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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에 관한 고찰

나뭇잎숨결 2022. 1. 4. 18:19

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에 관한 고찰
-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On Being and Essence)?를 중심으로 -

조 성 애
(외대 철학)

Ⅰ. 여는 말

우리는 이따금 광대한 자연과 더불어 이 지구상에 수십 억이 넘는 인류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수천 억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계, 눈에 보이는 작고 큰 사물들, 그리고 숨쉬고 있는 나. 발달하는 과학문명으로도 속시원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이러한 인간의 삶과 세계라는 존재 전반에 걸쳐 생겨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이다.


사실 서구 철학의 첫 문제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묻는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즉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으며 또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들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철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의 문제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13C 중세 철학의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실 존재를 형이상학의 첫째 문제로 삼으면서 본래적 의미에서의 존재에 관한 고찰을 시도했다. 즉 그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고는 모든 존재사물의 근거로서의 현존재 또는 존재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체(ipsum esse subsistens)에 집중되고 있다. 요컨대 토마스의 철학은 구체적인 경험세계의 존재자들과 밀접히 관련을 맺으면서 동시에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원천적 존재자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존재론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存在와 本質의 問題’를 서구철학의 무대 전면에 내세웠다는데 있다. 이 문제가 대두되기까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은 멀리 고대 희랍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있어 철학의 근본문제는 存在의 一과 多, 생성과 소멸, 不動과 動, 不變과 變化 등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存在와 本質의 구별은 명확하게 언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의 구성원리로서 현실태와 가능태론을 제시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현실태)과 가능적으로 있는 것(가능태)으로 구분된다. 현실태는 어떤 완전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먼저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가능태에 있었던 것이고, 가능태는 현실태의 주체로서 그것의 완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별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직 존재와 본질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중세에 와서 이 문제는 창조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有限有의 존재와 본질 사이에 실재적 구별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즉 피조물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의 구별이 실재적인 것인지 사고상의 구별에 불과한지의 문제이다. 중세철학에 있어 처음으로 이 문제의 구별을 명백히 한 사람은 아비첸나였다. 그는 필연유에 있어서는 본질과 존재가 실재적으로 일치하지만 우연유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원리들을 수용하여 존재에 관한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아비첸나와 함께 유한유에 있어서 존재와 본질 사이의 실재적인 구별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을 存在와 本質, 형상과 질료 등의 이론으로 상세히 보충함으로써 ‘存在와 本質’의 문제를 서구철학에 도입하였다.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에 있어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진수를 이룬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문제로 제기하였던 存在와 本質이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이것들을 구분하고 있는가?, 토마스 철학에 있어 ‘存在’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토마스의 초기 저서인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방대한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의 존재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토마스의 存在와 本質觀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현대 철학적 입장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그의 존재론에 관한 이해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Ⅱ. 몸 말

1.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 대한 이해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중심 Text로 다루고자 하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성 토마스의 많은 저작들 중 가장 초기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저작연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토마스가 파리대학 교수로 임명되기 이전, 대략 1254-1256년 쯤으로 추정된다. 저술시기로 보아 알 수 있듯이 토마스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가 완성되기 이전인 젊은 시절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그가 소속되어 있던 수도 종단의 형제들과 동료들을 위해 강의를 목적으로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 짧은 작품 안에는 토마스가 일생을 두고 탐구해 갈 철학의 전 요인들이 담겨져 있다. 즉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윤리학, 인식론, 자연철학, 심리학, 신존재증명 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 저서에서 질료와 형상, 보편성, 영원한 실재, 본질과 존재사이의 구별, 개체화의 원리, 유의 단일성, 우유문제 등등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적절히 집약하여 논한다. 후기에 이르러 각기 독립된 특수분야로 발전할 것들을 토마스는 여기에 집약해 놓은 셈이다.


이 작품은 간단한 서론과 함께 6장의 소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장에서는 존재자(being)와 본질(essence)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떻게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무엇보다 존재와 본질간의 실재적인 구분은 내용 전반에 걸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를 위해 토마스는 존재자들을 합성실체와 단순실체로 분류하고 그들 안에서 存在와 本質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 단순성 때문에 정의도 적합치 않은 제 1원리’로서의 神을 강조하면서 간결하면서도 결코 간단하지 만은 않은 이 작품의 마지막을 매듭짓는다.


이상의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토마스의 존재론을 이해하는데 있어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지금부터 이 작품에 나타난 존재와 본질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존재와 본질의 개념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용어는 Being(ens), Essence (essentia), To be(Act of existing;esse)이다. 이들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은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고찰을 시작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일상적으로 존재자(Being,ens,有)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들 일반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이것은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자(ens)라는 말에는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개념이 함께 들어있다. 즉 존재자(Being,ens,有)라고 불리는 것은 ‘있는 것’(subject which is)이나 ‘있다’(to be)를 지칭한다.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주체’나 실재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을 지시하는 명사적인 有이다. ‘있다’는 현존한다는 점,‘실존함의 현실’(act of being), 하나의 활동을 의미하는 분사적인 有이다. 일반적으로 명사적인 有는 본질(essentia)을 의미하고 분사적인 有는 존재(esse)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本質(essence)은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고, 存在(to be)는 ‘그것이 있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무엇이냐?’하는 물음에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하는 경우 이것은 본질을 제시한다. 또 ‘책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존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들에 대한 토마스의 개념정의를 살펴보자.

(1) 本質(Essentia)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1장에서 토마스는 本質이라는 용어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本質이란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의 존재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본질은 그 본질에 의해 사람이 神도 아니요 동물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요인이며 그 본질에 의해 또 그 본질 안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그런 요인인 것이다.


본질은 모든 본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질의 명칭은 철학자들에 의해 통성원리(quiddity)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졌고 이밖에도 본성(nature), 형상(form) 등으로도 일컬어질 수 있다. 이러한 용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은 本質이 존재자를 일정한 존재로 존재하게끔 하는 어떤 보편적인 規定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수용하고 규정할 수 있는 ‘존재에 적합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들을 담아 토마스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본질을 정의한다. 즉 “本質이란 그것(본질)을 통해서 그것(본질) 안에 존재자가 존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essence means that through which and in which a being has its act of being [esse])


한편 이같은 본질은 다음의 몇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본질은 恒久的이다. 본질이란 어떤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類나 種에 속하게 되는 것이기에 어떤 사물이 그 사물로 고찰되는 한 그것의 본질적인 특성은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본질은 不可分的이다. 본질은 어떤 경우에도 加減될 수 없다. 만일 가감된다면 그 본래의 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본질은 영원하다. 어떤 본질이 특정한 사물의 원리와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 미래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끝으로 본질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물은 그 존재에 있어서 생성 소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본래의 본질에 필연적이다. 이러한 본질의 특성은 후에 본질에만 치중하는 본질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存在(Esse)


존재(esse, to be)라는 말은 ‘있다’ 또는 ‘존재한다’ 라는 동사적인 의미로서, 라틴어 ex(from)와 sistare(stand)의 합성어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것에서부터 서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종속을 뜻한다. 즉 他存在로부터 존재를 받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자를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무한 존재자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존재를 표시할 때 existentia를 쓰지 않고 esse(act of existing)를 사용한다.


토마스 자신의 표현에 의한다면 存在(esse)는 本質을 존재하게 하는 활동자체(act of being)이다. 存在라는 것은 하나의 본질을 ‘하나의 존재자’가 되도록 만든 것이고, 본질자체는 그것이 있기 위해서 존재를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act of being) 때문에 비로소 존재자(being)이게 된다. 따라서 존재는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실제로 존재 내지 실재하게 하는 그런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이다.

“존재(esse)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esse)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다.”
“있다(esse)는 종속하는 형상들의 현실이다.”
“있다(esse)는 모든 현실들의 현실성이고 또 그 이유로 인해 다른 모든 완전한 것들의 완전성이다.”

다시 말해 ‘存在’라는 것은 각각의 사물에 대해서 존재자(Being)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이 거기서 생겨나오는 그런 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하나의 최고 존재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존재는 일반적인 개념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것을 존재자체에 대한 고찰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상을 통해 드러나듯이 토마스에게 있어 本質은 사물을 무엇이게끔 하는 것이오, 存在는 그 본질을 있게끔 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을 수용하여 존재와 본질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존재와 본질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특히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존재와 본질의 관계

?토마스에 앞서 이미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존재와 본질의 관계를 논하고 있었다. 예컨대 알파라비우스나 아비첸나는 유한한 대상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 만으로는 그것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존재는 본질의 한 偶有性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본질과 존재를 구분하고 있는 이들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존재를 결코 하나의 우유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사실 나는 무엇이 사람인지 또는 불사조인지 인식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사물들의 본성 안에 존재를 갖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존재는 본질이나 통성원리와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The act of existing is other than essence or quiddity]
토마스에게 있어 존재와 본질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대비되어 더욱 명확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存在者(있는 것)를 현실태로 있는 것과 가능태로 있는 것으로 구분했다. 가능태(potential)란 현실태를 지향하고 현실태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고, 현실태(act)는 가능태를 실현하며 행위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구분에 대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즉 가능태로 ‘보는 것’과 현실태 내지는 실제로 ‘보는 것’이 있다. 전자는 볼 수 있는 그러한 것????천부적으로 시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시력을 절명을 통해 상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며, 후자는 지금 여기서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본다는 것은 보는 능력[가능태로서의 시력]의 현실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내부에 가능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현실태을 가지고 있다.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도래하는 과도기, 즉 최종 현실태를 향한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과도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변화’(motus)라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변화에 있어서 가능태에 앞선 현실태의 선천성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가능태에 이전에 현실태가 있지 않았더라면, 결국 가능태는 활성화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다시 말해 이 가능태는 더 이상 가능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存在와 本質에 기인하는 존재자의 형이상학적인 구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능태-현실태 이론을 存在의 방향에서 근본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은 바로 토마스에게서 이루어진다.


토마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현실속에서 볼 수 있는 존재자들에 있어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을 인정하였다. “타자로부터 어떤 것을 받는 모든 것은 가능태 안에 있는 것이다. 또 그 안에 수용된 것은 그것(수용하고 있는 것)의 현실태이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현실태(act)란 그것에 의해서 실체가 존재를 가지는 것, 즉 存在(act of being)였다. 존재는 본질의 한 속성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밑바탕이다. 그 이유는 존재라는 현실성이 없이는 본질이 존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存在는 본질에 현실성을 주는 것이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을 뜻한다. 따라서 존재가 본질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현실태가 가능태에 관해서 갖는 관계와 그 범위상 일치한다.


토마스의 이러한 견해는 다른 여러 text들로부터도 입증되고 있다. “존재할 수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은 가능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진다.” 여기서 ‘존재할 수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란 바로 존재에 적합한 것으로서의 ‘本質’을 가리킨다. ?대이교도 대전?에서도 그는 “存在는 어떤 현실태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태에 있기 때문인 까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존재와 본질 가운데 ‘存在’가 보다 더 중요하고 완전하다. 존재가 완전성 중의 완전성이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구성원리라면 본질은 제한과 규정의 원리로서 존재자를 存在와 구별하고 다른 존재자들로부터도 구별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을 실재적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실태로서의 존재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와 본질은 상호규정하고 합치하여 존재자를 구성한다. “현실적인 유한유의 본질과 존재는 결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사물계에 있어서 존재가 없는 본질이 있을 수 없으며 본질 없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본질은 존재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창조된 존재는 언제나 일정한 본질을 지닌 존재이다. 창조된 존재는 본질과 함께 생겨난다. 즉 本質은 存在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存在는 항상 어떤 것의 존재인 것이다. 지금 있는 현존재는 본질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또한 존재와 분리된 본질도 아니다. 그것은 存在로 인하여 존재하는 本質이다. 다시 말해 토마스에게 있어서 存在와 本質은 존재자(being) 내에서 분리될 수 없는 구성원리이다.


이제 존재와 본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자 내에서 작용한다. 존재자는 이 두가지의 형이상학적인 구성원리, 즉 존재라는 현실성을 규정해서 특정한 종류의 사물을 존재이게 하고 있는 ‘本質’(essentia)과 그 본질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存在'(esse)의 합성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존재와 본질이 어떻게 구체적인 존재자들의 구성원리로서 작용하는지 살펴보겠다.


한 관계에 있는지, 특히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펴보기로 하겠다.

4. 존재자의 구성원리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첫머리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10개의 類로 분류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들 중 실체를 다시 합성실체와 단순 실체로 분류하고 있다. 합성실체란 물질적 실체를 단순실체란 지성적 실체와 神을 가리킨다.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분류는 존재자의 내적 구성원리인 存在와 本質의 작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분이 된다. 합성실체와 단순실체는 그 本質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存在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갖는다. 이제 이들 각각에 있어 존재와 본질의 작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存在者의 구성원리로서의 本質


합성실체(composite substance)란 실체자체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어 있는 실체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 정신이 감각을 통해 비로소 관계를 지니기 시작하는 유형적인 대상들, 즉 물질적 실체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합성실체들의 본질은 질료(matter)와 형상(form)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성실체 안에는 인간에서 영혼과 육체가 지시되는 것처럼 형상과 질료가 알려진다. 그런데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을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질료만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질료는 인식의 원리도 아니고, 그 자체(질료)를 따라 어떤 것이 種이나 類로 규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 또한 합성실체의 형상만이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된 것들에서 본질은 사물의 정의를 통해서 의미되는 그것이라는 점이 분명한데, 자연적 실체들의 정의에는 단지 형상뿐 아니라 질료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본질은 질료와 형상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2장)

토마스가 예로 들고 있듯이 우리는 인간을 말할 때 영혼만을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육체만을 인간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이라는 정의 안에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지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합성실체의 본질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단순실체의 본질은 합성실체와는 달리 질료를 포함하지 않는다. 토마스에 의하면 지성적 존재들과 같은 단순실체(simple substance)는 질료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서 질료를 그 자신의 부분으로 지니지도 않고 질료에 새겨진 형상도 아니다. 당시의 몇몇 철학자들 중에는 神 이외의 모든 정신적 존재자들????천사, 인간영혼 등????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지성적 존재에 있어 질료와 형상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창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현실태인 神과 동일시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토마스는 “비록 정신이나 영혼 같은 실체들이 질료 없는 순수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순수현실태라도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단순성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반론의 근거는 다음 단원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지성적 실체의 본질이 오직 형상뿐이라는 사실이다.[The essence of a simple substence is form alone] 지성적 실체는 형상이 곧 자신의 실체이므로 단순실체이다. 물질적 실체에서와는 달리 그것들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없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물이든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만큼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원인이 되는 것은 다른 대상자 없이도 존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이 어떤 질료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질료없이 어떤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합성실체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 모두를 포함하는 반면 단순실체의 본질은 형상뿐이다. 이점에 있어서 토마스는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본질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합성사물의 본질은 한정된 질료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질료의 역할에 의해 다수화가 되기 때문에, 어떤 것들[어떤 합성사물의 본질들]은 種에 있어서는 같으나 數에 있어서는 다르게 된다. 그러나 단순 사물의 본질은 질료 안에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런 다수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종의 많은 개체들이 그런 실체들 안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비첸나가 명확히 말하는 바와 같이 그런 실체들에 있어서는 개체들이 있는 그만큼 종들도 있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

이처럼 실체들 중 어떤 것들은 단순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합성된 것이지만 그 어느 것에나 본질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실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거기에는 존재자의 또 다른 구성원리, 즉 본질이 아닌 것으로서 본질을 존재하게 하는 ‘存在’(esse)가 필요한 것이다.

(2) 存在者의 구성원리로서의 存在


토마스는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구성원리인 본질을 논한대 이어 보다 핵심적인 구성원리로서 存在(esse)를 주장한다. 이것은 현실태-가능태의 합성과 마찬가지로 본질과 함께 모든 존재자의 가장 기초적인 합성을 이룬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존재는 본질에 대해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 갖는 관계를 갖으며, 현실태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

물질적 존재자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실체인 반면에 비물질적인 유한한 존재자의 본질은 형상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 존재자이게 하는 것은 存在(esse)이며, 존재는 본질에 대해서 흡사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서 발견된다. 어떠한 유한한 존재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자는 마치 현실태가 가능태와 구별되듯이 본질과는 다른 존재자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은 본질의 영역에서 규정하거나 완성하지만, 그 본질을 현실로 하는 것은 存在(esse)이다.

토마스가 더욱 관심을 갖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단순실체에 있어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다. 단순실체의 본질에 있어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단순실체에 있어 본질이 오직 형상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형상만으로는 단순실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형상이 아닌 것으로서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 바로 ‘存在’가 필요하다. “형상은 자기 존재에 대해 마치 가능태가 자신의 현실태와 맺는 그러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통성원리가 자기존재인 단하나의 사물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물에 있어서는 자기존재와 자기통성원리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들 안에는 형상 이외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성적 실체 안에는 현실태와 가능태와의 합성, 곧 형상과 존재의 합성이 있다. 이와 같이 토마스는 ‘순수한 존재’가 아닌 한에서의 각각의 존재자나 유한한 순수정신 속에는 가능태와 현실태가 함께 존재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것으로 앞서 논란이 된 ‘질료 없는 지성적 실체라 할지라도 순수현실태와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마련된다.


결국 모든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


의 합성으로 되어 있다. 합성실체는 ?????????????존 재 자??????????????
실체 그 자체에 있어서 합성인 질료 ? ???? 본 질 ???? ??????????? ?
와 형상의 합성과 함께 그렇게 합성 ? ?(질료) + 형상? + ? 존 재 ? ?
되어 있는 存在와 本質의 이중적인 ? ??????????????? ??????????? ?
합성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단순실 ? 가 능 태 현 실 태 ?
체는 형상만으로 되어있는 本質과 ?????????????????????????????????????

 

存在의 합성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存在’(esse)는 합성실체나 단순실체의 구분 없이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질료에도, 형상에도, 그리고 그들이 결합된 본질에도 속하지 않는 ‘存在’(esse)의 원리를 내세움으로써 무엇보다 존재자의 구성원리에 있어 현실태로서의 存在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질료-형상의 합성도 없고 존재-본질의 합성도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단순실체, 즉 모든 존재자들의 存在根據에 대한 고찰이 남게 된다.
펴보기로 하겠다.

5. 존재와 본질의 근거 -존재 자체로서의 神

지금까지로 보아 모든 (유한한)존재자들에 있어서 존재와 본질은 상호 규정하며 합치하여 존재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자들은 어디로부터 비롯됐을까?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에서 ‘본질이 곧 존재인 단 하나의 실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와 본질은 구분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에 대해 그것들의 존재 근거인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어야만 함을 밝히고 있다.

존재가 본성(본질)과 다른 이러한 모든 사물은 타자로부터 존재를 가져야 한다. 타자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치 제 1원인에로 귀결되는 것과 같이 자체로 존재하는 그것(one existing in virture of itself)에로 귀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게는 존재하는 원인이 되고 자체는 존재만인 양식으로 어떤 사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존재만이 아닌 모든 사물은 자기 존재의 원인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원인문제에 있어서 무한정으로 소급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뿐인 제 1존재로부터 [the first being which is simply the act of existing] 존재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이 제 1원인이 곧 神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

여기서 비로소 토마스가 말하고자 했던 존재자체(very Act of existing)의 정체가 드러난다.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지는[존재와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은 그 스스로 존재를 산출하지 못한다. 그 본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외적 원인에 의하여 존재를 부여받아야만 한다. 역으로 유한한 존재자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외적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자기원인으로서 존재하여야 한다. 이 외적 원인이 바로 존재자들의 근거가 되는 제 1원인으로서의 神이다. 토마스의 제 1원인으로서의 신에 이르는 추리를 E.질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약에 알려진 모든 사물의 본성(본질)이 ‘존재’가 아니라면, 그 본성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자체 안에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유일한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을 제시한다. ‘존재’가 어디에서나 손쉽게 부딪칠 수 있고, 각 본질이 다른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들의 공통적인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는 세계의 배후에는 그 본질이 바로 ‘존재’인 어떤 원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존재의 순수한 활동인 ‘존재’인 바 이런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또한 우주의 제 1원인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서 신은 ‘자체로 존재하는 그것’, ‘본질이 곧 존재인 단 하나의 실재’,‘존재뿐인 제 1존재’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에게 있어 존재와 본질이 일치함을 뜻한다. 신의 존재와 본질이 일치한다는 것은 토마스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하느님 안에서 본질과 존재가 같은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부정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본질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 되어야 하는데, 神은 그 스스로 第 1能動者이기에 神 안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또한 存在는 모든 본질들의 현실태이고 신은 모든 가능성이 배제된 순수현실태이기 때문에 신의 본질은 곧 존재이다. 따라서 神은 오로지 존재와 본질의 차원에서만 말하여질 수 있으며, 정확하게는 신은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存在自體이다.


神은 어떤 것도 그의 존재에 부가될 수 없는 純粹存在이다. 다른 어떤 것과의 합성도 이루지 않는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神은 절대적인 단일성과 절대적 동일성을 지닌다. 또한 神은 보편적 존재자일 수 없다. 왜냐하면 神은 그 자체로 최고인 절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神이 다른 완전성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神은 자기의 존재자체 안에 [in His very act of existing] 모든 완전성을 탁월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神은 필연적 존재이며 神에게로부터 存在를 부여받는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자체의 神에 대해 우연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물계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들, 즉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한다. 그런 우연적인 존재자들은 필연적인 존재인 神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것이다.


요컨대 神은 본질이 존재와 구분되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의 제 1원인으로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한다. 神의 본질은 자존하는 존재자체이고 그 존재방식은 바로 自存者로서 있다. 神은 전혀 특이한 본질이 아니고 실존의 순수현실이기 때문에 神이 될 수 있는 바의 어떤 무엇(essence)이란 전혀 없고, 神에 관해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神이 있다(to be)는 것 뿐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神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神이 모세에게 일러 준 이름, 즉 ‘있는 자’(I am Who am)라고 말한다. 이제 神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체로서 존재의 최고 위계에 서게 된다. 바로 이 ‘存在自體로서의 神’에서 存在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 토마스 존재론은 그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Ⅲ. 닫는 말

지금까지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觀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로서 합성된다. 本質(esse ntia)이란 존재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게 하는’ 것으로서 존재자의 가능적 측면이다. 본질은 그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존재를 받아들인다. 存在(esse)는 본질을 그것으로서 ‘있게끔 하는’ 현실태이다. 토마스는 이 둘을 실재적으로 구분하면서 무엇보다도 존재한다고 하는 활동(act of being), 즉 모든 것을 실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현실성으로서의 存在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본질에서는 존재가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초로 하여 존재의 근거를 찾고 존재의 제 1원인인 存在自體로서의 神을 규명했다. 이제 存在는 더 이상 偶有가 아니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토마스 철학의 핵심이다. 存在는 토마스 형이상학의 시작이요 종착점이며, 존재의 극점은 존재자체로서의 神인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존재론은 고대로부터 중세 아라비아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투명하게 남아 있던 存在와 本質의 問題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며 한갓 偶有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存在’에 초점을 맞추어 그 문제를 완결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사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의 방법, 원리 및 심지어는 존재의 기본적인 현실성에 관한 핵심적인 관념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 해도 사물의 존재방식에 집중되어 존재한다고 하는 활동(act of being)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을 존속시키면서,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강조점을 ‘本質’, 즉 ‘사물이 무엇이냐’에 두지 않고, 실존하는 활동으로서 생각되는 ‘存在’에 두었던 것이다. 코플스톤은 바로 이점에 있어서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토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本質과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본래적 의미의 存在를 구별하여 存在의 탐구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이전의 본질중심의 철학에서 존재중심의 철학으로 전향하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오늘날 토마스의 철학은 계속해서 재조명되면서 일반화된 하나의 철학사조로서 자리잡고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철학자로는 J.마리땡과 E.질송이 이다. J.마리땡은 토마스의 형이상학을 평가하면서 ‘存在’란 감성에 의하여 파악된 다양한 본질들로 옷입혀진 것이며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 하고, 이처럼 베일에 감추어진 存在를 들춰내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형이상학의 사명이라고 했다. 또한 E.질송은 토마스가 실존의 껍질에 불과한 本質이라는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存在의 순수현실태를 찾아내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토마스의 철학은 실존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저작들에 관한 성찰은 문화 전반에서 행해지고 있다.


과학문명의 이기가 겉잡을 수 없이 가속도를 내고 있는 요즈음, 토마스의 철학은 역사적인 흥미의 대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또 ‘토마스가 말하는 존재자체가 꼭 종교에서 말하는 神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철학자이기 보다는 당대의 평범한 신학자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철학은 단순히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암흑기 중세의 소장품이 아니다. 또한 절대자를 변호하기 위한 종교의 교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세계에서 출발하여 존재자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해내는 형이상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형이상학을 막연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반성의 기회를 줄 것이다.


본고에서는 토마스의 존재(act of being)개념과 현대의 실존(existence)개념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과제로 남기면서 본고의 끝을 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