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메를로-뽕띠(Merleau-Ponty)의 현상학적 신체론과 페미니즘

나뭇잎숨결 2021. 10. 4. 14:10

메를로-뽕띠(Merleau-Ponty)의 현상학적 신체론과 페미니즘

김 진 아(Chungbuk National University)

최근의 이론적 흐름에서 왜 몸이 하나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단순히 하나의 답으로 대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몸의 중요성이 대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서양철학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즉 정신/몸, 남성/여성, 이성/감성, 문화/자연의 항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면서 전자의 항에 우월성과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를 폄하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현대철학 및 페미니즘의 비판적 이론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서양의 지적 철학적 전통에서 몸은 오랫동안 지식과 진리에 대한 추구를 방해하는 제어하기 힘든 열정이나 욕구의 지점으로 의심스럽게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스펠만(Elizabeth Spelman)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몸이 “기만적인 감각에 의해서 우리를 진정한 지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실재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물질세계에 우리를 묶어놓으며 도덕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유혹한다라고 기술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34).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인간의 주요 관심사가 몸이 되어서는 안되며, 인간은 영혼의 복지에만 오로지 힘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인간은 몸이 아닌 영혼을 통해서만 진리와 실재, 도덕적 삶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Spelman 34).
플라톤에서 잘 나타나는 몸에 대한 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계승되며 데까르뜨주의자들의 근대철학에까지 연결된다. 데까르뜨적 사유에서 인식하는 주체는 육체와 상관없이 순수한 정신이나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런 맥락에서 몸은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데까르트는 의식을 내 존재의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으로 제시한다. 즉, 인간존재의 의심할 수 없는 근원적 확실성은 그가 사고하는 존재라는 사실, 그가 모든 것을 의심해도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신의 의식과 사유까지 의심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오는 정식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정식이다. 이 정식에 의거해서 보면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나의 몸이 아니라, 나의 의식, 나의 사고가 된다. 이렇게 지적 능력과 자아의 장으로서의 인간의 의식, 사유(res cogitans)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인간의 신체는 단순히 하나의 공간에서 일정한 부피를 차지하는 물질적인 연장 (res extensa)으로 그리고 내 의식을 담는 하나의 기계적인 그릇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신과 신체라는 대극적인 이원론적 존재로 된다. 데까르뜨 이후의 사유에서 몸은 단순한 물질로, 수학적인 인과법칙에 복종하는 고정된 생물학적 실체로서, 그리고 변화되지 않는 소여로만 파악된다. 몸은 이성적인 주체의 지적 추구과정을 위해서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며 순수한 합리적 사유에 대한 장애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므로 몸은 타자로서 배제되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서양 전통철학에서의 몸/정신 이원론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여성이 계속 가치절하된 항으로서의 몸과 연결되어 온 점이다. 전통적인 서양철학에서 초월이나 이성/합리성을 수행하는 능력은 남성에게만 허락되어 왔고, 여성은 그들의 몸에 뿌리 박혀 있는 존재로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스펠만에 따르면 영혼의 합리적인 부분이 다른 몸의 부분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서의 몸은 여성과 직결되며 그러므로 남성에게 있어 최악의 모델은 “슬픔과 한탄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프거나, 사랑에 빠져 있거나 혹은 진통을 하는” 여성이 된다(Republic 395 d-e, Spelman 37 재인용). 이와 같이 남성을 초월적 의식주체로 보고 여성을 내재적인 신체와 연결시키는 서양전통철학에서 여성은 합리성을 특권화하는 모든 영역에서 열등한 지위에 놓여진다. 몸과 직결된 존재로서의 여성은 당연히 남성과 평등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와 같이 여성을 몸과 연결시켜 폄하하는 입장에 대하여 페미니즘에서는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평등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으로 이들은 여성의 신체적인 특징들, 특히 여성의 출산이 남성과의 평등함을 이루는 데 주요한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며 슐라미쓰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발달된 과학이 여성을 출산의 기능에서 해방시킬 때 진정한 여성해방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반응은 대개 메리 데일리(Mary Daly) 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이론들은 여성의 몸과 출산, 양육기능에 대해 긍정하고 찬양하면서 여성을 자연과 연결시키고 여성의 몸을 진정한 여성성의 근원으로 파악한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위의 두 가지 관점은 여성을 몸과 연결시키는 입장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 양식으로 보이나 실은 이들의 이론 역시 여전히 정신/육체, 문화/자연의 이분법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Gatens 228). 위의 두 이론들은 여성을 자연과 생물학적 기능 및 몸으로 보고, 남성을 정신과 문화와 연결하는 이분법적 도식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전자는 여성의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후자는 여성의 몸을 찬양한다는 차이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주체는 몸으로도 정신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몸과 정신은 한 인간주체의 실존에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개진하면서 몸/정신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메를로-뽕띠의 몸에 관한 이론을 검토해 보는 것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데까르뜨나 칸트, 훗설, 등의 철학이론에서 인간주체를 의식주체로 보면서 세계를 정신의 구성물로 보는 지성주의적 관점과, 사르뜨르의 즉자(몸), 대자(의식) 이원론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며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메를로-뽕띠는 정신이 물질에서 독립된 실체라기보다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물을 향하는” 육화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이라고 주장한다(138). 그러므로 인간주체는 의식주체라기보다 “육화된 주체”(embodied subject)가 된다. 메를로-뽕티에게 있어 몸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체험된 몸(a lived body)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는 몸이다. 또한 그는 몸이 세계와 지각된 대상들에 대한 “내 ‘이해’(comprehend)의 도구”라고 보기도 한다. 몸은 모든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만드는 도구이기에, 대상세계 역시 몸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나타나고 의식 역시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내 몸이 “나를 세계에다 열고 세계의 상황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이다(165). 이와 같이 메를로-뽕띠는 몸 주체라는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인간의 몸을 보는 새로운 관점과 틀을 열어주며 몸/정신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성립불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 전통철학에서 몸/정신 이원론은 여성/남성 이원론과 연결되어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므로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은 서양의 뿌리 깊은 남성주의적 담론에 대한 효과적인 해체와 도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이론이 페미니즘에 유용한 전략적 틀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들 페미니스트들은 ?지각의 현상학?에서의 몸 분석이 남성의 몸 경험을 다루면서 그것을 보편적인 몸 체험의 구조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성의 몸 경험이나 성차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Price and Shieldrick 9; Sullivan 183; Grosz 94-5; Stoller 176 참조). 이 논문에서는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에 대한 페미니즘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메를로-뽕띠의 신체론: 관념론과 경험주의 비판
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바 있듯이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뽕띠는 서양 철학 전통에 뿌리박은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세계관, 즉 세계를 정신과 몸, 주체와 객체, 의식과 물질, 내면성과 외면성이라는 이분법에 기초를 둔 세계관을 비판하고 자신의 독특한 몸철학을 수립한다. 그는 투명하고 명증한 의식을 주체의 중심에 놓은 데카르트적 관점을 반박하며 주체성의 중심을 몸에 위치시키면서 “육화된 주체”라는 개념을 정립한다. 그는 또한 “육화된 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의식을 몸에서 독립된 실체로 파악하는 서양철학의 관념론적 입장을 반박한다. 관념론적 지성주의는 인간을 단지 의식, 사유존재로서 파악하고, 세계를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한편 인간이 객체로서의 세계와 맺는 관계는 단순히 지적인 인식작용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 메를로-뽕띠는 “반성철학의 오류는 성찰하는 주관이 성찰하는 대상을 자신의 사고에 흡수하거나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고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전적으로 의식일 수 없고 선험적 의식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우리가 의식이라면 우리는 우리 앞에서 세계, 우리의 역사, 독자성을 지닌 지각된 대상을 투명한 관계들의 체계로서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119). 나아가 그는 인간을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몸-주체이며 신체를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행위 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단순히 인식적 차원의 지가 아니라 일종의 실천지(praktognosia)이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프리스트(Stephen Priest)는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실용적(pragmatic)이라는 것이 메를로-뽕띠의 ‘실존적’ 현상학의 주장이라고 본다. 즉 “대상의 주체적인 구성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상을 집어 들고, 사용하거나 혹은 대상 주위를 걸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다”라고 본다(49). 한편 메를로-뽕띠는 관념 철학에 의한 “반성적 분석은 타자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를 무시한다”라고 비판하며(20), 철학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실재로서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를로-뽕띠에 따르면 현상학의 임무는 “실재를 기술해야 하는 것이지 구성하거나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18).
한편으로 그는 또한 몸이 자극-반응의 단순한 생리학적 체계나 혹은 물질로서의 대상이라고 보는 경험과학적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입장에 기반을 둔 과학이론들은 인간존재를 단순히 물리적, 생물학적 실체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이란 외부의 대상이 갖는 어떤 속성이 감각기관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신경계를 거쳐서 뇌로 전달되는 수동적인 반응구조이다. 여기에 대해 메를로-뽕띠는 인간은 결코 단순한 자극-반응 체계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임을 주장하며, 인간의 지각행위는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부여행위임을 지적한다. 메를로-뽕띠의 지각개념은 경험론자들이 보는 감각개념과는 다르다. 경험론자들은 감각적 원자료가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고 우리가 수동적으로 감각적 원자료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본다. 그러나 메를로-뽕띠는 우리의 지각이 능동적으로 감각대상을 형태화하고 의미화하면서 그 대상들과 교류한다고 본다. 우리 몸은 중립적인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시각(vision)도 순수한 대상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미부여 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땅에 놓여 있는 움직이지 않는 바퀴와 움직이는 바퀴, 쉬고 있는 몸과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몸은 같은 시각적 대상이라도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붉은 색을 감각하는 것은 색깔 스펙트럼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는 붉은 색이라는 성질을 우리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여서 그것이 신경을 통해 뇌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메를로-뽕띠에게 있어서 붉은 색은 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장미꽃의 붉은 색과, 피의 붉은 색, 부드러운 카페트의 붉은 색은 모두 다른 의미성(significance)를 갖는다는 것이다. 대상의 객관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지던 것들은 지각의 산 경험에서는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성은 지각이 인간의 개인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간이라는 것 역시 경험주의적인 과학이론에서처럼 x, y 좌표로 환원될 수 있는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게 된다. 공간은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는 (inhabit) 공간이 되며, 우리가 행위하고, 습관을 통해 관계를 맺어나가며, 세계와 교통하는 “상황”으로서의 공간인 것이다. 즉, “위치의 공간성이 아니라 상황의 공간성이다.”
몸을 단순히 의식을 담는 그릇도 아니고 물리적 객관적 대상도 아니라고 보는 메를로-뽕띠의 입장은 몸과 마음을 추상적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관념론이나 경험론, 혹은 심리학이나 생리학이 복잡하고 애매한 인간의 실존적 현상을 결코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고 본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으려면, 물리적인 대상 혹은 물질적인 객체로서의 몸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이 순간 살아 있고 체험하는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몸(living body)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내 자신이 살아 있는 몸을 수행하고 또 세계를 향해 자신을 일으키는 몸이 되어야만 가능하다”(74). 결국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과학과 철학이론들에 의해서 분석대상이 되기 이전의 전객관적, 전반성적 세계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하며, 세계 속에서의 체험하는, 살아 있는 몸의 현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최초의 철학적 행위는 객관세계에 앞서는 실제 경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객관세계의 한계와 권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체험 세계 내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체험 세계로 되돌아가면, 사물에 구체적인 표정을 되돌려 주고, 유기체들에게 세계를 다루는 그들 나름의 방식을 되돌려 주고, 주체성에 그 역사적 귀속성을 되돌려 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현상을 재발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이 우리에게 처음 주어지는 살아있는 경험의 층들을 재발견하는 것, 생성되는 대로의 ‘자아-타인-사물’의 체계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57)

경험과학과 관념철학의 개념화와 독단적 이론들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보면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과 그 삶의 지평으로서의 세계는 절대로 칼로 자른 것처럼 분명한 개념화가 되어질 수 없는 혼합되고 뒤섞인 애매모호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는 의식을 강조하는 관념론적 지성주의와 물질을 강조하는 경험론적 실재론 양자가 인간 실존의 애매성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살아 있는 경험 세계는 본질상 애매모호한 속성을 갖고 있으며, 철학의 본질은 세계의 뒤엉킴을 명료하게 푸는 것이 아니고, 이 모호함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하는 것이다. “육화된 주체”라는 개념 역시 인간실존의 애매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지점이다. 즉 육화된 주체로서의 인간은 정신과 몸이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한 존재이며 몸주체는 또한 보는 주체이며 동시에 보여지는 객체라는 점에서 주체와 객체가 함께 거주하는 장소가 된다.
육화된 주체로서의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기본방식인 지각 역시 인간의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 몸과 의식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양자를 연결하는 애매성의 지점이다. ?지각의 중요성』(Primacy of Perception)에서 메를로-뽕띠는 “지각하는 정신은 육화된 몸이다. 나는 지각을 외부적 사물이 우리 몸에 취하는 행위에 대한 단순한 결과라고 보는 이론이나, 의식의 자율성을 고집하는 이론에 대항해서 정신의 기반을 몸과 그것의 세계에 재확립하고자 애썼다. 이런 이론들은 순수한 외면성과 순수한 내면성을 옹호하면서 정신이 신체 속에 존재함을 잊어버리고 있다. 또한 우리 몸과, 신체성, 그리고 지각된 사물들 사이의 애매한 관계도 잊어버리고 있다.”(3-4)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애매모호한 종합으로서의 실존적 인간이 몸주체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양태를 자세히 분석한다.

2.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메를로-뽕띠의 몸주체는 무엇보다도 “세계-내-존재”(être-au-monde, being-in and to-the-world)로서 세계 내에서 존재하면서 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존재이다. 메를로-뽕띠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세계 속에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man is in the world, and only in the world does he know himself) 할 수 있는 “세계 속에 운명 지워진 주체이다”(a subject destined to the world xi). 인간에 있어 세계는 전통적인 철학이나 과학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의 인식대상이나 객관적인 물리적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메를로-뽕띠에게 있어 세계란 “규정된 대상의 총합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체험의 지평이다”(92). 즉, 세계는 단지 하나의 물질로서 객관적으로 우리 밖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활동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삶의 지평(horizon)이나 장(field)을 이루는 것이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수량화된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느끼고, 사랑하고, 성행위를 하며, 꿈꾸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사물들과 다른 인간들과 교통하는 그런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향한 인간 주체는 자신을 절대적 투명함 속에서 지각하는 무시간적이고, 사유하는 보편적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몸으로서 구체적인 역사와 상황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지각하고 행위 하는 주체이다. 신체는 세계-내-존재의 도구(vehicle)이고,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어떤 구체적인 환경과 상호 연관되어 (intervolved)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자신을 어떤 기획과(project) 동일시하면서 계속해서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43).
메를로-뽕띠의 “세계-내-존재”로서의 몸주체 개념은 한편으로 서양철학에 뿌리 깊은 이분법적 사유방식, 즉 인간을 주체로 세계를 대상으로 파악하는 주/객이원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주객이원론을 비판하면서 그는 인간을 세계와 그리고 세계 속의 타인들과 끝없이 변증법적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는 의식한다는 것 혹은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와, 몸과 다른 인간들과 내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것,” 즉 그들 곁에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with them) 공존하는 것으로 본다(90). 그는 세계와 살아 있는 의사소통으로서의 몸을 “모든 대상이 짜여져 들어가는 직물”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기술한다(402). 다음의 인용문은 주체가 단순히 하나의 초월적 주체로서 세계를 관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살아있는 생명의 교감을 이루고 있다는 메를로-퐁티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하늘의 푸름을 명상할 때 나는 그 창공 앞에 서있는 탈우주적 주체가 아니다. 내가 사유 내에서 그 창공의 푸름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하늘의 비밀을 드러낼 푸름에 대한 관념을 전개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푸름에 푹 빠져서, 그 신비 속에 젖어든다.... 나는 하늘이... 그 자체로(for itself) 실존함에 따라 하늘 자체가 된다. 내 의식은 그 끝없는 푸름으로 충만해진다.” (214)

세계와의 살아있는 교류로서의 지각은 지각하는 주체를 배제한 객관적 사유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지각에서 나의 몸은 이미 지각의 대상과 하나로 짜여지는 직물로서 공유되는 감각적 지평을 형성하며, 지각된 대상의 세계와 이미 하나의 의미작용을 이루고 있다.
지각하는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와 달리 초역사적인 보편적 의식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육화된 주체로서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 거주하고 있는 개별화된 주체이다. 인식하고, 욕망하고, 지각하고, 행위하는 이 주체들은 우리의 “과거, 미래, 인간적 환경, 물리적 상황, 이데올로기적 상황, 도덕적 상황” 속에서 “해야 할 과업”들에 직면해 있다(136, 100). 인간존재는 이와 같이 세계 속에서 행위 하는 주체로 되므로 의식은 기본적으로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의 문제가 된다(137). 데까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주체는 그러므로 몸으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표현하고, 사유하고, 지각하고, 느끼는 모든 행위들이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존재가 된다. 복합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각의 현상학? 5장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인 “성적존재로서의 인간”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3.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메를로-뽕띠는 육화된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인식주체와 대상으로서의 관계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정감적인(affective) 삶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자연세계가 나에게 고유한 의미와 현실성을 갖는 경험으로 되는 방식, 다른 사물들이나 존재들이 욕망이나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지성주의와 경험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설명할 수 없는 인간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정감적인 삶을 인간이 다른 인간과 성행위를 맺는 방식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경험주의에서 보는 성행위는 외부적 자극이 성 중추에 가해지는 자극-반응체계로서 나타난다. 슈나이더라는 두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의 경우를 상술함으로써 메를로-뽕띠는 이와 같은 인과론이 인간의 성을 설명해 줄 수 없음을 지적한다. 슈나이더는 뇌의 후두부에 손상을 입었으나 그의 성기와 성 중추는 정상이므로 성행위는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발적으로 성행위를 추구하지도 않고, 성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대상들 즉, 음란한 그림이나, 성적인 대화도, 다른 성의 몸도 그에게서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154.) 슈나이더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메를로-뽕띠는 “세상에 생명을 부여하고, 외부적 자극에 성적 가치를 부여하고, 각각의 주체에게 자신의 객관적인 몸을 어떻게 사용할지 윤곽을 지어주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 때 성적 “리비도는 본능이 아니라 일반적인 힘, 심신으로서의 주체가 즐기고, 다른 상황들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다른 경험들을 통해 수립하고, 행위의 구조를 획득하는 일반적 힘이다. 이 힘이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갖게 한다. 한 인간의 성은 세계와 시간과 다른 인간을 향한 존재의 방식이 투사된 것이다”(158). 슈나이더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지점은 바로 지각이나 성애적인(erotic) 경험의 구조이다. 슈나이더에게 지각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성애적인 구조를 상실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앞에 성적 세계를 투사하고, 자신을 에로틱한 상황에 위치 짓고, 그 상황에서 만족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단순히 자극으로서 주어지는 객관적 지각 내에 보다 내밀한(intimate) 지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내밀한 지각은 인식적 지각과는 구별되는 성애적인(erotic) 지각이다. 그리고 성애적 지각은 인식대상을 향하는 하나의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통해서 다른 몸을 향하는 지각이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는 오성(understanding)의 질서가 아닌 성애적인 이해(comprehension)가 존재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성은 경험이 일단 지각되면 그것을 하나의 개념(idea) 하에 포함시키는데 반해 욕망은 몸과 몸을 연결함으로써 맹목적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이다(156-77). 오랫동안 몸의 기능으로 이해되어 온 성욕은 심리적 현상만도 생리적 현상만도 아니고 몸과 마음이 어우러져서 구체적인 상황 내에서 일어나는 종합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행위하고 인식하는 존재”와의 내적 연결을 가지면서 작용한다. 슈나이더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 영역사이의 연결이나 통로가 끊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성적 상황뿐 아니라 정감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상황에도 자신을 위치시키지 못한다. 세계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중립적이 되고 이로 인해 그는 인간관계도 형성 못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을 상황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자유가 결여되어 있고”(135) 그의 소망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현재에 투사하지도 못한다. 그의 이런 능력의 결여는 신체적 성기능의 손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행위의 가능한 지반을 없애버린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생물학적 존재(existence)도 인간실존(existence)과 같이 작용 한다”고 본다. 즉, “인간의 모든 감각들--시각, 청각, 촉각--은 뗄 수 없이 함께 작용하고 이런 감각들과 성, 몸은 단지 개인적 실존의 통로, 도구, 현현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실존이 그것들의 존재를 흡수 한다”(159-160). 몸, 살의 삶 혹은 심리/영혼(psyche)의 삶은 언제나 상호적 표현이라는 관계 속에 연루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성과 삶의 상호성을 “하나의 분위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성은 마치 냄새처럼, 소리처럼 “하나의 애매모호한 분위기로서 삶과 공연(co-extensive)한다. 다시 말해 애매성이 인간실존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여러 의미를 지닌다...그러므로 주어진 결정이나 행위에 있어서 성적동기와 다른 동기간의 비율을 결정한다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성적’이라거나 이름 붙이기는 불가능하다. 인간 실존에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원리가 있다”(169). 메를로-뽕띠는 이와 같이 슈나이더의 예를 들면서 인간의 ‘기능들’: 즉 성, 운동성, 지성 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하나의 종합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 메를로-뽕띠와 페미니즘
이제까지 메를로-뽕띠가 정초한 몸주체로서의 인간관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부분에서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그의 이론에 대해 갖는 입장을 살펴 보고자 한다. 재프너 앨런(Jaffner Allen)과 아이리스 영(Iris Young)은 ?생각하는 뮤즈? (The Thingking Muse)의 서문에서 실존주의 현상학이 우리를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집단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키고 상황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실존주의 현상학의 반철학적인 경향이 이성에 대한 전통철학의 우위를 거부하고 의미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감정이 갖는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는 점도 높이 사고 있다. 그들은 메를로-뽕띠가 초월적인 의식으로서의 대자존재와 내재적이고 타성적인 즉자존재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의식과 신체와의 불가분성 및 주체의 세계-내-존재로서의 속성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반응한다(4). 그들은 특히 실존주의 현상학이 서양의 형이상학을 벗어나기 위해 산 경험을 강조하는 점이 미국과 다른 나라의 페미니스트 운동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확신과 연결된다고 본다(11).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스트의 슬로건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에 가치를 두면서 역사, 특히 여성의 역사나 경험과 분리된 서양의 철학적 흐름을 전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산 역사적 상황에 뿌리내린 인간의 실존과 산 경험에 역점을 두는 실존주의 현상학과 맞닿아 있다. 한편 앨런과 영은 실존주의 현상학에서 성애(eroticism)를 종래의 성기중심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상황, 산 체험의 차원에서 본다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관심을 표명한다. 그러나 이들은 메를로 뽕띠의 성적 주체에 대한 주장들이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주체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보편적인 주체가 거의 언제나 구체적인 남성의 경험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을 비판한다. 실존주의의 젠더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남성주체를 보편주체로 상정함으로써 “여성을 대상화, 주변화하고 침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16).
메를로-뽕띠의 몸담론에 관심을 표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대부분 앨런이나 영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메를로-뽕띠의 몸 담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한편 그가 정립하는 주체가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주체라는 점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쓰 그로츠(Elizabeth Grosz)는 이항대립적 양극화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저항과 도전은 페미니트스들의 관심사와 유사하며 특히 이성중심주의가 내재적으로 남근중심주의와 공모하고 있다고 보는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유사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그로츠는 메를로-뽕띠가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페미니스트 이론 자체를 풍부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그녀는 메를로-뽕띠가 경험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경험이 이론적 정립의 시금석을 이루는 것으로 보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또한 그로츠는 그가 “몸/정신 이원론에 대한 극복이나 심리적, 생물학적 삶에 있어서 지각의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 등이 페미니스트들이 성차의 근본적 개념에 대한 이론을 만들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략적 용어와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본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츠는 메를로-뽕띠의 저작들이 양성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가 성차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인간신체를 그가 논의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츠는 또한 메를로-뽕띠가 그의 공식들이 단지 한 종류의 주체(남성)의 경험만 분석하고 평가한데서 추출된 것이라는 것을 한 번도 암시하지 않고 있고, 그의 몸 분석이 지닌 남성성과 남근중심주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똑같은 역동적 힘, 같은 심리적 생리적 구조를 모든 성 주체에 부과하고 있으므로 다른 성의 관점에서 보면 몸에 대한 분석이 완전히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10).
아이리스 영은 “여자애답게 던지기”라는 논문에서 메를로-뽕띠가 주체성을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라 몸에 위치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전통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츠와 마찬가지로 메를로-뽕띠가 남성의 운동성과 공간과의 관계만을 일반적으로 분석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영에 따르면 메를로-뽕띠는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초월적이고, 열려있는 관계, 자신의 환경에 접근하고, 붙잡고, 전유하는 능력을 갖는 주체로만 보면서 몸주체를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관계로 보는데 이는 남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에 의해서 형성되는 여성의 몸의 경험을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즉 영은 남성의 몸과 달리 여성의 몸이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약받으면서 어떻게 하나의 보호받아야할 부담스러운 짐이 되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이 어떻게 여성의 자유로운 운동성을 제약하면서 여성의 몸을 소심함과 망설임 속에서 “나는 할 수 없다”의 주체로 만드는지에 대한 논의를 메를로-뽕띠가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60). 위의 페미니스트들은 공통적으로 메를로-뽕띠의 몸철학이 주로 남성의 몸에 대한 경험을 예로 들면서 인간이 몸주체로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양식을 기술하고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기 때문에 여성의 경험이 무시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주디쓰 버틀러(Judith Butler)는 메를로-뽕띠가 몸의 실존의 보편적 구조를 기술하고자 하지만, 이 추상적 보편주체는 기술하는 과정에서 결국 구체적인 문화적 주체, 즉 남성 주체로 변하고 이 특수한 문화적 성의 조직이 하나의 이론으로 굳어지면서 다시 한 번 보편성으로 변하는 원을 그리고 있다고 비판한다(95).
위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고 있는 점, 즉 메를로-뽕띠의 몸주체가 보편화된 젠더 중립적인 몸이며 그럼으로써 남성의 몸이라는 통찰력은 몸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 페미니즘의 주요한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 페미니즘은 어떤 몸도 보편적인 몸이란 없으며 인간의 몸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젠더, 성(sexuality), 계급, 인종, 연령, 문화, 국적, 개인적 경험과 양육에 의해 차별화되는 각기 다른 몸이라고 본다. 이들이 지적하듯이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뽕띠는 몸이 세계와 관계 맺는 일반적인 양태(공간, 시간, 운동성, 지각, 자연세계, 인간세계, 상호주관성 등)를 분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므로 성, 인종, 문화에 따라 어떻게 몸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본래 상황적인 존재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때 상황이란 성, 계급, 지위, 인종, 과거,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은 개별적인 몸들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고 본다. 메를로-뽕띠의 이론은 몸이 상황 내에서 세계와 관계 맺는 여러 가지 양태를 그야말로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여성의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는데도 기여를 할 수 있다. 실제로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이 제공하는 몸과 세계의 관계, 몸과 공간성의 관계, 운동성으로서의 몸에 대한 분석이 없었더라면 아이리스 영의 여성의 몸에 대한 분석틀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리스 영도 “가장 기본적인 기술적 수준(descriptive level)에서 보면, 메를로-뽕띠가 설명한 체험된 몸(lived body)이 세계와 맺는 관계는 모든 인간의 실존에 일반적인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54)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메를로-뽕띠의 지각, 운동성, 공간성과의 구체적 관계로서의 몸, 성적존재로서의 몸의 분석 등은 여성의 몸을 분석하는 데도 유용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메를로-뽕띠가 성을 우리 몸의 실존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인식주체로서의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이고 탈성적인 주체에 대한 반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데까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고 할 때 그 ‘생각하는 나’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 된다(조광제 213). 그러나 몸으로서의 주체를 거론하게 되면 보편적이고 투명한 인식주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몸주체는 필연적으로 성적 차이에 의해서 특화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몸이론에서 강조하는 점이 바로 보편적인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스트롤러(Stroller)는 “메를로-뽕띠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회의주의를 반성하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메를로-뽕띠에 대한 지배적인 페미니즘의 비판은 그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젠더-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남성)주체를 갖고 논의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여성의 경험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경험이 젠더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뽕띠에게 인간주체는 언제나 상황적인 주체이다....그러므로 위와 같은 결론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176)

앞서 지적한 바대로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은 데까르뜨의 코기토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메를로-뽕띠가 탈공간적, 탈시간적인 투명한 의식으로서의 주체를 비판하면서 시도한 것은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 역사적, 문화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보편적인 의식주체란 설정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철학적 반성에 대한 반성을 시도했을 때 메를로-뽕띠의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몸주체는 의식과 몸,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서 지배적인 앞의 항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작용하면서 다른 항을 무화하고 억압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 뽕띠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범주화된 것으로서가 아닌 애매모호하고, 구체적이며, 우연적이고, 특정한 것으로서의 몸이다. 메를로-뽕띠는 “인간은 자연적 종이 아니라 역사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산경험을(lived experience) 몸에 침전시키면서 개별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에게 있어서 산경험이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산경험이란 어떤 인간의 주체성(subjectivity) 전체를 지칭한다. 보다 분명하게 그 용어는 개인이 자신의 상황과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이 개념은 또한 나의 자유라는 개념을 포함하므로, 나의 산 경험은 내가 속해 있는 다양한 상황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산 경험은 내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침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내 상황성의 일부가 된다(Moi 60). 살아있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놓인 상황과 끝없이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맺는 행위주체로서의 몸은 그러므로 보편적인 몸이라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경험이 침전된 존재로서의 몸을 메를로-뽕띠는 물리적 객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으로 본다. 그것은 물질적인 대상이라기보다 의미이고 표현이며 존재의 양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객체로서의 몸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는 몸은 근본적으로 애매하기 때문에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몸은 생물학적, 자연적 법칙에 종속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의미에 종속된다. 몸은 순수한 자연도 순수한 의미도 아니며 양자를 다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그가 말하는 자연은 우리 경험과 동떨어져 있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 역시 의미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Moi 69). 그러므로 메를로-뽕띠는 몸이 근본적으로 문화적, 관습적, 제도적인 것이며 감정이나 열정 역시 문화적으로 형태 지워지고 의미화된 것이기 때문에 같은 신체구조를 갖고 있다고 해서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본능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감정의 영역에서도 자연은 확정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 났을 때 소리치는 것이나 사랑의 표시로 키스하는 것은 탁자를 “탁자”라고 부르는 행위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도 덜 관습적인 것도 아니다. 감정과 열정적 행위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invented). 부성(paternity)처럼, 인간의 성격의 일부로 보이는 것들도 역시 제도적인 것이다. 만들어진 문화적, 정신적 세계에 선행하는 ‘자연스러운“ 행위의 낮은 층위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manufactured)것이면서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어 하나, 행동 하나도 생물학적 존재에 어느 정도 기인하면서도 동시에 동물적 생명의 단순함을 피해간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나 행위들은 인간의 정의의 [핵심인] 애매모호성이라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일종의 존재의 유출(leakage)을 통해서 미리 정해진 방향에서 벗어나서 생생한 행동의 형식을 야기하는 것이다. (189)

위의 글에서 메를로-뽕띠는 “부성”처럼 인간의 본성의 일부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제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 본질이 아니라 변화가능성에 열려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성이라는 것도 역시 본질이 아니라 제도적, 문화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메를로-뽕띠의 몸이론을 받아들이면서 페미니즘이론을 개진한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성이 여성성이라는 본질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여성이 또한 상황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단지 소여된 존재로서 정의되지 않는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메를로 뽕티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연적인 종이 아니라 역사적 관념이다. 여성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그리고 이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녀는 남성과 비교되어야 한다. 즉 그녀의 가능성이 정의되어야 한다. 이 관점으로부터 나는... 몸은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몸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포착(grasp)이고 우리의 기투의 스케치이다. (34)

몸이 상황이라는 말은 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상황이란 주체가 하나의 자유로서, 초월로서 세계를 향해 미래를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다. 몸이 상황이라는 보봐르의 말은 몸이 “세계-내-존재”라는 메를로-뽕띠의 말과 같은 의미이다. 메를로-뽕띠에게 몸은 세계 안에 놓여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놓여진 현재의 상황에 구속되면서도 동시에 그 상황을 초월하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나의 상황이란 사실성과 자유 사이의 종합이다”(Moi 65). 그러므로 보봐르에게 있어 여성은 만들어지면서 또한 만들어나가는 존재가 된다. “여성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본질이 아니라 여성의 상황을 봐야 한다. 그러므로 미래는 충분히 열려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여성이 막 태어나고 있다”(714-715). 보봐르는 성차별적이지 않은 미래에 여성의 자유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살과 감정의 새로운 관계가 양성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730).
상황으로서의 몸,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존재로서의 여성주체라는 보봐르의 개념을 볼 때 메를로-뽕띠의 상황에 기초한 몸이론은 페미니즘 이론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론은 메를로-뽕띠의 이론이 여자, 노동계급, 근대적인 생산 주체 등의 몸 분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만 하기보다는 그의 이론에서 비어있는 부분들을 새로운 연구로 메워 가면서 그가 제공한 몸과 인간실존에 대한 통찰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긍정적인 전략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메를로-뽕티의 몸이론과 페미니즘이론은 상호배타성이 아니라 상호 협력에 기반을 둘 때 더욱 더 풍부한 여성의 몸에 대한 분석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충북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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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leau-Ponty's Phenomenology of the Body and Some Feminist Responses

Abstract Jina Kim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This essay purports to examine Merleau-Ponty's existential philosophy of the body in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and assess the responses to his theory raised by some feminists. Merleau-Ponty posits a new philosophy of the body that locates the subjectivity and consciousness in the lived body, rendering human subjectivity the embodied subject and consciousness embodied consciousness. It is only through the body that human beings exist, act, love, think, plan, formulate projects and interact with other people and things in the world. This move to situate subjectivity in the lived body radically challenges the dualistic perspective inherent in the traditional Western philosophy and empirical science prevailing in his times, and makes it impossible to preserve the mutual exclusivity of the categories subject and object, inner and outer, I and the world and mind and body. Many feminists have welcomed the disruption of the mind/body dualism and the emphasis on the significance of the body in human existence in Merleau-Ponty's theory, since in the traditional metaphysics the body as a d eval ued term had been associated with women, while men had occupied the position of the transcendental, rational, and transparent consciousness. On the other hand, they also argue that his theory of the body exclusively deals with a universalized, gender-neutral and thereby male body, and consequently ignores the specifically gendered experience of the female body. In this essay, I want to argue that Mereleau-Ponty's theory of the body always posits “a situated body” which encompasses concrete historical, cultural and social situations and therefore opens to the analysis of the particular bodies including the female body.

[주제어: 메를로-뽕띠, 시몬느 드 보봐르, 페미니즘, 현상학, 몸, 육화된 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