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통각 이론

나뭇잎숨결 2024. 12. 31. 23:24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통각 이론

 

 

김 정 주(서울대 )


머리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면서 존재한다”는 것(das Ich denke und bin)이 지적 직관을 통해서 발견된 최초의 직접적 명증적 확실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자아의 현존을 종래의 존재론적 개념규정에 따라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사유하는 실체로 규정했다. 그 이후 근대 철학은 주관성에 관한 여러 형태의 이론을 낳았다. 순수주관성을 철학의 참된 원리로 받아들인 칸트는 자기의 고유한 선험적 인식론의 체계 내에서 데카르트에 있어서의 사유하는 자아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순수주관의 자기의식과 경험적 주관의 내적인 지각으로 구분했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자아의 지적 인식은 칸트에게는 순수주관의 현존인식이 아니라 이 순수주관의 지적인 자기의식을 의미했고, 심리적 시간적 사유작용들을 수행하는 동안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현존에 대한 자아의 확신은 경험적 사유작용들을 수행하는 자아의 현존에 대한 직접적 무규정적 지각을 의미했다. 그런데 칸트의 이런 견해는 감성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 경험적 주관과 순수주관, 객관와 주관, 직관과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이분법에 근거해 있다. 여기서 그는 감성을 시간과 공간의 근원으로, 그리고 오성을 논리적 판단형식들과 여기에서 도출된 범주들의 원칙으로 규정했는데 무엇보다도 오성, 즉 자기의식적인 순수통각을 철학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칸트의 통각 이론은 피히테와 쉘링에 의해서 더욱 체계적이고 생산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에 있어서 완성되었다.


그런데 주관성의 이론은, 그 주관이 경험의 자기연관적 주관으로 이해된 경험적 자기의식이든, 판단형식들과 같은 논리적 규칙들과 범주들의 사유의 주관으로 이해된 순수한 자기의식이든간에, 오늘날 여러 근거에서 특히 경험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이론에 의해 비판을 받아왔다. 오래 전에 이미 마하는 순수 자아는 물론 경험적 자아조차도 심리학적으로 기술될 수 없기 때문에 구제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리히텐베르크는 사유를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심리적, 경험적 사건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면서 경험적 자아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Ego cogito”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비온다”(Es regnet)와 같이 비인칭적인 표현을 써서 단순히 익명적으로 “사유한다”(Es denkt)라고 말해야 한다. 러셀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 비온다”(It rains here)처럼 “생각한다”(It thinks)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일에 따르면 정신적 활동은 논리적 유형을 갖고 있어서 물리적 작용보다 더 고차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에 선행하는 물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아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자기의식을 획득하지 못하며 따라서 자아의 자기의식은 근본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그는 물리적 세계와 상관없는 존재를 갖는 데카르트의 Ego는 단순히 신화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또한 주관성의 이론은 신칸트주의자들 또는 신헤겔주의자들, 선험적 현상학자로서의 후설이나 기초존재론자로서의 하이데거와 이들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분석철학의 테두리 내에서도 다양하게 주창되어 왔다. 이때 이들의 이론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재구성적이든 비판적이든, 공통적으로 칸트의 주관성 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언제나 문제시되는 칸트의 주관은 수동적 주관인 감성이 아니라 능동적 주관인 오성이나 구상력이다. 칸트는 이런 능동적 주관성의 이론을 무엇보다도 선험적 연역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선험적 연역의 초판과 재판에서 각각 다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연역의 초판에서 칸트는 우리의 인식 주관이 세 종류의 독립적인 능력들(감성, 구상력과 오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상력을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능력, 즉 오성과 감성의 중간에 위치해서 이 두 능력을 자발적으로 매개하는 근본능력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 이론은 칸트가 본래 변호하고자 하는 두 종류의 인식근간들(Erkenntnisstämme), 즉 오성과 감성에 대한 능력 이론과 합치하지 않는다. 이 본래의 능력 이원론은 연역의 재판에서 비로소 전개된다. 여기서는 순수오성만이 유일한 자발성이며, 구상력은 그것의 직관적 종합활동에 있어서 오성에 의한 감성의 자기촉발(Selbstaffektion), 즉 내감에 대한 순수통각의 규제적 작용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오성의 직관관계적인 기능을 의미할 따름이며 따라서 그 구상력은 초판에서와는 달리 독립적인 자발성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 논문은 칸트가 선천적 종합판단과 이와 함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능력들이나 인식작용들에 관한 반성적 이론, 간단히 말해서 인식의 비판적 이론에 있어서, 그 중에 특히 선험적 연역의 재판에 있어서 통각 개념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며, 또한 칸트의 통각 이론이 어떻게 연역의 초판과 재판에 있어서 변화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제1부에서 선험적 연역의 초판에 있어서의 통각의 기능을 구상력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볼 것이고, 제2부에서는 맨 먼저 선험적 연역의 재판에 있어서의 순수 오성의 근본 구조, 즉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을, 그런 후에 자기촉발의 활동으로서의 구상력의 기능을 다룰 것이다.

1. 선험적 연역의 초판에서의 통각의 문제


논리적 범주들의 객관적 의미를 증명하고자 하는 선험적 연역은 바로 그 범주들의 근원을 다루는 형이상학적 연역을 전제해야만 한다. 일반 논리학과 선험 논리학, 논리적 판단형식들과 여기서 도출된 범주들의 근원은 순수통각이다. 그런데 칸트는 물론 형이상학적 연역을 포함한 비판 철학 내에서는 판단형식들과 범주들을 하나의 근원적 원리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전개하지 못했지만, 그의 후기의 반성들과 편지들은 그가 바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리에서부터 판단표와 범주표를 체계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여하튼 형이상학적 연역은 범주들이 주어진 직관 일반의 다양의 규정들로서의 논리적 판단형식들이라는 것과 그러는 한 그것들은 감성적 직관 일반의 대상들과 따라서 또한 우리 직관의 대상들의 존재론적 근본 규정들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수 오성의 개념들의 참된 의미”는 그것들이 판단형식들처럼 논리적인 기능만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자체로는 결코 객체 자체에 관한 어떤 개념도 형성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형이상학 서론?, § 39(324) 참조, 또한 B 153). 따라서 그것들은 내용 없는 공허한 개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그같이 오성에 근거를 둔 논리적 범주들이 어떻게 감성적인 현상들에 대해 타당할 수 있는가가 해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선험적 연역의 과제이다.


칸트는 선험적 연역의 초판에서 범주들의 연역을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으로 구분하고 있다(A XVIf.). 오성의 대상들 자체로 향해서 오성개념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객관적 연역(A 92f./B 124ff.)은 칸트에 의하면 그 자체로 충분한 본래의 연역이며, 이에 반해 오성을 다른 두 인식능력들(구상력과 감성)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는 주관적 연역은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다. 이처럼 바로 객체(das Objekt)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선험적 연역에서는 오성과 그것의 구상력과의 연관성을 다루는 이론은 부수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체는 칸트에게는 궁극적으로 통각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식 주관성에 대한 칸트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객체의 올바른 의미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선험적 연역의 특수화된 유형인 순수 오성의 원칙론에서 범주들의 증명을 “대상 일반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인 원천들에서부터의”(A 149/B 188) 증명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식 주관은 연역의 초판에 따르면 세 종류의 능력들, 즉 감성과 구상력과 오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능력들은 경험적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사용될 때, 제각기 경험의, 정확히 말해 해당하는 경험 요소의 형식적인 조건들을 형성하는 그런 선천적인 표상들을 산출하고, 이것들을 근거로 경험대상들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을 낳는다(A 94 참조, 또한 A 78f./B 104).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은 직관의 형식들로서 순수감성에 근거하며, 경험대상들의 대상성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선험적 대상(transzendentaler Gegenstand)은 생산적 구상력에 근거한다(A 118, A 123, A 145/B 185 참조, 또한 A 101, A 124, B 151). 그런데 이 구상력은 논리적 범주들에 따라 작용하므로 긍정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대상은 궁극적으로 그 논리적 범주들의 근원이 되는 순수오성에 근거한다.


범주들을 가지고 주어진 직관 일반의 다양을 결합한다고 하는 오성은 사실 그 자체로는 시간-공간적인 감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산적 구상력은 인식능력들 중 두 극단, 즉 감성과 오성을 필연적으로 매개하는 “인간 마음의 근본능력”(A 124)이다. 순수감성이 부여하는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는 직관의 단순한 형식들로서 무규정적인 다양성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오성에, 정확히 말해서 순수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속하지 않는다. 순수통각도 우리가 알다시피 또한 그 자체는 단순히 개념들이나 판단들의 지적인 종합을 수행할 뿐 우리의 감성적 직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선험적 구상력의 칸트 이론이 갖는 근원적 의미는 그 구상력이 시간과 공간의 직관형식들을 순수통각의 범주들과 결합시켜서 시간과 공간의 종합적 통일을 산출하고 무규정적 직관형식들을 규정적 순수직관들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범주의 관점에서 보면 구상력이 그 자체로 공허한 순수한 범주들을 시간이나 공간의 순수 다양과 관계시켜서 순수한 범주들의 시간적 내지 공간적 도식화를 수행하고 따라서 그들에게 특정한 직관내용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구상력의 직관적인, 비지성적인 종합은 반드시 오성의 논리적 범주들에 합치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 종합작용 자체와 종합의 산물인 시간이나 공간의 통일이 순수통각의 통일 속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직관적 통일은 이미 범주적으로 규정된 통일이며 결국 순수통각의 통일에 근거하고 있다. 칸트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형식들이나 순수직관들로 정의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이 규정은 순수통각의 범주들(특히 관계 범주들)이 시간과 공간에 적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구상력의 직관적 종합에 규칙적으로 작용해서 모든 종류의 종합적 통일을 산출하는 그 통각을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본적인 능력”(A 114)으로 정의한다. 또한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은 통각의 범주들에 따라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경험적 직관의 다양의 필연적 통일을 산출할 수 있다. 구상력의 종합을 통하여 결국 통각의 통일에 근거지어진 그런 통일은 모든 시간-공간적 대상들의 본질적 성격을 이루는데 그것은 연역의 초판에서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대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칸트는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에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이 선천적 인식능력으로서의 순수오성이라고 말한다(A 119 참조, 그리고 A 97). 그 자체가 근원적 통일인 순수통각이 순수한 범주들을 시간 내지 공간의 순수 다양에 적용시키면서, 이를 근거로 또한 그 범주들을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경험적 직관의 다양에 적용시키는 그러한 구상력에 관계하고 이 구상력을 통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관계할 때, 한 마디로 말해서 통각이 구상력을 통해서 감성화될 때, 그 통각은 비로소 “우리에게 있어서” 이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것은 이때 더 이상 단순히 지적이기만 한 사유의 능력으로 머물지 않고, 오히려 시간-공간적인 현상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타당한 사유의 능력, 즉 인식의 능력이 된다.

2. 선험적 연역의 재판에서의 통각의 문제


칸트는 연역의 재판(§§ 15-27)에서는 초판에서처럼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독립적인 연역들, 즉 주관적 연역과 객관적 연역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유일한 연역을 두 종류의 순차적인 증명단계들로 구분한다(§ 21의 B 144f.와 § 26의 B 159 참조). § 15와 § 20 사이에서 전개되는 첫 번째 증명단계는 범주들이 감성적 직관이 우리의 것이든 다른 감성적 존재자의 것이든 상관없이 직관 일반에 관하여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며, 특히 § 24와 § 26 사이에서 전개되는 두 번째 증명단계는 범주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순수 직관들과 관계할 때에만 비로소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 주여야 한다. 이러한 연역의 재판의 증명방식에 따라 아울러 전개되는 주관성 이론은 초판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 세 종류의 독립적인 인식능력들(감성, 구상력과 오성)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성과 감성을 매개하는 독립적인 능력으로서의 구상력에 대한 초판의 이론은 우리의 인식주관은 두 종류의 인식근간들(감성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칸트의 본래의 주관성 이론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둘째 이런 이유 때문에 초판은 오성의 본질적인 구조조차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칸트는 연역의 재판의 시작에서부터 감성과 오성의 원칙적인 대조를 강조하면서(§ 15), 초판에서 불투명하게 다루어진 오성의 구조를 통각(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오성의 객체구성적 종합)과 분석적 통일(오성의 자기반성)의 개념들을 통해서 명확히 하고자 하며(특히 §§ 15-17), 생산적 구상력을 초판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즉 자기촉발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24의 B 151-156, § 26의 B 162 주석).

2.1. 종합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


§ 15(B 129ff.)에서 칸트는 순수오성을 자발성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면서 감성의 수용성과 대조시킨다. 표상이 감성적 직관이든 개념이든, 경험적으로 주어지든 선천적으로 주어지든 상관없이, 표상들의 종합은 칸트에 따르면 외적 촉발에 의해서 산출되는, 즉 경험적 사물들의 물리적 운동이 외감을 촉발할 때 산출되는 그러한 감각들에 내용적으로 의존하는 작용들, 말하자면 지각, 연상, 경험적 사유 등과 같은 어떤 심리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단지 “주관에 의해서만” 수행되므로 곧 “주관의 자기 활동의 작용”이다. 이때 스스로 활동하는, 즉 자발적인 표상능력은 구상력이 아니고 바로 사유능력인 오성이다. 이 오성의 종합은 논리적 판단이며, 범주들의 논리적 통일에 따라 주어진 표상들에 있어서의 논리적 사태의 필연적 통일을 산출한다. 종합과 이것의 범주적 규칙으로서 종합적 통일은 궁극적으로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에 근거하고 있다. 종합이 그 자체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단순한 통각에 근거하는 한, 그것은 마찬가지로 그 자체 통일적이고 단순하며, 결코 종합된 표상들의 내용상의 차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 16에서 “나는 생각한다”(Ich denke) 라는 명제로 표현된다(또한 A 348, 398, B 406 참조). 이 “나는 생각한다는 모든 나의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표상들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최소한 나에 대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B 131f.). 우리는 어떤 순간에 예컨대 “책상”과 같은 개념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그 개념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표현하고 있는 그같은 “나는 생각한다” 라는 명제를 통해 단순히 반성적 의식의 가능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형식 논리학과 선험 논리학의 근원적 원리로서의 순수한 사유주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B 134 주석 참조).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라는 의식이 동반 의식인 한, 그것은 자신의 표상내용들을 직관적으로 산출하는 신적 오성과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엇보다도 먼저 표상내용들이 자신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유한한 능력이다. 그런데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은 감성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고유한 인식근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순수오성개념들에서부터 초감성적인 것을 선천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성은 칸트에게는 맨 먼저 주어지는 감성적 표상들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유한한 능력일 따름이다.


여기서 칸트는 모든 나의 표상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라는 동반 의식의 가능성(현실성이 아니라)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나는 생각한다” 라는 의식이 모든 나의 표상에 동반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우리는 일단 도식화된, 즉 시간적인 용어로 번역된 가능성과 필연성이라는 양상 범주들을 가지고 그 명제를 해석할 수 있다. 가능성의 도식화된 범주는 “어떤 시간에” 라는 시간규정을, 그리고 필연성의 도식화된 범주는 “언제든지” 라는 시간규정을 포함하고 있다(A 144f./B 184). 우리가 표상들에 대해 의미있는 진술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어떤 시간에” 한번 생각한다는 것이 “언제나” 일어나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표상들이 “나는 생각한다”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가능성과 필연성의 순수한 양상 범주들을 갖고서 “나는 생각한다는 …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 라는 명제를 해석할 수 있는데, 이처럼 순수한 범주들을 통한 해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직관들을 도외시하고 있는 첫 번째 증명단계에 있어서는 보다 더 타당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표상들을 어떤 임의적인 경우에서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대를 결코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표상들이 “나는 생각한다”에 속한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라는 그 의식에 있어서는 실제로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의식작용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혹은 사유하는 주관은 그 자체가 내용 없는 단순한 표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성 자체로서 자신의 사유작용에 의해 선천적으로 ― 주어진 표상들의 내용적 차이점에 상관없이 ― 표상들에 관계하여 이 표상들을 자신의 표상들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칸트에게는 모든 표상이 사유인 것은 아니다. 사유하는 주관에 상관없이 주어질지도 모르는 감성적 직관도 마찬가지로 표상이다(B 132 참조). 그러나 오성은 판단형식들에 따르는 자신의 종합작용에 의해서 감성적 직관들을 자신의 표상들로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칸트에게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표상들을 동일한 자기에 속하게 하는 사유주관의 그런 자발적인 활동의 필연적 현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활동의 필연적 가능성이 문제이다. 모든 표상들은, 특히 직관들은 그것들이 사유주관의 종합의 내용들을 이루는 한 그 주관의 소유물들이다.


그런데 사유주관이 모든 나의 표상들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칸트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표상들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최소한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만약 어떤 표상들이 내용적으로 모순된 규정을 자체 내에 포함함으로써 무모순적인 사유의 통일성으로 의미있게 결합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표상들이 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표상들이 순간순간 의식될 수 없고, 즉 명료하게 될 수 없고 끝내 우리의 표상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런 불명료한(dunkel) 표상들로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그 표상들이 본질적으로 자기의식적인 사유주관에 대해 최소한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내용적으로 모순되거나 불명료한 표상들은 사유주관이 동반될 수 없는 표상들이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밝혀진 것은 동반 의식으로서 사유주관이 자신의 표상들에 대해 갖는 관계는 아직은 주관-객관의 관계도 아니고 주관의 자기관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 개별적인 표상이 자기동일적인 사유주관에 상관없이 순간순간 다른 표상들과 구별된 명료한 표상으로 지각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표상에 동반되는 지각의 경험적 의식은 순간순간 주어지는 각 표상처럼 항상 산만하고 변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단지 개별적이고 고립된 표상 내용들을 줄 뿐, 이 내용들의 종합적 통일을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표상들에 대한 어떤 의미있는 진술도 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표상들의 종합적인 부가작용(Hinzusetzen)이 필요하다(B 133 참조).


칸트는 § 17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주관적인 측면에서만 본 사유의 종합작용, 즉 주어진 표상들을 자발적으로 지적인 주관에 속하게 하는 종합작용을 주어진 직관들에서 객체(Objekt)의 표상을 산출하는 활동으로 규정한다. 기실 선험적 연역은 사유주관이 범주들에 따라 객체를 구성할 때 비로소 그 범주들의 의미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연역의 초판에서 특히 선험적 대상의 개념을 통해 다룬 객체의 문제를 칸트는 연역의 재판에서는 § 17에서 맨 처음 언급하고 있다. “오성은 … 인식의 능력이다 … 인식은 주어진 표상들의 객체와의 특정한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객체란 그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다양이 통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B 137). 순수한 사유능력으로서 오성은 그 자체가 자발성이기 때문에 스스로 임의적인 직관들 가운데서 객체 자체를 산출하며 이것에 대한 순수한 선천적 인식을 낳는다. 오성은 이때에 동시에 순수한 인식능력이 된다. 따라서 오성, 정확히 말해서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이 직관의 다양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있는 궁극적인 조건이다(B 137 참조). 객체가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근거하는 범주들에 따라 산출되는 한 그것은 결코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생활세계적 사물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경험적 대상들의 본질적 성격을 형성하는 직관의 다양의 필연적 통일이며, 따라서 그 객체 없이는 어떤 주어진 것도 특정한 경험대상이 될 수 없다. 그 객체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법칙 속에 표현되어 있는 자연현상들의 규칙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각은 종합작용에 의해서 객체 자체를 산출하고, 이와 함께 주어진 직관의 다양의 객체와의 관계, 따라서 경험대상과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 “의식의 통일은 오로지 표상들의 대상과의 관계, 따라서 표상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 형성하는 것이다”(B 137). 그런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은 객체의 개념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객관적 통일”이라고도 불린다(B 139). 여기서 통각의 작용으로서 판단은 “주어진 인식들(개념들이나 판단들-필자 주)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에로 가져오는 방식”(B 141)이다. 그 판단의 논리적 형식들 속에는 이미 “주어진 개념들의 결합, 따라서 그것들의 통일”이 포함되어 있다(B 131). 모든 범주들은 바로 그 판단의 논리적 기능들에 근거하고 있다(B 131 참조). 이처럼 범주들의 객관적 의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리에서부터 유래한다. 순수범주들, 즉 주어진 직관 일반의 규정들로서의 논리적 판단형식들은 바로 통각이 객체를 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들이다.


위와 같이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로서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적인, 심리적인, 개인적인 사유체험이 아니라 형식 논리학과 선험 논리학, 논리적 판단형식들과 여기서 도출된 순수범주들의 근원적 원칙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이다. 이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그것이 선천적 인식을, 따라서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선험적이다(B 132 참조).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여러 표상들 가운데서 객체의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하는 선험적 조건이다. 그러한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의 능력을 칸트는 “오성 자체”(B 134 주석)라고 말한다.

2.2. 반성과 통각의 분석적 통일


칸트는 § 16에서 계속해서 순수오성의, 정확히 말하자면 순수통각의 또 다른 구조적 요소로서 통각의 분석적 통일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주관은 여러 다른 표상들이 특히 직관들이 자기 자신의 소유물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근본적으로 말해서 사유주관은 자기 자신이 종합의 주체라는 것에 대해서와 또한 자기 자신이 종합된 수많은 표상들 가운데서도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표상들이 근원적으로 그 사유주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원적으로 자기의식적 표상인 주관은 그 자체 순전히 논리적인, 따라서 내용 없는 표상일 따름이다. 표상내용들은 감성적 직관에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대한 논의에서 밝혀진 것처럼 사유하는 주관은 자기 자신의 공허한 형식성을 근거로 감성적으로 주어진 표상들로부터 동떨어진 채 자신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의식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처음부터 감성적 표상들의 변화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다. 이때에 주관은 그 자체가 논리적이고 형식적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즉 감성적 표상들의 내용과 상관없이 반성적 자기관계에 도달해야 하며, 따라서 위의 논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관이 자기관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선천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


칸트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러한 오성의 반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라는 것은 범주들에 따르는 순수한 사유에 의해 주어진 표상들을 동일한 자기에 속하게 하고, 특히 직관의 다양을 객체로 결합하는 주관을 의미하는데 반해서, 통각의 분석적 통일이라는 것은 종합작용 자체나 이 속에 필연적으로 함축된 모든 것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주관을 의미한다. 더 자세히 말해서 그것은 한편으로 종합작용 자체와 이 종합작용의 규칙인 범주를 의식하는 주관 또는 자기 자신을 종합의 주체로서 의식하는 주관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여러 표상들이 자기 자신에 속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주관 또는 여러 양상의 종합과 종합된 표상들 가운데서 근본적인 자기동일성을 의식하는 주관을 의미한다.


판단의 논리적 종합은 판단에서의 객체의 통일을 산출할 때 비로소 그 논리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주관이 판단에서의 통일의 타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종합작용이나 이것에 의해 구성된 통일을 반성해야만 한다. 이때 또한 주관은 논리적 규칙이 종합에서 사용될 때에 비로소 그 논리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말하자면 그 주관은 자신의 종합에서부터 규칙 사용의 타당성을 통찰할 수 있고 이와 함께 종합을 그 규칙에 의해 규제된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관은 더욱이 자기 자신이 객체구성적 종합의 주체, 즉 객체를 산출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따라서 자기 자신이 구성된 객체와는 전연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주관은 주어진 수많은 표상들을 자신의 규칙적 종합에 의해 자기의 통일성이나 동일성 속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주관은 또한 자신이 자발적으로 종합한 표상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관이 표상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는 것은 주관이 표상들의 변화에 있어서도 항상 자기동일적이라는 것과 그 주관이 항상 또한 이때에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동일성의 반성적 확신을 칸트는 통각의, 즉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로 규정한다. 그러한 주관의 자기반성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주관과 사유된 주관 사이에 주관의 어떤 자기분열 현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 주관은 양자를 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한 주관이 항상 실제로 명료한 반성적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반성적 의식의 현실성의 필연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의식의 가능성의 필연성이 문제이다. “나는 나를 생각한다”(B 158, 420, 429, 또한 B 430 참조) 라는 명제에 있어서 표현되는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은 “모든 나의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 종합을 수행하는 순수주관은 아마 이 종합 자체를 의식하지 못할는지 모른다(B 130 참조). 지적인 주관은 비록 이 종합을 의식하더라도 아마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의식하지 못할는지 모르며, 또한 이때에 자신의 종합된 표상들을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B 132 참조). 설사 주관이 자신의 종합된 표상들을 자기의 것으로 확신하더라도, 그러나 이때 이 확신은 반드시 종합에 대한 의식을 포함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주어진 표상들을 자기 자신에 속하게 하는 종합작용의 가능성과 이 종합에 대한 의식의 가능성을 포함하기만 하면 된다(B 134 참조). 그러나 만일 주관에게 표상들의 종합에 있어서 그러한 종류들의 반성적 의식의 가능성이 없다면, 그 표상들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주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의미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표상들에 대한 의미있는 진술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 엄밀히 칸트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지적 주관의 자기동일성 의식에 선행한다. 주어진 수많은 표상들에 있어서의 주관의 사유하는 자기관계, 더 자세히 말하면 자신의 모든 표상에 반드시 동반될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주관의 자기동일성 의식은 범주들이 규제하고 또한 의식이 동반된 혹은 최소한 동반될 수 있는 그런 종합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이 종합이 산출한 직관의 다양의 필연적 통일도 마찬가지로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의 필연적인 전제가 된다(B 134 참조). 그러나 칸트는 왜 종합과 종합적 통일이 본질적으로 자기관계적인 자기의식에 속하는가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과 종합적 통일의 내적인 조건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자기의식의 능력인 사유주관은 맨 먼저 종합을 수행하고 그리고 나서 이 종합의 의식에서 자기자신을 파악한다. 만일 그 주관이 종합에 있어서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종합과 종합적 통일이 자기의식에 속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은 비독립적이고 등근원적으로 주관의 자기관계의 구조에 속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대상에 대한 사유로서 주어-술어-문장에서 표현되는 그런 복합적 사유에 관해서는 종합의 필연성과 또한 이 종합의 자기동일성 의식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이것은 붉다”라는 단순 명제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순 명제는 술어개념만을 포함하고 있고 주어개념은 단순히 지시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 명제의 경우에는 종합을 고려할 필요 없이 단지 주관의 수적 동일성만을 전제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하나 주어진 개별적 인상을 사유의 가능한 내용으로서 주관의 표상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그 사유의 주관은 각각 고립된 인상들의 변천과정에 있어서도 항상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시적 표현을 주어의 위치에 놓는 그런 명제가 과연 칸트적 의미에서 일종의 판단인가, 말하자면 그것이 과연 한 대상에 관계하고 최소한 정언판단의 형식에 맞추어 개념들을 종합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자기관계적 자기의식의 칸트 이론에서는 각기 개별적인 단순 감각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적 표상들과 표상내용들에서의 주관의 자기동일성 의식이 문제이다. 사실 “붉음”이라는 단순 술어도 그같은 성질을 가진 여러 다른 대상들에 공통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징표이다. 그러한 단순한 분석적 동일성은 직관들의 논리적 분석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직관들은 분석되기 이전에 먼저 종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반 개념의 분석적 동일성과 자기의식의 분석적 동일성이 어느 정도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칸트는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은 “붉음”이라는 개념의 분석적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B 133f. 주석 참조). 이 이해하기 힘든 칸트의 주장은 아마 다음의 것을 의미할는지 모른다. 논리적 개념의 형성(주관의 타자 관계)과 형성되는 일반 개념들은 주관의 근원적인 자기동일성 의식(주관의 자기 관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관이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직관들을 개념으로 형성하는 것은 이미 그 주관이 종합된 수많은 직관들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칸트 자신이 그렇게 명확히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자기의식의 종합적 통일(객체구성적인 종합)과 분석적 통일(사유하는 자기관계)의 개념들을 명확히 함으로써 오성의 형식적 구조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런 개념들은 왜 사유하는 주관이 순수한 사유활동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유는 주관 없는 익명적인 활동, 즉 단순히 “사유한다”(Es denkt)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이 자발적인 사유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에 사유는 언제나 “나는 사유한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표상들을 사유한다”(Ich denke Vorstellungen)이다. 사유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으며 이때 자기관계적 사유는 사유된 것과 비록 서로 다른 차원에서라도 하나의 동일한 사유이며 이러한 것은 원칙적으로 사유의 주관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또한 “나는 나를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유의 의미는 “Ich denke Vorstellungen oder auch mich selbst” 라는 명제에 있어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의식, 정확히 말해 “나는 나를 생각한다”라는 명제에 있어서 표현되는 자기의식의 분석적 통일에 대한 칸트 이론은 순환 논증 속에 빠질는지도 모른다. 지적 주관은 순수한 논리적 범주들을 가지고는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유활동과 이와 함께 사유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 칸트가 ?비판?의 「오류추리」 장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주관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서부터 도출된 범주들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단순하고 수적으로 동일한, 모든 가능한 사유들의 주체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자기 자신의 범주들로써만 자기 자신에 대해 진술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주관은 결국 자기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따름이다. 사유하는 주관의 자기관계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순환”은 칸트 자신의 말처럼 확실히 하나의 “불편한 일”(A 346/B 404, 또한 B 422 참조)일 것이다. 또한 주관의 자기관계에 있어서 이 주관이 범주적 계기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자 할 때마다 그 사유하는 주관이 언제나 전제되어야만 한다면 그 주관 자체는 결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 주관이 자기관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주관과 사유된 주관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라도 궁극적으로 동일한 주관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범주들을 통한 자기사유에 있어서 전제되는 주관은 그 범주들과의 분석적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거는 또한 주관의 자기관계에 있어서의 순환 논증을 회피시켜 줄는지도 모른다.

2.3. 구상력과 자기촉발


우리는 연역의 재판의 첫 번째 증명단계에서 오성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증명단계는 우리 감성적 직관의 특별한 형식들, 즉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도외시한 채 감성적 직관 일반에 관계하고 있어서 이 직관이 도대체 우리의 것인가 혹은 다른 어떤 감성적 존재자의 것인가 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1의 B 144f.와 § 26의 B 159 참조, 또한 § 24의 B 150f.). 따라서 연역의 첫 단계에서의 오성의 구조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역의 두 번째 증명단계(§§ 22-27, 특히 §§ 24과 26)의 주제가 되는 자기촉발과 구상력에 대한 칸트 이론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직관을 고려하는 가운데 오성의 구조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유일한 자발성으로서 표상들 일반의 지적인 종합을 수행하는 사유능력인 오성(§ 15의 B 129f. 참조)이 직관 다양에서 객체를 산출하는 한, 또한 인식능력(§ 17의 B 137 참조)이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오성의 이론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순수한 직관형식들과 이와 함께 구상력의 형상적인, 직관관계적인 종합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유일한 자발성인 오성의 이론을 근거로 칸트는 연역의 초판에서와는 달리 재판에서는 감성과 오성에 대한 본래의 능력 이원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생산적 구상력은 초판에서처럼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능력들, 즉 오성과 감성의 중간에 위치해서 이들을 서로 매개하는 독립적인 기본능력이 아니라, 여기서는 오히려 그 형상적인(figürlich) 직관적인 종합에 있어서 주관의 자기촉발(B 151-156, 162 주석), 즉 오성(능동적 주관)에 의한 감성(수동적 주관)의 촉발에 있어서 오성의 직관연관적인 작용에 불과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자발성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때 오성은 연역의 초판에서처럼 더 이상 좁은 의미에서의 오성, 즉 생산적 구상력과 대립해 있고 그 자체가 단순히 공허한 그런 사유능력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오성, 즉 선천적 인식을 낳기 위해 한편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오성으로, 다른 한편으로 구상력으로 활동하는 그러한 능력이다(B 162 주석 참조).


§ 24의 첫 번째 부분(B 150-152)에서 칸트는 한번은 오성이 내감을 그 보편적 형식, 즉 시간에 따라 규정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번은 생산적 구상력이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성은 “만일 그 자체만이 고려된다면” 단지 순수한 사유능력일 따름이며, 이때 그것은 직관 일반의 다양을 결합하고 또한 감성적 직관 없이도 의식될 수 있는 그런 “작용의 통일”만을 포함하고 있다(B 153). 이런 연관 속에서 칸트는 사유능력으로서의 오성의 지적인 종합이 직관 일반의 다양을 순수범주에 따라 결합하여 선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한, 그것은 선험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생산적 구상력에 대해서는 초판에서처럼 그것이 직관들의 내용적인 차이와 상관없이 직접적으로 직관들의 선천적인 통일로 향할 때 그것은 선험적이라고(A 118 참조, 또한 A 123) 말하지 않고, 오히려 구상력이 형상적 종합에 있어서 단적으로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에 관계할 때 그것은 선험적이라고 말한다(B 151 참조). 이것은 구상력이 스스로 직관의 다양의 필연적 통일을 산출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것의 종합적 활동에 있어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근거하고 있고 이것의 개념적 규칙들인 범주들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 구상력은 다른 한편으로 본질적으로 감성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성적 직관에서 표상되는 그러한 전체성과 통일성을 산출하기 때문이다(같은 곳 참조).


그같은 구상력의 형상적, 직관적 종합은 칸트에 따르면 “감성에 대한 오성의 작용과 우리에게 가능한 직관의 대상들에 대한 오성의 … 적용”(B 152) 또는 “내감에 미치는 오성의 종합적 영향”(B 154)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감성적 직관 일반에 관계하는 오성이 시간과 공간 속의 현상들에 적용되기 위해서 더 이상 감성과 오성을 결합시키는 구상력에 관계할 필요가 없다. 이 구상력은 그 형상적인 종합에 있어서 선천적 인식을 낳는 그런 오성의 감성연관적인 활동일 따름이다. 오성이 우리의 감성에 관계할 때, 그것은 자발성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감성에게로 향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순수한 범주들의 시간-공간적 감성화(Versinnlichung)를 수행한다. 오성의 이러한 자기 감성화가 구상력의 형상적 종합이다. 그런데 구상력에 대한 이런 칸트 견해는 이미 자기촉발의 이론을 전제하고 있다(특히 § 24의 두 번째 부분, B 153-156). 자기촉발, 즉 주관의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의 촉발은 운동하는 물체들에 의한 외감의 촉발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외적 촉발은 우리에게 단지 감성적 인상들만을 준다. 자기촉발의 경험적 사례로서 칸트는 “주의의 활동”(Actus der Aufmerksamkeit)(B 156 주석)을 들고 있다. 순수오성은 내감에 주어진, 그 자체가 무규정적인 표상들을 각각 의식 속으로 가져와서 계기성이라는 시간조건에 따라 명료하게 규정한다. 그러나 이같은 오성의 활동은 단지 맨 먼저 그 내용이 외감을 통해서 주어지는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한 인식만을 낳는다. 모든 가능한, 따라서 또한 외적인 경험인식을 위해서는 이 인식의 질료적, 경험적 조건 이외에,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하나의 통일된 인식형태를 산출하는 자기촉발의 선험적 작용이 필수적이다. 하나의 동일한 인식주관은 감성과 오성, 내감과 통각(자기의식)을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능력은 동일한 주관 속에서 서로 고립되어 있는 능력으로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주관내적인 관계는 그 자체가 자발성인 순수통각에 의해서 생긴다. 그 자체 단지 지적으로만 활동하고 있어서 내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통각은 스스로 내감에게로 향하여 이 내감을 범주적 규칙들에 따라 규정할 때, 통각은 내감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통각이 스스로 내감의 시간형식에 따라 자기 자신을 감성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통각에 의한 내감의 규정은 능동적 주관에 의한 수동적 주관의 촉발이다. “오성은 주관의 자발적 능력(Vermögen)으로서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이라는 명칭 아래 수동적 주관에 작용을 미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오성의 작용에 의하여 내감이 촉발된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다”(B 153f.).


선험적 자기촉발의 활동성으로서 생산적 구상력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는 § 24의 두 번째 부분과 § 26의 첫 번째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모든 감성적 표상들은 우리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아래 주어진다. 이때 모든 공간적, 외적 직관들도 또한 내감의 시간형식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직접적으로 모든 내적인 표상들을, 간접적으로 모든 외적인 표상들을 조건지우는 보편적 감성형식이기 때문이다(B 50f. 참조). 그러나 시간 (또한 공간) 그 자체는 무규정적인 다양성만을 포함하고 있는 단순한 직관형식에 불과하다. 원칙적으로 통각의 범주적인 종합을 고려하지 않고 감성의 형식을 다루는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직관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통일성과 전체성이 단순히 감성적 직관에 주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험적 분석론에서 칸트는 무규정적인 순수직관과 규정적인 순수직관, 즉 단순한 “직관의 형식”(Form der Anschauung)과 “형식적 직관”(formale Anschauung)을 구별하고 있다(B 160 주석, 또한 B 154, A 100 참조). 단순한 직관형식은 그 자체가 통일 없는 다양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구상력에 의해 종합될 때 비로소 형식적 직관이 된다. 즉 선험적 구상력은 순수감성에 근거해 있는 순수한 직관의 다양에서 통일을 산출한다. 따라서 이 통일은 순수직관과 “함께”(mit) 주어질 뿐 감성론에서처럼 그 직관 “속에”(in) 주어지지 않는다(B 161). 이처럼 통각은 범주들에 따라서 내감을 그 시간형식에 관해 규제하는 그런 자기촉발의 작용에 의해 형식적 시간직관을 산출한다. 이 형식적-직관적 시간은 관계범주들에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분량의 전체성 범주에) 따라서 여러 근본적 시간양상들(Zeitmodi)로, 즉 “항구성, 계기와 동시존재”(A 176/B 219), 또한 “지속”(A 215/B 262)으로 규정된다. 통각은 생산적 구상력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기촉발적 작용에 의해 또한 시간의 보편적 형식 아래 주어지는 경험적 직관의 다양에서 객체 자체의 표상을 산출한다. 이 표상은 경험적 대상들의 본질규정으로서 범주들의 체계에 따라서 선험적 도식들(A 142ff./B 182ff.)로 규정된다.


이와 같이 구상력은 그 형상적 종합에 있어서 더 이상 독립적인 매개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내감에 대한 순수통각의 규제적 작용인 한, 그것은 이 통각의 직관연관적인 활동성에 불과하다. 이때 통각의 능력인 오성은 연역의 초판에서처럼 감성적 직관에 속한 구상력과 대립된 채 단순히 사유하는 능력(좁은 의미에서의 오성)이 아니라, 그것은 한편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오성으로서 지적, 범주적 종합을 수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상력으로서 직관적, 형상적 종합을 수행하여, 선천적 인식과 따라서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하는 그런 유일한 자발성(넓은 의미에서의 오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하나의 동일한 자발성”이 한편으로 오성이라는 명칭 아래 직관 일반의 다양을 결합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상력이라는 명칭 아래 우리의 직관의 다양을 결합한다고 말한다(B 162 주석 참조, 또한 B 137, A 97, 119). 이에 따라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맨 처음 구상력을 규정한 구절(A 78/B 103), 즉 구상력을 “맹목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불가결한 마음의 기능”으로 정의한 바로 그 구절을 ?후기 수기?(Nachträge XLI)에서는 달리 쓴다. 여기서 그는 구상력을 바로 “오성의 기능”으로 규정하고 있다.

맺음말


칸트의 주관성 이론은 독일관념론에 의해 더욱 생산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칸트 이론은 독일관념론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두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칸트가 여러 능력들을 하나의 원칙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단지 정태적으로만 병렬함으로써 능력 다원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의 주관성 이론은 18세기에 널리 퍼져 있었던, 주관은 “능력들로 가득 차있는 주머니”(?헤겔 전집?, 제4권, 237쪽)라는 생각을 단지 체계화한 것뿐이며, 그래서 결국 유한한 현상들만 다루는 “심리학적 관념론”에 속한다. 초기 피히테는 그런 칸트와는 달리 주관성의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칸트의 선험적 연역의 초판에서의 중심 개념인 구상력을 이론적 자아의 중심이자 실재적인 근본능력(Grundkraft)으로 해석하면서, 기초존재론자인 하이데거가 선험적 연역의 초판에서의 구상력 개념을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구성적인 구상력을 감성과 오성의 공통 뿌리로 규정한다.

 

예나 시절의 초기 헤겔은 칸트와 피히테의 주관성 이론을 발전시켜 생산적 구상력을 이성 자체로서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해석하면서 이 동일성이 유한한 경험적 현상 세계에 있어서는 감성과 오성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해석한 칸트의 구상력 개념을 통해서 바로 칸트의 순수통각 개념이 사변-논리적인 의미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칸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의 개념을 통해 사유주관의 객체구성적 종합과 자기관계의 필연적 연관성을 해명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순수한 자기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객체구성적 종합이 어느 정도로 자기의식의 자기연관성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명백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칸트는 주관의 자기표상에서 제기되는 순환 논증의 문제와 그런 자기표상에서 표상하는 주관은 끝없이 전제된다고 하는 주관의 무한한 전제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이것은 통각, 정확히 말해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에 대한 칸트 이론이 결국은 독일관념론적인 자기의식의 모델, 즉 주관-객관-관계 혹은 주관-객관-통일의 모델과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관념론적 운동사는 위의 칸트 비판과 관련해서 궁극적으로 하나인 두 종류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독일관념론이 주관의 자기의식의 역사에서 주관성의 통일의 이념을 실현하면서 칸트의 능력 다원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떻게 정신의 여러 능력들이 자기관계의 목적론적 원칙에서부터 체계적이고 역동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어떻게 객체가 점차적으로 주관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주관이 객체에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맨 처음 Reinhold가 제시한 주관-객관-관계의 독일관념론적인 자기의식 모델은 그것이 위의 과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