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분열된 여성, 그들을 위한 철학은 가능한가?

나뭇잎숨결 2021. 10. 4. 13:55

분열된 여성, 그들을 위한 철학은 가능한가?

 

 

 

 

 

1. 까미유 끌로델의 자기분열

 

 

 

로댕이 사랑한 것은 자신의 제자이자 작품모델인 까미유 끌로델이었다. 그는 천재적 예술가 까미유 끌로델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만약 끌로델이 로댕을 초월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가 로댕이 여기까지라고 하며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끌로델은 로댕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버렸다. 그의 주권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녀는 로댕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며 로댕의 규범을 넘어서는 위험한 사랑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댕은 떠났고 홀로 남은 끌로델은 미쳐갔다.

 

왜 로댕은 예술가 끌로델을 사랑할 수 없었는가? 브루노 누이땅 감독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단상을 던져준다. 영화에서 로댕은 끌로델이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적 세계를 발전시키자 그녀와의 사랑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로댕은 끌로델이 자신의 주권 밖의 타자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끌로델은 타자였다. 로댕은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끌로델의 예술적 기질에 위협감을 느꼈으며 그의 사회적 명성을 파괴시킬 만큼 강렬했던 끌로델의 사랑법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로댕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구축된 자기 세계의 법칙을 동일하게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에게 변화와 파괴를 가져올 끌로델과의 사랑을 자기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용감하게 로댕의 영역을 박차고 나왔던 끌로델, 그러나 왜 그녀는 미칠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의 예술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로댕이 아니라도 끌로델의 예술성을 인정해 주었던 사람들은 있었다. 로댕과의 이별 후 창작된 그녀의 작품 <사쿤달라>는 당대의 예술인 살롱의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끌로델은 음울한 작업실에서 미쳐가야만 했는가? 왜 끌로델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고 미쳐갔는가? 끌로델을 견제했던 로댕의 간계 때문이었을까? 이것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로댕의 방해가 그녀의 작품 전시회에 압력을 가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 그녀가 미쳤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좀 억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끌로델은 투쟁 의지가 분명했던 사람이었고 따라서 로댕의 방해는 오히려 그녀의 창작활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끌로델은 미쳤는가?

 

아쉽게도 감독은 영화의 끝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나 필자는 끌로델이 점점 미쳐가는 장면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에 언급되어 있는 현대 여성의 운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사회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주권을 선사했다. 그러나 현대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과 달리 불행했다. 현대의 남성은 남성답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남성의 남성다움은 자유나 주권의 실현과 함께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신의 독립성과 초월성을 과시할수록 남성으로서도 사랑받았다. 그러나 현대 여성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현대 여성은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확인하기 시작했으나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의 실현은 여성다움의 실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여성다움이 여전히 남성을 위한 존재 즉 남성을 위해 거기에 존재함”1)으로 정의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즉 여성다움은 의존성 혹은 복종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여성다움은 여성의 자유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보부아르가 정확하게 보았듯이 현대 여성들은 여성다움과 자유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자신을 자주적인 개인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성으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하였다. 좋은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버렸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성은 여성다움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행복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의 주권이나 여성다움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던 어머니도 자식이 자신의 주권을 무시하는 경우 매우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으며, 반대로 자신을 지배하려는 남편에 대항했던 여성들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남편의 사랑에 의존하곤 하였다. 결국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 여성들은 이중 플레이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안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경질적으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2) 이러한 맥락에서 보부아르는 어울리기 힘든 두 가지의 정체성을 동시에 내면화하고 있는 현대 여성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고 이로인해 오늘날 여성은 몰락하는 성”3)으로 비추어 진다고 말한다.

 

끌로델은 여성다움과 인간다움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 여성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로댕의 지평을 뛰어 넘는 초월을 감행했다. 그녀는 로댕의 예술세계와는 다른, 그리고 그 사회의 통념을 뛰어 넘는 작품을 창작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예술가적 자유의 실현은 로댕과의 사랑을 방해하였다. 로댕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한에서만 끌로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끌로델은 로댕이 그어 놓은 한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자신의 예술가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그녀 안의 또 다른 욕구 즉 여인으로서 로댕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끌로델은 로댕의 사랑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듯 하였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로댕의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자기 분열과 이중 플레이, 이것이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미치게 만든 주범이었던 것이다.

 

 

 

2. 싸우는 여자들

 

 

 

끌로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끌로델은 심리 내적으로만 분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도 달랐다. 끌로델은 자신의 어머니나 여동생의 사랑조차 받을 수 없었다. 끌로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끌로델의 조각활동을 더럽다며 경멸하였다. 여자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과 같은 여자로 살지 않는 끌로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든 비밀을 공유했던 여동생 루이즈 역시 끌로델이 로댕과 위험한 사랑을 감행하자 충격에 휩싸여 끌로델을 떠난다. 끌로델은 자기 안에서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도 다른 타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 간의 분열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버틀러의 저서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금이 간 자매 사진은 여성들 간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남성과 달리 여성은 동일성에 기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를 초월하는 보편적 인격으로 간주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그 자체로 생물학적이고 문화 내재적인 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4) 다시 말해서 남성과 달리 여성은 시-공적으로 위치 지워진육체가 가지게 되는 다양성 및 특수성을 그대로 표출한다. 따라서 여성들은 인종, 계급, 나이 또는 종교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여성들은 소속된 문화적 지평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통사회를 벗어나면서 여성들의 다양성은 분열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애틋하게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두 손을 잡았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이제 추억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낯선 것이 되었다. 이제 어머니처럼 살지 않는 딸은 어머니의 애환을 이해하기 힘들며 한 번도 딸처럼 살아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딸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사는지를 상상하기 힘들다. 끌로델은 어머니와 다른 맥락에 처해 있었기에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녀의 어머니 역시 끌로델의 욕구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간의 이질성은 어쩌면 이해가 불가능한 정도를 넘어 혐오감마저 자아냈을지 모를 일이다. 전혜성의 소설을 영화화한 <마요네즈>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듯 오늘날 어머니와 딸의 사이는 서로에게 애틋한 사이도 서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그런 친밀한 사이도 아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주지 못한 딸을 맘속으로 원망하며 딸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와중에도 억척스럽게 머리에 마요네즈를 바르는 어머니가 혐오스럽다.

 

여성들 간의 균열은 여성주의 이론 논쟁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아이리스 마리온 영이라는 여성철학자는 여성들이 서로 다른 맥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여성 모두를 위한 여성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것은 힘들다고 본다. 여성은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고통의 원천은 다르다는 것이다. 경제적 빈곤에 놓여 있는 여성은 여성억압의 근본원인을 경제적 불평등이라 생각하며 인종적 억압에 놓여 있는 여성은 인종차별을 여성해방의 지름길이라 판단한다. 따라서 여성들 간에는 통일적 여성성과 같은 것은 기대가 될 수 없으며 이는 곧 통일적 여성운동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여성들 간의 분열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은 소위 유색인 여성주의(Color of Women)" 내부의 논쟁이라고 한다. 이 집단에 모인 여성들은 그 어느 집단보다 다양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인종이며 서로 다른 문화에 소속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디언 여성주의자, 멕시칸 계열의 미국인 여성주의자,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 여성주의자 또는 흑인 여성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기반을 갖기 때문에 여성 억압의 근원을 진단하거나 대책을 제안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들의 논쟁은 뜨겁다. 이들은 서로 화합하여 동의에 도달하기 보다는 소리를 높여 서로 싸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양하고 특수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기대될 수 없는 것인가?

 

 

 

3. 여성을 위한 철학은 가능한가?

 

 

 

내적 외적으로 분열된 불행한 여성, 이들을 위한 철학은 가능한가? 1950년대까지 영미철학의 주된 관심은 언어의 분석에 있었고 이것은 곧 동일하고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었다. 서양 근대 철학사를 관통했던 주체인간개념 역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성에 대한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은 통일적이고 투명하기보다는 분열되어 있고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여성은 언어로 표현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인가?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여성이 언어적 동일성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여성은 언어의 부재를 그 본질로 한다고 보았다.5) 여성을 언어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순간 여성의 타자성과 다양성 및 분열의 양상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심리 내적으로 분열된 불투명한 여성은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여성들을 아우르는 통일적 개념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인가? 여성은 처음부터 우리, 여성들이라는 일반 개념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여성들이 자신의 분열과 타자성으로 인해 어떠한 언어도 가지지 못한다면 여성들을 위한 철학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성주의라는 정치적 이념 자체가 어떤 통일적 집단을 전제로 가능하다면 이제 여성주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여성주의 철학은 더 이상 전개될 수 없는 것인가?

 

여성주의 철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여성의 분열과 타자성을 몰락의 증조가 아니라 새로운 철학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철학자들은 동일성이나 이성 개념이 인류를 해방시키기는커녕 타자배제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진단을 거듭 반복해 왔다. 더 이상 통일적이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인간에게 동일성의 개념은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적 외적으로 첨예하게 분열된 현대여성의 자기경험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마련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성의 분열과 타자성은 새로운 인간이해와 대안적 사고방식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8년 이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철학의 대안을 여성적인 것에서 찾고자 했으며 이와 발맞추어 여성철학이라는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과 철학의 만남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분열과 타자성을 토대로 하는 여성과 동일성과 확실성을 원칙으로 하는 철학은 물과 기름처럼 그렇게 겉돌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철학의 성패는 무엇보다도 여성을 위한 철학적 언어와 개념을 재구성 하는 작업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언어를 동일성과 등치시키고 타자성에 대립시키는 도식을 벗어나 분열과 타자성을 배제하지 않는 개념과 언어를 정초할 때 여성을 위한 철학은 성립될 수 있다. 그런 언어가 가능한가? 그런 언어로 표현되는 새로운 주체의 이미지는 가능한가? 타자성과 분열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도 우리, 여성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필자는 버틀러의 이론 안에서 새로운 언어사용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버틀러는 후속 논문 일관적 토대 : 여성주의와 포스트모던의 문제에서 자신의 입장을 약간 수정한다. 버틀러는 이 논문에서 여전히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정체성과 같은 것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지만 우리, 여성들이라는 언어 자체의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주의 이론이 집단적 주체에 대한 연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버틀러는 비판적 여성 운동이 여성의 이름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던 것이다.6) 따라서 버틀러는 이 논문에서 어떻게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도 우리, 여성들이라는 개념이 이해되고 사용될 수 있는가를 밝힌다.

 

우선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권력체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권력체계란 정치적 권력체계를 비롯하여 언어, 종교, 규범 등을 포함하는 문화 전반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체계에 의해 여성의 의미가 규정된다고 이 개념의 의미가 완전히 한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이라는 개념의 의미는 권력체계의 변동과 함께 변화한다. 이로부터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개념을 지속적 개방과 의미변형의 현장”7)으로 파악하며 어떤 동일성의 범주로도 표현될 수 없는 차이의 영역을 나타내는 언어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여성주의자들은 우리, 여성들이라는 말을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다. 오히려 이 개념은 다른 의미와 의미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 사용될 수 있다. 우리, 여성들은 여성의 타자성과 분열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필자는 버틀러의 우리, 여성들에 대한 분석이 여성주의 철학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까미유 끌로델은 적어도 내적 외적 분열된 여성들을 우리, 여성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우리, 여성들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끌로델은 몰락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4. 분열과 타자성의 인정 : 여성주의적 연대를 위하여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하여 필자는 서로에게 타자인 여성주의자들이 우리, 여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조건에 다시 한 번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여성들은 처한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여성들이 우리, 여성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여성이라는 말 안에 다양한 의미가 담겨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여성들이 타자성의 전시장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여성들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자기분열과 타자성의 인정,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자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주의자들의 연대와 실천은 동일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의 연대는 구성원들의 분열과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 여성들안에서 이방인은 추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환영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인정을 통해 우리의 연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기분열이나 이방인은 파괴되어야 할 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중 하나이다. “타자는 내가 완결시키는 자이며,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인 것이다.”8) 타자성이 우리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자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숨겨지거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들추어지고 말걸어 진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여성들의 연대는 시끄럽다. “우리, 여성들은 서로 다르기에 서로에 대해 묻고 반박하기 바쁘다. 이해되지 않는 타자에게 말도 걸어보고 싸우기도 한다. 타자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왜 분열된 여성은 미쳐야 하는가? 누가 싸우는 여성들을 하질이라 비웃었는가? 까미유 끌로델은 자신의 분열을 억압할 필요가 없었다. 까미유 끌로델은 분열된 자신을 인정했어야 했다. 분열된 또 다른 자기를 숨기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꺼내 놓고 정면으로 대결했어야 했다. 까미유 끌로델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어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을 몰라주는 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소란스럽게 싸웠어야 했다. 그 싸움 속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