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론에서 초월론으로,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김 상 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철학은 초월적일 때만 철학적일 수 있다. 이는 철학이 사실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사실에 대한 추구, 나아가서 직접적 의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어떤 권리에 대한 물음이다. 과학적 탐구는 언제나 이 권리에 대한 물음에 종속되어 있다. 칸트가 사실의 문제에만 집착했다고 비판했던 영국 경험론마저 어떤 권리 증명의 기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만 그것은 정당한 자격의 철학이었다. 사실의 기원, 의미의 의미, 경험의 배후를 묻는다는 점에서 철학은 현실의 정당성에 대한 권리 증명의 문제를 제기하는 입법적 사유이다. 이 입법적 사유는 현실에 대한 다양한 권리 부여와 박탈의 형식들이 공존하는 가설적 추론의 공간을 전제한다. 철학적 사유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정위하기 위해서 이 가설적 추론의 공간에 들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철학은 불가피하게 현실을 초과해야 하고 따라서 초월적이다. 초월론은 총체성을 설계하는 철학적 건축술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을 이룬다.
물론 그 초월이 단순한 초과, 도피적 외출에 불과하다면 철학은 얼마든지 조롱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철학은 회귀적이다. 회귀적 외출이 철학적 사유의 일반적 궤적이다. 때문에 각각의 철학에 대하여 그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대목은 그것이 총체성의 안과 밖 사이에 위치하는 대목, 그 안과 밖이 소통하는 접경의 지대에 대하여 말할 때이다. 즉자적 현실과 그 배후의 순수한 개방성 사이, 직접적 사실의 세계와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사이에서 철학은 비상하거나 추락한다. 철학은 그 두 세계 사이를 왕래할 수 있을 때, 혹은 그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어떤 체계적 총체성을 설계하기 시작할 수 있다. 체계 구성을 위한 모든 철학적 건축술에 포함된 초월론은 그러므로 어떤 교량술이다. 초월적 사유는 그 교량술을 통해서만 현실을 현실로서 개방하는 그 배후의 차원으로 왕래할 수 있다. 모든 철학적 건축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최초의 원근과 척도는 그 왕래에서, 혹은 그 복귀적 외출에서 허락된다.
이론적 세계관을 대변해온 서양의 형이상학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어떤 건축술이었다. 해체론 또한 어떤 건축술이다. 이 점에서 해체론은 그것이 파괴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해체론이 형이상학에 대하여 파괴적이라면, 이는 단순히 부정과 일탈의 취미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이 체계 구성에 앞서는 어떤 물음을 생략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불충분한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체계는 본성상 어떤 질서의 공간을 개방하는 동시에 폐쇄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체계의 열림과 닫힘, 그 열림과 닫힘의 관계, 그 관계의 논리적 형식, 혹은 그 구조적 성격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해체론이 형이상학을 파괴할 때 궁극적으로 묻고 답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물음이다. 문제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한정된 체계에 대하여, 그 안과 밖의 관계를 꼴짓는 어떤 구조, 그 관계를 조정하는 어떤 경제에 있다. 해체는 형이상학적 체계가 이미 전제하거나 빚지는, 그러나 그 체계 안에서 추상되거나 망각에 빠지는 이 접경의 경제를 드러내기 위한 절차이다.
데리다는 구조주의를 논평할 때 이 접경의 경제를 ‘차연적 경제’ 혹은 ‘근원적 구조’라 불렀고, 이를 역사적 개방화의 논리 자체로서 서술했다. 역사적 현실에 부응하려는 해체론의 건축술적 성격, 나아가서 그 초월론적 면모는 사실 데리다가 구조주의적 구조를 해체론적 구조 개념을 통하여 상대화할 때, 다시 말해서 그가 60년대의 지배 사조인 구조주의에 개입하는 장면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구조주의와 관련된 데리다의 초기 논문들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자. 이는 일차적으로 해체론이 형이상학적 건축술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체계 구성의 전략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해체론은 많은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파괴의 기획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출발에서부터 어떤 구성의 기획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구성의 기획이 모든 철학적 건축술과 마찬가지로 어떤 초월론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구조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논평에서 뒤쫓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거기서 드러나는 초월론적 행보이다. 바로 거기에 해체론을 포함한 모든 철학적 사유의 본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I. 구조주의적 구조에서 접경의 경제로: 루세론
데리다의 초기작 ?글쓰기와 차이?는 구조주의를 논평하는 세 편의 글을 담고 있다. 이 논문들은 각기 구조주의 문학을 대변하는 루세, 구조주의의 인류학의 선구자 레비스트로스, 광기의 역사를 기술했던 푸코를 다루고 있다.
먼저 루세에 대한 논평에서 데리다가 지적하는 것은 힘과 지속(베르그송적 의미의 순수한 시간)에 대한 구조주의의 태생적 무능력이다. 즉 구조주의가 동원하는 어떠한 방법론적 장치도 힘과 지속을 번역할 수 없고 그 자체로서 사유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조주의적 의미의 구조 자체가 어떤 공간화하는 사유의 산물이라는 데 있다. 그 공간화는 힘과 지속의 환원에서 성립한다. 구조주의적 사유는 본성상 힘이나 지속과 양립 불가능한 관계에 있고, 때문에 힘과 지속에 대하여 언제나 파괴적이다. 구조주의적 건축은 추상적 건축이고, 그래서 말하자면 “자연과 예술의 대참사로 인하여 골격만 남은 어떤 도시, 사람이 살지 않고 폭풍우에 날라가버린 그런 도시의 건축과 다소 유사”(ED, 13)하다. 다만 구조주의는 자신의 이런 파괴적 성격을 잊고 있을 뿐이다.
그 망각은 자만과 겹쳐 있다. 구조주의는 분명히 어떤 질서의 공간을 개방하는 건설적인 건축술이다. 총체성의 추구, 전체의 유기적 재구성이 구조주의의 이념이다. 그러한 재구성을 통하여 구조주의가 지시하는 것은 그 전체의 내면적 자율성이자 그에 고유한 형식적 논리이다. 병리적 현상마저 내재적 합목적성을 지닌 어떤자율적 체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건전한 의미의 구조주의가 취하는 관점이다. 구조주의적 문학 비평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규정하고 확대 재상산하는 상상의 논리와 형식이다. 루세는 그 논리와 형식을 문학적 독창성의 근거로 간주했고, 따라서 그것을 모든 문학적 탐구의 고유한 대상과 동일시했다.
이런 구조주의적 탐구는 해당 문헌 전체에 대한 동시적 시야를 요구한다.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서고자 하는 구조주의적 해석은 어떤 평면도를 작성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전체의 생성 과정을 하나의 평면에 담고 있는 회전 그림(파노그래피),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적 해석의 귀착점이다. 이 그림은 구조주의적 관점이 동시성을 추구하는 관점, 근본적으로 공간화하는 관점으로서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이 동시화와 공간화는 필연적으로 힘의 약동을 평균화하고 지속의 차이성, 그 이질화의 흐름을 동질화시킨다. 따라서 힘과 지속은 그것을 환원하면서 진행되는 구조wn의적 사유에 대하여 영원한 타자이자 바깥일 수밖에 없다.
이 정도 수준에서 구조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아직 해체론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베르그송주의라면 이미 충분할 것이다. 해체론은 역사적 유래를 물으면서 시작하고, 그 유래에 대한 반성에서 가장 급진적인 체계적 비판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러한 해체론적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홀로 서 있는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서양 사상사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그래서 오래 전에 이미 태어나 있었던 사조이다. 즉 “구조의 개념 그리고 구조라는 말까지도 에피스테메[이론적 인식]와 동일한 나이를 먹었고, 다시 말해서 서양의 과학 그리고 서양의 철학과 동일한 연령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일상 언어의 토양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ED, 409).
구조주의는 서양의 이론적 사유의 전통 전체와 동시대적이고, 그 전통의 시작에서부터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의 이론적 전통의 기원과 한계를 이해한다는 것과 동일한 문제가 된다. 또한 구조주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역사적인 연역은 이 이론적 전통의 출발점으로 소급하는 절차 뒤에 시작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따를 때, 구조주의를 포함한 서양의 이론적 사유 전체는 서양의 일상 언어를 모태로 하고 있다. 데리다가 여기서 말하는 일상 언어는 니체적 의미의 아폴로적 개방성의 세계, 가시성, 빛과 형상, 조형성과 분별의 세계이다. 이 아폴로적 개방성은 어둠과 혼돈, 음악과 힘을 특징으로 하는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에 대립한다. 이런 니체적 구도에서 볼 때, 이론적 사유의 전통은 어떤 어두운 밤 뒤의 새벽처럼 시작되었다. 그 전통의 시작은 “힘의 여명기, 다시 말해서, 이미지들, 형상들, 현상들이 말을 하는 빛나는 아침이다. 혹은 그것은 관념과 우상들의 아침이다. 힘의 기복이 평온을 취하는 가운데 빛 안에서 자신의 깊이를 평면화하고 수평적 구도 속에서 길게 펼쳐놓는 그런 아침인 것이다”(ED, 47).
로고스, 언어와 이성은 해가 뜨는 아침, 그 아폴로적 개방성이 허락하는 테오리아(시선)이다. 이 시선과 그에 마주해서 나타나는 형상의 세계가 개념적 질서이다. 이 질서 안에서 빛과 그림자 혹은 나타남(보임)과 사라짐(보이지 않음)은 모든 개념적 변용과 장소 이동을 지배하는 원초적 은유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서양 철학을 기초하는 은유”이고, “이 점에서 철학의 역사 전체는 어떤 사진술, 즉 빛의 역사 및 빛 자체에 대한 논의로서의 사진술이다.” 그리고 “이 태양 중심적 형이상학 안에서 힘은 ‘에이도스’(다시 말해서 은유적 시선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에 자리를 내주는 가운데 이미 힘의 본래적 의미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는 마치 음악적 특성이 음향학을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밝음과 어두움의 차원에서 힘의 강약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ED, 45).
구조주의가 힘을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 무능력은 그러므로 그것의 역사․체계적 유래인 언어 자체에서 온다. 힘 그리고 지속은 구조주의의 타자이기에 앞서 언어의 타자, 아폴로적 개방성의 바깥이다. 구조주의의 개방성은 언어의 이론적 개방성에 대한 한 가지 표현 방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구조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론적 개방성 자체, 그리고 그것의 모태인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과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해체론의 특성은 이 불가능한 과제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데리다의 말을 옮기자면, 해체론은 “이 언어의 경계를 넘어가도록 시도해야 한다. 넘어가도록 ‘시도’한다기보다 그렇게 되도록 꿈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는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넘어간다’기보다는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넘어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의미의 빛을 박탈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자포자기식으로 언어에 함몰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가장 세련된 구조주의적 형식주의의 역겨운 만취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자포자기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ED, 46).
이 탈언어적 외출과 이를 위한 저항이 어떤 해체론적 당위라면, 이 당위는 힘과 지속을 개념의 매개 없이 그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는 베르그송적 요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당위는 언어적 개방성 자체의 배후, 그 배후의 기원적 사건에 대한 권리적 물음의 가능성에 있다. 언어적 개방성의 기원은 이미 그것이 개방해놓은 공간 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이 자명한 사실이 그 배후 혹은 그 바깥으로 향한 물음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해체론적 외출은 언제나 매개적이고 내재적이다. 해체론은 언어의 매개 없이 언어 밖의 사태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베르그송적 초월론과 구분된다. 해체론적 외출은 언제나 초과되는 것의 내용을 바탕으로, 초과되는 것의 규칙을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외출이다. 그것은 내재적 파열과 같은 외출이다.
이 매개적이자 내파적인 외출은 권리적 차원의 가설적 추론을 사다리로 삼고 있다. 해체론은 동일성을 타자들 간의 관계에서, 혹은 타자들 사이의 그물망 안에서 귀결되는 잠정적 산물로서 이해한다. 또한 그 동일성 안에는 그것의 성립에 참여했던 타자들이 그 개입의 흔적을 남기고 있기 마련이라는 확신, 스스로 검증해가는 가운데 공고히 다져가는 그런 자기 확신 위에 서 있다. 탈언어적 외출이 문제라면, 그것은 여전히 언어의 가능성이 그 바깥의 타자에 빚지고 있다는 가설적 추론에 근거한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언어의 타자는 힘이다. “이 힘은 언어의 타자이며, 이 타자 없이는 언어 또한 언어일 수 없을 것이다”(ED, 45). 언어의 가능 조건은 언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타자, 바깥에 있다. 그러나 그 타자, 그 바깥 자체가 그대로 언어의 기원인 것은 아니다. 언어는 오히려 그 내면과 외면이 관계하는 방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은 언제나 안과 밖의 관계를 꼴짓는 접경적 구조에 있다. 따라서 데리다는 루세에 대한 논평을 어떤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맺는다. “결론을 내려야 하겠지만 논쟁은 끝날 길이 없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사이, 힘의 도약과 구조 사이의 갈등과 ‘차이’는 역사 안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역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괴상한 의미에서 그 차이는 또한 어떤 근원적 구조이다. 즉 역사의 개방 운동이며 역사성 자체인 것이다. 그 차이는 단순히 역사에 속하는 것도, 구조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ED, 47).
해체론적 의미의 기원 혹은 시작은 언제나 안과 밖 사이의 관계적 사건이고, 그 관계적 사건은 구조적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유사성이나 동일성의 관계가 아니라 차이와 갈등의 관계이다. 그 차이와 갈등이 모든 것의 기원에 있는 관계적 사건이다. 그 사건은 구조주의적 구조와 다른 구조, 그 폐쇄적 구조보다 먼저 있는 구조를 이룬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리다는 이 관계적 사건이 만드는 구조를 ‘근원적 구조’라 했고, 이를 역사의 개방 운동 자체의 논리와 동일시했다. 그것은 역사에 속하는 모든 구조들의 기원에 해당하는 구조이다. 해체론은 위상이 다른 이 두 종류의 구조 사이에 위치한다. “구조의 열림이 ‘구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때, 우리는 이미 처음과 다른 차원으로 이행해온 셈이다. 소문자 구조 ― 필연적으로 닫혀진 구조 ― 와 개방의 구조성 사이의 차이, 아마 그러한 차이가 철학이 뿌리 박고 있는 장소, 위치를 정할 수 없는 장소이다”(ED, 230).
그러므로 오해가 없어야 한다. 해체론은 단순한 대립의 전략이 아니다. 구조주의의 아폴로적 개방성을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통하여 상대화할 때, 해체론은 단순히 “지속을 공간에, 질을 양에, 힘을 형상에, 의미나 가치의 깊이를 형태적 표면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분법적 선택지의 한쪽을 붙드는 것은 해체론이 극복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성에 속한다. 해체론은 이분법적 대립항을 탈이분법적으로 종합하는 새로운 매개의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 형이상학적 이항 대립의 체계를 탈피하는 새로운 개념들, 새로운 모델들, 어떤 ‘경제’를 찾아야 한다. 이 경제는 순수하고 무형적인 힘에 대한 어떤 에너지론이 아닐 것이다. 고려중의 차이들은 장소적 차이들인 ‘동시에’ 힘의 차이들일 것이다”(ED, 34).
이 ‘경제’라는 말은 갈수록 해체론적 건축술의 중심 용어로서 자리잡아간다. 그것은 해체론이 가설적으로 전제하고 그 실효성을 증명하는 구조, 데리다가 ‘근원적 구조’라 했던 것에 해당한다. 바타이유의 구분에 따르면, 경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제한 경제와 일반 경제가 그것이다. 제한 경제가 의미(가치)의 보존과 확대 재생산에 제한된 살림의 전략이라면, 일반 경제는 의미의 무차별한 소비, 회수 불가능한 지출의 전략이다. 충만으로 향한 제한 경제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체계 구성의 전략을, 그리고 무로 향한 일반 경제는 그와 대립된 체계 파괴적 전략을 지칭한다. 이 두 극단적 경제는 아폴로적 개방성과 디오니소스적 개방성 사이의 갈등을 이어가는 대립항이다. 해체론이 추구하는 경제는 제한 경제도, 일반 경제도 아니다. 해체론이 가리키는 개방성은 아폴로적 개방성도, 디오니소스적 개방성도 아니다. 해체론의 전략은 그 두 대립항들이 차이를 내는 그 사이에 위치하며 그 차이를 매개하는 교량술의 형태를 취한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의 안과 밖 사이에 다리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해체론적 건축술의 일차적 의도이다.
물론 그 건축의 재료는 기존의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 혹은 형이상학이 뿌리 박은 언어에 있다. 해체론의 전략, 그 전략적 글쓰기는 언어에 의한 언어에의 저항, 언어에 의한 언어 외적 외출로서 요약될 수 있다. 그 외출은 거꾸로 유입이고 기입이다. 디오니소스적 개방성(힘과 지속)을 아폴로적 개방성(이론과 형상) 안으로 기입하는 것, 일반 경제를 제한 경제 안으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 절대적 개방성을 폐쇄적 개방성 안으로 유입하거나 삽입하는 것, 그러나 이를 위해서 먼저 규정된 총체성을 초과하는 난폭한 힘과 대면해야 하는 것, 그것이 해체론적 의미의 글쓰기이다(ED, 18 이하 참조). 유입과 기록, 기입과 삽입으로서의 글쓰기는 해체론적 전략 자체를 말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사유가 단절과 심연으로서 표상하는 언어의 경계에 교량을 건설하는 문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
II. 탈중심적 구조와 어떤 영점: 레비스트로스론
해체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 가설적 교량, 그 근원적 구조는 중심이 없는 구조, 탈중심화된 구조이다. ‘중심 없는 구조’는 어떻게 보면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논리학자는 그것을 ‘둥근 사각형’이라는 말처럼 자기 모순적이고 무의미한 말로 평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일반적으로 중심이 있을 때만 위계적 질서와 안정을 얻고, 따라서 그 때에만 비로소 구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에도 모든 중심을 빼앗긴 구조가 아직 사유 불가능한 것 자체로 남아 있다”(ED, 409)면,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언어의 이론적 개방성 안에서 구조를 표상하여야 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개방성에 고유한 환원적 추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 이해의 차원에서 해체론은 이론적 개방성 안에서 일어나는 추상화의 결과를 ‘현전적 존재 이해’라 부른다. 나타남과 보임으로서의 현전을 존재 자체로, 사라짐과 보이지 않음으로서의 부재를 무로 표상하는 것이 현전적 존재 이해이다. 현전적 존재 이해란 빛의 세계인 이론적 개방성 안에서 일어나는 존재 이해이다. 구조가 언제나 중심화된 형태로서만 표상되는 것은 이런 현전적 존재 이해의 필연적 귀결이다. 구조주의가 힘과 지속을 환원한다는 것, 단지 사건을 공시화하고 공간화한다는 것, 그래서 동시성 속에 전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적 현실의 구조성 ― 근원적 구조의 구조성 ― 을 “언제나 충만하고 유희 없는 현전성에서부터 사유한다는 것”(ED, 410)과 같다. 그것은 “그 구조성에 중심을 부여하고 그 구조성을 어떤 현전의 지점, 어떤 고정된 기원에 묶어두는 행위”(ED, 409)이다.
구조성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그러나 구조의 구조성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박탈하는 행위이다. 구조성이란 구조 내적 유희(교환과 대체 혹은 변형의 운동)를 열어놓는 개방성이다. 이 개방성은 무한하되 어떤 구조적 성격을 띠었다. 때문에 데리다는 이것을 근원적 구조라 불렀다. 이 근원적 구조는 모든 역사 내적 구조들, 가령 구조주의적 구조, 에피스테메, 이론적 체계에 앞서는 ‘근본적 구조’이다. “만일 어떤 구조들이 있다면, 이것들은 이 근본적 구조에서 비롯하므로 가능하다. 총체성은 이 근본적 구조에 의해서 열리고 (…) 또 넘쳐흐른다. 이 개방성은 확실히 시간과 발생적 운동을 열어놓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것들에 형식을 부여하면서 생성을 폐쇄할 수 있는 위험, 형상 아래 힘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한다”(ED, 44).
중심의 부여는 그런 위험을 완성한다. 구조의 구조성을 망각할 때 사람들은 구조에 중심을 부여한다. 이때부터 구조 내적 유희가 시작하는 출발점은 더 이상 근원적 구조성이 아니라 중심이 된다. 과연 중심은 유기적 균형과 일관된 방향을 허락하면서 구조 내적 유희를 개방한다. 그러므로 구조의 기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심은 동시에 구조 내적 교환과 대체의 유희가 불가능하거나 금지되는 지점이다. 중심은 구조를 폐쇄하거나 봉합하는 지점이며, “구조를 지배하면서도 구조성을 피해가는 어떤 것”, 즉 구조적 유희 가능성 전체를 피해가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은 역설적으로 구조 ‘안’에 있으면서 구조 ‘밖’에 있다(…). 그것은 [유희의] 총체성의 중심에 있지만, 그 중심이 총체성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총체성은 다시 자신의 중심을 다른 곳에 지니고 있다. 중심화된 구조라는 개념은 ― 비록 그것이 일관성 자체, 철학 혹은 과학으로서의 에피스테메의 조건이라 해도 ― 모순적으로 일관적이다”(ED, 410).
이론적 담론은 “원천, 중심, 기초, 원리 등등으로 소급해야 한다는 절대적 요구”(ED, 420)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이론적 사유의 전통에서 중심은 구조 표상의 출발점이다. 근원적 구조성의 지위를 대신해온 중심은 서양 사상사에서 기원, 목적, 아르케, 텔로스, 이념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왔다. 그 중심의 역사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이고, 이 형이상학의 역사는 다시 중심화된 구조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구조의 구조성 혹은 소문자 구조와 근원적 구조 사이의 차이에 대한 망각의 역사이다. 서양의 이론적 사유의 전통에 참여하는 모든 사유, 종말론을 위시하여 구조주의와 고고학에 이르는 모든 사유는 “이 구조의 구조성에 대한 환원과 공모”(ED, 410)하고 있으며, 그 환원의 자리에 중심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립하게 된 중심화된 구조는 그러한 환원과 추상의 대가로서 역설과 모순을 수반하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논평하기 위해서 먼저 데리다는 이 구조의 역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전환, 이 시대에 일어나는 어떤 단절에 주목한다. “중심은 현전적 존재자의 형태로 사유될 수 없다는 것,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중심은 고정된 장소라기보다 어떤 기능이며 기호의 대체가 무한히 일어나는 일종의 비장소라는 것”, 바로 이것이 구조의 역사에 단절을 가져오는 새로운 인식이다. 데리다는 이 새로운 인식을 “구조의 구조성에 대한 사유로서의 탈중심화”(ED, 411)라는 말로 요약하고, 그 탈중심화의 시대를 연 선구자들로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를 언급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탈중심화 시대에 동참하고 있다. 서양의 인종적 우월주의, 자문화 중심주의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이미 탈중심적 사유의 모범이고, 서양의 문화가 표준적 지위를 상실해가는 시대의 직접적 반영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무엇보다 그런 인종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서양] 형이상학의 파멸과 체계적이자 역사적으로 동시대적이라는 점”(ED, 414)에 주목하고, 그러한 동시대성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구조주의의 내재적 변형을 통하여 탈중심적 구조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그런 탈중심적 구조 인식은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질서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이론적 담론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동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해체론으로 가는 입구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결정적인 대목은 근친상간 금지의 연구에 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의심받게 되는 것은 일단 자연과 문화라는 이항 대립적 구분법이다. 그러나 이 구분법이 흔들린다면, 이는 개념적 질서, 따라서 형이상학적 구분법 일반이 흔들린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구분법은 철학에 생래적이기 때문이다. “퓌지스(자연)와 노모스(규범), 퓌지스와 테크네(인공적 기술)의 대립이래, 그 구분법은 자연을 법칙, 제도, 예술, 기술, 나아가서 자유, 자유 의지, 역사, 사회, 정신 등등에 대립시키는 모든 역사적 연결 고리를 통하여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오고 있다”(ED, 415).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여러 가지 변용을 통하여 개념적 분류 체계 일반을 지배하고 있고, 그만큼 그 구분법이 형이상학적 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높다.
근친상간 금지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서의 한계를 알리는 어떤 ‘스캔들’이다. 이는 그 금지가 자연의 범주와 문화의 범주 모두에 속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연에 속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자발적인 현상, 그래서 어떤 특정한 문화나 규범 체계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문화에 속하는 것은 특정 사회의 규범 체계에 의존하고, 따라서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지가 자연과 문화라는 상호 배타적인 두 범주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금지는 규범의 세계에 속하면서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편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어떠한 규범 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발적 자연 현상이다.
근친상간 금지는 그러므로 투명하고 질서 정연한 개념적 질서 안에서 포착되지 않는 것, 사유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통적 의미론의 체계, 기존의 개념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 체계의 한계와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하는 근친상간 금지의 역설은 자연․문화의 대립법을 근간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질서 전체에 선행하는 바깥, 그 바깥에 관계하는 어떤 질서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이렇게 논평한다. “자연․문화의 이항 대립과 더불어 체계를 이루는 모든 철학적 개념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 다시 말해서 근친상간 금지의 기원을 무사유(l'impensée) 속에 방치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ED, 416). 근친상간의 금지는 개념적 질서의 기원, 철학이 스스로 사유할 수 없는 저편의 기원을 지시한다. 그것은 철학의 개념적 구분법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차원, 그러나 그 질서가 은폐하고 방치하는 차원이 그 질서 안에 남겨놓은 흔적이자 출구이다. 그 일탈적 사례는 철학적 언어 안에서 그 언어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언어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언어 자체에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실제로 자신의 신화 연구에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전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언어에의 저항 혹은 언어에 의한 언어 외적 외출을 꿈꾸는 해체론적 전략과 닮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연구에 필요한 그러한 언어 운영 절차를 ‘응급 수리’(bricolage)라는 이름으로 지칭했다. 이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재료를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임시적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재료를 바꿀 수 있고, 또 그 재료도 여러 가지 이질적 종류를 자유롭게 짜마추어 이용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소재를 짜깁기해서 임시 방편적으로 응급 처치하는 수리공은 전문적 지식과 기계를 동원해서 물건을 생산하는 기술자(mécanicien)와 대비된다. 레비스트로스적 의미의 기술자는 자신의 언어, 그 어휘와 문법 전체를 독자적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기술자는 어떤 신화, 즉 단순 수리공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술자가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 창출하고 구성하는 사람이라면, 수리공은 기존의 언어를 차용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차용된 언어를 다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판과 처방의 도구로 활용하는 사람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수리공의 행위를 지적인 동시에 허구적인(mythopoétique) 활동으로 서술했다. 신화를 연구하는 신화학적 담론은 그 자체가 신화적이자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신화학적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귀결된 이러한 인식은 담론 체계가 어떤 중심화된 구조를 이룬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한 평가는 “어떤 중심, 어떤 주체, 어떤 특권적 참조점, 어떤 기원 혹은 어떤 절대적 ‘아르케’에 대한 공개적 포기”(ED, 419)를 말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유사 유형의 개별적 신화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 원형 혹은 표준에 해당하는 특권적 신화라는 것을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미 표준 신화라 불리는 것도 알고보면 다른 신화들의 변형과 이합집산에 의한 변형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 자체의 절대적 기원이나 단일한 통일성은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게 된다. 기원이라는 것은 파악 불가능하고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의 파생물이자 그 그림자이다. 신화의 세계란 한 마디로 무중심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무중심의 상징 세계는 필연적으로 중심화하고 위계화하는 이론적 언어에 의하여 왜곡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적 담론을 신화적이자 허구적인 것으로 변형시킨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제 새겨야 할 것은 중심 부재의 의미이다. 중심이 부재한다는 것은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 곳에서도 여전히 어떤 교환과 대체의 유희 혹은 변형과 이동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 유희와 운동이 한정된 총체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총체성을 이룬다는 것과 같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중심은 구조 내적 요소들 간의 대체와 교환을 근거짓는 동시에 제한한다. 중심은 교환의 질서를 떠받치지만, 거기서는 어떤 교환이 성립할 수 없는 어떤 한계 지점이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구조 개념에 반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이미 중심에서도 요소들 간의 교환과 대체의 놀이가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구조 내적 놀이는 무한히 지속되는 것이고 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데리다는 “결여, 중심 혹은 기원의 부재가 허락하는 이 놀이의 운동은 대리적 보충의 운동임을”(ED, 423) 역설한다. 중심이 없다는 것, 그것은 중심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구조가 성립하기 위해서 설정해야 하는 중심을 규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중심은 확정할 수 없다. 그래서 총체화는 계속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 그 모든 이유는 다른 주변부 요소들이 중심을 대리하고 보충한다는 사실에 있다. 중심과 기원이 물러가 숨어버리는 자리는 전적으로 부재의 자리도 아니고 부재로서 방치되어야 하는 자리도 아니다. 다른 어떤 것이 현전의 양태로 출현하지 않는 그 중심을 대신하고 참칭할 뿐이다. 나타나지 않는 최종적 기의는 그렇게 기표를 유인하지만, 그 기의의 자리를 차지한 기표는 임시적으로만 거기에 머물 수 있다. 따라서 그 대리적 보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 기호는 무한히 증식해간다. 폐쇄적 구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기호의 증식, 이 의미 작용의 증산은 상징적 사유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증산을 낳는 대리적 보충의 정도가 모든 “라치오(ratio, 셈 혹은 합리화)의 기원”(ED, 424)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있는 것은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중심의 부재, 필연적으로 보충되고 대리되도록 생겨먹은 그 부재의 자리이다. 상징적 질서의 무한한 확장이 시작되는 곳, 기호의 생산과 증식이 일어나는 장소, 대리적 보충이 끊임없이 유도되는 가운데 의미 작용의 내포와 외면이 확장되는 출발점, 바로 그 장소가 그 부재의 자리이다. 대리는 되지만 직접 현전하지 않는 중심의 자리, 그 부재의 자리는 그러므로 여전히 어떤 기원이다. 다만 현전적 존재 이해와 이항 대립적 논리에 바탕한 기존의 형이상학, 기존의 개념 체계가 사유할 수 없는 기원일 뿐이다. 탈중심적 구조의 건축은 이 부재적으로 존재하는 기원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자기 은폐적 기원, 그 은폐의 장소, 그 부재의 자리는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신화를 상징의 세계로 파악하는 레비스트로스는 그 부재의 장소를 ‘상징적 가치의 영점’(la valeur symbolique zéro)으로 표기했다. 이는 음성학에서 ‘음소적 영점’(le phonème zéro)을 설정했던 구조주의 언어학자 야콥슨의 사례를 참조해서 나온 명칭이다. 이 영점은 단순한 부재의 지점이 아니고, 그래서 생략하거나 추상해도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을 낳고 교체와 대리의 운동을 유발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재하지만 환원 불가능한 무, 없음에도 추상할 수 없는 기원에 관계하는 장소이다. 서양의 이론적 사유와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를 통하여 데리다가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그런 환원 불가능한 무, 추상 불가능한 부재가 드러나는 흔적의 지점, 즉 어떤 초월적 영점이다.
III. 데카르트적 과장법과 초월적 사유의 본성: 푸코론
이제 문제는 철학사에서 그런 초월적 영점으로 이행하는 사례를 찾는 것이다. 데리다는 광기의 역사에 대한 푸코의 저작을 논평할 때 그런 철학적 영점 회귀의 고전적 사례와 마주치고 있다. 그 사례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다. 모순과 대립이 정지하는 곳, 대립항들이 하나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곳, 코기토는 왜 그런 장소일 수 있는가? 데카르트적 성찰을 다시 상기하자면, 내가 실성했건 실성하지 않았건, 세상이 실재하건 꿈 같은 가상이건, 나의 판단이 참이든 거짓이든,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는 한 존재한다. 코기토는 이성과 실성, 의미와 무의미, 실재와 가상, 참과 거짓의 대립이 무효화되는 지점인 동시에 그 모든 대립항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지점이다. 그 대립항들은 공존 가능한 사유의 양태 혹은 사유의 경우들로서 코기토 안에 보존된다. 코기토는 대립항들 사이의 교환과 대체를 자유롭게 허락하면서 포괄한다. 코기토의 절대적 확실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규정되어 있는’ 모든 모순들이 현상할 수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모순들은 이 영점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현상할 것이고, 이 지점은 규정성을 띤 의미와 무의미가 공통의 기원에서 다시 만나는 곳이다”(ED, 86).
데카르트가 그런 철학적 건축술의 영점에 도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회의’ 혹은 ‘과장법적 회의’(le doute hyperbolique)을 통해서이다. 꿈의 가설과 악령의 가설이 초래하는 허구적 과장이 코기토가 자신의 자격에 대하여 그 권리를 증명하는 문맥이다. 꿈의 가설은 세계의 실재성을 박탈하는 허구이고, 악령의 가설은 정신의 기원에 변덕과 광기를 내재화하는 과장이다. 인간 정신에 대하여 참된 인식의 소유 가능성을 심판하는 최후의 법정에서, 이 회의론적 가설들은 상식적 논변에 못지않게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이 가설적 논변의 핵심은 이성의 선천적 실성 가능성에 있다. 특히 악령의 가설은 명석 판명한 관념, 수학적 표상, 순수한 이성 자체 안에서 성립할 수 있는 착각 혹은 선험적 광기의 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다.
허구적 과장을 통하여 진행되는 데카르트의 회의와 코기토의 발견은 철학적 사유의 본성을 구하는 물음에 대하여 귀중한 암시이다. 그 암시를 간단히 되새기자면, 철학적 물음은 사실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 배후의 권리와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이 구하는 권리와 정당성은 언제나 권리 박탈적 논리와 부당화의 가설에 대한 투쟁에서 보존된다. 때문에 철학적 사유는 권리적 차원의 사유인 한에서 이미 가설적이고 허구적인 차원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또한 총체성을 재정위하는 시도이고, 이를 위하여 총체성을 초과해야 하는 초월적 기획이다. 데카르트가 모든 철학적 성찰은 회의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철학에 대하여 기존의 구분법을 총체적으로 초과하는 가설적 허구가 환원 불가능한 구성 요소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또 데카르트가 과장법적 회의에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이는 그 허구적 과장이 철학적 사유를 구성하는 대담성, 자신의 위기를 스스로 초래하는 용기에서 온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철학적 사유는 이성과 비이성, 이성과 실성의 대립을 초과하는 과장성을 띠어야 할 때가 있고, 그 과장성은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치명성을 띨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치명적 허구와 과장 없이 철학은 자신의 영점에 이를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과장법적 회의라는 치명적 허구를 통해서 사유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교차하는 접경의 지점에 도달하였다. 그것이 코기토이다. 이 코기토가 사례화하는 접경의 지점, 이 영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철학은 어떤 다른 세계를 통하여 현실의 불충분성을 보상 받으려는 “도피적 초월”(ED, 88)에 불과할 것이다. 철학이 어떤 허구적 가설을 통하여 초월성을 획득한다면, 그 추론은 자신의 허구적 가설 자체가 상대화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접경의 지점, 그 영점은 철학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초월적 회귀의 입구이다. 가설적 추론은 이미 기존의 의미들이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에포케’의 상태를, 기존의 개념적 구도가 무효화되어 있는 백지 상태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 가설적 사유가 그리는 그림에는 그렇게 백지화된 것들이 총체적으로 다시 나타나고 재설정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영점이란 총체성에 대한 그런 초과적 관점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그 지점은 총체성을 벗어나면서 사유한다는 기획이 뿌리박고 있는 곳이다. 총체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을 모면한다는 것이며, 이는 오로지 무한자나 무를 향해서만 가능하다”(ED, 86-87).
총체성에 관계한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리적 차원에서, 그 가능 조건에 대한 물음 속에서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체성을 사유하기 위해서 그것을 초과해야 한다. 그 초과의 가능성은 총체성을 포괄하는, 따라서 그 자체로는 무규정적인 무한자, 혹은 총체성에 속하지 않는 무에게 권리를 인정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그 무한자나 무에 대한 관계가 총체성에 대한 사유를 개방하는 일차적 조건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그러므로 악령의 가설이 열어놓는 지평 안에서만, 그 가설이 초래하는 무한한 부정성에 관계할 때만 초월적 영점일 수 있다. 완성된 체계, 규정된 형태로 건축된 모든 총체성은 이미 그 건축의 공간을 처음 열어놓는 그 무한한 부정성을 전제한다. 그 부정성이 모든 건축학적 가능성에 대한 최초의 가능 조건이다. 때문에 “모든 (의미 추구의) 철학은 자신의 담론 어디에선가 무의미의 심연에 관계하고 있다”(ED, 88).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그 무의미의 심연, 무한한 부정성이 만드는 균열, 그 절대적 개방성의 깊이 위에 걸려 있는 교량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철학적 사유가 성립하기 위한 최초의 개방성이다. 이 개방성의 주제는 이미 구조주의 일반에 대한 데리다의 논점을 결정하고 있다. 그 논점은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개방성은 구조주의에 대하여 어쩌면 유일한,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다. 즉 “특정 세계관에 대한 구조적 서술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진리의 무한한 개방성, 다시 말해서 철학의 무한한 개방성만은 예외이다. 하나의 구조에서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것은 그 구조를 닫히지 않도록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ED, 238). 한정된 총체성, 중심화된 구조를 목표로 하는 구조주의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진리와 역사의 무한한 개방성이다. 이 무한한 개방성은 물론 부정성, 구조주의적 총체성을 넘어서는 무규정적 무한성에서 온다. 그러나 이 무한성은 이론화 혹은 언어화의 가능성을 벗어난다.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언표되거나 사유될 수 없다. 해체론이 사유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그러므로 이 무한성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한정된 총체성과 이를 무한히 초과하는 무한자 사이의 차이이다. 해체론이 언제나 지시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본성상 구조주의가 사유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총체성과 무한자 사이의 차이”(ED, 180)이다.
둘째, 구조주의적 총체성을 넘어서는 그 부정적 무한자는 구조주의적 총체성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혹은 모든 체계의 탄생 배후라는 점에서 선험적 초월성의 지위를 지닌다. 그리고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즉 “어떤 경우에서라도 이 개방성의 선험적 초월성은 모든 구조 그리고 모든 체계적 구조주의에 대하여 그 기원인 동시에 파국이고,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다”(ED, 243). 체계가 열리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부정적 무한성, 무의미의 심연, 그 심연의 폭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심연의 무화 작용, 그 혼돈에 대한 통제와 제한이, 혹은 그 무화 작용으로부터의 탈출이 체계이자 구조이다. 철학은 그 무화 작용에 대해서 말하기, 말함으로써 그 무화 작용을 지연시키는 전략이다. 철학은 그 무화 작용에 대한 이중의 전략, 즉 다가서는 가운데 잊는 전략, 혹은 무릅쓰는 가운데 살아남는 전략이다. 철학은 무의미의 폭력에 대한 폭력이고, 이 반폭력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근원적 폭력”(ED, 94)이자 “선험적 폭력”(ED, 188)이다. 역사 속에 살아남는 자는 모두 그런 “환원 불가능한 폭력”(ED, 94)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총체성과 무한자 사이의 차이를 사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런 양자 간의 이중적 관계를 사유하지 못한다.
이 무능력은 가령 이성이 광기에 가해온 폭력을 고발하는 푸코의 작업에서도 지적될 수 있다. 사실 광기에게 권리를 되돌려주기 위해서 광기 자체를 언어의 법정에 불러들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왜냐하면 언어적 질서는 이미 이성적 질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 유럽어 전체, 서양적 이성의 모험에 다소간 참여했던 모든 것의 언어는 푸코가 광기의 감금과 대상화라는 관점에서 규정하는 그 기획을 무한히 대리하고 있다. 이 언어 안의 그 어떤 것도, 그 언어를 말하는 그 누구도 푸코가 소송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 역사적 죄악성을 면할 수 없다”(ED, 58). 이성의 폭력에 대한 고발, 광기의 옹호 역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법정 진술은 진술이자마자 고발된 죄악을 되풀이해야 한다.
광기에 대한 이성의 폭력을 고발한다는 것은 따라서 어떤 구조주의 혹은 그것의 변형태인 고고학에 대하여 실현 불가능한 과제이다. 이는 광기의 ‘역사’ 자체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이 이미 탈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즉 역사는 언제나 이미 이성적 사유의 산물, 이성적 개념으로서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이성에 반하는 역사, 다시 말해서 이성에 반하는 고고학을 기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기와는 달리 역사의 개념은 언제나 합리적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 혹은 ‘원형’의 의미일 것이다. 그것을 묻기 위한 초과적 글쓰기, 기원․이성․역사의 가치를 묻는 그런 초과적 글쓰기는 고고학의 형이상학적 울타리 안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ED, 59).
역사는 광기와 마찬가지로 이미 이성에 의하여 이론화․개념화․대상화되어 있다. 그런 이론적 혹은 개념적 대상화의 대가에서 역사와 광기는 언어의 질서 안에 자리할 수 있다. 그 대상화가 폭력이라면, 그 폭력은 역사 이전의 절대적 개방성, 광기가 지시하는 난폭한 무규정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감추는 행위, 이용하는 가운데 생략하는 행위, 출연시키는 동시에 지연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곧 소비이자 절약이다. 형이상학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초과적 글쓰기는 형이상학적 언어에 감추어진 이런 이중적 관계, 그 관계의 경제적 구조에 대한 회상이다. “과도한 과장성, 절대적 개방, 반경제적 소비는 언제나 어떤 ‘경제’ 속에 다시 취합되고 다시 붙들린다. 이성, 광기, 그리고 죽음 사이의 관계는 어떤 차연의 경제이자 차연의 구조이고, 우리는 이 구조의 환원 불가능한 근원성을 존중해야 한다”(ED, 95).
그러므로 다시 차연의 구조, 근원적 구조, 혹은 접경의 경제가 문제이다. 루세를 논평할 때, 데리다는 그 경제를 아폴로적 개방성과 디오니소스적 개방성 사이의 관계로 서술했다. 여기서는 이성과 광기, 이성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사건이 지시되고 있다. 문제는 언제나 안과 밖이 관계하는 방식이다. 이성과 언어의 안과 밖의 관계, 구조주의적 총체성의 안과 밖의 관계, 그 차이와 지연의 관계적 구조성이 모든 역사 내적 구조와 체계보다 먼저 있는 근원적 구조성이다. 루세를 논평할 때 데리다는 이 접경적 관계의 경제, 그 경제의 실행을 글쓰기와 동일시했다. 언어적 세계 밖의 디오니소스적 개방성, 그 난폭한 무규정성을 협소한 논리적 언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 기입하는 것, 이를 위하여 그 절대적 개방성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다. 여기서 그 경제는 여전히 철학적 글쓰기, 혹은 총체성에 관계하는 철학적 활동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 글쓰기의 경제는 초과하는 것과 초과된 총체성 사이에 정규화된 어떤 관계, 즉 절대적 초과의 차연[지연과 대체]이다”(ED, 96). 철학은 다시 말해서 총체성을 사이에 둔 접경적 경제에 위치한다. 이 접경적 경제는 절대적 개방성의 폭력을 수용하되 바어하고 드러내되 감추는 이중의 운동 속에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철학의 본성을 다시 ‘악마적 과장성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vouloir-dire-l'hyperbole démonique, ED, 95)로서 정의했다. 이런 공식은 데카르트의 악령의 가설, 그리고 플라톤이 선의 이데아를 말하자마자 글라우콘이 내뱉은 감탄 ‘디아모니아 히페르볼레스’(diamonia hyperboles)에 대한 주석(ED, 87)에 바탕하고 있다. 악마적 과장성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고착화된 총체성을 상대화하기 위하여 언표 불가능한 초월자를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인다는 것, 표상 불가능한 무한자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개방성의 기원에 있는 절대적 무규정성을 규정된 문법에 따라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언제나 절대적 개방성에 대한 반폭력, 상처내기, 왜곡일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의 과장법적 회의와 그 정점의 코기토는 철학에 본질적인 이 기획의 탁월한 실행 사례이다. “유래 없고 독창적인 기획, 무규정자, 무 혹은 무한자로 향한 초과의 기획, 사유 가능한 전체, 존재자와 규정된 의미들의 전체, 사실적 역사의 전체를 넘어서려는 초과의 기획”(ED, 87)이라는 점에서, 코기토에 이르는 데카르트적 성찰의 궤적은 살아 있는 철학의 모범이자 데카르트주의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하는 여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 행위는 그 본질이나 기획에 있어서 더 이상 데카르트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더 이상 데카르트주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ED, 95). 철학은 언제나 데카르트적이고, 데카르트적일 때만 철학적일 수 있다. 철학은, 그리고 해체론은 데카르트적 계획의 반복이다.(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장자의 통쾌한 과장법은 동아시아의 철학이 간직한,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잊혀진 위대한 유산이다.)
이 데카르트적 기획은 “사실적이고 규정된 형태의 역사적 구조 안에 가두어둘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하고 규정된 형태의 총체성 전체를 초과하는 기획이기 때문이다”(ED, 93). 데카르트의 철학을 어떤 특정한 시대의 인식론적 구조 안에 위치시키려 했던 것은 푸코이다. 푸코는 이성과 광기 사이의 화해와 공존이 깨지는 시대, 이성에 의한 광기의 배제와 감금이 시작되는 시대를 중세 이후의 고전주의 시대로 간주했다. 정신병원과 보호소의 탄생은 그런 지각 변동을 알리는 제도적 차원의 변화로서 해석되었고, 데카르트의 첫 번째 성찰은 그런 지각 변동을 알리는 철학적 표현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거기서 광인이 철학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자격을 박탈당한 채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첫 번째를 다시 읽는 것은 이런 해석을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한 면밀한 독서와 체계적 주석을 실천하는 이 논쟁의 세부는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중요한 것만을 기억하자면, 데리다는 데카르트의 첫 번째 성찰에서 등장하자마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광인이 사실은 성찰의 주체 안으로 점차 내면화되고 마침내 이성적 사유 자체를 선천적으로 구성하는 내재적 광기로 변형되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 광기의 내재화 과정은 당연히 꿈의 가설과 악령의 가설에 바탕한 과장법적 회의이다. 데리다는 광인의 광기보다 더 광적인 이 데카르트의 과장술적 행보에서 철학 일반에 공통된 계획,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일반의 총체성, 세계의 총체성을 초과하는 계획”(ED, 93)을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할 때, 광기에 대한 데카르트적 성찰의 관계는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론적 구조에 속한다기보다,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의 고전성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데카르트에게서) 모든 것을 규정된 역사적 총체성으로 환원할 수 있지만, 그 과장법적 기획만은 예외인 것이다”(ED, 88).
데카르트적 과장성이 철학적 글쓰기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라는 것은 그러나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철학이 본성상 위기를 생의 조건으로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 철학이 스스로를 배반한다는 것, 철학이 어떤 위기와 자기 망각에 빠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이 위기와 자기 망각은 철학의 운동에 대하여 어떤 본질적이자 필연적인 주기를 이룬다. (…) 그 자백은 광기의 공포 앞에서 그 공포의 망각인 동시에 폭로이고 그에 대한 자기 보호인 동시에 노출이며, 다시 말해서 어떤 경제이다”(ED, 96). 그러므로 철학사는 체계의 역사이기 앞서 체계를 최초로 개방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무규정적 무한성의 위험에 관계해온 역사, 실성과 전복적 혼돈의 공포에 관계해온 역사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철학사는 철학이 그 치명적 관계, 그 자기 부정적 위기를 스스로 초래해온 역사이다. 왜 스스로 위기를 초래하는가? 그렇게 그 위기의 분기점으로 되돌아 갈 때만 철학은 자신의 기원과 자유롭게 관계할 수 있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위기와 자기 상실적 망각 혹은 자기 부정이 철학의 ‘본질적이자 필연적인 주기’를 이룬다. 철학사는 그 주기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 모든 이유는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그런 악마적 과장성 없이, 그것이 말하는 위기의 자발적 초래 없이 철학은 더 큰 위기로부터 구제받을 수 없다. 철학은 언제나 이성적 행위이고 따라서 언제나 광기의 감금, 무질서의 통제이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한 체계, 모든 이론, 해체론마저 이성의 환원 불가능한 폭력성의 대행자이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은 “매순간 당대의 광기를 감금하면서도 옛날의 광기를 풀어놓지 않는다면, 사유로서 혹은 더 큰 폭력 아래 죽게 될 것이다”(ED, 94). 역사적 현실의 개방 구조는 영원히 정해진 중심이 없다. 역사 속의 모든 중심은 무한하게 이어지는 대체와 이동 혹은 보충과 번역의 지점에 불과하다. 중심의 몰락, 그 위기는 이미 역사적 개방성의 원천이다. 총체성을 설계하는 철학적 건축술에 대하여 그 출발점, 그 초월적 영점은 모든 역사적 유한자를 규정하는 본질적 위기와 그 원초적 위험성을 접촉하는 지점, 접촉하면서 지연시키는 지점이다. 거기서 초월적 사유는 광인보다 더 광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충격적 모험 속에서만 이성은 역사 내재적 허무와 소멸의 위험을 견디는 새로운 총체성의 원근과 척도를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개방성에 맹목적인 구조주의의 최종적 한계, 그리고 그것을 기초짓는 이론적 사유 일반의 마지막 한계는 아마 역사 내재적이자 사유 내재적인 이 위기의 필연성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 있을 것이다. 그 어원으로 돌아가서 새기자면, 위기란 위험한 분기점이다. 초월론으로서의 철학은 의미와 무의미, 존재와 비존재, 진리와 비진리의 최고 분기점, 그러나 역사화하는 분기점으로서의 어떤 영점에 이르고자 하는 계획이다. 이성과 실성 혹은 삶과 죽음이 접촉하는 그 위험한 분기점, 바로 그 지점에서 구축되는 교량이야말로 철학이 ‘중심’을 잃은 역사적 현실로 되돌아오는 출발점이다. 2천년 전통의 서양 형이상학이 몰락해 가는 이 시대에 해체론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잊혀져 가는 출발점, 그 영점으로 가는 길, 아직 길이 아닌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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