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하버마스에서 모더니티의 기획과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26

 




김재현 경남대 철학과  교수


<목차>


1.서론

2.모더니티의 원리

3.의사소통행위 이론에 기초한 비판의 입지점

4.포스트 모더니티에로의 진입-니체 해석

5.하이데거, 데리다 해석

6.바따이유, 푸꼬 해석-총체적 이성비판에 대한 반비판

7.의사소통론적 해방론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해방론의 비교








1.서론


하버마스에 의하면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인 모더니티의 기획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근(현)대의 기획은 객관화하는 과학, 도덕과 법의 보편주의적 토대, 자율적 예술을 각각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 발전시킴과 〈동시에〉 또한 그렇게 축적된 인식적 잠재력을 그들의 폐쇄적이고 비밀스런 형태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실천, 즉 생활상태의 이성적인 형성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다."1)

즉 근대의 기획은 과학, 도덕, 법, 예술의 발달이 인간 해방을 가져온다는 낙관적인 기획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낙관주의는 퇴색되어 간다. 마르크스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베버는 과학, 도덕 , 예술영역의 분화가 문화적 발전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전문화를 통해 일상적 생활 실천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의미상실'과 '자유의 결핍'을 가져온다고 본다. 오늘날 문제는 근대의 기획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지양할 것인가이다.

료따르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정보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을 검토하면서 고전적 모던적 사회에서 정립된 지식 개념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밝힌다. 그는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언어학 및 언어철학을 수용하여 사회적 화용론 입장에서 전통이론을 비판한다. 특히 "정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학, 사유 혹은 노동하는 주체의 해방, 부의 발전"2) 등을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큰 이야기'의 대표적 예로 규정하면서 포스트모던 사회는 '큰 이야기' 또는 '메타 이야기'가 효력을 상실한 사회라고 단정한다. 료따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버마스가 생각하듯이 토론을 통해 획득된 합의는 어떠한가? 그것은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침해한다. 그리고 창조는 항상 이의 속에서 일어난다.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단순히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시킨다. 그것은 전문가들의 일치에서가 아니라 창안가들의 불일치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3)

하버마스는 「근대(현대)-미완의 기획」에서 료따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에서 70년대에 소생한 니체의 정신에 영향을 받아 근대의 기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바따이유, 데리다, 푸꼬 등을 '젊은 보수주의자들'로 비판하면서 "근대와 근대의 기획자체가 좌절됐다고 보는 대신에, 근대의 기획을 동반했던 오류들과 근대를 지양하려 했던 극단적인 기획의 잘못으로부터 배워야 한다."4) 고 말한다. 전자가 동반한 오류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타나며 후자의 잘못은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에서 잘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포괄적 합리성, 의사소통적 이성의 이론을 통해 현대의 기획을 옹호한다. 이에 대해 료따르는 다시

"하버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통일성인가? 현대의 기획이 추구하는 목표는 일상 생활과 사유의 모든 요소들이 일종의 유기체적 전체로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통일성을 형성하는 데 있는 것인가? 인식, 윤리, 정치의 유희와 같이 이질적인 언어 게임들 사이에서 찾아야 할 상호 교통의 길은 이 언어 게임들과는 다른 질서인가? 만약 그렇다면, 상호 교통의 길은 이질적인 언어 게임들의 실질적인 통합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5)

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전체에 대항하여 싸워 보자. 그리하여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고, 충돌하는 차이를 활성화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구원하자"6) 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는 하버마스의 근본문제는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초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즉 어떻게 근(현)대적 이성이 갖는 능력, 잠재력을 거부함이 없이 사회적 해방의 기획이 가능한가? 이다.

하버마스는 근대적 이성에 대한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의 철저한 비판에 대항해서 『현(근)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한번 더 뚜렷이 했다. 그는 의사소통행위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이론을 기초로 철저한 이성비판에 대한 비판을 한다.

여기서는 하버마스의 모더니티 기획과 『현대에 대한 철학적 담론』에 나타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버마스가 언급하는 모더니티의 원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2장), 의사소통행위 이론에 기초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입지점을 살펴본 후(3장), 니체에 대한 해석(4장), 하이데거, 데리다 해석(5장), 바따이유, 푸꼬 해석(6장)을 간략히 검토한다. 그리고 의사소통론적 입장에서 해방론과 포스트 모더니즘적 해방논의를 간략히 비교 검토한 후 이를 종합하고자 하는 벨머의 입장을 간단히 제시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겠다.(7장)



2.모더니티의 원리


하버마스는 모더니티(근대 또는 현대)라는 개념을 검토하면서 현대라는 개념이 과거의 전통사회로부터 자신의 시대를 구별하기 위해 시대구분적으로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스로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으로 파악하는 시대적 자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것을 헤겔을 통해 밝힌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현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최초로 한 사람이 헤겔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현대는 지향적인 척도(기준)를 다른 시대의 모범으로부터 빌어올 수 없기 때문에 "근대(현대)는 규범성을 자기 스스로 산출해야만 한다."7) 즉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스스로 산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근대(현대)의 원리를 주체성으로 파악했다. 여기서 주체성은 첫째, 개인주의 둘째, 비판의 권리 셋째, 행위의 자율성 넷째, 관념철학 자체이며 이러한 주체성의 원리가 관철되게 된 역사적 핵심 사건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다. 8) 이러한 현대의 주체성 원리와 관련해서 "18세기에 '근대' 또는 '새로운' 시대라는 표현과 함께 나타나거나 오늘날까지 여전히 의미를 갖는 운동 개념들로 혁명, 진보, 해방, 발전, 위기, 시대정신 등의 개념이 있으며 이 표현들은 헤겔철학의 핵심단어들이 되었다."9) 고 본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주체성의 자기반성 관계는 절대정신에 의해 통합되므로 결국 절대정신에 근거한 헤겔 체계는 시대정신에 따라 분열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버마스는 역사 속에서 이성을 찾으려고 했던 헤겔의 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지점은, 절대자라는 개념이 결과적으로 계속적인 착취와 억압을 승인하고 있다고 비판한 청년 헤겔학파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들은 청년 헤겔학파의 동 시대인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우리가 절대적 관념론을 거부해서라기 보다는 절대적 관념론을 벗어나는 세 가지 길 중의 하나 즉 헤겔 좌파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으로 방향 전환하고, 혁명을 추구했던 헤겔 좌파의 비판은 이성의 불구화에 대항하여 즉 부르주아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이성의 도구화, 일방적인 합리화에 대항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된 이성의 잠재력을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헤겔 우파는 이와 반대로 불안을 자극했던 혁명 의식의 주관성이 현 상태의 합리성에 대한 객관적 통찰력에 굴복하게 됨과 동시에 현실적인 국가와 종교라는 제도가 부르주아 사회의 불안정을 보완해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이성적 주체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 의도적 합리성으로 시들어 버린 이성 비판에서 변증법이라는 가시를 제거했다. 그리고 그는 이성의 진정한 모습은 권력에의 의지에 불과하면서도 이성은 권력을 향한 의지를 훌륭히 감추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철저한 이성 비판의 입장을 드러낸다. 10)

헤겔 좌파에서는 헤겔 기획의 실천철학적 연속으로 마르크스가 등장하는데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크스도 결국 주관철학(주관-객관)의 틀을 못 벗어났다고 본다. 즉 "실천 철학에서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노동이 근대의 원리로 타당하다."11) 그러므로 의식철학적인 한계를 넘어서긴 했지만 그러나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으로 시작하여,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반성개념의 생산개념으로의 변형과 '노동'을 통한 '자의식'의 대체가 어떻게 난관에 부딪치는지"12) 를 단순화시켜 분석한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계몽변증법의 추진력을 믿는다. 근대 사회의 성취와 모순들이 나왔던 같은 원리에서 이 사회의 변형하는 운동, 이성적 가능성의 실현이 설명되어져야 한다."13)

행위하고 산출하는 마르크스의 주체-실천 철학은 인간종의 형성과정을 자기산출로 파악하는데 이는 결국 근세철학의 모델 즉 주체-객체의 모텔 속에서 강조점을 옮긴 것이라고 본다.

"분열된 인륜적 총체성이 소외된 노동으로 생각된다면,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분열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면, 해방적 실천은 노동자체로부터 발생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사한 근본개념적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14)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적 실천철학은 비록 인식하는 주체의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하는 주체의 목적 ;합리성 속에 이성을 자리매김하지만 대상들의 세계와 행위자와의 관계에서 〈인지적-도구적 합리성〉만이 관철되므로 여전히 주체철학의 변형으로 남는다.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은 노동을 상호 주관성으로 생각할 수단을 갖지 못하므로"15) 오늘날 합리적 실천의 패러다임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의 생산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이유는 이러한 철학적 문제 외에도 역사적 경험, 현실적 과정에서 이 패러다임의 정당성이 의문시 됐기 때문이다. 16) 즉 생산력 발달이 인간 해방으로 이끌지 않았고 또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해방적 실천을 더이상 하지 못한다는 현실적 경험이 노동에 기초한 해방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타율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노동의 유토피아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유토피아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노동이 아닌 인간 활동의 다른영역에서 해방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하는데 이 영역이 바로 의사소통의 영역이다.17)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유토피아도 결국 주관-객관이라는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에 빠져 있었으므로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한 실천 전략이 못 된다고 보고 마르크스적 생산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마르쿠스의 논의에 대해 반론을 편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쿠스의 문제제기는 좋으나 그는 해방의 전망이 생산 패러다임에서 나오지 않고 이해지향적 행위의 패러다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생산 패러다임을 확신하는 이론은 이성의 이념이 의사소통관계에 사실적으로 놓여있고 또 실천적으로 파악되어질 이념으로 정초될 수 있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공통적인 이해 속에서 해야하는 것을 실천적으로 끌어내고자 한다면 변화되어져야 하는 것은 상호작용의 형태이다."18)

하버마스는 모더니티의 새로운 기획으로서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기초하여 대화이론의 틀 내에서 전통적 가치를 파악하여 수용한다. 즉 자유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으로, 평등을 이상적 담화(언어)상황으로, 그리고 진리를 이상적 담화상황에서의 합의로 해석한다.19)

그러므로 모더니티 원리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적으로 파악하여 그 가능성을 더욱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하버마스의 입장임을 알 수 있다.



3.의사소통행위 이론에 기초한 비판의 입지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 이론』에서 이미 해명된 '합리화의 변증법'과 '근대성의 변증법' 즉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의사소통적 이성의 가능성이 〈동시적으로〉〈발전〉 되고 〈왜곡〉되어 왔다."20) 는 입장과 "해방과 지배의 이중적 작용을 자체 내에 갖는 법과 도덕의 내적 발전"21) 즉 법과 도덕의 발전이 해방과 지배의 두 측면을 동시적으로 갖는다는 양면적 측면을 다 고려하는 체계와 생활세계 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입장을 토대로 이론적 상대자들을 평가, 비판한다.

그는 현대문명의 위기 즉 의사소통적 이성의 가능성이 왜곡됐다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단에는 동의를 하면서도 대응 방식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는 하버마스의 입지점은 근대화와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이들이 일면적, 극단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으며 이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첫째,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근(현)대의 양면성, 합리화 과정의 양면적 성격 즉 물화적인 측면과 해방적인 측면을 동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근대화 이론 속에 물화적인 특색과 해방적인 특색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다 적절한 개념적 틀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사회적 합리화의 진보적인 측면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하버마스 식의 비판이론은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적어도 그의 『일차원적 인간』에서)의 고전적인 형태의 비판이론과는 구분된다.22) 하버마스는 그들이 사회적 합리화를 도구적 합리성의 확대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모호하지만 '보다 포괄적인 사회적 합리성'에 대한 서로 다른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보다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라는 개념으로, 베버는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생활태도'의 역사적 모델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활된 자연과의 우애있는 관계' 라는 관념으로 공유하고 있다.23

하버마스는 이성비판가들(신구조주의자,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베버와 루카치가 사회적 합리화의 해방적 -화해적 측면을 억합적-분열적 측면으로부터 구분했던 기준들이 흐려졌고" , "아도르노의 관리된 세계이론과 푸꼬의 권력이론이 하이데거의 주도적 틀(Gestell)로서의 기술이론에 대한 해명이나 데리다의 정치적인 것의 총제적 본질에 대한 해명보다 성과가 있고 더 교훈적이지만 그러나 그들도 문화적, 사회적 근대의 〈양면적〉 내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24) 고 비판한다.

둘째, 그들은 생활세계와 체계의 구분, 즉 문화적 근대의 합리성과 행정적 행위 체계의 합리성을 구분하지 못하여 결국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체계 합리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가져온 이성의 해방적 성과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근(현)대의 합리화 과정을 물화 내지 지배의 강화라는 일면적 측면 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회적 합리화 과정을 진보적으로 보면서 동시에 위기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는 하버마스의 입장은 생활세계와 체계를 나누는 그의 사회이론적 전략에서 잘 나타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서구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화는 점진적 분화와 합리화 과정이다. 이는 생활세계의 합리화의 증진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체계가 더욱 분화되고 복잡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증대를 뜻하는 이러한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근대화의 밝은 측면이다. 동시에 근대화의 어두운 측면은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체계요구의 '선택적' 압력 속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와 근대적 관리국가의 확장이 사실상 일면적이고 왜곡된 그리고 위기를 내포한 사회적 합리화를 즉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25)

셋째, 따라서 이들은 '이성의 가능성' 대신에 '이성의 타자'를 추구함으로써 일상적, 실천적 대안의 상실을 초래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성 비판적 시도에는 일상적 실천을 위한 체계적인 공간이 고려되지 않는다."26) 하버마스의 비판의 핵심은 포스터모더니즘이 합리성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이성의 타자'를 추구하다가 합리성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일상적 생활세계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 이론의 실천적 함의는 일상적 생활세계의 현실을 중시하는 것이다.

넷째, 이들은 총체적 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지만 결국 주관적 이성이 이성 비판을 위해 이성이라는 도구 즉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수행적 모순'에 빠진다. 하버마스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도 이를 잘 알면서 '계몽의 변증법'과 '부정적 변증법'을 통해 수행적 모순을 실천했다고 본다.27)

다섯째, 이같은 문제들에 부딪친 이유는 기존 이론들이 결국 모두 의식철학, 주체 철학의 틀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하버마스의 패러다임 전환 전략은 상호 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제시하면서 "의사소통적 행위로 파악되는 이성에 의한 주관(주체)중심적 이성의 한정된 부정"28) 을 통해 의식철학, 주체 중심적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포괄적 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근대 서구적 이성의 일면적, 억압적인 성격을 비판하면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통해 포괄적인 이성의 기획을 발전시킴으로써 일상적 실천의 공간을 가능하게 해준다. 상호 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29)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입장 그리고 계몽주의에 대한 계몽적 비판의 입장에서 하버마스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대결한다.

하버마스의 주요 논지는 니체가 제기한 '반 계몽주의적' 길, 즉 니체에 의해 현재에 이어진 두가지 국면에 대한 서술, 하나는 하이데거를 넘어(통해) 데리다에 이르는 길과 다른 하나인 바따이유를 넘어(통해) 푸꼬에 이르는 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나타난다.



4.포스트 모더니티에로의 진입-니체 해석


하버마스는 니체를 포스트 모더니티에로의 전환점으로서 파악하는데30) 그 이유는 니체가 이성개념의 새로운 수정이라는 주관 중심의 내재적 비판을 시도하지 않고 이성의 기획 자체를 폐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성은 권력에 불과하고 이성을 은폐하는 전도된 권력에의 의지에 불과하다."31) 고 봄으로써 "니체와 더불어 모던에 대한 비판은 처음으로 모던의 해방적 내용의 보존을 포기했다.32)

하버마스에 의하면 니체는 아방가르드 의식이 20세기의 문학, 미술, 음악에서 객관적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그리고 그 형태가 아도르노에 의해서 『미학 이론』을 통해 상세히 묘사되기 이전에, 미적 근(현)대성의 태도를 처음으로 개념화한 사람이다. 그는 순간적인 것을 한 단계 올려놓고, 역동성을 찬양하면서, 현재와 새로운 것을 미화하면서, 미적으로 동기 유발된 시대의식과 순수한 내적 현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예술, 그리고 오직 예술만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수단이며, 삶의 대단한 유혹이자 자극체이다."33)

하버마스의 모던 구상을 이해하는 데는 니체에 대한 그의 시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니체가 철학적 담론에서 직면했던 양자택일의 상황을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주관 중심적인 이성을 다시 한번 내재적 비판에 내맡기느냐, 아니면 기획 전체를 포기하느냐-니체는 두번째 방향을 선택했다. 그는 이성 개념의 새로운 수정을 포기하고 계몽의 변증법과 결별한다."34)

이것은 '이성의 다른 형태' 즉 신화로 귀결되는데, 하버마스  5716; 자신의 입장규정에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즉 해방의 포기와 신화로의 재통합을 하버마스는 포스트 모던의 특징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니체의 근대에 대한 비판은 두가지 국면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권력에의 의지의 왜곡과 반동적 힘의 등장, 그리고 주관 중심적 이성의 출현을 인간학적, 심리학적, 역사적 방법으로 밝히려고 한 〈회의적인 학자〉로서의 길로서 이러한 니체의 후계자는 바따이유, 라깡, 푸꼬이다. 다른 하나의 국면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의적인 비판가〉로서 특수한 지식을 요구하고 주관철학의 생성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단초에까지 추적하는 하이데거와 데리다에게서 그 후계자를 발견할 수 있다"35)

하버마스는 니체가 제기한 '반계몽주의적' 길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진 두가지 국면에 대해 서술하기 전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규명한 '계몽의 변증법'을 '신화와 계몽의 뒤섞임'36) 으로 해석하면서 이들이 니체에 대해 이성에 대한 부정적 비판과 함께 내재적 이성비판이라는 이중적 입장을 갖는다고 본다.37)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대중문화의 문제가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어진다. 대중문화를 분석함으로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오락에 합병된 예술은 혁신력이 마비되었고, 특히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내용을 상실해 버렸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들에 의해 일찌기 행해졌던 부르주아 문화의 단순한 순응성에 대한 비판은 대중문화가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인 예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아이러니에 대한 무기력한 분노로 화한다.38)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하버마스가 '수행적 모순'39) 이라고 일컫는 모순에 봉착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마지막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결과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비판을 원한다면 그들은 모든 합리적 기준들이 부패하였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최소한 한 가지 합리적 기준은 훼손하지 않은 채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설에 직면하게 됨에 따라, 자기 지시적 비판은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수행적 모순에 부딪친다.

그러나 이들이 니체와 포스트모디니스트들의 문제의식과 비슷한점이 있다 해도 그들과 분명히 다른 것은 이들이 이성의 새로운 가능성과 계몽의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5.하이데거, 데리다 해석


포스트 구조주의의 두 가지 변형들이 니체에게 진 빚은 가히 압도적이다. 40)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을 통해서 그가 견지하는 사유의 많은 주요 주제들의 윤곽을 드러냈고 데리다는 여러 텍스트에서 니체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푸꼬는 니체 해석을 통해 푸꼬 자신의 철학적 방법과 내용을 발전시켰으며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나는 단지 니체주의자이다' 라고 선언했다.

하버마스는 니체가 제기한 '반계몽주의적' 길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진 두가지 계열에 대해 고찰한다. 이것은 〈철학자〉로서 하이데거를 넘어(통해) 데리다에 이르는 길과 〈계보학적 학자〉로서 바따이유를 넘어(통해) 푸꼬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서술을 통해 구체화된다.41)

하버마스는 총체적 이성비판을 한층 심화시킨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하이데거를 검토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기존 형이상학 비판은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과 관련된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과학을 부정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하이데거가 의식철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시도했지만 그 자신이 이 틀 안에서 벗어날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즉 그는 여전히 후설의 현상학이 그에게 제시한 형태로 주체의 문제 속에 남아 있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논의는 마침내 명제적 진리, 담화적, 논쟁적 사유를 폐기하는 결과, 학습과정을 무시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세계 이해와 역사적 지평 안에서 가능한 경험과 실천의 변증법적 연관을 왜곡시킨다."42)

이러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근(현)대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에 근거를 갖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데리다는 철학과 문학의 영역구분을 폐기하고자 한다. 그는 논리중심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종래의 레토릭과 논리의 구분을 폐지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데리다는 간접적인 의사 소통과 같은 무엇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타일 비판에 착수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텍스트는 스스로를 비문학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텍스트의 문학적 층위에 내재한 의미의 수사적 잉여 속에서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명백한 내용을 부정한다. 그 결과는 언어의 미학화이다.43)

즉 해체의 실천은 이론 텍스트들에서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 인지적 내용을 부정하고, 그 텍스트들을 수사학적 장치들의 배열로 환원시킴으로써 이론 텍스트들과 문학 텍스트들 사이의 차이를 지워 버린다. 하버마스는 데리다의 해체는 하이데거 사유의 움직임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존재의 자기 감추기라는 하이데거의 주제는 '현존과 부재의 삭제된 기원'으로 서의 '차연' 개념 속에 반복되고 있다. 하버마스는 "원글쓰기와 그 흔적과 같은 은유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신의 모티브를 보게 된다. 이 모티브는 신이 서구의 아들과 딸들에게 자신의 부재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만듬으로써 자신의 예정된 현존을 더욱 명백하게 하는 것"44) 이라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데리다는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고 있을지라도, 유태 신비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45) 고 비판한다.



6.바따이유, 푸꼬 해석-총체적 이성비판에 대한 반비판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를 통한 신비주의적 방향과는 다른 길로 바따이유와 푸꼬의 길이 있다. 이 방향에서 핵심적인 전거는 니체의 권력이론이며 이들의 근본확신은 근대(현대)적 이성은 바로 은폐되고 왜곡된 권력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의 목표는 이성의 기만을 폭로하고 이성이 봉사하는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주체중심적 이성에 의해 억압된 욕망에 자율성을 다시 부여함으로써 이성비판을 철저화한다. 바따이유에서 이 시도는 유용한 것, 계산 가능한 것, 조작 가능한 것의 세계로부터 추방되고 배제된 '이성의 타자'에 대한 요구와 탐구로 나타나고, 푸꼬에서는 지식과 권력의 본질적인 착종(결합)을 밝히는 계보학적 해명의 형태를 갖는다. 푸코는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하이데거는 나에게 항상 절대적인 철학자였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프랑스의 반인간주의자들에게 '형이상학의 역사라는 이 주체 중심의 이성을 심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푸꼬에서 권력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체제 전체에 침투해 들어가는 다양한 관계들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처럼 경제적 토대에 인과적 우선성을 부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개인들을 억압하고 개인들의 활동을 제약함으로써 작동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을 구성함으로써 작동한다. 푸꼬 식으로 보면 개인의 자율성과 도덕적 주체라는 것은 허구가 된다. 46) 푸꼬는 19세기 초에 등장한 감옥과 같은 '훈육' 제도들을 주된 예로 들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푸꼬의 권력개념에는 선험적-역사적 의미와 사회이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계보학은 선험적 역사서술의 한 방식이다. 계보학의 목표는 첫째, 객체성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 즉 다양한 것, 우연적인 것, 자의적인 것들을 통해 통일적인 것, 필연적인 것, 불변의 것을 대체하려는 시도에 있다. 계보학의 두번째 측면은 역사적으로 지향된 비판적 지식 사회학의 측면으로 이는 정신치료와 사회기술에 내재되어 있는 진리를 규범화하는 훈육적인 효과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하버마스는 푸꼬의 비판적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총체화하는 이성 비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푸꼬는 이성의 비판을 위해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수행적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이는 푸꼬가 자신이 비판한 인간과학과 유사한 영역의 계보학적 탐구에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푸꼬가 권력이론으로 파악한 근대의 사회이론적 이해도 그것이 대체해야할 잘 알려진 인간주의적 이해의 단적인 반대물로서 의식철학의 틀을 못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해방과 지배의 이중적 작용을 자체 내에 갖는 법과 도덕의 내적 발전"47) 은 푸꼬에서 사라진다고 보면서 푸꼬의 권력이론은 근대사회와 문화의 이중성을 권력수준에서 평면화시킨 일면적인 것이라 비판한다. 푸꼬는 비록 사회화 과정에서 파편화된 개인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는 있지만 사회화 과정이 동시에 개인의 발전이라는 현실적인 해방적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는 푸꼬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을 권력의 영겁회귀 이론으로 철저화시켜 권력의 부정적인 측면을 절대화함으로써 권력의 정당화 과정 속에서 동시에 발전되어 온 자유와 해방의 측면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푸코의 니체적인 권력-지식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푸꼬에서도 권력은 비록 그 저항이 자신이 저항하고 있는 권력 관계들처럼 파편적이고 탈중심화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글에서 저항 개념은 분명한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개념은 다양한 억압된 그룹들에게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48) 하버마스는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7.의사소통론적 해방론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해방론의 비교


하버마스에 의하면 헤겔과 마르크스는 패러다임 전환을 하지 못했으며,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주체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결국 근원철학의 의도에 집착해 머물렀고 푸꼬도 주체(의식)철학의 틀을 완전히 못 벗어났기 때문에 근대(현대)사회가 갖는 지배와 해방의 이중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해방적 가능성을 즉 '주체 중심적 이성'이 아닌 '의사소통적 이성'에서 찾는다. 즉 '주체철학'으로부터의 다른 출구를 ? 6;어능력과 행위능력을 갖는 주체들 사이의 이해패러다임을 통해 모색함으로써 '의사소통론적 해방론'을 제시한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그 척도를 명제적 진리, 규범적 정당성, 주관적 진실성, 심미적 일치에 대한 요구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논쟁적 절차에서 발견한다."49)

이것은 곧 "절차적인 합리성 개념"으로서 이 개념은 말의 타당성 기초에 있는 이성의 가능성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인륜적 생활연관이라는 헤겔의 개념을 의식철학의 전제와 무관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상호주관적 이해와 상호적 인정이라는 결합력 속에서 타당성을 가지며 동시에 하나의 공동적 생활형식이라는 보편자를 묘사한다."50) 그러므로 '의사소통론적 해방론'은 공론영역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상호주관적 연대를 통해 실현되면서 화폐와 권력이라는 체계통합적인 매체들에 대항하여 사회 통합적인 권력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51)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철학적 개입이 띠고 있는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52) 1970년대 후반부터 그의 연구는 근(현)대성의 일부 또는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한 갈래의 보수주의적 사고가 자본주의 전체에 걸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2차 대전 이전의 유럽 우파가 가졌던 비합리주의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서 재등장하는 것은 독일 연방 공화국 내에서 아주 위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특히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적인 도전에 대한 공포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만들었다.53)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비판과는 달리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주장하는 욕망의 해방이나, '나'라는 중심을 해체하는 작업은 이성적 주체라는 획일적 가치체계의 거부로 통한다. 즉 차이와 비동일성을 강조하고, 작은 이야기를 중시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이성의 횡포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해방'에 대한 요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유물변증법 같은 거대이론, 총체성, 일사분란한 단일 전망, 프롤레타리아트 같은 통합주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본, 권력 등 사회 안의 특권구조와 관료제의 침투에 대항하여 생활세계의 자율성, 차이의 놀이, 시민사회의 다양성, 평등, 참여, 분산, 연대 등을 관찰해 나가는 나름의 변혁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54)

즉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가 미국 등에서 소수인종, 여성, 흑인운동 등의 '소규모 정치'에 활용되는 측면과 서구 중심적 근대화에 제동을 걸면서 비서구문화에 대해 공정한 취급을 요구하는 등의 저항적 해방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입장 등이 있다.55)

한편 료따르는 하버마스의 "해방의 이야기"는 프로이드적 마르크스적 메타 이야기보다 더욱 메타 이야기라고 비판하고, 로티는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해방의 이야기"라고 비판하면서도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유는 나치즘과 반계몽주의를 동일시하는 독일문화의 풍토에서 기인" 한다고 지적하면서 하버마스와 료따르의 논의를 절충한다.56) 켈너는 하버마스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포스트 모더니스트)에 대해 '구체적 비판' (벤야민)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57) 제임슨은 하버마스의 근대성에 대한 옹호를 '하버마스가 사유하고, 글을 쓰는 국가의 상황'에서 나타난 특수한 것이므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58)

그러나 이런 평가들은 지나치게 단순화 된 것일 수 있으므로 보다 세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수용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상대편으로부터 필요한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해방적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버마스 자신의 논의를 약화시킨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하는 벨머의 논의를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대 예술에서의 미적 종합의 새로운 형식은 정신적 사회적 '종합'의 새로운 형식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가 지닌 해방적 잠재력이다. 즉 '종합'의 새로운 전형이 - 미적으로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 전망되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에 따라 혼란한 것, 비통합적인 것, 무의미한 것, 분열된 것들이 비폭력적인 의사소통의 공간에로 - 예술의 탈경계화된 형식에로, 그리고 경직되지 않은 개별화 및 사회화 유형의 개방적 구조 속으로 - 들어오게 된다."59)

벨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사회야말로 계몽주의, 민주적 보편주의에 대한 중요한 승인이며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근본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회화 집단의 민주적인 자기조직이 구현되는 그러한 제도의 다윈주의는 하버마스적 의미에서의 의사소통행위가 행위조정의 메카니즘이 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부르조아 사회의 민주적 보편주의에 대(항)해서 민주주의가 사회생활의 구석구석에 까지 스며들지 않는 한 그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또한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에 대해서 그것이 보편적 직접성과 조화의 상태를 의미할 수는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모든 합리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궁극적 정당화도 궁극적 해결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민주적 보편주의 및 그 자율적 주체와 결별을 의미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자율적 사회에의 기획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이성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계몽의 도덕적 정치적 보편주의, 개인적인 자기규정과 집단적인 자기규정, 이성과 역사 등을 새로이 사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려는 시도 속에서 필자는 이성의 자기 극복이라고 하는 진정한 '포스트모던적' 충동을 발견하는 것이다."60)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방의 이야기'를 단지 큰 이야기라고 비판하는 료따르의 입장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하며,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해방론 속에서 해방의 '큰 이야기'와 해방의 '작은 이야기'를 연결시켜 논의하지만 이것이 뚜렷이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의 논란이 생긴다고 본다.

또한, 하버마스에서 나타나는 해방의 관점을 보다 구체적,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벨머의 통찰은 하버마스의 해방의 문제틀을 보완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를 주리라 생각한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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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Habermas, Kleine Politische Schriften1-4, 425쪽

2) 장-프랑수아 료따르,이현복 옮김 『포스트모던적 조건』 서광사, 1992, 13쪽.

3) 료따르, 같은 책, 15쪽

4) J.Habermas, Kleine Politische Schriften1-4, 460쪽

5) 료따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이진우 편역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서광사, 1993, 66쪽

6) 료따르, 같은 글, 80쪽

7) 하버마스,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16쪽, 이하 인용은 하버마스(1985)로 한다.

8) 하버마스(1985), 27쪽

9) 하버마스(1985), 15-16쪽

10) 하버마스(1985), 71쪽

11) 하버마스(1985), 80쪽

12) 하버마스(1985), 75쪽

13) 하버마스(1985), 79쪽

14) 하버마스(1985), 79-80쪽

15) 하버마스(1985), 82쪽

16) Heller.A. 'Habermas and Marxism' in:Thompson and Held(ed. by), Habermas: Critical Debates, The MIT Press.1982

17) 헬러, 앞의 글, 32-33쪽

18) 하버마스(1985),103쪽. 이 훈은 "소련은 개인의 발전과 사회적 생산의 발전을 통합하는데 실패" 했으며 "이미 마르크스에서부터 개인의 발전문제가 학예적 장인노동의 수준에서 거론될 뿐, 명상적 사유의 수준은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 한다. 이러한 지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 하이데거의 결합을 통해 구체화 된다. 이 훈 「노동과 여가」, 『철학연구』 22집 (철학연구회, 1987). 그러나 여기서 명상적 사유는 상호작용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학예적 장인노동과 명상적 사유가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 그 매개가 될 수 있는 '일상적 의사소통', '이해지향적 행위'의 문제가 빠져있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노동 패러다임이 학예적 장인노동의 수준이라 할때 역시 장인노동의 패러다임이므로 여기서는 상호 주관성,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인간의 자기실현, 해방의 문제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생산력의 민주주의적 통제문제도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구체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하버마스,1965.「기술적 진보와 사회적인 생활세계」참조) 하버마스는 하이데거류의 명상적 사유는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배제하는데 이를 둘러싼 논쟁이 '형이상학 논쟁'으로 나타난다. 형이상학 논쟁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Nachmetaphysisches Denken. Philosophische Aufsaatze, Frankfurt 1998.참조

19) Heller.A, 앞의 글, 33쪽

20) 하버마스(1985) 367쪽

21) McCarthy.T, "Der phi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Kritik der Verstandigunsverhaltnisse-Zur Theorie von J.Habermas,(1989) Suhrkamp.(The Critical Theory of Habermas,(1978)의 독역판임). 509쪽

22) 켈너, 「비판이론, 막스 베버 그리고 지배의 변증법」칼 뢰비트/이상률 옮김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1992, 95쪽

23) 하버마스, Theorie des kommuikativen Handelns, Band 1. Handlungsrationalitat und gesellschaftliche Rationalisierung, Frankfurt 1981, 209쪽, 켈너, 앞의 글, 191쪽

24) 하버마스(1985), 392쪽

25) 하버마스,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Frankfurt 1981, 471-488 쪽에서 하버마스는 근대사회에서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에 존속했던 교환관계를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26) 하버마스(1985), 392-393쪽

27) 하버마스(1985), 144-145, 219, 220쪽, '수행적 모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Jay.M, "The Debate over Performative Contradiction", in. Zwischenbetrachtungen, S. 171-189(1989)와 Martin J.Matustik, "Habermas on Communicative Reason and Performative Contradiction", in, New German Critique, Nr.47 1989, Spring/Summer. 참조

28) 메카시, 앞의 글, 501쪽

29) 하버마스의 『현대의 철학적 담론』의 11번째 강의 제목이 "주제철학으로부터의 하나의 다른 출구-의사소통적 이성 대 주체중심적 이성"이다.

30) 이에 반해 뢰비트는 니체를 "근(현)대성의 확실한 발견자"로 본다. 뢰비트, Von Hegel zu Nietzsche, 207쪽

31) 하버마스(1985), 71쪽

32) 하버마스(1985), 117쪽

33) Callinicos, A. Against Postmodernism, St. Martin's Press. 1990, 66쪽에서 재인용

34) 하버마스(1985), 106쪽

35) 하버마스(1985), 120쪽

36) 하버마스(1985), 130-157쪽

37) 하버마스(1985),145-146쪽. 프리드만은 구비판이론의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뿐만 아니라 20세기 지적사조에 나타난 모든 반부르주아적,반문명적 요소들로부터 영향 받았다는 것, 특히 니체, 슈팽글러, 하이데거, 프로이드, 유태주의의 영향이 컸음을 현대성의 실패와 연관시켜 해명한다. George Friedman, The Political Philosopy of Frankfurt School. Cornell University, 1981

38) 안드라스 게도 외『포스트 모더니즘의 도전』다민, 164쪽

39) 하버마스(1985), 145쪽

40) 캘리니코스, 앞의 책, 68쪽

41) 하버마스(1985), 121쪽

42) 메카시, 앞의 글, 505쪽

43) 하버마스(1985), 240쪽

44) 하버마스(1985), 213쪽

45) 하버마스(1985), 214쪽

46) 바로 이 점 때문에 호네트는 『권력의 비판』에서 푸꼬의 권력이론이 체계이론적 패러다임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Honneth, A., Kritik der Macht. Reflexionsstufen einer kritischen Gesellsohaftstheorie, Frankfurt 1985, 참조

47) 메카시, 앞의 글, 509쪽

48) 캘리니코스, 앞의 책, 85-86쪽

49) 하버마스(1985), 366쪽

50) 하버마스(1985), 377쪽

51) 하버마스(1985), 422쪽

52) 캘리니코스, 앞의 책, 92-93쪽

53) 하버마스는 역사해석 논쟁에도 참여하였다. 이 논쟁은 독일 역사에 대한 것으로, 나치 대학살은 사회주의에 내재한 전체주의적인 동력에 대한 한 반동이자 복제라는 에른스트 놀테의 주장에 의해 유발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 논쟁이었다.

54) 한상진, 김성기 「포스트 모더니즘 이렇게 보아야 한다」정정호,강내희 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쟁점』 도서출판 터, 1991, 298쪽

55) 피들러, 료따르, 핫산, 후이센 등이 그들이다. 정정호, 강내희 편 『포스트모더니즘론』도서출판 터, 1989와 김욱동 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2 참조

56) R. Rorty, Habermas and Lyotard on Postmodernism, in, Bernstein 엮음, J. Habermas and Modernity, 1985, Polity Press.

57) Kellner, Critical Theory, Marxism and Modernity, Polity Press, 1989, 173쪽

58) 캘리니코스, 앞의 책, 93쪽에서 재인용

59) Wellmer, A., Zur Dialektik von Moderne und Postmoderne. Vernunftkritik nach Adorno, Frankfurt 1985. 28쪽

60) 벨머, 앞의 책, 107-108쪽

61) 본 고에서는 벨머의 입장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벨머의 입장과 함께 이성의 권력지배에 대한 새로운 비판과학, 해방에 대한 추구로서 푸꼬와 다른 이론가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입장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