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Johannes Scottus Eriugena)의 인간과 자연인식에 대한 소고
김 영 철*한양대학교
요 약 문
이 연구의 주된 목적은 에리우게나의 사상을 통해서 중세철학에 대한 통념적인 견해인 인간성의 말살, 인간이성에 대한 신앙의 절대적인 우위와 같은 선입관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 논고의 중심 주제는 세계와 신에 관계하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 즉 인식 대상으로서의 신과 세계 그리고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성, 그리고 더불어서 인간이성의 자기인식에 있다.
에리우게나 철학의 주된 특징은 인식대상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 스스로를 스스로의 인식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 같은 인식과 대상의 동일성의 문제는 에리우게나 사고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神인식 문제의 디딤돌이 된다. 그는 인간 스스로의 인식으로부터 최고의 진리인식인 神 인식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에리우게나는 이 같은 인간 스스로의 인식과정을 포괄적으로 자연인식 과정 전반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주요어 : 인간, 자연, 자연인식, 자기인식, 존재, 이성, 세계
1. 연구 목적 및 대상
가. 연구 목적
중세기의 철학은 통상적으로 페트루스 다미아누스의 유명한 표현인 “신학의 시녀” 또는 “신학의 도구”라고 오인되어지고 있다. 아니면 좀더 과격하게 표현해서 중세에는 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철학계에서 이러한 무책임한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중세철학에 대한 연구가 다른 제반 철학분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너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세에는 신학만이 존재했었고, 철학은 단지 신학에 부차적인 역할만을 했던 것으로서 쉽게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심지어 중세전체가 암흑기로 간주되어 졌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견해는 다행스럽게도 차츰 줄어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중세철학을 재평가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중세철학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철학연구의 측면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져야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있다. 중세철학을 결코 고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 되고 ― 그러면 중세철학은 또다시 부차적인 성격만을 갖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 더 나아가서 중세철학 그 자체로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또한 답변을 구해야만 할 것이다.
이 같은 중세철학의 주체성은 단편적으로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사상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에리우게나는 성서의 권위나 교회의 독단, 즉 신앙과 대결해서 인간의 주체성과 인간이성의 위대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세계, 더 나아가서 창조주인 신과의 합일을 찾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합일은 신의 은총이나 다른 이상한 힘에 의해서, 즉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힘, 즉 인간의 주체적인 힘, 인간 정신의 능동적인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이 같은 사상을 우리는 특히 그의 자연개념의 고찰, 즉 인간과 자연개념과의 연관관계에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이 연구의 주된 목적은 에리우게나의 사상을 통해서 중세철학에 대한 통념적인 견해인 인간성의 말살, 인간이성에 대한 신앙의 절대적인 우위와 같은 선입관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 논고의 중심 주제는 세계와 신에 관계하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 즉 인식 대상으로서의 신과 세계 그리고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성, 그리고 더불어서 인간이성의 자기인식에 있다.
나. 연구대상 : 自己인식으로부터 神의 인식으로
에리우게나 철학의 주된 특징은 인식대상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 스스로를 스스로의 인식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또한 인간 스스로의 인식으로부터 최고의 진리인식인 神 인식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 같은 자기인식으로부터 다른 대상의 인식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경향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으며, 후에는 성 켄터버리의 안셀무스의 사상 ― 특히 자기인식으로부터 神의 인식문제 ― 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에리우게나의 자기인식문제는 여러 관점에서 연구되어질 수 있겠지만, 우선은 크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세상 즉 감각적인 세계와의 연관관계에서 고찰되어질 수 있으며, 두 번째로는 신과의 연관관계에서 논의되어 질 수 있고, 결국에는 다시 세계와 신이 인간 스스로의 인식 내에서, 즉 자기인식 안에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감각적 세계와의 연관관계에서의 인간 스스로의 자기인식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자면, 에리우게나는 인간을 감각적 세계에 살고 있는 그리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로 감각적 세계와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감각세계와 인간을 넓은 의미에서 동일시함으로서 인간, 즉 세계가 인식의 대상으로 되고 인식주체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식대상과 인식주체가 동일시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이 같은 인식과 대상의 동일성의 문제는 에리우게나 사고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神인식 문제의 디딤돌이 된다. 말하자면, 신과의 연관관계에서 보면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어진 神의 모상(imago dei)이며, 이 같은 신의 모상은 인간이 神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이 神인식의 가능성인 神의 모상, 즉 인간이 또 다시 인식대상(최고인식대상)이 되며 아울러 인식주체가 된다. 이 같이 세계와 神 그리고 인간이 동일한 인식대상, 즉 인간이성의 인식대상이 된다는 의미는 결국 인간의식 내에 이미 그 같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같은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의 인식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에리우게나는 이 같은 인간 스스로의 인식과정을 포괄적으로 자연인식 과정에서 설명하고 있다.
2. 자연인식에 관하여
가. 자연개념
에리우게나에게 있어서의 자연(physis, natura)이라는 개념은 총체적인 의미,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들(omnes res)과 심지어는 비존재자들까지도 포함해서 일컫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같은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은 결국 神과 세계, 즉 총체적인 세계(universalis, natura universalis, universa natura)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명칭은 보통 만들어진 모든 것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자도 칭하는 것이다. (…) 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자연을 구분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세계, 무한자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에리우게나에게서의 이 같은 총체적인 세계로서의 자연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성은, 단지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는, 즉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현실세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존재 가능한 세상, 즉 사고 되어질 수 있는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이 같은 자연개념은 결국 인간의 인식영역과 연결되어지며, 인간의 무한한 인식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 같은 의미에서 결국 자연이라는 개념은 인간정신에 의해서 인식되어진 또는 인식 가능한 존재 ― 여기에는 神도 포함됨 ― 를 칭하는 것이다.
에리우게나는 우선 자연을 논리적인 의미에서 존재(esse) 와 비존재(non esse)로 구분을 한다. 여기에서 존재는 일단 긍정적인(affirmatio) 의미로서, 학문적으로 진술이 가능하고 파악이 가능한 어떤 구체적인 것(es quae sunt)을 의미하며, 비존재는 부정적인(negatio) 의미로서, 非구체적인 것(ea quae non sunt)을 의미하며 따라서 진술이나 파악이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이 자연을 존재와 비존재로 구분하는 것은 우선 창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고, 아울러 자연이라는 개념이 모든 존재와 존재들의 근원인 神까지 포함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에리우게나는 그의 대표작인 ?자연구분론de divisione naturae?의 서론에서 ‘존재’와 ‘비존재’라는 개념이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첫 번째의 가능성은 총체적인 존재(자연)영역에 있어서의 인간이성의 인식영역과의 연관관계에서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비존재’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이나 또는 사물의 본질들(essentiae)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존재’는 인식 가능한 것이며, ‘비존재’는 인식 불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창조된 존재들(자연)의 영역에 있어서의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이다. 창조된 존재, 즉 창조물의 영역은 가장 최고단계의 창조물인 천사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단계 모두를 포함한다. 여기서 에리우게나는 두 개의 극단적인 본질들인 천사와 감각적인 사물들은 서로 대립하는 성질을 갖는 것, 다시 말하면 서로는 상호 부정을 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낮은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높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높은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낮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은 긍정(affirmatio)과 부정(negatio)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창조된 것을 ― 그것이 높은 존재이든 아니든 ―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반대로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세 번째의 가능성은 감각적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의 존재성(드러남)과 비존재성(드러나지 않음)에 의한 구분이다. 이 것은 인간의 관념과 그 관념에 의해서 이미 만들어진 사물들과의 구분으로도 이해되어지며, 또한 신의 예정(예정된 원인)에 의해서 이미 창조(결과)된 것과 아직 창조되어지지 않은, 즉 작용되어지지 않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과의 구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비존재’란 존재성은 이미 주어져 있지만 ― 일종의 예정된 원인으로서 ― 아직 감각적인 세계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본질을 의미하며, 이러한 예정된 원인으로서의 ‘비존재’가 감각적인 세계에 작용하면 ― 결과로서 ―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에리우게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예로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신은 인간본성(natura humana)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 원인으로서 ― 있었으며, 그것이 감각적인 세계에 ― 결과로서 ― 드러난 것이 바로 인간(아담)이라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들은 생명력(virtus seminum)이라는 원인이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네 번째의 의미에서는 ‘존재’란 오직 정신(intellectus)에 의해서만 파악 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또한 참된 존재(vere esse, aeternum esse)로서 정신적인 것이며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질적이며 변화하는 것은 ‘비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주로 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지만, 통상 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미이다. 철학은 현상적이고 물질적이고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인 ‘참된 존재’만을 사랑하고 찾고자 하며, 이것이 또한 철학과 철학자의 의무인 것이다.
에리우게나의 ‘존재’와 ‘비존재’간에 대한 다섯 번째 구분은 신과의 관계에서의 인간본성에 대한 구분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존재’라고 칭할 수 있으며, 반대로 죄를 행한 인간은 그의 죄지음으로 인하여 근본적인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며, 따라서 ‘비존재’라고 칭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신학적이며 (종교)인간학적인 관점에서의 고찰이며, 여기에서의 중심문제는 인간이 이성(ratio)을 사용하여 잃어버린 자신의 본성을 되찾음으로서 '비존재‘에서 ’존재‘에로 귀환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연구분 ― 존재방식의 다양성
에리우게나는 창조주(만든 자)로서의 神과 창조물(만들어진 것들)로서의 세계에 대한 관계에 근거해서 ― 창조하는 능력과 그 결과물인 창조물들과의 관계 ― 보다 구체적으로 자연을 4가지로 구분한다. 그는 ‘존재’로서의 신과 신의 작용 내지는 창조된 본질들로서의 3가지의 자연을 구분한다.
첫 번째의 자연은 창조하지만 창조되지는 않는 자연(natura quae creat et non creatur)으로서, 말하자면 창조하는 근원 내지는 원리(principium)이며, 스스로의 원인(causa sui)이며 모든 다른 것들의 원인인 창조자로서의 神의 본질을 의미한다.
두 번째의 자연은 창조되면서도 창조하는 자연(natura quae creatur et creat)으로서, 신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의 현현(Theophanie)이다. 이 자연은 신이 스스로 감각적인 창조물의 세계에 모습(존재)을 드러내는 것, 현실화되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 혹은 로고스(logos) 또는 근원적인 원인(primordiales causae)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점은 신플라톤주의자로 비교적 잘 알려진 사상가인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의 삼위일체론에서 ‘존재’(esse)로서의 성부(神)가 ‘삶’(vivere)으로서의 그리스도로 드러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단계는 감각적이고 유한한 것들과의 혼합된 상태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는 오직 제1일자연인 신과의 교통만을 하며, 오직 선(善)만을 따르려고 하며 선한 행동만을 한다. 이 점이 바로 참된 세계의 모습을 잘 반영하는 것이고, 아울러 모든 창조물은 이러한 것에 의해서 진리의 세계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의 자연개념은 또 다른 관점에서 고찰이 가능한데, 말하자면 플라톤이 그의 우주론적인 대화편인 ?티마이오스?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창조자로서의 데미우르고스(Demiurgos)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선의 이데아라는 전형(exemplar)에 의해서 세계를 조화롭게 창조하는 본질이다. 데미우르고스의 원인은 선의 이데아이지 결코 스스로가 원인이 될 수도 없고, 또한 선의 이데아라는 전형이 없다면 존재할 수도 또한 아무런 것도 창조할 수도 없는 본질이다. 즉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세계창조의 최초의 원인(prima causa)이지만, 감각적인 세상을 넘어있는 (초)존재와의 관계에서는 원인이 아니라 최초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는 제2자연이 제1자연의 드러남이 아니라, 즉 제1자연의 현현(드러남)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갖는 별개의 본질, 즉 제1자연인 신에 의해서 창조된 다른 본질 또는 존재가 된다. 신이 스스로 계획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통해서 자신의 계획 내지는 모습을 드러내는, 말하자면 창조활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2자연은 분명히 제1자연과는 구분되는 본질로서 이해되어질 것이다. 하지만 에리우게나의 사상에서의 제2자연은 신과 완전히 상이한 본질이 아니라, 단지 신이 스스로에 의해서 그리고 본질의 변화됨이 없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에리우게나의 제2자연을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라는 개념과 동일시하는 견해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다.
세 번째의 자연은 창조물의 영역인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서, 창조되지만 창조하지는 않는 자연(natura quae creatur et non creat)이다. 그리고 우선 이 제3자연은 제2자연과의 연관관계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창조하는 능력을 지닌 제2자연의 결과로서의 현상의 세계 또는 구체적인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제2자연이라는 이데아(관념)가 현상에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로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분명 제2자연과 제3자연은 서로의 관계에서는 창조와 결과이지만, 제1자연과의 관계에서는 제2자연과 제3자연은 현상으로서, 즉 제1자연이 세계에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자연물, 즉 신의 제1현현과 신의 제2현현이다. 이 점에서 분명한 것은 제2자연과 제3자연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서로 차이를 갖는 자연(본질)들이라는 것이다. 즉 제2자연이 제3자연 보다는 논리적인 질서에서 보다 더 높은 본질(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적으로 말하자면, 제2자연이 제3자연보다 더 많이 제1자연에 참여(분유, 닮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성서적으로는 제2자연이 제3자연보다는 덜 타락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의 자연은 창조하지도 되지도 않는 자연(natura quae nec creat nec creatur)이다. 이 제4자연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 내지는 완성으로서 또는 창조물이 나아가야 하는 최종의 목적이다. 이 네 번째 자연의 단계는 원인과 결과가 일치되는, 즉 神인 제1자연과 통일 내지는 일치를 이룬다. 말하자면 창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근원인 신에게로, 신인식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확신이 이 네 번째의 자연개념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제는 세상 또는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어떻게 발생되었는가와 같은 자연 철학적인 질문에서 벗어나서, 이 세계의 중심인 ‘나 자신이 무엇인가’라는 인식론적-인간학적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놓고 그리고 그 자신의 해명을 토대로 최고의 진리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주체성을 찾고 또한 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단지 제4자연의 개념에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은 아니고, 제1자연의 창조과정 전체에서 그러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창조과정 전체에서 근원과 결과의 연관관계에서의 근원에 대한 인식의 단초가 잘 드러나고 있으며, 그러한 관계의 분석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근원으로의 복귀가 가능하며,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제1자연인 神이 스스로의 속성을 분유하고 있는 제2, 제3의 자연으로 하향하는 형태로 현현(드러남)한다는 것은, 이미 그 하위 개념의 자연들에 분유 되어 있는 스스로의 본질을 인식함에 의해서, 상위의 자연개념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담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에게 그 자신의 근원이며 창조자인 신의 본성이 분유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 인간이 스스로의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이해 또는 자기인식을 통해서 자신 보다 더 높은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기이해 내지는 자기인식이 곧 최고의 자연이자 최고의 진리를 해명하는 길인 것이다.
3. 인간과 자연(세계)
가. 인간의 본질
에리우게나는 우선 ?자연구분론? 제4권에서 인간의 본질을 3가지로 구분해서 파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은 육신적인 본질이며 자연창조의 종착점으로 보며, 두 번째는 인간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본질로서 파악하며, 세 번째는 인간을 자연의 모상(imago naturae)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를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완성하는 본질로 파악한다. 이러한 에리우게나의 인간에 대한 파악들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인간은 육신적이면서 정신적이며 아울러 자연전반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본질로서 그 자신의 인식 안에 자연전체가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에리우게나가 생각하는 자연창조란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창조이며, 더불어 인간은 자신의 인식 안에서 모든 자연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리우게나는 ?자연구분론? 제2권의 전반부에서, 인간을 ‘만물의 공장(officina omnium)’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神이 만물을 인간의 인식 안에서 창조했고,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인식 안에서 창조된 만물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 인간은 신과 만물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신은 만물을 인간의 인식 안에서 창조했고, 인간은 자신의 인식 안에서 창조된 만물을 다시 종합함으로서 만물에 통일성을 부여하여 자신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신이 창조한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찾으려하고, 그 통일성에 의거하여 자신의 근거를 환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정신과 육신 혹은 감각을 지닌 존재로서 정신과 육신이 조화롭게 통일되어진 ‘이성적인 동물(animal rationabile)’이라는 점과 연결이 된다. 인간은 육체적인 감각에 의해서 현상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을 접하고 동시에 정신적인 능력에 의해서 그러한 사물들을 종합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인 능력과 육신적인 능력의 종합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지니는 존재이며, 현상적인 사물들도 인간의 인식 안에서 존재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에리우게나가 생각하는 창조, 즉 자연의 창조는 인간의 인식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리우게나가 언급하는 인간육신의 이중성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에리우게나에 의하면, 인간은 두개의 육신을 갖는다. 내면적이며 영구적이며 정신적인 육신과, 반대로 외면적이며 소멸되는 물질적인 육신을 갖는다. 그리고 정신적인 육신은 외면적인 육신에 의해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두개의 육신이 실제로는 구분되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에리우게나에 의하면 외면적인 육신은 내면적인 육신을 감싸고 있는 겉옷과 같은 것이고, 실제로는 단지 하나의 육신, 즉 내면적이며 영구적인 정신적인 육체만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에 의해서 창조된 내면적인 육신은 결코 소멸되지 않고 영구적일 수밖에 없으며, 현세의 육신적인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고 한다. 에리우게나는 이러한 식으로 두개의 육신을 구분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또한 하나의 통일성, 즉 인간은 두개의 육신이 통일된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은 한편으로는 ‘최고선의 반영(speculum speculi)’으로서 신의 모상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육신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에리우게나는 두 개의 육신이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듯이, 인간의 정신과 육신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현상에 드러나 있는 것이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에리우게나의 생각의 근저에는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사상이 깔려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신의 모상이며, 신은 인간의 원형이지만, 인간은 또한 신이 현상에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신은 결코 나누어지거나 분리됨이 없기 때문에, 신의 모상인 인간에게도 결코 분리성이나 자신 안에 상반성(相反性)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과 육신은 상반되거나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정신과 육신의 통일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리우게나는 영혼(anima)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말하자면 영혼도 육신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즉 이성적인 영혼과 동물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은 근본적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참되고 또한 사유의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물적인 영혼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형상을 인식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성적인 영혼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물들을 구분하고 종합함에 의해서 사유의 완성인 참다운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참다운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결국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영혼은 결코 구분되지 않는다.
이상에서와 같이 인간은 육신이나 영혼에 있어서 각기 이중적인 성향을 가지는 듯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아울러 인간이 영혼과 육신을 가지지만, 이것들도 또한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서로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 통일성을 갖는다. 인간은 현상적으로는 영혼과 육신이 구분되어져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합일된 통일체이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는 어떠한 것들도 서로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동일하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인식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자연들)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인간의 자기인식으로서의 자연(세계)인식
앞서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연창조의 중심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인간의 인식 안에서 창조되어졌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인식은 결국 인간의 인식, 즉 인간의 자기인식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인간이 ‘만물의 공장(officina omnium)’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서 다른 사물(자연)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선 에리우게나는 인간 안에서 만물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또한 어떻게 인간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물들은 외형적으로 또는 물질적인 것들로서 인간 안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일 사물들이 그러한 식으로 인간 안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인간은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로서 인간 안에서 창조되었거나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은 외형적인 사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즉 감각적인 인상들을 지각하는 능력에 의해서 사물들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 받아들인 사물들을 정신 안에서 이성적인 능력에 의해서 파악하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각적인 지각내용들이 인식하는 자 스스로와 비례될 수가 있는가? 말하자면, 감각적인 사물들이 인간의 정신 안에서 실체적인 관계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연적인 관계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에리우게나는 인간정신과 사물들은 실체적인 관계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정신은 사물을 우연적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을 참되게, 즉 실체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물을 올바르게만 인식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을, 즉 때로는 지혜롭고 이성적이며, 또한 때로는 무지하고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왜 신의 모상으로서 항상 올바른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게 무지함과 바보스러움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이 점에 대해서 에리우게나는 신학적인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갖는 현재의 오류성 내지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무지함의 원인은 인간이 지었던 죄 ― 원죄 ― 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내면적인 정신의 능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감각적인 지각에 의해서도 사물들을 올바로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행함으로서 사물들을 감각에 의해서 불완전하게 인식하게 되고 또한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원죄에 의해서 근원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놓여진 사물에 대한 앎이나 또는 자기 스스로의 앎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스스로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만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죄에 의해서 인간이 진리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에리우게나는 만물이 인간 안에서 창조되어졌으며, 또한 소멸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신에 의해서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고, 신에게는 소멸이나 불완전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음에 의해서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또한 신의 모상으로서 완전하게 창조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인간은 죄를 지음에 의해서 근원적인 본성을 망각하고, 사물들이나 자신마저도 단지 감각적인 지각에 의해서 인식하고자 하기 때문에 오류나 불완전한 인식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망각하고 있는 근원적인 자신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기억함에 ― 플라톤적인 기억, 즉 상기(anamnesis) ― 의해서 자신의 본성을 찾고, 아울러 사물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원죄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던 사물들과 망각된 인간 자신 스스로에 대한 앎은 감각적인 지각에 의해서 인식되거나 기억되지 않고, 이성적인 정신에 의해서 인식되고 기억되며, 그럼으로써 참다운 사물들, 즉 자연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에게 있어서 참다운 인식에 대한 가능성은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그의 기본생각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 창조되었고 자신 안에서 창조되고 자신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들을 인간정신이 감각적인 지각의 중재에 의해서 감지하는 것이 바로 에리우게나가 말하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죄에 의해서 망각하고 있던 것을 재기억, 자신의 원래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인식이 근원적으로는 자신 스스로의 인식이지만은, 그냥 단순히 자신을 명상함에 의해서 모든 인식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현재 자신의 정신 안에 머무르고 있는 참된 인식으로서의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망각하고 있는 앎을 다시 인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에리우게나에 의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플라톤의 상기론에서와 같이 진리에 나아가기 위해서 현상계와 관계하는 감각적인 요소를 모두 배제함에 의해서 참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 안에 머무르고 있는 참된 인식, 그러나 현재는 망각하고 있는 앎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인 지각에 의해서 사물을 감지하고, 이성(ratio)에 의해서 그 주어지고 감지된 사물들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참다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분명 감각적인 지각도 정신적인 이성적인 능력과 더불어 올바른 인식의 길로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에리우게나가 생각하는 자연의 개념이 부분적인, 즉 정신적인 측면의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서의 자연도 포함된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자연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연의 이해로부터 출발해서 비구체적이고 정신적인 자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단초로부터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것으로의 점차적인 인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에리우게나는 현실세계에 있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침잠함에 의해서, 자신이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러한 내면세계의 사유를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것이 바로 참다운 인식의 길임을 것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참 고 문 헌
Ansorge, Dirk, Johannes Scottus Eriugena: Wahrheit als Prozeß. Eine theologische Interpretation von “Periphyseon“, Innsbruck/Wien 1996.
Beierwaltes, Werner, Eriugena. Grundzuege seines Denkens, Frankfurt am Main 1991.
Dempf, Alois, Metaphysik des Mittelalters, München/Berlin 1930.
Flasch, Kurt, Das philosophisches Denken im Mittelalter. Von Augustinus zu Machiavelli, Stuttgart 1995.
,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Mittelalters, Darmstadt 1994.
, Augustin, Stuttgart 1994.
Gierer, Alfred, Eriugena, al-Kindi, Nikolaus von Kues ― Protagonisten einer wissenschaftsfreundlichen Wende im philosophischen und theologischen Denken, Halle 1999.
Gombocz, Wolfgang L., Die Philosophie der ausgehenden Antike und des frühen Mittelalters, München 1997.
Johannes Scottus Eriugena, De divisione naturae. (Einteilung der Natur, übers. v. L. Noack), Hamburg 1983.
Kreuzer, Johann, Augustinus, Frankfurt am Main/New-York 1995.
O'Meara, Dminic J., "The concept of natura in John Scottus Eriugena", in: Vivarium 19 (1981), 126-145.
Otten, W., The anthropology of Johannes Scotus Eriugena, Leiden 1994.
Platon, Menon, Ditzigen 1994.
Rudnick, Ulrich, Das System des Johannes Scottus Eriugena. Eine theologisch-philosophische Studie zu seinem Werk, Frankfurt am Main 1990.
Zusammenfassung
Der kleine Untersuchung des Johannes Scottus Eriugena
zum Menschen und der Naturerkenntnis
― Kim, Young-Chul ―
Der Hauptzweck dieser Untersuchung ist durch den Gedanken des Johannes Scottus Eriugena eine typische Meinung ueber die mittelaltliche Philosophie, wie der Zerstoerung der Menschlichkeit und des Vorrangs des Glaubens vor der menschlichen Vernunft, diesen Vorurteil aufzuloesen. Auf Grund dieser Problemsetzung besteht das Hauptthema dieses Schreibens im Verhaeltnis zwischen Welt und Gott in der aktiven Rolle des Menschen. Und es geht weiterhin um Gott und Welt als den Gegenstand der Erkenntnis und um die menschliche Vernunft als Subjekt der Erkenntnis, um die Selbsterkenntnis des Menschen.
Der starke Akzent der Philosophie Eriugenas ist das Problem des Gegenstandes der Erkenntnis. Darin will er den Menschen selbst zum Gegenstand der Erkenntnis selbst werden. Diese Gleichheit der Erkenntnis mit dem Gegenstand basiert auf dem Gedanken Eriugenas und damit auch wird zum Ansatzpunkt der Gotteserkenntnis. Er will von Selbsterkenntnis des Menschen in die Gotteserkenntnis aufgehen. Der Prozess dieser Selbsterkenntnis des Menschen soll bei Eriugena umfassend im ganzen Erkenntnisgang der Natur expliziert werden.
※ Schlagwörter : Mensch, Natur, Naturerkenntnis, Selbsterkenntnis, Sein, Vernunft, Welt
'백서(帛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에 관한 고찰 (0) | 2022.01.04 |
---|---|
성 켄터버리의 안셀무스의 삼위일체론적 사고에서 본 진리인식문제 (0) | 2022.01.04 |
발터 카스퍼, 새로운 역사 지평 안에서 교회 정체성 (0) | 2022.01.04 |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0) | 2022.01.04 |
칼 라너,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초월성' (0) | 202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