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도덕신앙의 윤리적․종교적 의미 - 박 찬 구 외대 철학 I. 머리말 II. 칸트 윤리학의 근본 성격 1.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2. 도덕의 정언적 성격 3. 도덕의 보편적 성격 4. 도덕의 자율적 성격 III. 도덕에서 종교로 - 최고선을 통한 신 존재 요청 1. 최고선 - 도덕성과 행복 2.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의 신의 현존 IV. 도덕 종교의 이념 1. 선한 인격의 이념 2.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념 3. 순수한 이성 신앙의 이념 V. 맺음말 I. 머리말 서양 근대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칸트의 철학은 자연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한 제 1 비판서(?순수이성비판?)로부터 시작하여 제 2 비판서(?실천이성비판?)와 제 3 비판서(?판단력비판?)를 통해 도덕, 예술, 종교라는 全人的 과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지상에 신의 나라인 이상적 도덕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것은 그의 도덕적 이성신앙의 최종적 요청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칸트철학의 귀결점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종교철학에 주목하되, 우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그의 도덕철학의 성격을 밝히고, 이러한 토대에서 출발한 그의 종교론의 구도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칸트의 종교 이론은 여러 가지 서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떤 이는, 칸트의 사상은 기독교와, 아니 모든 종교와 도무지 합치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칸트의 윤리학은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신과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도덕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어떤 이는 칸트 윤리학에서 도덕의 최종적 근거는 결국 종교로 연결됨으로써, 그의 윤리학은 종교에 흡수된다고 본다. 또 처음부터 칸트 윤리학의 기독교적 기원을 주장하는 사람은, 칸트가 로마서 2장 14-1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을 그의 도덕법 개념을 통해 훌륭하게 표현해냈다고 평가한다. 칸트의 윤리학이 종교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도덕의 형이상학적 절정이 ‘실천이성의 요청’에 놓여 있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사실상 칸트는 신의 개념 없이는 우리가 최고선(‘도덕성’과 ‘행복’ 사이에 어떤 일치가 있는 상태)을 달성할 수 있는 보장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은 그에게 있어 ‘자유’ 및 ‘영혼불멸’과 함께 실천이성의 요청 중의 하나이다. 이제 본 연구는 칸트 윤리학과 종교철학의 관계를 주로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윤리학과 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및 건전한 종교의 조건에 대해서도 성찰해보고자 한다. II. 칸트 윤리학의 근본 성격 1.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칸트가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우위”를 주장했던 것이나, 또 “나는 [도덕적] 신앙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 지식을 지양[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순수[이론]이성비판?을 쓴 진정한 이유는 ?실천이성비판?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의 1 차적 의도는 “도덕론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과학론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게 하는 것”으로서, 흄의 회의주의적 비판에 의해 위기에 봉착한 자연과학의 학적 가능성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의 최종적인 관심은 역시 형이상학, 그것도 진정한 형이상학으로서의 도덕 형이상학에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 이성(theoretische Vernunft)과 실천 이성(praktische Vernunft)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론 이성은 현존하는 현실을 묘사하는 능력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킨다. 하지만 이론 이성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반면에 실천 이성은 인간의 욕구능력(Begehrungsvermögen)에 관여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칸트가 인간의 도덕적 행위 능력에 대해서도 ‘이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rein) 이성이라는 칸트의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넓은 의미에서 이성이란, 경험에 앞서서, 또 경험과 상관없이 우리가 미리부터 가지고 있는 추론 능력이다. 수학적 계산 능력은 아마도 이성 능력의 가장 단순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 능력은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주관을 초월한, 다시 말해서 시대와 장소 및 개개인의 특성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성적 존재(rationales Wesen)라면 누구나 ‘2 + 2 = 4’라는 계산을 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인, 유럽인이나 아시아인을 막론하고 동일할 것이다. 칸트는 도덕의 영역에서도 인간이 이와 같이 보편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했고, 이것은 경험에 앞서서, 또 경험과 상관없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도덕적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좁은 의미에서 이성(Vernunft)은 오성(Verstand)과 구분되는 능력으로서, 후자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적 직관들을 다룬다면, 전자는 가능한 경험 전체의 통일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모든 주어진 경험을 넘어선 초험적인(transzendent) 것을 다룬다. 다시 말해서 완전성, 즉 무제약자(das Unbedingte)를 지향한다.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의 대상이었던 이러한 순수 이성의 이념들로는 영혼, 자유, 신이 있거니와, 이것들이 이제까지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피하기 어려운 가상(Schein)으로 인도했던 것은 인간 이성이 지니고 있는 소질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칸트도 “어떠한 종류의 것이건 간에 세상에는 항상 형이상학이 있었고 또 미래에도 아마 있을 것이며, 형이상학과 더불어 순수한 이성의 변증론(Dialektik)도 그 형이상학 중에 발견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 논자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성’ 개념이 지니고 있는 ‘무제약자에 대한 추구’라는 특성이다. 이 무제약자에 대한 추구야말로 칸트의 도덕이 지닌 정언적(kategorisch) 성격과 (최고선의 개념을 통한) 신 존재의 요청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도덕의 정언적 성격 칸트는, 무릇 교양된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단지 생활을 즐기고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삶으로부터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는 “[행복과 만족을 얻는 것과는] 다른, 훨씬 더 존귀한 생존 목적의 이념이 숨어 있고, 이성 본래의 사명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고차적인 목적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개인적인 목적은 최상의 제약으로서의 이념의 하위에 종속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최상의 제약으로서의 이념’은 물론 ‘최고선’으로서의 도덕성이다. 칸트는 이와 같이 교양인의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행복한 삶’에 대한 ‘도덕적 삶’의 우위를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도덕’ 혹은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히 인간 사회의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현상이고, 이렇게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현상으로부터 차근차근 분석해 나아감으로써 그 본질적 속성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가 찾아낸 도덕의 본질(das Wesen der Moral)은 바로 그것이 정언적(kategorisch)이라는 것, 즉 그 무조건적 당위성(Sollen)이다. 칸트가 상식에서 출발하여 도덕의 최고 원리를 찾아나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도덕’ 하면 일단 자기의 타고난 경향성(Neigung)대로 하는 것이 아닌 어떤 강제성이나 의무를 연상한다. 그리고 강제나 의무는 명령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명령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가언 명령(假言命令)이고 다른 하나는 정언 명령(定言命令)이다. 전자는 어떤 조건이 붙은 명령으로서, “만약 네가 A를 원한다면, 너는 B를 행해야 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건절의 A가 “B를 행하라”는 명령의 전제가 되고 있는 상위의 목표임을 알 수 있다. A의 자리에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목표에서부터 건강, 부, 명예 그리고 행복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부도덕한 목표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도덕의 원리가 가언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온갖 욕구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달성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전략적 지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원리는 가언 명령이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종류의 명령은 정언 명령으로서, “너는 무조건 이것을 행해야 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도덕은 이러한 정언 명령에만 근거해야 한다. 즉, 그 명령의 전제가 되는 어떤 상위의 목적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명제가, 만약 그것이 의무의 규칙이자 근거이고자 한다면, 행위를 직접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 명령해야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전제하고서 명령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다가오는 도덕의 최고 원리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다시 말해서 정언 명령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3. 도덕의 보편적 성격 칸트의 정언 명령의 제 1 정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여겨질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보편적인 실천 법칙’ 혹은 ‘도덕 법칙’(das moralische Gesetz)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이러한 도덕 법칙을 “직접적으로 의식한다”고 말한다. “도덕 법칙은 순수 이성의 사실(ein Faktum der reinen Vernunft)로서 주어져 있고, 그것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인식하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칸트의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연 법칙’ 개념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칸트에게서 자연 법칙은 우리의 이성 자신이 객관 세계에 부여한 것으로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 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 역시 우리 이성이 도덕의 세계에 부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통해 우리는 경험과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어갈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원칙을 갖게 된다. 다만 전자가 외부 세계에 쓰여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우리의 내면 세계에 쓰여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자연 법칙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반면, 도덕 법칙은 그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 분명히 전자는 ‘있는’ 사실의 세계의 법칙이요, 후자는 ‘있어야 할’ 당위의 세계의 법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양자 모두 보편타당한 법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 법칙, 즉 정언 명법은 왜 위에서 칸트가 말한 것과 같은 명제이어야 할까? 논자가 아는 한, 칸트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답한 적이 없다. 어쨌든 칸트 정언 명법의 제 1 정식은 그 핵심 내용으로서 ‘보편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할 때 항상 보편적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서 타당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정말 만족할 수 있을까?” 혹은 “너도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느냐?” 하고 자문해보아야 한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정도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남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보다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입장을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칸트는 모든 도덕 문제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경향의 극복에 있다고 보고, 도덕적 원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도덕 법칙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객관적 실재성은 그 자체로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칸트가 말한 도덕 법칙이 그 자체로 자명했던 것 같지는 않다. 과거의 왕이나 귀족이 평민들을,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이 노예들을, 19세기 미국 남부의 농장 주인이 흑인 노예들을 자기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칸트의 이러한 명제는 확실히 상식이나 경험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순수 이성의 사실’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이념(Idee)이라 해야 좋을 것이다. 칸트가 표방하는 이러한 보편주의 이념은 곧바로 인간 존엄성의 이념으로 통한다. 이 이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인격체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적 존재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도덕은 모두의 입장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원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개개인은 결코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다른 인간의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칸트가 두 번째로 제시한 정언 명법의 정식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또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건 그 인간성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오늘날에는, 드러내놓고 자기 자신을 주인공이자 목적으로 여기면서 남들은 한낱 엑스트라이자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칸트 도덕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오직 당위일 뿐, 그 구체적인 실현은 아직도 진행형일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은, 아니 본래 도덕은 하나의 이념으로서 신앙(Glaube)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4. 도덕의 자율적 성격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 도덕 법칙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soll)고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는 무엇을 할 수 있다(kann)고 판단하며, 도덕 법칙이 없었더라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자유를 마음 속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의 자유는, 도덕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과 필연의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현상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 본체계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반면, 이른바 ‘본체적 원인’(causa noumenon)으로서 현상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원인성’(Kausalität mit Freiheit) 개념이다. 여기에서 칸트 철학의 이원론(二元論)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의 원인성이란, “결코 ‘현상이 아닌 것’이요, 물자체 그것으로서 ‘그 결과만이 현상’으로 인정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현상에 대한 지성적 존재의 이러한 영향이 모순 없이 생각될 수 있다면, 감성계에서의 원인과 결과간의 모든 결합에는 자연 필연성이 인정되는 반면,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지만) 현상이 아닌 그러한 원인에는 자유가 인정되고, 그럼으로써 자연과 자유는 동일한 사물에 대해, 어떤 때는 현상으로서 또 어떤 때는 물자체 그것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아무런 모순 없이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계에 속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비록 한편으로는 자연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본체계에 속하는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갖는다. 이제 자연의 인과 법칙과 타율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부여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칸트의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자유, 즉 의지의 자유란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개시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어떤 외적 세력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외적 세력에,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회적, 역사적 제약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타고난 경향성도 (심지어는 사람들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현상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한낱 타율(Heteronomie)의 근거이자 경험적인 제약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두 가지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다는 칸트의 인간관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한편으로 동물과 공유하는 측면, 즉 본능적 욕구들(경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만이 지닌 측면, 즉 이성(자유 의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후자만이 진정한 ‘나’이다. 따라서 이 후자인 ‘본체적 자아’(das noumenale Ich)가 전자인 ‘현상적 자아(das phänomenale Ich)를 통제하고 있는 상태가 바람직한 상태이자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실천 이성 혹은 자유 의지를 지닌 ‘본체적 나’는 도덕 법칙을 세운 후 ‘본체적이자 동시에 현상적인 나’에게 그것을 부과한다.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되면, ‘자기가 명령하고 자기가 복종한다’는 말이 가지는 애매함도 사라지게 된다. 앞의 ‘자기’와 뒤의 ‘자기’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강제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타율이 아닌 자율(Autonomie)이다. 이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본체적이면서 현상적인 나’에게 있어 순수하게 ‘본체적인 나’는 하나의 이념이자 목표가 된다. 그리고 ‘본체적인 나’가 세운 도덕 법칙은 ‘본체적이면서 현상적인 나’에게는 의무(Pflicht)가 된다. 왜냐하면 후자인 ‘나’는 현상계에 속한 ‘유한한 나’로서, 경향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동적으로 도덕 법칙을 준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본체계에도 속한 ‘나’로서, 경향성의 저항을 극복하고 스스로가 세운 원칙에 따를 수 있는 능력, 즉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항상 목적으로 취급받아야 하고 또 존엄성을 지닌 인격이란 오로지 ‘본체적 나’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도덕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따를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감성계의 일부로서의) 자기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오직 오성만이 생각할 수 있는 사물의 질서에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분명히 신성하지 않으나, 그의 인격 속의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우리가 의욕하고 또 우리가 지배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오직 인간,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만이 목적 그 자체이다. 즉 그는 도덕 법칙의 주체이며, 도덕 법칙은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로 인해서 신성한 것이다.” III. 도덕에서 종교로 - 최고선을 통한 신 존재 요청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머리말에서, 우리의 인식이 대상의 성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성질이 우리의 인식을 따르도록 할 때에 우리는 대상의 성질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사물 가운데에 집어넣은 것만을 우리는 그 사물에 관해서 선천적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인식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칸트는 이렇게 하여 현상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모두 주관이 부여한 조건에 제약된 지식이다. 현상계를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칸트는 이것을 일괄해서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대상(초경험적인 무제약자)을 인식하려고 시도할 경우 필연적으로 혼란(이른바 선험적 가상)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칸트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은 모두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칸트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성을 지향하고 초험적(transzendent)이 되는 것은 우리 이성의 본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본래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칸트는 어떻게 과거의 형이상학이 빠졌던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형이상학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에 칸트는, 도덕 법칙과 자유의 개념을 이른바 요석(Schlußstein)으로 삼아, 물자체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1. 최고선 - 도덕성과 행복 칸트에 의하면, 이성은 그 사변적 사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도 무제약자를 구한다. “이성은 순수한 실천 이성으로서 실천적으로 제약된 것, 즉 경향성과 자연적 욕구가 근거하고 있는 일체에 대해서도 무제약자를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이성은,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가 아니라(이 규정 근거는 이미 도덕 법칙 안에 주어져 있는 바),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의 무제약적 전체를 최고선(das höchste Gut)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한다.” 이와 같이 칸트가, 비록 순수한 의지의 ‘규정 근거’는 도덕 법칙이지만 그 ‘대상’은 최고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도덕 법칙은 단지 형식적이어서, 다시 말해서 준칙의 형식만을 보편적인 법칙을 수립하는 것으로 요구함으로써, 규정 근거로서의 모든 실질, 즉 의욕의 모든 객관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선만이 실천 이성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최고(das Höchste)라는 개념은 최상(das Oberste)을 의미하거나 혹은 완전(das Vollendete)을 의미한다. 전자는 무제약적인 조건을 가리키고, 후자는 완전한 전체를 가리킨다. 칸트에게 있어 최고선은 ‘덕(Tugend) + 행복(Glückseligkeit)’이다. 덕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것’(Würdigkeit, glücklich zu sein)이자 ‘우리의 행복 추구의 최상 조건’이다. 그래서 칸트는 그것을 ‘최상선’(das oberste Gu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덕은 아직 ‘전체적인 완전선’(das ganze und vollendete Gut)은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행복이 또한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덕과 행복이 합해져서 한 인격 안에서 최고선을 소유하도록 하고, 여기에 또한 행복이 (인격의 가치와 행복할 만한 자격으로서의) 도덕성에 정확히 비례하여 배분되어 있다면, 이것이 가능한 세계의 최고선을 형성한다. 그런 한에서, 최고선은 전체, 즉 완전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덕과 행복 사이의 관계이다. 양자는 최고선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로서, 우리는 (우리의 실천 이성이 실현하고자 하는) 최고선에 있어서 이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양자는 서로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성질 또한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 법칙을 완전하게 실천한다 하더라도 현세에서는 그러한 덕에 합당한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최고선의 개념은 이 양자의 결합을 함축하고 있고, 이러한 최고선의 촉진은 인간 의지의 선천적 필연적 대상이며, 도덕 법칙과 떨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최고선의 불가능성은 또한 도덕 법칙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최고선이 실천적 규칙에 따라 불가능하다면, 최고선을 촉진하도록 명령하는 도덕 법칙 또한 환상적이고, 공허한 가공적 목적에 세워진 것으로서, 그 자체로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덕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명제가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감성계(sinnliche Welt)에만 속하는 존재로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예지계(intelligible Welt)에 속한 존재로 생각할 때에는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원인으로서의 심정의 도덕성은 감성계에서의 결과로서의 행복과, 비록 직접적은 아니지만 (자연의 예지적인 창조자를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그것도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는 특히 칸트의 이른바 ‘도덕적 만족감 혹은 행복감’이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발적으로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도덕적 태도 안에서 느껴지는 기쁨’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향락이 아닌, 자기의 실존에 대한 만족을, 즉 덕 의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인 행복 비슷한 것을 가리키는 어떤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것은 ‘자기 만족(Selbstzufriedenheit)’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아무 것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식하는 자기의 실존에 대한 오직 소극적인 만족을 항상 함축하는 것이다. 자유와, 결연한 심정을 가지고 도덕 법칙을 따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의 의식은 경향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경향성은 (비록 우리의 욕망을 촉발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욕망을 규정하는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도덕적 준칙을 따름에 있어서 나의 자유를 의식하는 한, 자유와 그러한 자유의 의식은 그것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만족감, 즉 어떠한 특별한 감정에도 근거해 있지 않은 불변하는 만족감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지성적 만족감(intellektuelle Zufriedenheit)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우리가 도덕 법칙을 따를 때에 본래적이고 진정한 행복이 뒤따르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행복감’(moralische Glückseligkeit)을 통해 덕은 그 자체로 보상받는 셈이다. 그러나 최고선과 관련하여 칸트가 말하고 있는 행복이 과연 이러한 행복일까? 만일 그렇다면, “행복감은 자기가 덕을 의식하는 가운데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한 스토아 학파를 칸트가 비판했을 것 같지 않다. 또 만일 그렇다면, 그가 굳이 ‘도덕법에 적합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 신의 현존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행복 개념을 보다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일반이 이해하고 있는 행복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행복의 개념은 아주 막연한 개념이어서 모든 사람이 그 행복에 도달하고자 원하지만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고 의욕하는지를 결코 명확하게 모순 없이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행복의 개념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다 경험적이요, 즉 경험으로부터 빌려와야 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이념에는 나의 현재의 상태 및 모든 장래의 상태에 있어서의 안전의 절대적 전체, 즉 최대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통찰력이 있고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유한한 존재자는 행복에 관해 그가 정말로 의욕하는 것에 관한 명확한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부(富)인가? .... 지식인가? .... 장수인가? .... 그는 무엇이 정말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를 원칙에 따라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지전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칸트는, 행복의 개념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임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복의 이념’(Idee der Glückseligkeit),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행복이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은 ‘인간의 온갖 자연적 욕구의 충족’에 뒤따르는 감각적․감성적 쾌락(Lust, pleasure)은 분명히 아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행복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행복이란, 이성적 존재자가 그의 현존의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이 자기의 소망과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행복은 자연[즉, 현실]이 이성적 존재자의 전체 목적[즉, 최고선]과 일치하는 데에 놓여 있고, 동시에 자연이 이성적 존재자의 본질적인 규정 근거[즉, 도덕 법칙]와 일치하는 데에 놓여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행복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도덕적 존재자에게만 가능하다. 행복은 (이성적) 존재자의 완전한, 자족적 상태를 의미한다. 행복은 현실 세계에서 가능해야 한다.’ 도덕 법칙은 원래 (자유와 함께) 예지계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 법칙을 의무로 인식하여 행위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감성적 존재자이기도 한 우리 자신이며, 또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곳 역시 현실 세계이다. 만일 도덕 법칙이 감성계와 전혀 무관하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는 최고선 또한 전혀 목적적 가치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최고선은 단순한 지성적 만족이라는 예지계에서 가능한 소극적인 즐거움에서 그 실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에서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관심과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칸트 사상의 후기로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서의 신의 현존 칸트는 이제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이자 궁극 목적인 최고선의 개념을 통하여 신의 현존을 요청하는 논증을 전개한다. 예지계에 속하는 도덕 법칙은 감성계의 어떠한 동인과도 무관한 규정 근거에 의해 명령한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 안에는 도덕성과 그 도덕성에 비례하는 (부분적으로 감성계에 속해 있고 또 그래서 거기에 의존해 있는 존재의) 행복 사이를 필연적으로 연결시켜줄 근거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법칙을 따르는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 의지에 의해서 자연의 원인일 수가 없고, 그래서 자기 의지의 힘으로는 자기의 도덕적 원칙들과 행복을 완전히 합치시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실천 이성의 과제, 즉 최고선의 필연적 추구에 있어서는, 이러한 연결을 필연적인 것으로서 요청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한성, 즉 무능력을 보완함으로써 도덕성과 행복의 엄밀한 일치를 보장해주는 원인, 전체 자연의 원인인 신의 현존이 요청된다. 이와 같이 신의 현존을 가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필연이다. 하지만 칸트의 말처럼, 이러한 도덕적 필연성은 “주관적인 요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이라는 전체 자연의 최고 원인이 있어, ‘행복할 만한 자격’(도덕성)을 갖춘 상태와 실제로 행복한 상태가 일치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을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 존재의 요청은 이론 이성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가설’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최고선을 실현해야 할 의무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실천적 관점에서는 ‘신앙’, 즉 ‘순수한 이성 신앙’(reiner Vernunftglaube)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도덕 법칙은 순수한 실천 이성의 대상이자 절대 목적인 최고선의 개념을 통해서 종교에 이른다. 즉 모든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 물론 도덕 법칙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가 세운 법칙이지만, 이것을 우리는 최고 존재자의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한(신성하고 인자한) 그리고 전능한 의지에 의해서만 최고선을 바랄 수 있고, 또 이 의지와의 일치를 통해서 그것에 도달하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칸트는 기독교의 윤리학이 바로 이러한 (도덕) 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기독교 윤리학은 (최고선의 두 번째 필수 요소의) 이러한 결핍을 이성적 존재자가 도덕 법칙에 전심을 다해 헌신하는 세계를 하느님의 나라(Reich Gottes)라고 표현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자연과 도덕이, 최고선을 가능하게 하는 신성한 창조자[신]에 의해서, 양자가 각기 단독적으로는 불가능했던 조화에 이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칸트가 생각하는 기독교 윤리학의 메시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IV. 도덕 종교의 이념 칸트 윤리학에 대한 비판 중 하나로서, 그것이 너무 이상주의, 엄숙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윤리학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원리를 이상으로 제시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너무 높아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도덕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나온 주장일 뿐이다. 도덕(특히 도덕의 최고 원리)이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거짓말이 선하다거나 당연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덕은 원래 당위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는 늘 하나의 이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상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상이 옳다고 여겨지는 한, 비록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놓여 있는 현실의 자리에서 그 이상을 향해 한 발자국씩 전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상의 지표를 버린다면, 우리의 현실은 급전직하(急轉直下) 도덕적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윤리는 우리에게 현실 도덕의 지표를 제공해주며, 그의 도덕 신앙 또한 우리의 현실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제 본고는 그의 ?종교론?을 통해 칸트의 도덕 종교가 하나의 이념(Idee)으로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선한 인격의 이념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인간(이성적 세계 존재 일반)’은 신의 세계 창조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이념은 신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라 신의 독생자이다. 이러한 도덕적 완전성을 지닌 이념의 원형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으되, 그는 스스로 인간성을 취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신의 아들이 스스로 택한 ‘자기 비하’의 상태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취한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되기를 소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이념적 원형을 지닌 그를 우리의 모델로 삼아, 우리는 그의 실례를 충실하게 모방하면서 그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념에 따라야만 한다(sollen).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können)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신의 뜻에 합치되는 인간의 이념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난점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과 우리가 빠져나와야 할 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해서, 우리의 행위가 그 이상(도덕 법칙과 행위의 완전한 일치)에 도달하기는 언제까지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칙과의 일치를 향한 행위의 무한한 전진은 그 행위의 근원인 초감성적 심성(Gesinnung) 때문에 순수한 지적 통찰 안에서 마음을 꿰뚫어보는 자에 의하여 하나의 완결된 전체로서 판단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늘 지니고 있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선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이 느끼는 ‘도덕적 행복'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항상 선을 향해 나아가는 심성에 자족적인 만족감을 줌으로써 그것의 지속성을 보증해준다. 하지만 ‘신의 영이 우리의 영을 증거하여 준다’는 것과 같은 소위 초감성적인 느낌은 위험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 중심적 해석을 거듭하는 가운데 가장 쉽게 자기 기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의 원리를 채택한 후 충분한 기간 동안 그 원리가 자기의 행위에 미친 영향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반성하는 태도만이 신념을 가지고 선의 길을 더욱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선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우리가 그 이전까지 범한 죄악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패한 심성을 버리고 선한 심성을 취하는 개심(Sinnesänderung)은 (옛 사람의 죽음이며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희생인 것이며, 새로운 인간이 신의 아들의 심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즉 감성적 존재자로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도덕적 법정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새로운 심성에 있어서는, 즉 예지적 존재자로서는 신적인 심판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신적인 심판자 앞에서는 심성이 행위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이 때 그는 도덕적으로 다른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심성은 신의 아들의 순수성을 갖춤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인정받은 자로서 그들의 재판관 앞에 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어 구원이란 순수한 도덕적인 근본원리를 가장 성실하게 채용하는 방법 이외에는 전혀 불가능하다. 이러한 도덕 종교(moralische Religion)는 교리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준수하려는 심성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기적 신앙은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본래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의무의 명령이 오직 기적을 통하여 보증될 경우에만 그 권위가 인정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도덕적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럴 경우,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한 단순한 신앙이나 모방을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전적으로 물리쳐야 한다. 이성적 존재자는 이론적으로는 기적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지 않으나, 실천적으로는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2.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념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악의 위험에 빠지는 것은 홀로 있을 때보다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에 훨씬 더 일어나기 쉽다. 질투, 지배욕, 소유욕 및 그것과 결합된 경향성들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 혼자서는 자족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그의 본성을 습격한다. 이리하여 인간들은 서로서로 그들의 도덕적 소질을 타락시키고 서로를 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힘을 합쳐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 즉 지속적이고 확대되며 순수한 도덕성의 유지에 주력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개인이 악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선의 원리의 지배는 인간이 도덕 법칙을 따르고 또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의 건설과 확장을 통한 길 이외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인류 전체에게 부여된 과제이며 의무이다. 순수한 도덕 법칙 밑에 형성되는 이러한 인간들의 결합을 ‘윤리적 공동체’(ein ethisches gemeines Wesen)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덕의 법칙에 따르는 보편적 공화국으로서의 그러한 공동체의 이념은 모든 도덕 법칙들과는 전혀 다른 이념으로서,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지배할 수 있을지 여부를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의무는 그 종류와 원리에 있어서 모든 다른 의무들과 구별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의무가 또 하나의 다른 이념, 즉 보다 더 높은 도덕적 존재자의 이념을 전제하는 것을 요구하며, 이 존재자의 보편적 지배에 의하여 그 자체로서는 불충분한 개인들의 힘이 비로소 함께 작용하여 결합되는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는 바로 도덕적 세계 통치자로서의 신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공동체는 신의 명령 밑에 있는 백성, 즉 ‘신의 백성’(ein Volk Gottes)이면서 동시에 ‘덕의 법칙’(Tugendgesetzen)에 따르는 백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신적인 도덕 법칙 밑에 있는 윤리적 공동체는 교회이다. 교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의 직접적․도덕적 세계 통치 밑에 있는 모든 의로운 인간들의 연합체의 이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die unsichtbare Kirche)이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설립되어야 할 교회의 원형이 된다.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이상에 합치되는 전체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결합으로서 ‘눈에 보이는 교회’(die sichtbare Kirche)이다. 참된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인간을 통해서 이 지상에 이룩될 수 있는 신의 나라를 보여준다. 이러한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적 아버지 밑에 있는 가족 공동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3. 순수한 이성 신앙의 이념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종교 신앙(der reine Religionsglaube)은 참된 보편적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이다. 순수한 종교 신앙은 모든 인간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전파될 수 있는 순수한 이성 신앙(ein bloßer Vernunftglaube)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단순히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역사적 신앙(ein historischer Glaube)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형편에 따라 제약되는 신앙으로서, 그 영향력 또한 제한된다. 모든 종교는 신을 우리가 마땅히 존경해야 할 입법자로 간주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신에게 합당한 우리의 태도에 입각하여 규정할 때, 신이 어떻게 존경받기를 원하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신의 입법적 의지는 단순히 법규적인(bloß statutarische) 법칙을 통하여 명령하든가 또는 순수하게 도덕적인(rein moralische) 법칙들을 통하여 명령한다. 전자는 계시(Offenbarung)를 전제하는 단지 우연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타당할 수 없는 교회 신앙이요 역사적 신앙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그의 종교의 근거에 놓여 있는 신의 뜻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의지를 우리의 심정 속에 기록해 놓은 순수하게 도덕적인 입법은 모든 참된 종교의 필수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 종교를 본래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제도적인 종교는 오직 이 참된 종교를 촉진하고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의 (진정한) 종교’(Religion)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신앙’(Glaube)은 다양한 형태들이 존재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항상 ‘종교’라는 말의 의미를 자기가 익숙해 있는 자기 자신의 교회 신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내면적으로 숨어 있는 것이고, 도덕적 심성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떠어떠한 ‘종교’를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지나친 경의를 표명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종교’라는 말에 관하여 이해하는 것은 법규적인 교회 신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순수한 도덕 신앙만이 교회 신앙 안에서 본래적으로 종교적인 것을 형성하는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역사 신앙, 즉 교회 신앙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순수한 종교 신앙에 끊임없이 접근해가며 결국에는 이 수단을 버릴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러한 교회는 ‘참된’ 교회, 보편적 교회(die allgemeine Kirche)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신앙으로부터 이성 종교로, 그리고 지상에 있어서의 윤리적 국가로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원리가 보편적으로 어딘가에 ‘공적으로’(öffentlich)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덕의 법칙에 따르는 공동체로서의 인류 안에 힘을 일으키고, 악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며, 그의 세계 지배 밑에서 영원한 평화를 확보하는 왕국을 세우는 것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끊임없이 진전되는 선한 원리의 활동인 것이다.” V. 맺음말 칸트의 윤리학은 그의 인식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욕구와 경향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실천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감성계에 속하는 반면, 후자는 예지계에 속한다. 인간에게 있어 도덕은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이 두 세계 사이의 긴장, 갈등, 투쟁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덕 법칙은 인간 안의 예지계, 다시 말해서 신의 나라의 씨앗인 실천 이성이 세운 것으로서, 유한한 인간으로 하여금 전자를 극복하고 후자를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아가는 과정의 최종 지점은 인간의 의지와 도덕 법칙의 완전한 일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념일 뿐, 현세의 인간에게는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최고선의 실현을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실천 이성은 당연히 또한 도덕성에 걸맞는 행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예지계에 속한 도덕 법칙은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현상계와 관련된 행복까지 보장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 일치를 보장해줄 신의 현존이 요청된다. 이로써 하나의 도덕 신앙이 생겨난다. 칸트는 이제 이러한 도덕 신앙을 진정한 종교의 근본으로 생각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도덕적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준수하려는 심성 안에 있다. 이 때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신의 아들은 우리에게 이 지상에서 그를 뒤따를 수 있다는 희망의 표상이 된다. 한편, 사회적 삶을 통해서 쉽게 도덕적으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는 인간들에게 있어 순수한 도덕 법칙 밑에서 결합된 윤리적 공동체의 형성은 우리를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한 윤리적 공동체의 이념을 우리는 교회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다양한 모습의 역사적, 현실적 교회가 항상 본받아야 할 표상이 된다. 진정한 종교의 이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계시 신앙, 역사적 신앙에 대해 참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유일한 신앙은 순수한 도덕 신앙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교회 신앙은 항상 이 후자를 이념으로 삼아 참다운 보편적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는 신의 나라가 될 것이다. 본고는 지금까지 칸트 윤리학의 근본 성격을 검토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신 존재의 요청을 통해 도덕 종교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칸트의 윤리학과 종교철학이 동일한 이원론적 구도, 즉 현상계와 본체계, 감성적 자아와 예지적 자아, 우리 자신들과 완전한 도덕성을 지닌 신의 아들,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계시(역사) 신앙과 이성 신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노선은, 한편으로 그 이념이 강조될 때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거나 경건주의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과 종교의 본질에 입각한 일관된 노선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참된 도덕과 종교의 본질을 망각하고 늘 타락의 길을 걸어가기 쉬운 우리들에게, 언제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이념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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