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 그 타자성의 역사
―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계보학 ―
장 문 정**고대 철학
요 약 문
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억압받았던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고 여성성을 찾으려는 이론적, 실천적 운동이다. 이 글은 페미니즘을 추동시키기 위한 이론적 전제들을 확보하려는 예비적 단계로서, 여성 억압의 현실, 즉 가부장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계보학적인 하나의 접근을 시도한다.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것이 남성들만의 계급 이익을 대변하는 거짓된 보편 체계임을 천명하는 것이고, 그렇게 그것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남성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된 것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역사와 달리 계보학적 방법은 누가 권력을 소유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행사의 여러 유형을 여러 담론간에 벌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지도는 가부장제처럼 여러 얼굴을 가진 이데올로기의 파생관계를 해명하는데 유용하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계보학의 첫 번째 이야기는 선사시대에 가부장제가 모권제를 대체하게 된 기원을 추적한다.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구석기, 신석기인의 자연과 여성의 환유적 동일시로 인하여 남성은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을 질투하게 되었고, 가부장제와 더불어 여성을 억압하고 소유함으로써 여성의 능력을 빼앗아갔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러한 가부장제가 오천여년동안 유지되었던 메카니즘을 추적한다. 남성들은 여성을 배제시키는 교환, 심지어 여성을 상품으로 삼는 교환을 통해서 자신들의 연대감을 획득함으로써 여성의 억압을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교환의 고리 속에서 잉여가치로서 자유, 평등, 규범, 합리성, 그리고 주체, 의식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파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고 이것이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 주요어 : 페미니즘, 육체, 이데올로기, 담론, 계보학
1. 서론 :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이 글쓰기의 주체는 보편자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우리이다. 물론 글쓰기의 구조가 한번도 여성적인 것을 표현한 적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문은 불가능한 일이며 모순적인 일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말을 할 수 없다고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말, 빗나가는 말, 히스테리컬한 말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가능한 언어는 남성 역사의 틈, 그래서 타자성의 역사, 그래서 불가능한 역사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그녀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녀는 한 인간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이 세계에 던져졌다. 매순간 다양한 언표를 통해서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도록 환기받았던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강요된 성적 정체성은 부인과 금지와 수동성의 의미들과 같이 실체가 없거나 남성성의 결여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은 세상에는 여성들이 많지만 여성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고, 또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삶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여성성의 경계 넘기를 욕망했다. 그것은 결국 남성성을 흉내내는 여성으로서였는데, 그것까지가 사회가 허용하는 귀여운 반란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팰러스(pallus)적 욕망은 언제나 성취될 수 없듯이, 끝없이 욕망하고 그르치면서 지겹게 유랑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남성의 시선에 아부하는 일이었고 그러한 남성의 시선을 내재화시키는 분열적 의식을 그녀의 주체성으로 삼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여성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여성임을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녀가 그동안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녀의 팰러스적 욕망은 환상(fantasy)이라는 사실, 그것을 냉정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의 욕망을 가졌다는 것이 아닌가? 여성으로서의 운명을 실존적으로 그래서 비극적으로 견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순간 그녀는 다시 욕망하기, 살기를 꿈꾸었는데,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했다. 페미니즘의 문턱이 여성으로서의 운명애를 갖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꿈을 꾸어야 했다. 아직은 절망적인.
역사적으로 그녀는 존재한 적이 없지만, 그녀는 ‘이렇게’ 존재한다. 즉 고통받는 그녀와 그녀의 육체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의식적인 실천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이론이기 이전에 이러한 육체적인 체험과 그 체험에 바탕을 둔 실천 운동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이어야만 체험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종교와 같은 것이다. 보통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과 여성의 위계 구조를 가부장제(patriarchy)로 칭하지만, 그것은 특정 기관이나 주체의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닌, 정치, 역사, 사회, 문화와 같은 우리 삶의 전체를 구조짓는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리만치로 견고한 벽이지만,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분명 이 유령과의 싸움이다. 승산없는 싸움인가? 상황이 이와 같다면, 이 꿈 또한 현실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욕망(disire)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팰러스와 같은, 페니스(penis)로 혼동되는 기표로 구조되는 욕망이 아니어야 한다. 그 욕망은 여자만이 꿈꿀 수 있는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은 여성성의 욕망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욕망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욕망이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도 욕망하는 것이 금지되어서는 안된다. 이제 이 새로운 꿈을 꾸기, 그리고 여러 가지 꿈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기가 페미니스트인 그녀가 꿈꾸는 것이다.
2. 말하는 이성과 침묵하는 육체
페미니즘은 여성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그녀와 부딪히는 개별적인 남성에게만 돌릴 수 없는 복잡한 것이다. 개별적인 한 남성은 그 자신을 넘어서 그 자신을 지배하는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로 이러한 환경이 그녀의 고통에, 그리고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무지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남성들을 둘러싸는 억압의 구조, 그리고 같은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성들을 둘러싸는 억압의 구조, 또 그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남성들을 둘러싸는 억압구조, 그것들을 가부장제로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지시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실체를 가진 사물도, 일정한 성문으로 구성된 규범체계나 제도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있다. 더우기 드러내놓고 여성을 억압할 것을 명하는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역사상의 거의 모든 주체가, 심지어 여성들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역사 이래로 우리의 삶을 조직해온 정치, 사회, 문화적인 광범위한 원리이기 때문에 마치 필연적인 삶의 조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페미니즘 논의의 주체는 단연코 여성이지만, 역설적으로 역사적으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제가 하나의 인간의 조건처럼 여겨진다면, 즉 그렇게 페미니즘이 전제하고 있는 여성의 억압이 철저하고 완전했다면, 페미니즘의 여성이나 여성성이 발현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가레이(Irigaray)에 의하면, 이 땅에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하나의 성만이 존재해왔을 뿐이다. 남성과 남성의 부정으로서의 여성. 우리가 여성성이라고 믿고 있는 여러 가지 양태들은 실은 남성성의 반대 이미지에 불과한데, 이를테면 부정은 부정하려는 것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한통속이며 정신분석학을 포함한 모든 여성성의 담론은 남성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여성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여성은 남성에 의존할 뿐 자립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그 속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기껏해야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이나 보편자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교육받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남성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면서 스스로 소외의 길을 밟아왔고, 이 경우 그녀는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기조차 힘들었다.
이처럼 여성의 억압은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도 너무나 철저하고 악날해서 실존하는 여성의 근거가 될 여성성의 어떤 실낱같은 ‘역사’도 남겨두지 않았다면, 여성이나 여성성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현실적으로 실존한 적도 없고 실존할 수도 없는 가정적인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 타자, 혹은 우리 문화의 절대적 경계를 의미하는 신적인 심연, 혹은 구원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여성을 현실적인 개체로서가 아닌 시대나 문명의 구원으로 신비적으로 다룰 때처럼 말이다. 이런 지경에서 우리는 여성성을 도저히 표상할 수 없다. ‘여성’이란 표상불가능한, 그래서 역사를 가지지 않는 육체이며, 물질이며, 차이이며, 타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성의 억압이라는 페미니즘의 전제에 동의하는 바로 그 순간 역설에 빠지는데, 역사시대에 이러한 ‘여성’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억압이라는 전제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무효화된다.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이라 불리는 육체와 그것에 대한 담론들이 존재해왔다.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매력적인’ 육체, 인류의 존속을 유지하는 ‘생산하는’ 육체, 그리고 공적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 사적인 유용한 ‘노동력’으로서의 육체들은 존재한다. 그것이 하나의 주체가 아닌 그저 육체에 불과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데카르트가 천명한 이후로, 육체는 저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하나의 수동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육체들은 남성들이나 남성 계급의 소유며, 그렇게 그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소외되어 있다. 이 육체를 둘러싸고 이 육체를 재단하고 주형하는 여성성의 담론들은 남성들의 욕망을 위하여 그러한 소외된 육체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육체는 말이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 타자를 위해서 말해줄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성의 담론은 그 육체가 말하는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이성을 가진 남성들’이 말하는, 아니 남성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가부장적 권력이다. 타자는 그저 말없이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페미니스트는 고통의 침묵에서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서 변형되고 일그러지고 상처받은 육체를 본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이 없는 이 육체적 존재의 확실성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여성에게 개별은 언제나 보편에 선행하는데, 형이상학적으로 보편은 개별에 앞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보편이라는 것이 언제나 남성의 전유물로서 권력적인 것이고 그 보편에 포개어지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어떤 말할 수 없는 것 ― 그것을 물질이라고 부르건, 육체로 부르건 ― 이 존재하는 한에서, 여성은 종종 그녀 자신이 그 이름없는 ‘존재’,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무(無)’의 체험, 이 말없는 틈으로부터 페미니즘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말하는 육체, 아니 남성의 말과 ‘다른’ 말을 하는 또 다른 주체의 말에 대한 담론으로 성장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세상에는 하나의 성(sex)만이 존재하는 한에서,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의 ‘틈’, 즉 무의 체험이 억압적인 여성의 육체를 형성하는 여성성의 담론, 즉 무소불위의 가부장적 권력의 한 가운데 있는 한에서, 여성의 주체적 활동을 목표하는 페미니즘이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역사인 가부장제 논의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가. 가부장제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논의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방법론적 태도와 관련하여 전제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부장제가 모든 육체를 재단하고 주형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구조로서 남성과 여성의 부당한 위계 구도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조건에서 따로 떼내어 축출할 수 없고, 그래서 가부장제를 다룬다는 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가 그럴 수 없으므로 아무 것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못마땅하고 모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내던져진 삶 전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삶 전체를 거리를 두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바라보고 말할 수는 있다. 즉 일정한 하나의 구조를 양성의 위계 구도의 상징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구조를 받침하고 있는 지배담론들의 액면 상의 말들에 속지 않고 그 너머의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권력항들을 꽤뚫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알튀세(Althusser)는 전자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구별하여 과학적인 태도로 지칭했는데, 페미니즘 논의를 시작하는데 있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이다. 물론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그가 인정하고 있다시피 완전하지는 않다. 이데올로기의 분석, 즉 과학적 분석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데, 일정한 권력관계와 무관한 공명정대한 담론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논의가 이런 권력적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해도, 우선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가 필연적인 역사적 굴레가 아닌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란 개념의 사용은 그동안 자명한 것으로 유통되어 오던 그것의 보편타당성을 더 이상 담보하지 못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계급적 이해와 관련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는 상황에서 기원한 것이다. 즉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것이 남성들만의 계급 이익을 대변하는 거짓된 보편 체계임을 천명하는 것이고, 그렇게 그것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남성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된 것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의 성격을 명시적으로 이데올로기로 규정짓는 것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현실(물질적 구조) 은폐, 그것의 허구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페미니즘 논의를 여성의 억압이라는 ‘현실’에서 시작해야 하는, 특히 그러한 억압의 현실이 은폐되어 있는 보편 담론에 맞서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수순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개념이 꿈처럼 거짓되고 허무한 위상을 가진다는 것, 즉 형이상학적으로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을 하는 맑스식의 태도는 주의가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여성에게는 형이상학적 진위 표명 자체는 의미없는데, 서구의 형이상학이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의 반영인 이상, 그들의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매겨진 거짓이라는 가치 절하가 그녀들에게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가 그처럼 막강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비난은 무력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은 그 배후의 진짜 원인이 되는 물질적 생산 구조에 대한 논의로 환원될 것이 아니라 알튀세의 말대로, 그러한 허구적 존재가 우리의 물질적 현실에 작용하는 ‘관계’에 대한 논의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가부장제에 대한 언명은 다음처럼 환언할 수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꿈과 같은 허구라 하더라도, 꿈은 명백히 존재한다. 꿈은 거기서 깨어난 경우에만 꿈이며 거짓으로 판명될 뿐, 깨어나지 않으면 너무나 견고한 현실이다. 게다가 데카르트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이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논리적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그 지독한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래서 꿈일지도 모르는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그것은 그 꿈에 대한 의식이었음을 상기해보자. 데카르트적 의식은 알튀세에 의해 실천이라는 구체적 의미를 보장받게 된다. 즉 데카르트적 ‘의심’은 하나의 육체적 행위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그 거짓은 우리 삶의 다양한 실천들, 즉 결코 이데올로기적 기구로 보여지지 않는 공적, 사적 기관이나 조직 속에 속해 있는 여러 육체들의 구체적 실천, 그리고 그 실천에 내접해 있는 의식을 통해서 진리로서 확증되고 재생산된다. 거짓 위상에 걸려 있을 뿐인 이데올로기가 무서운 것은 이처럼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며, 그 때문에 그것이 막강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현실과의 이런 관계에 기초한 이데올로기 분석은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단순히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의 해체의 실마리를 암시해주고 있다. 거꾸로 가부장제의 필연적 구조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바꾸어놓는 계기 역시 무의식적 육체의 실행을 거부하는 하나의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실천이라는 단순하지만 자명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꿈은 깨어나서 상기할 때, 비로소 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꿈을 상기한다는 것은 주체에 의해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여성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실존의 벽은 거꾸로 여성 주체의 힘에 의해서 말랑말랑한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조의 인식은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데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변화를 촉구하는데도 기여한다. 즉 변화하지 않는 구조는 없는데,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할지라도, 구조는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 모순이 있다. 만일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녀는 가부장제가 표상하는 주체와는 다른 주체로서 선행적으로 존재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역사이래로 실천 주체들에 의해서 줄곳 유지 재생산되었던 가부장제는 그것이 허용하는 가부장적 주체 외의 어떠한 주체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담론 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바깥의 주체는 말없는 육체로서 남성들의 세계인 지배 담론의 표면으로 올라올 수가 없다. 따라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로 ‘말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제 페미니스트의 선택은 그 안에 자신의 위치가 마련되어 있는 개념틀을 취하는 일인데, 문제는 이데올로기, 그 안에는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주체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을 꾸는(상기하고 해석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가 설계한 이데올로기 개념 안에는 이데올로기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는 그것의 해방을 위해서 그것을 비존재로 만들어버리고 그 바깥의 물질적 생산 구조의 변화, 즉 혁명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여성 억압이라는 페미니스트의 전제를 견지하고 이데올로기의 액면적 의미 너머의 은폐 권력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유효하며 페미니즘이 가져야할 하나의 긍정적인 태도를 촉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 내부에 여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담론의 여지를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페미니즘적 실천이 자리할 수 있는 이론적 장으로서 계보학적 방법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된다.
나. 계보학적 장 : 말과 육체의 얽힘
꿈이 꿈을 꾸는 주체에 의해서 상기되고 해석되듯이, 이데올로기는 그 바깥의 주체에 의해서 생산되고 유지된다. 이러한 관계는 이데올로기론이 주체에 대한 논의로, 즉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도구로서 소유하는 무대 바깥의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논의로 환원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래서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중의 이데올로기 즉 이데올로기를 기능하게 하는 근본 원리로서의 주체 이데올로기의 선험적 기능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에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초월적 주체나 권력을 명시적으로 지목하기 힘들며, 실제적으로 가부장적 권력은 여성들에게 억압과 고통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울타리에서 또 다른 권력들과 이해관계를 파생시키면서 여성들에게 그것을 누리고 행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으로만 파악하기 힘든 외연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가부장제는 명시적인 억압을 행사하는 제도적인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진리의 형식으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권력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로 간파했다는 것 ― 가부장제를 비판할수 있다는 것 ― 은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적 주체에 대한 권력적 퍼스펙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세계가 가부장적 담론으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그 세계 바깥에 나갈 수 없는 운명을 가지는 한에서,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담론 배후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이데올로기적 권력이 그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가부장제가 해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내부의 언어의 작용이지 바깥의 주체(진리)의 발견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과 양립불가능하지 않으면서도 그 개념의 한계를 보충해줄 수 있는 새로운 개념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의 개념에 이어서, 가부장제에 푸코(Foucault)의 담론(discours) 개념과 계보학(généologie) 개념을 채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맑시스트적 페미니스트가 봉착했던 한계들은 푸코식의 페미니즘에 의해서 보완됨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전혀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한 이론으로 화해될 수 없었다. 사실 본래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담론 개념은 철학적으로 서로 어울리기 힘든데, 푸코도 그 바깥에 초월적 권력을 설정하고 억압을 권력의 속성으로 삼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하면서 담론 개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담론이란 통상적으로 텍스트를 포함하여 언어의 의미작용을 지칭하는 말로 폭넓게 유통되지만 푸코에 의해서 그것은 그의 독특한 철학적 입장을 근거짓는 기본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그에게 담론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관한 지식을 생성함으로써, 그것들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규칙들을 형성함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énoncé)들의 집합이다.
무엇보다 담론 개념은 언어를 ‘사유하는 주체’의 산물로 보는, 그래서 언어를 통해 ‘개념’이 환기되면서 언어 그 자체의 존재는 도구로서 사라져 버리는 데카르트적인 언어관과 배치되는 맥락 속에서 전개된다. 담론적 장은 그 전체를 포괄하고 지배하는 초월적 주체를 설정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될 수 있는 ‘순수한 개념들’의 집합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말하여 진다’는 것에 불과한 익명성의 층위, 즉 사건을 환기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물질적인 언어의 존재 층위에 놓여 있으며, 그 안에서 다른 기원들, 다른 방향들을 가진 불연속적인 ‘사건’들이 얽혀 있는 장이다.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관한 지식을 생성한다는 것은 주체에게는 그의 지적 활동을, 지식의 편에서는 지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적 언어관에서 지적 활동이나 지식의 가능성은 오로지 말(꿈) 바깥의 사유하는 주체(정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반해서 담론에서는 사유 주체라는 유령을 지움으로써 그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권리회복한다. 말하자면 담론은 그 안에서 주체성의 형식을 만들고 있는 셈인데, 담론행위를 하는 주체와 담론과의 관계를 보자면 그 주체가 담론을 읽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담론 속에서 형성되어 담론의 장 일부를 점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나’란 언제나 한결같은 주체가 아니라 다수의 변하는 주체들의 ― 이른바 ― 별자리인 셈이다.
그것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의 주체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주체 개념이 근대적 인식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푸코는 인식의 기원, 소유권자로서 초월적 권위를 가진 주체라는 용어 대신 익명적이고 물질적이고 이질적인 벡터들에 가까운 힘, 혹은 권력(puissa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어떤 지식도 단일하고 초월적인 주체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절대적이고 순수한 진리라는 꿈이 환상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 그 내부에는 기원을 달리하는 권력들의 얽힘의 흔적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담론은 지식과 진리를 구체화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들, 즉 권력들의 관계가 그려져 있는 지도와 같은 것이다.
계보학은 이와 같은 권력 행사의 여러 유형을 여러 담론들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 작용을 통해서 탐구하고자 고안된 것이다. 이 역시도 푸코가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을 지칭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적으로 유통시킨 것인데, 담론 개념이 그러했던 것처럼 계보학적 방법은 누가 권력을 소유했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권력이 행사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짓는지를 추적하는데 관심을 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부장제를 다루는 우리의 관심에 정확히 부응하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이데올로기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표면에서 작동하는 메카니즘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다만 이데올로기와 달리 담론에서 권력은 억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열, 증식하는데 있기 때문에 가부장적 담론은 여성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남성적 권력과 다른 권력을 창출해주는 생산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이는 페미니즘의 전제를 무효화시키는 동시에 가부장적 권력에 맞서는 페미니즘과 같은 담론을 저항적 권력, 즉 가부장적 담론의 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파생 권력들 중 하나로서 페미니즘을 표류하게 만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담론 개념의 양자택일은 어느 쪽이든 페미니즘에 득과실 모두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부장제를 담론이라는 전체 기조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로 채용할 것을 제시한다. 가부장제는 하나의 담론이며 그 담론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억압적 이데올로기 효과가 페미니즘이 저항하는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시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젠더(gender)를 다루지도 않고, 그래서 여성을 억압하는 것 같지도 않는 일반적인 지배 담론, 특히 최고의 일반 담론으로서의 철학담론까지 포함하는 서구 지식의 전 역사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 취할 것이다. 진짜 무서운 억압은 그것이 억압인지 모르게 동의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인데,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피지배자들의 시선을 속이고 욕망을 왜곡시키면서 친근한 아군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담론들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권력들을 파생시키며 페미니스트의 결집을 혼란스럽게 하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력들 사이에서 이권을 누리는 여성에게 억압의 고통을 대입한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일이라해도, 페미니스트가 ‘진정한’ ―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성과 여성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 그런 여성들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고통에서 ―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그러하기 때문에 ― 해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상의 모든 담론이 가부장적 권력과 그 권력들의 변이들로 존재하는 한에서, 가부장적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가부장적 계통에서 단절된 진정한 여성성이 찾아질 수 있느냐 하는데 있다. 담론도 하나의 로고스이고 모든 로고스가 가부장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우리의 꿈은 담론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페미니스트의 꿈은 어쩌면 담론 배후에서 담론 전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파괴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초월적 주체로서의 여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의 요구가 그러한 것이라면 맞다.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담론 안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역시 타자를 억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권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여성이라고 불리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밑에서 침묵으로 신음하는 또 다른 육체들을 양산해낼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우리가 진정한 여성과 여성성의 담론으로 상징하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껴안을 수 있는 담론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부장제 ‘담론’ 안에는 아직은 담론적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하더라도 이 차이의 여지가 마련되어 있다. 담론에서는 데카르트적 언어관과는 달리 말은 말일 뿐이다. 이를테면 말은 사물을 지시하지만,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을 대신하면서 사라져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말의 한계, 즉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한계는 동시에 말의 가능성, 즉 말이 사물과 ‘다른’ 존재라는 가능성이기도 한데, 푸코는 말과 사물의 관련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질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강조했다. 말은 사물을 배신하고 거짓말 할 수 있는데,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그렇게 가능해진다.
반면 말이 사물을 지시하면서 지시할 수 없는 것은 말이 없는 사물, 또는 육체가 된다. 말은 여성을 지시하지만 결코 여성을 지시하지 못한다. 전자는 가부장적 언어가 양산해내는 여성이며 후자는 그것으로 언어화될 수 없는 육체로서의 여성이다. 그것은 말들의 집합인 담론에서 침묵과 빈틈으로 존재하며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꿈꾸는 여성과 여성성이 새로운 담론으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성적, 여성적 말과 이웃하고 남성적 육체를 비롯한 수많은 이질적인 육체들과 이웃하며 그렇게 나란히 존재하는데, 남성적 말처럼 말로 되기를 소망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말들과 육체들과 이웃하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푸코는 담론을 다루는 인문학자로서 사물에 대한 말의 우선성을 강조함으로써 말 너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지시하는, 동시에 그것이 지시하지 못하는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 즉 침묵, 빈틈, 육체, 사물의 세계를 존중했다. 이는 겸허하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담론의 장은 말과 그것과 다른 질서를 가진 사물이 얽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담론은 말을 둘러싸는 사물의 침묵과 빈틈으로 인해 단절적이며 불연속적인 사건들의 장이며, 사물들에 서로 다른 말의 빛들을 비추는 서로 다른 권력들이 얽혀 있는 장이기도 하다. 결국 계보학은 연속적이며 이론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 개념들의 체계라는 데카르트적 학적 이상을 고의적으로 훼손하면서 그것의 마디마디가 분절적 틈이 있는, 그래서 권력의 상호 작용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얽혀 있는 그런 불완전한 말의 역사를 보여주고자 한다. 역사는 신성한 목적을 가진 연속적이고 필연적인 사건들의 계열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계보학은 그런 역사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이 강자와 승자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음을,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경쟁, 타협, 분열의 장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신화를 깨뜨리고 세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3.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계보학
가. 어머니를 잊거나 왜곡하기
기원전 3100년 전부터 기원전 600년 전 사이의 2500여년의 긴 기간이 인류 문화가 가부장적인 구조로 조직되는 분기점이다. 가부장제의 기원을 추적하는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는 태고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서서히 생겨나서 지금까지 ― 그러나 인류의 지난한 역사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 인류 문화 전체를 잠식해버린 탐욕스런 권력 탄생의 지점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사시대에 대한 일련의 고고학적 근거에 따르면 가부장제로 재편되기 이전의 아주 긴 시간 동안, 모권제에 가까운 문화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연에 가깝게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구석기인들은 자연을 닮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후대에 동일한 이유로 가부장 권력에 의해 가치절하하고 통제되기 이전까지 신성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다. 자연은 인간 생존의 절대적 근원이었다. 그녀(자연)가 인간을 탄생시키고 양육해야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모성은 자연을 너무나도 닮아 있었는데, 여성신의 숭배를 통해서 드러나는 구석기 시대의 자연 예찬은 여성과 여성의 능력에 대한 높은 가치를 상징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데 남성이 기여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구석기인들의 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임신과 출산은 여성만의 신성한 능력으로 여겨졌고 육아 역시 모유를 생산하고 채집을 통해서 양식을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여성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여성은 가부장제 하에서처럼 가족이라는 사적 울타리에 갖히지도 않았으며 그것 이외의 다른 능력을 억압받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성이 채집을 통해 남성보다 더 많은 음식을 제공하고, 그런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영역에 대한 지식을 남성들과 동등하게 얻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데 있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그래서 모성 지배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자극하는 이 태고적 시기는 여성에 의한 남성 지배라기보다는 양성 평등에 근거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자연과의 절대적 의존 관계가 느슨해지는 신석기 시대와 때를 같이하여 우연치 않게 사회는 서서히 모권제에서 가부장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여성신을 강등시키고 남성신 중심의 종교를 확립했으며, 그러한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 문화 체계를 갖추었고 문자를 통해 그러한 시대의 영광을 기록했다. 이러한 대체는 자연스럽지도, 진화적으로 필연적이지도 않은 단절의 지점을 형성한다. 이 시기에 자연은 자궁처럼 편안한 집을 주고 젖처럼 맛있는 양식을 주는 육체로 존재했고 인간은 그러한 육체로 둘러싸여 있는, 그와 동일한 육체였다. 육체는 얽혀 있을 뿐, 하나의 육체가 다른 육체를 지배하고 억압할 수 있을 정도로 독립되어 있거나 초월해있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평화로운 육체들의 얽힘 사이에서 어떻게 육체들을 주형하고 재단하는 초월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 권력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인류가 육체의 단계로부터 정신의 단계로 진화를 했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전하는 인간의 신화는 잊자. 인간이 한번도 육체를 떠나서 존재해 본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가 놀라운 과학 기술력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현대 문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정신적,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는다 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체로 태어난다. 가장 믿을만한 지배담론인 철학에서조차도 아주 오랫동안 이 당연한 사실은 ― 거의 일부러 ― 잊혀지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인간의 기원은 모체인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약하고 무능한 젖먹이 아이 시절을 상기하는 것처럼 창피하고 지우고 싶은 과거인가? 육체성의 근원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 앞에 우뚝 선 문명의 놀라운 힘에 비해 미개하고 나약하고 초라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분명 멋진 문명의 옷을 입고 이미지를 굴리는 현대인이 거의 발가벗은 채로 돌도끼를 휘두르는 미개인을 수치스런 감정없이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인정하기는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육체를 관장하는 정신의 힘을 숭배했지만, 소수의 예외적 철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니이체는 그토록 초월적인 이성이 자신 혼자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는 무능력한 육체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당연하고도 놀라운 ―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에 ― 통찰을 던졌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을 이어받아 메를로-뽕띠도 세계-내-존재에 육체적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기원을 분명히 밝히고 고도의 문명 세계를 이끌어가는 정신성이 이러한 육체적 실존으로부터 구성되는 과정을 기술했다. 그들에 의하면, 육체는 ― 데카르트와 같은 가부장적 철학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 죽은 대상이 아니라 생명력에 넘치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그 주체는 이 놀라운 정신 세계를 창조할 정도로 다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이들 계보학자들은 육체를 선험적 주체로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육체적 기원에 대한 수치스러운 감정을 극복하고 육체의 감춰진 힘을 공개하는 동시에 이성을 물신화하는 철학의 허구성을 밝혔다.
그러나 육체가 능동적 힘을 가진 다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구석기․신석기인들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그런 육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들은 생존을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계량화, 수치화시킴으로써 그 생명력을 거세하는 문명인들과 달리 그들은 그것을 역동적인 힘을 가진 불투명하고 재단할 수 없는 육체로서 생각함으로써 자연의 힘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면서 그것과 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절의 분기점에서 문명의 탑은 그들의 생존을 관장하는 놀랍고 두려운 이 대지를 ‘딛고’ 섰다. 이것이 문명사를 장식하는 자랑스런 첫페이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하는 문명이 아니라 누르고 억압하는 문명이다. 육체는 그것이 무능하고 수치스러워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두려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억압되는 것이다. 숭배와 억압은 두려움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시작, 즉 자연, 육체, 대지의 ‘누름’은 상징적으로 여성의 억압으로 나타났는데, 대지와 여성의 환유적 관계로 인해 대지와 함께 여성은 억압되었던 것이다.
많은 고고학자가 분석하고 있는데로, 여기에는 그러한 단절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문화적 변화가 작용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채집과 수렵에서 벗어나 대지의 다산적 능력에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정착생활과 농업으로 인한 충분한 양식은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육아를 담당한 여성의 행동반경은 정해진 공간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가정으로 불리는 사적인 영역에 여성이 유폐되는 과정이다. 또 가축들을 우리에 가두어 관찰하게 됨에 따라 남성은 생명의 잉태 과정에 남성의 기여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여성의 신성한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찬탈하기 시작한다. 자연의 풍성한 생산력을 연상시키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 능력은 남성에게 얼마나 질투를 자아내게 만드는 힘이던가? 여성의 신성한 능력을 훔치기 위해서는 여성을 자신의 수족처럼 자신의 소유로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남성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남성의 자궁 선망은 역으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을 가치절하하고 여성을 남근(pallus)의 숭배자로 전락시키는 지배 담론을 형성시키게 된다. 동시에 현대적 가부장 권력의 자애로운 얼굴인 의학 기술을 통해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의학 담론을 유통시키고 제도화함으로써 정작 아이를 낳는 주체인 어머니를 의학 기술 앞에 놓인 무능한 육체 덩어리로 만들고, 급기야 시험관 수정, 대리모, 태아수술과 같은 아기 만들기 사업을 통해 어머니를 출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을 훔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인간은 자연에게 어떤 것도 보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의 사랑은 대가없는 보살핌이다. 인간은 풍요로운 대지의 사랑에 대한 감사함은커녕 그 힘을 질투하여 그녀를 겁탈하여 소유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사랑을 잊었다. 대지의 여신은 남근을 가진 가부장적 신에 의해 유린당하고 축출되는데, 그 자신은 자신의 육체적 출생을 지우는 보이지 않는 초월자가 되었다. 이 초월자가 자연 위에 우뚝 선 문명의 지배자인 것이다. 결국 문명의 발기는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수혜받으면서도 이 엄청난 빚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왜곡하면서 이루어졌다. 자연과 대지는 생명력을 잃은 대상물, 인간의 보살핌과 사랑을 갈구하는 ― 의식의 빛을 받아야 존재하는 ― 노예로 전락했다. 기술 문명의 힘은 자연, 대지, 모성을 창조하는데까지 이르렀지만, 그것은 대지와의 결속을 잊고 대지의 풍요로움을 착취하고 그것을 전유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명사는 가족사의 드라마에서도 반복된다. 태아는 살점 하나부터 뼈 한 마디, 피 한방울까지 모두 어머니로부터 공급받고 출산 후에도 오랫동안 전적으로 어머니의 양육에 의존한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의 근친상간의 욕망은 문명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존재에 의해서 좌절되고 문명으로 진입하면서 어머니와의 친밀한 관계를 청산하고 그녀를 버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처럼 가부장적 가족사와 문명사와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극명히 보여주는 드라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적인 문명의 기원을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계보학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일종의 임상적 실천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부장제의 합리화로 읽혀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나. 남자들만의 시장 : 공적 합리성
남성들의 여성 공포증이 여성의 억압을 초래했고, 이것이 가부장제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설이 그럴듯하더라도 그러한 감정적 동기만으로는 어떻게 억압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가 해명되지 않는다. 대지와 여성이 분노하고 반항하지 않았겠는가? 대지와 육체의 원초적 분노의 힘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는 엄청난 힘이 가부장제와 더불어 남성들에게 생성되었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계보학의 두 번째 이야기는 가부장제로 불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생성․유지되는 메카니즘에 대한 것이다.
한 미개인이 한 여성을 두려워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어쩌다 억압하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의 평범한 삶이 그러 저러한 갈등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억압이 그렇게 개인적 수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것은 5000여년 동안 남성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연대와 공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2500여년 동안 서서히 형성된, 그리고 그후 2600여년 동안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일종의 구조이다. 남성들이 두려워해야할 만큼 대지의 여신의 힘이 강하다면, 그녀의 힘을 빼앗고 억압하기 위해서 남성들 모두가 뭉쳐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남성들은 여성을 억압하여 착취하기 위해 공모했다. 그러나 그 공모는 반드시 의식적인 것만은 아닌데,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세월 견고하게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음모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이해 당사자들끼리 어떤 거래가 있기 마련이다. 주고 받음, 일종의 교환관계를 통해서 개별자들은 동일한 이해관계와 연대감을 공유한 집단이 된다. 심지어 눈빛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같은 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교환은 한 개인이 그러한 이해관계를 알건 모르건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본의 아니게 그것에 공모하게 될 정도의 초월적인 형식이 될 것이다.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여성을 교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가부장적인 친족제도를 통해서 밝힌 구조의 본질이기도 하다. 구조는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의 상호적 지시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총체성을 형성한다. 그것은 요소들과 긴밀히 관련되지만, 단순히 그 요소들의 산술적 합을 초월해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잉인데, 남성들의 교환은 일종의 남성들만의 연대감이라는, 단순히 교환 행위를 넘어서는 잉여적 가치를 획득한다.
남성들은 대지의 사랑, 어머니의 증여의 형식을 배워서는 안되는데, 즉 자신을 타자에게 증여하기만 한다면 자신은 타자에 얽혀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대지와 어머니는 이름이 없지 않은가? 남성들은 대지와 어머니의 희생을 입고 태어나, 어느 하나도 그 자신의 것이 없건만, 그 자신은 타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교환 행위, 즉 서로 서로를 지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희생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그들 모두를 포괄하고 그들 모두를 초월해 있는 힘, 즉 집단의 힘을 공유하게 된다. 교환 형식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자기 보존의 힘 ― 그러나 이 자기 보존의 힘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살해를 동반하지 않은가?―.
가부장제가 영속하기 위해서 교환 형식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성들은 무엇이건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환에서는 여성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것이 철칙이다. 이는 구조주의에서 근친상간의 금지로 표현되는데, 어머니의 사랑이 재현되면, 즉 준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교환 형식은 무너지는 것이며, 그것이 파생시켰던 유대감도 사라질 것이다. 근친상간은 규범과 질서 ―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인 ― 가 존재하는 문명의 단계에서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득찬 ― 육체들이 뒤얽혀 자기와 타자가 구분이 안되는 ― 자연, 미개의 단계로 후퇴시킬 것이다. 기원적으로 구조가 여성의 억압을 통해 생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지를 닮아 있는 여성의 존재는 교환 형식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구조를 해체할지도 모를 위험 요소이다. 이러한 여성 공포증으로 인해 당연히 여성은 교환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 여성은 남성들만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전락되었다.
여성을 포함하여 육체를 가진 모든 것 ― 여기에는 남성 육체도 포함된다. ― 은 교환될 수 있고 상품이 될 수 있다. 상품은 말을 할 수 없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교환 ― 혹은 의사소통 ―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교환되는 말이 교환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품은 항상 타자에 의해 규정받고 가치지워지는 교환의 체계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언어 역시 하나의 육체인데, 육체로서의 언어란 대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육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육체로 거듭나는 유동적이고 다산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주체는 여기에 일정한 규칙과 가치를 부여하고 언어의 육체를 재단하고 분절시켜서 절도있고 질서있는, 즉 가부장 권력이 허용하는 의미만을 유통시킨다. 문명이 가부장제로 조직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대부분의 언어들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남성들만의 이야기를 전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언어는 남자들의 상품일 뿐이다. 상품은 자신의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인위적 가치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부장 권력의 통제 아래서 언어의 육체성은 그것의 다산적 의미가 억압됨으로써 여성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단지 도구의 개념, 즉 수동적이고 불활성적인 물체 개념으로 왜곡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도 이 육체성은 남성 주체의 의도가 전달되는 그 순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지고 마는데, 여성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는 항상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그것을 통제하는 주체 ― 남성, 의식 ― 에 언제나 환원되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여성이 그 자신의 말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남성이 교환하는 모든 육체들, 즉 언어를 포함하여 문화, 기술, 종교, 여타 모든 상징 체계는 남성의 전유물인 것이다.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 육체에 가해진 일종의 가부장적 권력의 규범을 밝혀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소쉬르에 의해서 그 규범은 시간, 공간적으로 다르게 표상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형식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일종의 교환 형식이었다. 기의와 기표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한다. 혹은 사물과 말은 서로가 서로를 지시한다. 그러나 기표는 기의에 환원(소유)될 수 없으며 말은 사물에 환원될 수 없는데, 기의와 기표, 말과 사물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말과 사물은 서로가 서로를 지시할 수 없다. 이를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결국 교환의 교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육체들의 등가성은 차이들의 억압에 의해서 획득된 동일성에 불과한데, 본래 육체들 자체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연대(동일성)는 깨지기 쉬운 것이다. 남성들 각자는 각기 다른 육체들 ― 혹은 욕망들 ― 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와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만의 연대감을 위해서, 결코 완성되지 못한 그들의 연대감을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교환해야 했다. 그들의 연대감은 레비-스트로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언제 끝날지 모를 교환의 사슬 전체를 포착함을 가정하는 ― 이른바 ― 규제적(régulateur)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분적인 개개의 사슬은 지연되고 불평등한 교환, 즉 증여의 원리로 연결되어 있다.(옮기기) 남성들의 연대감, 혹은 가부장적 주체(구조의 총체성)는 이질적인 육체로부터가 아니라 그러한 육체의 차이를 지우면서 가정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교환 게임에 참여하는 남성들은 여성뿐 아니라 자신의 육체도 억압하고 있다. 매순간 순환에 끼어드는 육체들의 이질성은 억압되는 동시에 상기되지 않을 수 없다. 차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 즉 지연되고 불평등한 교환을 수정하고 완수하기 위해 남성들은 계속해서 교환을 해야하는데, 그러나 교환은 언제나 물러서있고 손 안에는 언제나 증여만이 남아 있다. 그들은 이러한 틈을 외면하면서 고리의 전체를 지향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야만 했다.
사실 다른 육체로의 대체가 수없이 반복되다 보면, 그 순환의 고리에 등가의 자격으로 들어갔던 수많은 이질적인 육체들은 망각되고,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끝없이 움직이는 교환이라는 추상적 형식만 남게 될 것이다. 투명한 의식, 주체의 본성은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만 한다는 것, 즉 타자를 지향한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순환 속에서 생성된 잉여 가치들은 이러한 주체의 타자 지향, 즉 텅빈 본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것이다. 근대적 주체 개념은 이러한 광고 이미지들로 채색된 과부하된 것이었다. 주체와 더불어 파생된 권력들, 즉 주체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작동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들, 즉 자유, 정의, 법, 합리성, 평등 등은 가부장적 권력을 유통시키는 일종의 광고와 같다. 이를테면 가부장 사회에서는 그러한 구조의 구성 요소들인 남성 개체들의 자율성과 평등 개념이 견지되고, 가부장제를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교환의 형식을 시작하는 계약 개념 즉 법, 규범, 합리성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고 교환되는 육체들의 등가성(동일성의 철학), 그리고 그 등가성을 위해서 모든 육체에 가치를 판정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육체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살이기 때문에 육체는 어느 하나도 같을 수가 없다. 극단적인 이질성이 육체의 정의인 이상, 본래 육체는 결코 교환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육체를 왜곡해서 불활성화시켜 죽은 물체로 만들어 버리서 그것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하고 측량하고 수치로 환원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억압하고, 계산하는’ 작인이 요구된다. 이는 당연히 육체에 폭력을 행사하고 억압, 왜곡함으로써 끊임없이 육체를 통제하는 가부장 권력이 맡을 것이고 이 권력은 철학자들이 그토록 찬미해마지 않는 정신, 주체라는 이름으로, 혹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적 정체를 숨길 것이다.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권력이 이데올로기로서 유통시키고 있는 문명의 긍정적 가치들, 이를테면 자유, 평등, 규범, 합리성과 같은 개념은 남자들만의 것이며, 그것이 다른 육체들의 억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부도덕하고 허구적인 것이다.
4. 결론 : 여성은 대지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계보학에서 벌어진 틈을 보아야 한다. 물론 이 틈은 아직 여성 해방에 대한 구체적 해결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데, 그것은 단지 작은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다음 단계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신체적 실천을 통해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는 다음 기회에 모색될 것이다.
우선 가부장제는 진화론적으로 필연적인 문명의 단계가 아니다.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등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적 사건이다. 즉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첫 번째 틈이다. 두 번째 틈은 가부장적 권력을 뒷받침하는 여타 개념들, 자유, 평등, 주체, 법, 합리성 등은 남성들만의 교환 형식을 통해서 파생된 잉여가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행해지는 여성의 억압은 어떤 정당성도 없다. 여성은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지배 가치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세 번째 틈은 가부장적 권력이 교환 형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 교환 형식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성들만의 공적 합리성을 닮지 않은 여성들의 교환, 여성들만의 시장을 형성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혹은 교환 시장이 필연적으로 다른 육체를 억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상, 페미니스트의 전략은 이러한 교환 형식 자체를 공략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보학 속에서 페미니스트가 혼동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성은 결코 남성들이 밟고 지나가는 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계보학에서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자연, 대지, 풍요의 여신이 출현할 뿐이며 그녀들의 증여로 남자들만의 시장이 굴러간다. 여성 억압은 이러한 증여자들을 환유적으로 여성으로 동일시하는 구석기인들의 인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대를 거듭하여 이데올로기로 정착했다. 대지는 인류의 문명을 일으키고 유지시켜주는 근원적 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머니들은 남성들만의 시장을 형성시켜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의 운명을 보자. 남성들은 어머니를 시장에서 유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근친상간은 문명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존중은 기껏해야 어머니를 사적인 가정의 울타리에 유폐시키고 망각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증여하는 일밖에는 어떤 욕망도 허용되지 않았다. 반면 처녀는 상품으로 유통됨으로써 잠정적으로 모든 남자들의 소유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식으로 공적 시장에 나갈 수 있었다. 이 교환의 흐름에서 파생된 잉여가치를 입고 그녀는 남자들의 상징들을 사용하고 그들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교환의 주체로 착각할 수 있었으나, 처녀성을 잃고 어머니로서 사적 공간에 갖히기까지만 유통되는 그저 상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대지의 포용력, 어머니의 사랑은 존경할 만하고 위대하다. 이러한 찬사를 가부장적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의 필연적 운명은 아니다. 남성은 여성에게 증여를 강제할 어떤 권리도, 필연성도 없으며 여성은 대지와 어머니의 증여를 답습해야할 어떤 이유도 없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최소한으로 자기를 보존해야할 권리가 있다. 또한 증여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은 대지와 인간의 구별없이, 남성과 여성의 구별없이 누구나 실천해야할 덕목이라는 전제하에서이다. 증여의 덕목은 가부장제의 폭력, 즉 동일자의 철학에 대한 반성으로서 후기-구조주의자들과 해체론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그들은 억압당하는 육체들,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증여의 강조는 여성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거꾸로 여성의 희생을 미화시키고 조장할 수도 있는 양가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육체는 유동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자기 맘대로 주조하려는 하는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 인간의 문명이 일정한 형태, 그래서 일정한 폭력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면, 페미니스트의 과제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육체의 형태, 폭력이 최소화되는 형태, 차이가 허용되는 최선의 형태, 그것을 찾는 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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