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한 여인의 성적 주체(정체성)의 계보학

나뭇잎숨결 2021. 10. 4. 13:49


한 여인의 성적 주체(정체성)의 계보학*
― 사르트르와 푸코 사이에서 ―


배 철 영**동의대


요 약 문
이 글은 ‘주체’ 개념을 둘러싼 사르트르와 푸코의 입장의 차이를 구분한 다음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 이론은 푸코의 권력/구조 이론의 보완을 필요로 하며, 또한 푸코의 이론은 암암리에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의 능동성과 초월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사르트르의 인간 주체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 구성해가고 창조해 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결단과 선택은 언제나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때 자유란 상황 내에서의 자유이다. 한편 상황 내에서의 선택이 언제나 투명한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기만하는(불성실의) 결단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존적 정신분석은 인간 주체로 하여금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여 미래의 자신의 삶을 올바로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삶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푸코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로운 구성적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형성하는 권력-구조의 틀에 예속된 존재이다. 권력-구조는 개인으로서 인간 존재를 선행하여 제도나 관습 혹은 담론이나 지식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군대, 학교, 가정, 성당 과 같은 권력 기구에서 교육, 훈육, 훈련을 통해 개개인의 말이나 행동, 태도, 신체 등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여 지배한다. 인간 존재는 이러한 권력-구조의 지배에서 대체로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은 구성적 주체 개념에 의존함이 없이 권력-양식의 전개 과정을 추적하여 우리의 현재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역사 서술의 한 방법론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적 주체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계보학적 방법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한편 푸코는 자신의 이러한 권력론에서 ‘저항’ 개념을 등장 시킨다. 푸코 저작에서 불명료하게 남아 있는 이 개념은 필자가 보기에 푸코의 주체구성론을 통해서는 규명될 수 없는 일탈적인 개념이다. 곧 기존의 권력/구조 연관으로서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이고 구성적인 성격의 존재론적 단위이다. 더욱이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개개인을 지배하는 현재의 권력/구조의 지배 논리를 폭로하는 것이 푸코의 과제라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후에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요컨대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론이 자신의 과제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도 구성하고 창조하는 주체를 전제해야 한다.

※ 주요어: 주체, 자기기만, 권력/구조, 계보학적 방법론, 저항
1. 머리말

이 글의 목표는 우선 인간 ‘주체’에 관한 사르트르(J.-P. Sartre)와 푸코(M. Foucault)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 개념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데 있다. 나중에 상론하겠지만 사르트르에게서 주체란 세계와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존재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초월성을 특징으로 하는 명증한 자기의식의 존재다.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투명하게 반성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행위와 실천을 통해 능동적으로 실현해 갈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비록 자기기만 속에서 일견 인간은 투명하지 못한 의식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가령 정신분석을 통해 이를 벗어나 자신의 본래의 명증적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으며, 이 상태에서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결단할 수 있다는 게 사르트르의 인간 주체다.
그러나 푸코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에게서는 주체란 권력 관계들이 펼쳐 놓은 미세한 그물망의 어느 한 지점을 차지하는 좌표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주체란 권력이 스스로를 행사하기 위해 취하는 다양한 양식(형식)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리고 예속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곧 제도나 관습 혹은 담론 등에 의해 개인의 주체성은 미세한 부분에, 가령 동작이나 말투, 태도에 이르기까지 규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도나 관습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를 넘어선 새로운 결단 운운하는 것은 사르트르의 소박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푸코의 구성되는 개인의 주체성이란 곧 그의 ‘정체성’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푸코의 주체의 문제는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푸코의 말이다.


내 이론의 전제는 개인이 선험적인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신체 위에, 행동 위에, 그리고 욕망 위에 가해지는 권력 관계의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체에 대한 푸코의 생각은 주체를 구성되는 존재로, 곧 주체성을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데서 그 한계를 드러내며, 나아가 그의 주장 자체에 주체의 구성적 특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먼저 푸코의 편을 들어 사르트르의 주체가 너무 과잉 능력을 가졌거나 혹은 ‘근대적 인간’ 담론의 연장선에 있는, 그래서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는 허구일 뿐이라는 생각에 부분 동조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체에 관한 탐구에 권력/구조 연관이 도입되어야 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푸코에 반대하여 그의 권력 이론의 주요 개념인 ‘저항’이 사르트르적인 반성적-비판적 의식을 전제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능동성의 특정 모습을 제한적이나마나 이해하고자 한다. 결국 이 ‘저항’이 비록 자신의 현재적 삶의 맥락에서 명증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미래를 예비하는 인간의 능동적 주체의 모습이며, 또한 비록 모호하다 할지라도 미래의 새로운 삶의 조건 내지 권력의 양식이 등장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글의 제목과 관련하여 논의의 전개 방식을 언급하겠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는 ‘불성실’ 혹은 ‘자기기만’에 빠진 여인의 성적 태도를 기술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주체 개념에 관한 윤곽을 이 여인의 태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려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푸코가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를 통해 권력의 내부 공간에서 관찰되는 개인의 자아-정체성에 관한 기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 이론을 성적 주체(정체성)의 형성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어 비교하기 용이한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직접 푸코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권력 관계에서, 성(sexuality)은 가장 눈에 안 띄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많은 술책에 이용될 수 있고 가장 다양한 전략들을 위해 거점 또는 연결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까닭에, 오히려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가장 큰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푸코의 관점에서 예의 여인의 성적 태도를 분석함으로써 구성하는 주체에 대한 사르트르의 입장을 비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체와 권력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거친 다음 우리는 사르트르의 ‘불성실’ 혹은 ‘자기기만’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푸코의 ‘저항’이 비록 애매하게 그려지지만, 양자가 삶의 현실적 맥락에서 인간 주체의 세계와의 또 다른 관계 맺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그것이 미래의 새로운 권력 양식을 암시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2. 사르트르: 구성하는 주체

2.1. 자유와 상황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란 이 세계에 어떠한 존재의 필연성도 갖지 못한 체 태어난 우연의 존재이다. 그래서 끝임 없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창조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표현해서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여분의 ‘잉여물’이다. 또 달리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행하는 어떤 정해진 삶의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세계 내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자유의 존재이다. 인간이란 세계에 우연하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세계에 아무 상관이 없을 ‘덤’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어떤 선행하는 결정 요소를 갖지 않는다. 즉 어떤 결정론의 제약으로부터도 벗어난 자유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자유로서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삶의 본질을 자신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세계 내에서 스스로 창조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인간은 먼저 실존한 다음 자신의 본질을 미래의 실천 속에서 창조해 간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가령 여기 ‘종이 자르는 칼’이 있다고 하자. 이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먼저 기술자는 칼을 만들기 전에 그 용도나 모양새를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칼의 본질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 본질은 당연히 편지 봉투나 접혀진 종이를 자르는 것이다. 칼은 보통 그 용도(본질)에 비추어 만들어진다. 요컨대 종이 자르는 칼의 본질은 그 존재함에 선행한다 하겠다.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게 된다. 즉 본질에 앞선다. 그럼 본질은 어떻게 된 건가?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이후 차차 만들어 가고 창조해 가는 것이다. 어떻게? 대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본질을 창조해 가는가?
행위와 실천을 통해서다.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기투(企投)를 행함으로써 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질이란 결국 우리의 결단에 의한 행위 및 그 결과와 다름 아니다. 우리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즉 우리의 본질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적인 무엇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본질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목적의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결단, 곧 행위를 수행하였느냐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본질의 형성과 세계의 변형에 기여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매 순간 결단하고 선택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즉 목적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위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유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모든 행위의 필수 불가결한 근본적인 조건은 행위하는 존재의 자유”라고 쓰고 있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가히 절대적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선택하는 하나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자유이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곧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자유라는 형벌을 선고받은 것이며, 자유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작품 도처에서, 그것이 철학적 저작이든, 소설이든, 희곡이든 간에 등장하는 그의 기본 명제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존재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행하려는 것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사회의 어떤 정치적․경제적 구조나 심리적 요소가 원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거나 선택하게끔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런 유형의 원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들은 우리의 결단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선택을 반드시 하게끔 만드는 결정적 원인은 결코 아니라는 게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가령 철수는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책임감 있고 근실한 한 시민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그가 미래에 무언가를 행할 것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계속 이 특성을 갖고자 한다면 이것은 내가 그렇게 하고자 선택하였기 때문이고 지금도 계속 자신의 현재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유를 바탕으로 한 결단과 선택이 무차별적이고 임의적인 분출로서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에 관해서 말할 때 그는 변덕스럽고 규칙도 없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며 무근거하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결단과 선택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내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 역시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유는 상황 내에서만 존재한다.’
이 상황은 우리들에 의해 구성되고 해석되는 한편으로 우리가 선택한 것을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게끔 하는 수많은 물리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그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 존재의 행위를 필연적으로 결정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상황 결정론’ 내지 ‘환경 결정론’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간의 결단과 선택은 언제나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상황은 언제나 선택의 배경을 이루며 상황 속에서만 행위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롭다는 표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상황 속에서 원하는 바를 자기자신에 의해서 결정짓는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해서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성취되었는가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서 하등 중요한 것이 못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봉착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를 행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자유와 동일한 의미로서의 인간 존재는 이제 언제나 상황의 세계 내에 머물러 있으며 결단과 선택을 통해서 대상을 방해물로 구성하거나 창조한다. 나의 자유는 세계 내에 있으며 스스로 목표를 향해 실천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황이 어렵다거나 좋지 않다거나 말하는 것도 세계 속에서의 나의 선택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르트르가 드는 예를 들어보겠다. 늘 다니는 등산길에서 어느 날 우연히 전에 없던 바위가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자. 그 바위가 나에게 방해물로 나타나는 것은 내가 산의 정상까지 오르고자 결단 혹은 의도하였기 때문이다. 바위 그 자체는 오르기에 쉬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바위는 원래 바위일 뿐이다. 단지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즉 나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의해서만 어떻게 하기에 쉽다거나 어렵게 나타난다. 저 산의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내가 지금 봉착한 상황을 어려운 것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드산(W. Desan)은 다음과 같이 사르트르의 논의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 실재는 모든 곳에서 방해물과 저항을 만난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선택 때문에 그러하다. 이러한 선택이 곧 인간 실재 그 자체이다.? 요컨대 그의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상황 내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우리의 결단과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2.2 불성실 혹은 자기기만

그런데 인간은 과연 상황 속에서 언제나 맑고 투명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적을 선택하고 결단할까? 혹 자신은 진정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의식 표면상의 믿음일 뿐 실제의 의도는 심층에 가라앉아 있어 그 자신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무의식’이란 개념이 시사하듯 의식의 표면과 심층 사이에는 복합적이고 중첩된, 그러나 뒤엉켜 있어 풀기 어려운 관계가 존재한다. 가령 신경증 환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며, 이를 전혀 엉뚱한 의도와 연관 지우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불성실’(不誠實)의 존재 방식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불성실’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자기기만이란 일종의 거짓말이다. 통상 거짓말에서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기만, 소위 자기자신에 대한 속임에서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모두 동일한 존재인 만큼 거짓말에서와 같은 이원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며 심지어 “불성실 속에서 ‘살’ 수도 있다.” 인간은 얼마든지 불성실 속에서 선택하고 결단한다. 그것도 계속 이어지면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불성실할 수 있다면 이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선 사르트르 자신이 들고 있는 예에서 시작해 보자. 인간 존재의 이 주요한 양태, 즉 불성실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사르트르의 예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존재와 무?에는 호감을 가진 한 남자와 처음으로 밀회를 하러 나온 여인, 까페에서 일하는 웨이터 그리고 동성애자에 관한 분석이 나온다. 여기서는 이후의 논의 전개를 위해 밀회를 하러 나온 여인의 경우에 주목하겠다. 그녀는 그를 성당에서 우연히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어 데이트 신청을 한다는 건 정숙한 숙녀로서 할 짓이 아니다. 해서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가와 데이트를 신청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둘은 저녁 해가 떨어질 무렵 한적한 교외 공원길을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얘길 나누며 걷다 잠시 쉴 요량으로 근처 의자에 않았다. 계속되던 대화는 순간 끊어지고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흐를 때 그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잡는 남자의 열정에 찬 표현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 불장난에 동의하는 결과가 되고 자신이 정숙하지 못하다고 그가 느낄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거부하면 이 순간의 몽롱하고 매력적인 쾌감과 어렵게 이루어진 그와의 미묘한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 당장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그녀는 지금의 관계의 시간적 전개와 이후의 결단을 직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의 손을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리고서는 지금 이 매혹적인 순간을 외면한 채 고상하고 추상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를 이야기의 주제로 삼고자 한다.
사르트르 말대로 그녀는 불성실 속에 있다. 그녀의 심리적 상태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1) 그녀는 남자의 행동의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그녀 역시 굳이 그의 요구를 피하고 싶지 않다. 2)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정숙한 여인으로 있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여자는 정숙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순간 그녀는 갈등 속에 밀려들어간다. 이때 3) 그녀는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름 사람의 손인 양, 마치 나무 막대와 같은 사물인양 실감하고서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즉 전혀 다른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결단을 내리고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자신의 현실로 삼고 살아간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엉뚱한 해석을 내리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사르트르 말대로 우리는 살면서 불성실의 행위를 수행한다. 자신은 진정한 선택이라고 믿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건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이자 기만적인 삶이다. 우린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자기자신을 반성함으로써 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진정 본래적 상황에 이르러 주체적으로 결단할 수 있는가? 사르트르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 불성실은 궁극적으로 탄로 나게 마련이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바로 자기자신이므로 종국에 가선 자신의 결단을,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불성실 속에 놓여 있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어떠한 통로를 통해서이든지 자신의 불성실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특정한 분석의 결과가 옳은지(치유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겠는가? 자신이 선택한 궁극의 본래적 선택은 그 자신이 한 것이니 만큼 그 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사르트르가 환자로 하여금 불성실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은폐된 진실을 반성 내지 성찰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선택으로 이르게 하는 방법으로서 제안하는 것이 ‘실존적 정신분석’(Existential Psychoanalysis)이다.


2.3 실존적 정신분석과 그 한계

‘실존적 정신분석’의 논의는 고정된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서 시작된다. ‘실존적 정신분석’은 인간이 상황 속에서 행한 근원적인 궁극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탐구함으로써 그의 본래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상황 속에서 인간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며, 실존적 정신분석자의 임무는 이들 각각의 고유한 선택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또한 근원적인 선택의 의미가 밝혀짐으로써 우리는 삶에 연관된 그 밖의 다른 사건들의 의미 역시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선택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서는 그 선택이 성적 욕망, 욕구, 충동, 환경, 경제적 배경 등 어떤 개념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견해다.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선택에는 그것을 선행하면서 결정하는 어떠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입장을 명료히 하기 위해 프로이드주의 정신분석과 비교한다. 프로이드주의 심리학자들 역시 근원적인 선택을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또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외적이고 경험적으로 탐지할 수 있는 삶의 심리적 현상들은 실제로 그 사람을 구성하는 총체성의 표현들과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사르트르와 프로이드는 일치한다. 양자는 모두 유전이나 기질적 성격처럼 소위 미리 주어진 생물학적 요인들의 존재를 거부한다. 두 사람은 인간 실재를 총체성으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 간주하며,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탐구에서는 그가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그의 출생 때부터의 삶의 내력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드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발견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개념들, 특히 ‘무의식’, ‘리비도’, ‘콤플렉스’ 등의 개념들에 반대한다. 프로이드주의 정신분석은 인간의 의식을 선행하는 이들 심리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 실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바로 이 점을 거부한다. “실존적 정신분석은 인간적 자유의 근원적인 출현 이전의 것을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곧 자유로운 의식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자의 선택은 의식적이다. 그런데 보통 정신분석자가 보는 것은 그가 환자에게서 이끌어내는 것-가령 외적으로 드러난 말실수나 동작 내지는 특정 행위 등-을 통해 이르게 되는 무의식 속의 억압된 리비도적 자아다. 그러나 환자나 정신분석자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은 환자의 무의식적 자아가 아니라 나아가 치료자 혹은 거리를 두게된 자신에 의해 비추어진 환자의 근원적인 선택임을 주목하여야 한다.
정신분석자는 환자를 타자의 관점에서 혹은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대상으로서 관찰한다. 여기에서 환자는 자기기만 속에서 하게된 그릇된 선택을 마치 자신의 진정한 삶인 양 살아왔으나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선택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오랜 세월 전위(轉位)와 억압으로 스스로를 숨겨온 만큼 원래의 자신의 선택을 찾아가기가 어려워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자를 찾는 것이다. 정신분석자, 곧 상담자는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선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자일 뿐이다. 자신의 본래적 상황에 주체적으로 직면해서 진정한 선택을 하게 되는 건 바로 환자 자신이다.
한편 환자 역시 정신분석자를 매개로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대상적으로 바라 볼 수 있으며 이때 대상은 곧 자기자신이다. 나아가 환자는 대상화된 자신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 곧 근원적 결단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정신분석학적 만남에서 환자는 정신분석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의식적, 무의식적 삶을 반성하고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자의 관찰(치료소견)은 참이 될 수 있는 높은 확률을 가진 가설로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많은 행동들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의 참을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자는 결국 개별적 주체로서의 환자 자신임이 주목되어야 한다. 또한 개개인은 자신에게 고유한 선택을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이 단일하고 획일적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한 실험자에게 소용되었던 방법은 그 사실 자체로 하여 또 다른 하나의 피실험자의 경우에는 사용이 될 수 없다.”
아래의 3.2에서 상론하겠지만 실존적 정신분석은, 그러나 한계가 있다. 환자가 정신분석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자기기만의 뒤얽힌 회로를 헤쳐 본래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해서 과연 인간은 불성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가령 예의 여인이 자신의 진정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불성실의 행위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불성실의 행위는 어떤 다른 특정한 의미를 갖는 것 아닐까? 나아가 우리의 선택과 행위의 배경을 이루는, 따라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분석의 여지는 없는가? 우리는 푸코의 권력-제도 이론을 거친 다음 그 비판의 한 모습을 윤곽 잡을 수 있을 것이다.



3. 푸코: 구성되는 주체

3.1 권력과 구조

다르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상황 속에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사실 상황을 구성하는 구조들로부터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이다. 아니 심하게는 인간 존재란 구조들로부터 완전 종속되어 있어 원칙적으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이다. 후자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은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 이후에 등장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의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구조는 과학적 법칙과 같아서 인간의 삶의 현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한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라는 것도 그 심층에 놓여 있는 불변적인 엄격한 구조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가령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결혼 양태에 공통적인 원리를 발견하여 이를 인간의 모든 결혼 양태를 지배하는 보편적 구조로 확대 인식하며 나아가 과학적 법칙으로 규정하려 한다. 여기서 구조는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불변적인 보편적 구조이다. 물론 얼마 후 구조에 대한 이와 같은 견고한 태도는 다양한 경로로 비판받아 완화되고,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가 등장함으로써 구조에 대한 유연한 태도가 나타난다. 이제 구조는 우리의 지식과 사고 방식 그리고 행위를 지배하는 ‘틀’로서 기능하나 불변적인 것은 아니다. 제도나 관습과 같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형되거나 다른 틀에 의해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틀의 지속은 완강하며 다른 틀에 의한 변형과 대체의 과정에서 저항하고 갈등한다.
우리 인간은 의식하고 있든 않든 간에 이와 같은 유연한 구조로서의 제도와 관습의 틀 내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게 통상적인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세계에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먼저 특정한 제도와 관습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교육․훈육․훈련 등을 통해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 하는 것을 배우며 그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르트르 말처럼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구성하고 창조하며 산다기 보다는 오히려 제도와 관습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주체로서 개인이란 이와 같은 구조의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구조의 반영물로서 인간은 이 구조-제도의 권력의 광범위하고 미세한 영역에까지 걸친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후기구조주의자 푸코를 따라 권력이 구조라는 형식(양식)의 옷을 입고 인간 개개인의 삶 전반을 통어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서 개인이 주체로 만들어지는 것도 바로 이 권력의 형식들에 의해서다. 그래서 “개인은 권력이 유통하는데 필요한 매개체이지 권력을 행사하는 주인이 아니며… 개인은 권력이 만들어내는 구성물이며 동시에 권력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일 뿐이다.
권력과 구조, 곧 권력의 작동 형식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고 권력이 그대로 구조라는 말은 아니다.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이 구조적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권력은 때론 제도와 관습의 형태로, 때론 구조-언어, 곧 담론과 지식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행사하며 교육, 훈련, 훈육 및 기율을 통해 우리의 언어와 행위의 미세한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우리를 지배한다. 푸코의 말이다.


“새롭게 변화된 권력의 모습은 마치 모세혈관과 같은 것이어서 개별자에게 미치는 권력의 효과는 개인의 육체와 행동, 태도, 그들의 담론, 그리고 학습과정이나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곳에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푸코는 이처럼 권력이 개인의 미세한 영역n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효과를 발휘하는 기술(technology)을 일컬어 권력의 새로운 ‘미시 물리학’이라 부른다. 이 기술은 18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해온 권력의 지배 작동 방식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권력의 지배 효과가 언제나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권력이 강제나 배제, 또는 방해와 같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효과를 발휘하지 만은 않는다는 말이다. 권력은 또한 새로운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즉 담론-지식과 제도-관습을 생산하기도 하며 이들은 다시 권력의 효과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이 권력을 받아들이고 그에 순종하는 것도 권력이 금지와 억압의 모습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형성하고 쾌락을 유도하며 우리의 생활에 안정을 주는 생산적 기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권력은 ‘저항’을 받기도 한다. 아니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저항이 존재한다. 이미 말했듯이 권력은 정교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그물망(권력기구, 권력장치, 담론-지식 등)을 펼쳐 개개인의 구체적인 영역 위에, 가령 신체나 성적 태도에 자신의 기술을 발휘한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권력의 효과가 발휘되고 나면 그 강화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 발생한다. 푸코를 따르면 저항은 지배적 권력에 즉시 반응하며 일어난다. 즉 개개인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지배 권력에 대립한다. 이 저항은 이런 혹은 저런 구체적인 권력 기관이나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과 형식(양식)을 공격한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의 지배적 형식들에 대립하는 이러한 저항의 형식들을 함께 분석할 때 비로소 특정 영역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 관계들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면 저항은 가령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을 취하는가? 푸코에 의하면 기존 권력에 대항하는 육체의 반항, 혹은 기존의 성이나 결혼 제도 혹은 고상함에 저항하는 쾌락의 유혹이 그것이다. 이때 ‘육체’와 ‘쾌락’의 저항은 어떠한가? 여기서 푸코의 설명은 분명하지 않다. 마치 ‘저항’은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여겨지며, 이는 다시 성적 신체의 현상학을 전개하는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를 상기시키다. 그러나 푸코의 구성주의적 시각은 완강하다. 그는 다른 곳에서 ‘쾌락’의 존재 방식 역시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과연 나의 몸이 고통스럽거나 즐`거운 것도 제도나 관습의 허가 하에서 비로소 그러한가? 이러한 신체적 거부나 쾌락적 저항은 곧 푸코가 거부하려는 주체의 존재론을 시사하지 않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답변을 내리지는 않는다. 단지 바로 이 지점에 하나의 철학적 논쟁이 새롭게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만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다른 한편 푸코는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권력 혹은 인구를 지배하는 의학의 권력 등에 대한 저항을 예로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성의 제도나 관습을 거부하는 혼전 동거나 자유로운 낙태의 요구 등이다. 이들 저항 역시 권력적이다. 그리고 이들 저항의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는 구분된다. 기존의 지배 권력과 이에 대한 저항 권력은 이들이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에 의해 구분된다. 지배 권력은 자신의 효과를 발휘할 비담론적 권력 양식으로서 제도나 관습과 담론적 지식을 확보하고 있거나 강화할 것이며 반면 저항 권력은 저항 담론이나 지식을 구하고자 할 것이고 새로운 권력 제도나 기구들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또한 이 두 권력은 동일한 개인의 신체나 성적 태도 위에 작동할 수도 있다. 곧 한 개인에게 다양한 권력들이, 정확하게 여러 권력 양식들이 복잡하게 작동할 수 있고, 반면 그들에 대한 다수의 저항들 역시 활동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 또 다시 제기된다. 곧 그 저항적 권력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먼저 저항의 양식이 존재하고 저항이 일어난다기 보다는 먼저 저항이 일어나고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모호하고 혼돈 속에서 자신의 형식을 구하지 않는가? 이것은 곧 기존의 권력에 대한 신체적 거부, 혹은 쾌락적 저항은 곧 푸코가 거부하려는 주체의 존재론을 시사하지 않는가? 나는 푸코가 후기에 가서는 그가 그토록 혐오한 구성적 주체를 다시 암암리에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지금은 권력/구조 연관에서 사르트르 비판을 시도하겠다. 푸코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권력/구조 연관이 어떻게 주체(개인)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의 존재론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우리의 원래의 이야기 줄기에서 다시 하겠다. 요컨대 다음은 푸코의 시각에서 행한 사르트르 비판이다.

3.2 권력/구조와 자유, 혹은 계보학적 방법론

다시 앞의 얘기로 되돌아 가보자. 선명한 의식에서든 아니면 불투명한 혼란스러운 의식에서든 우리가 상황 속에서 선택하게 될 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정말 우리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황 속에서 절대적으로 투명하고 자유로운가? 먼저 답변부터 하자면 그는 상황을 구성하는 지배적 요소들, 그 가운데 제도나 관습의 권력에 대해 과소평가 하였다. 이를 지적하기 위해 앞에서 사르트르가 불성실의 행위를 수행하였다고 규정한 밀회를 나온 여인을 다시 분석해 보자. 우선 그녀가 엉뚱한 판단, 그러니까 자기기만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갈등 상황에 다시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논의의 편의상 좀 단순화시키겠다.
그녀는 이제 다음의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봉착해 있다. (1) 부모와 학교 그리고 성당의 가르침대로 정숙한 여인으로 있고자 함으로써 그로부터 손을 빼는 것, (2) 그녀가 꿈꾸는 그와의 낭만적 사랑과 지금의 신체적 쾌락을 포기하기 어려워 그와의 신체 접촉을 허락하는 것. 그녀의 선택지는 이 두 가지다. 사르트르에게선 그녀가 물러서지 않고 어떤 하나를 자신의 실천으로 선택하는 것, 그게 기만하지 않는 진정한 삶이다. 그러나 예의 그녀는 이 선택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닌 엉뚱한 결단을 내리게 되고 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란 게 그의 진단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봉착하고 있는 상황이 이 두 선택지 가운데 반드시 어느 하나를 필연적으로 선택하게끔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여기까지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앞의 두 선택지 자체의 정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선택의 초기조건, 곧 그녀의 사고 방식과 행위 자체를 규제하고 제어하는 제도와 관습이라는 틀 자체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추적하는 데 까진 육박하지 않는다.
그녀의 갈등하는 두 가지 태도는 어디서 왔을까? 그녀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한편으론 몸가짐을 정숙하게 가져야 하고 성에 대해선 소극적인 게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모순되게도 다른 한편 자유로운 낭만적 사랑을 갈구하며 이를 실현시킬 멋진 남성의 존재를 만나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양립하기 어려운 두 태도가 서로 묘하게 갈등하며 존재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겠다. 그녀는 서로 갈등하는 두 관습 내지 관행 사이에 놓여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르트르에게 이건 어찌 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건 하나의 상황으로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선택해서 생겨나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단지 이미 주어진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선택을 회피하거나. 그러나 푸코를 따라서 보면 우리는 더 전진해 들어가야 한다. 그녀의 태도는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권력이 가정․학교․성당 과 같은 권력기구에서 교육과 훈육을 통해, 곧 제도나 관습의 형태로 그녀에게 그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처신하도록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사고 방식이나 언표 그리고 몸짓을 통해서 우리는 곧 그 배후의 권력-제도와 권력-담론을 거슬러 추적할 수 있고, 나아가 그 권력/구조의 정체성을 새롭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우리의 ‘현재’를 보다 분명한 모습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이 권력/제도의 정체 및 나아가 그 전개 과정을 밝혀 우리의 현실의 올바른 규명을 시도하고자 하는 전략이 이른바 푸코의 ‘계보학’(genealogy)이다. 주체 개념과 관련하여 계보학에 대한 푸코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구성적 주체라는 개념 없이, 아니 주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역사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 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계보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방법론이라 하겠습니다. 계보학은 사건의 장(場)과 관련하여 초월적이거나 역사의 전개 속에서 공허하게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과 담론과 대상의 영역 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해 내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다. 계보학은 ‘자유’의 개념 역시 ‘지배계급의 고안품’이지 인간 본성의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역사가 우리의 신체에 각인 시켜 놓은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이며 형성된 우리의 주체성을 체계적으로 분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의 성과 사랑에 대한 태도를 지배하는, 혹은 그 태도에 각인되어 있는 권력-구조란 무엇인가? 그의 계보학적 시각에 기대어 이해해 보자. 여기서는 두 가지 지속적 경향성을 띠고 있는 제도 혹은 관습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전통적 사랑’의 관습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적 사랑’의 관습이다. 낭만적 사랑은 18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포괄적인 사회적 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향이다. 반면 전통적 사랑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연원을 가지나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의 사랑 방식이다. 낭만적 사랑은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랑과는 달리 남녀 두 사람의 관계 형성에서 경제적 측면 외의 요소를 중요시한다. 두 사람에겐 먼저 정신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영혼의 만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로간의 느낌의 깊이가 중요시되나 그렇다고 성적 욕망의 노골적인 표출과는 양립하지 않는다. 혼인이 이루어지더라도 친족 관계로부터는 어느 정도 분리되고 결혼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가정’과 ‘일’은 분리되고 부부간의 공동의 정서적 유대가 강조된다. 당연히 가족 형태는 대가족으로부터 소가족으로 이행된다.
?존재와 무?가 쓰여진 해가 1943년임을 감안한다면 당시 예의 여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태도를 지배하는 구조는 이처럼 전통적 사랑과 낭만적 사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사랑의 관습은 그녀의 존재에 앞서 어느 정도는 서로 겹치기도 하고 대체적으로는 갈등하는 상이한 권력 양식으로 존재하면서 그녀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권력은 서로를 대체로 배제한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며 또한 이질적이므로 서로 갈등한다. 추측하자면 그녀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고 정숙 하라는 전통적 사랑의 방식을 가정, 성당, 학교에서 부모, 성직자, 교사로부터 교육받고 훈육받았을 것이다. 반면 낭만적 사랑은 친구들과의 얘기에서, 연애 소설을 통해, 혹은 매스컴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가슴에 쌓여갔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태도의 내용은 이들 구조의 권력이 행사된 효과이며, 나아가 일반적으로 그녀의 생각, 말, 행위 심지어 조그마한 동작 하나도 이들 권력의 침투에 의해 빚어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갈등하는 그녀도 실은 서로 갈등하는 권력-구조, 곧 점점 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사랑 전략간의 갈등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곧 몸과 마음을 가진 개별자로서 그녀의 존재(주체)란 결국 두 대립하는 권력-구조가 싸우고 있는 미시적 ‘장소’인 것이다. 곧 인간 존재(주체)란 결국 그를 에워싸고 있는 권력-구조의 반영이자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흔히들 인간 존재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권력-구조의 틀이라는 한계 내에서만 자유로운게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권력-구조의 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이 물음에 앞서 계보학의 과제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권력 관계들의 양상을 드러내 ‘현재’의 모습을 폭로하는 것이라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건가? 계보학 자체가 이미 구성적 주체의 존재를 전제해야 비로소 ‘쓸모 있는’ 역사 서술의 방법론이 되지 않는가?
3.4 권력-구조와 주체의 복귀

다시 밀회를 나온 그녀에게로 되돌아 가보자. 그녀는 왜 불성실의 행위, 그러니까 선택의 순간을 회피하고 자신의 팔을 마치 나뭇가지와 같은 사물인양 간주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의 논의 과정상 사르트르의 분석을 확장시켜 보자. 그녀의 타자인 그 남자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나? 그는 사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는 단지 어떤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와는 달리 미래의 결혼을 예비하고 있지 않다. 이른바 이 순간 사랑의 감정에 충실하여 그녀를 향해 강한 성적 애착을 표출할 뿐이다. 기든스(A. Giddens)에 따르면 이는 ‘열정적 사랑’으로 ‘낭만적 사랑’이전부터 인류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해 온 사랑 방식이다. 그런데 그녀는 사랑의 열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남자들의 이와 같은 불장난의 경향을 익히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녀는 불장난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짐짓 당혹스러워 한다. 그의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그녀에게서 원하는 건 단지 정념의 사랑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녀는 염려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불성실의 행위란 ① 전통적 사랑, ② 낭만적 사랑, ③ 열정적 사랑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 내지 관행이 서로 갈등하며 다투고 있는 혼란스러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은 푸코를 따라 그녀의 성적 태도가 표출되는 신체는 이들 서로 다른 권력의 양식들이 치열하게 갈등하고 투쟁하는 미시적 장소라고 할 수 도 있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진단과는 달리 불성실의 그녀는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갈등하는 사랑의 관습들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망설이거나 타협하거나 아니면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렇다면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갈등과 혼란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구조, 곧 관습과 관행의 억압/저항 논리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른바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현재의 제도와 관습 및 관행의 한계가 폭로된다면 그녀에게는 당연 새로운 결단의 순간에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푸코가 권력의 지배가 행사될 때 언제나 함께 나타나는 그 권력에 대한 저항적 권력을 상정할 때 이 저항의 일어남(발생) 자체는 새로운 양식, 곧 제도와 지식이 형성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푸코는 구성되는 주체가 아닌 구성하는 저항적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 하겠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의 불성실 역시 그 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권력-관습의 틀이 부적절 하다거나 억압적인 것임을 시사하는 계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르트르와 달리 불성실 속의 그녀를 구조의 맥락 속에 다시 놓아 보자. 그녀는 전통적 사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낭만적 사랑을 꿈꾸며 실현되길 바라고, 다른 한편으론 열정적 사랑을 모험하고 싶어하지만 불장난의 사랑은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열정적 사랑이란 흥미롭긴 하지만 그 파괴적인 속성을 실천하기엔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반면 낭만적 사랑은 다르다. 그녀는 그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결여를 메워 줄 이상형의 인물이길 소망한다. 그가 그녀의 영원하고 하나뿐이며 유일한 ‘남자’이길 바란다. 동시에 이런 전제하에서 사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면 더할 수 없이 좋고. 또한 가정은 이 사랑의 결정체다. 그래서 그녀는 흔쾌히 가정 속에서 자신의 전 행복을 건다.
그녀의 이러한 심리와 태도는 1940년대를 살아가는 그녀에겐 어쩌면 전형적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녀에겐 최근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는 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서 ④ 합류적(confluent) 사랑은 거의 발견되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합류적 사랑의 출발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불성실의 행위는 어쩌면 합류적 사랑의 관습이 지배적인 시공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합류적 사랑은 낭만적 사랑과는 달리 영원하고 하나뿐인 사랑의 의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적 친밀성에 있어서도 평등을 우선으로 하며 성적 쾌락의 상호 성취를 관계 유지 또는 해소의 핵심 요소가 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별거하고 이혼하는 사회’는 합류적 사랑의 권력적 효과로 나타난다. 또한 합류적 사랑은 그것이 억압적이라면 굳이 일부일처제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정과 육아에 대한 새로운 태도 전환을 요구한다. 요컨대 그녀는 1940년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의 관습에 거의 종속되어 그 틀의 범주 안에서 사랑의 삶을 어렵게 살아내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녀는 세 개의 사랑 방식 가운데 어느 하나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그 세 관습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서 어정쩡하게 살 수 밖에 없는가? 요컨대 우리는 구조라는 제도와 틀에 대해, 그것들이 갈등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주어진 권력적 제도나 관습들에 지배되어 의식하지도 못한 체 말하고 행위하는 게 사실이다. 권력과 결부되어 형성된 담론 체계와 제도 및 관습의 틀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사실 그 틀이 만든 복합적 좌표 공간의 한 점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주체는 또한 이들 관습들의 틀에 한치의 틈새도 없이 꽉 끼인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제도와 관습을 살아 내면서 드러나는 틈새와 간격 사이에서 옹호하고 보완하기도 하며 반면 거부와 저항을 통해 구조의 부식을 실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수행하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행위나 언표의 배후에서 지배하는 무의식적 권력-구조 자체의 논리를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폭로하는 비판을 시도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개선된 삶의 조건을 위해 어떤 시작을 할 수도 있다. 이점에서 나는 푸코에게서는 주체의 구성적 측면, 내지는 좀 더 세부적으로 우리의 신체와 성의 저항적 측면에 논의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푸코의 ?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과 ?성의 역사 3 : 자기에의 배려?는 근대적 권력이 성에 전개된 다양한 양식의 효과들에 대한 저항이후 주체가 능동적으로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지향해야 할 실천적 조건들을 푸코 나름의 제시라고 이해한다. 사실 푸코가 ‘주체의 자기형성적 실천’을 긍정하고, 이를 “자기 스스로의 활동으로 자아를 변형시키고 어떤 특정한 존재 양식에 도달하려는 자기의 훈련”으로 이해할 때, 이는 거의 사르트르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또한 푸코는 “주체가 스스로의 실천으로 자기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방식이 개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와 그가 속한 집단이 그에게 제시한 것이므로 자신의 문화 속에서 발견하라는 얘기는 사실 계보학적 전략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선 사르트르가 상황 속에서 인간의 주체적 행위 양식을 말하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 물론 물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탈산업사회에서 성적 실천에 대한 푸코의 제안은 얼마나 옳은가? 우리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 이런 윤리학적 물음은 지금의 과제는 아니다. 여기서는 단지 주체에 대한 푸코의 입장이 갖는 의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여 주체의 실천적 전략의 얼개를 개략적으로나마 그려보고자 하였다.
4. 끝맺는 말

지금까지 해 온 논의를 정리해 보자.

(1) 이 글은 ‘주체’ 개념을 둘러싼 사르트르와 푸코의 입장의 차이를 구분한 다음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 이론은 푸코의 권력/구조 이론의 보완을 필요로 하며 또한 푸코의 이론은 암암리에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의 능동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르트르의 불성실 혹은 자기기만에 빠진 한 여인의 성적 태도를 분석하는데서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이 분석이 두 철학자의 주체론을 비교하기에 적절한 소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곧 푸코가 보기에 개인의 미시적인 성적 태도가 근대적 권력의 작동 양식이 극명하게 구현되는 실제적 장(場)이기 때문이다. 논의는 사르트르의 구성적 주체에 대한 입장을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2) 사르트르의 인간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 구성해가고 창조해 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결단과 선택은 언제나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다. 상황을 벗어난 선택이란 생각할 수 없다. 자유란 상황 내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나 상황이 우리의 선택을 결정론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상황 내에서의 선택이 언제나 투명한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결단을 하기도 한다. 진정한 삶은 자기기만 혹은 불성실에서 벗어나 상황을 직시하여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4) 실존적 정신분석은 인간 주체로 하여금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재의 상황을 직시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삶의 방법론이다.

(5) 그러나 이러한 구성적 주체론은 상황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였다. 구조주의, 특히 후기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형성하는 권력-구조의 틀에 예속된 존재이다.

(6) 권력-구조는 개인으로서 인간 존재를 선행하여 제도나 관습 혹은 담론이나 지식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군대, 학교, 가정, 성당 등에서 교육, 훈육, 훈련을 통해 개개인의 말이나 행동, 태도, 신체 등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침투하여 지배한다. 인간 존재는 이러한 권력-구조의 지배에서 대체로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은 구성적 주체 개념에 의존함이 없이 권력-양식의 전개 과정을 추적하여 우리의 현재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역사 서술의 한 방법론이다.

(7) 한편 푸코는 자신의 이러한 권력론에서 ‘저항’ 개념을 등장 시킨다. 푸코 저작에서 불명료하게 남아 있는 이 개념은 필자가 보기에 푸코의 주체구성론을 통해서는 규명될 수 없는 일탈적인 개념이다. 곧 기존의 권력/구조 연관으로서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이고 구성적인 성격의 존재론적 단위이다.

(8) 더욱이 인간 존재는 권력-구조, 곧 제도와 관습의 지배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개개인을 지배하는 현재의 권력/구조의 지배 논리를 폭로하는 것이 푸코의 과제라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후에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이 주체는 기존의 권력/제도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아가 이를 거부하는 하나의 저항이라는 사건으로 존재하는 주체이며, 이것은 다시 사르트르적인 구성하고 창조해야 할 주체 아닌가?

(9) 다시 말하거니와 사르트르의 주체에 대한 이해는 푸코적 보완을 요청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즉 계보학을 통해 우리의 ‘현재의 역사’를 제대로 포착함으로써 우리는 다음을 예비하고 기획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획의 주체를 전제하여야 하며 그것은 어떤 환원가능성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시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다. 다시 역사로 돌아가서 미래를 위한 전망을 모색하는 수밖에. 나는 푸코의 ?성의 역사 2?와 ?성의 역사 3?은 이런 바램에서 시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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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Genealogy of a Woman's Sexual Subject(Identity)
― Between Sartre and Foucault ―


- Bae, Chul-Young -


This paper, firstly reveals the difference between position of Sartre and that of Foucault on the 'subject'. Next it shows Sartre's theory of constructing-subject has to be complemented with Foucault's theory of power/ structure and the latter premises the positivity and transcendentality of human subject tacitly. As it were Sartre's method of understanding of subject's identity has to be supplenented with Foucault's genealogical approach, and his genealogical task must assume the constituent subject which he has tried to remove in his works.
Besides the 'resistance' in Foucault's theory of power is an ambiguous notion which cannot be examined in his theory of constructed-subject closely. It also seems to have the ontological features of human being differently from his constructivist perspective.

※ Key Words : Subject, Self-deception(Bad-faith), Power/Structure, Genealogy, Resistance

[출처] 한 여인의 성적 주체(정체성)의 계보학-배철영|작성자 동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