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고찰
김 학 근(목포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201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의 역설을 언급한다.
“우리의 역설은 이것이었다: 하나의 규칙이 어떤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대답은, 모든 행위 방식이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모순도 일치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탐구」 201)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역설을 흔히 규칙 따르기의 역설이라 부른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 즉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어떠한 언어의 사용이 올바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립키(S.Kripke)는 「규칙과 사적 언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1982)이란 저서에서 이 역설을 ‘비트겐슈타인의 역설’ 혹은 ‘회의론적 역설’이라 부르고 그것에 대해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탐구」 전체를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해석하고자 한다. 그 결과 최근 20여 년 동안 크립키의 해석을 둘러싸고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의 해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탐구」의 중심 문제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그 역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셋째, 「탐구」 243 이후에 등장하는 소위 사적 언어 논증은 독립된 논증이 아니라 그 앞에 나오는 규칙 따르기 논의의 논리적 귀결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인 규칙 따르기의 역설과 관련하여 첫째 그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둘째 그것에 비추어 크립키의 해석이 근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탐구」에서 규칙과 관련된 논의 부분은 143-242이다.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과 규칙 따르기의 성격에 대해 고찰하는 가운데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해 언급한다. 따라서 필자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탐구」 143 이전의 논의들과 규칙 논의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본 다음 규칙 논의 속에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논의를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Ⅱ), 다음으로 규칙 논의 속에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다(Ⅲ). 이어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을 요약하고 앞에서 고찰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비추어 크립키의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겠다(Ⅳ). 끝으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Ⅴ).
Ⅱ. 규칙 논의의 배경
규칙 논의가 시작되는 「탐구」 143 이전의 고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토대를 비언어적인 세계라 보았던 자신의 「논고」의 언어관을 비판하고 언어의 실제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다음에 등장하는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즉 규칙 논의는 한편으로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의 연속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탐구」 1-142에 나타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고찰의 주요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
먼저 「논고」의 언어관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토대가 세계라 보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인 지시론적 의미론의 입장에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 결과 그는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는 이른바 언어 그림 이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지시적 기능을 갖는 낱말을 모델로 모든 언어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며, 그 이론에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의 지시 대상이다.
둘째 「논고」의 언어관에는 선험적 전제들이 있다. 즉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본질이 있다는 것과 문장의 의미는 확정적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전제들 위에서 언어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고 문장 의미의 확정성을 위해 여러 가지 보조 장치를 설정해 놓는다. 그러한 장치들은 이름과 대상의 단순성, 요소문장들의 상호 독립성 등이다.
셋째 「논고」의 언어관은 일상언어가 논리적 형식의 언어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따라 일상언어의 문법적 형식이 그것의 실제 논리적 형식과는 다르다고 보고 일상언어와는 다른 이름, 요소문장, 문장으로 구성된 논리적 형식의 언어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의 존재는 일상언어가 논리적 분석을 통해 그러한 언어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넷째 「논고」의 언어관에는 언어 사용자가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이미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체계라 보고 언어 그림 이론을 통해서 그러한 기호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갖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언어의 본질의 존재 및 문장 의미의 확정성을 가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가정은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요청’(「탐구」 107)이며, 이러한 요청은 마치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코 위에 걸친 안경을 통해서 보며, 또한 그것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탐구」 103) 명료한 통찰력을 방해하는 선입견이었다고 비판한다.
둘째 「논고」의 언어관이 함축하고 있는 분석적 방법에 대한 비판이다.「논고」에서 분석은 문장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요소문장으로 환원하는 절차이다. 그러한 분석은 복합체와 단순체의 구분을 전제한다. 그러나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하다’ 혹은 ‘복합적이다’는 말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서의 기준과 관련되는 상대적인 용어로서 복합체와 단순체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고 본다.(「탐구」 47) 그렇다면 그것들의 절대적인 구분을 전제로 하는 환원적 분석의 방법은 더 이상 언어의 탐구 방법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하겠다.
셋째 낱말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낱말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동일시한다면, 대상의 변화나 상실은 낱말 의미의 변화나 상실을 뜻하는 바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었다”와 같은 문장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갖는 표현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무의미한 표현을 포함한 위의 문장을 우리는 유의미한 문장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언어의 사용과는 거리가 먼 낱말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름의 담지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이름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와 그것의 담지자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탐구」 40, 41, 49)
넷째 「논고」의 언어관은 언어적 표현의 종류와 기능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즉 지시대상을 갖는 고유명사와 같은 종류의 언어와 그것의 지시적 기능만 고려될 뿐 예를 들어 ‘다섯’,‘그런데’,‘혹은’등과 같은 다른 종류의 언어들과 기능들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탐구」 1) 이러한 비판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종류와 기능의 다양성을 도구와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도구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생각해 보라. 해머, 뺀찌, 톱, 나사돌리개, 자, 아교 남비, 아교, 못, 나사 등이 있다. -낱말들의 기능은 이들 대상들의 기능만큼 다양하다.”(「탐구」 11)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상과 같은 비판은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서 「논고」의 언어관이 언어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언어의 실제 사용을 보라고 촉구하면서(「탐구」 66)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2.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실제 사용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인간에 의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비롯된다. 즉 언어가 언어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호로서의 언어 자체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을 때는 인간의 삶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바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것이 생명력을 갖고 살아 숨쉬는 것은 사용될 때라고 말한다.(「탐구」 432) 이것은 우리가 시간적, 공간적 언어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탐구」 108) 언어를 그것의 사용과 분리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을 부인하면서 언어의 사용의 사실들을 어떻게 조명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종류와 기능은 매우 다양하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보고 언어의 본질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한 「논고」의 본질주의적 사고 방식을 비판한다.
본질주의적 사고 방식은 일반명사들에 의해 지칭되는 사물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사물들에 공통된 속성 즉 본질이 있다고 믿고(혹은 전제하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생각으로서 플라톤과 그 이후의 서양철학에 있어서 줄곧 견지되어온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사고는 「논고」에서도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언어의 본질, 세계의 본질, 논리학의 본질 등의 이른바 본질 문제를 중심 문제로 다루고 있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반성을 열망하는 철학자들의 태도와 손잡고 있는 것으로서 철학적 질병을 야기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파악한다. 철학자들은 일반성을 열망한 나머지 개별적인 사례들 사이의 차이점은 보지 못하고 공통점만을 찾으려고 하며 하나의 예를 가지고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 사례들 사이에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선험적 가정일 뿐이며 하나의 예를 가지고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는 것은 개별적 사례들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일종의 편식 행위이다.(「탐구」 539)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없이 다양한 개별적 사례들에 대한 경험적이고 주의 깊은 고찰을 통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일반명사가 적용되는 모든 경우에 항상 공통된 속성이 있다거나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될 문제이지 선험적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탐구」 66)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에 대한 고찰 결과를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된 어떤 것을 산출하는 대신에 나는 이들 현상들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동일한 낱말을 사용토록 하는 공통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이다.”(「탐구」 65)
“나는 이러한 유사점들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가족유사성’보다 더 나은 표현을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족구성원들간의 여러 가지 유사성들도‧‧‧동일한 방식으로 중복되고 교차되기 때문이다.”(「탐구」 67)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들을 동일한 낱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의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언어들 사이에 중복되고 교차되어 있는 유사점들의 그물로서의 가족유사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은 없기 때문에 「논고」에서처럼 언어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는 「탐구」에서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언어와 인간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주목하면서 언어의 실제 사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과 놀이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유사점들에 기초하여 언어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을 모델 삼아(「탐구」 130) 언어 사용에 관한 다음 사실들을 조명함으로써 언어의 사용이 인간의 삶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인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둘째 언어의 사용은 비언어적인 행위와 얽혀 있다.
하나씩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의 이러한 점을 보이기 위해서 언어 사용을 장기를 두는 경우에 비유한다.(「탐구」 33, 108)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 시합을 하는 상황에서 장기의 말을 움직인다. 이것은 언어의 사용에서도 유사하다. 장기를 두는 사람이 한 수를 두는 것은 단지 나무 조각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장기 시합을 한다는 상황 속에서의 하나의 행위인 것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단지 소리를 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항상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의 말을 아무렇게나 움직이지 않는다. 장기의 규칙에 따라 말을 움직인다. 언어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구문론적 규칙, 의미론적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한다.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로서의 언어 사용의 바로 이러한 점을 명료화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언어의 사용은 비언어적인 행위와 얽혀 있다.
언어 사용의 이러한 사실은 언어놀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정 속에 드러나 있다.
“언어와 그것이 얽혀 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것 전체가 언어놀이이다”(「탐구」 7)
이러한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놀이가 문자나 소리 같은 물리적 기호 외에 행위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행위란 무엇인가? 「탐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형태의 언어놀이의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 그 언어는 건축공 A와 조수 B가 의사 소통을 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A는 건축용 석재로 집을 짓고 있다: 벽돌, 기둥 ,석판, 들보가 있다. B는 A가 필요로 한 순서대로 그것들을 날라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로 구성된 언어를 사용한다. A가 그것들을 외친다.- B는 그러그러한 외침에 따라서 나르도록 배웠던 석재를 가져온다....”(「탐구」 2)
이것은 집을 짓는 현장에서 건축공 A와 조수 B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를 가지고 하는 언어놀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 언어놀이에서 A는 그가 벽돌이 필요하면 “벽돌”하고 외침으로써 B가 벽돌을 가져오기를 꾀한다.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B는 벽돌을 가져온다. 여기에서 A는 단지 소리를 지르고 B는 그 소리를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A는 “벽돌”하고 외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B는 A의 외침에 적절한 반응을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행위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와 함께 이 언어놀이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결국 하나의 낱말의 사용은 어떤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 낱맡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언어 사용자의 반응 행위들과 얽혀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낱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낱말이 구체적으로 사용될 때 함께 얽혀 있는 언어 사용자들의 반응 방식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반응 방식들은 바로 언어 사용자들의 삶의 형식에 속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탐구」 17)이라 말한다. 이것은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 언어의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행위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즉 언어의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삶의 형식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형식이란 무엇이며 삶의 형식과 언어의 사용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이란 우리가 인간인 한에 있어서 우리에게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 주어진 것”(「탐구」 p.226)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삶의 형식’이란 표현을 몇 군데서 더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서 삶의 형식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 중에서 대체로 주류를 형성해온 해석은 윈치(P. Winch)로부터 시작되는 문화 상대주의적 해석이다. 이것은 삶의 형식을 문화공동체에 따라 특수적이고 상이한 문화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는 달리 삶의 형식에는 문화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삶의 형식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한 해석에 따르면 원초적 삶의 형식은 인간의 생리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류 보편적 특성으로서 그것의 양태는 반응 양식, 판단 양식,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원시적 행위들이다. 반면에 문화적 삶의 형식은 문화권마다 특수적인 것으로서 그 문화 구성원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삶의 형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글의 주된 관심 사항이 아니므로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이 글에서는 후자의 해석을 수용하면서 삶의 형식과 언어의 사용과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이러한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을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은 바로 인간들이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에 있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이다.”(「탐구」 241)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일 수 있으려면 정의들에서의 일치뿐 아니라 판단에서의 일치가 필요하다.”(「탐구」 242)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탐구」 p.223)
이상의 언급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의 일치는 언어에 있어서의 일치이며 그것은 바로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이 때 원초적 삶의 형식에 대한 일치는 생래적으로 가능하고 문화적 삶의 형식의 일치는 학습에 의해 습득됨으로써 가능하다. 설사 사자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자와 인간 사이에 일치된 삶의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언어 사용은 바로 삶의 형식의 일부이다.
“‘언어놀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부분 혹은 삶의 형식의 부분이다는 사실을 돋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다.”(「탐구」 23)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서 인간에게만 나타나며, 명령하고, 묻고, 헤아리고, 잡담을 하는 것과 같은 원초적인 언어놀이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행하는 걷고, 먹고, 마시고, 노는 바와 같은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라는 것이다.(「탐구」 25)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로서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셋째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는 다른 양태의 삶의 형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예로서 비트겐슈타인은 희망 현상을 들고 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할 수 있을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다. 즉 희망하는 현상은 이 복잡한 삶의 형식의 양태이다.”(「탐구」 p.174)
지금까지 「탐구」 1-142에 나타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고찰의 중심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는 이러한 고찰을 배경으로 해서 전개된다. 즉 규칙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언어관을 비판하고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해서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탐구의 일부이다. 그리고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바로 그러한 규칙 논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Ⅲ. 규칙 따르기의 역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하게 될 때 볼 수 있는 언어 사용의 중요한 특징 주의 하나는 언어의 사용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143-242 에서 규칙과 규칙 따르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이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 나타나는 정신적 경험 내용과 관련해서 규칙을 파악하고자 하면 하나의 역설에 이른다는 것을 보이면서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규칙 파악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울러 규칙과 규칙 따르기의 성격을 조명한다.
1. 규칙 따르기의 역설이 발생한 이유
규칙을 따르는 행위에 있어서 규칙은 행위를 인도하고 행위의 올바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규칙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그러한 규칙을 찾고자 할 때 역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규칙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 무엇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듣고 이해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 그 낱말에 대한 영상 혹은 그림이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a) 그 영상이 우리에게 그 낱말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강요한다.
(b) 그 낱말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영상을 갖는 정신적 상태이다.
(c)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가 그 낱말에 대한 올바른 사용의 원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역설 발생의 근원이라 보고 그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머리 속에 떠오른 그림이 낱말의 특정한 적용을 강요한다는 것은 하나의 심리적 사실로서 그 낱말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 그림은 하나의 낱말의 사용을 시사하지만 그 낱말을 다른 어떤 것에 적용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 ‘입방체’란 낱말을 들을 때 어떤 하나의 그림이 당신 머리에 떠오른다고 하자. 가령 어떤 한 입방체의 소묘. 어떤 점에서 이 그림이 ‘입방체’란 낱말의 어떤 한 사용에 들어맞거나 들어맞지 않거나 할 수 있는가 ? -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다. 이 그림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고 내가 예컨대 어떤 하나의 삼각 프리즘을 가리키며 이것은 입방체라고 말한다면 이 사용은 그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다.’ - 그러나 그것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나는 그 그림이 결국에는 어떤 하나의 투영방법에 따라 들어맞는 것이 아주 쉽게 상상될 수 있도록 그 예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입방체의 그림은 우리에게 물론 하나의 사용을 시사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르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탐구」 139)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낱말을 들을 때에 우리 머리 속에는 같은 것이 떠오를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두 경우에 같은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우리가 아니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한다.”(「탐구」 140)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투영 방법을 달리하면 ‘입방체’란 말을 들을 때 떠오른 그림을 삼각 프리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과 낱말의 적용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머리(사유, 마음) 속에서 경험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인도된다고 하면 낱말의 적용(의미, 사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언어 사용을 인도하는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해는 슬픔, 고통, 흥분과 같은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러한 표현들은 지속이나 중단, 강도나 정도 등과 같은 개념과 관련된 정신적 상태를 기술하는 표현이지만 ‘이해’는 그렇지 않다. 이해 개념은 능력이나 성향 개념과 관련된다. “ 결코 이해를 ‘정신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탐구」 154)
셋째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라고 보는 생각은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이 우리에게 그 낱말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강요한다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 믿음이 심리적 사실에 불과하다면 이 이해는 더 이상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없다.
넷째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라고 보는 생각은 언어 사용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모든 해석은 해석되는 것과 함께 공중에 떠 있다; 그것은 해석되는 것에 대해 발판으로서 쓰일 수 없다. 단지 해석들만으로는 의미를 확정하지 못한다.”(「탐구」 198) 그 결과를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역설로 표현한다.
“우리의 역설은, 어떤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되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각각의 모든 행위 방식이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일치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탐구」 201)
이러한 역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경험들을 기초로 해석함으로써 나타나는 오해의 산물이다. 실제 언어 사용에서 이러한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크립키는 이것과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마치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본래의 생각에 대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Ⅳ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해소
그렇다면 규칙 파악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 속에서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이 드러난다고 말한다.(「탐구」 201) 그 방법은 사람들이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라 말하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부르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하나의 낱말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가 그 낱말에 대해 그의 머리 속에 어떤 그림을 떠올려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대로 그 낱말이 어떤 것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것에 적용될 수 없는지 적용 방법을 가르친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배우고 그것에 따라 그 낱말을 사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우리가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가는 경우에 비유함으로써 조명한다.
길가에 서 있는 이정표는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간다. 이 경우에 이정표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의 규칙적 사용 즉 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탐구」 198) 아무도 그 이정표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설사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규칙적 사용도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고 이 때 그 이정표는 더 이상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이정표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은 그 이정표에 대한 반응 방식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정표에 대한 관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훈련을 통해 배운다. 하나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할지 우리는 그 화살표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그 화살표에 대한 규칙적 사용을 훈련을 통해 배움으로써 그 화살표에 대해 반응한다.
위의 비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는 바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규칙과 행위의 관련은 우리가 규칙을 배움으로써 성립한다. 여기에서 규칙을 배운다는 것은 실제로 규칙 따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규칙 파악의 방법이다.
둘째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관습이 존재할 때만 규칙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개인의 머리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이 놓여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규칙을 따르는 것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실제 언어 사용에서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규칙은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내가 하나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규칙과 일치되게 행하여졌는지 즉 그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는 내가 그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하나의 규칙 R이 행위 P를 요구한다고 하자. 내가 규칙 R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 나는 행위 P를 하면서 규칙 R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 나는 다른 행위 Q를 하면서 P를 행하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 나는 규칙 R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규칙 R이 행위 Q를 요구한다고 믿고 Q를 행하면서 규칙 R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규칙 R을 따르는 것이 행위 P를 하는 것이라 할 때 세 경우 중에서 ⒜를 제외한 ⒝와 ⒞는 잘못된 생각이다. 나의 실천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는 ‘그 규칙을 따른다’고 말해지는 관습 즉 공적 기준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내가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며 나의 생각에 의해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가 결정되는 사적 규칙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탐구」 202)
둘째 규칙을 따르는 것은 이유에 의한 정당화가 불필요한 행위이다.
우리가 규칙을 따라 행위할 때 그렇게 행위하는 것은 그것이 규칙에 일치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즉 하나의 낱말을 어떤 것에 적용할 때 그 적용이 올바른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명령을 따르는 것과 유사하다.(「탐구」 206) 명령을 하고 그것에 따르는 경우 우리는 하나의 명령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고 그 명령에 대해 훈련받은 대로 반응할 뿐이다. 규칙을 따를 때 우리는 그렇게 행위할 어떤 이유를 갖고 행위하지 않는다.(「탐구」 211) 그렇게 행위하는데 대한 정당화를 요구하면, 단단한 암반에 도달하면 삽은 휘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단지 그렇게 행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탐구」 217) 그러나 이것이 나의 행위가 부당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탐구」 289) 규칙은 항상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동일한 것을 말해주는(「탐구」 223) 최후의 법정이기 때문에(「탐구」 230) 내가 그것을 따를 때 더 이상의 안내도 필요치 않으며 (「탐구」 228),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선택도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는 의심없이 확신을 갖고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탐구」 219) 이것은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어떤 비합리적인 부당한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따르는 것 즉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 의한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치 않는 확고한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기반은 바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삶의 형식이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의 틀을 더 이상 무엇에 의해 근거지울 수 있겠는가?
Ⅳ. 크립키의 해석에 대한 비판
크립키는 「규칙과 사적 언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1982)이란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의 출발점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탐구」 201 앞부분에 등장하는 역설이다.
크립키는 그 역설을 비트겐슈타인이 하나의 회의론을 구성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회의론적 역설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내가 ‘68+57’과 같은 문제에 어떤 하나의 방식으로 반응할 때 나는 그 반응을 정당화할 수 없다. 내가 (+를 plus가 아닌) quus를 의미했다고 가정하는 회의론자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당화에 대해서도 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내가 plus를 의미하는지 quus를 의미하는지를 구별하는 나에 관한 어떤 사실도 없다. 참으로 내가 plus에 의해서 확정적인 함수를 의미하는 것과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나에 관한 어떤 사실도 없다.”
이러한 역설은 언어의 규범성 혹은 규칙의 규범성 문제에 관련된 역설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일상적으로 하나의 낱말에 의해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 때 나는 그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도 하고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무엇이 어떤 사용은 올바른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용은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가 ?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의 정신이나 행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떤 것도 하나의 낱말에 의해 어떤 것을 의미하는 나의 낱말 사용의 올바름을 결정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하나의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지 아니면 잘못 사용하는지를 구별할 수 없다.
크립키는 「탐구」 201의 역설을 위와 같이 언어의 규범성과 관련된 역설로 재구성하고 나서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그 역설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해결 방식을 그가 역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해결 방식과 비유하여 회의론적 해결 방식이라 부른다.
크립키에 따르면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결 방식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가 「논고」에서 견지했던 진리 조건 의미론(truth conditions theory of meaning)을 포기하고 「탐구」에서는 주장가능성 혹은 정당화 조건 의미론(assertability or justification conditions theory of meaning)을 채택함으로써 역설의 발생을 피하는 것이다.
진리 조건 의미론은 하나의 문장의 의미가 그것이 참이라 말해질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견해이다. 크립키는 역설이 바로 이 의미론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이 의미론에 따르면 “나는 ‘+’에 의해 더하기를 의미한다”는 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진리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에 따르면 내가 ‘+’에 의해 더하기를 의미하는 것을 참으로 만드는 어떤 사실도 나의 정신이나 행위 속에서 발견될 수가 없다. 역설은 바로 문장의 의미가 진리 조건에 의해 부여된다고 보고 그러한 조건들을 찾고자 할 때 발생한다.
정당화 조건 의미론은 하나의 문장의 의미가 그것이 주장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의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합당하게 주장될 수 있고 그것을 주장하는 놀이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구체적 조건들(상황들)에 의해 부여된다. 여기에서는 문장의 올바른 사용을 결정하는 나에 관한 사실들이 문장에 대응한다는 가정이 필요치 않다. 크립키는 「탐구」의 의미론을 이러한 종류의 의미론으로 보고 이러한 의미론에서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정당화 조건 의미론을 채택함으로써 역설이 발생하는 것은 피했지만 언어의 규범성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규칙 따르기 개념에 공동체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이유를 규칙과 인과성과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인다.
두 개의 사건 a와 b가 있고, a는 사건 유형 A에 b는 사건 유형 B에 속한다고 하자. 이때 a와 b가 인과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단지 a가 b를 유발시킨다는 것만을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건 유형 A와 B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을 때 그리고 a가 b를 유발시킬 때 a와 b는 인과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행위가 하나의 규칙을 따르는 행위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행위가 속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 유형이 존재할 때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고 공동체와 연루되어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하나의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의 낱말 사용 방식이 그가 속한 공통체의 다른 구성들의 그 낱말에 대한 사용 방식과 일치할 때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의 요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규범성에 대한 회의론과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크립키의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 대한 오해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Ⅲ장에서) 고찰한 내용과 관련지으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크립키의 해석의 단초라 할 수 있는 「탐구」 201에 나오는 역설은 크립키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회의론를 구성하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역설을 말한 의도는 우리가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의 정신적 경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규칙에 대한 파악을 하나의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는 해석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도달하는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는데 있다.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를 우리는 「탐구」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낱말을 사용할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그 낱말의 적용 방법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결정될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낱말의 사용을 머리 속의 그림 - 크립키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면 그 낱말 사용에 대한 나에 관한 사실 - 과 관련해서 보고자 할 때 그것에 의해 올바른 낱말의 사용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탐구」 139, 140)
이해를 정신적 상태로 본다든가 그러한 정신적 상태가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비판하는 경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올바른 언어 사용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언어 사용 혹은 규칙이 정신적인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머리 속에 나타나는 그림과 사용의 관계, 이해 및 그것과 사용의 관계, 규칙 파악의 방식 등에 대한 잘못된 그림으로부터 발생하는 오해의 산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언어의 규범성에 대한 회의론을 펴기 위해 역설을 말하지 않았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하나의 오해에 불과한 만큼 그것에 대한 어떤 이론적 해결책도 필요치 않다. 다만 규칙 파악에 대한 태도 혹은 관점만 바꾸면 된다. 그것은 규칙 파악을 위해 언어 사용자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언어의 실제 사용을 관찰하면 된다. 그 때 역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린다. 그러나 크립키에 의해 해석된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 역설의 부당성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인과성 문제에 대한 흄의 해결 방식처럼 역설을 인정하고 회의론적 해결을 찾아야 한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
셋째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론과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언어에 관한 어떤 이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 언어의 실제 사용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언어에 관한 어떤 이론을 제시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탐구」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탐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뻔한 사실들을 관찰하고 여러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그리고 언어에 대한 오해들을 들추어 내 보여 줌으로써 실제 언어에 대한 조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탐구」 201에서 언급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에 비추어 그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대한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요약하고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가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의 일부이며 규칙 논의는 그 이전의 고찰을 배경으로 해서 전개된다는 관점에서 「탐구」 1-142의 주요 내용 즉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 및 언어 사용의 사실에 대한 조명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규칙 논의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언어관에 대해 비판하면서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하여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탐구의 일부라고 해석하였다.
Ⅲ장에서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 따르기의 역설을 규칙 파악에 대한 잘못된 생각의 결과라 본다. 즉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규칙 파악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실제 사람들이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은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위반하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라 본다.
셋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요 어떤 이유에 의한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치 않는 확고한 기반 위에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명확히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로서의 언어의 실제 사용에 있어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다.
Ⅳ장에서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과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따르기의 역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Ⅲ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크립키의 해석과는 다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크립키의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끝으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의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치료로서의 철학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규칙 파악에 대한 오해로부터 발생하는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탐구」에서 볼 수 있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이나 사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규칙 파악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유아론적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규칙 파악의 방법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위반하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라 본 것은 바로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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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학 근(목포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201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의 역설을 언급한다.
“우리의 역설은 이것이었다: 하나의 규칙이 어떤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대답은, 모든 행위 방식이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모순도 일치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탐구」 201)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역설을 흔히 규칙 따르기의 역설이라 부른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 즉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어떠한 언어의 사용이 올바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립키(S.Kripke)는 「규칙과 사적 언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1982)이란 저서에서 이 역설을 ‘비트겐슈타인의 역설’ 혹은 ‘회의론적 역설’이라 부르고 그것에 대해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탐구」 전체를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해석하고자 한다. 그 결과 최근 20여 년 동안 크립키의 해석을 둘러싸고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의 해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탐구」의 중심 문제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그 역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셋째, 「탐구」 243 이후에 등장하는 소위 사적 언어 논증은 독립된 논증이 아니라 그 앞에 나오는 규칙 따르기 논의의 논리적 귀결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인 규칙 따르기의 역설과 관련하여 첫째 그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둘째 그것에 비추어 크립키의 해석이 근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탐구」에서 규칙과 관련된 논의 부분은 143-242이다.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과 규칙 따르기의 성격에 대해 고찰하는 가운데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해 언급한다. 따라서 필자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탐구」 143 이전의 논의들과 규칙 논의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본 다음 규칙 논의 속에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논의를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Ⅱ), 다음으로 규칙 논의 속에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다(Ⅲ). 이어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을 요약하고 앞에서 고찰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비추어 크립키의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겠다(Ⅳ). 끝으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Ⅴ).
Ⅱ. 규칙 논의의 배경
규칙 논의가 시작되는 「탐구」 143 이전의 고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토대를 비언어적인 세계라 보았던 자신의 「논고」의 언어관을 비판하고 언어의 실제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다음에 등장하는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즉 규칙 논의는 한편으로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의 연속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탐구」 1-142에 나타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고찰의 주요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
먼저 「논고」의 언어관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토대가 세계라 보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인 지시론적 의미론의 입장에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 결과 그는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는 이른바 언어 그림 이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지시적 기능을 갖는 낱말을 모델로 모든 언어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며, 그 이론에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의 지시 대상이다.
둘째 「논고」의 언어관에는 선험적 전제들이 있다. 즉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본질이 있다는 것과 문장의 의미는 확정적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전제들 위에서 언어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고 문장 의미의 확정성을 위해 여러 가지 보조 장치를 설정해 놓는다. 그러한 장치들은 이름과 대상의 단순성, 요소문장들의 상호 독립성 등이다.
셋째 「논고」의 언어관은 일상언어가 논리적 형식의 언어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따라 일상언어의 문법적 형식이 그것의 실제 논리적 형식과는 다르다고 보고 일상언어와는 다른 이름, 요소문장, 문장으로 구성된 논리적 형식의 언어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의 존재는 일상언어가 논리적 분석을 통해 그러한 언어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넷째 「논고」의 언어관에는 언어 사용자가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이미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체계라 보고 언어 그림 이론을 통해서 그러한 기호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갖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언어의 본질의 존재 및 문장 의미의 확정성을 가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가정은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요청’(「탐구」 107)이며, 이러한 요청은 마치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코 위에 걸친 안경을 통해서 보며, 또한 그것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탐구」 103) 명료한 통찰력을 방해하는 선입견이었다고 비판한다.
둘째 「논고」의 언어관이 함축하고 있는 분석적 방법에 대한 비판이다.「논고」에서 분석은 문장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요소문장으로 환원하는 절차이다. 그러한 분석은 복합체와 단순체의 구분을 전제한다. 그러나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하다’ 혹은 ‘복합적이다’는 말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서의 기준과 관련되는 상대적인 용어로서 복합체와 단순체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고 본다.(「탐구」 47) 그렇다면 그것들의 절대적인 구분을 전제로 하는 환원적 분석의 방법은 더 이상 언어의 탐구 방법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하겠다.
셋째 낱말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낱말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동일시한다면, 대상의 변화나 상실은 낱말 의미의 변화나 상실을 뜻하는 바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었다”와 같은 문장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갖는 표현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무의미한 표현을 포함한 위의 문장을 우리는 유의미한 문장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언어의 사용과는 거리가 먼 낱말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름의 담지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이름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와 그것의 담지자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탐구」 40, 41, 49)
넷째 「논고」의 언어관은 언어적 표현의 종류와 기능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즉 지시대상을 갖는 고유명사와 같은 종류의 언어와 그것의 지시적 기능만 고려될 뿐 예를 들어 ‘다섯’,‘그런데’,‘혹은’등과 같은 다른 종류의 언어들과 기능들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탐구」 1) 이러한 비판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종류와 기능의 다양성을 도구와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도구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생각해 보라. 해머, 뺀찌, 톱, 나사돌리개, 자, 아교 남비, 아교, 못, 나사 등이 있다. -낱말들의 기능은 이들 대상들의 기능만큼 다양하다.”(「탐구」 11)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상과 같은 비판은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서 「논고」의 언어관이 언어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언어의 실제 사용을 보라고 촉구하면서(「탐구」 66)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을 통해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2. 언어 사용의 사실들에 대한 조명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실제 사용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인간에 의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비롯된다. 즉 언어가 언어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호로서의 언어 자체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을 때는 인간의 삶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바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것이 생명력을 갖고 살아 숨쉬는 것은 사용될 때라고 말한다.(「탐구」 432) 이것은 우리가 시간적, 공간적 언어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탐구」 108) 언어를 그것의 사용과 분리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을 부인하면서 언어의 사용의 사실들을 어떻게 조명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종류와 기능은 매우 다양하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보고 언어의 본질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한 「논고」의 본질주의적 사고 방식을 비판한다.
본질주의적 사고 방식은 일반명사들에 의해 지칭되는 사물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사물들에 공통된 속성 즉 본질이 있다고 믿고(혹은 전제하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생각으로서 플라톤과 그 이후의 서양철학에 있어서 줄곧 견지되어온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사고는 「논고」에서도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언어의 본질, 세계의 본질, 논리학의 본질 등의 이른바 본질 문제를 중심 문제로 다루고 있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반성을 열망하는 철학자들의 태도와 손잡고 있는 것으로서 철학적 질병을 야기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파악한다. 철학자들은 일반성을 열망한 나머지 개별적인 사례들 사이의 차이점은 보지 못하고 공통점만을 찾으려고 하며 하나의 예를 가지고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 사례들 사이에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선험적 가정일 뿐이며 하나의 예를 가지고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는 것은 개별적 사례들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일종의 편식 행위이다.(「탐구」 539)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없이 다양한 개별적 사례들에 대한 경험적이고 주의 깊은 고찰을 통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일반명사가 적용되는 모든 경우에 항상 공통된 속성이 있다거나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될 문제이지 선험적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탐구」 66)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에 대한 고찰 결과를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된 어떤 것을 산출하는 대신에 나는 이들 현상들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동일한 낱말을 사용토록 하는 공통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이다.”(「탐구」 65)
“나는 이러한 유사점들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가족유사성’보다 더 나은 표현을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족구성원들간의 여러 가지 유사성들도‧‧‧동일한 방식으로 중복되고 교차되기 때문이다.”(「탐구」 67)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들을 동일한 낱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의 공통된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언어들 사이에 중복되고 교차되어 있는 유사점들의 그물로서의 가족유사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은 없기 때문에 「논고」에서처럼 언어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는 「탐구」에서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언어와 인간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주목하면서 언어의 실제 사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과 놀이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유사점들에 기초하여 언어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을 모델 삼아(「탐구」 130) 언어 사용에 관한 다음 사실들을 조명함으로써 언어의 사용이 인간의 삶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인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둘째 언어의 사용은 비언어적인 행위와 얽혀 있다.
하나씩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의 이러한 점을 보이기 위해서 언어 사용을 장기를 두는 경우에 비유한다.(「탐구」 33, 108)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 시합을 하는 상황에서 장기의 말을 움직인다. 이것은 언어의 사용에서도 유사하다. 장기를 두는 사람이 한 수를 두는 것은 단지 나무 조각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장기 시합을 한다는 상황 속에서의 하나의 행위인 것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단지 소리를 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항상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의 말을 아무렇게나 움직이지 않는다. 장기의 규칙에 따라 말을 움직인다. 언어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구문론적 규칙, 의미론적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한다.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로서의 언어 사용의 바로 이러한 점을 명료화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언어의 사용은 비언어적인 행위와 얽혀 있다.
언어 사용의 이러한 사실은 언어놀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정 속에 드러나 있다.
“언어와 그것이 얽혀 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것 전체가 언어놀이이다”(「탐구」 7)
이러한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놀이가 문자나 소리 같은 물리적 기호 외에 행위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행위란 무엇인가? 「탐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형태의 언어놀이의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 그 언어는 건축공 A와 조수 B가 의사 소통을 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A는 건축용 석재로 집을 짓고 있다: 벽돌, 기둥 ,석판, 들보가 있다. B는 A가 필요로 한 순서대로 그것들을 날라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로 구성된 언어를 사용한다. A가 그것들을 외친다.- B는 그러그러한 외침에 따라서 나르도록 배웠던 석재를 가져온다....”(「탐구」 2)
이것은 집을 짓는 현장에서 건축공 A와 조수 B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를 가지고 하는 언어놀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 언어놀이에서 A는 그가 벽돌이 필요하면 “벽돌”하고 외침으로써 B가 벽돌을 가져오기를 꾀한다.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B는 벽돌을 가져온다. 여기에서 A는 단지 소리를 지르고 B는 그 소리를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A는 “벽돌”하고 외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B는 A의 외침에 적절한 반응을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행위가 낱말 ‘벽돌’,‘기둥’,‘석판’,‘들보’와 함께 이 언어놀이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결국 하나의 낱말의 사용은 어떤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 낱맡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언어 사용자의 반응 행위들과 얽혀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낱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낱말이 구체적으로 사용될 때 함께 얽혀 있는 언어 사용자들의 반응 방식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반응 방식들은 바로 언어 사용자들의 삶의 형식에 속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탐구」 17)이라 말한다. 이것은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 언어의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행위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즉 언어의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삶의 형식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형식이란 무엇이며 삶의 형식과 언어의 사용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이란 우리가 인간인 한에 있어서 우리에게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 주어진 것”(「탐구」 p.226)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삶의 형식’이란 표현을 몇 군데서 더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서 삶의 형식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 중에서 대체로 주류를 형성해온 해석은 윈치(P. Winch)로부터 시작되는 문화 상대주의적 해석이다. 이것은 삶의 형식을 문화공동체에 따라 특수적이고 상이한 문화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는 달리 삶의 형식에는 문화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삶의 형식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한 해석에 따르면 원초적 삶의 형식은 인간의 생리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류 보편적 특성으로서 그것의 양태는 반응 양식, 판단 양식,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원시적 행위들이다. 반면에 문화적 삶의 형식은 문화권마다 특수적인 것으로서 그 문화 구성원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삶의 형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글의 주된 관심 사항이 아니므로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이 글에서는 후자의 해석을 수용하면서 삶의 형식과 언어의 사용과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언어의 사용은 이러한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을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은 바로 인간들이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에 있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이다.”(「탐구」 241)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일 수 있으려면 정의들에서의 일치뿐 아니라 판단에서의 일치가 필요하다.”(「탐구」 242)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탐구」 p.223)
이상의 언급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의 일치는 언어에 있어서의 일치이며 그것은 바로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이 때 원초적 삶의 형식에 대한 일치는 생래적으로 가능하고 문화적 삶의 형식의 일치는 학습에 의해 습득됨으로써 가능하다. 설사 사자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자와 인간 사이에 일치된 삶의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언어 사용은 바로 삶의 형식의 일부이다.
“‘언어놀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부분 혹은 삶의 형식의 부분이다는 사실을 돋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다.”(「탐구」 23)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서 인간에게만 나타나며, 명령하고, 묻고, 헤아리고, 잡담을 하는 것과 같은 원초적인 언어놀이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행하는 걷고, 먹고, 마시고, 노는 바와 같은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라는 것이다.(「탐구」 25) 인간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로서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셋째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는 다른 양태의 삶의 형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예로서 비트겐슈타인은 희망 현상을 들고 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할 수 있을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다. 즉 희망하는 현상은 이 복잡한 삶의 형식의 양태이다.”(「탐구」 p.174)
지금까지 「탐구」 1-142에 나타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고찰의 중심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는 이러한 고찰을 배경으로 해서 전개된다. 즉 규칙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언어관을 비판하고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해서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탐구의 일부이다. 그리고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바로 그러한 규칙 논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Ⅲ. 규칙 따르기의 역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하게 될 때 볼 수 있는 언어 사용의 중요한 특징 주의 하나는 언어의 사용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143-242 에서 규칙과 규칙 따르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이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 나타나는 정신적 경험 내용과 관련해서 규칙을 파악하고자 하면 하나의 역설에 이른다는 것을 보이면서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규칙 파악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울러 규칙과 규칙 따르기의 성격을 조명한다.
1. 규칙 따르기의 역설이 발생한 이유
규칙을 따르는 행위에 있어서 규칙은 행위를 인도하고 행위의 올바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규칙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그러한 규칙을 찾고자 할 때 역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규칙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 무엇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듣고 이해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 그 낱말에 대한 영상 혹은 그림이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a) 그 영상이 우리에게 그 낱말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강요한다.
(b) 그 낱말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영상을 갖는 정신적 상태이다.
(c)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가 그 낱말에 대한 올바른 사용의 원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역설 발생의 근원이라 보고 그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머리 속에 떠오른 그림이 낱말의 특정한 적용을 강요한다는 것은 하나의 심리적 사실로서 그 낱말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 그림은 하나의 낱말의 사용을 시사하지만 그 낱말을 다른 어떤 것에 적용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 ‘입방체’란 낱말을 들을 때 어떤 하나의 그림이 당신 머리에 떠오른다고 하자. 가령 어떤 한 입방체의 소묘. 어떤 점에서 이 그림이 ‘입방체’란 낱말의 어떤 한 사용에 들어맞거나 들어맞지 않거나 할 수 있는가 ? -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다. 이 그림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고 내가 예컨대 어떤 하나의 삼각 프리즘을 가리키며 이것은 입방체라고 말한다면 이 사용은 그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다.’ - 그러나 그것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나는 그 그림이 결국에는 어떤 하나의 투영방법에 따라 들어맞는 것이 아주 쉽게 상상될 수 있도록 그 예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입방체의 그림은 우리에게 물론 하나의 사용을 시사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르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탐구」 139)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낱말을 들을 때에 우리 머리 속에는 같은 것이 떠오를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두 경우에 같은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우리가 아니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한다.”(「탐구」 140)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투영 방법을 달리하면 ‘입방체’란 말을 들을 때 떠오른 그림을 삼각 프리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과 낱말의 적용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 사용이 언어 사용자의 머리(사유, 마음) 속에서 경험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인도된다고 하면 낱말의 적용(의미, 사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언어 사용을 인도하는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해는 슬픔, 고통, 흥분과 같은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러한 표현들은 지속이나 중단, 강도나 정도 등과 같은 개념과 관련된 정신적 상태를 기술하는 표현이지만 ‘이해’는 그렇지 않다. 이해 개념은 능력이나 성향 개념과 관련된다. “ 결코 이해를 ‘정신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탐구」 154)
셋째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라고 보는 생각은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이 우리에게 그 낱말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강요한다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 믿음이 심리적 사실에 불과하다면 이 이해는 더 이상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없다.
넷째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상태로서의 이해라고 보는 생각은 언어 사용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모든 해석은 해석되는 것과 함께 공중에 떠 있다; 그것은 해석되는 것에 대해 발판으로서 쓰일 수 없다. 단지 해석들만으로는 의미를 확정하지 못한다.”(「탐구」 198) 그 결과를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역설로 표현한다.
“우리의 역설은, 어떤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되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각각의 모든 행위 방식이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일치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탐구」 201)
이러한 역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경험들을 기초로 해석함으로써 나타나는 오해의 산물이다. 실제 언어 사용에서 이러한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크립키는 이것과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마치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본래의 생각에 대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Ⅳ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해소
그렇다면 규칙 파악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 속에서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이 드러난다고 말한다.(「탐구」 201) 그 방법은 사람들이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라 말하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부르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하나의 낱말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가 그 낱말에 대해 그의 머리 속에 어떤 그림을 떠올려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대로 그 낱말이 어떤 것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것에 적용될 수 없는지 적용 방법을 가르친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배우고 그것에 따라 그 낱말을 사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우리가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가는 경우에 비유함으로써 조명한다.
길가에 서 있는 이정표는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간다. 이 경우에 이정표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의 규칙적 사용 즉 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탐구」 198) 아무도 그 이정표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설사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규칙적 사용도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고 이 때 그 이정표는 더 이상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이정표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은 그 이정표에 대한 반응 방식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정표에 대한 관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훈련을 통해 배운다. 하나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할지 우리는 그 화살표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그 화살표에 대한 규칙적 사용을 훈련을 통해 배움으로써 그 화살표에 대해 반응한다.
위의 비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는 바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규칙과 행위의 관련은 우리가 규칙을 배움으로써 성립한다. 여기에서 규칙을 배운다는 것은 실제로 규칙 따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규칙 파악의 방법이다.
둘째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관습이 존재할 때만 규칙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개인의 머리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이 놓여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규칙을 따르는 것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실제 언어 사용에서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규칙은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내가 하나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규칙과 일치되게 행하여졌는지 즉 그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는 내가 그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하나의 규칙 R이 행위 P를 요구한다고 하자. 내가 규칙 R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 나는 행위 P를 하면서 규칙 R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 나는 다른 행위 Q를 하면서 P를 행하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 나는 규칙 R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규칙 R이 행위 Q를 요구한다고 믿고 Q를 행하면서 규칙 R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규칙 R을 따르는 것이 행위 P를 하는 것이라 할 때 세 경우 중에서 ⒜를 제외한 ⒝와 ⒞는 잘못된 생각이다. 나의 실천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는 ‘그 규칙을 따른다’고 말해지는 관습 즉 공적 기준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내가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며 나의 생각에 의해 규칙을 따른 행위인지 여부가 결정되는 사적 규칙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탐구」 202)
둘째 규칙을 따르는 것은 이유에 의한 정당화가 불필요한 행위이다.
우리가 규칙을 따라 행위할 때 그렇게 행위하는 것은 그것이 규칙에 일치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즉 하나의 낱말을 어떤 것에 적용할 때 그 적용이 올바른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명령을 따르는 것과 유사하다.(「탐구」 206) 명령을 하고 그것에 따르는 경우 우리는 하나의 명령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고 그 명령에 대해 훈련받은 대로 반응할 뿐이다. 규칙을 따를 때 우리는 그렇게 행위할 어떤 이유를 갖고 행위하지 않는다.(「탐구」 211) 그렇게 행위하는데 대한 정당화를 요구하면, 단단한 암반에 도달하면 삽은 휘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단지 그렇게 행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탐구」 217) 그러나 이것이 나의 행위가 부당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탐구」 289) 규칙은 항상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동일한 것을 말해주는(「탐구」 223) 최후의 법정이기 때문에(「탐구」 230) 내가 그것을 따를 때 더 이상의 안내도 필요치 않으며 (「탐구」 228),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선택도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는 의심없이 확신을 갖고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탐구」 219) 이것은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어떤 비합리적인 부당한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따르는 것 즉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 의한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치 않는 확고한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기반은 바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삶의 형식이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의 틀을 더 이상 무엇에 의해 근거지울 수 있겠는가?
Ⅳ. 크립키의 해석에 대한 비판
크립키는 「규칙과 사적 언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1982)이란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의 출발점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탐구」 201 앞부분에 등장하는 역설이다.
크립키는 그 역설을 비트겐슈타인이 하나의 회의론을 구성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회의론적 역설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내가 ‘68+57’과 같은 문제에 어떤 하나의 방식으로 반응할 때 나는 그 반응을 정당화할 수 없다. 내가 (+를 plus가 아닌) quus를 의미했다고 가정하는 회의론자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당화에 대해서도 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내가 plus를 의미하는지 quus를 의미하는지를 구별하는 나에 관한 어떤 사실도 없다. 참으로 내가 plus에 의해서 확정적인 함수를 의미하는 것과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나에 관한 어떤 사실도 없다.”
이러한 역설은 언어의 규범성 혹은 규칙의 규범성 문제에 관련된 역설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일상적으로 하나의 낱말에 의해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 때 나는 그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도 하고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무엇이 어떤 사용은 올바른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용은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가 ?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의 정신이나 행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떤 것도 하나의 낱말에 의해 어떤 것을 의미하는 나의 낱말 사용의 올바름을 결정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하나의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지 아니면 잘못 사용하는지를 구별할 수 없다.
크립키는 「탐구」 201의 역설을 위와 같이 언어의 규범성과 관련된 역설로 재구성하고 나서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그 역설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해결 방식을 그가 역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해결 방식과 비유하여 회의론적 해결 방식이라 부른다.
크립키에 따르면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결 방식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가 「논고」에서 견지했던 진리 조건 의미론(truth conditions theory of meaning)을 포기하고 「탐구」에서는 주장가능성 혹은 정당화 조건 의미론(assertability or justification conditions theory of meaning)을 채택함으로써 역설의 발생을 피하는 것이다.
진리 조건 의미론은 하나의 문장의 의미가 그것이 참이라 말해질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견해이다. 크립키는 역설이 바로 이 의미론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이 의미론에 따르면 “나는 ‘+’에 의해 더하기를 의미한다”는 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진리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에 따르면 내가 ‘+’에 의해 더하기를 의미하는 것을 참으로 만드는 어떤 사실도 나의 정신이나 행위 속에서 발견될 수가 없다. 역설은 바로 문장의 의미가 진리 조건에 의해 부여된다고 보고 그러한 조건들을 찾고자 할 때 발생한다.
정당화 조건 의미론은 하나의 문장의 의미가 그것이 주장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의 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합당하게 주장될 수 있고 그것을 주장하는 놀이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구체적 조건들(상황들)에 의해 부여된다. 여기에서는 문장의 올바른 사용을 결정하는 나에 관한 사실들이 문장에 대응한다는 가정이 필요치 않다. 크립키는 「탐구」의 의미론을 이러한 종류의 의미론으로 보고 이러한 의미론에서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정당화 조건 의미론을 채택함으로써 역설이 발생하는 것은 피했지만 언어의 규범성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규칙 따르기 개념에 공동체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이유를 규칙과 인과성과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인다.
두 개의 사건 a와 b가 있고, a는 사건 유형 A에 b는 사건 유형 B에 속한다고 하자. 이때 a와 b가 인과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단지 a가 b를 유발시킨다는 것만을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건 유형 A와 B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을 때 그리고 a가 b를 유발시킬 때 a와 b는 인과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행위가 하나의 규칙을 따르는 행위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행위가 속하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 유형이 존재할 때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고 공동체와 연루되어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하나의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의 낱말 사용 방식이 그가 속한 공통체의 다른 구성들의 그 낱말에 대한 사용 방식과 일치할 때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의 요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규범성에 대한 회의론과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크립키의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 대한 오해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Ⅲ장에서) 고찰한 내용과 관련지으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크립키의 해석의 단초라 할 수 있는 「탐구」 201에 나오는 역설은 크립키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회의론를 구성하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역설을 말한 의도는 우리가 규칙을 언어 사용자의 사유 속의 정신적 경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규칙에 대한 파악을 하나의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는 해석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도달하는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는데 있다.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를 우리는 「탐구」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낱말을 사용할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그 낱말의 적용 방법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결정될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낱말의 사용을 머리 속의 그림 - 크립키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면 그 낱말 사용에 대한 나에 관한 사실 - 과 관련해서 보고자 할 때 그것에 의해 올바른 낱말의 사용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탐구」 139, 140)
이해를 정신적 상태로 본다든가 그러한 정신적 상태가 올바른 언어 사용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비판하는 경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올바른 언어 사용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언어 사용 혹은 규칙이 정신적인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머리 속에 나타나는 그림과 사용의 관계, 이해 및 그것과 사용의 관계, 규칙 파악의 방식 등에 대한 잘못된 그림으로부터 발생하는 오해의 산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언어의 규범성에 대한 회의론을 펴기 위해 역설을 말하지 않았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하나의 오해에 불과한 만큼 그것에 대한 어떤 이론적 해결책도 필요치 않다. 다만 규칙 파악에 대한 태도 혹은 관점만 바꾸면 된다. 그것은 규칙 파악을 위해 언어 사용자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언어의 실제 사용을 관찰하면 된다. 그 때 역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린다. 그러나 크립키에 의해 해석된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역설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 역설의 부당성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인과성 문제에 대한 흄의 해결 방식처럼 역설을 인정하고 회의론적 해결을 찾아야 한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
셋째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론과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언어에 관한 어떤 이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 언어의 실제 사용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언어에 관한 어떤 이론을 제시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탐구」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탐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뻔한 사실들을 관찰하고 여러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그리고 언어에 대한 오해들을 들추어 내 보여 줌으로써 실제 언어에 대한 조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탐구」 201에서 언급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에 비추어 그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대한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요약하고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가 「탐구」 143-242의 규칙 논의의 일부이며 규칙 논의는 그 이전의 고찰을 배경으로 해서 전개된다는 관점에서 「탐구」 1-142의 주요 내용 즉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 및 언어 사용의 사실에 대한 조명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규칙 논의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언어관에 대해 비판하면서 언어의 실제 사용에 주목하여 수행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탐구의 일부라고 해석하였다.
Ⅲ장에서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 따르기의 역설을 규칙 파악에 대한 잘못된 생각의 결과라 본다. 즉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규칙 파악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실제 사람들이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은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위반하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라 본다.
셋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요 어떤 이유에 의한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치 않는 확고한 기반 위에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명확히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로서의 언어의 실제 사용에 있어서 규칙 따르기의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다.
Ⅳ장에서는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과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따르기의 역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회의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회의론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Ⅲ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크립키의 해석과는 다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크립키의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끝으로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의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치료로서의 철학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규칙 파악에 대한 오해로부터 발생하는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탐구」에서 볼 수 있는 「논고」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이나 사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규칙 따르기의 역설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규칙 파악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유아론적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규칙 파악의 방법을 언어 사용자의 정신적 경험 내용에 기초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실천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 규칙을 위반하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라 본 것은 바로 언어의 토대가 인간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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