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따르의 포스트 모던 철학
양운덕(고대 교수, 철학)
1.들어가는 말
장 프랑소아 리오따르는 포스트 모던을 대표하는 이론가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포스트 모던 조건과 포스트 모던 정치학에 관한 분석을 그 이론적 배경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주된 입장은 모던의 이성, 총체성에 중심을 둔 사고가 아우슈비츠와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전체주의의 뿌리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어떤 형태의 총체성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총체성,동일성에 뿌리를 둔 사고를 해체하려고 한다.
먼저 포스트 모던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던/포스트 모던에 대해 정의하기로 하자. ‘모던’이란 서구의 현대를 주도해 온 사상적 흐름인 계몽주의적 전통, 또는 이성중심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서구에서 계몽주의는 인간 주체와 이성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이성에 의해 세계와 그 본질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고, 그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해서, 자연과 억압적 사회제도로부터 해방되는 미래를 제시한다.
‘포스트모던’은 이런 계몽주의적,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가리키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성 자체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비판해서 이성의 본래 모습을 되찾자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급진적인 반이성주의이다. 포스트 모던은 모던이 기초로 삼는 인간 주체, 이성,역사의 진보 등이 모두 신화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이성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억압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리오따르가 제시하는 포스트 모던 철학의 기본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2장에서는 포스트 모던에 대한 정식화와 그것의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서는 그의 총체적 진리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보편적 정의에 대한 비판을 글의 재현 개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고, 4장에서는 앞에서의 그의 논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통해 총체성에 대한 그의 부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포스트 모던과 작은 이야기들
리오따르에 따르면 “모던”은 “인간의 보편적 해방”이란 목적을 실현시킨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체를 정당화하려 한다. 리오따르는 “모던” 철학이 지식을 총체화함으로써 지식의 ‘진리’와 권력의 ‘정의’를 결합시킨다고 본다. 이런 정당화에 의해 그것은 메타이야기로 작용한다. 모던의 계몽주의는 이성의 빛--합리적 과학, 보편적 도덕, 자율적 예술--으로 암흑을 추방함으로써 인간의 성숙과 해방을 가져오려는 시도이다. 리오따르는 이러한 계몽과 해방을 담당하는 이성과 총체성이란 무기가 실제로는 억압적이고 專制的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했다고 비판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리오따르가 흔히 오해하듯이, 포스트 모던을 새로운 ‘시대’, 모던 ‘이후’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것을 특정한 시대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양식에 대한 명칭으로 본다. 리오따르는 포스트 모던을 오늘날의 시대 정신으로 보거나, 새로운 ‘지금’, 새로운 시각, 최근의 유행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 모던에서는 두 이질적인 시간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역사를 시간적 선후에 따른 전개나 발전, 측적으로 보지 않고 이질적 시간의 혼재로 본다. 이것은 모던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뚜렷한 단절을 설정하고, 양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과 다르다. 포스트 모던은 이런 시기 구분을 분열시키려 한다.
리오따르는 모던을 큰 이야기grand récit, 메타이야기meta-récit로, 포스트 모던을 그것과 상반되는 ‘작은 이야기들 petit récits’로 특징짓는다. 이때 리오따르가 드는 큰 이야기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정치적 이야기와 모든 지식을 총체화함으로써 절대적 인식을 완성시킨다는 철학적 이야기이다. 이것들은 그것들 자체가 이야기의 하나이면서 모든 사회의 의미, 총체적 의미, 궁극적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진리라고 자처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야기들 가운데 내재하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야기들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밝힘으로써 이야기들을 일정한 목적 하에 배치하고, 질서짓고, 체계화함으로써 그것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포스트 모던은 모던의 이런 측면을 전복시키려 한다. 포스트 모던의 작은 이야기들은 그러한 총체화를 거부한다.
리오따르는 이러한 대립을 통해서 보편적, 총체적 담론이 은폐하고 억압할 수밖에 없는 단일성, 차이들, 이질성, 공약불가능성을 드러내어 총체성의 억압, 진리의 지배를 해체시키려 한다.
그는 작은 이야기들의 화용론이 인식론,정치, 미학의 영역에서 메타 이야기의 확신을 전복시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포스트모던이 이야기의 화용론 측면에서 메타이야기를 불신한다. 2)미학을 작은 이야기들의 고안(발명)을 위한 영역으로 재평가한다. 3)정치적 영역에서 ‘작은 이야기들’과 같은 정치적 소수의 저항이 한편으로는 자본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정당’에 의해 제안된 총체화하는 이야기에 대립된다고 지적한다.(Readings,64)
리오따르가 모던을 큰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은 모던의 과학들을 이야기와 관련짓기 위한 것이다. 그는 과학이 이야기보다 우월한 체계가 아니며, 나아가 과학이 그것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큰 이야기에 의지한다고 본다.
그가 이야기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 보자. 그는 과학의 화용론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과학적 지식은 指示에 기초한 ‘하나’의 놀이만 인정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며, 2) 사회적 결합을 추구하지 않으며, 3) 탐구의 놀이에서 송신자의 지위post에만 관심을 가지며, 4) 검증, 반증 등의 논증과 증명에 의해 타당성을 확보하며, 5) 通時的 時間性을 갖는다. (같은 책.45-47쪽)
과학이 주장하는 보편타당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과학이 그 대상이나 지시체에 대한 주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주장하는 바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학 이론이 일정한 규칙들을 제시한다면, 그 규칙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장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는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입장은 과학의 입장에서 형이상학을 제거하기 위해서 검증이론을 진리기준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만을 과학적 명제라고 주장한다. 각 명제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해서 참/거짓을 가려서, 참인 것은 유의미한 명제, 거짓인 것은 무의미한 명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검증이 불가능한 명제--이를테면, ‘신은 존재한다’,‘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그림은 아름답다’ 등--는 비과학적이라고 판정한다. 이후 이런 검증원리는 확증원리, 반증원리로 발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검증원리 자체, 즉 ’경험적으로 검증하여 참인 명제는 유의미하다‘는 원리 자체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검증원리에 따를 때 이것 자체가 형이상학적 주장이 된다. 결국 이 입장은 더 크고 세련된 형이상학의 무기를 들고 더 작거나 투박한 형이상학을 공격한 셈이다.
이 경우처럼 자신이 증명해야할 과학적 담론의 정당성을 전제하고 출발할 수는 없다. 과학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에 근거를 부여하는 다른 종류의 담론에 의지해야 한다.
리오따르는 과학이 큰 이야기에 의존하며, 그런 큰 이야기로 정치적, 철학적인 이야기를 든다(같은 책, 54쪽 이하). 정치적 이야기는 계몽주의와 결합되고 프랑스혁명으로 구현된 것으로, 인간을 정치적 예속과 억압으로부터 ‘보편적으로 해방’시킨다는 큰 이야기이다. 이것은 사회적 주체가 지식의 주체가 되어 인간해방이란 목적 아래 지식과 실천을 통합시킨다. 그리고 헤겔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철학적 이야기는 사변적 이야기로서, 모든 분야의 과학적 지식들을 하나로 통합한 총체적 체계로서, 이 사변적 이야기는 실재에 관한 완벽하고 절대적인 인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해방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들은 목적론적이다. 이 이야기들은 다른 작은 이야기들을 종속시키고, 조직하고, 설명하는 메타이야기이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들은 ‘인간해방’이나 총체적 인식이란 큰 이야기에 통합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개별 과학은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큰 이야기가 마련한 정당성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런 큰 이야기는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야기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자신이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고 본다.
리오따르는 이에 대해 두가지 유형의 이야기를 대립시킨다. 원시사회의 전통적 이야기는 이야기하는 자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암송’함으로써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정당화된다 (여기에서는 진리가 중요하지 않고 사회적 통합이 중요하다). 또한 포스트 모던의 작은 이야기들은 당대의 과학적 의사소통에서 주어진 합의를 깨뜨리는데 관심을 갖고, 그것들이 큰이야기에 응집되는 것을 방해한다.
큰 이야기, 메타이야기는 역사적 계기들을 연속성, 진보의 틀로 조직한다. 그것은 과거와 단절하고 역사의 보편적 주체가 해방을 수행할 기획을 내세운다. 예를 들면 계몽주의의 백과전서파는 보편적 지식을 이끌 계몽을 통해 미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헤겔의) 역사의 변증법은 정신의 실현이나 자유의식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내세우고,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인간을 속박에서 벗어나 평등의 공동체를 건설한다고 선언하고, 민주주의는 민중이 정치적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다스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산출하여 인류를 빈곤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 모던의 작은 이야기들은 더이상 메타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메타이야기, 큰 이야기는 기원(신)이나, 목적(보편적 해방)을 설정함으로써, 작은 이야기들을 조직하고 정당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 자체가 이야기이면서도 이야기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이야기들에게 규칙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정치적인 것, 또는 경제적인 것을 모든 사물의 진리를 드러내는 근거로 파악하는 시도도 이러한 것들에 속한다.
이런 메타이야기의 몰락은 문화를 작은 이야기들의 ‘잡동사니’로 만든다. 그래서 문화는 하나의 場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들이 이질적인 채로 공존하는 장으로 해체된다. 이런 장은 차이와 이질성이 서로 공존하는 장이다. 여기에서 한 이야기는 이질적인 다른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들은 중심이나 총체성에 환원되지 않은 채로 혼재, 공존한다.
그러면 이야기와 지식의 관계를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이야기를 이루는 요소인 이야기하는 자, 이야기를 듣는자, 이야기된 것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는 가가 문제가 된다. 전통적인 인식론(실증주의)에서는 지식, 진리를 세계에 대한 기술의 객관성에서 찾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야기된 것’ 만을 강조한다. 지식은 순전히 지시적이고, 이야기하는 자와 이야기를 듣는 자에 비해 지시대상의 심급만을 특권화한다.
이에 비해 모던은 ‘이야기하는 자’, 주체를 강조한다. 지식의 정당화는 인식하거나(합리주의) 의지하는(낭만주의) 주체의 능력과 관련해서 이루어 진다. 지식은 이야기가 아니고, 이야기는 단지 주체의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이야기narration를 이야기하는 자와 익명의 이야기된 것 간의 합의의 결과로 환원시킨다. 합의의 지평은 총체적 주체를 생산한다. 이 주체는 그것이 ‘인간’(인간주의)이건 역사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맑스주의)이건 이야기를 종식시키려 한다.
이와 달리 포스트 모던은 이야기의 어떤 심급도 지배적인 이야기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시대상도 이야기하는 주체도, 듣는 자도 특권화하지 않는다. 지시대상은 이야기의 대상이다. 주체는 항상 이미 이야기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와 현실의 관계에서 이야기의 지시대상은 항상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항상 지시대상으로서 특정한 이야기에 의해 자리잡는다. 이것은 이야기하는 자와 듣는 자가 이야기되는 것에 앞서지 않고, 이야기에 의해 자리가 배치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메타적 심급도 없다. 다만 작은 이야기들의 場이 있을 뿐이다.
큰 이야기는 지시대상이나 이야기하는 자를 중심에 두고 작은 이야기들을 그 주변에 배치한다. 이와 달리 포스트 모던의 작은 이야기들은 중심이 없는 이질적인 영역에서 ‘계열적’으로 배치된다 --그것들 하나 하나는 단순히 다른 것 다음에 오는 무한한 계열을 이룬다. 이런 계열은 어떠한 종합이나 통일을 만들지 않는다.
리오따르는 작은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체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틀을 빌어 각 이야기들을 나름의 규칙에 의해 구성된 ‘말놀이Sprachspiel’로 이해한다. 이 말놀이들 가운데 어떤 말놀이도 보편적 원리에 따라 구성되지 않는다. 이런 말놀이들은 이야기에서처럼 그 정당성을 자체의 임의적 규칙에서 찾으며 모든 말놀이를 지배하거나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를 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장기, 바둑, 체스 등이 있을 때 각 놀이는 각각의 놀이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이 가운데 가장 참된 놀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여기에서 놀이 전체에 적용될 보편적 규칙을 찾는 시도는 각각의 놀이의 차이와 고유성을 지워버리고 놀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흔히 이러한 포스트 모던을 상대주의라고 하는데 그 점을 따져 보자. 리오따르에 따르면 상대주의는 모던의 (부정적) 계기이다. 그것은 지식이 단지 주관적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허무주의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에 대한 어떤 주장도 ‘사물을 보는 한가지 방식’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주의는 자신들의 주장이 ‘사물을 보는 한가지 방식’이상의 것임을 주장해야 하는 부담을 진다. 즉, 상대주의적 관점이 ‘진리’임을 주장해야 한다. 이 입장은 주관적 의식이 사물을 보는 모든 방식을 기술하는 참된 방식이라고 강요한다. 이런 면에서 상대주의는 일종의 메타이야기이다. 모던의 ‘생각하는 나(Cogito)’는 ‘의심하는 나(Dubito)’가 되지만 주체인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Readings, 67).
리오따르는 중심이 없는 작은 이야기들의 복합적 장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그것의 주요한 특징은 동일성에 대해서 차이를, 총체성에 대해서 파편적 계열을, 진리와 논리에 대해서 위반과 反理paralogie를 맞세운다. 그래서 反理paralogie, 異意dissension, 발명invention, 실험experimentation 등이 강조된다. 포스트 모던의 ‘이의의 지평’은 결코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세계관과 문화를 지닌 원시인과 문명인의 대화를 합의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대개 그 경우에 통일을 추구하는 시도는 문명사회가 원시사회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이의는 합의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합의를 차이를 제거하려는 억압적 동일화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토론에서 하나의 보편적 결론을 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다양한 이질적인 견해들을 제시하는 것을 생산적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 토론이 하나의 결론을 산출하기 위해서만 있거나, 모든 토론자가 하나의 결론을 단지 각자의 입으로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토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리오따르는 보편성에 기초를 둔 논리가 아니라 소피스트들의 경우의 논리 logique de l'occasion를 회복시키려 한다. 그는 보편자의 논리가 사실상 특수자의 논리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특수한 것의 논리가 보편자의 논리를 지배하고 포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다 보편적인’ 논리나 ‘보다 참된’ 진리로서 종래의 보편자의 논리가 갖는 결함을 보충하거나 대체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포스트 모던의 작은 이야기들은 이야기들을 종식시킬 이야기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어떤 메타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야기에 관해 언급하는 메타이야기는 그 자체도 하나의 이야기임을 부정한다.
이처럼 진리와 의미에 관한 확신을 바꿔놓는 비판적 수행의 과제는 전통적인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적, 문화적인 것이다. 그래서 리오따르는 포스트 모던 ‘미학’을 중시한다.
이때 미학은 고안/발명의 영역이다. 그것은 진리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작업하는 것이다. 이 고안(발명)은 새롭고 보다 참된 진리의 발명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규칙을 추방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경건한 태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단적 태도는 진리와 환상의 대립을 버린다. 그것은 권력을 깨뜨린다는 명목을 내걸고 새로운 형태의 ‘더 높은’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경건한 철학자는 진리를 말하려 한다. 이에 대해 포스트 모던의 이단적 철학자는 새로운 진리, 이전의 진리를 보충하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지배를 뒤바꾸기 위해서 간계와 기지를 사용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의 기능은 두드러지게 ‘이단적’이다. 그것은 세계(진리를 말함)나 주관적 의지(상상적인 새로운 진리를 창조함)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충실하려고 하지 않는다.
리오따르는 예술 자체가 문화적 변혁이라고 본다. 그리고 예술이 생산한 효과는 새로운 진리를 보태지 않는다. 작은 이야기들은 문화적 변혁을 내거는 메타이야기를 형성하지 않는다. 예술은 작은 이야기들의 ‘계열’이다. 이 이야기들은 새로운 진리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모던의 경우 ‘혁신innovation’은 예술이란 언어게임의 규칙 안에 예술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한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던 미학의 ‘발명의 반리’는 게임의 규칙을 뒤바꾸려고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한다.
3.모던의 재현적 정치학과 포스트 모던의 차이의 정치학
리오따르는 여러가지 명분, 특히 총체성을 내세워 이야기들을 통치하려는 정치적 시도를 거부한다. 그는 이야기들 간의 차이, 근본적인 이질성, 그것들의 공약불가능한 공존에 주목한다. 자유주의적이건 억압적인 것이건, 명령적 정치를 정당화하려는 주장은 바람직한 사물의 상태에 호소함으로써 사물의 상태를 적합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를 것을 제시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총체화한다. 그리고 그와 다른 것을 배제하고, 희생시킨다. 이에 대해 포스트모던 정치는 그런 재현적 정치학을 전복시킨다.
리오따르는 再現représentation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극장구조를 살핀다. 극장은 3개의 경계로 분리되어 있다 (Lyotard,1973, 180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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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물의 외부벽: 현실 세계는 외부이고 극장은 내부이다. 극장에 들어서는 것은 (현실과) 다른 종류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다. 2) 극장안에서 무대와 관람자를 분리시키는 경계: 관찰되는 장소와 그것으로부터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3) 본질적인 경계: 무대 옆이나 무대 뒤로부터 무대를 분리시키는 경계: 원칙적으로 이 공간은 관람자에게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극장기구로서 감독, 생산, 조직의 장치 등이다. 극장의 화면은 이 비가시성으로부터 내보여지는 것 pro--duire이다. 무대 상에서 관람자에게 보여지는 것은 이 비가시적인 것에 의존한다.
이런 구조가 재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보자. 재현은 극장의 경계 안에 설정된다. 그 장치는 외부 현실과 대립되는 재현의 내부이다. 그런데 극장에서는 현실을 일정하게 변형시켜 제시한다. 즉 현실을 다시 보여준다--재현. 이런 재현에서 현실의 다양한 형태, 재현된 현실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재현된 현실이 바로 극장 바깥의 현실을 대신한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재현가능한 것’이 된다. 이때 현실적인 것은 재현의 구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현실들’로 대체되면서, 재현의 대상이 된다. 재현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깥에 둔다. 재현의 극장은 이러한 탈현실화 déréalisa tion의 효과를 생산한다.
이러한 재현구조는 그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재현의 문제로 만든다. 그래서 외부, 즉 극장이 재현하는 ‘현실’은 재현 외부에 남겨둔채 배제된다. 따라서 극장의 내부에서는 현실이 재현으로 대체되고, 현실은 재현의 부재하는 의미로서만 나타난다. 리오따르는 이것을 ‘죽은 신’, ‘거대한 영’에 비유하고 그것이 신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여기에서 현실적인 것은 단지 재현의 ‘부재하는 기원’이다. 그런데 이 기원은 텅빈 것이고, 그 내용은 현실에 관한 다양한 재현들에 의해 확정될 뿐이다. 즉 현실은 부재하는 원인, 텅빈 본질이고, 그것은 그것에 대한 재현들로 구성된다. (물론 이때 어떤 재현도 그것 자체가 유일하고 참된 현실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리오따르는 이러한 재현의 신학이 플라톤에게서 시작된다고 본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의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이 아니라 완전한 이데아이다. 따라서 이데아가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리오따르는 이런 재현장치를 현실과 대비시켜 허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즉 모든 재현의 근거가 현실이고 재현의 그것의 모사일 뿐이라고 보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입장은 현실이 이야기들에 의해 구성되었다면, 그것이 모두 비현실, 허구이어서 모든 것이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객관적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을 모조리 폐기하고 완전한 현실 자체를 세우고, 모든 재현이 그것을 모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들은 재현의 극장을 폐쇄함으로써 현실 자체를 물자체와 같이 알 수 없는 추상으로 만든다.
이처럼 재현이 재현 외부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그런 재현이 특히 바람직하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재현들 가운데 ‘하나’를 현실 자체와 동일하다고 강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리오따르는 현실을 재현하려는 모든 시도가 억압적인 정치학을 만든다고 본다.
리오따르는 재현적 장치가 낳는 효과를 문제삼고 그것이 만드는 신비화를 추적한다. 그는 <<정의에 관해서>>에서 정의를 참된 재현과 동일시하는 (정치적) 시도를 부정한다. 즉, 플라톤의 공화국, 맑스의 공산주의처럼 사물들의 참된 본성에 상응하는 바람직한 것을 재현하거나, 민중의 자각, 소비에트의 자치와 같은 정치적 주체의 자율성을 내세우는 시도를 부정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정초하기 위해 칸트의 반성적 판단의 문제를 논의의 중심에 둔다. 칸트에게서 판단력은 개별자를 보편자에 포섭시키는 심적 능력이다. 즉 개별자들에게 보편성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종합하는 능력이다. 이때 ‘규정적’ 판단력은 보편자가 주어진 상태에서 개별자들을 그것에 포섭시켜 보편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규정적 판단력을 중심에 두는데, 그것은 보편자--인식 주관의 선험적 형식--를 전제하고 개별자들---인식대상의 질료--을 그것에 포섭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을 통해 현상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이루어 진다.
이에 반해 ‘반성적’ 판단력은 보편자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보편자를 이끌어 내야 하는 판단력이다. 이것은 개별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보편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되듯이, 미적 (취미) 판단에서 개별적 미적 대상으로부터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을 끌어내는 것이라든가, 목적론적 판단에서 자연이 실제로 합목적적 질서에 따르는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마치 그런 합목적성이 있는 것처럼 요청하고 자연현상들을 합법칙성에 따르는 것으로 구성하여 보편적 법칙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때 얻어질 보편자는 감각일반을 종합하는 보편적 일치가 아니라 ‘공통’ 감각이거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요청된 (가정된) 것일 뿐이다.
반성적 판단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 없고 ‘개념없이’,보편적 척도 없이 판단한다. 리오따르는 이것을 판단의 일반 형식으로 일반화한다. 이런 틀에 따르면 개별적인 사건은 기존의 척도를 깨뜨리는 것을 낳는다. 그래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보편적 척도가 없는 상태에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반성적 판단의 경우에는 사건을 이해할 방식을 새롭게 고안해야 한다.
리오따르는 정치를 이러한 반성적, 불확정한 판단의 영역으로 본다. 정치는 바람직한 상태에 대한 기술과 그것을 실현시킬 실천을 결합시킨다. 즉 그것은 현실을 변혁시키려는 시도이므로, 현존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것을 명령한다. 이런 시도에 대해 리오따르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바람직한 상태--정의--에 기초를 둔 명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본다. 그는 칸트의 심적 능력에 대한 구별을 참조한다.
칸트는 인식적, 윤리적, 미학적 능력을 구별한다. 칸트에게서 인식능력과 윤리능력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후자는 전자로루터 연역될 수 없다. 윤리능력은 인과성에 의해 규제되지 않고, 경험의 요소도 아니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그것 자체로 정립된다. 이처럼 도덕 법칙은 경험의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als-ob:as-if) 확고하게 설정된다. 도덕법칙은 ‘확실하지’만 이성이나 경험으로부터 연역되거나 확정될 수 없다. 즉 인식능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이런 점을 참조하여 리오따르는 인식의 문장과 윤리의 문장을 분리시키는 심연을 잇는 길이 없다고 본다. 그는 두 영역의 이질성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정당화를 인식적 정당화로 환원시키는데 저항한다.
그는 윤리적 능력을 ‘유비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적용시킨다. 그가 인식능력과 윤리능력 간의 구별을 고수하려는 것은 양자의 차이를 지우고 그것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정치적 전체주의나 변증법 철학)를 부정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렇게 볼 때 ‘정의’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은 이질적이다. (Lyotard, 1979a, 22쪽). 즉, 사실을 記述하는 命題가 ‘참’된 것과 관련되는 것과는 달리, 명령의 수행은 ‘정당한’ 행위를 지향한다. 기술적인 경우에는 인식적, 규정적 판단이, 명령적인 경우에 불확정적, 반성적 판단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정치적 명령은 참에 대한 서술과 공약불가능하다. 명령은 記述的인 것이 아니므로 참/거짓의 기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통합된다고 가정하는데서, 곧 진리가 된 정의를 내세우는 不正義와 정치적 테러, 전체주의가 나온다고 본다.
리오따르는 전체주의가 바로 하나의 이념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법칙이 정확하게 재현될 수 있다는 주장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 지를 알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내세운다. 그것은 논쟁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법칙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회도 그것에 대립하는 어떠한 가능성도 침묵시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부정의에 빠진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리오따르는 “정당한 사회란 없다”고 주장한다.(Lyotard, 1979a, 25쪽)
이렇게 볼 때, 결국 사회의 참된 본성을 기술하고 재현하려는 시도나, 인류의 보편적 주체의 의지나 역사적 필연성의 큰 이야기에 근거를 둔 명령적인 것은 테러를 제도화한다. 그것은 저항과 위반을 축출하고 희생자를 침묵케 한다. 법 바깥에 있는 자들은 비현실적인 존재이고 그들은 말해서는 안된다. 정의가 확정되었으므로 정의에 관한 어떤 논의도 불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테러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저항을 비사회적, 반사회적이라고 낙인찍어 그것을 소멸시켜, 총체성을 강요한다. 재현의 문제로서 정의에 관한 총체적 이해는 그것이 민주적인 것이건 전체주의 적인 것이건 테러적이다. 리오따르는 정의의 억압적 체계를 거부하고 보편적 기준 없는 반성적 판단을 주장하고 정의를 확정하는데 저항한다.
4.차이와 단일성의 철학
리오따르는 <<디페랑 Le Différend(차이-다툼)>>에서 자신의 주장을 언어적 존재론으로 정리한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리비도 경제>>에서 제시한 욕망, <<담론, 형상>>에서 제시한 차이와 이질성을 강조하는 형상(Figure), 말놀이 개념 등을 언어적 소립자인 문장 phrase 으로 대체한다.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관점과 달리 사실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장화된 것 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들이 현실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며, 문장들과 그것들의 집합이 만든 체계가 현실을 대신한다. 이것은 구조주의자들이 언어화된 현실 이전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현실은 언어를 떠나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그것이 언어적 구성의 효과라고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리오따르의 경우는 이러한 보편적 언어 ‘구조’를 거부하는 점이 다르다. 즉 구조주의가 현실을 언어구조로 대체한다면 리오따르는 현실을 보편화될 수 없는 개별적 문장들의 집합으로 대체한다.
각각의 문장phrase은 단일한 것으로 다른 어떤 문장과도 다르다. 이를테면 같은 내용의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에 놓일 수는 없다. 시간적 선후나 공간적 거리를 지닌 문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문장phrase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는 문장들을 ‘문장 단위 régime de phrase’와 ‘담론의 장르genre de discours’로 구별한다. 여기에서 장르는 문장들을 일정한 틀, 질서로 연결시키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문장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내용이 어떠한 점이 아니라, 단순히 ‘문장phrase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장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책이 있다’란 문장은 실제로 책이 있다는 사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문장들로 제시된다. 리오따르는 이런 문장들의 존재를 통해 문장들에 앞선다고 여겨지는 현실, 즉 문장의 보편적 근거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문장들이 제시한 현실만이 있다고 본다.
문장들은 다수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일련의 계열을 이룬다. 그래서 각 문장은 문장들의 우주를 제시한다. 문장들이 있고 한 문장이 발생하면 다른 문장이 뒤를 잇는다. 이것은 종합되지 않는 무한한 계열을 이룬다. 이를테면 ‘책이 있다’란 문장에 대해 ‘책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도 문장이고, ‘책이 있다는 문장이 틀렸다’도 문장이다. 그리고 ‘문장들만 있다’도 문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의 연쇄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이다’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장이다.
이처럼 문장들이 계열을 이룬다는 것은 그 문장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얘기이다. 즉 각 문장은 다음의, 자기와 다른 문장과 연결된다. 그래서 한 문장에 이어 다른 문장이 오는 점은 불가피하다. 즉, 그것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리오따르는 이러한 연결에서 근본적인 우연성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즉 한 문장 다음에 오는 문장이 무엇인가는 근본적으로 우연적이다. “문장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지만, 어떻게 연결되는가는 필연적이지 않다”(Lyotard,1983,52; 103; 122)
연결의 우연성은 많은 문장들이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정한 시간에 오직 한 문장만이 선택될 수 있다. 대부분의 다른 문장들은 망각되거나 억압된다.
리오따르는 이런 문장들의 연결이 현실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문장이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리오따르는 현실도, 주체도 문장에 독립적이지 않으며, 그것들이 문장에 앞서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현실은 문장에 의해 자리매김된 지시대상을 뜻한다. 주체도 문장에 의해 자리매김된다. 현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아니고, 문장이 제시됨으로써 분석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체, 현실, 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문장들의 연결이 낳는 효과이다.
문장들은 그것들의 상황인 한 ‘우주’를 형성한다. 문장은 항상 ‘하나의’문장, ‘이’ 문장, 단일한 발생이거나 사건이다. 문장은 ‘지금’ 생긴다. 이것은 한 문장이 단일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문장들이 공존한다.
그런데 문장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한 문장을 연결시키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문장을 배제해야 하므로, 각 문장은 서로 경쟁한다. 이러한 경쟁관계에서 연결은 갈등을 일으킨다. 문장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이루어지면 다른 모든 연결은 ‘무시되고, 잊혀진 채로, 억압된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리오따르는 모든 문장이 디페랑Différend(차이-다툼)의 장소라고 본다. 다수의 연결이 가능하지만 특정한 시간에 오직 하나만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를 고르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억누르는 것이다. 따라서 연결의 우연성은 항상 디페랑을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서 다툼을 피할 수 없다. 또한 그것들을 규제할 보편적인 담론의 장르란 없다.
리오따르는 이런 다툼을 설명하기 위해 디페랑différend(차이-다툼)을 소송litigation과 구별한다. 소송은 단일하고 확정적인 판단 규칙을 전제한다. 소송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서로 다투지만 그들 모두가 ‘같은’ 규칙, 판단을 말하고 같은 법을 인정하고 그것에 비추어 자신이 정당하다고 다툰다. 이와 달리 디페랑에서는 다툼의 상대방은 두가지 근본적으로 상이한 관용어로 말한다.
예를 들면 체제에 저항하는 사상범이나 원시인과 문명인의 다툼은 서로 이질적인, 공약 불가능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다툼의 양쪽을 종합할 수 없다. 양자의 합의는 대개 폭력으로 끝맺는다. 이처럼 디페랑은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거나 공약불가능한 규칙 사이의 다툼이다. 그것은 공평하게 결정될 수 없는 갈등이다. 한 주장이 정당하다고 해서, 다른 쪽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주장이 모두 정당하거나 양립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는 이런 다툼의 상황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할 수도 없다고 본다. 변증법은 이것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담론의 ‘장르’는 문장들을 연결, 조직하는 일정한 양식이다. 장르는 상이한 문장의 단위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올바른, 권위있는 연결을 확정할 ‘보편적’ 장르란 없다. 물론 이때 연결의 우연성을 극복할 보편적 지반으로 ‘현실’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가능한 여러가지 장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리오따르는 현실적인 것이 특정한 연결 장르의 효과에 지나지 않으며, 디페랑이 출현하는 장이라고 본다. 현실은 모든 문장이 판단될 수 있는 근거가 아니고, 연결의 적합함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리오따르는 하버마스와 달리 의사소통적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실적인 것에 관한 합의는 항상 디페랑에 마주쳐서 불안정, 불확정, 일시적이다.
이것을 이름으로 설명해 보자. 즉, 세계는 이름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은 그것이 지칭하는 점에서 지칭사와 같지만 고정된 대상을 가리킨다. 이름은 상이한 문장들에서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 이름은 ‘고정된 지시사(rigid designator)--크립키의 용어--로서, 절대적 단일성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름은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고 텅빈 것이다. 그것들에는 예측할 수 없는 무한한 수의 기술이 부착될 수 있다. (Lyotard, 1983, 74절) 이때 이름에 부착될 수 있을 모든 의미들을 다 열거할 수 없다. 이를테면 ‘리오따르’, ‘하버마스’,‘박정희’란 이름의 지시대상은 완전하게 기술될 수 있는 본질이 아니다. 이것은 그 당사자들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름의 의미는 결코 확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합의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이름은 고정되지만 공허한 것이고, 그 의미나 화용적 상황에서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이질성, 공통의 관용어의 결여, 부재가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리오따르는 앞에서는 포스트 모던 예술에 차이와 이질성의 수호란 직책을 맡겼는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특성을 철학이란 장르에 부여한다. 즉 총체성과 싸우는 포스트 모던 철학은 메타이야기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험적 장르이며, 기준이 없는 판단의 장르로서, ‘단일성’에 적합한 규칙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규칙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건을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 철학은 디페랑을 포착하고, 반리적 실험을 실천하고, 새로운 관용어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언어게임을 억압하지 않는 연결을 추구한다. 물론 이것은 칸트의 반성적 판단을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리오따르는 문장 단위의 이질적 차이, 연결의 우연성, 그에 따른 다툼을 강조하는데, 이런 성격을 위협하고 차이와 이질성, 단일성을 제거하려는 규범적 장르, 정치적 장르를 비판한다.
규범적 장르는, “x는 행위a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y가 선언한다“란 형태로 나타난다. (155절,146) 이런 규범적 문장은 그 안에 명령적 문장을 포함하므로 차이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구별하지만 ,수신자의 위치를 발신자의 위치로 옮겨 놓는다. (이것은 수신자에게 ‘자율’이란 환상을 준다)
규범적 문장의 문법은 ‘우리’의 동일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대명사 ‘우리’는 나, 너의 차이를 지우려 한다. 아우슈비츠의 예에서 보듯이 나치가 ‘우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 속하지 않는 ‘너희들’을 배타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때 ‘너희들’은 우리가 ‘우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문장( ‘나의 법은 그/그녀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과 수용소의 포로들의 문장(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그의 법이다’)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이 두 문장을 동시에 정당화하거나 화해시킬 수는 없다.
또한 정치적 장르의 성격을 살펴보자. 정치적인 것은 단위의 이질성을 은폐한다. (207절) 앞에서 본 문장, ‘“x는 행위a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y가 선언한다‘을 보자. 이 규범적 문장은 모두가 그 법칙에 예속되는 수신자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런 선언은 그 수신자를 그것이 규범화하는 명령을 수행하는 수신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 법칙에 예속된 자들의 공동체 외부에 두번째 수신자 z 를 갖는다. 이때 두 종류의 수신자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고유명이 주어지는 데 의존한다(이를테면 ‘우리는 한국인’, ‘너희는 쪽발이’, 또는 우리는 內地人, 너희들은 朝鮮人). 이처럼 규범이 명령을 정당화하면서 특정한 공동체의 정당성을 제약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잠재적으로) 폭력적이다. 이를테면 제국주의적 확장은 z가 x에 포함되고, 나아가 y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상정하거나, z(나치에 대한 유대인)가 이상적으로 망각되거나 경험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태도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앞서 보았던 정의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살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정의는 재현적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이상’이다. 그것은 필연적이지만 불확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미리 어떤 것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래에 남겨져 있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정의의 조건은 정의의 ‘불확정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을 상대주의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불확정’ 판단과 판단에 관한 ‘상대주의적 거부’는 다르다. 상대주의는 모든 판단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다원주의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리오따르는 사건의 단일성, 디페랑의 공약불가능성은 기준없는 판단을 요구한다. 반성적 판단에서 기준이 없다는 점이 반드시 모든 것을 허용하는 상대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다.
리오따르의 입장은 다원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적 입장은 정의의 이상을 단지 정의에 관해 얘기된 것들의 총체로 여긴다. 그것은 만약 법칙이 재현될 수 없다면 (하나의 정의가 아니라 부분적이거나 서로 다투는 여러 정의만 있다면) 정의에 관해 얘기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가 법칙을 재현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정당한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리오따르는 ‘정의의 이상’이라는 ‘의무’를 져야 한다고 본다. 비록 그 이상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정당한 것의 본성에 관한 논의는 유지될 필요가 있다.
물론 기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판단은 다시 판단되어야 한다. 궁극적인 판단에 이를 수 없고, 그때마다 계속해서 다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이 판단 과정은 지속적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정당한 판단은 없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선한 판단, 올바른 연결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연결시켜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정의의 불확정적 이상이다. 그것은 디페랑, 재현불가능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연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리오따르는 현실이 문장의 올바른 연결을 위한 질서를 제공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이런 현실이라는 지고한 심판관의 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는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재검토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예를 문제삼는다. 그는 포리송이 나치의 가스실을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 점에 주목한다. 이 주장은 역사적 현실과 그것을 설정하는데 쓰이는 규칙들--역사적 사실에서 타당성의 기초를 둔--의 기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포리송Faurisson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한 가스실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제시하거나 증명할 수 없다. 그는 수용소의 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 그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본 사람을 요구한다. 만약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다면 그런 것이 믿을 수 있고 역사적 타당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장소가 가스실임을 확인하는 그의 논증을 나는 이 가스실의 희생자로서만 중거할 때에 받아들인다. (가스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나의 적에 따르면 오직 죽은 희생자들만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가스실은 그가 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Lyotard, 1983, 16-7)
포리송은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희생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희생자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이 침묵은 기호이다. 이것은 역사적 장르로 나타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기호이다. 이 기호들은 인식 단위로 검증가능한 의미로 규정되는 지시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기호는 어떤 것이 관용어로 문장화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문장화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인 기호는 존속한다. (Lyotard, 1983, 91) 리오따르는 역사가의 의무가 이 침묵을 듣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으로 본다. (같은 책, 92) 이것은 인식할 수 없는 의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때 과학적 의미화냐 그것을 버리는 부조리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불확정을 드러내는 침묵은 의미들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리서치, 기록, 검증가능한 논증이나 주장에 근거를 둔 역사적 장르가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불충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점이 이 침묵을 문제삼을 수 없도록 하지는 않는다. 리오따르는 다른 접근 방식을 찾는다. 사실 속에 숨겨진 이 침묵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리오따르는 이 점에서 인식에 우선권을 두는 입장을 물리치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는 이를 위해 칸트(그에게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의 칸트이다)를 새롭게 읽는다. 그는 칸트의 반성적 판단, 미적 판단과 칸트가 프랑스혁명이란 역사적 기호를 통해 이념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 가를 검토한다. 먼저 그는 칸트가 심적 능력을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서로 이질적인 것들로 본 점에 주목한다.
칸트는 인식적, 윤리적, 미학적 능력을 구별한다. 이때 어느 하나로부터 다른 것을 연역할 수는 없다. 리오따르는 이런 능력들의 이질성에 중점을 둔다. 칸트에게서 인식능력과 윤리능력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윤리능력은 인과성에 의해 규제되지 않고, 경험의 요소도 아니다. 곧 실천이성에서 도덕 법칙의 객관적 실재는 어떤 연역을 통해서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지지된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확증될 수 없다. 이것은 도덕법칙이 그것 자체로 정립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도덕 법칙은 경험의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als-ob:as-if) 확고하게 설정된다. 리오따르는 도덕법칙이란 ‘유사-사실’에 관심을 갖는다. 도덕법칙은 ‘확실하지’만 이성이나 경험으로부터 연역되거나 확정될 수 없다. 즉 인식능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칸트에게서 도덕적 주체는 이런 존재의 증명가능한 증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 의무를 수용한다.
리오따르는 인식의 문장과 윤리의 문장을 분리시키는 심연을 가로질러 그것을 잇는 길을 제안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두 영역의 이질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윤리적 정당화를 인식적 정당화로 환원시키는데 저항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윤리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문제는 느낌, 기호, 類比로 남아 있다.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환기될 뿐이다. 그는 이것을 이념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이념은 어떤 대상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과 다르다. 이념은 현실적 존재라기 보다는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지는 (als-ob)’ 것이다.
리오따르는 칸트가 프랑스 혁명을 보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 혁명은 참여자가 아니라 칸트같은 관찰자에게는 ‘기호’이다. 그는 갈등 바깥에 있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공평무사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개인적이거나 당파적이라기 보다는 보편적 입장에 선다. 이것은 미적 판단에서 유용성과 利害를 벗어나는 것과 같다.
미학적 판단은 주어져 있는 보편적 원칙을 적용하여 개별성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찾는 것이다. 미적인 것은 그 대상에 관한 인식이나 결정된 규칙이 없는 판단 형식이다. 리오따르는 미가 대상 자체의 성질이 아니고, 규정될 수 없다는 측면에 주목한다. “미적 대상”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이처럼 판단을 위한 미리 주어진 모델이 없으므로 판단의 이율배반(디페랑)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그 개념이 오성의 선험적 원리로부터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리오따르는 이러한 미학적 판단이 근본적, 우선적이라고 주장한다.
리오따르는 ‘유비추리’를 통해서 역사-정치적 대상을 이런 판단 형식에 연결시킨다. 미학적 영역에서 비판적 판단은 보여지거나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이를테면 예술 대상의 특성을 지각하고, 계산하고, 측정하고, 규정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별개이다. 미학적 대상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의 형식을 지각할 수 있지만 그 형식의 미는 지각가능하지 않다. (Lyotard, 1983,192) 마찬가지로 역사-정치적 영역에서 현상들을 지각하고, 모으고, 평가하고, 이해하는 것과 한 행위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 가를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Carroll, 178 참조) 리오따르는 이러한 유비를 통해서 정치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미학적 관조자처럼 그가 숙고하는 모든 대상에서 그 자신이 모든 이해로부터 벗어난 비판적 과정을 모색한다. 역사의 관찰자는 모든 개인적 이해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의 혁명참여자에 대한 ‘공감’은 보편적이고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혁명의 역사적 진리는 어떻게 특정한 조건에서 사건에 관한 어떤 느낌이 진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이때 진보라는 이념은 개념으로 제시될 수 없다. 단지 느껴질 수 있을 있거나 ‘기호들’을 통해 환기될 뿐이다. 그는 이 느낌을 ‘숭고한 것’에 대한 느낌과 연결시킨다.
파도치는 大洋이나 거대한 山河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장대함으로 우리에게 숭고의 감정을 유발하는데, 이 것은 그 양적 크기로 우리를 압도한다. 그것은 무한성, 인식할 수 없는 것의 이념의 기호로 나타난다. 칸트는 이러한 숭고함이 공포와 동시에 쾌락을 준다고 본다 (리오따르는 이런 이질적이고 상반된 느낌의 공존에 주목한다).
칸트는 인류가 ‘진보해 나가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혁명애서 (쟈코뱅에 의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시할 수 없는 자유의 이념’을 제시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적 방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떤 확정된 대상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집단학살의 범죄의 비열함과 그러한 죄악을 제안(암시)하는 자유의 이념의 고상함 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데서 나온다. (Lyotard, 1983,112)
혁명의 참여자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공화국의 형식을 ‘인간공동체의 이념’과 동일시하는 ‘정치적 환상’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화국에 대립되는 자들에 대항해서 특정한 형식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또한 그것과 다른 형식을 옹호하는 자들에 대항한다. 그런데 자기들이 추구하는 그 형식 자체가 보편성, 곧 이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떠한 확정된 대상도 그것을 제시할 수 없기 떄문이다. 그들이 실현시키는 것은 항상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다.
이런 실패로부터 중립적 관찰자는 그것의 실패와 동시에 그것의 무한한 이념에 대한 추구를 본다. 관찰자는 혁명적 열정에서 숭고한 것의 양면성을 본다. 우리를 압도하고 표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거대한 바다나 산맥이 무한한 이념을 제시하는 기호이듯이 진행과정을 보면서 그것이 진보, 인간공동체, 자유란 무한한 이념을 지시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 혁명적 열정에 공감한다.
(진보, 공동체, 자유) 이념들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없다. 이것은 이념들이 미래를 지시대상으로 갖기 때문이다. 만약 진보, 공동체, 정의에 대한 이념이 어리석은 요구이거나 환상이 아니라면, 그런 이념들은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으로는 지적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그 진보의 원인(Ursache)이거나 저자(Urheber)일 수 없고, 단지 진보를 지시(hinweisen)할 뿐이다. (같은 책, 236)
만약 미학적 판단에서 환기될 보편성이 합의가 아니라 ‘공통감각’이라면, 숭고함에 의해 예견된 보편성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숭고함에서 구상력(상상력)은 이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그 실패가 고통을 낳지만, 어떤 직관적 제시를 넘어서는 이념을 인식하는 능력을 느끼게 된다. (혁명적) 열정은 숭고의 극단적 형식이다. 그것은 “재현불가능한” 무한한 것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실제로는 재현불가능한 것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다만 그것이 제시될 수 없다는 것 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념의 거대함은 그것이 수반하는 고통 때문에 더욱 강렬하고 더욱 강한 쾌락으로 느껴진다.(같은 책, 238) 마찬가지로 ‘인류의 이념’은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경험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리오따르는 비판적 정치학의 과제에 주목한다. 그것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 즉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이 미래의 인류공동체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같은 책, 238-9)
리오따르는 이러한 점을 통해 자신의 차이의 정치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칸트의 공동체 이념의 간접적 제시가 갖는 장점은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확정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추구가 더욱 강한 것으로 느껴지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요구로 머무른다. 그리고 공동체가 취해야만 하는 형식이 인식의 문제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요구는 (거기에)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규칙도 없이 항상적이다. 그 요구는 모든 규칙의 한계를 드러내고, 규칙들을 넘어서야 할 필연성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공동체 형식에 관한 의견의 차이, 갈등, 논쟁을 낳지만 그런 차이가 공동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리오따르가 볼 때 공동체에 대한 실제적 위협은 국가, 사회, 계급, 당. 집단이 참된 공동체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사회에 대한 이러한 이념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은 테러를 정당화한다.
리오따르는 이념을 확정하고 실현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차이와 이질성을 제거하려는 전체주의적 시도로 못박는다. 그는 이에 대해 차이, 다툼, 이질성의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이념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거나 중립적인 것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판단들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다시 행해져야 하는데, 이때 중립성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모든 판단이 다툼을 야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보의 기호들은 정치적 비관주의와 유토피아적 낙관주의 모두가 근거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진보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다. 현재의 불의에 의해 전적으로 배제된 것도 아니고, 과거와의 차이들에 의해 확립된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을 하는 리오따르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리오따르는 어떠한 정치적 목표나 대안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정치적 해결책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어떤 법정이 제시하는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무정부주의로 보일 수도 있다. 그는 혁명적 정치학은 기존의 법정과는 다른 새로운 법정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새로운 정의를 내세우면서 기존의 정의보다 더 정당한 것을 폭력과 전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는 그것들이 디페랑을 소송으로 은폐하지 않는 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그런데 일단 그런 정의로운 법정이 제도화되면 그 법정은 디페랑을 소송으로 은폐하게 된다. 그는 포퍼를 연상시키는 구절로 “더 적은 악이 정치적 선이 되어야 한다” (Lyotard,1983,197절)고 자제한다. 물론 그는 포퍼처럼 자유민주주의에 도취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단위의 이질성과 장르의 공약불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리오따르는 정의가 성취된 상태도, 성취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고 본다.
헤겔이 “전체는 진리이다‘라고 한데 대해 아도르노가 ‘전체는 비진리이다’라고 한 것처럼, 리오따르는 ‘전체는 억압이다’라고 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총체성에 대해서 전쟁, 특히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이론적 전사이다.
맺는 말
이러한 리오따르의 논의는 그것이 긍정적인 제시가 아니라 부정적인 해체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기가 쉽지가 않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해체 논리가 정당화될 수 있는 가를 검토할 수는 있다. 여기에서는 본격적인 비판보다는 그의 해체 논리가 의심을 제기하지 않거나 정당회되기 어려운 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그의 논의를 거칠게 정리하면 두가지 주장으로 요약된다,
1)진리는 없다; 총체적 진리는 없다; 모든 것은 이야기이다. 자신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담론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2)보편적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정의는 확정되거나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총체적 진리와 보편적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문제르 제기하기로 하자. 먼저 진리(동일성, 총체성)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적 논리들이 갖는 역설을 지적할 수있다. 이것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장이다’라고 하는 어떤 크레타인의 말처럼 역설을 지닌다. 리오따르의 주장을 명제화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진리는 없다’
2)‘진리는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3)‘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이므로 처음의 ‘진리는 없다’는 명제는 진리가 아니다.
(3-1)‘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이므로 처음의 ‘진리는 없다’는 명제는 ‘진리는 없다’는 명제를 제외한 것들에만 해당될 뿐이다.)
4)‘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이므로 처음의 ‘진리는 없다’는 명제는 진리가 아님이 진리이다.
이것은 3)처럼 반박되거나, 3-1)처럼 수정되어야 한다. 전자의 계열에서서는 앞의 명제를 계속 반박하는 악순환, 1),2),3)을 단위로 순환하게 된다. 3-1)계열을 따르는 경우에는 계속 예외를 만들면서 처음의 명제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두번재로 리오따르는 모든 진리 담론이 이야기(큰 이야기)에 정당화 기초를 두고 있고 이야기와 진리가 구별되지 않으며, 진리를 주장하는 이야기도 하나의 이야기라고 본다. 이것은 모든 로고스(logos)를 뮈토스(mythos)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그것이 인식론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명제인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모든 것이 이야기라면 이야기에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그리고 이런 점 외에도 ‘모든 것은 이야기이다’라는 명제도 이야기이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집합론의 역설을 지닌다. 즉 자기를 원소로 하지 않는 집합에 자기가 포함되고 만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 명제를 이야기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메타언어로 보면 리오따르 자신의 명제가 가장 높은 층위를 차지하면서 바로 자신이 부정한 큰 이야기를 다시 상정하게 된다. 굳이 리오따르의 이런 명제가 의미가 있다면 진리를 주장하는 명제를 해체시키는 전략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다음으로 정의의 이념에 대한 그의 주장도 문제가 된다. 즉 보편적 정의는 특수한 실천에서 특수화되고 그 특수성은 부정되어 다시 새로운 특수화를 낳고 그것이 앞의 것을 無化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과 특수의 상호이행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무한히 게속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 필요도 없다). 리오따르의 명제는 양 계기의 이질성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종합도 없는 보편--특수의 부정적 변증법을 제시한다. 이러한 보편은 칸트의 물자체처럼 한게 개념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어떤 실현에서도 남김없이 드러나거나 구현되지 않는다. 보편과 특수의 무한한 상호이행은 그것이 보편이 특수로 실현되고 특수가 보편으로 고양되지 않는 한 무한한 악순환, 영원한 회귀를 이룬다. 그렇다면 이런 순환의 추동력은 무엇이고, 왜 그런 순환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틀이어야 하는가?
리오따르는 부재하는 보편성이라는 이념을 단지 특정화된 이념, 부분적으로 실현된 이념이라는 구체적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으로 본다. 모든 것을 진리에 포섭하는 동일성의 철학이 형이상학이라면 모든 것을 차이로 설명하는 체계 역시 형이상학에 기초를 두는데, 그것은 (니체나 끌로로소프스키가 말하듯이) 진리의 놀이에 맞서는 해체, 위반, 전복, 차이의 놀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주요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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