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의 영점(零點), 해체론의 선물
김 상환 (서울대 철학과)
1. 해체론과 욕망의 삼각형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붕괴와 더불어 시작됐다. 재현 모델은 주체와 현실적 대상을 잇는 이자(二者) 관계를 축으로 한다. 반면 현대 사상은 그 주체-대상의 관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축의 발견으로 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축과 더불어 원래 이자 관계는 삼자 관계로 변형된다. 현대 이론은 이 삼자 관계를 그려내는 다양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욕망의 삼각형은 이 점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다. 이 삼각형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보완하는 제3의 항을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 제3의 항은 ‘매개’의 위치에 해당한다. 즉 주체가 어떤 대상을 욕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욕망하는 타인과 관계해야 한다. 주체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이는 또한 스피노자의 ‘정서적 모방’이 함축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매개항은 단순히 주체-대상의 관계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완은 그 이자 관계의 가능 조건이고, 따라서 그 관계에 선행한다. 먼저 있는 것은 그 제3의 항에 대한 주체의 관계이고, 주체-대상의 관계는 그 일차적 관계의 귀결이다.
‘주체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욕망 개념 역시 삼각형의 구도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도 주체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매개되는 위치에 있고, 그 매개가 욕망의 조건이다. 게다가 욕망이 주체의 내용이자 실체임을 인정한다면, 매개자의 매개가 주체의 가능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매개, 매체, 미디어, 매트릭스. 그것이 주체의 자궁이자 젖줄이다. ?매트릭스 Matrix?는 사유하는 주체ego cogito와 존재하는 주체ego sum 사이의 괴리 안에서 펼쳐지는 영화이다. 그 괴리는 ‘소외’의 거리이다. 타자의 욕망인 한에서―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인 한해서― 주체의 욕망은 소외된 욕망, 조작되고 고안된 욕망, 타율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외의 상황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타자 ‘안’으로 소외되었거나 종속된 주체가 자유를 되찾기 위한 결단과 투쟁의 과정, ‘분리’의 과정에 있다. 그 해방의 서사는 사유하는 주체가 자신의 잃어버린 존재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 ‘코기토’와 ‘숨’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명법을 중핵으로 한다.
아마 이보다 더 라캉적인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매트릭스?는 결코 보드리야르적인 영화가 아니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환상 이론으로 발전한다. 그런 전환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 고유한 욕망의 대상-원인(대상 a)과 묶이는 축이 주체-대타자의 관계를 대체할 때, 다시 말해서 그 무의식적 대상이 대타자를 대신해서 매개의 위치를 차지할 때 일어난다. 대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마라. 다만 너 자신의 대상을 발견하고 그 대상을 고집하라. 이것이 이른바 환상($◇a)의 윤리학이다.
라캉의 욕망 이론을 도식화하는 삼각형은 현대의 급진적 저자들의 이론을 요약하는 함축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가령 들뢰즈의 철학은 대상 a의 자리에 ‘잠재적 대상’을 놓는다. 이 잠재적 대상은 무의식적 대상처럼 주체-현실적 대상의 관계가 가능하게 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되기 시작하는 매듭이다. 더블 바인드double bind. 왜냐하면 주체-현실적 대상의 관계는 그 잠재적 대상에 의해 묶이는가 하면 풀리기 때문이다. 라캉의 대상 a는 물론 들뢰즈의 잠재적 대상은 수축과 이완의 이중 운동에 놓인 존재론적 계사이다.
이 계사적 대상들은 가장 탁월한 탈형이상학적 대상들 자체이다. 자기 동일성의 결여, 자기 존재의 결여, 전치(자리바꿈)와 역설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대상들은 전통 형이상학의 문법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 로고스의 손을 빠져나가는 것, 재현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주체-대상의 관계, 그 재현의 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이 탈형이상학적 대상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 재현의 축을 기저로 하는 형이상학은 그 탈형이상학적 대상과 이어지는 축(주체-잠재적 대상, 현실적 대상-잠재적 대상)이 없다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없다. 탈형이상학적 대상은 재현 자체의 바깥이면서 안에 있는 대상, 외심적(外心的) 대상이다.
데리다의 해체론 역시 삼각형의 구도를 그리고 있다. 대상 a나 잠재적 대상의 자리, 그 제3의 위치에 무엇을 놓을 수 있을까? 해체론은 늘 그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파르마콘이나 그라메 등은 그런 물음에 대한 답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탁월한 해체론적 대상은 무엇보다 선물, 동don, donner이다(이것을 ‘똥’이라고 발음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만일 해체론이 해체하는 것이 구축 가능하거나 구성 가능한 모든 것이라면, 그 가능한 모든 것은 넓은 의미의 ‘경제’로 표시된다. 이 경제는 집oikos과 규범nomos으로 이어지는 의미론적 연락망 전체(체계, 구조, 총체성, 내면성, 가까움, 고유성, 전유, 동(일)화, 동일성, 유기체, 원리, 규칙, 이론, 표준, 중심, 뿌리 등등)를 집약하고, 그래서 로고스의 경제 혹은 형이상학의 경제 자체를 의미한다. 선물이 탁월한 해체론적 대상인 이유는 그것이 해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선물은 해체 불가능한 경제적 대상이고, 이 대상은 교환의 질서 일반에 초재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라는 의미에서 외심적이다. 해체론이 어떤 주체라면, 이 주체는 이 불가능한 대상 앞에 있다. 오히려 거꾸로 그 대상 앞에 끈질기게 위치하므로 비로소 해체론은 어떤 주체, 욕망의 주체, 환상의 주체일 수 있다. 선물은 해체론적 욕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선물은 해체론적 욕망의 대상이기 앞서 형이상학적 욕망의 대상이다. 다만 해체론은 형이상학과 다른 방식으로 그 대상을 욕망할 뿐이다. 다르게,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선물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밥을 먹는 것만큼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복권에 당첨되는 경우에 비하면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선물을 받아본 경험이 있고, 그 출생부터가 자연의 선물이나 부모의 선물로 새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통념은 데리다를 읽으면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경제가 부유해질수록 진부해지는 것이 선물이지만, 해체론적으로 재구성된 경제 안에서 선물은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한 것, 의미론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 불가능한 것, 변증법적으로도 불가능한 것, 게다가 일체의 학문은 물론 정신분석학으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이 선물이다. 정의하거나 정위(定位)할 수 없는 선물, 그것은 불가능한 것 일반의 가장 탁월한 상징이다. 선물은 논리적 아포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아포리아이다.
2. 선물의 역설
데리다는 이 아포리아를 니체와 하이데거 사이에서 처음 발견한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그 해석에 대한 해체론적 재해석에서 유혹적인 얼굴을 과시하던 것은 여자, 진리로서의 여자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자는, 또는 남자는 니체가 말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있을까? 존재 사유는 니체의 여자를 사유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 여자는 복종할 때도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취할 때, 여자는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 알 수 없다. 때로 여자는 자신의 몸을 주지만 지배하기 위해서 준다. 여자는 받기 위해서, 받으면서 준다. 남자는 여자를 취하되 여자가 허락하므로 취한다. 성적 차이의 문제, 남녀 관계의 문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주고받는 문제, 그것은 소유와 전유의 물음으로 귀착한다. 하지만 철학은 이 물음을 결코 통제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변증법도, 현상학도,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도 그 물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만일 ‘주기’와 ‘취하기’, ‘소유하기’와 ‘소유되는 것’ 사이의 대립이 일종의 초월론적 가상이라면…, 소속화의 과정은 모든 존재론적 결정 가능성을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변증법을 벗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적 소속성le propre, 전유, 탈전유, 지배, 예속 등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없다. …소속화는 근본적으로 결정 불가능성을 띠므로, ‘그것은 무엇인가’의 물음보다 더 강력하고 존재의 의미나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보다 더 위력적이다. …그와 동시에 소속화의 과정은 언어, 상징적 교환 일반의 전과정, 게다가 따라서, 존재론적 언명 전체를 조직한다. 그러므로 본래적 소속성은 존재-현상학적 질문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 혹은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은 본래적 소속성의 물음을 감당할 수 없다. 주기―취하기, 주기―지키기, 주기―해치기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교환, 증여의 도박coup de don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물음은 이 결정 불가능한 사건 안에 기입되고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속성, 고유성, 본래성le propre의 문제. 데리다가 이 문제를 통해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해체하는 출발점은 성적 차이와 남녀 관계이다. 이 남녀 관계를 구성하는 주고받음, 또는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고자 할 때의 주고받음은 하이데거적 의미의 존재보다 더 난해하고 포괄적인 사태, 보다 상위의 사태로 승격된다. 이 사태의 요체는 여성이 남자에게 자신을 허락할 때, 그 준다는 것의 환원 불가능한 애매성에 있다. “준다는 것don은 여성의 본질적 술어로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능동적으로 주는 것, 혹은 …취하도록 내버려두기/스스로 전유하기라는 결정 불가능한 동요 속에서 현상한다. 선물gift은 독Gift의 의미나 가치를 지닌다.”(같은 책, 98쪽)
하이데거도 역시 주기Geben와 선물Gabe을 생각한 적이 있다. 존재 물음을 “존재가 있다 es gibt Sein"라는 독일어의 관용적 표현 안에서 개진할 때, 그는 존재를 어떤 증여의 사태로, 그리고 이 증여의 사태를 존재 물음의 지평 안에서 충분히 해명될 수 없는 것으로 서술한다. 그 증여는 갚아야 할 채무인가, 무상의 선물인가? 존재 사유가 부딪히는 이 최후의 물음은 규명할 수 없는 비밀로 남아 있다. 존재 사유는 자신의 고유한 행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한계에 이른 셈이다. 여기서 존재의 의미와 진리는 측량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를 대신하여 데리다는 말한다. “여자 혹은 성적 차이의 존재나 본질이 없는 것처럼, ‘존재가 있다es gibt Sein’에 나오는 ‘있다es gibt’의 본질은 없다. 존재의 증여와 선물의 본질은 없다.”(같은 책, 100쪽) ?위조화폐? 1장에서는 이 선물의 아포리아가 훨씬 더 정교하게 재구성된다. 이 아포리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선물은 대가 없는 증여이다. 받기 없는 주기, 보상 없는 소비, 부채 없는 받기, 채무 없는 수용 등이 선물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 주는 자는 그 어떤 것도 되돌려 받지 않아야 한다. 선물은 회귀하거나 복귀하지 말아야 한다. 회귀나 복귀를 모른다는 점에서 선물은 모든 종류의 경제적 교환과 구별된다. ‘오이코스’와 ‘노모스’의 은유적 연락망 전체로서의 경제는 궁극적으로 순환적이거나 원환적인 구조를 이룬다. 떠난 것은 돌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는 것은 결국 받는 것이다. 준 것은 이러저러한 우회로를 통해 처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경제적 질서는 결국 “오디세이적 구조”(18쪽)를 이루거나 “상징적 구조”(26, 38쪽)를 이룬다. 주기와 받기, 준 것과 받은 것은 어원적 의미의 상징symbolen처럼 언젠가 합쳐지고 일치하기 위해서 만든 두 쪽, 만남의 약속을 위해 헤어진 두 쪽, 계약의 상징이다. 경제적 질서는 그 만남의 약속이 보증하는 믿음과 신용 안에서 열리는 교환의 질서, 채무와 변제의 질서이다. 반면 선물은 등가적 교환의 대상도, 탕감을 전제하는 빚도 아니다. 주는 자가 보상을 기대하거나 받는 자가 채무의식을 느끼는 순간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일 수 없다. 선물이 어떤 관계를 수반한다면, 그것은 상징적 관계도, 계약적 관계도, 교환의 관계도 아니다. 선물은 이런 비-회귀성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경제적이다. 이상적인 선물은 경제적 순환이나 원환의 바깥에 위치한다.
전통 형이상학은 이런 경제적 순환이나 원환을 시간 자체와 동일시했다. 현전적 현재, 현재적 순간을 중심으로 시간 전체를 이해하는 경우 시간은 태양의 경제, 그 경제의 순환 주기와 같아진다. 따라서 선물은 반-경제적인만큼 시간의 순환에 이방적이고 이질적이다. 선물은 현전적 현재, 현재적 현전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 선물의 현재는 시간의 경제적 원환을 일그러뜨리거나 파열시킨다.(21, 30쪽) 선물의 출현은 휘브리스hybris, 광기의 사건이다.
B) 선물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주는 자든 받는 자든 선물을 선물로서 의식하거나 자각한다면,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선물을 선물로서 알아보고 재인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부채 관계, 상징적 관계, 계약 관계, 어떤 묶기와 결속이 성립한다. 그 결과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일 수 없다. 선물은 선물로서 동일시되고 그 정체성을 획득하자마자 선물의 자격을 잃어버린다. 선물에 대해 정체성 확인은 언제나 정체성 파괴로 이어진다.
선물은 현상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주는 자에게든 받는 자에게든 선물은 선물로서 나타나자마자 경제적 순환의 여정에 놓이고, 따라서 사라진다. 선물에 대해 나타남(현상) 자체가 소멸이자 말소 혹은 자기 파괴와 같다.(21쪽)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선물은 선물이기 위해서 결코 어떤 의도나 지향성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선물이 선물이기 위해서는 주는 자에게든 받는 자에게든 선물로 현상하지 말아야 한다.
선물은 존재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선물은 실존하지 않고 현재적으로 현전하지 않는다. 만일 선물이 현전한다면, 더 이상 현전하지 않는다.”(28쪽) 선물은 선물이라 할 수 있으면 이미 선물이 아니다. 선물은 있다고 하자마자 없는 셈이다. 선물은 정의되는 순간 그 정의에 의해 파괴되고 취소된다. 정의를 통해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 그것이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의 진리는 비-선물 또는 선물의 비-진리와 등가적이다.”(42쪽) 선물은 역설의 구현이다.
3. 선물의 선물
선물은 탈의미, 탈현전, 탈시간, 탈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는 선물이 무의식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무의식은 여전히 경제적이다. 무의식의 경제에서 억압된 것은 복귀하고 회귀한다. 증상을 가져오는 것, 그것은 선물일 수 없다. 선물이 경제적 순환 안에서 잊혀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억압에 의해서 망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선물이 망각되는 것이라면 “절대적으로” 망각되어야 한다. 이 절대적 망각은 무의식보다 멀리(혹은 가까이) 있다. 선물은 무의식 이론의 저편이다.(29-30쪽)
선물이 무의식 이론의 저편이라는 데리다의 언명은 이렇게 옮겨볼 수 있다. “선물은 라캉적 의미의 대타자, 그 대타자의 논리나 법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기표의 질서로 편입되는 것, 그것이 라캉적 의미의 소외이다. 이 소외는 사실 주체 이전의 주체가 ‘이성적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소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통과를 의미한다면, 그 통과는 인간이 전통적 의미의 ‘합리적 동물’, ‘말하는 동물’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소외, 곧 예속화subjectivation이고 주체는 이런 예속화를 대가로 주체가 된다. 주체는 대타자의 매트릭스 안에서 비로소 처음 주체가 된다. 주체는 대타자, 그 합리적 질서, 그 경제적 질서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따라서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경제적 주체이다. 하지만 이 셈하고 계산하는 주체는 선물의 주체일 수는 없다. 주체는 소유의 주체, 상징적 교환과 계약의 주체, 오디세이적 모험의 주체일 수 있다. 주체는 갔다가 올 수도, 주었다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물은 그런 주체들 사이에서 오고 갈 수 없다. “주체나 대상이 있는 곳, 그 곳에서 선물은 배제된다. 어떤 주체든 어떤 대상을 어떤 다른 주체에게 선물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오히려 주체와 대상은 선물의 정지된 효과들, 곧 선물의 멈춤 장치들이다.”(38쪽)
여기서 다시 삼각형을 생각하자. 주체와 현실적 대상의 관계, 그 관계가 만드는 축에는 선물이 위치할 수 없다. 선물은 그 축 위에서 재현되거나 계산될 수 없는 것, 나타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주체든 대상이든 모두 이 선물의 효과들이다. 주체, 대상, 그리고 주체-대상 관계의 가능 조건은 선물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주체-대상의 축에 이중으로 관계한다. 한편으로는 바깥에, 다른 한편으로는 안에 있다. 한편으로는 묶고, 다른 한편으로는 푼다. 한편으로는 관계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한다. 주체-대상의 축과 선물 사이의 관계는 “관계 없는 관계”(45쪽)이다. 이런 이상한 관계 안에서 선물은 그 경제적 축에 질서와 척도를 부여하면서 그 척도를 넘어선다. 경제적 축에 대해 선물은 “척도 없는 척도”, “도를 넘는 절도”(45쪽)이다. 경제적 척도, 대타자의 법, 주체의 절도는 이 휘브리스에 대한 방어이다. 주체는 “선물의 약속 안에서 예고되는 이 휘브리스나 이 불가능성을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계산과 교환을 통해 지배하려는 염려에서 구성된다.”(39쪽)
이것이 주체가 있게 된 경위, 유래이다(보다 자세히는 131-132쪽 참조). 그러므로 주체가 주어진 어떤 것이라면, 그 주어짐의 첫 번째 조건은 선물 혹은 선사에 있다. 주체는 선물의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이 주는 것은 주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타자의 경제, 로고스의 경제, 그 경제적 원환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선물에 의해 원환이 넘치게 된다면, …이런 범람은 단순히 언표 불가능하고 초재적이며 무-관계성을 띤 어떤 외면으로 흘러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환은 바로 그 범람을 통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고, 바로 그 범람을 통해 경제가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선물에 의한 범람은 원환 안으로 ‘육박해 들어가고engage’ 원환을 돌아가게 만든다.”(47쪽. 그 밖에 54, 64쪽 등 참조)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경제적 원환의 “제일 운동자premier moteur”이다. 선물은 있는 순간 없는 것, 나타남 자체에 의해 무화되는 역설적 대상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대상이 경제적 원환 전체를 움직이는 첫번째 동인이다. 이 원환 안에 위치한 주체에 대해 사유, 욕망, 언어의 유래는 이 제일 운동자에 있다.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이 불가능한 대상에 관계할 때야 사유, 욕망, 언어는 비로소 시작되고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사유한다는 것, 욕망한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단지 그 불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 불가능한 대상의 절도 ‘없는’ 절도mesure sans mesure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일 사유, 명명(命名), 욕망의 고유한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아마 이 한계의 절도 없는 절도에 준할 때만 가능할 것이고, 그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관계 ‘없는’ 관계rapport sans rapport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즉 …고유한 의미에서 욕망하고 명명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오로지 ‘아직’ 또는 ‘이미’ 욕망하고 명명하고 사유하는 ‘과도의’ 정도mesure démesurante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45-46쪽)
사유는 사유할 수 없는 것 앞에 위치할 때만 비로소 사유이다. 언어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이름하려 할 때 비로소 언어이다. 욕망은, 체험할 수 없고 욕망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그 불가능한 대상이 사유, 언어, 욕망의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의 시작이자 끝, 기원이자 한계이다. 교환은 등가적이든 잉여가치를 낳든 이 영점(零點), 이 블랙홀 안에서 탄생하고 죽는다. 그 영점은 교환의 요람이자 무덤이다. 이런 영점에서 모든 이항대립은 무력해진다. 현전과 부재, 참과 거짓, 시작과 끝, 생명과 죽음은 대립한다기보다 공존한다. 공존한다기보다 서로의 위치를 바꾸고, 위치를 바꾼다기보다 뒤섞인다. 영점은 이항대립의 진공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Es gibt의 의미 안에서 사유할 때 그런 영점을 “숲속의 빈터Lichtung”라 불렀다. 여기서 숲은 형이상학이고, 그래서 숲속의 빈터란 형이상학 안의 빈터, 그러나 형이상학이 알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곳은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 소리와 고요가 서로 만나고 유희를 벌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항대립적 사유로서의 형이상학은 이런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노자는 도(道)를 종종 그런 빈터로 묘사한다. 도는 차라리 그 빈터에서 일어나는 유희, 승승(繩繩)의 유희일 것이다. 신나는 놀이, 춤. 그 승승의 춤은 흥(興) 없이 시작될 수 없다. 어쩌면 도는 그 흥 자체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로고스의 경제, 그 경제적 원환 안의 모든 교환은 그 흥의 선물이다. 교환의 영점에 해당하는 선물은, 그것이 주는 것은 흥이다. 그 흥이 모든 교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시작이자 마무리이다. 모든 것은 흥 속에서 나타나고 흥 속에서 사라진다.
데리다는 그 흥에 해당하는 것을 휘브리스, 과도, 범람이라 한다. 또 절도 없는 절도, 과도의 절도, 관계 없는 관계라 한다. 아마 ‘신산(神算)’은 이런 말을 번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표현일 것이다. 인간의 계산, 형이상학적 척도를 초과하는 계산, 망아적 황홀경의 계산이 신산이다(그러나 이보다는 ‘신바람’이 더 나은 말인지 모른다).
4. 선물과 텍스트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노자). 도는 이름할 수 없다. 하지만 도를 명명하지 않으면 언어는--이미, 또는 아직--언어가 아니다. 여자를 여자라 하면 여자가 아니다(니체). 여자는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여자를 여자로서 소유하지 않으면 소유는 소유가 아니다. 존재를 존재라 하면 존재가 아니다(하이데거). 존재는 대상화할 수 없다. 하지만 존재를 사유하지 않으면 사유는 사유가 아니다. 선물을 선물이라 하면 선물이 아니다(데리다). 선물은 교환할 수 없다. 하지만 선물을 욕망하지 않으면 경제는 경제가 아니다. 선물은 이름할 수도, 소유할 수도, 사유하거나 욕망할 수도 없다. 선물은 교환도, 증여도, 수용도 불가능하다. 소유도 보존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물은 형이상학적인 것보다 훨씬 더 초험적이고 훨씬 더 초재적이다. 선물이 선물하는 것이 어떤 ‘신산’이라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한참 넘어서 있는 것,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을 우리는, 그들은, 또는 어떤 사람이든 왜 말하고 있는가? 무슨 근거나 권리로, 어떤 자격에서, 그리고 또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낭만, 비의(秘義), 신비. 그것은 몽매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 반계몽주의로서의 해체론은 몽매주의 아닌가?
하지만 데리다만큼 몽매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저자가 또 있을까? 계몽에 미치지 못하는 것, 이성적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 몽매이다. 하지만 해체론은 경험과 인식을 넘어서는 것, 과학과 이론을 초과하는 것, 경제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단순한 열광이나 열망이 아니다. 그런 신비한 것에 대한 단순한 신념이나 신앙 고백, 방언도 아니다.(46쪽 참조) 해체론은 이성을 통해 이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규칙을 통해 규칙을 넘어서는 것이 해체론적 의미의 해체이다. 해체론은 개념으로 개념을, 문법으로 문법을 분석하여 그 바깥을 발견하는 전략이고 그런 한에서 이성 사용의 극치를 추구한다.
선물은 초재적이고 초험적인 것, 신비한 것이다. 불가능성 자체, 역설 중의 역설이 선물이다. 선물은 계산할 수 없으므로 비-로고스적이고, 현전하지 않으므로 유-토피아적이다.(52~53쪽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선물에 대한 모든 이론적 정의, 또는 이론화된 선물은 어떤 가상, 이론의 (거짓된) 확장을 낳는 초월적 가상이다.(46쪽) 가령 “모스의 기념비적인 저작 ?선물론?은 선물만 빼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경제, 교환, 가격 불리기, 희생, 증여‘와’ 반대-증여, 요컨대 선물로 육박하지만 ‘또’ 선물을 무화시키는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선물에 덧붙히는 모든 보충항들은 …원환을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그 안에서 그 보충항들은 무화된다.”(3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사유는 그 가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불나비이다. 해체론은―로고스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가능한 대상 앞에 있고 그런 대상을 욕망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로고스의 경제 안에서 성립하는 욕망, 계산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욕망 저편의 욕망”(46쪽)이다. 해체론은 로고스의 길을 따라 비-로고스적인 것을 셈하고 연역하고자 한다. 유-토피아적인 것의 장소를 찾고자 하고, 욕망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이것은 ‘이성이 원리’에 반하는 것도, 그 원리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47쪽) 해체론은 이성의 원리를 쫓아 그 원리 자체의 기원과 한계, 삶과 죽음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선물이라는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어떻게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상식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52쪽)
이런 물음 앞에서 데리다는 기록, 글쓰기, 텍스트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선물은 로고스를 초과하는 순수한, 따라서 우연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어떤 과정이라면, 그 과정은 어떤 분절화의 과정이자 그 분절화를 통한 (자기)말소 과정이다. 그런 이중의 과정, 그것이 기록, 글쓰기이다. 선물의 증여는 기록(분절화)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어떤 실천적 수행이다. 그러므로 선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남긴 기록을 읽어야 하고, 거기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선물이 남기는 것, 선물의 유산은 글이자 텍스트이다. 선물은 그 유산을 통해 사후적으로 추적되어야 한다. 이것이 선물에 대한 문제제기, 선물이 거느리는 문제틀의 한계이다. 즉 “선물의 문제틀은 흔적과 텍스트의 문제틀 이후에만 성립한다.”(130쪽) “단지 흔적이나 산종의 문제틀만이 선물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131쪽)
왜 그런가? 선물이라는 불가능자는 그 자체로(즉자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 결코 현전할 수 없는 것, 따라서 간접적으로만, 사후적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삐딱하게 보기). 선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실마리는 그것이 출현하면서 사라지는 장면, “어떤 글쓰기의 장면”(132쪽)에서 겨우 찾을 수 있다(가령 모스의 ?선물론?이나 보들레르의 「위조화폐」). ‘선물의 과정’은 글쓰기의 과정이다. 따라서 “선물은 언제나 어떤 글, 어떤 기억, 어떤 시, 또는 어떤 서사의 선물일 것이다. 선물은 어떤 경우든 어떤 텍스트의 유산(遺産)일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선물의 형식적 보조물, 외적 기록이 아닐 것이다. 글쓰기는 오히려 선물 증여의 행동 자체와 묶이는 ‘어떤 사태’일 것이고, 이 ‘행동’은 기록의 의미는 물론 이와 동시에 수행적 실천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63쪽) 선물은 수행적 사건이자 기록의 사건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텍스트의 사건이다. 선물이 성립한다면 필연적으로 텍스트로서 성립한다. 선물이 주는 것은 텍스트이고, 또 텍스트가 선물의 현실적 과정이자 구조 자체이다. 요컨대 텍스트 밖에는 선물이 없다
따라서 텍스트를 뒤져야 한다. 선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말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출현-소멸하는 글쓰기의 장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들여다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선물이 불가해한 위족(僞足)을 드러내는 글쓰기의 장면부터가 희귀하고 드물지만, 그런 장면을 찾더라도 거기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 그 글쓰기의 주체가 실수하는 곳, 무엇인가 잊고 있는 곳, 계산을 못하거나 멈추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선물이 주체 앞에서 이해나 사유 불가능한 것, 감당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용서pardon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대목, 바로 그런 곳을 들여가 보아야 한다(주체는 선물의 중지, 중단, 방어, 망각을 핵으로 한다). 주체가 믿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미칠 지경인 곳, 바로 그런 곳이 선물이 선물로서 출현-소멸하는 곳이다. 선물의 서사는 광기의 서사, 주체가 광기에 빠지는 서사이다.(65-67쪽 참조)
가령 보들레르의 「위조 화폐」에서 화자가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대목이 선물이 사건화하는 장면이다. 머리가 미치도록 계산이 복잡해지다가 결국 ‘용서 못해’라고 말할 때 선물은 출현-소멸하고 있다. 그 허락 불가능한 용서pardon, 신용이 선물don의 위족이 지나가는 다리이다. 선물은 용서의 다리 이면(裏面)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의 이야기는 용서의 이야기와 함께 간다.
용서란 포용이다. 선물, 그 시뮬라크르가 일으키는 무한한 가능성을 어디까지 포용할 것인가? 무한한 교환과 축재, 회귀 없는 과정, 절도 없는 진행, 중심 없는 이산과 산종을 얼마만큼,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가? 승승(繩繩)의 범위를 묻는 이 물음이 이성과 광기, 대타자와 실재, 정상과 비정상, 좋은 경제와 나쁜 경제, 자연과 인공, 제도와 재야, 문(文)과 문학 등의 역사적 대립을 규정한다. 개념, 진리, 표준, 제도, 문학 따위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이고 따라서 선물의 역사, 선물의 선물이다. 보들레르의 화자가 친구의 선물(거지에게 준 위조화폐) 앞에서 광기에 빠지고 용서를 거부할 때, 거기서 장면화되는 것은 또한 근대 문학의 기원이자 탄생이다. 보드리야르의 텍스트는 문학의 경제, 그 경제의 크기와 테두리가 결정되는 사건을 장면화하고 있다. 그것은 문학적 언어―시뮬라크르, 위조화폐로서의 언어―의 규범화, 자연화, 제도화를 반영하는 장면화이다.(214쪽 참조)
5. 이상의 선물, 이상의 용서
하지만 거기서 장면화되고 있는 것은 문학의 경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 일반이다. 경제에 속하는 모든 것, 가령 주체와 대상, 나아가 개념화 가능한 사물 일반이 선물의 선물, ‘동don’, 똥이다. 모든 것은 용서pardon의 항문에서 나오는 똥, 설사이다.
이런 정식에서 용서는 차연différance과 기입inscription의 다른 이름이다. 이 용어들은 모두 순수한 바깥, 절대적 광기, 디오니소스적 에너지에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이름이다. 하지만 누가 관계하는가? 개념, 코드, 유기체, 생명을 지닌 것 일반,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것 일반이다. 유기체는 디오니소스적 에너지와 관계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에너지에 직접 관계할 때는 혼돈에 빠지거나 파괴될 위험에 빠진다. 유기체는 그 에너지를 수용하는 한에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에너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해야 한다. 그 방어적 수용은 선택적 수용, 수용의 지연, 수용된 에너지의 왜곡과 재선별, 동화(同化), 분절화 등의 절차를 밟는다. 그것은 원초적 에너지의 폭력에 대한 반-폭력이고, 이런 폭력의 경제가 차연이자 기입(글쓰기)이다. 그리고 그런 경제적 신진대사가 또한 용서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 문맥(컨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런 의미의 용서에서 나온 산물, 똥이다. 이 똥에는 불가능한 것, 원초적 에너지, 선물이 죽어 있다. 그 죽음의 과정이 선물의 과정이고, ‘동’이 똥으로 되는 그 과정은 유기체가 신체를 얻고 정신을 얻는 과정, 경제적 주체로서 성장하는 과정, 유기적 신진대사 자체이다. 용서는 그런 신진대사를 가리키고,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이 용서의 마지막 출구에서 나온 똥이다. 따라서 용서는 두 경제가 서로 엮이면서 승승하는 어떤 영점이다. 거기서는 선물이 놓여 있는 죽음의 경제와 유기체가 놓여 있는 생명의 경제가 서로 묶이는 동시에 풀리는 매듭, 괄약근, 항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선물이 장면화되는 텍스트가 있다면, 똥이 장면화되는 텍스트도 있다. 선물이 위조화폐로 장면화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똥으로 장면화되는 작품도 있다. 그런 글쓰기 장면으로는 먼저 정신분석학의 텍스트를 꼽아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똥은 어린아이가 세상에 선사하는 원초적 선물이고, 라캉의 대상 a에 해당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문학 텍스트에서, 그것도 한국문학 텍스트에서 그런 장면을 찾는다면, 이상의 산문 「그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와 「권태」, 그리고 김수영의 시 「설사의 알리바이」를 꼽을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보들레르의 「위조화폐」는 모스의 증여 이론 전체를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물 일반에 대한 에세이의 모든 운동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모든 가능성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119쪽) 바로 거기서 선물과 관련된 모든 이론적 가능성이 장면화되고 있는 것이다(이 점에서 이 작품은 분석이나 정신분석 일반을 이미 장면화하고 있는 에드가 알랜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와 유사한 위상에 있다). 한국의 보들레르 추종자 이상과 김수영의 작품들은 그런 장면화의 무대일 수 있다. 거기에는 정신분석학의 똥 이론이, 라캉의 대상 이론이 녹아 있는지 모른다. 그 빼어난 산문과 시는 라캉적인 똥 이야기만이 아니라 데리다의 선물 이야기를 반영하는 거울일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때만, 오로지 그때만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로서의 차연과 글쓰기, 차연과 글쓰기로서의 용서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오로지 그때만 우리는 데리다의 글쓰기와 텍스트를 재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의 알리바이
―김수영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르륵거리는 배에는 푸른 색도 흰 색도 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性도 倫理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여름이 끝난 壁 저쪽에 서있는 낯선 얼굴
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
性과 倫理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들인다
文明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規制로 시를 쓰고 있다 他意의 規制
아슬아슬한 설사다
言語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履行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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