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생물철학과 비판적 목적론
맹 주 만(중앙대)
1. 선험철학과 생물학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철학적 물음이다. 하지만 생명의 본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생물학과 철학 각각에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문제는 과학자(생물학자)와 철학자 모두에 의해서 탐구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물철학과 이론생물학을 구별하고 실제로 그 경계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우선 근대과학의 시기에도, 특히 16세기 이래로 생명현상과 생명과정에 대한 설명과 이해의 문제는 과학과 철학이 현재와 같이 분업화되지는 않았지만 양 진영 모두에서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칸트는 자연과학과 자연철학, 생물학과 생물철학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에 누구보다도 이들 학문의 주제와 방법 그리고 원리가 갖는 특성과 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개념적으로 분명히 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수행한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또한 칸트는 생물학의 핵심적 연구 대상인 생명체 또는 유기체에 관한 문제를 생물학자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칸트가 처음부터 철학적 관점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칸트는 분명히 당시의 생물학적 연구 성과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자연사와 생식이론에서 거둔 중요한 발전들을 추적하고 반성해 나갔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또는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훗날 칸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면서 유기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대의 논의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당대의 유기체 이론들에 대해서 취했던 칸트의 태도가 그의 철학 체계를 수립, 완성하는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에 유기체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생물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칸트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으며, 이것이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계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칸트가 유기체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는 ?판단력비판?의 제2부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은 생명에 관한 학, 즉 생물학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철학적, 특히 방법론적 문제들에 대한 성찰로 해석된다. 칸트는 이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도 자연 사물들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은 그것이 가능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옳다는 근본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경험적 법칙들은 단순히 기계론이든 아니면 형이상학적 내지는 신학적 목적론이든 그 어느 쪽도 이를 원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이론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반성적 판단력에 기초한 자연목적의 개념을 상정함으로서 해결하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에 유기체의 발생과 전개 및 존재방식과 그 원리 등의 문제를 놓고 벌어진 기계론과 생기론의 대립과 문제들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철학 체계의 체계적 통일이라는 원대한 기획을 완결짓는데 기여하게 된다.
현대 생물학의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유전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시절의 칸트가 보여준 유기체에 관한 통찰은 생물학적 설명으로서는 몇 가지 오류를 포함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문제를 오늘에 와서 상대화시키면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적 사유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칸트가 당시에 유기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또 유기체의 과학적 설명에 수반되는 문제들에 대한 칸트의 평가와 반응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칸트의 유기체론이 그의 선험적 철학 체계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칸트가 자연과 자유의 통일 기획의 완성을 시도하면서 유기체에 대한 일정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판단력비판?(1790)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 밖에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개진하고 있는 일련의 저술들, 즉 ?보편적 자연사?(1755), ?신 존재 증명?(1763), ?다양한 인종에 대하여?(1775), ?순수이성비판?(1781/1787), ?헤르더의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서평)?(1784/1785), ?인종의 개념 규정?(1785), ?철학에서의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1788) 등을 검토하면서 칸트의 유기체에 관한 사유의 궤적을 추적해 볼 것이다.
2. 물질과 생명
칸트가 본격적인 철학적 연구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영역이 자연철학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칸트는 1756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동물과 식물의 분류학과 계통학을 포함하는 자연지리학(die physische Geographie) 과목을 개설하고 그 후 1797년에 은퇴하기 전 해까지 40년 동안 48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이 과목을 강의했다. 자연지리학 강의에 이용한 문헌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칸트가 자연사와 생식이론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전을 추적했으며, 또 이에 대해서 성찰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순수이성비판?의 출간을 전후해서 그리고 ?판단력비판? 이전에 발표한 ?다양한 인종에 대하여?, ?인종의 개념 규정?, ?철학에서의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 등은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 중요한 글들인데, 이 논문들도 자연지리학 강의와 관련해서 작성된 것들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칸트는 이미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 초기부터 생물학적 문제에 상당히 몰두했던 것 같다.
이러한 연구가 이루어지던 초기부터 생명체를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칸트는 언제나 회의적인 견해를 취한다. 이 같은 사실은 예전부터 칸트가 자연사를 비롯한 당시의 생물학적 연구 동향과 결과들에 대해서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비록 명확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이미 그 나름의 생물학적 입장을 견지해 가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도 초기에 이루어진 생물학 관련 언급들은 대부분은 자연사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들을 위주로 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의 칸트는 경험적 자연현상으로서 유기체가 보여주는 독특함과 신비로움을 인정하면서 또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전적인 설명 불가능성을 지지하면서 생명을 비유기체 즉 물질로부터 분명히 구분짓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물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을 다른 유기체와 구별하는 입장도 고수하고 있다. 이 같은 흔적은 1755년에 발표한 태양계의 기원과 발전을 물질(Materie)의 일반 법칙과 속성에 의거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보편적 자연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저술에는 거시적인 자연 세계에 대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지만 유기체에 대한 소견도 곁들여지고 있다. 말년의 철학적 사유에 이르러서까지도 유기체를 놓고 끝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칸트의 고민 또한 이미 ?보편적 자연사?에서 극적인 형식으로 대비해 놓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예시되어 있다.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그것을 갖고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즉,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너희들에게 어떻게 해서 세계가 생겨났는지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의 유충이 어떻게 해서 생길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구절이 시사하듯이 물질과 생명은 현상적으로 전혀 다른 특성들을 갖는 대상들이다. 이처럼 생명과 물질을 차별화하는 기조는 전체적으로 칸트의 생물학적 고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칸트는 물질의 원리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지만, 생명의 원리를 기계적 법칙에 따라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즉, 칸트는 전자에 대해서는 가장 단순한 기계적 원인에 따라 세계 체계의 성립을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생명을 하나의 통일적 원리에 입각하여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자연과 자유의 조화와 통일적 체계를 기획하고 있는 칸트의 선험철학의 목표와 궤를 같이 한다.
신의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칸트는 자연을 뉴턴처럼 “신의 직접적인 손,” “신의 직접적인 의지의 통솔,” 또는 “신의 선택”에 의해서 조정되고 간섭받고 지배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연 자체의 자족적인 운동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는 유기체든 비유기체든 기본적으로 기계론에 의거하여 일체의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기계적 법칙을 단순한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적 힘들의 작동에 근거하여 이해하려 하고 있다. 때문에 칸트는 자연의 역사를 자연의 내면적 법칙에 따라 발생․소멸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 법칙의 필연성이 곧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원리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신을 바로 기계론적 운동 법칙 및 이에 따라서 스스로 발전해 가는 물질을 창조한 자로 상정함으로써 신 존재와 자연 법칙의 양립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보편적 자연사?에 앞서 발표한 ?활력 측정론?에서도 칸트는 물질에 내재하는 살아 있는 힘, 즉 “활력”(lebendige Kraft)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개념이 당시에 생명력(Lebenskraft) 개념을 도입한 생기론, 특히 18세기 후반 생명 현상의 물질적 속성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을 확립한 생기론자들의 입장을 예견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이 ?활력 측정론?에서는 칸트는 유기체나 생명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쯔의 역학이론이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있지만, 이미 데카르트는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한 의학적 저술들을 포함한 자연철학에서 인간의 영혼을 제외한 살아 있는 생명체들 즉 유기체를 죽어 있는 것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라이프니쯔의 모나드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와는 정반대로 전 자연은 생명으로 충만해 있으며, 유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활력 측정론?과 ?보편적 자연사?에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물론이고 유기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활력 측정론?에서 주목할 것은 유기체를 포함해서 물질 일반이 갖는 있는 본질적 힘, 즉 운동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활력은 물리학적 내지는 수학적 개념으로 완전히 규정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활력 측정론?의 칸트에 따르면, 활력 내지는 살아 있는 힘은 기하학적 설명이든 물리학적 설명이든 기계적 법칙의 일방적 적용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활력은 “계산될 수도 없고, 어떤 인과 관계에서 파악될 수도, 규정될 수도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물체의 내부에 있는 자유로운 운동,” 물체의 “필연적 속성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이자 우연적인 것”으로서 물체의 “자유로운 운동의 전제”로 상정되고 있다. 그런데 천체의 생성과 운동을 뉴턴을 따라 보편적 자연법칙에 기초하여 이해하고 있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칸트는 직접 유기체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으면서도 분명한 언급은 유보해고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이미 당시의 생물학적 관찰 결과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유기체는 단지 움직이는 힘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물질을 유기화하는 힘, 즉 자신을 번식시키고 형성하는 힘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아직 어떤 분명한 입장을 갖지 않고 있거나 고민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모든 자연 사물들의 기원을 기계적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는 원칙적인 가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유기체의 설명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칸트는 수사학적인 표현을 빌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의 유충이 어떻게 해서 생길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 대상들의 참된 내적 성질과 그것이 드러내고 있는 다양성과의 관련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첫 걸음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있지 않은가? 단 하나의 풀이나 하나의 유충이 생겨났다는 것이 기계적 근거에 입각해서 명백히 그리고 완전히 알려지기 이전에 모든 천체의 물체들의 형성, 그 운동의 원인, 즉 우주의 현재의 전체 구조의 근원이 더 먼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감히 말한다고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칸트는 이 같은 어려움이 태양계의 복잡성으로 인해서 야기된 단순히 기술적 문제인지, 아니면 근본적 특성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서 태양계를 설명하는 것보다 유기체를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칸트는 물질로부터 유기체(풀이나 유충)의 생성의 설명가능성에 대해서 주저 없이 아니라고 답한다. 칸트가 여기서 느끼고 있는 어려움은 그가 태양계의 설명이 유기체의 설명보다 더 쉬울 거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단순히 기술적인 어려움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칸트는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의 기계적 산출의 설명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유기체의 기원을 원자들의 “맹목적인 응집(Zusammenlauf)”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설명했던 그리스 원자론자들의 견해가 불합리하다고 지적하면서 “나의 이론체계에서 나는 물질이 어떤 필연적 법칙에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칸트는 유충에 대해서 기계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주 생성의 기계적 법칙을 유기체 산출의 근원으로 상정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입장 아래서 칸트는 유기체의 산출 가능성에 대해서 기계적 법칙에 따라서 행성들이 처음에 점차적으로 생겨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면 그 결과 생명이 출현하게 된다고 보면서도 물질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반면에 훗날 ?판단력비판?에서는 보다 분명한 어조로 유기체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의 불가능성과 부적절함,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한계’를 토로한다.
우리가 유기체와 그 내적 가능성을 단순히 기계적 원리들에 따라서는 결코 충분히 알 수 없으며, 설명할 수는 더 더욱 없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칸트가 이처럼 ?보편적 자연사?에서 보여준 유보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로부터 ?판단력비판?에서 피력하고 있는 “확신”은 그의 유기체에 관한 사고에 중요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변화의 단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단력비판?의 확정적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유기체의 생성 과정에 대한 이해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과학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만일 과학적 설명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곧 사변적 형이상학 즉 독단적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또한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아주 분명하게 “살아 있는 물질” “생명 있는 물질” “생명을 가진 물질”의 개념적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무생명(Leblosigkeit) 또는 비활동성(inertia)이다. 따라서 생명 있는 물질의 가능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과 생명은 오직 유기체를 매개로 해서만 상호 관계가 추론될 수 있다. 즉, 물질로부터 유기체가 그리고 유기체로부터 생명 현상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물질이 아니며, 물질로부터 유기체가 어떻게 생겨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3. 신의 존재와 유기체
칸트는 ?보편적 자연사?에서 “천체의 형성과 운동의 근원을 최초의 자연 상태로부터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도출할 수 있는 체계의 발견”을 시도한다. 이에 따르면, 물질적 조건들로부터 행성들이 출현하고 다시 이로부터 생명체가 산출된다면, 물질로부터 생명의 출현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물질이 생명을 산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신이 이미 현존하는 세계에 개입함으로써 생명이 기적처럼 출현하는 경우이다. 칸트는 우주 생성의 기계적 근원을 수용하기 때문에, 두 번째 대안은 비과학적 설명으로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학적 설명은 당장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생명체의 출현을 위해서 신이 언제나 다시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등 비과학적인 임시방편적 가설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의 천체이론을 마무리 하는 “천체의 거주자들에 대하여”라는 주제 아래에서 수많은 다양한 천체의 행성들 위에 생명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고 있다. 칸트는 여기서 어떤 행성들에는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하듯이 적절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추정은 그 정당성을 떠나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칸트가 가정한 기계론적 원리를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시간의 진행 속에서 필연적인 물리적 조건들이 나타나게 되면 생명의 발생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편적 자연사? 이후 7년이 지나서 발표한 ?신 존재 증명?(1762)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여기서 유기체는 정식으로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근본적인 문제로서 부각된다. 하지만 동시에 칸트는 “식물이나 동물의 최초의 산출이 보편적인 자연법칙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기계적 부산물로 간주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기계적 법칙은 식물과 동물의 구조(Bau)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기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계적 법칙 이외의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기서도 칸트는 유기체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개진하고 있지는 않다. 칸트가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비록 유기체를 설명하는데 기계론적인 자연법칙이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사물의 과학적 설명에서 초자연적 것을 끌어들이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때문에 여기서도 여전히 ?보편적 자연사?에서 보여준 천체이론을 되풀이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자연사물에 대한 기계적 법칙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부분, 즉 유기체가 과연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검토하는데 있으며, 이로부터 유기체에 관한 기계론적 설명이 갖는 근본적인 난점을 보다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현재의 의도는 보편적 법칙에 따라서 그러한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자연사물에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칸트는 이 저술에서 유기체를 기계적 법칙에 따른 산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후 소위 전성설과 후성설로 대표되는 두 가지 가능성들에 대해서 검토한다. 칸트는 이 곳에서 아주 명백하게 두 번째 대안을 선택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첫 번째 대안이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성설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곧 신이 갑자기 모든 배를 직접적으로 창조하여 최초의 유기체를 만들었다고 가정하거나 신이 세계 속의 모든 생식에 개입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초자연적인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성설에 대한 대안으로 후성설을 칸트는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왜냐하면 후성설은 유기체의 산출을 직접적인 신적인 행위로 환원시키려 하는 대신에 최소한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비록 ?신 존재 증명?에서도 유기체에 대한 사고를 좀 더 깊이 있게 천착해 나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매크로린이 지적하듯이, 칸트가 어떤 경우든 유기체에 관한 기계론적 설명에서 근본적인 난점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에 있어서 유기체가 그 밖의 사물들과 구분되는지에 대한 개념적 파악은 아주 확실히 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도 칸트에게 유기체는 여전히 경탄(Bewunderung)의 대상이다. 칸트의 이 “경탄”이라는 표현은 그가 아직까지 개념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유기체를 놓고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즉 유기체를 대하는 칸트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후에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이 표현을 다시 등장시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유기체는 여전히 경탄을 자아내는 대상이다. 하지만 거기서 칸트는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론”이라는 이름 아래 이 같은 고민을 해소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판단력비판?에서 보여준 해결책에도 불구하고 “경탄”의 대상으로서의 유기체에 대한 사유는 말년에도 계속된다.
4. 인간 이성의 발생적 기원과 목적론적 원리
자연 개념에 대한 최초의 확정적인 규정이 등장하는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입장과 비교할 때, 전비판기 특히 1740년대 중반부터 1750년대 중반까지 칸트가 견지하고 있던 자연에 대한 그의 사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순수이성비판?은 물론이고 그의 말년에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 그것은 1755년에 발표한 ?보편적 자연사?에 그대로 나타나 있듯이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은 그에 대한 체계적 인식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선험철학적 토대 위에서 그리고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발견하고 또 근거짓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자연은 항상 완전히 규정되지 않고 남아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이러한 사고와 태도의 근저에 놓여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유기체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 개념을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근거짓고자 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는 유기체를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선험적 관념론에 입각하여 이해된 합법칙성으로서의 기계론적 법칙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전제에 의하면, 유기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기계론과 상호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유기체가 보여주는 합목적적 특성은 이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즉 생명 현상은 비유기체와 판이한 특성을 갖고 있으며, 또 인간이 이러한 유기체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기계적 관계를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 논의에 해당하는 ‘직관과 개념의 종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도 유기체에 대한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이 문제를 칸트는 인식의 두 이질적인 형식이 선험적 구상력의 매개를 통해 실제적인 결합을 가능케 한다는 설명을 통해 해결한다. 칸트에 의하면 “구상력은 지적 종합의 통일성을 위해 오성에 의존하고, 그 각자의 다양성을 위해 감성에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이 구상력은 양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심성의 독립적인 근본 능력이다. 구상력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이 서로 동화되어감으로써 소위 종합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이 가능한 것도 이성 자신의 유기체적 성격에 기인한다. 칸트는 이성의 이런 성격을 “오성 측에 들어 있는 범주가 모든 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서의 “순수이성의 후성(Epigenesis) 체계”라 부른다. 경험과 이 경험의 대상에 관한 개념의 필연적 일치, 즉 개념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성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칸트는 이성의 이 같은 소질에 대해서 “자연발생설”은 “범주의 경험적 근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사고하는 주관적 소질의 사용이 자연의 법칙과 꼭 일치하도록 조물주에 의해서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수이성의) 전성설”은 “범주가 그 개념에 본질적으로 속하고 있는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기 때문에 모두 물리친다. 따라서 인간 인식의 자발적 사고물로서의 범주의 선천성의 기원과 관련하여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발생적 기원과 그 근원적 능력과 소질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순수이성의 후성설을 수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추정해 본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설 이상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칸트는 인간 이성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 가능성을 가능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전혀 시도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의 발생적 기원”에 대한 문제는 적어도 칸트에게는 사실 근거의 문제이지 선험철학이 의도하는 권리 근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는 죽어있는 물질에 한정하지 않고 유기체를 포함해서 범주의 선천적 획득의 발생적 기원과 관련해서도 일종의 진화론적 사고 경향을 보여주고 또 언급하기도 하지만 이를 과학적 설명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유기체의 진화에 대한 사고를 매혹적인 것으로는 보지만 경험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즉 “경험으로는 유기체의 계통발생적 과정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폴머 같은 진화적 인식론자들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범주의 선천적 획득의 발생적 기원에 대한 규명이 체계적 인식이론에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순수이성비판?에서 생물학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유기체의 특이성에 대한 언급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유기적 조직의 전체성이 갖는 특이성과 관련하여 자연에서 발견되는 종들은 현실적 구분되어 있고, 따라서 그 자체가 본래 하나의 불연속량(quantum discretum)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기적 형식들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불가불 종의 연속성(continui specierum), 즉 “자연에서의 연속성의 법칙”(lex continui in natura)이라는 선험적 법칙을 전제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형식들의 연속성이란 하나의 이념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이 이념에 합치하는 대상이 경험 중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경험에 적합한 오성적 인식의 체계적 통일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결국 유기체적 종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형식들의 연속성이라는 이념은 경험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칸트의 논변은 무한 분할가능성을 유기체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라이프니쯔의 주장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는 불연속량을 전제하는 범생기론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곧 칸트가 번식을 통한 새로운 생물종의 발생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 물활론은 물론 생기론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물리치는 이유가 된다. 이와 같은 유기체를 바라보는 칸트의 태도는 ?판단력비판?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달라진 것은 유기체에 관한 확정적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당시 르네상스를 맞이한 스피노자주의와 범신론 그리고 헤르더가 유포시킨 물활론 등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분명한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비판적 목적론과 도덕신학을 선험철학적 체계 연관 속에 위치시키면서 체계 통일의 기획을 완성해 가고자 한 점이다.
칸트는 1784년에 발표한 헤르더의 글에 대한 서평에서 유기체의 구조를 통해 “물질의 자연적 형성과정에 비유해서” “인간 영혼의 정신적 본성과 그 영속성 및 완전을 향한 진보 과정을 증명하려고 하는” 헤르더의 시도를 “물질에 생기를 넣어주는 보이지 않는 일반적 본성,” 즉 “유기체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힘”을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더 잘 모르는 것을 사용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서평에서 칸트는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유기적 힘을 “경험적인 자연과학 밖에 있는 이념”으로 규정하면서, 물질 속에 들어 있으면서 모든 것을 유기화하는 생명력을 포함하고 있는 정신적 힘의 가정으로부터 인간의 두뇌와 직립보행의 필연적 관계, 직립보행으로부터 이성적 능력의 획득 등에 대한 의문에 답하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물음”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유기적 힘”을 사변철학에 속하는 “이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유기체 문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순수이성비판?의 출간을 전후해서 생물학적 문제들을 다룬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다양한 인종에 대하여?, ?인종의 개념 규정?, ?철학에서의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이 논문들은 일차적으로 인류의 공통의 기원에 대한 물음과 인종 분류의 경험적 결정기준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은 유기체의 기관과 구조의 합목적성에 대한 물음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이들 저술에서 환경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이와는 독립적으로 이러한 적응을 계속해서 유전시키는 유기체의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다양한 인종에 대하여?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 시기에 이미 칸트는 리나에우스, 뷔퐁, 모페르튀의 저작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브조이에 따르면, “칸트는 동물학적 사실들 대부분은 물론 과학적 방법에 대한 개념들 일부도 뷔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특히 칸트가 당시 뷔퐁에게서 넘겨받은 종(Rasse) 개념은 자연사에서는 전에 없던 것으로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생식력이 있는 잡종의 존재와 관계가 있다. 즉, 그 특징이 변함없이 유전되면서도 그것들이 다른 변종들과 짝을 이루지 않으면서 생식력 있는 후손들을 낳을 수 있을 때 아주 서로 다른 종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확연히 구분되는 변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변종들은 뷔퐁에 따르면 그것들이 서로 다른 유전적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공통의 기원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최초의 종으로부터 그와는 구분되는 특징을 물려받은 계통이나 아종이 파생되고, 그런 아종에 있어서는 유전가능한 새로운 특징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유전된 특징들 또한 환경에 명백히 합목적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새로운 합목적적 성질의 유전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프리카 흑인과 유럽 백인은 짝짓기를 할 수 있으며, 양쪽의 속성을 갖고 이를 계속 물려줄 수 있는 후손을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종은 동일한 생물학적 종에 속하게 된다. 이미 200년을 아프리카에서 산 유럽 백인(포르투갈인)은 피부가 태양빛에 검게 타 갈색이 되었지만 어린아이는 출생시에 유럽인과 아주 똑같이 희다. 즉 검은 피부색은 유전되지 않는다. 유럽으로 끌려 간 흑인은 유럽의 기후에 의해서 피부색이 바래지지 않고, 그들의 피부색을 변함없이 계속 물려준다. 두 종은 공통의 기원을 갖기 때문에 흑인은 과거 어느 시기엔가 흑인이 되어 있었으며, 그 이후로 종적 특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또한 칸트는 흑인의 피부색은 열대 기후에 합목적적으로 적응해 왔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물을 수 있다: 어떻게 흑인은 열대 지방에 적응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그들은 유럽에서는 희어지지 않는가? 어떻게 환경은 합목적적인 유전 가능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환경은 적응을 취소시킬 수 없는가?
칸트는 역학의 법칙이 유기적 구조의 최초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 근원적인 유기적 조직을 가정한다. 우리가 환경이 기계적 작용에 의해서 (유전되는) 유기적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환경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임의적으로 계속해서 유기적 조직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이유, 즉 환경이 유기적 조직 형태를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산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경이, 예를 들어 추위와 같은 기후가 어떻게 유기체에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통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칸트는 유기체에 합목적적인 모든 변화는 근원적인 합목적적인 유기적 조직에 소질로서 존재해야만 하며, 또한 환경에의 적응은 근원적인 계통 속에 있는 “배” 또는 “자연적 소질”로서 이미 전개되도록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들은 그에 상응하는 환경조건들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지만 이미 소질로 주어져 있는 속성들만이 환경으로부터 산출될 수 있다. 이미 소질로서 주어져 있는 미리 적응된 변화들만이 계속해서 유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스스로 물려받은 것만이 유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연, 혹은 일반적인 기계적 법칙은 그와 같은 조화를 산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적시에 이루어지는 발현을 미리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합목적인 것도 보여주지 않는 경우에도 단순한 능력은 그 자신이 갖고 있는 특수한 형질을 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특수한 배나 자연적 소질을 유기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이처럼 소질이 하나의 혈통으로부터 현재와 같은 인종으로 발전해왔다는 예는 칸트를 “정해진 소질의 발현은 또 다른 발전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부차적인 가정으로 이끈다. 인간성의 근원적인 완성에 따라서 인간은 유럽 또는 아프리카 또는 아메리카의 기후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소질을 발현시키면서 피부색을 확립해왔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배와 소질의 전개는 다양한 인종들의 현재의 속성들을 단지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칸트가 단순한 분류적 자연기술과 설명적 자연사를 구분짓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학적 종의 발달사 및 계통 속에 포함된 가능성의 발현과 관계한다. 이들 논문에서 칸트는 하나의 근원적 유기적 조직을 가정하는데, 그는 유기적 조직이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이런 가정이 과학적 설명에 대한 그 밖의 관점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또한 ?판단력비판?에 앞서 간략하게 ?철학에서의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해서?(1788) 라는 논문에서도 칸트는 이러한 입장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도 칸트는 “배”가 어떻게 작용하고 또는 배가 어떻게 유전되는지에 대해 기계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결코 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유기체를 기계론에 의거해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계속해서 배제하고 있다.
나로서는 모든 유기적 조직을 (생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유기체에서 이끌어냈다. 그리고 점차적인 발달의 법칙에 따르는 (자연물들과 같은 종류들인) 이후의 형태들을 유기적 조직에서 이러한 계통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소질들로부터 이끌어냈다. 이러한 계통 자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과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선다. 나는 그러한 한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칸트의 확언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글이 ?순수이성비판? 이후에 발표되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판단력비판?의 출간을 앞 둔 시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칸트는 물리학 내지는 역학의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 또 한편으로 유기체를 유기체 자체의 조직 원리에 의해서 설명해야 하며, 따라서 이를 위한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칸트가 이 글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도 자연과 자유를 축으로 해서 통일되는 철학 체계의 구성에 있어서 목적론적 원리를 도입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이와 더불어 이 글에서 눈에 띠는 것은 ?판단력비판?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기체 개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여기서 유기체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상호간 목적과 수단으로 가능한 물질적 존재자”로 정의한다. 동시에 이런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근본력(Grundkraft)이 무엇인지를 “인간 이성은 절대로 선천적으로 알아낼 수 없고 알아내려고 해서도 안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형이상학은 오직 공허한 개념들만을 날조할 것”이라고 한다. 칸트는 이 자리에서 “참된 형이상학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며,” 따라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이상의 것을 할 수 없기에” 물리학도 형이상학도 이 근본력에 대해서 다른 개념이나 명칭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은 곧 칸트가 자연과학의 학문성, 과학적 인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의 확증을 통해 과학적 인식을 정초하고자 했지만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 이 시기까지 확언을 미루면서 유보적 자세를 취해 온 칸트가 유기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 정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칸트는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비록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유기체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듯이 유기적 조직을 일으키는 근본력이 목적에 따라서 작용하는 원인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더욱이 이러한 목적은 가능한 결과의 근저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점이다. 칸트에 따르면 “오성과 의지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근본력들이다” 그리고 의지는 목적에 따라서 생겨난 산물들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근본력이 이러한 능력에 의해서 규정될 경우 그것은 목적이라 불리는 이념에 적합한 것을 산출할 수 있다. 칸트는 이 목적을 의지 또는 이성과 관계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목적은 다름 아닌 이성과 관계한다. 그런데 이성은 미지의 이성일 수도 우리 자신의 이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적을 미지의 이성에서 정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미지의 이성과의 유비로서 우리 자신의 이성을 근저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이성 없이는 목적은 결코 표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적은 자연의 목적이거나 자유의 목적이다. 자연 속에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선천적으로 통찰할 수 없다. 반면에 자연 속에 원인과 결과의 결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아주 잘 통찰할 수 있다. 따라서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은 자연에 관해서는 언제나 경험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원리가 본성에 의해서 (욕구와 경향성에 있어서) 의욕의 대상에 앞서 미리 규정근거로서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면, 목적론적 원리는 자유의 목적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순수한 실천적 원리를 부여하는 실천이성비판은 이성이 선천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따라서 선천적으로 그와 같은 목적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목적론적 원리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경험적 조건들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합목적적 결합의 근원적 근거를 결코 완전히 그리고 모든 목적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럽게 제시할 수 없다면, 그 대신에 우리는 이것을 (자유의 목적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는) 순수 목적론(reine Zwecklehre)에서 기대해야 한다. 이 순수 목적론의 선천적 원리는 이성 일반의 모든 목적들 전체와의 관계를 포함하면서도 실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순수 실천적 목적론, 즉 도덕은 자신의 목적을 세계에서 실현할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거기에 부여된 궁극원인과 관계되는 것뿐만 아니라 최상의 세계원인이 모든 목적들 전체에 적합하게 되는 것, 즉 결과에 있어서도 그러한 목적의 실현 가능성을, 따라서 객관의 실행 가능성, 즉 세계에서 실현할 것을 지시하는 목적의 실행 가능성에 관해서 순수한 실천적 목적론의 객관적 실재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자연목적론뿐만 아니라 자연 일반의 가능성 즉 선험철학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길게 인용한 구절에서 칸트는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중요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목적적론 원리의 사용이 필요하지만 자연의 목적과 관련해서 자연 자체로부터 목적론의 통찰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대신 자유의 목적에 한해서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것이 여기서는 순수 실천적 목적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유의 목적론 내지는 순수 목적론의 가능성으로부터 가일층 요구되는 것이 그것이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할 필요성이다. 칸트는 여기서 더 이상 논의를 확대하지 않고 있지만, 이 대목은 칸트가 2년 후에 출간한 ?판단력비판?의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 유기체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의 합목적성과 자연목적의 개념을 끌어들이는 근본 이유를 예고하고 있다. 순수 목적론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작업이 요구된다. 자연과 자유의 통일성 및 자유의 목적의 자연에서의 실현 가능성, 즉 자유의 목적론(도덕적 목적론)이 자연과의 조화 통일을 매개할 수 있는 가능근거를 하나는 자연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에서 발견하고 확립하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과제를 떠맡고 있는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즉, 반성적 판단력과 유기체를 실마리로 하는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로서의 자연의 (내적) 합목적성이 그것이다.
5. 반성적 판단력과 목적론적 유기체론
1)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불가능성
유기체에 관한 칸트의 사고의 진행과정을 추적하면서 자금까지 살펴본 저술들의 공통점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칸트가 유기체를 무엇보다도 사실과학적 관점에서 특별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과학의 대상으로 간주해왔다는 점이다. 이제 칸트는 ?판단력비판?의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 과학적 설명의 대상으로서의 유기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이미 유기체는 칸트가 유일한 과학적 설명으로 인정하는 기계론적 원리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뉴턴의 추종자로서 출발한 학문적 탐구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칸트를 고민케 했던 유기체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취했던 입장을 칸트는 이제 전과는 달리 확신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연의 단순한 기계적 원리들에 따라서는 유기체와 그 내적 가능성을 결코 충분히 알 수 없으며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마 언젠가는 뉴턴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한 그루의 풀줄기의 산출을 단지 자연법칙에 따라서, 즉 어떤 의도가 질서를 세워준 것이 아닌 자연법칙에 따라서 설명하리라고 예측한다거나 기대하는 것만도 인간에게는 불합리한 일이요,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통찰을 인간에게는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없이 ?판단력비판?에서 자연존재자 특히 유기체는 일정한 속성과 구조를 가진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특정한 설명의 어려움을 안겨 주는 대상으로 전제되고 있다. 칸트가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합목적성과 자연목적의 개념이다.
그러나 칸트는 실제로 ?판단력비판?의 출간을 기획하면서 당시의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들 및 유행하던 학설들을 충분히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칸트가 블루멘바하의 생물학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런 당시의 생물학적 지식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철학자로서 이 문제에 직접 뛰어 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한계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18세기 후반에 확립된 생기론은 유기체가 물질의 속성과 법칙에 의해서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유기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기계론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역학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유기체에 고유한 설명영역을 인정했다. 칸트 역시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서의 유기체에 대해서는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칸트는 주로 리나에우스, 라이프니쯔, 뷔퐁, 블루멘바하 등으로부터 얻었다. 특히 칸트의 이런 태도는 블루멘바하에 대한 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블루멘바하는 이러한 형성작용에 대한 일체의 자연학적(physische) 설명방식을 유기적 물질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 그대로의 물질이 기계적 법칙에 따라서 최초에 자기 자신을 형성했다든가, 무생물의 본성에서 생명이 나왔으며, 물질이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합목적성의 형식에 저절로 적응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것을 그는 정당하게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와 같이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근원적인 유기적 조직의 원리 아래에서 자연기계론으로는 규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오인해서도 안 되는 몫을 남겨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블루멘바하를 비롯한 생기론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 칸트는 블루멘바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자신에게 그의 저서 ?형성충동에 관하여?를 보내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있지만 그의 형성충동 개념에 아주 큰 의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칸트가 철학자의 시각에서만 이 문제에 접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생기론자들의 이론이 갖는 설득력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인과기계론만을 유일한 과학적 설명방식으로 간주하는 칸트로서는 생기론을 과학적 설명방식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유기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설명 원리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특별히 생리학자요 발생학자인 블루멘바하를 거론하면서 그를 높이 사고 있는 진정한 이유도 그가 유기체의 체세포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는 형성충동(Bildungstrieb), 즉 유기화하는 물질의 능력으로서 “물질에 내재하는 단순한 기계적 형성력(Bildungskraft)과 구별되는 형성충동”을 도입함과 동시에 형성충동 역시 보다 근원적인 “유기적 조직의 원리의 지도와 지시 아래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블루멘바하는 실제로 이와 관련한 생물학적 자료들을 뷔퐁으로부터 얻었지만, 이러한 설명 개념들은 라이프니쯔로부터 빌려 썼다. 칸트가 라이프니쯔의 생기론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루멘바하 자신이 이 원리를 명시적으로 규명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앞서 칸트는 이러한 유기체에 고유한 설명방식으로서 목적론적 원리를 이미 그 대안으로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할 경우, ?판단력비판?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 칸트의 유기체론이 처음 출발점에서 대단원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매크로린이 지적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칸트의 사고의 발전은 비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그의 사고의 발전과 나란히 진행된다. 물리학에서 칸트는 순전히 물리학적 물음에 대한 해명(비록 부분적으로는 방법론을 강조하고 있지만)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오히려 그의 관심은 점점 더 물리학적 물음의 과학이론적 측면에 기울어졌다. 생물학에서 칸트는 먼저 유기체들에 대한 물리학적 물음에 몰두했으며, 나중에는 점점 더 생물학적 설명의 고유한 특징에 대한 분석으로 기울어졌다.”
이와 같은 칸트의 사고의 진행은 이제 칸트가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정초 가능성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논거를 갖추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론」이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유기체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가능성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마치 ?순수이성비판?이 신칸트학파에 의해서 비판철학의 이론적 부분으로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정초에의 시도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을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정초를 시도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비판철학의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연역적-법칙발견적(nomologisch) 과학 이론을 분류학적-기술적 과학이론을 갖고 보충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의 자연과 자유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물음 및 해결은 “부수적인 성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칸트의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을 지나치게, 이를테면 그것을 “제4비판”으로 읽고 싶어 하는 매크로린의 입장처럼, 하나의 독립적인 작업으로 보려는 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반성적 판단력과 이성의 규제적 원리
칸트의 유기체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합목적성의 개념에 기초하여 미와 숭고 그리고 유기체 문제를 다룬 이유를 전체적으로 고려해야만 올바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칸트는 유기체의 생물학적 설명 가능성을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상으로 전제하고, 그에 적합한 설명 방식으로서 목적론적 원리를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시도를 감행하는 이유를 찾아냄으로써 최종적으로 정립된 칸트의 유기체론의 위상과 역할을 규명할 수가 있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본격적으로 유기체가 보여주는 합목적적 구조와 적응의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그에 따른 우리의 개념적 이해, 즉 합목적성 개념 및 유기체가 다른 무엇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주장의 정당성을 분석한다. 그렇다면 칸트는 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규명은 칸트의 철학과 또한 ?판단력비판?에서 그의 유기체론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우선 가장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 근거로 과학적 설명 원리가 아닌 목적론적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는 것과 이를 기초로 수립되는 목적론에 비판적 목적론이라는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이 해결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그러면 칸트는 왜 유기체 문제를 하필 ?판단력비판?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살펴볼 주제이다.
?판단력비판?의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유기체의 목적론적 산출방식이 갖는 특징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유기체의 생식능력과 외관상의 합목적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첫 번째로 관건이 되는 것이 칸트가 유기체를 설명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반성적 판단력”을 위한 “규제적 원리”라 부르는 “합목적성의 요청”이다. 이를 위해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반성적 판단력이 어떤 종류의 능력인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반성적 판단력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이유는 그것이 ?판단력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목적, 자연목적, 합목적성 개념을 발견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했었던 판단력은 특수를 보편 아래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보편은 오성에 의해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으로, 그리고 판단력은 특수를 단지 그 아래 포섭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판단력이 이렇게 미리 주어진 보편에 따라서 특수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규정적 판단력이다. ?판단력비판?에서는 판단력 개념이 훨씬 더 넓게 규정된다. 여기서도 판단력은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이제 두 종류의 판단력이 구분된다.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 그것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과 반대로 특수는 경험 중에 주어져 있지만 이를 포섭하고 판단할 보편자가 없기 때문에 판단력 스스로 그에 해당하는 보편자를 발견해내는 능력이다. 유기체가 바로 이 같은 특수한 경험적 대상에 속한다.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에 대한 규제적 원리의 주요 기능은 경험적 자연연구에 있어서 개념 구성(Begriffsbildung) 및 가설 구성(Hypothesenbildung)이다. 이 반성적 판단력은 이 경험적 특수자로서의 유기체에 적합한 설명방식을 목적론적 원리에서 찾는다.
규제적 원리의 개념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변증론의 부록」에서 체계적으로 논구하고 있다. 거기서 “규제적 원리”는 이를테면 12범주들처럼 경험의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들인 “구성적 원리"와 대조를 이룬다. 이에 반해서 규제적 원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준칙 혹은 지침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오성을 위한 규제적 원리만을 논구한다. 그러한 원리의 가장 중요한 예는 자연의 체계적 통일의 원리이다. 이와 같은 단순히 발견적 연구준칙을 칸트는 하나의 “선험적 전제”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원리”리고 부른다. 우리가 이를테면 자연의 체계적 통일성의 개념을 규제적으로 사용할 경우 우리는 여러 상이한 사건들에서 공통의 합법칙성을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자연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해서 먼저 자연이 실제로 통일성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체계적 통일성이 객관 자체에 속한다는 것을 선천적 및 필연적으로 가정하는 하나의 선험적 원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규칙의 이성 통일의 논리적 원리가 성립할 수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칸트에 따르면, 비록 그러한 규제적 원리가 선험적 원리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떠한 객관적 타당성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선험적 연역을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경험적 연구를 위해서 유용할 뿐이다.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의 부록」에서 자연 전체를 규제적 원리를 따르는 이신론적 체계로 간주한다.
오성을 위한 이성의 규제적 원리는 비판철학 안에서 비판받고 전복되는 근대 형이상학을 해체하기 위한 칸트의 주요 수단이다. 이에 의지해서 칸트는 자신이 더 이상 타당한 형이상학적 진술들이 아닌 것으로 배척한 합리적 심리학, 우주론 및 사변신학의 근본 원리들을 경험적 연구를 위한 발견적 준칙들로 대체한다. 여기서는 규정적 판단력이 문제였다. 하지만 ?판단력비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반성적 판단력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미 반성적 판단력을 구별하고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일차적인 목적을 고려할 때, 칸트는 그 개념을 아직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의 서론에서 칸트는 규제적 원리를 다시 다룬다. 이제 반성적 판단력과 관계하는 규제적 원리는 자연 일반과 관계하던 ?순수이성비판?과 달리 결정적인 차이, 즉 경험적으로 주어진 개별적인 것과도 관계한다. 전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즉 인과기계론적 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특수한 개별 대상들을 합법칙성이라는 관점 아래서도 고찰할 필요성이 정식으로 논구되고 있다. 칸트는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경험적 법칙들을 하나의 통일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로서 “자연의 합목적성”(Zweckmäßigkeit der Natur)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3) 자연의 합목적성과 자연목적
칸트는 자연의 합목적성을 미감적 판단력이 관여하는 미와 숭고의 주관적 합목적성과 목적론적 판단력이 관여하는 객관적 합목적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후자를 형식적 합목적성과 실질적 합목적성으로, 다시 후자 즉 실질적 합목적성을 상대적(외적) 합목적성과 내적(절대적) 합목적성으로 구분하여 논의를 이끌어 간다. 이 가운데서 유기체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이 제시되는 경우는 자연의 내적 합목적성이다. 칸트는 유기체의 경우에서 자연 존재자의 내적 합목적성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예를 찾아냄으로써 이제 그가 지금까지 고민해온 유기체 문제는 결정적인 국면을 맞게 된다.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론」에서 칸트는 객관적 합목적성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재생이라는 일반적 개념을 생물학에 도입하는데 따른 방법론적 귀결을 밝히려고 한다.
우선 합목적성은 목적 개념과 관계한다. 하지만 합목적성은 하나의 목적활동적인 주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갖는 반성적 판단력이 고안해낸 산물이다. 즉 “자연의 합목적성은 단지 반성적 판단력에만 그 근원을 두고 있는 하나의 특수한 선천적 개념이며,” “자연이 마치 어떤 하나의 오성이 다양한 자연의 경험적 법칙들을 통일하는 근거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적 판단력이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법칙처럼 부여한 선험적 원리이다. 그러면 칸트가 유기체를 포함해서 자연의 다양한 특수한 경험법칙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선천적 개념을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로 가정할 수는 있는 권리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은 자연 개념도 자유 개념도 아니다. 이 개념이 선험적 원리에 속하는 이유를 칸트는 “판단력의 준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본다. 판단력의 준칙이란 이를테면 “자연은 최단 행로를 취한다”(lex parsimoniae)와 같은 특수한 경험적인 자연법칙들이 자연 탐구에서 선천적인 기초가 되는 원칙들이지만 이것이 논리적인 객관적 필연성을 가지려면 선험적 원리로서의 자연의 합목적성은 선험적 연역, 즉 선천적 인식의 원천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자연의 경험적 법칙들은 오성의 범주적 규정에 따라 보편적 자연법칙에 포섭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무한히 다양한 보편법칙들의 연관과 통일은 오성적 규정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법칙들이 자연의 질서 아래 통일적 연관, 즉 법칙적 통일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반성적 판단력의 발견적 준칙으로서의 선험적 합목적성이 상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합목적성 개념의 연역의 정당성을 “무한히 다양한 경험적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주어진 지각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과제가 갖는 중대함”을 고려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주제화된 자연의 통일도 판단력의 이런 발견적 준칙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반성적 판단력과 그것의 선험적 원리인 자연의 합목적성은 칸트 철학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원리인 셈이다.
그런데 칸트가 자연의 합목적성을 선험적 원리로 전제할 수 있는 권리 근거로 삼고 있는 일차적 요소는 자연에 관한 모든 반성의 기초로 삼는 “자연의 (주관적인) 형식적 합목적성”이다. 이로부터 출발해서 칸트는 유기체와 관계하는 자연의 (객관적인) 내적 합목적성을 비롯해서 여타의 모든 합목적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칸트는 이 주관적인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선험적 원리를 「미감적 판단력비판」에서 정초하는데, 왜냐하면 “이 형식적 합목적성이 아니면 오성은 자연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자연이 우리의 인식능력에 대해서 가지는 형식적 합목적성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미감적 판단력뿐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칸트가 왜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 앞서서 「미감적 판단력비판」을 먼저 다루어야 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자연의 객관적 목적의 존재 즉 자연목적으로서만 가능한 사물들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지적할 근거가 없는데, 오직 판단력만이 이러한 사물에 대해서 이성을 위하여 오성으로 하여금 목적의 개념을 자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관적인 형식적 합목적성의 선험적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미감적 판단력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미감적 판단력을 포함하고 있는 부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 즉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에 대한 규명이 미감적 판단력에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달리 만일 합목적성 개념이 먼저 도덕적 주체에서 직접적으로 발견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었다면 ?판단력비판?은 굳이 쓸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와 함께 칸트의 유기체론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칸트 자신이 수행했던 방식을 쫒아 자연의 합목적성 개념은 물론이고 이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과 특히 “자연목적”의 개념을 정확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합목적성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자연과 자유의 통일 근거가 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논리적 근거가 아니라 실제적 연관을 갖는다면 그러한 통일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칸트가 유기체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합목적성은 인간의 (반성적) 판단력의 선천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유기체인 인간에게 그러한 자연의 합목적성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자연목적과 유기체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개념적 거리”가 존재한다.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도를 칸트는 도덕적-실천적 목적에서 찾고자 한다. 이 때에도 실마리가 되는 것도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다.
또한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 목적에 대해서 말할 때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제품을 만들 때의 제작자의 목적이지 권리를 행사할 때의 도덕적 행위자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도덕이 아닌 기술이, “도덕적-실천적 목적”이 아니라 “기술적-실천적 목적”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도덕적-실천적 지침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의 기술적-실천적 지침에 따른다. 따라서 유기체에 대한 칸트의 생물학적 설명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적 개념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칸트는 정의하기를 “목적이란 어떤 개념이 대상의 원인(그 대상의 가능성의 실재적 근거)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 개념의 대상이다. 그리고 어떤 개념이 그 객체에 대해서 가지는 인과성이 합목적성이다.” 하지만 이 때의 (목적)인과성은 기계적 원인과 그 결과의 인과성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 그 결과의 표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면서 또 이에 의거해서 결과의 원인을 규정하는 근거로서 결과가 그 원인에 선행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성이다. 이에 따르면 칸트에게 “목적”은 “하나의 객체의 개념이 동시에 이 객체의 현실성의 근거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자체는 객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반성하는 능력”속에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합목적적”이란 “어떤 것의 현존재가 바로 그에 해당하는 표상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일 때”를 이른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를테면, 객체, 심적 상태, 행위 등)이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목적의 표상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목적에 의한 인과성을 그 근저에 상정함으로써만 그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어떤 것을 합목적적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합목적적”이란 어떤 목적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합목적성” 역시 목적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런 합목적성을 반성을 통해서 형식상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또 대상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칸트는 특히 이 목적 개념이 갖는 상식적 의미가 아니라 형식적 의미에 주목한다. 가령 작품을 만드는 제작자의 목적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작품을 제작자의 의도 및 그 효과나 결과의 예견에 의거해서 평가한다. 반면에 칸트는 이 보다는 그러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드러난 작품 자체에 주목한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의 성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인과성으로 칸트는 각각 목적인( causa finalis)과 형상인(causa formalis)을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의 목적인과성은 모든 목적론을 특징짓는 중요한 두 요소이다.
통상 우리는 목적인만을 “목적”이라 부른다. 그런데 칸트의 경우에 이것이 분명히 역전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칸트의 텍스트를 분석할 경우 칸트가 목적이라고 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목적론인지를 묻는 것은 필요하다. 형상인은 이신론적 체계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반면 목적인은 이러한 이신론적 체계 속에서는 물리학적 설명으로서 어떠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목적, 즉 개념의 인과성을 해명해야 하는 이러한 예에 따르면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제작된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런 의도 없이도 “마치 그런 의도가 있는 것 것처럼”(als-ob) 순전히 목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자연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다. 칸트는 그런 자연사물을 자연목적(Naturzweck)이라 부르는데, 바로 유기체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결국 칸트가 목적 개념을 형상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즉, 유기체도 자연사물이라는 점에서 자연과학적 탐구 대상이므로 일단 목적인은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미 유기체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객관적인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칸트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마지막 남아 있는 가능성은 형상인이다.
자연목적 개념에 대해서 칸트는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론」의 핵심 부분(65절)에서 본격적으로 상세한 설명을 시도한다. 자연목적의 개념에 대한 다분히 형식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규정은 다음과 같다. 즉, 자연산물로 인식하는 것을 또한 자연목적으로도 판정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물이 (비록 이중적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서 원인이자 결과인 경우에 그 사물은 자연목적으로 존재한다.
자연산물이면서 동시에 단지 자연목적으로서만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사물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인이면서 결과로서 상관적으로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는 이에 해당하는 자연사물을 유기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 자연목적은 기계론적 유기체론과 대결하는 칸트의 생물철학을 특징짓는 목적론적 유기체론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칸트의 자연목적의 개념 자체는 그의 합목적성 개념에 드러나 있듯이 순수한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 얻어진다. 다시 말해 자연목적은 유기체의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개념이 아니다. 이 유기체에 대한 경험은 다만 칸트가 분석적으로 획득한 개념, 즉 자연목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증에 불과하다. 개념적으로 자연목적과 유기체의 선후 관계는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의 체계 내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술한 자연목적 개념에 따르면, 칸트는 유기체를 일반적으로 “자기보존이라는 정해진 목표를 갖는 원인과 결과와 상관하는 자기관계(Selbstverhältnis)”로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유기체에 대한 일반 개념으로서의 이 “자기관계”를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번식(Fortpflanzung), 성장, 부분들의 상호간 및 전체와의 상호 의존성”이라는 유기체의 세 가지 특징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는 1) 자기 자신을 유에 따라서 (동일한 유에 속하는 다른 개체의 생산에 의해서) 산출하며, 2)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성장에 의해서 산출하며, 3) 하나의 부분의 양육과 부양이 다른 부분에 의해서 보장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여기서 유기체와 관계하는 세 가지 종류의 재생이 각각 대응한다. 즉, 새로운 체계의 산출, 성장을 통한 확대재생산, 양육과 특별한 경우에는 회복에 의한 동일한 것의 재생과 조절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칸트는 유기체가 자연목적에 부합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 유기체는 기계적 인과성과 어떠한 유사한 요소도 갖고 있지 않은 자연산물이면서 동시에 자연목적이다. 하지만 자연목적이 순수한 개념인데 반해서 유기체는 동물과 식물처럼 감성적 직관에 사실적으로 부합하는 경험의 대상으로서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자연목적에 부합하는 실재적 존재 즉 유기체가 존재하면, 이 자연목적 개념 역시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 그러나 칸트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유기체가 실제로 자연목적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체계적인 근거에 입각해서 자연목적의 개념이 유기체와 동의어로 도입된 것은 아니었으며, 또 유기체의 적합성 여부를 통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의 유기체론을 이해하는 열쇠는 칸트 스스로가 “자연과학의 이방인”(Fremdling in der Naturwissenschaft)이라 부르고 있는 자연목적 개념이다. 때문에 칸트 스스로 이상과 같은 규정이 아직 “정확하지 못한 막연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어서 자연목적의 개념을 명확하게 개념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칸트의 분석적 해명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자연목적 개념이 칸트의 유기체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첫째, 단지 오성에 의해서 사유되는 인과결합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의 하향적 계열로 이루어지는 연결방식인데, 이러한 결합은 다른 사물을 그 원인으로 전제하고 있는 결과로서의 사물 자신은 동시에 그 사물들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칸트는 이와 같은 인과결합을 동력인적 결합(nexus effectivus)라 부른다.
둘째, 이와 반대로 (목적의) 이성개념에 따르는 인과결합도 사유될 수 있는데, 만일 이 인과결합이 하향적으로나 상향적으로나 의존성(sowohl abwärts als aufwärts Abhängigkeit)을 갖는 계열로 간주된다면, 일단 어떤 것의 결과로 불리어진 사물이라도 그것은 상향적으로 그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셋째, 기술과 같이 실천적인 것에서는 이와 같은 연결이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집은 임대료로 벌어들이는 돈의 원인지만 또한 역으로 이러한 가능한 수입의 표상은 집을 짓게 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과연결을 목적인적 결합(nexus finalis)이라고 부른다.
넷째, 우리는 동력인적 결합을 실재적 원인의 연결, 목적인적 결합을 관념적 원인의 연결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명명하면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인과성 이외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동시에 이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도 유기체와 관계하는 인과성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자연목적에 대한 일체의 규정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하향적이면서 상향적인 인과적 의존성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향”이란 전체의 특성은 부분의 특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며, “상향”이란 부분의 전체의, 즉 다른 부분에의 의존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되는 유기체를 칸트는 명시적으로 단지 “운동하는 힘”만을 지니고 있는 기계와는 달리 그리고 기계적 조직이 갖고 있는 운동능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 속에 형성하는 힘”을 소유하면서 그러한 힘을 물질에게 나누어주는 존재자로서, 한 마디로 “스스로 번식하면서 형성하는 힘”(eine sich fortpflanzende bildende Kraft)의 소유자로 규정한다.
칸트는 이상과 같은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도입한 유기체의 산출에 관한 목적론적 원리에 따를 경우, 유기체의 내적 합목적적 형식의 원인의 기초로서 기회원인론(Okkasionalism)이나 예정설(Prästabilism)의 수용 가능성을 점검한다. 여기서 칸트는 생식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의 최고 원인의 개입을 허용하는 기회원인론은 일체의 이성 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거부한다. 그리고 예정설에 포함시킨 개체적 전성설(또는 개전설)과 후성설(또는 종적 전성설) 중에서 유기체를 자기와 같은 것의 “추출물”(Edukt)로 보는 전성설 보다는 자기와 같은 것의 “산출물”(Produkt)로 보는 후성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이 견해는 유기체의 “번식을 스스로 산출하는 것으로 고찰하며, 최초의 시원을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초자연적인 것을 되도록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최초의 시원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결과를 자연에 맡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가 칸트에게는 결코 과학적 설명이 아니다. 칸트에게 유기체에 적합한 생물학적 설명이란 과학적 인식과 증명의 한계를 넘어선다.
6. 맺음말 - 비판적 목적론의 의의와 한계
칸트에게 유기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사물을 기계론적 인과성에 따라서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있는 놓여 있는 것이 칸트가 말하는 유기체이다. 칸트의 유기체론의 핵심 개념, 즉 자연목적 개념은 유기체에 고유한 인과 관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었다. 유기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다. 그러나 생물학이 유기체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방식과 방법은, 철학이 그것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설명방식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로 제기된다. 칸트가 유기체에 대한 설명에서 발견한 첫 번째 문제는 기계론적 설명 원리가 의존하는 것처럼 부분의 특성을 갖고서는 모든 유기체의 구조를 제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칸트는 부분들로부터 유기체가 갖는 구조의 산출 및 부분에 새로운 특성을 부여하는 전체성의 능력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목적에 따른 인과성을 가정해야 했다. 이를 위해 칸트가 시도한 전략은 인과성에 대한 새로운 규정, 즉 기계론적 인과성 이외에 목적론적 인과성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인과성의 원리는 그것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자연과학의 내적 원리가 아니라 외적 원리로 차용된 것이다. 이러한 목적론적 원리는 규제적 원리에 불과하며, 설명에 도움은 줄 수 있어도 과학적 설명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게는 기계론적 설명방식만이 그러한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목적에 근거를 둔 목적론적 원리는 어떠한 구속력이나 필연성도 없는 목적론적 준칙, 즉 실용적 준칙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기계론을 인과성의 한 종류로 파악한다. 경험의 대상과 관련해서는 인과성 자체는 언제나 오성 개념으로서 구성적이다. 하지만 기계론은 주관적 타당성만을 갖는다. 왜냐하면 기계론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오성의 구성적 특성에서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유기체의 경우처럼 전체가 그의 부분의 특성에 작용하는 인과관계를 우리는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도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근대 자연과학에서 기계론적-환원론적 설명이 갖는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부분과 전체의 인과성에 지배되는 유기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적 인과성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과성은 기계론의 한계를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 스스로 목적 인과성에 기초한 설명 방식의 지위에 비판적 목적론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칸트는 “생명체도 오로지 원인진술을 통해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고 본 보편적 기계론”과 “전자연이 합목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보편적 목적론”을 동시에 배척한다. 또한 이와 함께 칸트가 도입한 목적론적 원리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대표되는 칸트 자신의 이원적인 철학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하는 “체계적 매개기능”과 기계론적 원리를 보완하는 발견술적인 “사태분석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목적론적 원리를 도입한 근본 목적이 모두 다 충족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기에 칸트가 자연목적의 개념을 도입해서 유기체 문제를 해명한 이른바 그의 비판적 자연목적론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의 유기체에 관한 사고를 추적해 본 결과 인과기계론적 사고와 원리에 의해서는 유기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칸트의 확신은 유기체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경험법칙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능한 한 가지 설명 방식을 보여준 것뿐이지 유기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그 같은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 마디로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며, 더욱이 목적론의 도입의 객관적 필연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우리의 이해를 진척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칸트 스스로도 이런 사정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왜 유기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목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지 철저하게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답을 우리는 ?판단력비판?을 ?실천이성비판? 및 ?철학에서의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와 연관지어봄으로써 찾아볼 수 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동시에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리고 그 유기체는 자연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존재 특성과 그 실천적 소산들은 자연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칸트가 유기체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목적의 개념을 도입해야만 했던 근본 이유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계론의 원리에 따르는 자연연구가 우리의 이론적 이성사용에 대해서 갖는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모든 산물들과 사건들은, 가장 합목적인 것조차도,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한 기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우리가 오직 이성의 개념 아래서만 연구 자체를 위해서 제시할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산물들과 사건들은, 그 기계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성의 본질적 성질에 맞게 결국에는 목적에 따르는 인과성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창조의 최종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지상에서 창조[자연]의 최종 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들의 집합을 자기의 이성에 의하여 목적의 체계로 만들 수 있는 지상 유일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칸트의 유기체론이 그의 철학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연목적에 근거해서도 목적론적 자연 이해는 한계를 갖는다. 즉, 이론철학은 비판적 목적론의 정당성을 객관적으로는 그 어떤 무엇으로도 확증할 수 없다. 그러나 칸트가 믿고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실천적으로 자기목적성을 갖는 오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이다.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동시에 하나의 유기체적 존재이며, 또한 그러한 존재가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자연과 자유의 통일 및 자연 속에서의 도덕적 목적의 실현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단서라 할 수 있으며,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유기체 문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결정적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서 전개하고 있는 칸트의 유기체론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가 기회원인론과 예정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81절에서 종결된다. 이 이후의 논의의 주제는 오히려 자연의 최종 목적과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자연과 자유의 통일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이라는 주제 아래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체계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칸트가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을 ?판단력비판?에서 자세히 논구한 근본 의도는 결코 유기체의 과학적 인식의 정초에 있었던 것도, 생물학의 철학을 전개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론으로서의 유기체론의 정초의 불가능성”은 칸트가 유기체 문제를 자연목적의 개념, 즉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개념의 도입과 전개”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미 분명해졌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칸트가 목적론적 원리를 도입해서 유기체에 적합한 설명 방식을 확립한 이유는 이로써 체계 통일을 꾀함과 동시에 실천이성의 도덕적-실천적 목적의 자연(현상계)에서의 실현 가능성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칸트의 유기체론은 시대적 배경과 제약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기계론을 들 수 있다. 칸트는 “복잡한 기계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의 내적 구조를 관찰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특성상 기계론적 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칸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생물학의 수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필자는 칸트의 유기체론은 물론이고 비판적 목적론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계론에 대한 이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더 철저하게 논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시대에 공유되었던 기계론에 대한 맹신과 이와 함께 그로 인해 무비판적으로 승인된 기계론의 한계에 대한 성급한 예단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던 칸트의 비판적 태도가 유기체를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비판적 목적론이라는 결실을 맺게 한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학문적 연구에 종사하기 시작한 이래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경탄”의 대상인 유기체에 대해서 칸트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귀결은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 즉 기계론적 설명 가능성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목적론적 유기체론은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를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들의 대립을 중재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이론철학의 체계적 통일과 완성을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비록 유기체의 설명 원리로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칸트에게 유일한 과학적 설명 방식은 인과기계론적 원리였다. 따라서 우리가 칸트의 유기체론을 그의 비판적 목적론의 체계 의도와는 독립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계론 이해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칸트의 유기체론은 유기체를 기계론적 원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경탄”의 대상으로 보는 사고, 즉 기계론에 대한 “일정한 이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에게 유기체 문제는 그가 철학적 사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말년에 이를 때까지 그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들 중의 하나였다. ?판단력비판?에서 보여준 칸트의 유기체론은 유기체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이를 해결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잠정적으로) 체계 기획과 완성을 위해 활용한 흔적이 짙다. 이러한 사실은 칸트의 ?유고?에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유기체의 가능성은 증명될 수도 요청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하나의 근본사실(Factum)이다.
이 ?유고?에서 유기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정립한 이성의 근본사실로서의 도덕법칙처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사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에서 칸트가 보여주고 있는 유기체론은 여전히 명료하지 않다. 그런데 만일 유기체를 하나의 근본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생명체 자체는 우리의 오성적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또한 더 이상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더 나아가 이렇게 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확립한 이른바 “객관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은 동시에 객관의 존재의 조건들이다” 라는 대원칙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비판론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단편적인 사유들로 채워져 있는 ?유고?에서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는 단정짓기 힘들다. 하지만 칸트가 ?판단력비판?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확립한 유기체론을 넘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사유하면서 또 다른 방식의 설명 가능성을 놓고 고민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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