과 繩繩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사물 사이의 상생적 차이 관계, 그 관계의 그물망이 복귀를 통하여 도달하는 사태이다. 그러나 이 그물망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노장을 해체론적으로 연역하자면 천망은 복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귀를 통해서 비로소 모습을 얻으며, 복귀의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한다. 복귀란 해체론적 의미의 글쓰기, 말소적 글쓰기, 다시 말해서 지우기 위해서 덧붙이고 보완하는 글쓰기이다. 이 글쓰기에 의한 사후적 보충 없이, 그 복귀 속에 동원되는 해석학적 규칙이나 문법 없이 천망 또한 어떤 어림할 수 있는 사태로서 현상하지 않는다.

 

데리다를 인용하자면, “소쉬르를 따라서 기표와 기의를 동전의 양면으로서만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원초적 글쓰기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동전 자체의 바탕면과 재질을 산출하여야 한다”(ED, 311). 글쓰기란 단순히 언어(기표) 이전에 존재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서술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기표는 물론 기의를, 나아가서 양자의 바탕과 결합 관계를 생산하고 구성하는 과정이다. 노장의 복귀는 그런 원초적 글쓰기, 천망의 질서를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글쓰기이다. 이 사후적 구성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천망의 질서, 그런 고정된 텍스트는 없다. 다시 말해서 “다른 곳에 떨어져서 기록되어 있는 현전적 텍스트, [해석 혹은 글쓰기의] 노동을 유발하면서 그 노동에 의하여 아무런 변모도 겪지 않는 현전전 텍스트, 그 스스로에게 외면적이고 그 자신의 표면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화의 운동을 유발하는 그런 현전적 텍스트는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현전적 텍스트란 없으며il n'y a pas de texte present en general, 현재적 과거의 텍스트, 현재였다가 과거화된 과거적 텍스트는 없다”(ED, 313-314). 노장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복귀의 시제와 양태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는 일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항구적인 천망은 없다. 하늘의 그물망은 복귀하는 자의 언어, 복귀하는 자의 사고 범주와 수준, 복귀하는 자가 걷는 길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현상한다. 無物, 無極, 齊一, 樸은 언제나 자기 동일적인 그런 보편적 일자가 아니다. 복귀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복귀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변화하는 그런 일자이다. 따라서 그것은 無狀之狀이요 無物之象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道란 무엇인가?  노장의 道는 천망으로서의 일자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노자는 “道生一”이라 했다. 그리고 이어서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道德經』42장)이라 했다. 그런데 노자는 다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道德經』25장)이라 했다. 도의 존재론적 의미는 이 두 구절의 해석을 통해서, 정확히 말해서 이 두 구절이 각각 말하는 도와 일, 도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왕필은 “道生一”(『道德經』42장)을 무로 말미암아 유가 생성한다는 뜻으로 새겼다.40) “有生於無”(『道德經』40장)란 대목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석에 따르면, 도는 무이고, 무로서의 도가 무규정적 상태의 존재자 일반을 낳는다. 그러나 이런 주석은 ‘어떻게 없는 것이 있는 것을 낳는가’라는 곽상(郭象)식의 반론 앞에 곤경에 처하는 것은 물론, ꡔ도덕경ꡕ의 다른 구절 즉 “有無相生”(2장)과도 배치된다. 이 구절에서 무는 유의 발생적 기원이나 선행 원리라기보다 유와 동등한 대대적 범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와 무는 서로의 차이 관계 속에 성립하는 범주이다. 그 차이 관계가 양자의 발생적 기원이다. 이것은 그 이하의 문장, “그러므로 有와 無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나게 하며, 높고 낮음은 서로 포함하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41)를 보면 더 분명해지는 사실이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모두 “서로”(相)자에 걸려 있다. 사이 관계, 대대 관계, 차이 관계, 그것이 유와 무를 포함한 모든 범주적 규정성을 낳는 모태이다. 이 모태로서의 차이 관계, 그 관계의 그물망에 대한 이름이 천망이자 방생 혹은 무극이자 제일이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도 아니고, 유와 무 사이의 차이 관계로서의 천망도 아니다. 그것은 천망(一)을 낳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낳는다는 것(生)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발생의 순서에서 먼저 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발생의 순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것은 시간적 순서일 수 있고 논리적 순서일 수 있다. 사실적(de facto) 순서일 수 있고 권리적(de jure) 순서일 수 있다. 이런 칸트적 구별 이외에도 하이데거적 구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새로운 구별을 따르자면, 선행성은 존재자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인과적 관계일 수 있고 존재론적 차이를 포함하는 탈인과적 관계일 수 있다.

 

그런데 노장의 일자가 데리다적 의미의 텍스트와 유사한 사태라면, 이 텍스트를 조직하는 원리는 차연이다. 텍스트를 직조하는 논리, 그 논리의 실행 운동이 차연이다. 따라서 이 논리적 사태로서의 차연에 대응하는 노장의 진리는 도가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道가 어떤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 때문이다. “도는 텅 비어 있지만 그 작용은 끝이 없다..... 깊이 침잠해 있는 모습으로 마치 진짜 있는 것 같다.”42) 도가 비어 있다는 것(道沖)은 그것이 질료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은 질료적 내용이 없는 도가 어떤 작용의 사태, 무궁무진한 작용력임을 말하고 있다. 이 작용력은 질료적 내용이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작용력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이 도의 작용을 서술하여 “反이 道가 운동하는 모습이고, 유약함이 道가 작용하는 모습이다”43)라고 했다. 反과 弱의 성격을 띤 도의 운동과 작용은 우리가 더 이상 그 뒤로 소급해갈 수 없는 궁극의 기원이다. 따라서 노자는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나 上帝보다 앞서는 것 같다”44)고 했다.

 

이 구절은 도의 애매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도의 애매성은 ꡔ도덕경ꡕ의 첫 구절부터, 도의 무명성과 은폐성을 언급하는 그 대목에서부터 누차 강조되고 있다. 이 애매한 도는 그러나 어떤 존재론적 선후 관계 안에서 파악될 수 있는 위상을 갖는다. 가령 도는 上帝보다 앞선다. 이 상제는 보통 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우리는 天을 天網으로 새겼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천망보다 도가 앞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앞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道生一”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또한 사실적으로, 생성의 순서에서 선행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어떤 것이 권리적 차원에서 전제되는 원리인 동시에 사실적 차원의 내용을 발생시킬 때, 그것을 선험적(transzendental) 원리라 했다.45) 칸트가 말하는 선험 논리학이란 사고의 규범적 형식이자 내용 생산에 개입하는 형식이다. 노장의 道가 일자(천망)에 선행하는 어떤 논리적 형식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이런 칸트적 의미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도는 천망을 낳는 선험적 형식이다.

 

때문에 도는 천망보다 앞선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 선행성을 하이데거적 의미의 존재론적 차이,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와 선후 관계를 매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도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은 ‘x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무엇됨에 대한 물음은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천망 혹은 無極에 이르러 이미 한계에 도달한다. 천망은 존재자의 최고 범주이다. 이 범주는 권리상 그 무엇됨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이 범주는 그 물음에 의하여 미처 통제되지 않는다. 그 무엇됨에 대한 물음이 강요될 때, 천망 혹은 무극은 有 혹은 無로서, 有無相生과 混成으로서, 따라서 無狀之狀이나 無物之象으로서 경험된다. 무상지상이나 무물지상은 고정된 형상이나 본질적 규정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존재자의 최고 범주로서 천망 혹은 일자는 규정성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규정성으로 한다.

 

천망이 이렇게 권리상 무엇됨에 대한 물음에 종속되는 동시에 사실상 그 물음을 초과한다면, 도는 권리적 차원과 사실적 차원 모두에서 그 물음을 능가한다. 도는 어떤 내용을 지닌 본체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처럼, 그것은 존재하는 것(존재자)과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 모두를 개방하고 相生과 方生 속에 놓이게 하는 것, 그러나 이미 어떤 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 도란 개방성의 발현, 그 기원적 사건에 대한 이름일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一을 낳고, 一은 二를 낳으며, 二는 三을 낳고, 三은 만물을 낳는다”(『道德經』42장)는 문장, 노장의 우주발생론을 담고 있다고 간주되어 온 이 대목은 하나의 동일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연속적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서술에서 생략된 어떤 도약, 하나의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건너뛰는 도약, 그 도약이 전제하는 어떤 단절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 도약은 道와 一의 관계를 말하는 대목(道生一)과 그 이하의 대목 사이에서 일어난다. 바로 그 곳이 단절 혹은 심연이 자리하는 곳이다. 이 심연의 이전은 도가 존재하는 것 전체에 처음 관계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차원이다. 그 이후는 그런 관계 방식이 성립한 이후의 과정, 존재자가 발생론적으로 분화되고 복잡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단절을 식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문장에서 반복되는 ‘낳다’(生)라는 말을 일의적으로, 단선적으로 새겨온 관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道가 만물 전체, 천망으로서의 一에 관계하는 것을 말하는 -- 道生一의 -- 生은 一에서 만물이 분수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生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生을 ‘낳다’라고 새겨야 한다면, 우리는 전자의 生을 그와 다르게, 그래서 ‘살게 한다’, ‘있게 한다’로 새길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새길 때만 道와 (一을 포함한) 존재자 일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표시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 도의 ‘본성’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도의 본성은 즉 존재자 일반을 천망과 방생 속에 있게 하고 살게 하는 것, 천망과 방생의 공간을 개시하고 개방하는 데 있다. 道란 존재론적 개방성의 기원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노자의 道에 대한 해석을 결정해온 가장 중요한 대목을 고쳐 읽을 수 있다. “反이 道가 운동하는 모습이고, 유약함이 道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천하의 만물은 有에서 생겨나고, 유는 無에서 생겨난다.”46) 왕필이 노자의 道를 무와 동일시한 것은 아마 이 대목의 두 번째 문장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 문장에 주석을 붙이기를, “유는 무를 근본으로 삼아 시작되므로, 유를 온전히 하고 싶으면 반드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47)고 했다. 이 주석은 무를 유의 기원이자, 기원으로서의 본체로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천하만물과 유의 관계(天下萬物生於有)를 유와 무의 관계(有生於無)와 동질적이거나 연속적 관계에 있다고 보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해석은 道를 존재자의 수준에서만 파악하는 발생론적 본체론으로 귀착한다.

 

우리는 천하만물과 유의 관계를 발생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가 천하만물을 낳듯이 무가 유를 낳는다고 보는 견해에는 반대한다. 노자에게서 유와 무는 相生과 方生 혹은 竝作의 관계에 있다. 도는 그런 대대적 관계를 개방하는 사건이자 그 사건의 유사 논리적 측면이다. 따라서 有生於無의 生은 상생과 방생의 의미로, 병작의 뜻 안에서 새겨야 된다. 42장의 生을 이의적으로 새겨야 하는 것처럼 40장의 生 또한 두 가지 의미에서 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목은 “유는 무와 더불어 생겨난다” 혹은 “유는 무와 더불어 있게 된다”로 옮겨야 한다. 유와 무는 도가 개방하는 관계망을 구성하는 최고 범주들이며, 그 관계망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 존재론적 개방성의 기원인 道, 그것은 아직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다만 양자를 비롯한 모든 이항 대립을 서로 엮고 꼬아가는 운동이자 작용일 뿐이다.

위의 대목에서 이 도의 개방화 운동과 작용은 反과 弱으로 언명되고 있다. 弱은 아마 道의 은폐성, 개방성을 낳되 그 개방성 안에 숨어버리는 자기 은폐적 유령성을 말할 것이다. “大道가 널리 작용하는 것이 좌우 어디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만물이 의지하여 생겨나지만 (도는 무어라) 말하지 않으며, 功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만물을 감싸 기르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48)는 진술은 이 弱의 의미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反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相生과 方生, 繩繩과 天網, 對待와 竝作이라는 동적 사태이자 그 사태를 일으키는 운동력일 것이다. 텍스트를 생산하는 운동으로서의 차연, 그 데리다적 의미의 차연이 노자적 의미의 反일 것이다.

 

보통 이 反은 순환의 운동이나 복귀 운동, 또는 반대와 대립의 운동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해체론적 번역은 그 反에서 보다 많은 내용을 길어 올리도록 부추기고 있다. 무엇을 더  길어 올려야 하는가? 차이짓기와 遲延을, 차이나는 것 사이의 대리적 보충과 이중물림을 더 길어 올려야 한다. 反은 차이이자 지연이며 반대 속의 일치이다. 그러나 아직 더 길어 올려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사실 차연이란 단지 존재자 차원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옮기고 있다. 이 차이는 단지 수준, 차원의 차이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운동으로서의 차이, 다시 말해서 존재자의 질서를 개방하는 동시에 그 개방성의 공간 안에서 왜곡, 변형, 소멸하는 운동으로서의 차이,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의 사이-나눔(Unter-schied)으로서의 차이이다. 데리다는 이 차이를 다시 흔적(trace, trait, marque)이란 용어로 옮긴다. 움직이는 흔적(trait qui traite), 걸어가는 흔적(marque qui marche)의 길내기 운동, “길을 지난다기보다 길을 산출하는 흔적의 길내기(itinérant) 작업, 흔적을 그리는 흔적(trace qui trace)의 작업, 스스로 자신의 여정을 열어가는 흔적의 길내기 작업”(ED, 37), 그런 흔적의 움직임은 反이자 復이다. 즉 흔적은 언제나 반복의 흔적이며, 반복을 전제하는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향하는 동시에 뒤로 향하고 뒤로 향하면서 앞으로 향한다(明道若昧, 進度若退 『道德經』41장)는 이중적 의미의 반복-흔적(re-trait)이다.49) 弱으로서의 反, 그 반복과 차이의 흔적, 흔적으로서의 차이짓기가 道의 운동이다. 道는 이 차연적 흔적과 무관하게,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道는 언제나 천하만물의 도이며, 천하만물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그 생성과 소멸을 재표시(re-marque)하는 흔적으로서 존재한다. 도는 흔적 운동(弱)으로서의 차연(反)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 道 위에 있을 수 있는 상위 개념을 지시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50). 이 문장의 마지막 구절,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는 해석상의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문제는 도와 자연의 관계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노자에게서 도가 자연과 동일한 것이거나 자연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이라고 풀이했다.51) 반면 왕필은 노자의 자연에 대하여 “자연은 일컬음이 없는 말이며 궁극의 말이다”라는 주석을 붙였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노자의 문장에 충실하였다. 자연을 도보다 상위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자연이란 무엇인가?

 

권위있는 연구자에 따르면, “노자에 나타나는 자연은 우선 ‘스스로 그와 같다’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도에 내재하는 필연의 힘’이며 ‘도 작용의 자기 전개’이다. .... 그래서 결국 도에 내재하는 理를 자연이라 했다.”52) 이러한 해설은 노자의 도를 (理가 내재하는) 어떤 본체로 보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석을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이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道가 어떤 외재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道가 어떤 내재적 필연성에 의한 자기 전개 운동이라는 사실이다.53)

 

사실 유가 사상은 모든 변화와 생성의 문맥을 벗어나되 그 문맥을 규제하는 어떤 초월적 규칙을 옹호해왔다. 플라톤주의는 그보다 더 분명하게 삶의 세계 밖에, 삶의 세계보다 더 실재적인 어떤 입법적 이상(이데아)을, 어떤 외재적 규칙을 주장해왔다. 이런 옹호와 주장이 외재적 초월론이라면, 노장은 내재적 초월론이다. 이점을 가장 명확하게 지시하는 구절이 “道法自然”이다. 이 구절은 도에서 비롯되는 사물의 생성이 도 이외의 어떤 법칙, 초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향유하는 어떤 영원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의 운동은 자신에 내재하는 절차에 따른다. 그렇다면 그런 내재적 절차란 무엇인가?

 

아마 이것을 풀이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위에서 주석을 붙인 대목일 것이다. “도는 一을 낳고, 一은 二를 낳으며, 二는 三을 낳고, 三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陰을 지고 陽을 품으며, 冲氣로써 조화를 이룬다.”54) 이것이 도에서 비롯되는 존재론적 생성의 내재적 전개 절차이자 형식이다. 들뢰즈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이런 존재론적 생성 과정은 도가 복잡화(com-pli-cation)되는 과정이고, 이때 복잡화란 도를 외면화하고 펼치는 과정(ex-pli-cation)인 동시에 도를 끊임없이 자기 안에 함축하고 보존하는 과정(im-pli-cation)이다.55) 데리다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기-입의 사태, 어떤 규정불가능한 전체의 안과 밖 사이에서 일어나는 힘의 경제, 접경적 경제이다. 도는 존재론적 생성 과정에 대하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이고, 바깥이지만 그 안에서만 존재한다. 도는 그 생성 과정 전체를 초과하지만 그 안으로 재기입되고, 재기입되기 위해서 지연된다. 대리되고 보충되며 따라서 변형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 자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체적 생성 속에 함축된 도의 흔적, 그 자취 뿐이다.

 

노자는 이 도의 흔적을 道紀라 했다. “앞에서 기다렸다 맞이해 보지만 그 앞모습을 볼 수 없고, 뒤에서 따라가 보지만 그 뒷모습을 볼 수 없다. 옛날의 道를 잡아 지금의 有를 다스린다.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으니, 이를 일러 道紀라 한다.”56) 도기란 도의 실마리를 말한다. 옛날의 도가 남긴 실마리,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도의 흔적, 역사와 천지 변화 속에 작용하되 그 작용 속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규칙에 의하여 변형되고 왜곡되고 은폐된 도의 자취가 도기이다. 유한한 인간에 대하여 道를 안다는 것은 다만 이 자취로서의 도기를 안다는 것을 말한다. 天網 안에서 드러나는 道의 실마리, 그 실마리를 통해서만 우리는 道에 대하여, 그 도의 시초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장자는 실마리라는 말 대신 지도리하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道樞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이다.”57) 도추, 도의 지도리는 도의 이편과 저편이 통하는 문, 그 문의 회전축이다. 이 접점에서 모든 대립적 이항은 상호 교환될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다. 더 이상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도기나 도추에 해당하는 지점을 영점(point zéro)이라 불렀다((ED, 86, 169, 424). 데리다적 의미의 영점이란 구조주의적 이항대립이 소멸되는 지점, 구조주의적 질서의 한계, 구조의 안과 밖이 통하는 지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구조주의적 구조와 상위 구조가 만나는 접점, 제한 경제와 일반 경제 사이의 접경적 경제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영점은 즉 구조를 관장하되 구조를 초과하는 중심, 따라서 구조 안에 있으면서 구조를 벗어나는 그런 중심이다(ED, 410).

이런 의미의 영점은 구조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구조성의 망각에서 찾는다. 이때 구조성이란 구조주의적 구조의 열림과 닫힘을 관장하는 대구조의 구조성, 모든 구조적 개방성이 있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초월론적 개방성이다. “이 초월론적 개방성(la transcendantalité de l'ouverture)은 모든 구조, 모든 체계적 구조주의에 대하여 기원인 동시에 실패,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특정한 불가능성의 조건이다”(ED, 243). 폐쇄되고 중심화된 구조주의적 구조는 이 초월론적 개방성에 대한 환원, “구조의 구조성에 대한 환원”(ED, 410)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원적]  구조 개념, 그리고 구조라는 말은 ‘에피스테메’와 동일한 나이를 지녔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 모두와 더불어 같은 나이를 먹었으며, 그 뿌리를 일상적 언어의 지반으로 뻗치고 있다”(ED, 409).

 

하이데거는 서양의 이론적 사유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존재자의 본성에 대한 물음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고 했다. 데리다는 서양적 사유는 구조의 구조성에 대한 망각, 구조에 대한 환원적 이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에 대한 사유로 집약된다. 데리다는 해체론적 사유의 초점을 구조와 구조성 사이의 차이에 둔다. “구조의 개방성이 ‘구조적’이라고, 다시 말해서 본질적이고 형상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때, 우리는 이미 첫번째 질서와 다른 이질적인 질서로 이행했다. 즉 소문자 구조 -- 이것은 필연적으로 닫혀져 있다 -- 와 어떤 개방성을 말하는 구조성(la structualité d'une ouverture) 사이의 차이를 지난 것이며, 그러한 차이가 아마도 [해체론적] 철학이 뿌리내리고 있는 장소, 정위할 수 없는 장소일 것이다”(ED, 230).58)

 

그러므로 해체론은 환원적 소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단순히 그 구조를 깨뜨리는 그 바깥의 힘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해체론이 주목하는 것은 양자의 관계, 그 소구조의 안과 밖이 사이의 차이와 접촉 그리고 교환이다. 이 차이 속의 교환,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구조성, 선험적 구조성이다. 이때 소구조는 구조주의적 구조, 아폴로적 질서, 제한 경제를 말한다. 반면 그 바깥은 순수한 개방성, 디오니소스적인 힘, 일반 경제를 말한다. 해체론의 관점에서 이 경제는 서로 떨어져서 각기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충돌하고 서로 보완한다. 구조주의적 구조, 순수한 제한 경제가 이론적 허구인 것 같이, “경제는 일반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일반 경제라는] 이 말을 통해서 단순히 어떤 절대적 낭비로 열린 경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경제는, 그 궁극의 붕괴에 이를 때조차 기조적(stricturale)이다”.59) 다시 말해서 해체론이 문제삼는 구조, 그 경제는 “더 이상 절대적으로 일반적인 경제, 순수한 노출과 소비가 아니다. 다만 더하거나 덜하게 조여진 기조(stricture plus ou moins forte)이다.”60) 기조, 구조성을 말하는 이 기조를 우리는 대구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조라는 말은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이 신조어를 통해서 데리다는 한편으로는 무차별한 혼돈과 무질서로 향한 개방성, 총체성과 위계적 질서를 한없이 넘어서는 개방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심을 통해서 안정화하고 닫혀진 총체를 이루려는 경향, 위계적 구조화의 경향이 서로 교차와는 모습을 지칭하고자 한다. 기조란 서로 대립하는 이 두 경향 사이의 경제이다. 텍스트는 이 경제의 산물이다. 데리다는 테스트를 있게하는 이 접경적 경제를 “차연의 구조” 혹은 “글(écriture)의 경제”라 했다(ED, 95). 이질적인 경제 사이의 차연적 관계에서 비롯하는 구조, 한 경제가 다른 경제 안으로 유입되는 절차로서의 경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총체성을] 초과하는 것(l'excédant)과 초과된 총체성(totalité excédée)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규제된 관계, 즉 절대적 초과의 지연과 보류(la différance de l'excès absolu)로서의 글쓰기 경제(l'économie de cette écriture)”(ED, 96)이다.

 

데리다는 이 기입의 경제, 차연의 구조, 그 기조가 지닌 “환원불가능한 근원성”을 강조한다. 무엇에 대한 근원성 혹은 기원인가? 역사적 개방성,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소멸의 기원이다. 역사 속에서 성립하고 사라져 가는 모든 구조, 모든 경제는 순수한 열림과 닫힘 사이의 차연적 관계, 탈총체적 무질서와 중심화된 총체성 사이의 상호 기입적 관계, 그 접경적 경제의 산물이다. 이 접경적 경제는 아직도 “어떤 애매한 경제”(ED, 427)로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변동, 역사 자체, 역사 내적 생성 소멸을 사유하기 위하여, 혹은 역사적 개방성을 사유하기 위하여 우리가 소급해갈 수 있는 최후의 사태이다. 해체론은 이 최후의 사태로 거슬러 올라가는 초월론, 개방성의 기원에 이르려는 초월론이다.

 

데리다적 의미의 영점이란 무차별한 초과와 중심화된 총체성 사이의 차연적 관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며, “기록의 역사 선험적(historico-transcendental) 장면”(ED, 338)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노장이 말하는 道紀와 道樞는 이런 해체론적 영점과 유사한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도의 실마리, 혼적, 도의 저편과 이편이 만나는 입구, 입구의 문, 그 문의 회전축은 소구조의 한계인 영점, 소구조 안으로 그 밖의 힘이 유입되는 장소이다. 거기서 드러나면서 숨는 장면, 보이지 않으면서 세상만물을 다시 보게 하는 사건, 그 선험적 사건이 도의 운동, 도의 걸음, 나가면서 물러서는 도의 길내기이다. 도기와 도추는 정명론적 삼위일체의 안과 밖, 그 안쪽의 질서와 그것을 포괄하는 바깥의 구조, 제한 경제와 일반 경제 사이의 접점이다. 길내는 도가 만드는 통로, 도에 이르는 전환점, 우리는 이 입구가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의 사상과 막 태어난 (탈)서양의 사상이 만나는 통로임을 알 수 있다. 접점에서 생기는 통로, 구멍(“門”)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구멍에서 어떤 오래된 미래가 생성하고 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