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비합동적 등가물과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 이론
임 일 환 외대 철학 교수
목 차
Ⅰ. 문제의 설정 : 절대주의와 관계주의
Ⅱ. 공간, 실체, 관계
Ⅲ. 칸트의 1768년의 논증
Ⅳ. 반론들
Ⅴ. 널릭의 칸트 옹호 논증과 절대주의의 딜레마.
Ⅵ. 딜레마의 해소 : 좌우의 차이는 무엇에 수반하는가?
공간에 대한 현금의 형이상학적 이론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종류의 이론의 대립이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절대적 공간 이론과 관계주의적 이론이 그것이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생애 중에서 이 두 가지 이론을 한때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칸트가 이처럼 다양한 이론들을 편력하는 중에서 한가지 핵심적인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그가 “비합동적 등가물(incongruent counterpart)”이라고 부른 대상에 의거한 논증을 1768년에는 공간의 절대성을, 1770년에는 공간 지식의 직관성을 그리고 1783년에는 공간의 관념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공간에 대한 현금의 형이상학 이론의 대립에 대해 칸트의 논증이 어떠한 현대적 함축을 갖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왜냐하면 칸트의 이 논증은 단순히 역사적 흥미 뿐만 아니라 현금의 공간(혹은 시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과 그 철학적 쟁점들의 이해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의의 목적상 이 글에서는 특히 칸트의 1768년의 논증만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Ⅰ. 문제의 설정 : 절대주의와 관계주의
공간에 대한 철학적 문제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로 표현될 수 있다. 공간의 존재론적 지위 혹은 범주에 관한 물음이 형이상학적 문제라면, 우리의 시공간에 대한 지식의 인식론적 지위에 관한 인식론적 논란이 있다. 한편 현대의 과학이론 특히 물리학에서 가장 유용한 개념으로서 전제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는 과학 철학적 문제가 그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문제는 시공간의 철학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칸트에게서 보듯이 때로 한 분야의 철학적 이론은 다른 분야의 이론에 대해 심각한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글의 제목이 암시하듯, 본 논문의 주요 관심사는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공간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론과 관계주의적 이론의 고전적인 대립은 18세기 초엽에 라이프니츠와 뉴톤의 대변자 사무엘 클라크간의 논쟁에서 유래한다. 양 이론의 대립은 일단 다음과 같은 명제로 간단히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절대주의와 관계주의(A: 뉴톤 R: 라이프니츠)
A1. 공간은 존재론적으로 독립적인 개별자이다.
R1. 공간은 물체들의 상호간의 관계들의 체계에 불과하다.
A2. 공간은 아무런 물체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R2. 아무런 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A3. 물체들 간의 공간적 관계는 물체와 물체가 속한 공간 사이의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R3. 물체와 공간간의 관계 그리고 일반적으로 물체의 공간적 성질 일반은 물체들 간의 관계로 환 원된다.
A4. 절대적 운동은 가능하다.
R4. 절대적 운동은 불가능하다. 즉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다.
이상에서 간략히 서술된 두 이론의 대립은 오늘날의 시공간의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한 20세기 물리학의 혁명 이래로 시간과 공간을 각각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보던 전통적 사고는 무너지고, 거리와 속도(즉 시간과 공간)가 공변량이라는 것(따라서 시공간)은 현대의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내가 구별한 처음 세 가지 항목의 대립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공간 다양체”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철학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공간 다양체라는 것이 과연 절대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실체(substance)인가 아니면 관계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제반 물체들의 속성과 관계로 존재론적 환원이 가능한 일종의 논리적 구성물에 불과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해결 해야할 형이상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절대적 운동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하나의 물체는 그것이 상이한 시간에 상이한 장소, 즉 공간 내의 위치를 차지할 때 그때에만 절대적으로 운동한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운동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물체간의 공간적 관계의 변화인 상대적 운동만을 인정하고 따라서 뉴톤과는 달리 세계 내에 단 하나의 물체가 존재한다면 그 물체는 원리적으로 운동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상의 구분은 철저한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한 듯 하다.
칸트는 1747년에 당시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 이론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1768년 칸트는 그의 유명한 “비합동적 등가물”에 의거한 논증을 통해 절대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논증을 살펴보기에 앞서 나는 먼저 왜 이와 같은 공간에 대한 상이한 이론이 형이상학적으로 중요한가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공간에 대한 철학 이론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개념인 실체와 “관계”(relation)라고 불리는 보편자의 철학적 이해에 중대한 함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Ⅱ. 공간, 실체, 관계
공간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론을 아마도 가장 손쉽게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이 공간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상식적인 이해에 흔히 전제되고 있는 견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상적인 대상들 예컨대 나무, 돌, 책상 등의 대상들이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공간이란 그 속에 일상적인 대상들이 들어있는 커다란 통(big container)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통”으로서의 공간은, 약간의 철학적 반성을 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 대상들과는 극도로 상이한 형이상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뉴톤의 제자 존 킬(John Keill)이 말하듯, “공간은 모든 대상들을 그 속에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자체는 어느 것 속에도 들어 있지 않으며, ... 그것은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고 ... 그 부분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만일 공간이 개별자라면 그것은 일상적인 대상과는 전혀 다른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공간을 일상적인 대상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개별자로 인정하는 상징적인 기반에서 출발하는 절대주의적 입장이 왜 17-8세기에 형이상학적 논란을 일으켰는가를 이해하자면 우리는 일단 다음과 같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실체개념을 먼저 언급해야 할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통적 실체의 규정을 살펴보자.
S1. 실체는 구체적 개별자이다.
S2. 실체는 지속적 존재자(temporal continuent)이다.
S3.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자이다.
S4. 실체는 본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전통적인 실체개념의 형이상학적 특성은(S3), 즉 존재론적 독립성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실체는 다른 어떤 실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구체적인 노동자 김철수는 “한국의 평균 임금 노동자”와는 다른 종류의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수많은 구체적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 존재자이고, 인격체 김철수와는 달리 구체적인 노동자들에 존재론적으로 환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유구한 실체존재론의 전통은, 모든 대상이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뿌리깊은 우리의 상식과 즉각적으로 충돌한다. 모든 대상이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공간은 실체가 아니거나, 혹은 공간 내에 있다고 상정되는 모든 대상들, 즉 물체들, 사람들, 지구, 태양 등 모든 구체적 개별자들은 실체가 아니고 공간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 대상들은 그 속에서 그것이 연장을 가질 수 있는 공간(점, 장소, 위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간은 그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따라서(S3), 실체의 독립성의 기준을 받아들이면 공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공간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실체의 다수성(Plurality)을 인정하는 두 가지 선택 밖에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간 유일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전자의 입장, 즉 공간만이 유일한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견해는 스피노자의 견해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간을 한갓 물체들 상호간의 관계들의 체계로 간주하고 실체들의 무수한 다수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물론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ism)이다. 필자가 보기로 공간 유일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전한 세계관과 너무나 어긋나는 입장이다. 만일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면, 이 세계에는 수많은 실체들, 즉 사람들, 물리적인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는 공간 유일론을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공간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무수한 “형이상학적 아톰”의 존재만을 주장하는 라이프니츠의 관계주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인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이미 라이프니츠류의 관계주의가 “모든 대상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자명한 믿음에 가까운 우리의 직관과 상반됨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 볼 1768년의 칸트 논증에 따르면 관계주의는 한가지 중요한 공간적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상황은 이렇다. 실체의 독립성이라는 서양철학의 고전적인 실체 개념은, 실체성의 다수성과 실체의 공간 내 존재라는 우리의 건전한 직관 모두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체가 독립적 존재자라는 고전적 개념도 또한 분석적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으로 타당한 개념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우리는 이 세 가지 그럴듯한 직관들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실체의 독립성을 받아들이면, 공간 유일론 혹은 단자론이라는 형이상학적 부담을 져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런 형이상학적 부담이 과도한 것이라면 아마도 실체의 존재론적 독립성이라는 이 천년 여의 전통적 요구를 수정해야만 할 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공간이 왜 형이상학적 난제를 제시하는가 하는 논리적 관점은 러셀에서 유래한다. 「라이프니츠의 철학」 에서 러셀은 자신의 책의 제일 논제로서 모든 라이프니츠 철학 체계는 그가 의지했던 고전적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러셀은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내가 논증해왔듯, 전통적인 논리학은 ... 모든 명제들은 주어 술어를 갖는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실체의 독트린을 유지하면서, 공간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실체들과 그들이 점유하는 공간들간에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주어와 술어간의 관계가 아닌 고유한 관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관계의 각 항들은 각기 존재하고 그 관계가 변하더라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소와 그 장소를 점유하는 실체 사이의 관계는 고전적인 논리학이 설명할 여지가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관계의 존재가 전통적 논리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러한 러셀의 순수 논리적 논증은 그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순한 논리적 테크닉을 통해 항상 R(x, y)형식의 관계 문장을 관계 R을 포함하지 않는 P(x) 형식의 문장, 즉 일항 속성만을 내포하는 명제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는 2항 관계문장은 철수는 “영희를 사랑함”이라는 관계적 속성을 갖는다는 주어/술어 형식의 문장으로 항상 환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든 다항관계를 이처럼 관계적 속성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공간을 내포하는 관계문장의 단순한 논리적 형식 때문에 라이프니츠가 공간의 실체성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러셀의 논점이 설득력이 약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라이프니츠가 공간의 실체성을 부인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논리적인 근거 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한 실체의 형이상학을 함께 고려할 때 보다 잘 이해가 된다고 생각된다. 비록 우리가 논리적 테크닉을 통해 관계일반을 관계적 속성으로 환원한다고 할지라도, 예컨대 “철수를 사랑함”과 같이 “y에 대해 R관계를 가짐”이라는 형식의 환원항 일반들은 여전히 제거할 수 없는 방식으로 특정 실체를 그 구성요소로서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위에서 말한 통사론적 논리적 테크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주어진 하나의 실체는 또 다른 실체(즉 장소, 공간)를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그런 속성을 궁극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실체는 또 다른 실체에 존재론적 독립성을 갖는다는 실체 존재론의 기본테제와 상반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따라서 나는 관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데이비드의 아버지임과 솔로몬의 아들임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양자에게 공통된 관계는 실체들의 속성이 그 기초가 되는 한갓 관념적인 것이다.
이 인용문은 명백히 라이프니츠가 공간 관계주의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물체들간의 관계 일반 역시 궁극적으로는 논리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라이프니츠에 있어 Rab 형식의 모든 관계적 사실은 궁극적으로 Fa&Gb 형식의 순수하게 비관계적 사실로 환원된다. 그리고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관계의 “관념성”의 테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다수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물체와 공간간의 관계를 물체들만의 관계로 환원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뉴톤과의 논쟁의 결과이며 공간 개념의 1차적 분석이다. 그러나 실체의 존재론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체들간의 관계 일반은 궁극적으로 단자들의 일항 속성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것이 공간개념의 2차적 분석이다. 1차적인 공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분석에 있어 공간은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공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관계주의에 있어서도, 공간이 그것으로 환원되어지는 물체들의 관계와 속성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절대주의와 관계주의는 모두 객관적 공간이론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2차적 분석이 옳다면, 다시 말해 물체간의 관계일반이 단자들의 순수하게 비관계적 속성, 즉 라이프니츠가 “관점(points of view)”이라고 부른 것에 환원된다면 공간은 더 이상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공간의 객관성 대 관념성이라는 2차적 분석의 성패 여하에 달려있는 문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적어도 1768년의 칸트는 공간의 라이프니츠적인 1차적 분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 논증을 살펴보자.
Ш.칸트의 1768년의 논증
이미 언급했듯 라이프니츠의 영향 하에 칸트는 1747년에 당시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주의적 이론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비합동적 등가물”에 의거한 논증은 1768년에 최초로 등장하고 이 논증을 통해 그는 일단 절대주의자로 변신한다. 한편 논증은 그의 1770년의 “취임논문”에서는 우리의 공간에 관한 지식의 직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괴이하게도 논증은 칸트의 주저 <순수 이성 비판>에서는 사라졌다가 1783년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언>에서는 이른바 칸트의 성숙한 견해, 즉 공간의 관념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된다. 물론 우리의 관심은 1768년의 절대주의 옹호 논증이다. 그의 이 논증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비합동적 등가물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비합동적 등가물이란 간단히 말해, 우리의 왼손과 오른손, 혹은 왼 귀와 오른 귀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과 그 대상의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서로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등가적 대상이 겹쳐질 수 없는 그런 한 쌍의 대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왼손 장갑에 오른손을 꼭맞게 끼울 수 없는 까닭은 양자의 공간적 형체가 다른 것 때문이고, 바로 이 차이점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신발이 두 가지 종류(왼발을 위한 것과 바른발을 위한 것)가 있다는 것을 이해 하는데 애를 먹는다는 사실이다. 약간 극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인류가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하나의 거울을 통해 본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비합동적 등가물의 모습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나는 실제의 나와는 달리 왼손잡이이며 심장이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친숙하고도 흥미로운 대상들이 칸트가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기초인 것이다!
“공간의 영역 구분의 제일 근거에 대하여”라는 1768년의 논문을 통해 칸트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다.
(1) 주어진 손이 왼손이거나 바른손인 것은 그 손의 각 부분들 간의 내적인 관계 때문이거나 그 손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의 외부적인 관계 때문이다.
(2) 그러나 주어진 손은 그 내부적 관계로 인해 왼손이나 바른손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왼손이나 오른손이나 각기 그 부분들 간의 내부적 관계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3) 더구나 주어진 손은 그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와의 외부적 관계 때문에 왼손이나 바른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 내에 단 하나의 손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왼손이 아니면 바른손일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주어진 손이 왼손이거나 바른손인 것은 절대적 공간과의 외부적 관계 때문이다.
논증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세개의 전제를 받아들이면(그리고 왼손과 바른손의 존재를 인정하면) 뉴톤의 절대적 공간을 받아들여야 한다.
칸트의 다른 논증과는 달리 위의 논증은 놀랍도록 단순해 보이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논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이 논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 해왔다. 나는 다음 절에서 이 논증에 대한 최근의 반론들 그리고 칸트가 제기한 문제의 해결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가장 널리 알려진 칸트 논증에 대한 반론을 일단 논박하고자 한다.
칸트 논증에 대해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반론은 “4차원 공간 논증”이라고 불릴 수 있다. (여기서 “4차원 공간”은 흔히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 4차원이 아니라 공간의 4차원을 의미한다.) 이 반론은 비트겐슈타인, 베일(Weyl), 페어스(Pears), 야머(Jammer), 등에 의해 제기된 반론인 바, 그 핵심은 수학적 4차원 공간을 인정하면 칸트가 말하는 비합동적 등가물이라는 문제는 아무런 철학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즉 칸트는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을 보자.
“서로 겹쳐질 수 없는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칸트의 문제는 평면과 1차원 공간에도 이미 존재한다 .... 오른손과 왼손은 사실상 완벽히 합동이다. 오른손 장갑은 만일 그것이 4차원 공간에서 뒤집혀지면 왼손에 맞도록 끼울 수 있다.”<논고6.36111>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 비합동적 등가물은 왼손 오른손과 같은 3차원의 대상뿐만 아니라 2차원 평면 및 공간 1차원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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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림 1 그 림 2
그림 1에서 보듯 공간 1차원상의 선형 벡터는 1차원 내에 한정될 경우 겹쳐질 수 없다. 그림 2의 “왼쪽 삼각형”과 “오른쪽 삼각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주어진 N차원의 대상에 대한 모든 반영적 사상(reflective mapping)에 대하여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N+1 차원에서의 변위 및 회전 사상(translation/rotation)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3차원의 왼손은 4차원 공간에서는 단순한 운동을 통해 오른손이 된다. 예컨대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는 그림 2의 왼쪽 것을 “공간 속에서” 뒤집어서 오른쪽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적 반론 일반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올바른 반론이 되지 못한다. 첫째 이런 류의 논증이 주장하듯 3차원의 비합동적 등가물의 “합동성”을 4차원의 공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더라도, 각 차원에는 각 차원 고유의 비합동적 등가물이 존재한다. 따라서 4차원의 등가물은 5차원을 통해서 5차원의 그것은 6차원을 통해서 하는 방식의 무한 상승이 일어난다. 즉 이 반론은 각 차원에서 성립하는 칸트의 논증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실제적 무한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는 불합리를 초래한다. 더구나 문제는 이처럼 비합동적 등가물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고차원의 공간들 자체는 과연 절대적인 공간인가 비절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칸트의 반대자들은 단지 문제를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은 것 뿐이다.
둘째로, 오늘날의 현대 과학과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3차원의 공간의 세계이다. 따라서 3차원 이상의 공간 고차원을 도입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공간 4차원의 가능성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가능한 공간 속에서” 주어진 손을 뒤집는다는 것은 진실로 불가해한 말이다. 왜냐하면 절대주의 이론이 옳다면 가능한 4차원의 공간은 마이농 식의 가능한 개별자일 것이고, 관계주의가 옳다면 그것은 추상적 존재자들의 체계일 것인바 이들 “속에서” 손을 뒤집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더구나 존 이어만이 지적하듯 4차원 공간의 “손”은 우리가 “손”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갖추지 못한다. 그 “손”은 우리가 손바닥이나 손등의 피부를 건드리지 않고도 손가락 뼈들을 들어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과연 우리가 개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이것이 우리의 왼손과 오른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지 불가해하다.
셋째로, 칸트는 명백히 공간의 4차원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그는 실제 세계의 공간 3차원성을 경험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필연적 사실이라고 논증한다. 따라서 적어도 4차원 논증의 주장자들은 칸트에 대해 선결 문제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나는 고차원 공간에 의거한 반론은 칸트의 논증에 대한 적절한 반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간의 차원성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기로, 칸트의 논증에 중요한 함축을 갖는 공간의 위상학적 성격은 언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향적(orientable) 공간과 비정향적(nonorientable) 공간의 차이이다. 비정향적 공간을 가장 손쉽게 이해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를 고려하는 것이다.
그 림 3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는 비정향적 2차원 공간이고 이 공간 내에서는 2차원 비합동적 등가물이 띠 전체를 통해 변위시키면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모든 경험에 비추어 우리의 세계는 3차원이며, “국지적으로”(locally) 정향적 공간이다. 바로 이 때문에 뫼비우스의 띠와는 달리 우리의 왼손과 오른손은 겹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3차원 공간이 “총체적으로”(globally) 뫼비우스 띠같이 비정향적 공간이 아니라는 선험적 논증도 없고 경험적 증거도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공간의 총체적 구조로 말미암아 왼손이 원리적으로는 오른손과 합동적이라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이 공간의 비정형성 혹은 정형성이 갖는 귀결은 Ⅵ절에서 논의될 것이다.
Ⅳ.반론들
이상에서 우리는 칸트 논증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반론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보았다. 이 절에서 다루어야 할 최근의 반론들은 칸트와는 달리 좌우의 차이는 주어진 손의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공간이 아닌 또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는 반론들이다. 그리고 이 반론들은 대부분 칸트 원래의 논증의 전제(2)와 (3)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논리적 완벽성을 기하기 위해 전제 (1)에 대한 반론을 일단 고려해 보자.
칸트 논증의 전제 (1)은, 좌우 손의 차이는 주어진 손의 각 부분들 간의 내적인 관계 때문이거나 아니면 손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전제였다. 내가 아는 한 전제 (1)을 반박함으로써 칸트를 비판하는 철학자는 없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듯하다. 왜냐하면 전제 (1)의 부정은, 주어진 손이 왼손(오른손)인 까닭은 주어진 손이 그 전체로서 “왼손임”(바른손임) 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된다. 다시 말해 이 반론은 왼손과 오른손이 다른 것은 그것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주장이 된다. 좌우의 차이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다른 종류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는 포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보자.
램넌트(P.Remnant)와 마틴 가드너(M.Gardener) 등은 칸트 논증의 세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 즉 그들에 따르면 주어진 손이 왼손이거나 바른손인 것은 어떤 특정한 표준적 대상과의 관계 때문이고, 따라서 단 하나의 손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왼손도 바른손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렘넌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단 하나의 손을 내포하는 우주에서 주어진 손이 왼손인가 오른손인가 하는 문제는 경험적으로 결정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엄밀하게 불확정적이다 ... 주어진 삼각형이 오른쪽 삼각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왼쪽 삼각형이 될 것인가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삼각형을 평면에 놓는가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우주를 창조한다면, 최초의 손이 왼손인가 바른손인가는 내가 그 다음에 어떤 표준적 신체(standard body)나 그 등가물을 창조할 것인가를 결정함으로써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렘넌트는 “단 하나의 손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왼손이거나 오른손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유명한 사고실험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단 하나의 손은 왼손도 오른손도 아닌 “중립자(neuter)”라는 것이다.
단 하나의 손만이 존재하는 우주는 가정상 관찰자를 내포하지 않는 가능세계이다. 혹자는 따라서 관찰자라는 경험의 조건이 제시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의 손이 왼손인가 오른손인가 하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넌센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 도그마가 아니라, 이 논증이 주장하듯 마치 당구공이 지구에 비해서는 “작고” 모래알에 비해서는 “큰” 것처럼, 주어진 손은 항상 특정 표준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왼손 혹은 오른손이라는 사실이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렘넌트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다.
주어진 손 H는 신체 B에 대해 왼손(오른손)이다 = Df. H는 신체 B의 심장쪽(심장에서 먼 쪽)의 손목에 적절히 부착된다.
그러나 렘넌트의 이런 설명이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렘넌트에 따르면 좌우의 차이는 우리의 심장과의 관계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분석이 옳다면 만일 외과의사가 나의 심장을 오른쪽으로 이식수술을 한다면 나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불러야 한다. 명백히 이는 불합리하다. 우리의 심장이 어디에 붙었는가는 아마도 방향을 구분하는데 유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손의 형태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닌 것이다.(대부분의 우리말 사전은 왼손을 “왼쪽에 있는 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한 방향 이상의 형태라는 의미에서 “왼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칸트 논증의 세 전제 중 두 가지 전제에 대한 반론을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전제는 전제 (2) 즉 좌우의 차이는 손의 각 부분들 간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전제이다. 칸트는 명백히 손의 부분들 간의 관계를 손가락들의 각도 거리 및 선의 관계로만 해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어진 대상을 그 비합동적 등가물로 변환하는 반영적 사상에 있어 이러한 관계는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나 칸트의 전제 (2)를 비판하는 입장은 주어진 손의 내부적 관계를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좌우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밴 클리브(Van Cleve)는 “왜 내부적 관계는 거리와 각도의 관계들에 한정되어야만 하는가? 왜 그것은 또한 방향성(direction)의 관계를 포함하면 안되는가?” 라고 말한다.. 또한 이어만(J.Earman)은 칸트의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관계주의자들은 주어진 손의 각 부분들은 “왼손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음(standing in a left-handed confiuration)”이라는 환원이 불가능한 원초적 관계를 상정함으로써 칸트의 절대주의적 논증을 회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논의의 편의상 이런 논증을 간단히 "내부주의"(internalism)라고 부르자.
밴 클리브와 이어만이 지적하고 있는 내부주의는 간결히 말해 그림 1의 1차원 선형벡터, 즉 화살표의 차이는 각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절대적 방향성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부주의의 이러한 해결책이 단순한 임시변통적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그레엄 널릭(Graham Nerlich)은 “원초적 관계에 호소함으로써 좌우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편 밴 클리브는 다음과 같이 내부주의자가 단순히 임시변통적 해결책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원초적 내부적 관계를 상정하는 것이 단순히 임시변통적인 것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다음의 논증은 좌우의 기초를 구성하는 어떤 특정한 내부적 관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른손에서 엄지를 제거해서 손바닥의 다른 끝에 붙이면 그 결과는 오른손이 될 것이다 ... 따라서 주어진 손의 부분들을 재배열함으로써 - 다시 말해 그 내부적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역으로 손의 부분들을 재배열하는 것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 도대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손이 왼손인가 오른손인가는 전적으로 내부적 관계의 함수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은 이러한 내부주의 논증이 직관적으로 커다란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주의가 칸트가 제기한 비합동적 등가물이라는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단계의 논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칸트 자신에 의한 내부주의에 대한 반론을 검토해야 한다. 두 번째로 이와 관련하여 칸트 자신의 반내부주의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그레엄 널릭의 칸트 옹호론이 과연 정당한가를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내부주의가 좌우의 차이라는 칸트의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절대주의 대 관계주의라는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의 대립에 어떠한 함축을 갖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 논증의 세 개의 전제와 칸트 자신의 결론에 대한 논의를 완결시킬 것이다.
먼저 왜 내부주의가 우리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칸트 자신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러나 부분들의 이러한 배열들이 향하고 있는 공간 영역은 그 대상 외부에 있는 공간에 대한 지칭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보다 넓은 공간 내의 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연장이 그것의 부분으로 간주되는 단일체로서의 보편적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귀절에서 칸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예컨대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했을 때 엄지가 오른쪽 방향을 지칭하는 것과 같이, 내부주의가 주장하는 손의 부분들이 갖는 방향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보편적 공간” 즉 절대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지적인 것 같다. 그러나 나 자신은 방향성이 절대적 공간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칸트의 주장이 그렇게 명료하게 해석될 수 있는 주장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의문에서 그레엄 널릭은 칸트의 바로 이러한 주장에 근거해서 칸트의 절대주의 논증을 옹호하고 있다. 이제 그 논증을 살펴보자.
Ⅴ. 널릭의 칸트 옹호 논증과 절대주의의 딜레마
이미 보았듯 현대의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칸트의 논증에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만일 의견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칸트의 논증이 오류인가 하는 점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레엄 널릭(Graham Nerlich)은 칸트의 논증은 약간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옳은 논증이고 따라서 공간의 절대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먼저 널릭은 비합동적 등가물의 개념과 그가 “이상성(enantiomorphism)” 이라고 부르는 것의 개념을 구분한다. 널릭에 따르면 한 대상은 그것이 실제로 비합동적 등가물을 갖고 있을 때 오직 그럴 때만 비합동적 등가물이다. 즉 “비합동적 등가물임” 이라는 관계는 실제의 대상간의 관계이다. 한편 한 대상은 그것이 비합동적 등가물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 있으면 “이상”이고 만일 그런 가능성이 없으면 “동상(homeomorph)”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널릭에 의하면 칸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손만이 존재하는 가능세계의 손은 비합동적 등가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손이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그에 해당하는 비합동적 등가물을 가질 수 있으므로 이상성를 갖는다. 쉽게 말해 대상이 이상성을 갖는 것은 “왼손 혹은 오른손임” 이라는 선접속성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이제 널릭은 칸트 논증의 결함은 단 하나의 손이 필연적으로 왼손이거나 오른손, 즉 이상성을 갖는다는 전제가 거짓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4차원 공간 혹은 비정향적 공간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따라서 그런 공간 내의 유일한 손은 왼손도 오른손도 아닐 것, 즉 동상성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은 이상 혹은 동상이어야 한다. 즉 좌우가 결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주어진 손이 이상인가 동상인가 하는 문제는 그 손이 어떤 공간의 내부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만일 그 손이 삼차원 정향적 공간 속에 있다면 그것은 왼손이나 오른손이어야 하고, 양자 중 어느 것인가 하는 것은 주어진 손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간에 “투입”되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주어진 손이 동상인가 이상인가, 만일 이상이라면 오른손인가 왼손인가 하는 문제는 손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의 차원성이나 정향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원성이나 정향성은 전체로서의 공간이 갖는 속성이므로 이상 동상의 차이는 절대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널릭의 논증이 함축하는 내부주의에 대한 반론은 이것이다. 내부주의는 좌우의 차이가 손의 각 부분의 관계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배열되었는가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널릭의 논증이 옳다면 한 쌍의 손이 “방향성이 동일하거나 상이함”이라는 속성도 마찬가지로 대상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칸트가 말하듯 “방향성은 절대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전개된 널릭의 논증은 실상 두 가지 논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상의 이상성이 공간 자체의 차원성에 의존하므로 절대주의가 옳다는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첫째, 널릭의 절대주의 옹호론은 이상성이 공간의 차원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에 의존하는 논증이다. 그러나 로렌스 스클라(Lawrence Sklar)가 이미 지적했듯 널릭의 논증의 성패는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관계주의자가 공간의 차원성을 순수하게 관계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공간의 차원성이나 정향성이 관계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널릭의 논증은 절대주의 옹호론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의 논문에서 이어만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관계주의적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널릭의 절대주의 옹호론은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칸트와 널릭이 주장하듯 내부주의가 의존하는 방향성의 개념이 절대공간을 전제로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의 두가지 협약을 받아들이자. 먼저 나는 시각적 편의를 위해 왼손 오른손보다는 단순한 화살표의 방향성을 고려하고자 한다. 둘째로 다음의 “기초적”(grounded) 관계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라이프니츠의 인용문 참조)
(GR) 이항관계 R은 그 관계항 x, y에 기초지어진 기초적 관계이다. = Df. 필연적으로, 대상 x와 y사이에 관계 R이 성립하면, 비관계적 속성 F와 G가 있어, (1) x는 F를 갖고 (2) y는 G를 갖고 (3) x와 y사이에 R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Fx & Gy에 의해 논리적으로 함축된다.
예컨대 “동일한 색상을 갖음”이라는 관계는 기초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사과 a와 b가 동일한 색상을 갖는 것은 a가 붉고 b가 붉기 때문이다. 한편 “5미터의 거리 간격”이라는 관계는 비기초적 관계의 그럴듯한 예이다. 사과 a, b의 모든 비관계적 속성, 예컨대 색, 크기 형태 등의 내재적 속성들이 불변한다고 할지라도 거리 관계는 성립 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거리라는 관계적 사실은 관계항들의 비관계적 사실에 의해 함축되지 않는다.
이제 방향성이 칸트와 널릭의 주장과는 달리 절대적 공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널릭에 따르면 주어진 화살표가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화살표와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이 화살표와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는 과연 기초적 관계인가 비기초적 관계인가? 만일 그 관계가 기초적 관계라면, 각 화살표들은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 즉 방향성의 기초가 되는 비관계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각 화살표들은 그 자체로서 방향성을 결정짓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정상 방향성은 절대적 공간을 도입할 필요가 없이 설명될 수 있다. 한편 만일 그 관계가 비기초적 관계라면, 다시 말해 주어진 화살표가 방향성을 갖는 것이 다른 어떤 비관계적 사실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원초적 관계라면, 그 원초적 관계는 각 화살표간에 직접적으로 성립하지 말아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즉 절대적 공간은 도입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밴 클리브는 이것이 절대주의의 “근본적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좌우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절대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칸트와 널릭에 의한 내부주의에 대한 반론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Ⅵ.딜레마의 해소 : 좌우의 차이는 무엇에 수반하는가?
이상에서 우리는 내부주의에 대한 칸트와 널릭의 반론이 내부주의에 대한 적절한 반론이 되기보다는 절대주의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칸트의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에 대한 내부주의의 해결책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가? 내부주의를 옹호하는 밴 클리브와는 달리 나는 그러한 결론이 성급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앞절의 논의를 통해 밝혀진 것이 있다면 좌우의 차이 그리고 손의 방향성의 개념 등이 절대적 공간을 도입할 필요없이 해명될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물론 칸트나 널릭처럼, 특히 방향성의 개념을 대상을 포함하는 외부의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절대주의자는 아주 간단히 이 딜레마를 해소시킬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대상의 외부에 있는 절대적 공간과의 관계에 의해 대상이 방향성을 갖는다고 주장하지 말고 단순히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 그자체, 즉 공간적 점(Spatial Point)들의 집합이 방향성이라는 속성을 가지며, 따라서 화살표라는 물체가 방향성을 갖는 것은 그것이 점유한 공간의 성격에 의해 도출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좌우의 차이도 예컨대 주어진 손이 왼손인 까닭은 그 손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영역이 "왼손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음" 이라는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된다. 물론 관계주의자는 이러한 원초적 관계가 공간적 점들 간의 관계에만 한정되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반박할 것이다. 특히 내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설명이 존재론적으로 보다 경제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위에서 좌우의 차이가 절대적 공간에 의존하지 않는 내부주의에 의해 설득력 있게 주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입증하는 것은 좌우의 차이라는 칸트의 문제는 공간의 절대성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왜냐하면 좌우의 차이는 관계주의에 의해서도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절대주의에 의한 설명이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함축하지 않는다. 이미 보았듯 단지 내부주의는 마치 거울이 대상을 비추듯 절대주의적 설명을 내부주의적으로 반영할 뿐이었다.
이러한 논점은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 생각으로 우리가 다루었던 대부분의 칸트 반대자들은 이러한 결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는 관계주의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칸트의 논증을 뒤집어 칸트 절대주의에 대한 반박론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부주의를 주장하는 밴 클리브는 “주어진 손의 부분들을 배열함으로써 왼손을 오른손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왼손을 오른손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좌우의 차이가 내부적 관계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환원적 분석이다. 한편 우리가 IV절에서 살펴보았던 렘넌트나 가드너는 주어진 손은 적절한 표준적 대상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오직 그때에만 왼손(오른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지적했듯 절대주의적 설명도 좌우의 차이를 교과서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좌우의 차이에 대한 환원적 분석은 오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칸트의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제기할 수 있는 철학적 물음은 좌우의 차이는 무엇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좌우의 차이는 무엇에 수반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반은 환원이 아니라 단지 충분조건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했을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살아남은 내부주의와 절대주의가 과연 좌우차이의 적절한 수반 기초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주어진 손이 내부주의적 아니면 절대주의적 특성을 가지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왼손(오른손)이어야만 하는가?
내부주의자는 적어도 주어진 손의 내부적 관계가 그것이 왼손임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밴 클리브 자신은 우리가 4차원 공간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내부주의의 주장과는 반대로 주어진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갖고 있는 내부적 관계에 의해 함축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4차원 공간 내의 손은 나의 오른손과 동일한 내부적 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즉 4차원 공간 내의 손은 좌우가 결정될 수 없는 “동상성”을 갖기 때문이다. 밴 클리브 자신은 이 문제를 공간 4차원이 불가능하다는 칸트 자신의 입장을 옹호함으로써 내부주의의 옹호론을 완결 짓는다. 그에 따르면, “손이 특정한 내부적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손이 3차원 공간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 양자는 그것이 오른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왜냐하면 P와 Q가 R을 함축하고 Q가 필연적인 사실이면, P는 그 자체로써 R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공간 4차원을 좌우 차이의 문제에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4차원 공간의 손은 동상성, 즉 좌우가 결정될 수 없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주어진 손이 오른손인가 왼손인가 하는 우리의 물음에 좌우가 결정될 수 없는 그런 "것"이 무슨 함축을 갖는가? (예를 들어 심적 고통이 두뇌의 물리적 상태에 수반한다는 주장에 대해, 심적 고통이 실현될 수 없는 세계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올바른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공간의 차원성이 아니라 정향성의 문제는 여기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간결히 말해 밴 클리버의 주장과는 달리 손의 내부적 관계와 내포 공간의 필연적 3차원성조차 주어진 손이 왼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이 밴 클리브의 주장대로 필연적으로 3차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뫼비우스 띠처럼 비정향적 공간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왼손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언급했듯 차원성과는 달리 공간의 정향/비정향성의 문제는 경험적인 문제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사실상 비정향적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수반적) 내부주의의 올바른 표현은 손의 내부적 관계 및 내포공간의 정향성이 좌우 차이의 수반기초라는 것이다.
물론 내부주의만이 유일한 수반기초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이 두뇌 상태에 한다고 할지라도 고통을 결정하는 상이한 두뇌상태들은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이미 언급한 방식으로 절대주의적 수반기초도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절대주의도 내부주의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정향/비정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정향적 공간은 정의상 공간적 점들이 좌우와 같은 정향성을 가질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주의자는 적어도 공간의 정향성을 관계주의적으로 분석해야 할 부담이 없다. 그러므로 좌우의 차이는 무엇에 수반하는가 하는 우리의 문제의 답은 내부주의와 절대주의의 선접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결론일 것이다.
맺음말로서 이상의 나의 논증을 요약해 보자. 왼손과 오른손과 같이 단순한 비합동적 등가물이라는 대상에 의거한 칸트의 논증은 관계주의에 대한 절대주의 옹호론으로서는 실패한 논증이었다. (공간의 차원성과 정향성이 관계주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적어도 한가지 관계주의적 분석, 즉 우리가 내부주의라고 불렀던 설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칸트의 논증의 기본적 오류가 환원적 분석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를 관계주의에 의거한 환원적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하였던 많은 칸트 비판자들도 동일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였듯 좌우의 차이는 환원적 분석이 아니라 수반적 기초를 해명함으로써 해결되어 야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처럼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가 수반 기초의 문제라는 사실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칸트의 통찰이 근본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관계주의 일반이 주장하듯 대상의 공간적 속성 일반은 대상들간의 속성과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칸트는 좌우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이런 문제를 또 다른 환원적 분석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에 대한 현대의 비판자들에게서 우리가 이미 보았듯 환원적 분석의 유혹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나는 내가 비합동적 등가물의 문제해결을 위해 도입했던 수반의 개념이 단순히 좌우의 차이를 떠나 절대주의와 관계주의라는 고전적인 대립에 대한 한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음이 이 글을 통해 밝혀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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