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너,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초월성'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20세기를 빛낸 가톨릭교회 신학자 중에서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만한 인물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형 후고 라너(Hugo Rahner, 1900~1968)와 더불어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 영성가이자 사목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단지 가톨릭교회의 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폭넓고 깊은 숙고를 바탕으로 현대 세계에 이정표를 제시한 사상가였다.
-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칼 라너는 신학자이자 영성가였으며 현대 세계 이정표를 제시한 사상가였다. 사진출처=www.karl-rahner-archiv.de
부모에게 책을 헌정한 라너 형제
라너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요셉 에리히 라너(1868~1934)와 어머니 루이제 라너(1875~1976)는 1896년 10월 20일 결혼해 7남매를 뒀다. 그 중 후고는 칼보다 3년 먼저 예수회에 입회해 나중에 인스브루크 신학대에서 교회사와 교부학을 가르쳤다. 두 아들 칼과 후고는 아버지의 60세 생일을 맞이해 자신들이 집필한 375쪽에 달하는 책을 아버지께 헌정하기도 했다.
교사인 아버지는 독일어, 불어,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자녀에게 교육과 인문과학의 가치를 알려주며 자신의 자녀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도록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독일의 전형적인 가톨릭 어머니상(像)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녀들 학문 여정을 동반했지만 그것은 학문적 차원이라기보다 인성과 신앙 차원이었다. 특히 칼과 후고의 학문적 성공을 기뻐하기보다는 그들이 교만해질까 봐 염려했다고 한다. 라너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도록 가르쳤고, 나아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아버지의 60세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75세 생일에 칼과 후고는 자신들 강론과 강연 원고를 책으로 엮어 어머니께 헌정했다.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감각을 지녔다. 첫째 아들 게오르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수용소에 갇히게 되자 그녀는 직접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 자신은 자녀에게 자기 사랑을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들 후고가 뇌종양으로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퍼하기보다 아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말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준주성범」을 즐겨 읽은 10대 시절
1910년 학교에 입학한 칼은 처음엔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다. 그는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아이였고, 성적 또한 중간 정도였다.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많아, 수업을 받지 않으려고 교실에 악취탄을 뿌리기도 했다. 또 교사에게 거짓말을 해 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독일 학제로 8학년이 되면서 최고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을 지닌 칼은 생각하는 학생이었고, 잘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칼은 종교교사 마인라드 포겔바허(Meinr ad Vogelbacher, 1879~1965)에게 영향을 받았다. 포겔바허 교사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지적이며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고, 라너의 집안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러 종교를 가르쳤는데, 편견 없는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 방식이 제자 칼 라너에게 철학적ㆍ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칼은 「준주성범」을 영적독서로 읽곤 했는데 그 당시 십대 청소년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격렬한 운동보다 산책을 선호했다. 주말엔 산장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만나곤 했는데, 이 모임을 통해 당시의 유명한 가톨릭 사제인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를 만나게 됐다. 라너는 후에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수강했는데, 결국 라너는 1964년 뮌헨대학교에서 과르디니 후임으로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예수회 입회
1922년 칼 라너는 최종성적 '매우 우수'로 학교를 졸업했다. 장래 희망 학업으로 '신학'을 선택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예수회에 입회했다. 말년의 라너는 자신이 왜 예수회에 입회했는지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신비스러운 성소 경험과 같은 극적 체험은 없었다고 했다. 예수회원이 된 이유는 신앙의 뿌리가 깊은 가정 분위기와 성격 탓이라고 했다.
라너는 공동체 삶을 추구하는 수도생활을 선호했고, 다양한 형태의 수도생활 중에서 전례 위주의 삶보다 좀 더 개방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다. 또한 자신이 사변적 성격이어서 예수회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펠트키르흐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곳에선 형 후고가 수련을 받고 있었지만, 형은 동생의 성소를 알지 못했다. 동생 칼이 성소에 관해 형에게 털어놓지 않아서였다. 형 후고는 동생 칼의 편지를 통해, 부모는 학교 종교교사를 통해 칼이 예수회에 입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포겔바허 교사는 칼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투덜대는 성격이라, 예수회원이 되기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칼 라너는 형 후고의 뒤를 따라 1922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의 수련 동기는 무려 56명이나 됐다. 라너는 수련원에서 예수회원이 되기 위한 기초 교육을 받았는데, 하나는 이냐시오 영성을 자기 자신과 통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삶과 성소를 시험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련원 규칙생활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즐길 정도였다. 그는 아침에 일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모든 일을 주로 오전에 다 해결했다. 수련원에 살면서 그는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목표를 추구하지 않았다. 단지 수도의 기초와 영적인 저작들에 집중했다.
그는 「등대」라는 잡지에 기도에 관해 기고했는데 그의 글은 나중 그의 철학적 신학적 기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작아지고 좁아지며 결국 그들에 의하여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하십니다"(야고 4,8 참조). 이 글에서 그가 평생 주제로 다룬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무한성을 엿볼 수 있다. 칼 라너는 유한한 것을 넘어서 정신은 지상의 것에 자신을 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평생 주장했다.
초월철학과 신비주의 체험 공부 병행
2년간 수련생활 후 그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요셉 마레샬(1878~1944) 그리고 피에르 루세로(1878~1915)에 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에릭 프르치바라(1889~1972)에게 강의를 들었다. 라너는 특히 요셉 마레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셉 마레샬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를 접목하려고 시도했던 벨기에 예수회원이자 철학ㆍ심리학 교수였다. 철학에서 마레샬이 사용한 방법을 일컬어 초월론적 방법론이라 한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한층 풍요롭게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라너는 마레샬의 초월철학 이외에도 신비주의와 신비체험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초월적 정신을 소유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골몰했다.
철학 공부 이후 2년의 실습과정 끝낸 그는 네덜란드 발켄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주로 그리스와 라틴 교부를 탐독했다고 알려졌고, 오리게네스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때 양봉에 취미를 가졌는데 라너의 부지런함이 꿀벌을 본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사제수품(1933년)과 제3수련이라는 예수회 마지막 양성과정을 마친 라너는 1934년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이 대학에는 마틴 하이데거(1889~1976)가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라너는 예수회 동료 요한네스 밥티스트 로츠(1903~1992)와 함께 그의 세미나를 수강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개념은 라너에게 인간을 구체적인 실존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줬다. 라너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실존하면서 자신의 한계성을 넘어서려는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었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유한적 인식의 형이상학 - 칸트, 마레샬, 하이데거의 개념을 이용한 해석'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논문을 제출한 후 그는 곧바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신학교수가 됐다. 하지만 라너는 1937년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지도교수가 논문 인준을 거부해 자신의 철학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라너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탈락된 철학논문은 1939년에 「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라너는 한참 후인 1970년에 인스브루크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8) 칼 라너 (중)
시대, 사회적 문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하고자 노력
- 칼 라너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사목과 교육, 연구활동 병행
라너는 1936년 12월 19일 「그리스도의 늑방으로부터」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잘츠부르크에서 '종교철학의 기초'를 주제로 강의했는데, 강의록은 1942년 「말씀의 청자」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라너는 1937년 가을 인스브루크대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첫 강의는 '은총론'이었다.
그러나 인스브루크 신학대는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하고 새로운 교육법을 제정하면서 해체됐다. 신학 교수들은 무기한 정직을 당했고 예수회 회원들은 추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학과는 스위스로 이전했다. 형 후고 라너는 스위스로 갔지만 동생 칼 라너는 비엔나로 가서 사목을 하며 영신수련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양성과 사제 평생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 기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사목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세상에서 어떠한 과제를 가졌는지 숙고했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강연했고, 교회 일치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개방적인 자세로 교회 고위 성직자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갈등은 그가 비오 19세 교황의 지지를 이끌어내 무마됐다.
전쟁이 끝나자 라너는 다시 인스브루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술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부지런한 성격 탓에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한 뒤 연구교육 활동을 했다고 한다. 강의 분야는 창조론, 원죄론, 고해성사론, 성품성사론, 병자성사론이었고, 라틴어로 강의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주일미사, 고해성사, 영신수련 동반, 본당공동체 지도 등 사목활동을 병행했다.
탁월한 학문적 업적
그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다양한 학회를 통해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의 관계를 연구하고 발표했다. 라너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1905~1988)과 함께 새로운 가톨릭 교의신학을 기획하기도 했다. 또 다양한 신학종합사전과 여러 총서 그리고 신학저널이 탄생하도록 힘썼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중요한 기초자료로는 「신학과 교회를 위한 사전」, 「세상의 성사」, 「신학 소사전」, 「논의제기」, 「사목신학편람」, 「구원의 신비」, 「공의회」, 「공의회 소문헌」 등이 있다. 개인논문 모음집으로는 16권에 이르는 「신학논총」이 있다.
라너는 시대 문제에 즉각 응답하기 위해 소논문을 주로 작성했다. 저술은 4000여 편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그중에는 체계적으로 작성된 방대한 분량의 저술도 찾아볼 수 있다. 철학박사 청구 논문인 「세계 내 정신」은 라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서양의 중세 사상과 근대주의를 현대적 차원에서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두 번째 대표작인 「말씀의 청자」는 철학 및 기초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에 대한 숙고다. 여기서 라너는 인간을 하느님 계시를 순종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라너는 영성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쓴 영성서적으로는 「침묵 속의 만남」, 「성시간과 수난묵상」, 「기도의 필요성과 축복」 등이 있다.
- 국내에 소개된 칼 라너 저서들.
그의 학문적 열의는 평생 그칠 줄 몰랐다. 1972년에는 「교회의 구조변경」을, 1976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을, 그리고 그가 사망하던 해인 1984년에는 「교회 일치-실질적인 가능성」을 출판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신학자문으로 참여해 큰 공헌을 했고,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개최된 독일 주교회의(1971~1975)에도 참가해 영향을 미쳤다.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 교황청과 충돌
신학자로서 삶이 성공과 명성으로만 치장되진 않았다. 그는 1950년대 교회와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라너는 기존 이해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고자 했다.
라너의 눈에 교회는 분명히 거룩한 것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행업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교회는 죄 있는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이후 파괴된 유럽 사회에서 새로운 교회상을 세우려 했다. 1947년 '죄인의 교회', 1954년 '현대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인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성령을 끄지 마시오!'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당시 주교들은 라너의 새로운 교회관에 거세게 반대했다.
라너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아론과 관계된 것이었다. 1950년 '마리아 몽소승천'(성모승천) 교리가 반포되자 라너는 여기에 반대 의견을 썼다. 마리아 교리를 반대한다기보다 '교리 반포' 행위에 대한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교리 반포는 교의 발전에 대한 정당성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중에서도 성경적 근거가 매우 중요한데 성경에는 성모승천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기 어려운데 교리를 반포하는 것은 가톨릭 지성인뿐만 아니라 타 교파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으로 이해
라너가 보기에 성모승천은 교리로 선포되지 않고도 단순히 교회의 믿을 내용으로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라너가 마리아론을 현대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라너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주목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십자가 위로 어둠이 덮치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증언하는데 이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옛 세상이 몰락했음을 뜻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그와 동시에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성경의 증언은 새로운 세상이 들어섰음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세상의 종말이자, 인간 영육의 완성이 이뤄지는 세상의 새로운 창조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그리스도론적ㆍ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였다. 그는 성모승천에 관한 믿음을 교리로 선포할 정도로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에 대해 393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논문 「오늘날 마리아론의 문제들」을 작성했다.
그러나 로마의 시각에선 라너의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독특한 구원적 위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를 통해 인간 부활이 이뤄진다는 라너의 인간학적ㆍ종말론적 숙고는 마리아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라너의 새로운 마리아론이 마리아만의 독특한 위치를 흔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라너의 저술은 출판 검열로 출판되지 못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그는 교회가 믿고 있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원죄론적 관점보다는 오히려 구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하느님을 받아들여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하느님 구원 은총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생물학적ㆍ육체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학적ㆍ구원론적 관점, 즉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긍정이라는 시각에서 고찰돼야 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라너의 이러한 주장에 교황청은 다시 한 번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율리우스 되프너(1913~1976) 추기경의 중재로 정직을 면했다.
미사 공동 집전 보편화에 기여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에도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제의 미사 공동 집전은 생소했다. 라너는 교부들의 저술을 역사적으로 탐구해 「다수의 미사와 하나의 희생」이라는 논문을 1951년 완성했다. 여기서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은 교회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공동 집전이 드물었던 이유는 다수의 사제가 한 미사 안에서 오직 한 성체성사를 거행하기에 하느님 은총이 적게 베풀어진다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이러한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라너에게 경고했지만 결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너의 주장을 받아들여 미사 공동 집전을 허용했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7일,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자신의 한계 넘어 하느님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
- 칼 라너는 시대가 제가하는 문제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중심의 신학으로 초월론적 방법론을 펼치며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라너는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때때로 그러한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는 민감한 것이기도 했지만 라너는 이러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1968년에 반포된 윤리 회칙 「인간 생명」은 인공피임을 단죄했다. 라너는 교도권 입장을 존중했지만, 회칙이 개인의 양심적 결정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로운 성문화와 피임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문화에 대한 회칙의 강경한 입장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 심각한 문제였던 사제 독신제에 관해서도 라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라너는 사제 독신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신제를 없애면 사제직이 속물적이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론상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사제 독신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엔 강하게 반대했다. 진지한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싸구려 성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눈엔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라너는 오히려 독신제를 '십자가의 우둔함'이라고 표현하며 옹호했다.
1970년 교황의 무류권 문제를 제기한 한스 큉(1928~ )을 향해 라너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큉은 계시된 진리와 이 진리를 교의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인간 개념으로 규정된 것은 언제나 왜곡이 일어나기에 계시 진리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교의적인 문장은 계시 진리라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교회 가르침을 보호하고 때론 교리를 선포하는 교황에겐 신앙에 대한 무오류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인간의 사고로 개념화되는 순간 계시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교황이 정한 교의를 신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러한 큉의 주장을 위험하게 여겼다. 큉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 즉, 하느님의 강생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생이 신자들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이해 방식과 능력에 상응해 이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너는 진리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정리돼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반대한다면, 즉 하느님의 구원 진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전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 계시가 의미 없고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류성의 거부는 결국 성경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오류 없이 하느님 말씀을 인지하고 바르게 기록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기록한 성경이 계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물론 언어를 통한 개념적 정리가 진리의 심연을 다 열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라너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멀리 뛰어넘어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칼 라너 신학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초월 행위를 숙고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라너는 경험되는 구체적 사물 또는 사건을 뛰어넘어 그 사건과 사물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전제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고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내의 정신'이다. 세계 내에서 정신적 존재로 자신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그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하는 존재'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을 벗어나 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자이며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자기 스스로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선사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그 어떤 존재, 세상의 모든 존재를 허락하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절대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분이 곧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자에게 그 존재를 허락하고 빛을 비추는 최종 근거, 즉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현실이자 무한한 지평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현실이지만 무한하기에 인간에게는 신비로 다가온다. 절대자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상응해 진리의 빛을 비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부하듯이 사물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무한한 현실은 인간에겐 신비로운 존재이자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조차도 삼켜버리는 어두운 심연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느님 존재는 결국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부여하는 무한의 현실이고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절대적 신비인 것이다.
칼 라너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의 전통 신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제기되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놓으려 했다. 그는 교회의 권위적 방법론을 탈피하고 '아래에서 위로'라는 인간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하느님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인간이다.
이를 위해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의 통합을 시도한 요셉 마레샬의 철학을 수용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공한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현시점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현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제한돼 있음에도 무한한 현실인 하느님에 대해 무한히 개방된 존재다. 인간은 무한한 신비인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해 나아간다. 이러한 가운데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며 더욱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은 무한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졌고, 역사 내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에 상응해 구성하도록 노력한다.
1984년 초 칼 라너는 매우 바쁜 시기를 보냈다. 2월 11~12일 프라이부르크대교구 가톨릭 학술원에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며칠 지난 2월 17일 런던에서 강연한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것이 라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2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한 그는 3월 5일 인스브루크 공동체에서 생일 축하연을 가졌다. 그 이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일으켜 코피를 흘렸다. 3월 9일 입원한 그는 중간에 회복하는 듯 했지만 상태가 악화돼 3월 30일 밤 11시 26분에 선종했다. 그는 4월 4일 인스브루크 예수회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연구는 근대주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근대주의 도전을 극복하려 한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자신의 신학으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격의 세 가지 특징을 잘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는 '본연성',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성',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성'이 그것이다.
물론 라너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적인 하느님의 무한성과 독자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제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라너의 신학적 기획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너는 자신의 신학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영성적이자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에게 인간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면에서 주체적인 존재다. 그리고 인간이 주체적인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14일,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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