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의 포스트모더니즘론
-이향미
1.
현 세기의 대표적인 영미 좌파 지식인인 테리 이글턴은 최근의 저서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현대의 대표적 사상조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사상들의 조합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유독 맑스주의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소리높여 비판하는 항목만을 선택하여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적 시각에서”(ⅳ) 조목조목 이에 대한 반론을 편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밀려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 속에서 그 조류에 휩쓸리지도 않고 또 거슬러 퇴행하지도 않으면서 맑스주의란 배를 운항하는 능숙한 키잡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적 전통만을 고집하는 외골수의 고집통으로, 또 때로는 능청스럽고 방만하게 대처하는 교활한 모사꾼의 모습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용하라, 만약 할 수 없다면 하지마라”는 브레히트의 함축적인 문구나 혹은 “가능한 모든 것을 모으라. 왜냐하면 언제 그것이 용이하게 될 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벤야민의 충고(225)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싸움에 응하는 자신의 전술적 토대로 삼고 있다. 따라서 페리 앤더슨처럼 데리다나 푸코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판이 지니는 체제전복적 성격과 맑스주의의 위기에서 수행하는 긍정적 역할을 상기시키고, ‘해체적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마이클 라이언의 저서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그는 우선 후기근대성(postmodernity)이란 용어를 채택하여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속에 내재한 공통적 사상을 추려낸다. 이글턴이 보기에 후기근대성의 특성은 이성과 진리, 객관성, 거대 내러티브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들을 불신하는 사유양식이며, 계몽주의적 규범들에 반대하여 세계를 우발적이고 근거지워져 있지 않은 다양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서문-ⅰ) 더불어 획일적으로 억압하는 체제 하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임의성이나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성이나 언어, 욕망, 육체, 무의식과 같은 영역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양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현대문화의 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확실히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활약은 기존의 지배체제나 전통적인 좌파에 의해서 무시되어온 수많은 사안들을 이론의 중심무대에 올렸다. 이글턴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놓은 “비옥하고 풍성한 문화에 비추어 그 자체를 변형시키지 못하는 사회주의라면 분명히 출발에서부터 파산하게 될 것이다”(59)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정치적 급진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성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안영역은 정치적으로 활동성이 없는 사회에서의 대용적인 우상파괴일 뿐이며 결국 감금되고 “좌절된 정치적 에너지에 대한 매혹적인 대안”(45)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성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지만 고전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멋지게 비껴나는 하나의 방식으로 드러나며 결과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글턴의 이러한 입장을 목적론적 역사관과 총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이 맑스주의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소리높여 비판하는 대표적인 사안은 ‘목적론적 역사관’이다. 이것은 맑스주의가 가지는 특정한 역사관에 대한 비판 이전에 역사를 개념적으로 구속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부하는 것은 역사(history)가 아니라, 역사(History) 즉 은밀하게 전개되어온 내재적 의미와 목적을 지닌 역사라는 실체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거대담론(grand narrative)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일관된 거부이다. 거대담론들은 이질적이며 비교불가능한 문화와 역사적 사안을 획일적인 체계로 분석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제외되고 배제된 층위를 끊임없이 양산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단선적이며 목적론적인 역사관은 절대적 기원을 염두에 둔 형이상학적인 인과론의 부산물로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질책하는 목적론이란 단지 가상의 공격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니 도리어 사회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결정적인 역사(History)와 싸우는 것에 동의하며, 다양성・유연성・개방성을 지닌 역사를 믿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맑스에게 있어서 (그전까지의) 역사란 결정적이며 동시에 <비>이성적이었으며 사회주의의 의도는 역사를 다소 덜 결정적이며 동시에 덜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신화적으로 스스로 움직여가는 역사의 변증법에 동의하는 것이 맑스주의라기보다는 역사적 비결정성―즉 비교적 한가롭고 강제적이지 않은 사회, 비교적 추상적인 범주에 예속되지 않은 사회, 혹은 어떤 자연적 재난처럼 인간을 비틀거리게 하는 힘에 예속되지 않는 사회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적 비결정성―이란 사회주의에 있어서 여전히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이며 과거의 무시무시한 결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5)
즉 사회주의적 역사관이 지닌 목적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움직여 가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즉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물적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역사관에서 어떤 “미리 짜여진 고유한 필연성”(193)은 없다. 다만 우리 누구나가 각자 미래에 대해 스스로 설정하는 특정한 목적이 있고 그에 따라 규정되는 기획들이 있는 것처럼, 맑스주의가 가지는 목적론 또한 어떤 특정한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로부터 자동적으로 뒤따라 나오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발전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몇몇 필요조건들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196) 것이다.
한편, 역사와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지속성이나 보편성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인간의 특징들이란 것이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에 의해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저류에 흐르는 동일성이란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글턴은 “이렇게 믿는 것에 대한 대가는 살아 있는 대다수의 사람과 더불어 죽은 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역사에 대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역사가 놀랄 정도로 하나의 지속성―참혹함과 착취라는 지독스럽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실들―을 보여”(104)준다고 말한다. 만약 역사와 또 현대의 세계사적 사건들이 진정 철저히 단절적이고 무작위적인 것이라면, 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론상의 편집증을 버리고 임의적 주관성이라는 엄연한 객관성을 포용”해야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이 이상하리만큼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동시대적인 현재 세계 곳곳에서 착취는 개별적으로 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 아래 포섭되는, 다변적이긴 하지만 분명 동일성을 지닌 거대담론으로만이 설명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전지구적인’이란 수식어는 단지 ‘세계시장’이나 ‘매스미디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생태계, 문화, 공동체 등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것에도 유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여성은 항상 억압받아왔다’는 명제 또한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적용되면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명제 중의 하나(205)임을 이글턴은 상기시킨다. 이런 경우 거대 담론을 그 원인으로 추적하는 것을 또 하나의 환원주의로 비판해버릴 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은 표면적인 제스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다시 총체성이란 ‘거대담론’을 불러와야 한다.
3.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총체성 비판이 양면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포스토모더니즘은 “어떤 종류의 총체성에 대해서는 의심하면서 다른 종류의 총체성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어떤 종류의 총체성―감옥, 가부장제, 육체, 절대주의적 정치질서들―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되지만, 다른 종류의 총체성―생산양식, 사회 형성과정, 교조적 체계―은 암암리에 검열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36) 기실 총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혐오는 이 개념을 즉각적으로 스탈린주의나 파시즘과 연계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총체성은 억압받는 집단이 자신의 억압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따르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이는 현 상황의 적확한 실천을 위해서는 보편적이며 총괄적인 사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추정상 다른 모든 것들이 연역될 수 있는 이론과, 수많은 우리의 실천들을 구체화시키는 기반을 제시한다는 의미의 ‘거대’ 내러티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204)
이글턴은 “결국 총체성에 대한 수많은 회의론은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를 보다 넓은 정치적 틀 안에 설정해야 할 특별히 절박한 이유가 없는 지식인들”(36)에게나 환영받을 만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가치들과 형이상학적인 근본들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적어도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지배적인 가치체제를 훌륭하게 전복시키는 것이지만,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흔히 통하는 일이 시장의 차원에서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는 점과 동일한 비판이다.
어느 시대보다 전지구적인 경제적・문화적 침략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총체성에 대한 회의는 확실히 후기자본주의의 전략과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맑스주의가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는 “철저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차이, 전도, 이탈 등을 생산해내는 체제의 이미지, 유령처럼 실체가 없으며 포착하기 어려운 철저하게 수량화된 상품의 교환에 의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체제의 이미지, 추상적 평등으로부터 물질적 불평등을 계속 자아내는 체제의 이미지, 그 스스로가 끊임없이 조롱하는 권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스스로가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불변의 토대들을 필요로 하는 체제의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적대자들을 길러내는 체제의 이미지이다.”(121) 이러한 체제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일탈과 파편성은 예견되는 자기패배적 행위이며 체제 영속화를 위한 구실로 자리잡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의 4・19세대나 6・29세대의 주역중 많은 이들이 결국 기존 정치체제로 자연스럽게 포섭되고 그들의 저항이 보수세력내에서조차 한때의 치기로 너그러이 용인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문화와 차이에 열중하는 동안 국제 자본은 모든 자연자원과 지역공동체, 전통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주장하면서 생산과 시장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체제의 보편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의 실제 정치경제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며 전지구적 현실 그 자체이다. 이런 시점에서 총체성을 깨어나야 할 꿈이라고 항변할 때 우리는 그 진의를 되물어야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이글턴과 견해를 다소 달리하는 프레드릭 제임슨 또한, 폐기해버릴 수 없는 개념은 ‘총체화’라고 말한다. “현상적으로는 자율적이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영역들 사이의 비밀스런 유사성의 특성과, 우리가 보통 고립시켜 하나씩 기억하게 되는 것들에 숨겨진 연속성과 리듬의 특성을 더욱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밝혀낼 때” 필요한 것이 총체화라는 것이다. “역사의 재구성, 전지구적 차원의 특성을 규명하고 가정을 세우는 일, 직접성의 ‘꽃이 만발하고 벌이 윙윙거리는 소란’으로부터의 추상화 등은 늘 현시점에 대한 근본적인 개입이자 그 맹목적 숙명에 대한 저항의 약속”이다.
미국이라는 거대 일국 자본주의가 세계전체의 정치경제를 좌우하고 윤리도덕적 인식마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도시키는 지금, 총체성이라는 개념은 정확한 현실파악과 저항의 실천을 위해 우리에게 어느때보다 필요한 개념인 것이다.
4.
이글턴은 맑스주의가 총체성과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대내러티브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론이 되려고 한 적이 없는 제한적 내러티브”이며, 이외에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한 전지구적 내러티브와 같은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204) 이 중 그는 특히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 두 조류가 주목받게 된 것이 후기구조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각각 그에 따른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긍정성이 최대한 발현한 것으로 본다.
페미니즘은 정치적 실천에 회의적인 다른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이론적 급진주의와 정치 참여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페미니즘이야말로 정체성과 정치조직간의 문제는 물론이고 학계와 사회간에 귀중한 연결고리를 제공한 이론이었다. . . 페미니즘은 도전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체험한 현실(lived reality)을 자각시킨 이론이었으며, 이같은 명분을 들어 본질주의와 인습주의, 정체성의 확립과 정치권력의 성격 등 외견상 추상적인 주제들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여지를 준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역사발전에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본원이었던 유럽제국이 붕괴하고 이를 대신한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 초국가적 자본주의 기업, 또 서구 및 ‘주변부’ 사회에서 자행된 인종탄압 등을 고발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통해 이를 문화분석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가령 ‘거대담론’과 관련된 질문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사회가 과거로부터 자신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은폐해 왔던 역사적 상황으로 적용되고, “ ‘타자(the other)’란 단순한 이론적 개념이 아닌 역사서술에서 제외되고 노예성・모욕・신비화・대량학살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집단과 민족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글턴은 다른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계급, 인종, 성’에서 계급투쟁이 단지 그 중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제기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맑스주의의 고유성은 “첫째, 물질적 생산이 사회적 존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라는 데, 둘째, 계급투쟁이 역사발전의 중심적 동력”이라는 데 있으며, 세 번째로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 봉기의 이론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격하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위계질서에는 반대하지만, “우선순위에 따른 실제적인 등급화”라는 의미에서의 위계질서는 필요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급진적인 정치론은 그 자체의 한정된 에너지들이 여러 가지 안건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분배되도록 계산하는 어떤 방식을 필요로 한다. 이성적인 주체가 그러하듯이, 급진적 정치론은 어떤 안건은 다른 안건들보다 중요하며 어떤 지점은 다른 지점들보다 더 시작하기 좋은 곳이며, 어떤 투쟁은 다른 투쟁들과 달리 한 특정한 삶의 형식에 핵심적이라고 가정한다. 물론 이러한 정치론이 그 문제들을 치명적으로 잘못 계산하여 현실적으로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태만하여 간과해버린 갈등들을 수십년 혹은 한세기 동안 관심밖에 두게 될는지도 모르지만.(178)
그는 여러 가지 사안을 동등하게 배제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감탄할만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자유주의자의 모습이지 맑스주의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단호히 배격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는 항상 전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뜨로쯔끼의 언명을 존중하는 전통주의자로 본다.” 그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교의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적 공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살아있는 지혜로운 지표들이며, 그런 뜻에서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떠돌아 다니는 것을 신중히 경계함은 전통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주의 정치의 혁명적 성격, 즉 “고전적 맑스주의에서는 복잡하고 오래 지속된 다중적인 혁명과정은 반드시 부르주아 국가 무장세력과의 결정적 대결이라는 어김없는 위기국면을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를 회피하는 것은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규율, 권력, 통일성, 진리, 집단적 주체성, 타자성 등의 개념이 가진 부정적 면들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마지막엔 늘 식민지에서 제국주의를 배제해야 하는 상황, 혹은 베트남의 정글이나 제3세계의 혁명적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러한 이글턴의 태도는 현재 그러한 급박한 혁명적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서구국가나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억지 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7, 80년대의 억압적 국면 속에서 맑스주의가 지녔던 위계질서에 따른 배제와, 규율이 가졌던 부정적 영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글턴의 지적은 선뜻 받아들이기에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그에게서는 묵묵하고 성실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노년의 키잡이가 연상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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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기의 대표적인 영미 좌파 지식인인 테리 이글턴은 최근의 저서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The Illusions of Postmodernism,1996)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현대의 대표적 사상조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사상들의 조합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유독 맑스주의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소리높여 비판하는 항목만을 선택하여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적 시각에서”(ⅳ) 조목조목 이에 대한 반론을 편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밀려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 속에서 그 조류에 휩쓸리지도 않고 또 거슬러 퇴행하지도 않으면서 맑스주의란 배를 운항하는 능숙한 키잡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적 전통만을 고집하는 외골수의 고집통으로, 또 때로는 능청스럽고 방만하게 대처하는 교활한 모사꾼의 모습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용하라, 만약 할 수 없다면 하지마라”는 브레히트의 함축적인 문구나 혹은 “가능한 모든 것을 모으라. 왜냐하면 언제 그것이 용이하게 될 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벤야민의 충고(225)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싸움에 응하는 자신의 전술적 토대로 삼고 있다. 따라서 페리 앤더슨처럼 데리다나 푸코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판이 지니는 체제전복적 성격과 맑스주의의 위기에서 수행하는 긍정적 역할을 상기시키고, ‘해체적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마이클 라이언의 저서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그는 우선 후기근대성(postmodernity)이란 용어를 채택하여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속에 내재한 공통적 사상을 추려낸다. 이글턴이 보기에 후기근대성의 특성은 이성과 진리, 객관성, 거대 내러티브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들을 불신하는 사유양식이며, 계몽주의적 규범들에 반대하여 세계를 우발적이고 근거지워져 있지 않은 다양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서문-ⅰ) 더불어 획일적으로 억압하는 체제 하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임의성이나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성이나 언어, 욕망, 육체, 무의식과 같은 영역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양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현대문화의 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확실히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활약은 기존의 지배체제나 전통적인 좌파에 의해서 무시되어온 수많은 사안들을 이론의 중심무대에 올렸다. 이글턴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놓은 “비옥하고 풍성한 문화에 비추어 그 자체를 변형시키지 못하는 사회주의라면 분명히 출발에서부터 파산하게 될 것이다”(59)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정치적 급진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성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안영역은 정치적으로 활동성이 없는 사회에서의 대용적인 우상파괴일 뿐이며 결국 감금되고 “좌절된 정치적 에너지에 대한 매혹적인 대안”(45)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성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지만 고전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멋지게 비껴나는 하나의 방식으로 드러나며 결과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글턴의 이러한 입장을 목적론적 역사관과 총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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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이 맑스주의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소리높여 비판하는 대표적인 사안은 ‘목적론적 역사관’이다. 이것은 맑스주의가 가지는 특정한 역사관에 대한 비판 이전에 역사를 개념적으로 구속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부하는 것은 역사(history)가 아니라, 역사(History) 즉 은밀하게 전개되어온 내재적 의미와 목적을 지닌 역사라는 실체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거대담론(grand narrative)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일관된 거부이다. 거대담론들은 이질적이며 비교불가능한 문화와 역사적 사안을 획일적인 체계로 분석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제외되고 배제된 층위를 끊임없이 양산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단선적이며 목적론적인 역사관은 절대적 기원을 염두에 둔 형이상학적인 인과론의 부산물로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질책하는 목적론이란 단지 가상의 공격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니 도리어 사회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결정적인 역사(History)와 싸우는 것에 동의하며, 다양성・유연성・개방성을 지닌 역사를 믿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맑스에게 있어서 (그전까지의) 역사란 결정적이며 동시에 <비>이성적이었으며 사회주의의 의도는 역사를 다소 덜 결정적이며 동시에 덜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신화적으로 스스로 움직여가는 역사의 변증법에 동의하는 것이 맑스주의라기보다는 역사적 비결정성―즉 비교적 한가롭고 강제적이지 않은 사회, 비교적 추상적인 범주에 예속되지 않은 사회, 혹은 어떤 자연적 재난처럼 인간을 비틀거리게 하는 힘에 예속되지 않는 사회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적 비결정성―이란 사회주의에 있어서 여전히 성취되어야 할 하나의 목표이며 과거의 무시무시한 결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5)
즉 사회주의적 역사관이 지닌 목적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움직여 가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즉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물적 조건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역사관에서 어떤 “미리 짜여진 고유한 필연성”(193)은 없다. 다만 우리 누구나가 각자 미래에 대해 스스로 설정하는 특정한 목적이 있고 그에 따라 규정되는 기획들이 있는 것처럼, 맑스주의가 가지는 목적론 또한 어떤 특정한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로부터 자동적으로 뒤따라 나오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발전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몇몇 필요조건들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196) 것이다.
한편, 역사와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지속성이나 보편성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인간의 특징들이란 것이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에 의해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저류에 흐르는 동일성이란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글턴은 “이렇게 믿는 것에 대한 대가는 살아 있는 대다수의 사람과 더불어 죽은 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역사에 대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역사가 놀랄 정도로 하나의 지속성―참혹함과 착취라는 지독스럽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실들―을 보여”(104)준다고 말한다. 만약 역사와 또 현대의 세계사적 사건들이 진정 철저히 단절적이고 무작위적인 것이라면, 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론상의 편집증을 버리고 임의적 주관성이라는 엄연한 객관성을 포용”해야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이 이상하리만큼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동시대적인 현재 세계 곳곳에서 착취는 개별적으로 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 아래 포섭되는, 다변적이긴 하지만 분명 동일성을 지닌 거대담론으로만이 설명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전지구적인’이란 수식어는 단지 ‘세계시장’이나 ‘매스미디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생태계, 문화, 공동체 등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것에도 유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여성은 항상 억압받아왔다’는 명제 또한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적용되면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명제 중의 하나(205)임을 이글턴은 상기시킨다. 이런 경우 거대 담론을 그 원인으로 추적하는 것을 또 하나의 환원주의로 비판해버릴 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은 표면적인 제스쳐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다시 총체성이란 ‘거대담론’을 불러와야 한다.
3.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총체성 비판이 양면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포스토모더니즘은 “어떤 종류의 총체성에 대해서는 의심하면서 다른 종류의 총체성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어떤 종류의 총체성―감옥, 가부장제, 육체, 절대주의적 정치질서들―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되지만, 다른 종류의 총체성―생산양식, 사회 형성과정, 교조적 체계―은 암암리에 검열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36) 기실 총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혐오는 이 개념을 즉각적으로 스탈린주의나 파시즘과 연계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총체성은 억압받는 집단이 자신의 억압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따르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이는 현 상황의 적확한 실천을 위해서는 보편적이며 총괄적인 사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추정상 다른 모든 것들이 연역될 수 있는 이론과, 수많은 우리의 실천들을 구체화시키는 기반을 제시한다는 의미의 ‘거대’ 내러티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204)
이글턴은 “결국 총체성에 대한 수많은 회의론은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를 보다 넓은 정치적 틀 안에 설정해야 할 특별히 절박한 이유가 없는 지식인들”(36)에게나 환영받을 만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가치들과 형이상학적인 근본들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적어도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지배적인 가치체제를 훌륭하게 전복시키는 것이지만,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흔히 통하는 일이 시장의 차원에서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는 점과 동일한 비판이다.
어느 시대보다 전지구적인 경제적・문화적 침략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총체성에 대한 회의는 확실히 후기자본주의의 전략과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맑스주의가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는 “철저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차이, 전도, 이탈 등을 생산해내는 체제의 이미지, 유령처럼 실체가 없으며 포착하기 어려운 철저하게 수량화된 상품의 교환에 의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체제의 이미지, 추상적 평등으로부터 물질적 불평등을 계속 자아내는 체제의 이미지, 그 스스로가 끊임없이 조롱하는 권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스스로가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불변의 토대들을 필요로 하는 체제의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적대자들을 길러내는 체제의 이미지이다.”(121) 이러한 체제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일탈과 파편성은 예견되는 자기패배적 행위이며 체제 영속화를 위한 구실로 자리잡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의 4・19세대나 6・29세대의 주역중 많은 이들이 결국 기존 정치체제로 자연스럽게 포섭되고 그들의 저항이 보수세력내에서조차 한때의 치기로 너그러이 용인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문화와 차이에 열중하는 동안 국제 자본은 모든 자연자원과 지역공동체, 전통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주장하면서 생산과 시장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체제의 보편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의 실제 정치경제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며 전지구적 현실 그 자체이다. 이런 시점에서 총체성을 깨어나야 할 꿈이라고 항변할 때 우리는 그 진의를 되물어야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이글턴과 견해를 다소 달리하는 프레드릭 제임슨 또한, 폐기해버릴 수 없는 개념은 ‘총체화’라고 말한다. “현상적으로는 자율적이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영역들 사이의 비밀스런 유사성의 특성과, 우리가 보통 고립시켜 하나씩 기억하게 되는 것들에 숨겨진 연속성과 리듬의 특성을 더욱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밝혀낼 때” 필요한 것이 총체화라는 것이다. “역사의 재구성, 전지구적 차원의 특성을 규명하고 가정을 세우는 일, 직접성의 ‘꽃이 만발하고 벌이 윙윙거리는 소란’으로부터의 추상화 등은 늘 현시점에 대한 근본적인 개입이자 그 맹목적 숙명에 대한 저항의 약속”이다.
미국이라는 거대 일국 자본주의가 세계전체의 정치경제를 좌우하고 윤리도덕적 인식마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도시키는 지금, 총체성이라는 개념은 정확한 현실파악과 저항의 실천을 위해 우리에게 어느때보다 필요한 개념인 것이다.
4.
이글턴은 맑스주의가 총체성과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대내러티브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론이 되려고 한 적이 없는 제한적 내러티브”이며, 이외에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한 전지구적 내러티브와 같은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204) 이 중 그는 특히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 두 조류가 주목받게 된 것이 후기구조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각각 그에 따른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긍정성이 최대한 발현한 것으로 본다.
페미니즘은 정치적 실천에 회의적인 다른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이론적 급진주의와 정치 참여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페미니즘이야말로 정체성과 정치조직간의 문제는 물론이고 학계와 사회간에 귀중한 연결고리를 제공한 이론이었다. . . 페미니즘은 도전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체험한 현실(lived reality)을 자각시킨 이론이었으며, 이같은 명분을 들어 본질주의와 인습주의, 정체성의 확립과 정치권력의 성격 등 외견상 추상적인 주제들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여지를 준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역사발전에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낸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본원이었던 유럽제국이 붕괴하고 이를 대신한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 초국가적 자본주의 기업, 또 서구 및 ‘주변부’ 사회에서 자행된 인종탄압 등을 고발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통해 이를 문화분석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가령 ‘거대담론’과 관련된 질문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사회가 과거로부터 자신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은폐해 왔던 역사적 상황으로 적용되고, “ ‘타자(the other)’란 단순한 이론적 개념이 아닌 역사서술에서 제외되고 노예성・모욕・신비화・대량학살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집단과 민족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글턴은 다른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계급, 인종, 성’에서 계급투쟁이 단지 그 중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제기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맑스주의의 고유성은 “첫째, 물질적 생산이 사회적 존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라는 데, 둘째, 계급투쟁이 역사발전의 중심적 동력”이라는 데 있으며, 세 번째로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 봉기의 이론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격하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위계질서에는 반대하지만, “우선순위에 따른 실제적인 등급화”라는 의미에서의 위계질서는 필요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급진적인 정치론은 그 자체의 한정된 에너지들이 여러 가지 안건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분배되도록 계산하는 어떤 방식을 필요로 한다. 이성적인 주체가 그러하듯이, 급진적 정치론은 어떤 안건은 다른 안건들보다 중요하며 어떤 지점은 다른 지점들보다 더 시작하기 좋은 곳이며, 어떤 투쟁은 다른 투쟁들과 달리 한 특정한 삶의 형식에 핵심적이라고 가정한다. 물론 이러한 정치론이 그 문제들을 치명적으로 잘못 계산하여 현실적으로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태만하여 간과해버린 갈등들을 수십년 혹은 한세기 동안 관심밖에 두게 될는지도 모르지만.(178)
그는 여러 가지 사안을 동등하게 배제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감탄할만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자유주의자의 모습이지 맑스주의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단호히 배격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는 항상 전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뜨로쯔끼의 언명을 존중하는 전통주의자로 본다.” 그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교의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적 공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살아있는 지혜로운 지표들이며, 그런 뜻에서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떠돌아 다니는 것을 신중히 경계함은 전통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주의 정치의 혁명적 성격, 즉 “고전적 맑스주의에서는 복잡하고 오래 지속된 다중적인 혁명과정은 반드시 부르주아 국가 무장세력과의 결정적 대결이라는 어김없는 위기국면을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를 회피하는 것은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는 규율, 권력, 통일성, 진리, 집단적 주체성, 타자성 등의 개념이 가진 부정적 면들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마지막엔 늘 식민지에서 제국주의를 배제해야 하는 상황, 혹은 베트남의 정글이나 제3세계의 혁명적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러한 이글턴의 태도는 현재 그러한 급박한 혁명적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서구국가나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억지 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7, 80년대의 억압적 국면 속에서 맑스주의가 지녔던 위계질서에 따른 배제와, 규율이 가졌던 부정적 영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글턴의 지적은 선뜻 받아들이기에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그에게서는 묵묵하고 성실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노년의 키잡이가 연상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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