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초월논리학에서 헤겔의 사변논리학으로*
―칸트 초기 저작에 나타난 변증법적 사유의 단초를 중심으로
박 진 전남대
1.머리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체계를 크게 인식의 요소들(직관, 개념, 이념)을 다루는 ‘초월적 요소론(transzendentale Elemen- tarlehre)’과 사유의 훈련, 규준, 건축술, 역사 등을 다루는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lehre)’으로 나누고, 요소론을 다시 크게 ‘초월적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요소론의 2부의 표제를 이루는 바, ‘초월논리학(trans- zendentale Logik)’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전통적인 일반논리학(allgemeine Logik) 내지 형식논리학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칸트는 비판에서 일반논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보의 후퇴도 없었고” “학의 안전한 길을 걸어와”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완성된 학문”(B VIII)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스스로 비판의 요소론의 2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초월논리학”(B 81)과 일반논리학은 어떤 내면적인 관계를 지니며, 또 초월논리학의 원리는 일반논리학의 원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무엇이 무엇에 선행하는 우위를 지니는가? 나아가 또한 독일 관념론의 전개사 속에서 칸트의 초월논리학과 헤겔의 사변논리학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칸트가 “초월철학의 정점”(B134 Anm.)으로 간주한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를 주어와 술어, 특수와 보편, 주관과 객관, 존재와 사유, 정신과 자연과 같은 이종적인 요소들의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이라는 “참된 사변적 이념(eine wahrhaft speculative Idee)”으로 해석함으로써 초월논리학의 이념 속에서 사변 논리로의 싹을 발견했던 헤겔(G. W. F. Hegel)은, 그럼에도 칸트가 이런 단초를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한 채 모순율에 기초한 추상적 사고를 다루는 형식 논리와 병렬시켜 다루고, 또한 형식논리학의 판단표로부터 범주를 도출해내는 등 형식논리학을 초월논리학의 준거점으로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형식 논리적 사유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헤겔은 이런 관점에서 “내용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주관성의 추상적 형식들만을 다룬다”고 칸트철학의 추상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외관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변논리학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예컨대 범주의 초월적 연역, 선험적 종합의 문제, 생산적 상상력에 의한 직관과 사유의 매개, 자의식의 근원적 종합 통일 등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핵심적인 주제와 문제 의식으로부터 헤겔은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이는 초월 논리와 사변 논리의 관계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주제들이다.
본고는 이와 같은 초월 논리와 사변 논리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앞서 우선 일반 논리와 초월 논리의 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후대의 칸트 해석자들 사이에도 상이한 시각 차이가 있어왔다. 그것은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칸트가 비판에서 양자의 관계를 단지 병렬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명확한 관계 해명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도 기인한 것이다. 페이톤(H. Paton)은 한 논문에서 양자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고 형식논리학이 초월논리학의 근거가 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헤겔과 페이톤의 평가는 칸트의 사유의 발전 과정 전체를 면밀히 숙고해볼 때 일면적인 해석이라고 보인다. 칸트의 전비판기 저작 속에서부터 나타나는 바, 일반논리학의 최고 원리인 모순율과 형식 논리적인 모순 개념에 대한 반성의 내용들을 고려해본다면, 칸트가 오랜 반성 끝에 비판 속에서 제시하는 초월논리학의 이념은 형식논리학에 의존하거나 병렬적인 또 하나의 논리학의 구상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숙고된 “논리학의 철학적 근거지음”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칸트는 이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들에 관한 새로운 해명(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1755)이라는 제하의 최초의 형이상학적 저술 속에서,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이 기초하고 있는 인식의 제1원리인 모순율(principium contradictionis)을 언급하는 자리에, 오히려 동일률을 모순율에 앞서는 모든 인식의 제1원리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독자적이고도 새로운 해명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들의 궁극적인 법칙(regula ultima veritatum)”으로 간주된 동일률이 비판에서 “모든 인간 인식의 최상 원칙”(B135)으로 간주된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리와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또한 전비판기 저술인 「부정적인 크기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려는 시도(Versuch den Begriff der negativen Größen in Weltweisheit einzuführen)」(1763)라는 논문에서는 모순율에 기초한 논리적 대립과 모순 없이 성립할 수 있는 실제적 대립(Realrepugnanz)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구분을 통해 우리는 칸트가 비판기에 이르러 수행한 분석-종합 판단의 구별이 행해지게 된 근본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비판의 반성 개념 장에서 수행된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의 싹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칸트의 실재적 대립(reale Opposition)의 개념 속에서 이후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계승된 변증법적 모순(Widerspruch) 개념의 원초적인 싹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칸트의 전비판기 사유를 되새겨봄으로써 이후 비판기의 저작 속에서 이성의 월권 행위로 규정한 당대의 강단 형이상학에 대해 제기한 칸트의 비판이 어떤 배경 하에서 성립하게 되었는지 그 단초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하의 논의를 통해 필자는 헤겔의 외면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상주의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이미 칸트의 전비판기 사유에서 엿보이는 형식 논리에 대한 반성적 문제 의식으로부터 그 내면적인 연관에서 헤겔의 사변 논리로 나아가는 중요한 실마리가 발견되고 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2.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칸트 연구자들 사이에 서로 상이한 견해 차이가 있어온 매우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요, 초월철학의 사활이 걸린 매우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의 구조를 전통 논리학의 구조와의 연관 속에서 간략히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구조가 대체로 ‘분석론(Analytik)’, ‘변증론(Dialektik)’, ‘장소론(Topik)’, ‘방법론’ 등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반논리학의 구성 부분들과 일치하는 점이 발견된다. 즉, 칸트도 ‘초월논리학’을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과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으로 구별하고 있고, 이때 전자를 다시 ‘개념의 분석론’과 ‘원칙의 분석론’으로 나누고, 이때 ‘개념의 분석론’에서는 지성의 순수 개념인 범주들의 발견과 연역을 다루고, ‘원칙의 분석론’은 ‘판단력의 교설(Doktrin der Urteilskraft)’이라고 불리는 바, 순수 직관과 순수 사고의 결합과 매개(도식 작용)에 의한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제 원칙들을 다루며, 변증론에서는 종래 영혼론에서 수행된 이성의 오류 추리(Paralogismus), 우주론의 이율배반(Antinomie)과 종래 신학에서 수행된 신존재 증명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전통 논리학의 체계가 개념, 판단, 추리의 순서로 이뤄지고 있음을 볼 때 형식적인 구조에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면모도 발견된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칸트가 논리학에 앞서 질료(Materie) 내지 대상(Gegenstand)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수용적 직관의 기능을 다루는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을 그의 초월철학의 체계에 필수적인 중요한 것으로서 독립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념적 사고 내지 추리의 형식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칸트는 초월논리학의 ‘분석론’에서 개념과 전혀 이질적인 감성적 직관의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오히려 논리적 사고에 앞서 순수 수용성의 조건인 시간(Zeit)을 순수 사고의 선험적 질료(Materie)(B 102)로서 전제하고 있으며, 참된 대상(현상)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상상력의 매개에 의한 범주의 시간화, 즉 도식 작용(Schematismus)을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적 반성 속에서 수행되는 칸트의 초월논리학이 전통적인 형식논리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적인 논리학이 삼단논법적인 추리(syllogismos)를 중요시하여 그 형식들을 격(格)과 식(式)으로 세분하여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칸트는 ‘변증론’에서 일반논리학에 기초한 전통 형이상학의 “오류 추리들(Paralogismen)”을 사변적 이성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관심 속에서 단지 소극적, 비판적인 태도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칸트에게서 ‘변증론(Dialektik)’이란 명칭은 플라톤의 ‘변증술(dialektike)’이나 헤겔의 변증법(Dialektik)과 달리 참된 실재를 발견하기 위한 적극적인 “진리[眞像. idea]의 논리학(Logik der Wahrheit)”(B 87)이 아니라 단지 종래의 독단적 합리론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한 소극적인 “가상(假像)의 논리학(Logik des Scheins)”(B 86)일 뿐이다.
이렇듯 개념, 판단, 추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형식논리학과 일치하는 칸트의 초월논리학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구별되는 중요한 문제 의식은 ‘분석론’에서나 ‘변증론’에서도 공히 대상 관련적 질료적인 인식의 문제가 주제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분석론’의 주된 과제는 단지 개념이나 판단의 형식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나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내용을 지닌 대상[眞像]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해명에 있다. ‘변증론’의 과제는 한갓 올바른 추론의 규칙이나 형식상의 오류를 해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내용의 대상[假像] 인식이 생겨나는 원천을 드러내어 밝혀줌으로써 이성의 본성상 생겨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데 있고(B XXXI), 이렇듯 경험의 한계 너머로까지 이념의 구성적 사용을 감행했던 사변 이성에 가한 “소극적인 사용의 제한”은 또한 이념의 통제적-발견적 사용에 의한 경험의 내용적 인식들의 체계적인 통일을 가능케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실천적(도덕적) 사용”에 의해 초감성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는 이성의 본래적 목적의 실현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B XXV).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칸트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반논리학을 “완성된 학”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사고의 형식적 규칙들”(B IX)에 관한 학이라는 “제한된 한계 규정” 아래서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에 의하면 일반논리학은 대상 관련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준도 제시해줄 수 없다. “일반논리학은 지성적 인식의 모든 내용과 그 대상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사고의 순 형식만을 다룬다”(B 78). 칸트가 보기에 일반논리학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오직 이런 “논리학 자체의 제한성 덕분이었다”(B IX).
즉, 형식논리학은 사고와 추론 형식을 다루는데, 예컨대 삼단논법의 형식들 가운데 AAA식(式)의 1격(格)의 추론 형식(‘모든 A는 C다.’ ‘모든 B는 A다.’ 따라서 ‘모든 B는 C다.’)의 경우, 여기서 A, B, C는 모두 ‘변항’으로 어떤 임의의 개념 또는 대상들의 집합도 대입시킬 수 있고, 이때 이런 개념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또 각 개념이 대상들에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도외시되고 있다. 따라서 형식논리학은 지성의 사고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한, 제한된 범위 안의 확실성을 지닐 수는 있지만, 인식의 실질적인 내용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도외시한, 한갓 추상적인 기호들의 유희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미 초기 사유 속에서도 이런 일반논리학에 기초한 당대의 합리론적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식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 관련적인 형이상학의 방법으로서의 새로운 논리학, 다시 말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B 80) 실질적인 논리학으로서 “초월논리학”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한갓 사유의 규준(Kanon)일 뿐인 일반논리학을 존재자 산출의 기관(Organ)으로 오용했던 종래 형이상학의 오류를 폭로하는 초월논리학의 <변증론> 부분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B 86)으로 “가상(假像)의 논리학(Logik des Scheins)”(B 86)이라고 불렀고 이는 비판의 소극적인 내용을 이룬다. 칸트는 이를 “초자연적으로 사용된 지성과 이성의 비판”(B 88)이라고도 불렀다. 이에 반해 초월적 반성에 기초한 <분석론>까지의 성과를 “진리[眞像]의 논리학(Logik der Wahrheit)”(B 87)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감성론>과 더불어 비판의 적극적인 내용을 이룬다. 우리는 칸트의 이런 적극적인 성과를 한갓 모순율에 기초한 논리적 반성으로부터 존재자의 인식으로 비약하고자 했던 종래의 독단적인 존재론과 구별하기 위해 “비판적 존재론(kritische Ontologi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대결 의식은 아직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변 형이상학의 영향 속에 놓여 있었던 전비판기의 사유 속에서도 이미 그 싹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미 칸트의 전비판기 저작들 속에서 나타나는 논리학의 원리들에 대한 칸트의 반성을 되돌아봄으로써 한갓 형식적인 사고의 규준(Kanon)일 뿐인 일반논리학과 구별하여, “초월논리학”의 이념―즉 내용적인 대상 관련적 “진리[眞像]의 논리학”과 더불어 거짓된 대상[Schein] 인식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혀주는 “가상(假像)의 논리학”도 포함하는―을 비판에서 제시하게 되는 역사적인 배경과 그 단초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이후 비판에서 이성의 월권 행위로 규정한 당대의 강단 형이상학에 대해 제기한 날카로운 비판이 어떤 배경 하에서 성립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추적해보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오랜 전통 속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논리학뿐만 아니라 존재론의 제1원리로서의 자격이 인정되어온 모순율이, 칸트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지 분석적 인식의 원리로서 형식 논리적인 차원에만 그 타당성이 제한되는 철학사적 연원을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고찰을 통해 필자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말해 모순율에 기초한 일반논리학과 종래의 독단적인 존재론과의 연관을 밝히고, 나아가 통각의 통일 원리에 기초한 초월논리학과 칸트의 비판적 존재론과의 내면적인 연관을 해명하고자 한다.
3.일반논리학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초월논리학
1)모순율
우리는 이런 칸트의 비판적 사고가 형성되는 단초를 살펴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논리학의 제1원리로 간주되어온 모순율에 대한 초기 칸트의 반성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비판기 이전의 저작에서부터 나타나는 칸트의 문제 의식은 모순율로부터 형이상학의 전체계를 도출하고자 했던 라이프니츠-볼프로 대변되는 당대 합리론적 형이상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 즉 존재론(Ontologia)과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을 구별함으로써 칸트의 형이상학 체계 구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볼프(Chr. Wolff)는 데카르트 이래 근대 합리론의 전통에 서서, 이성에 의한 명석․판명한 사유만이 형이상학적 인식의 토대여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18세기 독일 강단철학에서 형이상학은 필연적으로 논리학과의 밀접한 연관을 지니게 되며 모순율에 기초한 순수 사유 가능성으로부터 형이상학의 전체계가 도출되게 된다.
크리스찬 볼프의 존재론(Ontolagia) 제1부는 “존재자 일반의 개념에 관하여(De notione entis in genere)”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런 표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술은 존재자(ens) 내지 존재에 대한 서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의 제1원리인 “모순율(pricipium contradictionis)”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모순율은 볼프 형이상학의 제1원리며, 그는 이로부터 동일률, 근거율 등의 제 원리들은 물론 형이상학의 전체계를 도출해낸다. 그러나 이렇듯 모순율을 존재론의 제1원리로 삼은 것은 그의 사고의 독창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가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논리적 성격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함축을 또한 지니고 있었던 모순율이 존재론적 원리로서의 그 타당성을 상실하고 단지 “분석적 판단의 원리”로서 진리 인식의 “소극적 기준”(B 190)으로만 타당성이 제한되게 된 데는 칸트의 비판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도대체 칸트가 어떤 이유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지 그 배후 근거를 살펴보는 데 있다. 이는 또한 그가 이후 비판기 저작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을 추적해보는 과제이기도 하다.
볼프의 형이상학적 사고가 모순율을 제1원리로 삼는 한,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존재자 자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이성의 무모순적 사고 가능성으로 향한다. 이러한 그의 지향은 최초의 형이상학적 저술인 신․세계․인간의 영혼 및 모든 사물 일반에 관한 이성적 사고들(Vernünftigen Gedanken von Gott, der Welt, der Seele des Menschen, auch von allen Dingen überhaupt)(1720)을 비롯하여 동일하게 “이성적 사고들”이라는 표제가 붙은 일련의 저술들을 통해서 드러나며, 이렇게 인식론적으로 정향된 볼프학파의 전통은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포함하는 학문(scientia prima cognitionis humanae principia continens)이라는 바움가르텐의 형이상학 정의나, 또한 앞서 언급한 칸트의 최초의 형이상학적 저술의 표제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들에 대한 새로운 해명(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1755)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아직 강단 스콜라철학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칸트의 초기 사고에서도, 모순율을 모든 진리의 “유일하게 절대적인 제1의 보편적 원리(principium Unicum, absolute primum, catholum)”로서 간주하는 당시의 견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칸트는 한갓 논리적인 사고 가능성으로부터 존재론의 전체계를 이끌어낸 종래 합리론이 기초했던 바, 모순율이 과연 모든 진리의 시금석(Probierstein)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impossibile est, idem simul esse ac non esse)>고 정식화되는 모순율은 사실상 단지 불가능한 것(das Unmögliche)의 정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자기 모순되는 것, 다시 말해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이런 설명, 즉 이 시금석에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냐 하면 모든 진리가 그 반대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확증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진리임을 승인하기 위해 그 자체로 충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반대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진리의 주장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가 거짓인 것은 무엇이든 참이다(cuiuscunque oppositum est falsum, illud est verum)”와 같은 명제를 매개로 해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명제는 긍정적인 명제며, 결코 모순율과 같은 부정적인 명제로부터 직접 추론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부정 명제로부터 단지 부정 명제만이 직접 추론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부정 명제로부터 긍정 명제가 간접적으로 추론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그 반대가 거짓인 모든 명제는 참이다”와 같은 긍정 명제를 매개로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 명제는 한갓 부정적인 원리로부터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명제인 모순율에 진리 영역에서 제1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도대체 부정적인 진리가 왜 긍정적인 진리에 앞서는 우위를 지녀야 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진리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진리도 포함하는 모든 진리에 대한 제1의 보편적 원리는 무엇인가? 즉, “모든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최상의 보편적 원리라는 이름을 스스로 요구하는 명제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동일성의 이중 명제(principium identitatis geminum) 속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이와 같은 것을 본다. 왜냐 하면 모든 긍정 표현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은 언표(vocula) ‘ist’며, 부정 표현 중 가장 단순한 것은 언표 ‘ist nicht’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한 개념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왜냐 하면 합성된 것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빛을 얻으며 단순한 것 보다 더 규정된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긍정적 진리와 부정적 진리라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는 한, 모든 진리의 절대적인 제1원리(principia absolute prima)는 두 명제로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보고, 그것을 칸트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quicquid est, est)”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quicquid non est, non est)”는 두 정식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동일률(principium identitatis)”이라고 부른다. 이제 칸트는 이렇듯 최초의 절대적 원리로서 확립된 동일률이 진리의 서열상 종래의 모순율에 앞서는 우위를 지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2)동일률
(1)동일성과 무모순성
칸트는 이렇게 제1의 지위를 부여한 동일률에 대해 독자적인 새로운 해명을 시도한다. 즉, 그는 동일률을 한갓 A=A와 같은 동어 반복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그 자체로(in se)” 고찰되건 또는 “결합에서(in nexu)” 고찰되건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일치(convenientia notiorum subjecti et praedicati)로서 해명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주어가 그 자체로(in se) 고찰되건 또는 결합에서(in nexu) 고찰되건 술어 개념을 포함하는 것을 정립하거나 또는 술어 개념에 의해 배제(excludere)되는 것을 배제할 때는, 항상 술어가 주어에 귀속한다고 말하며, 이를 좀더 분명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즉,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 사이에 동일성(identitas)이 발견되면 명제는 참이다. 이를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1원리에 이른다.”
즉, 하나의 명제 내지 판단의 진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립된 개념이 술어로서 주어와 결합됨을 긍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개념의 반대가 동일 주어와 결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배제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정립된 술어와 모순되는 술어를 배제함이 바로 모순율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동일률은 모순율에 앞서, 모순율을 자체에 매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동일률은 모든 명제와 판단의 진리가 그에 기초하는 진리들의 궁극적인 법칙(regula ultima veritatum)이며, 모든 주어와 술어의 참된 결합 가능성이 그에 기초하는 원리다.
우리는 여기서 동일률에 관한 칸트의 해명을 전통적인 판단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판단이란 개념들의 결합으로 간주되어 왔다. 즉, 그것은 술어를 주어와 결합(synthesis) 또는 분리(diairesis)하는 지성의 활동이며, 긍정(kataphasis) 또는 부정(apophasis)하는 활동이다. 판단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지성의 기능인 판단(iudicium)은 결합(compositio)하고 분리(divisio)하며 긍정(affirmatio)하고 부정(negatio)하는 활동으로 간주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판단은 표상들의 관계다. 즉, 두 표상들의 관계가 비교되어 동일한 것으로 결합될 때 긍정 판단이 성립하며, 두 개념이 비교되어 모순된 것으로 분리될 때는 부정 판단이 성립한다. 따라서 긍정 판단의 계사 “ist”는 주어와 술어의 결합을 표시하며 부정 판단의 계사 “ist nicht”는 주어와 술어의 분리를 표시한다.
여기서 문제는 표상들의 비교의 기준인 동일성(identitas)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데 있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그것이 주어 개념 속에 술어 개념이 내포됨(inclusio)을 뜻한다. 즉, 모든 참된 긍정 판단의 술어는 주어 개념 속에 이미 있는(in esse) 징표들을 이끌어낸 것이며 따라서 술어와 주어와의 동일성이 인정되며 술어는 주어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정 판단의 술어는 주어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지 않았던 징표며, 따라서 그것이 주어에 의해 배제되는 데서 판단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부정 판단은 술어가 주어에 속하지 않고 주어와 모순되는 것으로 분리됨을 표현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판단 이론은 모든 참된 긍정 판단의 술어가 주어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내포 이론”이다.
“우리가 한 술어에 대해 그것이 한 일정한 주어에 참으로 속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숙고해보아야 한다. ……만일 한 명제가 동일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잠재적으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철학자들은 술어가 주어 속에 있다(est dans)는 것을 내존재(in-esse)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내포적인 판단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부시킨다. “모든 참된 명제는 증명될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술어가 주어에 내재할 때 혹은 술어 개념이 완전히 인식된 주어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주어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분해함으로써 명제의 진리는 증명될 수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참된 판단은 동일성[무모순성]에 기초한 분석 판단이다. “모든 긍정적인 참된 언표에 있어― 그것이 필연적이건 우연적이건, 보편적이건 특수한 것이건 간에―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포함되어 있다(praedicatum inest subjecto).” 그러므로 동일성은 필연적인 이성의 진리들(vérités de raison)뿐만 아니라 우연적인 사실적 진리들(vérités de fait)에서도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명시적으로 표상된다면, 후자의 경우 잠재적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원리적인 가능성에서는 역시 동일성 명제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인간적인 인식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경험에 앞서 예컨대 케사르의 완전한 개념을 소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주어 개념으로부터 모든 술어를 이끌어낼 수 없지만, 신의 무한한 인식에서는 이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참된 인식을 궁극적으로 동일성으로 소급시키고 있는데 이는 모든 판단이 결국 주어 개념 속에 내포된 술어를 이끌어내는 분석 판단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판단 이론으로부터 창이 없는 단순 실체(substantia simplex)로서의 형이상학적 단자(monad) 개념이 생겨난다. 즉, 모든 판단이 단지 주어 개념에 내재된 징표들의 진술이듯이, 모든 개체의 상태는 단순 실체인 단자의 자기 표현일 뿐이다.
이제 라이프니츠의 판단론과 동일성 개념의 특징을 칸트와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라이프니츠에게서 모든 판단은 단지 주어 개념의 분해에 의해 성립하는 분석 판단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 진리 기준인 동일률은 어떤 주어에도 자신과 모순되는 술어는 속하지 않는다”는 모순율과 일치한다. 그러나 칸트에게서는 모든 판단이 분석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에서, 모든 참된 판단의 원리인 동일률은 단지 분석 판단의 원리인 모순율의 배면[무모순성 원리]으로만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동일률을 분석 판단뿐만 아니라 종합 판단까지 포함하는 진리 인식의 최고 원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칸트 자신이 명확히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서 그가 동일률을 주어와 술어의 일치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곳에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어가 그 자체로(in se)” 고찰될 때 분석 판단이 성립한다면, “주어가 [직관되는 것과] 결합에서(in nexu)” 고찰될 때 종합 판단이 성립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이데거(M. Heidegger)가 지적했듯이 칸트가 비판 속에서는 동일률을 따로 다루지 않고 분석 판단의 최상 원칙인 모순율(A≠-A)의 긍정적 정식화(A=A) 정도로 이해하여 분석 판단의 최상 원리인 모순율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예들(B 10, B 193 참조)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칸트에게서 동일성 원리는 형식 논리적 차원에서 분석 판단의 최고 원리인 모순율을 자체에 매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대상 관련적인 모든 종합 판단의 최고 원리로서 새롭게 해석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통각의 통일 원리도 분석 판단의 근거인 분석적 통일의 기능과 함께 종합 판단의 근거인 종합적 통일의 기능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고, 이때 전자는 후자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따라서 후자를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켜볼 필요가 있다.
칸트의 초월적 반성 속에서 수행된 이와 같은 동일성 개념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피히트(G. Picht)는 이런 변화가 지닌 철학사적인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이라는 “두 종류의 판단의 구분이 칸트의 전철학의 근저에 놓인 근본적인 구별이라고 한다면, 동일성의 두 상이한 모습이 중심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동일성의 두 상이한 형식(zwei verschiedene Formen der Identität)의 구별이 칸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칸트가 철학을 새롭게 정초한 초월적 전회(transzendentale Wendung)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가 자신의 철학 속에서 실현한 ‘사고 방식의 혁명’(B XIV)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전통 철학이 모순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칸트가 이런 전승된 판단과 생각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이해했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선행적인 이해에 의해 비로소 칸트가 분석-종합 판단의 구별을 통해 수행했던 정신적인 진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동일률을 이런 연관 속에서 이해한다면 “동일률은 초월성(Transzendentalität)의 최고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선험적 종합 판단의 최상 원칙 속에서 정식화되고 있는 바, 한편으로는 직관 형식과 사고 형식의 동일성(Identität)(즉,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의 정립이자 다른 한편 대상 형식의 동일성(경험 대상의 가능 조건)의 정립(Setzung)이다.”
우리는 1755년에 출간된 초기 형이상학적 저술 새로운 해명(Nova dilucidatio) 속에서 엿보이는 청년 칸트의 논리학의 원리에 대한 이와 같은 반성 속에서 이후 헤겔이 논리의 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수행한 반성의 결과와 사태 내용상 연결될 수 있다는 새로운 철학사적인 통찰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수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연구 과제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칸트의 사고 전개 과정 속에서 이런 칸트 초기 사고 속에서 나타난 동일률에 대한 반성이 이후 비판기에 정식화된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와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에 대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2)동일성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종합 판단의 최상 원칙으로 간주하고 있는 통각에 의한 다양의 종합 통일 원리는, 달리 말해 다양한 표상들을 결합함에서 “자기 의식의 일관된 동일성(durchgängige Identität des Selbstbewußtsein)”(B 135)이라고도 말해지고 있고, 이런 통각의 통일 원리를 칸트는 “전인간 인식의 최상 원칙(der oberste Grundsatz)”(B 135)이라고도 부른다. 즉, “통각의 종합 통일은 모든 지성 사용이 또한 전논리학이 나아가 초월철학조차도 그에 결부되어야 하는 최고 정점”(B 134 Anm.)이다. 이는 칸트가 “새로운 해명”에서 동일률에 부여한 명칭, 즉 “모든 진리의 유일하게 절대적인 제1의 보편적 원리”라는 호칭과 비견될 만하다. 그렇다면 동일률과 통각의 통일 원리 이 양자의 연관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앞서 동일률의 두 측면을 구별했다. 분석 판단에서 성립하는 동일성과 종합 판단에서 성립하는 동일성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일반논리학에서 다루는 무모순적 사고로서,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통각의 분석적 통일(analytische Einheit)(B 105)에 기초한 동일성이며, 후자는 초월논리학에서 다루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synthetische Einheit)에 기초한 동일성이다.
칸트는 한갓 개념들의 관계 비교로부터 “구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principium identitatis indiscernibilium)”(B 337)를 이끌어냈던 라이프니츠-볼프의 형이상학을 “(개념이 자기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개념의 논리적 가능성을 (개념에 대상이 대응함을 근거로 하는) 사물의 실재 가능성으로 바꿔치는 사기”(B 302)라고 비판한다. 왜냐 하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비록 개념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감성적 직관의 형식인 시간․공간상의 차이를 지니며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갓 개념들의 관계를 비교․반성․추상하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에 근거한 동일성은 내용[직관]적인 차이를 배제하는 추상적 동일성인 데 반해, 상상력의 종합을 매개로 직관적인 내용을 포착․재생․인지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근거한 동일성은 내용적인 차이를 배제하지 않는 구체적인 동일성이다. 즉, 전자가 한갓 개념들간의 관계(결합과 분리)에서 성립하는 형식 논리적 동일성[무모순성]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념과 직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대상 관련적 초월론적 동일성[대상성]이다.
이러한 통각의 종합 통일 활동은 감성적인 직관에 주어지는 다양한 표상들(술어들)을 모아 한 주어에 묶어줌(종합 판단)으로써, 상이한 징표들을 갖는 한 대상의 동일성(대상성)을 정립한다. 이렇듯 다양을 결합하는 활동성(Ich verbinde)에 의해 비로소 주관의 동일성(Identität)이 의식된다. 즉, 다양을 결합하여 한 대상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 통일(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B 135)에 의해 자의식의 일관된 동일성(durchgängige Identität)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이한 경험적 의식이 하나의 유일한 자기 의식 속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종합 명제는 우리의 사고 일반의 단적으로 최초의 종합적 원칙(der schlechthin erste und synthetische Grundsatz)이다”(A 117 Anm.) 이렇듯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직관의 다양[시간․공간 표상]의 종합적 통일은 나의 모든 일정한 사고에 앞서는 통각 자체의 동일성의 근거다”(B 134). 즉, ‘나는 나다’와 같은 공허한 분석적 동일성 명제는 다양을 결합하는 일관된 자의식[종합적 동일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우리의 인식 능력은 판단과 추론을 수행함에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동일률을 따르게 마련이다. 왜냐 하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그것이 분석적 인식이건 종합적 인식이건 선험적이건 경험적이건 간에―다양한 표상들을 결합하고 분리하는 데에 자의식의 동일성을 기초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분석 판단의 경우 우리는 주어 개념 속에 내포된 징표를 분석하여 그것을 술어 개념과 비교함으로써 “주어 개념의 내포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일치할 때” 주어와 술어가 동일함을 정립[긍정]하고, 어긋날 때는 이를 배제[부정]한다. 이런 긍정과 부정은 통각의 분석적 통일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종합 판단에서는 한갓 개념들의 관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가 문제된다. 즉,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연관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태적 연관과 과연 일치하는지가 문제다. 따라서 긍정 종합 판단에서는 한갓 주어와 동일한 술어가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와 동일한 술어가 정립된다. 즉, “종합 판단에서는 [주어와의] 동일성 때문에 술어가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일치하는] 술어 때문에 동일성을 표상한다.”
예컨대 “이 물체는 무겁다” 같은 경험적 종합 판단에서, 언표 “이다”는 ‘무거움’이라는 술어 규정이 문장의 주어를 넘어 나에게 나타난 대상 자체의 성질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판단의 논리적 구조(S-P)와 현상 사물의 존재 구조(실체-속성)의 일치[동일성]를 가능케 해주는 근거가 “초월적 주관(transz. Subjekt)”(B 404)의 근원적 종합 통일의 활동이다. 따라서 언표 ‘이다’는 Logos의 근원적 활동성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표상들을 결합하는 활동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산출하는 ‘Ich denke’는 판단의 기능 속에서 모든 술어들의 담지자인 주어(subjectum)의 기능으로 대변되며, 또한 현상의 구조에서는 다양한 성질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일적으로 지속하는 기체(hypokeimenon)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판단에서 술어들의 근저에 놓인 주어(Subjekt)는 실재에서 우유들의 근저에 놓인 실체(Substanz)와 유비적으로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Ent-Sprechen)은 “양자의 근저에 놓인 근원적으로 사고하고 언표하는 자아(das beide zugrundeliegende denkende und sprechende Ich)”가 판단의 주어에 술어들을 정초하고 통일하는 기능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연적인 성질들의 근거줌과 통일의 과제를 실체적인 대상에 위임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속에 투입(hineinlegen)했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며, “사물에 관해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
칸트의 초월적 반성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반성의 심화 과정이 독일 관념론의 전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피히테는 학문론의 제1원리 속에서 칸트가 남겨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분리를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으로 일원적으로 파악한다.
“자아(das Ich)에 의한 자아의 정립은 자아의 순수 활동성(reine Tätigkeit)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을 정립한다(Das Ich setze sich selbst) 그리고 나는 이런 한갓된 나 자신에 의한 정립에 의해 존재한다.”
피히테에게서는 A=A라는 동일률이 공허한 동어 반복이 아니라 사유(Denken)와 존재(Sein)의 동일성, 다시 말해, 사유하고 정립하는 자아와 정립된 현실적 자아의 동일성(Ich bin Ich)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지니며 모든 학문 이론의 근본 원리가 된다. 그러나 피히테는 절대적 원리를 활동하는 자아에서 찾음으로써, 칸트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분리를 실천적 자아 안에 통일시킴에 그쳤다.
셸링의 과제는 피히테가 자립성을 박탈한 자연 내지 비아의 자립성을 확보하면서 자아와 자연을 체계 안에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피히테의 이른바 주관적 관념론은 자연을 단지 주관의 자유로운 활동의 부산물로 간주한 채, “자아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일면적이라고 비판된다.
“‘활동성과 생과 자유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관적 관념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적인 것(자연, 사물의 세계)도 활동성과 생과 자유를 근거로 갖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는 피히테의 표현을 빌면 오직 자아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것이 자아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셸링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지양함으로써 자연과 정신을 동일한 자유의 원리에 의해 근거 지우려 시도한다. 절대자를 자연 안에 내재하는 생산적인 힘(natura naturans)에서 찾고자 했던 자연철학의 시기와 더 나아가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동일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동일 철학으로의 전개 과정은 자유의 원리를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 시도요, “자유”라는 궁극적인 원리에 의해 자연과 정신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연철학과 동일 철학의 시기에 이르러는, 자아만이 절대자요 자유인 것이 아니라 자연과 자아, 양자 모두 동일하게 절대적인 주체요 자유라고 간주된다. 그런 한에서 자연은 말하자면 아직 깨어나지 못한 정신이요, 정신은 깨어나 스스로를 의식한 자연이다.
“자연(Natur)은 가시적인 정신(der sichtbare Geist)이요, 정신(Geist)은 비가시적인 자연(unsichtbare Natur)이어야 한다. 우리 안의 정신과 우리 밖의 자연의 절대적인 동일성(die absolute Identität) 안에서 우리 밖의 자연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해소되어야 한다.”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말해지는 자연은 기계적인 필연성이 지배하는 죽은 자연이 아니라 자유를 원리로 하는 생동하는 자연이다. 따라서 자연과 자아 양자의 궁극적인 근거는 동일한 절대자요 자유다. 이로써 셸링은 동일성의 체계를 성립시키는 하나의 원리, 즉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의 무차별적 동일성의 원리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런 사유의 전개에서 셸링의 일관된 문제 의식은 자아와 자연 모든 것을 꿰뚫는 동일한 원리인 “절대자(das Absolute)”와 “자유(Freiheit)”에 대한 추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셸링의 절대자는 이른바 “그 속에서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과 같이 모든 차별과 유한성의 피안에 놓인 “무차별적 동일성”으로서의 ‘절대자’라는 점에서, 즉 유한자를 배제한 무한자라는 점에서 참된 절대자가 아니라고 부정된다.
헤겔의 ‘자유’로서의 ‘정신’ 개념은 칸트의 ‘통각 원리’를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의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이라는 “참된 사변적 이념(eine wahrhaft speculative Idee)”으로 해석함으로써 셸링의 이른바 모든 차별과 유한성의 피안에 놓인 무차별적 동일성으로서의 ‘절대자’를 차별을 자기 안에 내포하며 동일성을 정립하는 절대자로 반성 속에서 지양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의 정신 개념은 피히테의 일면적 ‘자아’와 셸링의 추상적인 ‘절대자’를 넘어서 스스로 유한한 대립을 산출하여 이를 극복하고 스스로 발전적으로 전개해나가는 살아 있는 주체이자 진정한 무한자로 반성 속에서 지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3)근거율
종래 형이상학은 철저히 형식 논리적인 반성에 기초해 있고 그 원리는 모순율이다. 그러나 모순율은 단지 개념의 분석을 통해 성립하는 분석 판단의 원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실재 가능성과 실재적 결합의 원리는 무엇인가?
라이프니츠와 볼프에게서 이런 실재적 결합의 원리는 충족이유율(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볼프는 이 원리를 또한 그의 존재론의 최상 원칙인 모순율로부터 도출해낸다. 이렇듯 논리적 연관으로부터 존재론적 사태 연관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이미 라이프니츠에게서도 그 싹을 엿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참된 명제는 주어 개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던 술어 개념을 이끌어내는 분석 판단이라는 판단론으로부터, 이런 논리적인 이유(주어)-귀결(술어) 관계를 사태 일반에 적용시켜, 존재론적인 근거(실체)-귀결(우유)의 관계를 도출해낸다. 즉, 예컨대 “‘아담’이라는 개별자의 개념에는 그때그때 그에게 일어나게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내가 말할 때, 이는 술어가 주어 안에 내재함(praedicatum inest subjecto)이 참되다고 모든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실적인 실체와 우유의 관계가 논리적인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부터 이해되어 “in esse”로 규정된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사물의 현존과 생성의 원리였던 충족이유율은 볼프에게 와서 “인간 정신과 통찰의 원리”로서 보다 강한 인식론적 지향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모순율처럼 보편적 원리로 간주되는 이 원리는 실체와 우유의 관계에는 물론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즉, 모든 우유들의 근거는 사물의 본질적 구성 요소들(essentialia) 안에 있고, 모든 생성하는 것들의 근거는 원인 속에 있다. 따라서,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nihil est sine ratione).”
라이프니츠를 위시한 이성주의자들은 사물의 현존과 생성의 원리를 단지 형식 논리적인 반성 틀인 모순율로부터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전비판기의 부정적 크기의 개념에 관한 저술에서부터 시작하여 칸트가 이 주제에 접근하는 고유한 문제 의식은 한갓 논리적으로 자기 모순적인 것(nihil negativum)으로서의 절대 무(無)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적극적인 사태 구성 요소로서 실재적인 대립(reale Entgegensetzung)이다. 즉, 칸트는 여기서 대립(oppositio)이라는 말의 두 의미를 구별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대립한다(einander entgegensetzen) 함은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정립된 것을 지양한다(Aufheben)는 것이다. 이런 대립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모순에 의한 논리적인 것이거나 모순 없는 실재적인 것이다.”
Hegel이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모순’과 이러한 ‘실재적 대립’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Hegel의 변증법적 ‘지양(Aufheben)’ 개념의 원초적인 싹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립된 것들은 동일한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관계를 맺거나, 대립되어 지양되거나, 서로 무관심한 한에서 모순(Widerspruch)을 포함한다.”
칸트에 의하면 모순, 즉 논리적인 대립(logische Opposition)이란 동일한 주어에 대해 어떤 것이 동시에 긍정되고 부정되는 경우며, 이런 논리적 결합의 결과는 전적으로 무다. 즉, 생각할 수조차 없다. 예컨대, 우리는 “한 사람이 걷는다”는 사태나 “한 사람이 걷지 않는다”는 사태를 각각 어떤 것(etwas)으로서 생각 속에 정립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움직이며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태는 표상할 수조차 없으며, 따라서 전혀 있을 수 없는 것, 말하자면 절대 무(無. nihil absolutum)다. 이는 동일한 주어에 모순되는 두 술어를 정립할 수 없다는 모순율에 기초하는 대립이요, 이로부터 생겨나는 무다. 그러나 실재적 대립(reale Opposition)은 서로 상반되는 두 술어가 한 사물에 대해 정립되지만 그러나 결코 모순적이지는 않는 경우며, 이런 실재적 결합의 결과는 무가 아니라 어떤 것(etwas)이다. 예컨대 한 물체 속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힘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힘이 서로 대립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상반되는 술어 규정은 모순적인 것은 아니며, 이런 실재적 결합(nexus realis)의 결과는 무가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정지(Ruhe)다. 물론, 정지란 운동의 결여(privatio)로서 일종의 무(nihil privativum)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절대 무인 자기 모순적인 것(nihil negativum)과는 구별되며, 또한 단지 생각할 수만 있는 공허한 개념(ens rationis)(B 347)과 구별된다. 즉, 그것은 우리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내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실질적인 어떤 것(etwas)이다. 칸트는 이런 실재적 대립의 관계(Realrepugnanz)를 수학에서 양수(+)와 음수(-)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실재적 대립은 모순율에 근거하는 형식 논리에서의 논리적 대립에서처럼 하나의 정립과 다른 하나의 정립을 함께 생각할 수조차 없는,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성립할 수 없는 모순 관계가 아니라, 하나와 다른 하나의 결합(nexus)이 가능한 따라서 상호 영향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대립이기 때문에 이런 실재적 대립의 결과는 단적인 무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로서 어떤 것, 실재적인 것일 수 있다. 이는 수학에서 “+3”과 “-3”의 합으로서의 “0”이 절대적인 무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인 것과 같다. 이는 물리학에서 하나의 힘(Kraft)과 반대되는 힘(Gegenkraft)의 통일이 “정지”인 것과 마찬가지며, 심리학에서 쾌와 불쾌의 감정을 지양한 것이 “무관심적 만족”으로 표상되는 것과 같다.
칸트가 「부정적 크기의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려는 시도(Versuch den Begriff der negativen Größen in Weltweisheit einzuführen)」(1763)라는 전비판기 저작 이래, 순수이성비판의 <반성 개념>장에 이르기까지 라이프니츠-볼프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앞서 보았듯이 수학적 사태에서나 물리적 현상 및 심리적 현상에서 공히 나타나는 실재적 상충(Realrepugnanz)을 논리적 모순과 명확히 구별지으려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해 한갓 모순율에 기초한 분석 판단과 경험에―그것이 현실적 경험이건 가능한 경험이건 ―기초하는 종합 판단의 구별과도 일치한다.
즉, 칸트는 단지 논리적 이유귀결의 관계로부터 가상체(noumena)로서의 실체우유의 관계는 물론 원인결과의 관계도 이끌어내는 종래의 독단적 형이상학에 맞서, 근거율의 타당한 적용 범위를 실재적 저항 관계 속에서 경험적으로 마주치는 사태들(phaenomena)로 제한한다. 이런 실재적 대립 관계는 개념들의 분석을 통해서는 더 이상 명확히 할 수 없는 실재적인 것(realitas phenomenon), 어떤 적극적인 것이다. 때문에 칸트는 경험의 유추(Analogie des Erfahrung) 원리들 가운데 두 번째인 원인성의 원리(B 232)를 단지 시간적으로 계기하는 현상들에만 그 타당한 사용의 한계를 제한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것의 원인을 인식한다 함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끔 추동시킨 힘(bewegende Kraft:vis movendi)(B 67, B 321)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힘의 영향 관계는 결코 개념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가상적 사태(realitas noumenon)(B 321)가 아니다. 즉, 우리가 마주치는 자연 현상의 인과 관계는 결코 개념의 논리적 근거(logischer Grund)만으로 알 수 있는 이유-귀결의 관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쪽의 실재 근거(Realgrund)가 다른 한쪽의 실재 근거로부터 나온 결과를 무력화하는” 실재적인 “상호 상쇄하는 대립”(B 330)의 인식 역시 단지 개념들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태가 아니며, 이런 실재적 대립과 상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라이프니츠의 착오는 단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추상적인 사고 공간 속에서 수행되는 한갓 논리적 반성의 틀을 부당하게 존재론적 탐구로까지 전용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논리적 사고 가능성(possibilitas)으로부터 실재 가능성(realitas)을 도출해내는 독단적 형이상학의 체계가 생겨난다.
즉, 라이프니츠처럼 “실재성(Realität)을 단지 순수 지성에 의해서 표상할 경우(즉, 가상적 실재성. realitas noumenon)라면, 실재성들 사이에 어떤 모순도 생각될 수 없다. 즉, 동일한 주어에 결합된 두 실재성[어떤 것]이 서로 그 결과를 상쇄(止揚. aufheben)하는 관계(3-3=0)는 생각될 수 없다”(B 320). 물론 “(한갓 긍정으로서의) 실재성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이 없다는 원칙은 개념들의 관계에서 볼 때는 전적으로 참된 명제다. 그러나 자연에 관해서는 물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물 자체에 관해서도 그 원칙은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 하면 A-B=0과 같은 실재적 대립은 도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한 주어에 결합되어 있는 두 실재성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작용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요, 이런 사태는 자연 안의 모든 방해와 반작용(Gegenwirkung)이 항상 우리의 눈앞에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방해나 반작용은 힘(Kraft)에 의존하므로 그것은 현상적 실재성(realitas phaenomenon)이라고 불릴 수 있다”(B 329). 그리고 “이런 표상이 가능한 조건은 오직 우리 감성에서만 발견된다”(B 330). 즉, 칸트에 의하면 “현상 속의 실재들(realitas phaenomenon)은 서로 대립하고 동일한 주어 속에 결합(vereinen)되면 한쪽이 다른 한쪽의 결과를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무효화(vernichten)할 수 있다”(B 321).
칸트가 노리는 것은 도대체 인식이 참된 사태 인식이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객관적 실재성을 지니기 위해서는”(B 194) 단지 개념 분석에 의한 분석적 인식이어서는 안 되며, 주어진 개념을 넘어 대상과 관계하는 종합적 인식이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된 인식의 궁극적인 근거는 분석 판단의 최고 원리인 통각의 분석적 통일[모순율]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합 판단의 최상 원칙인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서 찾아져야 한다.
경험의 가능성, 대상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칸트의 초월적 반성 속에서 모든 참된 인식과 대상을 가능케 하는 원리는 상호 <대립>하는 실재적인 힘들의 영향 관계 속에 있는 질료와 형식, 감성과 지성, 수용성과 자발성을 상상력이 매개하고 <일치>시킴에서 성립하는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에서 찾아진다. 이는 주어 개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지 않던 대상의 징표를 부가함으로써 주어 개념의 내용을 확장시켜주는 종합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자, 주어지는 표상들을 결합하는 활동 속에서 대상의 동일성과 자아의 동일성을 성립시키는 근거이기도 하다. 자아와 대상의 동일성은 한갓 무모순적 사고가 개념 분석을 통해 확립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모순율과 그 배면으로서의 동일률은 진리 인식의 적극적인 기준일 수 없다. 즉, 일치와 모순이라는 관계는 종래의 형식 논리적인 반성 속에서와는 달리 단지 추상적 사고 속에서 고찰되는 동종적인 개념들의 외연적인 포섭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적 대상 관련적 반성 속에서 수행되는 상호 이질적인 객관과 주관, 감성과 지성, 질료와 형식의 실재적 대립(reale Opposition)과 지양(止揚. Aufheben)이라는 역동적인 관계로서 이해된다.
모순율에 기초한 “분석(Analysis)의 근본 개념이 사고 가능성[무모순]과 불가능성[모순]이라면, 종합(Synthesis)의 근본 개념은 공간(Raum), 시간(Zeit) 그리고 힘(Kraft)이다”(R. 3716).
즉, 의식이 직관의 다양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직관 방식인 시․공의 순수 다양을 필요로 한다. 왜냐 하면 어떤 사물이든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이 우리에게 인식되고 또한 임의의 다른 사물과의 연관이 실재적인 것으로 경험되기 위해서는 서로 잇따라(Nacheinander)와 서로 곁하여(Nebeneinander)의 관계 질서 속에서 보일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종합 판단의 최고 원리인 통각에 의한 다양의 종합 통일 원리는 이런 시․공의 순수 다양을 자신의 한 계기로서 필요로 하며 상상력의 종합을 매개(Vermittlung)로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자료들이 지성 개념들과 관계맺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물들의 실재적 연관(nexus)과 영향 관계(influxus physicus)를 인식하는 종합 판단의 성립 근거 자체 속에도, 이미 우리 인식 능력들의 실재적 연관과 상호 작용(Wechselwirkung)이 성립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칸트는 유한한 인간의 참된 인식 가능성을 이렇듯 상상력의 순수 종합(reine Sythesis)(B 104)을 매개로 하는 인식 능력들 간의 상호 연관과 일치[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 속에서 찾았고, 바로 여기에서 또한 비로소 사물들의 참된 연관과 결합이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질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렇듯 초월적 통각(統覺)의 종합적 통일 원리는 대상과의 만남, 즉 경험 일반을 가능케 하는 조건(근거)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경험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만나질 수 있는 조건(근거)이 된다.
4.맺음말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칸트가 이미 초기 사유 속에서부터 일반논리학의 원리에 기초한 합리론적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 반성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칸트의 전비판기 사유를 되새겨봄으로써 이후 비판기의 저작 속에서 이성의 월권 행위로 규정한 당대의 강단 형이상학에 대해 제기한 날카로운 비판이 어떤 배경 아래에서 성립하게 되었는지 그 단초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볼프(M. Wolff)가 지적했듯이, 1755년에 출간된 최초의 형이상학적 저술 「새로운 해명(Nova dilucidatio)」 속에서 엿보이는 논리학의 원리에 대한 이와 같은 칸트의 반성 속에서 이후 헤겔이 논리의 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수행한 반성의 결과와 사태 내용상 연결될 수 있다는 새로운 철학사적인 통찰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칸트의 초기 사고 속에 나타난 동일률에 대한 반성이 이후 비판기에 정식화된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와 내면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전비판기 저술인 「부정적인 크기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려는 시도(Versuch den Begriff der negativen Größen in Weltweisheit einzuführen)」(1763)라는 논문에서는 칸트가 모순율에 기초한 논리적 대립과 모순 없이 성립할 수 있는 실제적 대립(Realrepugnanz)을 구분함으로써 그가 비판기에 이르러 수행한 분석-종합 판단의 구별이 행해지게 된 근본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고, 비판의 반성 개념 장과 변증론에서 수행된 종래 형이상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칸트의 실재적 대립(reale Opposition)의 개념 속에서 이후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계승된 변증법적 모순(Widerspruch) 개념의 원초적인 싹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기까지 독일 이상주의의 전개 과정 속에서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최고 원리인 자의식의 통일 원리가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고 있는지, 또한 칸트가 비판의 반성 개념 장에서 제시한 동일과 차이, 일치와 모순이라는 반성 원리가 헤겔의 논리의 학 본질론에서 본질성(Wesenheit) 내지 반성 규정들(Reflexionsbestimmung)로서 이해되고 있다면, 그 내면적 연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헤겔은 외관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변논리학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핵심적인 주제와 문제 의식으로부터 자신의 사변 논리로 나아가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특히 선험적 종합의 문제,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 범주의 초월적 연역, 생산적 상상력에 의한 직관과 사유의 매개 등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핵심적인 주제와 문제 의식으로부터 헤겔은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이는 초월 논리와 사변 논리의 관계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예컨대 대상 경험의 가능성을 정초하고자 하는 칸트의 선험적 종합의 문제 의식을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의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으로서 자신의 “사변적 이념”에 의해 해석하고, 그 싹을 온전히 전개시키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헤겔의 비판은 칸트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정당한 평가로 간주될 수 있는가? 과연 헤겔의 비판은 칸트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칸트와는 다른 전제에 기초한 일방적인 해석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초월논리학과 사변논리학의 관계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논제들이며, 앞으로 수행되어야 할 연구 과제로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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