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적’ 이성에게는 다소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죽음’․ ‘주체의 해체’․‘철학 혹은 계몽의 종말’등과 같은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된 사명은 ‘보편적 이성의 분산’․‘통일적 혹은 사변적 주체의 해체’․‘총체적 체계의 분해’를 통해 ‘이성의 변별성’․‘주체의 다양성’․‘체계의 이질성’을 강조하고, 이로써 억압되고 소외된 것을 복권시키고,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창안해내는 데에 있다. ‘회의의 대가’라고 불리워지는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사상적 전통속에서 사유의 나래를 폈던 프랑스의 푸코․데리다․라캉․알튀세․들뢰즈와 더불어 리오타르(J-F, Lyotard)는 철학의 영역에서는 최초로 ‘포스트모던’(postmoder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모던적 사유 양식의 전도를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19세기 말부터 과학․문학․예술의 게임규칙에 영향을 준 변형들 이후의 문화 상황․의식 상태․삶의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미국의 사회학자 및 비평가들의 입장을 수용하고, 동시에 이를 더욱 극단화시켜 “포스트모던이란 메타 이야기(métarécit)에 대한 불신”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반면에 ‘모던’(moderne)이란 메타 이야기 혹은 거대 이야기(grand récit)라는 정당화 담론(discours de légitimation)에 의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유 및 행위 양식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물질이 정신을 규정한다고 말함으로써 유심론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함으로써 신 및 이성 중심주의에,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의식주의에 각각 종말을 고하면서 기존의 사유양식을 거부한 태도를 탈정당화(délégitimation)의 씨앗으로 보면서, 리오타르는 선진 산업사회․정보화 사회․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이런 정당화 담론에 대한 탈정당화 과정이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한다.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정당화 담론으로서의 거대 이야기 혹은 메타 이야기는, 사랑을 통해 아담이 저지른 죄로 부터 해방된다는 ‘기독교적 이야기’, 지식과 평등주의에 의해서 무지와 예속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계몽의 이야기’,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에 의해 보편적 이념을 실현하는 ‘사변적 이야기’,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서 착취와 소외로 부터 해방된다는 ‘마르크스적 이야기’, 기술산업적 발전을 통해서 빈곤으로 부터 해방된다는 ‘자본주의적 이야기’등이며,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보편적 자유와 전 인류의 해방’이라는 ‘모던의 기획’(projet moderne)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속에서 이런 거대 이야기가 더 이상 신뢰될 수 없다는 것 혹은 모던적 주체가 소멸(la défaillance du sujet moderne)했다는 것을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즉,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것”이라는 헤겔적인 사변적 이야기는 아우슈비츠에 의해 거부되었고, “프로레타라아적인 것은 공산주의적인 것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프로레타라아적인 것”이라는 마르크스적인 사적 유물론 이야기는 노동자와 당이 대립된 1953년 베를린, 56년 부다페스트, 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민주적인 것은 국민에 의한 것이고, 국민에 의한 것은 민주적인 것”이라는 의회자유주의적 이야기는 사회적 일상이 대변적 제도를 와해시킨 프랑스 68년 5월 혁명에 의해 설득력이 상실되었으며,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전반적인 번영을 약속하며, 전반적인 번영은 수요와 공급을 자유롭게 한다”는 경제 자유주의적 이야기는 1911년과 1929년 경제위기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와 해방이라는 계몽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보편성․절대성․통일성․전체성을 축으로 해서 개별성․구체성․다양성․상대성을 포섭하고 평가하면서 정당화하는 모던의 기획과는 달리,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도하는 것은 개별자들간의 불일치(paralogie)와 차이(différence) 자체에 대한 인정이다. 동일성의 철학 혹은 전체주의적 입장에 근거한 저 모던의 기획이 종국적으로 초래한 것은 그것이 목표로 한 인류의 해방이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아우슈비츠와 같은 인류의 파멸이기 때문에, 이제는 인류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고유명사가 중요시 되는 또 고유명사들간의 차이성이 존중되는 포스트모던적 정의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자신이 구상하는 ‘차이의 철학’이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지를 보여줄 때, 그는 소피스트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의 분리, 파스칼의 세가지 질서의 확립을 거쳐 칸트의 이론적․도덕적․미학적․정치적 이성의 구분 및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의 다양성의 강조를 제시하고 있다. 통일이나 통합의 사상과 대립되는 ‘분리’(séperation)와 ‘분산’(dispersion)의 사유를 전개하는 사상을 리오타르는 과감히 수용하고, 특히 칸트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모더니티의 에필로그이자 ‘진정한’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é honorable)의 프롤로그라고 생각한다.
리오타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조우, 이는 20세기 초반 비엔나 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에서 부터 활기를 띤 언어철학이 사실상 20세기 서양 철학사 대부분을 장식했다는 것을 환기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언어 분석철학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도 의식이나 사물 자체에 대한 고찰보다는 언어의 현상이나 구조를 탐구함으로써 의식과 세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언어적 전환’(tournant langagier)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입장이 리오타르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인 지식의 위상을 검토한 ?포스트모던적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주저라고 밝힌 ?분쟁?(Le différend)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거의 열광적인 찬사를 아끼고 있지 않으며, 마침내 “비트겐슈타인, 이후”(Wittgenstein, ‘après’)라는 글을 발표하기에 이르고 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 학파가 발전시켰던 실증주의의 측면에서 출발하지 않고, 언어게임의 탐구속에서 수행성과는 다른 종류의 정당화의 관점을 제시한 것은 그의 강인함 덕분이었다. 포스트모던적 세계는 바로 이런 강인함을 상대로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트겐슈타인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관성을 피력하고 있는가 하면, ?분쟁?에서는 언어게임의 다양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견지하는 담론장르들간의 불일치․분쟁․분산의 사유방식과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에서는 “(칸트의)능력 비판처럼, (비트겐슈타인의)언어게임에 대한 검토는 언어들간의 분리를 확증하고 심화시킨다. 언어의 통일성(unité du langage)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언어섬들(îlots de langage)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들 각각은 서로 다른 규칙체계에 의해 지배되고,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번역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언어의 분산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며,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문장의 규칙체계가 다른 것을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리오타르는 말하고 있다. 이때 그는 ?철학적 탐구? 110장에 나타나는 “이 언어(혹은 이 사상)가 유일한 것이다-이것은 미신으로(오류가 아니다!)판명되는, 문법적 환상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편적 언어․메타언어를 주장하는 입장이 문법적 환상(illusion grammaticale)에서 비롯되는 것과 같이 보편적 이성․메타 이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초월적 환상’(illusion transcendantale)의 산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전통에 대해 과감한 단절을 선언하는 강인성, 이성 및 언어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유감 표명이 칸트의 능력 비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비판 그리고 문화 비판으로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내적 연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
2. 언어게임과 포스트모던적 지식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모더니티, 즉 해방과 진보의 모더니티이다. 아마도 데카르트 이래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된 물질적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가장 신뢰할 만한 패러다임으로 간주된 기계론적 자연관이 이 모더니티속에 함축되어 있다. 미신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아울러 인간의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념이 여타 이성이나 지식중에서 과학적․분석적인 이성 및 기술 과학적 지식을 독보적인 존재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과학적 잣대에 벗어나 있는 것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룩되고 난 후, 과학적 패러다임이 구체적이고 다양한 인간의 삶의 세계를 모두 해명할 수 있는지 혹은 도구적 이성의 전횡이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 즉 ‘인간의 위기’라는 반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후설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방법론적인 차이는 있지만-인간의 위기에 대한 반성적 극복을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리오타르는 선진 산업사회에서 혹은 포스트모던적 문화속에서 지식이 이제 어떻게 이해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지를 고찰한다. 지금의 조건속에서 지식은 고전적인 지식-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절대 확실한 지식) 및 인격의 도야와 밀접하게 결부된 지식-혹은 근대 기술과학적인 도구적 지식과는 상당히 다른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런 지식이 산출되는 사회의 유대이론을 먼저 검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식이 산출되는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지식의 현주소 즉 지식의 발전 및 확산이 오늘날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유대이론 및 지식의 위상을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 의거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언어게임을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립을 위한 방법론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리오타르는 각각의 다양한 종류의 진술은 그 특성과 가능적 활용을 명시하는 규칙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주목한다. 첫째, 규칙은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게임자들간의 명시적․암묵적인 계약의 대상이며, 둘째는 규칙이 없다면 게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 규칙의 미세한 변형조차도 게임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진술 혹은 활동은 규칙에 의해 규정되는 게임에 속하지 않으며, 세째는 모든 진술은 게임에서 행해진 활동(coup)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언어게임의 특성을 토대로 리오타르는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능케 하는 두가지 원리, 즉 “말한다(parler)는 것은 게임이라는 의미에서 전투함(combattre)이며, 언술활동(les actes de langage)은 일반적 투기(agonistique générale)에 속한다”는 것을 제1원리로, “관찰 가능한 사회적 유대은 언술적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2원리로 정립한다.
이와같은 언어의 사실성 및 화용성(pragmatique)을 근거로 리오타르는 사회를 유기적 단일체로 파악하는 파슨스적 기능주의, 계급투쟁의 원리에 따라 사회를 양분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적 사회이론을 ‘모던적’인 사회유대 이론으로 간주․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적 사회유대는 상이한 언술주체가 수행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상호 투기적인 언술활동 혹은 언어게임에 의해 형성된다. 예컨대, 사회적 유대가 어떻게 형성되는 지를 묻는 이 물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언어게임, 즉 질문하는 자(발화자), 질문을 받는자(수화자) 그리고 사회유대라는 질문 대상(지시체)을 즉각적으로 위치시키는 질문의 게임이며, 따라서 이 질문의 게임에 의해 사회유대는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화용론은 지시적․규정적․기술적․평가적․미학적 등등의 이질적인 진술들이 상호 얽힘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괴물(monstre)이며, 그래서 사회유대는 이런 다양한 진술들을 발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원자들’(atomes),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관계 조직망(texture)속에 놓여 있는 혹은 다양한 종류의 메시지들이 통과하는 교차점(carrefours)에 위치해 있는 ‘자기’(soi)들의 상호 투기적인 화용론적 언어활동에 의해 형성된다고 리오타르는 주장한다.
그래서 “언어게임은 사회 성립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관계”이며, 사회 체계의 질료를 구성하는 것은 원자들의 상호 투기적 언어게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리오타르는 ‘의사소통 이론’(la théorie de la communication)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의사 소통이론이 언술활동을 선동적인 말이나 메시지의 일방적인 전달 혹은 자유로운 표현이나 대화라는 전통적인 대안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두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바, 첫째는 메시지의 기능이 정보 전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지시적․규범적․평가적․기술적등등임에 따라 아주 상이한 형태와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메시지의 기능을 단지 정보 전달에 국한시키는 것은 곧 체계의 관점과 그 고유한 관심을 부당하게 특권화시키는 전망을 채택하는 것이다. 둘째로 정보 이론은 언어의 투기적 관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들은 화용론적 관계의 교차점에 놓여 있지만, 지속적인 운동으로 교차점을 통과하는 메시지에 의해 위치가 변경된다. 다시 말해서 언어 파트너는 자신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자리 변경을 감수하는데, 이는 하나의 활동은 그것과 대립된 활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담화의 일상적 사용, 예컨대 두 친구간의 토론에서 대화자들은 한 진술에서 다른 진술로 게임을 바꾸면서 무엇인건 닥치는 대로 진술을 활용한다. 질문․간청․단언․이야기는 뒤죽박죽 전투속에 던져진다. 이 전투는 규칙없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규칙은 진술들의 최대 유연성을 용인하고 촉진시킨다”.
거대 이야기의 기능이 지시적, 규정적, 기술적 언어 등의 요소로 형성된 구름속으로 분산되고, 이것들 각각이 자기 고유의 화용론적 원자가를 수행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이런 것들의 교차점에 놓여 있고, 필연적으로 안정된 언어적 결합할 수도 없으며, 우리가 형성하는 언어의 속성이 반드시 의사소통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사회는 구조주의나 체계 이론처럼 뉴턴적 인류학이 아닌 언어 입자들의 화용론에 의존한다. 이질적인 언어게임들이 제도에게 모자이크적인 ‘국부적 결정론’(déterminisme local)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오타르는 사회적 유대를 포스트모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이론 뿐만 아니라 투기를 전제로 하는 게임이론이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질적인 언어게임 혹은 투기적 언술활동을 근거로 포스트모던적 사회유대 이론을 정립하고 난 뒤, 리오타르는 마찬가지로 언어게임의 이질성에 착안하여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지식 일반’(savoir en général)이 지니고 있는 내재적 차이, 즉 ‘이야기적 지식’(savoir narratif)과 ‘과학적 지식’(savoir scientifique)을 소개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지식 일반은 다른 모든 진술을 배제하면서 대상을 지시 혹은 기술하는 진술이자, 참과 거짓으로 언표될 수 있는 진술들의 총체인 ‘과학(science) 혹은 인식(connaissance)’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지식 혹은 앎은 지시적 진술의 총체(un ensemble d'énoncés dénotatifs)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할 줄 앎’(savoir-faire)․‘생활할 줄 앎’(savoir-vivre)․‘경청할 줄 앎’(savoir-écouter)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유일한 기준뿐만 아니라, 효율(기술적 자격), 정의와/또는 행복(윤리적 지혜), 유성적․색채적 아름다움(청각적․시각적 감수성)등의 기준까지도 규정하고 적용하는 능력(compétence)이 문제가 된다. 이렇게 이해된 지식은 누군가로 하여금 ‘적합한’(bon) 지시적 진술뿐만 아니라 ‘적합한’ 규범적 진술․‘적합한’ 평가적 진술등을 발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식은 다른 종류의 진술을 배제하면서 인지적 진술과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진술에 관한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지식은 다양한 담론적 대상에 대하여 ‘적합한’ 수행들(performances), 즉 인식하기․결정하기․평가하기․변화하기 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지시적 진술을 적합하게 수행하는 이론적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진술․미학적 진술․정치적 진술을 적합하게 수행하는 도덕적․미학적․정치적 능력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은 능력들의 포괄적 ‘교화’와 일치하며,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류의 능력들로 이루어진 주체속에 구현된 독특한 형태이다”. 이것이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지식의 첫번째 특징이다.
리오타르는 지식의 두번째 특징으로 그것과 ‘관습’(coutume)간의 유사성을 들고 있다. “‘적합한’ 규범적 혹은 평가적 진술은 무엇이며, 지시적 혹은 기술적 영역에서 ‘적합한’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 진술들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는 이유는 이 진술들이 ‘식자’(sachant)라는 대화자 집단에 의해서 용인된 적절한 기준들(제각기 정의․아름다움․진리․효율성의 기준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초기 철학자들은 이런 진술의 정당화 양식을 ‘억견’(opinion)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관습적 합의(consensus)가 아는자와 알지 못하는 자(외국인이나 어린아이)를 구별해주고, 그것에 의해 산출된 것이 다름 아닌 관습적 지식이며, 이것이 한 민족의 문화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또 지식이 관습적 지식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면, 다양한 수행들을 적합하게 가능하게 하는 능력인 지식 일반은 관습적인 지식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한 민족의 문화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리오타르의 지식이론 전개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지식은 일차적으로 이야기적 지식․관습적 지식․일상적 지식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야기적 지식은 문화속에서 그 스스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처럼 또 다른 정당화담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더 나아가 화용론적 관점에서 이야기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점을 논하고 있다. 과학적 지식은 참과 거짓에 관계하는 지시적 언어게임만을 고집하는 반면에, 이야기적 지식은 내부에 다양한 언어게임들을 허용하며, 나아가 과학적 지식의 화용론에서 발화자는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증명을 제시할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의 입장과 대립된 명제를 반박할 수 있어야 하며, 수화자는 발화자의 진술에 대해 동의나 거부를 표명할 수 있어야 하고, 지시대상은 발화자의 진술속에 적합하게 표현되고 기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는 반면에, 이야기적 지식의 화용론에 있어서는 발화자는-카시나와족 설화의 예에서 나타나듯이-이전에 수화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 및 부족의 이름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이미 이야기속에서 서술되었다는 것, 즉 지시대상의 위치에 놓여졌다는 것에 의해 설정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가 전달하는 지식은 오직 진술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듣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 말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 이야기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보고된 현실 무대 위에서)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단번에 결정한다”. 또한 기억과 기획이라는 통시적 시간성을 갖고 있고, 검증과 반증의 대상으로 항상 남아있는 과학적 지식과는 달리, 이야기적 지식은 무기억과 무기획이라는 일시적 시간성을 가지며, 사회 제도에 정당성을 제공하거나(신화) 기존의 제도에 통합 모형을 제시하는(전설․동화)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되는 사회의 기준이자 눙력의 기준을 규정한다. 그래서 이야기적 지식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자신의 제도속에서 이야기의 게임을 하면서, 즉 발화자, 수화자 및 지시대상의 위치로 나가면서 이야기를 현실화한다. 문화가 과거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없듯이 또 자신의 이야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절차를 필요로하지 않듯이, 문화의 일부분인 이야기적 지식은 문화속에서 스스로 정당화된다. 이것이 정당화 문제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과학적 지식과 이야기적 지식간의 차이이다.
지식 일반을 이야기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다소의 우월성을 부여하고 있는 리오타르의 의도는 과학적 지식을 신뢰할만한 지식의 유일한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는 근대 서구 기술과학적 사유방식에 쇄기를 박는 데에 있다. 과학적 지식을 지향하는 ‘과학적 사유’(pensée scientifique)와 이야기적 지식이 몸담고 있는 ‘야만적 사유’(pensée sauvage)간에는 적어도 형식적 동등성이 주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을 비과학적인 이야기적 지식과의 대비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지시적 진술의 총체인 과학적 지식과 다양한 진술들의 총체인 이야기적 지식은 각각 상이한 규칙들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과학적인 것에 입각하여 이야기적인 것의 실재와 가치를 평가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상호 불가공약적(l'incommensurabilité)인 것이다. 자신의 정당화 문제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논증이나 증거 제시가 아니라 전달의 화용론에 의해 스스로 신뢰를 획득하는 이야기적 지식 혹은 ‘조밀한’(compact)지식은 과학적 지식 혹은 ‘발전된’(développé)지식을 “이야기적 문화 가족속에 있는 하나의 변종”으로 취급하는 인내심을 보이고 있는 반면, 과학적 지식은 이야기적 지식의 타당성을 끊임없이 의문시하고 이 진술들이 결코 논증이나 증명에 종속되지 않음을 확인한다. 이런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l'impérialisme culturel)에 의해 이야기적 지식은 억견․습관․권위․편견․무지․이데올로기로 형성된 야생적․원시적․저개발적․후진적․반이성적인 정신상태로 간주되어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과 이야기적 지식의 불가공약성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적 사회에 있어 과학적 지식 그 자체가 정당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리오타르는 생각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된 이야기, 즉 거대 정당화 담론은 정치적․계몽적 해방 이야기(자유의 영웅)와 철학적․사변적 거대이야기(인식의 영웅)이다. 해방 이야기에 의한 정당화는 과학의 정당성인 진리를 윤리적․사회적․정치적 실천에 참가하는 자율성에 의거해 확립하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기여하는 한 지식일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의 주체는 국민 혹은 인류이며, 해방의 이야기는 인류라는 주체 스스로의 통제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주체 해방의 서사시이다. 그 반면에 철학적 이야기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메타 주체(métasujet)로서의 사변적 정신(l'esprit spéculatif)이다. 리오타르는 이때 “사변적 정신이 없는 과학의 창조적 능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슐라이어마하의 말을 인용한다. 사변적 철학은 개별 학문으로 분산된 인식들의 단일성을 회복시켜야 하고, 이것을 정신의 생성 과정속에 있는 계기들을 서로 결합하는 언어게임속에서, 즉 이성적인 메타 이야기속에서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백과전서’(Encyclopédie)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총체화 기획’(projet de totalisation)이다. 여기서 지식은 실증적인 지식이기를 중단하면서, ‘지식들의 지식’(savoir de ces savoirs)인 사변적 지식으로 되는 한 지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식 담론들은 직접적인 진리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신적 삶(Vie de l'esprit)의 여정중에, 사변적 담론을 이야기하는 ‘백과전서’속의 어떤 위치를 통해 수용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19세기말부터 징조가 나타난 과학적 지식의 위기(탈정당화의 위기)는 기술과학의 발전보다는 오히려 ‘지식의 정당성의 원리의 내적 침식’으로 부터 유래한다. 헤겔의 사변적 이야기는 그 이야기 내부에 실증지식에 대한 회의주의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과는 사라지고 새로운 영역들이 생겨나는 과학들의 경계에 침해작용이 발생하게 되고, 인식의 사변적 위계질서는 상호 경계가 계속 변경되는 ‘평평한 내재적 망상조직’으로 대체되며, 백과전서적 골격이 이완되면서 과학은 사변적 철학으로 부터 해방되어 그 독자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의 이야기도 지시적 언어게임과 실천적 언어게임간의 관여성(pertinence)의 차이 혹은 능력의 차이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지시적 진술(문이 닫혀있다)과 규정적 진술(문을 여시오)사이에는 어떤 추론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지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의 구별에 의해서 과학적 담론에 치명타를 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결국은 자기 고유의 규칙에 따르는 과학적 담론이 다른 담론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오타르는 탈정당화의 시대에서 과학적 지식은 인류의 해방을 위한 지식이나 사변적 정신의 삶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의 독립성을 갖는 지식으로 설정하며, 이런 지식의 정당성을 수행성에서 발견한다.
리오타르는 과학적 지식에 있어 정당성의 문제를 두가지 관점- 지식의 두 기능인 지식의 탐구(연구)와 지식의 전달(교육)-에서 고찰한다. 수행성에 의한 연구와 교육의 정당화가 그것이다. 수행성에 의한 연구의 정당화와 연관해서 리오타르는 오늘날 과학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 ‘논증의 풍부화’와 ‘증명제시의 복잡성’을 거론한다. 논증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때 언어의 사용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한 규칙을 정립하고 수화자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따르며,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공리학(axiomatique)이 규정된다. 그리고 언어가 공리학의 형식적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메타언어가 존재해야 하며, 이 메타언어가 논리학의 언어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괴델의 입장에서)체계속에서 증명될 수도 반박될 수도 없는 명제가 산술적 체계속에 있을 수 있는 의미에서, 논리학자가 인공언어(공리학)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하는(다른 모든 언어가 이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메타언어는 자연언어 혹은 일상언어이고, 그래서 이 언어는 일관적이지 못하고 패러독스를 허용한다. 또한 과학적 진술이 참이라고 언명될 경우, 이 진술을 수용하고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공리학적 체계가 이미 정립되었다는 것, 또 이것이 대화자들로 부터 인지되고 충분한 것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스스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합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리오타르는 과학적 지식의 두가지 특성을 제시한다. 첫째, 과학적 지식이 갖는 논증 방식의 유연성, 즉 ‘논증 언어의 다수성’이며, 둘째는 화용론적 게임의 특성으로서 ‘파트너간에 맺어지는 합의’에 의한 진술의 수용 가능성이다. 이것으로 부터 과학적 지식에 있어 두가지 종류의 진보가 생기는 바, 하나는 기존의 규칙 영역에서 새로운 활동(새로운 논증)에 해당되는 진보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규칙의 창안에 의한 게임의 변경에 해당되는 진보이다. 이런 논의에서 리오타르가 주목하는 것은, 보편적 메타언어의 원리는 형식적이고 공리학적인 체계들의 ‘다수성의 원리’로 대체되고, 이런 체계들은 보편적이지만 비일관적인 메타언어로 서술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고전적인 과학적 지식에서 패러독스 혹은 오류추리(paralogisme)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제 이런 체계들 중 어느 하나에서 전문가들의 동의에 의해 새로운 공신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이 논증을 근거로 전문가의 합의에 의해 성립한다면, 논증의 일부 형식인 증명제시는 과학적 지식이 수행성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증명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고, 사실의 확인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술(technai)의 개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은 수행 극대화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이미 하나의 게임, 즉 기술적 게임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에 있어서 이런 증명제시의 필요성은 이미 데카르트가 실험실을 위한 자금의 필요성을 자각했을 때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래서 “돈없이는 증명․진술의 검증․진리도 없는 것이다. 과학적 언어게임은 재력가들의 게임이 될 것이며, 이때 옳을 기회를 가장 많이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부, 효율성 그리고 진리사이에 하나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로써 과학적 진술에 있어 수화자의 동의를 얻기 위한 논증의 일부인 증명제시는 기술적인 수행성에 의해 그 정당함이 증대되기 때문에, 기술적 기준은 진리의 기준에 영향을 주게 되며, 이렇게 해서 지시적 언어게임은 진리가 아닌 수행성, 즉 투입과 산출의 극대화가 쟁취 목표인 기술적 언어게임의 통제를 받게된다.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 즉 교육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을 고찰해본다면, 수행성에 의한 그것의 정당화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정보화 사회에서 교육의 목표는 미래의 쟁취목표인 첨단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 혹은 화용론적 위치에서 제도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게임자를 공급하는 것이지, 해방의 이야기가 정당화했던 일반적인 삶의 모형을 형성하고 보급하는 것, 즉 국민을 해방시킬 수 있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이 사상의 실현이나 인류의 해방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교육이 전달하는 것은 지식창고(stock organisé de connaissance)이다. 지식이 정보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한 지식이 방치되지 않는다면, 교수법은 수화자가 사용 가능한 지능 단말기를 갖춘 자료은행과 더불어 고전적 기억장치(도서관등)가 연결된 기계에 맡길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은 이제 내용이 아니라 단말기의 사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법은 또한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여기․지금’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해 적절한 자료를 연결하고 이것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리하는 능력”인 수행적 능력 혹은 조작적 능력(compétences opérationnelles)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보화 사회에서의 ‘백과전서’는 자료 은행이며, 이것이 ‘포스트모던적 인간에게서의 자연’인 것이다. 과학적 비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충분한 정보게임’(le jeu à information complète)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적 지식의 세계’에서 최상의 수행성은 추가 정보를 획득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상호 무관한 자료들을 연결하는 데에 있으며, 연결되지 않았던 것을 연결하는 능력이 바로 속도가 그 속성인 창의력(imagination)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생산에서 그리고 동등한 능력에서 수행성의 증가는 결국 “새로운 활동을 이행하거나 게임 규칙을 변경하게 하는 창의력에 의존한다”.
지식의 전달이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영역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활동과 새로운 규칙을 창안하는 능력인 창의력의 향상에 있다면, 그것은 범분과성(l'interdisciplinarité)이라는 공동작업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메타 언어나 메타 이야기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는 없지만 수행을 강화하기 위한 ‘반짝이는 두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의 탈정당화가 이루어지고 수행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교육은 전통적인 ‘교수’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있으며, 기존의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기억 저장 장치의 망보다 더 유능한 것이 없으며, 새로운 활동이나 새로운 게임을 창안해내는 데에는 범분과적 연구보다 더 유능한 것은 없다고 리오타르는 결론을 내린다.
리오타르가 정보화 사회에서 과학적 지식의 위상을 논하면서 취하는 태도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과학적 지식은 기술적 언어게임의 기준인 수행성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술 및 새로운 규칙을 창안해내는 창의력의 향상에 의한 과학적 진보 혹은 과학적 지식의 생산을 강조하고 있다. 리오타르가 자신의 포스트모던적 지식 혹은 과학을 불안정(instabilité)이나 패러독스의 발견으로 규정할 때, 그는 두번째 사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수행성의 기준이 갖고 있는 이점, 즉 “형이상학적 담론의 개입을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우화의 포기를 요청하며, 명석한 정신과 냉철한 의지를 요구하고(․․․․․․)논증과 증명제시, 알려진 것의 전달, 창의력의 연마와 같은 화용론적 기능을 분명히 밝혀준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는 않지만, 수행성이라는 기술적 게임의 기준에 의해 다른 모든 게임을 평가하는 것은 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체계 이론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체계 수행의 극대화, 즉 효율성의 기준을 “모든 게임에 적용할 때 미온적이건 강력하건간에 반드시 어떤 테러가 동반된다. 작동시켜라, 즉 공약 가능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라!”는 것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적 담론 혹은 시장 경제적 담론의 쟁취 목표인 권력이나 힘이 모든 담론을 지배하는 전체주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수행성은 투입과 산출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투입된 장소인 체계는 ‘안정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체계는 산출을 적절히 예상하게 해줄 유도 가능한 연속 함수를 확립시켜 주는 규칙적 궤도에 순응한다. 그래서 이제 리오타르는 이런 안전성을 전제로하는 실증주의적인 효율성의 철학에 대한 반론을 양자 역학이나 원자 물리학에서 발견하고, ‘불안전성’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포스트모던적 과학을 정립한다. 즉, “포스트모던적인 과학적 지식의 화용론은 본래 수행성의 탐구와 유사한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괴텔․망델브로․통․팔로 알토 학파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인식과 예측의 패러다임으로서 도함수와 연속함수의 우월함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효율의 실증주의 덕분에 팽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증명한다는 것은 반대 사례, 즉 이해 불가능한 것을 탐구하고 ‘창안한다’은 것을 의미하며, 논증한다는 것은 ‘패러독스’를 탐구하고 새로운 추리 게임의 규칙에 의해 이것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정 불가능․통제의 정확성의 한계․양자․불완전한 정보에 대한 갈등․프랙타․파국․화용론적 패러독스에 관심을 갖는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자기 고유의 발전 이론을 비연속적․파국적․비교정적․패러독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지식이란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버리고, 어떻게 이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언급한다.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알려진 것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것을 생산한다”. 즉, 포스트모던적 과학의 유용성은 패러독스를 탐구함으로써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새로운 활동(진술․논증) 및 새로운 규칙)을 산출해내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진술은 기존의 것과 차이를 내포하고, 논증․증명될 수 있는 한에서 통용될 수 있다. 과학은 ‘개방된 체계’의 모델이며, 여기에서 진술의 적합성은 새로운 진술 및 새로운 게임 규칙을 의미하는 ‘관념들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적 과학의 정당화는 최상의 수행성이나 전문가들의 일치(homologie)가 아니라 창안가들의 불일치(paralogie)에 있으며,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따라서 “단순한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sensibilité)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오타르는 왜 전문가들의 토론을 통한 합의․일치가 아니라 창안가들의 이의(dissentiment)․불일치가 포스트모던적 과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리오타르는 인류 해방이라는 거대 이야기의 타당성을 근거로 하는 보편적 합의, 체계 수행성의 유지와 향상에 기여하는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는 행정적 절차로서의 합의를 거대 이야기의 몰락과 체계 이론의 폭력성을 이유로 배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언어 게임이 이질적이며 또 이질적인 화용론적 규칙에 종속되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합의는 모든 화자는 모든 언어 게임에서 보편 타당한 규칙들이나 메타규범에 대해 일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대화의 목표는 합의가 아니라 오히려 이의나 불일치이고, 합의는 대화의 한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합의가 하나의 상태라는 입장에서 나타나듯이,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합의가 아니라 국부적이고 잠정적인 합의 상태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해 규범을 규정함으로써 혹은 새로운 영역을 한정하는 새로운 규칙을 제시함으로써 표면화되는 권력, 즉 기존의 이성 질서를 파괴하는 자가 항상 나타난다는 사실은 언제든지 폐기 가능한 국부적 합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합의의 상태는 다시 발생하는 새로운 질서와의 차이속에서 폐기되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지식이 산출되기 때문에, “창조는 항상 이의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이야기(petit récit)를 정당화하는 거대 이야기와 이질적인 언어게임 모두에게 통용되는 메타 규범이 쇠퇴한 모스트모던적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보편적 합의를 추구하는 하버마스의 입장은 그 동기는 훌륭하지만 논거는 그렇치 못하다고 리오타르는 주장한다. 합의는 낡고 의심스러운 가치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보편적 합의와는 무관한 정의의 개념과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즉 언어게임이 ‘충분한 정보게임’으로 되는 포스트모던적 사회에 있어 정의의 실현을 리오타르는 두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 단계는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함으로써 언어게임의 동질성을 가정하고 실현하려는 테러의 포기를 의미한다. 두번째 단계는 각각의 언어게임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규정하는 규칙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면, 이 합의는 국부적이고 잠정적이어야 하며, 이로써 국한된 메타논증 혹은 ‘메타규범’에 의해 시공속에 한정된 논증의 다수성이 지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의에 대한 갈망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이 동등하게 존중되는 정치의 윤곽”이 잡히게 된다는 것으로 ?포스트모던적 조건?의 말미가 장식되고 있다.
3. 분쟁과 포스트모던적 정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적 사회를 이질적인 언어게임의 주체들이 형성하는 조직망으로, 포스트모던적 학문 혹은 지식을 불안정성의 탐구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 합의이론과는 무관한 포스트모던적 정의의 개념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질적 언어게임 및 잠정적이고 국부적인 합의이론으로 정립하고 있다. 그러나 리오타르의 이런 입장은 정당한가? 그의 근본적 가설에 따르면, 말한다는 것은 전투하는 것이고, 따라서 언술활동은 일반적 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인정함으로써 전체주의적인 테러가 방지될 수 있다고 말할 때, 언술활동 혹은 언어게임간의 충돌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런 충돌이 파트너간의 잠정적인 합의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합의에 지식과 권력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권력이 정의를 창출한다는 세속적인 상황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학문은 알려진 것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산출하는 것이고, 포스트모던적 정의는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란 말이 지니는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리오타르는 이런 문제를 ?분쟁?에서 보다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언어게임이라는 방법론적 개념에 의해 전개되었다면, ?분쟁?에서는 ‘문장’(phrase)․‘규칙체계’(règime)․‘담론장르’(genre de discours)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이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문장이다.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것, 그것은 문장이다. 문장은 직접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장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도 (문장을)형성하는 것(phraser)이며, 침묵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문장은 일련의 규칙집단, 즉 규칙체계에 의해 형성되며, 다수의 규칙체계가 있다. 논증하다․인식하다․기술하다․설명하다․질문하다․명령하다 등과 같은 것이 규칙체계이다. 그래서 이질적인 규칙체계의 문장들은 상호 번역될 수 없다. 이런 이질적인 규칙체계를 따르는 문장들은 담론장르속에서 서로 연결될 뿐이다. 대화하기, 강의하기, 광고하기 등과 같은 것은 담론장르이며, 이것들은 각각 고유의 목표나 목적(지식획득, 가르침, 유도하기)을 갖고 있다. 이질적인 규칙체계의 문장들은 담론장르들이 지니고 있는 이런 목표의 도달을 위해 상호 연결된다. 예컨대, 대화라는 담론장르속에 목표로 설정된 지식의 획득을 위해 ‘질문’은 그속에서 ‘제시’나 ‘서술’같은 것과 연결되어 나간다. 따라서 “언어 일반(langage en général)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념의 대상(objet d'une Idée)일 뿐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문장은 발생하는(arriver)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생’․‘일어남’(occurrence)․‘사건’(Ereignis)이다. 어떤 문장이 발생한다면, “마지막 문장은 없기 때문에” 이 문장은 어떤 담론장르속에서 반드시 다른 문장과 연결된다(enchaîner). 즉, 이 문장과 다른 어떤 문장과 ‘지금’ 연결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연결 방식(le mode d'enchaînement)은 우연적이다. 어떤 문장에 어떤 특정한 문장만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문장은 원칙적으로 앞의 문장과 연결될 수 있다. 즉, 모든 문장은 앞의 문장과 연결된 잠재성 혹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어떤 담론장르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우연적으로 문장들을 연결시킬 뿐이다. 이때 연결된 문장, 즉 가능성이 실현된 문장은, 연결되지 않은 문장, 즉 여전히 가능성으로서 남아있는 문장에게 원치않은 ‘손상’(tort)을 입힌다.
그런데 이런 목표를 갖고 있는 한 담론장르는 각각 고유의 규칙체계에 종속되는 어떤 가능적 문장들의 복합체이고, 다른 목표를 갖고 있는 다른 어떤 담론장르는 또 다른 가능적 문장들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담론장르들은 자기 고유의 규칙(목표)를 갖고 있으며, 다른 가능한 문장들을 갖고 있다. 나아가 이런 담론장르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문장들간의 연결이 그렇듯이, 한 담론장르와 다른 담론장르들간의 연결은 필연적이지만, 그 연결방식은 우연적일 뿐이다. 이것은 문장들의 연결보다 심각한 손상을 야기한다. 한 담론장르에서 문장들의 연결은 하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연결되지만, 다양한 목표를 갖고 있는 담론장르들은 상호 불가공약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연결을 정당화해 줄 보편적 목표(규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론장르들간의 연결은 항상 갈등 상황(und cas de conflit)을, 즉 ‘분쟁’(différend)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오타르는 이런 담론장르들간의 분쟁이 치유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법적 소송’(litige)과 구별하고 있다. 판사가 보편적인 법규범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법적 소송인 반면에, “분쟁은 적합하기 판정내릴 수 없는-두 논증 모두에 대해 적용할 판단규칙이 없기 때문에-(최소한)양자간의 충돌 상황이다. 한 논증의 정당성은 다른 논증이 부당하다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자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자에 동일한 판단규칙을 적용한다면, 적어도 그들중의 하나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담론장르의 규칙은 다른 담론장르의 규칙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담론장르들간에는 보편적인 판단 규칙(une règle universelle de jugement)이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담론장르를 포섭․평가하는 보편적인 담론장르(un genre de discours universel)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적인 담론장르도, 보편적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고, 이질적인 담론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면, 담론장르들간의 피할 수 없는 ‘충돌’ 및 연결된(승리한) 담론장르가 연결되지 않은(패배한) 담론장르에게 가하는 부당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문장들 그리고 담론장르들간의 근원적인 분쟁의 상황을 메타담론에 의거해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차단되어 있다면, 그러나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리오타르에 따르면, 그것은 분쟁을 증언하는 것(témoigner du différend)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정치가의 정치나 지식인의 정치가 아니라 ‘철학적 정치’(la politique philosophique)의 과제이며, 따라서 포스트모더니트는 철학적 정치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쟁을 증언하라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강령은, 한편으로는 손상․부당성의 기제를 공격하고 그것의 오류를 발견함으로서 메타언어와 메타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특정한 담론장르를 추종하는 것은 곧 다른 담론장르에 대해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것, 이런 종류의 침해 및 전체주의화가 근본적인 악이라는 것을 증시하고, 규칙체계들․담론장르들간의 이질성을 주목하고 그것들의 한계를 고수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감정속에서 나타나는 분쟁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관용어법을 창안하고자 하는 것(즉,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로써 지배적 담론에 의해 침묵하고 있는, 잠재성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담론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드러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정치가로서 철학자의 임무는 판사의 입장에서 보편적 규범에 의해 충돌을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변호하는 것이고, 분쟁의 논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또 구체적인 분쟁이 해결 가능한 ‘법적 소송’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감지되도록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열의 사건’(l'événement de la fission)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요구되는 포스트모더니트들의 ‘반성적 책임’(la responsabilité réflexive)이다. 다양한(알려지고 또 알려지지 않은) 담론장르가 지니고 있는 목표의 이질성을 감지하는 능력(감수성), 이런 이질적인 목표를 가능한 한 추구하는 능력(창안력)이 포스트모던적 인간성의 이념이며, 이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철학자 혹은 철학적 사유의 영광(honneur de penser)을 진정으로 회복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적 정의는 불가공약성과 불일치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분쟁을 증언함으로써 ‘지배하는 것’․‘표현되는 것’․‘알려진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표현될 수 없는 것’․‘알려지지 않은 것’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분쟁?에서 제시되고 있는 리오타르의 이런 입장은 ?포스트모던적 조건?에 나타난 그의 근본 취지와 일맥 상통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것에 대해 인내력을 강화시키며, 결정 불가능성․프랙타․패러독스에 관심을 갖는 포스트모던적 학문은 알려진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산출하고, 이렇게 하여 정의에 대한 갈망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정치의 윤곽이 나타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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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différend, (Paris: Minuit, 1983)
-------------, Tombeau de l'intellectuel, (Paris: Galilée, 1984),
이현복 편역, ?지식인의 종언?, (서울: 문예출판사,
1993)
-------------, Le Postmoderne expliqué aux enfants, (Paris:Galilée,
1986), 이현복 편역, 앞의 책.
-------------, L'enthousiasme. La critique kanntienne de l'his-
toire, (Paris: Galilée, 1986)
Welsch, W., Unsere Postmoderne Moderne, (Weinheim: Acta humaniora,
1988)
Wittgenstein, L., Philosphische Untersuchungen, (Frankfurt a,M.: 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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