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로티와 리오타르*
노 양 진(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제분류】언어철학, 철학 방법론
【주 요 어】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의 제약, 로티, 리오타르
【요 약 문】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하는 다원주의가 제기하는 허무주의적 우려라는 문제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 제약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로티의 ‘우연성’ 개념과 리오타르의 ‘디퍼런드’ 개념은 공통적으로 극단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수반하는 다원적 변이를 옹호하고 있으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허무주의에의 우려를 불러온다. 이 제약의 문제는 이들의 급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다원주의에 가려져 있지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제약되지 않은 다원적 분기는 결국 상호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이 그러한 허무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만으로 그 분기가 어디에서 제약되는지에 관한 입증 책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로티와 리오타르는 공통적으로 신체적 층위의 경험에서 드러내는 안정된 수준의 공공성을 간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의 핵심적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
1. 머리말
로티(R. Rorty)와 리오타르(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인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선도적 철학자들이다. 상이한 지적 전통에 속하는 이들은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modernity)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들이지만, 인식 또는 지식 문제에서 드러내는 이들의 시각은 다분히 실용주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티와 리오타르는 구조주의적 전통을 사유의 출발점이자 표적으로 삼고 있는 데리다(J. Derrida)나 푸코(M. Foucault)와 구별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데리다나 푸코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여전히 모종의 일반적 언명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이론화나 체계화도 근원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와의 차별성을 드러낸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이러한 급진적 견해는 ‘현대’라는 보편주의적 문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다원주의적 세계로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들이 드러내는 급진성은 다수의 기준들이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반마저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소통과 현실적인 경험의 공공성마저도 전적인 우연의 산물로 규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급진적 태도는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를 불러온다. 그것은 과거의 불균형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불균형으로 나아가는 불안정한 철학적 행보다.
리오타르는 ‘디퍼런드’(differend)라는 개념을 통해, 로티는 ‘우연성’(contingency) 논제를 통해 ‘다원주의’의 길로 나아간다.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의 우호적 이름이다. 철학사를 통해 상대주의는 정합적으로 정형화하기 어려운 모호한 입장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입장으로 배척되어 왔지만, 그 내밀한 유혹에는 뿌리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의 경험에서 관찰되는 상대주의적 현상들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가 갖는 이러한 이론적 모호성 때문에 스스로를 ‘상대주의자’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상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철학자들은 ‘상대주의적 전환’(Relativistic Turn)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한 지적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이러한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대안적 이름이 바로 다원주의다. 로티와 리오타르가 모두 이러한 지적 흐름의 선봉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주의가 아닌, 제약된 다원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주장만으로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원성을 옹호하려는 철학자들은 그 다원적 분기가 제약되는 지점을 밝혀야 하며, 이 문제에 관한 한 그 입증 책임을 져야 한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다원주의가 자신들의 낙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적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불투명한 태도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시각을 빌어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이 다원성의 의미를 제공하는 토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원적 분기를 제약하는 지점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할 것이다. 이 지점은 모두에게 매우 친숙한 지점이지만 로티와 리오타르의 낙관적이고도 급진적인 전략에 의해 가려져 있다.
2. 다원성과 디퍼런드
리오타르는 오늘날의 지적 상황을 ‘포스트모던’으로 특징짓는데, 그것은 19세기 말부터 과학, 문학, 예술의 영역에서 지속되는 기준들의 변화가 불러오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킨다. 리오타르에게 있어서 포스트모던은 ‘모던’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규정된다. 적어도 17세기 이래로 유럽 사회에서 과학은 모든 서사들과 배타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과학은 이러한 서사들을 판정하는 우선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과학은 스스로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리오타르는 “메타 담론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모종의 거대 서사에 공공연히 호소하는 모든 과학”을 가리켜 ‘현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incredulity toward metanarratives)으로 특징짓는다.
메타 담론으로서의 거대 서사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특정한 지식 체계나 이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체계화와 이론화 자체에 대한 급진적 거부다. 이론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기본적으로 이론이 부당하게 개개인의 행위나 선택을 억압하게 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고 개별자만을 인정하려는 급진성을 반영한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로 특징지어진다. 리오타르는 이론화가 다양성의 통합을 겨냥한 하나의 이성적 행위라고 규정하며, 이 이론화의 핵심을 이루는 지식의 보편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특징적 징표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개별자들의 차이와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 bility)에 대한 강조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성이라고 보고 있으며,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합의가 대화의 특정한 상태일 뿐 결코 그 목표가 아니며, 오히려 그 목표는 ‘배리’(paralogy)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리오타르의 주장은 물론 이성적 합의를 의사소통의 궁극적․이상적 목적으로 설정하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시각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합의(consensus)는 낡고 의심스러운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로서의 정의(justice)는 낡은 것도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합의라는 이념이나 실천과 연관되지 않은 정의의 이념이나 실천에 이르러야 한다.
리오타르는 하버마스가 이상적 담화 상황 안에서 가정하는 합의가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지평”이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의사소통적 합의란 모두 일과적이며, 어떤 특정한 조건 또는 제약 안에서의 합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제 지식은 보편적 진리의 추구라는 단일한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상이한 언어게임처럼 각각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따라서 지식은 지속적인 창조와 대화의 연속이 된다.
의사소통에서 합의의 문제는 복잡한 국면을 안고 있다. 아마도 리오타르가 암시하고 있는 의사소통의 모형은 다양한 이해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당사자들의 통합될 수 없는 분기 상태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리오타르의 시각에서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의사소통의 모형은 우리의 이상을 말하고 있을 뿐, 결코 실제적인 의사소통 현상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합의를 특정한 상태라고 보는 리오타르의 지적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리오타르가 ‘합의’를 배척하는 핵심적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경험 세계의 본성을 다원성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합의와 같은 시도가 특정한 목적을 가진 특정한 행위 방식이라고 본다.
리오타르는 다양한 담론의 장르들 사이에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디퍼런드’(differend)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디퍼런드’란 논쟁의 당사자들 사이에 상호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판단의 규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 상황이 해결될 수 없는 분쟁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적으로 다른 언어게임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다른 편의 정당성의 결여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3의 판단이란 사실상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한 판단을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희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다양한 담론의 장르들 사이에 보편적인 규칙이나 판단이 적용되지 않는 디퍼런드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담론들의 다원적 해방을 선언한다.
레딩스(B. Readings)는 디퍼런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초록 개미들이 꿈꾸는 곳?(Where Green Ants Dream)이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광산을 개발하려는 백인들과 이에 저항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법정에서 마주서게 된다. 광산을 개발하려는 백인들은 ‘개발권’이나 ‘재산’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은 ‘땅에 묻힌 신성한 대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재판관은 원주민들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이들이 법적 효력이 있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정한다. 백인들과 원주민들은 동일한 법정에 서 있지만 이들은 사실상 전혀 다른 언어게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법적 분쟁(litigation)이 아니라 디퍼런드다. 이 때 원주민들은 사실상 법적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희생자다. 이 경우 어떤 최종적 판단도 한쪽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디퍼런드의 본성을 ‘언어게임’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언어게임은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후기 철학에서 온 것이며, 리오타르는 언어게임을 극단화시킴으로써 이를 자신의 중심적 전략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1) 언어게임은 규칙들을 전제하며, 2) 언어게임은 계약의 산물이며, 3) 우리의 모든 언어 행위는 특정한 언어게임 안의 한 수(move)여야 한다고 본다. 그는 언어게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은 유희라는 의미에서 싸우는 것이며, 화행은 논쟁학(agonistics) 일반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언어게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 자체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리오타르가 어느 지점에서인가 언어게임들 사이에 극단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리오타르는 상이한 언어게임 사이에 원천적으로 분쟁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이라는 생각에는 분명히 리오타르가 강조하려는 특징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극단적으로 상이하게 드러나는 언어게임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차이를 의미화해 주는 공통 지반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다양한 대립적 분쟁을 묶을 수 있는 지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디퍼런드라는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쿤(T. Kuhn)의 ‘패러다임’(paradigm) 이론이 제시하는 ‘공약 불가능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오타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잘못 해석․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 경험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해명에 이르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리오타르처럼 언어게임을 디퍼런드에 의해 특징짓게 되면 언어게임은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의사소통의 체계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 불가능성은 개념적으로 비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 가능성에도 문제가 있다. 데이빗슨(D. Davidson)의 지적처럼 전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언어게임―데이빗슨이 ‘개념체계’(conceptual scheme)라고 부르는―은 그 자체로 비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 가능성이 없는 공허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리오타르의 급진적인 언어게임 개념은 쿤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데이빗슨의 이러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상이한’ 언어게임들이 반드시 공통 지반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차이들은 그 차이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 지반을 전제한다. 이러한 지반은 차이들의 의미를 산출하는 기본적 조건이다. 공통 지반은 데이빗슨이 지적하는 것처럼 상이한 언어게임들 사이에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절연된, 그래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된 언어게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인지될 수 없다. 즉 그러한 언어게임은 인간의 언어게임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우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게임은 인간인 우리 자신의 게임의 일종이며, 그러한 생각은 모든 게임들이 공유하는 모종의 공공성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일 것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forms of life)은 이러한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공공성은 리오타르가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사회적 계약, 또는 로티가 말하는 ‘우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조건은 우리의 문화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공공 지반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다원주의적 차이들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모든 새로운 차이들은 항상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 지반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적 존재이며, 우리가 생성하는 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그 모든 언어를 벗어난 제3의 관점은 주어지지 않는다. 리오타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항상 의견 안에 있으며, 따라서 상황에 대한 진리 담론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벗어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메타 언어적 지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항상 생성중인 이야기들 안에 내재적이다.
리오타르의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담론들을 수렴한다고 자임하는 진리 중심의 과학 담론의 우선성을 거부하고 다양한 담론들의 해방된 공간을 향한 강력한 제안이다. 그래서 리오타르가 ‘이교주의’(paganism)라는 이름으로 묘사하는 우리의 상황은 다양한 담론들의 차이들로 가득 찬 다원적 상황이다.
이러한 이교주의는 예증되지 않으며, 추론되지 않으며, 서술되거나 연역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회의 이념, 즉 궁극적으로 다양한 화용론들의 집합(실제로 전체화되거나 수량화될 수 없는 집합)의 이념이다. 이러한 집합의 명확한 특징은 이 이교적 세계 안에서 드러나는 상이한 언어게임들이 상호 소통 불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통합적 메타 담론으로 종합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며, 내가 ‘이교적’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그것이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이교적 사회 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끊임없는 교차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도 우연히 도달하게 된 ‘합의’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규칙이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연일 뿐이다.
문화와 경험에 대한 이러한 리오타르의 진단과 처방은 개별자의 독립성과 지위를 복권시키는 데 기여하는 반면, 그만큼 문화와 경험의 공공 지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킨다. 리오타르가 옹호하려는 다원성은 합의를 유일한 가치로 인정하려는 편향된 철학적 태도를 교정하는 데 매우 강력한 제안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다원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지반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다원성의 의미 근거를 부정하게 된다. 리오타르가 옹호하는 다원성은 어디에서도 제약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리오타르의 다원성 옹호는 자연스럽게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를 불러온다. 이것은 리오타르가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함께 과거 이론들의 편향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편향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말해 준다.
3.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와 우연성의 철학
로티는 단일한 진리 개념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진리 대응설의 뿌리를 근세의 인식론적 구도에서 찾고 있으며, 그 구도를 원천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단일한 진리에 대한 담론 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한다. 인식론적 구도에 대한 이러한 급진적 접근은 다분히 듀이적이며, 로티 또한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기조가 듀이적 ‘실용주의’(pragmatism)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러한 해체 이후에 어떠한 대안적 이론화나 체계화도 불필요하며, 대신에 철학은 과거의 이론들이 불러온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고전적인 실용주의자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즉 철학은 체계 건설의 노력을 포기하고 과거의 이론들이 불러온 문제들을 해소하는 ‘치유적 활동’을 그 소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급진적 철학관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 때문에 로티는 다른 모든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함께 대안 부재의 ‘철학적 무책임’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로티가 절대적 진리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비판의 핵심적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근세의 인식론이다. 로티는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절대적 진리 개념이 로크데카르트칸트 전통이라고 불리는 인식론적 구도에 근거한 진리 대응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로티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론적 구도를 특징짓는 것은 ‘표상’(representation) 개념이다.
[객관주의 입장에 따르면] 안다는 것은 정신 바깥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가능성과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신이 그러한 표상작용을 구성하는 방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핵심적 관심은 실재를 잘 표상하는 분야와 별로 잘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 그리고 (잘 표상하는 척하고 있지만) 전혀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로 문화를 구분하는 보편적인 표상 이론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로티는 먼저 우리가 세계의 내재적 본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거부한다. 로티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언어 안에서일 뿐이며, 결코 언어를 벗어나 언어를 언어 이외의 어떤 것과 비교할 방식이 없다. 이러한 로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우연성’ 논제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우연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원천적으로 그 둘 사이에 안정적인 합치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티는 이러한 철학 비판을 토대로 새로운 진리 이론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미련 자체를 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는 하나의 진리 대신에 수많은 진리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원주의의 전형적 패턴이다. 단일한 진리 개념의 포기와 진리 담론을 통해 최종적 판정자로서의 위상을 누렸던 철학은 이제 아무런 특권도 없는 ‘다양한 인간의 목소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로티는 전통철학의 꿈을 넘어서 ‘문예문화’(literary culture)로 이행해 가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그것은 모든 특권 없는 담론들의 다원적 공존을 향한 제안이다.
로티는 물론 자신의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자신의 견해가 “모든 믿음은 다른 모든 믿음과 동등하게 정당하다”라는 유형의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로티 자신 또한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반박되어 마땅할 귀찮은 어떤 견해”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따금씩 부화뇌동하는 대학 신입생을 제외하곤, 중요한 논제에 관해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의견이 대등하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상대주의자’라고 ‘불리게’ 된 철학자들은, 그와 같은 의견들 가운데에서 선택을 하는 근거들이 예전에 생각되어 왔던 것처럼 [알고리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용어의 친숙성이야말로 물리학에서 이론 선택을 위한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거나, 현재의 의회민주주의의 제도와 정합된 것이야말로 사회철학에서의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서 상대주의자로 공격받을 수도 있다.
대신에 로티는 자신의 실용주의가 다만 “어떤 사회―즉 우리 사회―가 이런저런 탐구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정당화의 낯익은 절차들로부터 독립된 진리나 합리성에 관한 논의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로티는 자신의 입장이 상대주의가 아니라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상대주의’라는 말이 실용주의자가 지지하는 자문화중심주의적인 제3의 견해에 해당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자는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다만 우리가 지식과 의견의 전통적 구분―실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진리와 유효하게 정당화된 신념들에 대한 옹호적(commendatory) 용어로서의 진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을 포기해야 한다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주장만을 하기 때문이다.
로티의 주장의 초점은 자신이 자기 반박적인 상대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요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로티의 논의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로티가 대처해야 할 핵심적 숙제는 자신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가 어떤 방식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들지 않는지를 보이는 일이다. 즉 자신의 견해가 드러내는 상대주의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에 관해 적절한 제약 지점을 제시해야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로티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불투명한 태도로 논의의 핵심을 피해 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로티는 리오타르의 급진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로티는 모든 제도와 규칙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지식인의 순수한 임무라는 리오타르의 주장이 합의나 의사소통의 가능성마저도 손상시키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유감스럽게도 리오타르는 매우 순진한 좌파의 이념―이러한 제도들로부터의 탈주는 이 제도들을 선택했던 사악한 힘들에 의해 ‘이용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좌익주의는 필연적으로 합의와 의사소통을 평가절하한다. 왜냐하면 지식인이 아방가르드 밖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그는 ‘타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티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로티에게 있어서 이러한 의사소통 자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공유된 지반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는 모든 것을 우연성으로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의 철학에 대한 로티의 이러한 지적은 자신이 리오타르만큼 급진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암시해 주지만 그것이 로티 자신의 견해에 대해 제기되는 상대주의적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티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거듭되는 비판은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이성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철학자들에게 비판의 궁극적 지반을 제시하지 않는 로티의 비판적 태도는 비합리주의를 향한 위험한 행보로 간주된다. 특히 하버마스는 로티의 견해가 19세기의 딜타이적 역사주의의 세련된 표현일 뿐이며,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로티의 현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종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로티는 하버마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응답한다.
하버마스와 나의 주된 차이는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관념 없이도 잘 살 수 있으며, 충분히 풍부한 합리성의 관념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을 포기한 후에도 플라톤주의에서 좋은 점을 모두 유지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상에서 실재에 이르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 없는 의사소통의 추구로서 하버마스의 합리성에 대한 관념과 내가 취한 에머슨적이고 세속적인 낭만주의가 지닌 유사성들에 비하면 이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로티는 자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또 그렇게 낙인찍히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로티는 이성주의자가 생각하는 ‘이성’ 개념에 근거하지 않은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그 근거가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답을 피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로티와 하버마스의 차이는 도달하려는 지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그 방법이 이성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로티는 자신의 방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다원성을 옹호하려는 철학자들은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제시해야만 한다. 제약되지 않은 다원성은 극도의 분기를 불러올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로티의 낙관적 시각에 의해 가려져 있다. 로티뿐만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거부하고 다원적 기준을 인정하려는 철학자들은 모두 이 제약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원성의 옹호자들은 모두 자신이 서려고 하는 지점이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 지점이 어떻게 제시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의 ‘상대주의적 전환’(Relativistic Turn)이 불러온,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철학적 숙제의 하나다.
4. 다원성의 제약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 주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험의 다원성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이제 철학적 상식의 일부가 되었다. 다원성은 특정한 이론적 가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 영역에서 기본적 구조의 일부로 주어진다. 사람들은 동일하게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며, 지향하는 이상들도 다르다. 객관주의는 이러한 차이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차이들을 넘어서거나 제거함으로써 그 배후에 있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주된 소임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제기된 객관주의적 전통에 대한 지속적 비판은 이러한 객관주의적 열망이 이론적 환상이며, 따라서 철학사가 객관주의적 이론들에 의해 억압된 다원성의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이러한 비판적 흐름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를 거부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아무런 진리도 없거나 다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런 진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주의적 회의주의일 뿐이며, 그것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다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론으로서의 다원주의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는 그 자체로 정합성을 확보하는 데 큰 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어떤 특정한 담론의 특권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담론들의 다원적 해방을 지향하지만 아무런 제약도 주어지지 않는 이러한 해방은 ‘무엇이든 된다’라는 허무주의로 귀착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래서 다원주의의 옹호자들의 핵심적 과제는 다원성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이러한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제약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일이다. 로티도 리오타르도 물론 자신의 다원주의가 허무주의를 향하고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의도하는 다원주의는 허무주의적 다원주의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실제적 현상으로서의 다원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객관주의적 성향을 가진 철학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실제적 다원성을 어떤 특정한 지반으로 수렴시키려고 시도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사실상 표피적이거나 사소한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다원주의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다원성이 환원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고려되어야 할 실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쟁은 화해될 수 없는 평행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사실상 오늘날 상대주의자와 반상대주의자는 모두 유사한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통적 객관주의와 허무주의적 상대주의 사이의 중간지대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완화된 보편주의자나 완화된 상대주의자나 모두 현실적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적 분기를 피하려는 의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은 다원주의의 허무주의적 우려에 대응하는 매력 있는 후보로 남아 있다. 하버마스, 퍼트남(H. Putnam), 데이빗슨, 그리고 썰(J. Searle) 등이 모두 이러한 이성주의적 노선에 서 있다. 그러나 이들이 옹호하는 이성은 더 이상 과거의 이성이 아니다. 그것은 ‘후퇴한 이성’이며, 이러한 이성은 다만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을 막기 위한 이론적 요청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중립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는 체계들간의 불가 공약성은 의미화될 수 없다는 데이빗슨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아무런 척도도 없는 우연은 ‘정신적 자살’(mental suicide)에 이르게 된다는 퍼트남의 주장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처럼 그것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이성으로의 회귀라는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들에 의해서 이성이 비로소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은 순수하게 이론적 구성물이다. 우리는 이성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초월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 이성주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칸트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성주의자가 되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라면 이성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도 허무주의적 분기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일한 평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로티는 비교적 최근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잔인성’(cruelty)이다. 로티는 자유주의자란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제안함으로써 완전한 무정부주의적 귀결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로티가 제안하는 잔인성은 과거의 철학자들이 제시했던 것 같은 적극적인 기준도 객관적인 기준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잔인성이라는 준거점이 특정한 문화,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극단적 우연성 논제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한다. 필자는 이것이 로티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적 진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섬세하게 정형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원주의의 제약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R. Bernstein)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로티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교묘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새로운 구분들을 제시”하던 로티는 이제 숨겨 왔던 자신의 근거지를 소극적인 방식으로나마 드러낸 셈이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 견해는 다원주의적 분기의 제약 가능성을 적절히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허무주의라는 우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성주의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성의 제약을 제시하는 일은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유형의 다원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우선적 과제다. 체험주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적극적인 출구를 열어 준다. 그것은 다원주의가 불러오는 이론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제기되는 문제의 구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통해 문제의 구도를 바꾸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철학적 열망에 앞서서 우리의 경험 구조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체화된 경험의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적 해명의 핵심은 우리의 경험이 신체적․물리적 층위와 정신적․추상적 층위라는 두 층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경험은 신체적 경험을 근거로 확장되는 동시에 신체적 경험에 의해 강하게 제약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신체화되어(embodied) 있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우리는 신체적 층위로 갈수록 증가하는 공공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추상적 층위로 갈수록 증가하는 변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경험의 이러한 중층적 구조를 적절히 해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아닌, 제3의 시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약된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체험주의적 해명은 우리 경험 안에서 다원적 분기의 제약 지점을 비교적 선명하게 제시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체적․물리적 층위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현저한 공공성이다. 그러한 공공성은 단지 로티가 말하는 시간과 기회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이 공유하는 기본적 조건에 근거한 것이다. 로티의 시각을 고집한다면 이러한 안정적 공공성마저도 ‘필연’이나 ‘절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우연’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로티가 배격하려는 필연은 고전적인 필연/우연의 이분법적 구분에 근거한 것이며, 아마도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유용성은 ‘전략적인 것’ 이상일 수 없다는 점을 로티 자신도 인정할 것이다. 결국 로티의 포괄적인 우연성 논제는 필연이나 절대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경험 영역 안에서의 의미 있는 차이들을 해명하는 데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경험의 신체적․물리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공공성은 상위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다원적 변이들의 의미 근거인 동시에 제약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험적 지반은 로티와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정도의 급진적 우연성을 거부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공공성을 드러낼 것이다. 한편 그 지반은 하버마스와 퍼트남이 원하는 정도의 보편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반은 대립적 구도에 서 있는 두 진영의 철학자들이 접속될 수 있는 실제적 지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지점에서 두 진영의 철학자들은 ‘제약된 다원주의’ 아니면 ‘완화된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20세기 후반의 서구 철학자들을 양분해 놓았던 경계선이 ‘객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구성했던 가상의 경계선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5. 맺는 말
로티와 리오타르는 정초주의적 지식 개념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통해 단일한 진리 개념을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단일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는 다원주의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무런 진리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퍼트남의 지적처럼 그 자체로 ‘정신적 자살’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로티도 리오타르도 자신들의 다원주의가 이러한 허무주의적 귀결을 향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지만, 여기에는 자신들의 낙관적 선언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난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옹호하는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물음의 난해성은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전략에 의해 가려져 있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당면한 문제의 구도를 근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철학적 작업을 완수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의지해야 할 지반이 없이는 공중에 떠 있다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처럼 지반이 없는 비판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의 해체는 그 해체의 표적들과 공동의 지반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다만 그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적 지반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버마스가 가정하는 것처럼 ‘이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또 그것이 이상적인 합의를 보장해 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는 그 공적 지반을 공유하면서도 여전히 리오타르가 말하는 배리와 다원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들이 우리에게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려는 것은 이러한 두 대비적 경험들이 결코 어느 한쪽으로 흡수되어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체험주의는 바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이 공적 지반의 구조에 관해 새로운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몸의 중심성’이라는 논제를 중심으로 제시되는 체험주의의 해명은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다원적 분기가 바로 신체적 층위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층위에 의해 강하게 제약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의 급진적 논의 또한 사실상 이러한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이 지반에 의해 제약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지점을 간과함으로써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이 제안하는 다원주의가 불러오는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위협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핵심적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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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ostmodernism and Pluralism: Rorty and Lyotard
Yangjin Noh
This paper aims to show that the postmodern form of pluralism raises a nihilistic threat, and to offer the necessity and possibility of the constraint of it. Rorty's "contingency", as well as Lyotard's "differend" speak for the irreducibility of pluralistic variations along with a radical incommensurability, and thus bring forth a fear of a nihilistic down slide. Veiled by their radical and playful rhetoric, this threat is nothing but a trivial problem. An unconstrained difference may allow a nihilism that denies communication itself. Although Rorty and Lyotard repeatedly claim that they do not seek for such a form of pluralism, that does not get them away from the burden of proof. Purposedly or not, Rorty and Lyotard ignore the stable degree of commonality observed at the physical level of human experience, and, as a result, miss a critical clue to explaining the problem away.
【Key words】Postmodernism, Constraint of Pluralism, Rorty, Lyotard범한철학회논문집
?범한철학?제34집 200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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