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뭇잎숨결 2022. 1. 4. 18:14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변하는 교회”, “교회를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역사에 종속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 현실에 뿌리내린 교회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가 교회라는 말인데,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실례를 교회사 전반에 거쳐 언급하고 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 핍박과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느냐 라는 교회 존립의 문제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법의 위치와 성직자의 지위를 어디에 두느냐 라는 문제가 교회의 변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 등의 영향 아래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왔다.
 
한스 큉은 변하는 교회의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본질과 현실”의 문제로 언급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본질과 현실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는가, 즉 100%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100%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없는가 라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본질과 현실 사이의 한스 큉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결론을 짓는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곧 한스 큉이 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는 아예 이 점을 전제하여 에큐메니즘이니 종교들간의 대화이니 라는 것들을 거론했다. 그의 말대로 교회가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타협이 부득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사명을 지시하시는 선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가능한 것이며, 교회는 스스로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요 15:5 참고). 더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택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교회가 의로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평가로 삼기 때문인 것이다(요 5:30 참고).
 
이상의 논지에서 교회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으니, 따라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장황한 논리가 전개되지만 결론적으로 한스 큉의 입장은 신앙이나 교회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화된 신앙이 교회를 붕괴시킨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물론 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올바른 신앙이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였다”고 수정하고 싶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쪼개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구의 이면에 교회의 통일성이 간과되지는 않는지 제3자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공교회를 위해 신앙의 타협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면 신앙과 교회의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갈등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스 큉은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르와시의 문구를 제시하면서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통치”에 대해 다룬 것은 어쩌면 그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한스 큉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교회가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근원이 되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우리도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제2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입장을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입장에 따를 경우 예수님께서는 교회 탄생의 이유를 제공한 후 교회에 대하여는 객체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스 큉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축소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체계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할 때 비롯되는 교회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신약 교회를 구약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며,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스 큉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반면 하나님나라는 위로부터 돌입한다. 창조의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통치이며,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전단계도 아닌 전조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스 큉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따라서 좌절할지라도 교회가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스 큉이 이와 같이 교회의 책임을 경시하는 듯 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을 정리하면서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교회이다.” 한스 큉은 이 명제에 따른 실천적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직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못된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우리 개신교 교인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밖을 향해 사역자화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제직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직분의 유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어서 교회의 직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는 목회자의 세습으로 인해, 헌금을 많이 한 중직자를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강한 능력의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은 인간적인 자원이 부족할지라도 겸손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요, 인간적인 자원이 풍부함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회가 약한 교회라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후자의 교회를 더 강한 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나 확고한 제도를 강한 교회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또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의 전유물인양,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은사를 받은 어떤 특정 성직자가 임의로 성령의 능력을 부린다고(?) 여겨질 때 그에 대해 신령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허영이라는 본성은 교회관과 관련하여 이상주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교회’, ‘승리의 교회’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상주의의 교회관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는 한스 큉의 입장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한스 큉이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 혹은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성자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할 만한 위험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장선이나 강생의 계속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것 같으면 이런 교회는 한스 큉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반드시 전제하는 개념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한 적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는 한스 큉의 관찰은 아주 타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스 큉은 성만찬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한스 큉이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칭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령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말했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이냐 공재설이냐 기념설이냐 영적임재설이냐 라는 문제는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그가 껄끄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성만찬과 연결시킨 그의 입장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교회의 단일성”, “보편성 ‧ 성성 ‧ 사도성”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개신교의 특징으로 돌리고,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은 가톨릭의 특징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성례를 강조한 나머지 말씀을 등한시 한 것이나 성례에 있어서 세례와 성찬 외에 인위적인 요소들을 첨부하여 7성례를 만든 것은 말씀과 성례를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함을 어불성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해 개신교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한스 큉의 입장에는 다소 오해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스 큉은 교회의 이러한 속성들에 “개신교적 기준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렇게 말한 그가 또 말하기를 이러한 교회의 속성들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그 속에 있어야 할 본질들이 빠지게 되면 이러한 속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스 큉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톨릭교회가 단지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명분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집나간 자식들이 될 것이며, 교회의 단일성에 피해를 끼친 분리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른 속성들을 희생해서까지 단일성을 이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한스 큉의 입장을 헌신짝처럼 취급할만한 오류들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 눈감아야 한다면 이에 대해 진정한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에큐메니칼과 가톨릭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한스 큉의 입장에서는 하나 됨이 가능하겠지만,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큉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본질이 빠진 교회의 속성(여기서는 단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한스 큉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무엇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한스 큉의 입장은 성역이나 성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되며(이렇게 볼 때, ‘성지순례’라는 용어는 어불성설이며 기독교회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와 성찬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교회’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부터의 교회’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 중 어느 편에 더 치중하는가? 한스 큉의 입장은 양자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을 인용한 한스 큉의 입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가 없는가? 한스 큉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과연 ‘위로부터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가? 물론 한스 큉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지 않으심을 강조했을 것이고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곁들이자면 하나님의 임재가 옛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났듯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며,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듯이 돌감람나무인 교회를 버리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멀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은 성경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시대의 맹신을 떨쳐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5. “교회 내의 봉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봉사권과 연관되는 교회의 직분(특히 사제/주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봉사에 있어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라는 만인제사장의 입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양자에 대해 한스 큉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어느 편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의 직분관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제시했다면,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또 후자에 따라 이를 적극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스 큉은 이 양자의 입장을 항상 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의 봉사권이 가진 부동한 두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즉 한 직분관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어떻게 절충시키는가 라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물론 한스 큉이 가톨릭 측의 인물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 밖을 향한 봉사와 관련하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스 큉의 일관된 관점은 교회를 세계 속의 교회로 보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계 속의 교회가 교회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회가 세계 속에서 침묵함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세상 속에서의 지배욕을 포기함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과 정치에 결탁하여 추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스 큉의 이 말은 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또 교회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세계와 결합되고,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이 에큐메니즘에 치우친 학자임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 입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스 큉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의 과업이 복음전도라는 점이다. 한스 큉의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순수한 복음전도가 어떻게 에큐메니즘과 결탁될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변하는 교회”, “교회를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역사에 종속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 현실에 뿌리내린 교회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가 교회라는 말인데,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실례를 교회사 전반에 거쳐 언급하고 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 핍박과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느냐 라는 교회 존립의 문제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법의 위치와 성직자의 지위를 어디에 두느냐 라는 문제가 교회의 변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 등의 영향 아래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왔다.
 
한스 큉은 변하는 교회의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본질과 현실”의 문제로 언급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본질과 현실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는가, 즉 100%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100%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없는가 라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본질과 현실 사이의 한스 큉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결론을 짓는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곧 한스 큉이 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는 아예 이 점을 전제하여 에큐메니즘이니 종교들간의 대화이니 라는 것들을 거론했다. 그의 말대로 교회가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타협이 부득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사명을 지시하시는 선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가능한 것이며, 교회는 스스로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요 15:5 참고). 더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택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교회가 의로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평가로 삼기 때문인 것이다(요 5:30 참고).
 
이상의 논지에서 교회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으니, 따라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장황한 논리가 전개되지만 결론적으로 한스 큉의 입장은 신앙이나 교회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화된 신앙이 교회를 붕괴시킨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물론 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올바른 신앙이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였다”고 수정하고 싶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쪼개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구의 이면에 교회의 통일성이 간과되지는 않는지 제3자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공교회를 위해 신앙의 타협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면 신앙과 교회의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갈등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스 큉은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르와시의 문구를 제시하면서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통치”에 대해 다룬 것은 어쩌면 그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한스 큉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교회가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근원이 되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우리도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제2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입장을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입장에 따를 경우 예수님께서는 교회 탄생의 이유를 제공한 후 교회에 대하여는 객체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스 큉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축소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체계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할 때 비롯되는 교회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신약 교회를 구약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며,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스 큉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반면 하나님나라는 위로부터 돌입한다. 창조의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통치이며,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전단계도 아닌 전조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스 큉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따라서 좌절할지라도 교회가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스 큉이 이와 같이 교회의 책임을 경시하는 듯 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을 정리하면서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교회이다.” 한스 큉은 이 명제에 따른 실천적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직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못된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우리 개신교 교인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밖을 향해 사역자화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제직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직분의 유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어서 교회의 직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는 목회자의 세습으로 인해, 헌금을 많이 한 중직자를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강한 능력의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은 인간적인 자원이 부족할지라도 겸손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요, 인간적인 자원이 풍부함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회가 약한 교회라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후자의 교회를 더 강한 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나 확고한 제도를 강한 교회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또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의 전유물인양,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은사를 받은 어떤 특정 성직자가 임의로 성령의 능력을 부린다고(?) 여겨질 때 그에 대해 신령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허영이라는 본성은 교회관과 관련하여 이상주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교회’, ‘승리의 교회’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상주의의 교회관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는 한스 큉의 입장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한스 큉이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 혹은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성자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할 만한 위험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장선이나 강생의 계속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것 같으면 이런 교회는 한스 큉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반드시 전제하는 개념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한 적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는 한스 큉의 관찰은 아주 타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스 큉은 성만찬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한스 큉이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칭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령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말했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이냐 공재설이냐 기념설이냐 영적임재설이냐 라는 문제는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그가 껄끄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성만찬과 연결시킨 그의 입장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교회의 단일성”, “보편성 ‧ 성성 ‧ 사도성”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개신교의 특징으로 돌리고,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은 가톨릭의 특징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성례를 강조한 나머지 말씀을 등한시 한 것이나 성례에 있어서 세례와 성찬 외에 인위적인 요소들을 첨부하여 7성례를 만든 것은 말씀과 성례를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함을 어불성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해 개신교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한스 큉의 입장에는 다소 오해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스 큉은 교회의 이러한 속성들에 “개신교적 기준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렇게 말한 그가 또 말하기를 이러한 교회의 속성들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그 속에 있어야 할 본질들이 빠지게 되면 이러한 속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스 큉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톨릭교회가 단지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명분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집나간 자식들이 될 것이며, 교회의 단일성에 피해를 끼친 분리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른 속성들을 희생해서까지 단일성을 이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한스 큉의 입장을 헌신짝처럼 취급할만한 오류들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 눈감아야 한다면 이에 대해 진정한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에큐메니칼과 가톨릭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한스 큉의 입장에서는 하나 됨이 가능하겠지만,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큉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본질이 빠진 교회의 속성(여기서는 단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한스 큉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무엇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한스 큉의 입장은 성역이나 성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되며(이렇게 볼 때, ‘성지순례’라는 용어는 어불성설이며 기독교회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와 성찬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교회’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부터의 교회’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 중 어느 편에 더 치중하는가? 한스 큉의 입장은 양자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을 인용한 한스 큉의 입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가 없는가? 한스 큉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과연 ‘위로부터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가? 물론 한스 큉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지 않으심을 강조했을 것이고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곁들이자면 하나님의 임재가 옛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났듯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며,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듯이 돌감람나무인 교회를 버리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멀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은 성경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시대의 맹신을 떨쳐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5. “교회 내의 봉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봉사권과 연관되는 교회의 직분(특히 사제/주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봉사에 있어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라는 만인제사장의 입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양자에 대해 한스 큉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어느 편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의 직분관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제시했다면,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또 후자에 따라 이를 적극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스 큉은 이 양자의 입장을 항상 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의 봉사권이 가진 부동한 두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즉 한 직분관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어떻게 절충시키는가 라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물론 한스 큉이 가톨릭 측의 인물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 밖을 향한 봉사와 관련하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스 큉의 일관된 관점은 교회를 세계 속의 교회로 보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계 속의 교회가 교회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회가 세계 속에서 침묵함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세상 속에서의 지배욕을 포기함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과 정치에 결탁하여 추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스 큉의 이 말은 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또 교회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세계와 결합되고,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이 에큐메니즘에 치우친 학자임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 입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스 큉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의 과업이 복음전도라는 점이다. 한스 큉의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순수한 복음전도가 어떻게 에큐메니즘과 결탁될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2]교회 기초는 제도 조직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의 고백

 

 

-손희승 신부

 

 

열정과 논쟁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 1928~ ) 신부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신학적 연구를 열정적으로 수행하면서 많은 저서를 집필한 신학자다. 우리 시대에 중요하게 부각된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를 탐구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종말론, 신학적 방법론, 세계 윤리, 세계 종교들, 그리고 종교와 문학의 관계를 다룬 저작을 남겼다.

 

큉의 저서가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고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면서 그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자가 됐다. 우리말로 번역된 단행본만 해도 스무 권에 가깝다. 그는 또 다른 이유에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신학적 이견 때문에 교회 교도권과 공개적인 갈등과 마찰을 빚은 것이다. 이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관점도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비판으로 엇갈린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그의 6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신학 논총에서 "한스 큉은 20세기 신학에서 하나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평가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한스 큉 신부의 생애를 단계별로 살펴보면서 그의 신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조명해본다.

 

- 젊은 시절의 한스 큉.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 수르제에서 태어나 루체른에 있는 김나지움(인문계 중등교육기관)에서 수학했다. 전통적인 가톨릭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큉에게 김나지움 교육은 근대 문학과 예술은 물론 근대 정신 전체에 열린 자세를 갖게 해줬고,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는 개신교, 유다교 학생들 간 교류를 가능케 해줬다. 이런 교육은 나중에 큉이 근대 정신과 화해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교회일치와 타 종교와 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는 데 씨앗이 됐다.

 

1948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큉은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 진학해 1955년까지 철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이수한다. 이 기간 예수회가 운영하는 독일어권 신학생을 위한 신학원 '게르마니쿰'에 머물면서,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정신에 따른 엄격한 사제 양성 교육을 받는다. 그는 처음에 당시 신스콜라 신학과 규율에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로 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청과 신학의 경직성, 신학원의 일부 융통성 없는 규율에 의문을 품으면서 비판의식을 갖게 됐다고 고백한다. 로마에서 교육이 끝날 무렵인 1954년 큉은 사제품을 받는다. 로마에서 신학 기본 과정을 마친 큉은 프랑스 파리로 자리를 옮겨 소르본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1955~1957).

 

 

개신교 신학 거장 칼 바르트와 의화론

 

큉의 박사학위 논문 「의화론」은 스위스 출신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K.Barth, 1886~1968)의 의화론과 트리엔트공의회에 나타난 가톨릭의 의화론을 비교한 것이다. 큉은 이 논문에서 두 의화론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며, 차이는 교회 분열을 일으킬 만큼 큰 것이 아님을 밝혀냈다. 가톨릭과 개신교 벽이 아직 매우 높았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상황을 고려할 때, 종교개혁 시발점이 됐던 의화론에서 양편의 의견 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 큉의 논문은 신학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게 된다.

 

칼 바르트는 큉의 논문에 "만일 당신이 당신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전개한 의화론이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라면, 나는 나의 의화론과 당신의 의화론이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칼 라너(K.Rahner, 1904~1984) 신부는 큉의 의화론이 가톨릭의 통상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론 가톨릭 의화론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큉은 칼 바르트가 타계할 때까지 그와 신학적, 인간적 교류를 지속했다. 큉 스스로 바르트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바르트의 용어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소위 무한한 차이'라고 표현되는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경외심 △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 △ 인간은 이 계시 사건을 '오직 신앙을 통해서 적합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론 연구

 

한스 큉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스위스 루체른으로 돌아와 한 성당에서 1년 반(1957~1959) 보좌신부를 지낸 뒤 본격적으로 학문 활동을 시작한다. 독일 뮌스터대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신학 조교로 있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대 가톨릭 신학부 교수로 초빙받아 부임했다. 1964년에는 동 대학 부설로 새로 설립된 교회일치신학연구소 소장 직책을 겸임했다. 큉은 같은 대학의 개신교 신학부 교수들, 특히 신약성서학자 에른스트 캐제만(E.Kasemann, 1906~1998)과 만남을 통해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을 적극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큉의 신학, 특히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큉의 튀빙겐대 교수 부임 2년 후인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고, 그는 공의회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시기 그는 교회론에 집중하며 「공의회와 재일치. 쇄신, 일치에로의 부름」(1960), 「교회의 구조들」(1962), 「공의회에서의 교회」(1963) 등을 출판했다.

 

큉의 교회론 연구는 1967년에 출간한 「교회」에서 정점을 이룬다(이 책의 축소판 「교회란 무엇인가」는 1978년, 원저는 2007년 우리말로 출판됐다). 그는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를 종합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근거로 교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 공동체로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교회의 본질적 요소다. 교회 기초를 이루는 것은 고유한 예식이나 제도, 특정한 직무를 포함한 고유한 조직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고백이다.

 

예수의 핵심 관심사는 하느님 나라였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 공동체인 교회는 당연히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이어가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전령(傳令)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철저히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이 아니라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고, 강제와 무력을 배제한 헌신적 봉사를 수행하며, 죄를 멀리하더라도 결코 죄인을 내치지 않는 자비의 공동체가 돼야 하고, 자신의 업적에 의존하지 말고 철저히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큉은 교회가 신앙인 공동체임을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교계제도와 동일시했던 공의회 이전 시각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과거에 소홀히 다뤄졌던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을 부각시킨다. 또한 교계 직무는 성령의 다양한 카리스마 중 하나로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한 봉사 직무로 이해한다. 교황직에 관해서는 교회론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면서 그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봉사로서, 교황 수위권은 법적 권력이나 지배가 아니라 '봉사 수위권''사목 수위권'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20세기 교회론의 대가 콩가르(Y.Congar, 1904~1995) 추기경은 큉의 교회론이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바오로 신학에 근거해 교회의 카리스마적 차원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과거의 교회론이 교회를 가시적인 머리인 교황으로부터 연역해서 생각했지만, 큉이 교회 발달에 대해 먼저 관심을 두고, 교계제도와 교황을 마지막에 다룬 것은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콩가르는 큉이 교회 전통과 직무에 대해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교부들의 교회론이나 교회의 성사적 측면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교회 전체의 사도적 계승만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 직무자를 통한 사도적 계승의 측면은 소홀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큉의 교회론에 찬성 못지않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비판의 목소리에는 교황청 신앙교리성도 포함돼 있었다. 1967년 12월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조사를 위한 '대화'가 있기 전에 이 책의 보급과 번역을 금지한다고 통보했고, 그 다음 해 9월 큉을 소환했다. 하지만 큉은 공정한 '대화'를 위한 조건이 선결돼야 응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견조율을 위한 양편의 협상이 시작됐다.

 

 

 

교황 무류성 논쟁

 

 

 

큉은 「교회」에서 전개한 교회론의 실천적이며 비판적 측면을 1968년 「진실성,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에 담아 출간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교의 선포 100주년을 맞아 1970년 출간한 「무류라고? 하나의 질문」에서 그의 비판은 실천을 넘어 교의 문제로 향한다. 큉의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성 때문에 무류적 문장이나 표현은 있을 수 없다. 절대적 무류성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하는 것으로서 공의회도, 교도권도 무류적 문장을 만들 수 없다. 교회가 진리 안에 머물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무류적 문장이나 제도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교회는 인간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약속 덕분에 복음의 진리 안에 유지된다.'

 

큉의 주장은 가톨릭 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는 1971년 한 신학 잡지 기고문을 통해 단호한 반대 의견을 밝힌다. 교회가 하느님 계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큉이 부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나 '회의적 철학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공격한다. 같은 해에 신앙교리성은 조사 대상에 「무류라고? 하나의 질문」<사진>도 추가했고, 독일 주교회의도 이 책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17) 한스 큉 (중)

 

예수, 인간의 모든 차원과 관계에서 궁극의 척도

 

 

 

 

 

- 큉은 근대 사상의 흐름을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해했다.

 

 

1970년대 큉의 신학적 관심은 교회론에서 그리스도론과 신론으로 옮겨진다. 큉은 1979년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헤겔의 철학을 신학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담은 「하느님의 육화(肉化)」를 출간했다. 이 연구는 큉이 박사학위를 끝낸 직후 교수 자격 논문으로 시작한 것인데, 중간에 여러 사정 때문에 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 마무리됐다.

 

큉은 두 가지 목표를 두고 헤겔 연구를 수행했다. △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의 도움으로 역동적인 신관(神觀)에 이르는 것과 △ 그리스도론 교의를 결정한 첫 번째 천년기 공의회 이래로 우리에게 전래된 정적(靜的)인 고전 그리스도론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심도 있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큉이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추구하도록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큉도 처음에는 다른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칼케돈공의회(451년)에 뿌리를 둔 전통적 그리스도론, 곧 삼위일체 교리에서 출발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로고스와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느냐를 묻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추종했다. 또한 헤겔의 사변적 철학의 도움으로 이 그리스도론을 오늘에 맞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튀빙겐대에서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에 몰두하면서 다른 방향의 그리스도론, 곧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구상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런 전환은 「하느님의 육화(肉化)」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증언 그리고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예수와 그의 역사적인 메시지와 모습, 그의 삶과 운명, 역사적인 실재와 역사적인 영향으로부터 출발해서 이 인간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 즉 그와 아버지와의 일치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지 않을까? 간단히 얘기해서 사변적으로 혹은 교의적으로 위에서가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다." 큉은 이런 그리스도론이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핵심 내용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느님의 대리자이자 인간의 대리자인 예수

 

큉은 1974년 출판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책의 축소판 「왜 그리스도인인가」는 1982년 우리말로 출판됐다, 사진)에서 현대 세계와 사상을 배경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체적 해석을 시도하는 가운데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큉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대(大)종교들과 '세속적' 인본주의 도전에 직면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따라서 한 사람의 신앙이든, 교회이든, 신학이든 그것이 어떤 사상이나 원칙이 아니라 분명히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돼 있을 때에야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하에 큉은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예수는 당시 유다사회 내 다른 어떤 종교 집단과도 동일시되지 않는, 모든 틀을 깨뜨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수의 핵심 관심사인 하느님 나라의 이해가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 능력으로 도래하지만, 그 나라는 인간에게 하느님 뜻에 철저히 복종하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는 하느님 뜻은 내용상으로 인간의 포괄적 행복에 있다고 보고, 절대화된 전통과 제도를 상대화하고 모든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한다. 특이하게도 예수는 원수 사랑을 선포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면서 하느님을 '잃은 자들의 아버지'로 드러낸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의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들의 하느님"이고, 이는 "전대미문의 신관 혁명"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당시 종교지도자층과 충돌이 일어났고, 그 충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다. 십자가는 실패의 표지지만, 부활은 이런 판단을 뒤엎는다. 예수 부활로써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이 참된 하느님이고, 예수가 옳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고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핵심은 예수가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갖는 관계, 다른 인간과 갖는 관계에 최종 척도를 이룬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에 대해서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대리자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열띤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신약학자 야콥 크래머(J.Kremer, 1924~2010) 신부는 긍정적 평가를 했다. "한스 큉은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결과를 탁월한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나자렛 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진술을 그 당시로부터 이해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서술은 성서주석학 전문가조차도 다 전망하기 어려울 만큼 충만한 성서학 연구를 훌륭하게 사용한 것을 보여준다. 그는 성서학 연구를 결코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으면서, 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그들 마음을 끌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큉이 예수 당시의 상황과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의 독특성에 관해서 서술한 부분은 근래에 나자렛 예수에 대해 저술된 것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는 큉이 전개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정당한 시도일 뿐 아니라 현대인에게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삼위일체, 로고스의 선재, 육화한 로고스의 우주적 의미가 큉의 그리스도론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간단히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게는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그리스도론의 교의들을 큉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긍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의 시도는 그 목표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하고 그저 중간에 머물러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출발점은 정당하다. 그러나 나의 확신에 의하면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의 충만함에 이르지는 못했다."

 

 

근대 무신론의 도전에 응답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

 

큉은 1978년 신 문제를 다룬 「신은 존재하는가?」를 출간한다(책 전반부는 같은 제목으로 1994년 우리말로 번역됐다, 사진). 가톨릭교회는 피조물을 통해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기에 비 신앙인에게도 신 인식이 가능하지만, 참된 하느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만 가능하다고 가르쳐 왔다. 큉의 입장도 이와 대동소이한데, 독특한 점은 그것을 근대의 사상 흐름을 배경으로 재정립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헤겔을 거쳐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와 같은 근대 무신론자들 사상을 상세히 다룬다. 큉은 근대 무신론은 인간 행복을 위해 신과 종교를 거부한 '무신론적 인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철저한 인본주의'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큉은 근대 무신론의 귀결은 니체로 대표되는 허무주의라고 주장하면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시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느님을 긍정하는 길을 제시한다.

 

세계와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실재 전체는 근본적으로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불확실성을 지닌 실재 앞에서 인간은 긍정적 태도든 부정적 태도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근본적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실재 자체가 양면성을 지녔기에 결단을 위한 명확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결단은 항상 모험이고, 자신을 거는 신뢰나 불(不)신뢰의 문제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근본 결단에는 실재에 대한 '근본 신뢰' 혹은 '근본 불신뢰'의 문제가 걸려있다.

 

큉은 이 둘 중에서 근본 신뢰는 인간의 본래적 성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비존재보다는 존재를, 무의미보다는 의미를, 불행보다는 행복을 원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긍정을 향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긍정으로 향해 있음에도 실재의 허무함을 고집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무주의자도 살기를 원한다면 실천에 있어서 항상 존재에 의존해야 하기에, 허무주의적 태도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근본 불신뢰는 실천에 있어 모순이 따르는 비합리적 태도다.

 

다음 단계로 근본 신뢰를 바탕으로 신 존재를 긍정하는 길이 제시된다. 실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근본 신뢰를 가능하게 하지만, 실재 전체는 계속 불확실한 채로 남아있다. 바로 여기서 불확실한 실재가 존재하게 된 조건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그것의 최종 근거 곧 실재를 지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신을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재의 불확실성 때문에 실재의 최종 근거로서 신을 인정하려면, 근본적으로 결단이 필요하고 이는 증명이 아니라 일종의 신뢰 행동이다. 양면성을 지닌 실재의 최종 근거를 인정하는 신뢰는 넓은 의미의 "신(神) 신앙", 혹은 근본 신뢰와 연관 지어서 "신-신뢰"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근본 신뢰와 신-신뢰를 통해 인지한 실재의 최종 근거로서 신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은 구체성과 분명함을 지닌다. "철학자들의 신 개념은 전체적으로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철학자들의 신은 이름 없이 머물러 있다. 그 신은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다. 성경의 하느님 신앙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 결단을 요구한다. 그는 역사를 통해서 존재하는 이로, 즉 계속 존재할 것이며 인도하고 돕고 강하게 하는 이로 자신을 계시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이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15일,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종교 간 대화와 세계 윤리 정립에 힘써

 

 

  - 국내에 소개된 한스 큉 저서들.

 

 

1978년에 발간된 「신은 존재하는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보다 신학계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가톨릭 철학자 에머리히 코레트(E.Coreth, 1919~2006) 신부는 책의 전반부, 곧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니체에 이르는 근대 사상과 겨루면서 화해와 극복을 추구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계속된 교회 교도권에 대한 큉의 비판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큉은 근대 무신론조차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유독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교도권에 대해서만 왜 그렇게 비판적인지 묻고 싶다." 큉과 교회 교도권과의 해묵은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967년 「교회」로 시작된 교황청 신앙교리성과의 갈등은 1970년에 발간한 「무류라고?」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신앙교리성은 조사를 위한 '대화'에 큉을 부르지만, 큉은 '대화'의 공정한 규정을 선결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후 협상은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1975년 2월 조건부로 마무리된다. 큉이 앞으로 교황 무류권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신앙교리성에서도 더 문제 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갈등은 수습됐다.

 

 

교회 교도권과 마찰

 

하지만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직후, 큉은 다시 교황 무류권을 언급했다. 1979년 초 발간한 「진리 안에 보존된 교회?」라는 소책자에서 교황 무류권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새 교황에게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요청했다.

 

신앙교리성은 이를 1975년에 맺은 합의를 깬 것으로 간주하고, 1979년 12월 18일 성명을 통해 "한스 큉 교수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가톨릭교회의 온전한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가톨릭 신학자로 간주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큉은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사제직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결국 큉은 튀빙겐대 측과의 조율을 거쳐 독자적 지위를 얻게 된다. 가톨릭 신학부 소속이 아닌 총장 직속의 교회일치 신학 교수로서, 그 직책과 연관된 교회일치연구소 소장직을 계속 유지하고 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강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스 큉은 이렇게 특별한 조건에서 활동하다가 1995년 12월에 정년 퇴임했다.

 

가톨릭 교수 자격을 박탈했음에도 큉의 학문 활동은 왕성하게 계속됐는데, 연구 초점은 가톨릭교회와 신학 울타리를 넘어 좀 더 넓은 분야로 확장된다.

 

 

세계 종교의 기초 연구

 

우선 전통적 신학 주제를 대상으로 한 저서는 종말론을 다룬 「영원한 생명?」(1982),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새로운 출발점에 선 신학」(1987), 사도신경 해설서 「믿나이다」(1992) 정도다. 이에 비해 종교와 문학, 특히 여러 종교에 대한 저작들을 다수 출판했다.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1984), 「문학과 종교」(1985), 「신학과 문학」(1986),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종교」(1988), 「인간성의 변호인들」(1989) 등이다.

 

1990년에 출간한 「세계 윤리 구상」(1992년 우리말 번역)에서 큉은 원대한 계획을 드러냈다. 그는 현재 인류 상황을 고찰해볼 때 생존을 위해선 인류 전체를 위한 윤리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런 측면에서 대 종교들이 인류를 위해 공헌할 바가 매우 큰데, 세계 윤리는 윤리 담지자인 세계 종교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협력을 위해선 종교 간 대화가 필수적이다. 큉은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종교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고, 종교의 대화 없이는 종교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큉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각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리고 긴장과 다툼이 많은 세 종교, 곧 아브라함에게 기원을 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대한 기초 연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실행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인간이 2000년대에 돌입하면서 대 종교들의 취지는 어떠한 것일까? 무엇이 지속돼야 하고, 무엇이 변화돼야 하는가? 영속적인 신앙의 요체는 무엇이며 변화하는 징후는 무엇인가? 종교 사이의 적대는 어디에 있으며, 병존과 분화, 수렴과 갈등의 진원지 그리고 대화의 씨앗은 어디에 있는가?"

 

큉은 세 종교에 대한 연구 결과를 차례로 발표했다. 1991년에는 「유다교」, 1994년에는 「그리스도교」(2002년 우리말 번역), 2008년에는 「이슬람」(2012년 우리말 번역)을 썼다. 큉은 이 책에서 패러다임 분석을 통해 각 종교가 어떻게, 또 왜 오늘날의 모습이 됐는지를 고찰하고 바람직한 미래 모습을 제시했다.

 

큉은 자신이 주창한 세계 윤리 구상이 실현되도록 적극 활동했다.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협의회가 제정한 '세계 윤리를 위한 선언'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 선언은 장차 세계 윤리의 기초가 되는 4가지 기본 원칙을 담고 있다. △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비폭력의 문화 △ 정의로운 경제 질서와 연대성의 문화 △ 진실한 삶과 관용의 문화 △ 남녀의 평등과 동반의 문화를 의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1995년 세계 윤리 구상의 구체적 실현을 돕는 '세계윤리재단'이 설립됐고, 큉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2년 4월에는 큉이 명예교수로 있는 튀빙겐대에 '세계윤리연구소'가 세워졌다.

 

 

큉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중심주의

 

큉은 가톨릭 교수 자격이 박탈된 후, 자신의 신학을 변호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논하는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앙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표현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은 신학 연구 초기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그리스도 이해는 동일하게 머물지 않고 큰 변화를 겪는다. 칼케돈공의회의 교의 결정에 근거한 전통적 그리스도론, 이른바 '위로부터 그리스도론'에서 현대의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역사의 예수에 초점을 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큉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삶은 성경에 토대를 둬야 한다고 확신하는데, 그 성경의 중심은 역사의 예수라고 주장한다. 이런 전제하에 성경에서 출발해 교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성경의 중심인 역사의 예수를 신학의 근본 규범으로 삼아 교회 전통 요소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의미를 축소하거나, 제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방법론은 큉의 대표작 「그리스도인의 실존」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큉은 이 책을 통해 목표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정확하면서도 오늘의 현실에 부응하고 최근의 연구 현황에 바탕을 두면서도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교 설계의 결정적 특징을,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위해서 도출하는 것이다. 이 설계가 원래 2000년의 먼지와 쓰레기에 덮이기 전에 무엇을 뜻했었으며, 이 설계가 오늘 새로이 조명될 때 각자에게 뜻있고 보람찬 삶을 위해 무엇을 뜻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유일한 옛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환영만이 아니라 교회와 전통을 소홀히 한다는 거센 비판도 받는다. 바로 여기에 큉이 극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면서 교회 교도권과 심각한 마찰을 빚은 이유가 있다.

 

교황 무류권에 대한 논쟁은 많은 물의를 빚었지만, 그가 이유 있는 질문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 주제에 내재한 문제를 끄집어내 공론화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큉이 시도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전통 그리스도론의 핵심 내용을 불충분하게 반영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았다. 질문과 시도는 정당하지만 해결책은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 하인리히 프리스(H.Fries, 1911~1998) 신부는 현대인들, 특히 의심과 물음이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설득력 있게 전하려는 큉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큉으로 인해서 불안을 느끼는 신자들 외에도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큉의 저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신은 존재하는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위해 진정한 도움을 발견하거나 신앙을 강화하고, 신앙 이해와 획득을 위해 새롭고 신뢰할만한 입구를 찾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목자와 교리교사, 설교자에게 위에 언급한 두 책은 진정 귀중한 보고(寶庫)가 됐다. 큉은 자신의 말과 글을 통해 교회 변두리에 자리한 사람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를 두고서 교회를 비판적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도달한다."

 

교황 무류권 문제로 큉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칼 라너 신부도 비슷한 취지로 얘기했다. "나는 큉의 여러 입장을 비판적으로 거부하는 견해를 밝혔고 나름대로 항변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스 큉의 긍정적 의미와 자유주의적이고 대중적이며 회의적인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전해주려는 그의 성실한 노력을 존중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1981년 12월 칼 라너는 다른 여러 신학자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큉과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대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한스 큉 신부가 교회 교도권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결국 가톨릭 교수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해서, 또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노력과 성과의 긍정적 측면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계속되는 세계 윤리 정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주목할 만한 시도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29일,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구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 1986년 사제 수품(서울대교구)

▲ 1992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신학 박사학위 과정 수료

▲ 1996년 가톨릭대 대학원 교의신학 전공. 신학박사

▲ 저서 : 「일곱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성사 각론」,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등

▲ 번역 : 「희생양은 필요한가?-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

 

[평화신문, 2013년 9월 8일, 손희송 신부]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변하는 교회”, “교회를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역사에 종속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 현실에 뿌리내린 교회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가 교회라는 말인데,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실례를 교회사 전반에 거쳐 언급하고 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 핍박과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느냐 라는 교회 존립의 문제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법의 위치와 성직자의 지위를 어디에 두느냐 라는 문제가 교회의 변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 등의 영향 아래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왔다.

 

한스 큉은 변하는 교회의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본질과 현실”의 문제로 언급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본질과 현실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는가, 즉 100%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100%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없는가 라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본질과 현실 사이의 한스 큉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결론을 짓는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곧 한스 큉이 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는 아예 이 점을 전제하여 에큐메니즘이니 종교들간의 대화이니 라는 것들을 거론했다. 그의 말대로 교회가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타협이 부득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사명을 지시하시는 선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가능한 것이며, 교회는 스스로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요 15:5 참고). 더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택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교회가 의로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평가로 삼기 때문인 것이다(요 5:30 참고).

 

이상의 논지에서 교회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으니, 따라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장황한 논리가 전개되지만 결론적으로 한스 큉의 입장은 신앙이나 교회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화된 신앙이 교회를 붕괴시킨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물론 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올바른 신앙이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였다”고 수정하고 싶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쪼개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구의 이면에 교회의 통일성이 간과되지는 않는지 제3자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공교회를 위해 신앙의 타협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면 신앙과 교회의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갈등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스 큉은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르와시의 문구를 제시하면서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통치”에 대해 다룬 것은 어쩌면 그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한스 큉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교회가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근원이 되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우리도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제2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입장을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입장에 따를 경우 예수님께서는 교회 탄생의 이유를 제공한 후 교회에 대하여는 객체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스 큉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축소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체계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할 때 비롯되는 교회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신약 교회를 구약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며,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스 큉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반면 하나님나라는 위로부터 돌입한다. 창조의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통치이며,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전단계도 아닌 전조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스 큉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따라서 좌절할지라도 교회가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스 큉이 이와 같이 교회의 책임을 경시하는 듯 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을 정리하면서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교회이다.” 한스 큉은 이 명제에 따른 실천적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직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못된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우리 개신교 교인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밖을 향해 사역자화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제직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직분의 유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어서 교회의 직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는 목회자의 세습으로 인해, 헌금을 많이 한 중직자를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강한 능력의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은 인간적인 자원이 부족할지라도 겸손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요, 인간적인 자원이 풍부함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회가 약한 교회라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후자의 교회를 더 강한 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나 확고한 제도를 강한 교회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또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의 전유물인양,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은사를 받은 어떤 특정 성직자가 임의로 성령의 능력을 부린다고(?) 여겨질 때 그에 대해 신령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허영이라는 본성은 교회관과 관련하여 이상주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교회’, ‘승리의 교회’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상주의의 교회관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는 한스 큉의 입장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한스 큉이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 혹은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성자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할 만한 위험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장선이나 강생의 계속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것 같으면 이런 교회는 한스 큉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반드시 전제하는 개념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한 적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는 한스 큉의 관찰은 아주 타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스 큉은 성만찬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한스 큉이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칭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령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말했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이냐 공재설이냐 기념설이냐 영적임재설이냐 라는 문제는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그가 껄끄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성만찬과 연결시킨 그의 입장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교회의 단일성”, “보편성 ‧ 성성 ‧ 사도성”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개신교의 특징으로 돌리고,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은 가톨릭의 특징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성례를 강조한 나머지 말씀을 등한시 한 것이나 성례에 있어서 세례와 성찬 외에 인위적인 요소들을 첨부하여 7성례를 만든 것은 말씀과 성례를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함을 어불성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해 개신교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한스 큉의 입장에는 다소 오해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스 큉은 교회의 이러한 속성들에 “개신교적 기준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렇게 말한 그가 또 말하기를 이러한 교회의 속성들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그 속에 있어야 할 본질들이 빠지게 되면 이러한 속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스 큉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톨릭교회가 단지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명분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집나간 자식들이 될 것이며, 교회의 단일성에 피해를 끼친 분리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른 속성들을 희생해서까지 단일성을 이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한스 큉의 입장을 헌신짝처럼 취급할만한 오류들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 눈감아야 한다면 이에 대해 진정한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에큐메니칼과 가톨릭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한스 큉의 입장에서는 하나 됨이 가능하겠지만,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큉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본질이 빠진 교회의 속성(여기서는 단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한스 큉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무엇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한스 큉의 입장은 성역이나 성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되며(이렇게 볼 때, ‘성지순례’라는 용어는 어불성설이며 기독교회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와 성찬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교회’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부터의 교회’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 중 어느 편에 더 치중하는가? 한스 큉의 입장은 양자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을 인용한 한스 큉의 입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가 없는가? 한스 큉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과연 ‘위로부터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가? 물론 한스 큉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지 않으심을 강조했을 것이고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곁들이자면 하나님의 임재가 옛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났듯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며,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듯이 돌감람나무인 교회를 버리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멀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은 성경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시대의 맹신을 떨쳐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5. “교회 내의 봉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봉사권과 연관되는 교회의 직분(특히 사제/주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봉사에 있어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라는 만인제사장의 입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양자에 대해 한스 큉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어느 편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의 직분관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제시했다면,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또 후자에 따라 이를 적극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스 큉은 이 양자의 입장을 항상 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의 봉사권이 가진 부동한 두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즉 한 직분관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어떻게 절충시키는가 라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물론 한스 큉이 가톨릭 측의 인물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 밖을 향한 봉사와 관련하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스 큉의 일관된 관점은 교회를 세계 속의 교회로 보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계 속의 교회가 교회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회가 세계 속에서 침묵함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세상 속에서의 지배욕을 포기함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과 정치에 결탁하여 추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스 큉의 이 말은 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또 교회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세계와 결합되고,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이 에큐메니즘에 치우친 학자임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 입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스 큉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의 과업이 복음전도라는 점이다. 한스 큉의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순수한 복음전도가 어떻게 에큐메니즘과 결탁될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변하는 교회”, “교회를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 이는 교회가 역사에 종속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 현실에 뿌리내린 교회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형교회, 즉 보이는 교회가 교회라는 말인데,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한스 큉은 이에 대한 실례를 교회사 전반에 거쳐 언급하고 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 핍박과 이단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느냐 라는 교회 존립의 문제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법의 위치와 성직자의 지위를 어디에 두느냐 라는 문제가 교회의 변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 등의 영향 아래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왔다.

 

한스 큉은 변하는 교회의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본질과 현실”의 문제로 언급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본질과 현실은 항상 상충되는 관계에 있는가, 즉 100%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100%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없는가 라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본질과 현실 사이의 한스 큉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서 결론을 짓는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곧 한스 큉이 말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그는 아예 이 점을 전제하여 에큐메니즘이니 종교들간의 대화이니 라는 것들을 거론했다. 그의 말대로 교회가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타협이 부득이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사명을 지시하시는 선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가능한 것이며, 교회는 스스로 “세계를 위하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요 15:5 참고). 더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택자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교회가 의로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평가로 삼기 때문인 것이다(요 5:30 참고).

 

이상의 논지에서 교회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으니, 따라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이 질문을 둘러싸고 장황한 논리가 전개되지만 결론적으로 한스 큉의 입장은 신앙이나 교회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화된 신앙이 교회를 붕괴시킨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물론 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올바른 신앙이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였다”고 수정하고 싶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교회의 하나 됨을 쪼개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문구의 이면에 교회의 통일성이 간과되지는 않는지 제3자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공교회를 위해 신앙의 타협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떠면 신앙과 교회의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갈등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한스 큉은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르와시의 문구를 제시하면서 우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통치”에 대해 다룬 것은 어쩌면 그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한스 큉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교회가 없었으나, 교회가 예수님을 근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근원이 되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우리도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이 제2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입장을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입장에 따를 경우 예수님께서는 교회 탄생의 이유를 제공한 후 교회에 대하여는 객체로 물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한스 큉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축소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가톨릭의 지나친 교권체계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교회를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할 때 비롯되는 교회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큉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신약 교회를 구약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며,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스 큉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반면 하나님나라는 위로부터 돌입한다. 창조의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통치이며,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전단계도 아닌 전조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스 큉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따라서 좌절할지라도 교회가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스 큉이 이와 같이 교회의 책임을 경시하는 듯 한 입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 역시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을 정리하면서 한스 큉은 하나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교회이다.” 한스 큉은 이 명제에 따른 실천적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성직화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할 뿐, 직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못된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이므로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입장에 대해서는 우리 개신교 교인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밖을 향해 사역자화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만 제직화하고 있으며, 여기서 직분의 유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어서 교회의 직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부 교회는 목회자의 세습으로 인해, 헌금을 많이 한 중직자를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강한 능력의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은 인간적인 자원이 부족할지라도 겸손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요, 인간적인 자원이 풍부함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회가 약한 교회라는 역설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하여 후자의 교회를 더 강한 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나 확고한 제도를 강한 교회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또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회가 성령의 전유물인양,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은사를 받은 어떤 특정 성직자가 임의로 성령의 능력을 부린다고(?) 여겨질 때 그에 대해 신령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허영이라는 본성은 교회관과 관련하여 이상주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교회’, ‘승리의 교회’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상주의의 교회관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는 한스 큉의 입장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한스 큉이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 혹은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성자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할 만한 위험 요소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스 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장선이나 강생의 계속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것 같으면 이런 교회는 한스 큉의 관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반드시 전제하는 개념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교회를 따로 떼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한 적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는 한스 큉의 관찰은 아주 타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스 큉은 성만찬을 통해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한스 큉이 무형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칭한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가령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 것처럼 말했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율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이냐 공재설이냐 기념설이냐 영적임재설이냐 라는 문제는 에큐메니즘을 표방하는 그가 껄끄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성만찬과 연결시킨 그의 입장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교회의 단일성”, “보편성 ‧ 성성 ‧ 사도성”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개신교의 특징으로 돌리고,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은 가톨릭의 특징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성례를 강조한 나머지 말씀을 등한시 한 것이나 성례에 있어서 세례와 성찬 외에 인위적인 요소들을 첨부하여 7성례를 만든 것은 말씀과 성례를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제시함을 어불성설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해 개신교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한스 큉의 입장에는 다소 오해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스 큉은 교회의 이러한 속성들에 “개신교적 기준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렇게 말한 그가 또 말하기를 이러한 교회의 속성들은 본질 자체가 아니며, 그 속에 있어야 할 본질들이 빠지게 되면 이러한 속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스 큉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속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톨릭교회가 단지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명분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집나간 자식들이 될 것이며, 교회의 단일성에 피해를 끼친 분리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른 속성들을 희생해서까지 단일성을 이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 한스 큉의 입장을 헌신짝처럼 취급할만한 오류들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 눈감아야 한다면 이에 대해 진정한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에큐메니칼과 가톨릭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한스 큉의 입장에서는 하나 됨이 가능하겠지만,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큉이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한다면 이는 본질이 빠진 교회의 속성(여기서는 단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한스 큉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무엇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있다. 한스 큉의 입장은 성역이나 성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되며(이렇게 볼 때, ‘성지순례’라는 용어는 어불성설이며 기독교회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례와 성찬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래로부터의 교회’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부터의 교회’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 중 어느 편에 더 치중하는가? 한스 큉의 입장은 양자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을 인용한 한스 큉의 입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가 없는가? 한스 큉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과연 ‘위로부터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떠나지 않는가? 물론 한스 큉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지 않으심을 강조했을 것이고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일방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곁들이자면 하나님의 임재가 옛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떠났듯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으며,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듯이 돌감람나무인 교회를 버리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멀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황금률은 성경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시대의 맹신을 떨쳐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5. “교회 내의 봉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하여

 

 

 

한스 큉은 교회의 봉사권과 연관되는 교회의 직분(특히 사제/주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 내의 봉사에 있어서의 수위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라는 만인제사장의 입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어쩌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양자에 대해 한스 큉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어느 편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의 직분관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제시했다면,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또 후자에 따라 이를 적극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스 큉은 이 양자의 입장을 항상 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스 큉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의 봉사권이 가진 부동한 두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즉 한 직분관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어떻게 절충시키는가 라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장로교회의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물론 한스 큉이 가톨릭 측의 인물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만).

 

계속하여 한스 큉은 교회 밖을 향한 봉사와 관련하여 “세계 속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한스 큉의 일관된 관점은 교회를 세계 속의 교회로 보는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계 속의 교회가 교회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한스 큉은 말하기를 교회가 세계 속에서 침묵함으로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세상 속에서의 지배욕을 포기함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과 정치에 결탁하여 추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스 큉의 이 말은 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그는 또 교회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세계와 결합되고, 세계에 책임을 짐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이 에큐메니즘에 치우친 학자임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 입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스 큉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의 과업이 복음전도라는 점이다. 한스 큉의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가르쳐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순수한 복음전도가 어떻게 에큐메니즘과 결탁될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