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화 속의 성(sexuality) 담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 성 정치학의 관점에 따른 영화 분석을 중심으로
김 재 기**경성대
I. 요즘 들어 성에 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양한 문화 매체들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여, 현대 문화 속의 성 담론을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예시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나는 성 정치학의 시각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성에 대한 전통적(생물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견해들이 지닌 난점을 극복하고 성을 역사적·사회적 구성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글이 다루는 '성'(sexuality)은 생물학적 의미의 '섹스'나 좁은 의미의 성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성적인 것'(the sexual)으로 이해하고 있는 총체다. 구체적인 논의 자료로는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는 현대 문화를 대표하는 대중적 텍스트 중 하나이며, 영화 속에서 성은 풍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II. '성 정치학'은 한 마디로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성의 다의성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며, 더 나아가 현존하는 권력 투쟁의 장을 넘어서서 우리가 성이라는 이름으로 총칭하는 것, 즉 본능, 욕망, 관계, 관습, 구체적 행위, 그리고 이념들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 따라 나는 보이지 않는 미시 권력을 작용을 '타자의 개입'으로 명명하고, 이를 다시 두 측면에서 서술하였다. 첫째로 나는 먼저 두 편의 성애 영화를 골라, 그 속에서 권력이 어떤 형태로 어떤 담론을 따라 성의 의미를 구성하는지 살펴 본 뒤에, 둘째로 미시 그러한 권력이 관능성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간략히 논하였다.
III. 권력이 성의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분석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영화는 "감각의 제국"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다.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인 성애 영화이며 사적인 성 관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더구나 두 영화 속에서 성은 평범하거나 아름답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극단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모습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작용과 연관시킬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감각의 제국" 속의 성 담론은 쾌락의 담론이지만, 극단적인 새도매저키즘의 양식으로 표현되는 그 쾌락은 사실 권력의 은유이자 환유다. 하지만 그 권력이 유미주의(唯美主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약화된다. 반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속의 성 담론은 부정(否定)의 담론이며, 그 부정은 직접적으로는 부정을 통한 역설적 자아 성찰로, 간접적으로는 숨어 있는 권력에 대한 냉소와 환멸로 형상화된다.
IV. 영화 속의 성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제가 '관능성'의 문제다. 시각 이미지의 위력에 의해 좌우되는 관능성은 얼핏 보면 권력의 작용과 무관한 듯하다. 그러나 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자체를 분석해 보면, 여기서도 권력의 개입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관능성은 육체와 시선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시선이다. 시선은 일정한 틀에 따라, 일정한 전략에 따라, 코드화된 쾌락에 따라 관능을 생산한다. 흔히 관능성이나 에로티시즘을 남성적 시선(남성적 관음주의)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남성도 진정한 주체가 아니다.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관능성을 즐기는 남성은 수혜자임이 틀림없지만, 남성 또한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조종되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에로틱한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자아 성찰도 허용하지 않는 수동적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V. 성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와 인간 삶의 조건을 좀 더 깊이 성찰하도록 해 주는 기호학적 지표이며, 이 글 또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성 담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성은 잘 정돈된 화학식이나 원자 구조 같은 어떤 불변의 본질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역사적·정치적으로 구성되는 복잡한 축조물, 여러 힘들이 상호작용하는 미로 같은 그물망이다. 현대 문화 속의 수많은 성 담론들은 그 기둥이고 들보이며, 씨줄과 날줄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성 정치학의 출발점이다.
영화 속의 성애 묘사나 그 묘사를 통해 진술되는 담론들은 권력의 은유이자 환유이며, 또 그러한 권력을 은밀하게 미화하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영화 속의 성은 문자 그대로 기호학적 독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능성의 경우에는 사정이 어떠한가? 관능성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작용은 현실의 성 관계에서 더 거세게 작용하지만, 이 영역에는 우리의 실천의 몫이 남아 있다. 기존 권력에 대해 성찰하고 저항하면서 새로운 성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에 대한 진지한 영화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러한 공간이 그 무대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순수한 에로티시즘의 미학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관능적 영상이나 성애의 묘사는 성애의 다양한 의미와 그 속에 작용하는 권력에 대한 성찰과 연결될 때에만 간접적으로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주요어 : 성(sexuality), 성 담론, 성 정치학, 권력, 타자의 개입, 관능성
I.
오늘날 성(sexualit ) 담론의 해방에 의해 고무된 성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없다. 또 욕망의 여러 모습들(figures)이 널리 만연함에 따라 욕망보다 더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장 보드리야르
'성'(sexuality)에 관한 담론이 폭발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싸구려 주간지나 여성 잡지의 한 구석을 비밀스럽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던 성이 이제 공식적인 무대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성을 다뤄 왔던 문학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이 문제에 관한 한 비교적 점잖은(?) 태도를 지켜 왔던 신문, 잡지를 비롯하여 방송이나 이론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공중 매체도 이제 이 메뉴를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메뉴의 다양함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 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아주 오래된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 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수 천년 동안 원주민들이 살아 온 땅을 방문하고서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콜롬부스처럼 우리 모두가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흥분에 들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 속에서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시대, 치열한 사회적 실천이 시들어 버린 시대의 보수주의와 개인주의를 읽어 낼 수도 있고, 독점 자본의 간교한 음모와 천박한 선정주의를 짚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진단에 별로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성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콜롬부스의 모험이 단순한 약탈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진로를 바꿔 놓았듯이, 성 담론의 폭발은 그 물적 토대가 무엇이든, 또 논자들의 개인적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삶과 이념적 지형을 상당 부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성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통속적인 시각은 대개 생물학적 결정론, 도덕주의, 자연주의와 혼합된 신비주의 또는 삼류 쾌락 이론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입장들은 그 나름대로의 근거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 중 일부는 옳은 것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입장들이 종종 성에 대한 진지한 인문학적 반성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문학적 반성은 대상 자체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그러한 고찰의 결과이자 내용물인 담론에 대한 메타적 반성이기도 하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성 그 자체는 없다. 있다면 벌거벗은 육체와 성기들, 그 육체의 움직임과 부딪침이 있을 뿐이며,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운동이 빚어낸 부유하는 느낌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을 뿐이다. 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욕망이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욕망은 견고한 사물들처럼 실재하지 않는다. 욕망이 문제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지평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없이 많은 우연한 사건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들(기구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새로운 지평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은 좀 더 구체적으로 수많은 하위 담론들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러한 담론들이 현대 문화의 휘황찬란한 외양과 풍부한 레퍼터리 속에서 자신을 실현시킬 때 혼란은 가중된다. 마치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했던 상품물신성(Warenfetischismus)의 비밀과도 같이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성은 사회적·역사적·정치적 구성이라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감추고 하나의 견고한 본질, 하나의 자연물로 둔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이나 현상적 변화를 추적하는 탐구보다도 다음과 같은 물음이 더욱 근본적이다. 상이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최근의 성 논의들은 어떤 메타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성 담론의 폭발을 하나의 의미있는 문화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나면 결국 중요한 것은 성의 담론적 구성에 대한 고찰이며, 이러한 고찰은 불가피하게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의 관점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의 특권적 영역,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그 특수한 기능을 직접적으로 수행해내는 영역은 언어이며" 따라서 성 담론에 대한 메타적 분석은 결국 담론 속에 숨겨진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연구에는 일정한 물질적 자료들이 필요하며, 인문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먼저 성 정치학의 기본 시각을 소개한 뒤, 현대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산물이자 종합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를 하나의 논의 자료로 이용하려고 한다. 왜? 물론 이것은 단순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가장 그럴듯하게 재현하며 동시에 바로 그 때문에 가장 독창적으로 왜곡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감각으로 붙잡거나 고정시킬 수 없는 '의미'라는 괴물과 싸워야 하는 인문학에서 영화는 분명 매력적인 텍스트, 그것도 대중적인 텍스트이다. 그러나 이 글은 결코 본격적인 영화 비평은 아니며, 앞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을 다 다룰 수도 없다. 이 글의 관심사는 한 마디로 영화 속의 성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성을 소재로 다룬 몇 편의 영화를 골라 그 텍스트가 드러내는 성 담론들에 대해, 또 그 담론들에 의해 구성되는 성의 의미에 대해 고찰해 보는 이 글은 성 담론에 대한 본격적이고 좀 더 체계적인 철학적 고찰을 위한 일종의 예시적 시론인 셈이다.
II.
중요한 점은 어떤 형태 아래 어떤 수로(水路)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은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미끄러지듯 스며드는가, 어떤 도정이 권력으로 하여금 희귀하거나 감지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들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일상적 쾌락에 침투하여 그것을 통제하는가를 아는 일일 것이다. ― 미셀 푸코
푸코가 "성은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고안된다"고 주장한 이래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성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논의에 익숙해졌다. 사실 이 논의가 푸코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의 주장이 성 개념 그 자체를 문제삼음으로써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거론되던 세부적인 주제들(예컨대 무엇이 우리의 성 행동과 신념을 좌우하는가 등등)에 대한 연구 작업을 증폭시키고 한 단계 상승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금세기 초에 빌헬름 라이히를 비롯한 프로이트 좌파, 콜론타이 등의 급진적 맑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성 정치학의 토대가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은 마르쿠제의 이론이나 사이먼 등의 사회학적 연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60년대 이후 보편화된 페미니즘 운동이나 게이 운동 등과 같은 실천들도 성 정체성과 성 관계를 지배 권력과의 연관 아래서 다룸으로써 성 정치학의 진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면 도대체 "성은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성 정치학이라는 개념의 성립 과정이 복잡한 만큼 이에 대한 답은 물론 쉽지 않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마도 소박한 생물학주의를 극복하고 '권력의 개입'으로 구성되는 '성의 다의성'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모호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 명제를 직접적인 실천의 맥락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래서 성 관계나 성 정체성에 개입하는 구체적인 권력을 겨냥하고 이에 저항함으로써,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나 불평등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매우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사실 성 정치학의 이론적 실천적 효과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포르노의 금지에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또는 포르노가 여성을 억압하는가 아니면 여성에게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등등과 같은 해묵은 논란들을 제대로 풀기 위해서도 성 정치학의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본래 '정치적'(political)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선 그리스어 어원대로 '공동체적'이라는 뜻이며, 거기에 지배와 권력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졌다. 따라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공동체 속에서 행사되는 힘을 가리키는 용어다. 생물학적 본능이나 모호한 욕망을 넘어선 어떤 힘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 만유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해방의 유일한 가능성은 그 힘의 근원과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데서 나올 뿐이다. 따라서 성 정치학은 현존하는 권력 투쟁의 장을 넘어서서 우리가 성이라는 이름으로 총칭하는 것, 즉 본능, 욕망, 관계, 관습, 구체적 행위, 그리고 이념들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논의의 자료로서 영화를 선택한 이상, 영화 속의 성 담론들을 개괄해 볼 필요가 있다. 성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영화 속의 성 담론 중 가장 많이 거론되어 온 것은 페미니즘의 문제와 요즘의 동성애 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성 정체성의 문제였다. 물론 한 발 더 나아가서 헤겔이나 프로이트, 라깡이나 보드리야르, 심지어 들뢰즈까지 끌어들여 욕망의 정치학을 구성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단지 성의 다의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 속에서 어떤 힘이 행사되는가라는 보편적 문제를 두 편의 영화를 대비시켜 가며 간략하게 언급한 뒤에,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적 특성('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에 따라 부각되는 '관능성'(sensuality)의 문제만을 다뤄 보려고 한다. 페미니즘이나 성 정체성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또 지금 이 글에서 욕망의 정치학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논의의 초점을 압축하기 위해 나는 우선 '타자의 개입'이라는 개념을 거론할 것이다. '타자'(l'Autre)라는 용어는 물론 정신분석학에서 빌어 온 것이지만, 여기서 이 용어는 라깡의 이론에서처럼 정교한 개념 장치는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나 논리적 서사를 통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모든 유형 무형의 힘들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용어는 다분히 모호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정치학의 관점에서 성의 다의성을 분석하는 데 꼭 필요한 기본 토대인 동시에 관능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관능성'에 대한 담론의 수준은 성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서 일종의 약한 고리였다. 관능성, 때로는 잘 조직되고 표현된 관능성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이라는 문제는 순수하게 생물학적이고 심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거나 남성적 관음주의(voyeurism)의 혐의 아래서 가볍게 무시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능성 속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일 관능성의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성 정치학의 지평은 경험적 사회 연구의 틀을 넘어서서 인간 존재론으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모든 사랑의 행위는 제 3자를 포함해야만 한다."(Every act of love must in- clude a third person) ― 영화 "엠마뉴엘" 중에서
사실 "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성은 우리의 기원이며 토대이고, 동시에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성은 인간 관계와 사회 제도를 규율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고 권력이며 이념이다. 성은 끈적거리는 욕망과 누를 수 없는 충동의 대명사이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 정신의 순수함과 고귀함을 시험하는 잔혹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또 성은 모든 아름다움과 쾌락의 근원이며, 추잡함과 고통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핵심은 성이 모두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알 수 없는(알아서는 안되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 담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은 신비, 생명, 본능, 쾌락, 금기, 커뮤니케이션, 자기 완성 등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러나 근대 부르주아지에 의해 침실과 광장, 즉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인위적 분리가 완성된 이후로 '프라이버시'(privacy)라는 개념은 우리가 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중추가 되어 왔다. 결코 사회의 통제와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성이 개인의 자유, 낭만적 사랑이라는 슬로건과 결합하면서 밀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를 낳은 저 빅토리아 시대의 음울함까지 회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성을 전적으로 '사적(私的)인' 문제로 이해한다. 중세적이고 종교적인 금욕주의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세속주의자들조차 하드 코어 포르노에 대해서는 격분을 금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단순한 위선이 아니다. 음란성의 본질은 특정 행위의 구체적 성격에 있다기보다는 그 행위의 공개성 여부에 있다. 침실의 커튼 뒤에서는 모든 것이 용인되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평범한 허벅지조차도 구제불능의 외설이 되는 비밀! 그러나 개인들을, 그들의 의식과 행위를 밀실 안에 가둬 두고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조종하려는 근대 사회의 음모는 그 밀실 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폭로 앞에서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은밀하게 은폐된 사적인 공간 속에 이미 침투해 들어와 있는 어떤 힘의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야말로 성 정치학의 토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타자를 몰아내고 진정한 나만의 공간을 방어하는 데 있지 않다. 왜?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 타자의 시선 아래서 그 타자와 함께 나의 욕망과 의식과 행동을 재축조하는 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성의 다의성의 뿌리가 드러난다. 우리는 성을 주제 또는 중요한 소재로 다룬 거의 모든 영화들에서 그 타자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확인이라는 말은 너무 지나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일종의 독해 방식이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그 타자의 존재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감춰져 있거나 배경으로 스쳐 지나갈 뿐이며, 한 마디로 텍스트 밖으로 밀려난 텍스트이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보이스-오버(voice-over)다. 극단적인 실험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전통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따르는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는 서사 구조도 인물들의 성격도 그 타자의 존재를 상세하게 분석하거나 직접 설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른바 성애 영화 속에서 타자의 존재를 읽어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마 서사 구조를 감싸고 있는 총체적 상황을 읽어내거나(이 경우에는 많건 적건 작가의 세계관이 문제된다), 대사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성 의식 밑에 깔린 이데올로기를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인 방식일 것이다. 물론 양자는 때때로 서로 얽혀든다. 첫 번째 방식이 더 쉽고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좀 더 숙고를 요하는 작업이다. 먼저 이른바 일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은(이런 평가는 물론 상대적이다) 두 편의 성애 영화 속에서 권력이 어떤 형태로 어떤 담론을 따라 성의 의미를 구성하는지 살펴 보자.
우리 나라에는 정식으로 수입된 적이 없지만 인구에 널리 회자된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감각의 제국"(愛の コリダ, 1976)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던 '대일본 제국' 안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물론 이 영화는 외설성 논란과 재판 때문에 유명해졌고, 거의 하드 코어 포르노에 가까운 묘사 때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우선 이 글에서는 영화의 이른바 작품성, 영화적 완성도나 심미성에 대해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겠다. 작품성에 관한 논의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이 글의 관심의 초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문제는 일단 옆으로 밀어두자는 말이다. 얼핏 보면 "감각의 제국"은 "에로티즘이란 죽음에 이르는 욕망"이라는 바따이유의 테제에 걸맞는 듯한 작품이다. 지극히 사실적이고 단순한 묘사 속에서도 가와바따 야쓰나리(川端康成)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유미적(唯美的) 화면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 성에 대한 역겨움과 더불어 황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묘한 교차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이 영화가 가진 힘과 매력은 단순히 기괴한 스토리나 적나라한 성애 묘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하게,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머뭇거리면서 에로틱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들이 텅빈 기표들의 화려한 무대, '기호의 제국'다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 영화의 표면을 지배하는 것은 아마 '쾌락의 담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스터즈와 존슨 식의 과학적 담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르노그라피의 담론도 아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화면은 관객들의 색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환상의 조작을 통해 인간의 욕망에 아부하는 것이 포르노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포르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차분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전편에 걸쳐서 강조되는 것은 아집을 거쳐 자기 파괴로 나아가는 성애의 쾌락이며, 그것은 그 자체가 권력인 동시에 실재하는 더 큰 권력의 은유다. 물론 영화 속에는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보여 주는 단서가 별로 없다. 굳이 찾는다면 1936년이라는 연대와 지친 남자 주인공 옆으로 제국 군대가 행진해 가는 모습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한궤도를 질주하는 성애의 쾌락은 출구가 막혀 버린 채 내파(內破)되어 가는 힘이며, 이 힘은 파쇼적 절대 권력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 아니, 단순한 은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 행위 도중에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그 요청에 따라 상대를 죽이고 그 성기를 칼로 자르는 극단의 폭력은 분명히 새도매저키즘의 표현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새도매저키즘은 단지 개인의 기이한 성적 취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불평등하며 서열화된 사회 경험 구조(가부장제, 자본주의, 관료제, 군국주의 등등)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은 침실이 아닌 다양한 영역과 상황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거꾸로 침실 속의 새도매저키즘은 종종 이러한 모습의 거울이다. 따라서 "남을 통제하거나 자신이 통제받으려고 하는 강박적인 열망은 인간의 총체적 삶에 침투해 있고 다양한 양식의 외양을 하고서 스스로 작용하는 일반화된 감정이며, 무정형적이고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들의 행위는 사회적 권력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환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이 영화는 그러한 권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영화 속에 묘사된 이 힘이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치 절대 권력의 최후에는 비장미가 따르듯이...... 이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일본 남자들은 원래 툭하면 전쟁터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여자의 사랑과 만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감각의 제국"의 남자 주인공도 그런 사람이다." 작가의 죽음이 논의되는 마당에 감독의 생각이야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얼핏 들으면 남녀 간의 순수한 관능적 사랑을 그린 영화라는 말처럼 들리는 감독의 발언 속에 사실은 그 이상이 들어 있다. 지극히 일본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 영화 속에는 일본의 독특한 성 문화와 사무라이의 그림자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시마 나기사는 젊은 시절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좌파 감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 경향이 일정한 변화를 겪은 이후에 만들어진 이 영화를 비판적인 정치 영화로 억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인공의 죽음은 미시마 유끼오(三島行男)가 추구했던 파쇼적 탐미주의의 냄새마저 풍긴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단말마적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쾌락의 담론은 그들을 둘러싼 상황과 맞물려 권력의 담론으로 변형되며, 그 권력이 심미적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의 색깔을 규정하고 영화 속의 성 담론에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성의 본질이란 결국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극단의 쾌락을 통해서 표출된다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그 쾌락은 더 큰 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힘은 파괴적이지만 아름다우며, 아니 오히려 파괴적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 영화와 외양이 사뭇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예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197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감각의 제국"과는 달리 유미적인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화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잿빛 도시만큼이나 건조하고 우울하며, 오렌지색 조명 아래서 격정적인 섹스에 몰입하는 육체는 배경과 뒤범벅되어 굴절하면서 고통스럽게 녹아내린다. 남자 주인공 폴은 모든 사회 관계가 배제된, 이름도 모르는 상대와의 섹스를 통해 타자의 개입으로부터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애쓴다. 모든 언어를 금지하고 이를 통해 모든 논리와 규칙과 규제까지도 무화(無化)시켜 보려는 폴의 안타까운 몸짓은 "Nous prohibons toutes les prohibitions!(우리는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라고 절규했던 68년 5월 혁명의 구호를 생각나게 한다. 물론 이 허망한 시도는 비극으로 끝나 버리지만...... 이 영화 속에는 주인공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유일한 단서라면 1958년의 알제리 사태와 1968년이라는 숫자, 그리고 베일에 싸인 폴의 과거가 아주 잠깐 언급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톨루치 감독의 전력 때문인지 이 영화를 1968년이라는 해와 연결시켜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굳이 길게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어떤 평자의 말처럼 "프로이트와 맑스를 섞어 놓은" 영화, "68년 혁명 세대가 자신들의 내부를 향해 던지는 화염병" 같은 영화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폐쇄된 공간에서 포르노처럼 반복되는 성애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폴과 잔의 섹스는 얼핏 보기에 동물적이다. 반복되는 무의미한 성 행위 속에서 폴의 노화된 육체(결코 섹시하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점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며, 이러한 변형은 폴의 개같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동물적 본능이나 정욕 때문이 아니다. 어떤 동물도 그토록 게걸스럽게 섹스에 몰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포르노란 단순하기 때문에 지겨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그 지겨움의 지옥 속으로 도피하도록 만드는 타자의 존재다. 허공을 가르며 서로 스쳐 가는 듯한 등장 인물들 간의 대사를 통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살한 아내의 시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독백을 쏟아내는 폴의 모습을 통해서 베르톨루치는 고통과 좌절 속에 파괴되고 소멸해 가는 내면의 감정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날카롭게 응시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결코 그 감정에 편안하게 동화될 수 없다. 잔으로 하여금 자신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게 하고 돼지 새끼의 똥을 핥으라고 주문하는 폴의 새도매저키스트적 몸부림 앞에서 우리는 근대 세계와 모더니즘과 혁명적 유토피아가 추구해 왔던 기만적 이상에 대한 자기모멸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진술하는 성 담론은 냉소적이며 허무하다. 체제의 혁명이 없는 침실의 혁명은 가능한가? 하지만 파편화된 육체와 기억들이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꼴라쥬는 오히려 주인공들을 극단으로 내몰았던 욕망과 감정에 대한 자기성찰적 반성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성애의 의미와 그 뒤에 숨은 타자의 실체에 대한 반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68년 혁명 세대의 패배주의를 담고 있긴 하지만, "감각의 제국"과는 달리 모더니즘 이후의 삶의 조건에 대한 일종의 좌파적 답변이다.
넓게 보면 성애의 다양한 의미를 권력과 연계시킨 영화들은 아주 많다. 베루톨루치의 대표작인 "순응자"(Il conformista, 1970)에서부터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The night porter, 1974), 새도매저키즘과 성도착의 극단적 묘사를 통해 파시즘의 광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이미 고전이 되어 버린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Sal o le 120 Giornate di Sodoma, 1975),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이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The cook, the thief, his wife and her lover, 1989) 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아마 여러 가지로 논란을 빚었던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 "경마장 가는 길"(1991)이라든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심지어 "꽃잎"(1996)이나 "나쁜 영화"(1997) 등에 담겨 있는 성 담론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장선우의 영화들은 몇 가지 한계로 인해 여성계 쪽의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성 정치학의 관점은 이러한 비판까지도 함께 담아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타자의 은밀한 개입 앞에서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성의 다의성은 성 정치학의 중요한 토대이자 탐구 대상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성 의식 밑에 깔린 이데올로기를 읽어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지면의 제약도 있거니와, 이 방식은 기존의 논의들, 특히 페미니즘 비평 등에서 상세히 다뤄졌기 때문이다.
IV.
(욕망 앞에서) 의식은 자신이 육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관하고, 스스로 육체가 되고자, 오직 육체로 남고자 한다. ― 장-뽈 사르트르
욕망으로 뻣뻣해진 당신이 전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을 만족시키는 대상이란 열정에 찬 격심한 분노로 귀착되는 일종의 희생자다. ― 마르끼 드 사드
성 담론 또는 담론화된 성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아마 관능성의 문제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성애의 다양한 의미를 구성하는 상황의 개입이 부분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데 반해, 관능성은 시각 이미지의 위력을 빌어 전면에 떠오른다. 관능성은 오랫동안 미학적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진지한 철학의 대상은 아니었다. 관능성이나 에로티시즘의 문제는 너무 변덕스럽거나 지나치게 통속적이었기 때문일까? 사실 오늘날에도 에로틱한 영화들은 대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집어 넣거나 화면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영화 속에서 많건 적건 관능성은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으며, 관객들 또한 이를 즐겨 본다. 왜일까? 뻔하면서도 우리를 사로잡는 관능성의 마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또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에로틱한 영화들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기술적으로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로는 예술 영화로 지칭되는 성애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총괄적인 주제 의식이나 기술(촬영 기법, 조명, 화면 구도, 편집 등등)에 대한 심미적 평가 때문이지 관능성 그 자체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저질 포르노와 아름다운 성애 영화 사이의 경계는 늘 모호하며, 또 그 경계를 가르는 것이 이 글의 주제도 아니다. 사실 주류 상업 영화에서 발견되는 관능성의 이미지는 특별한 분석이 필요치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적당히 가려지고 적당히 노출된 미끈한 살덩어리들, 출렁이는 젖가슴과 땀방울, 감긴 눈과 벌어진 입술, 신음 소리 등등......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에 나타난 관능성, 또 영화 자체의 관능성에 대해서 무엇을 논할 수 있을까? 에로틱한 영화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가능한가? 관능성의 정치학은 가능한가? 앞서도 말했듯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영화의 관능성을 남성적 관음주의로써 설명하려는 시도는 꽤 설득력있고 실천적으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미흡하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편 맥도나우(Maitland Mcdonagh)처럼 '에로틱한 영화'를 '로맨틱한 영화'와 '포르노'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적 위력을 고려하면 이 또한 수긍할 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에로티시즘이 로맨스와 포르노의 산술 평균은 아니다. 에로티시즘을 "일상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종의 제의(祭儀)"로 설명하고자 했던 바따이유의 통찰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관능성이 경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탈의 순간은 언제, 어떻게 찾아오는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관능성은 육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육체 속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육체가 되고자 하는 의식의 욕망이야말로 관능성의 토대인 것이다. 그러나 살덩어리로서의 육체 그 자체가 관능성의 생산지는 아니다. 존 버거(John Berger)가 말했던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ed)의 차이는 관능성의 이해에서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육체가 다른 육체와 마주칠 때, 그것도 일차적으로는 다른 시선과 마주칠 때 비로소 관능성의 가능성이 열린다. 육체의 건너편에는 언제나 또다른 육체,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며, 타자의 응시(regarder)를 의식하고 이에 응답하는 순간 나는 자아를 지닌 한 인간이 되고 나의 육체 또한 생명력을 얻는다. 자각된 육체로서의 나는 다시 타인의 육체를 바라보며, 이제부터 아집과 지배를 향한 권력의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타자가 개입할 때 사르트르의 순진한 실존주의는 파산하는 것이다. 애드리안 라인(Adrian Lyne) 감독의 "나인 하프 위크"(Nine 1/2 Weeks, 1986)에서 남자 주인공 존이 엘리자베스를 만나 정사를 벌일 때 맨먼저 요구한 것은 그녀의 눈을 가리는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장님이 되어 버린 엘리자베스의 옷을 벗기면서 존은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당신의 몸을 보고 있어." 이 장면을 남성적 관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시선의 봉쇄와 독점을 통해 권력이 노골화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 권력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에로티시즘이란 적나라한 충동과 그 충동의 즉자적 해소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 욕망의 정체성을 축조해 가는 과정에 있으며 그 욕망을 육체로써 드러내려는 기대감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은 잘 짜여진 전략에 비유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전략을 입안하고 지휘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주어진 전략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선택하고 실천하고 또 혜택을 누리는 자는 물론 남성이다. 그러나 남성이 권력의 진정한 주인공인가? 아니면 유혹자로서의 여성이 주인공인가? 우리가 본능이라고 부르는 생물학과 DNA가 그 주인공인가? 어쩌면 '주체 없는 권력'의 개념을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은 성의 관능성인지도 모른다. 육체와 시선의 교차 속에서 등장하여 관능성을 구성하고 이끌고 통제하는 권력의 힘은 무엇인가?
사회학자인 장-끌로드 꼬프만(Jean-Claude Kaufmann)은 {여자의 육체, 남자의 시선}이라는 책에서 해변의 토플리스 여인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아주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육체 그 자체가 보편성, 관능성, 아름다움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물론 이 분류 사이의 경계는 늘 유동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육체의 다면화가 육체 그 자체가 아닌 시선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선 또한 자유로운 선택자는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육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마치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처럼. 목욕탕에서, 해변에서, 침실에서, 미술관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눈으로 육체를 바라보며, 그 시선은 우리 욕망의 표현인 동시에 지침이기도 하다.
헐리우드 식 주류 영화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영화 속에 나타나는 육체, 특히 여성 육체의 관능성이 남성의 시선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 자체가 갖는 관능적 성격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볼 수 없는 것, 보아서는 안되는 것까지도 보며, 게다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검열이라는 괴물만 제외하면) 즐기면서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까지도 우리 시선의 일방통행식 지배에 의해서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것이 되어 흥분과 쾌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 시선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성욕을 느끼기 때문에 그 욕망을 해소하려고 포르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느끼기 위해서, 즉 욕망의 발동이 가져다 주는 그 떨림과 긴장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 일부러 포르노를 찾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일정한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스크린을 응시한다. 이것은 잘 학습된 행동, '숨은 신(神)'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의 명령에 따르는 행동이며, 보드리야르의 표현대로 "쾌락의 코드 위에서" 진행되는 놀이일 뿐이다. 이러한 관습과 규칙이 깨져 버릴 때는 어떤 나체도 관능성의 쾌락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예컨대 "헨리와 쥰"(Henry and June, 1994)은 분명히 관능성을 다룬 영화이지만, 남근주의의 대표 작가인 헨리 밀러의 관점이 아니라 정반대로 뒤집어진 여성 작가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남성들에게?) 그다지 편안한 쾌락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물론 여성적 관점이라는 것도 관능성의 문제에 관한 한 근본적 변화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델마와 루이스"(Thelma and Louise, 1990)처럼 관능성과는 거리가 먼 전투적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면, 여성적 시각을 앞세운 관능적 영화들 또한 기존 권력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기껏해야 "에로티카"(Erotique, 1993) 수준의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반항에 머물기 쉽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여성적 관점의 포르노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내 대답 역시 회의적이다. 아마 흔히 남성적 관음주의로 지칭되는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포르노가 있다면, 그건 이미 더 이상 포르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에로틱한 영화를 보는 것은 상상 속에서 진행되는 변형된 권력 게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기 때문에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으며 주어진 권력을 고정시키고 어떤 자기성찰적 반성도 허용하지 않는 게임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Boxing Helena, 1993)라든가 "비터 문"(Bitter Moon, 1994)처럼 관능성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왜 강박 관념이나 새도매저키즘 같은 성도착을 단골 메뉴로 다루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굳이 사드 후작의 통찰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V.
이제 미흡하나마 마무리를 하기로 하자. 성 담론이 폭발하고 다양한 문화적 매체들 속으로 확산됨에 따라 성은 중요한 인문학적 고찰 대상이 되었다. 성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와 인간 삶의 조건을 좀 더 깊이 성찰하도록 해 주는 기호학적 지표라는 사실이 다각도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 글 또한 그러한 확인 작업의 일환으로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적 탐구가 지속될수록 성은 잘 정돈된 화학식이나 원자 구조 같은 어떤 불변의 본질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역사적·정치적으로 구성되는 복잡한 축조물, 여러 힘들이 상호작용하는 미로 같은 그물망임이 밝혀진다. 현대 문화 속의 수많은 성 담론들은 그 기둥이고 들보이며, 씨줄과 날줄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성 정치학의 출발점이다.
이 글은 성 정치학의 관점을 전제로 현대 문화 속의 다양한 성 담론들을 분석하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했으며, 먼저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이른바 '타자'로서의 권력이 텍스트 속에 개입하여 생성해 내는 메타적 의미들을 점검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영화 속의 성애 묘사나 그 묘사를 통해 진술되는 담론들이 권력의 은유이자 환유이며, 또 그러한 권력을 은밀하게 미화하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는 실례를 보았다. 이런 면에서 영화 속의 성은 문자 그대로 기호학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이어서 관능성의 문제를 보이지 않은 권력의 작용과 연결시켜 본 결과는 어떠한가? 사실 현실 속의 성은 관능성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육체를 전장으로 삼아 우리가 가진 모든 힘, 물리력, 이데올로기, 감정 등이 무기로 총동원되는 전투 앞에서 영화 속의 관능성이라는 황홀경은 단지 하나의 계기, 그것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관념의 욕망에 붙여진 이름표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이러한 관념적이고 기호적인 놀이에 대해 도덕적인 평가를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능성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작용은 현실의 성 관계에서도 여전히, 아니 더욱 더 거세게 작용하지만, 이 영역에는 우리의 실천의 몫이 남아 있다. 기존 권력에 대해 성찰하고 저항하면서 새로운 성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에 대한 진지한 영화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러한 공간이 그 무대가 될 것이다. 다소 성급하게 말하자면 영화에서 순수한 에로티시즘의 미학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연인"(L'amant, 1992)처럼 비교적 잘 꾸며진 영상미를 자랑하는 영화의 경우에도 그 영화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관능성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능적 영상이나 성애의 묘사는 성애의 다양한 의미와 그 속에 작용하는 권력에 대한 성찰과 연결될 때에만 간접적으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참 고 문 헌
김재기, [섹스와 철학?---어떤 강의에 대한 보고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대와 철학} 제10호, 동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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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ese days the discourses of sexuality are expanding and exploding, so we can see their concrete appearances in various media. This essay gives attention to this phenomena, makes the discourses of sexuality in the contemporary culture a subject of philosophical study and tries to make an exemplary analysis. For this work I introduce the viewpoint of 'sexual politics' because I think it enables for us to surmount the difficulties of the traditional(biological or metaphysical) views on human sexuality and to understand human sexuality as a historical and social construct. Therefore 'the sexuality' in this essay is neither the 'sex' in biological sense nor the sexual actions or relations in usual sense, but a totality that is composed of what we call 'the sexual'. I select some films as material for more concrete analysis. I think the film is one of the best popular text in the contemporary culture and in the film human sexuality is dealt with very abundantly and diversely.
II. 'Sexual Politics' is in a word an insight into the ambiguity of human sexuality that is constructed by many micro-powers, moreover an insight into the structure and meaning of what we call 'the sexual', that is instincts, desires, relations, customs, concrete actions and ideas. From this point of view I name the working of micro-powers 'the intervention of the Other' and describe this in two aspects. Firstly, I select two erotic movies and see how the power makes the meaning of human sexuality in what figures and with what discourse in these movies. Secondly, I discuss what role the power plays in making sensuality or eroticism in the film.
III. For analysing how the power make the meaning of human sexuality, I select two movies, "In the Realm of the Senses" and "Last tango in Paris". Both are naked erotic movies and deal with the private sexual relations, but in some senses can be interpreted as having the political messages. Besides in these movies human sexuality is not described as something plain or beautiful but is expressed as something extreme and self-destroying. I think the real meaning of these aspects can be understood well only in relation to working of the power that we cannot see directly in the screen. The discourse of sexuality in "In the Realm of the Senses" is a kind of discourse of pleasure, but in fact the pleasure expressed in the extreme sadomasochism is a metaphor and metonymy of the power. But in this movie the critic or reflection of that power is weakened because it is described as something very esthetic. On the contrary, the discourse of sexuality in "Last tango in Paris" is a kind of discourse of negation. This negation is directly embodied in the self-reflection through self-negation, and indirectly embodied in the cynicism and disillusion at the hidden power.
IV. We have to deal with another theme, 'the sensuality' when we discuss human sexuality in films. The sensuality much influenced by visual images seems like foreign to working of the power. But if we analyse the structure itself that makes the sensuality, we will find that the intervention of the power is very important here also. The sensuality is made through meeting of the body and the gaze, and it is not the body but the gaze that is important here. The gaze produces the sensuality according to the established rules, the strategies, and the encoded pleasures. It is usually said that the sensuality is made by the gaze(voyeurism) of the men, but in fact the men are not the real subjects. Of course the beneficiaries are the men who can enjoy the sensuality in the patriarchic culture, but they also participate only passively in the game that is controlled by the invisible micro-powers. Therefore to see the erotic movies is nothing but a passive play that doesn't allow any self-reflection.
V. The sexuality is not a subject of simple curiosity but a semiotic index that enables us to reflect more deeply upon what the human being is and how the situation surrounding them is. This essay also have some values only if it serves such reflection. The result of the philosophical consideration is as follows: Human sexuality cannot be understood as a immutable essence but have to be understood as a intricate construct that is made by many social, historical and political factors or a complicated network in which many micro-powers interact one another. Many discourses of sexuality in the contemporary culture are pillars and crossbeams of that construct. And the insight into this fact is the beginning point of sexual politics.
The descriptions of sexuality in the film or the discourses expressed in those descriptions are metaphors or metonymies of the power. And they sometimes beautify the power in secret or sometimes reflect upon it sarcastically. In this aspect the sexuality in the film need a literal semiotic reading.
How is the situation in the case of the sensuality? The influence of the power that make the sensuality works much more strongly in the real sexual relations, but there is something for us to do in this real realm. We have to reflect upon and resist the existing power and we can make the new sexual relations and the new mode of communication. If there are any films that deal with human sexuality sincerely, they must be these ones that deal with these problems. There cannot be any pure aesthetics of eroticism in the film. Because the sensual images and the discriptions of human sexuality will get some values indirectly only if they are connected to the reflections upon the various meanings of the sexuality and the power that works 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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