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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윤리학적 기초

나뭇잎숨결 2022. 1. 4. 18:19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윤리학적 기초*

신 창 석(대구 가톨릭대학)

[한글 요약]

토마스의 윤리학적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호소력 있는 실마리는 『신학대전』의 체계 자체에서 발견된다. 중세대학은 강의와 토론이라는 두 가지 교수법을 개발한다. 이들로부터 마지막에 대전(summa)이 발생한다. 중세의 위대한 토론과 토마스의 신학대전에서 발견되는 엄밀한 해명은 그 구조에서 상호일치한다. 토론이든 대전이든 ~인가, ~아닌가(utrum) 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이는 명제식 물음을 개시할 뿐만 아니라 문제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 Ia-IIae, 1-5문제들은 어떤 문제지평에서 철학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하는가?

이 긴장은 토마스 윤리학의 기초와 직결된다. 인간적 행위란 인간적인 것(humanum)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윤리학의 정초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윤리학적 기초는 사상사에서 두 가지 상이한 전통을 불러온다. 세계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토마스는 한편 그리스도교의 창조신학으로부터 모상(imago) 개념을 기초로 삼는다. 신학적 모상이란 인간을 자유로운 행위로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자연목적론에 기초하여 행위의 원리들을 주제화 한다. 목적론은 “본성” (physis, natura)을 주제화 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으로, 정확히 말해서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된다. 그럼으로써 여기서 인간적인 것의 내용은 철학적으로 해명된다. 왜냐하면 본성이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바로 그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를 이런 이중적 기초에서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적이란 형용사는 한편 모상 개념의 외연이 되며 다른 한편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목적론적 외연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하게 자리잡은 이중적 기초는 『신학대전』의 구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주제분야 : 중세철학

주 제 어 : 신학대전, 윤리학, 행위

1. 『신학대전』의 서술양식

철학은 철학자의 사유에서 비롯되며, 사유는 일정한 형식을 통하여 표현된다. 역으로 어떤 철학은 형식을 통하여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적 형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철학사에는 어떤 형식들이 등장했는가? 예를 들어 플라톤은 기획된 전집이 아니라, 담론의 기회에 따른 “대화편”(dialogus)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화라기 보다는 “고백록” (Confessiones)을 통하여 정진하였다. 데카르트는 “명상록”을 통하여 철학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형식을 통해 윤리학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가? 토마스의 철학적 형식은 당시 성립되던 대학의 수업양식과 함께 한다. 대체로 중세 대학의 수업양식은 원전을 함께 읽어나가는 강독(lectio), 질의응답에 의한 질문(문제, quaestio),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 나가는 토론(disputatio) 그리고 종합적 교재로 사용되던 “대전”(summa)으로 발전한다. 특히 토마스의 철학적 서술양식은 이러한 수업양식의 발전 과정에 비례하여 전개되며,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마지막에 등장한 “대전”(summa)의 양식에 해당된다.

여기서 “숨마”(summa)는 직접적 수업양식이 아니라, 당시 대학의 학문적 문제에 대한 요점을 정리하는 문헌양식이다. 그라프만은 숨마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숨마란 전문 용어는 명제집과 같은 종류의 용어이며, 학문적 자료에 대한 하나의 간략하고 조직적이며, 독립적인 정리작업이나 요약을 의미한다.” 따라서 숨마는 “법학대전”(Summa juris), “논리학대전”(Summa logica),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등과 같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던 문헌양식이요, 서술양식이다. 중세대학의 황금기에 숨마도 절정에 달한다. 그 후 데카르트는 숨마의 전신인 “토론”양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단적으로 거부하면서 근세의 문을 두드렸다.

숨마는 토론양식과 마찬가지로 문제(quaestio, 질문)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제는 또 다시 숨마의 기본요소에 해당하는 “절”(논항, 논문, articulus), 즉 요즘 말로 “아티클”(article)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절은 물음(quaeritur…)과 물음에 대해 부정하는 대론(obiectio), 대론에 대한 반론(sed contra), 대론과 반론의 문제성을 논술하는 본론(corpus articuli), 마지막으로 각각의 대론에 대한 대답(responsio)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은 토론양식의 절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전이 가지는 이러한 절의 구성은 토론집과는 달리 전문가(Professor)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 학문에 입문하는 대학생들의 연구(studium)를 체계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2. 절(논항)의 구조와 방법

절의 서두에 제기되는 물음은 철학적 탐구방법의 일환으로서, 명제적 물음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픽』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문제란 물음의 형식을 띤 명제이다. 명제적 물음의 제기는 단순히 문제를 구성해 낼 뿐만 아니라, 그 대답에서 학문적 근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행위는 종(種)을 목적에서 받는가?” 여기서 종이란 행위의 선(bonum), 악(malum), 무선무해(indifferens)를 말하므로, 행위의 선과 악은 그 목적에 의해 결정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 명제적 물음에 대해서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그러나…”로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를 선과 악의 결정이라는 물음을 통하여 윤리적 고찰의 지평으로 인도한다. 명제적 물음에 대한 대론과 반론의 연속은 마치 법정의 언어를 연상케 한다. 판사는 피고가 무죄인가 유죄인가를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판단하기 위하여 검사와 변호인에게 주로 명제적 물음으로 진위를 밝혀나간다. 이에 검사와 변호사는 끊임없이 서로 반론을 제기한다. 즉 피고가 그 현장에 있었는가?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 흉기를 들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해결은 이미 유죄인가 무죄인가에 대한 결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판사는 이런 물음을 전개하면서 사건에 속하는 참말과 거짓말을 아무런 편견 없이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어떤 명제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이다. 명제의 구성에 따라 이미 독자들의 사고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목적이 행위의 선과 악을 결정하는가에서 결정하지 않는다는 대론을 수집하려면, 이미 행위론에 대한 근본적이고 다양한 관점의 고찰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이렇게 제기된 대론의 심도에 따라 더욱 심오하고 복잡한 반론이 요구된다.

결국 이렇게 다양하고 심도있는 대론과 반론을 종합하여 하나의 일치된 관점으로 독자의 사고를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숨마의 철학적 방법이다. 따라서 토마스의 철학적 방법은 단순히 대론을 반대하거나 허위로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명제의 엄밀성을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물음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물음 그 자체의 엄밀성! 그것이 토마스 철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각각의 절(논항)은 그때마다 대답으로 끝나지만, 토마스 자신의 물음과 철학적 탐구는 끊임없이 다음 절로 이어진다. 결국 그의 물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학대전』이다. 그러나 『신학대전』의 절들은 던져진 벽돌 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고딕 양식의 건축물처럼 일정한 구조에 따라 쌓여 있다. 학문의 역사에서 중세의 대표적 건축은 『신학대전』이다. 따라서 각각의 절은 그 물음이 추구하는 일정한 구조 속에서만 정확하게 문제의 지평에 세워질 수 있으며,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한에서만 지속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 『신학대전』의 이러한 구조를 도외시하고, 한 두 절의 명제나 질문을 고찰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는 장님이 코끼리를 관찰하는 것이나 같다.


3. 『신학대전』의 구성과 구조

그렇다면 토마스의 윤리학적 기초를 담고 있는 『신학대전』 Ia-IIae qq.1-5는 어떤 구조 속에 있는가? 이 문제들은 어떤 물음의 지평에서 제기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이 문제들이 바로 정의채 역, 라틴어-한글 대역판 『신학대전』 제 16권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16권은 어떤 문제의 지평에 서있는가? 제대로 윤리학적 물음의 지평에 서기 위해서는 『신학대전』의 구성과 구조에서 시작해야 한다. 토마스 자신의 서론은 『신학대전』을 3부로 나누는 것을 이렇게 해명한다.

“성스런 가르침(sacra doctrina)의 주된 의도는 신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신 그 자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물 가운데서도 특히 이성적 피조물의 원천과 목적인 바의 신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로 신에 대해서 고찰하고, 두 번째로 신을 향한 피조물의 운동(움직임, 변화)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제 I부, prima pars: 신과 신의 업적으로서의 창조물: 신론

제 II부, secunda pars: 인간, 특히 신(神)을 원천으로 삼고 있는 동시에 목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움직임: 인간론, 행위론, 윤리학

제 III부, tertia pars: 구원의 실제적 역사.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인간이 신을 향해갈 수 있는 범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사론



나아가 토마스는 인간을 신의 모상(모습, imago dei)으로 강조하면서 제 2부를 시작한다(prologus). 즉 그는 말하기를, 제1부에서는 자기 업적의 원천인 한에서의 신을 다루었으므로, II부에서는 자기 행위의 주체인 한에서의 인간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특별한 신의 모상(imago)이기 때문에 신과 유사한 이성, 자유 그리고 권리를 가진 존재로 설정된다. 그래서 1부를 이론적 부분으로 2부를 실천적 부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 “실천적”(praxis)이란 토마스에게서 최초로 등장하므로 이런 분류를 꺼리는 학자들이 더 많다. 어쨌든 2부는 다시 인간 행위에 대해 보편론인 제 2부의 1부(IIa-IIae)와 특수론인 제 2부의 2부(IIa-IIae)로 양분된다. 양적으로 보면 윤리학에 해당하는 2부가 『신학대전』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이러한 『신학대전』의 구조에 대한 해석과 논란은 1960년대에 일어난다. 첫째로 세뉘(M.-D.Chenu)는 “창출과 회귀의 도식”(exitus-reditus Schema)을 주장한다. 이 도식은 하나의 역사를 세 가지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즉 제1부는 신을 원천으로 창출되는 만물의 유출과정이다. 제2부는 신을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회귀의 과정이다. 제3부는 신에로의 회귀를 위한 그리스도교적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길이다. 둘째로, 하이엔(A.Hayen)의 “그리스도 중심적 도식” (Christozentrische Schema)이다. 이는 『신학대전』의 서언에 기초하여 제1부는 인간의 원형으로서의 신과 신의 의지에 따른 창조이다. 제2부는 원형의 모상, 즉 인간의 원형을 향한 변화(운동)이다 ― 여기서 인간은 그 자체로 자기 행위의 주체이다. 제3부는 진리의 길을 증명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이다 ―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하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인쯔만(R.Heinzmann)의 “신학사적 도식”(Theologiegeschichtliche Schema)이다. 그는 『신학대전』이 “Summa theologiae”에서 “Summa theologica”으로 발전하는 학문론적 과정을 표출한다고 본다.

구조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어쩌면 하나의 구조를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다양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특히 윤리학적 기초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뉘가 밝혀낸 창출과 회귀의 도식이 제2부의 지평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4. 『신학대전』 제2부의 구성


『신학대전』의 제 2부 전체는 신론에 대비되는 인간학, 창조론과 그리스도론에 대비되는 윤리학으로 불리며, 다시 윤리학의 일반론을 다루는 제 2부의 1부와 특수론 다루는 제 2부의 2부로 양분된다. 이미 이러한 학술적 체계에서부터 토마스 윤리학의 체계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 『신학대전』 Ia-IIae의 구성



이러한 구성과 구조 속에서 『신학대전』 Ia-IIae, qq.1-5이 윤리학적 기초로 자리잡고 있는 제2부의 1부는 내용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5 문제 : 행위의 목적들과 궁극목적에 대한 근본 고찰

6-21 문제 : 인간이 목적과 연결되는 방식으로서의 인간적 행위(actus humaus), 행위의 일반적 구조 분석 - 인간의 고유한 행위에 대한 개별적 고찰은 2부의 2부로 이월된다!

22-48 문제 : 인간의 행위는 자기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인을 동반하기 때문에, 감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사랑, 미움, 욕망, 도피, 기쁨, 슬픔, 희망, 의심, 공포, 용감성, 분노가 고찰 대상이 된다.

49-89 문제 : 습관화되어 행위를 지배하는 품성(habitus) 그리고 개별적 행위에 선행하는 행위 정체성으로서의 도덕성과 부덕성이 고찰된다.

90-114 문제 : 지금까지는 행위의 내적 원리를 고찰했으므로, 이제 행위의 외적 원리로서 법률과 은총이 고찰된다.



결국 행위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라는 원칙적이고 보편적인 물음이 제2부의1부에서 추적되고 있다. 곧 행위 자체의 작용 원리는 무엇이며, 행위의 선과 악은 학문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학문론적으로 말한다면, 신학대전 제1부의 2부는 결국 인간 행위에 대한 서술이 학문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라는 가능성이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2) 『신학대전』 IIa-IIae의 구성



제2부의 2부는 철학사 전체에 걸쳐서 인간적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최초의 새로운 시도요, 시험이다. 여기서는 인간적 행위가 동반하는 요인들이 전반적으로 수집되고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된다.

대체로 분류해보면, 그리스도교의 삼덕(三德)인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이 다뤄지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등장하는 네 가지 덕목인 지혜, 정의, 용기, 중용이 주로 고찰된다. 그 외에도 행위를 지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의 모든 원리들이 고찰된다. 결국 인간은 어떻게 성공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가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자료들이 학문적 탐구 대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대전의 제2부 전체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초의 학문적 체계를 갖춘 “행위론”(Handlungstheorie)이며, 이행위론의 향방에 따라 인간의 모든 실천적 문제가 새로이 규정된다. 즉 행위론적 원리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윤리학,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는 정치학, 어떻게 벌어들이고 소비해야 하느냐는 경제학의 원리가 도출된다,

5. 『신학대전』 Ia-IIae, qq.1-5의 구성



이러한 구성에서 행복을 위해 발생하고, 행복에서 완결되는 인간 행위에 대한 일반적 원리가 고찰된다. 이를 물음으로 약술해보자. 행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자연 사물의 발생 원리와 같은가, 다른가? 행위에 대한 서술을 학문적으로 성립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의 지평에서 『신학대전』 Ia-IIae, qq.1-5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토마스가 서술하는 주제를 물음으로 바꾸어 도식화하면,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표 1 참조].

대체로 이러한 탐구의 구성은 자연사물의 발생을 추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여기서 행복은 개념적으로 목적이요, 목적은 행위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점으로 드러난다. 즉 행위는 목적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의 이러한 구성은 어떻게 사물이 발생하는가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설(Hylemorphismus)에, 행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문제를 그대로 대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토마스의 윤리학적 기초가 가지는 특수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6. 『신학대전』 Ia-IIae, 1-5 문제의 지평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토마스는 『신학대전』서문에서 제 2부를 “신을 향한 이성적 피조물의 변화(움직임, 운동)”로 규정했다. 그러나 제 2부의 서언(prologus)에서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신의 모상”으로 규정했다. 결국 제 2부는 원형(exemplum)을 향한 모상(모형)의 변화(움직임)에 대한 고찰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토마스는 제2부의 윤리학 전체를 목적론적으로 크게 정향시키는 첫째 절(논항)에서 의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정초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Ia-IIae, q.1, a.1은 “목적을 위하여 행위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적합한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목적론을 거부하는 대론의 반론에서 토마스는 성서나 여타 신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도입해 온다.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자연학적인 원리를 도입하면서 반론의 기초로 삼는다. “목적은 인간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는 작용들의 원리이다. 그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제2권에서 명백히 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agere propter finem)는 것은 인간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토마스가 지시하는 『자연학』 원전에 가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행위론이나 윤리학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서 대두되는 목적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즉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가를 알려고 한다면, 그 고유한 명세를 목적으로부터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이란 무엇을 위하여(ou heneka)이며, 원천적 시작은 규정과 개념에서 비롯된다”. 이는 명백히 자연 사물의 발생에 있어서 질료가 목적에 대해 가지는 자연적 필연성을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토마스는 이렇게 무리한 종합을 시도하는가 제2부를 정초하는 신학적 인간학으로서의 모상설(Imagolehre)와 자연적 목적론(Naturteleologie)은 무엇을 위한 양 극단인가? 초월적 신을 지향하는 모상의 행위(actus)와 자연적 성숙을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자연적 변화(motus)의 작용방식은 과연 어떻게 학술적으로 상호 해소될 수 있는가? 모상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과 자연적 변화가 지향하는 목적은 동일한가? 자유로운 행위의 목적과 자연적 운동의 목적으로부터 과연 행위의 선악을 규정하는 행위론적 법칙이나 도덕적 준칙이 발견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의 지평에 서면, 우리는 이미 신학적 인간학과 자연학적 목적론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이 긴장을 좀 더 팽팽하게 당겨보자.


7. 『신학대전』 Ia-IIae, 제1문제의 지평


토마스는 Ia-IIae, 제1문제의 서문에서 인간적 삶의 궁극목적에 대해서 다루고, 다음으로 무엇을 통하여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또 없는지를 다루겠다고 밝힌다. 즉 행위와 그 목적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이는 고찰 대상을 다시 8개의 절로 나누게 한다[이하의 도표 2 참조].

토마스는 1절의 본론에서 “인간은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는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첫 단계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를 구분한다. 인간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 중에서 인간적 행위는 오직 정상적 인간에게만 고유한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고유성은 자유로운 의지와 숙고하는 이성 그리고 행위의 주체성에 있다 ― 이것이 바로 모상의 내용이다. 따라서 인간적 행위란 이성으로 숙고하고 의지로 원하고 자신의 권리로 시행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행위에 국한된다.

둘째 단계로 토마스는 인간적 행위를 더욱 엄밀하게 세분한다.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란 의지작용으로부터 비롯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의지작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작용과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토마스는 전통적 방법에 따라 의지작용을 그 자체로 구분하지 않고, 대상에 의해 구분한다. 예를 들어 시각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나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각작용(본다)은 색깔을 지향하는 기능이고, 이와는 달리 청각작용은 소리를 지향하는 기능이다. 소리는 보이지 않고, 색깔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의지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열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무엇을 원한다면, 과연 어떤 관점에서 원하는가? 결국 의지작용이란 어떤 관점에서든 좋은 것[善]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지향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의지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필히 선으로서 의욕된다.” 여기서 선(bonum)은 의지가 의욕하는 목적(finis)과 동격이므로, 결국 “의지적 행위는 목적을 위하여 행한다.” 여기서 선은 아직 윤리적 선도 아니요, 초월적 선도 아니다. 그냥 의지가 행하고 싶어하는 좋은 것,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즉 인간은 어떤 관점에서든 좋은 것을 위해서 행위한다는 결론이 정립된다.

[도표 2]
절의 물음
주제
a.1 목적때문에 행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적합한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인간에게 속한다.
a.2 목적때문에 행한다는 것은 이성적 본성에 고유한가?
목적을 가진 인간의 행위는 다른 (자연)목적론적 해명에 적합한 현상과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a.3 인간의 행위는 종을 목적에서 받는가?
목적설정은 내적으로 인간적 행위에 속한다. 행위는 어떤 목적에 따라 종별화된다
a.4 삶의 어떤 궁극 목적이 존재하는가?
목적들에 대한 어떤 순환 논리적 사고는 목적을 가진 행위와 모순된다
a.5 한 인간에게 여러 궁극목적이 존재할 수 있는가?
궁극목적의 다수성은 궁극목적(최종목적)이라는 개념의 내연과 타협될 수 없다
a.6 인간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궁극목적을 위하여 원하는가?
궁극목적으로서 완전하게 의욕된 선은 다른 모든 것(선)을 위한 서열의 출발점이다.
a.7 모든 인간에게 하나인 궁극목적이 존재하는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완성에 도달하고자 욕구 한다
a.8 그런 궁극목적 안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일치하는가?
인간의 목적은 다른 피조물들의 목적과 경계 지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 결론의 이면에는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인간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목적론 사이의 긴장이 설정되어 있다. 이 긴장은 “선” (bonum)개념에 숨겨져 있다. 라틴어는 정관사도 없고, 부정관사도 없다. 그래서 보눔은 관점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 “선(목적)을 위하여 행한다”(agere propter bonum)는 명제를 해석해 보자. 여기서 보눔(bonum)을 부정관사로 보면(a good), "어떤 좋은 것“, ”일종의 좋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보눔을 정관사로 보면(the good), 좋은 바로 그것, 그 선, 절대선, 유일선, 최고선, 궁극선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마다 ”일종의 선으로 보이기 때문에 원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절대선”이기 때문에 원하는가?

토마스 사후 약 700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학자들은 보눔을 단일화의 어법에 따라 “절대선”으로 해석하고, 철학자들은 다양화의 어법에 따라 “어떤 선”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학대전』, 16권에 속하는 40개의 절(논항)이 제기하는 문제의 지평은 “어떤 선”과 “절대선” 사이의 긴장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토마스 윤리학적 기초의 핵심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보눔과 개념적으로 동격에 속하는 전문용어를 정리해보면, 토마스가 추적하는 문제의 지평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제1-5문제에 걸쳐 탐구되는 토마스의 물음은 [도표 3]의 A면에서 B면 사이의 긴장, A면에서 B면으로의 길, 어떤 선에서 절대선으로, 부분적 행복에서, 완전한 행복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분석과 검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긴장에서 궁극목적(finis ultimus)이란 개념적으로 무엇을 언표하는가? 도달하고자 하는 사태에 대한 언표인가? 어떤 목적 자체의 본질에 대한 언표인가? 도달해야 할 규범적 언표인가? 나아가 그 양태(modus)에 있어서 궁극목적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가? 대체로 사람들은 궁극목적을 행복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도표 3]이 보여주는 긴장은 인간의 궁극목적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서, 인간 자신이 스스로 목적을 선정하는 존재라는 당시로는 관철시키기 어려운 경이로운 사유를 암시한다. 따라서 토마스는 “인간의 궁극목적에 대해 보편적으로”(de ultimo fine hominis in communi) 탐구한 다음에, “행복”(beautitudo)에 대해 논술하고자 한 것이다.

8. 『신학대전』 Ia-IIae, 제2문제의 지평과 최소한의 해석

토마스는 행복의 질료인을 8단계로 나누어 고찰한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라는 물음으로 8가지 대상을 고찰한다. 이 여덟 가지는 부(富), 명예, 존경, 권력, 육체적 선(善), 쾌락, 영혼의 선(善), 창조된 것[차안]이다. 이들은 단계적으로 부정되지만, 조직적 구성을 띠고 있다. 처음 네 가지는 인간 외부의 것이요 그 다음 세 가지는 인간 내면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창조된 것에 대한 물음은 과연 인간의 긍극적 행복이 차안에 있는가를 결정적으로 묻는다. 그러나 이 여덟 가지에 대한 부정은 행복의 해석에 별 의미가 없다. 이들을 부정하거나 부분 부정하는 토마스의 논술에 선과 악의 척도로서의 행복에 대한 고찰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토마스가 말하는 행복의 의미를 위에서 말한 문제의 긴장 속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을 완전히 행복하게 하는 바로 그것은 그야말로 초월적이고 하느님 안에 있지만, 그곳에 있는 행복을 추구하고 그곳에 도달하여 누리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행복한 행위, 그것도 인간의 정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의 행복한 삶 그 자체에 있다.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은 바로 이 현실에서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운전하고 성취하는 행복한 행위 그 자체요, 이런 하나 하나의 행위로 연결되어 있는 행복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논술의 단계를 통해 암시한다.

우리는 그 근거를 제 2문제에서 이월된 제 3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살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위한 최상의 완성은 하느님과 결합될 바로 그 행위(실천, praxis)에 비례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인간의 행위는 영원히 지속적인 것도 아니요, 완전하고 통일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늘 중단되고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 때문에 현실적 삶의 상태에서의 인간은 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없다.” 결국 현실의 행위는 불완전한 행복이지만, 그래도 행복의 일부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행복과 부분적 행복을 하나의 긴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불완전한 행복이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 부분적인 불완전한 행복이나마 성취하면 할수록, 점점 더 완전한 행복에 가까이 가기 마련이다. 나아가 부분적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행복도 무의미하다. 결국 완전한 행복이란 부분적 행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월적이고 피안에 있는 영원한 행복은 이 세상 밖에 있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만,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이 세상에, 차안의 세계에, 바로 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삶 속에 있다. 여기서 행위(actus)란 이성(intellectus)으로 숙고하고 의지(voluntas)로 선택하며, 자신의 권리로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모상의 인간적 행위는 그 원형에 속하는 영원한 행복과 어떤 식으로든 긴장 상태에 있다. 여기서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가진 이성과 의지의 자유, 권리야말로 인간이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이성과 의지는 바로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 내용이다.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아 밖의 것, 자아 이상의 것,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내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있고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자아 자체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타의 생물과 같이 자신의 자체보존이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도 인간 본성의 내용이 자아를 초월하는 것을 자기 안에 가져오고 바라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제2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간략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성으로 숙고하고 자유로이 행위하는 인간의 영원한 고민은 무엇이겠는가? 이성은 영원한 행복을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불완전한 행복에 접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인간은 참된 진리, 절대적 자유, 영원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유한한 것들을 접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이렇게 인간의 특수한 존재방식에 깊이 뿌리박힌 난제를 토마스는 고난도의 단계적이고 조직적인 논술을 통해 추적해 가고 있다.

9. 결어

토마스의 윤리학적 기초에는 무한(도표 3, B면)을 향해 열려있는 인간적 존재방식에 대한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즉 토마스는 인간 본성의 열려있음과 닫혀있음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가운데 성공적 행위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 제시한 문제의 지평으로 돌아가보자.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정초에 따라 인간을 신의 모상(imago dei)으로 본다. 즉 신학적 정초에서 참을 파악하는 이성, 선을 추구하는 의지의 자유 그리고 행복할 권리는 무한으로 열려있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동기를 이용하여 인간의 삶을 행위론적 목적론으로 분석해 나간다. 본 논문에서는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목적론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변용시킨다. 그럼으로써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 대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자연학으로 승격시켰던 것처럼, 토마스는 자연학적 목적론에 기초하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행위론으로 승격시키는 방법으로 삼는다. 이제 학문적 체계를 추구하는 행위론은 비로소 윤리학적 기초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무한으로 열린 존재의 행위를 학문화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모상설과 자연학적 목적론이라는 이중적 정초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행위의 지평에서 가지는 특수한 지위에 비례하는 행위론을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