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정의의 문제
Liberalism and Justice
-- The Liberalist View of Justice in the Epoche of Globalization
문 성 원 (부산대학교 철학과)
자유주의와 정의의 문제
--세계화 시대의 자유주의 정의관
모든 덕 가운데 정의만은 '타인의 선'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이웃 사람에게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지배자이건 동료이건, 하여튼 자기 아닌 타인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1장
세계화는 인간의 복지를 고양할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지녔다. 동시에 세계화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격차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세계화는 약소국가, 불리한 처지에 있는 집단과 개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유네스코, [21세기의 윤리를 위한 공동의 틀]
<요약문>
오늘날 지배적인 사회 이념인 자유주의가 과연 세계화 시대의 정의로운 원칙을 제공할 수 있을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존 롤즈의 만민법 이론과 마이클 왈쩌의 도덕 이론을 검토한다. 롤즈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성립한 정의관이 자유주의 사회와 비자유주의 사회의 관계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그러나 롤즈의 '만민법'은 사회간의 실질적인 불균등 관계를 문제삼지 못하며, 보편을 앞세운 편파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반면에, 왈쩌는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각 사회의 특수한 현실에서 출발하여 지배와 간섭을 배제한 사회들 사이의 연대를 추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자유주의의 팽창주의적 경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왈쩌의 견해도 기왕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 어려운 소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한계가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특성에서 비롯한다고 진단하고, 이를 넘어서는 정의관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주제 분류>
사회 철학, 정치 철학, 현대 철학
<검색어>
만민법, 두꺼움과 얇음, 정의, 자유주의, 롤즈, 왈쩌
1. '만민법'과 정의
자유주의에 관한 오늘날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자유 경쟁을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정작 자신은 실질적인 경쟁 상대 없이 사회 이념의 지평에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가 생겨난 것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과 함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이루어지던 이념적인 길항 작용이 현저히 약화된 탓이 크다. 그 덕택에 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자유는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렝 투렌(Alain Touraine)은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라는 책에서 자유주의를 금융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시장 제일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고, 이러한 금융 자본의 이해관계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20세기에 경험했던 것보다 더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21세기를 맞이하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전횡이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리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21세기 벽두부터 미국의 새 정권이 취하고 있는 정책이나 행동 방식을 보면, 이 같은 경고의 현실성을 입증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자유주의를 너무 좁게 취급하는 것이라는 불만을 살 만하다. 시장 경제 논리의 신자유주의를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과 결부된 자유주의의 긍정적인 성과마저 무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거대 금융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책이야 때로 부정의한 것일 수 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와 결합된 자유주의의 관점은 오히려 이러한 부정의를 교정하고 제어할 정의로운 기준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존 롤즈(John Rawls)는 자유주의의 바탕 위에서 정의의 보편적인 규범을 제시하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의론}(1971)의 발상을 {정치적 자유주의}(1993)로, {만민법}(1999)으로 이어가면서, 그 적용 범위를 한 사회 내의 문제에서부터 여러 사회 내지 국제간의 문제로까지 넓히고 있다. 그리하여 롤즈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성립한 정의관이 자유주의 사회의 내부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와 비자유주의 사회 사이의 관계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 특히 '자유주의' 미국을 제외한 초강대국이 없는 시대에, 자유주의의 보편적 적용을 '정의롭게' 규율하고 정당화하려는 작업으로 여겨질 법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롤즈가 사회간의 관계에는 평등주의적인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본다는 점이다. 차등의 원칙은 자유주의 사회 내부의 분배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어서, 비자유주의 사회를 포함하는 다양한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이른바 '만민법'은 무엇을 통해 마련되는가? 이 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일찍이 {정의론}에서도 큰 비중을 지녔던 '원초적 입장'의 설정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무지의 베일'이 그 핵심적인 장치를 이룬다. 만민을 구성하는 각 인민(people)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속하는 사회의 영토나 인구의 규모, 그 국민의 상대적 힘 따위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만민(모든 인민)은 그 대표들의 합의를 통해 만민법의 원칙들을 도출해낸다. 각 인민의 독립성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인권 존중의 의무라든가, 자기 방어의 권리라든가, (심대한 인권 훼손을 범하거나 무법적 국가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다른 인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 등등이 그 원칙들이다.
여기에 분배 문제와 관련된 사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가 도저히 '질서 정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물질적 조건에 놓여 있다면, 만민은 이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일단 그 상태를 벗어나면, 다른 사회와의 사이에 현저한 물질적 불평등이 있더라도 그것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각 국민은 자력으로 그 사회의 부를 조정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경우에 자연 자원의 부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는 많은 사회들은 자원을 결하고 있지는 않다. 반대로 질서 정연한 사회들은 매우 적은 자원을 가지고도 잘 해 나갈 수 있다. 그들의 부는 다른 곳에서 연유한다. 즉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전통, 인적 자원 및 지식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화의 능력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문제는 오히려 일반적으로 정치적 문화의 특성 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바탕에 있는 종교적 철학적 전통의 특성에 있는 것이다. 빈곤한 나라들의 가장 큰 사회적 악은 억압적인 정부이며 부패한 엘리트 집단이다. 그리고 부당한 종교에 의해서 강요된 여성의 예속과 그에서 비롯하는 과잉인구, 즉 그 사회의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인구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통치되며 그 인구가 그 나라의 경제와 자원의 규모에 맞추어 적절하다면, 품위 있고 가치로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란 지구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롤즈는 어떤 사회가 겪는 어려움이 여러 사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불균형이 그 사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가 국제간 정의 문제의 초점이 여러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롤즈는 마치 노직(Robert Nozick)이 부의 재분배에 반대할 때 썼던 논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들간에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가 용인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국가가 저축률이 높이거나 인구증가율을 낮추려고 노력한 결과,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은 부를 가지게 되었다면, 이렇게 생긴 부의 불균형을 다시 조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여러 사회간의 정의를 다루는 {만민법}의 견지에서는 롤즈가 이전에 {정의론}에서 보여주었던 평등주의적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 롤즈는 무지의 장막 하에서 만민은 시장을 자유 경쟁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공정한 무역 기준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봄으로써, 자유 무역을 주창하는 세계화 추진 세력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여기서 그는 경제 강국에 의한 독과점이 일어나지 않는다든지, 장기적으로 볼 때 자유 경쟁의 시장 구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고 가정한다든지 하는 조건을 달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안정된 자유주의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론 구성 순서를 보아도, 만민법은 자유주의 사회들 사이의 합의에서 출발하여 이를 비자유주의 사회들로까지 확장해 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균등한 관계, 곧 여러 사회들 사이의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하는 관계들을 가릴 위험이 있다. 그런 탓에, 롤즈가 말하는 만민법은 힘있는 자유주의 사회의 행위를 규율한다기보다는 그 사회 중심의 질서를 다른 사회에 대한 관계에 덮어씌우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우려를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점은 롤즈가 비자유주의 사회, 특히 그가 '무법적 국가들'(outlaw states)이라고 부르는 사회를 취급하는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롤즈는 만민법의 질서 아래 포섭될 수 있는 비자유주의 사회를 '질서 정연한'(well-ordered) 사회로 한정하고, 이를 '카자니스탄'이라는 가상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카자니스탄은 이슬람을 신조로 하는 비자유주의 국가이다. 카자니스탄의 법 체계는 국가와 교회를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이슬람교도만이 정치의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허용된다. 국민들은 우선 어떠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고, 그 집단들의 상호 협의 체계를 통해 사회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 무엇보다도 카자니스탄의 통치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영토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 요컨대, '질서 정연'하다는 것은, 평화를 애호하며 팽창주의적이지 않다는 것,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공동선의 관념과 법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주의나 견해들에 대해, 특히 다른 종교적 입장에 대해 관용적이라는 것 등을 뜻한다. 이런 국가들은 자유주의 국가들과 함께 만민법의 질서 안에서 안정을 누릴 수 있다.
반면에 무법적인 국가란 이 같은 특징들을 벗어나는 국가들이다. "무법적 국가들은 공격적이며 위험하다." 롤즈에 의하면, 이런 국가들은 만민법의 질서 속에서 관용될 수 없다. 이 무법적 국가들은 '질서 정연함'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그 국가는 "비난받아야 하며, 중대한 경우에는 강제적 제재와 심지어 내정 간섭을 받을 수도 있다." 롤즈가 이런 생각을 피력하면서 어떤 특정한 국가를 지칭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라크나 북한 등을 그 예로 떠올릴 수 있다. 롤즈는 이 같은 무법적인 국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 목적은 무법적 국가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이런 무법적 국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하여 질서 정연한 국가들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롤즈는 자유주의 국가들 및 질서 정연한 비자유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전쟁을 일으켜야 할 이유가 없으며, 또 실제로 1800년 이후 자유주의가 확고하게 정착된 나라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바가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칠레의 아옌데,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이란의 모사데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등 민주적 정권을 전복시킨 사례들에 대한 롤즈의 설명은 매우 궁색하다. [만민법]을 번역한 정태욱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롤즈가 이러한 미국의 행위를 '무법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 편파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롤즈는 현실의 사회들이 결함이 있는 사회인만큼, 그 사회들이 이상적 상태에 가까이 갈수록 민주적 인민들 사이의 충돌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때로 '무법적'인 양상을 보이는 현실의 여러 사회들에 '질서 정연한 사회'니 '무법적인 사회'니 하는 분류 기준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자의적일 수 있다.
이처럼, 롤즈가 현실과 이상적 상태 사이를 오가면서 제시하고 있는 '만민법'의 질서는, 사실상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유주의를 비중립적으로 옹호하고 있다고 볼 만한 소지가 많다. 이 '만민법'의 발상이 과연 롤즈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특성대로 모든 '포괄적인 교리'(comprehensive doctrine)로부터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몹시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오히려 이 같은 시도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제공한다는 구실 아래, 불균등한 힘의 관계 속에 있는 약소국이나 주변적인 사회의 현실을 덮어버릴 위험이 있지 않을까.
2. '두꺼운' 비판과 '얇은' 연대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롤즈가 이론 전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원초적 입장'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다.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걸린 특수한 상황과 처지에 대해 눈을 감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비록 롤즈의 설명대로 이 원초적 입장을 가설적인 '대표 장치'(device of representation)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이런 발상은 각 사회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하는 문제와 갈등을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언제나 일정한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이 지니는 특징으로 상호성을 강조하지만, 이 상호성이 현실의 특수한 처지와 관계들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렇게 상정된 '보편적' 합의 속에 사실상 특수한 관점이 숨어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대표적인 논자 가운데 한 사람인 왈쩌(Michael Walzer)는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자못 흥미로운 구별 방식을 통해, 롤즈의 '만민법' 시도와는 그 함의가 상당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롤즈가 무지의 장막을 통해 가려버리고자 하는 특수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특수함이 '두꺼운'(thick) 것이다. 현실의 모든 사회는 다 나름의 특수함을 지닌 '두꺼운' 사회이다. 바로 이러한 특수함을 바탕으로 해서만 공통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자리잡을 수 있는데, 이때의 보편성이 '얇은'(thin) 것이다. 무엇이 두꺼운 것이고 무엇이 얇은 것인가 하는 점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1989년 중국의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데모를 생각해 보자. 이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비춰지고 다른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본다. '자유', '민주'와 같은 구호가 등장하고, 이것이 번역을 통해 소개된다. 그곳에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보고 데모에 동조할 수 있다. 가령 어떤 미국 시민이 동조한다고 해 보자. 이 사람은 중국 내부의 사정은 잘 모른다. 그러나 '자유', '민주'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 즉 미국에서 살면서 갖게 된 이해와 관심이 있다. 이 사람은 그런 이해와 관심을 중국 사태에 적용한다. 세부적인 면에서 보면, 이 미국인의 이해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실제로 데모를 하는 중국인들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만일 천안문 현장의 이해와 관심이 자신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면, 이 미국 사람은 아마 동조 행위를 멈출 것이다. 적어도 같다고 여기는 부분이 있어야 이 동조는 지속될 수 있다. 이처럼 같은 부분, 또는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민주, 자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일부다. 이것이 '얇은' 것이다. 이 공통된 부분은 '보편적'이지만, 완전히 보편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동조하는 것과 미국 사람이 동조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 한국 사람이건 미국 사람이건 중국 사람이건 이들은 모두 그 나름으로 자유와 민주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 관심과 이해에 공통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체가 겹쳐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관심과 이해, 각각이 지닌 특수한 전체, 이것이 '두꺼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꺼운 것 즉 특수한 전체가 얇은 것 즉 공통된 부분에 앞선다는 점이다. 왈쩌에 의하면, 얇은 것, 보편적인 것이 우선하고 거기에서부터 두꺼운 것, 특수한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두꺼운 것들이 먼저 있고, 상황에 따라 그 가운데서 얇게 겹치는 공통된 부분들이, 즉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인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왈쩌는 두꺼운 것을 '최대적'(maximal)인 것으로, 얇은 것을 '최소적'(minimal)인 것으로 놓고, 전자의 관점을 '최대주의'(maximalism), 후자의 관점을 '최소주의'(minimalism)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최대주의는 최소주의에 앞선다". 이를테면, 중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각각 자유, 민주에 대해 지니는 관심과 이해가 최대적인 것이고, 이것이 그 공통된 부분인 최소적인 것에 앞선다는 얘기다. 중국 사람과 미국 사람은 각각 자기네들의 두꺼운 이해와 관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공통되고 보편적인 출발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공통된 것은 서로의 행동이 겹쳐지고 반복됨으로써 드러나는 얇은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왈쩌의 견지에서 보면, 최소적인 것인 '보편'을 내세워 최대적인 것인 '특수'를 규율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말하자면 롤즈의 시도처럼, 어떤 특수한 이해관계에도 봉사하지 않는 보편적인 원칙을 찾아내서 이를 통해 모든 사회의 행동을 일률적으로 규율하겠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발상이라는 얘기다. 왈쩌에 따르면, 최소적인 것으로서의 보편은 사실상 중립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최소적인 것(얇은 것)이든 최대적인 것(두꺼운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도덕적인 보편은 어떤 두꺼운 도덕들 가운데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보편을 내세워 여러 사회 사이의 연대를 확인하고 증진할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다른 사회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런 식의 비판은 최소적인 것으로 그에 앞서는 최대적인 것을 재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가능한 것은 최소적인 것을 앞세운 최대적인 것으로 다른 최대적인 것을 비판하는 일뿐이다. 이것이 보편을 내세우는 비판의 실상이다.
예컨대, '민주'라는 구호에 동조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독재에 반대한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구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어떤 대안적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 사정은 사회마다 각기 달라진다. 어떤 경우는 사회 민주주의를 그 비판의 기준으로 내세울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중앙 권력의 분산과 지방 자치의 강화를 그 비판의 초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 각각의 입장은 구체적인 맥락과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두꺼운 것이다. 이처럼 비판은 구체적인 두꺼움과 결부되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 행위와 더불어 공통적인 '얇음'을 넘어서서 나름의 두꺼운 도덕을 들이밀게 된다. 그러니까 월쩌에 따르면, 어떤 보편을 내세워 다른 사회를 비판하려 할 경우, 우리는 우리의 특수한 입장을 거기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다른 사회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두껍다. 즉 서로 다른 두꺼운 관점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연대(solidarity)의 방식은 아닌 셈이다. 서로 같이 겹치는 얇음에 주목하는 최소주의, 이것이 연대의 방식이다. 이럴 경우, 비판은 일단 그 해당 사회 내부에 맡겨야 한다. 다른 사회와 연대하려면 자신의 잣대로 섣부르게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사람이 중국 사람과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중국 내부에 대한 섣부른 비판을 앞세워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자칫 두꺼운 미국의 모습을 중국에 강요하는 일이 되기 쉽다. 비판은 일단 중국 사회 내부의 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중국인들 자신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용어로 정의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북한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은 우선 그 사회 내부에 맡겨야 한다. 그것이 두껍게 대립하는 대신, 얇게 연대하는 방식이다. 두꺼움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서로 다르면서도 같이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롤즈의 만민법 구상과 분명히 다르다. 롤즈가 자유주의적 정의관을 모든 사회에 확대, 적용하려 한다면, 왈쩌는 그러한 시도가 야기할 수 있는 보편의 횡포를 경계하는 쪽이다. 왈쩌는 자유주의적 발상의 보편화를 꾀하기보다는 그런 발상 역시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정의의 문제는 각 사회의 특수한 문화를 반영하는 두꺼운 도덕적 관념들의 문제이므로, 어느 한 유형의 정의관을 다른 사회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왈쩌가 여러 사회들이 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도 일종의 두꺼운 최대주의에 해당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발전된 자유주의 정책의 산물이며, 그러한 한 그것을 다른 사회에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소주의가 요구하는 바는 이보다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회의 행동이나 기대가 우리의 행동이나 기대와 겹칠 수 있으면 족하다. 그 같은 행동이나 기대의 바탕에 똑 같은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깔려 있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왜냐 하면 여기서의 같음을 이루는 "최소는 최대의 기초가 아니라, 그 최대의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왈쩌 자신은 다원주의자이다. 그는 자유주의의 한 산물인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 사회의 그렇지 못한 면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시장 논리를 앞세워 사회 영역을 하나의 거대한 교환 체계로 취급하려는 것은, 각 영역의 자율성을 해치는 전제적(專制的)인 자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편협하고 지배 지향적인 자유주의일 따름이다. 반면에, 왈쩌의 다원주의적 시각에 따르면, 사회의 각 영역들은 나름의 자율성과 가치 기준을 지녀야 한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등등의 사회 영역은 다른 영역의 지배를 받아서도 안 되며, 다른 영역을 지배해서도 안 된다. 사회는 이 각각의 영역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는 한에서만 복합적인 평등(complex equality)을 이룰 수 있다. 왈쩌가 볼 때, 이 복합적 평등이야말로 자유주의 사회의 바람직한 정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 같은 다원주의적 잣대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 사회 내부에서의 일이다. 이러한 비판 역시 두꺼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왈쩌의 다원주의가 여러 사회간의 관계 문제를 판단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회 내의 여러 영역들이 각기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다른 여러 사회들도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법하다. 그렇다고 해서 왈쩌가 각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왈쩌에 따르면, 사회는 무엇보다도 그 내부의 비판을 통해, 그 내부의 갈등과 긴장을 통해 변화해 나간다. 사회는 각기 독특한 역사와 기억을 지닌 여러 영역의 복합체이며, 바로 이런 요소들이 그 사회의 두꺼움을 형성하고, 그 두꺼움 내부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물론 모든 사회는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비판과 변화는 궁극적으로 그 사회 내부의 문제이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 왈쩌의 생각이다. 외부의 역할은 얇은 연대에 그쳐야 한다. 이를 넘어서는 두꺼운 간섭은 자칫 강요이고 지배이기 쉽다. 가령 미국인이 천안문 광장의 데모에 대해 동조를 표하는 것은 좋지만, 그 데모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서는 곤란하다. 중국인의 문제와 미국인의 문제가 두껍게 겹칠 수는 없는 탓이다.
이렇듯 왈쩌는 사회들 사이의 관계에서 바람직한 것은 비판보다는 연대이며, 보편적 규율보다는 특수성의 인정이라고 본다. 각자의 두꺼움을 존중하면서 공통의 얇음을 통해 서로 연대해 나가자는 생각이다. 국제 관계에서는 도덕적 최소주의가 필요하고 그 원칙은 '자결'(self-determination)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왈쩌는 분리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편이다. 해당 주민 대다수가 원한다면 분리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와 같은 왈쩌의 견해는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분쟁을 부추기는 상대주의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질서를 보편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그 속에서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안정된 보편 속에서 이득을 얻는 힘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왈쩌의 이론이 무엇보다 '세계화'의 질서를 확장하려는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견제 논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도 아마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3. '동일자'의 정의와 '타자'의 정의
그러나 전반적인 면에서 사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왈쩌의 견해는 다분히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내세우는 얇은 연대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다른 사회에 대해 두꺼운 간섭을 삼가야 한다는 주장은 비중립적인 보편화에 저항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기왕의 문제나 잘못된 관계들을 바로잡는 데에는 크게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를테면, 현재의 세계화 추세와 관련하여 날로 확대되어 가는 빈부 격차를 어떻게 다시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적인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서로 겹치는 부분만으로 연대하자고 해서는, 불리한 처지에 놓인 집단이나 약소국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사실 왈쩌는 이런 식의 문제를 국제간의 문제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도 일종의 분배와 관련된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할 때, 왈쩌처럼 정의를 한 사회 내부의 두꺼운 문제로 보는 입장에서는, 여기에 대해 여러 나라가 서로 겹치는 뚜렷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들 사이에 불균등한 관계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갈등과 충돌이 발생할 경우, 모든 사회는 다른 사회의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은 왈쩌의 견해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비록 그가 자유주의의 자기 확장적이고 팽창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 여전히 자유주의적 발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자유주의를 논란의 여지 없이 규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본질적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개인주의라는 데는 누구도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놓는 사고방식과 이념이 자유주의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자유가 안정적이려면 확고한 자기 경계와 틀을 지닐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에서의 자유가 개인의 '권리'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이러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자유주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권리에서 소유권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오늘날의 자유주의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보다 확장되고 발전된 형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아무튼 자유주의는 이 권리를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확보하고 또 여러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한다. '나'는 일정한 권리를 지닌 주체이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너'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너'와 '나'는 서로 동일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같은 상호성과 그 형식상의 평등성은 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이런 틀이 쉽게 적용되는 것은 물론 자유주의적인 세계 안에서이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지배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느냐가 문젯거리가 된다. 자유주의적인 활동, 특히 자유로운 상품 교환을 핵심 요소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활동이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비자유주의적 지역과 영역을 자유주의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정이 어떠하던 간에, 오늘날의 처지에서 노골적으로 자유주의의 이념과 문화를 강요하는 일이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이 아닌 사회 및 그 구성원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유주의의 보편적 적용에 처음부터 모순되는 비자유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비자유주의 사회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자유주의적 요소, 또는 자유주의와 공통된 요소를 찾아내어, 이를 매개로 그 사회를 규율하고자 하는 편이 낫다. '인권'은 자유주의가 흔히 앞세우는 그런 보편적 요소이며, 롤즈가 제시하는 '만민법'도 그런 보편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왈쩌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비자유주의 사회와 맞부딪혔을 때, 그 속에 자유주의를 이식하거나 자유주의와 공통의 틀을 부과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그 사회를 자유주의와 다른 그대로 인정하자는 쪽이다. 물론 서로 공통되는 부분을 통해 연대를 맺을 수 있지만, 그 공통 부분에 어떤 본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연대가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고, 공통적인 것은 우연의 소산이다. 말하자면 '나'는 '나'고 '너'는 '너'이니, 서로의 개성과 권리를 존중하자는 식이다. 그렇다면, 비록 왈쩌가 사회 상호간에 자유주의적 틀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서로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주의적 개인들간의 관계를 사회 사이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또한 간섭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 바탕에는 뚜렷한 자기 경계를 지닌 개체들이 상정되어 있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몇몇 공동체주의자들이 그러하듯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관계가 맺어져 있거나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경우의 일이다. 이런 경우에 상호 무간섭이나 상호 인정을 주장하는 데 머무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무력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회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하지만 왈쩌의 견해에는 여전히 자유주의의 자기 중심성이 깔려 있다. 여기서 다른 사회는 자유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율적 개체로 여겨질 뿐, 그 사회들 사이의 관계가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왈쩌 식의 사고에도 타자를 자신으로 환원하거나 자기 영역에서 배제해 버리는 동일자 중심의 전략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개체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에서는 이런 동일자 중심의 발상을 피하기 어렵다. 무릇 자유란 자기가 관장할 수 있는 영역에서, 즉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는 타자를 배제한 동일자의 영역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의 일단은 왈쩌에 대한 로티(Richard Rorty)의 해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로티는 '두꺼움'이 '얇음'에 앞선다는 왈쩌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보편적인 합리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공박한다. 자유주의 역시 특수한 역사적 산물임을 주장하고, 자유주의에 속하는 특성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내세우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와 같이 왈쩌와 유사한 견지에 서면서도 단순히 비자유주의 사회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자유주의를 선전하고 전파하고자 한다. "충실한 서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주의 사회를 본받으면 '우리'처럼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고 비자유주의를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로티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자기집단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자기집단중심주의의 근거로 왈쩌의 '두꺼움'이 원용되고 있다. 자신의 두꺼움이 출발점이 될 때, 이 출발점은 다른 두꺼움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두꺼움을 확장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집단이 자기중심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듯이 당신들 집단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다만 우리는 강제적이 아닌 방식으로 우리 집단의 문화와 이념이 더 낫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설득하려 한다. 당신들도 물론 그럴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관점의 문제는 겉보기의 상호성이 사실상 동등하지 않은 현실의 역관계를 가려버린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기술 수준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두 나라를 놓고 상호간에 공평한 거래 조건으로 경쟁을 하자는 것과 비슷한 논리인 셈이다. 이보다는 왈쩌의 경우가 조금 나을지 모른다. 서로 겹치는 부분에서만 관계를 맺자는 식이기 때문이다. 같은 비유로 하자면, 각자가 희망하는 품목에 대해서만 서로의 조건이 맞는 한에서 거래를 하자는 얘기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방식도 이미 주어져 있는 불균등한 조건과 힘의 격차를 바로잡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모름지기 정의란 바로 이 같은 바로잡음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왈쩌 식의 자유주의마저 넘어서서 이러한 바로잡음에 이를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자리에서는 단지 몇 가지 생각해 볼 점만을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첫째,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불균형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존의 틀을 계속해서 깨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롤즈의 만민법처럼 어떤 보편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앞서, 또 왈쩌처럼 소극적이고 얇은 연대에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미 편파적인 보편으로서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틀을, 예컨대 선진국 중심의 자본 이동과 상품 무역의 틀을 깨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 철학의 영역에서는 보편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이와 같은 틀과 어떤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것인지 면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려는 것만이 정의를 위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때로 알력과 분쟁이, 즉 기존의 틀에서 보면 부정(不正)으로 비칠 수도 있는 행위가 새로운 정의의 성립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그렇다고 이러한 노력이 무정향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 형식적인 방향은 '배제의 배제'라는 형태, 즉 침탈과 지배를 위해 이미 이루어진 배제를 배제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겠지만, 그 내용적인 방향은 센(Amartya Sen)이 이야기하듯 '능력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잡힐 수 있을 것이다. 센은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실질적 기회를 체계적으로 박탈당함으로써 겪게 되는 고통에 전혀 개의치 않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정의와 발전을 위해서는 '능력'의 확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을 '실질적 자유'와 등치하고 이 실질적 자유의 평등한 실현을 사회 발전의 목표로 놓는데, 이렇게 되면 자유는 자유주의의 형식적 틀을 벗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및 원조와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센의 생각은 우선 한 사회 내에 대한 것이지만, 사회와 사회 사이에도 같은 발상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정의'를 '타인의 선'이라는 의미로, 나아가 '약자를 돕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럴 때, 정의는 '나' 또는 '나의 집단'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이럴 때 정의는 자유에 앞서는 것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그 때의 정의는 많은 '나'들의 형식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적 규범으로가 아니라, 이미 언제나 타자와 대면해 있는 나의 상황에서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것으로, 즉 타자에게 내가 이미 차지한 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과 같이 냉혹한 경쟁이 삶의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생각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격차를 확대"하는 세계화와, 그 세계화에 편승하거나 소극적인 대응밖에 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발상에 안주할 수 없다면, 바로 그러한 못마땅한 현실이 우리를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버텨 온 정의의 관념, 즉 정의는 타자의 선이요, 약자를 돕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먼저 이러한 정의관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조건들을 제대로 궁구해 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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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Liberalism and Justice
-- The Liberalist View of Justice in the Epoche of Globalization
by Moon, Sung-Won
Summary
Could liberalism be just today? As a dominant social thought of our epoch, could it offer a principle for the justice of globalization? For the answer, this paper examines John Rawls' world-scale theory 'the law of peoples' and Michael Walzer's moral concepts 'thick and thin'. John Rawls argues that the liberalist conception of justice can extend to the relations between liberalist societies and non-liberalist ones. But 'the law of peoples' involves the partial applicability in the name of universality; and it has no concern for the overcome of substantial inequalities in the world. On the other hand, Michael Walzer proposes the 'thin' solidarity of 'thick' societies without intervention or coercion. This seems to be able to criticize the expansionist tendency of American and neo- liberalism. However, his view is too passive and insufficient to correct the unfair relationship already established by powerful states. In effect, these limits of several versions of liberalism, which are bound to its innate individualism, make it necessary to search for a new conception of justice for the future of globalization.
Subject Sphere : Social Philosophy, Political Philosophy, Contemporary Philosophy
Key Words : Law of peoples, Thin and Thick, Justice, Liberalism, John Rawls, Michael Wal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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