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과 실질
문 성 학(경북대)
[한글 요약]
본고에서 필자는 형식주의 윤리학의 정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칸트 윤리학이 두 개의 치명적인 모순을 갖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첫 번째 모순은 그의 윤리적 형식주의와 연관이 있으며, 두 번째 모순은 그의 실천적 형이상학과 연관이 있다.
칸트는 세 개의 정언명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보편적 법칙의 법식, 목적 그 자체의 법식, 자율성의 법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목적 자체의 법식은 실질적 요소를 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칸트의 윤리적 형식주의와 양립할 수가 없다. 만약, 칸트가 자신의 형식주의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보편적 법칙의 법식만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도덕성의 필요 충분조건을 확립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그가 도덕성의 필요충분 조건을 확립하기 위하여 목적 자체의 법식을 받아들인다면 소위 윤리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것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게 된다. 만약, 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렇게 하고 있듯이 목적 자체의 법식과 보편적 법칙의 법식을 동일시 한다면 질료와 형식의 이분법은 부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칸트로서는 피할 수 없는 트리레마이다. 또 하나의 다른 심각한 딜레마가 행복에 대한 칸트의 입장에서 발생한다. 실천형이상학의 건설을 위하여 칸트는 행복을 의지의 규정근거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윤리적 형식주의의 일관성을 위해서 그는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고 따라서 최고선의 개념과 실천형이상학의 건설도 포기해야한다.
주제어 : 형식, 형식주의, 실질, 실천형이상학, 정언명법
1. 서론
사람들은 흔히 칸트 윤리학을 형식주의로 규정한다. 적어도 형식주의라는 말로 알갱이보다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규정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상 칸트 철학은 그 인식이론에 있어서도 형식주의적인 특징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칸트에 있어서 인식이란 감성과 오성의 결합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데, 우리가 인식의 영역에서 선험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감성과 오성의 형식뿐이며, 우리가 선험적 차원에서 인식의 질료적 부분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순수이성비판} : 필자 집어넣음)의 대부분의 중요한 주장들은 지속적으로 형식 혹은 형식성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칸트의 직관 이론은 "감성의 형식들"에 관한 이론이며, 순수한 혹은 경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의 이론은 "대상에 대한 사유형식"의 이론이며, "경험의 가능성"에 대해 그 자신이 특징지운 바에 따르면 "통일"이 경험의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통각의 통일은 유일한 "형식적 원리"로 간주되어야만 하며, 그리고 …
사람들은 칸트 인식론의 형식주의를 칸트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흔히 칸트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인식론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인식론적 설명에 의하면, 진리란 대상과 판단의 일치에서 성립하는 바, 칸트 이전에는 이 일치를 대상본위의 방식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런 설명방식을 모사설(Abbildtheorie)이라 불렀으나, 칸트는 그 일치를 주관 본위의 방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상과 판단의 일치에 대한 이런 주관 본위의 설명방식을 구성설이라고 부른다. 칸트적인 구성설에 의하면 현상적 대상은 주관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나 원칙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험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의 질료가 아니라, 대상의 형식이다.
{순수이성비판}을 형식주의라는 관점에서 이해한 사람들은, {실천이성비판}도 아무런 의심 없이 형식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리하여 {순수이성비판}은 형식주의 인식론으로 규정되고, {실천이성비판}은 형식주의 윤리학으로 규정된다.필자는 본 논문에서 첫째로 비록 칸트 윤리학에 형식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최고선'이나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과 결부된 실질주의적(목적론적) 요소도 존재함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로 칸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형식주의적인 요소와 실질주의적인 요소를 성공적으로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2. 윤리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
칸트는 행위자의 개인적인 사정이나 문화적·시대적·종족적인 특수상황과 무관하게, 요컨대 일체의 경험적인 제약과 무관하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화 가능한 준칙(도덕법칙)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비판적 형이상학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도덕의 형이상학을 건설하려 했다. 어떤 준칙이 일체의 경험적인 제약과 무관하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화 가능한 준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순수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채택할 수 있는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도덕법칙은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학은 학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도덕법칙을 발견하는 작업을 통해 비판적 형이상학을 건설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헛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인간에게 존경의 대상으로서 명령의 형식으로 다가오는 도덕법칙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이 문제에 제대로 대답하려면, 우리는 소위 칸트가 윤리학의 형식주의에 대해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 이전에 윤리학자들은 인간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그 선을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 규범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선에 대한 인식이 우선이고, 법칙은 그 인식에서 뒤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선은 통상 윤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런 선악 중심적 윤리학은 결국 대상 중심적 윤리학이요 또 실질주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실질주의 윤리학은 통상 목적론적 윤리학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최고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자신의 윤리학적 탐구의 첫머리에서 제시한다. 그 다음에 행복이 최고선이요 그 자체 목적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한 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도덕규범으로 권장된다. 행복주의에 대해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행복의 원리는 실로 준칙들을 줄 수는 있으나, 설령 보편적인 행복이 대상이 될 때라 할지라도, 의지의 법칙들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의 준칙들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복에 관한 인식은 단순히 경험적인 소여에 의존하고, 행복에 관한 모든 판단이 한 개인에 있어서도 매우 변하기 쉬운 각인의 자기 의견에 의존적이기에 그것은 일반적인 규칙들을 줄 수는 있으되, 보편적인 규칙들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평균하여 가장 적합한 규칙들을 줄 수는 있으나, 항구적이고 필연적 타당성을 갖는 규칙들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실천법칙들도 행복의 원리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쾌락주의 윤리학도 마찬가지로 대상중심적 윤리학이다. 벤담이나 밀은 쾌락을 선으로 규정한 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대상중심의 윤리학은 의지의 규정근거를 행복이니 쾌락이니 하는 경험적 대상에서 구함으로써, 윤리학을 학문으로 성립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에 대한 관념이 사람에 따라 다르듯이 쾌락도 마찬가지다. 칸트는 쾌락을 의지의 규정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쾌락주의 윤리설이 우리에게 실천법칙을 줄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로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쾌 또는 불쾌를 낳을지 아니면 쾌도 불쾌도 아닌 중성적 감정을 낳을 지에 대해 우리는 선천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쾌를 낳고 어떤 대상이 불쾌를 낳을 지에 대해 경험적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으며, 즉 자의의 규정근거는 항상 경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규정근거를 조건으로 전제하는 실천적인 실질적 원리들도 경험적인 것들 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쾌 불쾌란 항상 경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대해 똑 같이 타당할 수 없는데, 이런 쾌 불쾌의 감수성이라고 하는 주관적 조건에만 기인하는 원리는 그러한 감수성을 가진 주관에 대해서 확실하게 준칙으로 쓰일 수는 있으나, 그 주관 자신에게 대해서도 선천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객관적 필연성이 이 원칙에는 없기 때문에, 결코 실천법칙으로 쓰일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감정설도 결국에는 자기 행복의 원리에 귀착한다.
한층 더 세련되나 행복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이론은, 이성이 아니라 어떤 도덕적인 특수감관이 도덕법칙을 규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며, 덕의 의식은 직접적으로 만족이나 쾌락과 결합해 있고, 반면에 악덕의 의식은 마음의 불안'이나 고통과 결합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욕구에로 환원된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에 대한 탐구보다 선과 악에 대한 탐구를 우선시키는 모든 윤리학은 실질주의 윤리학이다. 그러나 실질주의 윤리학의 문제점은 첫째로 어떤 실질(내용)이 행위의 보편적 목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인에 의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실질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선의 개념이, 그것에 선행하는 실천법칙에서 도출되지 않고, 오히려 실천법칙의 근거로 기능해야 한다면, 선이란 것은 그것의 존재가 쾌락을 약속하며, 그리하여 주관의 원인성 즉 욕망능력을 결정하여 쾌락을 산출하게 하는 어떤 것의 개념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관념이 쾌락을 수반하며 어떤 관념은 반대로 불쾌를 수반하는지를 선천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직접적으로 선 혹은 악인가를 판별하는 것은 오로지 경험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욕망능력의 대상 ― 실질 ―을 의지의 규정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원리는 모두 경험적이며 어떠한 실천법칙도 발생시킬 수 없다.
경험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정보를 줄 수는 없다. 실질주의 윤리학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이성의 임무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실질주의 윤리학은 결국 우리에게 쾌 - 그것이 행복이건 명예건 아니면 돈이건 지식이건 그것도 아니면 사랑이건 우정이건 - 를 가져다주는 것은 선이요,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악으로 규정한 뒤에, 쾌를 획득할 수 있는 효율적인 규칙을 도덕적 의무로 제시한다. 예컨대 홉스는 삶을 욕구 충족을 위해 애쓰고 혐오를 회피하면서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운동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선을 어떤 사람이 욕구하는 대상으로, 악을 혐오하는 대상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런 이해방식에 관한 칸트의 평가에 따르면, 삶에 대한 홉스식 이해방식에 있어서, 이성은 단지 "감성적 존재로서의 그(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만" 쓰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의 임무는 그것 이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성이 인간에 대해서, 동물에 있어서 본능에 의해 취해진 목적의 충족에 봉사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이성을 갖는다는 것은 가치상으로 인간을 순 동물성보다 조금도 더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성이란 인간에게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자격을 주는 일없이, 동물에 준 목적과 동일한 목적을 인간에게 갖추어 주고자 자연이 사용한 특수한 기교가 될 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은, 그에게 이미 마련된 자연조직을 따라서, 그의 복·불행을 항상 고찰하고자 이성을 갖지만, 인간은 그것 이외에 한층 더 높은 사명을 위해서 또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도 칸트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시한다. 만약 자연이 유기적 생명체에다 제공한 자연적 소질들이 그 생명체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진 이유를 그것의 도움으로 행복을 얻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인간에게 이성을 준 자연의 조치를 아주 졸렬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성보다도 본능에 따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성은 인간에게 하나의 잉여물이요 불필요한 혹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성을 준 자연의 조치를 졸렬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이성의 본래 사명을 행복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이성이 욕구 충족의 도구이기만 하다면, 인간에게 이성을 붙여준 자연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본능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을 붙여주었다면, 이성에게는 욕구충족 이외의 다른 어떤 고차원의 임무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 칸트의 확신이다. 칸트에 의하면 쾌나 불쾌의 감정에 의해서 촉발되는 의지는 순수한 의지가 아니다. "순수한 의지는 순수한 이성이 자기 자신만으로 실천적일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문제는 그런 순수한 의지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윤리학을 학문으로 성립시키려면, 대상중심적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법칙 중심적 사고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는 대상중심적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내용적인 것과 연결되고, 윤리학이 내용을 다루게 되면, 경험적 내용과 연관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한 엄밀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지가 외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 자신에 의해 규정되는 가능성에 대해 미쳐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러한 대상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상중심적 사고방식이야말로 종래 윤리학의 영역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킨 원인이다.
만일 우리가 실천법칙을 미리 분석적으로 탐구했더라면, 대상으로서의 선의 개념이 도덕법을 규정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도덕법이 선의 개념을 … (중략) … 규정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했을 것이다. 최상의 도덕연구의 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이상의 관찰은 중대한 것이다. 이는 도덕의 최상원리에 관한 철학자들이 일으킨 모든 혼란의 원인을 단번에 설명해주고 있다.
칸트는 순수실천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도덕법칙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윤리학에서의 실질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형식주의를 채택한다. 달리 말해서 선악중심주의에서 법칙중심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실천이성을 비판함에 있어서 방법론상의 역설(das Paradoxon der Methode)을 설명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 (일견 선과 악의 개념이 도덕법의 근본에 두어져야 할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의 개념이 도덕법에 앞서 규정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여기서도 그랬듯이) 선과 악의 개념이 도덕법 이후에 그리고 도덕법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칸트가 윤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사고방식의 전회를 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진리의 기준을 대상본위에서 주관본위로 바꾼 것에 비교해서, 윤리학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이제 진리의 기준이 대상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 쪽에 있듯이, 선의 기준도 대상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 쪽에 있게 된다. 주관(이성)은 이론적으로건 실천적으로건 법칙의 근원으로서, 우리가 할 것은 주관(실천이성) 안에 내장되어 있는 실천법칙 즉 도덕법칙의 선천적 형식을 밝혀 내는 일이다. 칸트는 도덕판단의 영역에서도, 인식론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채택될 수 있는 실천 규칙들 - 그 내용은 각기 다르겠지만 - 의 형식은 실천이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도덕 규칙의 형식은 그 자체가 실천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순수한 이성이 실천적인 근거, 즉 의지를 규정하기에 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자신 내부에 갖고 있음을 우리가 가정한다면, 실천법칙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실천 원칙들은 준칙들일 뿐이다.
칸트는 자기 윤리학의 형식주의적 측면을 다음처럼 분명하게 진술한다.
만약 이성존재자가 그의 준칙들을 실천적인 보편법칙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는 법칙들을 그것들이 갖고 있는 실질 때문이 아니라 그 형식 때문에 의지의 규정근거를 포함하는 원리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천원리의 실질은 의지의 대상이다. 이 대상은 의지의 규정근거이거나 아니거나 이다. 의지의 규정근거라면, 의지의 규칙은 경험적인 조건(즉, 쾌·불쾌의 감정에 대한 규정하는 표상의 관계)에 종속하고 따라서 그것은 실천법칙이 아니다. 법칙의 모든 실질 즉 의지의 규정근거로 간주된 의지의 모든 대상이 법칙으로부터 사상(捨像)될 때, 보편적인 법칙수립의 형식만이 법칙에 남는다.
가능한 모든 실질적인 원리들은 최상의 도덕법이 되기에 전적으로 부적합하므로, 순수이성의 형식적인 실천원리만이 - 이 형식적 실천원리에 따라서 보편적 입법의 단순한 형식(이는 우리들의 준칙을 통해 가능하다)은 의지를 규정하는 최상의 그리고 직접적인 근거를 구성한다 - 정언명법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는 것이다.
칸트는 질료적으로 이해된 선의 개념을 도덕법칙에 앞세우는 모든 윤리학은 결국 타율의 윤리가 됨을 말한 뒤, 다음처럼 자신의 형식주의를 재삼 천명하고 있다.
형식적인 법칙만이 즉 준칙의 최상조건으로서 이성의 보편적 법칙수립의 형식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이성에 보내주지 않는 그런 법칙만이, 실천이성의 선천적인 규정근거일 수 있다.
그러면 칸트가 윤리학의 영역에서 형식주의적 전회를 통해 도달하게 된 순수한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학자들에 의해 흔히 '보편적 법칙의 법식'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그대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에 의하면 이 근본법칙은 사람이 단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기를 요구하며, 따라서 이 법칙은 무조건적, 절대적, 선천적으로 실천적인 명제이며. 또한 단적·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하며 객관적으로 규정한다. 의지는 일체의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직접 법칙을 수립하기 때문이다.
3. 칸트 윤리학에 있어 최고선과 실질주의적 요소
{실천이성비판}보다 3년 앞서 1785년에 출간된 {도덕철학정초}에서 칸트는 '보편법칙의 법식' 이외에, '자율의 법식'이나 '목적 자체의 법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의 근본법칙으로서 앞서 언급된 보편적 법칙의 법식만을 제시한다. {실천이성비판}에서 '목적 자체의 법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실천이성비판}에서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윤리적 형식주의와 조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에서도 우리는 칸트가 윤리적 형식주의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 못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천이성비판}의 후반부, [순수한 실천이성의 변증론]에서 칸트는 최고선의 개념을 도입한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순수이성을 사변적 차원에서 고찰하건 실천적 사용에서 고찰하건, 이성이 피제약자에 대해서 제약들의 절대적 전체를 추구하는 능력인 한, 이성은 변증론을 갖게 된다.
순수한 실천이성으로서 이성은 실천적으로 제약된 것 - (경향성과 자연적 욕구에 기인하는 모든 것) - 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무제약자를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실로 이성은 의지의 규정근거로서가 아니라, 비록 이 근거가 (도덕법 중에서) 주어졌더라도, 순수한 실천이성의 대상의 무제약적 전체를 최고선의 이름 아래서 추구한다.
그러면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최고선의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최고선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스토아 학도는, 덕이 모든 최고선이요, 행복은 오직 주관의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서 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쿨 학도는 행복이 모든 최고선이요, 덕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준칙의 형식' 달리 말해서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때 획득되어질 수 있는 준칙의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간략히 말한다면,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유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 유덕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곧 행복한 사람이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학파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 행복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유덕한 사람이다. 전자는 행복을 덕으로 환원시키고 있으며, 후자는 덕을 행복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스토아 학도나 에피쿠로스 학도와 같은 방식으로 즉 덕과 행복의 결합에서 성립하는 최고선의 가능성을 일방을 타방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결코 통합될 수 없는, 원리상의 본질적 차이를 언어상의 모순으로 번역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용어들로써 개념들의 표면적인 통일을 고안해내는 방식으로, 원리상의 본질적 차이를 극복하고자 한 것은, 그들 시대의 변증적 정신에는 어울리는 일이었다.(그리고 지금에도 치밀한 인간을 이따금 헷갈리게 만든다.
칸트는 덕과 행복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유덕한 사람이 불행할 수 있으며, 행복한 사람이 부덕할 수 있다는 상식을 받아들인다.
행복과 도덕성은 종자적으로 서로 다른, 최고선의 두 요소이기에 양자의 결합은 분석적으로 - 마치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유덕함을 발견하게 되거나, 혹은 덕을 따르는 사람이 그의 행위를 의식함에 있어서, 의식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그 자신이 행복한 것임을 발견하게 되듯이 - 인식될 수는 없고, 두 개념의 종합이라는 것이다.
덕과 행복이 이질적인 것임은 덕의 준칙과 행복의 준칙이 이질적인 것이라는[분석론]에서의 증명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덕은 순전히 형식적인 도덕법에 때한 순수한 존경심에 따라 행위하는 데서 성립하지만, 행복은 행위의 실질을 고려하는 데서 성립한다. 우리의 순수의지 즉 실천이성은 덕을 의욕하면서 동시에 행복을 의욕한다. 그리나 덕을 의욕하는 것과 행복을 의욕하는 것이 많은 경우에 상호 충돌한다.
[분석론]으로부터 다음의 사실이 명백해졌다. 즉 덕의 준칙들과 행복의 준칙들은 그 최상의 실천원리에 관해서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요, 같은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멀리 빗나가고 있다는 것. 비록 최고선을 가능하게 하려고 동일하게 최고선에 속하지만, 양자는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체에 있어서 서로 강력하게 제한하고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덕과 행복을 최고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라고 말한다. 칸트는 행위가 도덕에 일치하는 것을 최상선이라고 부르고, 그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실현된 상태를 완전선이라고 부른다.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서의) 덕은 우리에게 바랄만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최상조건이요, 따라서 우리들의 행복에 대한 모든 추구의 최상조건이며, 따라서 그것이 최상선임은 [분석론]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덕은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욕망능력의 대상인으로서 '전체적 완전선'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이 되기 위해서는 행복이 또한 요구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런 설명을 요약하자면, 최고선이란 행위와 덕과 행복 이 삼자가 일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도입하고 있는 최고선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이쯤에 이르러 최고선과 칸트 윤리학의 실질주의적 측면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필자는 이하에서 이 의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칸트는 인간에게 부과되는 지상의 도덕명령은 '너는 마땅히 최고선을 실현하라'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최고선에는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한, 최고선에는 모종의 실질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된다. 의무의 준칙은 형식적인 것이지만, 행복의 준칙은 실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선이 행위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되는 한, 그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행복도 목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칸트 윤리학에는 실질주의·행복주의·결과주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칸트는 최고선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윤리학의 형식주의와 동기주의가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는 듯이 보일 것을 염려하여 다음처럼 말한다.
도덕법만이 순수한 의지의 규정근거이다. 도덕법은 단지 형식적이기에 (즉 보편적으로 법칙수립적인 것으로서의 준칙의 형식만을 요구하기에), 그것은 규정근거로서의 모든 실질을, 따라서 의욕의 모든 대상을 사상(捨像)한다. 결과적으로, 비록 최고선만은 항상 순수한 실천이성 즉 순수한 의지의 대상일지 모르나, 그것은 여전히 순수한 의지의 규정근거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도덕법만이 최고선과 최고선의 실현 혹은 촉진을 순수의지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근거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최고선이 의지의 규정근거가 아니라, 오로지 도덕법만이 의지의 규정근거라고 한다면, 칸트는 도덕법과 최고선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너는 마땅히 최고선을 실현하라'는 명령이 도덕법이 아니고, 따라서 의지의 규정근거가 아니라면, 그래서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도덕법이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 법칙과 최고선이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 도덕법만이 의지의 규정근거라고 말하는 한, 최고선이 도입될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려고 노력하면 그 뿐이다. 그 노력 중에 나는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행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왜 나는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하는가 하고 물어볼 수 있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대는 유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대답이다. 우리는 칸트에게 또 왜 나는 유덕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 볼 수 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만을 의지의 규정근거로 인정하는 한, 다시 말해서 '너는 마땅히 최고선을 실현하라'는 명령을 도덕법에 포함시키지 않는 한, 칸트는 '너는 유덕해야 하기 때문에 유덕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유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방금 위에서 인용한 그 구절 바로 뒤에서는 최고선이 의지의 규정근거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분석론]에서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선의 이름 아래서 어떤 대상을 도덕법에 선행해서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최상의 실천원리을 도출해 낸다면, 이것은 항상 타율을 발생시키며, 도덕적 원리를 배제시켜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도덕법이 최고선의 개념 안에 최상의 조건으로서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이 때 최고선은 단순히 (순수의지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법의 개념과 우리의 실천이성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존재(최고선 : 필자 집어넣음)의 표상 이 양자가 순수의지의 규정근거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자명하다.
최고선의 개념 안에는 행위와 도덕의 일치를 명하는 최상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최고선의 개념은 순수의지의 객관이면서 동시에 규정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칸트는 행복에의 열망도 의지의 규정근거로 몰래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최고선에는 행위와 도덕의 일치를 명하는 최상선만이 아니라, 덕과 행복의 일치를 요청하는 완전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복에의 열망이 의지의 규정근거로 밀반입 된 이상, 칸트는 형식주의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행복에의 열망이 최고선의 개념을 통해 의지의 규정근거로 밀반입 된 이상, 이제 우리는 왜 유덕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유덕한 행위는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 답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분석론]에서는 행복주의를 가차없이 배격했지만, [변증론]에서는 어느새 행복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물론 칸트는 그의 윤리학적 저술들 여러 곳에서 행복을 목적으로 해서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말한다. 그리고 칸트는 도덕은 행복에의 합리적 조건만을 문제삼으며,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기에, 풀어 말하자면, 도덕은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되는 것이지,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기에, 도덕 자체를 행복론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음의 말은 칸트가 도덕을 행복론으로 보아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더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비록 전체 개념으로서의 '최고선의 개념' - 이 최고선의 개념에서는 최대의 행복과 (피조물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한 도덕적 완전성이 가장 정확한 비례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 중에는 내 자신의 행복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최고선을 촉진하도록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입증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여전히 도덕법이다. … (중략) … 그러므로 도덕이란 실로 어떻게 우리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가에 대한 교설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게 되겠는가 하는가에 대한 교설이다.
그러나 최고선이 의지의 규정근거일 수 있음이 일단 인정된 이상, 도덕론과 행복론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더군다나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무릇 행복을 필요로 하고 또 행복할 만 자격을 갖고 있으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일은 이성적 존재자의 완전한 의욕과 … (중략) … 도저히 조화할 수 없다.
이 말은 도덕론과 행복론이 구분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행복이 실천이성의 필연적 요청내용으로 인정된다는 사실이 실천철학적으로 증명된 이상, 도덕과 행복을 구분하는 것은, 의도와 결과의 이분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도덕법에 따르는 것 그 자체가 행위자의 의도이며, 행복은 의도된 결과가 아니므로, 이 양자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의 이런 사고방식은 카톨릭에서 말하는 '이중결과의 원칙'(principle of double effect)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유덕함에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 실천철학적으로 증명된 이상, 유덕함을 의욕하는 것은 동시에 행복을 의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칸트는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론이 행복론으로 불려질 수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중요한 구절이라 판단되어 생략함이 없이 인용하겠다.
그러나 (이기적 소망에 대한 방책을 제공하는 대신에 단지 의무만을 부과하는) 도덕이 완전히 논술되었을 때에는,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데려가는) 최고선을 촉진하려는 도덕적 소망이 각성될 때에는 - 이런 소망은 도덕법에 기초한 소망이며, 그 어떤 이기적인 마음도 갈망할 수 없는 소망이다, -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종교에로의 행보가 생긴 뒤에는, 오로지 그럴 때에만 윤리학은 행복론이라 불려질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희망이 오직 종교와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음의 사실이 밝혀진다. 즉 만약 우리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최후목적을 탐구한다면, 그것은 세계에서의 이성존재자의 행복이 아니라 최고선(이 최고선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성 존재자의 소망에다 하나의 조건을 부가하는 데, 그 조건은 이성적 존재자의 도덕성인 바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춘다는 조건이며, 오로지 이것만이 이성적 존재자가 현명하신 창조자의 손을 통해서 행복에 참여하기를 바랄 수 있는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 이라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이 이성존재자의 행복이 아니라, 최고선이라 하더라도, 최고선에는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해 있기에, 칸트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도덕론과 행복론을 구분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만약 칸트가 어떻게 도덕이 가능한가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신의 존재나 영혼불멸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천철학적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도덕에 따른 이유는 도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만약 영혼이 불멸이고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유덕함은 보상받을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상받지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믿자고 했다면, 도덕론과 행복론은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 조건으로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실천철학적 필연성을 갖고서 증명한다. 그런 한, 도덕설과 행복설의 구분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칸트 윤리학의 실질주의적 측면은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번에 먼저 우리는 칸트가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 언급했던 '목적 자체의 법식'에 대해 3년 뒤에 출간했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는 {실천이성비판}을 집필할 때 보다 자신의 형식주의적 사고방식에 덜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을 집필하면서 그는 실버가 '윤리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 사고방식의 전회 즉 선악중심주의에서 법칙중심주의로의 전환을 감행하게 되면서,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는 덜 철저하였던 형식주의를 보다 더 철저하게 밀고 나아가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일단 자신의 윤리적 형식주의를 철저하게 밀고 나가려 할 때, '목적 자체의 법식'은 하나의 걸림돌로 보였을 수가 있다.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접하라는 명법은 분명히 어떤 형식적인 명법이 아니라 실질을 담고 있는 명법이기 때문이다. 그 명법은 인간을 수단시하지 말라는 실질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 그런데 목적 자체의 법식을 법칙중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법칙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대상(실질)을 도덕법칙에 선행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목적 자체의 법식은 인간성을 어떤 다른 법칙보다도 우선시키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형식의 범주와 관계하는 보편적 법칙의 법식과 실질의 범주와 관계하는 목적 자체의 법식이 동치임을 주장한다.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네 자신과 타인)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성적 존재자는 너의 준칙에 있어서 동시에 그 자체 목적 자체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원칙은 결국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에 대한 보편적 타당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는 원칙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나의 준칙을 그것이 또한 모든 주관에 대한 법칙으로서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조건에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목적의 주체 즉 이성적 존재자 자신은 결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수단의 사용을 제한하는 최상의 조건으로서(즉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행위의 모든 준칙의 근저에 두어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형식과 실질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한,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만약에 칸트가 형식주의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보편적 법칙의 법식만을 인정한다면, 그는 도덕법칙의 필요조건을 제시하는 것일 뿐, 충분조건을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칸트로서는 트리레마에 빠지게 된다. 목적 자체의 법식을 받아들이면 도덕법칙의 충분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으나, 윤리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말 뿐인 것이 된다. 목적 자체의 법식을 내버리고 보편적 법칙의 법식만을 받아들이면,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에는 일관성을 줄 수는 있으나 도덕법칙의 필요조건 밖에 제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는 보편적 법칙의 법식과 목적 자체의 법식이 동치임을 주장하게 되지만, 이는 형식과 실질의 이분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필자가 보기에 칸트는 어떤 경우든 실질의 범주와 관계된 '목적 자체의 법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 이유를 이하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칸트적인 의무론적 윤리학에서는 도덕적 행위는 다른 어떤 실질적인 것(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 도덕적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효도는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져서는 안 되고 효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 그 자체가 목적 그 자체이다. 그런데 도덕법은 칸트에 따르면 형식적으로만 표현된다. 그 형식은 자기 입법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성의 형식이다. 따라서 도덕이 목적 그 자체라면 그러한 형식의 담지자로서의 인간 그 자체도 목적 그 자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는 바로 그 형식주의의 필연적 귀결로서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여진 목적 그 자체로서의 법식이 칸트의 형식주의와 배치된다는 데에, 칸트 윤리학의 근본적인 고뇌가 발견된다. 물론 인간이 순수사유라면, 칸트가 목적 자체의 법식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신의 윤리적 형식주의와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순수사유라면 경향성의 유혹도 받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도덕적 갈등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윤리적인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한, 인간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한, 목적 그 자체의 법식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와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이룩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의외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만나게 된다. 칸트는 도덕성의 원리를 제시하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단지 동일한 법칙의 다양한 법식들일 뿐이며, 그들 각각의 법식은 나머지 다른 두 법식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 뒤, 다음처럼 말한다.
모든 준칙들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1) 형식 : 이 형식은 보편성 중에 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 명법의 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준칙은 마치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타당해야 하는 듯이 선택되어야 한다.' 2)실질 : 즉 목적을 갖는다. 이 법식은 '이성적 존재자는 성질상 목적으로서, 그렇기에 목적 자체로서, 모든 준칙에 대해 일체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되어야 한다'로 표현된다. 3) 다음의 법식에 의한 모든 준칙의 완전한 규정 : '모든 준칙은 자기 입법에 의해 자연의 왕국으로서의 가능적인 목적의 왕국과 조화하여야한다'는 법식이다. 이 경우의 진행은 의지 형식의 단일성(의지의 보편성)의 범주, 실질(의지의 대상 즉 의지의 목적)의 수다성의 범주, 그리고 이 양자의 종합인 전체성 즉 총체성의 범주라는 순서로 진행한다. 도덕적 평가에 있어서는 항상 엄격한 방법에 따르고, 또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는 정언명법의 보편적 법식을 근본에 두는 것이 좋다. 그러나 도덕법칙들을 널리 보급시키기를 원한다면, 동일한 행위를 상술한 세 가지 개념을 통과하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도덕법칙들을 가능한 한 직관에 근접시키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위 인용문에서의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즉 '형식'과 '실질'과 이 양자의 종합인 '완전한 규정'이 그것이다.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이 어떻게 정식화되든 '보편적 법칙의 법식'은 그 명법을 형식적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며, '목적 자체의 법식'은 그 명법을 실질의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목적 왕국의 법식'은 그 명법을 완전하게 규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에 있어서 하나인 정언명법이 어떻게 정식화되든, 그것은 실질의 요소를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이다. 그리고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은 일체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이다. 물론 칸트는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이란 개념으로 생물학적 의미의 인간, 즉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족의 유전적 특징을 가진 생명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명체라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영구히 상실하면 그 생명체는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이성적 존재자는 도덕성을 가질 때에만 목적 자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자는 이 도덕성에 의해서만, 목적의 왕국에서 입법하는 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도덕적 능력이 있는 인간성만이 존엄을 가진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다음처럼 말하기도 한다.
'자연의 체계 속에서의 인간(현상적 인간 : homo phaenomenon)'은 사소한 중요성만을 가지며, 땅의 자손으로서 여타의 다른 동물과 똑같은 가치(pretium vulgare)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서 목적 그 자체를 형성하는 부분은 인간의 예지적 부분이지 현상적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칸트가 비록 인간성을 목적 그 자체로 간주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형식주의를 파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성이 목적 그 자체인 이유는 인간만이 도덕성의 담지자이기 때문이요, 이 때 도덕성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기에, 인간이 목적 그 자체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도덕의 형식성이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담지자로서의 인간 내부에 도덕의 선천적 형식성이 없다면, 인간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성 혹은 인간성 내부에 내장된 도덕의 형식 만을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함으로써, 결국 모종의 실질적인 것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인간이 도덕을 의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경험적 자아와 도덕법칙을 의식하는 예지적 자아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인간에게서 도덕성의 형식성 만을 담지하고 있는 예지적 부분만을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하고, 쾌고를 감수하는 능력으로서의 경험적·신체적 부분은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이분법이 될 것이다. 인간이 정신과 신체의 종합인 한, 정신과 마찬가지로 신체도 결국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가 일단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성을 목적 그 자체로 대접하기를 명령하는, 인간 존엄성의 정언명법은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적 입장과 상치되다고 하겠다.
5. 결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그 존재증명의 불가능성을 증명했던 영혼과 신을 실천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윤리학을 통해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실천형이상학 체계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러한 학문적 계획을 착수함에 있어서 그는 자유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가 자유로써 정초하려 했던 도덕성은 실천철학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규정되는데, 그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가 도덕성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만 관심을 가진 이유는 형식에 관한 지식만이 객관성과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지식은 비록 그것이 실천형이상학이라 하더라도 객관성과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의 개념을 통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란 도덕성의 가능성 조건이라는 것뿐이었다. 자유라는 것이 도덕성의 가능성 조건이라는 사실로부터는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는 자유를 통해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천형이상학에로 나아가려는 칸트의 학문적 계획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칸트는 이 문제에 직면하여 최고선의 개념을 끌어들이며, 최고선의 개념과 함께 행복을 밀반입 한다. 행복의 개념을 매개로 해서만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는 최고선의 실현가능 조건으로서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결국 칸트는 모종의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실천형이상학의 건설을 위해서는 행복을 의지의 규정근거로 인정해야 하고, 실천철학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확립한 형식주의를 일관되게 밀고 가려면, 최고선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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