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베르크손의 시간관과 생명의 드라마

나뭇잎숨결 2020. 10. 3. 20:19

베르크손의 시간관과 생명의 드라마


차건희 서울시립대 철학 교수


머리말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 1859-1941)이 철학적 사유를 시작함에 있어서 맨 처음 대면하였던 대상은 바로 시간 개념이다. 수학 경시 대회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과학적 연구에 소질을 보인 청년 베르크손이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빠리 고등 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담임 교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소질은 어쩔 수 없어서, 고등 사범을 졸업한 직후까지는 그가 일찌기 스펜서(Spencer, 1820-1903)에 경도된 결과 수용하게 된 기계론적 이론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과학 철학에 관한 박사논문을 쓸 요량으로 과학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검토해오고 있었다.

이 때 그는 당연히 역학이나 물리학에서의 시간 개념을 접하게 되었으며 "과학적 시간은 지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1) 플라톤이 철학을 '경이'로 정의했듯이, 베르크손의 전(全) 철학은 이 최초의 놀라움에서 비롯된다. 베르크손은 흐르는 시간 앞에 선 자신의 경이를 항상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PM 2) 이 최초의 경이는 결국 과학적 인식 형태와 그 인식이 겨냥하고 있는 실재와의 간극에서 발생한 것으로, 아직까지도 '베르크소니즘(le bergsonisme)'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베르크손과 함께 이 출발점에서부터 우리의 작업을 시작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과학적 '시간'과 구별되는 '지속'은 출발점인 동시에 중심이다. 원심력에 의해 항상 끊임없이 그 곳으로 되돌아오는 행위 자체가 철학자 베르크손의 사유의 운동이다. 이제 이와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아니 그보다 베르크손이 잘 쓰는 표현대로 하면, "실제적 지속 안에 자리잡고" 생명의 극적 드라마를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지속은 우리에게 현미경이나 망원경, 아니면 그 어떤 마술 안경의 노릇을 해서 생명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겹겹히 걸쳐 쓰고 있던 안경들을 벗어 버리고 가장 실제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때 모든 것이 생명을 지닌 역동적 모습으로 우리의 눈 앞에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계론이나 목적론 등의 생명에 대한 가상 시니리오를 읽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베르크손의 시간관



베르크손이 일상적 용어인 '시간(le temps)'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소위 '지속(la durée)'이란 과연 무엇인가? 지속은 무엇보다도 '흐름'이며 '지나감'이다. 흐르고 있다는 것은 그 흐르고 있는 어느 한 부분이 지금 현재 지나가고 있을 때 그 흐르고 있는 것의 또 다른 부분은 결코 동시에 나타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PM 2) 또한 측정하기 위하여 그 부분들을 중첩시켜 놓고 비교해볼 수 없는 경우가 곧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우리는 지속을 움직이는 것의 궤도로써 측정한다. 이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과학자이게 하는 것이며, 그 결과 수학에서의 시간은 선이 되었다. 그런데 과학자가 측정하는 선은 최소한 그것이 재어지고 있는 동안만은 움직이지 않아야 됨에 반해서, 흐르는 시간은 움직인다. 지속은 움직임이다. 한편 선은 이미 다 된 것인 반면, 지속은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두가 되어가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PM 3) 요컨대 베르크손 철학에 있어서 최초의 이원적 구별로 드러난 지속은 그 자체가 '흐르는 시간'이며 동시에 '창조적 시간'인 것이다.





1) 제 1 이원성 : 시간과 지속



과학적 시간과 실제 지속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베르크손의 성찰의 결과가 그의 당초 계획과는 다른 박사논문으로 정리되었으며, 지속의 개념은 그의 학위논문이자 최초의 저서에서부터 중심 주제가 되었고 장차 그의 철학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지속'은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관한 시론』의 한 장(章)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듯이 보이나 사실은 책 전체를 통해 그 기초가 되고 있다. 당연히 박사지원자는 '지속'에 관한 논문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것을 '자유'에 대한 논문으로 간주하여 생긴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렇다면 베르크손을 화나게 만든 오해의 근본적인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사실상 과학의 시간은 일상 언어에서의 시간과 다를 바 없다. 일상 언어는 상식의 표현으로 그 주요 임무는 '행위하기 위한 사유'에 있지 '사유를 위한 사유'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언어 사용과 상식적인 관점은 행위의 용이함을 위해 시간을 공간적인 외적 표상으로 파악하고 만다. 실제 흐르는 시간은 내적으로 체험된 지속 외에 다름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수 사유보다 유용성이 우선인 일상 생활과 과학은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지속을 공간화된 시간으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부당한 대체로부터 혼동이 야기되었으며 몇몇 철학적 문제들의 기원에서조차 이 혼동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베르크손은 그의 학위논문에서 바로 이런 혼동을 지적하려고 과학과 철학에 공히 관계되는 자유의 문제를 예로 들면서 논의를 전개했던 것이며, 바로 여기에 오해의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베르크손의 시간관이 지닌 독창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오직 그들의 고질적인 공간화된 시간관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베르크손적인 철학함에 익숙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소르본에서 통과되는 철학박사 학위논문 중에는 자유에 관한 것이 유행이었으므로 심사위원들은 똑같은 문제에 대한 또 한편의 해결책으로 베르크손의 논문을 대하였다. 그러나 베르크손의 철학함은 문제들의 해결에 있지 않고, 다만 각각의 문제들이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2) 철학사에서 이미 모색되었던 해결책들에 또 하나의 해답을 보탤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제기 자체 안에 감추어져 있는 혼동을 발견해냄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소시켜버리는 것이다.

혼동은 두 개 이상의 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게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을 보기 위해서는 외양을 걷어내어야만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 개념은 무엇보다도 먼저 행위와 연결된 개념들로 사유된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약속시간', '시간표', '취침시간'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개념 뿐만 아니라 천문학이나 역학과 같은 과학에서의 시간 개념이 우리가 시간하면 직접적으로 떠올리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직접성(l'immédiateté)'은 사실은 거짓된 직접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직접성은 실재와 일치하는 소여의 직접성이며 그런 소여는 말과 개념들의 일상적이며 습관적인 표상을 제거한 연후에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르크손은 그의 최초의 저서인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관한 논문에서 직접성은 결코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이렇듯 혼동의 불식, 다시 말해 진정한 직접성의 발견은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철학의 출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철학함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한 구별들이 베르크손 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어서,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 있고 사실 가장 중요한 구별인 시간과 지속의 구별 외에도 양과 질, 표층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 물질과 기억, 지능과 직관,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등의 이원론적인 구별들이 베르크손의 철학적 사유의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게 된다.

앞에서 간단히 시간과 지속의 구별이 베르크손 철학의 중추인 제 1의 이원성을 이룬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시간의 문제를 공간에 관한 문제틀과 결합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시간 개념 속에 여러 개념들이 혼동되어 있음을 분간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공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운동 자체보다도 운동의 궤적을, 변화 자체보다는 그 결과만을 보는 데 익숙한 곳이므로 실제 지속을 표상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지속이 공간적 표상을 거부하는 일종의 내적 흐름이라면,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파악 능력을 우리가 갖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겠다. 이를테면 공간적 인식이 과학적 인식이라고 할 때, 지속의 파악은 그 어떤 탁월한 철학적 인식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2) 흐르는 시간과 내적 직관



과학은 전개되는 시간 또는 전개될 시간을 다룰 때 마치 그 시간이 이미 전개된 것처럼, 그 흐름이 완료된 것처럼 취급한다. 또한 보통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지속의 측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지 지속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시간의 측정은 지속 자체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을 재려면 결국은 공간화된 시간을 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상식의 요구에 응하고 있는 것이며, 상식은 바로 과학의 출발점이 된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과학은 물질 세계로부터 반복 가능하고 계측이 가능한 것, 결과적으로 지속하지 않는 것을 추출하여 그것만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바꿔 말하면, 과학은 순간들만을 포착하며, 바로 이와 같은 과학의 방법을 베르크손은 '영화적 방법'이라 명명한다. 과학은 애당초 지속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적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이다. 과학은 생성을 일련의 상태들의 연속으로 표상하는 바, 이 상태들이라는 것 각각은 영화필름처럼 하나 하나 정지된 동질적인(homogène) 요소들일 뿐이기 때문에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만이 문제일 경우에는 지속의 흐름 자체를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베르크손은 말한다. 따라서 과학은 그 자신의 고유 영역인 비활성 물질의 세계에서 언젠가 실재를 완벽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과학이 갖는 위상이며, 세계를 정확히 정신과 물질로 배분하는 그의 이원론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부당한 자리매김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오성의 요구와 언어의 필요 그리고 과학의 상징주의에 부합하도록" 철학도 역시 시간이 낳는 중대한 결과들을 적당히 회피해야 하느냐에 있다.(PM 10) 왜냐하면 철학에 고유한 영역이 이번에는 정신의 세계이며 정신 또는 의식은 곧 지속 자체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크손에 의하면, 만약에 인간 정신이 실재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 지성 이외에 다른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정신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철학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을 파악함에 있어서 지성의 불능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금방 지성을 넘어서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성에서 일종의 직각(直覺, vision)으로 넘어섬으로 상대적임을 넘어 절대에 근접하려는 시도를 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 시간 안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다면 지성을 넘어섬은 곧바로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화된 시간은 공간이고 지성은 지속의 환영에 작용하지 결코 지속 그 자체에 미치지는 못한다.(PM 26)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을 넘어서기 위하여 시간 밖으로 나올 것이 아니라 시간 안으로 다시 들어가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지속에 자리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지성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잠정적이라 한 까닭은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지성으로 돌아와 상식의 세계에서 생활하거나 과학적 사유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지성을 벗어나 보려는 노력은 체계를 세우려는 '구축의 노력'이 아니라 '직관의 노력'이다. 따라서 철학함이란 '직관의 노력'에 의해서 지속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 자체 안에 자리잡는 것 외에 다름 아니며 결국은 실재를 그 본질인 운동성 안에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베르크손에 있어서 직관은 무엇보다 내적 영역을 겨냥하며, 거기서 성공적으로 대상을 붙잡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여타의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외적이고 피상적인 파악을 하는 반면 스스로는 내적으로 깊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EC 1) 그래서 베르크손은 서슴치 않고 말한다. -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우리 모두 내부에서부터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간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지속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이다".(PM 182)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내부에서부터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며, 일반적으로 "의식이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동일한 두 순간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PM 183) 우리의 의식 상태가 부단히 변화하는 이유는 "기억없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며 현재의 감정에다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첨가되지 않으면 한 상태의 계속이란 없기 때문이다".(PM 200) 결국 의식이 기억이면 삶은 늙어감을 의미하지만, 달리 보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는 것과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EC 2) 왜냐하면 상태 그 자체가 이미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절대로 분할 불가능하고 지침대가 필요없으므로 우리의 의식 상태들을 가지고 변화를 결코 재구성할 수는 없다.(PM 163)

직관은 이렇게 우리의 내부적 정신 세계를 목표로 삼는다. 우리의 의식이나 정신은 그것이 현재 포함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창출해낼 수 있고 내부로부터 점점 더 풍부해 질 수 있는 실재, 다시 말해 스스로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실재이다. 이와 같은 실재는 근본적으로 측정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결정된 적이 전혀 없으며 한 번도 무엇으로 고정되어진 바 없이 항상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의 세계야말로 바로 실제적 지속의 세계이며, 따라서 베르크손이 창조와 자유의 세계라고 규정하는 철학의 고유 영역이다.(M 887) 그런데 이렇게 정신이 지속이라면 정신의 무한한 자기 창조력은 바로 지속의 창조성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벌써 지속의 창조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3) 창조적 시간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지속에 대한 일종의 심리학적 경험은 시간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시간 그 자체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시간이 하나의 어엿한 실재라면 분명 여타의 실재들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시간은 심리학적 삶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도 역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역할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지속의 경험에서 과거가 간단없이 현재로 통합됨을 직관한다고 했을 때 이 통합의 성질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물론 복잡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예측 가능한 작용인지 아니면 전혀 예측 불가능한 과정, 다시 말해 진정한 창조인지를 밝혀야 하겠다.

이에 대해 베르크손은 우리가 다시 한번 내적 경험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인다면 지속은 발명이며 쇄신임이 드러난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그는 "시간은 발명이거나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항상 '영화적 방법'에 사로잡혀 있는 물리학은 "발명으로서의 시간(temps-invention)"을 파악할 수 없는 나머지 그것을 "길이로서의 시간(temps-longueur)"으로 대체시켜 버렸다고 비판한다.(EC 341) 그래서 만약 우리가 순수 지속에 다시 자리 잡는다면 "행위가 독특한 진화에 의해 이전의 행위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것이며 그 결과 이 행위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이전의 행위들을 재발견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 행위는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여기에 추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MM 207) 마치 꽃이 피어 열매가 맺을 때 열매는 꽃으로부터 된 것이지만 꽃과는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인 것처럼, 지속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차이나는 새로운 것으로 진화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속의 과정은 창조적 인과 관계의 연속이며, 한마디로 말해 지속은 창조이다.

지속이 창조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시간이 지나간 기간이 아니라 그 기간을 채우고 있는 심리학적 밀도가 창조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채워져야 할 시간의 기간이란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다만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는 우리의 고질적 습관의 농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지속은 앞으로 전개될 역사가 질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일종의 기획일 뿐으로, 이 기획이 계속 새롭게 시도되는 가운데 조금씩 실현되어 결국 창조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 때 창조에 소여되는 시간은 창조 그 자체와 같다. 이와 같이 하나의 생각이 구체화됨과 동시에 또한 변해가는 과정, 어떤 발상의 숙성 과정과도 같은 창조적 지속의 역동적 진행을 베르크손은 "생명적 과정(un processus vital)"이라 명명하고 있다.(EC 340)

그러나 베르크손에 있어서 지속은 항상 창조적이지만은 않으며 우리 속에서 자주 그런 사실에 대한 경험을 한다. 과거를 가능한 한 현재에 밀어 넣으려는 노력을 중단하면 긴장이 풀어져 꿈 속에 빠져드는 경우가 그 한 예이다.(EC 201) 만약에 완전한 긴장의 이완이 가능하다면 기억도 의지도 없게 될 것이며 무한히 없어졌다 되살아나는 순간들 밖에는 없을 것이다. 지속은 더 이상 창조하지 않을 것이며 소용없는 바램과 욕망이 창조적 기획을 대체할 것이며 때때로 무의식이 지배하기도 하고 우리의 과거의 단편들을 그냥 반복하는 습관적 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역사를 이끄는 위인들의 열정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영향력을 상실할 때 사회적 변화가 더 이상 역사로 기록될 가치가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이거나 사회적 차원이거나 간에 우리가 최초의 긴장과 열정으로 되돌아가기만 한다면 다시금 활기와 역동성을 되찾을 수 있듯이, 지속이 항상 창조적일 수는 없겠지만 언제라도 다시 창조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이 창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 심리학적 영역에서 내적 직관으로 확인된 지속의 창조성이 우주적 지속에서는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우선 앞에서 보았듯이 내적 지속이 창조와 자유였다면, 우주의 지속도 역시 창조적인지가 문제이다. 베르크손은 우주에서 계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이 그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현상의 계기적 상태들을 통합시키는 그 어떤 실재가 분명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시간이 일종의 힘을 가진 실재가 아니라면 왜 우주가 어떤 일정한 속도를 갖고 자신의 계기적 상태를 전개시키겠느냐고 그는 반문하고 있다.(EC 339) 그리고 이 우주적 지속이 단순한 숫자적 계기가 아니라 그 우주 안에 있는 의식에게 어떤 절대적 가치와 실재를 갖는 것으로 비춰진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이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우주의 지속은 창조의 여건 내지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EC 339)

그런데 베르크손이 처음부터 우주에 지속을 부여한 것은 아니어서 물질적 세계는 지속하지 않는 비활성의 영역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우주가 지속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신을 갖는 의식적 존재가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과연 우주에서 하는 일이 없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때, 분명 그 역할이 있어서 그것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지 못하게 방해하고 연기하는 일이다. 수행하려면 공들여야 하는 이 역할로 미루어 시간이 능동적 창조의 장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한 베르크손은 급기야 우주의 지속성을 일종의 우주적 영혼의 지속성으로 간주하게 된다.

여하간 모든 지속은 단지 과거를 현재 안에 연장시키고 과거의 것을 현재 안에 밀어 넣는 계속된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미래를 잠식하고 전진하면서 부풀어지는 계속적인 진보이기 때문에, 우리 내적 의식 상태는 시간의 여정 위를 전진하면서 갖게 되는 지속의 부피로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커지며, 우주 안의 의식, 즉 우주적 영혼은 스스로 전개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계속적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EC 4, PM 201, EC 132)

결국 베르크손에 있어서 모든 실재는 의식의 진행처럼 진보하고 다시 말해 지속처럼 진화하면서 스스로를 창조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지속은 결국 절대성이며 영원성일 수 있다. 물론 개념적이며 가상적인 영원성이 아니라 모든 지속이 농축, 응고되어 있는 살아 있는 영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실재 자체가 되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그 생명력의 영원함이 곧 절대성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2. 생명에 대한 두 가지 시나리오



인간을 포함하여 이 우주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체들을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들 사이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는 데에 있다. 다시 문제를 베르크손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어떻게 생의 비약(élan vital)이 물질과 같이 그와 전혀 이질적인 것과 결합하여 생명체를 조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물음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단번에 생명 창조의 신비 앞에 서 있게 되었다.





1) 기계론 비판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문제 자체를 피해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한 셈이다. 그들은 흔히 '기계론'이라 통칭되는 가설에 의해서 신비의 베일이 벗겨졌다고 생각한다. 우주를 제각기 항상적인 법칙에 따르는 요소들의 조합으로 설명하는 기계론적 우주관은 이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다시 두 가지 특징으로 대별될 수 있다. 첫번째는 비활성 물질로부터 생명이나 정신의 영역을 산출하려는 유물론적 경향으로, 그것은 결국 고차원의 것을 저급한 것으로부터 발생시켜보려는 시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편 두번째 특징은 결정론적 경향으로 주로 '법칙'의 개념에 의존하여 변화나 다수성을 일자(一者) 내지 동일성으로 환원하려 한다.

베르크손이 기계론의 이 두 가지 측면에 대하여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먼저 유물론적 경향을 갖는 기계론으로 다윈(Darwin, 1809-82)의 이론을 베르크손은 분석하고 있다. 다윈은 종의 진화를 인정하면서 이를 물질의 맹목적인 조합으로 설명하고 어떤 여타의 원인도 배제하였는 바, 베르크손은 이와 같은 다윈의 이론이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다윈 진화론이 이런 저런 유기적 생물체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각각 진화의 다양한 방향들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구조, 즉 상사기관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과연 해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연체동물의 눈은 척추동물의 눈과 해부학적으로 유사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연체동물의 눈이 우리의 눈과 같이 망막이나 각막, 수정체 등을 갖게 되기 휠씬 이전에 이미 연체동물과 척추동물은 그들의 공통적 줄기로부터 분리되었다.(EC 63) 이렇듯이 진화의 과정에서 비약의 방향이 이미 서로 달랐지만 동일한 구조에 이르게 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진화론이든지 간에 그것이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면 이 문제에 답을 갖고, 종들이 선사시대 이래로 서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 사이에 명백한 유사성이 계속 나타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답변을 찾아보기 위해서 먼저 다윈이 제시하는 진화의 기제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변이'의 개념이 그 중추를 이루고 있다. 원시적 유기체가 변이에 의해 다소 상이한 유기체를 낳을 경우, 문제의 변이가 유리한 것이라면 그것을 갖게 된 개체의 생존경쟁에 도움이 될 것이고 후대에 유전될 것으로 이것이 곧 진보요 진화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진화란 일련의 변이들이 도태 작용에 의해 선택, 추가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셈이다.(EC 54) 그러나 베르크손은 바로 이 진화론에서 '변이'가 갖는 위상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윈의 기계론을 반박하기 시작한다.

만약에 변이가 미미할 경우라면 눈에 띠는 진보를 가져오지 못하며 생존경쟁에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겠고 따라서 도태의 과정에서 선택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시각의 진화는 눈의 어떤 부분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다른 부분들에서 상보적인 개선이 함께 일어나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제각기 단절된 변이들을 당장 져버리지 않고 유보하였다가 그들이 전체적으로 진보에 역할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리며 변이들을 보존하는 이 작용은 가히 기적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대단한 변이가 일어나서 생존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면 그것이 보존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같은 중대한 변이의 발생 자체가 불가해해진다. 왜냐하면 복잡한 기관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변이는 이 기관의 모든 부분들의 동시적인 개선을 상정하며, 그렇지 않다면 미미한 변이의 경우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분들의 동시적 협동도 역시 기적의 산물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물론 다윈은 이를 생물의 '상관작용'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베르크손이 보기에 '상관적' 변화란 '연대적'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연대적 변화'는 '상보적 변화'와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상보적 변화들이란 보다 복잡한 조건에서 어느 기관의 기능을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서로 서로 협조하는 변화들이다".(EC 67)

베르크손의 논의는 결국 다윈의 체계에서 이런 협조를 보장하려면 앞에서의 미미한 변이의 연속성을 보장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호소할 수 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의 복잡한 기관의 출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진화의 노정에서 이 복잡한 구조의 상사기관들이 발견되는 이유를 단순히 우연적 '변이'와 '도태'에만 의존하여 설명하는 이론은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우리는 기계론이 갖는 특징을 둘로 나누었지만, 그 유물론적 경향, 다시 말해 생명을 물질적 요소들의 조합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변화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물질적 요소들은 엄밀한 법칙들에 따라 조합되고 그 법칙들은 제한된 적은 수의 영원한 원리들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우주에 예측 불가능한 사건은 일어날 수 없고 이른바 필연성이 지배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필연적 법칙'이라는 개념이 요체가 되는 기계론을 특히 결정론이라 규정할 수 있으며, 베르크손은 그의 전 저서를 통해 이에 대면하고 있다.

"우주를 상상에 의해 분자와 원자로 분해되는 물질 더미로 표상하는" 물리적 결정론은 이와 같은 미립자들이 모든 운동들을 발생시키고 물리 화학적 현상과 지각된 성질들은 객관적으로 모두 이런 기본적 운동들로 환원된다고 보며, 더우기 에너지 보존 법칙에 힘입어 어떤 한 원자의 위치는 다른 원자들이 그것에 미치는 기계적 작용의 총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한다.(DI 107-108) 이와 같은 거대한 기계로서의 우주가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수학적으로 계측 가능한 조합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만약 일정 시점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과 각 존재자들의 상태를 알고 있는 지성이 있다면 그의 눈앞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꺼번에 펼쳐질 것이다.(EC 38)

그러나 계산에 의한 예측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이미 지나간 시간처럼 공간적으로 측정해야만 가능하다. 결정론의 시간은 공간의 4차원이 되어 그 흐름은 움직이지 않는 궤도의 형태로 파악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해서 결정론의 우주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생겨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실재의 총체는 영원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생성과 변화, 다시 말해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동시에 인식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다.(EC 39)

물론 결정론자들 스스로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점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법칙이 일단 세워지면 그것은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는 항상적 법칙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일 원인은 동일 결과를 낳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이런 입장은, 베르크손이 지적하였듯이, 실재가 독립적인 계통들로 분해 가능하며 이 계통들은 언제라도 똑같이 재현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EC 215)

동일 원인은 동일 결과를 낳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예측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심리-생리 병행론'으로 나타났을 때 베르크손이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이 가설을 물리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적 우주의 영역에서의 결정론은 그의 최초의 저서에서는 아직까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창조적 인과성'은 자아의 내적 세계를 설명하는데 반해, 물리적 인과성은 외적 물질세계를 설명한다는 뚜렷한 이원론이었다. 그러나 『물질과 기억』에서부터 이원론이 완화되어서 정신과 육체의 구분이 흐려지고 우주 전체가 완전히 지속과 무관하지도 않고 따라서 완전히 필연성에 종속되지도 않게 되었다. 『창조적 진화』에 와서는 생명의 유기작용은 지속하는 정신과 반복하는 물질 사이의 무한한 타협의 산물이 되고, 물질적 우주 자체도, 열역학 제 2법칙이 보여주듯이, 특히 그것이 무한히 크거나 무한히 작을 경우에 에너지 보존법칙의 영향 밖에 있게 된다.(EC 244)

지속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물질은 결정론자의 영역이며 따라서 과학과 지성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물질적 우주는 "우리의 의식을 기다리게 만든다".(PM 37) 다시 말해 그 스스로 지속하면서 우리의 지속과 연대를 맺고 있다. 창조적 지속이 물질의 장애에 맞부딪혀 그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그 물질이 동질적 공간 안에서 순식간에 응고되어 그야말로 물질화되어서 영원한 현재 안에 모두 주어지는 것을 되도록 지연시킨다고 볼 때, 물질적 우주의 지속과 우리의 지속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주의 지속은 비록 그 급이 떨어지기는 해도 생명의 활동과 흡사하다. 왜냐하면 생성하고 소멸하는 생명체들의 활동을 가로질러 존속하는 그 무엇이 생명이며, 마찬가지로 지속은 비록 단순한 과거의 반복으로 퇴락할지언정 앞서 이미 창조적 지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결정론적 기계론은 생명의 비약과 정신의 창조적 활동의 "화석화된 잔재"일 뿐이다.(PM 296) 기계적 인과 법칙의 규칙성은 유기체의 영역에서는 전혀 맥을 못춘다. 그것은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똑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원인들이 항상 동일한 원인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인과 법칙의 개념을 빈다면 생명과 정신의 인과성은 '창조적 인과성'이며 그것이 바로 '창조적 진화'를 보장해 준다.





2) 목적론 비판



앞에서 살펴본 기계론의 시나리오는 생명의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정신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물질적 차원만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기계론은 예를 들어 다양한 기관들이 호흡이나 영양섭취, 감각 등의 동일한 목적을 위해 서로 협동하는 생명 작용을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기계론적 시나리오의 맹점을 피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은 이번에는 목적론이라는 또 다른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목적론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예를 들어 신이라는 목적성을 도입한 것으로, 이는 조물주가 우주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존재자들을 계획한 후 단지 계획되었을 뿐인 그것을 구체적인 질료를 사용하여 실제로 현실화한다는 가설이다. 물론 베르크손은 기계론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목적론적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는 바, 여기서 그의 반박을 정리해본다.

계획이란 언제나 미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현에 앞서서 표상될 수 있다. 또한 그 계획의 완전한 실현이 먼 장래에나 가능하거나 또는 무한정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지는 않다. 한마디로 말해 계획과 그 실현은 모두 현재 우리 지성에 의해 개념화될 수 있다. 그러나 베르크손에 있어서 "진화가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는 창조라고 한다면, 진화는 생명의 형태들 뿐만 아니라 지성이 생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관념들과 생명을 표현할 때 사용될 용어들도 역시 점진적으로 창조한다. 말하자면 진화의 미래는 그의 현재를 넘어서며 현재에서는 하나의 관념으로 그려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목적론의 최초의 오류가 있다."(EC 104)

그리고 계획이 미리 세워져 있다면 그 실현은 결국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게 된다. 진화는 하되 그 진화는 혁신하지도 발명하지도 않는 진화인 것이다. '창조적 진화'에는 시간이 필수적임에 반해 이렇게 모든 것이 주어진 경우 시간은 불필요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목적론은 기계론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시간', 즉 지속을 배제함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속이 도입되려면 계획의 실현이 점진적일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의 구상도 역시 점차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빈 공간과 같이 텅 비어 있는 시간에 앞서서 계획을 구상하는 시간이 먼저 있고 그 후에 그 실현의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계획의 창조가 곧 존재자들의 창조이며 그것이 바로 시간의 실재인 것이다. 계획이 수립됨과 동시에 실현되는 끊임없는 하나의 흐름이 곧 지속이다.

한편 베르크손이 보기에, 모든 것은 계획되었고 그대로 그러나 다만 점진적으로 실현된다는 목적론적 가설은 생명의 진화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퇴행, 정지, 부조화 등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난점을 갖고 있다. 생명이 어떤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그 실현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조화로운 상태가 이루어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을 검토해보면 계속 진화해가는 종이 있는가 하면 진화하다가 중도에 멈춰버리는 종들도 발견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베르크손은 "진화란 전진 운동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답보이며 때때로 탈선 또는 후퇴임"을 통찰하고 목적론의 실패를 확인한다.(EC 105)

또한 어떤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계획대로 구체적인 실행이 있어야 하는 바, 베르크손은 이 계획의 실행에 대하여 목적론이 가지고 있는 표상을 비판한다. 계획은 이미 있는 물질적 요소들을 잘 배합하고 조립함으로써 실천에 옮겨진다고 생각하는 목적론은 "자연의 작업을 한 아이디어의 실현 또는 한 모델의 모방을 위해 부품들을 조립하는 노동자의 작업과 동일시한다".(EC 89) 목적론은 실현해야 할 목표로 이상적인 모델을 상정했다는 점에서는 기계론과 다르지만 이 실현이 구체적으로 부품들의 조합으로 실행된다면 그것은 기계를 만들어내는 부품 조립공정과 다르지 않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임을 주장하지만 베르크손이 보기에는 두 가설들 모두 '의인적(擬人的)'인 성격을 갖고 있다.(EC 90)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 거대한 인조 기계도 아니며 스스로 인간 노동자처럼 작업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기계론과 목적론은 공히 유기체와 제작품(製作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작업으로, 마치 대가의 그림을 모자이크 조각들로 나누어 다시 합성하듯이, 물질적인 부품들을 조립해서 하나의 공통적인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 대가의 그림을 어쩔 수 없이 조각조각 나누어서 볼 수 밖에 없다면 기계론의 입장일 것이며 어쨋든 그 그림은 대가의 구상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 목적론의 입장이 되겠지만, 그 제작 과정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다자(多者)에서 일자(一者)로 가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기 작용이란 중심에서 주변으로 향한다. 수학적 점과 같이 미미한 최소의 물질만으로도 "일종의 폭발"이 일어나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확장되어가는 것이 바로 생명의 유기 작용이다.(EC 93) 일개 정충이 생명의 뇌관을 눌러 태아의 진화 과정을 발동시킴으로 마침내 어엿한 한 생명체로 되어가는 모습을 어찌 자동 인형의 조립 공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제작품은 물질적 부품들로 만든 조립품일 뿐이나, 일자에서 다자로,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유기 과정에서 조직된 유기체는 물론 조립품이 아니며, 물질 안에서 물질에 생명을 불어 넣지만 그 자신은 물질이 아닌 그런 실재이다. 예를 들어 눈이 보는 이유는 그것이 복잡한 해부학적 구조들을 가진 육체적 기관이기 때문이 아니다. 보는 기능은 물질을 가로 질러 발휘되는 것이지 물질에 의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살아있는 이유는 세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 세포에 발동을 걸고 계속 운동하게 만들고 있는 생명의 최초 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생명의 드라마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 현상에 관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똑같이 비판하고 있는 베르크손은 나름대로는 어떤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는가? 사실 우리는 비록 단편적이지만 이미 그의 생명관의 예고편을 본 셈이다. 그도 역시 일종의 목적론적인 생명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얼핏 든다. 물론 그가 비판한 것은 단지 외적 목적성이었을 뿐이고 내적인 목적성은 그도 역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이제 우리는 베르크손이 보여주는 생명의 드라마를 지켜봄으로 우리의 작업을 마치도록 하자.

사실은 베르크손에 앞서서 라마르크(Lamarck, 1744-1829)가 이미 내적인 목적성에 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프랑스 생물학자는 생물체가 그가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경주하는 노력에 바로 진화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은 생명이 극복한 장애물의 전체일 뿐으로, 생명 현상, 즉 유기작용에는 이 외적 조건에 적응함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고 베르크손은 본다. 생물체 개체의 개별적인 내적 노력으로는 생명 유기작용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노력은 이미 있는 기관을 잘 적응시킬 수는 있어도 그 기관을 창조하거나 심지어 복잡하게 만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개별적인 성격은 이미 오래 전에 공통 줄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종들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생명 현상의 원인을 그 어떤 노력으로 보려면, 그 때의 노력은 개체적인 의지력보다 더욱 심원한 것으로, 내적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개선되어가고 이 증가되는 개선의 경향을 후손에게 전하려면 그 개별적 존재보다 먼저 있으며 그를 통해 유전되는 그 어떤 내적 충동과 같은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 하나의 유기체들을 관통하여 생명을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충동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각각의 생명체들은 일장 춘몽의 덧없는 기간동안 그 위를 다만 교차해 지나갈 뿐인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흐름이 바로 생명의 흐름이며 이런 생명 진화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추진력이 바로 생명의 비약인 것이다.(EC 27)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런 내적 충동은 의식과 성질이 같다. 진화는 마치 의식 속에서 서서히 무르익다가 어느 순간 실현되는 기획과 흡사하다. 도대체 글이 될 것 같지 않아 노심초사하면서 구상하다 보면 어느덧 유기적인 문장들 안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데 성공하는 작가의 정신적 작업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베르크손은 생명과 '정신적 에너지(l'énergie spirituelle)'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처음에는(DI) 인간 의식에 국한되었던 의식의 개념이 급기야(ES, EC) 우주적 생명과 동연적이 되기에 이른다.

각 생물체 안에서 부분들이 마치 예정이나 된 듯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려는 내적 경향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론들의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파악되기 힘든 그 어떤 유연하고 살아 있는 목적성일 것이다. 이렇게 부분들 안에 목적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장껠레비치(Jankélévitch)는 '유기체적 전체성(totalité organiqu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베르크소니즘의 제 1의 주제로 삼고 있다.3) 한편 여기서 다시 우리 눈의 구조의 복잡성과 그 기능의 단순성을 예로 들면, 베르크손이 자연이 눈을 만드는 과정을 우리가 손을 쳐드는 것과 같은 단순한 행위와 비교했을 때의 '자연'도 역시 '유기체적 전체성'를 이루는 보편적인 우주이다.(EC 95) 이렇게 그 부분들이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유기체적 전체는 내적 경향이자 동시에 우주적 경향이기도 하며,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목적성인 '생명의 비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한편 베르크손의 생명관은 매우 역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생의 비약 내지 생의 자발성은 생명의 형태를 '진화'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형태 자체를 계속적으로 '창조'한다.(EC 87) 물론 이와 같은 '창조적 진화'가 물질이라는 장애에 부딪혀 실패로 끝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베르크손에 있어서 생명의 진화는 우연적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예측불가능한 생명 진화의 모습은 우리에게 대단히 극적으로 비추어진다. 그 결과가 항상 불확실한 생명의 물질과의 투쟁은 일종의 우주적 드라마라고 하겠다.

처음에 생명의 비약이 아직 그를 방해하는 물질을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창조가 용이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 진화의 현단계에 와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생명과 물질의 싸움은 끊이질 않아서 유기체란 결국 둘 사이의 휴전 협상안과 같은 것이다.(EC 250) 그런데 이 협상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이 대등한 협상안이라기보다는 공격자인 생명의 일방적인 항복 문서로 보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유공충류(有孔蟲類, Foraminifères)나 여관자속(女冠者屬, Lingules)과 같은 어떤 종들은 진화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형태로 경직되어서 화석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EC 103) 따라서 아직도 계속 진화하고 있는 종들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전선에선가 생명이 물질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타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지속이면 물질은 지속의 단절이다. 변화하지 않고 단지 반복하는 조각들로 흐르는 시간을 세로로 잘게 부수어 놓으면 그것이 곧 물질이다. 한편 가로로 보면 물질은 정신이나 생명을 축소시켜서 좁은 곳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물질은 부동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갖는다. 따라서 생명의 비약을 이렇게 물질에 의해 가로 세로로 나누어 놓음으로써 우주 안에서 현재 발견되는 유기체의 형태가 나오게 되었다. 만약 애초에 물질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면 유기체도 분명 현재의 꼴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유기작용의 결과 생명은 육체를 입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육체는 사물이 아니고 개체이다. 개체들은 대대로 번식하고 죽기를 거듭한다. 그러나 개체로서의 육체는 그 몸통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육체는 그것이 주고 받는 영향에 의해 모든 공간에 걸쳐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의식이 적용되는 물질이라면 우리 의식과 동연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심지어 별들에까지 미칠 수 있다."(DS 274) 그러나 생명체는 일단 육체로 제한되어 그의 형태가 잡히면 무한히 그 형태를 반복하려 하고 한번 완수한 행위를 자동적으로 거듭 수행한다. 자동성과 반복은 생명이 여기에 멈춰서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ES 24)

그러나 생명은 이렇게 겉보기에 패배한 듯이 보이는 곳에서도 물질이 강요하는 지연과 부동성을 무릅쓰고 기필코 전진하며 증가되어 간다. 그것은 잠시 방해를 받고 있던 생명의 비약이 장애를 극복하는 순간 최초의 비약의 순간과 똑같거나 오히려 더 큰 힘으로 용솟음쳐 오르기 때문이다. 생명이 반복과 죽음이라는 장애를 딛고 승리하는 모습을 베르크손은 "인류 전체가 거대한 군대처럼 열을 지어 말타고 달리면서" 수 많은 장애를 극복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EC 271)







맺는말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베르크손은 우리의 삶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인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식이다. "의식이 있는 존재에게 실존함은 변화함에 있고, 변화는 성숙해짐에, 성숙해짐은 곧 스스로를 무한히 창조함에 있다"고 단언한 후 베르크손은 이어서 "일반적인 존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묻는다.(EC 7)

의식의 삶을 이렇게 진화와 창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체 '창조적 진화'인 우리의 내적 지속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 실제적 지속을 전 우주에서 새삼 발견했을 때 그 안의 모든 것 역시 창조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지속하는 자아로부터 지속하는 우주로의 이행, 심리학적 영역에서 생명과 존재의 영역으로의 이행이 바로 '베르크소니즘'이며, 이는 심리학의 내적 관찰의 방법을 철학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심리학적 의식으로부터 존재 일반을 길어내는 '프랑스 유심론 철학(le spiritualisme français)'의 전통을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 주 -



1. M 766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에게 보낸 1908년 5월 9일자 편지]. 앞으로 베르크손의 저서는 본문 중에서 다음과 같이 약칭하고 이어서 쪽수를 기입할 것이다.

DI :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MM : Matière et mémoire

EC : L'évolution créatrice

ES : L'énergie spirituelle

MR :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M : La pensée et le mouvant

M : Mélanges

2. Cf.졸고, 「베르크손의 철학관(I)」, 『과학과 철학』 제4집(1993년 12월).

3. Vladimir Jankélévitch, Henri Bergson, Puf, 1975(2e éd), 제1장. 이 개념을 빌어 김형효 교수도 베르크손 철학을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는 그의 책 『베르그송의 철학』(민음사, 1991) 제 3장의 제목을 '생명의 비약과 유기체적 전체'라고 달고 있다.