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주님 공현 대축일(다해)

나뭇잎숨결 2022. 1. 2. 10:37

 


[강론1]윤여홍 시몬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기쁜 소식
 
찬미 예수님! 부제반 때의 일입니다.
저는 동기 부제들과 함께 졸업여행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하루는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으로만 듣던 그곳에서 직접 미사를 봉헌하니 감동과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미사를 봉헌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목격한 동방박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뵙기 위해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메시아께서 탄생한 곳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만 할 뿐, 기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똑같이 ‘기쁜 소식’을 들어도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기뻐하지만,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소식이 아무리 ‘기쁜 소식’이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만난 메시아를 이웃들에게 기쁘게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는 삶은 어떠합니까?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기쁘게 선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날마다 경배를 드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에 만족하며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얻은 은총과 기쁨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주셨듯,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동교구 윤여홍 시몬 신부
 

 

 
[강론2]김원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이제는 우리 공현을..
 
이 땅과 온 세상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한창이고 인간의 삶은 고단하고 피폐하며 두렵기만 합니다.
나약한 인간은 세상의 두려움에 용기를 잃거나 숨거나 눈을 감음으로써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무시하려 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더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아기의 모습을 가진 주님의 공현은 주님이시기에 언제든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 즈음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예수님에게 공현은 그저 쉬운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마태오 26,39 참조) 세상을 향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우리와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비우시는 큰 결심을 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모습으로 오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거리는 둘 수 있지만, 오늘 희망을 선포하는 하느님과는 거리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과는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을 위한 간섭은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을 향한 뒷담화는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슬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내가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두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비우시고, 우리의 희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주님처럼 베푸는 것입니다.
희망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증거 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 아기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그 사실을 항상 깨어 믿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로부터 변화되어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여러분의 공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앙과 말씀으로 세상의 희망이 되는 여러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부산교구 김원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론3]박혁호 미카엘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동참하시는 주님
 
새해 첫 주일인 오늘은 ‘주님 공현公顯 대축일’입니다.
‘주님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신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방 민족으로 표현된 동방의 박사에게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심으로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실 것을 알아차리고 태어나실 위대한 분을 경배하기 위해
별의 인도를 받아 먼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날 곳이라 생각하여 그곳에 갔지만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별의 인도를 받아 드디어 그분이 태어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마을인 베들레헴, 그것도 가축들의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마구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온 세상의 임금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고 경배하며 그들이 가져간 예물을 드린 후
자기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궁금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실 위대한 분이 왜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닌 유다의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 그것도 화려한 궁전 같은 곳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그분이 누인 곳도 화려한 요람이 아닌 가축들의 먹이통인 구유일까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빵의 집’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는 가축의 먹이통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이 먹히는 삶을 위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에게 먹히시어 힘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구간에 태어나심은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음을 드러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친구로 오셨음을,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고 계심을 드러내 주는
표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고통, 죽음이라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위에서 내려다보시며 동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고통에 함께 동참하시며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도 이 어려움에 집중되다 보니
자주 두려움에 휩싸여 평화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 안에서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드리고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내 처지와 상황을 깊이 이해하시고, 이미 우리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이끌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깊은 위로와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 기도 가운데 주님과 더욱 자주 만나 힘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마산교구 박혁호 미카엘 신부




 



[강론4]<거짓말만 안 하면 절대 외로울 일 없다>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가?’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과 헤로데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에게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 메시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누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깊은 산속에 유명한 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인 혜통대사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는데 누구에게 주지 자리를 넘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 스님은 두 제자를 불렀습니다.
    “오늘 너희에게 곡물 한 포대기를 나눠줄 것이다. 봄이 되거든 이 씨앗을 파종하여 정성껏 길러야 할 것이야. 또한, 가을이 되어 곡식을 거둬들이거든 나에게 가져오도록 하여라.”
주지 스님은 이렇게 분부한 다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곡식을 더 많이 거둔 사람이 미래 주지가 될 것이야.”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곡식이 무르익자 제자인 ‘지능’은 곡식을 한 짐 가득 싣고 주지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른 제자인 문원은 빈 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혜통대사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빈손으로 올라오는 것이냐?”
    “스님,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파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곡식이 발아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쌀 한 톨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올라오는 길입니다.”


    혜통은 그 대답을 듣고 그 즉시 문원을 미래의 주지로 지명했습니다. 이에 다른 제자인 ‘지능’이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혜통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스님, 분명 곡식을 더 많이 거둔 사람에게 주지 자리를 물려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쌀 한 톨 얻지 못한 문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려 하십니까. 저는 스님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혜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 너희 둘에게 준 씨앗은 모두 삶았던 씨앗이다. 그런데 어찌 삶은 씨앗에서 싹이 날 수 있겠느냐?”


    장자는 말합니다.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 내지 않아도 슬픔이 느껴지고, 진실로 화를 내는 사람은 성내지 않아도 화가 느껴지며, 진실로 다정한 사람은 웃지 않아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이 말은 ‘진실’이 작용하는 공간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육체적 관계, 정신적 관계, 마음적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자주 만나도 정신적으로는 싫은 사람일 수 있고, 아무리 정신적으로 추앙하더라도 심적으로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거짓’이 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수렁에 빠져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거짓으로 자신의 영광을 잃는 것을 방어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나의 영광을 포기하여 진실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모송을 바칠 때 항상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진실해지기 위해 한 노력이 바로 세 가지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황금은 아기 예수님이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유향은 예수님이 ‘대사제’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몰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되실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몰약은 죽은 이의 몸에 바르는 것인데 곧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향은 대사제가 성소에서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 생각을 봉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금은 지성소에서 하느님 뜻을 상징하는 십계명 판이 들어있는 계약의 궤를 덮는 데 쓰인 것인데 곧 ‘나의 뜻’, 또는 ‘나의 자유와 의지’를 봉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준비한 이 세 가지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육체와 혼과 영을 내어주셨기에, 우리도 그분을 위해 나의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교만, 그리고 나의 자유까지도 내어드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게 되어있고 그러면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소를 알려주지 않으며 놀러 오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래서 별을 보내셨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감추고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마음 안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어서 외로워집니다.


    “오늘 딸기는 산지에 비가 와서 평소보다 덜 달고, 조직이 다소 무릅니다. 수박, 참외는 아직 제철이 아니어서 덜 답니다. 구입에 참조하십시오.”
    한 백화점의 식품매장에 실제로 걸려있던 안내문입니다. 이 백화점은 단순히 딸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팔았던 것입니다. 이런 솔직함이 진실한 관계를 원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백화점에 또 가게 될 것입니다.


    외로워지고 싶지 않거든 거짓말하지 맙시다.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영광을 포기합시다. 그러면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거짓말을 하면 나의 영광을 위해 너를 이용하겠다며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사람이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이유는 스스로 거짓의 가면을 쓰기 때문입니다.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선물에 담긴 깊은 의미- 양승국신부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이 왜 하필 황금, 유향, 몰약이었을까요? 이왕이면 갓난아기에게 당장 필요한 일회용 기저귀나 분유, 장난감이 아니었을까요?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강론6]


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긴 강론: 베들레헴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박태범 라자로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는 요 며칠 사이 성탄, 성가정 축일, 천주의 성모대축일을 지내고 송구영신의 제를 봉헌하였고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신 것을 기리는 대축일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아기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 인성을 갖춘 동시에 천주성을 갖춘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교의사 안에서 볼 때 2세기 경에 아기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아기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신성의 가능성만을 갖추고 있었는데 세례를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의 제2격인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의 경배는 아기 예수님의 신성과 왕권과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종의 황태자 알현입니다. 애니매이션 라이언 킹에서 아기 사자의 공현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 보면 모든 창생들이 다 와서 경배합니다. 아기 사자는 나중에 황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황태자입니다. 성탄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탄생한 날이라면, 주님 공현 대축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경륜이 온 세상과 모든 백성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것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공현이라는 말은 프랑스어로는 Epiphanie(에피파니)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Epiphania(에피파니아)라고 하며, 그리스어로는 ‘Ἐπιφανεία’(에피파네이아)라고 합니다. 희랍어 에피파네이아는 일차적으로 ‘Ἐπι + φανεία’인데 ‘Ἐπι’9에피0라는 접두어는 ‘위’와 ‘바깥’을 나타내는 전치사이고 ‘φανεία’파네이아라는 말은 ‘나타내다’‘드러나다’‘발현하다’‘현현하다’ ‘나타나다’‘보여주다’라는 뜻을 지닌 phainein이라는 희랍어 동사의 명사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Epiphania는 일차적으로 ‘위 혹은 바깥으로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평범하게 보이는 어떤 인간이나 사물 혹은 현상을 통하여 그것을 능가하는 신성 혹은 천주성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Ἐπιφανεία’는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일상적인 용어로 또 다른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왕이나 황제가 와서 도착하여 백성들에게 얼굴을 직접 보여주며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피파니아는 공현이지만 그 보다 내현(來現)입니다. 내현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얼굴을 갖춘 하느님 방문의 직접성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얼굴로 이 세상에 직접 와서 자신을 현현하고 드러내시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천둥이나 번개 등의 신비로운 자연현상, 고목이나 커다란 바위덩어리, 거룩한 힘, 예언자 혹은 예언자의 말씀 안에 통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세상에 오셔서 직접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천상 구중궁궐에 유아독존으로 팔짱끼고 자존하시는 천지의 창조주만이 아니라, 중생의 구원을 위해 인간 세상에 뛰어드시어 개입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가족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첫 선을 보인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세 박사에게 공적으로 얼굴을 드러내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이 세상에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성탄 대축일에는 아기 예수의 ‘비천함’이 드러나고 공현 대축일에는 하느님 아들의 ‘위대하심’이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아기 예수님은 비천하게 보이지만 왕중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설정된 배경은 별이 빛나는 밤이며 에피파니가 벌어지는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사건의 조연은 헤로데입니다. 왕중왕의 탄생 앞에서 인간은 서로 다른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편으로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리고 기뻐하며 경배하려는 동방박사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중와의 탄생에 불안을 느끼고 제거하려는 당대의 정치적인 왕 헤로데와 그 무리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오로지 경배할 목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찾지만, 헤로데 임금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여기고, 왕의 수하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태어난 장소를 알아맞히는 전문지식을 자랑합니다. 헤로데와 그 무리들은 메시아가 탄생할 곳으로 베들레헴을 지목합니다.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조그만 고을 베들레헴은 온 구약 시대를 통틀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빈촌이었지만, 다윗의 고향(1사무 16장)이기에.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는 당연히 여기서 탄생한다는 예언과 속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기원전 1010-970년경 재위)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란 곳이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는 전설(1사무 16,1-13)의 발원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군주로 여겼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이민족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할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아도 당연히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고 기대하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의 신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신앙 교육을 위해 복음서를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는 모든 신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특히 유다인 출신 신자들이 유다교 신앙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당시의 독자들이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며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서 인정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의 민족 역사인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작가 마태오는 구약성서의 예언이 역사의 예수님을 통해 곧이곧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른바 '성취 인용문'이라는 문학적인 장치를 15회 가량 사용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삼왕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대사제와 율사들에게 메시아 예언에 대해 물어 봅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장1절을 제시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그런데 이 인용문을 앞뒤로 감싸 주는 표현이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 고 하였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5-6절).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성취 인용문 형식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마치 다윗 같은 인물이 등장해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해 내리라는 기대(메시아 待望 사상)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메시아라면 기본적인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선구자인 엘리야가 등장해야 했으며, 당연히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아들이고(마태 1,1-16), 엘리야 격인 세례자 요한이 있었으며(마태 17,12-13), 구약성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났으니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에 틀림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와 오늘 복음의 주요 등장인물은 동방박사 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유다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인식한 전 세계 이방인의 첫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모든 인류가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하나가 된 기념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방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왔던 세 박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발타살·멜키오르·카스퍼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각각 황인·흑인·백인이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점성가들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있는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큰 별은 늘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별은 에피파니를 위한 성현의 기능적 도구였습니다. 성현은 거룩함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룩한 신격으로 숭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신앙을 바탕으로 우주 삼라만상(參羅萬像)에 관하여 탈신격화의 작업을 하였습니다. 별을 비롯한 하늘과 땅과 달과 별은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그것들은 신성 자체가 아니라 신성을 가리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는 세속(世俗)이지만 동시에 거룩함이 나타나는 현장이 됩니다. 속(俗)을 통하지 않고 성(聖)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멩이 하나라도 거룩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하느님을 설명하는 편지이며 책입니다. 인간과 자연은 다 같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기초신학에서는 신현이나 공현과는 구별되는 성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현은 세상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현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바로 이 성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함을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미스테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미스테르는 인식론적으로 모른다는 의미에서 소위 영어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의 미스테리가 아닙니다. 성현은 비이성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명시적으로 완전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성현은 우리가 익숙한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인식론적인 틀로 설명되는 대상적인 요소를 뛰어 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이성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반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구별합니다. 전인적인 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포괄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고스의 영역에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 불립문자(不立文字)이지만 에토스나 파토스의 영역에서 감성적이거나 윤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비를 현대 해석학은 인정합니다. 성현이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하는 미스테르는 그것에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연루되어 있기에 그것을 따로 분리하여 대상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될 수 없기에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그것에 연루 되어 있기에 전혀 불가촉의 대상은 아니며 따라서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유신론적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미스테르입니다. 이런 미스테르의 개념은 나중에 칼 라너 신부에게 받아 들려져 거룩한 신비라는 개념으로 정립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별이라는 상징도 이런 차원에서 그 자체로 신격은 아니지만 신성의 에피파니를 지목하는 성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별이 메신저라면 메시지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메신저와 메시지가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통합되고 별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격 안에 메신저와 메시지가 통합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알림자인 동시에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신저인 동시에 하늘 나라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리는 말씀인 동시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무서운 힘, 바람이나 불이나 물이나 달이나 별이나 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신적인 본성 우시아를 온전히 가지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있었어도 전하는 말씀과 전하는 사람이 인격 안에 일치하는 존재는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성현들과 종교의 창시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지목하는 도구요 손가락이었습니다. 인류 종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회적인 말씀의 육화가 온전하게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 공현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들레헴의 별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계기로서 신적 현존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동방의 세 박사는 손가락을 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예언자적인 혜안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별을 보고도 그 성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인류가 열망하는 에피파니를 찾아 나섭니다. 별의 인도를 따라서 나선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그 별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여행 중에 당해야 할 위험 역시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성현을 통해 신현과 에피파니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을 단순히 거룩한 신비로 이해하는 정도를 지나 육화하신 위격적인 신성으로 한 아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먼 길을 떠나온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낯설고 먼 길을 여행하는 데 따르는 육체적인 노고, 강도의 위험, 추위와 더위, 목마름과 배고픔 등 그들이 겪었을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될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험을 감행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하늘에 맡긴 채 여행 준비를 갖추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믿음뿐이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그 큰 별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인도했고, 아마도 그 세 박사는 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 합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 박사가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면 그 장소는 당연히 하느님의 도성이며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동방 박사들과는 대조적인 인물인 헤로데를 만납니다. 세 박사가 헤로데를 만났을 때 헤로데는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는 유다인 출신이 아니라 이두메아 출신의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정권 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로데는 새로 태어난 왕을 경배하러 온 세 박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동방박사들은 메시아는 왕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을 알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묻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박사들의 이 말에 모두 깜짝 놀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기억을 공유하여 기록하였습니다. 특별히 헤로데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왕궁에 새로 태어난 왕자는 없는 데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역성혁명의 기운이 있다는 말인가?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이미 자신이 누리고 있던 권력과 향락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을 통해서 듣게 된 구세주 탄생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곧 어전회의를 엽니다. 헤로데는 원래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 발달한 기회이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봅니다. 헤로데 역시 메시아니즘에 관한 예언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 유지와 보신을 위해서는 명사목(明四目)과 명사총(明四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방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귀로 자신을 총명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는 그 분양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보통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모든 분야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막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독단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줄 아는 어느 정도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점은 통치자들 뿐 아니라 모든 교회 지도자들도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능력은 그저 재주 좋은 것으로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권력자 중에는 항상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헤로데 만큼도 되지 못한 완장찬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분야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걸로 착각하는 완장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각자의 고유한 탈렌트를 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학식과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속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고 적어도 자문을 구할 줄은 아는 깜냥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그는 자신의 음흉한 생각을 감추고 박사들에게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심정을 감춘 채 대사제들과 학자들을 불러서 새로운 왕이 태어날 곳이 어딘지 물어 봅니다. 그들은 헤로데에게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 다음에 그는 박사들을 몰래 부릅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곤란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러나 헤로데의 이 말은 구밀복검(口蜜腹劍) 즉 입에는 꿀을 발랐으나 배속에는 비수를 감춘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기를 찾아서 죽일 생각을 하면서 말로는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헤로데는 말이 생각이나 행동과는 다른 간사하고 간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명예와 안락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범죄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헤로데는 지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권력과 향락에 안주하려 했지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제구포신(除舊佈新)할 수 있는 선택을 놓쳐버리고 하느님 구원경륜의 궤도에서 낙오합니다. 그는 구원사적으로 구약을 접고 신약을 여는 변곡점에서 악역을 담당합니다. 그는 박사들을 통해서 들려 온 기쁜 소식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무죄한 어린이들의 피와 그 엄마들의 눈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됩니다.

세 박사가 헤로데의 왕궁을 나와서 베들레헴으로 길을 재촉하자 사라졌던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멈추자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여기에서 “경배한다”는 것은 ‘숭배하다, 무릎을 꿇다, 조공(공물)을 바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이 장면은 솔로몬 임금을 찾아와 금과 향료와 보석을 바친 스바 여왕을 연상시킵니다(1열왕 10,10). 아직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께 바쳐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장차 이분이 어떤 분인지를 예표합니다.

먼저 멜키오르가 가져온 황금이 상징하는 것은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황금은 쇠붙이 중에서는 가장 값진 것이며 변하지 않는 금속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금은 가장 소중한 광물로 여겨졌습니다. IMF때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는데 금은 바로 달러가 되고 기준이 됩니다. 박사들이 황금을 아기 예수께 선물한 것은 아기 예수야 말로 영원히 변치 않을 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많은 왕들이 있지만 그들은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처럼 언젠가 사라지고 말 권력자들입니다. 그러나 초라한 외양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가 오히려 온 인류의 왕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을 왕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중에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지금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힘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임금이십니다.


가스파르가 가져온 유향은 사제를 위한 예물입니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유황은 기도할 때 피워 올리는 향입니다. 유향은 비싼 향료라서 사제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주로 사용되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날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대사제로 세상에 오신 것을 표상합니다.


우리가 향을 피우면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엔 누가 계시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향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제사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제의 역할은 무엇보다 인간을 하느님과 만나게 해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입니다. 그것이 장차 예수께서 하실 일입니다. 아니,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예수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잇는 다리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아기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구원의 참된 매개자이심을 나타내는 선물입니다.

발타사르가 가져온 몰약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예물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몰약은 단순한 물약이 아닙니다. 몰약은 어디 사용됩니까? 몰약은 몰약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지방에서 나는 향수와 방부제의 원료로 사용되는 약제입니다. 즉 몰약은 시신에 바르는 약입니다. 몰약은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물건이지요. 예수께서는 역설적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몰약은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죄와 죽음의 썩음에서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결국 세 사람의 마뉴스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러 와서 봉헌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예수님께서 왕중왕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임금이시며 대사제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동방의 세 박사는 자신들이 지닌 가장 값진 보물을 아기 예수께 선물로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은 겉으로도 값진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마련할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후 박사들의 행적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지 않고 다만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말과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동방박사들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후 그 모습은 요셉과 성모님께 가장 먼저 드러났고, 그 다음 양치기 목동들에게 드러났고, 오늘 동방의 마뉴스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요셉과 성모님 그리고 양치기 목동들은 구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이었고 동방 마뉴스들은 이방인들로서는 처음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신약의 창단 멤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최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더 의미 있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 박사들의 경배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교가 닫힌 종교가 아니라 열린 종교임을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닫힌 회로가 아니라 열린 회로가 되어야함을 강조하는 인생원리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경배 이후의 동방 박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분들의 행적을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거룩한 별과 그 별을 따라 동방에서 온 이방인 박사들은 구원의 보편성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선민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민에게도 알리는 자신의 구원사적 역할을 다 수행하고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자신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납니다. 이방인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단군의 후예들을 위한 구세주이심이 에피파니한 것입니다. 주님의 공현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처음에는 하나, 한 사람, 한 민족의 선택에서 출발했지만 그 방향과 목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확산되어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임을 밝혀 줍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라는 구원도식이 정립됩니다. 선택은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그 하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에 하느님 구원경륜의 묘미가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와의 결약, 노아와의 결약, 아브라함과의 결약, 모세와의 결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과의 결약 등이 오늘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모든 이방 민족들과의 결약으로 보편화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이 오늘 주님의 공현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님의 공현은 구세주의 성탄이 갖는 의미와 내용을 보다 깊고 심오하게 드러내 주는 에피파니 계시의 축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은 보편성으로 열린 개체성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개체로 살아가고 자신의 고유성을 실현하지만 타자에게로 열린 삶을 살아가야함을 암시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은 백성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입니다. 설령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도구로 써 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를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하느님이며 이방인들이나 타자의 하느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느님은 나만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들, 이방인들, 모든 색깔과 빛깔의 인간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나 자신을 위해서 오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득불 편가르기를 피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과 한편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하느님과 나는 같은 편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받들고 그 뜻을 실현할 때 하느님은 나의 편입니다. 네편 내편 가르지 말고 다 하느님 편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편가르기나 줄세우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선민이고 이방인이고 간에 우리 모두 하느님 쪽에 서 있으면 다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지난 성탄 밤 미사 때 구유 경배 예절에 참여하였고 구유 예물도 이미 봉헌하였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대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임금이시며 대사제이시고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가만히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동방 박사의 반열에 들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왕중왕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말과 행동으로 알리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힘차게 외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주님께서 너만은 비추신다”(이사 60,1-2)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탄생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뭇 민족에게 구원의 빛을 예언하시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예언이 아기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비단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에게 비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또 다른 별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선물로 주신 임인년 2022년이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을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너희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린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 좋은 일이 새해에는 많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보화와 재물이 너에게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얼마나 신이 나는 흥겨운 말씀입니까? 아무쪼록 올 새해에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빛이 우리에게 오고, 영광이 떠오르며, 우리의 얼굴은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떨리며, 또한 땅의 재물과 바다의 보화가 들어오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짧은 강론: “바다의 보화와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라자로  2021. 12. 29.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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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짧은 강론: “바다의 보화와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는 요 며칠 사이 성탄, 성가정 축일, 천주의 성모대축일을 지내고 송구영신의 제를 봉헌하였고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신 것을 기리는 대축일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가족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첫 선을 보인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세 박사에게 공적으로 얼굴을 드러내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이 세상에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성탄 대축일에는 아기 예수의 ‘비천함’이 드러나고 공현 대축일에는 하느님 아들의 ‘위대하심’이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아기 예수님은 비천하게 보이지만 왕중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동방 박사들과는 대조적인 인물인 헤로데를 만납니다.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부릅니다. 그는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러나 헤로데의 이 말은 구밀복검(口蜜腹劍) 즉 입에는 꿀을 발랐으나 배속에는 비수를 감춘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기를 찾아서 죽일 생각을 하면서 말로는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헤로데는 말이 생각이나 행동과는 다른 간사하고 간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명예와 안락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범죄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제구포신(除舊佈新)할 수 있는 선택을 놓쳐버리고 하느님 구원경륜의 궤도에서 낙오합니다. 그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피와 그 엄마들의 눈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됩니다.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러 와서 봉헌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봉헌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왕중왕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박사들의 행적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지 않고 다만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말과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동방박사들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난 성탄 밤 미사 때 구유 경배 예절에 참여하였고 구유 예물도 이미 봉헌하였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대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임금이시며 대사제이시고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가만히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동방 박사의 반열에 들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왕중왕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말과 행동으로 알리는 일일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힘차게 외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주님께서 너만은 비추신다”(이사 60,1-2)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탄생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뭇 민족에게 구원의 빛을 예언하시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예언이 아기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비단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에게 비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또 다른 별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선물로 주신 임인년 2022년이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을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너희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린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 좋은 일이 새해에는 많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보화와 재물이 너에게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얼마나 신이 나는 흥겨운 말씀입니까?

아무쪼록 올 새해에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빛이 우리에게 오고, 영광이 떠오르며, 우리의 얼굴은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떨리며, 또한 땅의 재물과 바다의 보화가 들어오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