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데리다와 보르헤스의 글쓰기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26

 

박 종 혁(외대)


국문요약

 

 30년대를 전후하여 발표된 단편집 ꡔ픽션들Ficcionesꡕ, ꡔ알렙Alephꡕ과  ꡔ또 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ꡕ 등의 에세이집을 통해서 보르헤스의 문학은 이미 정점에 도달했지만 그의 작품이 세계문학의 범위에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61년 포멘터 상의 수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년대 이후로 프랑스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던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르헤스는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프랑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현대 프랑스의 문학과 사상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보르헤스의 영향과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데리다는 보르헤스의 단편들과 에세이들을 읽었으며 자신의 저서에서 보르헤스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데리다가 보르헤스로부터 받은 영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영향사적 측면 보다는 두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관점과 데리다의 텍스트에 인용된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전통적인 책의 권위는 보르헤스와 데리다에 의해서 파괴된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책이라는 한정적이고 일점근원적인 의미 체계를 벗어나, 직물짜기의 구조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차연 작용에 의해서 그 의미가 살포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보았다. 이는 보르헤스가 세계 전체를 도서관, 혹은 한 권의 책으로 보면서 그 세계 내에서 자유로운 해석과 사유의 놀이를 만들어낸 것과 상통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약국」에서 플라톤 이후 서구 지성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음성중심주의와 아버지중심주의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다. 데리다는 토트, 튜트, 헤르메스가 유사한 작용을 하는 기표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인용하였고,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제시된 우주의 역사라는 것이 하나의 문서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데리다의 논의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독약과 치료약의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파르마콘은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차연을 통한 무한한 의미의 연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파르마콘으로서의 글쓰기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진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 없이도 스스로 텍스트를 재생산하고 변질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텍스트에서 파르마콘/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친부살해적인 성격은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분석에 의하면 보르헤스의 실제 삶과 연관을 지어 고찰될 수 있다.

                  

I. 서론 - 프랑스의 보르헤스 읽기

 

 보르헤스의 작품은 1930년대를 전후로 ꡔ픽션들Ficcionesꡕ, ꡔ알레프Alephꡕ 등의 대표작들이 출간됨으로서 이미 문학적 완성기에 도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아르헨티나와 중남미의 범위를 넘어서 세계 문학의 장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것은 1961년 포멘터 상을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수상 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보르헤스는 20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을 포함하는 서구문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된다. 현 시점에서 보르헤스를 제외하고 모더니즘 이후의 문학사조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미 각 국 언어로 번역된 작품들이 널리 읽혔고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보르헤스의 작품이 소개된 것은 1923년 시집 ꡔ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ꡕ가 <라틴 아메리카 리뷰Revue de lAmeerique Latine>에 실린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1925년 에세이집 ꡔ심문Inquisicionesꡕ 이 출간되어 관심을 모았고 1939년에는 네스토르 이바라Neestor Ibarra의 번역으로 「알모따심으로의 접근」 이 소개되었다. Nancy M. Kason, Borges y la posmodernidad,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1994. p.8
 
2차 세계 대전의 포화를 피해 로저 까요아를 비롯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아르헨티나로 건너옴으로서 보르헤스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알려지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간 까요아는 1953년 ꡔ미로Labyrinthesꡕ 라는 제목으로  ꡔ알렙ꡕ 에 수록된 단편들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1958년에는 ꡔ오욕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infamiaꡕ 와 ꡔ영원의 역사Historia de la eternidadꡕ 가 한 권으로 묶여( ꡔHistorie de l‘infamie  Historie de leterniteeꡕ) 소개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르헤스가 사무엘 베케트와 함께 포멘터 상의 수상자가 된 사실은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하였고 이 후 수 차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되는 등 당시 세계문학 흐름에 급속히 파고들던 붐 소설 작가들과 함께 미학적인 가치를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포멘터 상 수상 이후 유럽과 미국의 유수한 출판사들은 각국어로 번역된 보르헤스의 작품을 내 놓았다.


프랑스는 보르헤스를 외국의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예술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했다. 1957년 노벨상 수상자인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auriac은 보르헤스가 “프랑스의 우리들이 자연주의에 안주한 채 더 이상 사고하기를 포기해버린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고 언급했다. Ibid. p.9에서 재인용.


 62년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학예술훈장Orden de Letras y de Artes에 보르헤스의 이름을 등재시킨다. 1964년 <레른 지Cahiers de l‘Herne>는 제라르 쥬네뜨, 로저 까요아, 끌로드 올리에, 장 리까르두 등의 헌정글이 실린 보르헤스 특집판을 내놓는다.


이러한 외면적인 보르헤스에 대한 존경과 광범위한 인정의 경향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작가의 영향력은 불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인정되기도, 연구자들의 가설과 검토를 통해서 밝혀지기도 했다. 미셀 푸코Michel Paul Foucault는 ꡔ말과 사물ꡕ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에세이 「존 윌킨스의 분석 언어」에서 받은 영향을 밝히고 있다. 이성 중심적이고 계통학적인 분류체계를 붕괴시키는 보르헤스의 동물 분류는 푸코에게 그 책을 쓰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 밖에도 푸코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보르헤스를 인용하며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쥬네뜨, 장 리까르두 등의 비평가들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분석했으며, 로브그리예 등 누보 로망의 작가들과 보르헤스의 상관 관계가 연구되기도 하였다. 


해체주의라는 20세기 후반 큰 철학적 흐름의 중심에 있는 데리다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었으며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은 데리다가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또 다른 심문』과 위에서 언급된 까요아의 『미로들』에 소개된 단편들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데리다의 기억에 의하면 61년에서 62년 사이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읽었으며, 그 후에는 새로운 작품을 접하지 않고 기존에 읽은 작품들을 재독했다고 한다. Aizenberg, Edna, Ed., Borges and His Successors, Colo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0. p. 133
, 자신의 책에서 보르헤스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인용한 부분을 제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보르헤스와 데리다의 유사성, 혹은 데리다가 받은 보르헤스의 영향에 대해서 몇몇 비평가들이 관심을 가졌다. 우선 데리다와 보르헤스가 표현하고 있는 사유가 20세기 전반부까지 계속되었던 서구문명의 완벽성과 유일성에 대한 자만심을 무너트리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근본적인 상호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지성이 관심을 가졌던 근원과 중심에 대한 추구에서 벗어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르헤스에 있어서 책의 의미는 일반적인 지식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단일한 체계를 형성하는 문서의 범위를 넘어서며 데리다는 텍스트 개념을 통해서 문학비평이 일반적으로 갇혀 있던 책이라는 공간을 받치고 있던 진리와 의미를 해체하려고 시도한다.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두 사람의 책과 텍스트 개념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인용된 데리다의 텍스트「플라톤의 약국La Pharmacie de Platon」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데리다가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고 그 것이 데리다의 논문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후반부에서는 로드리게스 모네갈이 위의 에세이를 분석하면서 행했던 심리학적 분석  또한 언급될 것이다.

 

II. 책과 텍스트 - 글쓰기에 관해서

 

데리다는 책(le livre)과 텍스트(le texte)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책은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형성한다. 책은 자기의 생각과 내용을 방어하는 그런 성격을 자신의 권위로 여기게 된다. 스승이 제자에게 훈계하듯, 저자가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듯, 책은 그런 전범의 귀감이어야 한다. 김형효. ꡔ데리다의 해체철학ꡕ, 민음사, 1993 p.18


 그리고 그 책을 지은 사람인 저자는 그 책에 대한 정신적인 소유권을 완벽하게 확보한다. 흔히 책은 작가의 자식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책에 대한 소유권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 및 가치에 대한 전적인 책임 역시 저자에게 속한다.


저자에 의해 쓰여진 책은 내부의 내용들 사이에 엇갈림이 없어야 하고, 나아가 외부적 세계에 대해서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더라도 정확하게 대응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책이 추구하는 바는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런 진리는 신의 창조와 다를 바가 없다. 책의 의미와 내용은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신의 권위를 대행할 수 있는 아버지나 위대한 스승님의 말씀이다. Ibid. p.19


 책은 죽지 않으며 저자가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 순간 무한히 지속될 시간적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책에 대한 이러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독립적인 특성은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자기반성 없이 부지불식 간에 받아들여져 왔다. 책의 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는 사실은 책과 저자가 가지는 권위가 얼마나 공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데리다는 책의 의미규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1)책은 영혼의 대화이거나 영혼의 변증법이어야 한다.


2)책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3)책에는 저자가 있다. 따라서 책의 진위를 결정하는 가치는 책 안에 있다기보다 저자의 자기 영혼과의 대화, 자기 진술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 될 뿐이다. 책은 저자의 영혼 깊은 곳에서 스스로 말하는 진술의 외형적 표지일 뿐이다.


4)그러므로 책은 영혼의 영상이거나 초상이다. Derrida, Jacques, Dissemination, translated by Barbara Johns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pp.184-188
 

 데리다는 이러한 책의 권위 속에 서구 세계가 플라톤 시대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받들어 온 로고스 중심주의가 숨어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철학적 해독의 기술원리‘ 김형효, op.cit., p.20
로서 텍스트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텍스트는 신화적 또는 신화학적 진술이 고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현실적 중심이 없다. 텍스트는 책이 가지고 있는 배타성과 고정성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책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저자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책과 같이 통일성을 지니는 명확한 의미를 파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각각의 텍스트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텍스트라는 용어가 직물을 짜는 행위에서 온 말을 생각해 볼 때 각각의 텍스트들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을 책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데리다가 여러 차례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고 지적해 왔듯이, 텍스트는 완결적이고 외부에 대해서 폐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복합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책은 종이에 인쇄된 상태로 남아있으나 텍스트는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사람의 일생이나, 기호로 표시된 지도, 기술되었거나 되지 않은 역사를 모두 포함한다.


 보르헤스의 ꡔ또 다른 심문ꡕ에 수록된 에세이 「만리장성과 책Las murallas y libros」은 텍스트적 지평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보르헤스는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중국의 진시황의 행동을 하나의 은유로 파악하고 있다. 진시황은 부정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없애기 위해 과거를 말소하려고 했으며 불멸성을 오염시키는 요소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축조했다. 이 시간과 공간의 무한을 나타내는 이 두 행위(은유)는 은밀한 방식으로 서로를 무화시키고 있으며, 건설과 파괴를 동시에 행한 사람들의 예는 역사상에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역사 자체를 확정된 사실의 기술이 아닌 미학적인 분석의 가치를 지닌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는 그 자체로 가치를 함유하는 것이며, 추정적인 내용 안에 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반화하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이론과 합치된다. 1877년 페이터는 모든 예술은 음악, 즉 순수한 형식을 닮으려고 열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음악, 행복의 상태, 신화, 시간에 의해 주형된 얼굴들, 어떤 여명과 특정한 장소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거나 혹은 이미 놓쳐서는 안될 무언가를 말했고, 혹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마도 미학적 사실이 드러나려고 하는 급박한 상태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고 있다. Borges, Jorge Luis, Obras Completas, Tomo II. Buenos Aires; Emecé Editores S.A., 1974, p. 13
 
  
 데리다가 새로운 사유의 도구로서 사용했던 텍스트 개념은 보르헤스가 역사 자체를 미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하나의 텍스트처럼 설명하고 있듯이 매우 확장적 개념이며 책의 경우처럼 일점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데리다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텍스트는 부유하는 존재이며, 그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산종과 차연의 형식을 따라서 끊임없이 확장될 뿐이다.


 데리다가 텍스트 개념으로 설명했던 광범위한 직물짜기의 영역은 보르헤스의 도서관을 연상시킨다. 끝없이 겹쳐지는 6각형들의 진열실과 그 안에 꽂혀있는 책들을 우주자체이다.

 

우주(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 부르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도서관>은 끝이 없다고 단언한다. (중략) 지금으로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격언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도서관은 구체로 되어있다. 그 것의 정 중심은 각 개의 육각형이고, 그것의 원주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그 당시에 팽배해 있던 또 다른 미신에 대해 알고 있다. 소위 <책의 인간>에 대한 미신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육각형, 어느 책장에는 (사람들이 추론하기를) <나머지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책이 존재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 어떻게 그가 거주했던 그 고귀한 육각형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일례들은 한 천재적인 사서로 하여금 <도서관>이 가진 기본적 법칙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사상가는 모든 책은 서로 얼마나 다르건 간에 동일한 원소들로 되어있다고 판단했다. 즉 띄어쓰기에 따른 공백과 마침표와, 쉼표, 그리고 스물 두개의 알파벳 철자. Borges, op.cit. Tomo I, pp.465-470


 마지막 인용은 매우 흥미롭다. <도서관>을 이루고 있는 책들은 전통적인 권위를 가지는 책이 아니고 우주 자체를 이루고 있는 텍스트들의 일부라고 해석할 때 보르헤스의 지적은 텍스트의 구성요소 혹은 일차적 요소로서의 ‘문자’와 유사하다. 데리다가 사용하는 문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글자(letra)의 개념을 넘어서며, 글자도 문자(escritura) 속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오히려 문자가 인간에게 글자를 창출케 한 사고의 실험적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차이와 흔적이 만드는 모든 유형적 무형적 관계의 주고받는 텍스트의 직물짜기에 해당한다. 김형효. op.cit. p.74


 보르헤스가 알파벳과 문장 부호들이 모든 책을 이루고 있다고 한 언급은 문자를 단지 소리를 기록해두기 위한 부차적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전통적인 관점과 확실하게 구분된다. 데리다는 소쉬르를 비판하면서 문자가 소리의 보조역할에 머물지 않고 이미 소리의 현현 속에 문자가 침투해 들어가 있음을 지적했다. 보르헤스와 데리다는 공통적으로 우주의 중심에는 어떤 목소리가 존재하며 그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신화를 붕괴시키는 작업을 행했다. 


 보르헤스의 잘 알려진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Pierre Menard, autor del quijote」 에서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데리다가 지적한 책의 의미규정과 책을 쓰는 행위에 대한 개념이 파괴된다. 로드리게스 모네갈에 의하면 데리다는 이 작품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강의 중 이 작품에 대해서 토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Aizenberg, Edna, Ed., op. cit., p.135


 이 작품에서는 가상의 작가 삐에르 메나르가 등장하고 그의 업적을 새롭게 재평가하는 화자는 그의 작품 목록을 다시 만든다. 삐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단어와 단어, 행과 행이 일치하도록 다시 쓰는 작업을 시도했다. 소설의 서술자는 메나르의 작업이 우리들 시대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작품일지 모른다고 평가하며, 17세기에 쓰여진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현 시대의 메나르의 작품의 비교를 통해서 글자 한자 틀리지 않는 작품이 새로운 미학적, 비평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 키호테』 제1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암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정의한다. 메나르에게 있어서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다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Borges, op.cit. Tomo I, p.449


 프랑스 상징주의자의 생소한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텍스트란 일점으로 지향될 수 있는 적합한 해석을 가질 수 없으며 텍스트의 고유성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므로 텍스트의 주인을 찾을 수 없으며, 그 것을 가공하고 재해석하는 데는 무한한 자유와 놀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동일한 문장이 전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은 독자에게 저자의 영향력 아래에서 재한된 독서만을 행해야 하는 제약을 없애준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텍스트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데리다가 전개한 책과 텍스트의 대비와 비교될 수 있는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III. 파르마콘 - 상징적인 부친살해로서의 글쓰기

 

 데리다는 ꡔ산종Dissèminationꡕ 에 실린 에세이 「플라톤의 약국」 에서 플라톤의 저작 「파이드로스Phaidros」 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서구의 사상체계에 내재해 있는 음성중심주의를 분리해 내고 플라톤 자신도 음성언어와 문자언어가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서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시대’의 기원을, 말하기가 쓰기보다 우선이라고 가르치는 지시(instruction)가 발견되는 순간을,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읽어내고 있다 크리스토퍼 노리스, ꡔ데리다ꡕ,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pp. 40-41
.
 이 에세이는 소크라테스가 파에드로스에게 문자의 기원과 관련된 이집트 신화를 이야기 해주는 장면에 우선 주목한다. 만물의 아버지인 타무스왕이 통치하고 있던 이집트에서 튜트Theuth라는 신이 문자를 발명한다. 튜트는 숫자, 계산, 기하학, 천문학, 주사위 놀이의 발명자로서 알려져 있다. 튜트는 왕에게 자신의 발명품이 이집트 사람들이 기억을 오래 보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튜트는 왕에게 문자가 파르마콘(pharmakon)과 같이 기능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는 치료약과 독약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데리다가 인용한 텍스트에서 파르마콘은 처방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튜트는 말했다. ‘이 도구는, 나의 왕이시여, 이집트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해줄 것이며 기억을 향상시킬 것입니다. 나의 발명품은 기억과 현명함 모두에 대한 처방(pharmakon)입니다. This discipline, my King, will make the Egyptians wiser and will improve their memories: my invention is a recipe(pharmakon) for both memory and wisdom.’"> Derrida, op.cit., p.75


 이러한 튜트의 제의에 대해서 왕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그는 문자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의존하려는 마음만을 키워서 기억력을 약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튜트가 발명한 문자를 ‘파르마콘으로서의 글쓰기(writing as a pharmakon)’로 파악한다. Ibid., p.94

 

 이 신화는 외면적으로도 문자를 음성언어보다 하위 범주로 구분하고, 유용성보다는 해악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고 있는 시각을 유발한다. 말로서 왕국을 다스리는 타무스 왕에게 문자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신이자 왕인 그는 글을 쓸 줄 몰랐지만, 무지 혹은 무능력은 오직 그의 군주적 독립성을 증명해줄 뿐이다. 그는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그는 말하고, 그는 명령하고, 그리고 말들로서 충분했다.   
 
 파르마콘은 아버지에게 제시되었고, 그에 의해서 거부되고, 비하되고, 버려지고, 비난받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글쓰기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한다. Ibid., p.76


 문자는 오히려 왕의 명령을 복제하고 기록해 두어 말로 이루어진 명령 없이도 권위를 상징하게 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을 대신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문자는 만물의 아버지인 타무스 왕의 사생아와 같다. 왜냐하면 타무스 왕의 진정한 아들은 문자가 아니라 말씀(logos)이기 때문이다. 김형효. op.cit., p.102
 

로고스는 그 아버지의 현존적인 도움 없이는 그 스스로의 현존속에서 파괴되어버리는 그런 아들이다. 그를 위해서 말하고 그를 위해 대답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이다.  즉 현전 없이는 스스로 무너지는 아들이다. 아버지가 없이는 그 아들은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그러한 부재는 물론 매우 다양한 양태로서, 뚜렷하게 혹은 혼란스럽게, 계승적으로 혹은 공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즉 자연적인 혹은 폭력적인 죽음을 통해서, 임의적인 죽음 혹은 부친살해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잃는 것이다. Derrida, op. cit., p.77
 

 또한 데리다는 아버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로고스가 전통적으로 선(善)의 의미를 취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권위를 따르는 아들이 정당성을 취득하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Ibid., p.81


 즉, 서양 문명의 기저에 위치해 있던 로고스에 대한 숭배는 아버지로부터 전해지는 음성을 통해 밝혀지는 진리를 현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윤리적 모범으로 파악하는 것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다.  


 타무스 왕에게는 토트Thot라는 아들이 있었다. 토트는 아버지의 곁에서 대변인 역할을 해왔다. 토트는 아버지의 말을 만민에게 잘 전달시키기 위해서 왕의 말을 분절시키고 차이를 분명히 짖는 그런 일을 하였다. 그래서 토트는 문자를 창안한 신 튜트와 같이 차이와 분절을 짖는 신으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토트는 곧잘 제우스의 전령 역할을 했던 헤르메스와 비유된다. 토트는 타무스 왕의 대리  역할을 하지만 완전한 신하는 아니다. 왕의 부재 시 대신 왕국을 통치하기도 하지만 헤르메스처럼 교활하고 영리하다. “아들로서의 각인: 튜트, 토트, 나부The Filial Inscription: Theuth, Thoth, Nabu” 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플라톤의 약국」 1부 3장에 인용된  「파스칼의 구」의 일부는 토트와 헤르메스를 동일인물로 보는 보르헤스의 시각을 인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데리다에 의해 인용된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세계의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계속한다. 제노파네스에 의해서 공격 받았던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은 시적인 허구 혹은 악마들로 축소되었지만, 단 한 명,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o는 상당한 수의 책을 구술했는데(Clemente de Alejandria에 의하면 42권, Iamblicus에 의하면 2만 권, 헤르메스이기도 한 토트의 사제들에 의하면 36,525권) 그 책에는 모든 것들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환영적인 도서관의 부분들은, 3세기 이후로 편집되거나 위조된, 소위 헤르메스전집Hermetica을 형성한다. Borges, op.cit., Tomo II, p.14
 

 이렇게 해서 튜트, 토트, 헤르메스의 사이에는 일정한 연결점이 형성되고 Derrida. op. cit., p.88
, 튜트가 발명한 문자라는 파르마콘-치료약이 어떻게 해서 아버지이자 진리를 말하는 신적인 존재인 타무스 왕에게 파르마콘-독약으로 받아들여져 경계의 대상이 되는지 드러나게 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파르마콘은 치료약이 될 수 있지만 후유증이 남을 여지가 있으며, 또한 문자가 아버지의 현존 없이 그 권위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파르마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은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에서 보자면 잡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적 생명의 유기체적>인 질서에 대한 도전을 하는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거부된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문자는, 즉 파르마콘은, 진리의 참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지식을 요령과 기술로서 가공하여 사람들의 지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소피스트들의 논리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파르마콘의 특징을 플라톤과 같이 위협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상호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차이를 형성하고 그 차이가 모순 대립으로 가지 않으면서 차이와 차이가 서로 얽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문자학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형효, op.cit., p. 105.


 데리다에 의하면 문자의 신인 토트는 헤르메스처럼 왕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다. 그는 가면을 쓴 모사가 이며, 협잡꾼이고, 카드 놀이에서 어느 특정한 패에도 속하지 않지만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커(joker)에 해당한다. Derrida. op.cit. p. 93


 문자는 이와 같이 음성언어에 종속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음성언어와 맞물려 있으며 상호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인 것이다. 나아가서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특정한 의미와 범위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해석을 내부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로부터 인용된 두 번째 제문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우스 떼르띠우스Tlön, Uqbar, orbis tertius」 의 일부이다.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단지 이미 흘러가버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과정에 대한 어슴프레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조작되고 훼손된 기억, 또는 반영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학파는 우주의 역사 -그 곳 속에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삶의 정말 하잘 것 없는 여러가지 형태들이 들어있는-란 악마와 타협한 한 하급 신이 만들어낸 하나의 문서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다른 학파는 우주란 마치 암호 표기법과 비교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한다 Borges, op.cit., Tomo I. p. 437
.

 데리다의 텍스트 속에서 보르헤스의 문장은 일점근원을 벗어난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한 공간의 일 예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작되고 훼손된 기억이 삶을 형성하고 있으며, 우주의 역사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문서로 보는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 역사란 진실과 실제 일어나던 사건의 정확한 기술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는 플라톤이 경계했던 문자의 자기 복재적이며, 부친 살해적인 위험성이 재현된 형태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세계 속에서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진리의 근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글쓰기는 기계적으로, 그 반복 속에서 떠받치고 수행하는 살아있는 정신 없이도, 즉 진실 자체의 현존이 없이도 자신을 스스로 반복시킬 수 있는 기표의 능력이 된다. Derrida. op.cit., p. 111


 문자는 자기 반복적이며, 스스로 아버지의 말씀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소명하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말중심주의적 서구전통의 시각에서 보자면 쓸모없는 말장난과 고의적인 의미의 혼란을 유발시키는 위험한 존재이다. 글쓰기와 글쓰기를 통해 생산되는 텍스트만의 고유한 영역은 전통적인 진리의 영역을 오염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의 권위를 위협하는 특징을 지닌다. 로드리게스 모네갈은 보르헤스의 글쓰기가 데리다가 「파에드로스」의 분석을 통해 밝힌 것과 유사하게 고아상태와 부친살해적 전복에 대한 욕망이 나타난 것라고 지적한다.   


 보르헤스의 아버지는 스스로 작가가 되기를 염원했으며, 그 소망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다. 항상 아들에게 글쓰기를 연습할 것을 권했다. 보르헤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해에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는 큰 사고를 당하는데 로드리게스 모네갈은 이것을 상징적인 자살의 의식을 행한 것이라고 본다. 이 사건 이후 보르헤스는 『픽션들』과 『알렙』에 수록되는 대표적인 단편 작품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작품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토록 숭앙했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던 바로 그 문학 자체를 파괴하거나 해체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글쓰기에 있어서의 은연 중의 부친 살해는 보르헤스가 고아가 된 순간, 아버지의 부재(아버지의 목소리의 부재)에서, 바로 그 순간에 실행되었다. Aizenberg, Edna, Ed., op. cit., pp.134-135
 

 보르헤스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일점근원에서 벗어난 텍스트적 특징들은 보르헤스가 작가(아버지)의 위치에 다가가려 하지 않고, 독자(아들)로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욕망이 나타난 것일 수 있다. 보르헤스는 여러 작품에서 부성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혹은 은유적으로 해석되는 보르헤스의 언급은 파르마콘으로서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부친살해적인 경향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보르헤스 자신은 작가가 아니며 그의 텍스트들의 독자일 뿐이라고 스스로 설득함으로서만-결국 거짓이지만- 글을 쓰는 저자가 될 수 있었다는 Ibid. p.135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만물의 아버지인 아모스 왕의 승인이 필요 없는 튜트의 발명품만으로 이루어진 보르헤스의 세계-문서들, 한 권의 책 혹은 도서관 그 자체인-가 형성될 수 있었다.
 
IV. 결론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데리다는 로드리게스 모네갈과의 인터뷰에서 보르헤스의 작품에 매력을 느꼈음을(“Il m‘a sduit”) 고백한 바 있다. 데리다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글쓰기와 차이』에 실려있는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인용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들이 보르헤스와 데리다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텍스트 분석으로 형성된 가설을 입증하는데 혹은 두 사람의 영향 관계의 방향을 결정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최소한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두 사람의 텍스트를 비교하는 작업에 따르는 자의성의 함정을 피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분석에 들어가기 이전에, 나는 데리다가 비밀리에 말해준 또 다른 일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그는 얼마 전 코넬 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타카Ithaca 공항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보르헤스를 보았다. 그는 보르헤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낼 것인가 망설였는데, 이는 데리다는 보르헤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 보르헤스를 만나고자 하는 욕망이 이러한 상황에서 전형적인 억제의 감정을 눌렀다. 데리다는 보르헤스에게 다가갔고 자신은 그의 독자이며 보르헤스를 존경하고 있다고 소개했으며,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담소를 나누면서 뉴욕까지의 나머지 여행을 함께 했다. 나는 이미 그 일화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이미 코넬 대학에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또한 나는 보르헤스가 자신이 만나는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오래된 습성에 대해서도 익숙했다 Ibid. p.134
.
 
앞에서 우리는 보르헤스와 데리다가 가지고 있던 책 혹은 텍스트에 대한 관점을 비교해 보았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책이라는 한정적이고 일점근원적인 의미 체계를 벗어나 직물짜기의 구조로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으며 차연 작용에 의해서 그 의미를 살포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보았다. 이는 보르헤스가 세계 전체를 도서관, 혹은 한 권의 책으로 보면서 그 세계 내에서 자유로운 해석과 사유의 놀이를 만들어낸 것과 상통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가 「플라톤의 약국」에서 플라톤 이후 유럽 사상사의 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음성중심주의와 아버지중심주의의 실체를 밝히고자 했던 작업은 보르헤스가 단편과 에세이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토트, 튜트, 헤르메스가 유사한 작용을 하는 기표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보르헤스를 인용하였고, 우주의 역사라는 것이 하나의 문서일 수도 있다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우스 떼르띠우스」의 가정은 데리다의 논의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독약과 치료약의 이중 의미를 가지고 있는 파르마콘은 데리다에게 있어서 차연을 통한 무한한 의미의 연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파르마콘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진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 없이도 스스로 텍스트를 재생산하고 변질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부재를 두려워하지 않는 속성은 보르헤스의 작품들 자체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숫자를 증식시키는 부성에 대해 보르헤스가 표현했던 혐오감은 그 자신이 작가-아버지의 위치를 거부하며 아들-독자의 위치에 머물면서 전통적인 창작이 아닌 다시 읽기 추구했던 그의 일생을 통해서 분석될 수 있다. 


보르헤스가 이미 30년대에 쓴 텍스트들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는 80년대 이후의 문학 비평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 존재하고 일정한 시기를 지나 비평의 관심을 끌고 그 영향력 아래 새로운 작품이 생성되고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는 경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경우지만, 보르헤스의 경우 작가임을 포기하고 작가/독자/비평가의 모호한 위치를 스스로 점했으며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의 일부를 미리 이론적 입장에서 기술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은 문학의 기호들이 변하기 전까지, 인식론적 범주가 전통적인 이론들과 별개로 다시-숙고하기 의 단계로 진입하기까지 그리고 서양의 로고스가 도전을 받기까지 읽혀질 수 없는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Alfonso de Toro y Fernando de Toro, Ed., Jorge Luis Borges: Pensamiento y saber en el siglo XX, Madrid, Iberoamericana, 1999. p.125

 

보르헤스의 작품을 사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평적 범위, 즉 시간적 구획을 정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불명확한 상태에서는 분류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보르헤스는 서양 정신의 근본을 이루고 있던 로고스의 존재를 예민하게 감지했으며, 그 권위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던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작업에 동반자가 되어준 보르헤스의 존재는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형효. ꡔ데리다의 해체철학ꡕ, 민음사, 1993.
크리스토퍼 노리스, ꡔ데리다ꡕ,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쟈크 데리다, ꡔ글쓰기와 차이ꡕ, 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1.
 
Aizenberg, Edna, Ed., Borges and His Successors, Colo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0.
Borges, Jorge Luis, Obras Completas, Buenos Aires; Emecé Editores S.A., 1974.
Derrida, Jacques, Dissémination, translated by Barbara Johns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M. Kason, Nancy, Borges y la posmodernidad,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1994.
Alfonso de Toro y Fernando de Toro, Ed., Jorge Luis Borges: Pensamiento y saber en el siglo XX, Madrid, Iberoamericana, 1999.

 

================================================

 

1) Nancy M. Kason, Borges y la posmodernidad,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1994. p.8

2) Ibid. p.9에서 재인용.

3)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은 데리다가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또 다른 심문』과 위에서 언급된 까요아의 『미로들』에 소개된 단편들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데리다의 기억에 의하면 61년에서 62년 사이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읽었으며, 그 후에는 새로운 작품을 접하지 않고 기존에 읽은 작품들을 재독했다고 한다. Aizenberg, Edna, Ed., Borges and His Successors, Colo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0. p. 133

4) 김형효. ꡔ데리다의 해체철학ꡕ, 민음사, 1993 p.18

5) Ibid. p.19

6) Derrida, Jacques, Dissemination, translated by Barbara Johns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pp.184-188

7) 김형효, op.cit., p.20

8) Borges, Jorge Luis, Obras Completas, Tomo II. Buenos Aires; Emecé Editores S.A., 1974, p. 13

9) Borges, op.cit. Tomo I, pp.465-470

10) 김형효. op.cit. p.74

11) 로드리게스 모네갈에 의하면 데리다는 이 작품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강의 중 이 작품에 대해서 토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Aizenberg, Edna, Ed., op. cit., p.135

12) Borges, op.cit. Tomo I, p.449

13) 크리스토퍼 노리스, ꡔ데리다ꡕ,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pp. 40-41

14) 데리다가 인용한 텍스트에서 파르마콘은 처방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튜트는 말했다. ‘이 도구는, 나의 왕이시여, 이집트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해줄 것이며 기억을 향상시킬 것입니다. 나의 발명품은 기억과 현명함 모두에 대한 처방(pharmakon)입니다. This discipline, my King, will make the Egyptians wiser and will improve their memories: my invention is a recipe(pharmakon) for both memory and wisdom.’"> Derrida, op.cit., p.75

15) Ibid., p.94

16) Ibid., p.76

17) 김형효. op.cit., p.102

18) Derrida, op. cit., p.77

19) Ibid., p.81

20) Borges, op.cit., Tomo II, p.14

21) Derrida. op. cit., p.88

22) 김형효, op.cit., p. 105.

23) Derrida. op.cit. p. 93

24) Borges, op.cit., Tomo I. p. 437

25) Derrida. op.cit., p. 111

26) Aizenberg, Edna, Ed., op. cit., pp.134-135

27) Ibid. p.135

28) Ibid. p.134

29) Alfonso de Toro y Fernando de Toro, Ed., Jorge Luis Borges: Pensamiento y saber en el siglo XX, Madrid, Iberoamericana, 1999.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