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철학적 이해
(Philosophical Explanation On Postmodernism)
- 최 재식 강릉대 철학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모더니즘
1. 근・현대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발전과 모더니즘의 시작
2. 철학적 모더니즘인 17세기
철학의 특징
Ⅲ. 포스트모더니즘
1. 계몽의 변증법 :
호오크하이머와아도르노 2. 이성의 확장 :메를로 - 뽕띠
3. 이성과 정상개념에 관한
고고학 및 계보학적 연구 : 푸코
4.타자의 형이상학 : 레비나스
5.해체론 : 데리다
Ⅳ. 마치는 글 :
지식의 포스트모던적 조건
Ⅰ.들어가는 말
오늘날 학문, 문학, 예술,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유행처럼 퍼져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이 우리에게 바로 시사해 주는 또 하나의 물음은 “모더니즘”(Modernism)은 무엇이고 “이후”라는 뜻을 갖는 “포스트”(pos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물음이다. 이런 어원적 분석에 관한 계속되는 물음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바로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어원적 분석은 단순히 어원적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철학적 이해로 들어가는 길목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그러면 모던과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모던이란 서양의 근․현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근․현대는 크게 중세와 구분을 짓는 그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고, 모더니즘은 이 시대(모던)의 정신 내지는 철학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특징이자 중세를 청산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종교개혁, 산업혁명, 프랑스혁명이며 모더니즘은 이런 개혁이나 혁명을 가능하게 해준 서구 계몽주의 사상 내지는 철학을 가리킨다. 이들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의 갈릴레이(G. Galillei), 베이컨(F. Bacon), 데카르트(R. Descartes), 라이프니츠(G. W. Leibniz, 칸트(I. Kant), 헤겔(G. W. F. Hegel) 등을 들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하버마스(J. Habermas)와 아펠(K.-O. Apel) 등이 이들의 철학적 정신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이들의 전통을 가장 많이 계승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이후라는 의미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post는 단순히 ‘이후’라는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이후’라는 의미의 post는 단순한 ‘이후’가 아니라 모더니즘의 한계 내지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을 벗어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탈 현대로 번역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떤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을 벗어나려(脫) 하는가. 그리고 이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과연 새롭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시키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계속된다. 만약에 이런 물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도는 한낱 지적인 허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모더니즘에 대해서 우선 간단히 고찰하고 나서 모더니즘을 벗어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런 비판적 검토과정에서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입장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이 얼마나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모더니즘
(서양) 철학의 특징은 반성적인 고찰이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바로 모더니즘에 앞서 있었던 중세의 지배적인 사상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따라서 그것이 모더니즘이든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앞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나 시대상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 근·현대(모던)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발전과 모더니즘의 시작
15세기 중세와 근세를 가로지르는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여 유럽에서 출발한 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의 큰 발견과 발명에 힘입었다: 첫째로, 나침판의 발견으로 인한 항해술의 개선을 들 수 있다. 이는 유럽 팽창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제국주의 시작과 그동안 유럽에 국한되었던 지식의 확장). 둘째로, 코페르니쿠스(N. Kopernikus)에 의한 태양 중심적인 세계관의 정초를 들 수 있다(세계관의 급진적인 전환). 셋째로, 구텐베르크(J. Gutenberg)에 의한 금속활자의 발견에 따는 인쇄술의 발명을 들 수 있다(정신적인 재화의 빠른 전파). 넷째로, 알베르티(L. B. Alberti)에 의한 회화에서의 원근법 발견으로 예술에 있어서의 수학(기하학)과 과학의 도입을 들 수 있다(인간의 모든 지적 및 예술적 활동에서 기하학적 방법론의 영향).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인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다. 그의 학문정신을 가장 크게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람은 갈릴레이이다. 이들에 의한 자연과학의 발달은 중세의 닫혀진 세계관을 근대의 역동적인 세계관으로 바꾸었다. 천문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연구방법으로서 보편적 수학 법칙의 정립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數量的) 분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런 자연과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본질에 관한 물음들을 물리치게 하였고 고대와 중세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의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이를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2. 철학적 모더니즘인 17세기 철학의 특징
자연과학의 빠른 발전에 따른 이 당시의 철학은 수학과 수학적 자연과학들과의 상호관계들에 의해서 특징짓는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밀접한 관계는 수학적 이성을 발견하게 해주었고 이런 수학적 이성에 근거를 두면서 철학은 교회(신학)로부터 조심스러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독립의 획득은 바로 이성에 의해서 가능해 진다. 따라서 철학사는 이 시대를 ‘이성의 시대’로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모더니즘의 철학자는 베이컨(1561-1626) 이었다. 그는 종전의 우상들을 타파하고 고전시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내려온 전통적인 철학(학문)의 방법론과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을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그 길을 제시하여 주었다. 그는 그 이전의 학문과 이것에 토대를 제공해준 철학의 무용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학문의 목적은 사회에 이용하기 위한 ‘자연의 지배’다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식은 힘”(scientia est potentia)이다.
이 당시는 의학의 발전과 인간 행위에 대한 욕정적인 영향의 제한을 통해서 합리적인 삶의 영위 그리고 법적인 권리의 보장, 경제적인 생산성 증가 등의 현실적 사회적 변화에 근거해서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우세하였다. 이런 낙관론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른 기계론적 자연관이 정착되면서 “자연의 수학화”로 인한 자연의 지배를 낳았고 문화․역사관에 있어서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더욱이 이런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간에게 자연의 공포로부터 더 많은 해방을 보장해 줌으로써 더욱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주의가 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말하는 합리주의 철학이란, 통일적이며, 현실의 형식과 일치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천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으로 타당한 최고의 확실성을 가진 (인간) 이성을 확신하고, 이 이성에 근거해서 스스로 구성하는 학문들의 수많은 결과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학문에게 요청되는 형이상학적인 기초를 제공하거나 이를 약속하는 철학을 말한다. 이 합리론은 하나의 체계적인 보편학문이라는 합리론적 개념을 만들었다. 이들이 채택한 방법론은 기계론적 방법과 기하학적인 방법이다.
이런 입장을 대표하고 창시한 최초의 대륙의 합리론자,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대표적인 모던이스트는 데카르트였다. 그의 이성적 인간관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규정한 서양 근․현대 인간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이성적 인간관은 사실 서양의 근․현대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적용된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의 성격은 희랍철학에서도 발견된다.
데카르트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주장된 생득관념에 근거한 인간 이성에 대한 근대적 신뢰는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거쳐서 헤겔에 이르러서는 이성은 모든 역사를 주제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주체로서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헤겔 철학에서 우리는 모더니즘의 절정을 만나게 된다.
Ⅲ.포스트 모더니즘
이런 서구의 근․현대정신인 이성적 인간관에 기초하는 합목적적 진보(사)관, 사회의 합리화,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신장에 대한 강한 믿음의 이면에 깔려 있는 부작용과 모순을 주목하는 철학적 반성이 빠르게는 니이체(F. Nietzsche)에서부터 시작하여 1-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의 이름 하에 일어나게 된다. 이런 철학적 반성을 이끄는 가장 최근의 철학적 흐름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의 특성을 지닌 서구철학이 비록 서구라는 제한된 지역적 특성 속에서 이루어진 철학이지만,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근대화(현대화)의 모델을 제공해주었고 이것은 서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행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근대화(현대화)를 점검해 본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철학적 작업임이 틀림없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문·사회과학에도 관계된 학문적 작업이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입장이 모두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 사이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공통점 못지 않게 문제의식과 그 해결점들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과 함께 그들이 다루는 문제영역도 많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유를 정초하고 그것을 대표하는 7명의 철학자들(호오크하이머-아도르노 M. Horkheimer-Th. W. Adorno, 메를로-뽕띠 M. Merleau-Ponty, 푸코 M. Foucault, 레비나스 E. Levinas, 데리다 J. Derrida, 리요타르 J.-F. Lyotard)을 차례대로 고찰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유의 특징들을 알아보도록 한다.
1. 계몽의 변증법: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신들의 공저인『계몽의 변증법』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 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계몽기 이후의 인간사회 발달에 대해 지극히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들은 계몽적 이성이 갖고 있는 이중성에 주목하게 된다. 즉 계몽적 이성이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이용하는 계산적 측면으로 인한 자유의 침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런 도구적 합리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계몽의 퇴행적 계기를 자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성이 갖고 있는 사회병리를 치유하고 인간 회복에 이르러 이성의 본래 이념인 목표를 이해하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즉 이론적 상상력을 복권시켜서 잘못된 사회 병리현상에 대해서 저항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계몽(모더니즘)에 의해서「진보」의 파괴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진보의 적에게만 내맡겨져 있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맹목적으로 실용화된「사유」는 자신의 지양시키는 힘을 잃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진리에 대한 연결 끈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인 생산성의 증가는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조건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장치와 이를 운용하는 집단으로 하여금 국민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엄청난 우월성을 갖게 하였고 개인은 경제적인 세력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다고 평가한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이 증가할수록 대중의 힘이 강해지고 개인의 인권이 신장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기력과 조종가능성은 커진다고 그들은 진단한다. 즉 계몽이 인권을 신장시켜 준다는 계몽의 신화는 오히려 인권을 억압하는 계기로 변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자기보존의 의도가 자연지배로 나가게 되고 이때 지배적인 이념으로 나타나는 것이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가 이런 인간의 자기 보존과 자연지배를 위해서 채택된 방법론은 바로 형식 논리학이다. 이 형식 논리학은「세계의 계산 가능성」이라는 도식을 제시하였고. 이런 계산 가능성은 동일시를 낳게 했으며 이런 동일시는 시민적 정의나 상품교환도 지배하는 지배적 논리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 속에서 질서를 조직하는 법을 배운「자아」는 외부에 대해 이런저런 처분을 내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유와 진리 일반을 동일시하게 된다. 즉 계몽은 자아 중심주의를 낳고 곧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기계의 발달이 지배메커니즘의 발달로 전환됨에 따라 ...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
자기보존을 위해 자기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무비판은 곧 바로 사회지배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사회지배를 벗어날 때에 우리는 엄청난 불안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이들은 정치적인 전체주의가 이미 계몽(모더니즘)에 의해서 도래되어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우리를 지배하는 실증주의, 자연의 수학화, 형식 논리학적 사유, 자본주의 등이 결국 자연지배와 자기지배(자기포기) 더 나가서 사회지배를 낳고 마침내 전체주의가 출현하도록 했으며 인간을 또 다른 억압의 구조 속으로 빠지게 했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비판의식을 낳게 했다. 모더니즘적 사유방식에 따른 자연지배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환경파괴를 낳게 했다. 즉 이성적인 인간이 자연의 수학화를 통한 자연의 계량화에 의해서 자연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얼마든지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때 이성은 바로 자연파괴를 서슴없이 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에 대한 비판은 환경 철학적 비판으로 연결된다.
2. 이성의 확장: 메를로-뽕띠
메를로-뽕띠는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처럼 적극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입장으로 나가기보다는 종전의 합리론이 말하는 이성(합리성) 개념이 얼마나 좁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이를 확장시키고자 했다. 이는 동시에 그동안 철학에서 진리인식에 있어서 배제되거나 격하되어왔던 지각(perception)과 야생적 사유의 복권復權의 정당성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더니즘적 이성개념이 갖는 자폐증을 치료하고자 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지성주의(모더니즘)가 인간의 지각활동을 폄하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신체성을 도외시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반성과 비반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전자들만이 철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온 종전의 모던적 합리주의에 대해서 메를로-뽕띠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현대성의 아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헤겔과 관련을 맺으면서 “우리시대의 과제”는 “비이성적인 것을 탐구하고 이 비성적인 것을 하나의 확장된 이성에로 종합시키려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① 어린아이의 합리성: 삐아제
어린아이의 합리성에 관한 논의에서 메를로-뽕띠가 비판적으로 접하게 된 이론은 삐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이다. 삐아제에 따르면, 최상의 이성은 논리적-수학적으로 구성된 이성이다. 그의 발생적 인식론의 핵심은 어린아이의 비논리적-비수학적 이성이 어떻게 논리적-수학적 (어른의) 이성으로 발전하는가를 발생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아이의 사고와 어른들의 학문적인(=과학적인) 사고 사이에 어떤 단절도 있을 수 없고, 발생적인 연속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 어린아이 합리성은 어른 합리성의 전 단계로서 극복되어야 할 합리성으로 나타난다. 즉 논리적인 합리성의 관점에 볼 때에, 사고의 발전과정에 있는 어린아이의 지식과 행동은 “덜 만족된 인식의 상태(위치)”로 나타나며, 그렇기 때문에 결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합리성은 더 높은 인식 단계의 논리적-수학적인 ‘어른들의 합리성’에 의해서 구축(驅逐)되어야 하고 교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삐아제는 인간의 지능(지성)의 발달을 단선(單線)적이고 발전적이며(progressive) 상하 계급구조적인(hierarchic) 발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선형적인 지능의 발전에 반(反)하는 다양한 경험의 발생학: 메를로-뽕띠
삐아제의 선형적인 인간의 지능(지성)발달이론에 대해서, 메를로-뽕띠는 경험의 발생학에 근거해서 인간의 경험방식과 지성발전을 다양하고 다의미적인 것으로 기술하고, 바로 이런 특징에서 인간의 지성발전의 본래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즉 인간 지성의 발달은 인간행위가 수행되는 중에 동등한 권한이 있는 구조화(Strukturierung)와 구조조정 (Umstrukturierung)으로서 지속적인 탈중심화와 관점화(Perspektivierung)로 발전한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구체적인 합리성은 - 삐아제가 말하는 것처럼 - 저급한 단계로서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혼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는 그들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형식적이고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발전한 어른들보다도 때로는 더 능숙하게 잘 처리한다는 사실에서 어린아이의 합리성이 형식 논리적인 합리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거나 배제될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른 “합리적인” 질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를로-뽕띠와 삐아제 모두가 어린아이의 선(先)논리적인 가능성들로부터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크다. 삐아제는 이 선(先) 논리적인 영역을 임시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지발달에 따라서 추월(능가)할 수 있고 따라서 극복되어야만 할 영역으로 정의한 반면에, 메를로-뽕띠는 이 선영역을 존재론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추월(능가)할 수 없는 영역으로서 오히려 ‘건강하게’ 성장한 어른들의 이성을 정초시키는 영역으로 보았다. 메를로-뽕띠가 밝히고 있는 어린아이의 발달과 지각의 장 조직(organization of field of perception)의 본래적인 특징인 다양성에서 우리는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의 방식과 실천의 공간이 전개될 많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③ 신화로서 “야생적” 사고의 복권과 세잔느(Cézanne) 그림: 합리성의 확장
메를로-뽕띠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야생적인” 사고가 - 그것이 어린아이의 사고이든 성인의 사고이든 간에 - 갖고 있는 생산적인(창조적인) 경험의 고유한 권리 회복이다. 야생적 사유의 복권(復權)에 의해서 우리가 얻게되는 결과는 “건강한 어른들”에서 정초된 종래의 합리성 개념의 확장이다. 어린아이의 ‘소위’ 미발달된 “야만적인” 사고는 최고로 성장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구축(驅逐)되어야 할 대상 - 삐아제 발생적 인식론에서나 전통적인 지성주의에서 처럼 - 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발달된” 인간의 이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따라서 또 하나의 합리성을 제시해 줄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자연 그대로의 야생적 사고가 어른의 사고에 비해서 존재론적으로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초시켜 준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장한 인간(어른)에게 침전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바로 어른에게는 하나의 신화이다. 이런 점에서 선형적인 인지 발달에 대한 삐아제 이론은 메를로-뽕띠 철학에 의해서 수정되어야 하며, 동시에 어린아이의 경험방식은 복권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야생적 사고가 복권되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정신 분석가들과 민속 인류학자들이 우리들(문명인)의 노이로제와 우리들의 문명권태를 우리들의 신화의 발견에 의해 치료하려는 것처럼, 메를로-뽕띠는 어린아이의 야생적인 사고에 신화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폐증”(autism)을 앓고 있는 어른의 이성을 치료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이 신화는 삐아제에서 처럼 수학적인 합리성의 성장에 따라서 길들여지고 감추어지는 신화가 아니고, 오히려 경직되어 있고 좁아진 (어른의) 합리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이를 통해서 종래의 경직된 합리성을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신화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어른) 이성(합리성)이 야생적이고 생동적인 사고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토착적인 합리성을 해체시키는 “폭력”을 중단하도록 해야한다.
야생적 사고가 복권되어야 하는 둘째 이유는, 관점성(Perspektivität, perspectivity 과 음영구조(Abschattungsstruktur, profilstructure)에 따라서 경험은 다의적이고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런 특징과 합리성은 자기조직화 된 경험에서 형성된다는 사실들에서 어린아이의 야생적 사고가 갖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정당화시킬 것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관점성과 탈 중심화에 의해 얻어진 다양하고 풍부한 합리성의 개념은 목적론적이거나 단선적(單線的)으로 발생적인 합리성 개념에 대한 반대 내지는 반정립(Antithese)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확장된 합리성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메를로-뽕띠는 어린아이의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세잔느와 그 이후의 회화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 의한 인류학적 발전에 도움을 받아서 이성개념의 확대라는 단초를 발견한다. 그는 “원시인”의 예술, 어린아이와 정신 이상자들의 그림들이 기하학적 원근법에 기인하고 문명사회에서 소위 “이성적으로 건강한” 어른들에 의한 고전 예술(르네상스시대의 회화와 이 회화의 전통)에 의해 교정되어서만은 안된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의 예술, 감성적 세계의 기술(記述)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성은 이런 “야생적”인 예술과 경험 그리고 “야생적”인 사고에 의해서 풍부해 진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타당한 객관적인 관점에 의해 완성된 객관주의적 예술은 많은 가능성들 중에 단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그림과 세잔느 그림에 관한 메를로-뽕띠의 철학적 탐구는 이 그림들이 학문의 눈(Optik)에 의해서 일그러지지 않은 근본적인 자연에 대한 지각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밝혀주는 데에 있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가공되지 않은 표현, 즉 생동적인 즉흥을 표현하는 순간의 직접적인 표현에서, 인간의 창조성을 발견한다. “고전적인 초상화가 인간을 보는 유일한 방식이 아닌 것처럼” 살아있는 가공되지 않은 표현의 관점에서 르네상스시대에 생긴 기하학적인 원근법은 “결코 감성적 세계의 유일한 관찰방식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면 기하학적인 원근법은 근원적이고 살아있는 지각세계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객관주의적 환상에 기인하는 하나의 구성에 불과하다.
결국 메를로-뽕띠 철학의 성과는 그동안 비합리적인 경험방식으로 간주되어 평가 절하되고, 더 나아가서 올바른 인식방식에서는 완전히 배제시킨 지각의 경험방식을 복권함으로써 모더니즘이 그토록 신뢰하였던 이성개념과 합리성 개념을 확장시켜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서 그의 철학은 모더니즘이 갖는 한계와 편협성을 밝힘으로써 인간 합리성의 확장과 그 합리성이 갖고 있는 자폐증을 치료해주는 새로운 포스트 모던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인 다원성과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의 의미를 세우고 밝히는 창조적 작업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앞으로 푸코의 논의에서 보게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배제했던 ‘다른’ - 광기라는 이름하에 또는 원시와 야만의 이름하에 - 합리성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당위성을 포스트 모던을 지향하는 메를로-뽕띠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3. 이성과 정상개념에 관한 고고학 및 계보학적 연구 - 푸코
푸코는 그의 저서『광기와 문명』에서 서양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서 모더니즘을 지배한 이성(합리성)의 배타적인 이념을 해체시킨다. 메를로-뽕띠가 철저하게 현상학의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했다면, 푸코는 고고학적 및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푸코가 말하고 있는 지식의 고고학적 방법이란 한 시대의 지식의 토대와 구조, 지적 담론과 법칙, 체계를 밝혀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가 이 방법을 채택한 이유는 광기를 정의하는 기존의 이성(권력과 연계된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경험으로서 광기를 파악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기의 진정한 언어가 지각될 수 없었고 오로지 거부의 제슈처와 문화적인 경계선을 긋는 것 그리고 가치설정만이 지각되었다고 본다. 이런 불가능을 극복하기 위해서 채택한 방법이 바로 고고학적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그는 광기의 진정한 언어를 찾아내고, 광기 역사의 원점에서 광기를 차별없는 경험으로 재발견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광기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이 다시 복원될 수 없는 광기를 수용소에 수감시키게 하는 역사적인 전체 사실들의 - 표상들, 제도들, 법적이고 정치적인 조치들, 학문적인 개념들의 - 구조를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이 고고학은 잃어버린 언어의 단편들에 따라서 우리에게 단순히 놓여있는 자료로서 학문적이고 제도적이며 행정적인 텍스트들 (예를 들면, 수용소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각종 행정적인 문서들) 밑에서 광기의 차별받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캐낸다. 이런 점에서 그의 방법론은 고고학이다. 인식주관의 절대적인 작업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익명적인 규칙(범)체계들이 학문의 가능성의 조건들로 되자, 확실한 인식과 단순한 선입관 사이의 견고한 경계는 사라진다. 궁극적으로 푸코의 고고학이 종전의 학문 방식과 구별되는 것은, 사유의 역사를 선험적인 자기 도취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탈 중심적인 작업을 추진하는 데에 있다 .
그러나 이런 고고학적 방법은 계보학적 방법으로 넘어간다. 이 때 말하는 계보학적 방법이란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에 있어 고정된 본질이나 심층적 법칙, 형이상학적 목표 혹은 진리의 의미를 거부하고 의미, 가치, 진리, 도덕, 선, 정의 등의 개념을 탐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 속에 감춰진 권력의 전략, 지배와 복종 및 억압 구조를 밝히는 방법을 말한다. 이런 계보학(적 방법)은 대립들, 각종 사회적 힘의 관계들, 권력 집행(표시), (법, 정치-, 사회- 경제권력 등에 의한) 복종 형태들, 지배를 위한 끝없는 투쟁, 공개적으로 또는 은폐된 채로 자행되는 폭력 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그의 계보학은 니이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니이체에 따르면, 현대 도덕적 규범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개인들의 양심과 죄의식의 내적인 무자비함(Grausamkeit)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을 내적인 제재(innere Sanktion)로 본다. 왜냐하면 양심은 외적이고 폭력적인 처벌의 내재화 덕분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도덕화의 이런 과정은 무자비한 처벌의 잔혹한 폭력에 기초를 둔다고 본다. 이러한 니이체의 “도덕의 계보학”이 푸코의 소위 ”인문학의 계보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이성과 광기(또는 비이성)를 명확히 구별하는 인식체계가 없었다고 한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소위 “이성의 시대”가 서구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부터 이성과 광기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성의 시대”가 만든 역사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17세기의 유럽 전역에서 사회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회의 부정적인 주변인물들(부랑인, 범죄자, 실업자, 극빈자 그리고 정신 이상자들)을 무차별로 가두는 종합병원이라는 수용소에서 자행되던 폭력적인 교정작업(구타와 고문 등에 의한 교화작업)을 푸코는 주목한다. 이런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교정작업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런 인도적인 치료방법은 소위 “광기”를 또 하나의 합리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기 보다는 오히려 광인의 죄의식과 열등감을 조직적으로 구성했고, 그 결과 광인은 스스로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 정상인과 이성(의 세계)에 의해 판단되고 관찰되며 저주받(아야된다)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각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이런 인도주의적 개혁은 육체적 처벌에서 정신적 처벌로 그 방법만이 교묘하게 바뀌게 된다. 이를 통해서 이성은 철저하게 비이성을 억압하고 질식시키게 하는 권력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권력과 지식은 서로 연계되어 있고 이성의 신뢰는 바로 하나의 담론체계로서 다른 담론체계를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푸코는 자신의 연구를 감옥 밖의 조직과 제도로 확대시킨다. 감옥에서 실행되던 규율․관찰․규범적 판단․검사 등의 기법은 사회 전 영역으로 전파된다는 것을 밝힌다. 감옥에서 수행된 이 기법은 학교․군대․공장․병원․가족 관계에 차용되고 경찰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율적 권력이 사회에서 효율적으로 행사된다. 이를 통해서 사회에서 존재하는 이원론들(같은 것과 다른 것, 억압적인 담론 통제와 담론의 다양성 인정)이 해체되고 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권력은 일원론(Monism)이라는 전체성의 특징을 갖게 된다. 푸코의 이런 계보학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협적으로 나타나는 위험들을 발견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이 위험은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의 급속한 발전에 의한 각종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조직하며, 저장하여, 무한대로 이(악)용할 수 있는 21세기에서도 더욱 증가된 전체적인 감시와 통제의 전체시각(Panoptism)의 위험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도 그것의 각종 시설들(병원, 학교, 각종 수용소, 비밀권력기구)의 장벽 뒤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힘이 상존하고 있다는 위험을 여전히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신의 고찰로부터 그는 권력 관계는 그 특수한 관계적 특성 때문에 국가라는 거대조직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연구보다는 미세한 수준에서 접근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나 원시적인 폭력사용 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미시 물리학”에만 보이는 나타나지 않고 분산되어 있는 권력의 메카니즘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관점에 근거하면 권력은 특정 그룹들이나 계급들이 갖고 있는 소유나 특권 또는 국가제도들의 속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전체 사회를 관통하는 전략으로 본다.
따라서 푸코는 권력의 생산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사회적 비판 기능이며 이렇게 전략적으로 세밀하게 사회 전체에 침투되어 있는 권력에 대한 우리의 비판도 “지역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푸코는 유토피아의 가설을 위해 분투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신의 법이나 국가의 법을 대표하고 이성의 보편적인 법칙을 공포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시대는 사라지고 지역적 영역에서 규율적 권력을 비판하는 “구체적 지식인”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사회비판은 보편적 가치를 가진 형식적 구조보다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탐구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철학의 과제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철학의 과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고 철저하게 역사적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역사에 내재해 있는 정치이고 정치와 통용될 수밖에 없는 역사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의 사회사적(社會史的)이고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미시적인 시각으로(mikroscopic) 다루는 사회이론이며 역사이어야 한다. 푸코의 이런 사회 철학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경향은 다른 포스트 모더니스트들(레비나스, 데리다, 리요타르)과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푸코에 있어서 권력의 거시 물리학에서 미시 물리학으로의 전이는 리요타르의 거대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의 전이라는 포스트 모던적 조건의 논의와 상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아래의 6장 참조).
4. 타자의 형이상학-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모더니즘 철학이 갖고있는 자아 중심주의와 이론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타자의 낯설음을 인정하면서 타자의 문제를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이다.
그동안 서양철학이 타자의 문제를 다룰 때 타자를 진정한 낯설은 자로서가 아니라, 자아의 지평 속에서 - 그것이 인식론적 차원이든 존재론적 차원이든 간에 - 타자 구성하고 이해하였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자아 중심주의적 타자구성 때문에 서양철학(모더니즘)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지배하는 전쟁의 철학, 전체주의 철학을 낳았다는 것이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면서 평화의 철학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존재 건너편에 선(善), 일자, 신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적인 설명을 잘못된 해석으로 간주한다. 의미와 선은 존재자가 갖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존재 건너편에 존재하는 선에 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윤리학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는 하이데거를 포함한 전통적인 서구 존재론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에 있어서 존재론의 근원적 오류는 존재를 항상 하나의 전체성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의 서구철학에 있어서 존재론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초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타자의 초월성뿐만 아니라, 신적인 타자의 초월성도 도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로서 무한적-다른-존재이다. 이런 무한자는 전체성을 - 그것이 논리적이든, 존재론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 부수어 버린다.
그는 이런 타자를 만나는 계기를 향유, 거주, 노동을 통해서 설명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하이데거와 비판적인 논의를 전개시킨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생존(실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이때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염려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세계 내에 살아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존재 방식은 염려가 아니라 오히려 즐김과 누림, 곧 향유(jouisssance)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염려하는 존재에게는 삶의 수단에 불과하지만, 삶을 향유로 본다면 자연은 향유의 대상이 된다. 향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보다 존재의 원천이고 만족으로 체험된다. 세계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젖줄이고 생활 환경이다. 이 향유를 통해 주체성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레비나스는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요소는 나를 떠받치고 있는 기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익명성으로, 무규정성으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있다. 이런 삶의 요소가 갖는 어찌할 수 없는 세력은 향유를 우선적으로 없애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공허와 욕구가 향유보다 앞서 있기 때문에 향유는 충족이다. 욕구와 충족의 두 계기는 완전한 향유를 이루고 있다. “향유의 행운은 욕구의 불행에 닿고 이것으로 하나의 타자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행복한 만남이고 하나의 기회이다”. 향유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나게 된다. 다른 한편 거주는 향유하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단절하고 세계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주에 있어서도 인간은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또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주변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한다. 사물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도구로서 취급되며 사회적 관계에서 교환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는 인간의 지식도 노동처럼 현실을 파악하고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 인식과 노동을 통해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타자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만나는 타자는 더 이상 자아에 의해서 구성된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 낯선 타자에 의해서 우리가 윤리적 판단과 행동을 내려야 한다. 타자는 우리에게 얼굴(visage)로 나타난다. 타자의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얼굴을 통해서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가 있으며, 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에서 타자는 이해의 지평 속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평 바깥에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만약 지평의 모델로 굳이 설명하려 한다면, 타자는 주체에게 존재하는 사물을 열어놓는 지평의 원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타자를 자아 속으로 가지고 들어 와서 해독(解讀)하는 가능성, 즉 타자를 나와 유추적(유사적:analog)인 방식으로 파악하려는 어떤 가능성도 여전히 자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물들처럼 타자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해자체를 이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종전의 서양철학의 전통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논의를 전개시킨다. 타자를 이해하는 출발은 타자와 말을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이때 말을 나누는 방식은 인사를 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런 이해는 바로 부름(appel)과 호격(vocatif)에서 수행된다. 표상에 근거하지 않고 부름에 근거하는 타자와의 연결을 레비나스는 종교로 부른다. 이런 타자와의 관계를 종교로 부르는 데에는 바로 타자와의 말을 나누는 것의 본질이 부름이나 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아 중심주의였던 모더니즘 철학이 레비나스에 의해서 타자로부터 명령을 받게 되는 ‘이타주의’ 철학으로 전환을 보게 된다. 타자의 얼굴이 지닌 비폭력적, 윤리적 저항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자유를 문제삼는다. 내가 힘없는 타자의 호소를 인정할 때, 나는 나의 자유, 나의 자기실현을 그대로 무한정 추구할 수는 없으며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타자의 얼굴과 만남에서 말로 표현하지 않는 말함과 이해의 본질이 있다. 폭력에 대한 대안으로서 말을 나누는 것(discours)은 타자의 얼굴에 의해서 비로소 열려진다. 이런 얼굴은 모든 상징주의에서도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타자의 나타남이다. 레비나스가 표현이라고 말한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말이 없고, 언어 이전의 언어을 뜻하는 것이다. 주관은 타자의 타자성을 이해하고 타자의 나타남을 구체적인 표시(상징)의 차원이 열려지는 것으로서 이해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폭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된다.
비폭력에 대한 요구를 얼굴이 갖고 있다는 것은 얼굴이 우선적으로 부정성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부정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서구철학에서 강하게 형성되어 온 독아론적인 삶과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이런 독아론적인 삶의 통일성을 부숴 버린다. 얼굴은 내가 갖고 있는 인식지평으로 설명될 수 없고 이 지평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이런 얼굴을 ‘발가벗고 있는’(nu) 것으로 부른다. 이 발가벗음은 모든 형식과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타자와 말을 하는 것은 “발가벗은 모습으로 모든 형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관계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의 의미를 갖는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발가벗음은 가치 병존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 항상 긍정적인 가치로 나타난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타자는 나와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자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있다.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따라서 타자와 나는 비대칭성, 불균등성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갖게 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모더니즘이 그동안 갖고 있던 자아 중심적, 자기 문화중심주의적 철학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평화의 철학을 제시해 놓고 있으며, 타자를 존중하고 더 나아가서 타자의 숭고함까지 인정하는 타자 윤리학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이런 레비나스의 철학은 세계화라는 이름 하에 시장에서의 강자 중심주의의 특징을 감추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가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5. 해체론 - 데리다
레비나스가 자아성(l’égoïté)을 부정하고 존재론을 형이상학에로 대체하는 타자성(l’altérité)의 철학을 정립한 반면에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보여주고 있는 존재론/형이상학의 대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오히려 문자로 대신한다. 데리다에서 자아성은 목소리(la voix)이고 타자성은 문자(l'écriture)가 된다. 데리다가 지시하고 있는 목소리의 철학은 바로 후설 현상학을 포함한 소위 모더니즘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기존 서구철학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후설은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진리, 관념적 객관성을 순수 내면성의 세계, 즉 선험성의 세계에서 찾고 있다. 이 객관적인 관념성은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설이 우려한 독아론 내지는 자아론에 빠지게 될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후설이 보편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소리의 방법이라는 것이 데리다가 본 후설 현상학에 대한 평가이다.
관념적인 보편성은 장소의 우연성과 관련된 경험성과 세계성, 상황성을 가져서는 안된다. 반복하는 보편성은 오히려 의식의 자기 현존과 자기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목)소리는 말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 말한 것을 듣는다. “목소리는 자기 자신을 듣는다”. 여기서 후설이 그렇게 강조한 명증성은 - 데리다의 평가에 따르면 -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le s'entendre-parler이 된다. 후설에서 발견된 이 현존적 진리는 가장 전형적인 자기애정l'auto-affection의 논리임이 데리다에 의해서 밝혀진다. 이런 목소리가 갖고 있는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며, 의식의 직접적인 직관과 파악이며 자기에의 현존이고 차이를 없애는 체험된 자가애정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문자는 목소리처럼 내면성이 아니고 외면성이며, <욕망>의 소산이고 타자의 흔적에 대한 기록이 된다. 타자의 흔적은 차이의 기호이다. 욕망은 근원적으로 타자에로 향하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소멸이다. “타자에로 향한다는 것은 또한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며, 의미가 문자의 통로 속에서 낯설게 된다”. 자아의 동일성이 해체되고 분리되어 있는 그 모습이 욕망이고 동시에 문자이다. 그런 쪼개진 모습이 이른바 자아라는 것이기에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흔적일 뿐이다. 이 흔적이 오히려 현존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점에서 데리다는 후설 현상학을 포함한 종전의 형이상학을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명명하고 이 현존의 형이상학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모더니즘 전체를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데리다는 흔적을 차연의 개념과 연결지움으로써 모더니즘의 특징인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데리다는 자신의 고유개념인 차연의 철학을 세우게 된다. 그가 말하는 차연(différance)은 차이(différence)와 연기(délai)의 합성어이다. “어떤 요소도 다른 요소와의 차이가 없이는 그 요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차이의 나타남은 어떤 절대적 단순성보다도 선행한다. 같음(같은 것) 속에서 다름(다른 것)을 다름(다른 것)으로 고정시키는 흔적이 없다면 어떤 차이도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할 것이고 어떤 의미도 나타나게 하지 못할 것이다. ... 순수한 흔적이 차연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희랍철학에 대한 비판을 전개시킨다. 희랍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통일을 주장하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희랍철학은 희랍인들(특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이 발견한 이성에 기초를 두어서 차이를 극복한다. 이런 차이의 극복방법은 불가피하게 아테네 종족(문화)중심주의로 가게 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데리다는 이런 희랍적인 로고스 중심의 사유를 이념의 세계 내지는 빛의 세계로부터의 철학 또는 <태양중심의 정치l’héliopolitique>라고 규정한다. 태양중심의 정치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는 집단성 - 이 집단성은 궁극적으로 전체성과 연결된다 -에 대한 비판을 재인용한다. 즉 “사회적인 것의 이념은 융해의 이념 속에서 찾아지고 주관은 하나의 집단적인 대표자(기관)에서, 하나의 공동 이념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런 빛 속에서는 타자는 주관과 동일하게 되고 모든 것을 통일로 그리고 공통적인 이념으로 융해되고 이런 융해 속에서 차이나, 거리둠을 허용하지 않는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에 같은 것의 승리만을 구가하고 같은 것(같음)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라는 흔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로고스 중심주의는 다름이 같음과 함께 성립한다는 사고방식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나쁜 고독 속에 갇혀 살게 된다(ED. 134). 그리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의 철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철학적인 전체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책 에서 텍스트의 시대로: 모더니즘에서 해체론(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의미의 총체 또는 진리의 체계를 상징하는 책의 해체
데리다의 텍스트이론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여기서 그를 해체론자로 부르게 되는 이유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책은 의미가 일정한 체계적 줄거리를 중심으로 하나의 이념 속에 질서정연하게 담겨 있는 의미들의 전체성이다. 의미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의식이 체험하고 파악한 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은 인간의식이 의미를 구성하는 전개과정의 전체이다. 저술한다는 것은 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책은 주인인 저자의 생각과 의미 추구의 모든 의도가 내용으로 실려 있는 집과 같다. 따라서 책은 저자가 마치 자기의 생각인 것처럼, 자기의 전적인 소유물인 것처럼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그런 폐쇄성을 지니며 동시에 아버지나 스승의 권위를 가진 전범(典範)이 된다. 이런 점에서 책은 전형적인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철학 정신을 담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책과 다르다. 텍스트에는 “신화적 또는 신화학적 담론이 지니고 있는 고정적이고 현실적인 중심이 없다. ... 중심의 부재는 주체의 부재, 저자의 부재를 뜻한다”. 텍스트는 책 속에 담긴 진리처럼 어떤 불변의 이념을 전제로 하는 닫힌 질서를 파기하고 극복할 때만 이해된다.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 개의 나이를 갖고 있고, 텍스트 읽기는 여러 개의 나이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텍스트에서는 기표(능기 le signifiant)에 대한 기의(소기, le signifié)의 구속력이 사라지고 하나의 의미가 갖는 전체성과 불변성으로부터 벗어난 물질적 기표들이 자율적이며 분산적 기호 작용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란 기의 없는 기표들이 직물처럼 엮어 가는 언어세계이다. 동일한 대상에 관해서 순수한 원초적인 의미로서의 기표는 어디에도 없다. “순수한 기의는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기의의 층으로서의 기표에서 어떤 것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즉 종래의 사유 체제로서 책은 기의(소기) 즉 기호의 내용을 중시하는 반면에 데리다가 말하는 새로운 사유 체제로서 텍스트는 기표(능기)를 중시한다. 예를 들어 고향을 생각하더라도 고향의 궁극적 의미결정은 불가능하고, 뒷산과 앞개울과 같은 것은 기표로서 그 기표가 다른 기표들과 연쇄적 연관의 짜깁기를 하는 여러 가지 관계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항상 존재하는 그 어떤 곳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 흔적의 사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선 특정한 출발점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었다. 우리가 항상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곳에, 즉 우리가 그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이미”우리는 출발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것보다 앞선 특정한 특정한 출발점이란 바로 전통 모더니즘 철학이 제시한 이성이나, 자아 중심주의나, 특정한(서구) 문화중심주의를 말하고 있다.
텍스트 상호간의 관계가 갖는 다양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면 재래의 철학적 진리나 그 진리를 모은 책이 자랑하는 이상적 절대 의미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텍스트는 의미와 무의미, 의미의 단수와 복수의 그런 재래적인 인식론적 테두리를 벗어나서 의미 자체를 흩어버린다.
그러나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나오는 많은 비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데리다의 해체론을 단순한 파괴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데리다가 자신의 텍스트이론을 직물짜기(Verwebung)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데에서 우리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텍스트를 직물짜기와 비유해서 말한다는 것은 종전의 피라미드적 구조나 자기애정을 갖고있는 각종의 중심주의(자아중심주의, 논리중심주의, 태양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종족(민족)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서로 이질적인 것이 서로 짜깁기하여 하나의 열려진 의미를 갖고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직물 짜기는 날실과 씨실이 서로 받아들이고 엮어짐으로써 가능해 진다. 즉 논증적인 것이 비 논증적인 것과 접목하고 언어적인 것(명시적인 언어)이 비언어적인 것(언어에 앞선 언어로서 잠재적 언어)과 이성적인 것이 감성적인 것과 서로 짜깁기를 하는 데에서 그의 텍스트 이론을 이해한다면, 그의 해체론은 ‘탈구성’으로서의 ‘재구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재구성으로서 또는 탈구성으로서 그의 해체론을 규정한다는 것은 종전의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정(많은 경우 이성)을 비판하고 이들 철학이 갖는 자기수정l'auto-insémination의 도식을 해체하는 철학이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의 철학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 무정부적인 철학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Ⅳ. 마치는 글 :지식의 포스트모던적 조건-리요타르
- 거대 이론(메타담론)에서 작은 이론(담론)으로
여기서 본고의 마치는 글로서 리요타르의 포스트 모던 철학을 다루는 것은 리요타르 철학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는 의미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적 철학의 저자이고 ‘포스트 모더니즘(모던)’이라는 개념을 철학과 그 밖의 인문․사회과학 논의에 가장 명시적으로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적어도 철학의 영역에서 사용할 때, 우리는 바로 리요타르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정리해 본다는 의미에서 마지막의 본 장에서 마치는 글과 함께 그의 철학을 다루고자 한다.
리요타르에 의하면 모더니즘적 지식의 토대와 기능이 정당화라면, 지식의 포스트 모던적 조건은 탈 정당화이다. 모더니즘을 특징짓는 것은 메타 이야기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을 특징짓는 것은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적 지식이 통일성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통일성은 거대 이야기 또는 메타담론에 의해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는 거대 이야기로 다음의 세 가지를 예로 들고 있다: 인류의 해방(계몽주의), 정신의 변증법(관념론), 의미의 해석학(역사주의).
위 세 가지 거대 이야기에 비추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앞서 논구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과 관련을 지어서 제기할 수 있다.
첫째,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 관련지어서, 앞선 모더니즘(계몽)에 의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과연 전체 인류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 주었는가?
둘째, 메를로-뽕띠, 레비나스 그리고 데리다에 관련을 맺어서, 인간의 이성은 과연 타자(타자성)을 받아 들였는가?
셋째,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 그리고 푸코와 관련을 맺어서, 극우(나치즘)과 극좌(스탈린이즘)의 역사-정치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사회를 제공해 주었는가?
리요타르는 이런 거대 이론을 제공한 최고의 대변인을 헤겔로 간주하고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전개한다. 그가 현대성의 특징을 대표하고 있는 거대이론의 최고 대변자로 헤겔을 지칭하는 이유는 헤겔이 세 가지 커다란 이야기들을 하나의 사변적 이야기로 통일시키고 궁극적으로 전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오직 자신의 발전을 통해 자기 자신을(스스로) 완성하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전체만이 진리라는 명제는 전체주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리요타르의 입장이다. 특히 오늘날의 포스트 모던적 조건에서 이런 전체는 다양한 부분들의 갈등과 상호작용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전체성이 주장하는 통일성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리요타르의 진단이다. 따라서 삶의 다원성이 오늘날 인간사회의 조건인 이상 거대 이야기가 갖고 있는 전체성의 해체는 오늘날 포스트 모던적 당위이다.
리요타르는 모더니즘적 특징인 거대담론이 포스트 모던적인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 대안을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인 다양한 언어게임(이론)들에서 발견한다. 이점에서 오늘날 포스트 모던적 현상이나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와 주체의 해체로 인하여 야기된 부정적인 현상으로서 이성의 혼란을 리요타르는 혼란으로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혼란은 이성이나 거대이론이 붕괴되면서 발생하는 혼란이 아니라, 다원성과 다원화를 보편적 합리성에 의해서 수용하지 못하고 이들 다원성들의 차이를 제거하려는 잘못된 모더니즘적 치유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성의 혼란은 “보편적 언어, 즉 개별적 언어들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의미들을 남김없이 수용할 수 있는 메타언어에 관한 지극히 현대적(모던적)인 기획에서 기인한다”.
자율적이며 다양한 언어들을 하나의 보편적인 메타언어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폭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요타르는 현대 정보사회의 언어에서도 그 폭력성을 발견한다. 이는 정보언어가 갖고 있는 보편성과 정보의 획일성 그리고 효율성 때문이고, 정보가 갖는 경제성으로 인한 부의 분배의 불균형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정보언어는 과학과 지식을 정당화시켜주었던 거대 이야기의 타당성이 붕괴됨으로써 작은 이야기로 되어버렸고 이들의 정당화도 스스로 확보해야되는 처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또는 정보언어가 더 이상 지식의 전체(총체)가 아니고 다른 종류의 지식과 충돌하는 관계에 접어들었다. 이는 동시에 과학적 담론이 다른 종류의 담론에 비해서 우세하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게임들의 이질성은 충돌과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고, 포스트 모던적 학문이나 언어게임은 비결정성, 비연속성, 파국성, 모순성을 갖게 되었다. 즉 “합의는 단지 토론의 한 상태일 뿐이지 그 목표가 아니다. 토론의 목표는 오히려 불일치(paralogie)이다”.
이때 말하는 불일치는 하나의 로고스에 의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전통적인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리요타르는 과연 불일치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주장했어야 했다. 그가 이런 불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언어게임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불일치와 경쟁의 성격이 복수적인 언어게임들을 하나의 섬유로 조직하고 있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적 유대는 언술적이지만 단일한 섬유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적 유대는 상이한 규칙에 복종하는 적어도 두 종류의 언어게임들이 교차하는 조직망이다”
이런 점에서 리요타르는 ‘하나’의 보편적인 의사소통이라는 ‘하나’의 절대 지평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데리다가 말하는 ‘책에서 텍스트로의 전환’에 상응하는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의 길은, 리요타르의 입장에서 보면, 책이라는 거대 이야기에서 텍스트라는 작은 이야기로 가면서 이 작은 이야기가 갖는 권리를 얻도록 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뽕띠에서는 이성의 확장이 철학적으로 요청되고 그 요청의 정당성이 밝혀졌다면, 리요타르에서는 언어게임 규칙의 망이 바로 이성이 활동하는 방식이 된다. 모더니즘은 이성을 권력구조에서 볼 수 있는 상하관계(hierarchy)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있는 심판정으로 기술했다면, 리요타르는 이성을 망 구조로 설명하고 이성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결국 포스트 모던적 이성은 다른 담론이 발생할 수 있도록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분쟁의 경우를 보여주고자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바로 도구화된 이성에게 다시 비판의 기능을 회복시켜서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 전체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호오크하이머-아도르노). 이런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호오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전체주의 극복 가능성을 우리는 자폐증에 빠져있는 어른 이성 또는 모던적 이성을 치료함으로써 또한 얻을 수 있다. 즉 이런 가능성은 지각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모던적 이성에 의해서 배제된 야생적 사유의 복권을 통해서 종전의 이성(합리성)을 확장시킴으로써(메를로-뽕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인 것과 비 이성적인 것, 정상적인 것과 비 정상적인 것의 구분이 얼마나 자의적이었으며 그것이 지식과 지배적인 정치 권력과의 연계에 의해서 수행된 것인가를 밝혀냄으로써(푸코) 감시하는 범시각(panoptique)적인 권력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종전의 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자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타자를 윤리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레비나스). 이런 윤리적 태도와 더불어서 우리는 타자와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텍스트에서 살아있는 타자의 흔적이 남긴 다의적인 의미의 세계를 차연 속에서 이해함으로써(데리다) 로고스 중심주의, 자아 중심주의, 종족 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거대이론에 의해서 보다는 지역적이고 작은 이야기에 의해서(리요타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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